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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텍트 문화 생활로 즐기세요
- 코로나19 여파로 박물관, 미술관은 물론이고 영화관에도 관객이 없다. 아예 휴관을 한 문화공간들이 많아서 딱히 어딘가를 갈만한 곳도 없다. ‘TV는 내 친구’도 하루 이틀이고 유튜브로 좋아하는 음악이며 동영상 짤 등을 찾아보는 이제 볼만큼 봤다. ‘궁하면 통하는 법’. 세계가 인정하는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가 이룩한 재빠른 응용력에 5G 인터넷 인프라를 자랑하는 한국 사회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문화계에 부는 코로나 19 적응시대의 문화 공유는 기존 오프라인 관람객에 온라인 관람객을 추가하는 쪽으로 확산되고 있다. 현재는 오프라인에 온라인 관람을 추가하는 추세지만 앞으로 문화계는 온라인 관람 및 향유로 빠르게 재편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뉴스나 콘텐츠를 신문이나 방송 등으로 소비하던 시대에서 현재는 모두 인터넷 및 SNS 등 온라인으로 소비하고 있는 것과 같은 문화적 대변혁의 시대를 코로나 바이러스가 견인(?)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 3월말 뉴욕 타임즈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은 ‘앞으로는 BC가 Before Christ가 아니라 Before Corona를 가르치는 단어가 될 것’이라는 칼럼을 실어 전세계 지식인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만큼 코로나 바이러스는 인류 역사의 한 기원을 가르는 충격적 문화현상을 가져올 것이라는 것이 한결 같은 학자들의 전망이다. 현재 K 방역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며 전 세계적인 찬사를 얻고 있는 한국은 다양한 분야에서 온라인 문화가 정착되고 있는 중이다. 특히 그 동안 온라인 분야가 부수적인 분야로 머물렀던 문화계의 온라인 공유는 음악 공연과 미술 전시회 등 전 분야에서 자리잡고 있어 문화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현재 문체부와 문체부 소속 산하기관의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한데 모아놓은 문화포털에서는 ‘집콕 문화생활!’이라는 콘셉트로 방구석에서 즐기는 다양한 공연과 전시 등을 즐길 수 있는 사이트들을 소개해놓았다. 무료로 즐기는 고품격 온라인 공연 ◇국립국악원 지난달 17일부터 주중 매일 오전 11시에 국악 한 편!! 이라는 슬로건으로 춘향가, 심청가, 가야금산조, 남도시나위 등의 공연일 계속되고 있다. 지난 공연도 감상할 수 있으므로 언제든 들어가서 즐길 수 있다. ◇국립극단 온라인 상영회 국립극단은 2016년에 공연했던 세익스피어 원작의 ‘실수연발’을 온라인 상영하고 있다. 1시간 55분 공연 전작이 올라와있어 코로나로 방콕하고 있는 연극팬들을 위한 훌륭한 팬 서비스라는 댓글 호응이 뜨겁다. ◇국립현대무용단 국립현대무용단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취소된 현대무용 공연 ‘혼자 추는 춤’ 시리즈의 10개 작품을 무관객 공연으로 제작, 무료 감상할 수 있도록 영상을 유튜브에 올려놓았다. 방구석1열에 딱 알맞은 콘텐츠. 야외 생활이 아무래도 제한될 수 밖에 없는 코로나 정국에서 방구석에서라도 따라 하며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경쾌한 공연이다. 강추!! ◇국립오페라단 ‘집콕 오페라 첼린지’라는 이름으로 국립오페라단이 긴급 업로드한 작품은 2019년 10월 상영했던 ‘호프만 이야기는 2시간 41분 공연 전작이 국립오페라단 공식 유튜브 체널에 올라가 있다. 1주일에 1편씩! 보고 싶었던 오페라 전막 감상에 도전하기라는 부제가 붙은 국립오페라단의 집콕 생활 응원 오페라 공연은 평소 접하기 힘든 공연이라는 점에서 한번쯤 도전해볼 만한 추천 집콕 생활이다. ◇서울예술단 서울예술단은 무용단원이 직접 지도하는 집콕 스트레칭 영상 및 가극단원이 지도하는 배우들의 환절기 기관자 꿀팁 등 ‘스펙TV특별편’을 제작해 실내에서만 생활하고 있는 이들에게 실질적인 꿀팁을 전수하고 있다.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 ‘내 손안의 콘서트’ 시리즈를 통해 현악 5중주, 바이올린 4중주와 더블베이스, 퍼커션, 플루트 4중주 및 클라리넷 5중주 등 실내악을 중심으로 무관객 공연 생중계를 실시한다. 집에서 답답하게 머무르는 오케스트라 애호가들이라면 충분히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만한 프로그램. ‘내 손안의 콘서트’ 지난 공연까지 유튜브 채널에 올라와있다. 심심한 손자손녀와 함께 온라인으로 즐기는 문화 콘텐츠 ◇어린이 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산하의 어린이박물관에는 우리 문화유산에 대해 즐겁게 배울 수 있는 전시 및 영상이 모여져 있다. 또한 국립민속박물관 산하에도 어린이박물관이 마련돼있어 온라인 놀이 체험 공간이 마련돼있다. 이곳 사이버놀이터에서는 컴퓨터로 민속놀이를 컬러링 하면서 시간을 보내며 민속 놀이를 배우는 코너가 있고 놀이체험마당 코너에는 지도 퍼즐 맞추기, 물건 알아 맞추기, 다른 그림 찾기, 네오 점프, 에어리언 점프, 컬러 점프, 네오 매치 등 어린 자녀 및 손자 손녀와 함께 즐기기에 적합한 교육 사이트다.. ◇국립국악원의 e-국악아카데미 국악 애니메이션을 통해 엉덩이가 들썩이고 흥이 절로 나는 국악 교육을 시킬 수 있다. 어린이들이 보다 쉽게 국악을 이해하고 접할 수 있도록 애니메이션 형태의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다. 국악 형태의 창작동요 나는야 껌딱지, 꽃마을, 밥도독, 밤밤밤부리, 별님이 가시연꽃에게, 아침소리 등의 창작동요 10곡 이외에도 60여개의 창작동요가 애니메이션 영상으로 업로드 돼있다.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한국 전래동화, 외국 전래동화, 창작동화 등의 동영상 동화 456편이 영어 및 중국어, 베트남어, 몽골어, 태국어 등의 5개국 언어로 자막 처리돼 구비돼있다. 손자손녀와 함께 보며 다국어 동화구연 교육을 통해 언어교육과 동화 교육을 함께 시킬 수 있는 곳이다.
