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년 개띠입니다.” 어느 모임에서 자신을 소개하는 첫마디다. 개띠의 당당함과 그들의 파란만장한 세월이 그 한마디에 포함되어 있다. 1953년, 전쟁이 끝나고 아기가 많이 태어났는데 그 절정기가 1958년이다. 개띠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뺑뺑이 추첨으로 배정받아 들어갔다. 58년 개띠라는 말은 사회 여러 방면에서 이전 세대와 차별되고, 이후 세대와도 분명하게 구분되어 생긴 용어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운동장에 가득했다. 교실이 모자라 오전과 오후반으로 나뉘었다. 필자는 비 오는 날 잠시 낮잠을 잤다가 오후반 등교가 늦어 엉엉 운 적도 있다. 그 시절은 중학교에 입학하지 못하는 가난한 집 아이가 꽤 많았다. 대부분 도시로 나가 공장에 취직했고, 여자들은 식모살이를 했다. 그러나 형편이 괜찮은 아이들은 과외도 했다. 필자는 학교가 너무 멀어 쌀 두 가마니를 주고 친척집에 머물렀던 기억이 있다.
중학교 때 펜팔을 했다. 단양 골짜기에 사는 소년에게 줄곧 편지를 써댔다. 엄마가 공부에 지장이 있다며 편지가 오면 아궁이에 집어넣곤 했다. 그 일로 엄마에게 대들던 사춘기가 떠오른다. 펜팔은 얼굴도 모르는 누구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냥 누군가에게 솔직한 말을 하고 싶어서 시작한 것 같다.
고등학교 때는 서울에 사는 준이라는 소년에게 편지질을 했는데 아침이 오면 지난밤에 쓴 편지가 너무 유치해서 박박 찢어버릴 때가 많았다. 저 별은 나의 별, 이 별은 너의 별. 별과 달을 자주 글 소재로 써먹었다. 편지를 자주 쓰다 보니 글 솜씨가 좋아져 친구들 연애편지를 대필해주고 옥수수와 고구마를 얻어먹기도 했다.
당시 수학여행을 가면 다른 학교 남학생들이 주소가 적힌 쪽지를 여학생들에게 던졌다. 누구를 지정해서 쓴 쪽지가 아니라 줍는 사람이 그 쪽지의 임자. 그렇게 편지를 주고받다가 결혼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는데 필자가 아는 사람 중에도 있다. 그 부부는 딸이 “엄마 아빠는 어디서 어떻게 만났어?” 하고 물어볼까봐 전전긍긍하며 살고 있다 한다.
“커피 한잔 하실래요?” 누가 뒤를 바짝 따라오며 말했다. 누군가 필자에게 호감을 보이는 게 싫지는 않았다. 그래도 일단은 “왜 이러세요” 하며 튕겼다. 예전에는 대부분 남자가 프러포즈를 했다. 여자가 남자에게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스무 살 봄, 이종사촌과 잘 알던 그는 계속 필자를 따라다녔다. ROTC 복장을 하고 자주 필자 앞에 나타나곤 했다. 그 시절은 주로 남자들이 데이트 비용을 부담했다. 돈이 없을 때는 전당포에 손목시계를 맡기기도 했다. 주로 만나는 장소는 다방이었고, 커피 한 잔을 시켜 둘이서 나눠 먹기도 했다. 가끔 이종사촌 커플과도 만나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눴다.
필자는 예술을 좋아했다. 한눈에 그에게 반해서가 아니라 외로움 때문에 가까워진 것도 같다. 만남은 운명이다. 필자는 말라버린 우물가에 누워 있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았다. 평생 동안 그 순간이 그 낯선 장면이 자주 떠오른다. 그가 속내의를 사서 아버지를 찾아왔던 일, 아버지와의 어색한 만남, 죄책감에 당황스러워하던 그의 표정. 아버지는 서너 달 후 뇌졸중이 와서 길에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돌아가셨다. 그는 장례식에 참석했다. 필자는 숙명으로 결혼을 받아들였다.
아버지의 오토바이를 판돈으로, 대우에서 나온 컬러텔레비전과 냉장고를 샀다. 컬러텔레비전은 그 해 혼수품으로 처음 나온 제품이었다. 시어머니는 밤색 모직코트 옷감을 혼수함에 넣어주었다, 양장점에 가서 모직바지와 코트를 맞춰 입었다. 지금도 그 기억이 남아 옅은 밤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시어머니의 얼굴이 자꾸 떠오르기 때문이다.
신혼여행을 가야 하는데 입고 갈 마땅한 옷이 없었다. 그 시절의 결혼 예복은 긴 소매 옷, 앞이 막힌 구두가 상례였다. 신혼여행을 안 가면 남들 보는 눈도 있고 후회도 될 것 같아 아산 현충사로 갔다. 하룻밤 있었나.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젊은 날의 쓸쓸함이여! 그때 그 얇은 마음이 얼마나 외로움에 떨었을까.
결혼을 후회하지 않으려 무척 애를 썼다. 7남매의 맏딸로 태어난 필자는 늘 동생들에게 모범이 돼야 했다. 지금은 홀가분하다. 58년 개띠 인생. 이제부터는 자존감 회복에 중점을 두고 싶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스스로를 사랑하자. 그래야 상대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더불어 살기 위해 더 노력해야겠다.
여행에 대한 정의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이 세상에 살면서 다른 세상을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여행 아닐까. 이왕이면 평소 사는 곳과 다른 곳일수록,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일수록 완벽한 여행지가 되는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가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 있지. 하지만 누군가는 별을 보고 있다네”라고 했던가. 살면서 꼭 한 번은 밤하늘에 펼쳐지는 신비로운 빛을 만나보고 싶다. 그 황홀한 광경을 보고 나면 우주는 더욱 위대해 보일 것이고 우리네 삶도 조금은 숭고하게 느껴질 것 같다.
최고의 오로라 관측소, 옐로나이프!
전 세계적으로 오로라를 볼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노르웨이, 핀란드, 아이슬란드 같은 북구의 나라와 미국 알래스카, 캐나다 화이트호스 등을 꼽을 수 있다. 그중 옐로나이프는 나사(NASA)가 지정한 오로라 관측 확률이 가장 높은 곳이다. 여름에도 오로라를 볼 수 있지만 11월에서 4월 사이 밤이 긴 겨울이 가장 좋다.
북극광(northern light) 혹은 극광이라고도 불리는 오로라는 라틴어로 ‘새벽’을 뜻한다. 태양에서 방출된 플라스마 입자가 자석 성질을 가진 지구의 극지방 주변을 둘러싸면서 붉은색이나 녹색, 파랑, 노랑, 분홍 등 다양한 색의 자기 에너지 띠로 나타나는 것이다.
엘로나이프로 향하는 프로펠러 비행기 안. 일본인들과 중국인들, 영국 등지에서 온 유럽인들, 그리고 캐나다인처럼 보이는 가족들도 보인다. 일본은 오로라 여행이 대중화되어 일반인과 신혼여행객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 오로라가 뜰 때 아기를 가지면 그 아기가 천재가 될 확률이 높다는 믿음 때문이라지만, 혹한과 어둠을 뚫고 세상에서 가장 보기 어려운 신비로운 빛을 함께 경험하는 일은 두 사람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순간을 선사할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갑자기 비행기 안에서 엷은 환호가 터져 나온다. “저기… 저기… 오로라다.” 반대편에 앉은 승객이 창 쪽을 가리키며 소리를 지르자 기내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창밖으로 향한다. 나도 벌떡 일어나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깜깜한 하늘에 두 줄기 오로라가 어른댄다.
“아~ 저것이 말로만 듣던 오로라구나.”
