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들에게 웃음을 주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시작한 백발노인의 이색 도전이 눈길을 끈다.
2일(현지 시간) 미국 ABC7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시소 타기 종전 세계 신기록 보유자인 척 워커가 지난 1일 다시 시소에 올랐다. 자신이 세운 기록의 50주년을 맞아 이를 경신하기 위한 도전에 나섰다.
앞서 워커는 1971년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에서 216시간, 9일 연속으로 시소를 타 세계 신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워커는 여전히 왕좌를 지키고 있었다. 지난 50년 간 그 누구도 깨지 못한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워커는 “바보 같은 묘기 덕에 수십 년을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잠과 생리 현상을 포함해 약 열흘간을 시소 위에서 보내야 하는 불편함을 겪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이 얼마나 재밌어 했는지 생각하니 손자들 역시 즐거워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며 “이들을 웃게 해 주고 싶었다”고 남다른 손자 사랑을 드러냈다.
또 그는 “나는 충분히 좋은 몸과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하며 도전에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러나 도전은 쉽지 않아 보인다. 워커가 자신의 기록을 깨기 위해선 최소 10일을 시소에서 보내야 한다. 수면은 물론 생리현상도 시소 위에서 해결해야 한다.
지난 1일 캘리포니아주 콩코드 토도스 산토스 플라자 스테이지에 설치된 시소에 오른 워커는 오는 10일 정오에 시소에서 내려올 예정이다.
60세 A씨는 평소 환경보호에 관심이 많다. 손자에게 종종 과자를 사주고 먹고 난 비닐봉투를 부피를 줄이려는 마음에 잘 접어서 버렸다. 그런데 이런 얘기를 주변에 했더니 한 지인이 비닐을 접어서 버리면 안 된다고 알려줬다.
비닐을 버릴 때 부피를 줄이려고 딱지처럼 접어서 버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딱지처럼 접으면 재활용품 선별장에서 비닐 재활용률이 떨어진다. 노끈도 비닐로 분리해서는 안 된다. 선별할 때 끈이 기계에 빨려 들어가 기계가 고장날 수 있어서다.
과자 봉투, 빵 봉투, 라면 봉지에 물건을 살 때 담아오는 비닐까지 생활에서 사용하는 비닐이 아주 많다. 종이 봉투처럼 비닐을 대신하는 물품 이용을 권장하고 있지만 비닐 사용은 계속 늘고 있다. 비닐 사용을 줄이기 어렵다면 분리배출이라도 잘하는 것이 환경에 도움을 주는 방법이다.
◆매듭 묶거나 딱지로 접지 않기
비닐을 버릴 때 흔히 매듭을 묶거나 딱지를 접는다. 하지만 비닐을 묶거나 접어서 배출하면 재활용품 선별장에서 일반쓰레기로 분류돼 버려진다.
재활용하고자 분리배출 방식을 이용하는데 마지막 단계에서 일반쓰레기로 분류되면 재활용을 위해 진행한 노력이 모두 허사가 된다. 따라서 비닐을 버릴 때는 되도록 매듭을 묶거나 접지 않고 펴서 배출해야 한다.
◆비닐에 붙어있는 스티커·테이프 제거하기
대형마트에서 종종 테이프로 묶인 상품을 볼 수 있다. 채소 같은 식품을 포장한 비닐은 바코드나 식품 정보를 스티커로 붙여 놓는다.
이럴 때는 꼭 테이프와 스티커를 제거하고 배출해야 한다. 테이프나 스티커가 깨끗하게 떨어지지 않을 때는 그 부분은 가위로 잘라내고 배출하면 된다.
◆비닐에 묻어 있는 이물질 씻고 말리기
생선이나 생닭을 담아 기름과 냄새가 배있는 비닐과 건강즙, 한약이 담겨 있던 레토르트 파우치를 재활용할 수 있게 하려면 이물질과 냄새가 남지 않도록 깨끗하게 씻어서 버려야 한다.
과자봉지도 비닐 안에 부스러기가 남아 있지 않도록 깨끗하게 털어서 버리고 버려야 한다.
◆추가 배출 팁
택배 시 함께 배송되는 에어캡이나 비닐 충전재는 바람을 뺀 뒤 분리배출하는 것이 좋다.
PVC 소재인 비닐 랩은 재활용이 쉽지 않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유해물질도 함께 나온다. 이때는 비닐이라고 해도 일반쓰레기로 버리는 것이 좋다.
추가로 과자나 시리얼 중에는 여러 번 나눠 먹을 수 있도록 대용량 봉투에 지퍼가 부착돼 출시되는 제품이 많다. 이런 봉투는 내용물을 모두 먹은 후 바로 버리지 말고 세척해서 재사용하는 것이 좋다.
시장에서 생닭이나 생선, 생고기같이 기름기가 있고 냄새나는 식재료를 사 올 때 이 지퍼가 부착된 비닐에 담아 가면 냄새도 새어 나오지 않고 일회용 비닐팩 사용도 줄일 수 있다.
환경을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해도 위생이나 경제적인 문제로 비닐 사용을 아예 안 할 수는 없다. 때에 따라 앞에서 제시한 방법을 활용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시니어이자 어르신으로서 생활에서 쓰레기 분리배출에 바르게 앞장선다면 다음 세대에 깨끗한 환경을 물려준다는 뿌듯함을 누릴 수 있다.
고전에는 사람 사는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인류의 보물창고입니다. 사람은 짧은 생을 살다 가지만 축적된 지혜는 면면히 이어집니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해도 사람의 생각과 정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지요. 고전에 담긴 지혜는 삶의 고갱이가 되어 우리 영혼의 양식이 됩니다. ‘영혼의 혼밥’을 짓는 신아연 작가가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독자들을 위해 동양 고전을 재료로 솥단지를 걸었습니다.
“집에 글쎄 도둑이 들었지 뭐예요. 얼마나 놀랐는지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었어요.”
요즘 하고 있는 어느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재기발랄한 아가씨가 데이트 상대에게 던진 대사입니다.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다’, 젊은 층에서 딴에는 재치로 하는 말, 단순 유행어라고 하기엔 그 철없음에 민망하여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어디 비교할 데가 없어서 일상의 자잘한 사건 사고를 장난삼아 6.25 난리를 끌어들여 말할까요. 6.25를 직접 겪은 세대가 이 말을 들을 때 느낌이 어떨지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거겠지요. 그저 재미있고 유쾌하면 그만인 거지요. 하지만 전쟁의 상흔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괴리, 허탈, 상처, 분노를 더해 세대 간의 정서적 공감력 단절에서 오는 잔인한 슬픔이 가슴에 멍울질지도 모릅니다.
‘도덕경’을 쓴 노자는 전쟁의 참상을 이렇게 애곡하고 있습니다.
군대가 머문 곳에는 가시덤불만 자라고, 큰 전쟁이 있은 후에는 땅이 피로 저주받아 흉년이 들며, 만물을 낳는 흙조차 모성을 잃어버린다고. 무고한 백성들뿐 아니라 전쟁터에 끌려간 말이 전선에서 새끼를 낳는다고. 그러니 전쟁은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하며, 이겼다 해도 승리를 미화하지 않고 상례(喪禮)로 처리해야 한다고. 그것은 흉사이기 때문에 나쁜 일을 기리는 자리, 즉 오른쪽에 최고 지휘관이 서야 한다고.
