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로즈 엄마의 미국 이민이야기] (21) 코리안 바비큐
- 파티를 즐기는 것이 또 미국 문화다. 주말이면 사람들이 모여 크고 작은 파티가 열린다. 차와 간단한 다과를 하는 것도 그들은 티 파티라고 했다. 집집마다 주말이면 파티가 성행한다. 한 주 내내 열심히 일을 하고 금요일 오후가 되면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파티가 시작된다. 그것이 미국의 문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특별히 멕시칸들이 사는 지역은 바비큐 냄새가 진동하고, 그 경쾌하고 묘한 음악소리가 이 집 저 집에서 크게 울려 퍼져 공해가 되기도 했다. 미국 손님들이 가끔씩 자기들 집으로 필자 부부를 초대해주었다. 필자는 초대를 받으면 무조건 응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문화가 궁금해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때마다 정성껏 코리안 바비큐를 준비했다. 제일 한국적인 선물로, 직접 마켓에서 질 좋은 초이스 고기를 사다가 정성껏 양념을 해서 준비를 하면 대인기를 독차지했다. 우선 코스코에서 가장 좋은 갈빗살을 적당히 준비한다. 때때로 질 좋은 LA 갈비도 선호한다. 준비한 싱싱한 고기를 찬물에 얼마간 담가놓았다가, 깨끗하게 빨아서 핏물을 제거한 후에 꼭 짜놓는다. 갖은 양념을 준비한다. 달콤하고 아주 맛난 싱싱한 배와 양파 그리고 마늘 생강 등을 믹서에 곱게 갈아놓는다. 달달 한 진간장에 약간의 죽염 소금과 각종 양념을 잘 섞어 준비하고, 짜놓은 고기에 가볍게 설탕을 약간 뿌려 간이 배도록 한다. 고기가 조금 연해지는 것 같다. 다시 모든 양념을 섞어 남편의 넓적한 손으로 정성껏 주무른다. 장갑을 끼고 하라고 해도 남편은 손맛이라며 기어코 두툼한 맨손으로 주물러댄다. 마지막으로 고소한 참기름과 깨소금을 넣고, 한두 점 프라이팬에 구어 살짝 양념을 맛본다. 그리고는 하루쯤 냉장고에 숙성을 시킨다. 그 후에 몇 시간 냉동을 시켜놓고 있다가 당일 아침에 꺼내어 다시 냉장실에 보관한다. 가기 전에 바로 반드시 숯불에 구워 정성껏 초대한 집으로 선물로 가지고 간다. 코넬리 부부인 정겨운 손님들이 산타모니카에서 롱 비치로 이사를 갔다. 롱 비치도 해변도시로 필자는 처음으로 가보는 곳이었다. 마침 금요일 저녁에 초대를 받았다. 세탁소 일을 서둘러 마치고 롱 비치로 향했다. 미국도 불타는 금요일이었다. 온통 도로가 트래픽(교통체증)으로 꽉 막혀있었다. 1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겨우 도착을 했다. 집안 입구에서부터 멋들어진 캔들 향이 코를 찔러왔다. 미국인들은 무척 초를 좋아한다. 현관에서부터 화장실, 부엌 등등 어느 곳에나 색색의 촛불들이 화려하게 수를 놓으며 불타오른다. 코넬리 부인의 고향인 남미 브라질의 향기도 약간은 있었지만 대체로 미국 사람들의 향내가 흘러나왔다. 이곳저곳에는 두 부부의 사랑스러운 사진이 장식되어있다. 아름다운 서구식 인테리어가 고급스러웠다. 코넬리 부인이 한때는 브라질의 모델이었다고 한다. 구석구석에 그녀의 자태가 커다랗게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걸려있었다. 젊은 날의 앳되고 날씬하며 활기찬 모습들이었다. 커다란 식탁 위에는 각종의 미국 음식들이 진열되어있었다. 더러는 브라질 음식도 섞여있다. 실내에서 이루어지는 파티였으므로 미국식 바비큐는 없었다. 필자 부부는 숯불에 미리 구워온 한국식 바비큐를 식탁 가운데에 올려놓았다. 미국 사람들은 신기하게 바라보더니 한 점씩 가져가기를 시작했다. 먹어보고는 또 가져간다. 먹고 나면 또 먹고 싶은 묘한 맛이 있다는 것이다. 순식간에 커다란 접시, 하나 가득한 것이 다 사라졌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엄지손가락을 쳐들며 최고라며 입맛을 다신다. 소스의 맛이 특별하다는 것이다. 모두들 소스 레시피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대체로 미국은 생고기 위에다 단순하게 소금이나 바비큐 가루를 뿌려먹는 것이 일수였기 때문이다. 다음 파티에도 또 해줬으면 하는 무언의 부탁을 받았다. 남편은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기분이 아주 좋은듯했다. 이번에도 한국인의 선물이 최고의 성공을 거둔 것이었다. 그날 이후로도 몇 번은 더 해주었고 필자의 집 앞마당으로도 미국인들을 초대했다. 그들은 아주 행복하다며 코리안 바비큐가 역시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 한국 사람들의 입맛은 아마도 세계를 제패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2016-08-30 10:08
-
- 1. 2. 3 학습등대
- 등대는 배가 가야 할 길을 잡아주는 길잡이다. 사람들의 삶에도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곳, 사는 동안 길을 잃지 않고 안전한 길로 갈 수 있도록 안내를 해주는 특별한 공동체가 있었다. 사람을 잇다. 마을과 마을을 잇다. 그리고 아름다운 하나의 공동체가 되는 곳, 이것이 학습등대의 스토리이다. 시민과 함께 배우며 성장하는 학습의 장으로 특별한 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성숙해나가고 있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평생을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며 배우고 가르치는 보람으로 살수가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에는 한여름의 열대야에도 더욱 뜨겁게 돌아가는 곳이 있었다. 평생교육 프로그램인 학습등대 프로젝트가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었다. 이것은 성공적으로 안착한 프로그램으로서 지역사회의 평생교육모델로 평가 받고 있다고 했다. 지난 2013년에는 교육부가 주관하는 제10회 대한민국 평생학습대상 시상식에서 대상인 국무총리 상의 영예를 차지하기도 했다. 필자는 시의 부속센터인 다산서당을 찾아갔다. 배움. 새로움. 즐거움. 어울림 그리고 뜨거움으로 가득한 다산서당내 학습등대에서는 한창 그 열기를 더하고 웃음이 가득했다. 평생 학습 원, 지역 주민이라면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학습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남양주시의 학습등대가 교육부에서 주관하는 평생학습의 대상으로 선정이 되면서, 등대를 세우게 되는 데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한다. 그 하나는 주민들이 주도적으로 학습활동을 통해서 지역공동체를 세우는 활동이고, 다른 하나는 주민들의 자치적인 학습활동에 대한 최대한의 다양한 행정지원을 해주는 것이라고도 했다. 시에서는 우선 10분내 학습등대, 20분내 주민 자치센터, 30분내 도서관이라는 슬로건으로 평생학습 인프라를 구축하였다. 또한 남양주의 특화사업으로 시민들의 학습권리를 누릴 수 있는 권리로 그 체계를 갖추고 있다. 지역주민들을 위한 지식 정보 문화공간을 마련하고 그 가치를 창출하며 주민들의 학습과 문화 및 그 지역의 높은 기대치를 위한 진정한 자치실현 및 문화욕구 충족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더구나 이러한 일들에는 평생학습을 실행에 옮기도록 도와주는 시청 산하 주민 매니저들이 있다. 그 들은 담당지역을 총괄하며 시와 연결을 하는일에 대표로 한다. 또한 수업을 함께 가르치며 터득해가는 수많은 지역출신 시민강사들이 있으며, 이들의 다양한 노력과 참여하는 주민들의 협동심들은 훌륭한 공동체 학습등대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내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평생학습의 꽃'이라 말할 수 있으며 시 행정의 철저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로 구성이 된다. 이 같은 평생교육의 장에서는 수많은 지역주민들의 고용창출도 수없이 일어나고 있으며,주민들에게도 각광을 받고 있다고 했다. 현재 전국 각 시도에서도 '1.2.3 학습등대'를 배우기 위한 벤치 마켓팅이 이루어지고 있다고도 한다. 필자부부는 남양주시 지역주민으로써 이러한 일들에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다. 공동체의 훌륭하고 멋진 사업에 의미를 새기며 함께 동참하기로 마음도 먹었다. 가장 먼저 가까운 아파트 내에 있는 10분내 학습등대에 수업을 참여하기로 했다. 또한 운영위원이 되어 함께 이끌어 갈 것도 약속을 했다. 앞으로도 재능기부를 하고 남양주 시청에 정식으로 강사신청을 하여 봉사를 하는 시간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꾸준히 발전하며 노력하는 자기개발의 사람들이 있기에 건강한 공동체의 하루는 활기가 솟아났다
- 2016-08-29 12:31
-
- [해외투어]지구에서 가장 작은 마을, 불가리아 ‘멜니크’
