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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철훈의 사진 이야기] 물을 만난 꽃, 바람을 만난 물
- 카메라가 발명되고 나서 상업적 사진과 예술 사진의 경계에서 사진을 활성화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단연 보도사진이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과 로버트 카파 등이 시작한 보도사진작가 그룹 매그넘이 초기 사진의 발전을 이끌었으며, 저명한 언론인 조셉 퓰리처의 유산으로 만들어진 퓰리처상으로 보도사진이 주목받았다. 각 지역의 문화와 자연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촬영해온 잡지의 자연과학 사진도 빼놓을 수 없다. 이 모든 사진은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장르를 묶을 수 있으며, 이들이 20세기 사진을 이끌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큐멘터리 사진이 주목받는 것은 사진의 정체성이 사실성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진의 전부는 아니다. 예술의 덕목에 다양성이 있는 것처럼, 사진 역시 다양성을 처음부터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사진의 사실성과 함께 추상도 생각했다. 이는 사진도 예외가 아닌 예술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할 중요한 길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사실 전통적인 시각예술이 모두 그렇게 폭을 넓히고 생각을 키워 왔다. 그 일환으로 나는 종종 다중 노출 작업을 진행한다. 다중 노출 사진은 이미지가 겹쳐지면서 동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겹쳐지는 대상이 원래의 피사체와 같거나 연결되는 외형을 갖고 있는 경우에는 되풀이되는 패턴이 생긴다. 패턴이 서로 겹쳐지면서 어떤 부분에서는 예측하지 못했던 끊어짐과 이어짐이 되풀이되는 리듬과 끊어지면서도 부드러운 선이 생긴다. 그렇게 만들어진 무늬가 서로 잘 어울리기도 한다. 음악이 갖고 있는 박자와 멜로디 그리고 어울림의 화음이 만들어지면서 없던 시각적인 아름다움이 생겨난다. 아무 관계도 없었던 바람들이 한 장의 필름에서 만나 꽃을 흔들어 무늬를 이루었다. 자연에는 의외로 많은 패턴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두 번 겹쳐 촬영한 한 장의 이미지에서 만들어지는 패턴은 우연일까? 거기에도 자연스러움이 있다. 인위적인 방법으로 두 장의 사진을 한 장의 필름 위에 덧씌운 이중노출 기법이지만 그것 또한 우연히 만들어진 자연의 한 모습인 것이다. 우연히 만난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가족을 이루어 자식을 낳고 살 듯이 말이다. 제시한 사진은 바람과 물이 만나는 장면을 다중노출 기법으로 연출한 사진 중 하나이다. 처음에는 사진 속의 사물들을 따로 따로 바라보았다. 서로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그렇게 무심히 바라보다 서로간의 연관성이 보이기 시작한다. 먼저 바람 스스로 낸 물길에 따라 흔들리며 흐른다. 꽃과 바람이 실제로 만나는 장면이 포착되었지만, 무작정 기다릴 수 없기에, 나는 우연을 적극적으로 기대하며 두 이미지를 한 장의 프레임에 담기를 되풀이하며 지켜보았다. 꽃뿐 아니라 그 배경으로도 이야기는 진행되며 퍼져 나간다. 물을 만난 바람이 물 위에 일정한 시간을 두고 연속적으로 흔적을 남긴다. 그 사이 꽃은 다시 바람에 의해 누웠다 서기를 되풀이한다. 뿌리가 물밑 바닥 땅에 박힌 풀의 제한이 일정한 박자를 만든다. 조금 더 길게 보면 모인 풀들은 흩어지는 시간의 여정을 각기 시작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꽃은 시들 것이고 먼지가 되어 바람을 타다가 끝내 바람이 될 것이다. 바람은 다시 꽃의 색을 모으면서 순환하며, 이따금 여기에 물이 겹친다. 바람과 꽃과 물이 함께 만난 자리에 나도 참석하여 우연에 필연을 섞어 작업한 작품이다. 샌프란시스코 근처 1번 국도 남쪽의 배면도로를 달리다 보면 만나게 되는 하프 문 베이에서 작업했다. 의도를 넘어 우연(偶然)이 아름다움을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도 내가 열과 성을 다해 노력한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면, 우리는 인내심을 가지고 그 과정을 되풀이할 필요가 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시는 언제까지나 끈기있게 기다려야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일생을 두고 가능하면 아주 오래 오래 살아서 우선 꿀벌처럼 꿀과 의미를 모아 들여야 할 것이다. 그래서 최후에는 아마 10행쯤 되는 좋은 시를 쓸 수가 있을는지 모르겠다. 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닌 것이다. (중략) 사실은 시는 경험인 것이다”라고 했듯이 말이다. 장소가 어디든 대상이 무엇이든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내용의 핵심과 구조를 보기 위해서는 겉모양에 현혹되지 않아야 한다. 겉을 싸고 있는 껍데기가 얇고 가볍게 보일지라도 가장 무겁게 사물의 내부를 누르고 있는 것은 그래도 외모이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이는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 존재들은 온힘을 쏟아 붓는다.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한다. 보이는 것은 자연의 일부이지만, 그것이 모든 것이 아님을 살면서 차츰 알게 된다. 통찰(洞察)이나 식견(識見)이란 뜻이 그렇고, 비슷한 뜻으로 쓰이고 있는 인사이트(insight)라는 영어 단어 또한 같은 얘기다. 사진을 잘 찍으려면 대상을 제대로 보아야 한다. 좋은 사진을 만들기 위해서는 렌즈의 각도를 달리하며 오래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면 빛이 뻗어가고 확장해서 그 속에 숨겨져 있던 핵심과 구조가 보이기 시작한다. 맨눈으로는 결코 파악할 수 없었던 포장지 안의 속살이 뷰파인더를 통해 드러난다. 포장지 그 밑에 쌓여 있는 거품이 진짜 내가 보고 싶었던 속살이라고 착각할 때도 있다. 어떤 때는 벗겨도 벗겨도 또 나오는 껍질에 속지 않고 내용을 보기 위해 이어지는 껍질을 까다 본질이 바로 껍질인 경우도 있다. 사진으로 형성되는 인상은 다중 노출의 형태처럼 다양하고 복잡하다. 수많은 시간과 공간의 조합이 다시 되풀이될 수 없을 만큼 경우가 많다. 매번 선택하는 셔터 스피드와 조리개뿐 아니라 그 사이의 시간적 공간적 간격에 따라 모두 다른 결과가 나온다. 기대는 할 수 있지만, 예측은 할 수 없다. 그래서 본질을 볼 수 있는 수많은 방법을 갖고 있는 사진은 역시 기대할 만한 예술의 한 장르이다.
