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사시사철 과일을 먹을 수 있어서 참 행복하다. 필자가 자랄 때는 열매나 과일채소라고는 봄에 딸기, 여름부터 가을철에 나오는 수박, 참외, 토마토, 자두, 복숭아, 사과, 배, 포도, 감, 대추가 전부였다. 그나마도 품종이 몇 개 안 되고 시장에 나오는 시기도 짧았다.
예를 들어, 자두는 7월이면 끝물이었는데 요즘은 품종은 다르지만, 자두가 가을에도 시장에 나온다. 복숭아도 여름까지는 나왔지만, 복숭아털이 없어 먹기 좋은 천도복숭아라는 것은 나온 지 몇 년 안 되는 신품종이다. 먹기 좋게 품종 개량한 방울토마토도 그렇다. 제주도 귤도 지금은 흔하지만, 어렸을 때는 못 먹어 보던 과일이다. 제주도로 신혼여행 갔을 때 선물로 사오던 과일이다. 사과도 지금은 어느 품종이든 다 맛있지만, 그 당시에는 맛없는 품종도 여럿 있었다. 지금은 맛없는 사과는 도태되어 안 보인다.
그전에는 흔하지 않던 과일도 보인다. 거들떠도 안 보던 오디, 우름, 꾸지뽕, 복분자도 제 철에는 먹을 수 있다. 무화과도 귀한 과일이었는데 흔한 과일이 되었고 가격도 싸다. 블루베리도 그렇다.
수입과일도 많다. 오렌지, 자몽, 메론, 바나나는 물론 동남아시아 관광이나 가야 맛 볼 수 있던 갖가지 열대 과일도 수입되어 들어온다. 바나나가 귀한 과일이라고 하면 의아해 하겠지만, 그 당시에는 유일한 수입과일이었다. 가격은 좀 비싸지만 적당히 새콤달콤해서 인기 있는 체리도 들어온다.
전반적으로 운송, 저장 기술도 발달해서 싱싱한 과일을 먹을 수 있고 심지어 겨울철에도 여러 가지 과일이 있다. 온상 재배한 과일까지 나온다. 그 덕분에 노모가 겨울철에 딸기를 먹고 싶고 하여 산야를 헤매다 쓰러진 효자에게 신선이 딸기밭을 인도했다는 동화 속에나 나오던 겨울철 딸기도 현실화 되었다.
당도도 높아졌다. 재배기술의 발전 덕분이다. 달아야 좋아한다. 그전에는 수박은 두드려 보고 잘 익은 것을 골라서 샀다. 꼭지 부분을 삼각형으로 오려 내서 빨갛게 잘 익었다며 안을 보여주기도 했다.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 없이 믿을만한 판매처에서 사면 당도에 문제가 없다.
어렸을 때부터 과일을 좋아했지만, 지금도 아침 식사에는 과일이 빠지지 않는다. 먹을 수 있는 과일이 사시사철 있다는 것이 참 다행이다.
요즘 참 살기 좋아졌다며 이런 얘기를 하면 요즘 젊은 사람들은 시큰둥하다. 제 철 과일이 시장에 나왔다고 만만하게 사 먹을 수 있는 집도 많지 않았다. 겪어 보지 않은 세대들이라 실감하기 어려울 것이다.
과일에 얽힌 얘기도 많다. 필자는 자두를 좋아했는데 아내가 참외만 사들고 와서 다시 시장에 갔다가 여름 휴가지로 떠나는 단체 버스를 놓쳤다. 끝물이라 다 삭은 자두 담은 봉투를 들고 시외버스를 타고 만리포까지 따라 간 적이 있다. 제주도 신혼여행 때 귤을 몇 박스 샀다가 그 무거운 것을 가지고 오느라고 고생한 추억도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파견 근무 시 장티푸스에 걸려 식사를 제대로 못할 때 바나나 한 다발로 식사를 대신하며 극적으로 살아나기도 했다.
여에스더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출신으로 TV에도 많이 나오는 유명한 가정의학과 전문의라서 까다롭고 위엄이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 만나보면 전혀 위압감이 없고 소탈하고 발랄한 소녀 같다. 게다가 인품도 훌륭해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참 괜찮은 여성이다.
지금도 그런데 서울대 의대 시절에는 얼마나 인기가 많았을까? 그런 그녀를 목소리로 사로잡은 이가 바로 홍혜걸이다. 여에스더는 당시 응급실 주치의였고 두 살 연하 홍혜걸은 인턴이었다. 당시에는 선생님으로 깍듯하게 불렀지만 이제는 ‘임마’라고 부른다. 당시 응급실 근무 교대하기 전에 홍혜걸이 전화로 여에스더에게 보고할 때 저음의 차분하고 감성적인 목소리는 그만 여에스더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말았다.
그 후 홍혜걸이 여에스더가 자기에게 호감을 가진 것을 눈치 채고 하늘 같은 의대 선배에게 사귀자고 도발했다. 마침 여에스더는 7년간 사귀던 남자와 막 헤어졌던 터라 홍혜걸이 행운을 잡을 수 있었다.
홍혜걸이 여에스더를 처음 유혹할 때의 말이 걸작이다. 세계 금연의 날 세미나에서였다. 여에스더는 “결혼할 사람이 담배를 피운다면 어떻게 하시겠나?”라고 물었고, 이에 홍혜걸은 즉흥적으로 “어린 사람이랑 결혼하면 되죠!”라고 맞장구를 쳤다. 그녀보다 두 살 연하인 본인이 남편감이라는 것을 에둘러 표현한 것. 머리 좋은 여에스더는 곧바로 알아듣고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했다. 사귀게 된 지 3주 만에 병원 뒤뜰에서 갑자기 홍혜걸이 여에스더의 손을 와락 움켜잡더니 “우리 결혼해요”라고 프러포즈를 했다. 그때 첫 포옹을 했는데 홍혜걸의 쿵쾅쿵쾅하는 심장 소리가 하도 커서 변태인 줄 알고 살짝 고민도 했다고 고백한다.
‘편지’와 ‘살색 팬티’가 결혼기념일 선물
가정의학과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의한 생리적 반응에 대해서는 무지한 소녀였다. 올해로 결혼 24년 차라서 “내년이 은혼식인데 뭔가 큰 선물이 있지 않겠냐?”라고 물었더니 “이제껏 한 번도 이벤트를 해준 적이 없다”며 입이 튀어나온다.
며칠 전에 결혼기념일이어서 남편에게 “뭐 없냐?”고 슬쩍 물었더니 “매일매일 잘해주는데, 뭐가 필요해?”라며 뻔뻔스럽게 반문하더라는 것. 그녀는 가끔 돈 안 들인 선물은 받아왔다고 웃는다. 다름 아닌 편지. 홍혜걸이 뭔가 잘못했을 때 편지로 쓰는 “다시는 안 그럴게~ 술도 안 먹고…” 등등의 다짐이다.