전쟁의 승리를 기뻐하는 사람은 살인을 즐기는 사람이며
살인을 즐기는 사람은 결코 큰 뜻을 펼칠 수 없다.
길한 일이 있을 때는 왼쪽을 높이고 흉한 일이 있을 때는 오른쪽을 높인다.
둘째로 높은 장군은 왼쪽에 서고 제일 높은 장군은 오른쪽에 위치한다.
이는 상례로 처리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을 살상하였으므로 이를 애도하여 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상례로 치러야 한다.
-노자 ‘도덕경’ 31장
올해로 6.25전쟁 71주년을 맞았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과 함께 시작됐으니 전쟁의 참혹함을 새삼 언급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6.25전쟁은 분단의 고통과 함께 여전히 살아 있는 슬픔입니다. 그 슬픔을 함께 아파하지는 못할망정 조롱하는 듯한 유행어를 듣는 것은 언짢고 화가 납니다.
‘전쟁이 나쁘지, 농담이 나쁜가’ 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해학과 촌철의 달인 장자의 비유를 들어볼까요?
‘장자’ 칙양편에는 인간사를 달팽이 뿔 위에서 벌어지는 전쟁으로 비유한 글이 나옵니다.
달팽이 머리 위에 뿔이 두 개 나 있는데
각각이 하나의 나라다.
왼쪽 뿔은 촉나라고, 오른쪽 뿔은 만나라다.
이 두 나라는 서로 땅을 빼앗기 위해
틈만 나면 전쟁을 벌였다.
그 싸움이 워낙 치열해서
널브러진 병사의 시체가 수만 구나 되고
도주하는 적군을 추격하면
15일이나 걸려야 돌아왔다.
촉만지쟁, 와각지쟁으로 불리는 장자가 만든 우화입니다. 두 나라 간의 싸움이 처절하기 그지없지만 기껏해야 달팽이 뿔 위에서의 일이니 그야말로 하찮다는 의미가 담겨 있지요. 하늘이나 우주에서 내려다본다면 인간들끼리의 전쟁이 달팽이 뿔 위에서 벌어지는 것과 다를 바 없겠지요. 더 중요한 것은 달팽이의 두 뿔은 한 몸에 달려 있다는 거지요. 두 뿔 중 하나를 잃게 되면 달팽이는 부상을 입거나 죽음을 맞게 되겠지요.
결국 전쟁은 승자가 없습니다. 노자 말씀대로 오른쪽을 높인들, 상례로 치른들 모두가 희생자요, 부질없는 일인 거지요. 병법가인 손자조차 이익을 얻기 위해 전쟁을 치른다 해도 감정이나 기분이 앞서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지혜의 대가들은 입을 모아 전쟁은 가급적 치르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지구상 어딘가에서는 지금도 전쟁 중이니….
이익이 아니면 군사를 움직이지 않고, 가능성이 높지 않으면 군사를 쓰지 않으며, 위험이 없으면 결코 싸우지 않는다. 군주는 분노 때문에 군사를 일으켜서는 안 되고, 장군은 화 때문에 전쟁을 벌여서는 안 된다. 망한 나라는 다시 살릴 수 없고, 죽은 사람도 다시 살릴 수 없다. 그래서 밝은 군주는 전쟁에 신중하고, 뛰어난 장군은 깊이 경계한다. 이것이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군대를 온전히 하는 길이다.
- 신정근 ‘공자와 손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사회적 거리 두기에 지친 시니어들의 일상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고, 손주에게도 도움을 주는 방법이 ‘영상 통화’라는 의견이 나왔다.
코로나19는 시니어들의 일상에 다방면으로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나이가 많은 시니어일수록 치사율이 높아 감염을 방지하기 위해 사람을 만나거나 외부 활동을 크게 자제하고 있다. 이 같은 사회적 거리 두기로 집에서 주로 생활하다 보니 고립감에 우울해지는 시니어도 많아지고 있다.
실제로 코로나19로 시니어가 가장 의지하는 가족, 특히 자녀와 손주들과 왕래하거나 연락하는 비율이 점점 줄고 있어 정서적으로 외로움이 더욱 심화된 것으로 확인됐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20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시니어가 자녀와 왕래하는 비율은 2008년 44.0%, 2017년 38.0%, 2020년 16.9%로 12년 사이에 절반 이후로 줄었다. 자녀와 연락하는 비율은 2008년 77.3%, 2017년 81.0%, 2020년 63.5%로 2017년까지 늘어나다가 지난해에는 3년 전보다 4분의 1가량이 줄었다.
게다가 코로나19 확산을 막고자 착용하는 마스크도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었다. 58세 직장인 A씨는 “오래 알던 사람은 걸음걸이나 신체 조건으로 그나마 파악이 가능하지만, 새로 알게 된 사람은 마스크를 낀 모습이 더 익숙하다 보니 돌아서면 다른 사람 같기도 하다”며 “마스크 탓에 목소리가 잘 안 들리기도 하고, 기분이나 감정이 어떤지 몰라 의사소통하기가 힘들 때도 있다”고 말했다.
권준수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사람은 얼굴을 눈, 코, 귀 등을 각각 인식하기보다 눈 사이 거리, 눈과 코 관계, 입과 코 거리 등 전체를 ‘패턴’으로 인식한다. 그런데 마스크를 쓰고 있으면 눈 모양만으로 타인을 인식해야 해 어려움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시니어들이 코로나19로 인해 겪는 부작용을 해결할 방법이 있다. 바로 ‘영상통화’다. 영상 통화는 시니어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고립감을 해소할 수 있고, 손자와 손녀에게는 비언어적 표현을 배우며 사회성을 높일 수 있도록 돕는다.
사람은 언어를 사용해 대화하기도 하지만 표정이나 몸짓 등 비언어적 표현으로도 서로 의사소통을 한다. 그러나 코로나19 시대에 태어난 아이들은 부모를 제외하고는 마스크를 쓴 사람 모습에 더 익숙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 마스크 때문에 사람을 만나고 보면서 얼굴 표정으로 배우고 익힐 수 있는 다양한 비언어적 소통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는 셈이다.
오은영 원장(소아청소년클리닉)은 “이제 막 언어를 배우고 정서 발달을 시작하는 아이들은 할아버지나 할머니와 영상통화를 자주 하면 많은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즉, 아이들이 학습할 기회가 생기는 것은 물론, 일상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를 나누며 교감하는 과정에서 시니어들도 우울감을 회복하며 손자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
영상통화는 음성통화보다 서로 얼굴을 보며 말을 하고 듣는다. 덕분에 아이들이 감각을 더 발달시킬 수 있고,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기 때문에 시니어와 손주 간 친밀감도 더 높일 수 있다.
덧붙여 오은영 원장은 “할머니나 할아버지와 하는 영상통화는 아이가 다양한 표정을 배울 수 있다”며 “특히 용건만 간단히 하기보다 각자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일상에 대해서 자세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고 조언했다.