- 2016-10-0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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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식이 만난 귀촌(귀티나는 촌사람)] 경남 하동, 지리산 기슭에 사는 조동진씨 부부 "노후 직업으로 농사보다 이상적인 게 다시 있으랴"
- 박원식 소설가 구불구불 휘며 아슬아슬 이어지는 가파른 비탈길의 끝, 된통 후미진 고샅에 준수한 한옥 한 채가 있다. 집 뒤편으로 세상의 어미로 통하는 지리산 준령이 출렁거리고, 시야의 전면 저 아래로는 너른 들이 굼실거린다. 경남 하동군의 곡창인 악양면 평사리 들판이다. 광활한 들 너머에선 섬진강의 푸른 물살이 생선처럼 퍼덕거린다. 호방하고 수려한 산수 풍광을 한눈에 쓸어 담을 수 있는 요지(要地)에 터를 잡은 셈이렷다. 증권사 지점장 출신인 조동진씨(58)가 동갑내기 아내 고미선씨를 대동하고 이곳 지리산 자락으로 귀촌을 한 건 9년 전의 일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지리산을 애호한다. 지리산의 너그러운 품에 병아리처럼 포근하게 안겨 오순도순 오붓하게 살아갈 꿈을 꾸기도 한다. 조동진씨가 그랬다. 서울에서, 분당에서, 증권맨으로 뛰었던 그는 휴가철이면 매번 지리산을 찾았다. 그렇게 지리산과 교제를 하는 사이 담뿍 정이 들었다. 그 대상이 사람이건 자연이건, 정 들어 사무치게 그리우면 투신하게 마련이다. 나, 퇴직하면 지리산에 살래! 그는 그렇게 안으로 다지고 밖으로는 광고를 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마침내 일을 저질렀다. 인생의 항해를 결정하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돛이다. 대양의 바람은 한 곳에서 불어오지만 돛의 향방에 따라 어떤 배는 동쪽으로 가고, 어떤 배는 서쪽으로 간다. 조동진은 의지의 돛, 지향의 눈을 돋워 지리산 산골을 겨누었던 것이다. 사연의 보따리를 헤쳐 볼까. “악양의 산자락에 있는 감나무 과수원 3306㎡(1000평)를 미리 사들이는 것으로 거사를 도모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대충 다 컸겠다, 아내만 끌고 내려가면 되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아내가 손사래를 치더라고요. 집사람이 원래 도회적 성향이라서 시골살이에 아무런 매력을 느끼질 못했던 겁니다. 세뇌교육에 들어갔죠.(웃음) 그러던 중 아내가 원인 미상의 중한 폐질환에 걸렸습니다. 의사들이 말하길 현대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는 병이라 하더군요. 그렇다면 이걸 어떡하나. 그래, 자연요법으로 고쳐보자. 이왕지사 땅도 사놨으니까 산골로 가자. 그렇게 아내와 합의를 보고 드디어 시골살이를 시작하게 되었던 겁니다.” “지리산의 그 무엇이 그렇게도 좋았을까?” “제가 실은 대학을 다닐 때부터 지리산에 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었는데요, 그 웅장한 풍경에 사로잡혔던 것 같아요. 게다가 저는 바닷가에 가면 힘이 쭉 빠지는 반면, 산에 가면, 특히나 지리산에 가면 힘이 난다는 걸 자주 느꼈어요. 체질적으로 기질적으로 잘 맞는 거겠죠.” “한옥이 매우 근사해요. 저토록 야무진 한옥을 지은 특별한 이유가 있겠죠?” “아내의 폐질환을 다스리기엔 한옥이 유리하다는 생각이었어요. 황토와 목재를 재료로 한 한옥은 숨 쉬는 집이라 하죠. 그러나 남들에겐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건축비가 너무 많이 들고, 공기(工期)도 길고, 관리도 힘드니까.” “저는 말이죠, 이왕에 산골의 자연과 야생을 벗 삼아 살 거라면 작고 소박한 집을 짓는 게 마땅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왜 아니랴. 동감입니다. 그저 값싸고 편리한 현대식 집을 짓는 게 좋을 겁니다. 다만, 사랑채 정도는 제법 운치를 풍기는 작은 흙집을 짓는 것도 재미날 거예요.” 조동진씨의 거처 한편엔 나무로 골격을 세우고 흙으로 벽을 쌓아 지은 사랑채가 있다. 누각이 딸려 있는 소담한 별채로 조씨가 손수 설계해 지었다. 여자로 치면 음전하면서도 은근히 요염한 멋을 풍기는 가인을 닮은 집이다. 부부가 수시로 눈을 맞추며 단란하게 속닥이는 데에 사랑채의 용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멀고 가까운 곳에서 찾아드는 벗들과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일에도 쓸모가 많겠지만 말이다. 농사일은 노동이 아니라 축제 조씨의 섬세한 조력과 자연의 협찬 덕분일 테지. 다행스럽게도 아내의 병증은 현저하게 개선되었다. 난생 처음 경험하는 시골 생활이지만 마을 주민들과의 관계에도 아무런 흠결이 없다고 한다. 감 농사도 순항이다. 한적한 산골에 입장했으니 그저 한가하게 노닥거리며 자연을 즐기면 그만일 성 싶지만, 조동진씨는 농사일이 오히려 구미에 맞다. 애초에 사들인 땅이 감 과수원이었기에 자연스럽게 감 농사에 뛰어들 수 있었다. “노후의 직업으로 농사처럼 이상적인 게 없습니다. 정년퇴직 없지, 누가 간섭하지를 않지, 적당한 육체노동으로 건강을 챙길 수 있지, 정직하게 땀 흘리는 농사일은 단순히 노동이 아닌 축제에 가까워요.” “세상에서 가장 못 믿을 직업이 농사라고들 해요. 벌이가 되질 않는다는 거죠.” “저도 경제적인 면에 관한 두려움이 많았지만 적절히 극복해 왔어요. 2314㎡(700평) 규모의 감 농사를 지어 곶감이나 감식초를 만들어 판매를 하는데 연간 1200만원에서 1500만원 정도의 수익을 올립니다. 그 정도면 무난해요. 시골에선 말이죠, 골프 할 일 없지, 노래방에 가서 도우미를 부를 일 없지, 수입이 적더라도 지출을 줄일 수 있어 생각보다는 여유를 부릴 여지가 많습니다.” 흔히 귀촌과 귀농을 구분해서 선택을 하거나 판단을 한다. 조동진씨는 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성공한 귀농인 사례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농사에 목을 걸다시피 들입다 땅을 파는 인물은 아니다. 농사에 생활의 한 자락을 걸침으로써 한결 뿌듯한 실속과 실리를 구할 수 있다는 이치를 터득했을 뿐이다. 그의 시골살이 촉이 이렇게 살아 있다. “제 경우는 귀농을 가장한 귀촌인이라 봐야 정확할 겁니다. 그저 작은 텃밭을 일궈 소소한 먹거리를 거두는 귀촌 생활도 즐겁겠지만, 농사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것도 신나는 일입니다. 남자는 퇴직을 했더라도 명함이 있어야 해요. 992㎡(300평) 이상의 농사를 지을 경우엔 누구나 명함을 만들 수 있어요. 일테면 ‘지리산 농원 대표이사’라거나, 그런 식으로 떠억 명함을 새길 수 있는 거예요(웃음). 992㎡(300평) 정도의 농사만 지으면 농업인 등록을 할 수가 있으며, 온갖 지원을 받을 수도 있는데, 그걸 왜 마다할까? 가급적 농업인 자격을 획득하라고 권장하고 싶습니다. 한 달에 하루만 일해도 폼 잡을 수 있는 게 농사에요. 시골에선 말이죠, 하는 일 없이 늘 술이나 마시고 돌아다니면 욕먹습니다. 그러나 농업인으로서 일을 할 경우엔 술을 퍼마셔도 욕먹을 일이 없어져요.” “사전에 열심히 귀농교육을 받고 입촌한 사람들마저 실패하는 경우가 많은 게 현실 아녜요?” “도시 인구를 분산하고, 실업을 해소하고, 도농격차 해결을 위해 정부에서 농촌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려는 갖가지 지원 정책을 펼치지만, 사실 허점이 아주 많습니다. 귀농교육이랍시고 억대 수입이니, 특작물이나 유기농을 운운하며 과도하게 분위기를 띄우지만 사실 허황한 얘기들에 불과해요. 가령, 농사 경험이 없는 사람이 유기농에 도전하는 건 독립운동을 하는 것처럼이나 어렵고 위험합니다. 제가 힌트를 하나 드리죠. 특수작물이나 유기농을 요란하게 하려 하지 말고, 그 지역의 특산물을 하라는 것! 그래야 생산이나 유통의 이점을 누릴 수 있으며, 원주민들과의 소통도 빨라져요.” “빈손으로 귀촌할 경우엔 어떤 재주를 발휘해야 하죠?” “도시에서는 움직이면 돈이 나가지만 시골에선 움직일수록 돈이 들어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양육할 자녀가 없이 부부만 귀농할 경우, 빈손으로 시작해도 무방해요. 퇴직을 한 시니어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의 건강만 있다면, 자세를 낮출 수 있다면, 늘 일손이 부족한 농촌에서 일당 10만원짜리 일감을 찾는 건 일도 아니니까. 한 달에 열흘만 날품을 팔아도 그럭저럭 먹고살 수 있는 겁니다. 문제는 겸손한 마음, 열린 태도이겠죠. 퇴직을 뜻하는 리타이어(retire)는 ‘타이어를 교체한다’는 의미 아니겠어요? 은퇴 뒤 시골에서 살고자 한다면 마음 자체를 싹 바꿔야 합니다. 돈보다는 마음의 행복과 즐거움을 구하는 쪽으로 삶의 잣대가 변해야 하는 거죠.” 시골에서 오히려 진정한 문화생활 누려 사람들은 흔히 시골의 문화적 환경이 열악할 것으로 믿는다. 갖가지 공연과 전시회 따위가 펼쳐지는 도시를 벗어나 시골에 살다 보면, 그저 주야간에 앞산만 멍하니 바라보다가 자칫 우울증에 빠지지나 않을까 걱정한다. 조동진씨에 따르면 이는 미신에 가깝다. “서울에서 공연 구경을 가는 건 어쩌다 한번 아닐까? 공연물이 많다지만 막상 향유하긴 어려운 게 도시살이에요. 요즘의 시골엔 지역축제나 산사음악회 같은 문화 행사가 잦습니다. 아이돌 가수에 밀린 7080 가수들까지 대거 참여해요. 저는 이곳 공연장에서 소찬휘라거나 김재동 같은 연예인들을 처음 봤어요. 게다가 관람료는 전적으로 무료에요. 뒤풀이엔 술과 음식이 푸짐하게 나오고요.” “풍부한 상상력으로 바라본다면 산야 자체가 뮤지엄이겠죠.” “제가 도시에 살며 열네 번이나 이사를 했어요. 이사 때마다 고려한 게 창밖으로 달을 볼 수 있느냐는 점이었어요. 여기 산골의 달밤은 얼마나 좋은지요. 사랑채 정자에 앉아 달빛 흥건한 마당을 바라보며 술 한 잔을 하는 일은 최상의 낙입니다. 달 없는 밤엔 별들이 허공에 모이죠. 때로 반딧불이가 공연을 하고, 빗소리가 악곡을 연주하고, 사시사철 모든 풍경이 장관입니다. 뒷산의 야생화들이 뿜는 향기의 잔치는 또 얼마나 행복한지요. 이 다양한 자연 현상들이 명약이자 보약입니다. 시골엔 의료시설이 빈약하다는 소리들이 있지만, 제 아내가 병을 다스린 걸 보면, 저 산야 자체가 하나의 병원이라는 실감을 할 수밖에 없어요.” “앗! 시골 예찬이 극에 달하셨다(웃음). 도대체 아무런 불만이 없는 거예요?” “제가 외환위기 때 쫄딱 망해 시장에서 전을 벌리고 옷을 팔기도 했어요. 박수를 치며, 싸요, 싸요! 외치면서요. 그런 고통의 시절을 겪은 게 인생의 디딤돌이었습니다.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걸 나름 깨달았어요. 그러하니, 제가 원해서 들어온 산골에서 무슨 불만이 있겠어요? 이제 제가 해야 할 일 하나가 남았는데요, 귀촌을 희망하는 은퇴자들에게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해서, 최근 지리산웰빙귀농학교라는 걸 세웠어요. 대차게 밀어붙일 참입니다(웃음).” 10년 가까이 흐른 시골 생활을 통해 조씨는 어언 선수에 이르렀나? 귀촌에 관한 낙관과 긍정에 경계가 없구나. >> 박원식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 2016-09-28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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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즈 엄마의 미국 이민이야기](22)소셜 넘버 따기
