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필자는 창신·숭인 지구 도시재생을 알아보기 위해 이 동네를 찾았다. 창신동은 필자에게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동네다. 선머슴처럼 천방지축이던 중학생 시절과 꿈 많던 여고 시절을 창신동에 있는 학교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돈암동에서 보문동 신설동을 지나 숭인동까지 버스를 타고 통학했는데 학교 앞에서 내리면 잘 다려 허리 잘록하게 맵시 있게 입었던 흰색 교복이 마구 구겨져서 한동안 돈암동 집에서 창신동 언덕을 걸어 통학하기도 했다.
이 동네는 그렇게 세월이 흘렀는데도 골목마다 아직 친근함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필자가 다니던 학교는 너무 많이 바뀌어 안타까웠다. 담쟁이가 멋졌던 유서 깊은 빨간 벽돌의 아름답던 교정도 없어지고 학교는 강남으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학교가 있던 자리에는 유명 브랜드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모두 사라져버린 듯 슬펐다.
이렇게 재개발로 큰 아파트 단지가 생겼지만, 근처 동네 분위기는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50여 년 전에 있던 한의원 간판도 그 자리에 있었다. 꽤 높은 언덕 위에는 필자 친구 집이 있었는데 그 시절의 분위기가 여전히 느껴졌다. 무허가 집이 많았던 허름한 이 동네는 2000년대에 서울시 뉴타운으로 지정되었는데, 2013년 7개 구역 주민들의 강력한 반대 속에 뉴타운이 해제되는 역사적인 상황이 벌어졌다고 한다.
재개발되면 깨끗하고 비싼 집에서 살게 될 텐데 왜 반대를 한 것일까? 거기에는 이해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원주민 비율이 많은 이 동네에는 자기 집에서 세를 주어 경제적 효과를 보는 주민이 많았다. 그러나 재개발을 하게 되면 살던 집도 없어지고 새 집에 들어갈 부담금도 내야 하고 세를 받던 경제적 효과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몇십 년 동안 이웃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 정도로 친하게 지내던 주민들과의 이별도 두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뉴타운을 반대했고 이후 도시재생 선도지역으로 지정되어 도시재생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도시재생은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 마을 공동체의 활성화와 지속적 관리를 통해 도시환경을 개선하고 지역경쟁력을 확보해 삶의 질을 높이는 사업이다. 창신·숭인 지역 도시재생 사업은 노후주택 개량과 기반시설 정비, 공동시설 확충을 진행하며 이 지역의 특징인 봉제산업 활성화와 지역 명소를 발굴해 관광자원을 조성하고 있다. 아울러 성곽과 같은 역사적 자원과 공공미술, 예술·문화활동 장려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창신·숭인 지역에서 예술활동을 했던 분으로는 박수근 화백, 가수 김광석, 아티스트 백남준 외에도 훌륭한 예술가가 많다.
지역 주민 모두를 위한 문화, 소통, 창작의 공간으로 예술가와 전문가, 지역 활동가가 함께 다양한 활동을 펼치는 창신소통공작소도 있고 봉제박물관도 건립 중이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봉제사업을 해온 분들의 이름과 회사명을 기억하기 위해 만든 명판도 눈길을 끌었다.좁은 골목길을 바쁘게 오가는 오토바이를 보며 활발한 생명력을 느끼기도 했다. 이들의 노고로 우리나라 봉제산업이 한층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백남준 기념관은 그가 살았던 집터를 매입해 그의 삶을 소개하고 있는 곳이다. 옆에 작은 카페도 있어 들러보면 좋다. 기념관으로 가는 골목 바닥에는 '내일, 세상은 아름다울 것이다'라고 씌어 있다. 창신·숭인 지구 사람들의 내일도 더 행복하고 아름답기를 바란다.
누구나 노후에 작물을 기르며 텃밭을 가꾸고 싶은 작은 소망이 하나씩 있다. 밥상 위에 놓을 야채 몇 가지가 추가되는 것만으로도 좋고, 주변에 누군가와 나눌 수 있다면 더 좋다. 여기에 약간의 용돈까지 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실현 불가능한 꿈은 아니다. 그렇다고 집을 등지고 시골로 내려가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잘만 하면 직업으로 삼을 수도 있다. 바로 도시농업이다.
도시농업은 우리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어쩌면 전 세계적으로 자연스러운 흐름일 수 있다. 자연이 도시화되고 상당수의 인구가 도시에 몰려 살면서 농촌이 가지고 있던 일부 농업 기능을 도시로 옮기고자 하는 노력은 전 세계적으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의 오바마 전 대통령의 부인 미셸 오바마다. 그녀는 백악관 텃밭에서 작물을 가꾼 경험을 바탕으로 이라는 책을 2012년에 발간했다. 미국은 자생적 도시농업의 대표적 국가로 각 주정부마다 시민들이 마음껏 경작을 할 수 있도록 세세한 조례를 마련해놓고 있다. 뉴욕 시도 예외는 아니어서 도시 텃밭 조성을 위한 시민사회단체가 운영하는 그린 섬(Green Thumb) 프로그램을 시 차원에서 지원하고 있다. 또 식량위기를 도시농업으로 돌파한 쿠바의 이야기나 시민농원법을 통해 공동체 텃밭의 운영을 권장하는 일본 역시 도시농업의 주요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도시농업의 세계적 우수사례 서울
이렇게 많은 도시가 도시농업에 주목하는 이유는 첫 번째로 환경 문제가 있다. 도심의 생태계를 도시농업을 통해 복원시키고 거주 환경도 개선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한 일자리 창출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급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고령화 사회에 대한 대비로도 도시농업이 꼽힌다. 각종 텃밭 관리나 농업 관련 교육 등은 은퇴자 일자리에 적합한 분야 중 하나다. 특히 ‘땅’을 기반으로 한 농업은 지역 공동체 결속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결국 지역에서 거주기간이 긴 중장년층이 나설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이를 통해 공동체 문화가 조성되고, 지역의 경제적 기반이 마련된다면 금상첨화다.
국내에서 도시농업에 대해 정책 개발을 가장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곳은 서울시다. 서울시의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모범으로 꼽힌다. 서울시는 2012년부터 도시농업 1.0 사업을 통해 도시농업이 정착될 수 있는 제반 준비와 함께 다양한 실험적 사업을 진행했다. 현재는 2018년까지 완료를 목표로 ‘도시농업 2.0’을 진행하고 있다. 1.0이 관 주도의 취미·여가형 도시농업이었다면, 2.0은 민관이 결합해 함께 사업을 추진하고 지역에 공동체 문화를 활성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 서울시의 설명이다.
서울시의 도시농업 사업이 잘 적용된 대표적인 곳이 바로 종로구 행촌권 성곽마을이다. 종로구 행촌동 일대 지역은 단독주택이나 다세대주택 밀집 지역으로 그동안 돈의문 뉴타운 사업이나 재개발구역에서 소외되어왔다. 그러다 주거환경관리사업 정비계획안이 통과되면서 주거환경 개선사업과 더불어 도시농업 시범마을로 특화돼 연중 자동화 재배가 가능한 IoT(사물인터넷) 스마트팜 조성도 진행 중이다.
서울시와 지역민들은 지역공동체 거점인 ‘행촌共터’를 3호점까지 개설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도시농업을 위한 여러 교육을 진행했다. 지난해부터 육묘장을 만들고 본격적으로 텃밭을 가꿔 불우이웃을 도울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소득도 올렸다. 양봉도 시작해 꿀 800ℓ를 얻기도 했다. 올해는 도시농업의 특성상 작은 면적에서 높은 효율의 수확을 얻어내기 위해서 부가가치가 높은 더덕, 감초, 어성초 등을 심은 약초밭도 만들었다.
농부 되기 위해선 교육이 우선
도시농부가 되는 과정은 무엇이 있을까. 도시농부가 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역시 관련 교육과정을 통해 농업의 기초를 쌓는 것이다. 교육과정은 지역별 농업기술센터의 교육과정이 대표적이다. 서울시 농업기술센터의 경우 도시농업 전문가 과정을 통해 매년 100명 이상의 도시농부를 배출하고 있다.
도시농업 교육기관을 표방하는 민간단체들도 상당히 많다. 일부에선 “교육기관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고 평가할 정도. 서울시에서 꼽은 도시농업 시민단체만 해도 협동조합을 포함해 44개나 된다. 관련 소규모 시민단체들은 지역에 따라 활성화된 곳도 있지만 조직적, 재정적 어려움도 상당하다.
이러한 교육 과정의 정비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농림축산식품부 산하 국가자격증 제도인 ‘도시농업관리사’ 제도가 실시된다. 지난 3월 관련 법령이 개정되면서
9월 22일부터 시행 예정인 도시농업관리사는 도시민의 도시농업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도록 도시농업 관련 해설, 교육, 지도 및 기술보급을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또 개정안에는 도시농업의 범위에 ‘수목과 화초를 재배하는 행위’와 ‘곤충을 사육(양봉 포함)하는 행위’를 추가해 도시농업의 범위가 넓어졌다.