- 불가리아는 우리나라와 먼 나라가 아닌 듯하다. 불가리아 요구르트를 먹으면 장수한다는 TV 광고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불가리아에 가면 ‘장수’할까? 세계에서 가장 작은 마을 멜니크에서 조용한 휴식과 함께 와인 잔을 기울이고 온천욕을 즐긴다면 가능할 것이다. 우리나라보다 약간 큰 불가리아(면적 11만 879㎢)는 억압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1014년부터 동로마 제국에게, 1393년부터 약 480여 년간은 터키의 지배를 받았다. 1908년 9월, 러시아의 도움으로 터키로부터 독립을 했지만 1989년 구소련이 무너질 때까지 40여 년간 소련의 영향을 받는 사회주의 국가로 살아야 했다. 1990년에 이르러서야 민주 정부를 세우고 나라 이름도 불가리아 공화국(The Republic of Bulgaria)으로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필자는 수도 소피아(Sophia)에서 여행을 시작해 서남쪽으로 약 80㎞ 정도 내려가 릴라 수도원(Rila Monastery)을 찾았다. 릴라 산맥 속에 꼭꼭 숨어 있는 유서 깊은 수도원도 좋았지만 정작 필자가 매료된 곳은 멜니크(Melnik)다. 릴라 수도원에서 남쪽 그리스 쪽으로 약 100km(소피아에서 186km) 정도 가면 멜니크 배드랜드(Melnik Badlands)가 있다. 피린(Prin) 산맥의 해발 약 440m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마을은 불가리아어로 ‘흰색 점토, 분필’을 뜻하는 ‘멜(mel)’에 모래 산이 합해져 만들어진 지명이다. 불가리아에 현존하는 전통형태의 마을 중 가장 작고 마을 가옥 전부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러시아 작가인 유리 트리포노프(Yury Trifonov, 1925~19 전문가의 설명이 없어도 예사롭지 않은 건축물과 마을 뒤쪽의 독특한 모래 산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거기에 와인 상점, 와인 박물관, 와인 밭이 흩어져 있는 것만으로 ‘와인 산지’임을 한눈에 알게 한다. 멜니크는 트라키아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페르시안 1세(Persian I, 836~852) 때 크게 번성했고 이후 왕국의 남서부를 통치하던 알렉시우스 슬라브(Alexius Slav)에 의해 이 지방의 중심지가 되었다. 아센(Asen) 왕조(1185~1396) 때부터 독립적인 봉건 공국의 수도가 되었다. 그의 통치 기간에 경제와 문화가 발달해 학교와 교회가 많이 생겨났다. 이후 오스만 정복으로 쇠퇴하다가 17~18세기에는 담배와 와인 생산지로 알려지면서 번성한다. 특히 멜니크 와인은 경제권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했다. 이 지역의 와인은 향기가 아주 진해 일찍이 13세기부터 베니스의 부호들 식탁에만 올랐다고 한다. 주로 영국과 오스트리아, 해외로 수출되었는데 영국 처칠 총리가 좋아했다고 한다. 멜니크 종 포도는 프랑스가 원산지이나 불가리아에서 오래전부터 재배되어 온 우량 품종으로 와인 색은 진하고 맛은 무거우나 단맛이 난다. 이 마을은 발칸전쟁(1912~1913) 이후, 불가리아령이 되면서 기존에 살던 그리스인은 추방되었다. 일부 상점과 주택들이 그들에 의해 약탈되었지만 복원, 재건되었고 현재의 전통 가옥들은 숍, 숙소로 이용하고 있다. 또 근처에는 루피테(Rupite)와 대학도시로 유명한 ‘블라고에브그라드(Blagoevgrad, 애칭 ‘블라고’)’, ‘산단스키(Sandansik)’가 있다. 산단스키는 온천 휴양도시다. 그 외에도 수도인 소피아, 중세기 도시인 벨리코 투르노보(Veliko Turnovo), 플로브디프(Plovdiv), 소조폴(Sozopol) 등이 있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2014년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 2016-08-26 17:37
-
- [브라보가 만난 사람] 올해 ‘0’세가 된 현경 교수와 결코 ‘가볍지 않은 우문현답’
- “현경 교수를 인터뷰하시겠습니까?”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순간 멍해졌다. 그녀는 유명인사다. 세계인을 상대로 여성과 환경, 평화를 말한다. 이념의 장벽을 쌓지 않는 종교학자로 180년 역사의 미국 유니언신학대학(Union Theological Seminary in the City of New York, UTS) 아시아계 최초의 여성 종신교수이기도 하다. 고로 1년의 반 이상은 미국 뉴욕에 있으니 지금이 아니면 인터뷰가 어렵다는 뜻이었다. 현경(玄鏡·60). 인생을 두고 영광스러운 자리가 전화 한 통화로 시작됐다. 당황스럽긴 했지만 대답은 예스! 그렇게 세기의 지성을 만났다. 운명처럼 말이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무슨 일이… 현경 교수를 처음 만난 장소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 주민센터였다. 부암동은 서울 중심에 있지만 고즈넉할 뿐만 아니라 70년대 모습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런데 그녀를 만난 지난 6월 30일은 고즈넉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풍악대가 동네를 돌아다니며 풍악을 울리고, 화선지에 먹으로 그림을 그리는 퍼포먼스가 주민센터 앞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이날은 부암동 신축 건물과 관련해 건설업체 예지학과 주민 사이에 경관 훼손 및 조망권 침해와 관련한 공청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무엇보다 신축 건물이 세워진 곳은 현경 교수 집 바로 옆이었다. “우리 집 위치가 부암동의 자궁이고 바람골이에요. 이렇게 모든 기운을 막는 건물을 지을 거라고는 상상 못했습니다. 이 집의 기운이 매우 좋아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여성학자나 예술가에게 유산으로 이곳을 작업 공간을 남기고 싶었어요. 부암동의 흐름을 완전히 끊는 명백한 ‘건축 테러’라고 생각해요.” 미국에서 주로 생활하는 현경 교수는 공사 진행상황에 대해 잘 몰랐다고 한다. 여름방학에 집에 돌아왔다가 사태에 직면하게 된 것. 방학 동안에도 강연활동에, 신학자로서 설교, 설법하는 시간도 모자란데 이날만큼은 부암동 주민으로서 분주하게 뛰어야만 했다. 일반인은 이해 못 할 ‘기독교불자’ 그녀의 이력을 보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기독교불자’라는 말이다. 평범한 지식으로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는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물과 기름 같은 종교를 합친 말이 특이했다. 일반적인 사고로 이해할 수 없는 경지라 조심스럽기까지 했다. “난 기독교불자예요. 기독교신학자이고 목사 안수과정을 다 끝냈어요. 불교 법사도 받았죠. 이제 나는 종교의 틀과 이름을 벗어난 거 같아요. 교회에서 설교 할 때는 기독교신학자로, 불교 수양회를 할 때는 불교 법사로서 얘기하죠.” 기독교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편하지 않을 것 같다며 우려 섞인 얘기를 건넸더니 그건 그들의 문제일 뿐이라고 답했다. “사실 진보적인 교회도 내 입장을 받아드리기 어렵죠. 내가 불교 법사가 됐으니까요. 그런데 종교 간의 대화는 열린 기독교에서 얼마든지 받아드릴 수 있어요. 21세기는 종교의 틀을 벗어나야한다고 생각해요. 종교가 아니고 영성입니다. 여성운동 관점에서 보면 현대의 모든 고등 종교는 가부장적입니다. 종교에서 지혜와 전통은 배우고 가부장적인 고루한 전통은 이제 버려야 해요. 그래야 종교도 진화가 되죠. 종교가 강물이라면 강 밑에 도도히 흐르는 지하수가 영성이라고 생각해요.” 현경 교수는 현재 종신교수로 있는 미국 뉴욕 유니언신학대학에서 '아시아여성 해방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세계교회협의회 총회에서 아시아 여성의 영성문제를 제기하고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위주 신학을 비판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여성의 시선에서 종교와 사회를 바라보고 활동하며 자신 있는 여성의 삶을 말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녀의 종교 철학에는 ‘여신’이라는 표현이 쓰인다. “나는 ‘여신’이라는 존재 혹은 기호를 만들어서 여성의 내적 지혜 혹은 신성에 관해 설명합니다. 여성이 너무 낮게 살지 말고 스스로 여신으로 살자는 의미죠, 여자들이 자기를 찾고 싶은데 뭔가 좀 당당하면 “나쁜 여자다”, “마녀가 좋다” 혹은 “공주다”, “아줌마다”라 말하면서 세상이 단정 지어 버리잖아요. 그런데 우린 다 여신이에요. 가장 깊은 신성과 우주가 우리 안에 들어와 있어요. 뭐 유치하게 남자와 동등함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잖아요, 30대는 조금 힘들어요. 그런데 40대가 되면 조금 바라보는 시선이며 생각이 나아지죠. 그런 면에서 나는 여자가 40, 50대가 굉장히 예쁜 거 같아요. 60대도 예쁘잖아요?“ 여성으로서 환경과 평화를 이야기하다 현경 교수는 종교학자, 교수라는 직업 이외에 여성으로서 환경과 평화에 대한 문제에 대해 실천하고 움직이는 사람이다. 우선 그녀가 말하는 에코페미니즘, 환경 여성해방운동은 무엇인가. “환경과 자연해방, 환경의 문제와 여성문제가 근본적으로 철학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보는 거죠. 자연해방과 여성해방이 같이 가야 한다는 거죠. 에코페미니즘은 1974년 프랑스의 여성 철학자 프랑스와즈 드본느(Francoise d’Eaubonne·1920~2005)가 만들어낸 말이에요. 환경운동과 여성운동을 합쳐서 만든 말이에요. 나는 ‘살림이스트’란 말을 만들었어요. ‘살림살이’라는 뜻도 있고 자신과 타인, 지구를 살리는 일도 ‘살림’입니다. 내 안의 신성을 돌보고 내 이웃, 사회, 지구 전체 등 주변의 생명체들을 돌보는 게 바로 ‘살림’이죠. 공격과 충돌이 아니라, 상생과 대화를 믿는 게 바로 ‘살림이스트’, 한살림운동이나 여성 환경운동연대가 다 에코페미니스트고 살림이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름과 겨울방학 때 현경 교수는 주로 여성· 환경· 평화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많은 일을 한다. “2015년에는 전 세계 노벨평화상 받은 여성평화운동가 30명과 함께 평양에서 경의선 육로를 통해 한국으로 걸어왔던 ‘위민크로스 DMZ(Women Cross DMZ)’ 걷기행사를 했어요. 그 전에는 달라이 라마(達賴喇嘛), 아크비숍 데스몬드 투투(Archbishop Desmond Tutu) 등 노벨 평화상 수상자들과 20년 동안 전 세계 분쟁지역을 다니면서 평화의 다리를 놓는 일을 했어요. 멕시코의 치아파스, 북아일랜드, 캄보디아, 남한과 북한,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등 여러 분쟁지역을 다니면서 어떻게 하면 서로 평화를 만들 수 있을까 같이 나누는 일을 주로 했어요.” 