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대학 졸업 후 지금까지 만나는 친구 모임이 있다. 남녀공학인 대학에서 몇 명 되지않는 여학생들이 학교를 다니느라 나름대로 고생을 많이 했는데 당시만 해도 동숭동 문리대 교정에는 여학생 전용 화장실도 제대로 없었다. 지금은 대학로라 불리는 학창시절 동숭동을 떠올리면 유명한 학림다방이며, 중국집 진아춘, 세느강이라고 부르던 학교앞 개울이 마치 흑백영화가 지나가는 것처럼 생생하다.
친구 모임은 문리대에서 이과 계열은 제하고 문과만 모이는데 각과에 평균 두명 정도라 영문, 불문, 국문, 심리, 사학등을 모두 다 합쳐도 스무명도 되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외국 간 친구를 빼고 지금 만나는 친구들은 열 명 정도이다. 거의가 캠퍼스 커플들이고 남편들이 능력이 있어서 그런지 출세도 하고 또 사업을 해서 사는 데는 부족함이 없는 친구들이다.
친구들은 몇 십 년을 만나도 성실한 모범생의 모습들은 변하지 않는다. 자녀 교육에도 성공해서 모두 능력 있는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60년대 당시 남학생들이 데모로 열을 올릴 때 여학생은 도서관에서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현재도 그 때 즐긴 독서는 내게 타자를 이해할 수 있는 상상력을 길러주었다. 겪어보지 못한 무언가에 대해 단순히 짐작하는 것과 독서로 기른 상상력으로 짐작하는 것은 확연히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한 친구의 아들은 현재 서울대 법학 대학원 교수로 있는데 사법시험 존폐에 관하여 사법시험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을 써서 큰 반향을 일으켰었다 그의 주장은 우리나라가 옛날부터 과거를 중심으로 사람을 등용해 왔지만 그때는 모든 제도나 교육이 발달 되어 있지 않아 그럴 수밖에 없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완전하게 발전 되어 있는데 옛날처럼 과거제도를 통하여 사람을 뽑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사법고시를 폐지하는 대신 로스쿨을 만들어서 법조인을 키우지만 로스쿨의 학비가 너무 비싸서 금수저들만 다닐 수 있다는 불평이 나오고 있다. 그래서 금수저 아닌 집단에서는 아직도 사법고시 폐지를 반대하는 운동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폐지 될 때가 온 것 같다.
과거제도는 누구나 능력이 있으면 출세할 수 있는 당시로선 선진적인 제도였지만 모든 사람을 상대로 동일한 시험을 치러 성적으로 선별한다는 아이디어는 근대 문명의 다양한 전문가를 길러내는 데 적합하지 않다. 필자는 여고 시절 법대로 진학하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송사에 휘말린 적이 있었는데 얼마나 힘들어 보였는지 내가 크면 법관이 되어서 아버지를 도와 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법대를 지원하는 여학생이 거의 없었고 아버지께서도 우선은 영문과를 들어가서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셔서 그대로 따랐었다. 지금 생각하면 좀 후회가 된다.
1998년 무렵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법조인 이태영 변호사가 치매를 앓는다는 사실을 알고 필자는 탄식했다.
‘여성들의 권익을 찾아주기 위해 평생 헌신하신 분에게 이런 병이 오다니… 누구보다 두뇌활동을 열심히 한 분도 피해갈 수 없는 질환이란 말인가….’
머리를 잘 안 쓰는 사람들이 치매에 걸리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필자는 큰 충격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치매는 쥐도 새도 모르게 다가오는 병 같다. 필자가 평택에 살았을 때 아래층 70대 할머니가 그랬다. 자녀들이 분가한 후 홀로 지내던 분이었는데 젊은 시절 한 미모 했을 것같이 고왔고 말도 자분자분 조용히 했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하고 어울린다거나 대화를 나누는 일이 거의 없었고 집 안에서 혼자 폐쇄적인 생활을 했다. 그리고 그렇게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아들이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요양원으로 모시고 갔다.
필자와 인연이 있는 서울농대 농화학과 P교수님도 치매를 피하지 못했다. 40대 후반 무렵 교수님 댁에 놀러갔을 때의 일이다. 사모님은 P교수님이 퇴직한 후 유럽 여행을 하며 찍은 사진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사진 속에서 교수님과 사모님은 다정하게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와우! 사모님 부러워요. 완전 잉꼬부부시네요!”
물색 모르는 필자가 감탄하자 사모님은 웃으면서 P교수님이 알츠하이머병이 와서 손을 꼭 붙잡고 다닌 거라면서 설명을 해주셨다.
“손을 놓으면 아무데나 막 가버리셔서 잠시라도 손을 놓을 수 없었어요. 앞날을 기약할 수 없었던 날들이라서 서둘러 유럽여행을 떠났지요. 즐거워야 할 여행이 얼마나 쓸쓸하던지….”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1970년대 필자가 농대 학과장실에 근무할 때 학생지도위원이었던 P교수님이 가끔씩 들리셨다. 방문 여는 소리만으로도 P교수님이라는 걸 단박에 알았다. 문을 유난히도 씩씩하게 열어젖히셨기 때문이다. 그토록 건강하시던 분이 치매에 걸리다니… 인생무상이 이런 것인가 했다.
고령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치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의 존엄성을 잃어버리게 한다는 점에서 최악의 질병이다. 치매는 진행 속도를 줄일 수는 있어도 완치는 되지 않는다고 한다. 병이 오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하는 수밖에 없다.
치매가 올까 걱정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필자에게는 있다. 뇌가 여러 번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18세 때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하며 심각한 생각에 빠져 걷다가 전봇대에 엄청 세게 부딪혔었다. 55세 때는 바위에 부딪혀 정신을 잃었었다. 요즘은 잠의 질이 형편없다. 꿈을 꾸다 깨어나는 일이 많아 머리와 몸이 무겁다.
이 노릇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심히 걱정스러웠는데 때마침 치매예방 교육 프로그램이 있어 강남시니어 플라자에서 치매 테스트를 받아봤다. 그 결과는? 필자도 놀라웠다. 30점 만점에 30점이 나왔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다.