- 미국에도 우리나라 주민등록증 같은 것으로, 소셜 넘버라는 것이 있다. 그것이 있어야만 운전면허증을 딸 수도 있고, 은행구좌 및 생활 모든 곳에 자기 신분을 증명할 수가 있다. 예전에는 비자가 없어도 그나마 쉽게 발행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9.11테러 이후로는 아주 어려운 과제 중의 하나였다. 첫 번째로 적법하게 비자를 만들었다면, 그다음으로 행하는 것이 소셜 국에서 자기만의 고유의 번호를 받아 평생 사용을 한다. 미국 내에서는 그 넘버 하나면 다 통할 수가 있었다. 다음으로는 운전면허증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 정도면 미국에서 생활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물론 코리아 타운이 아닌 외곽지역에서는 영어를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대체로 한인타운의 많은 한인들이 영어가 안되니, 겁이 나서 코리아타운을 벗어나지 못한다. 한인들은 코리아 타운 외곽 도로인 프리 웨이로 운전하는 것을 매우 꺼려한다. 생각해보면 아주 답답한 노릇이다. 더구나 비자가 없어 많은 한인들이 운전면허증을 딸 수가 없으니, 무면허 자들도 가끔은 있었다. 물론 불법체류자가 대다수인 멕시코인들은 거의가 무면허자 들이었다. 필자는 어렵사리 위대한 비자를 받았으니 바로 소셜 국으로 달려갔다. 지역마다 여기저기 있었으나, 그나마 영어가 부족한 것에 위안을 삼아 한인타운에서 가까운 곳으로 갔다. 아침 일찍부터 소셜 국에는 이미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있었다. 어찌나 많은 인간들이 들어오고 나가는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곳은 늘 그렇다고 했다. 밖에서 두어 시간을 지나서야 겨우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번호표를 빼어 들었다. 실내에도 온갖 인종들이 가득 차 있었다. 여기저기 갖가지 묘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유난히 많은 멕시코인과 흑인들, 그리고 간혹 털이 덥수룩한 무슬림 계열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독한 향수 냄새를 온몸에 품고 다닌다. 언제 어디서나 야릇한 향수 냄새는 그 또한 미국의 문화였다. 오전 내내 기다려야 했다. 미국의 공무원들은 모두들 아주 천천히 일을 했다. 공무원들이 손톱은 기다랗게 붙여져 있고, 몸은 비대할 대로 뚱뚱해서 엉덩이를 씰룩 거리며 급할 것이 없었다. 한국이 빨리 빨 리가 대명사라면, 미국인들은 너무 느리고 근무가 태만한 것 같았다. 모든 것들은 세월 가는 줄 모르게, 인내심으로 기다려야만 미국의 일상적인 문화에 적응하는 것이기도 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 서 너 시가 지나서야 겨우 필자의 이름이 마이크를 통해 호명이 되었다. 두껍게 무장을 한 투명 유리 사이로 마이크가 달려있었다. 그곳에다 대고 묻는 말에 대답을 해야만 했다. 다행히도 영어로 단답형 질문을 하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단지 어딘가 모르는 어두운 분위기와 인상이 좋지 않은, 각양각색 인종들의 집합 소에서, 강하고 지독한 냄새의 분위기가 긴장을 하게 만들었다. 이것저것 간단한 질문과 함께, 드디어 모든 절차가 끝나고 접수증을 받았다. 소셜 번호가 담긴 카드는 약 보름 후에나 집으로 메일에 의해 온다고 했다. 온종일을 긴장감으로 기다리며 아주 힘들게 받아낸 소셜 번호 접수증, 그 종이 한 장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모른다. 그것이 있어야만 미국에서 사람 구실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정식으로 운전면허증을 딸 수가 있고 비즈니스도 떳떳하게 할 수가 있게 되었다. 길게 안도의 한숨이 입안 가득 터져 나왔다. 남편에게 기쁜 소식을 빨리 전하기 위해, 속도를 내며 프리웨이를 달려갔다. 낯선 땅의 선선한 가을바람이 창문 틈으로 불어와 축하를 해주었다. 지루한 하루에 몸은 지쳤으나 보람이 있어 기분이 좋아졌다. 제아무리 힘든 일도 참고 인내하며, 하나하나 또 얻어 가는 것은 저마다의 매력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저녁에는 서둘러 일을 마치고 LA 코리아 타운으로 다시 나가, 조선 갈비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았다.
- 2016-09-21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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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즈 엄마의 미국 이민이야기] (22)소셜 넘버 따기
- 미국에도 우리나라 주민등록증 같은 것으로, 소셜 넘버라는 것이 있다. 그것이 있어야만 운전면허증을 딸 수도 있고, 은행구좌 및 생활 모든 곳에 자기 신분을 증명할 수가 있다. 예전에는 비자가 없어도 그나마 쉽게 발행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9.11테러 이후로는 아주 어려운 과제 중의 하나였다. 첫 번째로 적법하게 비자를 만들었다면, 그다음으로 행하는 것이 소셜 국에서 자기만의 고유의 번호를 받아 평생 사용을 한다. 미국 내에서는 그 넘버 하나면 다 통할 수가 있었다. 다음으로는 운전면허증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 정도면 미국에서 생활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물론 코리아 타운이 아닌 외곽지역에서는 영어를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대체로 한인타운의 많은 한인들이 영어가 안되니, 겁이 나서 코리아타운을 벗어나지 못한다. 한인들은 코리아 타운 외곽 도로인 프리 웨이로 운전하는 것을 매우 꺼려한다. 생각해보면 아주 답답한 노릇이다. 더구나 비자가 없어 많은 한인들이 운전면허증을 딸 수가 없으니, 무면허 자들도 가끔은 있었다. 물론 불법체류자가 대다수인 멕시코인들은 거의가 무면허자 들이었다. 필자는 어렵사리 위대한 비자를 받았으니 바로 소셜 국으로 달려갔다. 지역마다 여기저기 있었으나, 그나마 영어가 부족한 것에 위안을 삼아 한인타운에서 가까운 곳으로 갔다. 아침 일찍부터 소셜 국에는 이미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있었다. 어찌나 많은 인간들이 들어오고 나가는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곳은 늘 그렇다고 했다. 밖에서 두어 시간을 지나서야 겨우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번호표를 빼어 들었다. 실내에도 온갖 인종들이 가득 차 있었다. 여기저기 갖가지 묘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유난히 많은 멕시코인과 흑인들, 그리고 간혹 털이 덥수룩한 무슬림 계열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독한 향수 냄새를 온몸에 품고 다닌다. 언제 어디서나 야릇한 향수 냄새는 그 또한 미국의 문화였다. 오전 내내 기다려야 했다. 미국의 공무원들은 모두들 아주 천천히 일을 했다. 공무원들이 손톱은 기다랗게 붙여져 있고, 몸은 비대할 대로 뚱뚱해서 엉덩이를 씰룩 거리며 급할 것이 없었다. 한국이 빨리 빨 리가 대명사라면, 미국인들은 너무 느리고 근무가 태만한 것 같았다. 모든 것들은 세월 가는 줄 모르게, 인내심으로 기다려야만 미국의 일상적인 문화에 적응하는 것이기도 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 서 너 시가 지나서야 겨우 필자의 이름이 마이크를 통해 호명이 되었다. 두껍게 무장을 한 투명 유리 사이로 마이크가 달려있었다. 그곳에다 대고 묻는 말에 대답을 해야만 했다. 다행히도 영어로 단답형 질문을 하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단지 어딘가 모르는 어두운 분위기와 인상이 좋지 않은, 각양각색 인종들의 집합 소에서, 강하고 지독한 냄새의 분위기가 긴장을 하게 만들었다. 이것저것 간단한 질문과 함께, 드디어 모든 절차가 끝나고 접수증을 받았다. 소셜 번호가 담긴 카드는 약 보름 후에나 집으로 메일에 의해 온다고 했다. 온종일을 긴장감으로 기다리며 아주 힘들게 받아낸 소셜 번호 접수증, 그 종이 한 장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모른다. 그것이 있어야만 미국에서 사람 구실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정식으로 운전면허증을 딸 수가 있고 비즈니스도 떳떳하게 할 수가 있게 되었다. 길게 안도의 한숨이 입안 가득 터져 나왔다. 남편에게 기쁜 소식을 빨리 전하기 위해, 속도를 내며 프리웨이를 달려갔다. 낯선 땅의 선선한 가을바람이 창문 틈으로 불어와 축하를 해주었다. 지루한 하루에 몸은 지쳤으나 보람이 있어 기분이 좋아졌다. 제아무리 힘든 일도 참고 인내하며, 하나하나 또 얻어 가는 것은 저마다의 매력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저녁에는 서둘러 일을 마치고 LA 코리아 타운으로 다시 나가, 조선 갈비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았다.