편견을 이겨내는 삶 이렇게 활달하고 시원하고 생각을 표출하는데 스스럼없는 현경 교수지만 많은 편견을 이겨내고 살았다. 1989년부터 7년간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로 재직할 당시 그녀의 교수실에는 전 세계를 돌면서 수집한 여신상이 방 한가득 꾸미고 있었다. 그 방에서 학생들과 쌓은 추억을 되살리며 황홀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도 종교적 입장이나 반제도적 성향으로 비춰졌던 자신의 행동 때문에 학교와 마찰은 피할 수는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현경 교수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버텼다. “세 가지 방법이 있어요. 첫째, 완전히 깎으면서 도가 트는 방법. 두 번째, 아예 안 깎고 내 멋대로 사는 방법, 그리고 세 번째는 그냥 욕먹어가면서 적당히 사는 거예요. 대신 욕먹을 때 상처받지 말아야죠. 그냥 저들은 나를 오해할 권리가 있고 나는 해명할 의무가 없다고 말이에요. 그냥 그들의 생각이고 나는 내 생각이고 이렇게 생각하면 편해요.” 모든 게 좋아 보이는 뉴욕 생활도 사실은 만만치는 않다고 했다. “아무래도 뉴욕의 백인 학교에서 교수를 한다는 건 인종차별주의라든가 백인들의 문화적인 제국주의와 부딪히지 않을 수 없어요.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든지 잘 싸워가면서 살아가는 거죠. 자기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맷집이 키우는 거라고 생각해요. 맞게 되면 내가 이렇게 했으니까 맞는 거구나. 단 상처 받지는 말아야죠, 그렇다고 매를 맞지 않기 위해서 내 말을 안 할 수 없잖아요? 내 목소리를 내면서 매를 안 맞으면 제일 좋겠지만, 매를 맞게 되면 기꺼이 맞고 또 확 풀고 살아요.” 현경 교수가 처음으로 사람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영성과 종교적 관념을 얘기하는 그녀와는 또 다른 이미지였다. 이에 현경 교수는 “당연히! 안 그러면 어떻게 살아남았겠냐”며 교수가 되고 박사가 되는데 수석으로 들어가 수석으로 나왔기에 맷집도 필요했고 패기도 필요했다고 말했다. 한국애서 현경은 ‘빡’세게 살아야 했다 그녀의 경력을 보면 그 누가 봐도 ‘나쁘지 않은 삶을 살았네’라고 생각할 것이다. 수학의 전 과정을 수석으로 들어가 마쳤다는 그녀가 좀 얄밉게도 느껴졌다. “난 공부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원래의 꿈은 예술가였다. 미술이건 무용이건 연극이건. 그런데 아버지의 사업이 망했어요. 매번 꼴찌만 했는데 생존 때문에 공부 열심히 했죠. 학교도 못 가게 생겼더라고요. 그래서 하루에 4시간만 자고 공부했어요. 전액장학금 받으려고. 그래서 내가 중학교 때부터 박사학위 받을 때까지 학비를 한 번도 내 본 적이 없게 된 거예요. 대학을 들어가선 학생운동을 만났고 그땐 그럴 수밖에 없던 시절이니까. 인문계열로 들어가서 하고 싶은 공부 다 하고 3학년 때 신학전공하고, 철학를 부전공했으니 철학적 신학을 공부한 거죠.” 뉴욕에서의 삶, 교수, 학자 그리고 탱고 그래도 종신교수로서의 삶은 행복하다. 죽을 때까지 가르칠 수 있고 세계에서 모인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는 자체만으로도 좋다. “제가 가르치는 것이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 아침의 불교 명상, 신비주의와 현명의 영성, 에코 페미니즘과 지구 영성, 종교와 평화 등입니다. 내 과목이 재미있는 것은 내가 그냥 교수가 아니더라도 일생동안 그 분야에 관련한 책을 보면서 살고 싶어요. 근데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가르치면서 그걸로 돈을 버니까 너무 괜찮은 거죠. 그리고 뉴욕에서 저는 끊임없이 공부해요. 미술사를 공부하고, 문학 클럽에 들어가서 한 달에 한 번씩 세계고전을 계속 읽고 아르헨티나의 탱고를 배워요. 너무 예뻐요, 정기적으로 배우러 다녀요. 내가 즐겁자고 하는 거죠.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갔을 때 완전히 반해서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늙은 여자가 추기에 딱 예쁜 춤이 탱고인 거 같아요. 젊은 여자들은 잘 이해 못할 거 같아요.” 뉴욕의 삶이 너무 빡빡해 보였다. 쉼 없이 가르치고 공부하고 또 뭔가를 배우는 바쁜 삶의 연속 같았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정말 열심히 일하죠. 새벽에 일어나서 명상하고 학생들 가르치고요 그런데 금요일 오후부터는 모든 걸 닫아요. 인터넷도 안 해요. 그리고 주로 자연에서 시간을 보내요. 등산을 한다든지, 운동은 한다든지, 바다에 간다든지 일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자연 속에서 많이 쉬려고 해요.” ‘졸혼’ 그녀, 몇 살이 됐건 연애하고 살아야지 현경 교수의 결혼 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무척이나 사랑했던 사람과 결혼해 10년을 살았고 이혼이 아닌 ‘졸혼(卒婚)을 했다. “서울대 학생이었는데 노동운동, 농민운동을 하던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에 대해 표현하라면 그 당시에는 예수와, 체 게바라, 안드레아 보첼리를 섞어 흔든 사람이었다고 말해요. 7년 동안 연애를 하고 결혼했고 10년을 살았어요. 학생운동을 하다가 둘 다 납치되고 고문당했는데 저와 남편은 심리적으로 굉장한 트라우마를 받았고, 나는 그 경험으로 완전히 전사가 돼 나왔어요. 고문 없는 세상, 독재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데 남편은 그러지 못 했어요 그러면서 남편은 강성인 사회운동가에서 말도 못하게 보수적인 기독교 목사가 됐어요. 많이 사랑하지만 도저히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 결혼한 지 10년 만에 정리를 했죠. 아이도 낳을 수 없었어요. 서로 조율이 안 되는 상황에서 아이를 낳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어요, 나는 이렇게 기도를 해요. 내가 그 사람을 열여덟 살에 만났는데 어린 시절 내 영혼과 내 모든 것을 다 바쳤던 애인이자, 친구이자 동지였던 그런 사람이랑 젊은 여성이 할 수 있는 가장 열렬한 연애를 했던 거 같아요. 첫사랑이었어요. 그래서 결혼할 수 있게 해줬던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이후 결혼을 졸업했어요. ‘졸혼’을 했어요. 결혼은 인생에 있어서 한 번으로 족한 거 같아요. 세계는 넓고 남자는 많다. 그래서 세계의 아름다운 남자들과 연애를 하면서 살았죠.” 문득 30대 때 현경 교수가 궁금해졌다. 여전사로 느껴지고 혼자 인생을 짊어진 것 같은 느낌이지만 쉽지 않은 삶은 아니었을까? “그 나이 때 이 세상 욕은 다 먹고 살았어요. 마녀다, 이단이다 온갖 얘기 다 듣고 살았죠. 이혼했기 때문에 이혼녀 주홍글씨도 달고, 이혼했으면 불행해야 하고 어디 구석에 숨어서 죄인처럼 살아야 하는데 불행하지도 않고 더 예뻐지고 연애하고 결혼도 안하고 말이죠. 많은 사람들이 칼을 던졌어요. 그런데 자기가 행복한 사람은 ‘칼’을 안 던지고 잘하고 있다고 말해 줬고, 무척 부러워했어요, 자기가 불행한 사람은 나를 너무 미워했죠. 온갖 욕을 하면서. 결국은 맷집을 기르는 수밖에 없죠(웃음). 저는 이제 0살입니다. 120까지 살 거예요 아직도 현경 교수에 대해 어렵게 느낄지 모를 독자에게 한 말씀 부탁했다. 그녀가 아무리 괴짜 같아도 우리 독자들과 동시대를 살아 온 친구이자 연인이지 않은가. “나는 지난 60년을 나한테 가장 진실한 것이 무엇인가, 그 목소리를 따라서 파란만장하게 살아왔어요. 산전수전, 공중전, 핵전쟁까지 겪었어요. 한국에서 60이 돼서 환갑이 된다는 것은 육십갑자가 끝나는 거잖아요? 근데 나는 전생이 끝난 사람입니다. 이제부터 살아야 하는 60년은 제 삶이 컴퓨터 프로그램이라면 완전히 새롭게 리셋 했어요. ‘0세’이라고 생각해요. 새로운 삶은 치유자, 치유적 예술가 그리고 영적 안내자로 살아가고 싶어요. 여태까지 그걸 준비하는 과정이었죠. 지난 3~4년 동안 독일에서 자아초월심리학을 배웠고 행할 수 있는 자격도 얻었어요. 이제 더 많은 시간을 종교, 영성, 예술, 사회운동, 치유, 이런 걸 다 종합해서 내 내면의 문제와 사회변혁이 분리되지 않는 예술 그리고 영성이 분리되지 않는 개인적인 치유와 사회적인 치유가 분지되지 않는 그런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싶습니다. 그 에너지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하면서 앞으로 60년을 살고 싶어요. 하늘이 허락하는 한 120세까지 살고 싶어요.” 그녀와의 시간은 어려우면서도 낭만적이었다. 사실 ‘어디서부터 어떻게’라는 생각에 조급했고 이 방대한 얘기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 고민했다. 사실 그녀와 한 이야기는 인터뷰에 써놓은 것보다 더 오묘하고 깊다. 인터뷰라기보다 돈 주고도 못 사는 가르침의 시간이었다. 가을로 접어든 뉴욕의 어딘가에서 멋진 남자와 탱고를 추고 있는 그녀를 생각하며…
- 2016-08-23 13:49
-
- [브라보가 만난 사람] 문주현 MDM 회장의 돈의 철학 “돈은 내 것이 아니라 잠시 맡아 놓은 것, 사회를 위한 나눔으로 거듭나야”
