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들의 ‘손주 사랑’은 세계 공용어다. 영화 의 할머니는
“이 나이에 기다리는 것은 손주와 죽음이다”라는 대사를 내뱉는다.
또 “난 죽으면 손주의 애완 고양이로 태어날 거야”라는 대사도 나온다.
이 영화 말고도 손주를 통해 ‘웬수’가 된 아들과 화해하는 장면은 부지기수다.
올 여름, 빈센트 반 고흐가 희망과 꿈을 갖고 떠난 ‘아를’로 손주와 함께 떠나보자.
손주와 ‘론’ 강변을 걸으며 ‘별 헤는 밤’의 그림 이야기를 꽃피우면서
그곳에 추억을 남겨놓자.
손주의 여행 경험은 향후 엄청난 학습효과를 갖게 될 것이다.
수많은 예술가가 사랑한 남부 프랑스
프랑스 남부지역의 프로방스는 세계 여행자들의 로망이다. 특히 프로방스는 많은 시인, 화가, 영화 예술가가 사랑한 도시다. 프로방스의 매력에 빠진 예술가들은 평생 그곳을 그리워하면서 소설, 시, 그림 등으로 남겼다.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가 고향인 폴 세잔, 코트다쥐르의 생폴 드 방스(Saint-Paul de Vence)는 샤갈, 피카소도 좋아했고 6개월간 안티베(Antibes)에 머물기도 했다. 르누아르가 노년을 보냈던 르누아르의 집, 레 콜레트(Renoir’s House, Les Collettes)는 카뉴 쉬르 메르(Cagnes Sur Mer)에 있다. 모딜리아니는 니스를 무척 사랑했다.
또 주옥같이 아름다운 소설인 , 의 저자인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 1840~1897)는 아를과 가까운 님(Nimes)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향을 일찍 떠나 파리에 살면서도 프로방스에 대한 애정을 평생 안고 살았다. 그의 작품 속에는 고향 프로방스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프랑스의 극작가 겸 영화제작자 겸 영화감독인 마르셀 파뇰(Marcel Pagnol)의 작품에도 어김없이 프로방스가 등장한다. , 등 영화 속에 프로방스가 담겨 있다.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Rainer Maria Rilke)는 “가장 아름다운 곳은 프로방스였다. 당신도 언젠가 꼭 한번 그리로 가봐야 한다”라는 편지를 썼고 그는 마지막 거처를 프로방스에 마련할 수 있기를 염원하면서 죽었다.
특히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는 프로방스의 아를(Arles)에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그래서 아를은 ‘고흐의 마을’로 불린다. 많은 관광객이 아를로 몰려 드는 이유는 고흐를 만나기 위함이다.
로마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2000년 古都
아를은 테제베 고속열차가 멈추지 않는 작은 역이다. 역에서 1km 떨어져 있는 마을로 들어서면서 놀라게 되는 것은 부서진 로마의 유적 때문이다. 고흐의 그림 스타일을 아는 사람들은 이 생경한 문화 유적에 놀랄 수밖에 없다. 그때도 분명히 이 자리에 있었을 문화 유적이지만 그의 작품 속에는 건축물을 찾을 수는 없다. 그저 투우 장면을 그린 그림이 있을 뿐이다.
아를은 2000년의 역사를 지닌 고도(古都)다. 그리스의 식민지였다가 시저(Julius Caesar)에 의해 로마령이 되었다. 긴 세월동안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반질거리고, 울퉁불퉁한 조약돌로 된 골목길과 부서진 성벽 등이 온 마을을 장식하고 있다. 마을 제일 높은 곳에는 거대한 원형 경기장인 아레나(Arenes)와 기둥만 남아 있는 원형 극장이 있다. 아레나에서는 매년 투우 축제(4, 9월)가 열린다. 또 이 마을은 초기 기독교 시기의 중요한 거점도시였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순례자의 길을 시작하는 곳 중 하나로 중세 건축물인 생 트로핌(Saint-Trophime) 대성당이 남아 있다. 11세기에 창건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에서는 ‘최후의 심판’ 장면을 새겨 놓은 부조와 조각을 볼 수 있다. 구시가지 한가운데 자리한 리퍼블릭 광장에 삼색기가 휘날리는 아를시청사가 있다. 그 앞에는 아를에서 제일 높은 시계탑과 2000년 전 로마 황제가 이집트에서 가져왔다는 오벨리스크(obelisk)가 솟아 있다. 이 도시의 로마 유적지는 198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아를 골목에서 고흐의 작품 현장 찾아내기
오래된 가옥과 골목을 헤집다 보면 포룸 광장에서 ‘고흐 카페’를 만나게 된다. 고흐가 즐겨 썼던 노란색으로 칠한 카페는 ‘고흐’란 화가의 이름을 파는 상술을 펼치고 있다. 그가 그린 ‘밤의 카페 테라스(The Night Cafe in Arles)’ 그림을 안내대처럼 세워 놓았다. 유독 그 카페만 관광객들로 북적댄다. 카페 주변에는 피카소, 장 콕토 등이 자주 묵었던 낡은 호텔이 있다.
고흐는 이 카페 근처에 일명 ‘노란집’을 얻어 놓고 이곳을 매일 밤 찾았다. 카페에 앉아 늘 ‘녹색요정 압생트’를 마시면서 얘기를 나누고 그림을 그렸다. 고흐는 친구 고갱이 오길 기다리면서, ‘아를의 여인-지누부인’(1888년)을 그렸다. ‘아를의 여인’이라는 제목은 고흐 이전에 알퐁스 도데가 첫 단편집에 쓴 ‘아를의 여인(L' Arlesienne, 1872년 작)’이 있다. 이 작품을 다시 각색해 3막 5장의 희곡을 발표했는데 당대 잘 나가던 프랑스의 작곡가 조르주 비제(Georges Bizet, 1838~1875)가 극장 상연에 쓰일 부수음악 27곡(관현악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같은 제목의 글, 그림, 음악이 만들어진 곳이 아를이다.
또 에스파스 반 고흐(Espace Van Gogh)에는 ‘아를 병원의 정원’이라는 그림이 있다. 고흐가 1888년 12월, 자신의 귀를 자르는 발작 이후 머물기를 반복했던 병원으로 현재는 문화센터로 바뀌었다.
어둠이 내릴 무렵엔 론 강으로 가서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을 그려보자. 고흐가 생레미 드프로방스의 한 요양원으로 옮겨진 후에 그린 그림으로, 아름다웠던 아를의 기억을 되살렸을 것이다. 지금 고흐 그림처럼 아름답지 않은 론강의 어둠 속 끝에서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난다. 그 외에도 ‘열두송이의 해바라기’와 ‘아를의 다리(도개교로 링클루아 다리)’ 등도 모두 아를에서 그렸다.
현재 아를에는 ‘반 고흐 파운데이션’이 있다. 하지만 기대는 말아야 한다. 고흐의 작품은 거의 볼 수가 없고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과 어릴 적 고흐와 동생 테오의 사진 등 몇 점만 볼 수 있다. 고흐의 고국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고흐 박물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다.
예술촌을 꿈꾸던 화가는 고갱을 만나 미쳐 버리고
고흐는 1888년 2월, 아를에 예술촌을 만들겠다는 부푼 꿈을 꾸고 이곳에 방을 얻는다. 파리에서 뜻이 잘 통했던 고갱이 오기를 기다렸고 오기 전까지 방을 꾸미고 마음이 들뜬 채로 지냈다. 하지만 같이 살면서 극단적인 성격 차이로 싸우게 된다. 결정적으로 화를 돋구게 된 것은 고갱이 그린 자화상이었다. 고흐와 고갱은 서로 자화상을 그리기로 했는데 고갱이 그린 그림 속에는 고흐는 없고 고갱이 앉아 있었다. 그림 속 고갱의 콧수염은 고흐의 붉은 콧수염이었다. 고흐와 고갱은 크게 싸웠고 분에 겨운 고흐는 집으로 돌아가 한쪽 귀를 잘라 버린다. 자른 귀를 싸들고 술집 여자에게 갖다 주었고 그녀가 경찰에 신고를 해서 시립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고흐가 꿈꿨던 예술촌의 꿈은 그렇게 두 달 만에 끝났다. 고흐의 발작은 더 심해져 근처 생레미 정신병원(1889년 5월)에 입원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발작이 없을 때면 그 동안의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려는 듯 마구 그려댔다. 병원에서 약 15개월간 머물면서 187점에 이르는 그림을 남겼다. 분명히, 고흐가 아를을 사랑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가 아를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도 나타난다. “예전에는 이런 행운을 누려 본 적이 없다. 하늘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파랗고 태양은 유황빛으로 반짝인다. 천상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푸른색과 노란색의 조합은 얼마나 부드럽고 매혹적인지…”라고 보냈다.
