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 나타났다가 아침이면 사라지는 도깨비처럼, 비밀스러운 거래가 일어나던 도떼기시장을 이른바 ‘도깨비시장’이라 부르곤 했다. 이처럼 특정한 날과 시간이 되면 열리는 장이 있다. 바로 ‘서울밤도깨비야시장’이다. 청계천과 한강공원 등 물가 인근에서 열려 밤공기가 선선한 6월이면 산책 삼아 거닐기 제격이다.
서울밤도깨비야시장(이하 야시장)은 서울시에서 출범해 올해로 3회째를 맞이하는 행사다. 3월부터 10월까지 금·토요일(청계천은 토·일요일) 저녁마다 여의도·반포 한강공원과 청계천, 동대문디자인프라자(DDP)에서 열린다. 청년 상인들이 운영하는 각양각색 푸드트럭과 핸드메이드 숍, 다채로운 공연 무대 등을 만날 수 있다.
‘월드나이트마켓’이라 부르는 여의도 야시장은 한강의 유람선과 마포대교, 쌍둥이빌딩 등에서 비추는 조명이 별처럼 반짝이는 야경을 자랑한다. 잔잔한 강 물결과 어울리는 버스킹(길거리 연주) 공연과 더불어 아시아·유럽·남미의 전통 공연까지 다양하게 펼쳐진다. 한강공원의 너른 잔디밭에는 텐트와 돗자리를 펴고 야시장을 즐기는 이들로 가득하다. 인근 자전거도로와 산책로를 다니다가 반짝이는 야시장의 불빛을 보고 발걸음하기도 한다. 한여름에는 열대야에 더위를 식히기 위해 찾는 방문객이 주를 이룬다. 돗자리만 챙겨간다면 도시락을 싸가지 않고도 여름밤 가족 나들이를 즐길 수 있다.
동대문디자인프라자 ‘청춘런웨이마켓’에서는 신나는 DJ공연과 함께 패션쇼가 열린다. 다른 야시장보다 젊은 층의 비율이 높아 신선하고 활력이 넘치는 분위기다. 패션의 거리인 만큼 신진 디자이너들의 패션쇼와 더불어 개성 넘치는 아이디어 상품과 디자인 소품들을 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패션 트렌드와 젊은 세대 문화를 느껴보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한다.
도심의 야경과 분수, 빛과 음악이 흐르는 반포 야시장 ‘낭만달빛마켓’에서는 로맨틱한 재즈, 팝페라, 어쿠스틱 음악 공연이 열린다. 해질 무렵 찾아가면, 붉게 물든 석양 아래 무지갯빛 물줄기가 쏟아지는 낭만적인 광경을 볼 수 있다. 인근 반포대교와 한남대교 등 도심의 야경을 배경으로 이색적인 음식과 시원한 맥주를 곁들이는 이가 많다.
청계천을 따라 펼쳐지는 ‘타임슬립마켓’은 사랑의 자물쇠와 소원의 나무, 도깨비 퍼레이드 등 다양한 이벤트를 운영한다. 평소에는 광통교 일대에서 열리지만, 시즌별로 특정한 날에는 청계광장에서도 야시장을 만날 수 있다(여름 시즌 8월 18~20일). 도심 속 시민들의 쉼터로 자리 잡은 청계천의 생동감 넘치는 모습이 색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각 지역 야시장 종합 안내소 겸 상황실에는 의료지원 본부가 마련돼 있어 응급상황 시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푸드트럭, 점포 정보 및 공연 안내는 서울밤도깨비야시장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하다.
“연기는 내게 산소이자 숨구멍 같은 의미예요. 배우가 아닌 나를 생각할 수가 없어요. 배우인 게 정말 좋습니다. 가능만 하다면 다음 생에 태어나도 다시 배우를 하고 싶습니다.” 췌장암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는데도 연기에 방해가 된다며 진통제도 거부한 채 드라마 촬영을 마친 뒤 숨을 거둔 연기자 김영애의 말이다. 그녀는 KBS2 주말극 50회 촬영을 끝낸 지 얼마 안 된 4월 9일 66년간 치열하게 수놓았던 지상의 무대를 떠났다. 동시에 46년간의 연기자 삶도 마감했다. 에 함께 출연했던 차인표가 “김영애 선생님은 촬영을 시작할 때 분장실에서 50회 끝날 때까지 살아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어요. 목숨 걸고 연기했습니다. 직업을 떠나 사회인의 한 사람으로서 맡은 바 책임을 끝까지 다하신 것에 고개가 숙여집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신이 존재한다면 그분이 자신을 연기자의 길로 인도했을 것이라고 말했던 김영애는 스무 살에 연기를 시작해 에서부터 , , , , , , 그리고 까지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정교한 연기력과 빼어난 캐릭터 창출력으로 시청자와 관객에게 진정성과 감동을 선사했다. 지난 2012년 사극 에 출연할 당시 췌장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수술한 뒤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 , 등에 출연해 김영애의 대체 불가 연기를 선보이며 관객과 시청자에게 큰 울림을 줬다. 김영애는 몸이 아파 소리 지르는 연기가 제대로 되지 않아 허리에 끈을 조여 매고 촬영에 임했다. 그리고 죽더라도 연기하며 죽을 것이라는 평소의 다짐을 실천으로 옮겼다. “연기할 때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낀다. 연기는 내 삶의 원동력이다. 그래서 항암치료를 받으며 생명을 연장하기보다 연기하다 죽는 것이 더 행복한 일이다.”
김영애가 생전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또 한 명의 중견 연기자가 폐암의 고통 속에서도 연기 열정을 불사르다 생의 마지막을 맞이했다. 2월 19일 79세를 일기로 숨을 거둔 김지영이다. 그녀는 1960년 영화 로 데뷔한 뒤 수많은 연극, 영화, 드라마에 출연하며 뛰어난 조연 연기를 펼쳤다. 죽기 직전까지 드라마 , 등에 출연했고 병세가 악화한 상황에서도 차기작을 준비했을 정도로 연기 열정이 남달랐다. 김지영은 57년 동안 무대에서, 스크린에서 그리고 TV 화면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는 주연은 단 한 번도 하지 못했다. 비록 식모, 주모, 첩 등 시청자나 관객의 눈길을 끌 만한 멋진 배역은 아니었지만, 김지영만이 소화해낼 수 있는 캐릭터로 승화해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특히 그녀는 시대극, 사극, 현대극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 ‘조연 연기의 지존’으로 평가받았고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함경도, 강원도 등 지역 사투리를 완벽하게 구사해 ‘사투리 대사의 달인’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김지영은 생전의 인터뷰에서 “나는 연기가 너무 좋아. 나에게 다가온 고통과 불행도 연기할 때는 다 잊을 수 있어. 김지영 인생에 연기를 빼놓으면 아무것도 없지”라고 말했다. “사망하기 두 달 전 병세가 악화해 호스피스 병원으로 거처를 옮겼지만 새로운 작품을 해야 한다며 운동을 하는 등 연기 의지를 드러내셨다. 5월에 새로운 작품을 할 예정이었다. 새 작품 준비를 하다 숨을 거두셨다.” 김지영 가족들의 전언이다.
“어머니 여운계는 사람들에게 끝까지 연기하는 사람으로 기억됐으면 좋겠다. 어머니는 ‘나는 죽을 각오로 무대 위에서 연기하고 죽는 그 순간까지도 죽음이라는 연기를 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배우 여운계를 기억해줘 감사하다. 배우 여운계를 사랑해줘 감사하다.” 2009년 5월 22일 폐암으로 숨을 거둔 연기자 여운계의 딸, 차가현씨가 한 말이다. 암세포가 온몸을 덮는 순간에도 연기에 임한 연기자가 바로 여운계다. 한 번도 아닌 두 번의 암도 여운계의 뜨겁고 끝없는 연기 열정을 꺾지는 못했다. 2007년 신장암 판정을 받고 SBS 사극 에 출연한 데 이어 수술 후 곧바로 드라마 에 복귀했고 2008년에는 폐암 진단을 받고도 일일극 에 출연했다. 여운계는 그녀의 삶 69년 중 48년을 연기자로 살아왔다. 고려대 국문학과 재학 시절 연극반 활동을 하다 1962년 KBS 탤런트로 본격적인 연기자의 길로 들어선 여운계는 수많은 연극과 영화, 드라마를 통해 관객과 시청자를 만나왔다.
여운계는 출연 당시 진행된 인터뷰에서 “연기자는 정년이 없어요. 죽는 순간이 정년이지요. 연기자는 연기를 펼치는 마당에서 죽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여운계는 그녀의 말처럼 연기를 하다 생을 마감한 천생 배우였다. “대장암 다 치료됐어요. 드라마 다시 하니까 살 것 같아요. 드라마를 하면 정말 내가 살아있는 것을 느껴요”라고 밝게 웃으며 말했던 여배우는 김자옥이다. 대장암 수술 후 작품에 출연했던 김자옥은 얼마 안 돼 암이 폐로 전이된 상황을 알게 됐다.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작품에 출연한 그녀는 2014년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70년 MBC 탤런트 공채 2기로 연기를 시작해 등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멜로 연기를 펼쳐 만인의 연인으로 사랑을 받았던 김자옥은 2008년 대장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했다. 수술 직후 만났던 그녀는 “투병생활 잘하고 기도 열심히 하고 있으니 금방 나을 거예요. 드라마 출연하면 좋은 글 많이 써줘요”라며 밝게 웃었다. 그리고 암이 폐로 전이된 이후에도 드라마뿐만 아니라 예능 프로그램 라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 시청자들에게 많은 웃음을 선사했다. 출연 당시 쾌유를 비는 말을 하자 김자옥은 “걱정하지 하지 말아요. 빨리 나아 활동 열심히 할 거예요”라고 씩씩하게 말했다. 비록 실천하지 못하고 삶을 마감했지만, 김자옥은 죽는 순간까지 연기자로서 치열한 삶을 살았다. 암의 고통 속에서도 그리고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 공포에 굴하지 않고 연기자로서 삶을 선택했던 김영애, 김지영, 여운계, 김자옥으로 인해 한국 드라마와 영화, 연극 연기의 지평은 확장됐고 연기자에 대한 인식은 긍정적으로 변했다. 비록 그녀들은 떠났지만, 자신이 남긴 작품들을 통해 연기자로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6월이면, 계곡이나 바닷가 인근 지역 축제뿐만 아니라 각종 문화, 먹거리 관련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진다. 이러한 축제 일정은 우연히 광고를 보거나 현수막을 발견하지 않는다면 놓치기 십상이다. 흥미롭고 볼거리 가득한 전국 축제 일정을 모아 보기 쉽게 제공하는 앱 ‘헤이페스티벌’을 이용해보자.