순간 가슴이 콩닥콩닥 두방망이질하기 시작했다. 오로라, 그것은 마치 바닷속의 돌고래를 보는 것과 같다. “고래다!” 하고 소리치는 순간 사라져버리는 신기루 같은 존재 말이다.
오로라 빌리지를 통하면 모든 예약이 하나로
오로라를 보러 옐로나이프를 간다면 오로라 빌리지(Aurora Village)를 통하는 것이 가장 편리하다. 한국에서 비싸기로 유명한 캐나다 구스는 영하 50도까지 내려간다는 이곳 옐로나이프에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 평소엔 입을 일이 없기에 오로라 빌리지에서 대여해준다. 방한 점퍼와 바지, 마스크, 두터운 신발과 장갑까지 착용하고 나면 마치 우주복을 입은 듯한 기분이 든다. 이제 저 하늘을 둥둥 떠다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옐로나이프 오로라 사진마다 등장하는 아름다운 원주민 텐트 ‘티피(teepee)’ 안엔 따뜻한 화로가 있고 간단한 수프와 빵, 차와 커피, 코코아 등이 준비되어 있어 장시간 오로라 사진을 찍거나 관측하다 꽁꽁 언 몸을 녹일 수 있다.
캄캄한 어둠속을 달려 오로라 빌리지에 도착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밖에서 “스고이”, “스고이”라는 일본말과 외국인들의 환호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뛰어나가 사람들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과연 지상에서 보는 오로라는 어떤 모습일까? 정말 사진에서처럼 그렇게 환상적일까? 깜깜한 밤하늘에서 처음엔 희미한 듯하더니 점점 더 강렬하게 하얀 빛줄기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삼각대 위에 카메라를 올려놓고 20초. 마침내 신의 영혼인 듯, 천상의 빛인 듯, 신비롭고 영험한 기운이 내게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잊지 못할 오로라 여행이 시작되었다.
낮 동안의 신나는 북극 체험
전날 밤 오로라를 보고 숙소에 돌아온 시각은 새벽 3시. 이곳에서의 일정은 밤에 오로라를 보기 위한 기다림으로 채워진다. 바쁠 것 없는 아침. 늦잠을 자고 일어나서 내다보는 창밖 풍경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영화 속 엘사가 살던 ‘겨울 왕국’ 그 자체였다.
밤엔 매일 오로라를 관측하고, 낮엔 다양한 북극 체험을 했다. 얼어붙은 그레이트슬레이브 호수를 걸어보는 아이스로드(ice road) 체험, 시베리안 허스키를 타고 하얀 숲을 달리는 개썰매 체험, 이누이트 원주민들이 신던 스키를 신고 산속을 트레킹하는 스노슈잉(snow shoeing) 체험이 대표적이다. 이런 액티비티한 경험은 어디서도 해볼 수 없는 이색 체험들로 반드시 해보기를 권한다. 노스웨스트 의회 청사나 박물관에 들러 이곳의 역사를 알아보는 것도 흥미롭다. 노슨이미지(Nothern Image)에서는 원주민이 직접 그리거나 만든 예술작품도 감상할 수 있다.
마지막 밤, 오로라를 보며 신에게 감사를
드디어 떠나기 전 날 마지막으로 오로라를 보러 가는 길, 호텔 로비의 컴퓨터 화면에 나타난 밤 9시의 기온은 영하 33도, 체감온도는 영하 40도!!!!! 실제로 체험해보기 전엔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 기온이다. 그러나 언제나 상상이 더 무서운 법. 막상 가보면 별것 아니다. 오로라 빌리지에 도착하니 하늘에 별이 총총했다. 오로라도 별이나 달처럼 날이 맑을수록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다. 티피 안에서 코코아를 마시고 있을 때 밖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4박 6일의 여행기간 중 가장 눈부시고 화려한 오로라가 나타나줬다. 영하 40도의 혹한과 어둠을 뚫고 마지막 날 가장 아름다운 신의 영혼을 만날 수 있음에 감사의 마음이 북받쳐 올라왔다. 좀체 보기 힘들다는 핑크오로라도 볼 수 있었다. 마시초 갓(Mahsi-cho, god)! 원주민어로 “신이시여, 감사합니다”라는 의미다. 사진 속에서만 보던 ‘오로라의 아우라’를 실제로 체험하고 나니 오랫동안 꿈꿔왔던 소원 하나를 이룬 느낌이다. 모든 여행은 눈을 뜨고 꾸는 꿈이라 했는데, 이번에야말로 진정한 꿈을 꾼 듯했다. 지구별이 아닌 다른 행성으로 다녀온 꿈 말이다.
travel tips>>
항공편>>인천-밴쿠버-캘거리-옐로나이프로 연결된다. 밴쿠버에서 옐로나이프로 바로 가는게 없고, 캘거리를 거쳐야 하므로 비행기를 최소한 세 번을 바꿔타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가는데만 하루가 소요되는 힘든 길이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
오로라 빌리지 예약 시스템>> 옐로나이프 여행의 핵심은 오로라빌리지이다. 모든 여행 시스템은 오로라빌리지를 중심으로 매우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개별여행자는 오로라 빌리지를 통하면 방한복 대여 및 오로라관측에 대한 일체의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다.
Aurora village (www.auroravillage.com)4720 Northwest Territories Ltd. Yellowknife, NT, CANADA /Tel 867-669-0006
추천숙소>>
옐로나이프엔 혹한과 어두음을 피해 안락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숙소가 다양하다. 필자의 경우, 더운 나라에 갈때엔 저렴한 게스트하우스 등을 이용하는 편이지만 이곳은 혹한의 환경이라 가장 좋은 익스플로러 호텔을 선택했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호텔급에서부터 inn, B&B, 게스트하우스, 로지, 콘도스타일까지 다양하므로 취향에 맞게 선택하면 된다. 숙소에 대한 더 많은 정보는 시내 중심의 관광 인포메이션을 제공하는 비즈니스 센터에서 얻을 수 있다.
Explorer Hotel 익스플로러 호텔 엘리자베스 여왕도 묵고 갔다고 해서 로비에 사진도 걸려있는 가장 럭셔리한 호텔이다. 그날그날의 일기예보는 물론 친절하고 품격높은 서비스를 제공하며 다운 타운에 위치하고 있어 접근성이 용이하다. 로비와 방에서 무료인터넷도 가능하다. (www.explorerhotel.ca) P.O.Box 7000, Yellowknife, NT, CANADA Tel 867-873-3531
추천레스토랑>>
극지방에 왔으니 다른 곳에서 먹어볼 수 없는 특이한 음식을 먹어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된다. 익스플로러 호텔 1층에 있는 트레이더스 그릴(Trader's Grill) 레스토랑은 극지방에서 잡아올린 신선한 해산물과 원주민 전통요리인 순록 스테이크를 맛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늑하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
Address 4823-49th Avenue, Yellowknife, NT, CANADA
Tel 867-873-3531
추천 준비물>>
오로라 사진은 핸드폰으로는 잘 찍히지 않는다. 일정시간 이상 노출을 해야 하므로 오로라 사진을 찍고 싶다면 트라이포드(삼각대)와 수동설정이 가능한 카메라와 광각렌즈(18mm이상)를 준비해가는 것이 좋다.
★여행경비400만원 내외
58개띠들이 하면 유행이 된다. 폭발적인 우리 사회 인구증가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58년생들은 사회 변화와 유행을 주도한, 지금으로 치면 ‘완판남’·‘완판녀’로 부를 수 있는 세대다. 그들의 문화적 파괴력은 굉장했다. 여러 분야 중 특히 여행과 관련한 58개띠들의 문화주도도 눈여겨볼 만하다. 빈궁에서 벗어나 경제성장의 혜택을 보기 시작한 이들은 다양한 여행을 경험해나갔다.