- 2020-04-2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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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19 사태가 길어지니…
- ‘프랑스에서 자가 격리가 길어짐에 따라 정신과 문의가 많아지는데, 자가 격리 중에 벽이나 식물에 말을 건네는 정도는 괜찮다고……. 그런데 말을 걸었을 때 벽이나 식물이 대답하면 진료하러 오라고 했다고 함’ 프랑스에서 딸이 보낸 위의 내용을 친구에게 보냈더니, 아래와 같은 답이 왔다. “ 난 벽하고 대화한 지 오래 되었고, 요즘은 아예 껴안고 잔다! 제기랄!” 최근, 집안에 갇혀 있는 기간이 길어지니 정신질환과 가정폭력이 증가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은퇴 후의 시니어들은, 그간 다양한 각종 활동을 계획하여 그래도 아침이면 집 밖으로 나왔는데 그마저도 여의치 못한 지금은 이식이에서 삼식이까지 되어 간다고 하소연한다. 그래서 부부갈등도 많아지고 있단다. 그렇지만 늙어가는 서로의 얼굴을 잠시 마스크로 가릴 수 있어서 좋다는 친구들도 있다. 또 외출할 때 모자와 마스크 하나 쓰면 머리를 안 감았어도, 로션을 안 발랐어도 아내에게 잔소리 들을 일도 없다. 그리고 모자와 마스크를 써 보니, 몸매만 살짝 가다듬으면 아직도 괜찮다는 느낌까지 든다. 길거리에서 예쁜 여자를 쳐다본다는 아내의 힐난도 안 듣게 되었다. 다 그 여자가 그 여자이기 때문이다. 상당히 평등해졌다! 아내 자신도 기초화장 하나 안 하고 편하게 동네 외출을 감행한다. 외모지상주의가 잠시 멈춰가는 느낌이다. 갑자기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소설이 생각난다. 지금 같이 전염병이 돌아 모든 인간의 시각이 상실되니, 피부 색깔이나 나이를 떠난 진정한 인간교류가 가능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최근, 방학이 길어지니 애들도 달라졌다. 필자도 방학이 길어진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오일쇼크에 따른 에너지 절감시책에 따라 1973년 2월 한 달간 동계방학이 연장되었다. 그 기간 스포츠머리를 잘 기른 녀석들은 가르마까지 타며 우쭐거렸고, 수염까지 잘 기른 녀석들은 교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술집까지 방문한 경험에 대해 자랑스레 떠벌렸다. 그런데 지금의 경우는 그 시절 정도가 아니다. 동계방학이 12월에서 무려 4월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런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다 보니 학생들의 변화도 극을 달린다. 중학교 교사인 후배는, 활자로 된 책만 보면 어지러워하고, 공부 잘하는 애들을 보면 외계인이라 칭하던 제자들 때문에 늘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며칠 전, 그가 싱글벙글하며 나타났다. 애들이 극단적으로 변했단다. 워낙 길게 놀다 보니 이젠 노는 게 하도 지루하고 심심해서 아래와 같은 얘기들을 하며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이다. “책도 읽을 만하네요. 선생님, 어! 공부해도 안 죽네요! 죽을 줄 알았었는데..” 최근, 집안에 갇혀 있는 기간이 길어지니 시니어들은 손자 욕심을 살짝 냈었다. 재택근무다, 출장 금지다 해서 30대 애들이 붙어있으니, 열 달 뒤에는 좋은 소식들이 들리고 국가 존망이 달린 출산율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줄 기대했다. 그런데 뒷조사를 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남편들이 컴퓨터에 붙어 앉아 게임만 해대고 있단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쯧쯧. 그놈들 중학교 때 스타크래프트를 사주는 게 아니었는데…. 우리가 아들들을 잘못 키운 업보다!
- 2020-04-22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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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레기를 줍는 특별한 사람
- 글쓰기 동호회에서 내 나이 또래의 하유수 선생(이하 하 선생)을 만났다. 첫인상이 웃는 얼굴상이어서 그런지 까다롭지 않고 마음씨 좋겠다는 느낌을 먼저 받았다. 시니어라는 나이가 되면 직관력이 발달해서 처음 만나는 사람도 척 보면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지 알아차리는데 3초면 충분하다. 한발 더 나가서 내가 피해야 할 사람인지 다가가야 할 사람인지도 몇마다 말을 섞으면 느낌이 있다. 경륜이라는 시간 덕분이지만 신통하게도 대부분 적중한다. 하 선생은 전직이 고위소방공무원이었다. 문무를 겸비하여 우리나라 최고의 기술자격인 ‘소방관리사’자격증을 갖고 있다. 소방관리사는 소방시설물을 점검하는 업체에서는 법적으로 의무고용을 해야 한다. 시험이 어려워 배출된 소방관리사가 많지 않아 희소가치가 높아 현재로서는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는 자격증이다. 평소 배우기를 좋아해서 자식들이 해외여행이나 다니시라고 권해도 공부가 좋다며 요즘도 다양한 교육장소를 찾아다닌다. 하 선생을 몇 번 만나다보니 이분이 한문에 관심이 많고 박식 하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한 번도 못 가본 서당을 두 번이나 다녔을 정도로 한문 기초가탄탄하다. 한시(漢詩)를 여러 편 줄줄 외운다. 이옥봉, 허난설헌의 작품을 줄줄 외운다. 특히 ‘황진이’를 좋아해서 황진이 관련 여러 자료들을 갖고 있는데 앞으로 황진이 평전 같은 책을 써보겠다고 야심만만하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 선생이 과거 폐암에 걸렸는데 치료를 위해 명예퇴직을 했다는 아픈 과거사 최근에야 알았다. 등산을 열심히 하는 이유도 체력을 보강하기 위함이라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하 선생은 산행 중에 꼭 쓰레기를 줍는다. 처음에는 선행으로 쓰레기를 줍는지 알았는데 직업인처럼 산행 시 마다 쓰레기를 줍는다. 길거리에서도 쓰레기를 줍기는 귀찮은데 위험한 산비탈에서 곡예 하듯이 쓰레기 줍기는 아무나 할 수 없다. 무슨 사연이 있거나 굉장한 결심을 한 사람이다. 그 이유가 궁금해 물어보기로 작심하고 기회를 기다렸다. 코로나19 사태로 ‘방콕’시간이 길어지면서 답답하기도 하고 봄의 꽃과 새싹들을 보기 위해 서울대학교 뒷산으로 잘 알려진 관악산에 하 선생과 등산을 가기로 했다. 역시 이번 산행에서도 눈에 보이는 쓰레기를 다 줍는다. 전에는 쓰레기를 손으로 주어 등산 가방에 넣었는데 이번에는 검은 비닐봉지와 손 집게를 준비했다. ‘쓰레기 줍겠다고 집에서부터 작정하고 나왔군요.’ 하고 내가 말하자. 코로나 사태로 쓰레기를 직접 줍거나 가방에 그냥 넣기도 비위생적인 것 같아 집게로 집고 검은 비닐에 담아 집으로 갖고 가서 쓰레기봉투에 버린다고 말한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우리나라 위생 개념을 크게 발전시켰다는 생각이 든다. 