‘오늘의 나는 어제 먹은 음식.’
이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아침마다 디톡스 주스 한 잔에 사과 한 알, 현미 잡곡밥에 굴 미역국이나 시금치 된장국 등을 먹으며 건강한 밥상을 차리려 노력한다. 먹거리에서 오는 리스크만이라도 최소화하려는 것이다. 모델워킹을 하고, 왈츠를 추고, 서울 둘레길 걷기를 한다. 오늘도 필자는 많은 사람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치매가 가까이 올까봐 경계하며 살고 있다.
승승장구, 탄탄대로 인생을 사는 이들이 있다. ‘천운을 타고났나?’, ‘사주팔자가 좋은가?’라며 그들의 성공을 진단해보기도 하지만, 뭐든 타고난 운만 가지고 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만의 비법으로 성공운을 거머쥘 수 있었던 이들의 유형을 살펴봤다.
◇ 운명개척형
일본 최대 소프트웨어 유통회사인 소프트뱅크의 손정의(손 마사요시) 대표는 젊은 시절 자신의 운명을 미리 점쳐놓았다. ‘20대에 이름을 날린다. 30대에 최소한 1000억엔의 군자금을 마련한다. 40대에 사업에 승부를 건다. 50대에 연 1조엔 매출의 사업을 완성한다. 60대에 다음 세대에게 사업을 물려준다.’ 손정의가 20대에 세운 50년 인생계획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스스로도 자신을 천재라 여겼다고 한다. 사업 제휴를 맺는 상황에서도 “나는 천재다”라고 말했을 정도. 일찍이 그는 자신의 잠재성향과 운을 꿰뚫었고, 그 덕분에 막힘없는 성공 가도를 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스타항공 회장을 지낸 이상직 전 국회의원은 요즘말로 흙수저 출신이지만, 자신만의 ‘텐배거’ 로드맵을 만들어 금수저 반열에 올랐다. 텐배거(Ten bagger)는 10루타라는 뜻으로 야구가 아닌 금융투자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투자자에게 10배, 1000%의 수익률을 안겨주는 대박 종목을 의미하는데, 이상직은 1998년 텐배거에 도전해 2년 만에 투자원금 1300만원으로 그의 15배에 달하는 2억원의 수익을 올렸다. 이후 그는 텐배거 법칙을 사업뿐만 아니라 인생의 기본 원리에 적용했다. ‘10루타를 쳐라’를 좌우명으로 삼았던 그는 현대증권에서 10루타 종목을 연이어 터뜨렸고, 이스타항공의 대박 신화를 창조해냈다.
◇ 대기만성형
피카소처럼 타고난 천재성 덕분에 명성을 떨친 예술가가 많다. 그러나 근대 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세잔의 경우는 달랐다.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나 법과 대학을 다녔던 그는 돌연 화가라는 꿈을 꾼다. 이후 세잔은 선천적인 재능이 아닌 고뇌와 노력의 산물로 세계적인 명작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실제 피카소는 20대 중반에 그린 작품들이 60대에 그린 작품들보다 4배가량 비싸게 팔렸는데, 세잔의 그림은 60대 중반에 그린 것들이 젊은 시절 작품들보다 최대 15배의 가격에도 팔렸다고 한다. 현재 파리 오르세미술관에 전시된 그의 최고 작품들 역시 모두 인생 말기에 그려진 것이다.
20세기 세잔이 대기만성형 예술가라면, 21세기 대기만성형 과학자를 꿈꾸는 이가 있다. 서울중앙지법원장 출신 강봉수 박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물리학에 관심이 많아 고등학교도 이과를 택했고, 서울대 원자력학과를 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권유로 서울대 법대를 지원했고, 이후 40년간 잘나가는 법조인의 길을 걸었다. 그러면서도 과학자의 꿈을 잃지 않았던 그는 퇴직 후 66세에 물리학 공부를 위해 미국 유학을 떠난다. 그 후 7년 만에 머시드 캘리포니아대 대학원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땄다. 당시 그의 나이 73세였다. 하루 15시간씩 공부에 매진한 덕분에 이제는 ‘강봉수 물리학 박사’로 불리며 활발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 장수형
무병장수를 꿈꾸는 100세 시대,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도 무탈한 인생이라 할 수 있다. 과거 조선시대 왕 중에서 가장 오래 산 왕은 83세까지 살았던 영조다. 영조의 장수비결은 규칙적인 식사습관과 소식(小食)이었다고 한다. 고기와 생선을 멀리하고 보리밥과 채소를 즐겨 먹었던 영조는 감선(減膳: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왕이 수라상의 음식 가짓수를 줄이며 근신하는 것)을 89차례나 했는데, 신하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는 감선을 넘어 단식까지 감행하며 절대권력을 유지했다고 한다. 이러한 식습관으로 영조는 장수뿐만 아니라 그에 비례하는 수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영조처럼 식습관을 잘 다스린 덕분에 장수한 역대 대통령 중에는 제4대 대통령인 윤보선이 있다. 그는 94세까지 살았는데, 평생 절주를 하며 콩·보리·팥 등이 섞인 잡곡밥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1949년 상공부장관 시절 도시락을 들고 다녔던 윤보선의 일화도 유명하다. 도시락은 부인인 공덕귀 여사가 직접 만든 샌드위치와 잡곡밥 등 검소한 식단이었다고. 이런 소박한 식습관은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계속됐고, 그의 삶을 오랫동안 건강하게 해주었다.
◇ 인(人)형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남다른 인연 덕분에 승승장구하는 일생을 살았다. 그가 남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6기)에 다니던 시절, 당시 교관으로 있던 박정희 대통령은 수학 실력이 뛰어난 박태준을 눈여겨보게 된다. 성격이나 취향이 비슷했던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를 벗어나 인간적인 정을 쌓게 됐고, 서로 다른 지역에서 근무하게 될 때도 만남을 이어간다. 이후 1963년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됐고, 같은 해 박태준은 소장 진급과 함께 군복을 벗었다. 이듬해 설날 박정희는 박태준을 청와대로 불러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관련해 박태준을 대통령 특사로 일본에 보낸다. 특사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박태준은 철강과 제철 분야에 매진했고, 강철 1000만 톤 시대를 연 주역으로 우뚝 선다. 이후 국회의원, 국무총리, 포스코 회장, 포스텍 창립자 등 수많은 직함을 얻었지만, 퇴직금 한 푼, 주식 한 주도 갖지 않았을 정도로 청렴한 철강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 별별유형
1) 독서형: 미국의 대부호 빌 게이츠, 워런 버핏, 마크 저커버그는 젊은 시절 도서관에서 읽은 책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한국의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도 자신의 성공의 8할은 독서에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 외에도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 박원순 서울시장, 윤송이 엔씨소프트 회장, 남재희 전 노동부장관 등도 잘 알려진 독서광이다.