1978년. 58개띠들이 만 스무 살이 되던 해. 당시 8월 17일자 경향신문에는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실린다. ‘바캉스 파장 … ‘고요’ 되찾는 산하, 연인원 5천만 기록’이라는 제하의 기사는 당시 여름휴가를 위해 산과 계곡, 바다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몰렸는지를 증언한다. 재미있는 내용 중 하나는 작년 대비 피서객이 40% 늘었다는 대목이다. 예년보다 높은 기온이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성인이 된 58개띠들이 피서객 증가에 한몫하지 않았을까.
당시에도 제주도는 관광지로 인기가 좋았다. 평소 600석 내외로 운영되던 서울-제주 간 항공편은 피서기간에는 1000석 이상으로 증편돼 관광객을 실어 날랐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탓인지 다음 해인 1979년, 철도청은 고급여행을 원하는 관광객을 위해 새마을호 객차 확충을 서둘러 진행했다.
물론 58개띠들이 여행 보따리를 맘껏 싸기 시작한 원인에 경제성장의 수혜도 빼놓을 수 없다. 1977년은 우리 경제의 상징적인 시기였다. 1인당 GDP가 처음으로 1000달러를 돌파해 1034달러를 기록했고, 수출 역시 최초로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배고픔은 점차 잊히고 있었다.
가장 원하는 신혼여행지는 ‘제주도’
그렇다면 58개띠들의 신혼여행은 어땠을까. 통계청이 2011년 발표한 ‘최근 30년간 초혼자료 분석’에 따르면, 1981년의 남성 초혼 연령은 26.4세, 여성은 23세로 나타났다. 이를 바탕으로 유추해보면 58개띠들의 결혼이 이뤄진 시기는 이들이 23세에서 26세를 지낸 1981년에서 1984년 사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1982년 5월 27일자 동아일보에는 당시 젊은이들의 신혼여행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기사가 등장한다. 한국갤럽이 18세 이상의 남녀 121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가장 많이 다녀온 신혼여행지는 부산(21.6%), 경주(12.6%) 순이었다. 아무래도 비용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제주도는 3위(12.2%)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재미있는 것은 순위에 자리 잡고 있는 ‘서울’의 존재다. 당시 지방 거주민들에게 서울은 충분히 매력 있는 여행지였다. 신혼여행으로 서울을 선택한 이들은 5.4%나 됐다.
가고 싶은 신혼여행지로는 역시 제주도(46.5%)가 가장 많이 꼽혔고, 당시 왕래가 여의치 않았던 외국을 꼽은 이들도 13.1%나 됐다. 3위는 설악산(11.8%)이 꼽혔는데, 다녀온 여행지에서 7위에 불과했던 것에 비하면 높은 수치다. 설악산이 관광지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말. 1978년 진갑을 맞은 박정희 대통령이 선택한 관광지도 개발이 막 시작된 설악산이었다.
해외여행 자유화로 ‘천지개벽’
58개띠가 해외 땅을 밟은 것은 ‘여행’보다 ‘일’이었다. 물론 해외 출장이라고 쉬운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 고위직 공무원이나 주요 기업의 임원이 해외 출장이라도 나가면 모두 기삿거리가 됐다. 그만큼 해외 방문은 쉽지 않았다. 출장이 목적이어도 회사의 매출 규모가 낮은 기업은 여권을 받기도 어려웠던 시절.
중동에서 일어난 건설 붐은 58개띠들의 해외 구경의 좋은 구실이 됐다. 굳이 따지자면 58년생은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말까지 일었던 중동 붐의 막차를 탄 세대다.
1985년 해외로 나간 한국인은 약 48만 명이었다. 일본과 미국을 방문한 이가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사우디아라비아가 많았다.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른 결과다.
서울올림픽 개최 다음 해인 1989년이 되면서 전 국민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뤄졌다. 1983년만 하더라도 50세 이상인 사람이 관광예치금을 200만 원 이상 맡겨야 관광여권을 받을 수 있었지만 매년 대상 연령이 낮아지다가 1989년에 완전 자유화가 이뤄졌다.
해외여행 자유화는 우리 사회의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1990년부터 신문 지면에는 ‘배낭여행족’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고, 즐겨 찾는 신혼여행지는 제주도에서 태국이나 필리핀으로 바뀌었다.
세운상가 외제장사 아시나요?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 해외 출장 근로자들의 부업 중 하나는 바로 소니와 산요로 대표되는 일본 가전제품을 내다 파는 일이었다. 이들이 면세점 등에서 구매해 들여온 카메라, 오디오, 전기밥솥 등은 세운상가 상인들에게 늘 환영받았다.
그러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뤄지면서 소비자들이 해외에서 직접 물건을 사갖고 들여오는 문화가 확산됐다. 이런 문화의 아이콘으로 ‘코끼리 밥통’이 있다. 일본 조지루시 전기밥솥은 밥맛이 좋다고 입소문을 타면서 고소득층 사이에서 필수품 대접을 받았고, 점차 대중화되어갔다.
매일경제신문은 1992년 광복절 ‘일제선호 불치병인가’란 기사를 통해 당시 상황을 소개했다. 일본 버블경제의 거품이 꺼져가면서 가전제품 상점가가 몰려 있는 아키하바라역 인근 가게들은 불황을 겪고 있지만, 한국 관광객들이 너도나도 밥통 등 가전제품을 사주는 덕에 상권이 유지되고 있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다. 최근 중국 관광객 유커들이 백화점에서 한국산 밥통을 사재기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당시 58개띠들의 나이는 34세였다. 김포공항 입국 수속 행렬에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지 않았을까.
당시 신문에 게재된 해외여행 광고를 보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가도 일본, 미국, 동남아로 지금과 차이가 나지 않았고, 도쿄 4일 여행상품이 70만 원 선, 필리핀 4일 여행 상품이 48만 원 선으로 가격도 비슷하다. 다만 다른 부분이 있다면 중국 관광의 유무다. 58개띠들이 중국 관광지를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1994년 중국여행 전면자유화 이후부터다.
[추억 한토막] 대전역 가락국수 맞먹는 앵커리지공항 우동의 추억
경부선과 호남선이 지났던 대전역. 선로가 붐비고, 대기시간이 길었던 탓에 대전역 승강장의 가락국숫집은 승객들이 꼭 들러야 하는 명소가 됐다. 비행기 여행과 관련해서도 대전역 가락국수와 비슷한 추억의 공항이 있다. 다소 엉뚱하게도 미국 알라스카 앵커리지공항이 그곳이다.
대한항공이 1975년 서울-파리 여객노선을 개설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과 유럽 노선이 늘기 시작하면서 앵커리지 공항은 상당수 여객기가 들러야 할 경유지였다. 당시 여객기들의 비행거리가 짧았고, 냉전으로 인해 소련 영공을 지날 수 없었기 때문에 필연적인 절차였다. 이런 사정은 일본도 마찬가지. 버블시대 해외 여행객이 폭발적으로 늘었던 일본의 항공사들도 이곳을 들러야 했다.
환승보다는 급유의 목적이 컸기 때문에 앵커리지에서 머무는 시간은 짧지 않았다. 때문에 당시 해외 출장이 잦았던 상사맨들이나 항공사 관계자들은 당시 앵커리지의 추억을 기억한다. 항공사 승무원으로 근무했던 안영희 동년기자는 “한 시간은 있어야 했는데 승객들이 딱히 할 만한 것이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면세점들이 장사가 잘됐죠”라고 설명한다.