- 2016-09-21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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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석특집] 추석에 가볼 만한 곳, 친지들과 연휴 나들이하세요
- 친지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큰 명절 중 하나인 추석. 이때가 되면 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늘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차례상에 올라갈 밤을 깎고, 전 부치고, 이런저런 요리를 계속해서 나른다. 밥을 먹고 치우기를 반복하다 밤이 되면 송편 만들기에 돌입. 힘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시간은 오랫동안 쌓아두었던 수다로 이겨 낼 수 있다. 이렇게 음식이 차려지고 조상님 만나고 나면 헤어지기 아쉽다. 못다 한 이야기를 좀 더 하고 싶다면 친지의 집에서 가까운 멋진 장소를 찾아가자. 글 권지현 기자 9090ji@etoday.co.kr 북촌한옥마을(서울시 종로구 계동길) 북촌한옥마을은 경복궁과 창덕궁, 종묘 사이에 위치한 지역으로 서울의 600년 역사와 함께한 전통 거주 지역이다. 두 궁궐 사이에 전통한옥이 밀집해 있다. 옛 골목길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역사 도시의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지금은 전통 문화체험관이나 한옥 음식점 등으로 활용되는 곳이 많아 간접적으로나마 조선시대 생활상을 느껴 보기 좋다. 북촌한옥마을이 지속 가능한 관광지가 될 수 있도록 침묵 관광을 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 ‘침묵 관광’이란 관광객들로 인해 주민들의 생활권과 환경권이 침해받지 않도록 큰소리로 떠들지 않고 조용히 여행하는 관광형태를 말함. 관광코스 안내 도보관광코스(3시간 30분 소요) 안국역 → 북촌문화센터 → 가회동 11번지 → 한상수자수공방 → 가회민화공방 → 북촌생활사박물관 ‘오래된 향기’ → 안국동 윤보선가 → 안국역 예약신청 인터넷(dobo.visitseoul.net) 예약 / 관광일 기준 3일 전까지 신청 문의 02-6925-0777 www.bukchon.seoul.go.kr 제비원 석불이라 불리는 ‘마애여래입상’(경북 안동시 이천동) 경북 안동과 영주 사이를 지나는 이천동 길에는 자비롭게 위에서 내려다보는 석불을 만날 수 있다. 일명 ‘제비원 석불’이라고도 불리는 마애여래입상이다. 불두는 큼직한 육계가 표현된 소발(素髮)의 머리와 얼굴을 각각 다른 돌에 새겨서 조립했는데 미끈한 얼굴의 질감과는 달리 거칠게 표면 처리한 머리를 이마 위에 얹어 놓아 멀리서 보더라도 뚜렷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풍만한 얼굴의 미간에는 백호(부처의 양 눈썹 사이에 난 희고 부드러운 털)를 큼직하게 새겼다. 수평으로 길게 뜬 눈 위에는 초승달 모양으로 깊게 파인 눈썹과 날카롭게 우뚝 솟은 코가 이어져 있다. 붉게 채색된 도톰한 입술은 굳게 다물어 강한 윤곽으로 표현한 얼굴과 함께 장중하고 근엄한 인상을 풍긴다. 강한 각선으로 조각된 환조(丸彫)의 머리와는 달리 장대한 신체는 선각으로 처리됐다. 불두를 따로 제작하여 불신이 새겨진 암벽 위에 얹는 형식은 고려시대에 널리 유행하는 형식이며, 얼굴의 강한 윤곽이나 세부적인 조각 양식으로 볼 때 11세기경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애여래입상 옆에는 연미사가 있으며 최근 주위를 공원으로 조성해 쉬기 편하다. 만약 공원까지 갔다면 마애여래입상 앞에 꼭 가보시라.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헤이리 예술마을은 예술인들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을 꿈꾸며 만든 곳이다. 미술인, 음악가, 작가, 건축가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인 300여 명이 모여 집과 작업실, 미술관, 박물관, 갤러리, 공연장 등을 세워 문화예술 공간을 조성했다. 마을 이름은 경기 파주 지역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래농요 '헤이리소리'에서 따왔다고. 각종 문화예술의 창작 공간, 전시 공간, 공연 공간, 축제 공간, 교육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헤이리 마을은 주어진 자연환경을 최대한 살리는 설계를 지향하며 최고의 건축가들이 설계한 건축 전시장으로, 건물 자체가 자연과 예술이 조화된 예술작품이며 자연 친화적인 공간이다. 휴무일 대부분의 작업장이 매주 월요일 휴무(각 전시장, 작업장에 따라 다를 수도 있음) 체험안내 헤이리 마을 내 다양한 체험 코너 마련 이용가능 시설 전시장, 박물관·공연/소극장, 아트 숍, 서점, 공간대관, 레스토랑 및 카페, 갤러리, 게스트 하우스 등 이용시간 09:00~20:00 (전시 공간별로 다름) 죽녹원(전남 담양군 담양읍 죽녹원로 119) 전남 담양군이 조성한 죽녹원은 죽림욕장으로 인기가 높다. 관방제림과 영산강의 시원인 담양천을 끼고 향교를 지나면 바로 왼편에 보이는 곳이 죽녹원이다. 입구에서 돌계단을 하나씩 밟고 오르면서 굳어 있던 몸을 풀고 나면 대나무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청량감을 불어넣어 준다. 죽녹원 안에는 대나무 잎에서 떨어지는 이슬을 먹고 자란다는 죽로차(竹露茶)가 자생한다. 죽로차 한 잔을 마시고 죽림욕을 즐기며 하늘 높이 솟은 대나무를 올려 보라. 사람을 차분하게 만드는 매력과 함께 대나무와 댓잎이 뿜어내는 향기를 느낄 수 있게 된다. 대나무 숲 외에도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과도 연결돼 이국적이고 환상적인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입장시간: 3월 ~ 10월 09:00 ~ 19:00 (입장마감 18:00) 입장료 어른(단체요금) 3000원 (2400원) 청소년/군인(단체요금) 1500원(1000원) 어린이(단체요금) 1000원 (600원) 천리포수목원(충청남도 태안군 소원면) 천리포수목원은 ‘푸른 눈의 한국인’으로 불렸던 故민병갈(미국명: Carl Ferris Miller) 설립자가 40여 년 동안 정성들여 일구어 낸 우리나라 1세대 수목원이다. 1962년 부지를 사들여 1970년부터 본격적인 나무 심기를 시작한 수목원은 교육 및 종 다양성 확보와 보전을 목적으로 관련분야 전문가, 후원 회원 등 제한적으로만 입장을 허용했다. 2009년에 일부 지역이 일반에 공개됐다. 56만1000㎡(17만평)에 이르는 수목원 호랑가시나무, 목련, 동백나무, 단풍나무, 무궁화를 중심으로 1만3200여 품종이 식재됐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식물자원이 심어져 있다. 故민병갈 설립자는 식물을 공부하지 않았지만 평생 동안 전 재산을 들여 민둥산을 지금의 수목원으로 만들었다. 탐방 소요시간약 1시간 30분 개방 구간총 7개 지역 중 밀러가든만 개방 홈페이지 천리포수목원www.chollipo.org
- 2016-09-08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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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현동 인쇄 골목
- 서울역사 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인현동 인쇄 골목’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요즘은 성수동, 파주 출판단지 등으로 분산되어 있지만, 그래도 인현동은 인근 필동, 을지로동, 광희동과 함께 전통의 인쇄골목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인현동 인쇄골목은 충무로역을 중심으로 중부세무서, 대한 극장 맞은편의 작은 한 구역이다. 원래 인현동이라는 지명은 선조의 일곱째 아들 인성군의 집터가 있던 곳으로 인현동이 되었으며 인쇄 골목이 된 이유는 금속활자를 만들어낸 관청인 주자소와 책자 인쇄를 관할한 교서관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울 시내 인쇄소가 총 2,400개 정도 되는데 그중에 60%인 1,500여개소가 인현동 일대에 몰려 있다고 한다. 인현동이 인쇄골목으로 유명해진 것은 여기 오면 인쇄의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점 때문이다. 디자인과 편집에서 시작해서 출력, 인쇄, 후가공까지 다 처리가 가능한 것이다. 원래 영세한 업체들이라 한 공장에서 모든 과정을 처리하기 어렵다 보니 협력체제로 컨베이어 벨트 흘러가듯이 일이 진행되는 것이다. 오프 셋 인쇄과정만 봐도 인쇄전 공정부터 인쇄 공정, 인쇄 후 공정까지 세부적으로 나눠져 있는 것을 마치 한 회사가 해내듯이 처리해 내는 것이다. 이런 시스템이다 보니 밀집된 인쇄 골목은 각 가공 공정에 맞게 건물을 개조하여 사용하고 있다. 도로 폭도 3.5톤 트럭이 들어갈 수 있는 도로 폭 10m가 있는가 하면 도로 폭에 따라 트럭도 1톤, 다마스, 삼발이, 오토바이, 손수레 등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좁은 골목도 있다. 인쇄업에 사람들이 매달리는 이유는 우리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각종 출판물과 홍보물을 비롯하여 문화국가에서는 인쇄업이 발달한다. 소자본으로 할 수 있는 영역이 많으며 부가가치도 높은 편이라고 한다. 지금은 사라진 업종이지만, 인쇄와 관련된 직업들이 있었다. 근대 활판 인쇄에서는 활자를 일일이 뽑아서 인쇄 활판을 만들어서 인쇄에 들어갔으므로 여러 직종이 있었다. 