2) 명상형: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과 코비 브라이언트 등은 그동안 여러 매체를 통해 명상의 효과를 언급했다. 포드자동차의 빌 포드 회장도 명상으로 경영위기를 극복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한국 메이저리그의 신화 박찬호 역시 현역 시절 슬럼프가 찾아올 때마다 명상을 통해 마음을 다스렸고 124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
3. 산책형: 프랑스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는 “생각의 발로는 ‘발’에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셰익스피어, 괴테, 칸트, 베토벤, 모차르트 등은 산책이 영감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2011년 여름 49일간의 백두대간 종주를 마치고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당선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등산을 통해 인재를 모으고 집권했는데, 민주산악회가 대표적인 핵심 조직이다. 김 대통령은 매주 목요일 등산을 즐겼고, 산에 올라 기도를 했다고 한다.
✽참고 도서 , , ,
]지난 이야기를 써보려고 컴퓨터 앞에 앉아 기억과 씨름을 해보니 필자가 기억하는 시간이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필자의 첫 기억을 떠올려봤더니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언니. 고모. 이모 그들이 모두 함께 있다. 초등학교 입학식 때의 담임 선생님도 기억할 수 있고 3. 4. 5. 6 학년의 선생님들도 기억 속에 있다. 그러나 2학년 때 선생님은 아무리 생각하려고 해도 머릿속에 없다. 딱히 기억되는 동무도 없다. 왜 유독 건너뛰는지 인간의 기억이 재미있다. 언젠가 기억이 자기 혼자 스스로 살아 나올 때까지 기다려 보아야지. 이것이 치매 초기증상은 설마 아니겠지?
손이 귀한 집이었으나 모두의 바람과는 달리 아들은 필자의 남동생 하나밖에 없고 딸이 다섯이나 되었다. 맏딸과 바로 밑 남동생이 있었으니 둘째 딸 필자는 아무도 모르는 나름대로 출생 서열의 서러움이 종종 있었다. 지금도 필자의 성격 일부분을 지배하고 있음을 혼자 안다.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을 경쟁력의 도구로 삼아야 한다는 이론을 믿는 성격이 필자에게 있다면 이 환경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짐작해 보기도 한다.
온종일 엄마는 시집살이에 너무 바쁘고 아버지는 정말 공평해서 저녁이면 남동생 빼놓고 언니와 필자만 양쪽 팔로 베게를 만들어 눕히고 우리와 함께 ‘아~ 목동들의 피리 소리들은 산골짝마다..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합창하였던 유년기 기억이 있다.
필자가 중학생이었는지 고등학생이었는지 오늘처럼 비가 오는 여름 어느 날 아버지가 가수 성재희의 ‘보슬비 오는 거리’ 레코드판을 사오셨다. 정작 듣는 건 한 번도 본적이 없지만 전축이라는 기계 위에 한번 잠깐 올려놓은 걸 본 적이 있다. 아버지가 그걸 사오신 것도 필자는 의아했다. 언제부터인가 아버지는 그냥 가족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런 유행가 음악이나 감성이 아버지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그때는 몰랐다. 엄마 아버지 그들은 스스로 삶의 도구가 되어서 희로애락을 떠나서 그냥 사는 것처럼 어린 필자의 눈에 비쳤다.
지금의 필자보다 훨씬 젊었던 시절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정서 한 가닥이 지금 필자의 정서 한가닥이 되어있음을 이제는 안다. 어머니, 아버지 그들은 제3의 성에 속해 있는 줄 알았지만 어른이 된 필자가 아버지를 돌이켜보면 켭켭 시집살이 속에 있던 엄마에게 아버지는 200% 따뜻한 남편이었을 것이라는 느낌이 있다. 실제로 필자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0년을 더 사시고 돌아가셨는데, 우리가 모두 주책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아버지 사후 10년 동안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 사셨던 행복한 여자였었다.
1960년대 초반 지방 도시에서 서울로 이사를 왔으니 나름 일찍 서울에 터전을 잡은 편이라 사춘기 시절 종로구에 있던 필자의 집은 취직 등의 이유로 지방에서 올라온 친척들 없이 밥상에 앉았던 날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도 돌아가시고 고모들도 시집을 다 갔지만 육 남매를 비롯한 우리 식구 수도 만만치 않았는데 늘 손님까지 있던 집을 필자는 정상인 줄 알았고 거기에 대해서 별 불만이 없었다.
전학을 와서 다녔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여학교에 입학한 필자는 함께 등교하자고 약속한 친구의 집으로 좀 일찍 갔을 때 필자는 소리 없이 놀랐다. 친구의 집은 아침을 먹고 있었는데 식구가 어머니, 아버지, 동생과 친구 이렇게 네 사람이었고 그들은 식빵과 우유를 아침으로 먹고 있었다, 더구나 집에는 식탁이 있었고(필자는 이게 최고 부러웠다) 식탁 위 전등은 형광등이었다. 필자는 당시 형광등은 정말 부잣집에만 있는 것 인줄 알고 친구네 집이 바로 말로만 듣던 부잣집인 줄 알았다. 속으로 미국은 어떤 곳인지 몰랐지만 ‘이 집은 미국 같은 집이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친구의 집이 한없이 부러웠고 필자는 엄마를 조르기 시작했다.