쓰레기를 줍는 하 선생에게 쓰레기를 줍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느냐고 물어봤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손사래를 치더니 내가 계속 조르자 그는 슬픈 듯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자신이 한때 폐암에 걸려 항암주사를 맞았는데 4번째 항암주사를 맞으러 병원에 가는 차 안에서 너무 슬프고 고통스러워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 제발 저를 살려주십시오. 너무 두렵고 아픕니다. 저를 고쳐주시면 남들을 위해 봉사하며 살겠습니다.’하고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간절히 기도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성경 이사야 10장 10절의 말씀인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하는 성경 구절이 불현듯 생각나더란다. ‘아 나는 나을 수가 있겠구나!’하는 마음이 갑자기 솟구치고 스스로 감동의 전율이 몰려오더란다. 간절한 기도의 보람인지 항암주사의 효과인지 잘 모르지만 김 선생은 완치 판정을 받았다. 암의 사슬에서 벗어나자 하나님에게 약속한 데로 무슨 봉사활동을 할 것인가 생각하고 찾았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쓰레기를 줍자는 생각이 들더란다. 쓰레기는 더럽기 때문에 자기가 버린 쓰레기도 자기가 줍기를 싫어한다. 혐오 물질인 쓰레기를 치우면 더럽던 곳이 깨끗해지고 누구나 기분이 좋아진다. 여러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일이야말로 진정 보시(普施)라는 믿음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 이 일을 내가 해보자 하고 결심을 굳혔다. 행복이나 즐거움은 내 마음속에 있다. 내가 만족하고 즐거워하면 아무리 더러운 일을 해도 기쁜 마음이 우러난다. 내가 주운 쓰레기 덕택에 주위가 깨끗해지면 쓰레기 버리는 사람도 줄어들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기분이 좋을 거라고 생각하면 더욱더 즐겁다고 한다. 남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겠다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고 있는 것 같아 뿌듯하다고 행복 해한다. 스스로 인생이 즐겁다고 생각하니 만나는 사람에게도 좋은 말을 하게 된다. 덕택에, 덕분으로는 말을 자주 했더니 진짜로 자식들이 진급도 하고 아파트도 당첨되고 하는 일마다 술술 잘 풀린다. 손자 손녀들도 공부를 더 잘하는 것 같다고 웃는다. 하 선생의 웃음은 웃음 바이러스로 보는 사람에게도 전파되어 우리를 웃게 만든다.
- 2020-04-14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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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아, 6·25때 난리는 난리도 아녀~
- “6·25때 난리는 난리도 아녀~” 너도 알다시피 힘들거나 복잡한 상황이 발생하면 앞집 할머니께서 쓰시는 말이다. 그런 그 분이 요즘은 그 말씀을 달고 사시는 걸 보니 확실히 힘든 시기인 것 같다. 그리고 평생 받았던 전화보다 더 많은 네 전화를 이틀이 멀다하고 받으면서, “코로나19 위험 연령층에 속하니 꼼짝 마라”는 잔소리를 듣는 걸 보니 난리가 맞는가 보다. 네가 좋아하는 사피엔스의 저자인 유발 하라리 교수는, 코로나 사태 이후의 세계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전체주의와 개인주의, 그리고 국가적으로는 쇄국과 개방 사이의 선택들이 미래를 결정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어려운 전망보다 아래와 같은 경험에 의한 아빠의 느낌이 더 맞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나는 ‘반공도덕’ 과목을 배우며 국민교육헌장을 외워야 했던 초등학교 시절부터, 교련을 받으며 학도호국단 활동을 했던 대학까지의 교육을 받으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잘못 되시면 그 즉시 남침을 받아 적화통일이 될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그 후… 나라가 안 망했다. 대한민국 역사를 함께 시작한 통행금지는 가장들에게 합법적 외박의 핑계를 제공했다. 오늘날의 연인들은 마지막 배를 놓치기 위하여 주말에 시간을 내어 섬 지역까지 가야 하지만, 당시의 우리는 통금을 잘 활용해 매일 막차를 놓칠 수 있었다. 마음을 온전히 허락해야만 겨우 손을 잡았던 그 당시, 통금은 그렇게 속도위반에 따른 결혼률 상승의 기회로 활용되었다. 그래서 통금의 해제는 사회적 방종과 범죄의 양산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 후... 그냥 그대로 건전했다. 교복과 까까머리 두발은 학생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매일 아침이면 교문에서 규율부가 복장검사를 하였다. 그리고 방과 후 문제 행위가 발생했을 때, 교표가 달린 모자와 명찰로 오늘날의 CCTV 못지않게 비위 학생들을 잘도 찾아내었다. 따라서 교복/두발 자율화가 되면 모두 불량학생이 되어 다 망가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 후… 애들의 겉모습만 바뀌었을 뿐이었다. 컬러텔레비전 방송 개시는 과소비를 유발한다며 시기상조라 했는데 오히려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였고, 간통죄가 폐지되면서 도덕과 윤리는 땅에 떨어져 금수와 같은 세상이 될 것이라 했는데 그 이전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가보지 않은 길, 즉 새로운 경험은 늘 두렵다. 코로나19 이후는, 한 국가의 차원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또 다양한 부문에 걸쳐 상당한 변화를 가져 올 것이다. 부정적인 변화가 상당할 수도 있다. 네 말대로 인간끼리 어울리는 면대면 기회의 상실로 재미없는 세상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잘 생각해 보아라. 너도 내가 가르쳐 준 야구와 탁구를 친구들과 안 하고 스타크래프트 게임 사달라고 졸라, 네 방문 잠그고 매우 즐겁게 중학교 생활을 보내지 않았느냐? 나도 육십을 넘기면 인생이 재미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생김새와 성격이 다양한 손자들이 생기고 평생 같이 살아온 친구들의 행동과 생각이 변하는 경험을 하면서, 나름 심심하지 않게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 인생의 각 단계에서 느끼는 희로애락은 거의 일정한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흐르면 힘든 기억조차도 추억으로 변해 간다. 그러니 언제까지 코로나19 이전의 시대를 그리워하면서 살겠느냐? 유발 하라니 교수가 나보다 젊어서 예리하고 또 박식하지만, 인생의 실제 현장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아버지의 경륜을 믿고 다가 올 세계에 대해 너무 걱정하지 마라. 우리 세대가 겪어온 앞서의 경험들과 마찬가지로, 너희들도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며 잘 살아갈 것이다. 그렇다고 아들아, 너무 밖으로 내두르진 말고!