까르르 웃는 소리, 뭐라 외치는 높고 맑은 아이들 목소리가 저 아래 공원에서 들려온다. 그 소리가 창문을 열게 한다. 미세먼지 때문에 잘 열지 않는 창을 목을 빼고 내려다본다. 아이들이 마주 앉아 그네도 타고, 잔뜩 매달려 빙글빙글 빨리빨리 돌아가고도 있다. 겁이 나는데, 아니 걱정이 되는데 아이들은 겁도 없이 타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며 잘도 돌아간다.
우리 아파트는 가족공원을 안고 있어서 좋다. 오명가명 아이들 노는 모습, 젊은 부부가 아이들 노는 걸 바라보는 모습을 보는 게 참으로 좋다.
우리 손자 두 녀석은 이제 이 공원에 오지 않는다. 4,5학년 때 브라질에서 한국으로 온 형제, 이젠 고등학생이 된 것이다. 농구나 축구를 하러 친구들과 더 큰 공원으로 가거나 혼자 방에서 게임을 한다. 우리 집에 와서도 꾸뻑 인사 후 그냥 그대로 게임에 빠진다. 가끔 옆에 앉아 아이의 휴대폰을 조심조심 들여다본다. 옛날 전차에서 신문을 읽을라치면 옆 사람이 종종 같이 읽으려 하는 듯해 무척 싫었던 기억이 나서다. 할 수 있으면 배우고 싶기도 하고 도대체 어떤 것이길래 정신없나 들여다보지만 노상 총을 들고 달려가는 전쟁터, 금방 돌아앉고 만다.
너덧 살 때 우리 집에만 오면 틀림없이 “하니1), 우리 꼭꼭 숨어라 하자!” 눈 반짝이던 녀석들, 고작 거실에 방 둘, 샤워실이 있는 화장실, 부엌 지나 뒤로 가면 빨래터, 작은 식모방이 있고 작은 화장실이 하나 더 있어서 숨을 곳은 뻔한데 두 녀석은 숨바꼭질하자 했다.
내가 벽에다 얼굴을 박고 “하나 두우울 세에에엣 네에에에엣 다아서어어엇…” 하는 동안 옷장 안, 침대 아래, 커튼 뒤, 식탁 아래, 의자 뒤, 둘이 엉겨 붙어 같이 숨느라 바쁘다. 아무리 그래도 하니는 어디 숨었는지 금방 안다. 한 번도 숨기 놀이 같이한 적 없는 하지도 애들이 잘 숨나 열심히 본다. 소파 옆에 잘 숨도록 슬쩍 가려줄 줄도 안다.
하니, 이윽고 “간다!” 외친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알뚤도 꼭꼭 알란도 꼭꼭” 노래도 한다. 그러고는 괜히 엉뚱한 곳으로 가서 “어! 여기 아니네! 어디 숨었지? 방귀도 뀌지 말고 웃지도 말고 꼭꼭 숨어라” 한다. 침대 밑에 납작 엎드린 두 녀석, 들킬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에 숨 멈추고 있을 때 하니는 일부러 저 뒤 빨래터로 가서 큰 소리로 “아이고! 없잖아?” 했었지.
다시 내려다보니 군인들 서너 명이 씩씩하게 걸어간다. 외출 나온 모양이다. 유쾌하게 웃더니 갑자기 놀이기구로 간다. 애들 틈에 끼어 빙빙 돌아간다. 군인인 걸 잊은 듯! 입대 전 학생으로 돌아간 듯! 문득 우리 손자들 같아서 재미있고 반갑다.
“여보!” 할아버지를 부른다. 우리 내외는 군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말없이 내려다본다. 할아버지도 안다. 왜 불렀는지. 우리 두 아이들, 몇 년 후 군인이 될 것이고, 휴가 나와 하니 하지를 찾아와 “충성!” 하며 경례를 붙일 것이다. 여드름이 사라진 얼굴은 거무튀튀 건강한 색깔이고, 어깨는 반듯해져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진짜 사나이가 된 아이들이 눈물겹도록 대견하고 또 대견할 것이다.
창문을 닫고 돌아선다. 미세먼지가 생각난 것이다. 잠시 그 군인들은 어디로 갔을까 생각해본다. 어디든 다섯 명이 넘으면 안 된다는 걸 알 테지? 이게 노파심이다. 어린애들과 섞여 빙빙 회전놀이기구를 즐긴 기분으로 이 친구 저 친구 다 모이라 하고 만나러 가는 건 아니겠지?
나는 오랜 팬데믹으로 인해 졸업식도 없이 고등학생이 되어버린 아이들이 너무도 측은하다. 내가 중학교 졸업하던 날, 우리 식구는 아버지 따라 중국집에 짜장면 먹으러 갔었지. 행복이란 별게 아니었지. 아, 그래. 그 짜장면! 얼마나 맛있었던가!
그리고 기대에 차서 고등학교에 간 첫날, 담임선생님을 뵙고, 새 친구들을 만나고, 자리를 정하고, 새 교과서를 받아올 때, 난 아주 다른 느낌을 받았었지. 어른의 세계로 한 발짝 들어선 기분 아니었던가? 집에 와선 스스로와 한 굳은 약속도 써 붙이고, 책상 정리도 새로 했었지. 그렇게 새날을 향해야 한다는 나는 현실을 모르는 구시대 노인일까?
그도 그럴 것이 비대면이라는 놀라운 수업으로 백석의 시, 충담사의 찬기파랑가, 서경별곡 그리고 훈민정음해례본, 아관파천을 배운다니 기가 막혔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가 프린트한 것을 보고는 그 난해한 콘텐츠에 그만 놀라버렸다. 우리 아이들이 이 엄청난 한자어 낱말들을 과연 알까? 선생님은 잘 설명해주셨을까? 이 역시 노파심이리라.
얘들아, 사실 신라 향가나 고려 속요 모른다고 무슨 일이 있는 것 아니야. 그렇지만 책 읽은 얘기, 영화 본 얘기, 어젯밤 꾼 꿈 이야기를 나눌 친구는 만나야지. 멀리 있어도 옛날 그 어느 날에 공부하자고 한 약속을 잊지 않고 있는 친구, 그런 친구를 나도 고등학교 때 만났단다. 아, 그러니까 얘야, 너와 내가 한 약속이 또 생각나는구나.
알뚤, 네가 5학년 때였지? 할머니와 나눈 약속, 빨간 차!
“너네 빨간 차, 참 예쁘다. 이 담에 이런 차 할머니한테 사줄래?” 내가 말했더니 넌 얼른 그러겠다고 했어. 그 이후 가끔 묻곤 했지. 넌 그때마다 빨간 차 하니한테 사주겠다고 했어.
나는 이제 그 약속을 더 묻지 않는다. 고등학생이 된 네가 지금도 기억할 것을 알아서다. 대학생에서 군인으로, 사회인으로 성장해, 나를 앞세우고 빨간 차 보러 가는 날을 상상해본다.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그게 언제일까는 군더더기.