이 공항에서 인기가 가장 높았던 매장은 바로 ‘우동’. 해외 왕래가 잦았던 한국과 일본의 ‘밀리언 마일러’ 사이에선 반드시 거쳐야 할 일종의 성지였다. 일본의 몇몇 사이트에 남아 있는 기록의 편린을 맞춰보면, 앵커리지 우동은 주인이 두 번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첫 번째 주인은 미국계 일본인으로 육수 제작과 제면을 직접 하는 정통파여서, 본토 일본인들도 인정할 정도였다고. 가격은 10달러 내외로 비싼 편이었다. 지금도 일본에선 ‘앵커리지 우동’이란 단어는 여행지에서 만나는 수준 높은 우동집을 칭하는 대명사처럼 통용되고 있다.
장사가 잘되자 한 항공사 자회사가 주인을 밀어낸다. 일종의 젠트리피케이션. 물론 우동은 인스턴트로 바뀌었다. 냉전의 종말과 항공기 성능의 향상으로 앵커리지 경유 노선이 줄자 이 우동집은 한국인 사업가에게 넘어간다. 맛도 한국식으로 변했고, 단무지는 별매여서 원성을 사기도 했다.
대한항공에서 정년퇴직한 정용진 기장은 “당시 조종사들 사이에서 앵커리지공항의 우동은 자주 언급될 정도로 유명했어요. 우동과 함께 팔았던 연어 고기도 한국에선 구하기 힘든 물건이어서 인기가 많았죠”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1960년 초반이었나? 그때는 모두가 넉넉하지 못했던 시절이라 전화가 있는 집이 드물었다. 병원을 운영하시던 친정아버지는 전화가 필요해서 일찍 전화를 개설하셨던 것 같다. 그러나 요금이 한 통화에 20원 정도쯤 해서 꼭 필요하지 않으면 이용하지 않았다. 또 시내 전화와 달리 시골에 거는 시외 전화는 요금이 더 비쌌다.
그래서 집에 전화가 없는 사람들이 가끔 급하게 전화 연락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우리 집에 와서 "전화 좀 빌려주실래요?" 하고는 통화를 끝낸 다음 한 통화 요금이 20원인데 미안해서였는지 50원짜리 동전을 놓고 가곤 했다. 그러면 친정아버지는 그냥(?) 가시라고 말은 하면서도 얼마 안 되는 요금을 동전으로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때 친정에서 제일 먼저 결혼한 언니는 주말이면 형부와 함께 주말마다 놀러왔다. 신혼 셋집에 전화를 개설할 형편이 못 되었던 형부는 우리 집에만 오시면 눈치 없이 전화통을 붙잡고 여기저기 전화를 해댔고, 필자는 아무 말도 못하고 대신 언니한테 눈을 흘기곤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형부는 그때부터 인맥관리를 하고 계셨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아버지가 어렵고 또 요금이 아까워서 전화도 맘대로 못 걸었던 우리 식구와는 다르게 처가집 전화이지만 맘대로 쓰던 형부는 배짱이 좋았다. 그래서 우리는 형부를 ‘미스터 배짱’이라 부르곤 했다.
필자는 대학 졸업 후 결혼하기 전까지 외국 항공사에서 근무했다. 당시 국제전화 요금은 3분이 기본요금이고 3분을 넘기면 아주 비싼 요금이 부과되었다. 그러나 3분은 얼마나 짦은 시간인가. 몇 마디 못하고 엄마~ 하고 몇 번 부르면 벌써 3분 초과를 알리는 뚜뚜 소리가 나서 끊어야 했다. 어떤 때는 까짓것 돈 몇십만 원 버릴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엄마 목소리를 실컷 듣고 싶었다. 그만큼 혼자 지내는 외국생활이 힘들고 외로웠다. 그래도 결국 돈이 아까워서 그렇게는 못한 것 같다.
그렇게 어려운 시절이 모두 지나고 요새는 스마트 폰 발달로 누가 외국에 나가도 로밍이 가능해 카톡으로 매일 소식을 전하고 사진을 올리니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지 않다. 며칠 전 뉴욕으로 떠난 손주와 매일 카톡을 즐기니 변한 세상이 새삼 고맙기까지 하다. 스마트 폰 요금도 천차만별이라 알뜰폰부터 데이터 무한사용 조건의 요금까지 소비자가 맘대로 고를 수 있다.
시니어 중에는 청력이 나빠져 통화를 맘대로 못하는 경우도 많은데 요새는 전화보다 카톡이나 메시지가 더 유행이라 굳이 전화를 안 해도 얼마든지 서로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다. 한마디로 살기 좋은 세상이다.
얼마 전에 어느 여성 국회의원이 발언 중에 비정규직 급식 요원을 ‘밥 하는 아줌마’로 비하했다고, 매스컴의 공격을 받고 발언자가 당사자들인 급식요원 앞에서 공개 사과하고 곤욕을 치룬 일이 있었다.
옛날 우리 모두가 못 살던 시절, 서울의 웬만한 중산층 가정이면 거의 대부분 ‘밥하는 아줌마’인 가정부를 집에 두고 살았다. 다만 한 식구라도 먹는 입을 줄이기 위해 빈곤한 농촌에서 어린 딸을 서울로 올려 보내 흔히들 말하는 상주하는 식모살이를 시켰다. 당시엔 식모라고 불렀으나 언제부터인가 파출부나 가정부로 변하더니 요새는 가사 도우미로 명칭이 바뀌어서 조선족들이 그 일을 많이 하고 있는 걸로 안다.
그 시절 추석이나 음력 설 때가 되면 가정부 언니들이 자기 시골집에 다녀온다고 해서 주인이 차비랑 시골 식구 선물 꾸러미를 안겨서 잘 다녀오라고 보내면 나가서 돌아오지 않고 행방불명되어 사라지는 일도 있고 또 다른 집으로 스카우트 당하는 일도 있었다. 우리 친정도 물론 필자가 결혼 할 때까지도 아줌마가 계셨고, 또 결혼 후 시댁에서 시집살이를 할 때도 살림을 돌봐 주는 도우미가 언니가 있었다.
금자 씨는 시골에서 초등학교 졸업을하고 어려서 우리 시댁에 들어와서 우리 시어머니 시중을 들며 자란 시댁의 도우미 언니였다. 금자씨는 46개 띠인 필자와는 띠 동갑으로 58 개띠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13살 때 우리 집으로 들어와서 28살에 결혼하는 날까지 15년을 우리와 함께 살았다. 금자 씨의 한문이나 영어 등의 중등 교육은 시어머니가 학습지를 배달 받아서 직접 시키셨다. 금자 씨가 어느 정도 자라서는 시어머니 대신 우리 집 가사 일을 책임지게 되었다. 사실 금자씨의 도움이 없었다면, 가사나 육아에 꽝인 필자가 그 시절로는 드물게 결혼 후에도 워킹 맘으로 활동을 하면서, 승진을 하고 또 총수 비서실장의 꼬리표를 달 수 없었을 것이다.
금자 씨가 나이 들어 결혼 적령기가 되자, 필자는 당시 시동생이 사장으로 있던 중소기업인 의료기 회사의 기술 사원과 선을 보고 두 달만에 결혼을 시켰다. 데이트는 주로 아파트 앞 정원에서 만나 외식은 압구정동 맥도날드에서 했다. 신랑은 가방 끈은 짧지만, 손재주와 머리가 좋고 A/S 기술도 좋아 회사에서 매우 촉망 받았던 의료 기구 기술자였다. 머리가 좋아 공부를 잘했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대학을 포기 했다고 수줍게 말하는 청년이었다.
