-
- KTX 강릉선 타고 가을 여행, 가 볼 만한 곳은?
- 가을이라 해도 날씨는 여전히 온화하다. 강릉으로 떠나며 날씨를 검색해보았더니 기온이 뚝 떨어질 거라는 예보다. 환절기의 쌀쌀함을 즐길 때는 아닌 것 같아 머플러랑 니트를 주섬주섬 더 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강릉은 언제나 따스했다. 이전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랬고, 그곳은 언제나 따스하게 날 맞는다. 아마 앞으로도 또 그럴 것 같은 강릉. 명주동 거리, 강릉의 ‘핫플레이스’이라고 했다. 명주(溟州)는 신라 시대에 강릉을 이르던 지명으로 ‘바다와 가까운 아늑한 땅’이란 뜻이다. 1500년 전의 고도 명주는 예부터 문화·행정의 중심지이던 곳인데 강릉 시청이 옮겨가면서 한물간 구도시가 되어버린 듯했다. 그런데 이젠 달라졌다. 구도심 귀퉁이 마을인 명주동 일대가 요즘의 레트로 바람을 타고 찾아가고 싶은 원도심으로 변신했다. 가을볕 아래 명주동 문화마을 천천히 걷기 강릉 대도호부 관아 건너편에서 시작해 그 주변 동네와 골목 한 바퀴를 느릿느릿 걸으며 시간 여행을 시작한다. 어릴 적 추억도 소환하고, 숨겨진 예쁜 가게를 발견하는 재미가 걷는 내내 이어지는 풍경. 드라마 시대극을 연상케 하는 오래된 주택과 상점들이 옛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시나미 명주. 시나미는 ‘천천히’ 또는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을 뜻하는 강원도 말이다. 산책하듯 천천히 걷다 보면 과거와 현재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공존하는 뉴트로 강릉의 모습이 보인다. 시공을 넘나드는 이 골목에서는 저절로 천천히 걷게 된다. 그게 오히려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벽돌담 모퉁이를 돌면 유년의 뜰에서 늘 보았던 백일홍이 옹기종기 모여서 피어 있다. 반쯤 열린 나무 대문 앞으로 한 무더기씩 뿌리내린 채 꽃을 피워 올린 소박한 식물들이 예쁘다.골목 여행을 하는 이들을 위한 주민들의 자발적 배려다. 저절로 따스함을 얻는다. 낡은 담벼락에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이 바른 글씨체로 세 줄 적혀 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세월이 느껴지는 담장에 켜켜이 스며 있는 옛이야기를 느끼며 그 길을 걸어간다. 쭉 걷다 보면 빈티지하면서도 멋스러운 건물들이 간간이 눈길을 끈다. 담쟁이덩굴이 뒤덮은 ‘봉봉 방앗간’ 건물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 장면으로 더 유명해진 집이다. 근처의 작은 공연장, 박물관, 예술마당, 프리마켓 등의 문화공간에 슬슬 가을 분위기가 덧입혀지는 중이다. 골목길을 걷다 잠깐 앉았다 갈 수 있도록 가게 앞에 의자를 놓은 인심이 더 멋진 풍경을 만든다. 그 의자에 한 번씩 앉아 사진을 담는 여행자들 덕분에 아예 포토존이 되기도 한다. 이제는 찾아가 보고 싶은 ‘인싸들의 강릉 여행지’가 되었고, 곳곳에 젊음의 생기발랄한 에너지도 풍겨난다. 오래된 건물을 현대적 감각으로 새 단장한 소박한 점포들, 골목상권의 소상공인을 여행자와 연결해주고 쇠락한 골목길에 생기를 불어넣으려는 노력도 엿보인다. 신구(新舊)가 공존하는 원도심 거리답게 옛집을 개조한 카페 ‘오월’의 격자무늬 창문 너머로 동네 할머니가 뒷짐 지고 걸어가시던 골목길 풍경 또한 가을볕에 아련하다. 정겨운 가을날이다. 강릉의 구도심을 온몸으로 느끼며 마실 가듯 천천히 느릿느릿 타박타박 걸었던 명주동 골목 나들이다. 강릉 대도호부 관아 명주거리를 벗어나기 전에 건너편 강릉 대도호부 관아(사적 제388호)에 들어가 보는 것도 의미 있다. 골목길을 따라 늘어선 강릉 대도호부 관아는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걸쳐 중앙의 관리들이 강릉에 내려오면 머물던 곳이다. 강릉 임영관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객사문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안으로 들어가면 전대청이 있는데 '임영관'이라고 쓴 현판 글씨는 공민왕이 낙산사 가는 길에 들러서 쓴 친필이다. 현재 객사문은 이 터의 남측에 국보 제51호로 지정 보존되어 있고, 서측은 임진왜란 이후 경주에 있던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셔다 봉안했던 집경전(集慶殿) 터다. 해설사님의 해박하고 구수한 해설로 역사적 사실이 더욱 흥미롭다. 누구나 원하면 미리 신청해서 해설사님의 안내를 받을 수 있다. 관아 곳곳에 우뚝 선 고목이 되어버린 은행나무는 가을이 한창이었다. 바다 언덕 위에 펼쳐진 예술 세계 이제는 시원한 바다를 보며 예술과 자연, 인간이 공존하는 전시 공간에서 감성을 충전할 때다. 묵은 스트레스도 날려버릴 시간이다. 강릉의 괘방산 자락을 배경으로 등명마을에 자리 잡은 ‘하슬라 아트월드’. 산과 바다와 하늘과 바람과 햇살이 함께하는 아트월드다. 조각가 부부가 힘을 모아 만들고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며 새로움을 선보이고 있는 하슬라 아트월드. 하슬라는 고구려 때 부르던 강릉의 옛 지명이다. 현대 미술관, 아비지 갤러리, 터널 설치미술, 체험학습실, 피노키오 박물관, 마리오네트관 등 볼거리가 한가득이다.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가 터널을 통과하고 고래 뱃속 터널을 지나 지하 계단, 그리고 피노키오 전시관과 마리오네트 전시관까지 감상하는 내내 눈이 즐겁고 동심을 불러일으키는 곳. 발길 닿는 곳마다 포토존이다. 해안 절벽 위에 위치한 야외 조각공원은 예술 정원으로 3만3000평의 드넓은 자연 속에 있다. 어딜 돌아보아도 산과 바다. 이처럼 바다가 아름답게 보이는 곳이 또 어딜지. 이어지는 스카이워크를 통해 다시 한번 자연을 만끽한다.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건강하게 로스팅한 산야초 커피를 마시는 것도 좋다. 문화예술 공간에서 하루나 이틀 쉬고 싶은 이들을 위해 아트월드 안에 호텔도 있다. 설화 속의 월화거리 즐기기 강릉을 떠나기 전 전통시장인 강릉중앙시장에도 잠깐 들러봐야 하지 않을까. 강릉역으로 가는 길에 들른 시장통엔 매스컴을 통해 이미 유명해진 아이스크림호떡과 치즈호떡을 맛보려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맛집들이 즐비하다. 마늘빵과 닭강정 역시 인기여서 사람들이 찾아드는 모습이다. 군것질을 하며 시장 구경을 즐기다 보면 여행은 더욱 흐뭇하다. 중앙시장을 지나 KTX를 타러 가는 길목에 월화거리로 가는 화살표가 있다. 강릉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교동의 ‘월화거리’는 강릉 도심을 지나던 폐철도 부지에 조성된 공원 시설이다. KTX 강릉선 개통으로 강릉 도심 철도가 지하화되면서 옛 지상 철길은 유휴지로 남게 됐다. 강릉시는 기차가 달리지 않게 된 이 공간을 공원화한 것이다. 컨테이너로 이루어진 월화 풍물시장은 기존에 있던 시장을 리모델링해서 만들어졌다. 메밀전병이나 감자떡 등 강원도 토속음식은 물론이고 다양한 간식거리로 옛 분위기를 느끼며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월화거리는 강릉 월화정 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기록에 따르면 신라 시대 화랑 무월과 강릉 지방 토호의 딸 연화는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경주로 돌아간 무월에게서 연락이 없고 연화는 다른 사람과 결혼할 상황에 처한다. 이에 연화는 산책하던 연못의 잉어에게 편지를 전달함으로써 두 사람이 다시 만나 혼인하게 된다는 것이 월화 설화의 주요 내용이다. 사랑의 메신저가 잉어라니. 무월과 연화의 이름에서 따온 월화정이 있는 이곳을 월화거리로 만들어낸 것이다. 걷는 내내 눈길을 끄는 갖가지 구조물이나 꽃 조형물들이 시민들과 여행자들에게 힐링을 선사한다. 강릉역에서 부흥마을까지 걸을 수 있는 길이지만 노선은 각자의 형편에 따라 조절하면 된다. 시장과 월화거리를 지나며 강릉역이 저편으로 보인다. 2017년 12월에 서울 강릉 간 KTX가 개통되면서 114분 만에 강릉에 도착할 수 있어 강릉 당일 여행이 쉬워졌다. 강릉선은 서울역에서 출발하면 청량리-상봉-양평-만종-횡성-둔내-평창-진부-강릉 도착이다. 일상을 벗어나 바다도 보고 하루쯤 나만의 시간을 만들어보고 싶을 때 강릉이 있다.