SNS소통연구소 이종구 소장
1. 앱 다운로드
구글 플레이스토어에서 ‘헤이페스티벌(또는 heyfestival)’을 검색, 무료로 다운로드한다. 카카오톡이나 페이스북 계정으로 회원가입 가능하다.
2. 실시간 베스트 10
홈 화면에 ‘실시간 베스트 10’ 축제 정보가 나온다. 관심 있는 일정을 누르면 축제 상세 정보 및 축제기간 날씨, 구글지도, 리뷰 등을 볼 수 있다.
3. 내 주변 축제
홈 화면 하단 오른쪽에 ‘내 주변 축제’ 버튼을 누르면 현재 위치를 기준으로 열리는 축제 정보 목록을 보여준다(전방 1·3·5·10km 이내로 선택).
4. 테마축제
메뉴에서 ‘테마축제’로 들어가면 지역별(도별), 카테고리별(음식·특산물·계절·자연·문화·스포츠·공연·전시 등) 축제 일정을 확인할 수 있다.
5. 추천코스
앱에서 제공하는 추천코스를 보여준다. 축제 일정을 토대로 주변에 가볼 만한 곳이나 맛집정보, 즐길거리 등을 곁들여 소개한다.
6. 월별 축제
홈 화면 상단 왼쪽의 메뉴 목록에서 ‘월별축제 한눈에 보기’를 누르면 월별로 열리는 축제 정보를 한꺼번에 정리할 수 있다.
한낮에도 그저 적요한 읍내 도로변에 찻집이 있다. ‘카페, 버스정류장’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버스정류장’이란 떠나거나 돌아오는 장소. 잠시 머물러 낯선 곳으로 데려다줄 버스를 기다리거나, 마침내 귀환하는 정인을 포옹으로 맞이하는 곳. 일테면, 인생이라는 나그네길 막간에 배치된 대합실이다. 우리는 모두 세월의 잔등에 업히어 속절없이 갈피없이 흔들리며 먼 길을 가는 나그네가 아니던가. 저마다 여정을 손에 쥔 순례자이며 여행자! 상호에 서린 서정을 음미하며 찻집으로 들어선다.
‘카페, 버스정류장’ 주인 박계해(57)씨는 5년여 전까진 문경시 가은읍의 산골에서 귀농자로 살았다. 그보다 더 오래전엔 중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교직생활은 신바람 났었더란다. 그럼에도 교사직을 버리고 귀농을 한 건 그 어떤 틀에 사로잡혀 살기를 악어의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는 일처럼 싫어하는 성향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남편이 어느 날 귀농을 선창하고 나선 데 있었다. 그녀는 고분고분 따랐으며, 남편보다 더 빠르게 시골생활에 적응했다지.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에 그렇게 시작된 시골 살림은 이후 10여 년간 계속됐으나 다시 행선지를 바꾸었다. 인생이라는 여행 혹은 순례에 무슨 고정된 목적지가 있을 것인가. 박계해씨는 우연히 상주시 함창읍의 거리를 걷다가 오래된 일본식 2층 고가에 필이 꽂혀 단박에 임대를 하고 찻집을 차렸다.
교사에서 농촌생활자로, 다시 소읍의 찻집 운영자로. 다채로운 편력을 하며 중년기 15년여의 세월을 흘러온 셈이다. 섭렵이 쏠쏠했으니 드라마도 푸짐하렷다. 행복과 불행이, 만족과 불안이, 빛과 그늘이 순리처럼 그녀의 시간을 곡예하며 통과했을 게다. 그렇다면 마땅히 자리에 모시어 경청하는 게 사리에 맞는 일. 운치도 정취도 남실거리는 찻집에 마주앉아 한 여자의 삶에 서성거리는 나름의 광량(光量)이라는 걸 느껴볼 수 있는 기회란 행운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귀농 10년의 얘기부터 들어볼까? 순식간에 학교에 사표를 내고 후다닥 귀농한 대목으로부터 얘기가 시작되었다.
“남편의 제안을 따라 귀농 교육을 받으며 곧바로 제 마음도 시골로 향했어요. 제 고향이 하동 악양의 시골인데요, 허물어져가는 돌담집에 대한 애호 같은, 농촌의 자연과 풍경에 매료되는 성향 덕분이었죠. 드디어 지인의 소개로 가은의 시골을 둘러보게 되었는데, 모든 게 맘에 들었어요. 빈집 하나를 사서 적당히 고쳐 시골 살림을 시작했어요. 도시 출신인 남편과 달리 저는 풀이나 피도 잘 뽑고, 매사 빠르게 적응했어요. 시골생활의 많은 점들이 좋았어요.”
“귀농의 초기 정착에 갖가지 애환을 겪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선생의 시골생활은 좀 달랐군요. 일테면, 어떤 점들이 만족스러웠죠?”
“무엇보다 도시에서와는 달리 자연이 주는 감흥들이 참 좋았어요. 하늘, 땅, 나무, 풀, 모든 자연 생태가 주는 힘이라는 것, 그게 좋았어요. 재래식 화장실을 쓰며 도시에서 좌변기를 쓸 때 느꼈던 죄의식을 갖지 않을 수 있다는 점도 만족스러웠어요. 이웃분들과의 소통은 늘 즐거웠어요. 제가 말이죠, 마을 부녀회장을 맡기도 했어요. 상(喪) 당한 집에서 이웃들과 둘러앉아 전을 지진 기억도 많아요. 학교생활의 경험을 살려 할머니들을 모신 학급을 운영하기도 했어요.”
귀농 경험, 책으로 펴내다
“처음 3년간은 아무런 불편 없이 살았어요. 교직 근속 20년을 채우기 직전에 사표를 써 연금 대상자가 되진 못했지만 퇴직 때 받은 돈이 있었기에 미리 걱정하거나 연연해하질 않았어요. 그런데 3년이 지나자 돈이 바닥나고 말았어요(웃음). 저나 남편이나 돈 문제엔 워낙 태평한 사람들이었어요. 저축이라는 걸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았거든요.”
“돈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는 게 귀촌귀농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물질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이 세속에선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르죠.”
“저희 집 가훈을 들어보실래요? ‘내비도!’ 바로 그거였어요. 남편이나 저나 그냥 사는 스타일이었어요. 귀농해서 살며 생전 처음으로 돈의 위력을 실감했어요. 어느 정도 돈 문제에 덜미를 잡혔던 거죠. 마치 벌을 받는 것처럼(웃음).”
‘내비도!’ 내버려둬라, 저절로 흘러가련다. 렛 잇 비(let it be)! 근사한 푯대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의 삶이란 낭만적 지향이건 급진적 가치이건, 물적 토대에 의해서만 실현 가능하다는 소식이 난무하지만, 그게 반드시 그러기만 하랴.
귀농이나 귀촌이란 소유를 헐겁게 하는 실천일 수도 있다. 소유하지 않음이 아니라 가급적 소유의 부피와 무게를 줄이는 지혜를 발휘할 절호의 찬스일 수도 있겠지. 박계해씨의 사고와 삶은 자유로운 지평을 향했던 것으로 보이며, 귀농의 나날들은 한동안 유쾌했던 것 같다. 그러나 통장 잔고가 바닥을 치면서 당장 활로를 찾아야 했다.
“더 이상 여유를 부릴 상황이 아니라서 일을 만들어 덤벼들었어요. 가은읍내에 점포를 얻어 옷을 팔았어요. 전에 천연염색과 바느질 공부를 해둔 게 있었는데, 그게 도움이 됐어요. 손수 염색한 옷가지들이 제법 팔려나갔으니까.”
“시골 옷가게 매상이라는 게 소소했을 테고, 남모르게 진땀 흘린 시절들이었겠어요.”
“당시 아들과 딸, 두 녀석이 학생이었는데 교육비 부담이 컸어요. 어떻게 이 상황을 헤쳐 나갈까, 늘 고심이 많았어요. 그러나 자존심이 상하거나 위축되진 않았어요. 이왕이면 일을 즐겁게 해나가야겠다는 생각으로 가게에 딸린 안방을 동네 사랑방처럼 활용해 아줌마들과 교류를 했어요. 제가 교직에 있을 때 교사 극단을 만들어 활동한 경험이 있는데요, 가은 시골의 초등학교 학부형들과 작당을 해 연극 캠프를 열기도 했습니다.”
고심이 많은 생활이었지만 여흥을 누리는 일에도 게으르지 않았던 셈이다. 취향과 재능을 죽이는 난감한 상황에서도 여하튼 들고 일어서는 게 낙관의 힘이렷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처럼 즐거운 게 다시 있을까. 무슨 일이건 억지로는 하기 싫은 반면, 하고 싶은 일은 기어이 해내면서 살고 싶었어요. 그런데 사실 생활에 보탬이 되고자 벌인 일이기도 했어요. 연극 강사로 나서 수입을 얻었으니까. 주부강좌에 나가 천연염색을 강의하기도 했어요.”