언제가 아니면 어떠니. 넌 약속을 했고, 코로나 괴물은 도무지 사라질 줄 모르는데. 그리고 빨간 차는 내 마음속 주차장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으면 됐잖니.
1) 큰 손자가 아기 때 할머니를 ‘하니’라고 불렀다. 아기는 ‘할머니’라 말한 것이지만 어른들 귀에는 ‘하니’로 들렸다. 할아버지도 ‘하지’라고 불렀다.
안경자·이찬재 41만 명의 인스타그램 팔로어를 보유한 시니어 인플루언서 부부로, SNS에 손주 사랑을 담은 글과 그림을 올려 화제를 모았다. 그림 에세이 ‘돌아보니 삶은 아름다웠더라’를 펴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손주’라고 하지만, 이 남자의 손주 사랑은 꽤 유별나다. 여름에는 ‘할아버지의 여름 캠프’를 준비해 손주들과 강원도 농막에서 특별한 시간을 보내는가 하면, 겨울에는 산타 할아버지로 변신해 아이들 앞에 깜짝 선물을 들고 찾아온다. 그 모든 기록은 그의 블로그에 빼곡히 담겨 있다. 조용경(70) 전 포스코엔지니어링 대표이사 부회장의 이야기다. ‘워커홀릭’ 인생 2막을 매듭짓고, ‘손주홀릭’으로 노년을 지내고 있는 조 전 부회장의 특별한 손주 사랑법을 들여다봤다.
“축하해주세요. 제가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조 전 부회장의 블로그 중 ‘손자바보의 육아일기’ 카테고리에 게시된 첫 글이다. 글 안에는 그의 첫 손주 현우의 신생아 적 사진이 담겨 있다. 첫 글부터 1년 단위로 나뉘어 있는 폴더를 눌러보면 늘어나는 숫자만큼 쑥쑥 자라난 손주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남이 봐도 대견한데, 할아버지 눈에는 오죽 사랑스러울까. 손주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는지 이야기를 꺼내는 그의 표정은 싱글벙글하다.
“손주들이 태어나고 나니까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어요. 인생이 달라지는 것 같고요. 무엇보다 저는 6·25 전쟁통에 태어나서 어린 시절의어떤 기록도 남아 있는 게 없어요. 그냥 백일 사진, 돌 사진 한두 장 정도가 다예요. 그게 참 안타까워서 우리 손주들은 태어나서부터 성장할 때까지의 기록을 남겨줘야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블로그를 시작했죠.”
손주는 절친한 벗이자 스승
손주들을 위한 기록을 남긴 지 어느덧 11년째. 그 사이 고사리 같은 손발로 기어 다니던 두 손주는 친구들과 노는 데 푹 빠질 나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할아버지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닌다. 손녀 현아도 할아버지를 만나는 날이면 껌딱지처럼 떨어질 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함께 즐기는 놀잇거리가 꽤 다양하다. 바둑, 알까기, 배드민턴부터 최근에는 복잡한 보드게임까지 연마하고 있다.
“거창한 교육 철학은 없지만, 몸이 힘들어도 친구처럼 놀아주려고 해요. 누가 보든 말든 홀랑 벗고 팬티 하나만 입고 같이 수영장 들어가서 놀고, 침대에서 레슬링하고, 음식도 만들어서 먹이고 그러는 거죠. 어떨 때는 우리 집사람도 한심하다는 듯 봐요.(웃음) 그래도 손주들은 잔소리하는 할아버지보다 같이 놀아주는 할아버지를 좋아해요. 아이들에게 어른의 기준을 요구하는 대신, 어른이 아이들의 눈높이를 맞추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때로는 친구가 아닌 스승과 제자처럼 지내기도 한다. 대신 여기서 스승은 손주다. 그는 ‘논어’에 나오는 고사성어 ‘삼인행 필유아사’(三人行 必有我師·세 사람이 같이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를 인용하며 손주를 통해서도 배울 점이 많다고 강조한다. 손주와 가까이 지내는 그만의 두 번째 비결이다.
“작년에 동영상 편집을 공부하려고 학원을 알아보는데, 승우가 가르쳐주겠대요. 그러더니 영상 자르고 붙이기, 자막 쓰기, 음악 넣기 등 영상 편집하는 방법을 삐뚤빼뚤한 글씨로 1번부터 10번까지 적어온 거예요. 감동도 감동이지만 충격이었어요. 이렇게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아이들과 소통을 잘하려면 계속 배워야 되겠다 싶더라고요. 그날 승우에게 ‘이제부터 승우가 할아버지 선생님이다!’ 하니 무척 좋아하더라고요.”
할아버지의 특별한 자연 수업
2014년 우연한 계기로 마련한 강원도 춘천의 농가 주택은 손주들의 또 다른 놀이터다. 봄에는 상추나 고추 모종을 심으며 싱그러운 계절을 느끼고, 가을에는 밤송이를 줍기 위해 뛰어다니고, 겨울에는 내리막길에서 썰매를 탄다. 모니터 안의 게임 화면보다 생동감 넘치고 즐거운 놀이다. 사계절 내내 자연 속에서 손주와 뒹굴며 행복을 느끼는 건 조 전 부회장도 마찬가지. 그중에서도 그는 ‘할아버지의 여름 캠프’를 잊지 못할 추억으로 꼽는다. 2015년부터 2018년까지 매년 이어져온 가족만의 작은 연례행사다.
“자연 속에서 지내는 걸 손주들이 생각 이상으로 좋아하더라고요. 걔들 눈에는 모든 게 다 장난감이잖아요. 돌멩이도 장난감, 개구리도 장난감. 그 모습에 제가 위안을 받은 것 같아요. 덕분에 추억이 참 많아요. 낮에 너무 열심히 논 나머지 손주 녀석이 자다가 이불에 지도를 그린 적도 있고, 세 녀석과 파고라에 누워 별을 보며 잠들었던 기억도 나네요.”
마냥 평화롭게만 보이는 농촌 생활이지만, 위험천만한 상황도 종종 겪었다. 뱀이 수시로 마당이나 텃밭을 기어 다녀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은 기본, 말벌에 이마를 쏘여 응급실로 실려 간 적도 있었다. 이 정도면 자연에 신물 날 법도 한데, 손주들이 즐거워하면 그만이라는 그다.
“벌에 쏘였을 때는 눈앞에서 번개가 치는 줄 알았어요. 병원에 가려고 집 밖을 나서다가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들어가서 손주들을 한 번씩 안아주기까지 했다니까요. 위험한 일도 많았지만, 그래도 손주들이 자연과 가까워지고 친해지는 것 같아 좋더라고요. 더 이상 송충이도 무서워하지 않게 되고요.”
배려하는 사람으로 자랐으면
손주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그는 때때로 자신의 조부모를 떠올린다. 조부모 밑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기억이 있어서다. 공립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조 전 부회장의 아버지는 직업 특성상 2~3년 주기로 전근을 다녔다. 어린 동생들은 아버지를 따라갔지만, 장손인 그는 열 살이 될 때까지 조부모와 함께 살았다.