- 2021-11-12 08:39
-
-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부록
- 부록 늦가을 나무에서 떨어진 모과 한 알 대책 없는 레드카드 향도 빛깔도 잃은 나이테와 검버섯만 남았다 흙에 다는 댓글 진물 어느 날 보충 설명도 없이 등 떠민 세월이 괘씸하다 유턴이 불가한 길 알아서 가야 하는 지도에도 없는 길 노년 내가 닦달한 급물살의 얕은 길 몇 개의 산허리 휘둘러 오며 나는 어두워졌다 이제 속도를 내려놓고 뒤척이며 깊어지는 녹두 빛 바다를 배운다 나의 시간은 백일홍 꽃의 하루 분량도 읽지 못했다 사랑 이야기 반의반도 읽지 못했다 이제 천천히 흐르며 깊어지고 싶다 수초의 손등을 만져주며 물방개 막춤도 추며 바람의 노래도 듣고 싶다 잔치도 끝나고 설거지도 끝난 육십 즈음에 명주 옷고름 문양 같은 파란 시간이 돌아온다 부록은 굳게 내린 셔터를 올리고 낙과 진물 찍어 시를 빚는다 나를 깎아 빚은 시 모과 향이 깊은 행간 걸음걸음 풀꽃 들여놓고 나를 피운다 반세기 너머 별을 채집하던 그 하늘로 회귀 내 여백에 별이 쏟아진다 부록이 더 아름답다 ㆍ수상소감 - 최우수상 시 김귀순 “세상의 작은 이름 비켜선 것들의 신음이 꽃으로 피는 시를 쓰고파” 기쁨의 쓰나미였습니다. 한동안 감동의 여진이 계속될 것 같습니다. 유통기한 지난 식품처럼 비켜선 지 오래, 하마터면 주저앉았을 일상의 무기력한 안주. 어떤 경우이든 포기했다면 얼마나 큰 낭비일 수 있는가를 깨닫게 한 수상의 기쁨이었습니다. 늘 죽음을 묵상합니다. 그 무거운 주제가 삶을 치료하고 가볍게 합니다. 치열하게 살게 합니다. 삶을 곱씹으니 시가 되었습니다. 가을 늦게 핀 민들레 노란 윤기를 다 피워내고 하얗게 바래 듬성한 흰 머리칼도 눈물 나는 시가 되었습니다. 부족한 글 최우수상으로 낙점하신 심사위원님들, 수고하신 모든 관계자님들 엎드려 감사드립니다. 깔아주신 시니어 문학 전용 멍석 위에서 시의 막춤을 추었습니다. 위축되고 주눅 들었던 씁쓸함은 벗어던지고요. 제 삶의 시간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계셔 행복하고, 시가 있어 행복하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당신 님들이 계셔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당신 님들이 계셔 어둑한 노년을 꽃피울 수 있었습니다. 신상품처럼 반짝일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작은 이름 비켜선 것들의 신음이 꽃으로 피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시의 보폭을 넓히며 치열하게 걸어온 길을 쭈욱 걸어갈 것입니다. 브라보. 다시 시작하는 우리 백금 같은 만년을 위하여.
- 2021-08-27 10:00
-
- 은퇴는 습관을 바꾸는 일이구나
- 마지막 소를 실어 보낸 그날 이후 석 달이 지났다. ‘젖소는 내 운명’ 그 40년의 세월에 종지부를 찍은 게 지난 초봄이었다. 수많은 톱니가 맞물려야 돌아가는 목장에서 문제가 생긴 올 2월 초 갑자기 남편이 일을 그만두자고 했다. 생명을 거두는 녹록지 않은 ‘먹고사니즘’의 긴장을 더는 겪고 싶지 않은 데다 10년 전에 다친 다리 상태도 좋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일생을 바쳐온 일이니 느긋하게 그만두자고 맘먹고 있었는데 한순간 결정을 내리는 일이 너무 어려워 몇 날 며칠을 불면으로 새야 했다. 축사와 하고 많은 장비, 꾸준히 이뤄졌던 투자를 버리는 것은 물론 소가 맺어주었던 촘촘한 사회관계를 허무는 일이며 소 없는 인생, 빈 우사를 견디는 허무감은 깊이 생각해볼 겨를도 없었다. 그만둔다고 석삼년은 결심해야 겨우 해치울 일이 그렇게 끝났다. 촌 나이로는 이른 나이에 소를 내려놓는 일은 당사자인 우리나 같은 일을 하는 주변 사람들도 놀라움을 금치 못할 일이었다. 날씨 때문에 하늘 바라보며 조바심칠 일도, 우유가 남아돈대도 가슴앓이 할 일도 없고 목장 관리 때문에 속 썩을 일도 없이 홀가분한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줄기차게 해대던 목장 식구들 밥에서 놓여난 것은 해방 중의 해방이었다. 목장을 정리하며 들어온 소위 노후자금을 이리저리 나누어 통장에 넣었지만 이자가 바닥이니 원금을 조금씩 잘라먹을 게 눈에 선했다. 산 입에 거미줄 치냐며 만만했던 맘 위로 남모를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돌고 돌아서 돈이라는데 일방통행이 돼버린 돈이 너무 낯설었고 걱정스러웠다. 지난 40년 동안 늘 한 달에 두 번씩 우유 값 정산한 목돈이 들어와서 나가는 사이로 스쳐가던 푼돈들의 얼굴이 또렷해졌다. 자연스레 윤활유처럼 생활을 반들거리게 하던 씀씀이를 주저하며 쩨쩨해(?)지는 중이다. 인생에 계획이란 있기나 한 걸까. 서울 사람이 생면부지 땅에 소 키우러 들어와 40년을 살았는데 소도 안 키우면 이 땅에서 떠나야 하는 게 다음 순서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긴 은퇴를 책임져줄 자금의 어느 부분이 이 땅에 있으니 그건 우리 생애 안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임이 분명했다. 한 곳에 뿌리박고 산 널찍한 시골집 살림에 눈길이 멈췄다. 어떤 장래에 우리가 이사라는 걸 하게 된다면 한숨에 정리해야 할 것들이다. 그 쓸쓸함이 어떨지 미리 겁이 났다. 손때 묻으며 나이 들어간 물건들은 대개는 분리수거라는 이름으로 쓰레기통에 처박힐 운명이니 미리 버리고 비우자며 책부터 손을 댔다. 책 욕심이 유난히 많은 내게 서재 가득 들어찬 책은 한순간 무거운 짐으로 변할 터였다. 마당의 묵은 갈잎을 태우는 속에 먼지가 풀풀 나고 냄새가 나는 책을 한 권씩 던졌다. 차곡차곡한 물건들을 덜어내며 책은 최소한으로 사되 남을 것, 즉 물건은 되도록 사지 않으리라고 새삼 맘을 먹었다. 버리고 비워야 할 것은 물질뿐이 아니었다. 평생을 임무와 도리에 매여 안달한 몸에게 시간을 오롯이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40년 남짓 목장 관리인들 밥을 해준 것도 모자라 유난했던 도시 손님치레들로 삶은 더욱 번잡했다. 며느리는 엄마, 아내, 목장 집 아낙, 심지어는 이름자보다도 앞서 내 노동을 규정하는 명사였다. 아버님은 시골에 사는 자식들이 자랑스럽다 하셨고, 집안 대소사를 한 손에 거머쥐고 막힘없는 시어머니는 따로 살았어도 언제나 고달프고 힘에 부쳤다. 자랑의 얼굴은 연이은 손님치레로 드러났다. 내 생각은 아랑곳없이 ‘어느 날 어느 시 몇 명’ 이런 통보가 날아오곤 했다. 상다리가 휠 정도라야 흡족해하는 분들이 말씀은 언제나 ‘김치에 된장이면’이었다. 승합차도 오고 승용차도 오고 버스가 올 때도 있었다. 발바닥에 불이 날 지경이었으나 이분들을 거스르지 않아야 겉으로라도 평화가 왔다. 나의 사람 됨됨이는 어른들의 만족에 달려 있었다. 누구를 위해 일면식도 없는 서울 사람들의 밥을 차리며 나는 흔들려야 하는가. 무의미하고 동의할 수 없는 노동에 대한, 내색도 못 하는 반감이 꼿꼿하니 여기저기가 자꾸 아팠다. 며느리 도리에 결박당해 젊음 곳곳에 깊은 상처를 남기며 마흔 후반이 지났다. 이런 와중에 잡은 공부라는 지푸라기로 오십 넘어 박사가 되었으니 평생을 모자란 시간에 애걸하고 매달린 셈이다. 영화 한 편을 봐도 평이 좋은 안전한 것을 봐야 시간 낭비가 아니라는 안심을 했다. 그렇게 육십 평생 관계가 얽어맨 도리에 치인 삶, 목적지향형 삶에 복무하느라 닦달했던 시간과의 화해가 필요했다. 모든 노동이 의미로 치환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조급함을 내던지는 중이다. 내 식구만의 밥상을 차리니 한평생 바다를 걸레질하듯 맥 빠지고 지치던 부엌일이 할 만해졌다. 요즘 같은 여름날 텃밭의 펄펄한 채소들을 밥상에 올리니 장에 갈 일이 거의 없다. 냉장고를 뒤적여 요모조모 반찬을 만들며 진정한 부엌의 회복을 꿈꾼다. 내 인생에서 추구했던 의미는 이미 총량을 넘어선 느낌이다. 어느덧 예순셋, 오늘이 제일 젊은 날이라는 자각이 또렷해지니 더 이상 나를 혼내며 괴롭히지 않기로 한다. 미리 앞질러 돈 걱정하지 말 것. 짜장면을 먹으러 가도 귀걸이를 달고 나서는 예쁘고 쾌활한 할머니가 되자. 박사가 된 후 나가는 학교 강의가 아직은 중요한 일이지만 나머지 시간은 무용한 즐거움으로 채우고 싶다. 어찌 의미를 좇는 일만이 삶이랴. 더 이상 효율이라는 이름을 인생에 들이대지 말 것. 심상히 하늘을 바라보는 일도, 노을 녘의 산책도,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도 다 눈부신 인생이려니. ‘은퇴는 무릇 습관을 바꾸는 일이구나.’ 번개처럼 스친 문장 하나로 돈 걱정에 사로잡혔던 맘속이 비로소 환해졌다. 치열하고 빛나게, 남다르게 살고 싶었던 인생의 등성이를 넘어서니 102호도 103호도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란 말을 알겠다. 명주 같은 삶을 살고자 안간힘을 썼던 긴장감에서 벗어나 무명 같은 헐렁함으로 살아보려 걸음마를 뗀다.