해설과 교육, 기술 보급도 도시농업
도시농업이 단지 주변의 작은 유휴지에 작물을 심어 가꾸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텃밭학교나 스쿨팜 사업 등을 통해 작물에 대한 교육과 이를 통한 인성 교육을 추진하는 단체들도 많다. 도시농업포럼의 꿈틀텃밭학교가 대표적이다. 이 학교는 이동필 전 농림축산식품부장관이 교장으로 부임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15년부터 초등학생들과 학부모 등을 대상으로 텃밭을 가꾸는 데 필요한 각종 교육, 채취한 농산물을 활용할 수 있는 교육 등을 진행하고 있다. 학교 관계자는 “단순한 농업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텃밭이라는 공간을 통해 가족 간의 잃어버린 대화를 회복하고, 아이들의 인성 발달 등 긍정적인 효과가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직업으로서 도시농부는 어떨까? 아직은 글쎄다. 일부에선 “농작물을 통해 거둬들이는 수익을 기대하는 것보다는 강사로 활동하는 것이 벌이는 더 낫다”고 평가할 정도. 도시농업에서의 텃밭이라는 공간은 농촌의 대규모 농업과 경쟁에서 이기기 어려운 구조적 어려움을 안고 있다. 일부 지자체나 주민단체가 고부가가치 농작물에 열중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농작물을 가꾸고 수확하는 것에서 끝내지 않고, 이를 가공해 서비스 사업으로 연계해야 도시농업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조언한다.
글 박원식 소설가
항구에 닻을 내린 배는 안전하다. 그러나 그러자고 배를 만든 게 아니다. 항해에 나선 배라야 배답다. 거친 파랑을 헤치고, 멀거나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는 배는 인생을 닮았다. 모험이나 도발이 없는 삶이란 수족관처럼 진부하지 않던가. 도시에서 회사원으로 살았던 이기순(52)씨가 남편 이병철(57)씨의 손을 잡아끌어 시골로 들어간 건 모험적 항진이었다. 하지만 애석하다. 이기순씨의 시골살이는 암초에 걸려 허우적거린다. 대해를 표류 중이다. 취재 섭외를 위해 통화를 할 때, 이기순씨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겸사(謙辭)였다.
“남들은 그럴싸하게 바라보지만, 사실 속사정은 그게 아니에요. 아마도 저희 부부의 현실은 실패 사례로 더 어울릴 거예요. 그냥 차나 한 잔 드시고 간다는 기분으로 오세요.”
이기순씨는 오랫동안 암벽 등반을 즐겼다. 휴일이면 쪼르르 산으로 달려가 잔나비처럼 바위에 매달렸다. 그러다가 추락사고를 당해 온몸에 부상을 입었다. 이후 그녀는 지금까지 진통제를 달고 산다. 이 불행한 사고는 용케도 시골로 이주하는 계기가 되었다. 공기 좋은 시골에 살며 건강을 돋우자는 착상을 했던 거다. 그즈음 중소기업 상무이사였던 남편 이기철씨는 명퇴의 강박감에 시달리며 전전긍긍 활로를 모색하던 중이었다. 이 역시 도시 탈출의 배경이 되었다. 말하자면 부부가 의기투합했던 것. 까짓것, 우리 시골로 가서 새로 시작합시다! 이기순씨가 앞장서 선창을 했다. 그래그래, 그러세! 남편이 후렴을 읊으며 선선히 뒤를 받쳤다. 그게 4년 전의 일이었다지.
시골 살림을 결단하며 꿈꾸고 그린 게 많았을 게다. 우선은 볕이 잘 드는 남향 터를 잡아야 할 테고, 폼 나게 수려한 전원주택을 지어야 하고, 철따라 꽃이 피어 요요하게 속삭일 정원을 꾸며야 하며, 달빛과 별빛이 비단처럼 흘러내리는 밤에 부부 둘이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일 만한 정자를 짓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의치 않았다. 생활이라는 게 흔히 돈이라는 요물의 농간에 휘둘리게 마련인데, 이들 부부도 자금이 넉넉하질 않아 두통을 앓았다. 그래서 소득을 흐벅지게 올릴 수 있는 방책을 찾았다. 그 결과로 시작한 게 오이농사였다. 이들이 사는 천안시 병천면은 오이의 최대 주산지. 재배 기술도, 유통 루트도 탄탄한 지역이다. 부부는 2000평에 달하는 농지에 오이를 재배하는 것으로 시골생활의 시동을 걸었다. 농토는 임대를 했다. 그 위에 설치된 시설 하우스는 매입을 했다. 거창한 시발이었다. ‘가브리엘 농장’이라는 팻말도 새겨 걸었다. 하지만 업무에 바쁜 행운의 여신은 그들에게 사소한 윙크조차 보내주질 않았다. 첫해는 물론 둘째 해, 셋째 해까지 내리 실패를 보고 말았다. 이기순씨의 얘기를 들어볼까.
“농사라는 게 정말 어렵다는 걸 온몸으로 깨달았어요. 안간힘을 다해 노력해도 매년 결과는 참담했어요. 기술력 부족으로 생산량이 저조해 낭패를 보기도 했고, 풍작일 경우에도 가격폭락으로 적자가 크게 났어요. 칼자루를 쥔 중도매인들의 횡포에 당하기도 했고요. 갖고 있던 돈을 모두 까먹었고, 빚이 늘어 파산지경에 몰렸어요. 그래도 쌀독에 쌀은 떨어지진 않았어요(웃음). 예산 산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는 친정엄마가 쌀을 보내주셔서….”
“상당한 수준의 기술을 요하는 게 원예농업이죠. 미리 사전 교육을 받진 않았나요? 남의 농장에서 일단 실력을 길렀다거나….”
“별다른 준비 없이 무작정 뛰어들다시피 했어요. 일단 일을 저지르자, 뭐 잘되겠지, 하는 기분으로.”
“저런! 환상적인 귀농이었던 거예요?”
“다분히 그런 면이 있었죠. 귀촌이나 귀농을 하려는 분들에게 요즘 제가 강조하는 얘기가 있는데요, 낭만적인 생각으로 시골에 들어와서는 절대 안 된다는 거예요. 산이 좋다고 무작정 산골로 가고, 바다가 좋다고 해변으로 귀촌하는 식의 출발은 극히 위험해서죠. 사실 저희 부부가 단순한 환상으로 귀농을 할 만큼의 바보들은 아니에요. 충분치는 않았을망정 나름대로 사전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그런데도 그게 농촌 현실에서 큰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예상하지 못한 수많은 변수와 악재들이 들이닥치더라고요.”
“차라리 초기에 발을 빼는 게 현명했을까?”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격이었기에 포기 같은 걸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어요. 내년엔 좋아지겠지, 차차 타산을 맞출 수 있겠지, 그런 희망으로 더욱 공을 들이고 땀을 쏟았어요. 농사에 어느 정도 물정이 트이면서 우환 중에도 희망이 솟구치곤 했죠. 내 손길을 통해 건강하게 잘 커가는 작물들을 바라보는 경이로움도 견딜 수 있는 힘이었어요. 폭염에 시들시들 말라가는 오이를 볼 때는, 마치 어린 자식이 병상에서 가쁜 숨을 내쉬는 것 같아 너무도 괴로웠지만, 그런 경험조차 농사에 애착을 갖게 하는 긍정적 체험이었어요. 정작 후회는 다른 문제에서 왔어요. 마을 원주민들과 어울리는 일이 참 힘들었거든요. 이른바 텃세라는 것 말예요. 이곳은 남편의 고향이지만 한동안 이방인 취급을 받았어요.”
마을 원주민들의 텃세를 견뎌내는 일이 농사보다 더 어려워
전통적으로 유목사회와 달리 농경사회 구성원들은 내 땅, 내 영토에 대한 질긴 집착을 가지고 살아왔다. 공동체 의식도 발달했다. 외지인들이 끼어드는 게 달가울 리 없다. 여기에서 ‘텃세’ 문제가 야기되지만, 토박이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전원생활자들의 무신경하고 비사교적인 위세가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가 다반사다. 믿을 만한 소식통에 따르면, 무례를 범하지만 않으면 텃세에 걸려들 일이 없다는 게 아닌가? 그러나 이기순씨 내외가 겪은 텃세는 워낙 자심한 것이었던 것 같다. 그녀는 시골 인심이 예전과 다르다는 항간의 논평을 몸으로 직접 체험해 확인한 모양이다. 삶이라는 생존의 들판치고 어딘들 전장(戰場) 아닌 곳이 있을까. 코피 터지는 경쟁의 난리 블루스, 그게 세태이지 않던가. 이기순씨는 시골의 텃세라는 걸, 허공에 미만한 공기처럼, 세상살이에 당연히 붙어 다닐 수밖에 없는 기본 조건으로 치부하기로 한 것 같다.
“차라리 마을을 떠날까, 그런 궁리를 할 만큼 눈에 보이지 않는 텃세에 부대꼈지만 그냥 감수하기로 했어요. 어차피 원주민들과 저희의 정서가 서로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서로 살갑게 어울려 지내는 게 힘들다면,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면 그만이라는 생각도 했어요. 그러자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흙이나 작물들은 텃세를 부리는 법이 없죠?”