“가은 시골에서의 귀농 경험을 담은 책, 를 출간했더군요.”
“촌에 살며 농사를 좀 했지만 사실 일머리가 서툴렀고 커다란 애착도 없었어요. 자연이 드러내는 사계의 민감한 변화를 만끽하는 일, 야산에 올라 산나물을 뜯는 일, 어른들과 어울리는 일은 참 좋았지만 그것만으로는 다 채워지지 않는 어떤 허기 같은 게 있었어요. 나, 이렇게 살다가 마는 거야? 아니지, 이건 아니지 하는 생각으로 귀농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제가 버지니아 울프를 좋아하는데, 그가 말했어요. ‘기록하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과 마찬가지다’라고. 그 말에 자극을 받아 마을 얘기,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 좌충우돌한 경험담 등을 글로 썼던 겁니다. 책 출간 뒤엔 글쓰기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어요.”
“비록 물적 애환이 자심했다지만 동분서주, 야무지게 자신을 건사한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말이죠, 귀농으로 맞닥뜨린 시련 중에 부부간 갈등이 깊어지는 경우가 드물지 않더군요. 선생의 그 열렬한 날들 중에 부군과의 관계는 어땠나요?”
“흠. 저희 부부는 이혼을 했어요. 제가 먼저 이혼을 원했고, 마침내 남편이 동의해줬어요. 저는 그를 존경하고 좋아하고 사랑했어요. 그러나 더 이상 발전이 없는 한계를 깨달았어요. 소통에 문제가 생겼어요. 각자의 길을 가는 게 옳다는 판단을 했죠.”
언젠가는 섬에서 살고 싶어
이혼을 금기시하는 묘한 모럴도 있지만, 결혼이 자연스럽듯이 이혼 역시 당연한 귀결로 찾아드는 수가 있다. 이혼이 상처가 되지는 않았다고, 차라리 좋은 경험이었다고, 박계해씨는 담담하게 토로하고 있다. 그녀는 이혼 절차를 완료하고 남편과 함께 법원을 나서던 날의 기억을 다음처럼 글로 썼다.
‘그는 내 어깨를 툭 치며 독립을 축하해! 라고 말했다. 그 순간 나는 이 대단한 남자와 결혼했던 것이 뿌듯해서 그에게 몸을 찰싹 붙이고 팔짱을 끼었다.’
박계해씨의 찻집 ‘카페, 버스정류장’은 귀농 이후 그녀의 삶을 새로운 쪽으로 데려다주었다. 인생엔 터닝 포인트라는 게 있는 법. 찻집 운영과 더불어 그녀의 나날은 바닷장어처럼 생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원로 시인 강은교 선생이 이 찻집을 다녀간 뒤 ‘카페 버스정류장’이라는 제목의 시를 발표하기도 했지만, 어지간히 지역의 명소로 부상해 일부러 찾아드는 이가 드물지 않다. 토속적 미감과 모던한 감각이 잘 버무려져 낭만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적막한 소읍의 찻집에선 차만 파는 게 아니다. 예술인들을 위한 전시장으로, 노래 공연장으로, 시낭송 공간으로 쓰이기도 하니까.
“귀농 이후 그 어느 시절보다도 편합니다. 일단은 규칙적인 소득이 발생하기에 안도할 수 있고, 다양한 개성의 사람들과 만나 삶을 얘기할 수 있다는 게 참 좋아요. 아이들도 잘 자라 아들놈은 부산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고, 딸은 만화가로 일하고 있어요. 두 번째 책 을 펴낸 일도 즐거운 추억이 되었어요.”
“귀농으로 촉발된 인생의 색다른 여정이 어떤 안착에 이른 거예요?”
“꽤 안심을 느끼지만 이 찻집은 앞으로 5년 정도만 더 할 작정입니다. 경제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이곳을 지역 예술인들에게 내놓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저는 다시 어디론가 떠난다거나 환경을 바꿔야겠죠. 음, 요즘엔 시나리오를 쓸 궁리를 하고 있어요. 독립영화가 아닌 상업영화용 시나리오를요. ‘나의 경제’라는 제목의 책도 한 권 쓸 예정이에요.” “가령, 무인도에 혼자 살아야 할 경우 꼭 가져가고 싶은 한 권의 책이 있다면?”
“이상의 예요. 어, 그런데 제가 최종적으로 가서 살고 싶은 곳이 섬인데요?(웃음)”
“섬에서의 삶을 꿈꾸세요? 고독을 견딜 수 있겠어요?(웃음)”
“가급적 환경을 새롭게 바꿔 자신의 삶이 점점 나아지는 걸 느끼고 싶어요. 경험 세계를 넓혀 내적으로 성숙하는 기쁨을 맛보며 살고 싶다는 거!”
길은 다양하며, 모든 길마다 나그네의 경전이다. 삶의 문제를 여행으로 혹은 순례로 치환할 수만 있다면 귀농이건 섬이건 가슴 설레는 행로이지 않겠는가. 잠정적인 고난이야 해 뜨기 직전의 어둠이나 추위에 불과할 테고.
길은 다양하며, 모든 길마다 나그네의 경전이다. 삶의 문제를 여행으로 혹은 순례로 치환할 수만 있다면 귀농이건 섬이건 가슴 설레는 행로이지 않겠는가. 잠정적인 고난이야 해 뜨기 직전의 어둠이나 추위에 불과할 테고.
박원식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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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줄다리기가 재밌으면 얼마나 재밌을까, 멋있으면 얼마나 멋있을까? 어렸을 적 운동회 단골 메뉴인 줄다리기? 기지시줄다리기민속축제에 가본 사람이 아니면 콧방귀 뀌며 줄다리기를 논할 자격이 없다. 웅장하고 기운찬 줄을 대한다면 가볍게만 바라봤던 마음이 싹 가셔버린다. 이웃 주민의 안녕을 넘어 온 나라의 상생과 화합을 염원하는 기지시줄다리기민속축제 현장 속으로 들어가 봤다.
충청남도 당진시는 서해대교를 건너자마자 바로 만날 수 있는 지역이다. 이곳에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민속문화가 있다. 바로 500년 역사의 ‘기지시줄다리기민속축제’다. 지난달 6일에서 9일까지 당진시 송악읍 기지시리 일원에서 한 해의 풍요와 평안을 기원하고 마을의 화합을 염원하는 축제가 열려 성황을 이뤘다.
‘기지시줄다리기민속축제’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
기지시줄다리기의 시작은 5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마을에 큰 해양 재난이 닥쳤는데, 강하고 센 땅의 기운을 누르고 흐트러진 민심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목적으로 줄다리기 행사를 시작했다. 또 기지시리의 시장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내포지방 교통의 요지로 떠오르게 되면서 줄다리기 또한 지역 고유의 문화유산으로 자연스럽게 남게 됐다.
기지시줄다리기는 1982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5호로 지정, 보존하고 있다. 또한 국내 여섯 개(당진 기지시, 창녕 영산, 밀양 감내, 의령, 삼척, 남해) 단체의 줄다리기와 필리핀, 베트남, 캄보디아 3개 국가의 전통 의례와 놀이가 ‘줄다리기 의례와 놀이’라는 종목으로 2015년 12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기지시줄다리기의 가장 큰 볼거리는 줄다리기에 사용되는 줄이다. 2월 15일부터 3월 10일까지 한 달여간 기지시리 주민 수십 명이 꼬고 이어서 만들어낸 줄은 직경 1m, 암·수 줄 길이 200m, 무게 40톤에 이른다.
물윗마을이 이겨, 나라가 태평할 것
‘기지시줄다리기민속축제’의 백미는 행사 마지막 날이다. 마을 주민의 땀과 노력으로 만들어 놓은 암·수 줄 앞에서 줄고사가 행해진다. 이때 전국에서 모인 수백 명의 인파가 물윗마을[水上]과 물아랫마을[水下]로 나뉜 두 개의 줄을 들고 행사장으로 이동하는 줄나가기가 진행된다. 1km 남짓 되는 거리를 이동하는 모습은 가히 인상적이다. 각 줄 머리에 올라선 두목의 구령에 맞춰 사람들은 “의여차, 의여차!” 소리를 내며 서로의 기운을 모아 한 걸음, 한 걸음씩 이동한다. 시원한 바람이 때마침 불어주어 땀을 잠시 식히긴 했지만 행사장에 도착한 참여자들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됐다. 줄나가기는 지신밟기와 용이 승천하는 과정을 묘사해 한 해의 풍수를 통해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이다. 행사장에 도착한 두 개의 줄을 결합하면 곧바로 줄다리기가 이어진다. 줄다리기는 물윗마을과 물아랫마을이 겨루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수상(물윗마을)이 이기면 나라가 태평하고 수하(물아랫마을)가 이기면 풍년이 든다’는 속설대로 이기고 지는 일보다 모두가 화합하는 데 의의를 둔다. 올해는 수상이(물윗마을이) 박빙의 승부 끝에 승리했다. 행사에 참여한 모두가 나라의 태평과 화합을 기대하며 기쁨과 환호 속에 행사를 마무리했다.
‘당신은 무엇을 먹고 사십니까?’ 지난해 대한불교조계종단으로부터 최초로 ‘사찰 음식 명장’을 수여받은 선재 스님의 책 제목이기도 한 이 문장은 요즘 가장 치열하게 식문화가 발전하고 있는 현재에 던지는 화두처럼 들려온다. 셰프가 TV 스타가 되고, 수많은 예능 프로그램이 요리를 소재로 만들어지고, 건강과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풍부해진 요즘 과연 우리가 먹는 것은 제대로 된 음식일까? ‘우리는 음식을 왜 먹는가?’ 사찰음식의 대가 선재 스님에게 그 답을 들어봤다.
힘이 넘친다. 조계종에서 인정한 최초의 사찰음식 명장 선재 스님의 목소리에는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에너지가 넘쳤다. 사찰음식에 담긴 조화의 힘이 그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일까?