- 2021-04-02 11:21
-
- 격조 높은 전통주 달콤한 맛, 쌉싸름한 맛, 은은한 맛
- 우리의 전통주는 주정에 물과 조미료를 섞어 만든 희석식 소주가 아니라 증류주다. 몸에 부담을 덜 줄 뿐 아니라, 맛과 고상한 운치가 남다르다. 달콤한 감칠맛, 쓴 듯 아닌 듯 쌉싸름한 맛, 묵직하면서도 쾌청한 알싸한 맛…. 프랑스 와인의 지역 고유 맛에 영향을 주는 테루아가 있듯 전국 팔도 고유의 특산 농산물로 지역의 맛을 보여주는 우리의 전통주는 소중한 문화자산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 술의 빛깔, 맛, 향, 스토리, 그리고 곁들임 음식 등은 외국의 유명 술인 와인, 위스키, 사케 등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이런 아쉬움에서 정부 차원의 전통주 지원 정책에 대한 요구가 이어져 우리 술의 가치를 더욱 높일 다양한 작업들이 진행되고 있다. 전국의 전통주 제조업체들과 원료 공급 농민, 주류연구 전문학자, 유통업자들이 모여 만든 사단법인 한국전통주진흥협회는 장인들의 혼이 담긴 전통 명주의 역사와 맛, 이야기를 정리하고 있다. 아울러 보다 과학적이고 정교한 테이스팅을 통한 세련된 맛 표현, 사실적이고 흥미로운 스토리 개발, 전통주에 어울리는 마리아주 개발 등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설날맞이로 달콤한 맛, 쌉싸름한 맛, 은은한 맛의 대표 주자인 전통 명주 3인방에 대해 알아본다. 이를 통해 한국 전통 명주의 역사를 알고 우리 술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달콤한 맛 ‘감홍로’ 제조원 농업회사법인(주)감홍로 유형 일반 증류주(용량 750ml, 375ml) 알코올 함량 40% 원재료 및 함량 쌀(국내산)70%, 조(수입산)30%, 정제수·용안육·계피·진피 ·정향·생강·감초·지초(자초) Story 감미로운 맛, 황홀한 붉은 빛, 맑은 이슬의 의미를 담은 술. 감미롭고 붉은 빛, 강렬하고 독특한 향이 미각, 시각, 후각을 만족시킨다. 육당 최남선 선생이 ‘조선상식문답’에서 이강주, 죽력고와 함께 조선 3대 증류주로 꼽을 만큼 명성이 높은 술이다. ‘별주부전’에서 자라가 토끼를 감홍로로 유혹하고 ‘춘향전’에서는 춘향이 한양으로 떠나는 몽룡에게 이 술을 내어놓는다. 감홍로는 고려시대 때 평안도 지방에서 만들어진 3대 명주 중 하나다. 6·25 전쟁으로 월남하기 전까지 평양에서 대대로 감홍로를 빚어온 가문의 주조 비법을 후손인 이기숙 명인이 섬세하게 복원했다. 누룩과 쌀로 빚은 술이 발효하면 1차 숙성시킨 후 두 번의 증류 과정을 거친 다음 한약재를 침출한다. 이후 짧게는 6개월, 길게는 2년까지 숙성시켜 깊은 맛을 낸다. 도수가 높아 오랫동안 저장이 가능하며 묵힐수록 풍미가 좋아진다. 색, 맛, 향이 조화를 이룬 조선시대 최고의 명주. 다른 음료수와도 잘 어울린다. 술에 약한 사람들이 칵테일을 만들어 마셔도 무리가 없는 격조 높은 술이다. Taste 패션으로 치면 한복 두루마기에 걸친 모피 숄처럼 고급스럽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꽃향기와 계피향이 어우러지면서 내는 풍미가 일품이다. 한 모금 머금으면 혀끝에 살짝 감도는 단맛과 함께 스파이시한 향이 입안에 확 퍼진다. 높은 도수와 강렬한 향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게 넘어간다. 목을 넘어간 후에도 묵직하면서도 달콤한 향이 입안에 계속 머물며 여운을 남긴다. 섬세함과 중후함을 동반한 고급스러움이 가히 한국의 위스키라 불릴 만하다. Food 맵고 자극적인 음식보다 담백한 안주가 어울린다. 지방이 적은 육포나 대구포도 감홍로의 맛과 향을 잘 살려주는 안주다. 스테이크, 숯불이나 그릴에 구운 돼지고기, 양꼬치구이 등 육류와도 즐길 수 있다. 해산물 샐러드, 신선한 허브로 마리네이드한 연어 등의 해물요리와도 궁합이 맞는다. 초콜릿, 블루치즈, 견과류와 함께 가볍게 마셔도 좋다. 쌉싸름한 맛 ‘진도 홍주·백주’ 제조원 대대로 영농조합법인 유형 일반 증류주 용량 750ml, 375ml (진도백주 375ml) 알코올 함량 40%, 38% (진도백주 38%) 원재료 및 함량 쌀(국내산) 99%, 지초(국내산) 1%, 진도백주 쌀(국내산) 100% Story “홍매화 떨어진 잔에 봄눈이 녹지 않았나 싶고 술잔에 비친 홍색은 꽃구경할 때 풍경이로다!”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이로 잘 알려진 고산자 김정호 선생이 진도홍주의 맛에 반해 읊은 노래다. 지도 제작을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다 각지의 전통주를 접했을 터. 김정호 선생은 흥선대원군에게 완성된 대동여지도를 바칠 때 마치 붉은 눈물이 방울방울 모여 술을 이룬 것 같은 진도홍주를 함께 올렸다고 한다. 진도홍주는 고려시대 때부터 지역 세도가들이나 살림이 넉넉한 민가에서 전통비법으로 빚어온 토속 명주다. 쌀이나 보리에 누룩을 넣어 숙성시킨 뒤 증류한 순곡 증류주. 마지막에 지초(芝草) 침출 과정을 거치면 붉은 빛을 띤다. 지초 뿌리에는 산삼 버금가는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어 예로부터 이 약초를 넣어 빚은 술은 음용뿐 아니라 치료 목적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효능도 좋지만 무엇보다 지초 뿌리에서 우러난 붉은색이 황홀하다. 입술을 갖다 대기도 전에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조선시대에는 ‘지초주’라 불렸는데, 임금에게 올리는 최고의 진상품으로 꼽힐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진도는 한양에서 먼 남쪽 끄트머리에서도 뭍에서 떨어진 섬인지라 유배지로도 적지(適地)였다. 자연스레 귀양살이하러 온 선비들의 학문과 풍류가 지역사회에 스며들었다. 문장이나 글씨, 그림, 노래 등 수준 높은 문화에 술이 빠질 리 없었다. 시 한 수 읊으며 한 잔, 붓 한 획 긋고 한 잔, 노래 한 자락에 화답하며 또 한 잔. 이렇듯 유배지에서의 시름을 잊게 했던 술이 진도홍주 아니었을까. 진도백주에 붉은색을 띠게 해주는 지초를 침출하면 홍주가 된다. 백주는 국내산 쌀을 이용해 만든 밑술을 발효시킨 뒤 증류한 전통 소주다. Taste 예상을 뒤엎는 맛. 부드러우면서 강하고 깨끗하고 단아하고 견고한 느낌이다. 황홀한 비단노을 빛 아래 남성성이 숨어 있는 듯하다. 화끈하면서도 묵직한 맛을 동시에 볼 수 있다. 단맛이 짧은 대신 향의 여운은 오래간다. 다시 말하면, 양면성을 지닌 개성이 분명한 독주. 스트레이트로 혹은 얼음을 채워 음미해도 좋지만 술에 약한 사람은 맥주나 탄산음료에 섞어 칵테일로 마셔도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풍미가 좋아진다. 서가 한 귀퉁이에 놓아두고 가끔 한 모금씩 마시면 김정호 선생이 말한 “꽃구경할 때의 풍경”이 어른거릴지도 모른다. 진도백주는 알코올 함량이 38%. 꽤 높은 도수이지만 순곡주 특유의 고급스러운 맛이 살아 있어 마치 무엇을 그려도 되는 빈 도화지 같은 느낌이다. 목넘김이 자연스럽고 기분 좋은 끝 맛이 입에 맴돈다. 온더록스로 즐겨도 좋다. 화이트 스피릿(White Sprit)으로 활용하면 칵테일 맛을 더 풍부하게 즐길 수 있다. Food 육류, 생선과 두루 잘 어울린다. 다만 도수가 높고 향이 강해 위에 부담을 주지 않는 음식이 좋다. 어란, 굴튀김, 진도 특산물인 구기자를 이용한 구기자갈비찜, 전복탕 등은 진도홍주에 잘 어울리는 최고의 안주. 큼직하게 썰어 노릇노릇하게 구운 두부스테이크, 쫄깃하고 담백한 문어숙회도 술맛을 돋운다. 기름진 중화요리를 곁들이면 부드럽고 알싸한 맛을 즐길 수 있다. 호두, 아몬드, 대구포 등 가벼운 안주도 무난하다. 진도백주는 생선회나 전류, 산적, 쇠고기구이 등 다양한 한식 메뉴들과 잘 어울리며 육포나 땅콩 등 마른안주와 곁들여도 좋다. 매콤한 겨자 맛이 매력적인 냉채족발이나 샐러드도 궁합이 잘 맞는 안주다. 은은한 향 문배주 명작 제조원 문배주양조원 유형 증류식 소주 용량 750ml, 375ml 알코올 함량 25%, 40% 원재료 및 함량 조(국내산), 수수(국내산), 쌀(국내산), 효모, 정제수 Story 평안도 지방 전통주인 문배주는 고려시대 때부터 임금에게 진상했던 술로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현재 북한에서는 명맥이 끊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의 문배주 기능 보유자 4대손인 이기춘 명인에 의해 재현돼 1986년에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고 1990년도에 상품화됐다. 문배주에 사용되는 누룩은 밀, 술은 조와 수수를 이용한다. 수수와 조는 계약 재배를 통해 수매하고 있어 철저하게 품질이 관리된다. 순수 곡물로 만들어지는 술에서 문배나무의 과일 향이 은은히 풍긴다 해서 ‘문배주’로 불리기 시작했다. 문배주는 빚어서 바로 마시지 않는다. 증류한 후 봉인해서 서늘한 곳에서 1년간 숙성시켜야 은은한 향과 깨끗한 맛을 자랑하는 명주로 완성된다. 1990년대부터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국빈을 대접하는 외교주로 쓰였다. 2000년에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 만찬주로 사용되는 등 품격과 가치를 인정받았다. Taste 25% 부드럽고 편하다. 향긋하고 여리지만 강함도 느껴진다. 곡물로 만든 술인데도 싱그러운 과일 향이 느껴져 기분 좋은 취기가 가시질 않는다. 40% ‘문배주’라는 이름답게 한 입 머금으면 특유의 은은한 향기가 난다. 높은 도수이지만 정갈하고 깨끗하다. 강렬함도 느껴진다. 순곡주에서만 맛볼 수 있는 고소함과 달콤함도 있다. 목을 넘긴 뒤에는 기분 좋은 풍미가 오래도록 남는다. Food 리코타 치즈와 아몬드 등 견과류를 뿌린 샐러드와 즐기면 좋다. 부드럽고 고소한 풍미를 더 풍성하게 느낄 수 있다. 민어 등 흰살생선에 달걀옷을 묻혀 고소하게 지져낸 전이나 지리 같은 깔끔한 음식과 잘 어울린다.