“저나 남편이나 농사라는 건 난생 처음 해보는 일이에요. 그렇지만 흙이 지닌 생명력과 식물들의 정직한 성장에 곧바로 매료됐어요. 아아, 흙 냄새, 작물들의 숨결은 또 얼마나 좋은지…. 해마다 농사에 연패를 해 실의에 빠지기도 했지만, 땅을 상대로 한 농사라는 게 신성한 직업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돼요.”
“이상해요. 당신은 지난해 천안시가 선정한 우수농민이지만 사실은 곤경에 처했다는 거!”
“농촌의 현실을 보면 겉과 속이 다른 경우가 흔해요. 수억대 소득을 올리는 농가들이 매스컴에 등장하지만, 매출과 실소득은 크게 다르죠. 저희도 연간 매출이 1억쯤 되지만 갖가지 투자비용을 제하면 오히려 적자가 나더라고요. 적자가 해마다 거듭되다 보니 빚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빚을 내서 빚을 갚아야 하고, 이런 식의 악순환이 이어지는 거예요.”
“어이하나?”
“혹독한 공부 과정이었다고 생각해요. 좌절도 많았고, 눈물도 많이 흘렸지만, 어느덧 단련이 되고 나름의 내공도 생긴 거 같아요. 이젠 비로소 길이 보여요. 저비용 고효율 농업으로 가야 하는데, 대안이 보이고 있어요. 일단은 작물을 다양화할 예정이에요.”
기죽을 게 뭐람, 괜찮아, 괜찮다구!
이기순씨 내외는 오이 하우스 안에서 산다. 7평짜리 컨테이너에서 살림을 한다. 이 옹색한 정경을 목도한 친정엄마가 눈물을 흘리고, 친구들이 쯧쯧 혀를 차지만, 그녀는 이마저도 오히려 복되지 아니한가, 하는 투로 담담하다. 애당초 근사한 집을 짓기 위해 대지 150평을 장만해두었으나 빚잔치 통에 순간에 날아갔다. 그 바람에 컨테이너에서 살 수밖에 없었는데, 그녀는 이 회피할 수 없는 현실을 냉큼 받아들이기를 이미 오래전에 했다. 싱긋 웃는 그녀의 얘기를 들어보시라.
“‘난 말이야, 2000평 정원에 7평짜리 원룸에 살아. 이 정도면 나쁜 건 아니지 않니?’ 제가 친구들에게 하는 말이 그래요. 남들에겐 철딱서니 없는 허세처럼 들릴 수도 있겠죠. 그러나 컨테이너에 산다고 해서 기죽을 게 뭐람. 괜찮아, 괜찮다구! 그렇게 제가 저에게 들려주며 용기를 잃지 않으려 노력해요. 지금의 형편에서 방바닥에 등 붙이고 부부가 함께 따뜻한 잠을 잘 수 있다는 것만도 큰 다행 아니겠어요?”
“왜 아니겠어요? 참새는 옷 한 벌 입은 게 없이 나뭇가지 한 줌을 움켜쥐고 엄동의 밤을 무사히 지내죠. 최소한의 의식주만으로도 기꺼이 견딘다는 건 일종의 절경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도시에 살 땐 제가 돈을 펑펑 썼어요. 해외여행이며 쇼핑이며,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다 해봤어요. 그래서 지금의 어려운 형편에 정신까지 약해지진 않아요. 남편 역시 강인하고 똑똑한 사람이라 끄떡없어요. 돈 때문에 허둥지둥 고생하는 모습을 지켜보자면 안쓰럽지만, 우리 부지런히 뛰어 멋지게 농장을 살려내자고 등 두들겨 격려하죠. 남편은 원래 영어와 일본어를 잘하는데요, 요즘도 잠들기 전에 꼭 외국어 공부를 해요. 나중에 외국인들이 우리 농장에 견학 올 것을 대비해서죠.”
“산에서 당한 사고로 온몸을 다쳤다 했죠? 지금은 매우 건강해보여요. 그건 귀농 덕분일까요?”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땐 걸음새조차 나사 풀린 바퀴처럼 휘청거렸어요. 그러다가 농사일에 매달리는 사이 건강이 크게 좋아졌죠. 농사를 노동이 아니라 운동으로 여긴 덕분이겠죠. 정신은 더욱 건강하게 깨어난 것 같아요. 경제 면에서는 시련의 연속이었지만 감성이나 정서는 더 밝고 풍부하게 성숙하는 기분? 그런 걸 느껴요. 하우스 안의 작물들, 바깥으로 펼쳐지는 자연 풍경이 자주 순수한 감정을 불러일으켜요. 저의 어릴 적 꿈은 문학이었답니다. 요즘도 좋은 글을 찾아 읽거나, 뭔가 느낌이 떠오르면 즉시 메모장을 꺼내 글을 써요. 주로 시골생활에 관한 단상이지만, 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기도 하죠. 이 역시 귀농이 준 행복이라 여겨요. 이쯤이면 괜찮게 사는 거 아녜요(웃음)?”
“사람이 농사를 통해 작물을 기르지만, 동시에 농사가 사람을 키우기도 하는 거예요?”
“당연하지 않겠어요? 흔히들 돈에 사로잡혀 살지만, 남에게 돈 빌리지 않을 정도만 되면 잘사는 것일 테고, 더 중요한 문제는 자신이 선택한 일에 만족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을 텐데, 저는 농사에 만족해요. 흙에 뜨거운 애정을 느껴요. 비록 아직은 고전하고 있지만, 비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크는 나무가 있겠어요?”
가시밭길을 거치지 않고 도달할 수 있는 꽃길이 있나? 파도를 타넘지 않고서 바다를 건널 수 있던가? 이기순이라는 이름의 선박은 암초를 만나 표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잠정적인 조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아들이 뉴욕 변두리 지금의 집으로 이사한 지 10년 되었다. 이 동네는 단독주택 주거지로 중산층 마을이다. 1950년대에 조성되었으며 그 시절에는 두 블록만 건너가면 맑은 개울물이 졸졸졸 흐르는 시골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마을이었다. 지금 그 개울은 오버브룩이라는 이름으로 흔적만 남기고 있다
이웃들은 새집을 지어 입주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곳에서 아들딸 낳아 길러 독립시키고 이제는 나이 지긋한 시니어가 되어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동네는 마을 공동체의 속성이 있다. 아들이 이사하고 며칠 되지 않아 앞집에 사는 로즈라는 이름의 80대 유태인 할머니를 만났다. 혼자 사는 할머니는 우리와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동네를 소개하면서 아들 옆집에는 잭이라는 아이리시 독거남이 산다고 알려줬다. 그 집 이름은 ‘보이스 클럽’이란다.
잭을 만나니 로즈의 집은 ‘칠드런스 하우스’라고 알려준다. 그 의미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로즈의 집은 6남매 자녀들이 근처에 살고 있어 자녀들은 물론 손자들, 증손자들까지 놀러와 늘 붐볐다. 때로는 이들이 한 달씩 로즈와 함께 살기도 한다. 그야말로 ‘자녀들의 집’이다. 잭은 70대 부인과 사별한 독신남으로 잭의 집은 늘 남자 친구들이 들이닥쳐 북적인다. 원래는 잭의 아버지 집이었는데 잭이 매입해 지금까지 살고 있다. 남자들이 모여 담소도 하고 스포츠 게임도 보고 포커 게임도 하는 모양이다. 늘 왁자지껄 소란스럽다. 이 집 이름 역시 ‘남성 클럽’이 딱 맞다.
필자 며느리는 그 마을로 이사 갈 때 두 번째 아이를 가진 상태로 만삭이었다. 아이를 출산하는 날, 마침 로즈의 생일파티가 있어 동네가 붐볐다. 그 인연으로 로즈는 손녀의 생일을 꼬박꼬박 챙긴다. 생일이 같다는 인연이 그렇게 반갑고 좋은 모양이다. 로즈는 마을에 활기를 가져다준 새 에너지가 경이로웠는지도 모른다.
잭은 아들이 정원일을 하거나 바깥 청소를 하면 “장인이 해줄 텐데, 장인 기다리지?” 하며 아들을 놀린다. 그럴 때마다 아들은 민망해한다. 작년에 바깥사돈은 은퇴를 했다. 은퇴 후 처음으로 딸 집에서 한 달간 머무르며 아이들을 도와주었다. 이때 필자 아들이 바빠서 미루기만 했던 집 페인트도 장인이 해줬단다. 아마도 잭에게는 그 풍경이 낯설고, 가정을 이룬 자녀 집 페인트를 해주는 별난 내리사랑이 이해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필자의 아들을 만나면 종종 그렇게 장난을 쳤다. 잭은 세 자매를 두었는데 모두가 교사다. 그런데 딸과 손자들의 방문은 거의 없었다. 70대인데도 햇살이 깜짝쇼를 하는 봄에는 무개차를 타고 달리는 멋도 부린다. 집과 정원관리도 깔끔하고 완벽하게 해낸다. 어느 구석 하나 홀아비 티가 전혀 나지 않는다.