“불경에는 놀랍게도 음식에 관한 가르침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음식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철학적인 이야기에서부터 조리법, 음식 손질과 보관법, 주방 설치법, 먹는 법까지 세세하게 쓰여 있습니다. 특히 에 나오는 ‘일체 제법은 식(食)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식이 아니면 존재할 수 없다’는 경구는 부처님이 음식을 굉장히 중요한 가르침으로 다루셨음을 말해주는 증거입니다.”
불경에서부터 귀하게 다루었던 식문화를 확인한 선재 스님은 문헌 연구를 거듭하였다.
그리고 1994년 중앙승가대학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며 발표한 ‘사찰음식문화연구’ 논문은 그동안 스님들에게만 전수되던 사찰음식에 관한 최초의 논문으로 기록됐다.
음식으로 다시 생명을 얻다
그러나 사찰음식 연구는 선재 스님에게 큰 시련을 안겨줬다. 연구를 하면서도 화성 신흥사 청소년 수련원에서 아이들의 수련교육을 맡았는데 교육의 좋은 결과에 반한 기관과 학교들에서 수련교육 요청이 빗발쳤다. 해야 할 일이 많아지자 하루에 두세 시간 정도밖에 잠을 못 잤고 음식의 질도 신경 쓰지 않고 급하게 끼니를 때우는 일이 거듭됐다. 그러자 기운이 없어졌고 어느 날 주저앉아버렸다. 병원에 가자 의사가 간경화라는 진단을 내리면서 1년을 넘기기 힘들다고 했다. 난데없이 시한부 인생이 된 것이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힘없이 누워 있는데 문득 제가 쓴 ‘사찰음식문화연구’ 논문이 생각났습니다.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논문을 꺼내와 읽기 시작했습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논문을 쓸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내가 쓰고도 정작 나는 글대로 살지 못했구나, 부처님 법대로 살지 못해 아픈 거구나, 그제야 알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을 그토록 연구했음에도 자신은 정작 실천하지 않았다는 자책감에 스님은 남은 시간을 부처님의 법대로 철저하게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모든 가공식품을 끊고 자연 그대로의 음식, 제철 음식, 때에 맞는 음식, 깨끗한 음식으로 스트레스와 불규칙한 식사로 채워진 일상의 습관을 바꾼 것이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몸에 나쁜 음식을 먹지 않고 일상의 습관을 바꾼 것만으로도 몸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의 마무리는 에너지 넘치는 스님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보인다. 선재 스님의 두 번째 삶은 딱딱하게 굳어 있던 간에 항체가 생기는 기적과 함께 시작됐다.
꿈꾸는 삶, 사찰음식에 다 있다
선재 스님의 두 번째 삶에는 사찰음식의 전파가 중요하게 자리하고 있다. 얼마 전 스님은 프랑스 부르고뉴에서 사찰음식에 관한 강연을 진행하고 프랑스 파리 오이시디 주재 한국대표부에서 행사를 가졌다. 최근 세계 3대 요리의 나라 프랑스는 물론 독일, 미국, 베트남 등 전 세계에서 선재 스님을 찾고 있다. 사찰음식이 갖고 있는 현대 식문화에 관한 대안적 성격을 요리 문화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더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해외에 초대받아 갈 때 저는 음식만 가는 게 아니라 문화도 함께 가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그래서 외국에서 사찰음식에 관한 강연을 요청받으면 음식에 대한 얘기와 함께 불교가 갖고 있는 사상에 관한 강연도 함께 하죠. 예를 들면 대웅전의 꽃문살 사진 전시회와 함께 강연회가 열리기도 합니다. 언젠가 사찰음식에 관한 칼럼을 써서 강연을 들으러 오시는 분들한테 미리 공부해서 오시라고 요청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그 강연이 반응이 좋아서 그해 있었던 그 지역의 해외 행사들 중 가장 훌륭한 행사로 최우수 평가를 받기도 했죠.”
스님이 전파하는 불교 사상의 핵심은 땅, 물, 바람, 동물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자연 존중에 있다. 사찰음식이라는 문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세상에 대한 고마움과 겸허를 알려주려는 스님의 노력은 파괴적이고 소비적인 작금의 식문화에 경종을 울리는 일이기도 하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육체, 정신, 영혼 모두에 영향을 미쳐요. 몸과 마음도 연결돼 있지요. 음식은 곧 생명, 먹는다는 것은 곧 산다는 것과 같거든요. 내가 만든 음식에 사람을 살리고 자연을 살리는 가치관이 담겨 있다는 것이 세계적으로 사찰음식을 찾는 이유일 거예요.”.
변질된 사찰음식은 사찰음식이 아니다
“사찰음식 문화의 범주를 의식주에서 찾으면 안 돼요. 약에서 찾아야 해요.”
음식을 약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선재 스님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절절하게 체험한 데서 나온 것이리라. 스님은 제대로 된 사찰음식은 누구에게나 맛있는 음식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분명 몸에는 좋은 음식이라서 사찰음식이 입에 안 맞더라도 그 사람 몸에 좋다면, 그 사람 생각을 바꿔서라도 먹도록 해야 하는 게 맞다고 말한다.
“지금 바깥의 사찰음식을 보면 뭔가 빨리, 뭔가 맛을 내기 위해서 쓰는 것들이 보여요. 그런 건 사찰음식이 아니에요.”
스님은 요즘 사찰음식 붐이 일어나고 있지만 상당수의 사찰음식이 사찰음식 본연의 철학과 가치를 담고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 스님이 갖고 있는 가치관의 엄격한 면을 확인할 수 있는 말이었다.
“사찰음식을 강의하던 자리였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 자리에서 처음 만든 음식이 야채 샤브샤브였어요. 우리 땅에 나오는 재료로 음식을 만드는데 우리 언어를 써야 맞지 샤브샤브가 뭐냐 싶어서 그 사람에게 직언한 적이 있어요. 그 사람은 기분이 안 좋았겠지만 누군가는 말을 해줘야 해요. 자연음식가라면서 야채 샤브샤브라는 말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써도 되는지 안타까웠어요.”
스님은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친환경 급식’ 개념도 비판적으로 바라봤다.
“야채는 친환경일지 모르지만 거기에 들어가는 장은 첨가제가 들어가는데 친환경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친환경 급식의 맹점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첨가제가 들어간 음식은 먹지 말아야
“음식에 따라 사람의 성정이 달라집니다. 경상도 사람들은 음식을 짜게 먹으니 마음이 급하고 충청도는 심심하게 먹으니 사람이 순하죠. 육류는 동적인 에너지를 주고 두부는 정적인 에너지를 줍니다. 차를 불가의 대표적 음식이라 하는데, 차와 선은 같은 맛이라는 말이 있죠.”
불교에서 육식과 오신채를 금하기 시작한 것은 모든 생명에 자비심을 가지는 수행자들의 문화에 영향을 받았다. 조계종이 사찰음식 명장 1호로 선정한 선재 스님의 음식 철학도 “사찰음식에서 육식을 하느냐의 여부보다 어떻게 먹느냐의 문제”에까지 뻗쳐 있다. “내가 무엇을 먹고 살고 있는지 살피며 바른 음식을 먹고 바른 생각으로 살아야 지혜롭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답니다.” 스님이 음식에 까다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음식의 그런 막중한 역할 때문이기도 하다.
“육류와 파, 마늘은 수행자가 피곤할 때는 허락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가공식품은 약이 아니라 독이에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장아찌를 만들 때 음료수를 넣어 만들어요. 그렇게 하면 상하지 않죠. 하지만 자연적이라고는 볼 수 없죠. 설탕은 빠르게 흡수되면서 열을 발산하니까요. 저는 일체 안 먹어요. 차라리 깨끗한 생선은 부처님이 허락했지만 이런 건 안 된다고 봐요.”
스님에게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먹어야 하냐고 묻는다고 한다. 그때마다 스님은 뭔가를 먹으려 하지 말고 버리라고 말한다. 그래서 스님은 단언한다.
“다섯 살짜리 아이가 이해하지 못하는 첨가제는 먹지 말아야 합니다.”
김치와 장이 수행자의 맛
자연에는 온통 먹을 게 천지에 널려 있다. 그것들은 모두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음식이다. 그렇다면 스님이 선호하는 음식은 무엇일까?
“김치, 그리고 장. 그게 기본이죠. 나는 김치 속에 간장, 된장, 고추장을 넣어요. 김치에 발효음식을 넣는 거죠. 그래서 과거 스님들이 장을 다섯 말을 담갔다면 나를 만나면서 두 말을 더 담그게 됐어요(웃음).”
스님은 변질되지 않은 사찰음식을 보다 많은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하려면 김치를 집에서 담가 먹어야 한다고 말했다.
“모든 음식의 재료는 또 다른 생명이에요. 그 생명을 내 몸에서 잘 흡수되게 만들려면 중간 역할이 필요하죠. 그것을 장과 발효가 해주는 거예요. 그리고 요즘은 배추에 농약을 많이 쳐서 쓴맛이 나요. 진짜 유기농은 처음도 달고 끝도 달아요. 김치를 담그고 그 쓴맛이 없어지는 때가 오는데, 이는 발효를 통해 중금속이 중화됐기 때문이죠.”
스님은 밥 중에서는 쌀밥을 최고로 친다. 그런데 식은 밥이 아니라 바로 한 밥만을 먹는다고 한다. 바로 한 밥은 3분의 1만 먹어도 에너지가 생기지만 식은 밥은 두세 공기를 먹어도 몸에 흡수가 안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제야 ‘요리사라는 직업은 의사와 같다’는 스님의 말이 이해가 갔다. 불가의 가르침에 따라 철저하게 음식의 효능과 조화를 따지는 그의 모습에서 환자를 살피는 의사의 모습을 본다. 음력 4월은 부처님 오신 달이다. 부처님에게 한 가지 밥과 반찬을 공양하라 하면 선재 스님은 어떤 음식을 만들까?