조각공, 문선공, 식자공, 그리고 청타수 등인데 컴퓨터 조판이 생겨나기 전까지는 일반 직장인들보다 월급이 3~4배 높았다는 것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이들 숙련공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전에는 잡지 하나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회사가 설립되고 그 안에 편집기자, 사진 기자, 그리고 출판, 영업을 따로 두고 했다. 그러나 요즘은 기자는 외부 용역을 쓰고 잡지 만드는 일은 여기 인쇄 골목에 맡기면 알아서 잡지를 만들어줄 정도로 정 직원 한 명 없어도 잡지 하나가 버젓이 만들어진다. 여기 인쇄 골목이 현재 기로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강북 재개발로 인근 땅값이 뛰자 여기도 땅 주인들이 집값을 올려 받게 되고 아예 옮겨달라는 요청도 나오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아도 소음에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민원이 들어온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 대형업체들은 준 공업지역인 성수동, 파주 출판단지 등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렇다고 인현동이 일시에 무너지지는 않을 거라는 예상이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종사하고 있고 인프라가 탄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2016-09-05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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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동경은] 전업주부 곤도 유키코의 화려한 제2 인생
- 영화감독 꿈꾸던 소녀 음악PD가 되다 인터뷰 이태문 일본 통신원 gounsege@gmail.com 작은 체구에 단단한 관록을 풍기면서 함박웃음으로 맞이해 준 ㈜콘코르디아(CONCORDIA)의 대표 겸 음악 프로듀서 곤도 유키코(近藤由紀子, 67)는 이시카와현(石川縣) 나나오시(七尾市) 출신. 육군비행학교를 나와 육군항공대 조종사로 태평양 전쟁 때 동남아시아와 인도양에서 전투를 치르고, 오키나와에서 특공대로 소집돼 죽음의 출격을 앞둔 상황에서 1945년 8월 15일 패전을 맞이한 부친, 그리고 평범한 주부였던 모친 사이에서 유키코는 1949년 1월에 태어났다. 바로 이른바 일본의 전후 베이비붐 세대를 뜻하는 단카이(團塊) 세대인 셈이다. “철들 무렵 늘 영화관에 있었다. 당시 나나오시에는 오락물 혹은 엔터테인먼트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엄마 세대는 전쟁의 아픈 기억과 상처받은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영화였는데, 엄마를 따라 서양 영화를 비롯해 일본 영화 등 모든 장르의 작품을 봤다. 그러다가 혼자서 ‘할머니를 찾으러 왔다’며 영화관에 들어가 작품에 푹 빠져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울러 영화와 관련된 음악도 열심히 들으면서 막연하게나마 ‘영화감독’이라는 꿈을 키웠다.” 청운의 뜻을 품고 와세다 대학으로 영화감독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더 큰 물에서 헤엄치는 물고기가 되고자 유키코는 도쿄(東京)의 와세다(早稻田) 대학 제1 문학부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막 올라온 소녀의 눈에는 모든 게 신기하고 낯설기만 했다. 이웃사촌처럼 터놓고 지냈던 나나오시의 생활과는 완전히 다른 별세계(別世界)에 크고 작은 문화충격도 받았지만 영화 때문에 싹튼 꿈을 위해 뭐든지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노력했다. “아는 친지도 없고 인맥도 없는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기로 처음부터 하나씩 쌓아 나가야 했다. 신기하게도 주위 분들이 많이 도와 주셨다. 시골에서 올라온 순진한 소녀가 열심히 뭔가를 잡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예쁘게 봐 준 것 같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TV방송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는데, 학생 신분으로 일본 엔카(演歌)계의 최고봉인 가수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 거물급 여배우 나카무라 타마오(中村玉緖) 등의 도우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직접 옆에서 지켜보면서 영화계에 대한 동경심도 더욱 강해졌지만 한편으로는 남성 중심의 폐쇄적인 영화계 풍토에서는 여성의 입지가 정말 좁다는 현실도 깨닫게 됐다고 한다. 대학 나와 첫 직장은 ‘이와나미 홀’ 유키코는 대학 졸업 후 프랑스에서 영화를 배운 다카노 에츠코(高野悅子, 1929년생. 영화운동가, 영화 프로듀서, 방송작가 및 연출가 등)가 운영하는 ‘이와나미(岩波) 홀’에 입사한다. 당시 이와나미 홀은 232석의 작은 극장이었지만,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을 비롯해 유명 사진가 등 당대를 대표하는 문화 예술인들이 드나드는 사랑방 역할도 했다. “다카노는 ‘마음’과 ‘신념’으로 일했다. 진짜는 언젠가 반드시 세상의 빛을 받으며, 평가받을 것이라는 진지한 자세를 그때 배웠고, 이것이 나의 출발점이 됐다.” 이와나미 홀에서 2년간 근무 후 그녀는 일을 포기한다. 결혼으로 두 아이가 생겼으며, 무엇을 하든 하나에만 집중해 모든 힘을 기울이는 그녀는 망설임 없이 육아를 선택해 엄마의 길을 걷는다. 음악계에 신선한 바람을 두 아이의 엄마로서 아낌없는 사랑으로 육아를 마친 유키코는 49세 때 아티스트 프로듀서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물론 전업주부로서 살림을 꾸리는 틈틈이 시나리오 작가를 공부하고, 드라마 기획서도 쓰는 등 조금씩 준비를 했던 것이다. 그녀는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가코 다카시(加古隆, 1947년생)가 음악을 담당했던 NHK 특별 다큐멘터리 에 감동하여 2000년 스페셜 콘서트를 기획해 도쿄, 오사카(大阪), 가나자와(金澤), 후쿠시마(福島) 등을 돌며 전석 매진의 흥행을 거두었다. 2003년에는 히비야(日比谷) 공원 야외음악당에서 개최한 에도(江戸) 400주년 기념 오프닝 이벤트 등도 꾸미는 등 늦깎이 프로듀서의 열정과 실력이 조금씩 평가받기 시작했다. “20세기 전쟁 때문에 돌아가신 분들의 레퀴엠으로 콘서트를 열어 21세까지 이어지지 못한 그들의 넋을 제대로 위로하는 진혼곡(鎭魂曲)을 들려주고서 21세기 평화와 생명의 시대로 힘차게 나아가자는 뜻을 담으려고 했다. 기획서를 쓰고 2년 동안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뜻을 함께하는 분들을 모았고 스폰서를 찾으려고 동분서주했다. 그 고생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들지만,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눈물과 박수로 다시 한번 음악의 힘을 느꼈으며, 큰 보람과 함께 정말 값진 보물을 얻은 기분이었다.” 한국과 인연도 깊어 2015년 1월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아 양국의 젊은 성악가 2명이 함께 기념 공연을 펼친 바 있다. ‘한국판 폴 포츠’로 불리는 팝페라 가수 휘진(권휘진)과 일본인 테너 가수 고하시 고헤이(古橋鄕平)가 도쿄 지요다구(千代田区)의 기요이(紀尾井) 홀에서 ‘같이 울리는 순간’이라는 주제로 듀엣으로 화합과 희망의 선율을 선보이는 감동적인 무대를 꾸몄다. 물론 곤도 유키코가 기획한 공연이었다. 그녀는 가수 휘진에 앞서 2004년 9월부터 R&B 남성듀오 ‘소리(SoRi)’, 그리고 2007년 솔로로 전향한 가수 케니(홍기현) 등을 일본에 데뷔시키는 등 꾸준히 실력 있는 한국 아티스트를 찾아내 적극 소개해 왔다. 휘진이 동일본 대지진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음악의 힘으로 미래를 믿는 마음을 심어주기 위해 피해 지역을 수차례 찾아가 자선 콘서트를 펼쳤듯이 케니도 2007년 9월 미얀마 민주화 시위를 취재하다 총에 맞아 사망한 사진기자 나가이 겐지(長井健司)에게 바치는 곡 ‘눈물-세계 어디선가 이 순간’을 발표해 수익금의 일부를 캄보디아 빈민을 돕고 있는 민간단체 등에 기부했다. 부제 ‘흐르는 눈물을 미래의 아이들 빛으로 바꾸기 위해’가 붙은 이 노래는 곤도 유키코가 직접 노랫말을 썼다.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요즘 세계의 움직임이 정치적으로 위험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위기감이 든다. 일본은 수많은 젊은이의 희생 위에 패전을 맞이했고, 그 뒤를 이어 태어난 우리 단카이 세대는 평화 속에 살아올 수 있었던 걸 감사하면서 계속 평화를 지켜가야 하는 사명이 있다. 두 번 다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려 미래로 이어가는 징검다리 역할이 바로 내가 할 일이고, 한일관계도 마찬가지로 문화 교류를 통해 서로 뜻을 나누고 마음을 함께하는 자리가 계속 이어져야 한다.” 원점에서 소통을 다시 생각 2003년 54세의 나이로 자신의 뜻을 좀 더 구체화하기 위해 음악·예술 기획사 콘코르디아(CONCORDIA)를 설립한 곤도 유키코는 평화와 소통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음악·예술 문화는 평화의 사절이며, 사람들 마음을 비추는 밝은 빛이라고 믿는다. 앞으로도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을 응시하면서 마음에 와 닿는 감동을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갈 것이다. 음악과 예술을 통해 국경, 민족, 언어의 벽을 뛰어넘어 상호 소통과 연대감으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가길 바랄 뿐이다.” 2015년 5월 회사 창업 12주년을 맞이해 프로듀서 이름으로 결혼 전 이름인 후지하시 유키코(藤橋由紀子)를 내걸고 원점에서 다시 활동을 재개할 것을 선언한 그녀는 “신으로부터 목숨을 받아 태어난 이상 죽을 때까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건 인간의 도리이다. 또한 일하면서 만나는 수많은 인연을 통해 교류를 넓혀가면서 그 만남을 소중히 여길 것이다. 국경을 넘어 서로 돕고 힘을 합치는 것, 바로 이것이 소통이고 문화의 시작이다”며 시종 웃음을 잃지 않았다.