필자의 아들을 내 대신 키워 준 금자 씨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던 필자는 마치 본인의 결혼처럼 설레고 신이 나서 가구 시장을 함께 돌아다니며 혼수 감을 준비했다. 물론 비싼 물건을 사서 주지는 못했지만 당시 유행하던 티크 장롱과 설합장을 구입했다.
금자 씨 부부는 시어머니가 해준 미아리 방 한 칸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고 나중에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난 후에는 동대문 지하상가에 조그만 의료 소모품 및 의료 기구 상회를 차렸다.
점차 사업이 안정되고 애들이 자라자 부부는 자연스럽게 자녀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금자 씨의 아들은 아빠를 닮았는지 전교 일등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공부에 두각을 나타내더니, 그 어렵다는 의대를 입학하고 거기서도 우수해서, 요즘 제일로 쳐준다는 안과를 선택하여 수련의를 마치고, 동료 의사인 방사선 여의사를 만나 얼마 전에 결혼했다.
이제 금자 씨는 의사 아들에다 의사 며느리까지 둔 시어머니가 되어,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받으며 남들이 그토록 바라는 행복한 사람이 됐다. 금자 씨, 그대가 부러워요.
즐거운 고생을 드디어 체험해봤다. 연탄 배달 봉사를 해 낸 것이다. 추억의 연탄이다. 필자도 신혼 시절 때 4층 건물까지 연탄을 들고 날랐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는 아파트로 이사 가는 바람에 연탄과는 이별했었다.
KDB 시니어브리지 아카데미 회장을 맡으면서 봉사꺼리를 찾고 있었고, 연탄 봉사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연탄 봉사를 공약으로 내세우고 여기저기 알아 봤다. 그러나 연탄 봉사라는 게 그리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 복지회관이 돈만 놓고 가라는 식이었다. 간단히 봉투를 전달하는 것보다 동료들이 같이 땀 흘리며 봉사하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계속 알아보니 동료 중 하나가 연탄을 무료로 제공하겠다는 기관과도 연결이 되었다. 그런데 이것도 봉사기관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연탄 값을 내고 연탄 배달을 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면 보조금 200원이 없어지기 전에는 개당 650원에 1000장이면 65만 원이 들어야 하는 것이다.
계속 연탄은 우리가 무료로 공급받아서 연탄배달까지 하는 것을 수용한 상계종합복지관과 연결이 되었다. 날짜가 확정되고 대대적인 홍보와 함께 사람을 모았다. 송년회에 150여명이 모였기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달 전 둘레길 걷기 행사에 20여 명밖에 안 온 것이 마음에 걸렸다. 연탄 1,000장을 배달하려면 30명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8명밖에 신청자가 없었다. 그것도 여성이 몇 명 끼어 실제로 연탄을 나를 남자가 필요했다. 그래서 각자가 KDB 시니어 브리지 아카데미 졸업생이 아니더라도 데려 온 사람들까지 15명이 모였다. 여성이 4명이었다.
하필 그 주부터 한파가 몰아 닥쳤다 전날 풀린다는 예보도 어긋나 당일 아침에도 꽤 추웠다. 옷을 잔뜩 끼어 입고 복지관으로 갔다. 연탄 배달에 대한 기초 교욱을 받고 현장으로 갔다. 연탄 1000장이 얌전히 골목 어귀에 내려져 있었다.
준비해간 비닐 우의를 앞뒤를 바꾸어 입고 비닐 위생 장갑 위에 코팅 목장갑을 끼웠다. 그리고 배정 받은 다섯 집에 골고루 200장씩 나르는 것이었다. 연탄 한 장에 3.6kg이라고 했다. 남자들은 2장 씩, 여자들은 한 장 씩 안고 날랐다. 생각했던 광경은 한 줄로 서서 옆 사람에게 릴레이로 연탄을 넘겨주는 것이었는데 배달 장소가 멀고 사람이 적어 그럴 수 없었다. 정작 힘든 것은 연탄 무게가 아니라 두 사람이 겨우 피해가야 하는 좁은 골목길과 오르막이었다. 그나마 빙판이라 연탄재로 임시 처방을 해 놓았으나 사고가 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30분도 안되어 비닐 우의는 땀으로 차서 수증기가 맺히고 손은 찬 연탄에 시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누구하나 꾀부리지 않고 묵묵히 연탄을 날랐다. 봉사하러 스스로 온 사람들이라 달랐다. 첫 집 연탄 200장 나르는 것을 보고는 복지관에서 3시간은 소요 될 것 같다고 했다. 청년 20명이 1시간 걸리는 양이라고 했다. 연탄을 각 집에 200장씩 날라야 하므로 여성 2명은 연탄 개수를 세었다. 남자 한 명은 연탄 쌓는 일을 담당했다. 나머지는 나르는 일을 담당했다.
그렇게 무사히 연탄 1000장을 배달했다. 한 사람이 대략 100장을 날랐고 한 번에 두 장씩 날랐으므로 골목길을 50회 왕복한 셈이다. 정작 연탄을 제공 받은 주인들과는 마주치지도 못했으나 그편이 더 나은 것 같았다. 귀가해서 수북이 쌓인 연탄을 보고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보냈으면 하는 마음이다.
뒤풀이는 고생했으니 고깃집으로 갔다. 모두 고생이 보람 있었다고 했다. 즐거운 추억이자 고생이었다.
경상도 시골 출신인 필자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인천에서 미혼이었던 형님이 고등학교는 대도시인 인천에서 다니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왔다. 이후 형님 집에서 지내게 됐는데 몇 달 후 형님이 서울로 발령이 나버리는 바람에 필자만 홀로 덩그러니 인천에 남게 되었다. 시골 부모님이 보내주는 돈이 보잘것없어서 늘 배가 고팠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고1 학생이 겪는 타향살이는 늘 외롭고 쓸쓸하고 힘들었다. 더구나 억센 경상도 사투리가 재미있다고 깔깔대며 웃어대는 반 아이들 등쌀에 필자는 학교를 다니기가 싫을 정도로 몸과 마음이 위축되어갔다. 이런 필자를 안타깝게 생각했던 반 친구가 있었다. 어느 날 자기네 집에서 함께 지내자고 했는데 친구 집이 서울 시흥동이었다. 친구 집 부근에는 대한전선이 있었고, 신흥 주택 지역으로 난개발이 한창이었고, 시흥이라는 팻말을 달고 다니는 버스 종점도 희미하게 떠올랐다. 친구 집에 가 보니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셨고 친구는 신혼살림을 차린 형님 내외분과 같이 살고 있었다.
요즘 같으면 가당치도 않은 일이지만 형님이 동생으로부터 필자 이야기를 듣고 부모 없이 쓸쓸해하는 동생을 위해 필자를 데려오라 한 모양이었다. 친구 형님 내외분도 필자를 살갑게 잘 대해줬다. 이른 새벽 형수님이 해주는 밥을 먹고 시흥역으로 뛰어가 기차를 타고 영등포역에서 다시 인천행 기차를 바꿔 탔다. 늘 허둥지둥하던 날들이었다. 친구는 공부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더구나 부모님도 안 계시고 가정 형편도 넉넉지 않다 보니 어느 날 학교를 그만두고 장사를 해보겠다고 했다. 연탄과 쌀을 파는 가게를 염두에 둔 듯했다. 당시 시흥동은 주택 개발로 사람들이 몰려오는 지역이었고 연탄과 쌀은 꼭 필요한 생활필수품이었다.