고흐는 1890년 봄, 파리 근교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 sur Oise)에서 자살한다. 고흐는 테오의 가족이 찾아온 이후 밀밭에 가서 총을 쏘고 집으로 겨우 기어 들어와 이틀 만에 동생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죽었다. 테오가 형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 무엇이었을까? 테오는 “조카도 생기고 가정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더는 형의 생활비를 대어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동안 고흐는 그림들을 테오에게 보냈고 그 대신 생활비를 받았다. 살아생전 단 한 점밖에 못 판, 생활 능력 없는 그가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었을까? 사랑을 주고 싶지만 줄 사람도 없고 정신병을 앓고 있는, 희망없는 삶.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죽음’ 밖에 없었을 수도 있다. 고흐 나이 37세였다. 오베르에 머문 지 두 달 되던 때였다. 이후 동생 테오도 6개월 뒤 매독에 걸려 죽는다. 두 사람의 묘지는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집 앞에 있다.
고흐의 삶은 그 어느 창작자가 일부러 만들어 내기도 어려울 만큼 드라마틱하다. 여행을 떠나기 전, 고흐에 대한 영화나 책 등을 미리 보고 가는 것도 도움이 된다.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열연한 영화 과 BBC 다큐인 폴 고갱의 이라는 작품을 추천한다. 아를에서의 고흐와 고갱의 생전의 삶을 알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2014년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생물학적 수명은 늘어나고 사회적 수명인 정년은 점점 짧아지면서, 제2 인생을 준비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두 번째 인생을 위해서는 경제적 자유, 즉 은퇴자금 준비가 중요한 문제이지만 제2 직업은 더 중요하다. 시니어들의 이러한 요구에 발맞춰 여러 민·관 기관에서 제2 직업에 관한 다양한 안내와 새로운 직업 소개를 하고 있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찾기보다 교육과 준비과정을 통해 새 인생에 어울리는 새로운 직업을 알아보는 것은 어떨까?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최근 제2 직업을 위해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시니어들과 이들을 대상으로 구인 활동을 펼치는 업체나 기업을 살펴보면 현실과 괴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장년들의 일자리를 위해 노사발전재단이나 대한상공회의소, 중소기업중앙회,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경영자총협회, 대한은퇴자협회 등 여러 기관에서 중장년 일자리 희망센터를 전국 단위로 운영하고 있다. 이 일자리 희망센터를 이용하면 구인구직 정보에서부터, 교육 프로그램, 관련 컨설팅 서비스까지 받을 수 있다.
시니어 구인구직 단순직종에 집중
문제는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되는 직업이나 일자리가 시니어들이 원하는 수준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일자리가 경비직이나 청소, 택배와 같은 단순 노무직이고 그나마 이런 일자리의 대부분은 40대를 우선적으로 선호한다. 연령이 높은 시니어들에겐 순서조차 돌아오기 힘들다.
도심권50플러스센터의 정현주 대리는 센터가 최근 사회공헌형 일자리로 사업 방향을 옮긴 것도 이런 현상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경제적으로 자유롭거나 노후 자금이 해결된 시니어들은 단순직 일자리를 원치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대부분 그간의 경력을 살릴 수 있거나 새로운 일자리를 통해 경제적 소득보다는 보람을 찾으려는 분들이 많아요. 수고를 인정받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뜻이죠. 저희 센터에서는 이런 시니어들의 요구에 맞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현장에서 활동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 센터에서 준비하는 직업들은 경제적 소득보다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지원이나 참여 시니어들의 자부심 확보에 중점을 두고 있다.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업 중에는 건강코디네이터 양성 과정이 있다. 지역 치매센터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경도 인지장애(초기 치매) 노인들을 대상으로 상담과 인지학습 역할을 할 사회공헌 활동가를 양성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밖에 바른먹거리전문가 양성과정은 유치원 등 각 교육기관의 학생과 학부모에게 먹거리에 관한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는 전문가를, 다문화가족 서포터스 양성과정은 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요청을 받아 한국생활 정착의 멘토 역할을 할 지원자들을 교육하고 있다.
수익보다 보람과 자부심 얻을 수 있어야
지난해 도심권 50플러스센터를 통해 SNS전문가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종로지역자활센터 등에서 강사로 활동 중인 김희순씨(64)는 경험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시니어들에 대한 직업 교육은 지식 전달뿐만 아니라 삶의 활력을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어요. 재능기부를 통해 교육생들에게 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줄 수도 있고, 사회에 기여한다는 자부심도 갖게 됐습니다. 예전엔 손주들이 와이파이 터진다고 하면 뭐가 터졌냐며 놀랄 정도였지만, 이제는 대화도 통하고 생활이 달라졌어요.”
물론 일자리나 전문가들을 양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현장에선 이야기한다. 기본적으로 실업난을 겪고 있는 청년들의 일자리와 겹치게 되면 사업 자체의 정체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고, 현장에서 원활하게 일할 수 있도록 활동 무대까지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사회적으로 자리 잡은 성공적인 직업에 정리수납전문가가 있다. 정리수납전문가는 여성발전센터, 여성인력 개발센터 등을 통해 민간에 알려졌다가 현재는 협회까지 설립됐다. 한국정리수납협회의 정경자 협회장은 이렇게 조언한다.
“정리수납은 보통 팀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혼자 활동하기 어려운 시니어, 특히 여성들에게 적합한 직업입니다. 평생 살림을 해온 분들은 원칙과 이론을 알려주면 금방 익숙해지거든요. 이렇게 새로운 직업을 만들거나 창업하려면 좋아하는 일보다는 잘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좋습니다. 소비자를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하니까요.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의 전문성, 문제를 해결할 창의성, 구성원과 소비자를 대할 인성을 갖추고 있는지 늘 끊임없이 점검해야 합니다.”
찾을 수 없다면 창직(創職)도 방법
새로운 직업에 대한 단서가 필요하다면 한국고용정보원(www.keis.or.kr)을 노크하는 것도 방법이다. 이곳에선 제2 직업을 필요로 하는 중년들을 위한 자료를 연구하고 개발해 보급하고 있다. 올해 3월에 발간된 자료집 이 대표적이다. 이 책은 인생 2막을 설계하는 베이비 부머들이 도전하기에 적합한 직업 30개를 선정해 하는 일을 소개하고 해당 직업을 가지려면 무슨 준비를 해야 하는지 등을 알려주고 있다. 또 지난 5월부터는 중장년층의 창직 활동을 돕기 위한 라는 지침서를 배포 중이기도 하다.
# 클릭하면 크게 보입니다.
‘도랑 치고 가재 잡다'는 속담이 있다. 한 가지 일하다 보면 곁들여 또 다른 좋은 일이 겹쳐진다는 의미다. 늦깎이로 시작한 사진 취미가 바로 그런 예가 되었다. 60세에 사진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지금은 그 사진취미가 바탕이 되어서 KBS 1TV ‘아침마당’ 출연을 비롯한 방송활동, 강사, 기자, 저자로 인생이 막을 의미 있고 재미있게 보내고 있어서다. 그뿐만 아니라 용돈도 벌고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가를 어떻게 쓸모가 있게 보내느냐를 고민한다. 나이가 들면서 그런 상황은 많아지게 마련이다. 퇴직하면 매일이 일요일인 셈이다. 직장을 다닐 땐 대부분 시간을 바깥에서 보내게 되고 동료나 선후배, 관련 기관이나 거래처의 고객과 어울리며 시간을 무료하지 않게 보낸다. 하지만 직장을 그만두고 난 후에는 그런 인간관계에서 서서히 벗어난다. 그리고 일상이 따분해진다.
