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하면 안 되지!” 남편의 호통에 새댁은 눈물이 맺혔다. 결혼한 뒤 신랑을 돕겠다며 세탁소로 나섰는데, 그녀의 실수에 용서가 없었다. 서운함이 밀려왔다. 결혼생활 26년이 흐른 지금, 그녀는 “그 시절의 고생이 자긍심의 밑거름이 됐다”고 말하면서 “이젠 내가 남편에게 잔소리할 정도가 됐다”며 웃는다. 최근 양장기능사, 양복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 의류수선집을 창업한 박정단(朴廷丹·50) 씨 이야기다.
서울시 강동구 고덕동에 위치한 아파트 단지 내 3평 남짓한 가게.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재봉틀과 ‘단이네패션옷수선’이라고 적혀 있는 간판이 옷 수선집임을 알려준다.
박 씨가 이 가게를 연 지는 1년 6개월 정도 됐다. 그녀는 “이제 자리를 잡아 멀리 하남에서도 고객이 찾아올 정도”라고 말한다. 과감히 도전한 창업은 연착륙에 성공했지만, 그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박 씨가 처음 재봉틀을 잡은 것은 신혼생활을 시작하던 무렵이다. 신랑 혼자 세탁소를 운영하는 것이 힘들어 보여 돕겠다고 나섰다. 봉제일을 하던 친언니에게 어깨너머로 재봉질을 배운 적이 있어 조금 고생하면 적응할 수 있겠다 싶었다. 벌써 26년 전 일이다.
생계 위해 시작한 일, 26년 차 베테랑
“처음엔 고생이 심했죠. 수선 기술을 남편에게 배웠는데, 손님 옷을 다루는 일에 대해 매우 엄격했어요. 잔소리를 들을 때마다 서럽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했지만, 덕분에 한 번도 손님 옷 망가뜨린 적 없이 지금까지 이 일을 잘 해왔어요.”
그러다 남편이 신학 공부에 뜻을 품으면서 박 씨가 의류 수선집을 차려 독립했다. 물론 운영이 쉽지 않았다. 가게를 포기하고 식당에 취업해 일하다 쓰러진 적도 있을 정도. 결국, 의류 수선으로 돌아왔다. 남다른 손재주 덕분에 가게는 점차 손님들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두 아이와 남편 뒷바라지까지 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박 씨는 일을 하면 할수록 궁금한 게 많아졌다. 바로 봉제와 의류 제작의 기본 이론에 관한 것들이었다. 주변에선 26년 차 베테랑이라고 치켜세웠지만, 자신의 지식이 금세 바닥을 드러내는 것 같아 늘 부끄러운 마음이었다.
“옷 수선과 제작은 전혀 다른 작업이에요. 저도 원단을 사다가 아이들 옷을 만들어 입혀보기도 했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꽤 있었어요. 옷을 만들고 수선할 때도 기초가 중요한데 저는 남편에게 주먹구구식으로 배웠으니까요. 기본이 부족하다 보니 옷을 과감하게 절개하거나 디자인을 바꿀 때 주저하게 되더라고요. 또 오랫동안 터득해온 지식들이 제대로 된 것인지도 검증받고 싶었고요.”
그러다 알게 된 곳이 서울시 산하 기관 동부기술교육원. 의상 제작 분야에서 강점이 있는 곳이라는 지인의 소개에 공부에 대한 열망이 더 커졌다. 하지만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하루 종일 매여 있어야 하는 가게 때문이었다.
“며칠 고민하다가 결심을 했죠. 가게를 정리하기로요. 교육원 다니는 김에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어요. 그동안의 궁금증을 다 풀어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일을 하면서는 공부를 못할 것 같았어요. 말 그대로 올인하기로 한 거죠.”
“제대로 배우자” 하고 가게 정리해
수십 년간 현장에서 배우고 익힌 기술은 몸이 기억하도록 많은 습관을 남긴다. 당연히 좋은 습관도 있지만 나쁜 습관도 있기 마련. 오랜 기간 수선일을 해왔다고 해서 배우는 과정이 순조롭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무척 조심스러웠어요. 또 20년 넘게 재봉틀을 잡고 살아온 사람이 더 배우겠다고 왔으니 가르치는 분이 부담스럽지 않을까 걱정도 됐죠. 하나라도 더 배우고픈 마음에 말과 행동을 조심했어요.”