아들 집은 오래된 집이라 고장도 잘 나고 부품 구하기도 힘들다. 있는 것을 다시 사용해야 하니 쉽지가 않다. 이럴 때마다 잭은 친절하게 도와주는데 필자 아들에게 닦아라, 돌려라, 빼라, 밀어 넣어라 하며 수리를 도와준다. 본인 손은 절대로 대지 않는다. 이런 잭의 태도를 보면 바깥사돈이 신체 멀쩡하고 건강한 자녀 집 페인트를 대신 칠해준 게 이상스럽기도 했겠다.
필자도 종종 아들 집에 가서 손자들을 돌봐준다. 이웃들은 틀림없이 필자 아들 집을 ‘부모의 집’이라 이름 붙였을 것이다.
2015인구주택 총조사에서 유독 눈에 띄는 수치가 있다. ‘1인가구 비율 27.2%’ 이 수치는 2010년 조사 때보다 3.3% 늘어난 수치이며 2000년도의 15.5%와 비교하면 1인가구가 엄청나게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 요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결혼이 필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젊은 사람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혼자 사는 데 큰 불편이 없고 구속받지 않고 마음대로 살 수 있으니 굳이 결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 돌싱이 많아졌다. 이혼은 더 이상 흠이 아니다. 돌싱이 된 것을 당당하게 밝히는 사람들이 많다. 셋째, 황혼이혼도 많지만 사별하고 홀로 사는 노인들도 많다.
언제부턴가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술을 먹는 이른바 ‘혼밥 혼술’족이 많아졌다고 한다. 심지어 혼자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는 음식점도 생겼다고 하니 1인가구 문화가 대세로 자리 잡아 가는 모양이다. 필자는 아직도 혼자 밥을 먹으러 들어가면 괜히 어색하고 눈치도 보인다. 그래서 주문하면 빨리 나올 수 있는 메뉴를 시켜서 후딱 먹고 일어선다. 손님 몰리는 시간에는 혼자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한다.
더러는 사회성이 결여된 외톨이들이 ‘혼밥 혼술’족에 포함될 것이다. 어쨌든 최근에는 혼자 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마케팅이 활성화되고 있다. 심지어 혼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보여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인기도 높다. 이제 혼자 먹고 혼자 놀고 혼자 살아가는 개인 중심 사회로 급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문화는 주거 양식의 변화까지 요구하고 있다. 과거 대가족 시절의 단독주택 주거 형태는 핵가족으로 변화하면서 급격하게 아파트 문화로 바뀌었다. 최근에는 1인가구가 증가하면서 중대형 아파트보다 소형 아파트의 인기가 높다. 원룸이나 소형 오피스텔의 수요도 많다. 이렇게 소형화되고 개별화되는 주거 형태는 개인주의와 맞물려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사람은 건축을 만들고 건축은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다. 요즘 일반화되어가고 있는 주거 형태로는 이웃과 소통하기 어렵다. 고독사는 작금의 아파트 문화와도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홀로 사는 시니어들에겐 서로 소통하고 교류할 수 있는 새로운 주거 형태가 필요하다. 개인의 취향이 존중되는 독립적인 생활이 보장되면서도 공동생활을 선택적으로 할 수 있는 주거 형태의 심층적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공유주택, 쉐어하우스라는 이름으로 공동생활이 가능한 건물도 등장했지만 이러한 건물은 주로 대학생들이나 젊은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지어지고 있다. 다수가 한 집에서 살면서 침실은 각자 따로 사용하지만, 거실ㆍ화장실ㆍ욕실 등은 공유하도록 되어 있는 쉐어하우스는 불편한 점이 많지만 학교 기숙사보다 자유롭고 저렴하기 때문에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많다.
그러나 이 시대에 꼭 요구되는 시니어를 위한 쉐어하우스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시니어들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큰 요인이 아닐까 싶다. 아직 모여서 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시니어들에 대한 두려움이다. 모여서 사는 것은 혼자 살 때보다 장점이 훨씬 많을 때 가능하다. 모여서 사는 사람들끼리 갈등으로 인해 삶이 불편해진다면 오히려 혼자 사는 게 낫다. 바로 이런 문제가 시니어를 위한 공유주택의 고민이 되는 것이다.
잠시 만났다가 헤어질 때도 갈등이 존재하는데 한 공간에 모여 사는 사람들 간에 갈등이 없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모여서 살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갈등을 이겨낼 각오를 해야 한다. 무엇보다 나로부터 유발되는 갈등을 최소화하려는 마음 자세가 중요하다. 이것이 1인가구 시대에 필요한 행복한 공동체의 본질이라고 할 것이다.
50대 이상이 되어 자식들도 분가하여 빈 둥지가 되면 새로운 집을 찾는 것이 일반적이다. 큰 아파트나 집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3대 욕구는 의식주인데 이중 집은 인간의 행복의 질을 결정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다고 여겨진다. 노인들의 가장 큰 바람이 자기가 사는 집에서 가족과 같이 생활하다가 죽는 것이라고 한다. 집에는 각종 추억이 깃들여 있고 자기만의 생활이 보장되며 인간관계가 이어지는 곳이다. 거동이 불편해져 가족이 돌보는 것이 힘들어지면 노인들은 대부분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으로 보내진다. 이 경우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지 못하고 인간다운 대접을 못 받기 때문에 삶의 질이 현격히 저하된다. 통계에 의하면 최근 1인 가구 수가 늘어난다고 한다. 일본에는 고독사 사람들이 많고 우리나라도 그러한 사례가 종종 매스컴에 보도된다.
공유주택에서 살기(shared house holding)는 새로운 주거형태이다. 주거비용을 줄이고 더불어 사는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아직은 초창기이지만 더불어 함께 사는 사람들, 성리산 마을, 구름정원, 소행주 , 어쩌다 집, 푸른 마을 협동조합 등 주위에 공유주택의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약해지는 가족의 기능을 보완하거나 대체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마흔 이후 누구와 살 것인가』는 외국의 공동체 생활을 다룬 책이다. 캐런, 진, 루이스 3친구가 같이 공동생활한 실제 체험담이다. 공동체 생활을 하기에 필요한 생활규칙, 표준계약서 등도 다루고 있다. 타인과 공동체 생활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시도해 볼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지인이 더함플러스 협동조합을 운영하면서 50+세대를 위한 주거전환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관심이 있는 분들은 서울 50플러스재단 등에서 개설하는 강의를 들으시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건강한 가정이 모여 크고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 이런 공동체가 모여 국가의 초석이 된다. 하지만 가정 해체가 심심찮게 일어나면서 아동학대, 노인 소외 등 심각한 사회문제로 이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허물어지는 가정 해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우리 사회의 대안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전문가들은 바로 효(孝)라고 말한다. 이번 호에서는 효를 실천하는 3인이 한자리에 모여 이 시대의 효의 진정성에 대해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
△ 무크지 을 창간하는 권혁승 백교문학회장(이하 권혁승 회장)
△ 효경영의 리더 상훈유통 이현옥 회장(이하 이현옥 회장)
△ 교육을 통해 효 문화를 정착시키는 최종수 한국효문화센터 이사장(이하 최종수 이사장)
장소 이투데이 6층 회의실
Q.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전통적 가치 ‘효.’ 요즘 효를 얘기하려면 저마다 답답하다고 한탄합니다. 무엇 때문에 시니어들이 분노하는 걸까요?
△ 이현옥 회장: ‘효는 백행지본(百行之本)’이에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모든 행동의 근본이죠. 부모가 없었다면 자식들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섰더라도 이는 모두 부모의 은덕이죠. 부모 모시는 일을 우선으로 해야 하는데 바쁘다, 먹고 살기 힘들다는 핑계로 찾아뵙는 것은 소홀히 하고 전화 한 번 하는 정도로 생색내는 자식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죽는 날까지 자식 잘 되기를 바라고 좋은 소식 있기를 고대하며 밤낮으로 자식 걱정을 하는 게 부모의 마음이죠.
△ 최종수 이사장: 자식들의 마음가짐을 바로 세우기 위해선 교육이 우선돼야 해요. 옛 서당에서는 과 을 기본으로 어려서부터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예절을 가르쳤어요.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비는 아비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각자 직분에 충실하게 하는 밑바탕에는 효가 자리 잡고 있었지요.
이런 이유로 초·중·고교에서 효와 예절, 질서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어요. 학식을 갖추는 것보다 사람이 되는 게 우선이지요.
이러한 일들을 시작하게 된 게 주위에 있는 문화예술인들이 ‘우리 매일 같은 것만 할 게 아니고, 인성과 효에 대한 공감을 통해 새로운 일을 한번 해보자’고 한 것이 계기가 됐어요.