- “어느 언론사 기자가 문주장학재단에 대한 기사를 썼는데 내가 환갑이 되기 전에 기금 200억 원 달성이 목표라고 마음대로 쓴 거야. 그래서 당신 때문에 200억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랬지. 그래서 달성해 버렸어(웃음).” 국내 디벨로퍼(부동산개발 업체) 1세대의 대표주자인 문주현(文州鉉·58) MDM 한국자산신탁 회장은 유쾌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 말에서 비범함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있다. 문 회장은 자신의 회사와 함께 문주장학재단을 세웠다. 그리고 재단은 어느새 회사 자본금보다 더 큰 규모가 됐다. 이제 남부럽지 않은 경력과 성취를 이루게 된 그가 어째서 그토록 사회 환원을 추구하는 걸까? 문 회장이 갖고 있는 돈과 사회, 그리고 시니어로서의 삶에 대한 철학을 들어본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 사진 이준호 기자 jhlee@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일만 하는 ‘노예’처럼 살았던 그는 검정고시에 합격한 후, 대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지독하게 가난했다. 후배 집에 얹혀살면서 생활비를 벌어 겨우겨우 필요한 돈만 메꿨던 생활. 2015년 매출액 4193억원을 기록한 MDM의 회장이자 한국자산신탁 회장을 겸하고 있는 국내 디벨로퍼 1세대 성공 신화의 주인공 문주현 회장의 20대 시절 얘기다. 가난한 사람이 돈의 소중함을 안다 “그러던 시절, 대학교 3학년 때 모 독지가로부터 전액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그때가 시작이었어요. 세상에 아무런 조건 없이 어려운 사람에게 베푸는 사람이 있구나 싶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과 약속했습니다. 내가 돈을 벌게 되면 나도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고.” 그의 약속은 현실이 되었다. 그는 현재 200억 원가량의 기금으로 운용되는 문주장학재단을 갖고 있다. 2014년 기금 100억 원을 달성한 후 불과 2년 만에 그 두 배를 달성한 것이다. 재단은 2002년부터 초·중·고·대학생 1750여 명에게 장학금을 지원했다. “2001년에 장학재단을 세우니 직원들 사이에선 회사 일을 안 하려나 보다 하고 소문이 났어요. 그러나 사람은 자기만족이잖아요? 내가 약속한 거고 신세를 졌는데, 해야지.” 문주장학재단의 수혜 대상자는 무조건 형편이 어려운 사람으로 선정된다. 그 외 특별한 선정 기준은 없다. 요즘은 돈을 많이 가질수록 공부도 더 잘하는 세상이다. 문 회장은 가난한 이들은 돈을 소중하게 쓴다는 신념이 있다. 그것은 그 누구보다도 본인이 세상에 증명한 사실이다. “장학 대상자는 웬만하면 바꾸지 말라고 해요. 다만 성적이 급격히 떨어지면 바꾸라고 하죠. 돈까지 대주는데 공부를 안 하는 건 기본이 안 된 거니까.” 돈이란 내 것이 아니다 문 회장은 장학재단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일이 쑥스럽다고 말했다. 그저 자신이 하고자 했던 일을 할 뿐이라는 말이었다. “장학재단을 하다 보니 나를 돈을 많이 벌었다고 소개를 안 해주고 좋은 일을 한다고 소개해줘요(웃음). 아 세상이 이렇구나 싶었죠. 물론 나보다 돈 많은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런 거겠지만, 회사보다 자본금이 더 큰 장학재단을 갖고 있어서 그렇겠죠.” 문 회장의 사회를 향한 지원에는 장학재단만 있는 게 아니었다. 고향인 전라남도 장흥의 모교에 씨름부를 만들고 공공버스도 운용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했다. 덕분에 전국 우승도 다수 경험하는 강한 씨름부로 거듭날 수 있었다. 서울시청 지하 1층 시민청에 마련된 서울책방이 다시 문을 여는 데는 문 회장이 쾌척한 1억원이 있었다. 국내 최초의 여자바둑대회에는 2억원을 내놨다. 모교인 경희대학교에도 매년 1억원 이상을 기부한다. 이쯤 되니 궁금해졌다. 그가 갖고 있는 돈의 철학이란 무엇일까? “돈이란 무엇인가? 내 것인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사회로부터 얻은 거고, 신앙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나에게 관리하라고 맡긴 겁니다. 이걸 갖고 자기 거라고 유세를 떠는 건 잘못된 거예요. 그리고 이 돈이 내게 관리하라고 온 것은 일정 부분을 사회에 내놔야 한다는 의미라고 봅니다.” 가진 사람이 못 가진 사람을 돕지 않으면 이 사회의 양극화가 해소될 방법이 없고 시장경제가 지탱할 수 없다. 문 회장의 ‘돈은 내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은 그러한 진실을 우회해서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그가 유독 젊은이들에게 기부의 타깃을 맞춘 것도 그들이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부모를 잘못 만난 것은 자기 탓이 아닙니다. 대신 정신이 올바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문주장학재단은 예술계 쪽 지원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한다. 아직 본격화된 것은 아니지만 여러 방향에서 검토하는 중이다. “사회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보니 문화예술계 쪽이 굉장히 어려워요. 그런 사람을 도와주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능력 있고 자질 있는 사람을 골라서 지원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예를 들어 ‘이상문학상’처럼 공모를 통해 권위가 있도록 만들어야겠죠. 아직 밑그림을 정확하게는 안 그렸지만 오페라, 소설, 악기 쪽 등등 다양한 분야에서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도시재생, 사회를 위한 또 하나의 인생 목적 최근 문 회장이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업은 도심재생 사업이다. 그에게 시기가 괜찮은지를 물어보자 확신처럼 ‘해야 할 시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도시재생을 지금까지는 자기 지역, 구역 별로 민간에서 했는데 민간이 하는 건 한계가 있어요. 앞으로의 세계는 도시가 국가 브랜드입니다. 싱가포르, 홍콩, 도쿄, 뉴욕 등등을 봐요. 관광할 때 그 나라를 왜 가느냐는 겁니다. 관광은 자연관광과 도시관광으로 나눌 수 있어요. 우리나라는 자연관광이 취약합니다. 그렇다면 도시관광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을 도시 관광 국가로 만들려면 도시재생이 이뤄져야 합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살 거주 공간으로서의 도시의 공급이 부족했다. 그래서 신도시를 마구, 급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저출산, 저성장기가 도래했다. 더 이상 신도시는 안 만들어질 것이라고 문 회장은 진단했다. 그렇다면 오래된 도시를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도시재생이 중요해지는 게 당연한 수순이다. 그리고 이 분야에서 문 회장은 발 벗고 뛰는 적극적인 ‘전도사’였다. “공청회나 세미나를 하자, 우리나라의 발전 방향을 토론해보자. 하다못해 광화문, 테헤란로 등등으로 나눠 섹터 별로라도 하자라고 말하고 있어요. 우리는 민간과 같이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에요. 도시 부동산은 대개 개인 소유라.” 문 회장은 우리가 아이디어가 부족한 나라가 아니라고 단언했다. “관광을 대개 일본이나 홍콩, 싱가포르로 가잖아요 그런데 거기에 가서 보는 게, 결국 우리나라 건설회사들이 지어 놓은 걸 보는 거예요.” 실로 예리한 한마디였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못할 게 뭐가 있겠는가? “개발과 보존은 공존해야 합니다. 북촌이나 서촌 같은 문화적 가치가 있는 지역은 보존해야죠. 다만 재개발해야 하는 곳은 과감하게, 제대로 개발해야 합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대성공하면서 흔히 강남스타일이라는 표현을 하지만, 막상 강남을 가면 갈 데가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밤이 되면 거리는 죽고 뒷골목만 살아난다. 문 회장의 주장대로 도로 옆에 문화공간을 배치하여 문화 향유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부터 시작함으로써 진짜 ‘강남스타일’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건설회사는 도면대로 짓고, 도면이 없으면 한 삽을 못 떠요. 하드웨어라고 할 수 있죠. 반면 디벨로퍼는 지휘자고 소프트웨어 역할을 할 수 있어요. 상상력을 실현하는 이들이죠.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우리나라에도 종합부동산 금융그룹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실버타운, 도시와 함께 하는 공간이 되어야 “나이 들어 은퇴하면 인생에 낙이 없어요. 즐거움, 기쁨, 재미가 없어지죠. 젊었을 때는 뭐든 재미있었는데. 그래서 더욱 손주에게 끌리는 거겠죠. 나도 늦둥이가 있어요. 지금 제주도에 있는데 ‘네가 아빠 희망이지’라고 말하곤 해요. 손주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시니어이자 부동산 전문가로서 문 회장은 자신과 같은 마음을 가진 이들의 마음도 꿰뚫고 있었다. “실버일수록 도심으로 들어오고자 합니다. 전철, 공원, 병원 옆으로 말이죠. 그렇지 않으면 손주들을 못 보기 때문이에요. 실버가 되면 외롭습니다. 그러니 무조건 전철역 근처에 자리를 잡게 되는 거예요. 어느 성공한 시니어가 하는 말이, 자식들이 손주를 데리고 와서 자신에게 맡기고, 장을 보러 간다든지 하면 손주와 함께 있는 게 그렇게 즐겁다는 거예요. 그런데 자신이 지방에 있으니 전화만 하고 안 와서 섭섭하다는 겁니다.” 문 회장은 실버타운을 짓는다면 신경을 써야 할 부분으로 기능적인 구분을 꼽았다. 몸이 불편하여 간병인 등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는 곳과 건강한 사람들이 모여 친구들과 취미 생활 등을 할 수 있는 시니어 타운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혹은 두 영역을 합친다 해도 중간에 병원을 두어 병원을 중심으로 분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둘 다 도심에 있어야 한다는 건 공통된 조건이다. “실버타운은 구성원의 특성상 죽음과 밀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젊음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사람들과, 도시와 섞여 살아야 해요. 