박 씨는 배우는 과정이 기쁨 그 자체였다고 표현했다. 20여 년간 쌓였던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고. 옷본(패턴)이나 봉제 원리에 대해서도 점점 눈이 열렸다. 동부기술교육원에서 공부를 한 뒤 단순한 수선이 아닌 다양하면서도 과감한 시도를 할 수 있게 됐다고 박 씨는 말했다.
“바지를 수선할 때 허리 1인치 줄인다고 엉덩이까지 그만큼 줄이면 안 돼요. 손님 체형을 고려해야 하는데, 특히 입던 옷을 수선할 경우엔 신체의 변화도 파악해야 합니다. 예전엔 옷을 망가뜨릴까봐 하지 못했던 작업도 원리를 알고 난 뒤부터는 과감하게 해요. 다행히 만족하시는 고객이 많아요. 몸에 딱 맞게 수선하는 솜씨가 맘에 드는지 아예 기성복을 사와 맞춤옷처럼 만들어 달라 하시는 분들이 늘었어요.”
일감이 많아지면 가끔 남편에게 도움을 청하는데, 이제는 그녀가 남편 솜씨에 대해 지적을 한다. 입장이 역전된 것이다. 박 씨는 “신랑에게 혼나며 배웠던 시절을 생각하면 고소한 마음도 든다”며 웃었다.
여성들에게 권하고 싶은 직업
오래된 옷을 최신 스타일로 바꾸려는 손님이 늘면서 유행에도 민감해졌다. 사람들이 선호하는 스타일을 알기 위해 그녀가 주로 살펴보는 교재는 바로 드라마다. 예전에는 보는 둥 마는 둥 했지만 일에 재미를 느끼면서 젊은 연예인들의 의상 핏이나 스타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20년 넘도록 같은 일을 해오고 있지만, 재교육을 통해 제2인생을 살게 된 셈이다.
이러한 재미는 자연스레 수익으로도 이어졌다. 박 씨는 “여자 수입치고는 괜찮은 편”이라고 말하면서 중장년 퇴직자나 경력단절 여성들에게 의류 수선을 권하고 싶다고 했다. 물론 동네마다 수선집이 한두 곳 있어 경쟁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6개월 이상 배우고 노력하다 보면 자리 잡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생각보다 이 분야에 대해 교육을 하는 곳이 많지 않아요. 배우고 싶어도 쉽지 않죠. 요즘은 손님들의 요구가 정말 다양합니다. 그래서 제대로 배우고 일을 시작하는 게 좋습니다. 특히 여성들 옷은 값비싼 게 많아 손을 대려면 겁부터 나니까요. 그래도 한 번 만족하면 단골이 되고, 단골이 늘면 바빠지는 것이 체감이 돼요. 패션에 관심이 많거나 손재주 있는 분에게 추천하고 싶은 직업이에요.”
청첩장을 많이 받는 계절이다. 모처럼 정장을 차려입고 예식장을 찾으면 혼주가 상기된 얼굴로 하객들을 맞는다. 결혼식 풍경은 거의 예외없이 들뜨고 즐겁다. 하객과 혼주 간에 격식을 탈피, 농담 섞인 유쾌한 인사도 많이 오간다.
“빚 갚으러 왔네!(우리집 혼사에 와줬으니)“ ”저축하러 왔어! 우리집도 곧 혼사가 있을 모양이여...” 하객들의 이런 농 섞인 축하인사말이 예식장 분위기를 띄워주기 시작한다.
주례사도 많이 바뀌고 있다. 우선 시간이 길면 감점이다. 7~8분이 대세다, 젊은이들이 희망하는 주례사 시간은 5분 안쪽이라고 한다. 내용도 예전의 “아들 딸 많이 낳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자 되고...”라는 식은 없어진 지 오래다. 신랑.신부에게 맞춘 이른바 맞춤형 주례사를 매우 짧게 하는 추세다.
정작 신혼부부에 대한 덕담은 신랑,신부와 양가 부모들이 하객 테이블올 돌며 인사 드리는 피로연장에서 쏟아진다. 한 잔 걸치고 불콰해진 얼굴로 양쪽 부모와 신혼부부에게 건네는 나이 지긋한 하객들의 덕담이 ‘진짜’다.
덕담 중 ‘명작’ 하나를 소개한다.