- 2020-01-16 10:13
-
- 유형별로 추천하는 시니어 아지트① 樂(즐기다)
- 당신의 아지트는 어디인가? 물론 특정한 한 곳만을 아지트로 삼은 사람도 있겠지만 날씨, 기분, 개인 욕구에 따라 가고 싶은 장소가 달라지기도 한다. ‘2019 시니어 아지트’ 설문조사에서 ‘시니어를 위해 생겨났으면 하는 아지트 유형은?’이라는 질문에 대다수가 문화공간, 학습터, 쉼터를 꼽았다. 그래서 준비했다. 즐기고, 마음의 양식을 채우고, 쉬고 싶을 때 찾으면 좋을 공간을 소개한다. 연재 순서 ① 樂(즐기다), ② 學(배우다), ③ 休(쉬다) 樂(즐기다) 색다른 체험 한국전통식품문화관 전통주갤러리 한국전통식품문화관 1층 전통주갤러리에선 ‘이달의 시음주’로 선정된 5개의 전통주를 매달 무료로 맛볼 수 있으며 구매도 가능하다. 무료 시음회는 약 30분간 한국어, 일본어, 영어 등 3개 국어 해설로 진행된다. 한국어·일본어 해설은 오후 1시, 3시, 5시, 7시(7시는 한국어 해설만 있고 주말엔 없다), 영어 해설은 오후 2시, 4시에 들을 수 있다. 조선 3대 명주를 포함한 프리미엄 전통주를 맛볼 수 있는 특별 시음회도 열린다. 매일 오후 1시, 3시, 5시에 열려 1시간 정도 진행된다. 참가비는 1인당 2만5000원. 4인 이상 10인 이하의 인원이어야 하며 늦어도 하루 전날 예약하는 게 좋다. 위치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5길 51-20 (강남역 11번 출구 도보 6분, 신논현역 5번 출구 도보 8분) 운영시간 매일 10:00~20:00 (월요일 휴무) 예약방법 네이버 예약, 전화(02-555-2283) 한국전통식품문화관 식품명인체험홍보관 한국전통식품문화관 2, 3층에는 식품명인체험홍보관이 있다. 2층은 식품명인카페 ‘이음’과 판매점, 3층은 체험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카페 ‘이음’에서는 식품명인의 잎차와 감식초, 식혜 등 전통식품을 활용한 다양한 음료와 간식을 맛볼 수 있다. 평일 오후 5시 30분에는 차, 한과, 전통주를 무료로 시식·시음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열린다. 평일에는 체험관에서 식품명인의 재료와 레시피를 활용한 한과, 전통주, 떡, 조청 만들기 체험 등에 참여할 수 있고, 토요일엔 매주 다른 분야의 명인을 만나 강연도 들을 수 있다. 프로그램 참여 시 예약 필수. 위치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5길 51-20 (강남역 11번 출구 도보 6분, 신논현역 5번 출구 도보 8분) 운영시간 매일 10:00~20:00 (월요일 휴무) 예약방법 네이버 예약, 전화(02-6927-3005/3012) 추억의 영화 감상 청춘극장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한 시니어 전용 극장이다. 55세 이상 어르신 및 동반자는 2000원에 1950~90년대 추억의 영화와 공연을 관람할 수 있다. 수요일엔 영화 상영이 없고 ‘시네마테라피’, ‘청춘! 싱어롱’, ‘청춘은 떼창이다’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토요일 오전 11시에는 무료 음악 교실, 오후 1시와 3시에는 ‘청춘유랑극단쇼’가 열린다. 예매는 토요일 오후 3시 20분부터 그다음 주 금요일 오후 3시까지 선착순으로 진행된다. 간식도 마련되어 있는데 가래떡 한 개에 200원, 커피는 한 잔에 100원으로 저렴한 가격에 즐길 수 있다. 자세한 영화 상영, 공연 일정은 청춘극장 카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위치 서울 중구 새문안로 22 (서대문역 5번 출구 도보 2분) 운영 시간 매일 9:30~18:00 (일요일 휴무) 참고 청춘극장 네이버 카페 시네마테크 KOFA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위치한 한국영상자료원에는 누구나 무료로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바로 한국영상자료원 지하 1층에 위치한 ‘시네마테크 KOFA’. 상업 영화관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독립영화와 옛날 영화들을 감상할 수 있다. 입장권이 빠르게 매진되는 경우도 있고, 영화에 따라 상영 후 ‘감독과의 대화’가 마련되기도 하니 홈페이지에서 관람 영화 정보도 얻고 입장권은 미리 예매할 것을 추천한다. 직접 방문하기 어렵다면 한국영상자료원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한국고전영화(Korean Classic Film)’를 통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위치 서울 마포구 월드컵북로 400 (수색역 1번 출구 도보 11분, 디지털미디어시티역 2번출구 도보 21분) 운영시간 시네마테크KOFA-매일, 영화 상영시간에 따라 유동적 / 한국영화박물관, 영상도서관- 10:00~19:00 (휴일엔 18:00까지) (월요일, 1월 1일, 설·추석 연휴, 1월 18일 창립기념일 휴무) 예매방법 시네마테크 KOFA 홈페이지, 현장 예매
- 2019-05-17 15:33
-
- 강원도 홍천 산골로 귀촌한 전직 변호사 정회철 씨
- 술을 즐기다 보니 술 만드는 기술이 궁금해졌더란다. 그래서 양조법을 배웠고, 조예를 키웠고, 마침내 술도가를 차렸다. 최고의 술을, 독보적인 전통주를 만들어 세상에 내놓고 싶었다. 이게 그의 귀촌 내력이다. 산골 숲속에 터를 잡았다. 된통 외진 골짝이다. 바람소리 물소리 도란거려 술을 익히나? 술 아니라 맹물이라도 향긋하게 무르익을 풍광이다.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산골 술도가 사장 정회철(56) 씨의 전직은 변호사. 변호사였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집어치우고 고시학원 강사로 뛰어 이름을 들날렸다. 충남대학교 로스쿨 헌법 교수로도 재직했다. 남들 눈에는 활보였겠으나 그는 도중에 멈췄다. 시골로 내려가기에 마땅한 사정이 생겼기 때문에. 건강에 탈이 났기에. 일밖엔 난 몰라! 그는 그리 속으로 외치며 열렬히 직업 활동을 했던 모양이다. 그러자 몸에 적신호가 켜진 것. “머리 아픈 증상이 극심했어요. 오랜 세월 누적된 과로로 몸에 과부하가 걸렸던 거죠. 온몸의 기(氣)가 머리로만 몰렸던 것 같아요. 단 5분도 책을 집중해서 읽을 수 없었어요. 밤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고…. 그 단계를 넘어서면 정신병원으로 가야 할 상황이었죠.” “사법고시 준비생들에게 스타 강사로 널리 알려졌었다죠?” “근 10년쯤 신림동 고시학원에서 강의를 했어요. 하루 너덧 시간을 내리 강의하는 식으로 열심히 했죠. 제가 고시생들을 위한 헌법 수험서 열 권을 펴냈는데, 날이면 날마다 글을 쓰는 일도 무리였어요. 명예도 좋고 부(富)도 좋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건강부터 되살리고 보자, 그런 생각으로 귀촌을 했습니다.” “귀촌 이후 건강은 좋아지셨고?” “강의하고 책 쓰고, 머리의 에너지를 모조리 써야만 하는 강행군에서 벗어나자 몸이 빠르게 회복되더군요. 요즘 다시 머리가 아파지려 하지만.(웃음)” “양조장 일의 과로로?” “양조사업 구상은 귀촌 이전부터 나름 충실하게 해왔어요. 양조 공부를 많이 해뒀죠. 덕분에 일의 진행이 빨랐어요. 그런데 전통주 사업, 이게 만만한 게 아닙니다. 일본 술 사케나 서양 와인은 1년에 한 번 빚으면 그만이지만, 저희 토속주는 1년 365일 계속 매달려야 하거든요. 게다가 양조장 개업 7년이 지났지만 아직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어요. 그러니 머리 아플 수밖에.” “적자 발생 원인이, 문제점이, 어디에 있죠?” “소비자들이 전통술을 잘 모릅니다. 