△ 권혁승 회장: 우리나라 효 사상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고, 한국의 가족주의도 전부 없어져 가고 있어요. 이러한 현상을 두고 ‘가정 파괴’라는 말들을 씁니다. 이는 곧 가정의 예절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가정의 예절이란 자식이 부모를 공경할 줄 알아야 하는데, 요즘은 어버이날이나 부모 생신날이라 해서 선물하나 사서 주는데 그건 효가 아니죠. 효 사상이라는 것은 한국인의 정신문화라는 것이고, 물질의 교류나 거래는 아니죠. 부모자식 간에 아파트 사주고 비싼 선물 사주고, 물론 그것도 효도의 한 방법 일수 있지만, 한국의 기본 사상이자 문화 사상은 아니라고 봅니다.효의 출발점을 가정의 예절에 두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부터 아이들을 교육해야 해요. 요즘은 어린이 교육이 잘못돼 개인주의나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해졌지만, 한국 효 사상이 무너져가는 위기 상황이라고 느끼니 씁쓸하죠. 그러한 문제로 우리(3인)가 모인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웃음).
Q. 지금 효는 현실적으로 어떻게 실천되고 있나요?
△ 권혁승 회장: 요즘 대다수 부모는 자식에게 의지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리고 자식들은 부모에게 효도하려는 생각을 안 하고 있죠. 효를 바라지도, 하지도 않는 게 현 상황인거죠. 그래도 지금 우리가 하는 효 운동을 계속 꾸준히 전개해야 하는데, 도움이 필요합니다. 각 시·구 문화원에서 부모에 대한 시 낭송회를 1년에 한 번씩 한다든지, 강의를 한다든지 말입니다. 이렇게 효에 대한 교류를 해야 효심이 생기는 것이죠. 젊은이들에겐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고 날마다 반성을 해나가는 것이 효예요. 아이들이 “학교 다녀 오겠습니다”, “다녀 왔습니다” 인사를 하는 것이 기본인데 휙 갔다가 말없이 돌아오죠. 젊은 엄마들도 다 어릴 적 해본 것으로 신경을 못 써서 그렇지 아이들도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에요. ‘효심’. 그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봤어요. 대한민국 국어사전에 이렇게 나옵니다. 첫 번째, ‘효성스러운 마음’. 두 번째, ‘효심은 엄하게 키운 자식일수록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 법이다’ 그러니 부모가 애를 잘 키워야 하죠. 적당히 키우면 효도가 안 돼요. 불효라는 것은 아이에게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고 상대적인 것, 부모자식 간 주고받는 것이거든요.
△ 이현옥 회장: 효를 실천하는 방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 왔어요. 이기주의와 황금만능의 물신주의는 가정의 안녕과 질서의 근원인 효를 경시하므로 해체되는 가정들이 늘어나고 어린이나 젊은이 할 것 없이 절대가치와 기준이 상실되어가고 있는 현실이죠.
자식을 물질적으로 키우면 그게 효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권 회장 말씀대로 엄하게 키우고 가정에 모범을 보여야 하죠.
Q. 지난해 12월 ‘효도계약’을 지키지 않은 아들에게 증여한 부동산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이 판결을 놓고 가족모임에서 효도계약서를 쓰는 시니어들이 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 권혁승 회장: (부모자식 간 효도계약서 등의 문제에 대해서) 나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요. 한국인은 효에 대해 우리 전통문화, 민족문화로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데 개중에는 부모자식 간 효도 계약서를 쓴다든지 하는 문제가 있다고 하는데, 사실상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런 몇몇 사건을 미디어에서 너무 부풀리는데, 그런 것을 줄여야 해요. 부모자식 간 화합하고 소통해야 하는데 불화가 있다면 잘못되는 것이죠. 아이들이 자랄 때 가정 예절이나 인성 교육을 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으니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자식이 잘못했든 부모가 잘못 가르쳤든 소통이라는 것은 쌍방이에요.
△ 최종수 이사장: 효도계약서를 쓰고 하는 효는 결코 효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계약을 하는 것도 문제, 그것을 퍼뜨리는 언론도 문제이지만, 어쨌든 그것은 효가 아니고 효가 될 수도 없어요. 중요한 것은 두 분(권혁승, 이현옥)도 그렇지만 자신의 모든 열정과 재산을 털어 효 문화를 전파하는 훌륭한 분들이 계시는데 국가는 대체 무엇을 하는가 생각이 들어요.
지방자치단체 강령에도 효에 대한 지침 등이 있지만, 지나친 복지로 효가 묻히고 퇴색하고 있어요. 노인, 장애인 복지 등을 위한 비용이 당연히 들겠지만, 그중 일부를 효를 위한 예산으로 책정해 정책을 세워야 합니다. 사람들이 효를 통해 그런 노인과 장애인 등을 돌볼 수 있도록 말이죠.
Q. 효에 관한 교육과 정책 지원이 줄어들고 있다는데요.
△ 권혁승 회장: 예를 들어 우리 어린이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시 낭송회를 한다고 하면 그들도 그 며칠 동안은 아버지 어머니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효가 뭔가 선물만 주는 게 아니라 기본을 익히는 교육을 해야 해요. 이런 말이 적절할지는 모르지만 각 지역마다 문화원이 있어요. 대개 문화 강좌를 한다든가 음악, 미술, 무용 등을 가르치는데 효 문화에 대해서도 강의하면 안 될까 싶어요. 문화원마다 책정된 예산들을 다 그런 예술 강좌에만 써야 할까요?
△ 최종수 이사장: 의 독자들의 나이대를 보면 나라 망하고, 6·25사변 나고 배고프고 살기 어려워서 그런 걸 찾을 수 없는 시대였다 할지 몰라도, 그 와중에도 뜻있는 사람들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어요. 좋은 효자·효부 정말 많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었다는 생각 말고 기본적인 교육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요?
△ 이현옥 회장: ‘효’를 바탕으로 회사를 경영하다 보니 직원들도 만족해하고, 사고도 발생하지 않아요.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가는 직원들에게 홍천 대명콘도와 양양 솔비치콘도 숙박을 지원해 줍니다. 1년에 상·하반기 2번 가능하고, 시댁이나 처갓집 식구들도 함께 갈 수 있게 하는데 주로 직원들이 장인·장모를 모시고 가는 편입니다.
‘너희들이 부모에게 잘함으로써 우리 직장도 건전하게 발전이 되는 거다’라고 자주 말합니다. 매년 5월에는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전 직원이 가족을 데리고 세종시에 있는 효림원(효 마을)을 방문해 효심을 나누고 효 문화행사를 진행하죠.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서는 무엇을 바꾸어야할까요?
△ 최종수 이사장: 효 문화예술 교류 차원에서 학교에 전문 강사가 방문해 효 강의 등을 하는데, 어느 정도 한계가 있지만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어머니들의 생각이 좀 바뀌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효에 대해 토론회를 한다고 하면 관심도 없고, 다른 학원에 가라고 하는 등 꽁무니를 빼기 때문이죠. 학생들을 모집하면 3분의 1 정도만 자발적으로 오고, 3분의 1은 학교에서 하라니까 억지로 온 것이고, 또 3분의 1은 참여는 하지만 구실만 있으면 학원에 가거나 빠지려고 해요. 그런 경우에 학생도 학생이지만 어머니들이 적극적으로 인성이나 효, 예절에 관심을 가져야 해요. 인성이 기본이 된 다음에 학력을 쌓아야지 기본도 안 되고 학력만 쌓으니 아이들이 머리만 커지는 것이죠.
효라는 것은 평생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것인데, 유가(儒家)에서 배울 때는 부모가 살아 계실 때 모시기를 잘 해야 한다고 하는데, 종교가 달라 많은 부분에 갈등이 생겨나고 있어요. 그런 효가 필요 없다고 하는 단체도 생기고, 내가 효를 안 해도 살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지는 몰라도, 효는 우리나라 정서나 젊은이들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지난해부터 인성교육진흥법을 시행하여 인성교육을 강화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단체가 갈팡질팡하고 있어요. 인성과 예절 교육은 효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권혁승 회장: 효 문화, 이런 운동은 돈이 많다고 할 수 있는 운동도 아니고 시간이 많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죠. 어떠한 소명감에 의해서 하는 것이지 이해타산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니라 ‘기브’만 하는 거죠.
요즘 부모는 자식의 효도를 바라지도 않고, 자식도 안 하는 상황이지만 결코 포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에요. 효는 어디 내다 팔래야 팔 수 없는 한국인의 아주 기본적인 사상이자 문화 사상으로 한국인만이 가지고 있는 정서니까요. 2018년에 동계 올림픽을 하는데 외국인들이 많이 왔을 때 ‘한국은 효의 나라다’라는 게 선전되면 얼마나 좋겠어요(모두 웃음).
△ 이현옥 회장: 생전이나 사후에도 예에 벗어남이 없어야 합니다. 즉, 살아 계실 때도 예를 지켜야 하나 돌아가신 후에도 예를 지켜야 합니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자(慈)라면 자식의 부모 사랑은 효(孝)라고 합니다. 부모는 진 땅을 걸어가도 자식은 마른 땅을 걸어가기 바라는 게 부모입니다. 그래서 전체를 바쳐 희생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인프라 구축이 우선시되려면.