신랑을 바라보며 “자네가 여자 보는 눈이 높군. 아빠 닮았어!” 이어 신부에게는 “남자 보는 눈이 높아. 엄마를 닮았나봐!”
빵 터지는 웃음 속에서 그 두 마디가 몇 사람이나 띄워줬는지 저마다 계산하기 바쁘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신아연 소설가가 전 남편에게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고즈넉한 봄날 5월의 주말 아침, 처음으로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당신과 헤어진 지 어느 덧 7년째, 언제나처럼 나는 혼자 눈을 뜨고, 혼자 아침을 먹고, 혼자의 하루를 시작합니다. 내가 없는 당신의 하루는 어떤지 궁금합니다. 당신은 밥보다 빵을 좋아하니 오늘 아침도 빵을 먹었겠군요. 그러고는 산책을 나가고 오후에는 책을 읽고 간간이 글도 쓰면서 나처럼 단조롭고 쓸쓸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지요?
호주는 가을로 접어들고 있겠군요. 이 무렵의 기온은 두 나라가 비슷하지요. 하지만 한국은 여름으로, 호주는 겨울을 향해 서로를 등지며 가고 있지요. 북반구와 남반구는 계절이 반대이니까요. 한때는 생을 함께 꾸려왔지만 이제는 각자의 길을 가는 당신과 나처럼 말이죠.
당신, 환상지 증후군이란 말 들어봤어요? 손이나 발이 절단된 후에도 그 부위의 감각이 여전히 느껴지는 증상, 가령 손목 아래가 잘려 나간 사람이라면 손 전체나 손가락이 아직도 존재하는 것처럼 감각되는, 그래서 ‘유령사지’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증상 말이에요. 그걸 다른 말로는 환상지 증후군(phantom limb syndrome)이라고 한다네요.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한동안 나는 그 증상에 시달렸어요. 어떤 상황에 처하거나 무슨 일이 닥쳤을 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우리 이렇게 할까?” 하며 마치 당신이 옆에 있기라도 하듯이 자동으로 고개를 돌려 말하곤 했죠. 늘 옆에서 걷던 당신의 기척이 느껴져 몸을 쓸어내리던 적도 있었고요.
당신과 내가 살았던 보라매공원 옆, 방 두 칸짜리 신혼집 부근(지금은 다른 건물이 들어섰지만)도 서성거려보고, 아이들을 낳았던 난곡 입구 박산부인과 앞도 일 없이 지나가봤습니다. 무엇보다 꼬박꼬박 닥치는 주말이면 서러움이 더해서 하릴없이 거리를 헤매곤 했는데, 이것도 모두 환상지 증후군 탓이었지 싶어요. 그랬던 것이 이제는 주말이라는 개념조차 흐려져 삶은 온통 무덤덤, 무감각의 잿빛입니다. 온 나라를 뒤덮은 뿌연 미세먼지처럼.
“당신은 돈만 있으면 될지 몰라도 나는 돈 빼고 다 잃었다”던 당신의 고함이 아직도 귓바퀴를 울립니다. 21년간 당신과 함께 살았던 호주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온 후, 당장 내 입 하나를 먹일 수단이 없어 밥벌이에 전전긍긍하며 제발 돈 좀 보내 달라고 하자 전화로 당신이 내게 내지른 소리였지요. 아마도 당신은 이혼을 전제로 한 법적 별거기간 1년 동안 생활비를 주지 않으면 내가 다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던 게지요. 그때 내 수입은 신문 기고로 받는 월 30만 원이 전부였던 터라 라면 하나로 하루를 버틴 적도 있지만, 굶어 죽으면 죽었지, 먹고살 길이 없어 다시 당신에게 돌아가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고 마음을 다지고 다졌지요. 그 정도로 나의 이혼 결심은 확고했고, 그럴수록 당신의 분노와 원망은 커졌고 급기야 절망과 체념에 이르러 이혼에 합의할 수밖에 없었지요.