결혼하고 첫 번째 생일 선물로 촌스런 살색 팬티와 ‘효도 신발’ 같은 것을 받았다. 그때는 어이가 없었지만, 돌이켜보니 남편의 그런 성격이 귀엽다. 홍혜걸은 평소에 쓰다듬고 주무르고 스킨십하는 걸 좋아한다. 여에스더는 당하는 걸 좋아한다. 그래도 잠자리에 들면 등을 돌리고 자는 게 편해서 줄곧 그렇게 지내왔다.
그런데 작년부터는 갱년기라서 아예 트윈베드로 바꾸고 사이가 좋을 때는 침대를 가까이 붙이고 뭔가 틀어졌을 때는 멀리 떨어뜨려놓는단다. 남편도 갱년기라서 서로 고집도 피우고 투정도 부린다. 그래서 작년과 올해 초까지 힘들었는데 지금은 둘 다 의사이기에 생리적 현상을 서로 잘 이해하고 좋아졌다.
이제는 부부지간에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은 후라서 그럴까? 술자리 모임에서도 에스더와 홍혜걸은 서로 험담을 늘어놓으면서 재미있게 논다. 잘 삐지지도 않는다. 홍혜걸의 별명은 ‘홍수르(만수르에 빗댄 말)’란다. 남편이 경제관념이 없고 허술해서 그녀는 불만이다. “홍혜걸은 허당”이라고 대놓고 말한다.
“어떤 부분이 그렇게 허술하냐?”고 묻자 “한번은 저 몰래 강의료를 모아두려고 은행에 새 구좌를 개설했다가 저한테 딱 걸렸잖아요. 인터넷뱅킹을 안 하니까 로그인하면 계좌 목록이 쫙 뜨는 걸 몰랐던 거예요”라고 폭로하며 깔깔 웃는다.
바가지를 그렇게 긁어도 고쳐지지 않아 불만이었는데 지금은 이해한다는 것. 바둑의 단수를 올린다든지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이 많은 남편의 열정이 지금은 오히려 보기 좋을 정도로 너그러워졌다. 결혼 24년 차의 여유일 수도 있겠지만 에스더의 사업이 번창해서 과거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풍요로워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 같은 여유는 자신의 외모를 평가하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홍혜걸은 허당 ‘홍수르’
여에스더는 최근 한 방송에 나와 “예전에는 홍혜걸씨가 왜 저렇게 못생긴 여자랑 결혼했냐는 말이 많았다”고 운을 뗀 뒤, 그런데 요즘은 “아이유랑 닮았다는 얘기를 듣기도 하고 수지랑 닮았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다”며 외모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케케묵어 익을 대로 익은 남편과의 사랑이 결실을 맺은 자신감의 표현이다. 그러면서 남편에 대한 불만도 과감하게 털어놓는다. “2년 만에 뉴욕으로 출장을 가게 됐을 때 원래는 밤 9시 비행기였는데 폭풍우로 밤 12시로 시간이 바뀌어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데 평소 같으면 ‘어떻게 하니, 폭풍우가 와서 위험하겠다. 조심해라’ 이렇게 말을 해야 하는데 그날은 뭔가 말을 제대로 못하더라! 남편이 집에 있어야 하는 시간인데 집에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돌아와 우연히 영수증을 발견했는데 꽤 비싼 음식 값이더라. 그것도 추가 와인 두 잔에 코스요리 2인분. 이게 뭔가. 청담동에서 내가 없을 때 누구하고 먹었겠나?” 그녀는 남편을 다그치며 따졌다고 한다. 홍혜걸이 “회사 일로 알게 된 후배”라고 하자, 여에스더는 “아내가 외국출장가고 없을 때, 왜 하필이면 그 밤에 그것도 청담동에서 분위기를 내면서 와인까지 마시냐?”고 따져 물었다.
한량 이봉규는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 것도 같지만 굳이 이 대목에서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기로 했다. 홍혜걸도 한 방송에서 부인에 대한 불만인지 자랑인지 알쏭달쏭한 말을 한 적이 있다. “돌이켜보면 나를 잘 이용하는 여우 같은 생각이 든다”고 포문을 열었지만 결국 “박사로 만들어준 아내에게 정말 고마운 생각이 든다”며 부인 자랑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신혼 시절 아내가 나에게 진지하게 박사 학위를 따라고 했다. 석사부터 박사까지 하려면 10년 정도가 걸리는데, 그 당시에는 ‘새삼스럽게 무슨 공부를 또 하나’ 했지만 지금은 아내에게 너무 고맙다”고 부연 설명했다. 그러면서 “예전에 MBN 에서 함익병 원장이 우스갯소리로 집사람 뜯어먹고 산다고 한 적이 있는데, 내가 벌어온 돈으로 아내가 병원을 개업하고 사업도 시작한 거다”라며 정색했다.
아마 2009년 설립한 회사에서 만든 이른바 ‘여에스더 유산균’이 대히트를 치고 각종 홈쇼핑에서 판매실적 1위를 달성하는 등 사업가로서 대성공한 아내에 대한 위축감으로부터 나온 자기방어의 발현일 수도 있겠지만, 아내를 존경하기에 자랑삼아 자기비하를 고급지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머리 좋은 사람의 고급 유머. 이를 반증하듯, 남편 홍혜걸이 아내 여에스더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내가 지금까지 만난 남자 중에 당신이 베스트다”라는 평가다. 여에스더가 결혼 전 7년 사귄 남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보다 빨리 두 배 이상 같이 살고 싶다”며 두 사람이 처음 맹세했었는데 어느새 세 배 이상 살고 있어서 행복에 겨운 부부다. 짓궂은 질문으로 반전을 노려봤다. “이혼할 생각 해봤나?” 에스더는 망설임 없이 “멋진 남자를 보면 눈이 돌아가지만, 남편을 사랑해서 이혼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잘라 말한다.
“다시 태어나도 홍혜걸과 결혼하고 싶어요”라고 말하며 부끄러움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다. 24년을 같이 살았는데도 에스더의 가슴은 여전히 소녀같이 뛴다. 처음 포옹할 때 홍혜걸 심장의 쿵쾅거림이 100미터 달리기 후의 느낌이라면 지금 여에스더의 심장소리는 마라톤을 완주한 후 내뿜는 안도감같이 들린다. 의사와의 인터뷰인 만큼 건강하게 사는 법에 대한 팁을 주문했다. “하버드대학의 음식 피라미드에 따르면, 건강을 위해 매일 잡곡밥, 올리브유로 만든 샐러드, 탁구공 두세 개 정도 크기의 껍질 벗긴 닭고기, 과일과 채소 다섯 접시 등을 먹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이렇게 먹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며 방법을 알려주는데 바로 자신이 일생을 걸고 매진하고 있는 여에스더 종합비타민과 유산균이라는 것. 이 대목에서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고 눈이 빛난다. 천생 연구하는 의사 티는 어쩔 수가 없나보다.