- 2020-04-14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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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산 롤러코스터
- 2017년, 갑작스런 사위의 발령으로 인해, 손자들은 어학 준비를 못 한 채 파리의 국제학교에 입학했다. 영어, 불어, 모국어 사이에서 방황하는 손자들은 매일 아침 등교를 거부하였다. 낯선 이국생활의 시작은 딸 자신에게도 매우 버거웠다. 급기야 나에게 SOS가 날아왔고 딸바보인 나는 이틀 만에 프랑스에 도착했다.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손자들의 등하교 챙기기였다. 군소리 안하고 침대에서 바로 일어나 등교 시 1유로씩, 하교 시 나를 쳐다보지 않고 앞장서서 제대로 집을 찾으면 1유로씩을 지급했다. 그리고 각종 생활수칙을 잘 지키면 즉시 현금 포상을 하였고, 특히 그 돈들은 절대 딸 내외가 손을 못 대게 하였다. 이렇게 등하교 및 이국생활 문제들은 해결되었고 애들은 점차 학교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1년이 지나자 손자들의 학교생활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먼저 식당에서부터였다. 프랑스에서는 급식시간에 모든 학생들에게 잼이 지급된다. 그런데 그 용기는 햄버거 가게의 토마토케첩처럼 손톱으로 찢어야만 한다. 그런데 외국 아이들은 그것에 매우 서투르다. 하지만 우리 손자들은 옷에 흘리지 않게 귀퉁이를 잡아 찢는, 그 섬세한 작업을 아무렇지도 않게 쉽사리 해 냈다. 그래서 점심시간마다 전 세계에서 온 학생들에게 잼 봉지 찢기 봉사를 하며, 손자들의 위상은 높아졌다. 그 후 체육시간에 신발 끈을 제대로 못 매 쩔쩔매는 영국 애들, 교복 넥타이를 못 매는 독일 애들, 연필을 칼로 못 깎는 미국 애들까지 도와주면서, 타고난 손재주를 과시하며 인기몰이를 시작했다. 모두 한민족 유전자 덕분이었다. 프랑스 주최인 2019년 5월의 칸 영화제에서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면서 한국의 명성은 상한가를 쳤다. 딸네가 살고 있는 파리 근교의 자그마한 동네(Chatou) 영화관에서도 ‘기생충’이 상영되었다. 딸 부부는 오랜만에 영화관에서 자막 없이 보는 한국 영화가 반가웠기도 했지만, 영화 종료 후 동네사람들이 딸네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축하를 받으며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으로 어깨에 힘이 팍 들어갔다. 2020년, 우울한 시작이었다. 중국에서 발생한 코로나19가 한반도를 급습했다. 그러자 프랑스 사람들의 태도가 갑자기 돌변했다. 교장선생님은 직접 딸에게 전화를 해 겨울방학 중 한국에 다녀왔는지를 물었다. 길거리에서의 동양인들은 기피 대상이었고, 2월인 작은 손자의 생일파티는 당연히 취소되었다. 그들에게 우리 한국인은 검정색 마스크를 쓴 채 파리 중심가에서 쇼핑하는 중국인 관광객들과 다르지 않았다. 특히 유력 신문인 ‘르몽드’에 코로나19 확산의 주역인 신천지교회 이만희 총회장이 땅에 엎드려 절하는 사진이 실리면서, 그동안의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급락하였다. 프랑스 사람들은 IT산업 강국인 한국과 이상한 종교가 판치는 한국 사이에서 우왕좌왕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원래 신체가 건장하고 생활수준도 높아 코로나19쯤은 걸려봤자 감기처럼 금방 낫는다고 자부했다. 자신들의 문화와 어긋나는 마스크 착용은 당연히 무시되었다. 그들에게 코로나19는 먼 극동의 비위생적인 국가들 얘기였다. 그런데…. 프랑스에서의 코로나19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다. 급기야는 마크롱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코로나19에 대한 논의를 하였고 그로 인해 G20 정상회담이 개최된 것에 대한 보도가 나오면서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다시 롤러코스트를 탔다. 이제는 한국 방역모델이라는 말이 일반명사화 될 정도로 자주 등장하고, 한국을 걱정하던 이들이 한국을 부러워하는 분위기로 급변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가 앞으로 또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파리에서 3명의 자녀와 함께 4년째 거주하고 있는 딸과 사위는 이렇게 고국의 위상 변화에 얹어져 어지러운 롤러코스트를 타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 2020-04-07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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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스터트롯' 남승민, 맥콜 광고 찍는다
- ‘미스터트롯’ 남승민이 음료 광고모델로 선정됐다. 식음료기업 일화는 TV조선 ‘미스터트롯’에서 활약한 ‘국민 손자’ 남승민을 보리탄산음료 ‘맥콜’의 광고모델로 발탁했다고 30일 밝혔다. 남승민은 고등학생임에도 깊은 울림이 느껴지는 가창력으로 톱 20까지 진출해 강한 인상을 남겼다. 새롭게 제작되는 맥콜 광고에서 남승민은 트로트 버전의 맥콜송을 직접 부르며 기존에 보지 못한 또 다른 매력을 발산할 예정이다. 일화 관계자는 “남승민만의 매력 포인트가 10대부터 중장년층까지 다양한 연령층에 어필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돼 광고모델로 선정했다”며 “‘맥콜’과 대세 장르 ‘트로트’가 만나 다양한 시너지가 기대된다”고 말했다. 1982년 탄생한 맥콜은 1980년대 당대 최고의 가수였던 조용필을 광고모델로 선정하고 “젊음의 갈증은 맥콜로 풀자”는 슬로건을 내세워 빠른 매출 성장을 기록했다. 이후 최수종, 이미연, 주원, 박형식, 김수미, 김윤지 등 국내 유명 연예인들이 맥콜 광고모델을 거쳤다.