친구가 학교를 그만둔 마당에 친구 집에 계속 있을 수 없었다. 팔을 붙드는 친구의 팔을 억지로 떼어내며 집을 나왔다. 그 뒤 찾아갔더니 인근에서 연탄가게를 차려 열심히 돈을 벌고 있었다. 그러나 멀리 떨어져 살다 보니 찾아가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다가 군에서 제대를 한 뒤 가 보니 동네가 완전히 변했고 친구도 이사를 가고 없었다. 찾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친구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이름과 출신 중학교, 나이뿐라서 막연했다. 그렇게 세월이 또 흘러갔다.
마음 한구석에 늘 그리움이 있어서였는지, 어느 날 친구 소식을 듣게 됐다. 벌써 30여 년 전 일이지만 어제 일처럼 또렷하다. 당시 필자는 경남 통영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친구를 수소문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 부탁을 했다.
그리고 며칠 뒤 필자에게 들려온 소식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친구가 이미 사망했다는 내용이었다. 요즘처럼 인터넷이나 전화가 발달했다면 연락이 끊기지 않았을 테고 사망 원인도 알았을 것이다. 결혼은 했는지, 결혼했다면 자식들은 어디서 사는지, 궁금함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가족이라도 만나보고 싶었지만 주위에서 말렸다. 가족을 만나 그다음엔 어떡할 거냐고 했다. 겨우 잊고 지내는데 필자를 보면 다시 슬픔에 빠질지도 모른다고도 했다.
친구와의 인연은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저승에 가면 연탄장사는 어땠는지 왜 죽었는지 물어보고 싶고 학창 시절 추억도 나누고 싶다. 저승에도 술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한잔 술을 기울이며 기분 좋게 이야기꽃을 피우고 싶다.
시골에 내려가 살기를 원하는가? 그러나 시골에 거처를 마련할 실력이 여의치 않은가? 빈손인가? 걱정 마시라. 찾다 보면 뾰족한 수가 생긴다. 일테면, 재각(齋閣)지기로 들어앉으면 된다. 전국 도처에 산재하는 재실, 재각, 고택의 대부분이 비어 있다. 임대료도 의무적 노역도 거의 없는 조건으로 입주할 수 있다. 물론 소정의 면접은 치러야겠지만 당신이 남파된 간첩이 아닌 한 딱지맞을 일은 없다. 폐교를 빌려 쓰는 방법도 고려할 만하다.
서양화가 원덕식(46)씨는 산골 폐교를 빌려 살고 있다. 귀촌한 지 어언 6년이 지났다. 그녀 곁엔 동화작가 노정옥(49)씨가 그림자처럼 동행한다. 이들은 서울에서 뜨거운 연애를 하다 부부 사이로 발전했다. 결혼식은 이곳 폐교 운동장에서 치렀다지. 귀촌의 첫 장을 혼례로 기록한 셈이다.
원씨 내외는 별반 손에 쥔 것이 없는 채로 산골에 들어왔다. 맨몸으로 신접을 차렸다. 온몸을 다해 귀촌 초기를 개척했다. 수천 평 부지에 들어앉은 낡은 폐교를 부부 단둘이 덤벼들어 단장을 하길 날마다 반복했다. 첫해 엄동엔 난방이 안 돼 냉장고보다 찬 사택에서 덜덜 떨며 밤잠을 자야 했다. 살을 에는 추위를 덜기 위해 방 안에 텐트를 치고 선잠을 잤다는 게 아닌가. 도깨비 나올 듯 뒤숭숭한 교사를 고치고 때우고 꾸미고 칠하는 일도 고스란히 부부의 몫이었다. 강철 같은 기세로 운동장을 뒤덮고 우르르 들솟는 풀들을 뽑는 일은 신역이 자심한 반면 좀체 표가 나질 않더란다. 이래저래 고역에 고난에 고심이 첩첩 겹쳤겠지. 신혼의 달콤한 훈김이 시련을 덜어줬을 법하지만, 제주도로 유배를 당한 추사도 아닌 것을, 어쩌자고 으스스한 폐교에 둥지를 틀었단 말인가? 원씨의 얘길 들어볼까.
“시골생활을 경험한 적이 없어서 처음엔 많이 염려했어요. 과연 잘 살 수 있을지, 견뎌낼 수 있을지 내심 걱정이 많았죠. 하지만 그런 근심에 사로잡힐 겨를조차 없이 온갖 일에 매달려야 했어요.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시설을 고치거나 운동장의 풀을 뽑아내는 일들이 화급했으니까. 몸으로 부닥쳐야만 하는 그런 일들은 예상보다 훨씬 힘들었어요. 그러나 잘 견디며 지내왔어요. 남들이 보기엔 무모하거나 철없는 귀촌일 수 있겠지만 저희에겐 뚜렷한 목적이 있었으니까요. 폐교의 너른 교실 공간을 손질해 미술 작업실로 쓰자, 그것으로 작품에만 매진할 여건을 조성하자는 게 귀촌 동기였거든요.”
글쟁이에겐 골방에 컴퓨터 하나면 그만이지만, 화업(畫業)엔 널찍한 공간 확보가 필수다. 서울의 임대료는 비싸다. 화가들이 그래서 흔히들 교외나 시골에 작업실을 마련한다. 폐교를 임대해 활용하는 이들도 많지만, 수년 안짝에 철수하는 사례도 흔하다. 원씨 내외도 초기 한때엔 서울로 되돌아가는 문제를 놓고 갈등을 했더란다. 주거 환경이 너무도 열악하고, 덩치 큰 폐교의 안팎을 보수하는 일이 버거워서였다. 그러나 서서히 자리가 잡혀 이젠 정착에 이르렀다.
부부는 미친 듯이 창작에 진력할 작정이었다. 남편은 글을 쓰고, 아내는 그림을 그리는 일을 치열하게 하자는 게 귀촌의 목적이자 초야에 건 약속이었던 것. 그러나 다소 길이 달라졌다. 마을 주민들을 끌어들인 ‘생활문화공동체사업’을 펼쳤다. 관이 행하는 마을 사업 공모전에 응모, 지원 대상으로 선정되면서부터였다. 부부는 마을 안길에 미술 조형물을 설치했다. 교사 안에 소규모의 농업박물관도 개설했다. 주력 사업은 주민들에게 그림 그리기나 시 쓰기, 도자기 만들기 같은 걸 가르쳐 전시회를 여는 일이다. 반응도 성과도 좋았다지.
소외된 촌로들을 공방으로 끌어들이다
주민의 대다수는 노인들. 평생을 두더지처럼 땅을 파며 살아온 농부들. 그들에게 글과 그림이란 생판 생소한 딴 세상의 물건이기 십상이다. 실상이 그렇지만 노인들은 손수 만든 작품으로 전시회까지 여러 차례 흐뭇하게 치렀다. 도시에 번성한 문화 예술은 좀체 시골에 손을 내밀지 않는다. 원씨 부부의 행장은 이 점에서 가상하다. 소외된 촌로들의 고즈넉한 삶을, 파묻힌 기층문화를 수면 위로 돋우는 역할을 했으니 말이다. 눈여길 건 노인들을 모아들인 원씨 부부의 출중한 사교 능력. 그들은 배타적이거나 고독한 노인들을 폐교의 공방으로 자연스럽게 끌어들였다. 처신을 어떻게 했기에?
“시골 어머니들의 삶은 참 고달파요. 겨울 한철을 빼곤 늘 농사일에 매여 살죠. 새벽에 들에 나갔다가 저물어서야 귀가하는 일상을 지켜보면 안쓰러워요. 얼굴엔 주름투성이이고, 손발은 갈퀴처럼 거칠고, 벌레에 물린 자국으로 온몸이 얼룩지고, 그러면서도 강인하고 씩씩하고요, 가슴 찡해지는 모습이죠. 그런 어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자주 접촉하고 수시로 스킨십을 하고 그랬어요. 애교도 부리고, 장난도 치고, 옥희씨! 순자씨! 그렇게 이름도 불러드렸고요. 스스럼없이 다가가 다정한 관계를 맺었어요.”