어느 날 둘째 아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사귀고 있는 여자 친구를 소개하겠다면서 언제쯤 시간이 되느냐고 물어왔다. 필자가 상경해서 생활한 이후 울산 집을 지키면서 혼자 살고 있는 둘째가 늘 걱정이 됐는데 그 아들이 결혼할 사람을 인사시키겠다고 해서 바로 일정을 잡아 만났다.
아들의 여자 친구는 표정이 밝고 항상 미소를 띠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당돌하게 “아드님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하고 자신감 있게 말했다. 아들이 키도 크고 호남형이라 키가 큰 편이 아닌 예비 며느리와 결혼을 시키기에는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들이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으니 그 선택을 믿기로 했다. 세상이 달라져 요즘 젊은이들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잘 만나지도 않는다 하니 눈치만 보고 빨리 결혼하길 기다렸다.
그 후 시간이 흘러도 결혼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 아들에게 잘 지내는지 슬쩍 물어봤다. 아들도 고민하고 있었다. 이유인즉슨 여자 친구의 아버지가 하나밖에 없는 딸을 너무 좋아해서 서른 살이 넘었는데도 결혼을 좀 천천히 하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우리 부부는 혼자 있는 아들이 걱정되어 빨리 결혼을 시키고 싶었는데 급할 것 없다는 예비 사돈의 생각에 난감했다.
결국 필자가 나서야 했다. 만약 결혼을 더 늦춘다면 다른 혼처를 알아보겠다고 통보한 후 상견례 일자를 빨리 잡도록 했다. 이윽고 상견례 일정이 잡혀 양가 부모가 만났다. 이미 딸을 통해 상황을 전해 들은 예비 사돈도 더 이상 결혼을 늦출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상견례에 나온 것 같았다.
예비 신부의 부모는 생각했던 것보다 젊어 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약 10년 정도 우리 부부보다 젊은 사돈이었다. 서로 결혼하게 되었음에 감사해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상견례가 진행되었다. 길일을 택해 결혼 일정을 잡는 등 결혼식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사돈은 이미 아들과 만나 술도 함께하고 노래방까지 다니면서 아들의 품성을 충분히 검토했다고 한다.
필자는 사돈 내외가 젊어서 오래도록 아들 부부를 가까이서 잘 돌봐줄 것 같아 더욱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안심이 되는 것은 사돈 내외가 우리 아들을 너무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언행 바르고 품성이 좋아 괜찮은 아들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사돈 될 분으로부터 칭찬을 받으니 그날따라 아들이 더욱더 대견했다.
예비부부는 결혼 준비를 척척 해나갔다. 필자는 혼주로서 처음 맞는 결혼식이라 걱정만 했는데 직접 식장을 잡아 예약하고 청첩장 인쇄 등 자신들이 알아서 다 했다. 심지어 청첩인들의 주소와 전화번호만 엑셀로 만들어주자 청첩장 발송 준비까지 다 했다. 예비부부가 직접 주도하니 예단 등 우리 부부가 해야 할 일들만 처리하고 나머지는 조언만 했다.
작은아들 결혼식을 생각하면 아직도 잊히지 않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당시 사돈댁에서 준비한 음식들이 얼마나 푸짐했는지 결혼식에 참석한 손님들이 “그때 정말 잘 먹고 즐거웠다”고 지금까지 인사를 해온다는 사실이다. 귀경 중 차내에서 실컷 맛있게 먹고도 남아 귀가할 때 봉지에 싸들고 갈 정도였다. 사돈 내외분께 두고두고 고맙게 생각한다.
결혼식이 끝나고 파리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얼마 있다가 아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결혼 전에 모아두었던 돈 1000만원이 있는데 아빠한테 보내주겠다는 것이었다. 각자의 부모님에게 결혼 전에 모은 돈을 몽땅 드리고 자기네들은 완전히 새 살림을 시작하겠다는 설명이었다. 요즘 세상 아이들 같지 않았다. 나름대로 새로운 삶에 대한 자신감 같은 것이 보여 대견했다. 비록 큰돈은 아니지만 부모를 생각하는 아이들 생각이 참 장하고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 후 며느리는 더욱 예쁘게 보였다. 아들이 좀 과묵한 성격인데 며느리가 약간 말을 재미있게 하는 편이다. 마치 아들 대변인처럼 우리 부부가 궁금한 것들을 며느리가 속 시원하게 다 이야기해준다. 그리고 진심으로 아들을 사랑하고 있음을 며느리의 언행을 통해 느끼고 있다. 결혼 후 며느리의 첫 생일에 결혼반지 외에는 다른 반지가 없어 극구 사양하는 며느리를 설득해 작은 금반지 두 개를 생일선물로 해줬다.
결혼 2년 차에는 며느리가 아들을 낳아 우리 부부를 더욱 행복하게 해주고 있다. 아내의 핸드폰에는 손주 사진으로 꽉 차있다. 며느리가 매주 손주와 영상통화를 하게 해주고 수시로 카톡으로 동영상과 사진을 보내줘서 우리 부부는 새로운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걱정했던 집 문제도 잘 해결됐다. 40평 임대 아파트를 계약해 2년 후에는 새 집으로 손주와 함께 이사 갈 꿈에 부풀어 있다. 사회에 하나씩 적응해가는 아들 내외의 모습을 보는 게 요즘 우리 부부의 큰 기쁨이다. 며느리는 결혼 전 했던 약속처럼 변함없이 내조를 잘하고 있어 고마운 생각이 든다. 아들로부터 받은 1000만원은 그간 아들 부부로 인해 행복하고 즐거웠던 것을 감안해 그만큼 더 보태서 돌려줘야 할 것 같다. 사이좋게 예쁘게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 고마워 어떻게든 보답을 해주고 싶다.
꼬마였던 두 아들이 어느새 훌쩍 커버려 아내가 될 여자 친구를 소개했다.
둘 다 아직 나이가 어린 편이어서 직장생활을 좀 더 하고 결혼을 하면 했다.
결혼하라고 애원해도 안 가는 아이들도 많다고 해서 좋은 마음으로 결혼 준비를 했다.
큰아들과 작은아들 모두 혼수는 생략했다.
큰아들은 둘이 반지 하나씩 만들어서 끼고 서울의 저렴한 전셋집을 둘이 발품 팔아 신림동
마을버스 종점 쪽에 마련했다. 부모인 우리는 2000만원만 보태준 게 다였다.
가파르게 높은 동네였다. 처음 집을 가서 보는데 목이 메었다.
아들이 눈치를 챘는지 오히려 신림역 종점이라 버스를 앉아서 갈 수 있다며
좋다고 말하면서 위로한다.
그런데 혼인신고도 안 하고 있어 무슨 일인가 했더니 대출을 저렴한 이자로 받으려고 그랬다한다. 한 번 집을 옮길 때마다 자신들이 모은 돈에다가 신혼 대출을 저렴하게 얻어 집을 옮겼다.