“할아버지와 사랑방에서 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매일 새벽이 되면 깨워서 세수를 시키시고, 호롱불을 켜놓고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알려주셨죠. ‘일생지계재어유’(一生之計在於幼·일생의 계획은 유년 시절에 세운다)라는 옛말처럼 어린 시절부터 공부를 한 덕분에 여러 가지 생각을 많이 할 수 있었어요. 제가 인생의 스승으로 삼는 사람이 세 분 있는데, 그중 할아버지가 첫 스승이에요.”
손주 사랑도 유전인가 싶을 정도로 그의 조부모 역시 그를 애지중지 아꼈다.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을 베풀 줄 안다”는 그의 말이 이해되는 지점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사랑에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남는 듯했다.
“손자에 대한 사랑이 맹목적인 분들이셨어요. 모든 것을 제 중심으로 맞춰주셨죠. 집 앞 산이나 강도 쉽게 못 갔어요.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서 성장 과정에서 버릇없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었죠. 그런 기억이 있어서인지 손주들은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싶더라고요.”
마지막까지도 ‘손주’
건설업계에서 30년간 굵직한 족적을 남기고 자식 농사도 성황리에 끝마쳤으니 이제는 느긋이 노년을 즐기며 쉴 법도 한데, 조 전 부회장은 여전히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10여 년 전 작성한 버킷리스트를 달성하기 위해서다. 특이한 점은 버킷리스트 대부분이 손주들에게 해줄 것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 손주들과 몽골 초원에 누워 밤하늘의 별 바라보기, 2년에 한 번 손주들과 해외여행 가기, 장학금 만들어주기 등 온통 손주를 위한 이벤트뿐이라 손주들이 쓴 버킷리스트인지 헷갈릴 정도다. 물론 ‘할아버지의 여름 캠프’도 그중 일부다.
“2008년에 영화 ‘버킷리스트’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어요. 밤을 새워가며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것 30가지 정도를 꼬박 적었죠. 3년 뒤 현우가 태어나고 다시 펴봤어요. 그때 보니 손주하고 아무 관계 없는 것들만 써놨더라고요.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서 손주들과 함께할 수 있는 것들로 다시 썼죠. 몽골 여행은 올해 목표였는데 코로나 때문에 어려워졌지 뭐예요.”
이야기 도중 그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작은 USB 카드 3개가 눈에 들어왔다. 세 손주의 성장 과정과 함께한 추억을 사진으로 정리한 것이다. 틈날 때마다 사진기를 든 덕분에 두 손자는 2000장, 뒤늦게 태어난 손녀 현아는 700~800장 정도의 사진이 모였다. 첫머리에는 할아버지가 보내는 영상 편지도 담았다.
“올해 안에 선물하는 걸 목표로 삼고 있어요. 나중에 이걸 보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없어도 영원히 제 곁에 있다고 느끼지 않을까 싶어서요. 세 녀석이 할아버지를 ‘세상에서 가장 나를 사랑했던 사람’이라고 기억해주었으면 해요.”
조 전 부회장과 함께 사는 둘째 손자 승우 군이 인터뷰 중 할아버지를 찾아 카페로 왔다. 자다 일어나니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아서였다. 그런 손주를 바라보는 조 전 부회장의 눈은 사랑으로 가득했다. “인생 후반전에 주어진 새로운 삶의 에너지원, 나의 부활”을 마주할 때만 짓는 표정이었다.
손주 마음 엿보기
Q. 할아버지랑 뭐하고 놀 때 제일 좋아요?
A. 알까기 할 때요. 하지만 제가 이겨요. 오목은 할아버지가 더 잘해요. 여름에 같이 파고라에 누워서 자는 것도 재밌어요.
Q. 할아버지 왜 좋아요?
A. 너무너무 착해요. 잘 놀아주고, 원하는 거 많이 해줘요.
Q. 앞으로 할아버지랑 같이하고 싶은 건요?
A. 단둘이 미국으로 여행 가고 싶어요.
Q. 단둘이? 현우, 현아랑 셋이 가면 좋잖아요.
A. 아뇨, 할아버지랑 둘만 갈래요.(웃음)
2012년, 50대 중반에 손주를 본 작가 박경희(60) 씨는 금쪽같은 손주가 태어난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덜컥 겁이 났다. 50대에 할머니가 되는 법은 들어본 적도, 배워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기왕이면 멋진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지난해 자신과 주변 조부모들의 이야기를 담은 ‘손주는 아무나 보나’를 펴냈다. 나름의 독학인 셈이다. 그 무수한 고민 덕분이었을까, 이제 그녀는 익어가는 자신과 쑥쑥 자라나는 손자를 느긋하게 관망하는 여유가 생겼다. 베테랑 방송 작가에서 ‘오아민 할머니’로 인생 3막을 일궈가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모든 것이 남들보다 한걸음 빨리, 숨 가쁘게 찾아왔다. 박경희 씨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다. 스물여섯에 결혼을 하고 곧바로 첫째를 낳았다. 한숨 돌릴까 싶더니 연년생으로 둘째 아들이 세상 밖에 나왔다. 라디오 작가로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사이 커버린 첫째는 자신과 견줄 만한 속도로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이른 나이에 짝을 만나고, 결혼하자마자 첫아이를 본 것까지 빼닮았다. 정신 차려보니 풋보리 같은 손자 아민이가 자신을 ‘할머니’라 부르고 있었다. 순간 그녀는 미지의 세계에 빠진 듯 혼란스러웠다.
“김혜자 선생님과 라디오 프로그램을 같이할 때 비슷한 얘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김혜자 선생님도 저처럼 이른 나이에 손주를 보셨거든요. 그 당시 선생님께서는 할머니가 될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어디론가 떠밀려가는 느낌이 드셨다고 해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공감은 했지만, 사실 실감은 못 했어요. 그런데 아민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접하는 순간, 그제야 선생님의 말씀이 이해됐어요. 뭐랄까, 여자로서의 막이 닫힌 느낌? 좋고 나쁨을 넘어 굉장히 미묘한 기분이었어요.”
인생에 갑작스러운 변화의 바람이 불면 누구나 그렇듯 지나온 삶을 돌아보기 마련이다. 경희 씨에게는 손주가 태어난 순간이 바로 그 지점이었다. 어느 날 그녀는 모니터 앞에 앉아 이상적인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소싯적 아주머니라는 호칭조차 거부했던 그녀였기에 훗날 손주가 자신을 떠올릴 때 멋지게 기억되길 바랐다. 그런 생각을 하니 손주와 할 일이 하나둘 떠올랐다. 작가 박경희로서의 욕심도 생겼다. 그러자 할머니가 된다는 것이 끝에 다다른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시니어를 위한 에세이 ‘손주는 아무나 보나’를 펴낸 이유이기도 하다.
“아민이가 태어난 후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해보게 됐어요. 휴게소처럼 달리다 잠깐 멈춰서 돌아보고 재정비하는 거죠. 처음에는 인생의 막이 내린 것 같았는데, 사실 세 번째 막이 열리고 있었더라고요.”