“예술을 한다고 외돌아 앉아 오불관언식 처세를 했다면 미운털이 박혀도 야무지게 박혔겠죠? 이웃을 마주칠 때마다 인사만 참하게 잘해도 기특하다는 평이 돌아오는 게 시골이죠. 툭하면 벌어지는 마을 술판에서의 호출에도 가급적 득달같이 달려가는 게 현명한 처신이고 말이죠.”
“술자리 참석은 남편의 전공 분야입니다(웃음). 마을의 갖가지 경조사에도 부지런히 찾아다녔어요. 내 부모 대하듯 어르신들의 얘기를 경청하고 존중하는 버릇도 남편의 처신에 배었죠. 괜한 참견이나 잔소리에도 토를 달기는커녕 고맙게 받아들였어요. 덕분에 소통이 쉬웠던 것 같아요. 음, 복된 관계랄까, 일찌감치 저희는 자식처럼 따뜻한 대접을 받으며 살아왔어요. 이런 정황 하에 마을공동체사업을 원활하게 전개할 수 있었습니다. 흔히들 시골의 부당한 텃세를 운운하지만 저희는 그런 조짐조차 느끼질 못하고 지냈어요. 텃세란 귀촌자의 처신 여하에 달린 문제이지 않겠어요?”
“세태란 야박해서 내 안의 이기적 유전자를 발동하지 않고선 남에게 당하거나 밀리기 십상이죠. 날이면 날마나 피 튀기는 복싱이 벌어지는 게 서울이라는 사각 링일 뿐일까? 시골의 풍정은 안도해도 좋을 만큼 평온한 거예요?”
“도시의 인간관계란 대체로 메마른 계산 중심으로 흘러요. 시골은 좀 달랐어요. 그 머릿속에 계산이 전혀 없는 건 아니겠지만, 시골 할머니들의 태도엔 순응이랄까, 순수랄까, 그런 기본 정서가 농후하게 서려 있어요. 그러나 내면엔 아픔, 슬픔, 상처가 가득 고여 있죠. 개인의 꿈은 접고, 고단한 시골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억지로 살아온 한평생에 관한 한(恨)! 할머니들의 이 억압된 꿈과 깊은 한을 주제로 한 그림 작업, 요즘 저는 거기에 몰두하고 있어요.”
원씨는 알아주는 눈들이 많은 화가는 아니다. 주변의 촉망을 한 몸에 받는 일은 아직 벌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기죽을 여자도 아니렷다. 그림을 평생의 본분사로 삼았으니 말이다. 그녀가 진정 남김없이 열정과 깡을 다해 작업에 임하는지는 그녀 자신만이 알 일이겠지만, 미술을 위해 귀촌을 결행했으니 그녀 내부엔 나름 큼직한 사이즈의 포부가 들어 있을 테지. 최근엔 해외 아트페어에서 할머니들의 고달픈 노년에 서럽게 잔존하는 여성성을 주제로 한 작품 몇 점이 팔려나가기도 했다. 그녀는 이를 의미심장한 신호로 읽는다. 비로소 작풍의 방향을 찾았다는 안도감에서다. 아울러 이를 귀촌의 선물로 간주한다. 마을 할머니들과의 애정에 찬 교제의 산물로 여긴다.
상처에서도 애틋한 싹이 돋고 잎이 나오고 꽃이 핀다
자연으로부터도 많은 걸 얻었다. 다채로운 걸 느끼고 배우고 담았다. 자연이란 흔연한 사랑을 닮아 조건 없이 준다. 수업료를 받지 않고 강좌를 펼치며 음성을 내지 않고도 메시지를 전달한다. 산봉우리에 오르면 그 높음을 배울 수 있으며, 물길을 만나면 그 맑음을 배울 수 있다. 소나무에서는 그 푸름을, 달에서는 그 밝음을 배울 수 있다. 한적한 시골의 삶에도 남모를 부침이 있고 일희일비가 교차하는 법. 갈등과 괴로움 없이 삶을 건널 수 있던가. 마음이 쑥대밭처럼 뒤엉킬 때면 원씨는 자연 풍경에서 위안을 얻는다. 그게 자연의 품에 안겨 살아가는 귀촌 생활자의 특권이라는 것.
“사람을 보듬어주는 자연을 느끼며 살아가는 게 만족스러워요. 도시에선 좀체 만나기 어려운 새소리, 물소리, 달과 별, 숲과 적막, 이런 것들이 들끓던 고민들을 순식간에 잊게 해주는 거예요. 작업이나 일로 힘들었던 하루가 저문 깜깜한 밤에 운동장에 나가면 허공에 모인 별들이 빛을 뿜어요. 초롱초롱 빛나는 그 별들을 바라보면 저절로 피로가 가시고 근심이 달아나요. 남편과 다투고 난 뒤의 상심도 씻겨나가죠.”
“자주 다투세요? 이는 우문이리. 밑바닥까지 드러난 감정 충돌이 잦은 게 부부 사이라서. 결혼 자체가 짐이나 멍에일 수도 있고요. 그럼에도 왜들 결혼을 할까(웃음).”
“소소한 다툼이 생기곤 해요. 이건 어쩌면 긍정할 만한 기회이기도 해요. 서로 간에 미처 몰랐던 상대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는 기회이기도 하니까. 오해에서 벗어나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찬스이기도 하고요.”
고적한 시골에서 날마다 24시간 부부가 붙어 사는 삶엔 창작만큼이나 각별한 재능이나 내공이 요구될 수도 있겠지. 사람이란 천성적으로 ‘삐딱이’가 아니던가. 본능의 밑뿌리인 에고이즘과 ‘귀차니즘’이 불러들이는 불협화음으로 소소한 상처를 주고받는 게 부부 사이 아니던가. 그러나 상처도 인간 내부의 자연이다. 상처에서 애틋한 싹이 돋고 잎이 나오고 꽃이 핀다.
“허황한 욕망과 소비 중심으로 바쁘게 돌아가는 서울에서 살았다면 부부 관계가 한결 단조로웠을 것 같아요. 귀촌 덕분에 남편의 내면을 더욱 깊이 있게, 또는 성숙한 눈길로 바라보게 되었죠. 남편은 섬세하고 다정해요. 욱하는 성질은 좀 있지만 독한 게 없어요. 요리도 잘하고, 늘 내 편이라는 게 고맙고 좋아요. 자연이 주는 안정감 같은 걸 남편에게서 느낍니다.”
“두 분, 가진 것 없이 귀촌을 해 온몸을 쓰는 노역으로 폐교를 가꿔 활달하게 살아가고 있어요. 소박하고 간소한 살림, 수굿한 태도, 긍정심, 이런 것들이 보기에 좋아요. 소유에 대한 예찬과 경쟁이 극에 달한 이 세속에서 그렇게 순하게 살기란 쉬운 게 아니라서.”
“틀에 박히지 않으면서 하고 싶은 걸 하며 사는 삶, 돈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었어요. 그게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걸 귀촌을 통해 확인하고 있지요. 점점 더 미니멀한 삶으로 가고 있으며,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줄어들고 있어요. 훗날에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지만, 여러모로 여전히 불편하고 어려운 점들이 많지만, 원하는 방향으로 이행하는 이 과정엔 회의가 없습니다.”