구분을 짓지 말아야 합니다. 이 시장은 굉장히 성장할 것이고, 정부에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주위 사람들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라며 산다 문 회장은 올해로 환갑을 목전에 둔 나이가 됐다. 그에게도 지금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 있을까? “사실 후회를 좀 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돈은 벌었을지 모르지만 내 청춘이 가버렸잖아요. 생각해보세요. 제가 연애를 잘 해봤겠어요? 당구도 못 치지. 그때는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삶 자체가 옆을 볼 수가 없었던 시절이었죠. 아내가 저에게 ‘음악을 알아?’, ‘그림을 알아?’ 하고 물어요. 그럼 저는 ‘몰라’라고 대답할 수밖에요. 저는 솔직한 얘기로 너무 안 해본 게 많고 모르는 게 많아요. 내 업무와 내가 하는 부분만 알지. 그래서 요즘은 정말 여행을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될 수 있으면 비행기로 6시간 이내로 끊어서 가려고 해요. 좀 더 많은 여행을 하는 것, 그게 제 인생을 위한 중요한 일이겠네요.” 문 회장은 아내가 자신을 보며 종종 불쌍하다고 말한다고 한다. 일밖에 모르니까. 그런데 그는 일이 없으면 공허해지는 것 같다고도 말했다. 말하자면 문 회장은 자신을 돌보고 아끼는 데 익숙하지 않은, 그 부분을 일로 채우는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다. “그렇게 안 하려고 해도, 그게 쉽게 안 돼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비빔밥이에요. 비벼서 빨리 먹고 일하러 가야겠다는 생각인 거죠. 그리고 비생산적인 데에는 투자를 안 하려고 해요. 와이프는 왜 남은 도와주면서 자기는 그렇게 안 하냐고 타박합니다. 그런데 남을 도와주는 것은 그 사람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는 일이죠.” 힘들었던 어린 시절, 서른 살이 넘어 입사한 나산에서의 승승장구, IMF 한파로 인한 퇴직, 퇴직 후 MDM 설립과 한국자산신탁 회장이 되기까지. 고난과 성공을 오가며 쉼 없이 살았던 그가 살면서 이것만은 지켜야겠다는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어떤 일을 하든지 주위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내 돈 몇 푼이 중요한 게 아니고 뭘 하든지간에 같이 상생할 수 있는 일을 우선했습니다. 이 일을 하면 참여자들이 만족하느냐, 소비자가 만족하느냐, 사회가 만족하느냐가 기준이었죠. 그래서 저는 디벨로퍼의 도덕성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건물을 짓는다고 했을 때, 이걸 짓다가 멈춰 서버리면 사회적 악이 돼요. 금융사, 시공사, 협력업체, 분양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시의 흉물이 되잖아요. 그만큼 디벨로퍼란 정> 문주현 MDM 회장 1958년 전남 장흥에서 9남매의 다섯째로 태어났다. 1978년 대입 검정고시를 보고 군대까지 다녀온 뒤 1983년, 27세의 늦은 나이에 경희대 회계학과에 입학·졸업했다. 1987년 나산실업에 입사, 부동산개발 사업에 발을 들였고, 7번의 특진을 통해 최연소 임원이 됐다. 하지만 나산그룹은 IMF 외환위기를 맞아 부도를 맞았다. 그는 재취업을 고민하다가 1998년 분양대행 업체인 MDM을 만들었다. 2007년 첫 시행사업에 나서기 전까지 ‘분당 코오롱 트리폴리스’, ‘분당 파크뷰’, ‘목동 현대 하이페리온’ 등 굵직한 주상복합 건물의 분양대행을 도맡았다. 2001년 재단법인 문주장학재단을 설립해 현재 출연금을 200억원까지 늘렸다. 2010년 한국자산신탁을 인수했으며 2012년 한국자산캐피탈을 창립했다. 2013년부터 서울시탁구협회 회장, 2014년부터 한국부동산개발협회 회장, 2015년부터는 전국검정고시 총동문회장을 맡고 있다.
- 2016-08-18 08:41
-
- [미니 자서전] 인생의 터닝 포인트
- 1915년 5월 27일생이신 아버지와 1922년 11월 1일생이신 어머니 사이에서 1946년 1월 4일 8시께 1942년 8월 13일 누님에 이어 둘째로 태어났다. 2년 뒤 여동생, 4년 뒤 또 여동생이 태어났고 막내 남동생과는 9살 터울이다 어릴 적 기억은 4세 때 한국은행 돌계단을 오르면서 엄마 손 잡고 명동 가던 것뿐이다. 누나는 공부를 잘해 늘 전교 1등이었는데 그 동생은 말썽꾸러기라서 늘 창피하다며 야단을 쳤었다. 학교에서 누나에 거는 기대가 크면 클수록 필자는 야단을 적게 맞고 반대로 장난은 늘어만 갔다. 드디어 누나가 50년 개교 이래 처음으로 경기여중을 들어갔다. 누나 졸업과 동시에 필자는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었다. 무엇 조금만 잘못해도 엄청 꾸중을 들었다. 아마도 그동안 적립해 놓은 야단을 한꺼번에 듣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일이 터졌다. 학교 주변은 피난민이 많이 살았는데 대개 남대문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의 자제였다. 학교 끝나고 오는 길에 그들 몇이 모여 한 아이를 끌고 가 여럿이 골목에서 때리는 것을 보았다. 말썽부리고 공부는 잘못 해도 남을 해치고 약자를 괴롭히지는 않았는데 무슨 생각이었는지 뛰어들었고 우릴 아는 애들이 뒤따라 들어와 패싸움이 되어 일이 엄청 커졌다. 다음날 부모가 들어왔는데 그악스런 이북말씨에 네 일도 아닌데 싸움판에 끼었다는 요즘 말로 하면 변호사법 위반으로 징계를 먹었다. 다행히 초등학교여서 퇴학이 없어 전학으로 결정됐다. 5학년 후반 남대문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런데 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과를 끝내고 집에 오려는데 왠지 많은 아이가 빨리빨리 교실을 빠져나가고 열 두어 명이 남더니 뒤에서 양동이를 머리에 씌우고 몰매를 놓는 것이었다. 학교 근처에 서울역 양동이라는 사창가가 있었는데 그곳 아이들이 뭉친 게 한패, 남대문 시장 뒤 고아원 아이들이 한패로 그들만의 리그가 볼만했다. 전학생이 왔는데 패싸움 때문에 전학 왔다니까 기선을 잡기 위해 선수를 친 것이었다. 그런데 다음날 망치를 하나 들고 갔다. 노는 시간에 하면 여러 명에게 당할 것 같아 공부시간 중간에 뒤에서부터 한 명씩 깼다. 당연히 학교가 난리 났다. 결국 3개월 만에 멀고도 먼 교동초등학교로 전학 갔다. 이곳은 맹모삼천지교란 말이 실감 나는 곳이었다. 한반이 72명인데 왜 이렇게 조용히 공부만 하는지 답답하기만 했다. 필자도 할 일이 없어 공부하기 시작했다. 두 달 후 6학년이 되었다. 72명이 어깨 맞대고 촘촘히 앉아 시험을 봤다. 그래도 두 달 공부 열심히 했다고 아는 문제가 많아 정말 신나게 시험 봤다. 일요일이 주일 후 시험성적표가 성적순으로 나와 뒷벽에 붙었다. 그런데 나름대로 시험도 잘 봤는데 팔저 이름이 없는 것이었다. “선생님 제 이름은 없는데요?” “그래? 번호는 몇 번까지 있니?” 72번이요.” “그럼 맞는데 어디 보자.” 갑자기 머리에 벼락이 떨어졌다. “야 임마 여기 있잖아. 너는 네 이름도 못 읽냐.” 아차 필자 번호 67번에 필자 이름이 있는 것이다 필자 생전 그렇게 재미있게 시험 본 경험이 없을 정도로 재밌게 봤는데 이상했다. 시험지 확인을 해보니 평균 82점인데 67등이었다. 그렇다면 점수 18점 안에 66명이 있다는 것 아닌가. 6년 내내 최고 점수 평균 91점 받아봤지만 등수에는 거의 변함이 없었다. 중학교 입학해 공부 좀 하려는데 집에 큰일 생겼으니 빨리 가보라는 담임교사 말에 어리둥절해 가보니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갔다. 5남매 장남으로 7식구 돌보는 삶이 시작된 것이다. 우선 먹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신문 배달뿐이었다. 대학도 안 가려는데 어머니가 앞으로는 대학 졸업장 없으면 행세를 못 하니 앞으로 들어갔다가 뒷문으로 나오더라도 졸업장은 반드시 가지라고 말했다. 공부 잘하는 누나 한 사람 대학 보내기도 쉽지 않은데 필자 덜컥 시험을 봐 경희대에 턱걸이로 합격하니 어머니는 얼마나 심란했을까. 그 시절은 생애 최고의 순간이기도 했고 불안의 나날이기도 해다. 필자는 누나가 결혼한 뒤 군대에 갔다. 훈련을 마쳐 각자 본대로 가는데 그 많은 훈련병 다 호명해 갔으나 마지막까지 혼자 남았다. 알고 보니 육군본부였다. 군대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필자 복에 육군본부라니 말도 안 됐지만 사실이었다. 근무 중 월남파병 백마부대에 차출되어 강원 화천 오음리서 훈련받았다. 만기 제대를 하고 도저히 경희대 주간을 다닐 형편이 되질 않아 건국대 야간대학으로 옮겨 낯에는 일하고 밤에 학교를 다녔다. 경희대 다니며 친구들과 만든 “포도원”이란 모임은 지금도 50년 넘게 만나고 있는데 이혼, 상처, 상부, 본인 사망한 친구가 없는 모임이다. 건국대 야간은 낙원동에 위치한 96%가 직장을 다니며 주경야독하는 백전용사들이다. 지금도 매월 첫 수요일 저녁은 그들과 함께하는데 시멘트에서도 싹 튼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입가에 웃음이 걸려 있는 지독한 독서광들인 친구들이다. 건국대 야간 경제과를 졸업하고 학사가 되었다. 어머니 말대로 앞으로 들어가 뒷문으로 나온 기분이었다. 그해 10월 아내와 결혼했다. 그리고 1973, 75, 78년 생 딸 2, 아들 하나 아이 셋을 낳았다. 그리고 큰애가 아들과 딸, 작은애가 딸 둘을 낳았다. 1998년 소마라는 개인회사를 만들었다. 특수방식의 사료 첨가제였다. IMF가 왔지만 사료비를 아끼려는 농가가 많아져 오히려 매출이 늘었다. 크기를 키워 주식회사로 만들고 상호도 (주)지니 바이오로 변경했다. 이후 회사는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사옥도 사고 직원도 늘리고 거의 수직 상승곡선이 그려졌다. 하루 운행 거리가 최고 762km. 평균 500km가 넘을 정도로 영업하고 다녔다. 