손주로 되찾은 청춘
책을 쓰기 위해 주변 조부모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다니던 경희 씨는 한 가지 눈에 띄는 공통점을 발견했다. 수십 년간 몸담은 직장을 떠나고 백수로 돌아갈 생각에 수심 가득하던 남성들의 얼굴이 손주가 태어난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피어났다는 것이다. 은행 지점장으로 일하다 은퇴한 경희 씨 남편의 친구는 “마음은 청춘인데 세상이 나를 뒷방 노인네 취급한다”며 한탄하더니, 손주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죽은 나무에 꽃이 피는 기분”이라며 활기를 되찾았다고 한다.
“은퇴하면 가정을 책임진다는 큰 몫이 사라지잖아요. 그런데 바쁜 부모 대신 손주를 봐주면 자식이나 며느리, 사위가 감사해하고 든든하게 느끼니까 ‘아직 여기에 내 역할이 있구나’ 깨달으면서 삶의 낙을 찾는 거죠.”
은퇴하지 않은 남성들도 고독을 느끼기는 매한가지다. 병원장으로 재직 중인 경희 씨 친구의 남편은 과업으로 힘들어하며 매일 기운 빠지는 소리를 입에 달고 지내곤 했는데, 손주를 보고 난 뒤 180도 달라졌다. 그녀가 메신저로 전해받은 동영상 속에는 우울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아장아장 걷는 손주를 사랑스레 바라보는 인자한 할아버지가 있었다.
경희 씨 남편도 예외는 아니다. 말수도 적고 덤덤한 경희 씨 남편은 표현에 서투르지만, 표정에서 다 드러나는 모양이다.
“남편은 아민이가 태어났을 때도 덤덤했어요. 근데 손주를 본 기쁨은 나보다 더 큰 것 같더라고요.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나 무언가를 남기고 간다고 하잖아요. 남자들은 손주를 볼 때 그게 무척 실감나나 봐요. 가끔 아민이 데리고 외식하러 가면 남편이 더 좋아해요. 두 아들을 챙겨주지 못한 미안함과 손주에 대한 감사함이 표정에서 보이죠.”
두 사람 사이 웃을 일이 많아지니 부부 사이도 좋아졌다. 원래도 사이가 소원한 건 아니었지만 하는 일도, 관심사도 달라 이야깃거리가 많지 않았다. 그런 두 사람에게 손주는 교집합의 행복이었다. 손주가 똥을 싸도 기특해하는 것까지 똑같다. 때로는 손주와 나들이 간다는 구실로 근교 데이트도 즐기고,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못다 한 이야기도 나눈다.
“두 아들 정신없이 키울 때는 남편과의 추억이 많지 않은데, 요즘은 손주 덕분에 그때 누리지 못한 여유를 즐기고 있어요. 노년의 삶이 한층 더 풍요로워졌죠. 약간의 신혼 분위기랄까요.(웃음)”
워킹맘 며느리와의 특별한 연대
18년간 라디오 프로그램 ‘김혜자와 차 한잔을’ 작가로 활동하며 결혼 후에도 일을 놓지 않았던 경희 씨는 그 당시 흔치 않은 워킹맘이었다. 하지만 방송국이나 잡지사로 동분서주 뛰어다니느라 바쁜 하루를 보내면서도 가사에 소홀하지 않았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는 것은 안 된다’던 시어머니 밑에서 엄격한 시집살이를 하며 본의 아니게 일과 육아, 가사를 모두 완벽하게 해내야 했다. 경희 씨는 늘 최선을 다했지만, 동시에 불안했다.
“나름 잘 키우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이한테 못 챙겨주는 부분이 있는지, 놓치는 정보는 없는지 고민을 굉장히 많이 했어요.”
오늘날 대한민국의 워킹맘도 30여 년 전 경희 씨와 별반 다르지 않은 고충을 겪고 있다. 경희 씨의 며느리도 그렇다. 개발자로 일하는 며느리는 손주가 태어나고부터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상황이라 주변의 손을 빌려야 했다. 경희 씨 역시 아들과 며느리가 부탁하면 작가로서의 커리어를 포기하고 황혼 육아에 전념할 생각이었지만, 오랜 논의 끝에 아들네와 가까이 사는 사돈이 돌봐주기로 결론지었다.
“ ‘손주를 아무나 보나’를 처음 보는 분들은 제가 아민이를 맡아 키우며 쓴 책일 거라고 생각하세요. 근데 사실 그러지 못한 미안함으로 쓴 거거든요. 이 땅에 아민이 외할머니 같은 분들이 많을 거란 생각으로요. 단순히 사례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조부모나 시부모로서의 올바른 역할과 책임, 말 못 할 고민에 대해 사회적 차원에서 함께 이야기해보자는 취지였죠. 이런 이야기가 우리 사회에는 아직 많이 부족하거든요.”
손주를 돌봐주지 못하는 미안함이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다는 경희 씨는 며느리와 손주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을 고민했다. 그때 워킹맘 며느리의 모습에서 자신의 젊은 시절이 겹쳐 보였다. 이후 분기별로 며느리와 손주에게 필요한 책을 주문해 보내주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10살이 된 손주에게는 초등학교 3학년이 읽을 만한 상상력 가득한 소설을, 며느리에게는 초보 엄마를 위한 에세이를 보내주는 식이다.
“워킹맘의 노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잖아요. 아이 교육에 중요한 시기를 놓치면 굉장히 후회하거든요. 그래서 시어머니로서는 적당히 거리를 두되, 며느리에게 필요한 부분은 최대한 지원해주고 싶었어요. 딸 같은 마음이라기보다는 같은 일하는 여성으로서의 연대, 응원 같은 거죠. 특히 조부모는 자식 키우며 수많은 성공과 실패를 경험했잖아요. 그중 실패담은 빼고 효과적인 노하우만 전수해주니 며느리가 싫어할 이유가 없죠.(웃음)”
럼피우스 할머니를 꿈꾸다
손주를 만나는 날이면 경희 씨의 머릿속은 이야기보따리로 가득하다. 첫째 아들 어린 시절 그림 그리는 재주를 발견한 순간, 두 아들이 과자 하나를 두고 꼬집으며 싸웠던 일화, 경희 씨 고향인 양평에 얽힌 추억까지 옛이야기를 들려주면 손주의 눈은 흥미롭다는 듯 커다래진다. 그녀는 그런 손주를 보며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내 말이 숭숭 새는 것 같아도 기억에 남는 게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들으며 남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10여 년 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전해주신 말씀이 어제처럼 선명하게 떠올라서다.
“두 아들 키울 때 해주지 못한 것을 손주에게 쏟게 되는 것 같아요. 다행인 건 아민이 아빠도 그 모습을 보고 그동안의 서운함을 조금씩 씻어내는 것 같더라고요. 언젠가 한번은 아들에게 표현하지 못한 마음을 아민이에게 전한 적도 있어요. ‘아민아, 사실 너네 아빠는 혼자서도 뭐든지 참 잘했어’라고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대화법은 경희 씨가 손주와 허물없이 지낼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하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대신 손주의 의견을 구한다. 명령보다는 의문문을, 일방적인 가르침보다는 생각을 공유하는 토론을 선호한다. 영화 한 편을 같이 보고 난 뒤에는 감상평을 나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데려가서는 작품이나 유물에 얽힌 내용을 할머니의 목소리로 들려준다.