우리는 한때 서로 살을 ‘베어 먹일’ 듯 사랑했지만, 이혼을 앞두고는 서로의 살을 ‘베어 먹을’ 듯 으르렁거렸지요. 하지만 돌이켜보니 그 모든 일들이 한바탕 꿈인 것만 같아요. 독 서린 감정의 날카롭던 칼날들도 시나브로 무뎌져 품속 어딘가의 칼집 속으로 슬며시 자취를 감추었지요. 그런데도 나는 이따금 당신을 꿈에서 만납니다. 꿈에서 당신은 대부분 슬픈 표정이지만 어떤 땐 무서운 얼굴을 하고 나를 다시 호주로 데려가려 하지요. 악몽이라도 꾼 듯 소스라치게 놀라 깨고는 꿈이라며 안도합니다.
당신에 대한 연민과 염려의 마음과는 별개로 당신의 폭력을 지금껏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용서는커녕 세월이 흐를수록 25년 결혼생활 내내 당신이 내게 가한 폭언과 폭력에 대한 기억은 더욱 또렷하고 선명해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형식적으로라도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고, 자신의 분노조절장애와 폭력 성향을 고쳐보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지요. 아니, 그 심각성을 인정조차 하지 않았지요. 폭력을 견디다 못해 아내가 집을 나가겠다는데도, 가정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데도 남편이라는 그 알량한 자존심이 더 중했던가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이혼 과정에서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은 둘째가 우리의 이혼 수속을 맡게 된 거였어요. 변호사가 되자마자 한 일이 제 손으로 제 부모를 법적 이혼시킨 거였으니…. 그 애가 하필 가정법원에서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이 우연이 아니었기를 바라며 위로할 수밖에 없지만 우리는 이래저래 미숙하고 부끄러운 부모입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돌아가신 우리의 어머니들, 그리고 뿔뿔이 흩어져 사는 우리 두 아이들, 완전히 남남이 되어버린 나와 당신에게 가정의 달 5월은 황폐하고 무참합니다. 당신과 나, 그리고 작은 아이까지 세 식구의 생일이 들었던 지난 4월도 잔인했지만, 우리에겐 5월도 여전히 잔인한 달입니다.
신아연 소설가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21년간 호주에서 지내다 2013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인문예술문화공간 블루더스트를 운영하며 소설을 쓰고 있다. 생명소설 ‘강치의 바다’, 심리치유소설 ‘사임당의 비밀편지’,인문에세이 ‘내 안에 개있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우스갯소리로 들릴 수도 있지만 자식은 두 종류로 나뉜다 한다. 은혜를 갚으러 온 자식, 빚 받으러 온 자식이란다. 전자의 자식을 둔 부모는 행복하겠지만 후자의 자식을 둔 사람은 삶이 고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식에 대한 지나친 애착으로 노후 준비가 뒷전인 사람이 많다. 자녀 학자금 대느라 허리가 휜 뒤에도 결혼 자금 마련으로 모아둔 돈까지 탈탈 턴다. 결혼 비용도 만만치 않지만 신혼살림 집 마련이 가장 큰 부담이다. 결혼 적령기에 이른 자식이 스스로 집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아서다. 베이비붐 세대들은 대부분 신혼 시절을 단칸방으로 시작했다. 규모도 형편이 나아지는 대로 조금씩 늘렸다. 요즘 자식들 상황과는 전혀 달랐다. 지금은 단칸방 월세를 살 형편이면 아예 결혼을 포기한다. 다들 번듯한 가구를 들여놓을 수 있는 규모의 아파트를 원한다.
한 소설가는 자식을 “빚 받으러 온 사람”이라고 표현하며 ‘빨대’에 비유했다. 대학을 졸업시켜도 취업이 잘되지 않아 자녀 취업을 위한 자금까지도 고민해야 하는 현실을 살고 있다. 서울대학교 노화고령사회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은퇴 후 가장 큰 고민은 자녀 학자금과 결혼 자금이다.
평범한 직장인 출신의 1963년생 정재경이라는 사람이 쓴 책이다. ‘은퇴자로서 제주에서 살아보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2015년 제주도에 내려가 한 달 살기 숙소로 가장 규모가 크다는 자연하우스를 운영하는 사람이다.
은퇴자, 환갑을 앞둔 나이, 제주, 낯선 땅 경작하기, 한 달 살기 등 요즘 시니어가 가장 큰 관심을 보이는 키워드를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나도 한때는 제주도에 관심이 많았다. 육지에서 떨어져 있는 섬이라는 묘한 신비감도 있어 신혼여행도 제주도로 갔다. 남한에서 가장 높다는 한라산도 있지만 수많은 오름, 올레길, 바닷가 등 이국적인 분위기가 낭만적인 은퇴 생활을 꿈꾸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곳이다.