우리 걱정은 마세요. 엄마아빠 건강하시고 별일 없으면 돼요. 생활력 있는 며느리를 만나 씀씀이가 좀 헤픈 우리 큰아들이 생활인이 된 것도 감사하다.
큰아들 장가보낸 후 바로 다음 해에 아직 나이도 어린 작은아들이 결혼하겠다고 서둘러댄다.
남의 집 자녀들은 결혼 안 해서 걱정인데 우리 집 자식들은 결혼을 너무 서두르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작은아들은 이미 결혼할 여자 친구와 함께 호주에서 1년간 워킹홀리데이를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결혼해서 바로 떠나면 집 장만 할 것도 없이 그곳에서 직장도 잡고 일도 하면서 전셋집 장만할 비용 마련해올 테니 엄마 아빠는 결혼식에 참여만 하라는 것이다.
이래도 되는 일인가 했다. 그러나 결혼식장 예약 비용부터 결혼 당일 헤어와 양가 부모님 메이크업 비용까지 작은아들이 살뜰하게 계산했다. 몸이 아픈 아빠는 결혼식 날도 의자 가져와서 몇 번을 일어났다 앉았다 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말 나온 김에 하는 것도 좋겠다 싶어 허락했다.
현재 작은아들은 호주에 가서 일도 하고 힐링도 하며 착실하게 월급 모으고 있다. 한국에 와서 자리 잡으려고 준비하고 있는 작은아들 내외와 주말도 반납하고 일하는 큰며느리와 큰아들 모두 생활력이 있어 걱정은 안 한다. 감사한 일이다. 남편도 몸이 안 좋은데 아이들마저 힘들게 했다면 정말 짐이 무거웠을 것이다.
지금은 남편의 몸이 회복되기만 바랄뿐이다. 필자는 열심히 사는 아이들에게 짐이 안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힘은 못 될망정 짐 되는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결혼할 때 다 마련한 집에 몸만 들어갔다. 집은 물론 가구와 가전까지 다 해주셨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꼭 그렇게 하는 것이 좋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겠다. 처음의 그 달달함이 오히려 치열하게 생활인으로 살아가는 데에 지장을 주기도 했던 것이다.
부모는 자식을 강하게 키울 필요가 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문제해결력, 자생력을 키운 아이들이 고맙다. 이제 미안해하지 않으려 한다.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해 졸업한 딸이 당연히 유학을 갈 줄 알았는데 안 가겠다고 선언을 했다.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 공부를 시작해 대충 한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열공을 해 수상 경력도 많고 어려서부터 유명세를 탄 딸이었다.
딸이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으면 유학을 포기하겠다고 선언을 할까. 그 마음 헤아려 얼마 동안 하고 싶은 대로 놔뒀다. 그러는 동안 딸은 어느새 29세가 되었다. 이번에는 조바심이 난 필자가 딸에게 강력하게 선언했다. 시집을 가든지, 유학을 가든지 선택을 하라고.
딸은 쉬면서 취직도 해보고 다른 길을 모색해보려 했지만 흡족한 것이 없었던 것 같았다. 나이 들어가는 딸이 불안해 몰아치자 섬머스쿨을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렇게 미국에서 섬머스쿨을 마치고 음악 도시들을 여행하며 재충전을 하더니 다시 피아노 공부를 하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유학을 결심했다.
두려운 마음으로 지원을 하고 유학을 떠난 딸이 드디어 대학원을 졸업했다고 전화를 해왔을 때 필자는 “이제는 결혼을 해야지!”라고 말했다. “네가 아무리 유명한 피아니스트라 해도 싱글은 안 돼”라고 하니 남자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서울로 와서 선을 보라고 했다.
고민해보겠다던 딸은 며칠 후 다시 전화를 해왔다. “엄마, 사실은 나를 언제까지라도 기다리겠다는 사람이 있어.” 누구냐고 물었더니 나이가 많이 어리다고 했다. 필자는 난감했다. 지금 ‘no’ 하면 혼기를 넘길 게 분명했다. 일단은 “그래? 그러면 결혼하면 되지 뭐”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겁이 덜컥 났다. 우선 마음을 진정하고 날을 잡아 보스턴으로 갔고 그곳 시청에서 시댁 식구와 우리 부부, 그리고 유학 중인 아들이 참석해 결혼식을 올렸다.
딸은 사위를 섬머스쿨 때 만났다고 했다. 그런데 유학을 가서 다시 만나게 되어 인연인가보다 했단다. 딸은 졸업을 했지만 사위는 아직 대학원 재학 중이라서 보스턴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둘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필자도 마음이 놓였다.
그 해 여름, 서울에서 다시 결혼식을 올렸다. 하객들은 신랑이 몇 살이냐고 물어왔다. 필자는 시침을 떼며 차이가 나는 나이의 반을 줄여 대답했다. 베네수엘라에서 태어나 모국에 처음 온 사위는 매우 신기해하며 한국이 너무 좋고 맛있는 것도 많다며 서울에 와서 꼭 살고 싶다며 흥분했다.
경주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딸네 부부는 바로 보스턴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년 후 첫아들을 낳고 대학원을 마친 사위는 딸과 함께 서울로 왔다. 현재 대학 교수로 자리를 잡고 제자를 가르치며 연주생활에 열중하고 있다. 사위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이며 여러 악기를 다루고 작곡도 한다. 재주꾼에 꽃미남이다. 하루는 연주회에 참석한 기자가 “저 부부는 좀 이상하다”며 취재를 했다. 딸보다 8년 어린 사위의 정보는 곧 모두 공개가 되었다. 그러면서 딸네 부부의 인기는 더 올라갔다.
딸이 결혼할 때만 해도 연하 남자는 흔치 않았다. 지금은 연상·연하 커플도 많고 다른 사람 눈치 보는 시대도 아니다. 필자도 이제 사위의 나이를 더 이상 숨기지 않는다. 꽃미남인 사위가 가족모임에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보면 귀여워서 저절로 싱긋 웃는다. 우리 딸의 남편 선택은 정말 기발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18년 전 아내와 이혼하게 되었을 때 아내가 재산분배에 대한 계산서를 내밀었다. 지금 회고해보면, 아내나 필자가 이혼 얘기는 많이 했지만, 실제로 이혼할 생각이 확고했던 것은 아니었다. 졸지에 퇴직을 하게 된 충격으로 필자는 다른 일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잘못해서 이혼 당할 유책 배우자도 아니니 이혼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내가 얼굴만 보면 이혼 얘기를 꺼내 견디기 어려웠다. 이혼 절차를 밟아도 마지막으로 구청 신고를 하지 않으면 별거를 하다가 재결합의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아내가 내민 계산서를 제대로 따지지 않고 서명을 했다.