- 2016-09-0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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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국남 뉴컬처 키워드] ‘포켓몬 고’와 증강현실(AR)
- 글 배국남 대중문화 평론가 knbae24@hanmail.net ‘열풍(熱風)’이라는 단어로는 상황을 설명할 수 없다.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대한민국 강원도 속초까지 전 세계를 강타하는 지구촌 광풍(狂風)이다. 세계 각국의 수많은 이용자가 함께하는 문화현상이자 사회적 신드롬이다. 닌텐도 주가가 1주일 사이 93%나 폭등하는 등 천문학적 이윤과 부가가치를 창출한 경제적 사건이다. 구글의 스타트업 기업으로 시작해 독립한 나이앤틱이 일본 게임업체 닌텐도와 손잡고 7월 6일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에서 선보인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AR) 모바일 게임 포켓몬 고(Pokemon Go)다. 포켓몬 고는 서비스 국가를 속속 확대하며 지구촌 열기를 고조하는 동시에 증강현실의 실체와 잠재력을 수많은 사람 앞에 펼쳐 보이고 있다. 포켓몬 고는 출시되자마자 하루만에 앱 스토어 매출 1위를 차지했고 포켓몬이 출현하는 장소나 거리, 지역은 사람들이 몰려 교통이 마비됐다. 포켓몬 고가 서비스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도 포켓몬이 출현하는 강원 속초 일대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속초시 등 일부 지자체는 관광객 유치 홍보전에 포켓몬 고를 활용하는가 하면 여행사들은 관련 상품을 내놓는 발 빠른 마케팅을 전개했다. 포켓몬 고는 이용자의 현실 공간 위치에 따라 모바일 기기상에 출현하는 가상의 포켓몬을 포획하고 대결하고 거래도 할 수 있는 게임이다. 스마트폰을 이용해 포켓몬 고 앱에 로그인한 후 성별, 피부색, 머리 모양 등을 선택해 자신의 아바타를 만든다. 아바타가 생성되면 이용자가 위치한 주변 지역의 지도가 나타나고 포켓몬 체육관 등이 지도에 표시된다. 이용자가 공간과 지역을 이동할 때 아바타 역시 게임의 지도를 따라 움직인다. 이용자는 세계 각 지역에 서식하는 다양한 포켓몬을 찾아 포획한다. 이용자가 포켓몬을 발견할 경우, 증강현실(AR) 모드에서 실재(實在)처럼 보이는 배경과 함께 포켓몬을 보게 된다. 이용자는 포켓볼을 던져 포켓몬을 포획한다. 이 게임의 궁극적 목적은 포켓몬을 포획하고 진화시켜 포켓몬 도감을 완성하는 것이다. 포켓몬 고는 증강현실과 위치기반정보(GPS), 그리고 지도를 활용한 게임이다. 게임 이용자의 위치를 파악해 주변에 몬스터를 뿌리기도 하는데, 능력이 많은 몬스터는 특정 위치에 서식하므로 그걸 잡기 위해 이용자가 이동한다. 한국에는 포켓몬 고가 공식적으로 서비스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강원 속초와 양양 일부 지역에서 포켓몬 고가 구동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수많은 사람이 몰려 포켓몬 잡기에 나서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포켓몬 고는 구글 지도를 이용하는데, 한국 지도가 구글에 의해 사용되는 것이 한국 법으로 금지돼 있으므로 포켓몬 고의 한국 서비스는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 포켓몬 고는 한국에 출시되지 않고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지만, 게임 개발사가 구분해놓은 독특한 영역 구분 때문에 강원 속초 일대에서 게임이 가능하다. 하지만 몬스터만 잡을 수 있고 이용자를 상징하는 아바타 주변의 실재 공간이 나타나지 않는다. 포켓몬 고는 증강현실을 이용해 실제 눈앞에서 보는 것과 같은 현장감과 실재감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실재 공간을 찾아다니며 게임을 하므로 이용자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기업과 사람들이 포켓몬 고 광풍을 지켜보면서 그것을 가능하게 한 증강현실(AR)에 눈을 돌린다. 증강현실은 인공지능(AI), 가상현실(VR)과 함께 가장 각광받는 새로운 정보기술로 세계 각국과 기업들이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다. 적지 않은 사람이 증강현실과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혼동한다. 증강현실은 실재와 허구의 세계를 자연스럽게 혼합하는 반면 가상현실은 100% 허구 세계를 구축하는 점이 차이다. 가상현실은 이용자와 배경·환경 모두 현실이 아닌 가상의 이미지를 사용하는 데 반해, 증강현실은 현실의 이미지나 배경에 가상 이미지를 겹쳐서 하나의 영상으로 보여 주기에 ‘혼합현실(Mixed Reality, MR)’이라고도 한다. 증강현실은 실재세계와 가상세계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경험을 제공한다. LG경제연구원 서기만 수석연구위원은 “증강현실은 기본적으로 현실 정보에 약간의 가상 정보를 덧입힌 형태를 말한다. 주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보조 정보를 현실 정보 위에 추가로 표시하기 위해 이용된다”고 설명한다. 게임의 경우, 게임의 주체가 가상이냐 실체냐에 따라 증강현실과 가상현실이 구분된다. 가상현실 게임은 이용자를 대신하는 가상 캐릭터가 가상공간에서 가상의 적과 대결을 펼치지만, 증강현실 게임은 ‘포켓몬 고’처럼 현실 속의 내가 미국 뉴욕이나 강원 속초라는 현실 공간에서 가상의 적(포켓몬)과 대결을 벌인다. 증강현실은 가상현실보다 현실감과 실재감이 높다. 또한, 공간 증강현실(SAR· Spatial AR)의 경우에는 이용자가 특별한 장치를 손에 들거나 착용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어린이나 나이가 든 사람들도 증강현실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강점이 있다. 증강현실은 일상생활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활용한 지도와 위치 검색은 물론이고 내비게이션, 청소기 등 가전제품부터 게임, 스포츠 중계, 일기예보를 비롯한 방송, 영화 등 문화콘텐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디지캐피탈’이 최근 발표한 ‘AR· VR 리포트’에서 2020년 가상현실 시장 규모는 300억달러(약 34조원), 증강현실 시장 규모는 1200억달러(약 137조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최근까지는 가상현실 시장 규모가 증강현실 시장보다 크지만, 2017년 이후부터는 증강현실이 성장을 주도하며 역전할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다. 전문가들은 증강현실이 현실 공간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어 간단하게 제작할 수 있고, 스마트폰만 있으면 누구나 활용할 수 있으므로 시장성과 잠재력은 무궁무진하다고 분석한다. 이 때문에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퀄컴, 알리바바, 워너브라더스 등 세계적인 기업과 삼성전자, LG전자 등 국내 기업들이 앞다퉈 증강현실 기술과 콘텐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LG전자는 청소기에 증강현실 기술을 활용한 제품을 내놓았는가 하면 SK텔레콤은 증강현실 솔루션 ‘T-AR’를 출시했다. 한빛소프트는 증강현실 모바일 게임 ‘오디션’을 개발했다. 새로운 기술은 사회를 새롭게 구성하고 특정한 문화적 제도를 구축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고와 정서에 큰 영향을 미친다. 증강현실은 새로운 사회와 문화를 창출하면서 사람들의 인식과 정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증강현실을 비롯한 새로운 기술이 초래한 문화와 현상에 대한 이해 없이는 시대와 사회의 변화를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한다. 또한, 젊은 세대의 문화와 정서에 대한 이해의 폭도 좁아진다.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는 대한민국에서조차 거세게 일고 있는 포켓몬 고 광풍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해주고 있다. 지구촌에 거세게 일고 있는 포켓몬 고 신드롬은 단순한 모바일 게임을 즐기는 차원을 넘어선다. 포켓몬 고 신드롬에선 증강현실이라는 신기술이 초래한 새로운 사회와 문화의 일면을 읽을 수 있다. 새로운 기술에 관해 관심이 없고 이용법을 모른다는 이유로 포켓몬 고를 외면하는 대신 눈길 한번 주자. 그 눈길은 바로 증강현실을 비롯한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몰고 오고 있는 새로운 문화와 사회를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그리고 그것은 젊은 세대의 문화와 정서에 대한 이해를 확대하는 단초이기도 하다.