수명은 날로 늘어난다.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늘어난다. 머지않아 120세에 이른다고 예측한다. 은퇴 후 보내야 할 시간이 엄청나게 길어진다.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의 발표로는 60세에 은퇴하여 80세까지 산다고 가정하였을 때도 하루 여가가 11시간으로 따져보면 잔여 시간이 8만 시간에 달한다. 그 긴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취미생활이다.
그래서 취미활동의 하나로 사진을 택했었다. 나이 60세, 그러니까 2010년 7월부터 사진을 배우기 시작했다. 물론 일반인들과 같이 자동모드로 예전에 사진을 찍기는 하였으나 사진에 대한 지식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우기는 처음이었다. 필자가 사는 고양시 일산동구청에서 무료로 진행한 사진교실에 참가한 것이다. 6개월 과정이고 한 달에 1시간 반씩 세 번의 학습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사진에 대한 기초지식을 익혔다.
물론 카메라는 큰아들 녀석이 인터넷 쇼핑몰을 할 때 사용하던 작은 콤팩트 카메라를 얻어 사용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했듯이 취미활동에 끝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인정하는 공인 사진작가가 되기 위하여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개월 후부터 도전하였다. 사진작가 명함을 얻는 방법은 여러 갈래가 있을 수 있다. 그중에 하나가 한국사진작가협회가 인정하는 전국사진공모전 수상을 통하여 당해 협회의 정회원이 되는 길이다.
필자는 그 길을 택하고 공모전에 출품하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 첫 번째로 응모한 제1회 너브내감성사진전국공모전에서 작품 '형상I'이 동상에 입상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동상의 경우 사진작가로 등록하기 위한 점수가 3점에 불과하다. 입선의 경우는 2점이다. 지금은 규정이 바뀌었지만, 당시에는 그런 점수의 합계를 50점을 넘겨야 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하여 꾸준히 응모하였다. 입선이 잘 안 되어 포기할까도 수없이 망설인 적도 많다. 그러나 한번 시작한 일을 중도에 포기할 수 없었다. 나태해지는 마음을 재차 다스리며 또 도전하고, 도전하기를 반복하였다. 수도 없이 낙선되었다. 필자의 서재에는 당시에 낙선한 작품들이 가득하다. 지금 다시 그 사진을 살펴보면 역시 낙선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보면 우물 안 개구리였다. 일 년이 채 되지 않는 기간에 목적을 이루긴 하였어도 그 과정에는 수많은 고뇌를 반복하였다.
늘 카메라를 손에 놓지 않고 사진에 대한 공부도 계속하고 있다. 사진 관련 서적도 꽤 쌓였다. 찍은 사진도 500기가 용량의 외장 하드가 6개를 넘어서고 있다. 사진 촬영을 위한 명소로의 촬영여행은 잘 가지 못하여도 이른 아침부터 거의 매일 사진을 찍고 있다.
그리고 사진을 통한 재능기부와 봉사도 곁들인다. 사진강의와 촬영지도를 하며 사진과 관련하여 조선일보사 시니어조선의 사진 명예 기자로도 활동을 한다.
물론 작품을 사진대전을 비롯한 공모전에 출품하여 공개적인 평가를 받기를 좋아한다. 2013년에는 사진의 국전인 대한민국사진대전에 '무한질주'라는 작품을 출품하여 입선하였고, 같은 해 10월에 부산일보사가 주최한 제21회 부일전국사진대전에 '닭장'을 출품하여 우수상을 받은 것도 그런 과정이다.
이러한 사진에 대한 도전과 취미활동은 의 생활에 더없는 보람과 즐거움을 준다. 특별한 재주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가지고 있는 카메라 장비도 일반인과 다를 바 없다. 한 동안 필자는 똑딱이라고 칭하는 소형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했다. 그 다음에 며느리가 사용하지 않는 캐논 400D 구형 카메라를 주기에 사용하다가 50만원을 주고 산 중고 500D를 지금도 사용 중이다. 물론 렌즈도 번들형에 가까운 저가형이다.
필자 카메라 장비를 보고 사진을 좀 한다는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런 장비로 어떻게 그런 작품을 만드느냐고 되묻는 눈치다.
좋은 카메라는 촬영자를 편하게 한다. 카메라 장비가 뒷받침되지 못하는 필자의 경우는 다른 사람이 겪는 노력의 몇 배를 하여야 한다. 쉽게 말하여 몸으로 때워간다.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며 사는 생활이 노후를 편하게 한다. 뱁새 황새 따라가면 가랑이 찢어진다. 필자 방식대로, 내 형편대로 사는 자세가 필요하다.
사진은 누구나 한번 도전해 보아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요즘은 주변에 사진을 무료로 배울 기회와 공간이 많다. 그리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장비도 무척 편해졌다. 스마트폰이 그 중에 하나이지 싶다. 침팬지가 카메라를 들고 있는 모습이 신문의 기사로 뜬 적이 있듯이 사진 촬영이 손쉬워졌고 소셜미디어 시대를 살고 있어서 사진을 찍지 않으면 아니 되된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사진 촬영 경험을 많이 했다. 사진을 잘 찍을 수 있음이다. 다만 사진이론적 측면에서 몇 가지만 가미하면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다. 여러 사람과 또는 자연과 어울리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진 취미는 노후에 한번 도전해 볼만한 취미다.
도사 되는 법?
무림의 비급은 인연 있는 자의 것이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누구나 가질 수 없어 비급이라 했던가
어언 나이 70을 넘었다
고령사회에서 평균연령 100세 이상을 산다고 하는데 우리도 피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하루가 다르게 빠르고, 계속해서, 새롭게 변하는 IT 세상에서 알파고 아이들과 어울려 살아가려면 앞장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뒤따라가기도 버겁고, 쳐지면 짐이 되어 걸림돌이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지난날에는 명절이다 하면 시끌벅적 건너 뛴 시간 이어주는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요즘은 “안녕 하세요” 인사만 끝나면 각자 스마트 폰 하나씩 들고 어느 구석 찾아 벽에 기대 카톡, 게임, 페북에 열중하며 혼자서 웃고 찡그리고 즐겨서 명절이어도 고향이 조용하다는 쓴웃음 소리도 있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귀엽고, 궁금한 게 많으신 조부모님께서 말을 붙여보지만 눈길 한번 없이 입으로만 단답식 대답에 부모가 꾸지람도 해 보지만 소용없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아 내 자신이 바뀌어보자 생각하고 IT를 배워보기로 했다.
우선 컴퓨터를 배워 메일이라도 보내봐야겠다는 소박한 생각에 시작한 컴퓨터.
시작은 켜고, 끄고, ID 만들고 독수리 타법이었다.
친구들에게 짧으나마 10행 미만의 글 하나 보내는데 한나절
그런데 격려의 답장이 오고
곧 이어 전화가 와 컴퓨터 배우길 참 잘 했다며 별 다섯짜리 도장을 찍어준다느니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신났다.
뭔가 하나 시작 했는데 주위에서 그게 잘 한 짓이라니 너무 신났다.
문장이 늘어나고 답장이 여러 곳에서 오는데도 글 쓰는 시간은 좀체 줄지 않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엉덩이 진물 날 정도로 앉아 보내고 또 보냈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조선일보와 유어스테이지 (주)시니어 파트너즈에서 강사과정 안내문을 컴퓨터로 받아보니 새삼 신기했고 그 위력을 알 것 같았다
강사과정을 공부하며 아쉬웠던 부분은 파워포인트 강의안을 만들어야하는데 그런 실력이 없어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만들려니 그때마다 부탁하는 것이 너무 미안하고 나의 부족함이 싫어 새삼 컴퓨터를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는데 2015년 도심권 이모작센터에서 SNS기초반이 있다는 광고를 컴퓨터로 접하고 등록해 가보니 베이비부머 수강생이 많아 정말 놀랬다
시작이란 이제까지 해보질 않던 것을 하는 것이니 두근거리는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나처럼 아랫사람에게 지시하면 척척 되던 시절을 겪은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한 울타리에 모아놓은 모습이었다.