“아이들에게는 현장 학습이 중요하거든요. 책에서 보는 열목어와 눈으로 보는 열목어는 다르잖아요. 직접 경험하면 나중에 교과서로 배울 때 얼마나 쉽겠어요.”
경희 씨의 바람은 바버러 쿠니의 그림책 ‘미스 럼피우스’의 럼피우스 할머니처럼 손주에게 기억되는 것이다. ‘미스 럼피우스’는 어릴 적 할아버지로부터 수많은 이야기를 듣고 자란 럼피우스가 먼 훗날 할머니가 되어 자신의 인생담을 또 다른 꼬마들에게 전해주는 내용이다. 할머니이기 전에 이야기하는 직업을 가진 그녀와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캐릭터였다.
“할머니의 품을 편안한 쉼터라고 여겼으면 좋겠어요. 요새 아이들은 숨 돌릴 틈도 없잖아요. 이 글을 읽는 분들도 본인이 어떤 할머니가 될 것인지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평소와 같은 날도 다르게 다가오거든요. 저는 그걸 아민이 덕분에 느꼈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을 찍기 위해 경희 씨와 대학로 방송통신대학교 뒷길을 거닐었다. 그녀는 촬영도 잠시 잊은 듯 길가에 핀 꽃의 이름을 읊으며 흥미로운 이야기를 쏟아냈다. 멋진 할머니를 둔 아민이가 내심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기쁠 때는 노래의 멜로디가 들리고, 슬플 때는 노래의 가사가 들린다는 말이 있다. 음악을 듣는 건 어떤 마음을 느끼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1980~90년대 포크밴드 ‘동물원’의 멤버로 활약했던 가수 김창기는 서정적인 노랫말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 그가 기타를 세심하게 매만지던 손으로 초크 대신 펜을 들고 음악과 삶에 관한 얘기를 독자에게 들려주고자 한다.
‘무얼 믿은 걸까 부족했던 내게서. 나조차 못 믿던 내게 여태 머문 사람. 무얼 봤던 걸까 가진 것도 없던 내게. 무작정 내 손을 잡아 날 이끈 사람. 최고였어. 그대 눈 속에 비친 내 모습. 이제는 내게서 그댈 비춰줄게.’ 트로트계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임영웅이 지난해 경연대회에서 우승 후 발표한 노래 ‘이제 나만 믿어요’의 가사 중 일부다.
이 곡은 사랑하는 이에 대한 고마움을 담은 곡인데, 그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는 누구였을까? 한 인터뷰에서 밝히기를 “성공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그는 망설이지 않고 “외할머니와 어머니께 효도하고 싶다”고 했다. 노랫말처럼 부족한 그를 이끌어주고 손을 잡아준 사람은 바로 오랜 세월 든든한 버팀목이자 응원군을 자처했던 외할머니와 어머니였다.
특히 그는 외할머니에 대한 마음이 각별하다. 아무리 바빠도 외할머니에게 꼬박꼬박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살뜰하게 외할머니를 챙기는 이유는 어린 시절 외할머니로부터 보살핌을 받은 경험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고, 어머니는 홀로 미용실을 운영하며 그를 키워야만 했다. 어머니가 일하는 동안 그를 보살폈던 존재가 바로 외할머니였다. 이러한 덕분에 유대가 깊을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외할머니는 또 다른 어머니 같은 존재였을지도.
그는 무명 시절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알바로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가수의 꿈을 놓지 않았다. 유년 시절의 고난과 무명 가수로서의 생활고와 시련을 극복하고 멋진 가수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외할머니로부터 받은 사랑 덕분일지도 모른다.
부디 그가 초심을 잃지 않고, 외할머니의 가르침을 본받아 더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음악인이기를 바란다. 인기는 언젠가는 사라지지만, 인격은 대를 이어 꾸준히 지속되는 것이기에.
성숙한 인간으로 같이 성장
우리가 흔히 말하는 ‘효’의 근본은 부모에게 잘하는 것만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위치에서 맡은 바를 충실히 하고, 도리에 맞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옛 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효가 모든 일의 근본이라 불리는 이유다. 따라서 진정한 효도는 먼저 본인의 건강과 올바른 생활을 잘 지키는 것이다. 자식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는 부모, 조부모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는 것이다. 조부모와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고, 자주 뵙고, 그들의 소소한 바람을 이루어드리는 것은 그다음이다.
지금 자녀나 손주가 효도하고 있다면 잘 살아왔다는 증거다. 반대로 자녀나 손자와 손녀들의 행동이 불효하는 것처럼 여겨져서 서운하다면, 그 이유를 잘 살펴보고 그것을 고쳐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녀와 소통을 해야 한다. 지난 세월 자녀와의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부터 그들이 원하는 소통 방식으로 접근하는 건 어떨까? 자녀들의 내면에 관심을 가지고 다가가면, 그들로부터 배울 점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도 완벽한 사람이 아니니까.
친밀감의 표현을 모르고 살아왔던 아버지는, 친밀감을 박탈당했던 아들이 손자에게 어떻게 친밀감과 따뜻함을 표현하는지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무엇을 원했고,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배우게 될 것이다.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손자를 대해보자. 그것이 최소한의 도리다.
마찬가지로 화를 잘 내던 어머니 때문에 인내심을 배운 딸이 손녀를 대하는 방식을 보며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손녀의 입장을 헤아려보자.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 딸이 어머니에게서 무엇을 원했고, 아직도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서로를 보고 배우며 이해하게 될 때, 부모와 자녀는 진정한 소통과 교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자란 손주들도 자연스레 조부모에게 효를 다할 것이다. 그렇게 부모도, 자녀도, 손주도 좀 더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나만 믿어요 - 임영웅
이 곡은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불러도 좋다. 현재 임영웅은 트로트계의 대세로 불리지만, 이전까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가수로서 무명 시절이 길었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카페, 편의점, 식당 등에서 일했고 데뷔 후에도 군밤을 팔아야 했지만, 노래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어려운 상황에서 그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변함없이 응원해주었던 외할머니와 어머니 덕분이었다. 고단한 시절을 같이 보낸 두 분에 대한 위로와 미안함, 그리고 고마움을 담은 이 곡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은 이의 심금을 울렸다. 지독한 연습벌레로 불리며 무명 시절에도 매일 10시간 이상 노래 연습을 했다. 이 노래의 작곡을 맡은 조영수 작곡가는 ‘가사를 이야기하듯 전달하는 능력’을 그의 장점으로 꼽았다.
영화 ‘미나리’에서 제이콥과 모니카가 건강이 나쁜 손자 데이빗을 위해서 친할머니 대신 외할머니를 부른다. 많은 엄마들도 모니카처럼 친할머니 대신 외할머니의 도움을 받아 자녀를 양육한다. 그런데 이 같은 결정은 과학적으로 보면 매우 현명한 선택이다.