그리고 영업을 위해 삼성 SM5를 샀다. 이 차는 세상에 차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걸 내게 알려준 최초의 차였다. 차 뺀 지 2년 만에 35만km를 달렸지만 잔 고장 하나 없이 잘도 달려주었다. 그런데 2000년 구제역이 왔다, 매출이 100%에서 3%로 떨어졌다. 1년 후 재기를 노려 농가를 다니길 약 20일. 그러나 다시 구제역이 왔다. 사옥도 팔아가며 버티고 버티며 2011년까지 왔지만 역부족 결국 남에게 넘겼다. 그러는 사이 나라에서 지하철 공짜카드가 나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이가 벌써? 대한노인회에 이모작 준비에 관해 문의했다, 그런데 답이 “집에서 가까운 경로당에 가서 봉사하라”라고 하는 것 아닌가. . 잔버들 경로당에 가서 한 달을 버텼다. 경로당은 구립이라 지원금이 일 년에 360만원이 전부였다. 그래서 근처 절, 성당, 교회, 기업체를 다니며 ‘한 달에 한 번 어르신들께 점심 기부를 해 달라’며 다녔다. 많은 사람 앞에서 직접적인 필자 일도 아닌 금전적인 것을 부탁하러 다니다 보니 얼굴만 벌게 지며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40여년을 오로지 스피치 교육만 하고 있다는 ’한국언어문화원’을 찾아갔다. “지금처럼 서로 마주 보고 일대일로 상대를 설득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낚시법이라 한다면 저희는 일대 다중을 설득하는 투망법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하는 원장 말에 뿅 가서 그날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 발성 연습을 하며 우리말이 이렇게 어려운 것인지 처음 알았다. 6개월 하고 나니 발성이 제대로 나오게 되었다. 얼마나 배웠는지, 남 앞에 제대로 설 수 있는지 알아보려 2012년 11월 3일 전남 광주시에서 열리는 제38회 박정희대통령기 쟁탈 전국웅변대회에 그 당시 한참 신문, 방송에 오르내리는 이태석 신부의 일대기를 웅변했다 . 결과는 특등. 그 한 번의 경험으로 연단 공포증을 단숨에 없애버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쉬지 않고 매주 월요일이면 스피치 공부하러 다니고 있으며 현재는 한국언어문화원에서 교수진에 등록되어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특등으로는 성이 차질 않았다. 2015년 11월 7일 광주에서 열리는 제41회 박정희대통령기 쟁탈 전국웅변대회 주제는 그해 대단히 가물어 식수마저 끊기는 지역까지 있어 ‘환경은 생명이다’”라는 원고로 참가해 마침내 대상을 거머쥐게 되었다. 1년 후 조선에듀케이션과 유어스테이지(주) 시니어파트너즈에서 강사 과정이 있다기에 응시해 생애 재설계를 배웠다.건강, 인식, 관계, 경제, 직업, 주거, 여가, 계획과 실천, 교수법을 배웠다. 그렇게 죽을 만큼 공부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결과는 합격. 필자가 강사가 되다니 꿈만 같았고 그 길을 계속 가고 싶었다. 2013년 3월 11일 강사자격인증서를 받았고 3월 21일 드디어 강사위촉장을 받으며 강사생활이 시작됐다. 필자는 무엇이든 빠르지 않고, 재주부릴 줄 모른다. 하지만 인생은 절대 뒤로 가지는 않는다. 필자는 강사 과정을 함께 공부했던 사람 중에 대단히 해박하고 아는 것이 많았다. 공부해 보니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회 각당복지재단에서 웰다잉을 공부하라 지도해 주셔 죽음학을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 죽음의 의미를 알아보는 로고테라피 강의는 그 중에도 백미였다. 다모작포럼협동조합에서 “한(정수) 이사”의 준말인 ‘하니’란 애칭으로 교장 선생 일도 보람 있게 하고 있다. 필자에게 강사라는 꿈이 있었을까? 연단에서 누굴 가르친다는 게 가능했을까? 필자는 돈만으로 격을 따지는 세상에서 인성의 사각지대에 있는 그들에게 어깨를 빌려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동안 배운 모든 과정을 녹이고 녹여 재미있는 강의를 하다 보니 지금은 공무원연금공단 변화관리 전문강사로 활동하며 직접 겪은 '불가능에서 가능으로 전환 과정'을 중장년에게 전수해주려 하고 있다. 아울러 '다가치포럼 협동조합' 전무이사로 '중장년 미래전략 강사양성'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정부 지도자 과정도 다음 달에 개설할 예정이다. 교육이 대세라는 생각은 팔저를 생각하면 당연한 길이다. 무궁한 발전이 있을 것이다. 혼자가 아닌 함께 가는 길이기에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 2016-08-17 15:33
-
- 해리슨 포드의 영화 ‘위트니스’ 감상기.
- 어릴 때부터 우리 엄마는 영화관에 가실 때마다 필자를 데리고 다니셨다. 그래서일까? 필자는 영화 보는 걸 무척 좋아한다. 영화라면 장르에 상관없이 다 좋아하지만 요즘 많이 나오는 주제인 좀비라던가 와장창 때려 부스는 영화는 별로이다. 특별히 좋아하는 영화가 많지만, 영화를 생각하면 어릴 때 보았던 아름다운 한 장면이 먼저 떠오른다. 어떤 영화였는지는 기억에 없어도 한겨울 예쁜 아치 모양의 다리 밑에서 한껏 차려입은 남녀가 스케이트를 타는 모습이다. 남자들은 정장을 차려입었고 여자들은 허리가 잘록 들어간 긴 치마의 투피스 차림으로 모자에 깃털까지 아주 멋을 내었다. 꽁꽁 언 다리 밑 강에서 둥글게 원을 그리며 얼음을 지치는 선남선녀의 모습은 너무나 낭만적인 풍경이어서 어른이 되었을 때까지도 그 장면이 머릿속에 남아 잊히지 않았다. 요즘은 좀 바쁜 일이 있어 편안하게 영화나 드라마를 볼 시간이 없었지만, 언젠가는 시리즈물을 앉은 자리에서 네, 다섯 편이나 계속 본 적도 있을 정도로 필자는 영화 보기를 좋아한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재미있는 모임에 참석하는 기회가 있었다. 이번 모임에서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와 강의하신 선생님이 선정해 오신 영화를 한 편 감상했다. 강사 선생님은 해리슨 포드가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와 스타워즈 등 수많은 영화에 출연했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순수하고 매력적이었다고 평을 하셨다. 제목은 ‘위트니스’로 목격자라는 뜻이다. 첫 장면은 매우 목가적이고 아름다운, 자연의 풀이 바람에 일렁이는 서정적인 풍경으로 시작되었다. 미국에 청교도처럼 문명을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삶을 고수하며 살아가는 집단으로 ‘아미쉬’ 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모여 살며 현대문명과는 동떨어지게 전기나 TV, 자동차, 냉장고 등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지 않고 폭력과 성 등 욕망 적이며 선정적인 것에 거리를 두고 농사를 지으며 엄숙하고도 평화롭게 그들만의 자연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는 집단이다. 이들은 어떤 폭력도 원하지 않아 주거지를 벗어난 지역에서 그들을 모욕하거나 놀리는 사람들에게도 절대 대적하지 않고 묵묵히 당하고만 있으니 아무리 평화를 위해서라지만 부당하고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느 날 남편이 죽어 미망인이 된 엄마 ‘레이첼’은 어린 아들 ‘새뮤얼’과 난생처음 ‘아미쉬’를 떠나 볼티모어에 사는 친척을 찾아보기 위해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게 된다. 열차를 갈아타기 위해 필라델피아 역에 잠시 머무르는 동안 어린 아들은 화장실에서 살인을 목격하게 된다. 살인사건을 신고했으니 아들 새뮤얼은 목격자로 경찰서에 오게 되고 형사 ‘존’이 담당하게 된다. 범죄자 목록을 보여주어도 어린 목격자는 지목하지 못하는데 경찰서 내의 장식장 안에 트로피를 들고 활짝 웃는 사진의 흑인 형사를 보고 가리킨다. ‘존’은 놀라며 얼른 그의 손가락을 감추어 준다. 소년이 가리킨 사람은 동료 형사였다. 엄마와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집으로 돌려보낸 후 조사를 하던 중 동료 형사가 마약을 빼돌리고 살인까지 한 걸 알게 되고 부장에게 보고하지만 실은 부장이 주범이었다. 사건을 조사하던 중 총을 맞고 부상당한 상태로 차를 몰아 찾아든 곳은 아미쉬 마을 레이첼 집 앞이었다. 우체통을 들이받고 기절한 그를 시아버지와 레이첼은 정성을 다해 간호하고 회복시킨다. 미망인이 된 그녀를 사모하는 아미쉬 남자가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그들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존은 그 마을이 답답하고 동화될 수 없음을 안다. 어느 날 건강을 회복한 존이 망가트린 우체통을 고치는 걸 보게 된 레이첼은 그게 무슨 뜻인지 느끼고 이별을 감지한다. 그녀는 평소 머리에 쓰고 있던 보닛을 벗고 그를 찾아간다. 아미쉬 마을 일을 도우며 지내던 어느 날 악질 부장과 형사가 찾아온다. 나쁜 형사를 물리쳤지만, 존은 부장에게 인질로 잡히고 만다. 어린 소년이 위험을 무릎 쓰고 종을 울려 아미쉬 남자들이 몰려오고 경찰도 출동해 부장형사는 체포된다.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다. 필자는 존이 그 마을에 남아 레이첼과 영원한 행복을 찾든지, 레이첼이 존을 따라나서 도시생활을 하게 될 줄로 알았는데 결국 레이첼은 평생 살아온 대로 엄격한 아미쉬 마을에 남고 존은 도시로 돌아간다는 이야기이다. 서로 다른 세계를 살아온 그들이 동화될 수 없는 생활에 질척이지 않고 깔끔하게 헤어진다는 이야기가 가슴이 아프면서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필자라면 사랑하는 남자를 따라 마을을 떠났을 것 같은데 역시 살아온 방식을 버릴 수 없었던 연인이 안타깝기만 하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해리슨 포드의 매력이 한껏 돋보인 신선한 영화를 한 편 보았다.