- 2020-03-30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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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꼰대'와 '유별난 젊은이'간 갈등, 어떻게 풀 것인가
- 젊은 세대가 '꼰대'라고 부르는 기성세대와 '유별난 젊은이'로 지칭되는 밀레니얼 세대(20~40세) 사이의 갈등은 사회 전반에 도사리고 있다. 늘 있는 일이지만 변화가 빠른 현대에선 더 심해 좀처럼 간극이 좁혀지지 않는다. 세대 갈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통계가 있다. 취업포털 ‘잡코리아’에서 신입사원 670명(밀레니얼 세대)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내용이다. 5명 중 4명(79.6%)은 취업이나 재취업이 쉽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이직을 고려하고 있다고 했다. 이유 중 '배울 점이 없는 직장 상사'라는 답변이 24.3%나 되었다. 상사를 통하지 않는 '꼰대'로 규정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기성세대 또한 그들을 '유별난 젊은이'로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있어 조직력 창출에 걸림돌이 된다. 조직은 구성원 모두의 힘을 끌어내어 시너지 효과를 가져와야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밀레니얼 세대는 20세기 주역이기에 그들과의 협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손자병법을 조직의 리더가 적용해보면 좋지 않을까 싶다. 지피(知彼), 상대방인 밀레니얼 세대를 제대로 알고 대응할 때 힘을 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의 특성을 외면한 채 나만의 잣대로 설계되는 일의 추진은 공감을 얻기가 쉽지 않을 터다. 어떤 특성이 있을까?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에 익숙하다 인터넷으로 연결된 세상이었던 198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초 사이 출생한 젊은이들이다. 모바일 기기와 함께 성장함으로써 수평적이고 자유로운 대화방식인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에 익숙하다. “여러 소리 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세요!”라는 기성세대의 일방적 지시에 회사에 입사하는 순간부터 당혹해 한다. 독선적이거나 상의하달식의 대화는 갈등 요인으로 작용한다. ▲불합리할 때 바로 이야기한다 기성세대는 조직 생활 중에 불만이 있어도 표현하기보다 속으로 참는 경우가 많았으나 밀레니얼 세대는 그렇지 않다. 합당하지 않거나 불합리한 경우 곧바로 이야기한다. 버릇이 없어서가 아니라 성장하면서 몸에 밴 특성이기에 그들의 이야기를 유별난 젊은이의 행동으로 볼 일이 아니다. ▲집단의식이 약하다 기성세대보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다. 집단의식이 강했던 기성세대는 주말 근무나 반복되는 야근도 당연히 조직을 위한 개인 희생으로 받아들였다. 밀레니얼 세대는 불필요한 야근이나 과도한 회식은 개인 생활 침해로 여긴다. ▲직장보다 직업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기성세대와 달리 평생직장의 의미는 그들에게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직장보다 직업이 중요한 세대다. 글로벌 금융위기, 저성장의 시대를 겪으면서 체험했다. 경영환경이 빠르게 변해 본인이 속한 조직이 당장 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기회가 있으면 미련 없이 직장을 그만둔다. 이러한 특성을 바탕을 이해한 후 '지피지기(知彼知己)'로 적절하게 대처한다면 밀레니얼 세대를 춤추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성세대인 조직 리더의 관심과 실천력 그리고 시대 흐름에 따른 자신의 변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유별난 젊은이로 치부하는 일상의 틀에서 벗어나 그들의 아이디어를 발전 동력으로 삼아보면 어떨까?
- 2020-03-25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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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추머리 김병조 “나 같은 사람 한 명쯤은 있어야죠”
- 나른한 퇴근길, 서울 지하철 1호선 전동차 안에서 그를 보고는 자동으로 인사했다. 생각해보면 그는 어린 시절을 함께한 참 오랜 친구였다. 뽀뽀뽀 체조로 아침잠을 깨면 항상 볼 수 있던 뽀병이었고, 주말 밤에는 두루마기나 정장을 입고 앵커석에 앉아 “지구를 떠나거라~” 혹은 “나가 놀아라~” 같은 유행어를 쉴 새 없이 제조하던 웃긴 아저씨였다. 문득 생각하니 이런 특이하고, 특별하고, 독보적인 캐릭터가 존재했었나 싶다. 지금은 그때의 기운 센 스타 말고 세월에 깎이고 다듬어진 신사가 되어 지하철 옆자리에 앉았다. 달리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우리나라 시사풍자 개그의 효시이자, 명심보감 전도사, 조선대학교의 김병조(金炳朝·69) 특임교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서울역사에서 김병조 교수를 다시 만났다. 지하철에서 묵례만 하고 헤어졌던 짧은 만남을 이야기하며 정식으로 인사를 나눴다. “인기에 연연해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알아본다고 기뻐하거나 알아보지 않는다고 서운해하지 않아요.” 지방 강연이 있는 날이면 용산역이나 서울역에서 KTX를 이용한다. 인터뷰가 있던 날도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강연이 있다고 했다. 개그맨에서 교수로 직업의 영역은 달라졌지만 비슷한 점이 많다. 사람들 앞에 선다는 것, 그리고 명심보감과 함께한다는 점이다. 옛 기억에도 그는 어렵고 긴 한문 구절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막힘없이 읊곤 했다. “방송하던 시절에는 재미있으면서도 유익한 코미디를 만들고 싶었어요. 마침 제 뜻에 공감하고 좋아하는 피디 한 분이 계셨습니다. 방송도 공익을 위한 것이니 교육 기능을 강조해야 한다던 분이셨죠. 고전에서 취득하자고 해서 명심보감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됐고, 지금까지 제 평생 함께하고 있습니다.”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얄개 선비 집안의 장손인 김병조는 어려서부터 벗삼던 명심보감을 개그 소재로 삼았다. 작가가 써주는 것을 기다리기보다 아이디어를 발굴해 글을 쓰고, 시사 개그의 앵커 멘트를 고쳤다. 