“우선 참죽나물로 만든 밥이 좋겠어요. 그 이파리를 말려 볶아 으깨서 넣은 밥. 원래 참죽나물은 참선하는 스님들이 먹는다 하여 ‘참중나물’이라고 불리기도 해요. 단백질이 많고 열이 많은 나물이죠. 모든 야채가 냉한데 이건 뜨거워요. 이 밥으로 비빔밥을 만들어 올리면 좋겠어요.”
사찰음식을 만드는 수행자들은 음식이 몸과 마음을 합일(合一)시켜준다는 사실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깨달음은 음식을 통해서도 오는 것임을 이제야 알겠다. 거기에는 스스로를 다스린다는 명제가 있다. 선재 스님이 만들어준 오색화전과 상추떡을 먹고 나니 왠지 맑은 심성을 되찾아 착한 사람이 된 듯했다. 그리고 평소의 오만함이 무모한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스님이 하시는 거 보니 사찰음식 너무 쉬워 보이는데요, 저도 집에 가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의기양양한 기자를 보며 선재 스님은 어리석은 중생을 위해 또 한 번 미소를 내어주셨다. 그 사이 봄날 보리사 장독대에서 익어가는 장(醬) 내음은 홍매화 향기 못지않게 코끝을 간질였다.
선재 스님이 가르쳐준 사찰음식
취나물전병, 진달래전병
새알 빚어 꼭꼭 눌러 기름 둘러 지져낸 희고 둥근 반죽 위에 진달래를 꽃피우게 해서 둘둘 말아 김밥처럼 썰면 진달래전병이 되고, 취나물 잎을 얹어 둘둘 말면 취나물전병이 만들어진다.
오색화전
찹쌀가루에 단호박, 비트즙, 쑥즙, 백년초 가루를 각각 섞어 다섯 가지 색을 낸 반죽을 팬에 기름을 두르고 구운 뒤 진달래꽃, 제비꽃, 냉이꽃, 민들레꽃 등을 전에 얹으면 오색화전이 만들어진다.
상추전, 취나물전
상추전은 감자를 갈아서 부쳐내고 취나물전은 갈아놓은 호박과 함께 부친다.
199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백인 경찰의 흑인 폭행으로 시작된 흑백 갈등이 엉뚱하게도 코리아타운으로 불똥이 튀었다. LA폭동이었다. 미국 매스컴들의 편파보도는 살림 잘하고 있던 한 한국 아줌마를 ‘욱’하게 만들었다. 현모양처가 꿈이었던 그녀는 그 길로 정치판으로 뛰어든다. 이 드라마틱한 스토리의 주인공은 미셸 박 스틸(62). 미주 한인 커뮤니티에서 가장 사랑받고 있는 여성 정치인이자, 현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 슈퍼바이저 위원장이다. 그녀를 미국 현지, 산타에나 오렌지카운티 청사에서 만났다.
카운티 슈퍼바이저(County Supervisor). 우리에겐 무척 생소하니 단어 정리부터 해보자. 카운티는 미국 주 정부의 하부 행정 구역으로 캘리포니아 주(州) 오렌지카운티 안에는 총 34개의 시(市)가 포함되어 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세 번째, 미국 전체에서는 여섯 번째로 크다. 인구 320만 명에 한해 예산만 6조원에 이르는 오렌지카운티는 한국의 광역시와 비슷한 규모의 자치단체다.
카운티는 각 지역구에서 선출된 5명의 슈퍼바이저(슈퍼바이저 위원회)가 이끌어 가는데 박 위원장은 2014년 선거에서 한인 최초의 슈퍼바이저로 당선됐다. 지난 1월에는 만장일치로 위원장에 선출, 그녀는 명실상부 오렌지카운티의 행정 수장이다.
“한국뿐 아니라 이곳 한인분들도 낯설어했어요. 당선되고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슈퍼바이저가 뭐하는 자리냐는 거였으니까요. 그만큼 한인 정치인이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죠. 저는 한마디로 오렌지카운티의 모든 살림을 맡아서 합니다. 법을 만들고 집행도 하지요. 소방국, 경찰국, 보건국 관리는 물론 교육, 사회복지, 심지어 쓰레기를 수거·처리하는 일까지 모두요.”
얼마나 바쁘냐는 질문에 다이어리를 살핀다. 존웨인공항의 리모델링과 국제선 비행기의 공항 사용료 문제, 야생 코요테의 사체 처리 법안, 등·하교시간 교통 체증에 대한 주민 항의, 노숙자 샤워와 숙박시설 허가…. 박 위원장의 수첩을 꽉 메우고 있는 현안들이다. 오늘 잡힌 미팅만 4개. 자잘한 방문 약속까지 소화하려면 오늘도 칼퇴근은 어렵겠다며 웃는다. 그녀의 기분 좋은 미소 뒤로 성조기가 아닌 태극기가 눈에 들어온다.
그녀가 정치인이 된 이유
한국 이름 박은주. 그녀의 고향은 서울 성북동이다. 어린 시절 뛰놀던 학교 운동장이며 창경원(現 창경궁)에 놀러갔던 일, 경복궁에서 스케이트를 타던 추억이 그녀의 뇌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일본 한국교육문화원으로 발령이 나면서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동경여자대학교 영문학과 1학년이던 1975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페퍼다인대학(Pepper dine University)에서 경영학을 전공할 때만 해도 박 위원장의 꿈은 현모양처였다. 예쁜 앞치마를 입고 쿠키를 구우며 아이들을 키우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고. 1981년 테니스 동호회에서 만난 전도유망한 청년 변호사 션 스틸과 결혼해 예쁜 두 딸도 얻었다. 그렇게 현모양처의 꿈을 이루는 듯했지만 그녀의 길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LA에서 홀로 옷가게를 운영하던 어머니가 어느 날 국세청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어요. 세금을 속였다며 정말 어마어마한 벌금을 부과했더라고요. 분명히 잘못된 것이었어요. 어머니는 한국과 일본에서 교편을 잡았던 분이세요. 평생 정직을 최고의 가치로 알고 사셨던 분이 탈세라니… 너무나 억울했지만 아무도 우리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어요. 그때 처음으로 소수계가 당하는 부당함과 설움을 알게 됐어요. 거기에 불을 지핀 것이 4·29 폭동이었고요.”
LA 4·29 폭동은 박 위원장에게 ‘행동하지 않으면 변화하지 않는다’는 신념과 자신이 ‘한국인’임을 각인시켜준 사건이었다. 1992년 4월 29일 흑인 로드니 킹을 폭행한 백인 경찰관들이 무죄 선고를 받자 흥분한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공권력은 부유한 백인들이 살고 있는 비벌리힐스를 보호하기에 바빴고 결국 폭도들에게 한인 타운으로 가는 길을 내준 꼴이 되었다. 맨손으로 일군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한인들은 직접 총을 들었고 미국 매스컴들은 앞다투어 한·흑 갈등으로 몰고 갔다.
닷새간 이어진 방화와 약탈로 2300여 한인 업소가 피해를 입었고 피해액만 5억달러에 이르렀다. 돈 벌기 위해 너무 앞만 보고 달렸다는 각성의 목소리도 나왔지만 그 대가치고는 너무나 참혹했다. 한인 타운은 그야말로 잿더미로 변했다.
“한마디로 미디어의 횡포였어요. 뉴스, TV 쇼에서 잘못된 내용을 말하고 있는데 누구 하나 정정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뭔가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어요. 정치인 친구들이 많았던 남편에게 부당함을 쏟아냈고 뭐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고 말했어요. 정말 뭐라도 해야 할 거 같았어요. 남들 앞에 나서기를 지독히도 싫어하던 제가 말이죠.”
1993년 LA시장에 출마한 리처든 리오든 선거캠프 자원봉사를 시작으로 그녀는 미국 정치판으로 뛰어들었다. 안 하면 안 했지 적당히 하는 꼴은 못 보는 한국 아줌마의 힘은 어디서나 단연 돋보였다.
시장에 당선된 리오든 시장은 그녀를 LA소방국 커미셔너로 전격 발탁했고 이후 LA공항, LA아동복지국 커미셔너를 역임했다. 커미셔너는 해당 분야의 정책자문 역할을 하면서 시의 전반적인 행정에 간접적으로 관여하는 직책이다.
박 위원장은 이어 1999년 한미공화당협회 회장, 2001년 부시 행정부에서는 아시아태평양 자문위원을 거치며 차근차근 정치 이력을 쌓게 된다.
한인 커뮤니티가 사랑하는 선거의 여왕
사실 박 위원장이야말로 ‘선거의 여왕’이라 불릴 만한 전력의 소유자다. 24년 정치인생에서 세 번의 선거에 출마, 모두 승리했다. 특히 2006년 당시 ‘듣보잡’ 후보에 가까웠던 그녀가 도전한 ‘캘리포니아 조세형평국 위원’은 캘리포니아 조세 정책을 총괄하는 막중한 자리였다.
그녀는 이 선거에서 정치 거목이었던 상대 후보를 꺾고 60.5%라는 득표율로 압승했다. 한국 커뮤니티는 물론 그녀가 속한 공화당 내부에서도 놀란 결과였다. 목소리까지 가냘퍼 보이는 그녀의 이런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박 위원장은 서슴없이 ‘한국인의 DNA’ 덕분이라고 말한다.
“처음 출마선언을 하고 후보 인준을 받기 위해 연설을 한 날이었어요. 얼마나 무서웠던지 연설을 마치고 나와서는 자동차 뒷좌석에서 결국 울음이 터졌죠. 옆에 앉은 분이 걱정이 되어 남편에게 전화를 하더라고요. 전화를 끊고 아무 말이 없길래 남편이 뭐라고 하더냐 물었더니 그냥 놔두라고 했대요. 금방 다시 씩씩해질 거라고. 미셸은 한국 여자라고요(웃음)!”