켜고, 끄기부터 시작해 자판을 외우라는 숙제가 떨어졌고 독수리 타법을 생소한 10손가락 운지법으로 고치는데 집에 와서도 계속 연습하다보니 이젠 독수리 타법으로는 오히려 불편해지며 점차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애국가, 명시 등을 치며 어느 시점에서 행을 바꾸고, 여백의 아름다움을,
글자체의 종류와 적용 사례, 내용에 따라 한 장에 들어가는 글자 크기, 배열 그리고 속도를 익혀갔다
노트북을 하나 사 지참하고 교육을 받다보니 손에 익숙해져 슬슬 넘어가는 손놀림만으로도 신기했다
3개월 후 시험에서 1/2 합격선에 들어 심화반에 들어갔다
문제는 스마트폰이었다
컴퓨터와 함께 스마트 폰 교육이 병행되었는데 컴퓨터보다 어려운 게 스마트 폰이란 걸 처음 알았다
그러나
스마트 폰만 제대로 알면 컴퓨터를 대신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페이스 북, 트위터, 밴드로 영역을 넓히다보니 재미있어 하나하나 신기함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블로그, 카페, 동영상을 배우며 숙제는 간단했다
단 한줄, 한 컷도 좋으니 매일 올리라는 것이었다.
남들은 매일이라는 이게 쉽질 않았나보다
나는 무슨 일이든 남보다 빠르질 못 해 오죽하면 별명이 “느림보”일까.
그렇지만 느리기는 해도 꾸준함은 있기에 하루도 빠짐없이 올리길 해
3개월 후 1/2 탈락자 명단에서 빠져 전문가반으로 올라갔다.
구글의 여러 기능, 스프레드시트, 모두, 마인드맵, 음악 동영상 시간과 분위기에 맞는 것 골라 넣기, 유튜브 옮겨 자르고, 붙여 필요 부분만 사용하는 법 등을 신나게 배웠다
무엇보다 강사로서 PPT 배우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가장 백미는
누구나 팀을 이뤄, 새로 공부하시는 분들 기초반에서 선생님 보조강사 하는 것이었다.
그때 보조강사는 물론이고 누군가를 가르쳐봐야 가르치기 위해서도 자신이 배운 걸 제대로 익힐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수료를 위한 마지막 시험은
자신의 스프레드시트 만들어 자신의 전문분야 동영상 15분 이상 6개 만들어 그 주소를 넣을 것
SNS 관련 모임 6번 개최한 기록 만들어 넣을 것
타 SNS 관련 모임 6번 참석해 자신이 타 모임에서 기여, 보조한 기록 만들어 넣을 것 등을 스프레드시트 지정 란에 채우고 클릭 한 번으로 바로 열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니 거짓말도 못하는 것이었다.
강사다보니 내 강의 장면을 누군가 동영상 찍어주질 않으면 안 되는데 미리 알았으면 틈틈이 준비했으련만 발등에 불이 떨어져 약 한 달을 만사제치고 그 일에 매달려도 쉽지 않았는데 다행히 강의가 곳곳에 있어 첫 번째는 채울 수 있었다
SNS관련 모임 6번과 타 SNS관련 모임 참석은 동기생들과 짜고 서로 모임 주선하고 참여해 주는 것으로 하렸다가 선생님께 들켜 자신의 집 구역을 설정하고 그곳에서 모임 하라니 지역이 각각이라 동기들도 가고 오기가 버거워 잘 되질 않았고 나 자신도 멀리까지 찾아가 참석해 줄 형편이 되질 않아 애를 먹다 미완성인체 겨우 턱걸이로 수료증을 받고나니 어느새 1년이 지났다
평생 써먹을 걸 배웠는데 얼마나 큰 성과인가
스마트 폰이 내 손 안에 착 달라붙은 기분이다
바로 IT 비급은 내가 차지한 것이었다.
요즘 중학생 학습 방법은
한 반을 1팀 5~6명, 4~6팀에게 다음 시간 수업할 내용을 팀별로 나눠주고 각 팀별로 주제 만들어 PPT 만들어 발표하게 해 시험, 발표 각각 50%씩 반영 성적을 낸다고 한다.
효과는 팀웍의 중요성과 협동의 가치를 자연히 익히게 하며, 있을 수 있는 지진 한 친구를 어떻게, 각기 다른 능력의 조화여부, IT는 물론 회전식 역할분담까지 하다보면 자연히 인성을 익히고 학습을 놀이형태를 빌려 재미로 승화시키는 것이라 한다.
중학생들 IT 능력은 뛰어나다
노트북, 스마트 폰은 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장난감에 불과하다
우리와 실력인지도 모르고 일상에서 즐기며 놀이로 자유자재 다루는 그들과는 게임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사실 버겁다
IT 도사되는 비급을 열어보니
“IT 지름길은 없다
꾸준히 만지며 실패하고 익히는 길만 있을 뿐이다“
라고 쓰여 있었다.
IT도사? 필자에게 이 단어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일견 필자는 IT도사일 수도 있다. 지금 컴퓨터로 먹고사니 나름 IT도사 아니겠는가?
오스트리아 정신의학자 알프레트 아들러는 “인생을 사는 방식, 즉 라이프스타일은 과거의 특수한 경험이나 트라우마 같은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필자는 퇴직하면서 이 말대로 삶을 스스로 결정하면서 살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필자는 1999년 40대 중반에 은퇴하고 인생 2막을 준비하려 상담 공부를 시작했다. 3년 정도 열심히 팠는데 상담으로는 2막을 시작하기 쉽지 않았다. 뭔가 다른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필자는 교육받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다. 그래서 기관마다 회원으로 가입해 교육이란 교육은 죄다 섭렵하기 시작했다. 여성능력개발원, 구청 사이트, 문화원 등등.
그리고 그중엔 고용센터에서 취업 전략으로 교통비와 식비까지 주면서 무료로 하는 강의도 있었다. 필자는 이를 통해 ‘쇼핑몰 제작과 운영과정’을 배웠다. 그 과정 안엔 포토샵, 일러스트, HTML, 플래시 등 과목이 있었다. 난 사진작가이기에 포토샵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나 할 줄은 몰랐고 다른 것은 난생처음 듣는 단어였다.
처음 교육이 시작된 날 책을 보니 그 난이도가 ‘심오’ 그 자체여서 아차 싶었지만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그냥 듣기로 했다.
첫 시간이 끝나자 필자의 뇌리에 남은 단어는 ‘멍’하고 ‘우왕좌왕’. 그래서 모르는 것이 있으면 젊은 친구들에게 체면 불고하고 물어댔다. 그런데 문제는 40대 여성 한명도 계속 묻는다는 것. 필자보다 더 젊은 친구들이 얼마나 짜증났겠는가? 강의실 뒤에서 짜증 섞인 소리가 들리고, 들린 듯하다. 마침 앞에 앉은 아가씨가 착해 그 아가씨를 무척이나 귀찮게 했다.
그렇게 일주일을 지나고 나니 눈치가 보여 묻는 것을 줄이고 집에서 연습하기 시작했다. 일러스트는 그런대로 할 수 있었으나 플래시는 조금만 잘못 클릭해도 전혀 진행이 안 돼 무척 고전했다. 쇼핑몰 홈페이지를 만드는 것도 수업 땐 잘되다가 집에만 가면 전혀 생각이 나질 않았다. 결국 독자 학습은 포기하고 다음 날부턴 다시 앞에 앉은 아가씨를 괴롭혔다. 밥을 사줘 가면서….