원씨의 언어는 정밀하거나 기민한 맛을 결여한 대신 유연하고 온순해 평화롭다. 아둔한 나의 머리엔 잡념이 술렁인다. ‘돈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이 과연 실현 가능할까, 불가능할까.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이기나 할까.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목적지는 충청남도 부여다. 그곳에서 태어나고 묻힌 시인 신동엽을 만나기 위해서다. 서울남부터미널의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여행의 설렘을 더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알록달록한 단풍잎은 가을을 보내기 싫다는 듯 나뭇가지 끝에 겨우 매달려 몸을 흔든다. 두 시간 정도 지났을까, 호젓한 부여에 도착했다.
부여시외터미널에서 신동엽문학관까지의 거리는 멀지 않다. 5분 정도 이정표를 따라 걷다 보면 신동엽의 시 ‘껍데기는 가라’의 한 구절을 써놓은 게스트하우스 담벼락이 눈에 들어온다. 이는 문학관에 거의 다 도착했다는 의미다. 100m도 채 지나지 않아 신동엽문학관과 신동엽 생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2013년 개관한 문학관과 복원된 생가는 서로 다른 매력을 보여주지만, 함께 어울려 신동엽 시인에 관해 이야기한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껍데기는 가라’는 1967년에 발표됐다. 이후 ‘참여시의 절정’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비로소 문단의 조명을 받았다. 같은 해에는 4800행에 달하는 장편서사시 ‘금강’을 팬클럽의 작가기금을 받아 발표한다. 깔끔한 외모의 젊은 국어선생님이었던 신동엽은 평소에도 인기가 높아 여학생들로부터 편지를 많이 받았다. 그런 그를 보고 아내인 인병선 여사가 화를 많이 냈다고 한다. 신동엽은 자신의 작품인 오페레타 ‘석가탑’을 무대에 올리고 다음 해인 1969년, 국민방위군(1951) 때 감염된 간디스토마가 간암으로 악화되어 만 3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신동엽문학관은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승효상의 작품이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낡아가는 자연스러운 문학관의 모습이 신동엽의 시를 닮았다. 마치 종이를 바른 듯한 느낌의 외벽에는 여백이 넘치고 내부는 외부로 자연스레 연결된다. 진보적인 시인이었던 신동엽. 이곳을 순례하는 자들의 발길은 여전히 잦다.
전시관에서는 시인의 육필 원고를 비롯해 인병선 시인과 주고받은 편지와 사진, 즐겨 읽던 책, 교무수첩, 신분증 등 다양한 유품을 관람할 수 있다. 그와 관련한 자료들은 시간이 많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유가족의 노력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전시관을 다 둘러봤다면 옥상정원으로 올라가봐야 한다. 푸른색 기와의 신동엽 생가를 한눈에 넣을 수 있다.
신동엽이 자라고 신혼생활을 했던 생가의 앞마당 웅덩이는 지금은 풍성하게 자란 잔디가 그 자리를 메꿨고 초가지붕은 기와로 바뀌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시인이 살던 집은 조금씩 모습을 바꿨지만, 생가 안의 물품은 그 시절 그대로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흰 고무신과 책상 위의 잘 익은 감을 보고 있으면 마치 시인이 살아 돌아올 것만 같다. 방문 위에 걸려 있는 목판에는 인병선 시인의 작품 ‘생가’가 새겨져 있다. “있었던 일을 늘 있는 일로 하고 싶은 마음”이란 구절에서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나버린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느껴진다.
우리의 만남을/ 헛되이/ 흘려버리고 싶지 않다// 있었던 일을/ 늘 있는 일로 하고 싶은 마음이/ 당신과 내가 처음 맺어진/ 이 자리를 새삼 꾸미는 뜻이라// 우리는 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살며 있는 것이다.
―인병선, ‘생가’
관람 정보
주소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신동엽길 12
전화 041-833-2725
관람시간 09:00~18:00 (11월~3월은 17:00까지)
휴관일 매주 월요일, 명절 입장료 무료
추억이 있어서
언젠가 쓸 것같아서
비싸게 주고 산 물건이라
여러 가지 이유로 메모한장,다양한 기념이 될 만한 물건을 못 버린다.
아니 못버리고 산지 오래다.
정리수납에 대해 배우는 모임에서 정리수납의 달인들이 하시는 말씀이
정리정돈도 중요하지만 제대로 잘 버리는 것도 중요하다고 한다.
누군가 더 필요한 분들에게 기증도 하고 나눔도 하는 것 과감히 우리 집에서 내보내는 것
중요하고 선택해야할 활동이다.
책상 위가 아주 정신없는 학생 본인은 아주 지장 없이 잘 쓸수 있다고 하지만
바라보는 입장은 아내이든, 엄마든 간에 답답한 노릇이다.
그것보다 나이가 들어 자녀들이 결혼하여 분가한 경우라도
요즘 정리수납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부쩍 든다.
언젠가 방송에서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방송을 하였는데 재활용하거나 판매하여
물건을 현금화 하려는지 모으고 또 모아서 방으로 들어갈 때 자신의 집도 아주 힘들게
드나드는 분을 보고 놀래기도 하고 그 외에 들은 이야기인데요 물건을 쌓아두고 사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것을 치우는데도 며느리들과 아들들이 몇날 며칠 사람 써서
함께 치웠다는 말을 들었다.
필자도 이번에 새삼 집안을 정리정돈 하는 일하다 보니
미혼 유치원교사시절 언젠가 다시 재취업하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메모노트가 몇 권이 나오고 세상에 무슨 교육가서 받은 자료까지 나온다.
또 정리하다보니 아기 키우던 시절 사용하던 기저귀가방 큰 것 안에 장가간 두 아들의
배내저고리까지 나온다.
전문가 들이 정리수납에 대해 전하는 말씀이 시간, 체력, 판단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아주 수긍이 가는 부분이 상당하다.
좀 버릴 줄도 아는 태도가 아주 중요하다.
식빵구입하고 나온 반짝이 끈조차 모아둔 것도 나온다.
옷이든 뭔가 자신이 아끼던 물건중 옷이든 추억의 물건이든 쳐다보고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는데 신혼여행갈 때 우리 시절에는 명동이나 이대앞에서 맞춰서 입고 신혼여행을
가는데 그 옷을 아직도 못 버리고 있다. 다이어트해서 입을 것 같지도 않은 사이즈에
옷 스타일도 연예인 평상복처럼 평범하다 예사롭지 않은데도 왜 아직도 못버리는지
그건 다시 옷걸이로 다시 걸어두었다.
정리수납 함께 공부하는 모임에서 전체미션으로 옷장, 주방, 냉장고를 정리하라고
과제를 주셔서 정리하여 본 주말시간이었다.
버릴 것을 생각하여 쓰레기봉투와 다시 들어갈 자료 수선이 필요한 것 등 분리하면서
정리수납하다보니 역시 삶이 더 의욕적이 되고 늘 살던 집인데도 애착이 간다.
우울증 치료에도 정리수납이 효과적이라더니 정말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데
머리어깨무릎발이 다 아프다.
모든 것이 다 있다는 매장에서 다양한 수납도구를 저렴한 가격이 구입해서 해도 도움 되고
평소 택배 오는 박스나 각티슈를 이용하여 상자를 만들어서 정리 수납하니 아주 보람찬
정리의 시간이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마구 아무렇게나 꺼내 쓰고 지냈는데 이젠 좀 정리하고 사는 습관을
들여 보려 한다.
언제 누가 열어봐도 으악~~ 할 정도로 살지는 않으려 한다.
정리수납을 하면서 몇 가지 책을 들여다 보니
이런 말이 있다.
버림의 자유를 실천하고
채움을 바르게 채워야하며
나눔은 나눔의 행복을 이야기 하고 있다.
공간의 주인은 사람이다. 사람중심인 공간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