‘엄마, 우리 집에 사람들 좀 못 오게 해. 우리도 식탁 사고 형광등도 달아. 그리고 아침을 양식으로 먹어.’ 이런 주문을 마구 하면서 날마다 졸랐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우리 집에는 할머니가 계시고 식구가 많아서 아침을 그런 거로 먹을 수 없다고만 대답했다. 필자는 ‘그렇게 간단한 딸의 부탁을 엄마는 왜 못 들어주나’ 라고 생각하고 사춘기 심통을 마구 부렸던 기억도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지방에서 오던 친척들이 점점 수가 줄면서 집을 수리하게 되자 동생과 필자가 함께 쓰는 방에 꼭 형광등도 달아 달라고 주문했는데 아버지는 집 전체 전등을 형광등으로 교체하고 어머니는 식탁도 샀다. 또 가끔은 양식(?)으로 아침도 차려 주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대가족이라는 게 다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특별히 인성교육을 강조해서 받은 기억은 없지만 여러 연령층이 함께하는 가족 집단에서 권리와 의무의 한계 같은 게를 자연스럽게 습득한 것 같기도 했다. 많은 사람에게 당연한 일로 여기며 따뜻한 밥을 해 먹였던 어머니나 대식구를 거느렸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들 삶 자체가 존경의 대상이다.
집에는 빈약한 크기의 냉장고가 있긴 있었으나 지금 생각하면 대식구의 냉장고의 역할을 하기나 했을까 싶다. 더운 여름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참외와 토마토르 먹었는데 그들은 항상 그늘진 곳 빨간 고무 대야 수돗물에 동동 떠 있었다. 승용차나 대중교통 노선이 자유로웠던 시절도 아니고 배달이라는 것도 없었을 텐데 필자가 먹었던 그 많은 과일은 누구의 손에 들려서 집에까지 왔는지.
또 있다. 여름 방학이면 식구 단체로 만리포해수욕장에 가곤 했다. 필자는 해바라기 비슷한 정체 모를 꽃이 마구 달린 비닐 수영 모자까지 갖추고 갔다. 딸이 필자 하나도 아니었을 텐데 식구 전체가 해수욕을 가기 위해 혼자 걸어서 동대문시장을 왔다 갔다 했을 어머니의 모습이 그려진다. 만리포 숙소로 가기 위해 식구들은 지난한 투쟁을 감수해야 했다. 우선 새벽같이 단체로 시외버스에 올라 인천까지 간 뒤 인천에서 만리포로 가는 여객선을 4시간 이상을 타야 했다. 이뿐 아니다. 여객선이 바다에서 육지가 가까워져 올 때쯤 다시 나룻배를 갈아타고 해변에 내려서 직사광선 아래 모래밭을 한 시간 가까이 걸어야 그놈의 숙소를 만날 수 있다. 와중에 누군가 심지어 석유풍로라는 것까지 들고 갔던 것 같다. 도착하는 즉시 엄마는 석유풍로에 불을 피워 닭백숙 같은 걸 마구 끓이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피서였는지, 피난이었는지 구분 안 되는 행렬이었지만 정말 오랫동안 이 풍경을 기억할 것 같다.
그리고 할머니에 대한 기억. 할아버지 돌아가고 지금의 필자 나이쯤에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 와서 서울이 낯설고 친구도 없는 할머니를 위해서 아버지는 야사로 된 ‘야담전집’을 사드렸다. 할머니가 요새 살아있었으면 아마 박사가 되시지 않았을까? 이런 전집류는 표지가 거의 딱딱한 하드보드로 되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할머니는 들기도 쉽지 않은 이런 책을 밤낮없이 읽었다. 덕분에 필자는 할머니로부터 영창대군과 단종,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끝없이 들어야 했다. 처음에는 어린 영창과 단종의 이야기가 너무 슬퍼서 어린 필자는 들을 때마다 마음이 눈물 쏟았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는 한 단계 더욱 수준을 높여 삼국지까지 읽어서 유비, 장비, 관우, 조자룡과 제갈공명의 이야기를 또한 외울 때까지 들어야 했다. 어떻게 하면 집안에서 최대로 할머니와 멀리 있을 수 있을까가 필자의 최대 고민이었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할머니에게 정말 많이 고마워하고 오래 기억해야 할 것 같다. 할머니가 더 오래 사셨다면 그리스 신화도 읽으시지 않았을까? 참고로 필자의 할머니는 1900년 이전에 태어나신 무학의 19세기이었고 독학으로 언문을 깨우치셨다고 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옛날 대구 삼덕동 재판소에 근무하셨던 당시의 법조인이라고 하셨다.
종로구 정든 집에서 15년 정도를 살다가 필자의 집은 강남이 시작될 즘에 아버지가 논현동에 주택을 지으시고 식구를 모두 데리고 이사를 하셨다. 말이 논현동이지 1974년도 필자의 집이 이사할 즈음 대중교통은 남산 순환도로를 돌고 돌아 제3한강교 (현 한남대교)를 건너서 신사동으로 진입하는 좌석버스와 서초동 칠성사이다 앞으로 오는 말죽거리행 시내버스가 전부였다. 사대문 안이 서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양재동은 참으로 머나먼 곳이었다. 버스가 한남대교를 지나 신사동으로 들어서면 아무 건물도, 가로등도, 네온사인도 없어서 해가 지면 사방이 어두워서 잘못 내리면 집 찾아가기도 어려웠다. 특히 방심해서 내릴 정류장을 놓쳐 말죽거리까지 가서 남동생이 말죽거리까지 데리러 나온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그 집에서 얼마 살지 않고 결혼을 해서 그 동네를 탈출하여 미국에 갔었지만 그때 그 동네 풍경은 지금의 강남과 연결이 되지 않는다. 몇 년 만에 그리운 고향 집(?)에 돌아왔을 때 밤하늘 번쩍였던 신사동 후지필름 네온사인 불빛을 보고 ‘여기가 라스베이거스인가’ 라고 생각하고 혼자 웃었다.
꿈에 부풀어 이사하였던 그 당시 한 벌판에 서 있던 양옥집이라는 곳은 때맞춰 시작된 유류파동으로 방 하나에 보일러를 켜고 모든 식구가 모여 있어야 하고 화장실은 샤워는커녕 세수하기에도 추웠다. 유류파동이 아니더라도 하루가 멀다고 고장 나는 당시의 보일러는 집과 마음을 순식간에 얼려버렸다. 이 집은 필자 상상 속에 존재했던 양옥집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 집은 종로에 있었던 개조한 한옥에서 어머니, 아버지가 가꾸어 왔던 따뜻한 평화를 깨트릴 수도 있는 집이었다.