박 위원장은 2010년 재선에서도 거뜬히 승리하면서 8년간 조세형평국 위원으로 재직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그녀의 이름 앞에는 ‘가주 내 한인 최고위 선출직 공직자’,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공화당원’ 등의 수식어가 붙게 된다.
미셸 박 스틸의 러닝메이트는 바로 한인 커뮤니티다. 그녀는 한인 커뮤니티로부터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다며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것은 모두 한인들 덕분이라고 말한다. 미국의 선거는 선거자금이 당락을 결정짓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미국 정치인들에게는 선거자금 캠페인, 모금행사 등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기부금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한인들에게는 이것이 낯설기만 하다. 또 사는 게 바쁘다 보니 유권자 등록이나 투표는 늘 딴 세상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아쉬운 이야기이지만 한인 유권자 등록률과 투표율은 아시안 커뮤니티에서 늘 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셸 박 스틸이 출마하는 선거는 유독 한인들의 투표율이 높다. 박 위원장이 슈퍼바이저로 당선된 지난 2014년 선거에서 오렌지카운티의 한인 유권자 투표율은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미셸 박 스틸만큼은 밀어줘야 한다는 분위기다. 이렇다 보니 미주 한인사회의 오랜 숙원인 연방하원에 입성할 인물로 박 위원장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박 위원장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시정에서는 한인 커뮤니티를 어떻게든 메인스트림으로 끌고 들어오려는 노력이 느껴진다. 카운티에 공식적으로 미주 한인의 날을 만드는가 하면, 한인 단체가 벌이는 행사를 카운티가 공식 후원함으로써 힘을 실어주고 있다.
조세형평국 시절에는 정부 공식 홈페이지에 한글로 된 안내문을 올리기도 했다. 부당한 세금이 청구된 납세자가 있다면 자신에게 연락하라, 혐의가 입증되기 전에는 무혐의로 믿고 끝까지 보호하겠다는 취지의 글이었다. 그녀 어머니가 당했던 억울함을 한인들에게 다시는 없게 하겠다는 의지였다. 강철 벽처럼 느껴지는 주 정부 홈페이지에 한글로 된 안내물이라니… 어찌 한인들이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연한 일이에요. 메인스트림 안에서 한인을 대변하기 위해 정치를 시작했으니까요. 임기 동안 하나라도 더 정착시켜놓으려 합니다. 제가 이 자리를 떠나더라도 카운티 차원에서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요. 그만큼 어깨가 무겁기도 하지만 보람도 있습니다. 초심을 잃지 않으려 해요. 내가 왜 이 자리에 오려 했는가를 생각하죠. 정치인은 유권자의 선택으로 살아남는 사람들이에요. 유권자가 내려가라 하면 내려가야죠. 다행히 아직까지는 저를 많이 사랑해주고 계세요(웃음).”
박 위원장은 내년 그녀의 네 번째 선거를 치러야 한다. 슈퍼바이저 재임에 도전하는 것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역시 선거자금을 모으는 일이다. 이제 곧 후보들 간의 모금 현황부터 비교하며 당락 가능성을 점치는 언론들의 보도가 쏟아져 나올 것이다. 다시 전쟁이다.
남편, 그리고 엄마
박 위원장의 정치인생에 없어선 안 될 사람이 있었다면 그것은 남편 션 스틸 변호사(공화당 전국위원회 위원)와 어머니 정옥희 여사(2011년 작고)다. 박 위원장이 정치를 시작하면서 함께 살기 시작한 세 사람에게는 소소한 추억들이 많다. LA 문단에서 수필가로 활동하기도 했던 정옥희 여사의 수필집 곳곳에는 딸과 사위 이야기가 있다. 특히 사위 스틸 변호사에 대한 묘사에는 애정이 그대로 담겨 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사람. 우리나라 함경도 사람처럼 일하며 처자 권속을 확실히 지키는 사람. 내가 여행이라도 가는 날이면 손에 돈과 정을 같이 쥐어줄 줄 아는 사람이 우리 사위다. 집에 돌아오면 조용한 집 안을 장터같이 활기차게 만들고 장모의 김치볶음밥과 순두부찌개가 최고라고 치켜세우는 사위는 가정을 지키는 것이 생애 최고의 행복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다’. (정옥희 수필집 모음 중에서)
결혼 36년 차의 남편은 박 위원장에게 늘 휴식 같은 존재다. 캘리포니아 공화당협회 의장까지 지냈지만 정치적 조언보다는 시정에 지친 아내를 살피는 일이 우선이다. 타고난 유머감각으로 박 위원장을 늘 웃게 만들어주는 것도 그의 몫이다.
지난해 큰딸 채안(29)이 결혼하면서 박 위원장은 사위를 봤다. 그래서인지 돌아가신 ‘엄마 생각’(박 위원장은 꼭 엄마라고 불렀다)이 더 잦아졌다고.
“참 강하고 현명하셨던 거 같아요. 그때는 엄마로서 이민자로서 살기가 지금보다 훨씬 힘들었던 시절이었는데 말이에요. 처음 일본에 가서 말도 못하고 친구가 없는 저를 보고 엄마는 늘 웃으라고 했어요. 내가 웃기만 하니 아이들이 ‘아호(바보)’라고 하더군요. 엄마는 그래도 계속 웃으라고 했어요. 정치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소리가 미셸은 잘 웃어서 좋다는 말이에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엄마라면 뭐라고 했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엄마가 딸을 위해 내어놓는 솔루션보다 좋은 게 어디 있겠어요?”
박 위원장은 자신이 엄마를 추억하듯, 훗날 딸들이 자신을 그렇게 추억해주기를 원한다. 그녀의 뒤를 이어 한인 커뮤니티를 대표할 차세대 정치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삶에 덕이 되고 싶고, 길을 먼저 가는 선배로서 그들이 올 길을 조금은 편하게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이다.
“정치적 야망이요? 그렇게 거창한 표현은 안 어울리고요. 정치인으로서 잃고 싶지 않은 것은 있어요. 민심과의 소통, 발로 뛰는 열정 그리고 정직이요. 어디까지 가든 소통과 열정, 정직 없이 가게 될까봐 겁이 납니다. 연방하원… 가야죠. 제가 아닌 누구라도 가야 합니다. 제가 갈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 갈 것이고 혹 나보다 더 좋은 후보가 나타난다면 저는 미련 없이 그를 밀 것입니다.”
인터뷰 말미, 그녀가 고향 성북동의 안부를 묻는다. 두어 차례 한국 지자체의 초청을 받아 남편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지만 정작 추억 어린 곳은 찾지 못했다고 한다. 서울 시내 곳곳이 너무 많이 바뀌었지만 성북동은 아직 옛 정취가 많이 남아 있다고 하니 아이처럼 반가워한다. 남편과 함께 꼭 가볼 거라고 코를 찡긋거리며 웃는 그녀.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으며, 열정적이고, 그대로의 자신을 내어 보이는 미셸 박 스틸은 아름다웠다.
최근 고궁과 같은 사적을 방문하면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역사적 배경을 곁들여 문화재를 설명하는 문화해설사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전하는 ‘이야기꾼’에서 역사적 사건과 그 배경을 설명하는 ‘역사 선생님’으로서, 때론 유적을 안내하는 ‘안내자’로서의 열정을 보여주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문화해설사에 대한 묘한 매력이 느껴진다. 그 매력에 빠지는 것만큼 문화해설사가 될 수 있는 방법도 쉬울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문화해설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이 직업이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 직종인지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문화해설사란 전문성을 갖고 사적이나 특정 지역의 역사와 가치, 문화를 알리고 방문객의 이해를 돕는 사람을 지칭한다. 문화해설사제도가 처음 도입될 때만 하더라도 특정 문화재를 대상으로 고정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최근에는 문화재가 아닌 여러 지역이나 코스를 대상으로 해설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문화해설사라는 명칭 역시 대상이나 주관 기관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문화재청의 경우 제도 시행 초창기에는 문화해설사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현재는 문화재안내해설사라고 구분해 부르고 있다. 광역자치단체에서 공식적으로 활동하는 문화해설사들은 ‘문화관광해설사’라는 명칭이 사용된다. 문화관광해설사제도는 관광진흥법으로 정해져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 그리고 각 지자체가 함께 운영하고 있다.
이밖에 구 단위 소규모 지자체나 민간단체에서 활동하는 인원은 문화해설사, 역사문화해설사, 문화교류해설사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처럼 명칭이 해설 대상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그 취지와 역할은 대동소이하다.
정부 문화관광해설사 취득은 ‘바늘구멍’
문화해설사 중 가장 대표적인 문화관광해설사제도는 어떻게 운영될까? 안을 들여다보면 다소 복잡하다. 문화관광해설사제도의 설립은 2011년 관광진흥법 개정으로 시작됐다. 2001년 ‘한국 방문의 해’를 맞아 당시 문화관광부가 문화유산해설사를 배출하기 시작한 것이 시초다.
문화관광해설사는 자격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다른 제도와 달리 관광진흥법에 따라 문화체육관광부가 인증한 위탁 교육기관을 수료한 사람만이 지원 가능하다. 위탁 교육기관에서 100시간 교육을 통해 배출된 예비 문화관광해설사는 지자체의 평가와 3개월 이상 실무수습을 마친 후에 문화관광해설사 자격을 얻게 된다.