변호사가 만든 술이라 호기심을 가질 법하지만, 별 관심들이 없더라고요. 전래의 청주 문화, 약주 문화는 이미 고사 직전이에요. 거대 기업들이 장악한 유통망을 저희 같은 작은 업체가 파고들기도 어렵고.” 정회철 씨의 양조장엔 ‘전통주조 예술’이라는 상호가 걸렸다. 그 옛날의 고귀한 양조 정통을 살려 예술에 맞먹을 술을 빚겠다는 의지를 실었다. 산중 유벽한 곳에, 수려한 숲속 5000평 부지에, 살림채를 비롯해 완벽한 수준의 양조 시설물들을 구축했다. 본때 있게, 맵시 있게. “뭘 모르고 뛰어들었어요” 개량 한복을 소탈하게 차려입은 정 씨. 안면에 자란 텁수룩한 수염이 입성과 오붓하게 어울린다. 숨어사는 사람처럼 표정은 고요하다. 넘치는 의욕으로, 신명에 찬 근면으로, 그는 오직 술 만들기에 전념해왔단다. 주조(酒造)만을 일삼진 않는다. 양조 기법과 술 문화를 배울 수 있는 체험교실도 운영한다. 게스트하우스도 겸한다. 하지만 아직은 불황! 세상의 그 어디에도 예외가 없다. 사업판이란 적자생존의 정글이라는 거. 누구나 알 만한 사실이지만, 전국 곳곳에 산재한 군소 전통주 업체들이 고전한다. 그는 그걸 몰랐을까? 몰랐단다. “뭘 모르고 뛰어들었어요. 상황을 알았다면 덤벼들지 않았겠지요. 몰랐기에 사업 착수가 가능했던 겁니다.” “그 무슨 신념이 있었기에?” “우리 선조들이 마셨던 전통주를 제대로 복원해 보급하고 싶었어요. 진정한 민속주를, 장삿속만을 추구하지 않는 술다운 술을 빚는다는 거, 그건 사업 성패를 떠나 매우 가치 있는 일이라 판단했어요.” “전통주를 만드는 사람마다 자기의 술이 최고라 자부해요. 장인정신을 표방하며. 당신이 만드는 술은 어떤 특장이 있나요?” “좋은 술은 일단 맛이 빼어납니다. 미각과 후각은 물론, 시각까지를 미묘하게 자극해 만족을 주죠. 또 숙취라는 게 없어요. 그럼 좋은 술을 만드는 관건은 무엇인가? 누룩입니다. 어떤 누룩을 썼느냐에 따라 술의 품질이 결정돼요. 대부분의 업체들은 첨가물이 들어간 인위적 누룩을 사용하는데, 이게 술의 품질을 저하시키는 겁니다. 저는 직접 자연발효 누룩을 만들어 술을 빚어요.” 정 씨가 술을 내놓는다. ‘무작53’이라는 이름이 붙은 술이다. 알코올 도수는 53도. 조선의 명주 ‘적선(謫仙)소주’를 원본으로 해 빚었다는 정통 증류식 소주. 한 잔 털어넣자 감미롭게 혀를 굴러 뜨겁게 목으로 넘어간다. 그는 증류식 소주 외 약주와 막걸리도 만든다. 술마다 고가격을 매긴 건 품질로 승부하겠다는 자부심의 표출이겠지. 술꾼들은 좋은 술에 대한 얘기만 나와도 엔도르핀이 솟는다. 이태백 이래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술과 더불어 풍진 세상 흥겨이 노닐었던가. 날이면 날마다 막걸리를 마시며 쓸쓸한 이승을 소풍처럼 살다 귀천(歸天)한 천상병 시인의 동류는 또 얼마나 많던가. 술로 구겨진 인생도 숱하지만, 술의 위무(慰撫)로 일어선 인생사도 즐비하다. 가장 복스러운 인생은 술 빚는 자의 것일지도. 향기로운 술로써 세상에 미만한 고독과 고통을 씻는 일에 일조하기에. “술을 만드는 일, 좋은 술을 빚는 일, 거기에 심혈을 기울이는 일은 정말 즐거워요. 용케도 만족할 만한 술이 만들어졌을 땐 기뻐 날뛰고 싶은 심정에 사로잡히죠. 모두들 세상에서 최고는 돈이라고들 하지만, 제겐 술이 최고예요.” “‘최고의 술’을 만든다지만 부진을 면치 못하는 중이군요. 불안은 없을까?” “귀촌 전, 진정 기꺼이 즐기며 남은 생 전체를 쏟을 일을 찾았어요. 그게 전통주 사업이었죠. 단순한 술도가가 아니라, 풍류를 중심에 두고, 모두 흥겹게 어울려 놀 수 있는 복합 술 문화공간으로 가꾸고 싶었어요. 그게 꿈이자 목표예요. 불안? 그런 건 없어요. 다만, 화증과 짜증은 많이 늘었죠. 화 폭발의 대상은 와이프이고.(웃음)” “부인이 무슨 죄? 신사는 여자에게 큰소리를 치지 않는 법이죠.” “아내가 하는 말, 서울에서 이토록 열심히 일했다면 빌딩을 벌써 사고도 남았을 거요! 저는 일벌레입니다. 부진한 수익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노력하는 것, 그 하나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사업상의 향후 전망은 밝으니까.” “활로를 찾았다는 얘긴가요?” “예전과 달리 젊은이들이 전통주에 관심과 호감을 갖기 시작했어요. 제겐 고무적인 정황이죠. 어, 이거 맛있네! 기존 막걸리와는 다르잖아! 이게 뭐지? 전통주네! 그런 반응들.” “우리가 마시고, 남으면 팔자!” 바람 잔 날에 바람개비를 쥔 사람의 태도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바람이 일기를 기다리기. 다른 하나는 앞으로 바람처럼 달려 바람 일으키기. 정회철 씨는 냅다 질주 중이다. “선택과 집중. 돌아보면, 제 인생은 그걸 나름 잘 해왔어요. 뭐든 신중하게 선택하고 가차 없이 몰두해왔죠. 이게 아니다 싶으면 바로 바꿨어요. 이런 저의 삶을 롤러코스터에 올라탄 기분으로 조마조마 바라보는 건 와이프이고.” “어릴 적 꿈은?” “제가 대학 땐 운동권에서 뛰었어요.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다 할까, 정치인이 되고 싶은 꿈이 좀 있었죠. 그러나 한계를 느꼈어요. 그건 나의 길이 아니다, 그건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긴 해도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런 판단을 했어요. 오늘날 이곳에서의 양조 일, 그건 인생 후반에 발견한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입니다.” “술 사업과 적성이 잘 부합하는 거예요? 비즈니스란 허울 좋은 요령과 처세가 무기일 텐데.” “흠, 얼마 전 너무도 힘들어 난생처음 점집에 가서 사주를 봤는데요, 절더러 한량 타입이라 합디다. 한량? 내가 정말 그런 거야? 반신반의했지만,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정히 그렇다면 잠든 ‘끼’를 살려 재미있게 살면 되겠지, 워낙 모범생으로 성장해 내향적인 성격이 굳었지만 술과 더불어 한평생 즐겁게 살자, 그런 다짐을 해보는 것이죠. 저희 부부에겐 슬로건이 하나 있어요. ‘재미있게 살자!’ 부제(副題)도 있어요. ‘우리가 마시고, 남으면 팔자!’” 떠밀릴 수밖에 없는 거대한 파도에 직면한 것과도 같은, 그런 절박한 굽이를 곧잘 마주치는 게 인생이지만, 웬일인지 파도는 흔히 절로 가라앉는다. 그걸 문득 느끼자면, 순항도 재미요, 난항도 재미다. 자신이 선택한 상황 안에서 자극과 감흥을 발견해 즐기는 데에서 삶의 풍미는 돋아난다. “귀촌을 해서 목가적인 낭만을 즐기겠다는 태도는 위험해요. 일 속에서 재미와 가치를 구해 행복의 실체를 찾아가는 게 옳다고 봐요. 귀촌을 환상으로 모색하는 건 실패의 첩경입니다. 시골 환경은 예상보다 더 단조롭고 답답할 수 있어요.” “원주민과 흐뭇하게 지내는 일에도 공을 쏟아야만 하죠.” “귀촌인들은 마을에서 백년을 살아도 외지인이에요. 애초 마을과 뚝 떨어진 곳에 터를 잡는 게 현명할 수도 있어요. 지나친 간섭을 받지 않아도 되니까.” “도시보다 시골에 막대하게 많은 건 자연의 얼굴들이죠. 자연이 주는 안정감, 그건 귀촌으로 누릴 수 있는 최상의 행운이지 않을까?” “사계의 변화에 자주 가슴이 먹먹해지더라고요. 철 맞춰 꽃이 피고, 향기가 번지고…. 아아, 그럴 때면 넋을 잃어요.” 생물과 무생물이 섞인 도시. 생물과 생명이 얼크러져 순환하는, 시골이라는 자연. 자연을 향해 넝쿨처럼 뻗어나가는 마음이라면, 귀촌이란 자못 근사한 여행이겠지. 정회철 씨가 주는 귀촌 준비 tip ❶ 시골은 돈 버는 곳이 아니라 돈을 줄여 쓸 수 있는 곳이다. 너무 열악한 경제 형편 하에서 귀촌하면 괴로워진다. ❷ 가급적 마을과 떨어진 곳에 터를 잡자. ❸ 시골의 문화 여건은 미비하다. 스스로 즐길 수 있는 뭔가를 준비해서 귀촌하자. ❹ 도시에서 맺은 인적 관계를 꾸준히 관리, 지속하자. ❺ 사업을 할 게 아니라면 터를 넓게 잡을 필요 없다. 200평 정도면 텃밭까지 즐길 수 있으니.