당시 아내가 내민 계산서에는 우리가 가진 재산이, 동산과 부동산 합해서 5억 원 정도로 되어 있었다. 50평짜리 아파트가 2억5000만원 정도였다. 맞벌이를 했으므로 아내가 축적한 비자금이 상당액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아내는 가진 동산이 한 푼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필자의 동산은 퇴직금과 당시 주식시장에 약간의 여윳돈을 넣고 있던 것까지 합해 2억5000만원으로 계산했다. 그러나 깡통계좌가 속출하던 시절이어서 주식시장에 넣어두었던 돈의 잔존 가치는 별로 없었다. 증권회사 직원의 강권으로 대박이 난다는 텔슨전자 주식을 샀다가 얼마 안 되어 상장 폐지되면서 휴지가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내의 계산서에는 투자한 원금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부부가 재산을 반분하면 필자 몫이 2억5000만원인데 아내는 여기서 또 1억원을 떼었다. 왜냐고 물으니 앞으로 있을 아들딸 결혼자금이라는 것이었다. 왜 벌써 떼냐고 물으니 10년 후 아들딸이 결혼할 때 필자가 경제적 여력이 없을 수도 있고 다른 여자와 재혼하면 입장이 달라져 오리발을 내밀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내도 오랜 시간 고민했고 주변에서도 그렇게 충고를 한 모양이었다. 필자는 재결합의 가능성도 열어놓았으므로 다투지 않고 그대로 수락해줬다. 결국 필자에게 남은 돈은 장부가격으로는 1억5000만원이었지만 주식으로 날린 돈 때문에 잔존 가치는 5000만원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돈이면 일단 원룸을 전세로 얻을 돈은 되니까 그대로 수락하고 짐을 씨서 나왔다.
독립을 하고 나서 당장 수입이 없어 막막했다. 그래도 아직 젊고 건강했으므로 믿는 구석이 있었다. 스포츠용품 업체들이 밀집해 있는 동대문 지역에 빌붙어 있다 보면 무슨 수가 생길 것 같았다. 세계적인 스포츠 브랜드 ‘Umbro’ 대표이사를 지냈기 때문에 경력도 있었고 영어가 취약한 업체들이 필자를 필요로 할 거라고 예상했다. 마침 계약 추진 중이던 이탈리아 스포츠 브랜드 ‘Kappa’도 결국 다음 해 성공적으로 따내서 성가를 높이고 있었다. 개인 사업도 바이어 중 하나가 당시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의 메인 스폰서로 선정되면서 매출이 급증해 승승장구했다. 형제간에 끝없는 갈등을 낳게 했던 아버님 유산도 필자가 나서서 해결하고 공평하게 배분받았다. 그렇게 해서 경제적으로 기사회생하고 겨우 노후 대비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0년 후 아들의 결혼 소식을 접했다. 아들은 그동안 엄마와 같이 살았으므로 결혼 준비는 전 아내가 다 했다. 아내는 이혼할 때 떼어줬던 돈으로 오피스텔을 사서 자금을 불렸고 그 돈으로 아들에게 신혼집으로 작은 빌라 전세를 얻어줬다. 그리고 예물이며 결혼식장 계약 등은 전 아내와 아들이 직접 해결했다.
이윽고 아들의 결혼식 날, 아내와 필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정상적인 부부처럼 나란히 서서 하객들을 맞았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었다. 그날 온 하객들의 80%는 필자가 부른 손님들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던 전 아내의 직장 동료들 몇 명과 처가 친척들을 빼고는 거의 필자 손님이었다. 직장은 물론 동창모임, 댄스와 커뮤니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한 사회활동을 한 덕분에 필자의 손님들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전 아내나 필자 모두 처음 치러본 결혼식이라 잘 몰랐을 수는 있다. 그러나 전 아내가 결혼식이 끝났는데도 하객 명단을 필자에게 안 주고 시치미를 떼는 것이었다. 아내의 직장 동료들이 접수를 봤고 그대로 아내에게 전달되었으므로 필자는 아는 것이 없었다. 하객들이 누가 왔고 축의금으로 얼마를 냈는지 알아야 인사도 하고 추후 관혼상제가 있을 때 갚아야 할 돈이라 반드시 명부가 필요했다. 필자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아내는 우여곡절 끝에 명부를 건넸다. 필자는 그것을 기초로 결혼식장에 와준 하객들에게 직접 인사 또는 감사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런데 누구 손님인지를 가려 들어온 축의금을 그대로 나눠야 하는데 아내는 한 푼도 못 내놓겠다고 했다. 그동안 아들에게 들어간 양육비며, 사두었던 오피스텔이 안 올라 신혼집 빌라 전세금 마련하느라 힘들었다는 얘기였다. 이혼 초기에는 필자도 상당히 어려웠다. 밥은 안 굶었지만, 여윳돈이 없어 당장 전세금을 올려달라 하면 대책이 없었던 시절이다. 반면, 전 아내는 살던 집도 있었고 직장도 있었으므로 아이들 양육에 큰 문제가 없었다. 아이들이 크면서 아르바이트를 통해 경제적으로 도움도 주고 있었다. 돈 문제로 다투는 것이 아이들 보기에도 안 좋은 것 같아 포기했으나 섭섭한 마음은 금할 길이 없었다.
덕분에 이제는 아내와의 이혼이 엄연한 사실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특히 돈 문제에서는 한 푼의 양보도 없는 전 아내의 냉정한 태도를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들이 결혼도 했으니 전 아내를 배척할 필요까지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느슨했던 마음이 냉수 마시고 정신 차린 계기가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아들딸 결혼식을 대비해서 미리 돈을 떼어놓아야 한다는 아내의 속셈은 신의 한 수였다. 주변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전 아내는 필자를 가능한 한 빈털터리로 내보내면 얼마 안 가 못 버티고 항복하고 다시 들어올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아직 딸이 출가 전이다. 제 말로 결혼은 필수가 아니라니 결혼할 의사가 없는 듯하다. 아빠로서 결혼을 강권하고 싶지도 않다. 스스로 알아서 할 일이다. 더구나 제 힘으로 벌어 이미 그럴듯한 아파트 한 채도 사놓았다. 필자가 18년 전에 남긴 결혼 비용 5000만원을 얼마나 불려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큰 아파트로 이사 가는 데 보태라고 했다. 그러나 요즘 같은 세상에 재테크에 밝은 똑똑한 딸이나 신의 한 수를 두었던 전 아내가 이 방면에 해박하니 알아서 할 일이다.
필자에게 기차여행은 생각처럼 쉽지 않은 여행이라 늘 마음만 먹다가 말곤 했다. 특히 국내에서는 자동차로 갈 수 있는 곳이 많아 더욱 그랬다. 그러다 보니 특이하게도 국내에서는 거의 해보지 못하는 기차여행을 해외여행 중에 하곤 했다. 뮌헨에서 잘츠부르크로, 프랑크부르크에서 로맨틱가도로, 또 파리에서도 그랬고, 비엔나에서 부다페스트로, 일본에서는 북해도나 하코다테에서도 그랬고, 교토나 고베 등 숱한 기차여행을 해외에서 많이 한 셈이다.