이들 교육기관은 문화체육관광부가 한국관광공사에게 선발을 위탁하는데, 한국관광공사는 3년에 한 번씩 교육기관의 인증을 갱신한다. 현재 인증된 교육기관은 총 25개소로, 교육 시설을 갖춘 대학이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이들 25개 인증 교육기관으로 찾아가면 문화관광해설사가 될 수 있을까? 아니다. 이들 교육기관은 상시적으로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아니라, 각 지자체에서 문화관광해설사의 수요가 있을 때마다 교육을 의뢰받아 시행한다. 다시 말하면 서울시와 같은 광역자치단체에서 문화관광해설사에 수요가 있을 때 문화체육관광부와 협의해 선발 계획을 세우면, 공고를 통해 지원자를 선발하고 이들의 교육을 한국관광공사에서 인증한 위탁 교육기관에 의뢰하는 식이다.
의뢰가 있을 때마다 선발된 인원에 대해서만 교육을 진행하기 때문에 교육기관을 찾아간다고 문화관광해설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각 지자체에서 선발 공고를 내면 그 시기에 맞춰 신청해야 자격 취득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문제는 문화관광해설사의 수요가 광역자치단체마다 사정이 다르다는 것. 강릉시와 공주시, 경상남도의 경우 올 초 문화관광해설사를 선발해 본격적인 교육에 들어갔다. 이에 반해 국내 최대 규모인 214명의 문화관광해설사를 관리하고 있는 서울시의 경우 올해 추가 인원을 뽑지 않기로 했다. 서울시 서울관광마케팅관광사업팀 관계자는 “모집 여부는 지난해 실적을 고려해 판단하는데, 지금 인원으로 충분하다고 판단돼 올해 추가 모집은 없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사드 문제로 인한 중국 관광객의 급감도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문화관광해설사 자격을 얻으면 운영기관 배치에 따라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하게 된다. 서울시의 경우 문화관광해설사들이 활동 가능한 시간과 지역을 설정해놓으면 서울도보관광(korean.visitseoul.net)에서 신청자들의 예약을 받아 자동으로 연결하는 형태로 운영 중이다.
해설사 운영 지자체도 많아
소규모 지자체에서 모든 과정을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문화해설사 과정도 노려볼 만하다. 서울의 경우 중구와 종로구, 영등포구 등이 각 지역의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활동할 문화해설사를 선발해 운영 중이다. 선발이나 운영 방식은 각 구별의 특성을 반영해 차이가 있다.
서대문구의 경우 지난 3월 처음으로 해설사 8명을 선발했다. 총 36명의 지원자 중 8명을 뽑았다. 이들은 40시간의 이론·현장 교육을 받은 뒤 5월 하반기부터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해설을 하게 된다. 서대문구 지역활성화과 박홍표 과장은 “서대문구의 역사문화 자원을 발굴하고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하며 “스토리텔링 개발을 통해 문화재 중심에서 지역을 알리는 골목 해설로의 확대도 검토 중”이라고 설명했다.
문화해설사제도가 지자체의 전유물은 아니다. 서울시 도심권50플러스센터는 지난해 6월 민간단체 한양길라잡이와 함께 세종마을(서촌)해설사 양성 과정을 진행했다. 이들은 7월 23일부터 10월 16일까지 온라인으로 해설 신청을 받아 1개 도보여행 코스를 운영했다. 올해 역시 도심권50플러스센터를 통해 두 번째 세종마을해설사 총 18명을 선발해 지난 3월 수료식을 진행했다.
한양길라잡이 이상욱 대표는 “올해는 해설사 선발에 경력사항을 중점적으로 고려했고, 실제로 반응도 좋다. 지난해보다 단체 신청이 많은 상태”라며, “내년에는 한옥마을로만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갑신정변과 3·1운동의 중심인 북촌과 관련한 프로그램을 운영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민간단체를 통한 경력 확보의 길
현장의 문화해설사들은 문화해설사라는 직업을 쉽게 접하고, 관련 경력을 쌓을 수 있는 방법으로 민간 문화해설 관련 단체를 추천한다. 민간 주도의 ‘재능기부’이기 때문에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워 가입이 쉽고, 교육 내용도 관 주도의 교육보다 실질적이고 체계적이라는 평가가 많다. 현재 민간 문화해설사 양성기관 중 대표적인 곳으로는 비영리 민간단체 우리문화숨결이 운영하는 ‘궁궐길라잡이’와 사단법인 한국의재발견이 운영하는 ‘우리궁궐지킴이’가 있다. 두 기관의 뿌리는 서로 다르지만 1999년 공식적인 문화해설 활동을 협력해 시작한 사이로 국내 문화해설 사업을 이야기할 때 두 단체를 빼놓을 수 없다. 실제로 국내 문화해설사 교육 과정에 참여하는 인력 중 상당수는 이들 단체 출신이고, 두 단체 출신은 선발 과정에서 프리미엄이 붙는다는 이야기까지 나돌 정도다.
두 단체는 1년에 한 번 교육생을 모집하고, 총 9개월간의 이론과 실습 교육 과정을 거쳐 문화해설사를 배출한다. 배출된 인원은 문화재청과의 협의를 통해 주요 궁궐을 중심으로 한 사적에 배치돼 방문객을 대상으로 해설 활동을 한다. 서울의 5대 궁궐(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과 종묘에서 궁궐지킴이는 금요일과 토요일, 궁궐길라잡이는 일요일에 해설을 맡는다. 문화재청 소속으로 활동하는 문화재안내해설사들은 평일에 주로 외국인을 상대로 안내 역할을 한다.
큰 수입 기대하면 낭패
직업으로서 문화해설사는 어떨까. 현실적으로 생활에 보탬이 될 만한 수익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문화재청 소속의 문화재안내해설사들이 급여가 보장되어 있어 그나마 사정이 가장 낫기는 하지만 기간제근로자(계약직)라서 업무성과 평가 후 1년 단위로 계약이 갱신된다. 모집인원도 문화재마다 1~2명씩 선발하는 것이 고작이어서 도전하기가 쉽지 않다.
광역자치단체의 문화관광해설사를 포함해 소규모 지자체의 문화해설사 역시 대부분 급여의 개념이 아니라 교통비와 활동비 정도만 지원해준다. 1회당 지원금은 2만5000원에서 3만5000원 수준이다. 이마저도 해설을 매일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수입은 ‘월 소득’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민망한 액수다. 그래서 자긍심과 보람, 열정이 없으면 하기 힘든 일이다.
중국어 전문 서울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 중인 김선희씨는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에게 우리나라의 자랑스러 문화유산을 알릴 수 있는 것이 이 직업의 매력”이라며, “해설을 들은 외국인들이 여행 후에 다시 연락해 감사인사를 전할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신도시 건설은 종종 자연과 문화재 훼손의 주범으로 지목되곤 한다. 수만 세대를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시설의 등장은 늘 그래왔다. 그러나 지혜가 모아지고 제도가 보완되면서, 우리는 가끔 사랑할 만한 무엇을 남기기도 한다. 동탄 신도시 등장에 발맞춰 건설된 노작 홍사용 문학관이 그렇다.
경기도 화성시 노작로에 위치한 ‘노작 홍사용 문학관’은 동탄 신도시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뒤로는 동탄역이 있고 앞으로는 호텔을 포함한 상업시설이 성처럼 둘러싸고 있다. 또 그 주변은 지평선 따위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빼곡하게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다. 이런 곳에 문학관이라니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다.
노작 홍사용 문학관은 2007년 동탄 신도시 개발을 위한 행정구역 개편이 시작되면서 함께 건립이 구상됐다. 2008년 연면적 941.55㎡ 규모로 설계가 완료되고 공사를 거쳐 완공된 것은 2010년의 일이다.
동탄 신도시 개발과 함께 노작 홍사용 문학관의 건립이 고려된 것은 신도시의 허파 역할을 할 반석산에 그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 계기가 됐다. 노작 홍사용 문학관은 화성시 미디어센터, 동탄복합문화센터와 반석산 근린공원을 구성하는 주인공이 됐다.
일제강점기에도 지조 지킨 작가로서의 삶
노작 홍사용(露雀 洪思容)은 1900년에 태어나 1947년 사망할 때까지 뜨거운 삶을 산 우리나라의 대표적 근대 시인이다. 학문적으로는 1920년대 초 낭만주의 운동의 대표 시인으로도 꼽힌다. 동심 어린 시각에서 어머니를 바라본 시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그의 작품이다. 이 시는 형식적인 면에서도 근대시의 기틀을 마련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또 ‘봄은 가더이다’와 같은 민요풍의 율조가 바탕이 된 민요시들도 발표했다.
노작은 시인으로만 보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창작활동을 했는데, 소설과 수필 등에서도 남다른 재능을 발휘했다. 특히 희곡과 이를 바탕으로 한 연극에도 관심을 보여 연극단체 토월회(土月會)를 이끌며 자신이 쓴 작품의 배우로도 직접 출연했다고 전해진다.
노작 홍사용은 일제강점기에도 지조를 지켜 문인들의 친일행위라 할 수 있는 매문(賣文)을 하지 않은 대표적 작가로 손꼽힌다. 그는 1919년 기미독립운동 당시 학생운동에 가담했다 체포되기도 했고, 8·15 광복을 맞아 근국청년단(槿國靑年團)운동에도 가담했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문화 공간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문학관들은 특정 작가를 기리는, 일종의 ‘박물관’처럼 운영되는 곳이 많다. 생전의 작품이나 유품들을 전시해놓는 것이 전부이다 보니 현재와 과거가 만나는 접점이 빈약하기 쉽다.
이런 면에서 보면 노작 홍사용 문학관은 좋은 점수를 받기에 충분하다. 홍사용 선생의 작품들이 일제 치하의 민초들에게 꿈꾸고 숨 쉴 수 있는 정서적 여유를 가져다 줬다면, 노작 홍사용 문학관은 지역주민들의 다양한 문학적 체험이 가능한 공간이다.