- 2018-08-20 14:31
-
- 오미나라 이종기 대표, 술을 좋아하다 못해 직접 술을 빚다
- 국내 최고의 술 전문가가 마침내 세계와 겨룰 명주를 만들기 위해 선택한 재료는 오미자였다. 패스포트, 썸씽스페셜, 윈저12, 윈저17, 골든 블루… 27년 동안 동양맥주에서 한국 위스키 시장의 거의 모든 술에 관여해, 업계에서 그를 모르면 간첩이라 불릴 만큼 주류 역사의 산 증인이 된 이종기(李鍾基·62) 오미나라 대표. 오랜 세월 한국 술 문화 발전에 기여한 그는 지금 독립군이 된 심정으로 명주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의 술 만드는 흥과 열정, 그리고 잃어버린 술 문화를 되살리고자 하는 고군분투의 이야기. 서울대 농화학과 75학번인 이종기 오미나라 대표를 만나니 대뜸 이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오미자였을까?’ “제가 술로 할 수 있는 재료는 거의 다 해봤어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우리나라에는 양조용 원료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한국에는 양조를 위한 원료가 없다 충격적인 이야기지만 사실이다. 예를 들어 맥주는 보리가 주원료다. 우리가 먹는 보리는 육조대맥이라 하여 위에서 보면 알맹이가 육각형으로 달려 있다고 한다. 그런데 양조용 보리는 이조대맥이라는 두 줄짜리 보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한다는 것. 심지어 쌀도 마찬가지다. “쌀로 술을 만들기 좋은 품종이 일본에는 80개가 있고 그중에 유명한 7대 품종이 있어요. 포도도 수천 종 중에서 양조용 품종인 샤르도네, 리슬링 등이 유명하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전부 생식용이지 양조용 원료가 없어요. 양조학에서 생식용은 아예 양조 대상이 아니에요. 물론 그걸로 만들어도 술이 되긴 되죠. 그런데 명주가 될 가능성은 제로거든요.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나는 쌀을 비롯해서 곡물, 과일, 약재 등으로 술을 만들어봤는데 국제적으로 명주의 가능성이 있는 것은… 그런 기준으로 봤을 때에는 오미자 이외에는 없었던 거죠.” 희석식 소주는 알코올이지 술이 아니다 이 대표가 우리나라 명주를 만들기 위해 원료를 탐색하기 시작한 것은 1993년부터다. 그로부터 5년여 후, 그는 한국산 원료로선 오미자 외에는 기대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오미자를 선택하게 만들었을까? “술은 기본적으로 관능미를 충족시켜야 합니다. 취하는 거야 술이 아니어도 취할 수 있어요. 그냥 에틸알코올만 마셔도 취하긴 하죠. 술의 주성분은 물이에요. 12도 와인이라면 물이 88%입니다. 그런데 알코올과 물 외에 천분의 일 정도 분량에 수백 가지 다른 요소들이 섞여 있는 거죠. 문제는 그 수백 가지 요소들로 인해 술의 색과 향과 맛 등이 결정된다는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술에는 역사와 문화가 있잖아요? 그 모든 것들을 합친 게 술이죠. 오미자가 그걸 충족해요.” 이 대표에게 있어 술이란 일단 매력이 있어야 한다. 관능미를 충족시키는 매력과 역사 문화적인 스토리가 있어야 진짜 술이란 것이다. 그에게 술은 사회의 공기와 같은 존재다. “그래서 저는 희석식 소주는 알코올이지 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희석식 소주는 일제가 전쟁을 일으켜서 발악할 때 만든 전쟁 보급품이에요. 워낙 우리가 어렵게 살다 보니 제3공화국 때 서민용 술로 보급된 거지. 그런데 희석식 소주가 우리나라 술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니 술과 농업이 전혀 관련 없게끔 괴리가 생겼어요. 술은 농산물의 꽃이고 농업의 가장 오래된 산업이 양조 산업인데 우리나라는 전혀 그렇지 않아요.” 문화 말살을 위해 일제가 만든 적폐 희석식 소주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볼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우리 생활에 관계된 얘기다. 당장 오늘 저녁에만도 그 수많은 식당과 테이블 위에서 몇 병씩 비워질 삶에 밀착된 한 부분 아닌가. “1909년에 순종이 주세법을 공포했어요. 물론 일제의 강압에 의해서였죠. 그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가가호호든 궁궐이든 술을 만들어 먹었는데 주세법은 그걸 금지시켰어요. 겉으로는 조세를 확보한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속으로는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서 술은 그냥 마시는 게 아니라 문화 그 자체였어요. 아예 향음주례(鄕飮酒禮)라는 법도가 있었는데, 직역하면 마을에서 음주하는 예절이라는 의미죠. 정조가 이것을 책으로 수천 부를 만들어서 배포했어요. 술 문화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죠.” 이 대표는 향음주례의 절차가 일곱 개로 나뉜다고 설명했다. 술을 권하고 받을 때 세 번 권하고 두 번 사양하라는 것도 거기서 나온 것이다. “그걸 없애니 문화가 말살된 거죠. 우리나라는 사람들이 다짜고짜 취하려고 술을 털어넣는 문화가 아니란 말이에요.” 우리 술이 살아야 우리 농업이 산다 술은 그 지역에서 농사지은 걸 빚어서 먹는 것이었다. 그러나 1938년이 되자 일제가 전선을 중국, 동남아, 하와이까지 넓히면서 보급품이 부족하게 됐다. 그때 일제는 국가총동원령을 내렸다. 국가에 있는 모든 자원을 국가의 필요에 의해 전쟁에 동원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전쟁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식량 못지않게 술입니다. 그런데 식량은 전쟁물자로 다 나간 상황이죠. 그러니 일제가 열대에서 나는 가장 싸구려 타피오카와 당밀을 섞어 알코올을 만들고 거기에 사카린, 조미료를 타서 보급한 게 오늘날 희석식 소주예요. 술을 음미하고 즐기는 게 아니라 정성과 품이 안 들어간 막술로 변질된 것이 거기서부터 시작됐죠.” 술은 문화를, 예법을 논하는 일이다. 이 대표는 그런 술의 본연의 성격이 지금은 일종의 도피제로 바뀌었다고 비판했다. “술을 도피제로 전락시킨 것은 정말 저급한 문화죠. 저는 항상 술을 마실 때는 시를 생각해요. 로마네 콩티가 왜 비쌀까요? 한 병에 오백 내지 이천만원에 달할 정도로. 로마네 콩티나 소주나 취하는 건 똑같은데 말입니다. 로마네 콩티에는 그걸 마시고 싶은 스토리, 문화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물론 생활고에 시달리는 서민들이 스트레스 때문에 가격이 싼 희석식 소주를 마시는 것은 이해됩니다. 그러나 지금의 희석식 소주 시장에서 10%만 괜찮은 술로 대체가 된다면 그 자체가 경제적 파급효과가 있어요. 지역 발전과 관광, 술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일어날 겁니다.” 인삼주 혹평에 자존심 상해 명주를 만들기로 작심 우리나라 농업을 살리려면 우리나라 농산물로 만든 술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 이 대표의 물러설 수 없는 지론이었다. “술은 그 나라 문화의 척도라고 얘기됩니다. 자기 고장의 술을 마시고 영감도 얻고 애환도 달래고 해야 하는데 일제의 보급품을 국주처럼 먹는 건 진짜 적폐죠.” 문득 술은 공동체의 삶이 녹아 있는 문화라는 말이 떠올랐다. “맞습니다. 가양주(家釀酒)가 다양한 형태로 발달했어요. 일제가 전쟁 군수용으로 개발한 소주로 한국의 양조 문화와 술 문화가 떨어진 거지요. 우리나라에서 아직 일제 치하에 있는 문화가 술 문화예요. 그런데 우리의 삶이 거기에 있다고 본다면 슬픈 일이죠.” 이 대표는 현재 충주에서 세계술문화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 2005년 5월 1일에 설립하여 올해로 벌써 12년째다. 그는 우리나라 술 문화가 너무 저급하고 전통문화와 지독하게 단절되어 있다는 깨달음에 두 가지를 하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바로 박물관과 세계 명주를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그 동기는 199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회사를 다니던 1990년 영국 에든버러의 헤리옷 와트 대학원에서 2년간 양조학을 공부했어요. 담당교수가 세계 각국에서 모인 학생들에게 자기 나라의 대표 술을 갖고 시음회를 열자고 했죠. 저는 막걸리를 가져갈 수는 없어서 인삼주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담당교수가 다른 술들을 마시면서는 칭찬을 하더니 인삼주를 마시고는 혹평을 쏟아내더군요. ‘한국 사람들은 술과 약도 구분하지 못하냐’고 말이죠. 여기서 저는 프랑스에서 온 학생이 가져온 로제(rose) 샴페인을 마시고 그 빛과 맛, 향이 너무도 환상적이어서 세계에서 인정받는 한국산 명주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됐습니다.” 오미자로 술을 만들기 위한 고군분투 2006년 우연히 경북 문경에 있는 농장을 방문하면서 오미자 열매에 꽂혔다. 그가 닥치는 대로 실험을 한 끝에 고르게 된 오미자는 단맛·신맛·쓴맛·짠맛·매운맛의 복합적인 맛을 내는 재료다. 그 다양한 맛은 오미자의 명주 재료로서의 가능성을 높게 만들었다. 반면 그런 다채로운 맛의 오미자를 발효시켜 술까지 이르게 만드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2007년에 프랑스 연구소를 찾아가서 오미자 발효 여부에 대해 자문을 했습니다. 결론은 오미자는 쓴맛과 매운맛이 강해 천연 방부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발효가 안 된다는 진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시간이 걸려도 발효가 분명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의 확신은 2008년에 마침내 현실이 됐다. 그래서 바로 오미자 농가가 많은 경북 문경에 JL크래프트 와이너리와 오미나라, 우리술연구소를 설립했다. 현재 JL크래프트의 제품은 네 가지다. 오미자로 만든 스틸 와인, 스파클링 와인, 브랜디, 그리고 사과로 만든 브랜디가 그것이다. “세계 명주라는 기준으로 봤을 때, 지금은 제품은 어느 정도 된 거 같은데 재정이 문제죠. 재정이 취약하니 활동을 할 수가 없어요. 품평회도 열고 해외에서 행사도 할 수 없으니. 그런데 내년 정도면 재정이 상당히 좋아질 것 같아요.” 이 대표는 세계 명주의 기준을 두 가지로 보고 있었다. “첫째는 이 술이 세계의 다른 어떤 술과 비교해도 열등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문화적 철학이 녹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요즘 그가 자랑하는 술은 오미자 증류주인 ‘고운달’이다. 이미 상당한 마니아가 만들어졌다는 자평이다. 물론 신제품도 준비하고 있었다. “스파클링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들을 대상으로 신제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절반 가격으로 대형 유통과 손잡고 내년 하반기부터 스파클링 와인을 출시할 계획이에요.” 좋은 술은 스토리가 많아 더 맛있다 술을 만드는 명인답게 그는 대단한 술꾼이기도 했다. “스코틀랜드에 유학을 가기 전까지 일 년에 500회는 마셨을 거예요. 거의 매일 마셨던 셈인데, 그것도 하루에 두 번 가까이 마신 거였죠.” 그는 술을 맛있게 마시는 방법으로 술과 함께 먹을 음식을 잘 맞추라고 말했다. 음식과 술의 궁합이 물질적인 측면에서 술을 맛있게 먹는 방법이라면 술이 가진 스토리와 좋은 사람과의 교감은 정신적 측면에서 술을 맛있게 먹는 방법이다. “선물용으로 술을 준비해야 하는 일이 있죠. 우리 저장고에 보면 다양한 술들이 있는데 이 술들은 자기가 오크통을 사고 직접 술을 담가서 숙성을 시키는 거죠. 말하자면 직접 만드는 정성이 담긴 술들입니다. 이런 술이 정말 선물할 가치가 있는 술이 아닐까 싶어요.” 그에게 마지막으로 죽기 전에 꼭 마셔야 할 술 세 가지만 추천해 달라고 했다. “우선 뮌헨 옥토버 페스트에서 나오는 라거 맥주는 정말 맥주가 이렇게 맛있나 놀라게 만듭니다. 그리고 포르투갈에 가면 도루 강이란 곳이 있는데, 강 양쪽에 오랜 역사를 가진 와이너리들이 있어요. 그곳의 음식과 와인은 정말 대단한 맛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우리나라에서 직접적으로 관여해서 런칭한 술이 윈저부터 패스포트까지 이르고, 간접적으로는 조니워커, 발렌타인 시리즈 등을 탄생시켰죠. 그러니 제가 빚은 ‘고운달’을 마셔보면 다른 술하고 비교가 안 돼요(웃음).”