- 2016-08-08 16:21
-
- [장홍의 와인여행] 와인 구매 가이드라인 8가지 포인트
- 세상에 와인을 구매하는 행위보다 간단한 것도 없다. 마트나 와인 숍 등에서 여느 상품처럼 그냥 돈을 내고 사면 그만이다. 그러나 원하는 와인을 제대로 구매하는 것만큼 까다로운 일도 드물다. 글로벌 시대에 특히 뉴 월드 와인이 공산품처럼 대규모로 생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와인은 여전히 규격화된 공산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와인 중에서 자기가 필요로 하고 자신의 취향에 맞는 와인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와인의 최고 전문가라 해도, 이 세상에서 생산되는 모든 와인을 모조리 꿰차고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실수하지 않고 와인을 구매하려면 몇 가지 가이드라인을 세우는 것이 바람직하다. 첫째, 자신의 취향에 맞는 와인을 찾아라. 최고로 비싼 와인이 존재할지 모르지만, 향과 맛에 관한 한 최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존재한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에서 최고일 뿐이다. 게다가 주관적인 관점은 시시각각으로 변할 수 있다. 각자의 취향에 따라, 그리고 그날의 기분, 컨디션, 분위기 그리고 함께하는 사람과 음식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평소 여러 종류의 와인을 접해보고, 자신에게 맞는 것을 고르는 훈련이 필요하다. 와인 선택에도 당신의 개성과 끼를 발휘하라. 둘째, 비싸다고 다 좋은 와인은 아니다. 대체로 값과 질은 비례한다. 저 유명한 1855년 보르도의 ‘그랑 크뤼 클라세’도 가격을 바탕으로 작성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값에 비해 질이 수준 이하인 것들이 생각보다 많다. 특정 AOC의 명성을 배경으로 질에 비해 터무니없이 비싼 와인들도 있다. 그러니 레이블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아직 세상에 그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가격 대비 질이 우수한 와인을 찾는 노력을 하라. 가격이 적당하면서도 질이 우수한 새로운 와인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느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똑같은 와인이 어느 날 유명 전문 잡지에 소개되고 나면 값이 20~30% 이상 치솟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니 먼저 선수를 쳐라! 참고로 프랑스에는 병당 1만5000원 이하의 와인만 모아 놓은 와인 가이드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와인을 레이블이나 값으로 마시지 않고 각 와인의 고유한 특성을 음미하고 즐길 수 있을 때, 진정한 와인 애호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오래된 와인이라고 무조건 좋은 것은 결코 아니다. 대개의 와인은 생산 후 5년 안에 마시는 것이 좋다. 화이트나 로제 와인의 경우는 1~3년, 레드 와인의 경우는 3~5년 정도가 적당하다. 그리고 샹파뉴는 특별한 빈티지 샹파뉴를 제외하면 구매한 후 최대한 이른 시일 안에 소비하는 것이 좋다. 보졸레 누보는 6개월 내에 마셔야 한다. 물론 뛰어난 빈티지의 고급 와인의 경우 보관기간이 10~20년 이상 가는 것들이 대다수지만, 이런 와인은 값이 비싼 만큼 예외적이란 사실을 기억하라. 그리고 이런 고급 와인은 하나같이 타닌이 높아 몸체가 탄탄한데, 너무 일찍 마시면 향과 맛이 채 열리지 않아 절대 고급 와인의 오묘한 진수를 느낄 수 없으니 창문으로 돈을 던져 버리는 것과 같다. 넷째, 빈티지에 너무 연연하지 말라. 많은 와인 아마추어들이 빈티지 표를 마치 수학 공식처럼 신봉하는 경우가 있다. 사실 빈티지는 와인의 출생신고 같은 것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같은 지역, 같은 빈티지라 할지라도 주조하는 사람의 정성과 테크닉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와인이 나올 수 있다. 그러니 빈티지를 참고는 하되 너무 신봉하지 않는 게 좋다. 게다가 나쁜 빈티지는 오랜 보관이 불가능하므로, 고급 와인이라 할지라도 오랜 기간 기다리지 않고도 마실 수 있고 가격도 저렴해 우리 실정에 맞는다고 판단된다. 가끔 활용해보기 바란다. 다섯째, 머잖아 마실 와인과 장기간 보관했다 마셔야 할 와인을 구별하여 구매해야 한다. 귀한 손님을 대접한다고 10년 이상 보관했다 마셔야 제격일 ‘그랑 크뤼 클라세’를 구매해서 그날 바로 마시는 것은 정말이지 어리석은 행위이며, 와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본다. 자칫 돈만 낭비하고 얼굴을 찡그리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여섯째, 같은 와인을 최소한 여섯 병 단위로 구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러 사람과 마실 때 한 병으로 모자라는 낭패를 피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한 종류의 와인을 일정 시간을 두고 마시게 되면, 그 와인에 대해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같은 와인이 자신의 기분이나 컨디션, 그리고 시간과 더불어 어떻게 발전해 나가는지도 경험해 볼 수 있다. 만약 그러지 못할 사정이면 최소한 두세 병이라도 구매하는 것이 좋다. 물론 매우 귀한 고가의 와인일 경우는 한 병으로 만족해야겠지만. 일곱째, 믿을 만한 와인 가이드북을 한 권 정도 준비하는 것은 필수다. 한글로 번역된 것들도 있으니,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접근이 가능하다. 가이드북을 통해 와인을 구매하기 전에 구매할 와인에 대해 사전에 공부를 할 수 있고, 마시고 있거나 마신 와인이 어떤 것인지 검토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내린 평과 전문가의 평을 비교해 봄으로써 와인 시음에 대한 능력과 자신감을 향상시킬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매우 까다로운 문제인 ‘언제가 마시기 적절한 시기인가?’에 대해서도 상세히 일러준다. 가이드북의 종류에 따라서는 생산자나 가격에 대한 여러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으니, 각자의 필요에 맞는 와인 가이드북을 꼭 한 권 갖추라고 권한다. 한 가지 문제점은 매해 새로운 빈티지가 나오기에 매해 새로운 빈티지를 첨가한 가이드북의 개정판이 나온다는 점이다. 와인 마니아나 이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적당한 간격으로 구매하면 어떨까 한다. 최선의 방법은 아니지만 차선은 되리라고 믿는다. 여덟째, 공동구매를 해보라. 와인을 좋아하는 지인들과 같이 공동구매에 대해 논의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서로 모르는 와인에 대한 새로운 지식도 습득하게 되고, 특히 할인도 받을 가능성이 높다. 가격대가 높은 와인일수록 공동구매는 더욱 유용하리라 본다. “당신이 어떤 와인을 마시는지 말해주면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한다. 그만큼 이제 와인은 단순한 음료나 상품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뜻이다. 그러니 와인의 선택은 간단한 생필품 구매와는 여러 면에서 차원이 다르다. 단순히 주머니 사정을 넘어, 선택하는 사람의 성향과 인품을 나름대로 반영하기 때문이다. >> 장 홍(張洪) 성균관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국제관계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프랑스 알자르 소믈리에협회 준회원이며, 등 다수의 저서를 펴냈다. 사회학적 측면에서 살펴본 와인, 인류역사 속 와인의 의미와 파워, 예술 인문학을 통해 본 와인 등에 대해 강의도 하고 있다.