시드니 여행에서도 두 번 정도의 기차여행을 했다. 그중 동화 속 작은 마을 같은 울릉공(Wollongong)을 가려면 기차를 타야 해서 시드니 센트럴 역으로 갔다. 아침 찬바람에 한기가 온몸으로 엄습했다. 그곳은 8월 중순이어도 아직 겨울이었기 때문이다.
울릉공 역으로 향하는 시티레일은 남쪽으로 80Km 정도 달려서 약 두 시간쯤 걸리는데 차창 밖의 겨울 풍경이 우리나라의 늦가을의 풍경이었다. 차분하고 맑았다. 차츰 울릉공이라는 안내 글자와 그림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기차가 역에 멈추자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기에 당연히 울릉공이라고 생각하고 무심히 따라 내렸다. 사람들이 몰려가는 방향으로 따라가다 보니 젊은 아이들이 모두 버스에 올랐다. 그제야 우리 부부는 그 버스가 울릉공대학 스쿨버스였음을 알게 됐다. 한 정거장 먼저 내린 것이다.
“어쩌지?” 하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자, 후덕해 보이는 아줌마 운전기사가 내려오더니 우리에게 자기네 스쿨버스에 타라고 한다. 그리고 다음 정류장에서 하차해 그린색 셔틀버스를 이용하라고 친절하게 안내한다. 젊은 대학생들로 가득 찬 울릉공대학 스쿨버스 덕분에 우리는 목적지인 울릉공에 무사히 도착했다. 지금도 가끔씩 떠오르는 여행 장면이다.
그날 울릉공으로 들어섰을 때 멀리 있는 등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넓고 화려하진 않지만 정겨움이 느껴지는 해변이었다. 휴식을 위해서, 사색의 시간이 필요해서, 행복한 대화를 위해서 우리는 그곳에 있었다. 갈매기가 사람과 같이 놀아주는 곳, 낮은 파도가 마음을 위로하는 곳, 바람이 좋아서 맑은 날에는 행글라이딩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 시드니의 명물인 오페라하우스의 화려함이나 거대한 하버브리지만큼 대단하지는 않아도 여행자를 편안하게 해주는 정감 있는 곳이 바로 울릉공이다. 요즘엔 우리나라 사람들이 신혼여행지로도 찾기 시작했다 한다.
해안가를 거닐다 보니 바닷가의 그들과 동지의식이 절로 생겼다. 여유롭게 벤치에 앉아 겨울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그 시간을 온전하게 누렸다. 그런 시간들을 다시 누리기는 어렵겠지만, 가끔삶이 고단하거나 숨이 차오를 때 가끔씩 그 시간들을 떠올리며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다면 울릉공에서의 하루는 값진 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문득 호주 여행의 잔잔했던 그날이 떠오른 것은 가라앉은 계절 탓일 수도 있다. 그 바닷가의 반짝거리던 햇살만큼 따뜻했던 울릉공역 카페의 커피 한 잔이 그리워지는 초가을 아침이다.
임대해주고 있는 아파트가 한 채 있다. 전세금이 워낙 빠르게 오르다 보니 다시 연장 계약할 때 전세금으로 100% 채우기는 불가능해서 오른 차액을 월세로 받은 적도 있다. 그러나 금리가 워낙 싸다 보니 금리로 계산한 월세는 수입에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전세로 하자고 하면 그렇게 해줬다.
세입자들은 사정이 어려운 사람들이다. 그래서 필자는 전세금을 주변 시세보다 싸게 받는다. 많이 받아봐야 보증금 정도. 결국 세입자가 나갈 때 내줘야 하는 돈이다. 2년마다 오르는 전세금으로 차액이 생기니 생활비로도 쓰고 잘 굴려서 몇 푼의 금리 덕을 보긴 한다. 그러나 인구가 줄어들고 있으니 일본처럼 언젠가는 집값이 폭락하고 전세금도 폭락할지 모른다. 깡통 전세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무리하게 시세대로 다 챙기려 하지 않는다. 아직까지는 오를 때마다 생긴 차액을 잘 관리해 재미를 보고 있지만, 자칫하다가는 원금을 날릴 수도 있다는 점을 늘 염두에 둔다.
한번은 필자가 그 아파트에 들어가 살 생각으로 세입자에게 이사할 의사가 있냐고 물어보니까 싸게 들어왔기 때문에 그 돈으로는 다른 데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며 거절했다. 싸게 전세를 준 것이 오히려 덫이 된 것이다. 매번 싼 전세금으로 계약을 하다 보니 손해 볼 때도 많다. 만기가 안 되었는데 중간에 이사 갈 사유가 생겼을 때 하루라도 빨리 나가야 하니 새로 올 세입자에게도 그 금액에 해달라고 간청을 하는 것이다. 그래야 전세가 나가지, 그렇지 않으면 언제 나갈지 모른다는 것이다.
만기가 되었는데 전세가 안 나갈 때도 그렇다. 시기적으로 이사 시즌이 아니거나 동시에 전세 매물이 한꺼번에 나온 경우다. 이사 갈 세입자가 급하다고 사정하면서 남들보다 싸게 내놓아야 빨리 나간다며 간청을 한다. 그러면 그렇게 해줄 수밖에 없다. 한번은 세입자들이 도배, 장판 등을 요구한 적이 있다. 그 아파트에는 더 이상 돈을 들이고 싶지 않아 도배, 장판 안 하는 조건으로 전세금을 많이 깎아준 적이 있다. 그때 세입자가 자기 돈으로 도배, 장판을 했는데 그런 이유로 그 동네에서 전세금이 가장 싼 아파트가 됐다.
그 동안의 경험으로 보면, 신혼부부는 만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중간에 이사 가는 경우가 많았다. 둘이 다투고 나서 별거나 이혼에 들어가는 사정 때문이다. 중개 수수료를 부담하지 않아도 되니 그건 나쁘지 않다. 금융기관에서 전세 대출을 받아 전세로 들어오는 사람도 있다. 이럴 때는 전세금 반환을 금융기관으로 해야 해서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다.
가장 안정적인 세입자는 신혼을 벗어난 부부인데 매번 세입자를 고를 형편이 못된다. 부동산 중개인이 다리 놓아주는 대로 계약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부부는 만기가 되어도 연장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아 중개 수수료를 더 들일 필요가 없다. 좋은 조건이다. 세입자 잘 만나는 것도 집 주인의 복이다.
저녁식사를 하지 않으려다 늦은 시각에 라면을 먹었다. 필자는 라면을 무척 좋아하지만 건강에 별로 좋지 않다는 상식을 갖고 있어 짭짤하고 입맛 당기는 유혹을 뿌리치고 거의 먹지 않는다. 그래도 다용도실 식품보관함에는 언제나 몇 개쯤은 준비되어 있다. 밀가루 음식을 좋아하는 필자가 이날은 칼국수도 수제비도 아닌 매콤하고 짭짤한 라면이 생각나 한 개를 끓였다. 잘 끓여낸 라면은 면발이 부드럽고 탄력이 있어 후루룩 빨아 당기는 맛이 그만이다.