- 2017-10-08 11:54
-
- [한문산책] 정유년(丁酉年)
- 글하태형 전 현대경제연구원장 2017년이 밝아온다. 새해는 정유년(丁酉年)이다. 십이간지(十二干支)상 유(酉)는 닭에 해당하므로, 새해는 닭의 해이다. 우리는 흔히 酉자를 닭과 연결해 생각하지만, 사실 한자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면 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한자이다. 따지고 보면 십이간지를 나타내는 열두 글자가 동물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글자들이었다. 이 십이지를 쥐[子] 소[丑] 범[寅] 토끼[卯] 용[辰] 뱀[巳] 말[午] 양[未] 원숭이[申] 닭[酉] 개[戌] 돼지[亥] 등 열두 마리의 동물과 결합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전국시대(戰國時代)로 추정되는데, 이와 같이 동물과 연관 지은 것은 동물을 숭배하는 중국의 토템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그러면 酉자의 기원은 무엇일까? 일단 갑골문을 보면 이 글자는 술병을 나타내는 글자로 등장한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자전인 는 이 글자를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이룬다[就]는 뜻이다. 8월이 되어 서리[黍]가 익으면, 술을 진하게[酎] 담글 수가 있다[就也。八月黍成。可爲酎酒。].” 후한(後漢)시대 허신(許愼)이 저술한 의 내용은 간단하다. 이를 풀이한 청(淸)대 단옥재(段玉裁)의 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서리는 대서(大暑)가 지나 이삭이 패서, 8월이 되면 익는다. 대개 벼[禾]과에 속한 곡물들은 8월이면 익는데, ‘벼[禾]’라고 하지 않고, ‘서리[黍]’라고 얘기한 것은 당시 술을 담글 때 주로 서리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술을 진하게[酎] 담근다는 것은 세 번 빚는다는 것이다. 술을 묵힐 때는 반드시 술병[酉]을 사용하여야 하므로, ‘유(酉)’가 곧 ‘이룬다[就]’는 의미와 같게 쓰인 것이다. [黍以大暑而穜。至八月而成。猶禾之八月而孰也。不言禾者、爲酒多用黍也。酎者、三重酒也。必言酒者、古酒可用酉爲之。故其義同曰就也。]” 당시에는 하력(夏曆)을 사용하였는데, 하(夏)나라 때 사용한 하력은 오늘날 태음력(太陰曆)에 해당하므로, 당시의 8월은 오늘날 양력 기준 9월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한편 중국의 가장 오래된 시가(詩歌)인 의 빈풍(豳風). 칠월(七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가을에 거둔 쌀로 봄날 술[春酒]을 담가서, 노인들 장수를 빌어보네[爲此春酒 以介眉壽].” 이러한 전통이 이어져서인지, 당(唐)나라 때부터는 아예 술을 지칭할 때 ‘춘(春)’이란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예컨대 에, ‘영주(郢州)에서 나는 술을 부수춘(富水春)이라 부르며, 조정(烏程)의 술은 약하춘(若下春), 영양(滎陽)은 상굴춘(上窟春), 부평(富平)은 석동춘(石東春), 검남(劒南)은 소춘(燒春)이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춘주(春酒)중 세 번 담가서 진하게 빚은 술을 ‘춘주(春酎)’라고 하며, 고급 술로 쳤다. 조선시대 동정춘(洞庭春), 호산춘(壺山春) 등 명주가 이런 전통을 따랐다. 새해는 정유년이니 우리나라의 역사 발전이 이루어지는[就] 한 해가 됐으면 좋겠다. 특히 새로 빚어진 한국의 역사를 담는 술병[酉]같은 한 해가 되길 기원해 본다.
- 2016-12-22 16:00
-
- [우리 세대 이야기] 1946년生, 결핍과 허기의 시대
- 문창재 내일신문 논설고문 집에서 지하철역에 가려면 백화점 두 곳을 지나게 된다. 하나는 주로 중소기업 제품을 취급하는 곳이고, 하나는 굴지의 재벌기업 소유다. 통행인이 많은 길옆 점포들은 고객을 유혹하려고 바리바리 물건을 쌓아놓고 늘 ‘세일’을 외친다. 60층이 넘는 주상복합 아파트 세 동의 하부를 이루는 재벌 백화점 지하에는, 지하철역과 통하는 무빙 워크가 있어 편리하다. 그곳을 지날 때마다 젊은 날 나를 괴롭힌 결핍의 시대가 떠오른다. 그 많은 의류와 잡화들이 그런 회억의 실마리다. ‘그때 저렇게 값싸고 질 좋은 방한복이 있었으면 그날 그렇게 떨지 않았을 텐데….’ 눈에 띄는 제품마다, 후각을 파고드는 음식과 향신료 냄새마다 지나간 결핍의 시대 영상을 내 기억의 창고에서 끌어낸다. 저런 신발이 있었으면 시린 발을 동동거리지 않아도 좋았을 것을! 저렇게 강렬하게 후각을 유혹하는 음식이 그 시절에 있었던가! 4·19 학생혁명이 일어난 1960년 제야에 나는 처음 서울에 왔다. 다음 해 3월의 고등학교 입학시험 준비를 위해서였다. 그날 아침 나는 지독한 추위에 떨었다. 아마도 영하 20도는 되었을 혹한의 미명이었다. 삭풍이 몰아치는 신작로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얼마나 제자리 뛰기를 했던지, 눈썹에 먼지가 허옇더라 하였다. 그 새벽 버스는 오지 않았다. 아침을 먹고 장터에 올라가 보았다. 운전사가 버스 밑에 엎드려 장작불을 피우고 있었다. 밤새 얼어 시동이 걸리지 않는 기관을 녹인다는 것이었다. 밤에 읍에서 올라와 다음 날 새벽에 떠나는 그 버스밖에는 교통편이 없었다. 도리 없이 서울행이 하루 늦어졌다. 구불구불 느릿느릿 달리는 그 버스 편으로 250리 밖 중앙선 철도역에 닿아, 귀성객으로 꽉 찬 열차에 결사적으로 올라탔다. 짐짝처럼 흔들리고 구겨진 열다섯 시간의 여행 끝에 청량리역에 도착한 그날 밤부터 나는 지독한 감기몸살로 앓아 누웠다. 그때 나의 입성은 초라하였다. 마직 검정색 교복 안에 목내의를 겹쳐 입었을 뿐이었다. 외투도 털목도리도 없이 얇은 명주 수건을 목에 두르고 세 시간 넘게 한데서 떨었으니, 얼어 죽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신발도 그랬다. 눈만 흘겨도 찢어질 것 같은 조잡한 운동화 차림이었다. 한겨울 백두대간 종주산행 때나 한라산 눈밭에서도 그렇게 발이 시려본 적이 없는 근래의 기억과 비교하면, 참 어이없는 시대였다. 우리는 ‘해방둥이’로 불린 축복의 세대다.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난 광복조국에 태어났으니 어른들 보기에 얼마나 복 받은 세대겠는가. 그렇지만 우리의 유소년 시대는 그 반대였다. 6·25 전쟁의 격류 속에서 살아남은 것 자체가 행운이었다. 전쟁 중에 입학한 학교생활의 하나부터 열까지가 없거나 모자랐다. 그러나 큰 불편을 몰랐다. 당연한 줄 알았다. 산골짜기여서 6·25 때는 피란을 가지 않았다. 광산 갱도 안에서 급박했던 며칠을 피하고, 인민군과 국군에게 번갈아 지배당한 몇 달이 지나간 1·4후퇴 때는 피란을 갔다. 모두 피란을 가라는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하였다. 태백준령 눈밭을 넘어 경상북도 봉화 땅에서 겨울을 보내고 돌아온 다음 해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국공 양측 군대의 본부로 쓰였던 교사는 불타고 없었다. 컴컴한 군용천막 안이 교실이었다. 흙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책상도 없는 바닥에 앉아 학교생활을 시작하였다. 가마니 바닥에 책과 공책을 펴놓고 ‘가갸거겨’를 배웠다. 칠판을 보고 글씨를 쓰려면 궁둥이를 높이 쳐들고 어깨를 낮추어야 하였다. 궁둥이 때문에 칠판이 안 보인다고 툭하면 싸움이 났다. 교과서가 부족하여 두 사람이 한 권을 같이 보았다. 그러다가 한두 아이가 작은 책상을 들고 와서 교과서와 공책을 올려놓았다. 그게 부러워 너도나도 그런 책상을 들고 다니게 되었다. 줄지어 들고 와서 하학 때 들고 나가는 모습이 교문 앞 풍경으로 굳어졌다. 날씨가 풀려 야외수업을 할 때가 제일 즐거웠다. 특히 벚꽃 그늘에서 공부할 때가 좋았다. 꽃이 아름답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고학년이 되어 새로 지은 판잣집 교사에 들어갔을 때는 행복하였다. 소나무 판자의 향기가 그윽한 널따란 교실 벽을 트고 학예회를 할 때는 세상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몇 해가 지난 뒤 ‘사라호’로 불린 태풍에 학교 함석지붕이 날아가고, 벽면이 위태롭게 기울었을 때는 왜 우리 학교만 그런 신세가 되었는지 의아스러웠다. 그때는 너나없이 돈이 없었다. 돈을 본 일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선생님 따라 화전민 마을에 갔다가, 자두 한 되를 5환에 사먹은 일이 있다. 돈 구경을 못 해보았는지, 촌 아주머니는 선생님이 꺼내든 10환짜리와 5환짜리 돈 가운데 빨간색 5환짜리가 탐났던 모양이다. 10환짜리를 주려 하니 빨간 돈을 달라 하였다. 태풍 피해자 돕기 의연금 같은 돈 걷는 일에 현금을 낼 수 있는 아이는 드물었다. 새 학기가 되어 갈려 가는 선생님에게 주어야 한다고 전별금을 걷을 때도 그랬다. 돈을 낼 수 없는 아이들은 쌀이나 보리 같은 곡식을 한 됫박씩 가져왔다. 팔아서 돈으로 주었던 모양이다. 6학년 수학여행 때도 쌀을 지고 갔다. 