△ 최종수 이사장: 정부의 지원도 중요하지만, 그럴 수 있는 분위기가 먼저 조성돼야 합니다. 내가 과천문화원장을 8년 정도 하고, 전국문화원 회장을 4년 동안 했어요. 그러면서 체계적으로 구축하여 효 문화를 선도하려는 효 문화센터를 만들려고도 했죠. 그러나 주변에서 ‘왜 저렇게 판을 벌이나’하고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어요. 그러니 그런 것을 하려고 해도 먼저 주변의 인식과 분위기를 바꾸지 않으면 안 돼요.
△ 권혁승 회장: 국내 효 문화를 바로잡고 육성, 창달해야 하지만 아울러서 교양을 갖출 수 있어야 해요. 효는 한국 고유의 문화예요. 이 문화가 옛날 중국이나 일본에서 온 게 아니죠. 물론 서양에서도 방식이 다를 뿐 효도를 잘 하죠. 영국의 역사 철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책에 ‘인류문화 발전을 위해 한국이 크게 기여한 게 있다. 그것이 한국인의 가족제도와 효 사상이다’라고 썼어요. 그는 이러한 효 사상을 전 세계에 번지도록 해 모든 세계인이 가족을 사랑하는 정신이 퍼졌으면 좋겠다는 뜻을 설파했고요. 소설가 톨스토이도 “불효하는 사람은 벗으로 삼지 말라”고 했어요. 미국연방준비제도 의장을 지낸 버냉키(Bernanke)도 미국 프리스턴대학교 졸업식 축사에서 “이제 여러분은 졸업을 하니 매주 한 번씩 부모님에게 전화해라”라고 말했습니다. 생일에 선물을 사주고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1주일에 몇 번씩 전화 걸어 안부를 여쭙는 것이 한국 효의 기본입니다. 이러한 점이 전 세계에 한국인이 어깨 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자랑거리가 될 수 있고, 자부심이라 할 수 있어요.
한국의 효 사상을 세계에 널리 알려서 모든 세계인들이 한국의 효 사상을 본받고 한국하면 ‘아! 효의 나라’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해요. 더 나아가서는 효 문화를 유네스코 문화재로 등록한다든가, 널리 번지도록 힘써야 해요.
△ 이현옥 회장: 이런 분위기를 조성해서 좋은 일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여 정부와 언론이 주목하고, 효에 대한 인식이 관철됐으면 합니다.
△ 권혁승 회장: 효에 대한 좌담회는 한국 언론사, 매체 사상 처음 있는 일 아닐까요? 아마 단군 이래 최초일 것 같아요. 오늘로 끝내지 말고 계속 이어갔으면 좋겠어요. (웃음)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계시나요?
△ 최종수 이사장: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타고난 소질과 능력을 개발해 나의 길을 찾고 이웃과 사회를 위한 사랑과 봉사가 바로 ‘효’라는 것이죠. 이를 위해 시대에 맞는 효 문화의 창출이 바로 인성 교육의 출발점이라고 보고 한국효문화센터를 2011년 시작했어요.
한국효문화센터는 효에 관련된 교육과 행사로 우리가 실천해야 할 진정한 효가 무엇인지 되돌아보며 자신에 대한 사랑의 첫걸음을 시작으로 하는 인성 교육과 밝고 건강한 사회 구현이 목표예요.
예술단체장들이 효 문화사업을 하면서 학술회의도 하고, 학생들을 모아 토론한 내용들을 토대로 효 문화를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지 단초를 발견했어요. 요즘 고등학생들은 입시에 시달리지만, 그중에서도 고전 등을 훤히 꿰뚫는 학생들이 꽤 있어요.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 하지만, 마냥 그럴 것이 아니라 헌혈도 하고 기증도 해서 사회에 돌려주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의견도 나왔죠. 그러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 시대에 효 문화사업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해줬어요. 아이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그들의 수준에 맞는 효 문화사업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렇게 글짓기, 그림 그리기 대회도 하고, 매년 토론회도 열면서 새로운 것을 찾아가고 있어요. 국내 최대 규모의 ‘효’를 주제로 한 문화축제로 1회성 행사로 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지만 그만큼이라도 확실히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상을 받는 아이들과 부모님들을 만나보면 그때만이라도 가족끼리 효에 대해 이야기하고, 부모를 생각한다고 하거든요.
△ 이현옥 회장: 효 문화라는 건 다들 잘 알고 있지만 실천하는 게 어려워요. 어머니가 살아 계실 적에 특히 5형제 중 셋째인 나를 많이 아끼셨고 사랑을 주셨죠. 공직생활 중에도, 사업을 할 때도 어머니가 편찮으시면 달려가 돌봐드리는 등 장남 역할을 했어요. 고향 마을에 1981년 대덕연구단지가 들어서면서 선산을 세종시 조치원으로 이전해 효림원을 조성했어요. 어머니는 그 안에 있는 농가주택에서 4개월 동안 고생하시다 90세에 돌아가셨고, 5일장을 치렀어요. 매년 시묘살이를 하기 위해 내려갔고 거기 가서도 돌아가신 어머니와 대화도 나누고 3년 탈상을 했는데 마을 회장이나 이장이 그 모습을 눈여겨봤나 봐요. 그러다 매년 추모식을 하면서 마을 사람 100명을 초대해 아이들에게 선물도 주고, 면장 추천을 받은 어려운 학생들에게는 500만원씩 장학금도 수여하는 행사를 진행했죠. 사실 3년만 하고 그만두려 했는데, 막상 해마다 해온 것을 그만두기는 어려웠어요. 나로서는 자식의 도리로 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소문이 나자 군에서 우리 마을을 성균관장에게 추천해 각지에서 몰려와 선전을 해주고, 포상도 받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마을 사람들이 1만원, 5000원씩 자발적으로 980만원을 모아서 선산 공원 입구에 효비를 들여놓았어요. 마을이 효의 고장이니까 “마을 입구에 ‘효림원’이라고 세워 놨어요. 그때 어머니가 옥색 한복을 입고 꿈에 선명히 나타나시더니 ‘마을에서 이렇게 효비도 세워주고 행사도 열어줬는데, 너도 고마운 뜻을 표시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어요. 작은 유통업을 하던 나는 영농조합 농장을 하나 인수했어요. 그곳에서 생산하는 오이, 토마토, 배 등 농산물을 국가유공자 요양원이나 보훈병원, 군부대 등 10여 기관에 기증하고 있어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지역의 소득 증대도 되고, 고용창출도 되니 농민들이 굉장히 좋아합니다.
△ 권혁승 회장: 7년째 백교문학상 효친문학상 작품을 전국적으로 공모하는데, 글과 시 속에 효 사상, 효심 또는 모정이 깃들어져 있는 작품을 심사 기준으로 삼아 상을 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잘 쓴 글이라도 사친과 관계없는 글은 입선이 안 되죠. 자식들은 부모가 그렇게 사랑을 줘도 사랑인 줄 몰라요. 일상에서 공기를 마시듯 깨닫지 못하는 것이죠.
강릉 시골 마을에다가 사모정 정자를 지었어요. 마을의 쉼터가 되라고. ‘사모정’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라 해서, 한쪽에는 도예 조각 하는 교수님의 작품도 세워 놨죠. 정자를 강릉시에 기증했는데 하고 나니까 주변에서 그 정자만 가지고 효 사상이 함양되겠느냐 해서 ‘사친문학상’을 만들라 하더라고요. 그걸 만들어 전국적으로 등단한 문인을 대상으로 작품공모를 하고 있어요. 거기다 이 사상을 전 세계에 알려야 되겠다는 의미를 담아 이라는 책을 만들었어요. 국내 200여 도서관에 비치했고, 영어판을 제작해 65개국 130개 도서관에도 전달했어요. 유엔, 세계은행에도 책이 있어요. 대통령, 교육부장관, 문화부장관 등에게도 돌리고, 오바마 대통령에게도 보냈는데 잘 전달이 됐는지는 모르겠어요(웃음).
작년에 사모정이 있는 공원이 너무 좁다고 해서 확장공사를 1년간 했어요. 높이가 3m인 고석에 ‘효 사상 세계화의 발원지 효향 강릉’이라 쓰고 밑에 영어로도 써놓았어요. 그 옆의 돌에도 효에 대한 글을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로 새겼어요. 오는 9월에 도 창간할 예정입니다.
공가는 함께 공(共)과 집 가(家)로 ‘비어있던 집에서 함께하는 집으로’ 라는 슬로건을 걸고 사회적 목적을 추구하는 공유주택을 말한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어린 시절 동무들과 놀이터에서 모래밭에 한 손을 묻고 다른 손으로 토닥이다가 살짝 손을 빼면 작은 동굴 같은 공간이 만들어지는 놀이를 했다. 그 놀이를 하면서 우리는 두꺼비에게 헌 집 줄 테니 새집을 달라고 노래를 하며 놀았다.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어쨌든 두꺼비는 집과 관련 있는가 보다.
요즘 주거는 아파트가 대세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층수가 올라가는 아파트는 그 동네의 랜드마크로 많은 사람이 살고 싶고 갖고 싶어 하는 재산이 되었다. 어릴 적 아파트가 개발되기 전 우리나라는 단독주택에 작으나마 마당 딸린 집이 대세였다. 거기에 이 층이나 삼층집이면 부잣집이라고 했다.