다만 1대뿐인 TV와 전화기 등의 문화기기가 집결되어 있었던 안방은 재미있었다. 식구 모두의 모든 문화생활이 한곳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고 모든 전화 대화는 자동으로 누군가에게 검열을 받아야 하는 씨스템이였으며 그 검열에 대해서 아무 불만이 없었고 가질수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그 써늘한 이층집에서도 재미난 에피소드도 있다. 지금은 미국에 사는 60세가 갓 된 재미있는 여동생의 이야기. 당시 최헌 가수의 ‘당신은 몰라’라는 노래가 있었다. 가라오케 노래방도 없었던 시절에 동생은 모나미 볼펜을 마이크 삼아 이 층 계단을 걸어 내려오면서 자기 흥에 이 노래를 매일 불렀다. 처음에는 ‘도대체 왜 저래?’ 하다가 나중에는 아무도 관심 두지 않았지만 그래도 동생은 썰렁했던 집에서 썰렁하기만 했던 필자보다는 1층과 2층을 연결하며 가족의 몫을 해 줬다.
이렇게 함께 살아왔던 필자의 형제들은 지금 다 제각기 바쁘게 나이 들어가고 있다. 같은 환경에서 육 남매가 살아왔는데 지금은 각자의 환경도 다르고 생각도 달라서 타인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가장 안타까운 건 바로 밑 남동생은 간경화로 투병 중이어서 일 년에 두세 번씩 입원하면서 지내고 있다는 점이다. 아들이 중요했던 집에서 그래도 아들만 둘을 두어서 엄마 아버지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어 자기 몫은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100세 시대’를 동생이 누렸으면 좋겠다. 필자는 필자의 자식들이 더 독립체가 될 때쯤에 기회가 되면 그들과의 생활로 이런 에피소드를 엮어보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마치겠다
# 중견기업을 운영하는 K씨. 그녀에게는 세 딸이 있다. 첫째는 의사, 둘째는 법조인, 셋째는 교수를 꿈꾸는 재원이었다. 첫째 딸은 꿈을 이뤄 동료와 결혼했고, 둘째와 셋째 딸은 사법시험 준비와 박사과정이어서 결혼에 급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K씨는 김희경 팀장이 추천하는 남성을 이런저런 이유로 거절했다.
몇 년 후, K씨의 두 딸은 각각 변호사와 교수가 돼 자리를 잡았고, 이에 어울릴 만한 전문직 남성을 소개 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문제는 두 딸이 모두 35세가 넘은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전문직은 고사하고 추천 가능한 남성은 한 명도 없었다. 동갑내기 남성은 있지만 30대 중반 남성이 동갑을 만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두 딸은 결혼 적령기를 놓친 탓에 아직도 결혼을 못하고 있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목표를 달성했지만 결혼이라는 현실 앞에 외면당해야 했다.
김희경 팀장은 결혼 적령기가 자녀 결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강조한다. 신한PWM센터 고객 자녀의 커플매칭을 담당하고 있는 김 팀장에게 결혼 적령기의 중요성과 최신 트렌드에 대해 물어봤다.
1. 결혼 적령기를 놓치면 결혼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희 세대는 대학 졸업하고 취직하면 결혼하는 걸 당연하게 여겼는데, 요즘 젊은이들은 그 시기를 자신이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라고 해요. 그런데 나이가 들어 결혼하겠다는 마음을 먹으면 맘에 드는 사람을 찾기가 참 어려워요. 만남을 주선하다 보면 여성은 경제력과 직업 좋은 남성을, 남성은 안정된 직장에 외모가 예쁜 여성을 가장 선호하죠. 문제는 이런 사람들은 금세 품절남녀가 된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려면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많은 시기인 남성은 30세, 여성은 27세부터 진지한 마음으로 만남을 시작해서 남성은 33세, 여성은 30세 전후에 결혼하는 것이 제일 좋아요. 적령기를 넘기면 남은 사람 중에서 찾아야 하니까 맘에 드는 상대를 만날 확률도 낮아지고, 만남의 기회도 줄어드니 결혼도 어려워질 수밖에 없지요.
2. 커플매칭을 진행하면서, 가장 고심하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신청서가 접수되면 고객을 만나 대면상담을 합니다. 이후 최적의 배우자를 찾아 만남을 주선해 드리는데, 상담 후 미팅 진행이 안 되면 저도 굉장히 부담스러워요. 잘해 드리고 싶지만 원하는 상대를 찾을 수 없는 경우도 있거든요.
부유층에서 자녀 유학을 많이 보내는데요, 방학만 되면 좋은 사람 소개해 달라는 요청이 많이 들어옵니다. 그런데 유학생 남성은 미팅이 잘되는데, 여성은 미팅이 잘 안 돼요. 괜찮은 남성은 서울에서도 소개팅 기회가 많은데 한 달 후에 미국에 갈 여성을 만날 이유가 없는 거지요.
또 예체능 전공 후 프리랜서로 일하거나, 순수작품 활동만 하는 여성은 남성들이 많이 부담스러워해요. 요즘 남성들은 본인과 비슷한 직장에 다니는 여성을 선호하는데, 서울에 있는 중상위권 대학에서 일반학과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근무하는 상냥하고 세련된 여성이 인기가 제일 많아요.
3. 최근 골드미스가 늘고 있는 추세라고 들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골드미스’라는 단어는 있는데, ‘골드미스터’라는 단어는 아직 들어본 적이 없을 거예요. 여성은 조건이 좋아도 결혼하기 어렵지만 남성은 그 반대니까요.
예로부터 사위는 딸보다 좀 더 위에서, 며느리는 아들보다 조금 아래에서 데려와야 편하다는 말이 있듯이, 대부분의 여성들은 배우자감으로 자신보다 더 좋은 조건의 남성을 찾습니다. 그래서 여성은 조건이 좋을수록 만날 수 있는 상대가 남성에 비해 적습니다. 만남의 기회가 적어지니 자연적으로 결혼도 더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죠.