아주 내려가 살지는 못하는 형편 때문에 ‘제주도 한 달 살기’는 요즘 인기 여행 품목이 됐다. 지인 중에도 제주도에서 한 달 살고 온 사람이 있다. 몇 년 전 롱 스테이라는 말을 들어보기는 했으나 그때는 동남아, 뉴질랜드 등 그 대상 지역이 외국이었다. 인건비가 싼 동남아에서 살면 서울 생활비 정도로 여러 도우미를 거느리며 왕처럼 살 수 있다고 했다. 또 뉴질랜드로 가면 천혜의 자연 덕분에 매일 골프를 치며 꿈같은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서울에서 할 일이 많아 한 달씩 자리를 비우기는 무리다. 모임도 많고 멀쩡한 내 집을 한 달씩 비워둔다는 것도 마음에 걸린다. 이런 상황에서 제주 한 달 살기 정도의 롱 스테이는 내게 맞는 조건이다. 그러나 아직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혼자 가면 너무 외로울 것 같고 15일 이상 집을 비워본 경우가 없어서다.
이 책은 이런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해 저자가 먼저 겪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이 책 말고도 제주도에 대한 여러 서적을 소개했다. 이어도, 강정마을, 제주도 특산물 등 제주도와 관련한 정보도 들어 있다. 정착 과정에 체크할 사항 등도 꼼꼼히 기록되어 있다. 제주도가 아니더라도 은퇴 후 타지에 정착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가이드북이 될 것 같다.
제주도는 그동안 땅값이 너무 올랐다. 관광객들이 몰려오고 2015년 신공항 발표로 가격이 *천정부지로 솟은 것이다. 은퇴 후 노후보장 대책으로 제주도에 투자하기에는 이제 늦었다. 관심을 갖고 몇 년 지켜본 바로는 바람도 많고 *눈비 오는 날도 많아 기상 상황이 좋지 않다. 신혼여행 때 본 날씨 좋은 제주도의 풍광을 기대하면 안 된다. 어쩌면 방구석에 쳐 박혀 좋은 날씨를 기다려야 하는 신세가 될 수도 있다.
저자는 적당한 나이, 가격이 오르기 전의 땅 구입 등 절묘한 타이밍에 제주도에서 인생의 변곡점을 맞이했다. 나는 저자를 따라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한다. 인생의 변곡점이라는 심오한 시간 흐름도 깨닫지 못하고 나이가 들어버렸다.
한강 변의 궁전 같은 별장을 가진 친구가 있다. 부럽기는 했지만, 그 별장을 편법으로 사고 유지하기 위해 골머리를 썩는 것을 봤다. 그 친구보다 가끔 놀러갈 수 있는 내 처지가 더 나아 보인다. 인생을 즐기는 방법은 다양하다.
나에게는 조그만 여행용 가방이 있다. 벌써 몇 년째 충실한 동반자 역할을 하며 지구 반대편을 함께 다녔다. 서유럽, 북유럽 등 여러 나라를 다녔고 터키에도 10여 일이나 넘게 동행했다. 옛날에 가지고 다니던 가방은 좀 낡고 작아 새로 구매했는데 귀중품을 넣기에 적당한 크기여서 애용했다. 여행할 때는 어깨걸이 멜빵을 하고 허리띠에 끼워 덜렁거림을 방지하면서 도난의 위험을 막았다. 그렇게 몇 년을 함께했어도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스페인 여행길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철옹성 같았던 가방 문이 열린 것이다. 여행 중 가이드에게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소지품 조심하라는 말이다. 가방 속에는 여권, 신분증, 신용카드, 현금 등 귀중품이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소지품을 잃어버리거나 도난당하면 어렵게 온 여행을 망치게 된다. 여권 없이는 꼼짝도 못한다. 유럽은 이러한 가방을 노리는 사람들의 천국이다. 떠돌이 집시들이 많다. 가난한 나라에서 넘어와 일자리 없이 방황하거나 쉽게 돈 버는 일에 빠져든다. 그래서 도난사고가 잦다.