- 2016-08-05 16:46
-
- [시니어클래스] 그림 그리기 ‘특별한 취미’가 아닙니다
- 최근 그림을 취미로 하는 연예인들의 이야기가 많은 사람 사이에 회자되었다. 배우 김혜수와 구혜선의 그림이 아트페어에 걸린 이야기가 화제가 되더니, 배우 하정우의 그림이 수천만원에 거래된다는 이야기도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그러다 가수 조영남의 대작 논란으로 ‘아트테이너’에 대한 관심이 절정에 이르렀다. 이쯤 되니 그림은 ‘특별한 사람’들의 ‘특별한 유희’로 여겨진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물론 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이젤을 세운다. 그리고 하얀 캔버스를 올려 조금씩 스케치를 한다. 아마 노후의 취미생활을 꿈꾸어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상상해 본 장면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떨까. 통계청의 ‘2015년 사회조사 결과’에 따르면 50대는 53.2%가, 60세 이상은 56.4%가 노후를 보내고 싶은 방법으로 취미활동을 꼽았다. 자원봉사나 종교활동 등 다른 활동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였다. 그러나 실제 여유시간을 보내는 여가활동으로 50대의 72.2%가, 60대 이상의 81.2%가 가장 간단한 TV 시청을 꼽았다. 대다수가 이상과 현실이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예술활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응답은 3%도 되지 않았다. 심리적 장벽이 높은 취미 ‘미술’ 미술은 시니어들을 위한 취미로 가장 먼저 손꼽히는 분야 중 하나다. 시니어 대상 교육기관에서 미술은 빠지지 않는 단골 분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붓을 손에 쥐지 못하는 시니어들이 적지 않다. 그 이유는 바로 선입견이라고 권인수 화백은 설명했다. 경기도 성남시 판교동에서 5년째 일반인과 시니어들을 대상으로 회화를 가르치고 있는 화실 ‘아트담’의 대표이기도 한 권 화백은 회화나 미술에 대한 편견이 장벽처럼 작용하고 있다고 했다. “학교가 입시 교육에 집중하면서 학생들이 미술, 그러니까 아름답게 그릴 수 있는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는 초등학교에서 멈춘 셈이죠. 잘 못 그리는 것이 당연해요. 그런데 스스로 재능이 없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재능을 갖고 있어요.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재능이 아니라 들이는 시간과 노력이에요. TV 프로그램 에 나오는 수많은 달인들을 보세요. 그들이 자기 직업에 대해 재능을 갖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잖아요. 오랜 직장생활과 노력 덕분이죠.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다른 선입견 중 하나는 그림은 돈이 많이 드는 취미라는 것. 그러나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도구만 따지면 결코 그렇지 않다. 화실 수업료를 제외하면 이젤과 물감, 붓 등의 구매비용은 25만원 내외에 불과하다. 사진이나 자전거 등에 비교하면 되레 저렴한 취미인 셈이다. 이나마도 캔버스를 제외한 나머지 재료들을 강습생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하는 교육기관도 있다. 학원…화실…본인에 맞는 곳 선택을 실제로 그림을 그리겠다고 마음먹었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주변에서 ‘스승’을 찾는 일이다. 시니어를 대상으로 회화 등 미술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은 각 자치구가 운영하는 문화회관과 백화점 등이 운영하는 문화센터가 있고, 개인이 운영하는 학원이나 화실 등이 있다. 구청 문화회관이나 백화점 문화센터는 다른 취미와 병행이 쉽고, 가격이 비교적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교육 인원이 많은 편이기 때문에 강사가 1대 1로 지도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다. 학원은 입시 미술을 겸하거나 정해진 강의 위주로 운영하는 형태가 대부분이고, 화실은 1대 1 지도를 중심으로 수업을 한다. 미술학원은 대학 인근에 많고, 화실은 반대로 주거지역 주변에 많다. 수업 형태나 시간, 수업료 등이 제각각이기 때문에 상담을 통해 충분히 교육기관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고 본인에게 맞는 곳을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림이 시니어에게 주는 장점은 다양하다. 미술 수강생들은 운동에 비해 체력적으로 제한이 없는 취미이면서, 고도의 집중을 통해 잡념을 사라지게 한다고 입을 모은다. 11년째 송파에서 화실 ‘모노그라프’를 운영 중인 서양화가 김용일 화백은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시니어들에게 제공하는 장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평생 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 중 하나죠. 적은 비용에 비해 얻는 성취감도 크고요. 보통 6개월에서 1년 정도 배우면 남에게 그림을 선물할 정도의 수준까지 올라서는데, 그 과정에서 얻는 자존감도 상당합니다. 그룹 전시회를 통해 본인의 그림이 남에게 인정받거나 팔리는 경험은 시니어들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화실에서 형성된 커뮤니티를 통한 사회활동도 그림을 배우는 과정이 주는 매력 중 하나다. 앞서 소개한 아트담은 인근 구치소 면회자들을 위해 대기실에 그림을 전시하기도 했고, 모노그라프의 경우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그림 봉사활동을 진행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전시회 활동은 그림에 대한 욕구를 재충전하는 기회로 사용되기도 한다. 또 일부 지역의 경우 화실은 체면을 내려놓는 휴식 공간이 되기도 한다. 고소득층 수강생들이 많은 한 화실의 관계자는 “재벌이나 정치인, 연예인 등이 신분을 숨기고 그림을 그리기도 합니다. 유난히 걸레질이나 설거지에 열중했던 한 회원이 지자체장의 부인이라고 밝혔을 때 주변에서 적잖이 놀란 적도 있어요. 사교를 위해 일부러 모인다기보다, 본인의 원래 모습을 찾아 순수한 문하생으로서 서로를 평등하게 대하니 관계가 홀가분해지는 것 같아요.” 그림 그리기는 치매 예방에 큰 도움 그림은 심리적인 부분 이외에 실제 정신건강에도 도움이 된다. 미국의 유명한 병원인 메이요 클리닉의 신경과 전문의 로즈버드 로버트는 지난해 발표한 연구 논문을 통해 “그림 그리기 등 노년의 미술 활동이 경도인지장애(치매의 전 단계)에 걸릴 가능성을 73% 낮춰준다”고 발표했다. 그는 4년간 256명의 85세 이상 노인을 관찰했는데, 미술 활동이 수공예(45%), 사교활동(55%), PC활용(53%)보다 인지기능 보호 효과가 더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중앙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김선미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림 그리는 것이 경도인지장애 예방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은 미술 활동을 통해 마음과 정신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손의 미세한 운동과 관련된 신경을 활성화시키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자극들이 신경세포의 퇴화를 방지하고, 새로운 신경세포의 성장을 촉진하면서, 인지기능 유지에 사용되도록 변화를 일으키는, 일종의 신경가소성 효과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 교수는 그림 창작활동은 치매 예방뿐만 아니라 시니어들의 전반적인 정신건강에도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미술 활동은 인지기능이나 창의력 향상으로 삶의 질을 높이고, 추억 회상을 통해 의미있는 대화를 촉진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더불어 의사 소통 능력도 향상시키죠. 자아감이나 자존감의 회복에도 도움이 되고, 심지어 치매환자 간병인의 삶의 질까지 향상시킨다는 보고가 있을 정도입니다.” 우리마포복지관에서 수채화를 가르치고 있는 류영선 강사는 “소질을 걱정하는 회원분들에게 관심이 곧 소질이라고 늘 말씀드려요. 그리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그릴 준비가 되어 있는 셈이니까요. 실제로 시작하고 나면 기대 이상으로 쉽게 적응하시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붓을 잡고 행복하다는 말씀을 연발하시는 회원분들을 보면 다른 분들도 주저하지 말고 빨리 시작하셨으면 합니다”라고 조언했다.
- 2016-07-27 14:17
-
- 탱고와 피아졸라(Astor Piazolla(1921~1992)
- 7월 20일 예술의 전당에서 ‘피아니스트 오윤아의 재즈, 탱고, 클래식의 만남’ 공연이 있어 갔다 왔다. 프로그램에 아스토르 피아젤라의 누에보 탱고가 클래식과 융합하여 연주된다 하여 벼르던 공연이었다. 탱고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의 전통 음악인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난히 좋아하는 음악이다. 우리 가요 중에도 탱고 풍의 가요가 많다. 춤도 그렇다. 스탠더드 댄스 5종목에 탱고가 들어가는데 왜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태동한 댄스인 탱고가 라틴댄스에 안 들어가고 왈츠, 폭스트로트 퀵스텝 등과 함께 스탠더드 댄스에 들어가는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탱고의 문화사를 알아야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 탱고는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인 1900년대 초에 유럽에서 아르헨티나의 항구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민 간 사람들이 처음 췄다고 한다. 주로 이민 간 노동자들이 사창가 등 빈민가에서 추던 춤이라 관능적이었다. 이 춤이 유럽에 건너갔을 때 추기경들을 비롯해서 귀족들이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20년에 런던에서 몇 가지 동작을 스탠더드 댄스 동작에 맞춰 표준화해 오늘날의 컨티넨탈 탱고, 또는 인터내셔널 탱고가 되었다. 기존의 탱고는 그대로 아르헨티나 탱고로 불린다. 초기의 탱고는 춤을 위한 음악이었다. 아르헨티나 전통음악이 된 것이다. 그러다가 이를 클래식이나 재즈처럼 별도의 음악 장르로 승격시킨 사람이 바로 아스토르 피아졸라이다. 그러므로 탱고는 피아졸라 이전의 탱고와 이후의 탱고로 나눠 피아졸라가 만든 탱고는 ‘'새로운 탱고(Nuevo Tango)'라 부른다. 피아졸라는 탱고 춤이 유럽에서 한창 수난을 당하고 있을 1921년에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다. 4세 때 부모를 따라 뉴욕으로 이민 간 덕분에 여러 장르의 음악을 공부할 수 있었다. 피아졸라가 16세이던 1937년, 그의 가족은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 와서 반도네온 연주자로 활동했다. 아르헨티나에서 음악공부를 계속했던 그는 배움에 대한 갈증으로 1954년 프랑스로 유학 가서 세계적인 음악 스승인 나디아 블랑제를 만났다. 나디아 블랑제가 피아졸라의 탱고 연주를 듣고 탱고를 버리지 말고 승화시키라는 말을 들었다. 다음 해인 1955년에 귀국하고부터 누에보 탱고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지 200년 정도 밖에 안 된 나라이다. 나라는 큰 데 일할 사람이 없으니 유럽 이민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차 대전 덕분에 고기, 낙농 제품, 광물 등을 수출하며 세계 5대 경제 대국에 들어갔다. 그러나 1940년대 페론 정부가 들어서면서 실업자들에게도 직장인 평균임금보다 1.5배나 더 많은 수당을 주는 포퓰리즘 정책을 펴 나라가 망했다. 그리고 망한 나라에서 모든 피해는 온전히 노동자에게 돌아갔다. 이렇게 소외된 노동자들은 탈출구가 필요했다. 그 탈출구는 바로 밀롱가를 찾는 것이었다. 말롱가에 오는 노동자에 맞춰 탱고가 탄생했다. 그리고 이 탱고를 클래식이나 재즈에 버금가는 음악 장르로 수준을 올려 놓은 사람이 바로 피아졸라이다. 이날 연주는 피아졸라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4계’ 피아노 3중주로 시작했다. 이 곡은 이탈리아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의 ‘사계’처럼 각기 다른 시점에 만들어졌으나 나중에 4계로 묶었다. 인터미션 후에는 피아졸라의 명곡 ‘Tangata’, ‘Milonga Del Angel’, ‘Oblivion’, ‘Libertango’가 연주되어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특히 ‘자유의 탱고’라는 ‘Libertango’는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외에도 드럼, 다양한 아르헨티나 타악기가 합주되면서 최고의 무대를 선보였다. 이날 연주에서 미국의 팝 클래식 대가 폴 쉔필드의 ‘Cafe Music for Piano Trio’도 눈길을 끌었다.
- 2016-07-27 1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