- 2016-08-31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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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온가족과 유럽 미술관을 순례한 미술평론가 이주헌
- 20여 년 전, 미술평론가 이주헌(李周憲·55)은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유럽 미술관을 순례했다.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은 그동안 14만 부가 넘게 팔리며 대중에게 꾸준히 사랑받았고, 이를 발판으로 그는 미술평론가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지만, 당시 기저귀조차 떼지 못한 한 살, 세 살배기 아이들을 데리고 먼 길을 떠났던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1993년 언론사 기자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활동하던 무렵, 그는 미술평론가로서 대중에게 인정받을 만한 ‘자격’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관련 학위를 더 쌓아 대학교수가 되는 것도 방법이었지만, 그는 ‘책’이 그 자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술평론가로서 활동하려면 기반이 되고 신뢰하게 할 만한 계기가 필요했죠. 때마침 해외여행이 자유로워졌는데, 국내에는 서양 미술관을 소개한 책이 단 한권도 없더라고요. 그 전에 일본 서점에 갔더니 그런 책이 10~20권 정도 있었어요. 우리나라 대중에게도 그런 책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죠. 해외에 가면 유명한 미술관을 안 들를 수 없는데, 그러면 아무런 정보 없이 가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는 알고 가는 것이 좋거든요. 그런 면에서 해외 미술관 관련 책을 사람들이 선호할 수 있으리라 믿었죠.” 책을 쓰기 위해서라면 혼자 가거나 미술 관련 전문가와 함께 가는 것이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온 가족이 함께, 그것도 한 살, 세 살,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손이 많이 가는 두 아이를 데리고 생고생(?)을 자처한 이유가 궁금했다. “여행 가는 사람들을 위해 미술관에 대한 책을 쓰더라도 막상 독자가 미술을 어렵고 낯설게 느낀다면 책에 손이 덜 가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때만 해도 미술에 대한 관심은 음악에 비할 수 없이 낮았죠. 무엇보다 미술을 쉽게 접하도록 해야 했고, 그러려면 책을 부드럽게 꾸며야 했어요. 젊은 아빠가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배낭여행을 가면 당연히 좌충우돌 사고가 생길 수밖에 없잖아요. 누구나 예상하고 재미를 느낄 만한 에피소드들을 넣어 준다면 쉽게 책을 다 읽어낼 수 있고, 다 읽고 나면 미술을 어렵지 않게 느낄 것 같았죠. 물론, 바삐 살며 가족에게 소홀했던 것을 만회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요.” ‘미술’, 공부하지 말고, 친구처럼 다가가라 그가 일종의 모험을 감수하며 자신의 체험을 통해 책을 쓴 가장 큰 이유는 대중이 미술에 친근하게 다가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여전히 미술을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런 이들에게 그는 두 가지를 조언한다. 첫째, 미술을 알려고 하지 말고 먼저 느끼라는 것이다. “중요한 건 느낌이에요. 대부분이 오해하는 게, 예술적 지식이 없으면 작품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아는 게 중요하다고 느끼고 공부부터 시작하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맞지만, 그렇다고 아는 만큼 꼭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아이들이 어른보다 지식이 모자란다고 해서 덜 느끼는 것은 아니잖아요. 길가에 핀 꽃을 보고도 어른들은 그냥 지나칠 수 있지만, 아이들은 그 꽃을 보고 강렬한 느낌을 받아 꼼짝을 못할 수 있어요. 아주 좋아할 수도, 슬퍼할 수도 있는데 그게 바로 감상이거든요. 감상이란, 느낌을 얻는 거예요. 내가 어떤 대상을 보거나 듣거나 지각해서 내 마음에서 느낌이 일어나고 그 느낌이 나를 완전히 사로잡는 경험을 하는 거죠.” 그는 미술 감상은 지식을 넓히기 위한 행위가 아닌 느낌을 얻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지식을 넓히려면 지금 당장 도서관에 가서 열심히 책에 밑줄 긋고 열심히 공부하면 그만이라는 것. “어떤 사람을 아는 것과 친구가 되는 것이 다르듯, 미술을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며 그는 줄곧 미술을 ‘친구’에 비유했다. 미술을 친구 사귀듯 하라는 것이 그의 두 번째 조언이다. “세상 모든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미술 작품도 다 알 필요 없어요. 아무리 인기 있는 사람이라도 내가 끌리지 않으면 사귀지 않잖아요. 피카소나 고흐의 작품처럼 유명하다 해도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굳이 알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돼요. 먼저 내가 어떤 그림에 끌리는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죠. 풍경화든, 추상화든, 인물화든 좋아하는 게 뭔지 알고 그 위주로 즐기고 보면 돼요. 그러면서 내가 공부를 안 해도 점점 아는 것들이 생겨요. 그러다 관련된 글을 읽거나 책을 보면 확 이해되고 더 깊이 알게 되죠. 유사한 작가나 작품도 찾게 되고요. 깊어지면 넓어지는 건 순간이거든요. 미술은 그렇게 다가가고 공부하는 거예요.” 그는 책을 보고 하는 미술 공부는 관념의 연장선이지만, 그림을 느끼고 감상하는 것은 관계의 연장선이라고 설명했다. 그런 점에서 중·장년에게 미술 감상은 친구를 사귀는 것과 같다고 한다. “좋아하는 작품을 발견하는 건, 친구가 생기는 거예요. 나이 들수록 나를 든든하게 하는 것 중 하나가 친구잖아요. 대개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힘들고 슬플 때 음악을 듣죠. 그림도 마찬가지예요. 예술의 기본적인 기능이 있다고 하면 그건 ‘위로’라고 생각합니다. 음악을 들으면 기분이 전환되는 것처럼 좋아하는 그림을 보면 힘이 나고 위로받을 수 있어요. 좋아하는 그림 전시가 열리면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는 기분으로 가서 보고, 해외여행을 할 때도 멀리 사는 친구를 보러 가는 마음으로 좋아하는 작품을 찾아가 보면 반갑고 즐거워지죠. 저도 힘들 때 마티스나 케테 콜비츠의 그림을 보면서 용기를 얻곤 해요.” 20년 후, 여섯 가족이 함께한 유럽 미술관 여행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그에게 미술은 그야말로 ‘절친’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 그 못지않게 미술을 가장 친한 친구로 만든 이들이 있으니, 바로 그의 아들들이다. 20년 전 함께 여행을 다녀온 두 형제와, 그 이후 태어난 셋째까지 세 아들은 모두 미술을 전공하고 있다. 그는 책이 나오고 20년 후, 세 아들과 아내, 그리고 막둥이 딸을 데리고 다시 유럽 미술관 순례 길에 올랐다. 늘어난 식구만큼이나 이전과는 사뭇 다른 여행이었다. “가자마자 달라진 걸 느꼈죠. 예전에는 제가 짐을 가장 많이 들었거든요. 젖병, 기저귀, 유모차까지 보통 짐이 아닌 데다가, 아이들 자체도 짐이나 다름없었죠. 근데 이번에 가보니 애들이 크고 힘도 세져서 제 짐도 들고 다니고 알아서들 잘 다니니 아주 편했어요. 스마트폰 지도 앱을 보고 저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더라고요. 무엇보다 전에 갔을 때는 밤 문화라는 것을 상상도 못 했는데, 이번엔 유명한 펍(pub)이나 바(bar)에 가서 아이들과 이야기도 하고 즐기니까 진짜 여행 온 기분이 들었어요. 