짧고 간결하지만, 속 시원하게 긁어주는 이야기에 많은 시청자가 귀 기울였다. 그가 진행했던 ‘일요일 밤의 대행진’은 7년 동안 평균 70%의 시청률을 기록한 시사 풍자 프로그램이었다. “제 대본은 거의 다 제가 썼습니다. 고서 인용만이 이유는 아니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청중 앞에 섰는데, 그 끼는 타고난 것 같아요. 면 단위 동네에서 아주 유명했습니다. 사회도 보고, 응원 단장도 하고, 웅변대회에서 상도 타고 말이죠. 아주 오랜 경험이 쌓여 있었으니 사람들을 웃길 자신이 있었어요. 작가가 써준 대본을 수정할 경우 양해는 구했죠. ‘내가 고쳤는데 만약에 대사가 재밌고 유익하면 용서해달라’고요. 당연히 재밌지.(웃음) 작문에도 재능이 있었거든요. 개그맨은 작가적 소양을 지닌 연기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전신인 서라벌예술대학에 진학했다. 원래는 육군사관학교를 지망하던 우등생. 서울대학교를 바라봐도 될 성적이었다. 하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에 전액 장학금으로 공부할 수 있는 대학교에 가야만 했다. 서울대 합격률이 높은 광주일고 대신 육사 진학률이 좋은 광주고등학교를 선택했다. “육사에서 장학금 받을 정도면 연극영화과 학교에 가도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무엇보다 영화와 연극을 좋아했습니다. 대학에 입학한 후 1학년 1학기 때 과 수석을 제외하고 4년 내내 학년 수석을 했습니다. 장학제도가 다양하지 않던 시절 전액 장학금을 받을 방법은 학년 전체 수석이었습니다. 정말 공부만 했어요. 4년 동안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뉴스 형식의 시사풍자 프로그램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많은 자양분이 됐습니다.” 김병조의 인터뷰에 단골로 나오는 이야기는 한학자 아버지와 가난에 대한 내용이다. 이번에도 지나치지 않았다. 고희가 다 된 나이에도 가난했던 얘기를 굳이 또 꺼내느냐는 사람도 있겠지만 김병조는 가난했던 그 시절이 어두웠거나 피해가고 싶은 시간들이 결코 아니기에 마음놓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스타가 될 사람이 아닌데 스타가 된 유일한 사람일 겁니다. 꼬장꼬장하고 성격도 강했죠. 타고난 재능과 끼가 있어서 연예인의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덕망 쌓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제 인생에서 고맙게 생각하는 부분이 바로 가난한 선비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가난하면 비관하고 항거하고 투쟁하는 쪽으로 이끌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저 수용했습니다. 제가 너그러워질 수 있었던 것도, 전철을 타고 다니는 것도 복 받은 거죠. 집에 있는 가래떡이나 김만 봐도 너무 좋습니다. 제 행복의 비법은 어려웠던 때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귀이망천자불구(貴而忘賤者不久), 사람들은 성공하면 어려운 시절을 잊어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이 오래가지 못하는 거예요.” 젊은 시절 ‘배추 머리’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김병조는 방송 활동 내내 톱스타 중에서도 톱스타였다. 어린이 프로그램과 시사 코미디를 넘나들며 모든 세대의 사랑을 받던 슈퍼스타였다. 광고모델로 억대 출연료를 받은 연예인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가 등장하는 프로그램은 폭발적인 시청률을 자랑했다. 대체할 만한 인물도 없었다. 한학을 바탕으로 시청자를 배꼽 잡게 하는가 하면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달하며 사람들을 들었다 놨다 하던 이. 말 그대로 김병조 전성시대였다. 그날 이후, 다른 삶을 살다 1987년 6월 10일. 이날을 기점으로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진일보했다. 김병조는 이날의 사건으로 삶을 정리하고 돌아봐야 하는 상황에 봉착했다. 현대 역사의 결정적 장면과 맞물려 제대로 된 소명 한 번 못해보고 시대의 막을 내려야 했다. “당시는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혼란한 시절이었죠. 그날은 집권 여당의 전당대회로 대통령 후보를 뽑는 날이었어요. 당원들이 모여 투표하는데 누구 아이디어인지 축제와 함께 진행을 한 거예요. 당대 최고가수도 불렀고 저도 개그맨으로 참석해 달라고 해서 갔습니다. 정당 측에서 코미디를 잘 모르니까 저한테 한 3분 정도 웃길 내용을 적어오라고 하더군요. 대본을 써가지고 보여줬더니 거기다가 뭘 또 적어주더라고요. 그 내용을 보고 사실 대단히 놀랐습니다.” 거기에는 집권 여당을 옹호하고 야당을 폄하하는 발언이 들어 있었다. 단 몇 초 분량의 내용이었지만, 읽어야 할 사람이 대중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던 김병조라는 게 문제였다. “전당대회에서 대본을 읽기 전까지 얼마나 고민을 많이 했는지 몰라요. 최종적으로는 제 잘못이죠. 과감하게 ‘못합니다’ 하고 거절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정말 후회됩니다. 선비 집안의 장손답게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말았어야 해요. 저는 정치투사도 아니고 한 집안 가장이었어요. 또 늘 그래왔듯 대본대로 읽어야 하는 연예인이었습니다.” 당원들끼리 하는 내부 행사라서 방송 전파를 타지 않았지만 한 일간지에 그가 한 말이 보도되면서 일파만파로 사건이 커져버리고 말았다. “자숙의 기간이 필요해 방송을 쉬고 싶다고 했는데 쉬는 것조차 어렵더라고요. 우리 집사람까지 나서서 ‘원하는 멘트를 했으면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항의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정치인들은 문제를 확대해서 자기네한테 유리한 정쟁으로 삼고 싶었던 것이죠. 잘 모르는 분들은 그 당시 제가 방송계에서 퇴출당한 것으로 생각하시는데 스스로 관둔 게 맞습니다. 그 사건 이후 정치권의 제의도 있었습니다만 다 거절했습니다. 또 방송에도 복귀했지만 실의를 느꼈습니다.” SBS가 개국하면서 자리를 옮긴 김병조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전성기 못지않은 사랑을 받았지만, 이미 방송에 대한 매력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마침 그때 KBC 광주방송이 개국했습니다. 노래자랑 프로그램 ‘열창 무대’ MC를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어요. ‘잘됐다! 고향의 방송을 하자!’ 하고 갔습니다.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요. 그리고 조선대학교에서 강의 요청도 해왔고요.” 