요즘은 모두들 편리한 아파트를 선호해 이사를 하거나 결혼한 자녀가 집을 떠나 단독주택에는 노부부만 남기에 그들도 살기 편한 아파트로 주거를 옮기는 가구가 많아졌다고 한다. 그래서 생활하기에 힘든 불편한 변두리 작은 주택은 그만 비어서 방치되는 집이 많이 생겨났다.
관리가 안 되는 집이 늘면서 범죄위험도 늘고 지역공동체에 위협이 되기도 하니 이런 집을 수리해 집이 없는 청년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빌려주는 ‘두꺼비하우징’ 이라는 사회적 기업이 생겼다. ‘두꺼비하우징’은 LG전자와 LG화학의 지원을 받아 도심 곳곳의 비어서 방치된 주택을 찾아 집주인과 계약을 하고 수리해서 살 곳이 없어 힘든 젊은이들에게 빌려주는 셰어하우스를 만들기로 했다. 도시의 역사를 그대로 담았지만, 지금은 낡아서 아무도 살지 않는 집들에 생기를 불어넣어 춥고 불편했던 집을 아늑하고 따뜻한 공간으로 고쳐 사람이 살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집주인과는 6년간 한 달에 월세로 120만 원을 주기로 계약하고 입주청년들에게서는 시세보다 저렴한 20~30만 원의 임대료를 받아 서로 윈윈하는 방식이다. 필자는 사회적기업을 방문해 그들의 하는 일을 체험해 볼 기회를 가졌다. 은평구의 마당이 딸린 이층집이 막 수리를 끝내고 있었다.
오래 비었던 집이라 손 볼 곳이 많았다는데 지금은 깔끔하고 아늑한 이층 양옥으로 변신했다. 작지만 마당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있어 정다웠고 새집 냄새가 나는 현관을 통해 들어가니 깨끗한 거실과 주방, 그리고 일인실, 이인실로 꾸며진 방이 있었다.
이 집은 일 층과 이 층에 모두 9명이 거주하도록 지었다고 한다. 주방과 욕실은 공용이고 전기요금, 가스요금, 수도요금 등 관리비는 공통으로 나누어 낸다. 누군가 에어컨 같은 가전제품은 설치하지 않는지 질문을 던졌다.
두꺼비하우징 대표님은 그 문제는 입주민의 상의가 있어야 할 것이라는 답을 했는데 찬 바람을 싫어하는 사람과의 형평성 때문이라고 했다. 그때 동행하신 사회적기업을 지원하는 LG 직원께서 만약 에어컨을 설치하게 되면 꼭 자사제품을 써달라고 애교스럽게 말을 해서 모두 한바탕 웃었고 회사를 사랑하는 마음이 전해진다며 칭찬도 했다. 이곳의 계약 기간은 기본 6개월 이상이며 담당자와 협의를 통해 계약 기간을 정한다고 한다.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자동 연장되고 이사하고 싶으면 계약종료 1개월 전에 퇴실 의사를 말하면 된다.
필자가 본 은평구의 아담한 이층주택은 모든 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침대, 책상, 주방시설, 세탁기 등 필요한 건 이미 다 있으므로 이불만 준비해서 입주하면 된다니 형편이 어려운 청년에게 매우 편리하고 좋은 조건이라는 생각이다.
‘두꺼비하우징’은 함께 사는 것의 힘을 알고 마을 만들기를 통해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것을 도우며 주거를 통해 사회를 고민하고 지속 가능한 도시를 만들어가는 도시재생 전문 사회적 기업이다. 이런 사회적 기업을 지원하는 대기업이 더 많이 늘어날수록 우리나라가 안정되고 발전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사회적 기업의 도움을 받아 저렴한 월세로 모여 살게 될 젊은이들을 생각하니 흐뭇하다. 각자의 일을 마치고 들어와 하루의 수고를 위로하며 맥주 한잔으로 우정을 다지는 모습을 상상하니 기분이 좋아지고 그들의 앞날이 환히 빛나기를 응원해 주고 싶다.
(‘두꺼비하우징’의 홈페이지는 www.toadhousing.com이다.)
탄생부터 죽음까지 80년을 추적한 사상 초유의 수명 연구 프로젝트, 터먼 프로젝트가 그 공식을 공개한다.
1500명의 인생 추적을 통해 밝혀진 건강장수의 변수
미국 스탠퍼드대 루이스 터먼 교수팀은 10세 전후 어린이 1500여 명의 인생을 80년 추적 연구한다. 결혼, 교육정도, 자녀, 직업, 라이프스타일, 종교, 애완동물 등 다양한 삶의 조건에 따라 삶의 건강도를 분석한 결과, 기존의 건강에 대한 통념을 깨고, 오래 살기 위한 “건강한 삶의 경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적 관계와 성실성으로 나왔다. 장수한 사람일수록 가족, 이웃은 물론 사회적으로 단단한 유대관계와 긴밀한 소통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관계에서 가장 확실하게 도움이 되는 것은 남을 돕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누구라도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일이니 무척 고무적인 결론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결혼생활의 만족도가 예상대로 평균수명에 크게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흥미로운 것은 남자와 여자의 경우 그 양상이 달랐다. 아내가 있는 남성의 경우 사별 후 독신남보다 평균수명이 훨씬 길었다. 반면에 여성은 결혼 상태에 있는 것이 장수와 직결되지 않았고 심지어 사별한 여성이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여성보다 더 오래 사는 경향을 보였다. 남자는 기혼, 독신, 재혼, 이혼 후 독신의 순으로 장수하였다. 그에 비해 여성은 ‘기혼’과 ‘이혼 후 독신’의 수명이 비슷했고, 그 다음 ‘독신’, ‘재혼’의 순이었다. 독신이라는 조건이 남성과 여성에 미치는 영향이 달랐다. 이에 대해 “독신이 된 여성은 자신을 걱정하기보다 자녀나 친구 쪽으로 관심의 방향을 돌리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 반면, 독신 남성들은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친밀한 사회적 유대관계를 유지하지 못함으로써 삶에의 의지를 잃어버린다”고 밝히고 있다.
75년에 걸친 하버드대학교 인생관찰 보고서
“노년에도 계속 발전하는 삶, 젊은 시절보다 더 만족하며 살 수 있다”
하버드대생 268명을 포함 800여 명의 인생을 70여년간 추적한 하버드대 의대교수 조지 베일런트의 연구는 잘 사는 삶의 절대적 공식은 없고, 50세경까지 형성한 인간관계가 이후의 생애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임을 밝혔다.
생의 마지막 10년을 얼마나 건강하고 행복하게 보낼지는 50세 이전 형성해놓은 ‘행복의 7가지 조건’으로 예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조건은 ‘고난에 대처하는 자세’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인간관계였다. 나머지는 (평생) 교육 연수, 결혼생활, 비흡연, 적당한 음주, 규칙적인 운동, 적당한 체중이었다. 연구를 주관한 조지 베일런트 교수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이며, 행복은 결국 사랑’이라고 결론지었다. 다행히도 행복과 불행, 건강과 쇠약함을 좌우하는 것은 유전적 요인보다는 ‘통제할 수 있는’ 요인들이었다.
장수의 비밀은 어울림
1인 가구 비율이 60%에 이르는 스웨덴 사람들이 소통 단절과 고독사의 위험을 극복하고 건강한 노년을 맞는 비결은 40대부터 90대까지의 1인 가구가 모여 사는 공동주택 페흐드크네펜 덕분이다. 또 그리스 이카리아섬 사람들의 장수 비결은 사생활이 없을 정도로 이웃과 한데 어울려 살아가는 삶의 형태 덕분이다.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은 세계 어디서나 건강한 장수의 필요충분조건이라 할 수 있다. 혈액과 뉴런이 그러하듯이, 소통은 곧 생명력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노후 준비는 다름 아닌 친밀함을 나눌 수 있는 동성 또는 이성 친구, 취미와 가치를 공유하는 공동체, 남을 돕는 봉사활동, 다양한 소통의 통로와 대상 등 사회적 자본에의 투자에 있다. 독신 상태가 장수에 더 치명적이 되는 남성들이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잘 사는 삶에 일정한 공식이 있을까?
건강과 행복의 미스터리를 향한 세계 석학들의 연구
장수 요건의 통념을 깨다 ( or 진실을 밝히다)
2050년이면 평균수명 100세가 예상된다고 한다.
건강한 슈퍼 100세인이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글 한숙기 한스코칭 대표
내가 2003년에 낸 에세이집 를 읽은 많은 독자들이 던지는 질문 가운데 하나. “어떻게 하면 그렇게 모여 살 수 있나요?” 많은 분들은 궁금증을 가집니다. 자녀 네 가족과 우리 내외가 한 지붕 아래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 신기한가 봅니다. 호기심으로 묻는 분도 있고 부러워하면서 묻는 이도 있습니다. 성질 급한 분은 당장 그 비결을 알려 달라고도 합니다. 나는 이런 급한 질문을 받으면 좀 당황스럽습니다. 달리 당황스러운 것이 아니라 단시간에 단 몇 마디 말로 설명을 드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글 이근후(李根厚·이화여대 명예 교수)
요즈음 우리 사회는 핵가족도 모자라 일인 가정으로 살아가는 인구도 참 많아졌습니다. 교과서적인 가족의 개념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전통적인 사회학 교과서에 실린 가족의 개념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확대가족이란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핵가족이란 개념입니다.