여러모로 아이들이 나와 아내를 케어해 주니까 도움이 많이 됐고, 여행의 질 자체가 달라졌죠.” 그의 이야기를 들은 이들이라면 한 번쯤 그처럼 온 가족이 유럽여행을 떠나면 어떨까 생각해 볼 것이다. 경험자로서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를 부탁했다. “가족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팀워크’와 ‘프로그램’이에요. 어디를 가서 뭘 즐길 것이냐도 중요하지만, 아무리 좋은 곳에 가도 가족 모두가 행복하게 지낼 수 없다면 의미 없는 여행이 되고 말죠. 가족끼리 가는데 무슨 프로그램을 짜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자녀들이 크고 나면 각자 취향에 따라 가고 싶고 하고 싶은 게 다를 거거든요. 사전에 가족끼리 합의하고 배려해서 프로그램을 짜면 수월한데, 막상 가서 정하려고 하면 밥 한 끼 먹는 거로도 트러블이 생길 수 있어요. 현장에 가서 이러자 저러자 하지 말고, 미리 양보하는 마음을 갖고 서로를 배려해 플랜을 짜면 기분 좋게 여행을 즐길 수 있죠.” 미술관을 테마로 여행을 갈 계획이라면 유명한 명소보다는 작고 한적한 곳을 찾아갈 것을 추천했다. “루브르처럼 유명한 곳을 가는 것도 좋지만, 그러다 보면 미술관의 참맛을 느끼지 못할 수가 있어요. 관광객이 몰려 복잡하고, 입장하는 데만 시간도 한참 걸리기 때문에 정신없이 관람하고 지치기 일쑤죠. 한적하고 조용한 마을 미술관을 가족과 산책하는 기분으로 간다면 더 여유롭게 여행을 즐길 수 있을 거예요. 최근 자동차 테러가 있긴 했지만, 제가 가장 추천하는 곳은 프랑스 니스예요. 니스에 가면 마티스나 샤갈미술관도 있고 인근에도 좋은 미술관이 많아요. 주변 풍경이나 밤바다도 참 아름답죠. 반대로 조금 복잡하더라도 비엔날레 기간엔 베네치아에 가면 시끌벅적하지만 워낙 보고 즐길 거리가 많아지는 시기니까 한 번쯤 가보면 좋아요.” 그는 유럽 어느 지역을 가도 가 볼 만한 미술관 몇 곳은 있기 때문에 미술관을 테마로 계획을 짜면 여유롭고 감성적인 여행을 즐길 수 있으리라 추천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이 함께하는 여행을 권하는 데는 ‘편안함’에 있었다. 가족과 떨어져 여행을 가면 서로의 안위를 걱정하고 그리워하는데 그런 염려 없이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한다. 가족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그에게 언제 또 온 가족이 여행을 갈지, 그리고 10년 후에도 책의 개정판이 나올지를 물었다. “글쎄요. 10년 뒤에도 개정판이 나온다는 게 쉽지 않으리라 보지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또 다른 방향으로 꾸며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단 그 자체로도 무척 고마운 일이고요. 가족 여행은 앞으로도 계속해야겠죠. 근데 아이들이 크고 나니까 각자 바빠요. 친구들과 여행도 가야 하고 자기 계획이 있으니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죠. 그래도 언제든 어떤 형태로든 자연스럽게 또 떠나게 되지 않을까요?”
- 2016-08-30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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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공간] 우리옛돌박물관 실내 전시실
- 웃는 얼굴, 근엄한 얼굴, 크고 작은 석상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어쩌면 100년도 더 넘는 시간동안 비바람을 맞고 어디엔가 쓰러져 있던 석상. 사람의 욕심에 끌려 바다 건너갔다 돌아온 고단한 돌들의 쉼터가 서울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바로 ‘우리옛돌박물관’이다. 우리옛돌박물관은 2000년 경기도 용인에 문을 열었던 세중옛돌박물관을 서울 성북구로 옮겨와 재개관한 것이다. 이곳은 이사장인 천신일씨가 40여 년간 찾아 모으고 일본에서 환수해 온 우리의 석상들을 모아 전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근·현대미술작가의 작품을 비롯해 우리네 어머니들의 정성이 담긴 자수 작품 등도 만나 볼 수 있다. 이곳에서 만날 수 있는 석상은 크게 4종류가 있다. 장군, 문인, 동자, 벅수다. 장군, 문인, 동자상은 묘지를 지키는 석상이었고, 벅수는 마을을 지키는 일종의 돌로 만든 장승이었다. 1층 1. 환수 유물관 환수 유물관은 천신일 이사장이 환수해 온 70점의 유물 중 문인석 47점을 전시했다. 일본에 약탈당하고 여러 곳으로 돌아다니다 보니까 없어진 것이 많다. 짝이 없으면 없는 대로 그대로 전시했다. 문인석이나 장군석은 키에 따라서 묘주의 신분을 알 수 있었다. 키가 170~180cm정도는 왕릉 혹은 정일품의 묘 앞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 금강역사 사찰 앞에 한 쌍으로 세워졌던 것이다.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을 ‘아금강역사’,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흥금강역사’라고 부른다. 박물관에 있는 것은 ‘흥금강역사’다. ‘아’와 ‘흥’은 산스크리트어의 AtoZ와 같은 의미. 모든 불경을 보호한다는 의미이며 한 쌍의 ‘아흥금강역사’가 사찰을 지켜왔다. 3. 무병장수의 길 1층 오른쪽에는 걸어서 옥상까지 올라갈 수 있는 무병장수의 길이 조성돼 있다. 길상을 상징하는 양과 물고기를 낮은 층에 배치했고 올라가는 내내 다복이나 장수 등을 비는 석상들을 배치해 놓았다. 이 외에 여인상, 장명등이 전시돼 있다. 2층 1. 장군석 우리옛돌박물관을 대표하는 유물 중 하나다. 화강암임에도 불구하고 눈썹이 날리는 터럭의 모양 등이 잘 표현됐다. 석조유물의 특징은 3등신이다. 3등신이 정확할수록 가치가 높다. 도깨비 문양이 칼과 양 어깨에 있다. 옛날 석공들은 도면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각 모양을 비슷하게 잘 만들었다는 것은 기술이 대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2. 동자석과 벅수 동자석과 벅수가 발전한 곳은 제주도다. 동자석은 원래 서울·경기 지역에서 시작했지만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일시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런데 제주도는 섬이고 전파가 되고 나서 거기서는 계속 발전했다. 무덤 앞에서 주인의 시중을 드는 역할을 했고 장군과 문인이 있는 무덤에서 활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장군, 문인, 동자가 석공이 조각을 한 것이라면 벅수는 손재주가 있거나 여행을 좀 해봤다 하는 사람들이 직접 민간에서 만든 작품이다. 장승의 돌 버전이다. 암수가 있다. 노인 형상을 한 벅수는 장수와 지혜를 상징하고 마을 사람들이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는 염원에서 만들어졌다. 3. 카페테리아 카페테리아 쪽으로는 한국 여성들의 정성이 깃든 자수 작품들이 전시돼있다. 작은 골무에서부터 보자기, 바느질 용구, 주머니 등이 있다. 3층 1. 양이 조선시대 길상이었던 이유 이성계가 조선의 왕이 되기 전에 양 꿈을 꿨다고 한다. 꿈에 양을 잡으려고 양의 뿔을 잡았는데 뿔이 떨어져 나갔다, 꼬리도 잡았지만 꼬리도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꿈이 이상해 무학대사에게 물어 보니 왕이 될 꿈이라고 했다. 그 이유가 양(羊)에서 뿔이 빠지고 꼬리가 빠지면 왕이 된다는 의미였다. 조선시대 유난히 양을 조각한 석조 유물들이 많다. 2. 3층 기획 전시실 근·현대미술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3층은 바깥 전시장으로 나갈 수 있는 테라스로 연결돼 있다. 날씨가 맑으면 제2 롯데월드도 보일 만큼 시야가 탁 트여 있다. 전시안내 전시(도슨트) 설명 오전 11시, 오후 2시, 3시 (50~60분 정도 소요) 멤버십카드 연회비 1만원 혜택 1년간 전시 무료 관람, 박물관 소식 메일링 서비스 가입문의 - KOSA@ksmuseum.com - 안내데스크에서 현장 가입할 수 있다. - ‘문화가 있는 날’은 매월 마지막 수요일.
- 2016-08-30 10: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