많은 시니어는 잘못될까 봐 기계 만지기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잘못되면 돌아가면 되고 잘못되면 까짓 서비스센터에 가면 되지’라는 생각으로 하니 자신감이 생겼다. 이렇게 하니 100%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2014년 회원 가입된 여성능력개발원에서 메시지가 왔다. 서울시에서 은퇴자를 모집한다는 공고였다. 당연히 원서를 냈고, 사진작가로서 인터넷을 할 줄 안다는 스펙으로 합격해 홍보팀장으로 활동하게 됐다. 그곳에서 모 기업 동우회에서 활동하는 선생님을 만나게 됐는데 이 사람을 통해 해당 동우회에서 일하게 됐다. 만약 컴퓨터를 못했다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동우회에서 사무자료 작성을 제대로 하려면 엑셀 능력이 필요해 퇴근 후 고용센터 내일배움카드로 학원에서 엑셀을 무료로 배우기 시작했다. 이렇게 공부한 덕에 사무자료 작성, 소식지 편집, 행사 사진 촬영, 홈페이지 사진 관리 및 편집을 전혀 어려움 없이 할 수 있게 됐다.
미국 구인ㆍ구직 정보업체 ‘케리어 캐스트 닷컴(Career Cast.Com)’이 발표한 2016년 ‘미국 최고의 직업 10개’를 보면 IT 관련 업종이 4개나 차지하고 부동의 1위에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랭크됐다. 그만큼 이 시대의 화두는 IT다. 이런 변화가 불과 30년 이내에 일어나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시니어들로서는 숨 가쁠 수밖에 없다.
필자가 젊어서 직장 생활을 할 때는 공문도 직접 기안문에 펜으로 쓴 뒤 시행문만 타이피스트인 여직원이 타이핑해서 보냈다. 그 뒤 컴퓨터가 보급이 시작됐지만 비용 관계로 1인 1대가 아니라 부서에 1대가 보급되는 귀하신 몸이었다. 이미 부장으로 승진된 필자는 직원들에게 떠밀려 컴퓨터 앞에는 앉기가 어려웠다. 몇 년 뒤 1인 1 컴퓨터 시대가 도래하고 종이 없는 사무실을 만든다는 슬로건 아래 모든 업무를 전산화해 지방사업소 출장 중에도 결재할 수 있었지만 부서장인 필자는 직접 문서를 생산하지 않고 열람과 결재만 해 점점 뒤처지는 컴퓨터 능력에 속으로 겁을 먹었다.
퇴직 후 제2의 직장에서는 필자가 직접 문서를 만들어야 했다. 직속 부하가 아닌 젊은 사원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필자 머릿속의 아이디어로 새로운 서식을 만들고 독수리 타법으로 채워 넣기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뿐 아니라 막힐 때마다 부하도 아닌 젊은 사원을 부르는 것도 눈치가 보였습니다. 한두 해 살고 말 것도 아니고 하루라도 빨리 못된 컴퓨터 ‘완전 정복’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도전해보기로 했다.
배울 곳은 전산 학원이었습니다. 당시는 재직자도 고용보험에 가입돼 있으면 학원에 20% 정도 교습비용을 내면 수강이 가능했던 ‘호랑이 담배 먹던’ 호시절이었다. 인터넷 활용법과 문서작성법도 배우고 엑셀, 파워포인트는 물론, 포토샵까지 다양하게 여러 과목을 수강했다. 집에서는 딸에게 배우고 회사에서는 젊은 사원들에게서 배우고 학원에서는 강사에게 배우는 ‘몰입 교육’ 덕택으로 속히 배울 수 있었다. 필자보다 어린 학원 선생에게 매일 음료수 1캔을 교탁 위에 올려놓았더니 고마워 하고 학습 분위기도 다른 반보다 좋았다. 요즘 친구들처럼 친목 카페도 만들어 운영하고 블로그도 다음, 네이버, 유어스테이지 이렇게 3개나 개설해 운영하고 있다.
스마트폰 시대가 열리면서 스마트폰 사용법이 또 과제로 눈앞에 닥쳤습니다. 스마트폰은 ‘손의 컴퓨터’라고 하지만 컴퓨터와는 기능이 다르기도 하다. 도서관에 가서 스마트폰 사용법에 관한 책을 구해다 읽기도 하고 젊은 친구들에게 물어보기도 한다. 하드 부문에 대해서는 친절한 A/S센터에 들락날락하면서 물어보면서 배웠다. 여기저기서 시행하는 무료강좌에도 등록하여 사용법을 닥치는 대로 배우고 연습했다. 이런 노력으로 손자, 손녀의 사진을 스마트폰으로 변형해 역으로 보내주기도 하고 맛집이나 길 찾기는 물론이고 페이스북, 카톡, 밴드 활동도 할 수 있게 됐다.
블로그에 글도 활발히 쓴 결과로 2015년도 한국블로그산업협에서 시상하는 불로그어워드 개인 부문 우수상을 받았다. 세상은 변한다. 그리고 노인이라고 해서 세월의 변화라는 거대한 수레바퀴를 혼자서 맞설 수는 없다. 현명하게 변화의 수레에 올라타야 한다. 그리고 즐겨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급격하게 경제발전을 이룬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으나 사람들은 그중 하나가 고등교육을 받은 풍부한 인력에 있었다고 한다. 세상의 부모들은 왜 아이에게 공부를 하라고 하는 것일까? 필자는 철이 들면서 이런 의문을 품고 있었다.
오늘날 자라나는 대부분의 학생은 지엽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핵심적인 답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취업이나 결혼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알아야 면장(免牆)을 한다는 말도 바로 그런 말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다.
( Scientia potentia est., Knowledge is Power.) “ 라고 한 말도 같은 맥락이다.
부모의 사후에 자식들이 혼자 힘으로 잘 살아가길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주체적인 삶이란 좋아하는 것을 공부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좋아하는 것을 공부하면서 생각의 폭을 넓히고 깊이 깨달아야 변한다. 그리고 세상과 정면으로 마주 해야 한다. 그래야 편견에서 벗어나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 의해 바뀌어야 할 때 나의 생활은 힘들어질 수 있다.
학문이란 어떤 분야를 체계적으로 배워서 익히는 것이다. 어떤 지식이든 항상 의문과 의심을 갖고 비판적으로 접근할 때에만 참된 나의 지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학문이라는 것은 목적일까? 수단일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이에 대한 답은 논어에도 나와 있다. “古之學者 爲己, 今之學者 爲人” 이라고 공자가 말했다.
즉 “ 과거의 학자들은 자신의 인품을 갈고 닦기 위해 공부를 하였지만 오늘날의 학자는 다른 사람으로 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공부를 한다.” 와 같이 해석해 볼 수 있겠다. 그런데 필자의 생각이 공자와 좀 다른 점은 자신을 갈고 닦아 나오는 빛으로 세상을 결론적으로 위하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문을 하는 동안에는 목적이지만 결과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어야 학문을 하는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필자가 교육학 관련 공부를 좀 하면서 내린 결론은 좀 다르다. 사람이 공부를 잘한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성적표가 A+를 받는 것이 아니고 올바른 관(觀)을 형성하는데 있다고 본다. 한 발 더 나아가서 공부를 한 사람은 긍정적인 자아관을 형성해야 한다고 본다. 비록 성적표가 A+가 나왔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긍정적이지 못하고 부정적인 사람이 되었다면 그는 교육을 잘 못 받은 것이고 그 사람을 공부를 잘못한 것이 되는 것이다.
미국의 성공한 사업가 카네기가 젊은 시절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실의에 찬 어느날 빌딩과 빌딩 사이의 네온사인을 보고 용기를 내어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즉 American의 앞 글자는 보이지 않고 뒤에서 네 글자 ‘ I CAN“ 만 보였다고 한다. 즉 “나는 할 수 있다.”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는 것이다.
일화 같은 이야기지만 수긍이 가는 것은 긍정적인 사람은 본인이 바꿀 수 없는 것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본인이 원하는 것을 생각하며, 어떤 상황에서든지 좋은 것만을 보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각은 무한한 에너지를 갖고 있는 것 같다. 된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간절하게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은 일들이 이루어지는 경험을 우리는 가끔 체험하기 때문이다. 원효대사도 “ 일체유심조(一體唯心造) 이 세상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다렸다.” 라고 하지 않았던가?