확대가족은 농경사회에서 경험했던 가족구조입니다. 3대가 한 지붕 아래 모여 삽니다. 핵가족이란 산업사회를 겪으면서 생긴 가족형태입니다. 가족 이동이 손쉽도록 기능적인 가족이 부부와 미성년 자녀들로 구성하는 가족형태입니다.
13가족 함께 한 지붕아래 산다
시대가 변하면서 대부분의 가족들은 핵가족 형태를 취합니다. 자녀가 결혼하면 곧바로 분가하여 자신의 핵가족을 이룹니다. 그런데 요즈음 들어서는 이런 고전적인 가족 정의를 설명할 수 없는 가족형태들이 존재합니다.
이런 사회적 추세로 보아 우리 집은 13가족이 한 지붕아래 함께 산다고 하면 당연히 궁금증을 일으킬 것입니다. 요약해서 말씀 드리면 이렇습니다.
우리 부부는 2남2녀를 두었습니다. 그러니 모두 5가구 손자녀 합해 13명입니다. 함께 돈을 모아 빌라 형태의 집을 지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하자고 한 일은 아닙니다. 자녀들이 모여 그런 발상을 해서 내가 동참한 것입니다. 하향식이 아니라 상향식입니다. 필요에 의해 모였습니다. 1년 여의 의논과 1년 여의 설계를 거쳐 함께 모여 삽니다. 필요에 의해 모였다는 말은 자녀들의 요구와 우리 부부의 사정이 맞았다는 말입니다.
당시 현실적인 요구는 자녀들이 모두 전세를 살고 있어서 자기 소유의 주택을 갖지 못했습니다. 손자녀들이 어렸는데 그 부모들은 모두 직장을 가진 터라 육아에 손이 모자랐습니다. 우리 부부는 은퇴를 하여 상대적으로 시간여유가 있었습니다.
필요에 의해 모인 확대가족
이런 상황에서 모였으니 우리 가족은 필요에 의해 모인 확대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자녀들이 결혼하면서 신혼 6개월을 함께 보냈습니다. 그 이유는 처음부터 분가를 시키면 남남이 될 것 같아서 서로 양해를 하고 6개월의 소통기간에 합의했습니다. 새로 우리 집에 들어오는 며느리나 사위도 우리 부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부부도 새로 들어오는 식구들의 진면목을 알아야 합니다. 결혼하기 이전 자라던 친가에서 하던 습관대로 행동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우리 부부도 새 식구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하던 습관대로 했습니다. 서로 눈에 거슬리는 모습이더라도 그렇게 하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서로가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 6개월의 학습동거 끝에 분가시켰습니다.
6개월 학습동거 끝의 분가 이후
이런 사정을 거쳐 서로 분가하여 살았는데 아무리 필요에 의한 재집결이긴 하지만 의논해야 할 일들이 많았습니다. 필요에 의한 재집결의 아이디어는 큰며느리가 제안했습니다.
아들 부부가 의논하기를 우리 부부 중 누가 먼저 타계하게 되면 남은 부모를 모시기로 했답니다. 자녀가 넷인데 서로 역할을 나누어 모시면 어떨까라고 형제들 간에 의논을 했답니다. 그렇게 하자면 한 집에 살아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으로 이어지고 그 아이디어를 내가 정년퇴임하는 시점을 맞추어 실행에 옮겼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자주 모여 어떻게 하면 필요성을 극대화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 많이 의논했습니다. 부부간에 생각을 맞추어 살아가기도 힘든데 이런 대가족이 모여 살자면 의견이 다른 점도 많고 서로 부딪쳐 속상하는 일도 많을 텐데 어떻게 적응할까 많이 의논했습니다.
의논 끝에 찾아 낸 핵심적인 요체는 이렇습니다.
“우리들은 각 가정이 고유한 가치관과 종교관을 갖고 간섭 없이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서로 같음은 나누면서 즐기고 다름은 인정하고 존중합니다.”
서로 독립성을 유지하고 침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함께 모여 사는 동안 우리들은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이 노력을 하기 이전에 우리들이 깊이 생각한 하나는 가족 간의 거리입니다. 함께 한 지붕 아래 살고 있으니 물리적 공간과 거리는 매우 가깝습니다. 가까운 만큼 지켜야 할 약속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약속입니다.
정서적 거리도 중요합니다. 너무 가까워도 갈등으로 꼬이고 너무 멀어도 남남입니다. 얼마만한 정서적 거리가 필요할까요.
고슴도치를 생각했습니다. 서로 꽉 껴안으면 상처를 입습니다. 너무 먼 거리에서 바라만 보면 가족정서가 아닙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낱말이 정서적 안전거리 확보입니다. 이런 정서적 안전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기준은 결국 독립성의 유지와 간섭의 배제였습니다.
서로가 지향하는 삶의 가치 인정해
3세대 가운데 우리 부부가 그 약속을 지키기가 제일 힘들었습니다. 자녀가 아무리 나이를 먹고 성가하여 나름 가족을 형성했다고 해도 부모 눈엔 역시 어린아이로 보입니다. 이 위태한 아이(?)로 보는 시각은 머리로는 옳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정서적으로 느끼기에 부족했습니다. 하루아침에 습관이 변할 것은 아니지만 정말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간섭을 하지 않으면 자녀들도 어린이가 아닌 이상 그들이 습득한 방법으로 가족을 이끌어 갈 것입니다.
우리 부부는 늘 이런 문제로 의견이 엇갈릴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부부의 노력은 점차 자리를 잡아 갔습니다. 걱정했던 것만큼 우리 부부의 손길이 없어도 잘 지냅니다. 되돌아 보면 기우입니다. 우리 부부의 간섭이 줄어들면 상대적으로 자녀들의 창의성이 넓어집니다.
자녀들도 제가끔 나름의 가치관을 가지고 그들이나 가족들의 인생을 행복하게 살고 싶을 것입니다. 크게 패가망신할 삶이 아니라면 어떤 간섭도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꼭 부모가 살았던 방법이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상호의존적인 삶이 모델입니다. 집 구조상 함께 사는 공동주택이지만 법적으로 각기 소유로 등기되어 있으니 공동경비만 갹출해서 유지보수하면 될 일입니다. 그러니 독립이 보장된 셈입니다.
정서적으로는 서로가 지향하는 삶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으로 독립성을 유지하도록 노력을 했습니다. 이런 약속을 하고 산 지가 10년이 넘었습니다. 가장 혜택을 받은 층은 당연히 우리 부부입니다. 다음이 손자녀들입니다. 한창 일할 나이의 자녀들은 샌드위치 신세입니다. 위로 부모를 모시랴 아래로 자녀들을 키우랴 눈코 뜰 사이가 없습니다. 우리 부부가 아무리 자녀들의 독립성을 유지시키고 간섭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부모라는 이름의 무게 그 자체 때문에 불편감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가족공동체 언제까지 유지해야 하나?
이제 손자녀들도 자라 우리 부부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도 될 만큼 자랐습니다. 처음 모여 살기로 했을 때 이런 약속도 했습니다. 그러면 이런 형태의 가족 공동체를 언제까지 유지해 나갈 것인가.
손자녀들이 장성하여 결혼을 하게 되면 그때 의논해서 새로운 출발을 하자고. 10년이 지나 보니 그런 시기가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동안 사회도 많이 변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자녀들이 집에서 꿈을 키우고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자라 사회의 일꾼으로 자랄 것을 소원합니다.” 이 약속은 다섯 가지 약속 가운데 마지막 약속입니다.
이제 손자녀들이 결혼을 하여 새로운 가정을 이룬다면 그들이 함께 살았던 가족공동체 경험을 살려 또 다른 창의적인 삶을 살기를 바란다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상호 존중하는 독립성과 정서적 안전거리 확보는 미래의 가족들에게도 가치 있는 기준이 될 것을 확신합니다.
이근후 명예교수는
1935년생인 이근후 교수는 이화여대 교수이자 정신과 전문의로 50년간 환자를 돌보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76세의 나이에 고려사이버대학 문화학과를 최고령으로 수석 졸업하면서 화제가 된 인물이다. 30년 넘게 네팔 의료봉사, 40년 넘게 광명보육원 아이들을 돌본 이유도 별 게 없다. 봉사를 하니까 인생이 더 즐거워졌다는 게 전부다. 그는 10년 전 왼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고 현재 당뇨, 고혈압, 통풍, 허리 디스크 등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으로 살아가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임 후 사단법인 가족아카데미아를 설립하여 청소년 성 상담, 부모 교육, 노년을 위한 생애 준비 교육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네 명의 손자 손녀가 그의 인생 후반부를 새롭게 쓰도록 해준다며 가족들의 인연이란 참으로 놀랍다는 걸 나이가 들어갈수록, 세월이 흐를수록 실감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