조선대학교에서 강의를 한 지도 벌써 23년째다. 평생교육원을 시작으로 학부와 대학원을 두루 다니며 강의를 해왔다. 199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그의 모습이 시청자들 눈에서 서서히 멀어져간 과정은 그러했다. 몇 해 지나고 개그맨이 아닌 대학교수가 되어 나타난 그는 어딘가 모르게 많이 달라져 있었다. 젊은 시절 흑발의 보글보글하던 머리카락은 단정한 커트의 은발이 됐다. 푸짐해 보이던 몸은 마라톤으로 다져 보통의 건강한 체격으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 그 사건의 스트레스로 오른쪽 눈은 결국 실명됐다. 그래도 사는 데 불편함은 없다고 했다. 혼자서도 잘 걸어 다닌단다. 당시 정치 상황에 휘말리지 않았어도 그는 지금의 길을 택했을까? “가르치는 것이 꿈이었어요. 방송에 몸담고 있을 때도 어머니 교실이나 어린이 교실에서 봉사활동을 많이 했죠. 지금 제가 가고자 했던 길을 가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그때 그 사건마저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시 그 기사를 쓴 기자와 기사가 제 스승이에요. 정말 고맙습니다. 진심으로요.” 아들, 손자, 며느리와 함께 ‘시래기톡’ 요즘 김병조가 강의 외에 집중하는 건 바로 작년 10월부터 아들과 함께 하고 있는 인터넷 방송이다. 카카오TV와 유튜브에 ‘시래기톡’이라는 채널을 개설해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세대 공감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왜 방송 이름이 ‘시래기톡’일까. 파릇파릇했던 배추 머리가 세월이 흘러 묵직하고 담백한 맛과 향을 내는 시래기로 탄생했다는 의미다. 지금의 김병조에게 딱 어울리는 별명인 듯하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다가 살아생전의 목소리가 녹음된 카세트테이프를 발견했어요. 산소에 모시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차에서 카세트테이프를 들으면서 엉엉 울었어요. 그 카세트테이프를 CD로 구워두었죠. 제가 올해 칠십인데 아버님이 일흔둘에 돌아가셨어요. 어느 날 아들이 ‘우리 아버지도 돌아가신 할아버지 나이가 서서히 되어가시네’ 하더라고요. 뭔가 남기고 싶었나봐요. 아들의 생각과 명심보감 구절을 포함해 젊은이들 대상으로 강의하면서 제가 느낀 것들을 영상으로 제작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자기 눈으로 보지 말고 상대의 눈으로 보고 다름을 인정하자’가 시래기톡에서 추구하는 의미란다. 아울러 유튜브 채널을 통한 한학의 대중화에도 기여하고 싶다고 했다. “이런 의미 있고, 온고지신(溫故知新) 같은 방송도 있어야죠. 훌륭한 일을 하고도 대우받지 못하는 어른 세대와 희망과 꿈이 있음에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젊은 세대에게 용기를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방송은 제 유언이기도 합니다. 남기 유(遺), 말을 남기는 것이죠. 먼 훗날 세상을 떴을 때 아들이 우리 아버지의 철학이 여기에 있었구나. 그렇게 생각해주면 좋고요.(웃음)” 아버님이 카세트테이프에 목소리를 남겨놓은 것처럼 그의 이야기도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나 같은 사람 한 명쯤은 있어야 한다’가 제 철학입니다. 진분수 같은 삶을 살고 싶죠. 가식과 허황한 사람이 주목받는 세상에서 있어도 없는 듯 낮추고, 줏대 있는 가난을 선택하며 살고 싶습니다.”
- 2019-11-19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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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가게] 대전편① 67년 전통 ‘사리원면옥’
- 67년 전통 ‘사리원면옥’ 지역마다 평양냉면 노포들이 있지만, 대전에서 ‘평양냉면’ 하면 첫손가락으로 꼽히는 곳이 바로 ‘사리원면옥’이다. 1952년, 황해도 사리원 태생인 故김봉득 일가가 6·25전쟁 직후 대전에 내려와 자리를 잡으며 이북식 냉면을 팔기 시작한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사리원면옥은 평양냉면으로는 물론이고, 대전광역시 일반음식점 허가 제1호 식당으로도 그 명성이 자자하다. 현재는 창업주의 손자인 김형준(64), 손자며느리 송명희(64) 내외가 가게를 지키고 있다. 또 부부의 두 아들인 김기남(39)·김기석(37) 씨도 4대째 가업을 물려받기 위해 부지런히 일을 손에 익혀가는 중이다. 주인장 송명희 씨는 “아무래도 냉면은 분식이라 쉽게 배가 꺼져 든든하게 곁들일 수 있는 불고기를 고안하게 된 것”이라며 “동절기엔 냉면이 덜 나가 갈비탕을 내놓기 시작했는데, 손님들 반응이 아주 좋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운을 떼자 큰아들 기남 씨도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음식 설명을 거들었다. “냉면이 주력 메뉴이지만, 불고기도 신선한 과일과 야채로 양념을 만드는 등 신경을 많이 씁니다. 갈비탕은 겨울 메뉴 타깃으로 내놨는데 고기 양이 많다고 입소문이 나서 이제는 사시사철 사랑받는 메뉴가 됐죠. 다른 평양냉면집과 차별화된 건 아무래도 ‘소고기김치비빔’이 아닐까 해요. 대개 가게에서 직접 사태나 양지로 육수를 뽑는 냉면집은 사용하고 남은 고기를 활용한 메뉴를 내놓곤 하거든요. 이곳에서 손수 만들었다는 일종의 증거인 셈이죠. 저희는 그 의미로 소고기김치비빔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기남 씨는 사리원면옥의 장수비결로 ‘추억’을 꼽았다. 그가 기억하는 가게의 세월보다 오랜 단골들의 흔적이 더 깊이 스며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리원면옥 식구들이 대를 물려 가게를 지키는 이유와도 같다. “대전 외 지역에서 오는 손님들이 절반은 되더라고요. 단순히 맛집 탐방하러 온다기보다는, 원래 이쪽에 살다 결혼이나 직장 때문에 터를 옮겼던 분들이 옛날 생각 하면서 찾아오곤 하죠. 10년 전쯤에 건물이 너무 낡아 새로 지은 게 지금 모습인데, 예전 분위기가 그립다고 아쉬워하는 단골들도 계셔요. 그러다가도 냉면 한번 드시고는 ‘맛은 그대로네’ 하며 흡족해하십니다.(웃음) 현재의 맛을 잘 유지해, 앞으로의 100년을 맞이하는 게 저희의 바람입니다.” 대전1호선 중앙로역 3번 출구 도보 5분 주소 대전시 중구 중교로 62 영업시간 11:00~22:00 대표메뉴 평양냉면, 갈비탕, 불고기 ※본 기획 취재는 (사)한국잡지협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2019-10-22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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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재산, 언제 어떻게 물려줘야 할까?