만일 학교 성적이 좋지 않다하더라도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이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 될 것이다. 긍정은 곧 행복한 삶으로 들어가기 위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필요한 기업가 정신의 소유자 일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시니어들이 추구하는 배움의 자세는 돈보다는 가치 지향적이어야 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즐기면서 잘 할 수 있도록 그리고 국가와 사회에 도움이 되는 그런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런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항상 준비를 해야 하며 끈기 있게 포기하지 않고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퇴직 후 양재천을 자주 걷는다. 아내와 함께 걷기도 하고 때로는 혼자서 걷기도 한다. 시간에 구속받지 않고 자유스럽게 산책할 수 있어 좋다. 양재천은 철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6월이면 화사하던 봄 꽃 들은 자취를 감추고 연초록 나뭇잎은 싱싱한 푸르름을 더해간다.
6월에는 우리 가족에게는 큰 행사가 두 개있다. 어머니의 기일이 있고 둘째 동생이 회갑을 맞이한다.
어머니는 당뇨와 암으로 16년 전 6월에 68세로 돌아가셨다. 요즘 같은 장수 시대에 칠십도 넘기지 못하신 어머님은 우리 가족에게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꽤 시간이 지났건만 우리 형제끼리 모여 술 한 잔 할 때면 막냇동생을 울리는 것은 간단하다. 동생이 취할 때쯤 어머니 이야기만 꺼내면 보고 싶다며 큰소리로 운다. 오십이 넘고 대기업의 임원으로 있건만.
세브란스 암센터, 원자력 병원 검진 결과 너무 늦었다는 결론이 내려져 항암치료를 포기하시고 어머님이 고향집으로 내려가시기로 결정하시던 그날 ‘그만 내려가자’ 고 아버님이 하시던 그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후 어머니는 5년을 더 사셨다. 고향집에서 고통의 나날이었지만 그래도 친구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생을 마감하셨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2년이 지나지 않아 아버님도 어머님 곁으로 가셨다.
이제 세월이 흘러 동생이 회갑을 맞이해 잔치를 한다고 한다.
호텔에서 가족들을 초대해서 음악회를 열 계획이다. 노래방 반주기에 맞춰 동생은 색소폰을 연주하고 우리 형제들은 부부 단위로 노래를 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날 부를 노래 곡목을 미리 제출하라고 한다. 색소폰 반주를 해주기 위해서다. 동생은 퇴직 후 색소폰을 배운다고 아파트에 방음시설을 갖추고 몇 년을 연습하더니 이제 프로가 되었다.
우리 부부는 그날 댄스를 하려고 한다. 지난해 내가 라틴 댄스 차차차를 배워 몇 달을 집에서 아내와 함께 연습한 적이 있어 이번에 그 실력을 뽐내보려 한다.
사실 나도 4년 전 회갑을 지냈지만 잔치를 하긴 쑥스러웠다. 그래서 아내와 유럽 여행을 하고 형제들과 간단히 식사를 했다. 팔순을 넘긴 삼촌도 계시는 데 거창하게 잔치를 한다는 것이 좀 어색했기 때문이다.
동생은 나와 성격이 달라 잔치를 제법 제대로 할 모양이다. 아무리 장수시대라 해도 회갑이란 인생에서 의미가 있는 날이긴 하다. 아이들은 다 자라 품을 떠나가고 직장에서 퇴직을 하고 제대로 홀가분하게 제2의 인생을 설계할 시점이다. 회갑을 지나니 인생이 뭔지 좀 알 것 같기도 하다. 시간이 소중하다는 것도 안다.
내 나이도 어느덧 60중반이 되어 며느리도 보고 손녀가 생겨 할아버지가 되었다. 인생은 다 때가 되어야 깨닫게 되나 보다. 손녀 아이가 자라는 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깨닫는다. 보자기에 싸여 태어나 업치고, 일어서고, 걷고, 말을 배우는 과정을 자세히 보면서 너무 신기하고 귀엽다. 아들과 딸을 다 키웠건만 그때는 어떻게 키웠는지 모르겠다. 생명의 신비와 핏줄에 대한 애정이 이렇게 소중하게 다가올지 몰랐다.
가끔 아들과 며느리, 딸 우리 가족이 다 모여 식사하는 날이 더없이 행복하다. 작은 일이지만 이러한 일상생활 속의 소박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한다. 이것이 치열하게 살던 젊은 날과 달라진 점이다.
유월에는 아내와 제주도 서귀포 여행을 간다. 제주도를 몇 번 다녀오긴 했지만 이번 여행은 별다른 의미가 있다. 제주도 공무원 연금공단 강의가 있어 함께 가기로 한 것이다. 일과 여행을 동시에 하는 의미 있는 일이다. 내가 강사가 되어 내가 먼저 경험한 소중한 것들을 후배 시니어들과 나눌 수 있어 기쁘다.
직장생활의 오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생 이 막을 준비하는 데 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내려놓고 가벼이 해야 자유스러워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새로 준비하고 끊임없이 학습을 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유월을 맞이하며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는다.
김원곤(金元坤·63) 서울대 의대 흉부외과 교수는 독특한 이력들을 갖고 있다. 국내 굴지의 대학병원 교수라는 것도 충분히 화제가 될 수 있는 이력이지만, 동시에 열정적인 미니어처 술병 수집가이며 영화광이기도 하다. 얼마나 그 취미를 파고들었는지 미니어처 취미는 ‘닥터 미니어처의 아는 만큼 맛있는 술’, 영화 취미는 ‘영화 속의 흉부외과’라는 책으로 만들어졌다. 그는 또한 소위 말하는 ‘몸짱’으로도 유명하다. 환갑을 앞두고 1년 동안 몸 만들기에 매진한 그는 세미누드 사진집까지 펴낼 정도로 자신을 가꿨고, 중년을 위한 몸 만들기 책도 펴냈다. 쉬지 않고 스스로를 단련하고 있는 그가 다음으로 시도한 영역은 4개 외국어다.
그는 50세의 나이에 일본어, 중국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4개 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놀랍게도 4개 외국어능력시험의 고급 과정에 단 한 번에 합격했다. 이 정도면 사람이 좀 불공평하게, 그러니까 김 교수가 어떤 특출한 자질을 갖고 태어나서 그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러나 김 교수는 그런 생각이 말도 안 된다고 말한다.
“저는 제가 언어력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고 살았어요. 우리 집에서는 그런 공부를 한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영어 알파벳 선행학습 한 거하고 서양 사람 얼굴을 AFKN에서 본 게 제 어린 시절 외국어와 접촉했던 전부예요. 그러니까 대학 졸업 전에는 어학 관련해서는 접한 게 없습니다.”
더구나 김 교수는 콤플렉스까지 있었다. 바로 자신의 사투리 발음에 대한 것이다.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 의욕적으로 한글 교육 정도는 내가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가 돼서 한글을 가르치고 받아쓰기 테스트를 했는데, 받아쓰기가 영 엉망인 거예요. 막 야단을 쳤죠. 그런데 아이가 ‘아빠가 발음하는 대로 썼다’ 하는 겁니다. 그 이후로는 뭐 아이에게 한글 교육 같은 거 안 했어요. 지금도 영어의 p 발음과 f 발음은 구분하기 힘들어요.(웃음)”
그가 50대가 넘어서 외국어 공부를 시작한 것 자체가 굉장히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그가 50세가 되었을 때 주5일제 제도가 시작되면서 전에 비해 여유 시간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나중을 생각해서 후회 없이 한 가지를 해보자고 다짐했다고 한다. 영어 외의 제2외국어를 찾다 보니 가장 만만한 게 일본어였다.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인생에 후회가 없을 일을 한번 해보자
“운동이나 외국어, 다 어렵죠. 운동도 그렇고 외국어 공부도 그렇고 공통적인 특징은 자기가 아무리 열심히 해서 궤도에 올려놨다고 해도 잠깐 게을리하면 쭉 떨어진다는 거예요. 멈춘 상태로 그대로 가는 게 아니라는 게 무서운 거죠. 학원에 다니다 보면 그런 사람들을 수없이 봐요.”
그는 특히 전업으로서, 혹은 생활에 도움이 되는 수단으로서의 공부가 아닌 취미로서의 공부는 더욱 어렵다고 말한다.