어쨌거나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일을 당한 적이 없다. 내 가방이 안전하다는 믿음이 지나쳤던 걸까? 스페인의 유명한 관광지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꽃보다 할배’라는 모 TV 프로그램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누에보다리’에서였다. 신구 시가지의 경계인 120m 협곡에 놓인 다리 길이는 얼마 안 되었는데 아래로는 완전 벼랑이었다. 내려다보니 아찔했다. 벼랑 위 양쪽에는 조그만 집들이 제비집처럼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었다. 카페도 있어 차를 한잔하는 스릴을 만끽할 수 있었다. 수많은 관광객이 이 기이한 장면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나도 사진을 찍기 위해 자리를 옮겨가며 열중했다.
이때 어디서 겁에 질린 목소리가 들렸다. “아 아저씨~” 마치 비명소리 같았다. “저 사람이 아저씨 가방에서 검은 지갑을 꺼냈어요~” 돌아보니 신혼부부처럼 보이는 젊은 남녀와 시어머니로 보이는 아줌마 한 분이 있었다. 그중 젊은 여자가 내 가방을 뒤졌다고 했다. 곧바로 외국인 3명의 신병을 확보한 뒤 뭘 가져갔느냐고 보디랭귀지로 따지니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고 딱 잡아뗐다. 하지만 철옹성 같았던 가방 문은 아무 저항도 못하고 무기력한 듯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가방 속을 살펴보니 다행히 지갑은 있었다. 일행 중 한 명의 외침을 듣는 순간 도로 집어넣은 것이 틀림없었다. 혼자 하지 않고 신혼부부나 가족처럼 여행객을 가장한 3인조 전문 털이범이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행운이었다. 만약 지갑이 털렸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사진을 찍기 위해 팔을 잠시 올렸을 뿐인데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그들은 완벽하게 일을 처리했다. 주위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작전 성공이었을 것이다.
여행 관련 격언이 떠오른다. “등 뒤에 있는 물건은 공동의 것이고, 옆에 있는 것은 나눠 쓰는 것이며, 앞에 있는 것만이 내 것이다.” 여행하는 사람들이 명심해야 할 말이다.
전에 알지 못했기에 몇 년 전에 발표된 줄도 몰랐는데 요즘 내 마음 속으로 쏙 들어온 노래가 있다. 나는 음악이라면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데 젊을 때는 트로트를 듣지 않았다. 아니, 듣지 않았을 뿐 아니라 트로트를 들으면 무식해 보일 것 같은 편견까지 있었다.
당시 어른들이 말했다. 나이 들면 음악 성향도 다 바뀐다고, 그러나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큰소리쳤다. 그런데 옛말 그른 것 하나 없다는 말처럼 나이가 드니 내게도 변화가 생겼다. 예전에 그렇게 무시했던 가수 남진, 나훈아가 지금은 너무 섹시해 보이고 노래도 멋지게 들리는 것이다.
최근 유튜브를 보다가 한 영상에 눈길이 꽂혔다. 선남선녀의 결혼식에서 우아한 한복 차림의 친정어머니가 축가를 부르는 모습이었다. 신나는 반주에 맞춰 열창하는 노래가 너무나 매력적으로 들려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노래 제목은 바로 ‘아모르파티(amor fati)’. 아모르파티에서 파티는 우리가 흔히 아는 ‘party’가 아니라 ‘fati’로 운명이라는 라틴어라고 한다. '아모르파티'는 '운명을 사랑하라'라는 뜻이어서 축가로서도 손색이 없는 노래다.
역주행이라는 말이 있다. 오래전에 발표되었지만 당시에는 인기를 얻지 못하다가 다시 유행이 되는 역주행 노래가 있다. 가수 김연자의 노래 ‘아모르파티’도 그렇다. 리듬이 경쾌해 들으면 이토록 신이 나는데 왜 이제야 듣게 되었는지 의아하다. 가사도 의미 있다. “쏜 화살처럼 사랑도 지나갔지만 그 추억들 눈이 부시면서도 슬펐던 행복이여”라는 구절이 내 가슴을 울린다. 생각해보니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내용 같다. 나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옛 추억이 가슴 아파 슬프게 느껴지는 행복이 있다. 유행가 가사는 어찌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잘 표현하는지 놀랍다.