- A(72) 씨는 크지는 않지만 젊은 시절 맨손으로 일으켜 탄탄하게 키운 사업체를 지금도 잘 운영하고 있다. 아들은 A 씨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고, 딸은 결혼해 미국에서 살고 있다. 남부러울 것도 걱정할 일도 그다지 없는 A 씨이지만 아내가 여기저기 아프다면서 병원 신세를 자주 져 신경이 쓰인다. A 씨는 특별히 아픈 곳이 없지만, 요즘 들어와 부쩍 기력과 기억력이 떨어지는 걸 느낀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사업체와 재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주고 은퇴해야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해왔는데, 구체적으로 언제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할지, 마음이 복잡하다. 우리나라의 현 법령과 제도는 부(富)의 대물림에 엄격한 잣대를 대고 있어 그 문턱이 상당히 높다. 대가 없이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를 법률적으로 분석하면 결국에는 ‘증여’ 아니면 ‘상속’이 된다. 세법(稅法) 측면에서 보는 ‘증여’는 그 행위 또는 거래의 명칭, 형식, 목적 등에 상관없이 직간접적으로 타인에게 무상으로 재산을 이전하는 것(현저히 낮은 대가를 받고 이전하는 경우 포함)을 의미한다. ‘상속’은 사망한 사람(피상속인)의 권리와 의무를 일정한 사람(상속인)에게 포괄적으로 이전하는 것을 말한다. 자녀 이름으로 취득한 재산이라 해도 취득에 들어간 자금의 출처를 입증하지 못하면 부모가 증여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사망한 사람의 재산이 다른 사람에게 이전되는 사유로는 앞서 설명한 ‘상속’이 대표적이지만, 유언으로 유산을 무상으로 다른 사람에게 주겠다는 ‘유증’도 있고, 증여자가 생전에 증여 계약을 체결한 뒤 사망했을 때 비로소 그 효력이 발생하는 ‘사인증여(死因贈與)’도 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같이 ‘증여세’와 ‘상속세’는 다른 세금에 비해 세율이 높다. 증여 또는 상속되는 재산 가액이 커질수록 세율도 높아지기 때문에(이를 ‘누진세율’이라 하는데 증여, 상속되는 재산이 30억 원이 넘으면 세율이 50%에 이른다), 합리적이고 치밀한 절세 전략이 필요하다. 증여세를 줄이려면 먼저 증여세 부과 대상에서 제외되는 부분, 즉 공제(控除)제도를 잘 활용해야 한다. 10년 이내에 증여한 금액의 합계액이, 배우자는 6억 원, 부모 또는 성년 자녀는 5000만 원, 미성년 자녀는 2000만 원까지 세금이 부과되지 않는다.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은, 증여를 할 경우 반드시 증여세 신고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증여세 신고를 하지 않으면 증여한 돈 또는 그 돈으로 얻은 재산 가치가 불어났을 때 늘어난 재산까지 증여 금액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액 공제가 되는 범위 내에서 증여하더라도 증여세를 0원으로 해 신고를 하거나, 소액의 증여세만 낼 정도의 금액을 증여해, 언제 누구로부터 증여를 받아 얼마를 증여세로 냈다는 근거를 남겨두는 게 좋다. 고령자가 일정 규모 이상의 재산을 처분해 현금을 수령하거나 재산이 수용되어 보상금을 받으면, 국세청에서는 일정 기간 당사자와 가족의 재산 변동 상황을 지켜보다가, 배우자 또는 자녀가 재산을 취득했을 때 취득자금 소명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처분대금 사용처나 취득자금 출처에 대한 입증 자료를 철저히 준비해둘 필요가 있다. 이밖에 부동산을 증여할 때는 부동산 가격 하락이 예상되지 않는 한 공시지가나 기준시가 고시일 이전에 증여하면 세금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 부채를 상환할 때, 미성년자 명의로 재산을 취득할 때는 그 상환자금이나 구입자금 출처 조사에 대비해 증빙 자료를 잘 준비해둬야 한다. 또 손자에게 재산을 증여하는 경우처럼 세대를 건너뛰는 증여는 할증된 세액이 적용된다는 사실도 기억해두면 좋다. 상속세를 절약하려면 먼저 공제 항목을 잘 알아둬야 한다. 상속재산이 10억 원 이하이고 사망자에게 배우자가 있다면 상속공제를 받아 별다른 문제가 없지만, 상속재산이 많아 상속세가 과세될 경우에는 배우자 상속 공제(최대 30억 원까지 공제 가능)를 받느냐 안 받느냐에 따라 세 부담의 차이가 클 수 있다. 가업상속공제, 금융재산상속공제, 동거주택상속공제 등의 상속공제 항목도 잘 살펴야 한다. 한편 피상속인이 사망한 날로부터 10년 이내에 상속인에게 증여한 재산이 있으면 그 재산 가액이 상속세를 계산할 때 과세가액에 포함된다(상속인이 아닌 사람에게 증여한 경우는 5년 이내 기준). 10년이 지난 증여는 합산되지 않는다. 10년 이내 증여라 해도 그 가액은 과세 시점이 아닌 증여 당시의 가액으로 평가되므로, 증여 시점을 잘 선택해야 세금을 줄일 수 있다. 이외에 사망일이 임박한 상황에서는 피상속인의 재산을 처분하지 않는 게 유리하다는 점, 상속세를 계산할 때 공제되는 피상속인의 채무를 빠뜨리지 말아야 한다는 점, 건물을 상속할 때는 월세보다 전세가 많은 상황이 유리하다는 점, 사망하기 전 재산을 처분하거나 예금을 인출할 경우 사용처에 대한 증거자료를 잘 준비해둬야 한다는 점, 상속인이 상속 개시일이 속하는 달의 말일로부터 6개월 이내에 상속세를 자진신고하면 세금의 3%를 공제해준다는 점(증여세의 경우는 3개월 이내) 등을 알아두면 절세에 도움이 된다. 김성우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하고 2002년부터 판사로 활동. 2015년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의 한정후견개시사건을 담당했고, 2018년부터 2019년 2월까지는 상속재산분할사건, 이혼과 재산분할 등에 관한 가사항소사건을 담당하는 합의부 재판장을 역임했다. 2019년부터 법무법인 율촌에서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상속, 후견, 가사 분야의 국내 최고 전문가 중 한 명이다.
- 2019-09-27 17: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