골드미스가 많은 전문직 중에 여성은 전문직 남성만 희망하는 데 반해, 전문직 남성 중 전문직 여성을 선호하는 경우는 30%도 안 됩니다. 전문직 여성을 만나겠다는 남성이 별로 없는 거죠. 대학에도 골드미스가 많은데요, 여성이 박사학위 받고 자리 잡으면 금방 33세가 되는데, 조건 좋은 남성 중에 이 연령대를 만나겠다는 남성이 별로 없어요. 여성의 학력과 사회적 지위는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 변화에 맞춰 남녀가 배우자에 대한 기준이 바뀌지 않는다면 골드미스는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4. 커플매칭을 진행하면서 예전과 지금 달라진 점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강남 거주 고객과 상담을 하면, 괜찮은 여자는 많은데 괜찮은 남자는 없다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사위 삼고 싶을 정도의 괜찮은 남성이 별로 없다는 의미겠지요. 그래서 딸이 혼기를 놓치기 전에 빨리 결혼시키려는 가정이 늘고 있어요. 이전에는 30세 전후 여성들이 많이 신청했는데 2~3년 전부터 신청 여성의 연령대가 많이 낮아졌어요. 대학을 막 졸업한 24세 딸의 커플매칭을 의뢰한 고객도 있을 정도니까요. 결혼 적령기가 늦어지는 추세라지만, 딸을 둔 부유층 집안일수록 자녀 결혼을 서두르는 편입니다.
5. 결혼 적령기를 앞둔 자녀를 둔 부모님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나이가 어리면 만남의 기회도 많습니다. 그런데 더 좋은 기회를 잡으려고 욕심을 부리다보면 2~3년 지나는 건 금방이고, 어느새 적령기를 넘기게 되지요. 그러다 보면 적령기를 넘기게 되지요. 배우자의 조건으로 10가지 중 3가지만 맞으면 된다고 하면서 대부분 6~7가지가 맞아야 선택을 하는데, 이것이 바로 욕심입니다. 자녀의 배우자 조건으로 중요한 10가지를 작성해 보고, 그중 가장 중요한 3가지가 무엇인지 우선순위를 정해보세요. 그리고 그 순위에 맞으면 나머지는 조금 부족해도 받아들여 보세요. 조건을 너무 앞세우다 보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칠 수가 있습니다.(집안 경제력, 가족구성원, 父 본적, 종교, 궁합, 본인 성품, 학력, 직업, 본인 경제력, 키, 나이, 외모)
◇ 커플매칭 서비스 진행절차
1. 신한PWM센터 거래(수신 5억 원 이상 가능)
2. 전담 PB팀장에게 커플매칭 신청서 제출 (자녀 동의)
3. PB팀장은 본점 커플매칭 팀장에게 신청서 송부
4. 커플매칭 팀장은 고객과 통화하여 상담 날짜 예약
5. 대면상담 후 일대일 미팅 진행
6. 신청서는 2년간 보관 후 파기
※ 성혼커플 : 33쌍(2015년 9월 1일 기준)
도움말 김희경 팀장(신한은행 WM사업부 커플 매칭 담당)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을 걷다 보면 작고 아담한 사케집 쿠노요를 발견하게 된다. 안으로 들어가면 빼곡하게 자리한 다양한 미니어처들과 사케 병들이 밀도 높은 풍취와 따스함을 느끼게 만든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인 먹을 식(食), 마실 음(飮), 취할 취(醉)의 일본어를 한 글자씩 따서 지었다는 쿠노요는 아는 사람은 이미 아는 신사동의 명소. 쿠노요를 8년째 운영하고 있는 박호준(朴浩?) 대표는 얼굴을 잘 기억 못하는 사람이라도 ‘어디서 봤더라?’ 갸우뚱하게 만들 것이다. 맞다. 그는 SK텔레콤, 한국투자신탁, 씨티은행, 일동제약 등등 다양한 TV 광고에 등장했던 CF 모델이기도 하니까. 중년들의 문화 공간 아지트를 운영하고 있는 박호준의 목소리로 들어보는 신중년 스타일과 문화 이야기.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기자 teinny@etoday.co.kr
박호준 쿠노요 대표는 과거 플로랄프로렌, 빈폴, 까르뜨블랑슈 등에서의 MD, 기획자, 의상 디자이너 등등 트레디셔널 캐주얼 디자인의 최고전문가였다.
“마지막 직장은 쌍방울에서 란제리 디자인 실장을 맡았었습니다. 일반 남자들은 접하기 어려운 영역이죠. 제가 사실 언더웨어와 란제리의 양쪽을 다 맡은 란제리 디자인 실장 1호예요. 그때 주변 남자 친구들이 나를 너무 부러워하는 거야.”
그러나 그는 그렇게도 친구들이 부러워하던 자리를 2007년에 내놓는다. 이후 3개월만에 신사동에 쿠노요의 문을 열었다.
술을 모르는 사람과의 대화에는 한계가 있다
“프랑스에서 란제리 쇼를 보고 돌아오면서 내 나이를 생각해봤어요. 이제 곧 5학년(50대), 직장 생활 하느라 내 인생을 더 지체할 시간이 없겠다 싶었죠.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니 사케가 떠올랐어요. 플로랄프로렌 일본 지사에 있을 때 사케를 접하고 지구상의 술 중에서 사케가 가장 좋아진 거죠. 그런데 사케만 먹고 다니니 비용이 너무 많이 나오는 거야. 차라리 차리는 게 돈이 덜 들겠다 싶었어요(웃음). 사케집은 아기자기하고 감춰진 듯한 맛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그런 가게가 없었죠. 그래서 목수를 데리고 직접 디자인하여 열게 됐어요.”
박 대표는 ‘술은 여자보다 좋다’는 모토를 갖고 있었다. 술을 모르는 사람과는 철학적인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게 박 대표의 신념. 그래서 나이가 들면 자신이 먹는 게 뭔지 모르고 먹지 말아야 하며 안주를 줄이더라도 술은 좋은 걸로 먹으라고 조언했다.