맛있게 먹기는 했지만 다 먹고 나니 배가 부르고 너무 맵고 짜서 입안이 개운치 않았다. 밤 9시가 다 된 시간이었지만 운동을 하고 오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았다. 아파트 뒤편으로 왕복 4km 거리를 걸을 수 있는 산책로가 있어 환한 대낮에는 거의 매일 걷고 있지만 밤이라 조금 망설여졌다. 그래도 산책로에 가로등이 있고 간혹 창밖을 내다보면 늦은 밤에도 운동 나온 사람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용기를 내어 운동화 끈을 매었다.
산책로에 들어서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운동을 하러 나와 있었다. 나이 지긋한 분부터 귀여운 강아지를 데리고 나온, 신혼부부 같은 커플도 보인다. 캄캄한 밤에 나오면 무서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으니 안심이 되었다. 필자는 팔을 휘두르며 열심히 걷기 시작했다. 버스정류장 기준으로 세 정거장쯤 되는 곳에 필자가 잘 가는 재래시장이 있는데 그곳을 지나다 보니 산책로 위쪽 음식점이 불야성처럼 불을 밝히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
음식점 앞에 펼친 테이블에서 사람들이 즐겁게 웃으며 한잔하는 모습이 무척 신기하고 생동감 있는 풍경으로 다가왔다. 밤이 되어도 사람들은 이렇게 왁자지껄 유쾌한 시간을 보내는구나 하며 필자도 누군가와 그 무리에 섞여 떠들썩하게 얘기도 하며 웃어보고 싶었다. 이전에는 밤에 집 밖을 나선다는 걸 생각해보지 않았다. 모임이 있어도 낮 시간에만 실컷 놀다가 저녁할 시간이 되면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주부는 저녁 이후로는 집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던 것 같다.
한때 디자인학과를 원했던 아들이 입시에서 떨어져 1년을 재수했다. 홍대를 목표로 입시학원과 실기학원을 다녔는데 실기수업을 마치는 시간이 늘 자정을 훌쩍 넘겼다. 대중교통도 끊어지는 시간이었고 학원버스는 집까지 연계되지 않았다.
필자는 매일 밤 운전해서 정릉에서 광화문을 지나 사직터널과 연대 앞을 통과해 홍대까지 아들을 데리러 다녔다. 그때 필자는 휘황한 밤거리를 봤다. 너무나 많은 차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어 매우 놀랐다. 늦은 밤에도 그렇게나 많은 사람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필자만 몰랐던 밤의 문화였다.
밤의 산책로는 낮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장마 후 개울 물살이 빨라졌다. 낮에 보았던 청둥오리 가족은 다 어디로 갔을까? 어디서 자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개울을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필자 옆으로 많은 사람이 스쳐지나가고 있다. 왕복 4km를 빠른 걸음으로 걷고 오니 땀도 나고 기분이 좋다. 앞으로는 낮뿐 아니라 야간산책도 가끔씩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청춘아 어디로 갔니, 소리 없이 흘러가는 세월이건만, 그것이 인생이더라.’ 오승근(吳承根·66)의 새 앨범 수록곡 ‘청춘아 어디갔니’의 가사다. 노래 속 그는 청춘을 찾고 있지만, 현실 속 그는 “내 청춘은 바로 지금”이라 말한다. 노래하는 지금이 청춘이고, 노래를 불러야 건강해지고, 세상을 떠난 뒤에도 노래와 함께 남고 싶다는 천생 가수 오승근. 사진을 찍을 때 “주름은 지우지 마라”며 뭐든 자연스러운 게 좋다는 그의 미소에는 특유의 편안함이 배어 있었다. 아내(故 김자옥)가 떠난 뒤, 이제는 살림도 제법 하면서 싱글라이프를 톡톡히 즐기고 있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지금껏 나온 앨범 표지 중에 표정과 의상이 가장 밝아요. 밝기도 하고 젊기도 하죠. 한동안 ‘내 나이가 어때서’를 많이 불렀잖아요. 이후에 다른 곡들도 발표했는데 사람들에게 어필이 안 됐어요. 그 노래의 인상이 너무 강하다 보니까. 이번에는 ‘내 나이가 어때서’를 뛰어넘는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표지 촬영한 것 중에 중후한 멋의 사진들도 있었는데 사진작가나 기획사에서는 젊게 나가는 게 좋겠다 하더라고요. 그래서 얼굴에 포토샵도 하고(웃음). 나야 그런 거 안 하는 게 자연스럽고 좋긴 하죠.
타이틀곡으로 ‘맞다 맞다 니 말이 맞다’를 고른 이유가 있나요? 전체적인 흐름이 좋았어요. 리드미컬하고, 따라 부르기 쉽고. 나이 들고부터 곡 고르는 기준이 달라졌어요. 예전에는 남이 어떻든 간에 나를 나타내려고 가수를 위한, 내가 좋아하는 노래만 했거든요. 요즘은 반대로 “이 노래는 내 노래가 아니라 여러분을 위한 노래”라고 하고 불러요. 내가 좋아하는 노래보다는 대중과 함께할 수 있는 노래를 부르려고요. 예전에 ‘투에이스’, ‘금과은’ 시절에 불렀던 노래는 듣기는 좋아도 따라 부르긴 어려웠어요. 그래도 여전히 찾는 팬들이 있어 자주 불러드리곤 하죠.
‘떠나는 님아’, ‘빗속을 둘이서’ 등 청춘 시절 노래를 부르면 어떤 감정이 드나요? 이전과 많이 다를 것 같은데요. 노래는 말이죠, 젊었을 때와 나이 들어서의 감정이 똑같아요. 오히려 노래를 부르면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나죠. 다만, 나이가 들어서 까랑까랑하던 높은음이 안 나오는데, 그럼 키를 낮추면 되니까. 동년배는 지금 목소리를 더 좋아하기도 해요. 청춘이라는 것도 꼭 20대만을 뜻하는 건 아니에요. 40대가 된 사람이 30대를 그리워하는 것도 청춘이고, 60대가 50대 떠올리는 것도 다 청춘 아니겠어요? 노래는 그런 감정의 매개체 역할을 하는 거죠.
타이틀곡 ‘맞다 맞다 니 말이 맞다’에서 ‘사랑해서 미안합니다’라는 가사는 어쩐지 애잔하더라고요. 아내를 향한 감정이 담긴 것이 아닐까 궁금했어요. 그런 건 아닌데,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나도 조심스럽게 부르긴 해요. 그만큼 사람들이 공감하는 가사이기 때문이죠. 사랑하는데 왜 미안해? 물어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미안할 수도 있거든요. 연인이나 부부, 자식 관계도 그렇고 모든 게 사랑한다는 이유로 서운하기도 하고, 상처도 주고 하니까요.