노작의 생전 활약에 대한 정보나 유작 등에 대한 전시는 물론이고, 약 1만2000권의 문학 서적으로 채워진 도서관과 북카페가 운영되고 있다. 1층에 마련된 88석 규모의 공연장에선 매달 최근 개봉작 영화가 상영되기도 하고, 시민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연극동아리 산유화회의 다채로운 공연을 위한 공간으로도 활용된다.
지역주민 위한 다양한 행사와 문예강좌 열려
노작 홍사용 문학관의 자랑 중 하나는 바로 수준 높은 문예강좌에 있다. 극작법에서부터 소설창작, 인형극, 시창작, 문학평론에 이르기까지 문학과 관련한 전반적인 수업이 진행된다. 또 금요일에는 판소리, 남도소리반도 운영 중이어서, 소리를 통한 해학과 이면을 이해할 수 있다.
매년 10월에는 노작의 문학정신을 기념하기 위한 노작문학제가 열리고 노작문학상 시상식이 이뤄진다. 2000년에 시작된 시(詩) 문학상의 초대 수상자는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진 안도현 시인이다. 문학상은 지난해부터 범위를 넓혀 희곡 부문도 공모를 받고 있다. 지난해 당선된 희곡 대상 작품은 올해 전문 극단의 손에서 완성돼 10월쯤 무대에 오른다.
관람시간 09:00~18:00
휴관일 매주 월요일, 명절, 선거일 (국경일은 개관)
입장료 무료
주소 경기도 화성시 노작로 206
문의전화 031-8015-0880
4월의 ‘한 달 여행’ 시리즈는 ‘길 위에 오두막 별장 만들기’다. 한 달간 스페인의 ‘순례자 길’을 걸어보는 것이다. 그 시작점은 피레네 산맥을 등에 기대고 사는 프랑스 산간 마을, 생장피에드포르다. 순례자들은 이곳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설 준비를 한다. 생장피에드포르에 도착한 그 순간부터 전 세계의 ‘시니어’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프랑스 페이 바스크의 아름다운 소읍, 생장피에드포르
프랑스의 남서부, 스페인과 이웃한 작은 도시가 생장피에드포르(Saint Jean Pied de Port)다. 이 산간 마을의 이름은 페이 바스크(Pays Basque)다. 분명 프랑스령이지만 국가에 완벽하게 귀속되지 않은 채, 자기만의 전통 색깔을 강하게 지켜나가는 바스크인의 영토다. 이들은 피레네 산맥 지역에 사는 소수 인으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이다. 1000년도 넘은 천년고도 ‘생장’에는 바스크 지방의 특색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사암 벽돌로 지은 바스크식의 아름다운 가옥들. 건물마다 이름을 새겨놓은 것도 바스크의 전통이다. 마을은 그림 같다. 성당의 종탑에서는 미사의 종소리가 울리고 맑은 니베 강이 마을을 가로지른다. 이 마을엔 사철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야고보의 순례길(Camino de Santiago)’의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순례자들은 피레네 산맥을 넘을 준비를 하면서 호흡을 가다듬는다. ‘산티아고’까지 총 800㎞를 걷는 대장정을 시작하는 순례자들의 표정은 사뭇 진지하다. 필자가 머물던 숙소지기는 “완주하고 나면 다시 태어날 것이다”라는 말로 격려한다.
고산에 피어난 야생화에 고단함을 푸는 시간
‘생장’을 벗어나 ‘운토’ 마을에 이르면 넓은 호밀밭이 펼쳐진다. 야트막한 푸른 언덕에 그림 같은 집들이 군데군데 들어선 모습은 가히 아름답다. 이 지역은 고도여서 사람 살기에 적합한 곳은 아니었지만 자연 조건이 좋아 일찍부터 사람들이 거주했다. 초기에는 유목민이었다가 서서히 정착생활을 해나갔다. 아름다운 고원의 풍경에 빠져 걷다 보면 첫 번째 사설 알베르게(Albergue, 순례자 전용숙소)인 ‘오리손(Orison, 770m)’을 만난다. 올드 팝이 들리는 깔끔한 바다를 마주하고 맛있는 커피 한 잔의 휴식을 가진 뒤에는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까지 가는 ‘각오’를 해야 한다. 이제부터는 민가 한 채 없는 허허벌판과 가파른 산길만 있다. 걷는 길이 힘겹지만 가끔 벗이 되는 것들이 있다. 군데군데 피어난 야생화 군락지다. 4월에는 주목나무 잎을 가졌지만 골담초처럼 노란 꽃을 피워내는, 가시 박힌 나무가 온 산하에 펼쳐진다. 벤타르테아 언덕(Collado de Bentartea, 1344m)의 가파른 고갯길을 넘어서면 깜짝 놀란다. 한국의 깊은 산에서만 보던 얼레지와 흡사한 야생화가 피어 있기 때문이다. 피레네 산맥에 피어난 아름다운 보랏빛 꽃은 여린 꽃잎을 파르르 떨고 있다.
봄의 잔설과 약수터에 서린 ‘롤랑’의 전설
이 고갯길부터는 우측 능선이 확 트여 수채화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운무 자욱한 평원과 저 멀리 있는 고산의 산정엔 봄철까지 눈이 남아 하얗다. 넓은 초지 사이로 몇 채의 목장 건물이 들어앉아 있고 고원의 바람 따라 구름도 함께 춤을 춘다. 행여 산정을 못 넘는 순례자를 위해 바위 틈새에는 대피소가 마련돼 있다. 준비해온 도시락을 꺼내 들고 휴식을 취하는 곳. 체하지 말라는 듯 ‘롤랑(Roland)의 샘’이 반긴다. 롤랑 백작이 이 산맥을 넘을 때 마셨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약수터 이름이다. 이 약수터를 기점으로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이 나뉜다. 롤랑은 11세기(혹은 12세기 초)에 씌인 중세 유럽 최대의 서사시인 ‘롤랑의 노래’에 등장하는 비극적 영웅이다. 롤랑은 프랑스 샤를마뉴(742~814) 대제의 군대를 이끌고 론세스바예스 요새로 가다가 미리 매복하고 있던 바스크족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후 샤를마뉴 대제가 바스크족을 전멸했다는 게 이 서사시의 주요 스토리다. 이 작품이 전설인지 실화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롤랑이 패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아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바스크족의 요새, 론세스바예스 수도원
약수터를 지나면 피레네 순례길에서 가장 높은 레푀데르 언덕(Collado de Lepoeder, 1430m)에 이른다. 여기서부터는 급경사의 내리막길. 고갯길을 조금 내려오면 두 갈래로 길이 갈라지고 팻말이 나온다. 한쪽은 3km이고 다른 길은 3.6km. 어느 쪽을 선택하든 론세스바예스 수도원에 도착하게 된다. 그러나 이 길은 일기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할 정도로 힘겹다. 딱 봐도 롤랑 장군이 단련된 바스크족에게 당할 수밖에 없는 지형이다. 고개를 내려서면 산맥의 협곡 깊숙한 곳에, 외따로 자리한 론세스바예스 수도원이 있다. 여전히 요새와 같은 곳. 안내소와 두 동의 알베르게, 식당 두 곳, 서점 등 여러 동의 건물이 있다. 어쨌든 생장에서 론세스바예스까지 일단 발을 뗀 이상 포기할 수도, 되돌아갈 수도, 도움을 청할 수도 없다. 오직 두 다리로 걷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변화무쌍한 이곳의 봄 풍치는 평생 기억에 남는다.
Travel Data
교통편 파리로 입국하는 게 가장 좋다. 파리 몽파르나스 역에서 바욘 역까지 테제베를 이용하고, 바욘 역에서 생장피에드포르까지 가는 두 량짜리 기차로 갈아타면 된다.
걷는 코스 생장피에드포르(Saint Jean Pied de Port)-운토(Hunto, 5km)-오리손(Orison, 3km)-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 17km). 총 25km.
현지 정보 ‘생장’에 도착해 ‘산티아고 협회’에서 신청서를 작성하면 순례자 증명서를 준다. 협회에서는 그날 묵을 순례자 전용 숙소인 알베르게도 정해준다. 피레네 산맥은 고지대라 거의 산행에 가까우므로 트레킹화보다는 등산화가 좋다. 해빙기 때는 눈이 남아 있고 길도 질퍽거리는 데다 기후 변화도 잦다. 또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는 빵, 음료 등을 반드시 준비해야 한다. 일요일에는 모든 상점이 문을 닫는다는 것을 기억해두자. 영 자신이 없다면 스페인 론세스바예스까지 이동한 뒤 순례를 시작하면 된다. 배낭은 절대적으로 가벼워야 하고 힘들 경우 배낭을 미리 보내면 된다.
순례자의 길 산티아고의 길(1993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은 생장~산티아고까지 총 800km다. 완주하는 데 한 달 정도 예상하면 된다. 어떤 상황이 닥쳐도 ‘카미노(camino)’ 한마디면 다 통한다. 카미노는 스페인어로 ‘길(road)’이라는 뜻이다. 카미노 여행의 매력적인 장점은 기간 대비 비용이 매우 저렴하다는 것이다. 내 발로 걸으니 교통비도 들지 않고, 순례자 전용 숙소인 알베르게 사용료도 매우 싸다. 이곳에서 취사, 세탁 등을 다 해결할 수 있다.
여행 적기 ‘산티아고 성인의 날’은 7월 25일. 이때는 관광객들이 엄청나게 몰려온다. 봄과 가을이 가장 좋다. 겨울은 절대 ‘비추’다. 많은 한국인이 준비 없이 떠나 고립되었다는 사실을 스페인 친구가 전해주었다.
시니어 여행 포인트 이 여행이 힘든 이유 중 하나는 빨리 완주하고 싶어 하는 한국인의 속성이다. 욕망이 앞서면 결코 여유로운 여행을 즐길 수 없다. 힘들면 코스는 언제든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자. 가장 좋은 10일 코스를 선택하고 스페인 일반 여행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스페인은 한 달 이상 여행할 가치가 있는 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