부처님 진신 사리를 모셨다는 정암사까지 80리 길을 쌀 두 되를 지고 종일 걸어서 갔다. 밤중에 도착하여 지고 간 쌀로 밥을 지어 먹고, 다음 날 수마노석으로 쌓았다는 돌탑을 보고, 또 종일 걸어서 돌아왔다. 객지에 공부하러 나간 학생들 하숙비도 쌀로 내던 시절이다. 식량의 결핍은 너무 슬퍼 되돌아보기 싫다. 그 시대 어느 고장 어느 마을이고 넉넉히 먹고 산 데가 없으니 특별한 이야기는 못 되리라. 그러나 미국에서 왔다는 우유가루 배급 이야기만은 빼놓을 수 없다. 쌀자루에 그걸 배급받는 날, 손으로 집어먹어 얼굴에 허연 가루를 묻히고 장난치던 일이 결핍의 시대 화제에서 빠질 수는 없다. 사료용이었다는 그 가루를 쪄서 과자처럼 만들어 먹은 날에는 어김없이 배탈이 났다. 그런 날 온종일 학교 변소가 붐비던 일은 비탄의 감정 없이는 돌아볼 수 없다. 사람 사는 세상에 꼭 있어야 할 것 가운데 책을 빼놓을 수 없다. 그것을 파는 곳이 없어 낙망하였던 일은 나의 소년기에 큰 상처가 되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지 못하여 기가 죽어서 지낸 몇 달 동안, 나는 어린이 도벌꾼이었다. 중학교 참고서를 사다가 독학을 하리라는 장한 꿈으로 산에 올라 소나무를 베어 젖혔다. 그걸로 장작을 만들어 장에 지고 가면 “어린 것이 진학을 하지 못하고 나무꾼이 되었구나!” 하고 측은해 하며 사주었다. 그렇게 참고서 값은 마련되었으나 책을 살 길이 없었다. 빨간 딱지 이야기책이나 취급하는 잡화점에 부탁하여 ‘간추린 영어’ ‘간추린 수학’ 같은 참고서를 주문하여 책을 손에 넣고 나니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곧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알파벳을 배워 본 일이 없는 영어 까막눈에게 영문법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수학도 그랬다. 1학년 2학기에 편입한 첫 수학시간부터 나는 그 과목과 멀어져야만 하였다. 그때 선생님들은 왜 그렇게도 질문을 싫어하셨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집안에도 이웃에도, 그 목마름을 풀어줄 사람이 없어 나의 영어와 수학은 점점 ‘불구’가 되어 갔다. 읽을거리에도 목말랐다. 교과서 말고는 책도, 신문도, 잡지도 없었다. 유일하게 책을 가진 동네 형 집에서 찾아낸 책들은 소용에 닿지 않았다. 서울에서 신문을 배달하며 야간대학에 다니던 그의 책꽂이에서 어느 날 눈에 번쩍 뜨이는 책을 발견하였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였다. 그 전 해였던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 빌려다 읽어 보았으나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히 우리말로 된 책이었지만 그렇게 어려웠던 까닭을 이제는 알만하다. 노벨상 대목을 노려 급하게 이중삼중 번역판으로 내놓았을 책의 내용이 오죽하였으랴! 그나마도 얇은 축약판으로 나온 책이니 물어볼 나위도 없는 일 아닌가. 책에 대한 허기를 채우려고 나는 서울의 고등학교에 진학하자마자 도서반에 들어갔다. 방과 후 교내 도서관에서 학생들이 원하는 책을 찾아주고 반납 받은 책을 정리하는 서비스의 대가로 도서반원에게는 관외대출 특전이 주어졌다. 그 혜택 덕분에 책과 가까이 하게 된 것이 내 인생행로의 나침반이 되었다. 서울생활에서는 겨우 책에 대한 갈증을 풀었을 뿐, 다른 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내 주머니는 텅 비어, 갖고픈 게 있어도 가질 수가 없었다. 물건은 많은데 돈이 없어 욕망을 채울 수 없는 고통이 더 크다는 걸 그때 알았다. 고등학교 3년간 통학로였던 서울역 염천교 길은 오사리 잡탕. 백화점이었다. 갖가지 먹을 것을 파는 노점상에서부터 입을 것, 신을 것, 지닐 것, 야바위판 등등 없는 게 없었다. 어떤 루트로 흘러나온 것인지, 시장골목보다 값싸고 멋진 물건으로 넘쳐났다. 그러나 한 달 치 전차회수권 60장이 유일한 유가증권이었던 나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내가 제일 갖고 싶었던 것은 멋진 학생 단화였다. 다른 아이들은 다 가진 그것을 나는 못 가졌다. 입학 때 내게 떨어진 것은 3년 넘게 신을 수 있다는 군화였다. 무게를 줄이려고 목을 잘라낸 그 신발을 꼬빡 3년을 신었다. 졸업 무렵에는 발등 부위에 두 군데씩 구멍이 뚫려 우리 반 아이들이 “박물관으로 가져가자”고 한 유명한 신발이다. 유소년 시절과 학생시절 나를 괴롭힌 유형무형의 결핍은 대학에 가서도 풀리지 않았다. 머리가 굵어질수록 욕망은 커지는데 여건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가슴속에는 늘 욕구불만이 자꾸 쌓여갔다. 내 욕구를 눌러 꼼짝 못 하게 할, 쓰고 또 써도 넘쳐날 풍요를 찾아 헤맨 4년이었다. 그 허기는 직장생활을 시작하고도 마찬가지였다. 열심히 일하면 채워질 날이 있을 것 같았다. 밤을 낮처럼 지새우는 끝없는 일구더기를 벗어나, 세상의 주역이 될 나이가 되면 달라지지 않을까. 이런 기대에 속아 허겁지겁 달려왔다. 퇴직을 하고 인생의 종점이 보이는 곳에 당도하여서도 달라진 건 없다. 그래서 불행한가? 난 요즈음 이런 자문을 할 때가 있다. 단호히 고개를 젓는다. 누구도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영원히 욕구를 채울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나지 않았는가. 그리고, 가득 채워본들 무엇 하리! 저 세상 갈 때 무얼 가져갈 수 있겠는가. 유형무형의 결핍 속에서 모자라고 빈 데를 채워보려고 허덕이는 과정 자체가 인생이라는 것을, 불유구(不踰矩)의 언덕에 올라서야 알았다. 아 아, 이 미욱함이여!
- 2016-06-01 10:15
-
- [하태형의 한문산책] ‘한정부(閒情賦)’ 아름다운 사랑 시
- 중국의 고전 중에는 남녀 간의 애틋한 사랑을 노래한 시가 많지 않다. 남녀 간의 사랑을 드러내어 노래하는 것은 소위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라 하여 멀리한 유교의 전통이 강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다음에 소개할 대시인 도연명(陶淵明)의 아름답기 짝이 없는 사랑의 노래, ‘한정부(閒情賦)’는 매우 특이하다. 도연명은 살아생전에는 무명에 가까운 문인으로, 빈한한 삶을 산 불우한 사람이다. 그의 사후 도연명을 발굴해낸 인물이 바로 남조(南朝) 양(梁)나라의 소명태자(昭明太子) 소통(蕭統)이었다. 그가 직접 쓴 라는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나는 도연명의 글을 좋아하여 손에서 놓지 못하였고, 항상 그 덕을 떠올리며 동시대에 살지 못함을 한스러워하였다[恨不同時]...그러나 그의 작품 중 옥에 작은 티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정부’ 한 편으로,...어찌하여 그가 (이런 글을 짓기 위해) 그 붓끝을 놀려야 했던가?[搖其筆端] 애석하구나! 이는 차라리 없는 것이 좋겠다.” ‘한정부’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흔히 ‘도연명의 열 가지 소원’으로 불리는 다음 내용이 그 압권이다. “1)바라건대 그대의 옷깃이 되고 싶소...꽃다운 얼굴의 남은 향기를 품고자 하오나, 비단 옷깃을 저녁이 되어 벗어버림이 슬프고, 가을 밤 다하지 못함이 한스럽다오. 2)바라건대 그대 치마의 허리띠 되고자 하오...아름다운 가는 허리 묶고 싶으나, 서러워라 추위와 더위의 변덕스런 날씨에, 수시로 옷을 벗고 새 옷을 갈아입겠지요. 3)바라건대 머리카락에 바르는 기름이 되고 싶소...어깨에 드리운 검은 머리 빛내고자 하오만, 어여쁜 임이 자주 머리를 감으시니, 맑은 물에 씻기어 버릴 것이 서럽다오. 4)바라건대 눈썹 위에 칠하는 먹이 되고 싶소...임의 눈매를 따라 살풋살풋 움직이고자 하오. 연지와 분이 더욱 아름다워, 때로는 아름다운 화장에 지워질까 애달프다오. 5)바라건대 왕골로 만든 자리가 되려 하오...삼추의 선선한 계절에 여린 몸 쉬게 하고 싶소만, 아름다운 이불로 바뀌어, 해를 넘기고 찾게 될 것이 슬프다오. 6)원컨대 명주가 될 테니 신으로 삼아주오...고운 발에 붙어 돌아다니고 싶사오만 행동거지에 절도가 있어 쓸쓸히 침대머리에 벗어둘 것이 슬프다오. 7)원컨대 대낮에는 그대의 그림자 되고 싶소...언제나 임의 몸을 따라 여기저기 쫓아다니고 싶으나 높은 나무 그늘이 짙어서, 때때로 함께 할 수 없음이 한스럽다오. 8)원컨대 밤에는 등불(관솔불)이 되겠소...두 기둥 사이에서 옥 같은 얼굴 비추고 싶소만, 태양이 빛을 펼치면, 문득 빛은 스러지고 밝음이 묻혀버릴까 슬프다오. 9)바라건대 대나무라면 부채가 되고 싶소...부드럽게 쥐고 흔들어주면 시원한 바람을 머금고 싶으나 백로라 흰서리 내릴 때면 소매부리에서 멀리 떨어질 것이 슬프다오. 10)원컨대 내가 나무라면 오동나무가 되겠소...무릎 위에서 울리는 오동나무가 되려오. 즐거움이 극에 달하면 슬픔이 온다는데, 나를 밀어내고 연주를 그침이 슬프다오.” 문제는 도연명이라는 대시인이 이토록 애틋한 사랑을 표현한 대상이 누구였는지가 명확치 않다는 점이다.
- 2016-03-11 0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