영화 ‘미나리’에서 모니카는 병아리 감별사로 맞벌이를 해야 하는 사정이 발생한다. 이에 심장이 좋지 않은 아들 ‘데이빗’과 여동생 ‘앤’을 돌봐줄 사람으로 한국에 있는 엄마 ‘순자(윤여정)’를 미국으로 부른다.
데이빗은 처음 만난 낯선 할머니가 진짜 할머니 같지 않다고 투덜댄다. 게다가 다른 집 할머니들처럼 맛있는 쿠키를 구워주지도 않는다. 데이빗은 서툰 한국말과 영어로 외할머니가 싫다고 말하지만 순자는 반대로 알아듣고 기뻐한다. 갈수록 나빠지던 둘의 사이는 옷장 사고를 계기로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순자가 외할머니가 아니고 친할머니였으면 어땠을까? 친할머니였다면 사이가 계속 나쁜 채로 끝났을 가능성이 높다. 과학적으로 보면 손자는 외할머니가 친할머니보다 더 가깝기 때문이다. 유전적으로 외할머니는 손자와 손녀와 비슷하게 가깝고, 친할머니는 손녀와 가장 가깝다.
실제 과학적인 연구에서도 손자는 외할머니와 함께 살 때 생존율이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 반면 손녀는 친할머니와 함께 살 때 생존율이 가장 높았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의 레슬리 냅 교수 연구진은 할머니들의 손주 사랑이 유전자와 관계가 있다고 믿고 관련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17세기부터 2009년까지 일본과 에티오피아, 감비아, 말라위의 농촌지역, 독일과 영국, 캐나다의 도시 지역 인구변화를 분석했다.
연구진은 2009년 10월 28일 국제학술지 ‘왕립학회보 B’에서 7개 국가의 인구변화 자료를 분석해 손자는 외할머니와 함께 살 때 생존율이 높고, 손녀는 친할머니와 함께 살 때 생존율이 높다는 결과를 얻었다고 밝혔다.
XY성염색체를 토대로 조부모와 손주의 관계를 단순하게 분석해보면 손자는 친할아버지로부터 Y염색체를 받고, 외할머니나 외할아버지로부터 X염색체를 받는다. 반면 손녀는 친할머니로부터 X염색체 하나를 받고, 나머지 X염색체를 외할머니나 외할아버지로부터 받는다.
비율로 따지면 손녀는 친할머니와 X염색체를 50% 공유하고, 외할머니와는 X염색체를 25% 공유한다. 반면 손자는 외할머니와 X염색체를 25% 공유하고, 친할머니와는 관계가 전혀 없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전체 유전자 중에서 X염색체가 가지고 있는 유전자는 8%에 얼마되지 않는다. 이처럼 X염색체는 전체 유전자로 볼 때는 적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렇다면 친할머니와 외할머니가 손녀와 손자에게 차별 대우를 하는 것일까? 과학적으로는 할머니가 손주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연구진은 “할머니가 전해준 특정 유전자가 손주의 생존을 더 유리하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X염색체에 지능처럼 생존에 아주 중요한 유전자가 있어서 생존률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할머니 배우 윤여정이 한국 배우로는 처음으로 오스카 트로피를 품으며, 한국 영화사를 새롭게 썼다. 윤여정은 영화 ‘미나리’에서 외손주를 돌보기 위해 미국으로 간 외할머니를 전형적인 할머니에서 벗어나 유쾌하면서도 여운이 남는 연기로 호평받았다.
25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유니언 스테이션에서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윤여정은 영화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다른 4명의 여우조연상 후보를 제치고 얻은 영예다. '보랏 서브시퀀트 무비필름'의 마리야 바칼로바, '힐빌리의 노래'의 글렌 클로스, '더 파더'의 올리비아 콜먼, '맹크'의 어맨다 사이프리드가 경쟁자였다.
특히 한국 배우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연기상을 받은 건 한국 영화 102년 역사에서 처음이다. 아시아계 배우로는 두 번째다. 1958년 제1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일본 우메키 미요시가 영화 '사요나라'로 여우조연상을 받은 뒤로 63년 만이다.
윤여정은 1947년에 태어나, 한양대 재학시절인 1966년 연극배우와 TBC 공채 탤런트로 데뷔했다. 중학교 때까지는 공부를 잘 해 어머니에게 의사가 되기를 기대받았다. 하지만 이화여고 재학시절 위염으로 인해 결석이 잦아지면서 성적이 떨어지자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일흔이 넘어 처음으로 재미교포 2세가 찍는 미국 독립영화에 도움을 주겠다는 마음으로 출연해 뜻하지 않은 성과를 낸 셈이다.
이날 시상식에서 윤여정은 재치 있는 수상소감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그는 무대 오른쪽에 서 있던 시상자 브래드 피트를 향해 “드디어 만났군요. 우리가 오클라호마 털사에서 영화 찍을 때 어디 계셨나요?”라는 농담으로 관객을 웃겼다. 브래드 피트는 영화 ‘미나리’의 공동제작사인 플랜B 대표다. 영화 관계자이지만 촬영 현장에서 만날 수 없다는 얘기다.
이어 자신을 낯설어할 영미권 관객과 시청자들에게 “한국에서 온 윤여정”이라고 말하며 “유럽 사람들은 제 이름을 ‘여여’라고 하거나 그냥 ‘유정’이라고 부르는데 오늘 밤만은 모두 용서해드리겠다”고 말했다. 또 “아시아에서 자라면서 TV로만 보던 오스카 시상식에 온 게 믿기지 않는다”며 “이제 정신을 좀 가다듬어야겠다”고 덧붙였다. 예상치 못한 윤여정의 농담에 객석에서는 계속 웃음이 터져 나왔다.
또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다른 배우들에게도 예우를 표했다. 그는 “내가 어떻게 글렌 클로스 같은 대배우와 경쟁을 하겠느냐. 그의 훌륭한 연기를 너무 많이 봤다”며 ‘힐빌리의 노래’로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글렌 클로스에게 찬사를 보냈다. 이어 “다섯 명의 배우들은 다른 작품에서 모두 승자다”며 “내가 운이 더 있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아카데미 관객들을 빵터트린 수상소감 하이라이트는 미국에 살고 있는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두 아들이 자꾸 일하러 나가라고 했다”며 “덕분에 엄마가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랬더니 이런 상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자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윤여정은 미국으로 이민을 간 딸 모니카(한예리) 부부를 돕고, 손주들을 돌보기 위해 한국에서 건너간 외할머니 순자를 연기했다. 자식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는 전형적인 한국 할머니의 틀에서 벗어났다. 영화에서 외손자 데이빗이 "할머니는 진짜 할머니 같지 않아요"라고 외칠 정도다.
손주를 사랑하지만 손주가 부리는 응석에 끌려다니지도 않는다. 또 손주들에게 화투를 가르치고, 고약한 말도 서슴없이 던진다. 많은 매체들은 윤여정이 "독특한 할머니 순자를 연기했다"고 평가했다.
윤여정의 아카데미 수상에 대해 한 시니어 독자는 “세계에서 한국 할머니의 좋은 모습을 보여준 게 아닌가 싶다”며 “시니어들은 그들에게 맞는 역할이 있다면 잘 수행할 수 있다.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