아내를 위한 추모곡 계획은 없나요? 안 하려고 해요. 추모는 그 사람을 계속 기억한다는 건데, 그러면 괴로움도 계속되는 거예요. 그 마음 아픈 게 얼마간은 있을 수 있지만 10년 20년 그렇게까지 가는 건 바람직하지 않죠. 노래로 만들어놓으면 계속 남잖아요. 그건 남들에게 자꾸 ‘가지고 있어라’ 강요하는 거밖에 안 돼요. 그 사람도 좋은 곳에 갔을 거고, 우리 애들하고 나하고 기도하고 그러니까. 다들 그런 그리움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주면 좋겠어요.
아내의 부재가 마음이 쓰여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라는 말을 나중에 물어보고 싶었어요. “어떻게 지내세요?” 똑같아요. 조금 달라진 거는 일하고 집에 갔을 때 같이 있었는데 이젠 혼자 있다는 것. 그 차이일 뿐이죠. 한동안은 같이 있다고 생각했었어요. 잠시 여행 갔다고 말이죠. 전에 같이 있을 때도 몇 개월씩 여행을 다녀오곤 했으니까. 어디 갔구나, 곧 오겠지, 근데 어떻게 하지? 혼자 밥해야 하네? 그렇게 조금씩 실감했어요. 애절하게 ‘나 외로워’ 이건 아니고. 물론 그럴 때도 있지만 매일 그러지 않죠. 그러면 남은 사람이 힘들어져요.
살림 솜씨가 늘었겠어요. 요리도 잘하세요? 잘하죠. 나 설거지도 잘하고 반찬도 잘하고 청소도 잘해요. 처음에는 (장가간) 아들하고 같이 살려고 했어요. 근데 아이들도 나도 편하게 살려면 분가하는 게 좋겠더라고요. 아내랑 함께 살던 집에서는 내가 못 지낼 것 같은 거예요. 거실이며 부엌이며 그 동네 어귀에도 아내와의 추억이 남아 있는데…. 거기 사는 건 내가 너무 괴롭다. 아빠가 나갈게. 그러고는 아내랑(봉안당) 가까운 판교에서 혼자 살게 됐어요.
그야말로 싱글라이프네요. 일상에서의 즐거움은 뭔가요? 내가 참 감사한 게 주변 친구들을 보면 다 실업자들이에요. 직장인들은 정년퇴직하고, 사업가들은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근데 나는 정년 없지, 새 노래도 만들 수 있지. 자기 관리만 잘하면 100세까지도 할 수 있는 거니까. 또 애들 엄마 하늘에 가면서 일찌감치 상속 정리를 했어요. 그러니 내가 벌어서 나만 쓰면 되고, 쓰고 남으면 좋은 데 봉사하고, 눈치 보지 않고 쓰고 싶은 데 쓰고 먹고 싶은 거 먹고 그러지. 그 자체가 즐거움이죠.
자기 관리 비법이 따로 있나요? 노래를 하면 젊어져요. 엊그제도 몸이 안 좋았거든요. 그러다 무대에서 섰는데 원래 부르기로 한 세 곡을 다하고 앙코르를 해서 총 다섯 곡을 불렀어요. 노래하면서 에너지를 채운 것 같아요. 노래가 약인 거죠. 지방 갈 때 아침엔 컨디션이 안 좋다가도 다녀오면 좋아져요. 매니저한테 나 오래 살길 바라면 일 많이 잡아줘야 한다고 해요(웃음). 약이 되는 피곤함이랄까?
일 외에 취미생활은요? 여행은 안 다니세요? 운동 삼아 골프도 치고, 여행도 가끔 가요. 사람을 골라서 만나지는 않지만, 여행 파트너는 마음이 맞아야 하거든요. 함께 다니던 가장 친한 친구가 작년에 세상을 떠났어요. 50년 지기인 데다가 마음도 참 잘 맞았는데… 그러는 바람에 이제 누구랑 여행을 가야 하나 싶어요.
요즘은 혼자 여행 다니는 사람도 많잖아요. 혼자가 좋다고들 하는데, 그건 정말 혼자가 되어보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나도 자다가 어떻게 될까 싶어 무섭고 외로워요. 여행은 좋은 사람과 함께 가는 게 최고죠. 어떻게 보면 지금이 얽매일 것 없어 여행 가기 좋은 때이기도 해요. 얽매이는 건 가정인데, 아이들도 다 커서 자유로워요. 근데 오히려 편하니까 나태해지더라고요. 이게 아니다 싶으면 스스로 채찍질도 하죠. 온전한 자유 안에서의 불안이 있잖아요. 고삐가 없는 것처럼.
자유로운 지금, ‘내 나이가 어때서’ 노래처럼 도전하고 싶은 일은 없나요? 나는 내 나이를 몰라요. 생각 안 해요.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하고, 가고 싶은 데 있으면 가고. 친구들에게 그래요. 너희들 돈 쓸 날도 얼마 안 남았어! 좋은 것도 한때이지 쓸 수 있을 때 쓰고, 재미있게 즐겨야죠. 지금처럼 자유롭게 지냈으면 하는 게 바람이에요. 오히려 도전, 목표 이런 걸 정해놓으면 거기에 구애받으니…. 자연스러운 게 좋아요.
‘자연스러운 것’을 선호하는 편이네요. 원래 성격이 그랬나요? 아뇨. 예전에는 그렇게 했어도 구애를 받게 되죠. 옆에 사람(아내)이 있으니까. 신혼 때는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지내왔는데, 살다 보니까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맞추는 게 좋더라고요. 아내가 좋아하는 쪽으로 계속 바뀌었죠. 근데 이제 상황이 달라졌잖아요. 요즘 나를 말하자면 자유분방 그 자체?
여전히 아내 얘기를 자꾸 하게 되는데, 솔직히 불편하지는 않나요? 할 수밖에 없죠 뭐. 크게 불편하지는 않아요. 근데 너무 길게 이야기하지는 말자 그래요. 그럼 또 생각나니까… 내가 힘들어져요. 그냥 이렇게 이야기하다가 물 흐르듯 지나가면서 하는 정도가 괜찮아요.
아내 김자옥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우리는 만나고 6개월 만에 결혼해서 서로를 다 알지는 못했어요. 살면서 느끼고, 알아갔죠. 다음 생에서도 그 사람과 함께할 수만 있다면, 다시 결혼하고 싶은 그런 여자예요. 근데 나뿐만 아니라 참 많은 사람이 사랑했잖아요. 아내가 떠날 때도 사람들이 정말 많이 왔어요. 이 사람 참 잘 살았구나 생각했죠. 내가 죽을 때도 그럴까 싶어요.
대중에게 오승근은 어떻게 기억되길 바라나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내 노래가 흘러나왔을 때, 아 이 사람! 그렇게 노래와 가수가 함께 떠오르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내가 세상에 없더라도 노래와 함께 회자되고 남아 있다면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에요. 노래 자체가 나의 정체성이고, 나의 정체성이 노래로 표현될 수 있는, 그런 게 대중에게 공유될 수 있다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