“그건 한 번 시작하면 끝이 없는 걸 뜻하는 거예요. 올림픽을 목표로 하거나 대회가 있으면 그러한 구체적인 목표에 매진하면 되지만 취미 생활로 공부를 하면 목표가 있을 수 없죠. 그러니 평생 해야 한다는 건 어렵죠. 먹고살 일도 아니고. 열심히 하면 수입이 보장되는 일도 아니잖아요? 얻을 수 있는 건 자기만족과 자기발전이란 건데, 그 외에는 사실 동기 부여가 없는 셈이죠. 그게 힘든 거죠.”
하긴 그렇다. 취미로서의 공부란, 아무도 옆에서 강요하거나 격려하지 않는다. 공부하는 사람 본인은 그냥 안 하면 그만인 일이다. 하지만 김 교수는 결코 그만두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을 드러냈다.
“다 좋은 거잖아요. 공부나 운동이나.”
외국어에서 문법과 단어가 중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
김 교수가 자신의 외국어 정복기를 묶어 책으로 만든 ‘파란만장 중년의 4개 외국어 도전기’에서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문법과 단어를 뼈대와 근육으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일상 회화의 중요성이 계속 강조되는 근간의 외국어 공부 흐름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우리 시절에는 해외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어요. 외국인을 만날 기회도 이유도 없었죠. 그러니 오로지 가르치는 게 문법이었어요. 현실에서는 말 한마디 못하는 게 사실이었죠. 그런데 시대가 바뀌니 말하는 게 중요하다, 해서 일상 대화가 강조됐습니다. 사실 말하는 건 중요하죠. 그런데 한국 사람끼리를 생각해 보세요. ‘밥 먹었니.’ ‘날씨 좋다.’ 우리나라 사람들 일상 대화를 보면 늘 그런 식으로 얘기합니다. 그렇게 단순히 얘기해도 일상생활에선 불편이 없죠. 그런데 같은 사람을 계속해서 만난다고 생각해 보세요. 만날 식당에만 가는 것도 아니고, 할 줄 아는 말이란 게 밥 먹고 날씨 좋다고 말하는 것뿐이라면 문제가 있죠. 심층적인 얘기도 좀 하고 정치 사회 현안에 대해 얘기도 하려면, 단어를 모르면 할 수 없어요.”
외국인이 우리 문화권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을 설명하려면 그걸 표현할 수 있는 바탕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외국인에게 공자에 대해 설명해 주려면 공자를 표현할 수 있는 사회적, 철학적 단어들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김 교수는 문법이나 단어의 바탕이 좋은 사람은 외국어 능력 발전에 가속도가 붙지만 회화만 할 줄 아는 사람은 역으로 발전이 잘 안 된다고 지적했다.
한자를 많이 안다고 중국어를 잘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쉽게 배울 수 있는 언어는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일본어다. 그런데 시니어들 중에는 한자를 많이 알고 있다고 하여 중국어도 일본어만큼 배우기 쉬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한자를 많이 알고 있으면 중국어를 배우는 데 조금 도움은 될 수 있지만 잘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중국어에서 특히 어려운 건 성조예요. 우리나라는 억양이 달라도 성조가 없으니까 다 알아듣는데, 중국은 성조가 없으면 아예 못 알아들어요. 그리고 어순이 우리와 완전히 다르죠.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쓰는 한자 대부분이 중국계 한자와 다르다는 거예요.”
우리나라가 받아들인 현재 쓰고 있는 한자의 상당수는 일제 당시에 일본에서 만들어진 일본식 한자다. 애초에 중국과 다를 수밖에 없는 데다, 중국은 따로 간체자라고 하는 새로운 한자 체계를 조직하여 쓰고 있다. 아무리 한자 지식이 많다고 해도 현재의 중국에서 통용될 수 있을 리가 없다.
김 교수는 프랑스는 유럽 언어 중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배우기에 가장 어려운 말이라고 소개했다. 특히 발음이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국어를 배우는 사람들 사이에선 중국어 성조가 더 어려우냐, 프랑스어의 발음이 더 어려우냐 하는 비교가 있을 정도라고 한다.
“사실 프랑스어의 문법은 크게 어렵지는 않아요. 그런데 우리는 영어로 자란 세대니까, 영어와 다르면 무조건 어려운 거죠. 그리고 스페인어는 발음은 우리나라 사람 입장에서 쉬운 편이긴 합니다.”
진짜 공부는 일상 속에서 한다
김 교수는 올해 우리 나이로 63세다. 그는 자신도 나이를 거스를 순 없으며 젊었을 때보다 기억력이 쇠퇴했을 것이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런데 학원을 가면 젊은 친구들이 많은데 단어 암기에서 제가 그들에게 뒤진다는 생각은 안 하거든요. 자기의 타고난 능력에 대해선,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변명하기가 좋아요.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암기는 가장 효과가 있는 시점에 반복하고 자주 반복하는 게 좋아요. 학원을 마치고 나오면 해방이다, 이러면서 핸드폰으로 게임하고 영화를 보고, 소주 한 잔을 하든지 그러면, 암기가 잘 안 될 수밖에 없어요. 저는 지하철을 이용하는데 타고 가면서 배운 걸 보고, 자기 전에 또 봅니다. 거리를 가면서도 공부할 것들이 많아요. 간판에 적힌 글자들만 봐도 뭔가 궁금해지면 바로 스마트폰으로 검색하여 공부하죠. 그래서 시간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라고 생각해요.”
공부를 마치고 나서 바로 짧은 시간에 반복해서 다시 복습을 하는 것, 그리고 자투리 시간을 내서 공부를 하는 그의 태도는 공부법에서 말하는 복습의 중요성을 일깨우게 만든다.
“나이 든 사람들과 공부를 해보면 그분들 나름대로 한계가 있긴 해요. 그러나 다 극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머리 중심 노익장의 시대가 올 것
김 교수는 ‘나이 많은 몸짱’이란 개념도 거의 10여 년 전부터 시작해서 이제는 꽤 보편화된 개념이 됐다고 진단했다. 아직도 스페셜하긴 하지만. 그 자체가 화젯거리가 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는 것이다.
“몸짱은 그렇다 칩시다. 사람들이 이제 다 그런 개념을 갖게 됐으니까. 그런데 머리를 쓰는 것은 어떤가요? 나이를 먹은 사람의 특성상 머리를 쓰는 게 몸을 쓰는 것보다 더 맞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우리가 노인이 돼서 머리가 안 돌아간다고 말하는 건 오래된 축적된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하는 것보다는 기억력과 관련된 문제예요.”
김 교수는 공부에 뜻이 있는 시니어들이 막상 해보려고 하면 자꾸 기억이 안 나게 되니 좌절감을 느끼고 ‘나는 안 된다’라고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몸짱’이 나이 많은 사람에게 정립이 된 것처럼 자연적으로 머리를 바탕으로 하는 노익장이 주목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생각해 보면, 먹고살기 위해서는 그걸 처절하게 견뎌야 하는 몸이 바탕이 되어야 했으니 몸이 먼저 주목받았던 게 당연합니다. 사실 머리는 당장 먹고사는 것과는 관계가 없죠. 그래서 머리와 관련된 기능은 쉽게 퇴화하고 유지하는 게 어려운 걸 수도 있어요.”
은퇴, 그 자체를 잘 모르겠는 마음
나이를 잊은 것처럼 에너지가 넘치는 김 교수에게 은퇴 후의 삶이란 어떻게 다가올까? 그는 그 질문에 대해 ‘잘 모르겠다’라고 대답했다. “세상이 너무 변했어요. 요즘은 나이가 들어도 너무도 건강하게 됐어요. 은퇴 생활이 60대에 적용된다고 보면, 남들은 일하는데 은퇴한 자신은 놀고 있으면 능력이 없어 보이는 자괴감이 들 수도 있는 그런 세상이 된 거죠. 그래서 저는 은퇴 후라는 게 ‘인생을 열심히 살아보자’인지, ‘유유자적하게 살자’는 것인지 모르게 됐어요. 사회적으로 정립이 안 된 걸 개인이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죠. 내년에는 양상이 또 바뀌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서 정말 어려운 문제예요.”