박 대표는 사케 전문가가 된 사람으로 사케에 관련해서는 정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이야기를 하면서 좋은 시간을 같이 보내니 단순한 술 한 잔 이상의 낭만과 여유가 느껴졌다.
바삭한 보리새우 안주에 청명한 사케 한 잔 생각날 때 쿠노요를 방문하면 일본통인 박 대표로부터 유쾌한 사케이야기와 일본 음식, 문화, 패션에 대한 풍성한 수다를 들을 수 있다. 법조인들, 방송인, 영화 감독들의 히든 스토리도 덤으로 듣는 기회도 생긴다고.
문화로서의 습관이 없기에 놀 줄 모를 수밖에 없는 세대
“베이비붐 세대는 앞뒤 세대에 깔려서 문화를 모르고 살았던 세대예요. 소위 말하는 산업역군으로서, 30여 년을 죽도록 일만 하면서 가족과 나라의 발전을 위해 산 것밖에 없거든요. 이제야 한숨 돌리고 돌아볼 수 있는 상황이 됐는데, 지금에서야 문화를 향유하자니 문화가 너무 앞서 간 상태예요.”
박 대표가 처음으로 직장에 입사했던 게 1982년 11월 22일. 그때만 해도 핸드폰을 들고 다닐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상이 너무 달라졌기에, 정서적인 것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것도 누리기가 쉽지 않은 이유다.
“빈부 차, 사회적 여건 등등도 문화를 즐기지 못하는 구분을 만들고 있습니다. 고교 동창회를 가보면 확실히 선이 그어져 있어요. 여유 있게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사람과 자기 위치를 보여주기 싫어서 나타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인생을 정말 열심히 일했던 친구들이겠죠. 그런 양극화를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사람들이 문화를 즐기지 못하는 한국의 어떤 저변은 사회의 다양한 층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문화를 즐기지 못하면 그 문화가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박 대표 또한 자신이 좋아서 시작한 사케집이지만 운영하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털어놨다.
“저는 백 년 된 가게를 해보고 싶은 게 꿈이었어요. 그래서 예전에는 ‘한국은 왜그럴까, 왜 외국처럼 백 년 넘은 가게가 없나’ 하는 생각도 했었죠. 그런데 이젠 이해합니다. 장사가 좀 잘 된다고 하면 주인들이 가만 놔두지를 않아요. 무슨 일이 있으면 나가라, 월세 올린다, 이러니 백 년 된 가게가 있을 수가 있나요.”(웃음)
“옷 잘 입을 권리 있어요”
‘CF스타’이자 모델로서의 그는 특히 일본과 비교하여 국내 모델 문화에서 교육적인 면이 너무 허약하다고 비판했다.
“지금 동양권에서 가장 돈을 많이 받는 모델은 일본 모델입니다. 일본 간지(패션 센스를 의미하는 비속어)가 확실히 좋아요. 간지를 내기 위해 중요한 건 교육적인 뒷받침입니다. 우리나라 모델들은 착장, 코디네이션 자체에 대한 흐름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에요. 대기업들조차도 교육에 대한 기본 매뉴얼이 없는 건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일본 모델들은 첫 직장에서 신입사원 교육(On The Job Training ) 받을 때부터 수염 다듬는 법까지 가르칩니다.”
자연스럽게 모델로서의 박 대표에게 같은 세대의 남자들이 갖춰야 할 패션 센스를 묻고 싶어졌다. 배도 나오고 자신의 체형에 대해 콤플렉스를 느낄 나이들에게 박 대표는 ‘우선 배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국 남자들은 스스로 포기하는 게 너무 많아요. 교육적 접근이 필요해요. 예를 들어 원래 투 버튼 정장은 아래 버튼을 채우는 게 아니에요. 쓰리 버튼일 때는 가운데 걸 채우고 하나 더 채우게 된다면 위 버튼을 채우는 게 옷의 룰이에요. 그런데 우리나라 TV에서는 모두 버튼을 다 채우고 나오죠. 그런 것들을 지적하지 않는 것 자체가 작은 거지만 아직 문화적 애티튜드가 안 되는 거예요. 한국 남자들은 교육이 안 되어 있다뿐이지 자질이 있습니다.”
모르거나 부족하면 우선 배워야 한다
박 대표는 패션의 포커스를 어느쪽에 둘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밝혔다.
“모든 아웃도어의 기본은 재킷입니다. 라펠이 붙어 있는 재킷이 착장의 기본이 되어줘야 해요. 재킷이 잘 되면 밑의 코디를 정장 바지로 하든 진으로 하든 소화가 됩니다. 화이트 칼라들은 셔츠와 타이를 매일 바꿔 입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어제를 지우고 오늘 새로 출근한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데님은 수트 느낌 나는 데님과 캐주얼한 데님이 있는데 가능한 한 두 가지를 구분해서 갖고 있는 게 좋아요.”
박 대표는 패션의 센스를 충족하는 조건으로 기본적인 액세서리를 강조했다. 박 대표 자신은 붉은색을 자신의 마스코트색으로 삼기에, 빨간색 양말을 40년 동안 신고 있는 중이다.
“옷의 멘토를 정하세요. 예를 들어 조지 클루니로 정하면 조지 클루니 입는 형태를 따라가면 됩니다. 멘토가 멋있게 입는 사람이면 자신도 멋있게 입을 수밖에 없어요. 옷 입는 걸 포기하지 말고 항상 관심을 가지는 게 좋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공간을 필요로 한다. 어쩌면 그건 동물 본연이 가지고 있는 영역에 대한 욕구에서 출발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차 한 잔을 마주하며 예술과 문화 감성을 즐기는 그들만의 공간인 ‘다락찻집’은 공간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만한 곳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앤틱 가구, 시, 노래, 춤, 그림이 있는 다락찻집은 아는 사람만 가는 은밀한 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은 아지트이다. 한 번만 들러도 열성 마니아들을 불러 모으는 다락찻집의 특별한 무언가를 확인해 본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bravo-mylife.co.kr 사진 이형용 MeBranding 이사
예술과 감성을 사랑하는 럭셔리 중년들의 시크릿 아지트, ‘다락찻집’은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에 위치해 있다. 청계산 옛골을 지나 있는 이 곳은 간판도 명확하지 않아 찾기가 어려운숨 겨진 장소다.
고급기생’ 의 격 있는 스킨십으로 예술과 감성이 무르익다
다락찻집의 마담 나무(Namu)가 직접 만든 문패가 걸린 문을 열고 들어 간 다락찻집 안에선 자연스럽게 예술적 아우리가 뿜어져 나왔다.
엔틱 가구와 피아노, 아기자기한 소품과 인테리어로 이뤄진 구성에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배치된 테이블, 시중에서 쉽게 구하지 못하는 유럽의 명품 찻잔들, 작은 그림들이 눈으로 보는 즐거움과 함께 시끌벅적한 도심에서 느낄 수 없는 편안함을 준다. 전직 앤틱 딜러기도 했던 마담이 직접 고른 앤틱 가구들은 즉석에서 판매되기도 한다고.
다락찻집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화제와 격이 있는 소통은 그동안 중년들이 그리워했던 부분을 건드려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파리의 살롱 문화에서처럼 문화를 즐기고 춤과 노래, 문학을 얘기하며 저마다 갖고 있는 색깔 있는 인생이야기에 흠뻑 취하는 분위기다.
매일 온다는 한 단골 고객은 “3040세대가 와도 세대차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진정한 소통과 공감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 나만의 시크릿 장소로 아끼고 있는 곳”이라 말했다.
자신의 재능을 기부하며 함께 단골 고객이 된 이들은 1달에 1번 정도로 일요일에 파티를 연다. 그날이 되면 멋지게 차려입고 다락찻집에 와 춤과 음악, 문학, 그림 등 자신들의 문화를 공감하는 시간을 갖는다. 우아한 예절과 세련된 취미들을 함께 발산하며 저마다의 매너, 감성, 지혜를 공유하는 것이다. TEA ART 퍼포먼스를 시작으로 불현듯 누군가가 가곡에 팝을 부르면 누군가는 왈츠&탱고를 추고 누군가는 거기에 무용을 얹는다. 그리고 멤버들은 박수 치며 노래와 춤 솜씨를 감상한다.
철학이 묻어나는 대화와 서로에 대한 이해가 있는 한국적 ‘살롱’
다락찻집 마니아들의 구성원 면면은 화려하다.
시를 쓰는 60대 기업 회장, 탱고와 트위스트를 추는 70대 패션 디자이너, 모델 워킹을 가르치
고 본인 소장품을 무료 전시하는 갤러리 관장, 차 문화 보급을 위해 앞장서는 티 소믈리에&티 파티 플래너인 다도문화원 교수, 에어돔 친환경 농장을 운영하는 식물학 박사, 시계 박물관을 경영중인 치과 원장, 중년들의 다운에이징에 힘을 쏟는 성형외과 의사, 화장품회사 CEO, 감자와 옥수수를 무제한으로 공수해 오는 강원도 슈퍼리치 등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와 품격은 어디에서 볼수 없는 휴먼 앤틱 자체였다.
힐링을 하러 찾아 온 예술가들과 법조인, 의학인, 기업인, 대학교수 등 다양한 고객이 자연스
럽게 한데 어울리는 자리인 것이다.
성형외과 의사 부인인 한 단골은 “철학이 묻어나는 대화를 하며 문화를 즐길 줄 아는 여기 멤버들과 예술적인 감성을 나누면 나를 찾는 여정 같은 기분이 든다. 마치 파리의 귀부인이 된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고 웃었다. 또 갤러리를 운영하는 한 단골 귀부인은 “비싼 음식에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를 해놓고 부자들만 간다고 해서 그곳이 럭셔리한 장소는 아니다. 중년이 되면 편안하고 나만이 즐길 수 있는 곳을 찾게 된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취향이 거의 유사하여 서로 통하는 그것(?)이 많고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정서를 느끼면서 성장할 수 있다. 이곳이 진정 상류층이 즐기는 아지트다”라고 말했다.
다락찻집의 가족을 만드는 ‘나무 마담’의 한국적 예술 사교가 무게중심
다락찻집은 여럿이 함께 어울리는 곳이라 이런 분위기가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당연히 처음에는 서먹서먹하다. 그러다 두 번째 방문이 이뤄지고 세 번째, 어느덧 익숙한 단골이 되고 하나가 되어 한 가족이 되어간다. 그 무게 중심에는 주인장인 나무 마담의 역할이 크다. 새로운 손님도 함께 어우러지도록 음식과 음악, 그리고 낭만과 예절을 꽃피우는 살롱 문화를 전파하는 나무 마담만의 리더십이 여기저기 돋보인다.
그녀에게선 한국적 예술 사교를 느낄 수 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인생이 살찌워지는 느낌이었다. 라디오 PD인 나무 마담의 부군이 소장하고 있는 막대한 카테고리의 음악 CD를 효과적으로 틀어주는 게 소통의 방법 중 하나였다.
한국적 살롱문화가 깃든 ‘다락찻집’의 멋과 감성
“비 오는 날에 맞는 멋진 음악을 선사해주면 고객들은 감성이 통했다고 좋아하십니다. 음악부터 대화의 첫 출발지가 되면서 유유상종 모든 예술과 문화를 공유하는 마당이 되는 것 같아요.”
다락찻집은 술은 팔지 않고 차를 판다. 찻집이라는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는 것 외에도, 굳이 술이 필요 없이 예술만으로도 충분히 취할 수 있는 공간이어서일까.
“차와 예술을 파는 직업이라고 생각하니까 옛날 기생과 다름없습디다. 하지만 좀 더 세련되고, 술을 팔지 않는 서비스를 하기에 ‘고급 기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단골들이 그리 불러주니 나쁘진 않아요.”
나무 마담은 평창에 ‘아무아(a moi)’라는 자작나무 숲 펜션을 오픈할 예정이다.
자유를 즐기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자신을 찾는 시간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들만 멤버로 만들어 진행할 생각이라고 한다.
다락찻집이 중년들의 사랑방을 토대로 새로운삶과 지혜를 창출하는 예술문화공간의 롤모델로 자리 잡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