의학의 발달과 사회적 진화로 인해 기존의 정년 개념은 이제는 무의미하게 됐다. 이제 은퇴라는 말은 아직도 충분히 일할 수 있는 상당수의 시니어들에게 낯설게 다가오는 말일 수도 있다. 김 교수가 말하는 은퇴에 대한 개념을 들으며 느낀 것을 많은 시니어들도 동감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넓은 공부의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다
술, 영화, 운동, 외국어까지 섭렵했다. 이제 다른 영역으로 김 교수가 도전해보고 싶은 게 있을까?
“사실 지금까지 한 것들도 도전을 위해서 한 게 아니고 우연히 한 거죠. 우연히 시작한 걸 버려선 안 된다, 한때의 추억으로 남기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어요. 앞으로의 욕심이라면 현재 하고 있는 외국어, 운동들로 그 자체 내에서 내가 얼마나 발전할 수 있나를 시험해 보고 싶습니다. 운동은 가시적인 발전에 한계가 있습니다만 외국어는 끝이 없을 거라고 봐요. 커피도 그렇잖습니까? 다 맛있다 하다가도 원산지, 볶는 법 등등을 알게 되면 끝이 없잖아요. 언어도 그런 게 더 없겠습니까?”
그는 나이가 들어도 지금 꾸준히 하고 있는 것들을 잃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언제까지 할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이상 퇴보하는 건 없도록 하고 싶어요. 그 기간이 오랫동안 연장이 됐으면 싶고. 1차 목표는 70세로 하고, 더 좋은 기회가 주어지면 75세로 늘리려고요(웃음).”
“한 번 선택하면 18년을 좌우합니다.” 순간 그의 눈빛이 변했다. 만난 후 내내 온화한 의사선생님의 모습을 하고 있던 그였는데, 이야기 주제가 동물 입양으로 옮겨지자 갑작스레 진지해졌다. “사람을 입양하는 것과 같죠. 개와 고양이 모두 최근 수명이 길어져 평균 18년 정도 사는데, 함께 하는 사람 입장에서도 굉장히 긴 기간입니다. 신중해져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죠.”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박효철(朴孝哲·55) 대표는 국내 최대의 애견 프랜차이즈의 최고경영자이자 진료도 함께하는 대표원장 역할도 하고 있다. 그가 운영하는 동물병원 프랜차이즈 쿨펫(Cool Pet)은 전국에 150여 개 가맹점이 있고, 전국의 롯데마트나 이마트 등 대부분의 대형마트를 선점하고 있다. 이 밖에 호텔이나 놀이터 서비스를 제공하는 반려동물 서비스 전문의 프랜차이즈 위즈펫(Wizpet) 등 그가 론칭한 크고 작은 애완동물 브랜드는 모두 5개나 된다.
수명 얘기가 나오니, 돈벌이만 생각한다면 순환이 빠른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나쁜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지만, 그의 진중한 태도에 얄팍한 이야기는 입 밖에 내지도 못한다.
박효철 대표의 말에 따르면 애완동물, 반려동물 시장은 최근 급속도로 커지며,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고 한다.
“최근 혼자 사는 인구가 늘면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애견인(愛犬人), 애묘인(愛猫人)들이 늘었어요. 최근에는 자녀들과 떨어져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빈자리를 반려동물로 채우려는 시니어들이 늘어났습니다. 동물별 비중을 살펴보면 과거에는 개를 선택하는 인구가 90% 정도를 차지했지만, 최근에는 고양이의 인기가 늘어나면서 20% 이상을 차지합니다. 고양이를 키우는 애묘인들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어, 이 추세라면 30%를 넘는 것도 얼마 남지 않은 상태입니다.”
시니어 중에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인구가 늘고 있는 것은 선진국의 사례에 비춰보면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했다. 특히 일본의 경우 반려동물을 키우는 독신인구 중 70% 정도가 시니어층이라고 한다. 시니어들이 개보다 고양이를 더 많이 선호하는 것도 한국과는 다른 특징이다. 시니어의 반려동물로 선택되는 개와 고양이의 비율은 4대 6 정도다.
생활공간 등의 문제로 망설였던 반려동물의 사육을 이제라도 시작하려는 시니어들에게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 물었더니 의외의 답이 돌아온다. 그의 사업영역인 동물병원이나 관련 매장을 찾아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좋지만, 가까운 지인 중에서 이미 반려동물을 기르고 있는 사람을 찾아 살펴보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다.
“실제 기르고 있는 사람을 찾아 밥은 어떻게 주는지, 훈련은 어떻게 시키는지, 그 외의 관리상 주의사항은 무엇인지 미리 듣고 학습하는 것이 좋습니다. 실제 사육하는 과정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현실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그 이후에 본인이 기르고자 하는 동물의 특징을 공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입양은 맨 마지막 단계입니다. 천천히 해도 늦지 않습니다.”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턱대고 입양을 하다보니 유기견의 증가가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일각에선 유기견의 입양도 캠페인처럼 펼쳐지지만, 사육을 처음 시작하는 초보 시니어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유기견의 경우 몸과 마음을 모두 다친 상태에서 구조되는데, 관련 기관에서 육체적인 상처는 치료해도, 마음의 상처는 그대로 둔 채 입양을 보내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사람의 준비가 몇배 더 필요하다는 것. 실제로 입양된 유기견들이 파양(罷養)되어 돌아올 확률은 절반에 육박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시니어에게는 어떤 동물이 키우기 좋을까? 물론 개인의 취향이 우선시되어야겠지만, 개와 고양이 중에서 선택하라면 고양이가 편하다고 조언한다.
“개는 의존적이어서 항상 곁에서 돌봐줘야 하지만, 고양이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물과 음식만 준비된다면 며칠 동안 집을 비워도 문제없을 정도죠. 배변 훈련도 모래만 준비하면 됩니다. 가르칠 필요가 없죠. 그래서 키우기 편한 쪽은 당연히 고양이입니다. 만약 강아지 중에서 추천하자면 몰티즈나, 요크셔테리어, 푸들, 시추 같은 소형견이 적합하죠. 하지만 인위적으로 몸집을 줄인 아주 작은 견종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건강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최근 반려동물 관련 산업이 확대되면서 관리에 대한 다양한 상품이나 서비스 등이 늘어났지만, 지나치게 과잉보호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박 대표의 설명이다. 너무 병원을 자주 찾거나, 보호에 힘쓰는 것보다는 산책을 하는 등 같이 함께 보내는 시간을 늘리는 것이 더 중요 하다고 설명한다.
“사람처럼 반려동물도 병원을 가 버릇하면 계속 탈이 나게 되어 있어요. 병원은 큰 문제가 없으면 일년에 한 번 정도 예방접종하러 가면 되고, 먹는 것도 그냥 사람 먹는 것을 함께 먹어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인류는 그동안 그렇게 동물들을 키워왔고, 동물들은 그렇게 살아남았으니까요.”
입양할 동물이 결정되고 집에 들이게 되면 가장 중요한 것은 집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라고 조언했다.
“개든 고양이든 한 일주일 정도는 일부러 만지려 들지 말고, 먹이를 줄 때를 제외하고는 내버려 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고 나서 적응이 되면 먼저 가까이 다가올 겁니다. 산책할 때도 목줄을 조금 여유 있는 길이로 맞춰, 가고 싶은 곳으로 따라가는 형태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함께 지내다 보면 상대도 마음을 열게 되고 서로 가까워졌음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반려동물과 함께 지내는 것을 통해 얻는 장점을 박 대표는 ‘교감’으로 이야기했다. 사람과 사람은 말로 교감을 하지만, 사람과 동물은 원초적 감정을 통해 소통하기 때문에 좀 더 근원적인 교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마음의 안정과 위안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일부에선 동물이 수명을 다할 때의 상실감을 우려하기도 하지만, 죽기 전에 동물을 한 마리 더 입양해 충격을 최소화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추천했다. 나이 많은 동물에게도, 그를 잃는 사람에게도 새로운 식구가 힘이 되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는 신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니어가 동물을 키우게 되면, 동물이나 사람의 수명을 고려할 때 평생을 함께하는 셈이니까요. 그래서 반려동물이라는 말 그대로 남은 생을 함께 할 식구를 찾는다는 마음으로 입양에 임해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