유튜브 동영상에 나오는 매력적인 친정어머니는 무대 위에 나란히 선 딸과 사위를 향해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 가슴 뛰는 대로 살라”고 노래했다. 신혼부부에게 할 얘기는 아닌 듯하지만 장면이 재미있어 웃으며 감상했다. 그 영상을 본 후 나도 아모르파티를 배워 멋지게 불러보고 싶어졌다. 한때 가수가 되려 한 적도 있으므로 금방 배워 잘 부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휴대폰을 켜놓고 따라 불러보니 만만치 않은 노래였다. 몇 시간을 연습해도 가수 김연자처럼 감칠맛 나게 부르기가 힘들었다. 리듬을 따라가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잘 불러보려고 열심히 연습 중이다.
누구나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와서 소설 같은 이야기를 써가며 산다. 자신에게 실망하지 말자.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면 되고 인생은 지금이 중요하다는 메시지가 트로트 가사에 다 녹아 있다.
아모르파티! 우리 모두 운명을 사랑하고 지금을 멋지게 살아보자.
“앵커, 명예 졸업합니다. 고맙습니다.”
8년 전 마지막 뉴스를 전하던 날, 유영미(柳英美·57) 아나운서의 마무리 멘트에는 후련함, 시원함 그리고 섭섭함이 담겨 있었다. 그녀 나이 오십. 여성 앵커로서 최장기, 최고령이라는 타이틀을 얻었지만 그 말이 무색할 정도로 젊고 아름다운 시절에 뉴스 인생을 마감했다. 강단 있는 목소리로 SBS 여성 앵커의 표본이던 유영미 아나운서. 한동안 안 보이나 싶더니 작년 말 ‘2018 아나운서 대상’ 시상식에 모습을 드러냈다. TV 시청자 눈을 떠나 라디오 청취자들과 만나고 있었단다. 그것도 빨간 오픈카(?) 타고 ‘마음은 언제나 청춘’을 외치면서 말이다.
시니어와 소통한 보람을 인정받다
“놀랐어요. 내가 벌써 공로상을 받을 나이가 됐나 하고요. 저희 프로그램은 시니어에게 도움이 되고자 1991년 SBS가 창사하면서 시작한 최장수 프로그램입니다. 일찍 일어나는 새벽 청취자들을 위한 방송이었죠. 다른 선배님께서 3년 정도 하시다 제가 바통을 이어받아 지금까지 했는데 이런 큰 상도 받네요.”
작년 말, 2018 아나운서 대상 시상식에서 유영미 SBS 아나운서의 이름이 불렸다. 시니어 세대를 위한 SBS 러브FM ‘유영미의 마음은 언제나 청춘’을 25년간 진행해온 공로였다. 오랜 시간 프로그램을 이끌어온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유영미 아나운서는 DJ는 물론 2010년부터 PD도 겸하고 있기에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2015년에는 한국방송대상에서 사회공익 라디오 부문 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SBS 간판 아나운서로 뉴스를 비롯해 다양한 교양 프로그램을 진행하느라 눈코 뜰 새 없었던 30대 초반에 만난 ‘마음은 언제나 청춘’. “유영미 선배의 목소리가 너무 따뜻해서 라디오와 잘 어울린다”는 담당 PD의 사탕발림(?)에 못 이기는 척 승낙한 방송이 인생 역작이 됐다.
“처음에는 부모님이나 선배 세대를 생각하면서 방송했어요. 청취자와 서서히 녹아들고 세월이 지나고 보니 저도 어느새 시니어 대열에 합류했네요. 그동안 잘 걸어왔어요.”
매일 새벽 5시. 그 누구도 듣지 않을 것 같지만 유영미 아나운서는 멀리서 묵묵히 라디오를 켜는 시니어의 관심과 사랑을 깊이 감지한다. 진행을 더 잘해보고 싶은 마음에 2000년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사회복지 대학원에서 노인학을 공부했다. 2010년에는 시니어 프로그램 DJ 경험담을 엮어 ‘두 번째 청춘’도 발간했다. SBS로 채널을 돌리면 ‘또 유영미’ 소리가 나오던 때에 말이다.
금기를 깨고 얻은 타이틀 ‘최초’
유영미 아나운서는 시청자로서 봐왔던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파스텔 톤 정장에 정돈된 머리 스타일의 그녀가 밝은 갈색 머리에 꽃무늬 로브룩으로 나타났다. 예능의 끼가 느껴진다 말하니 투정 섞인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 재미난 것을 왜 안 했는지 몰라. 늙기 전에 진작할걸. 옛날에는 뉴스 앵커 이미지 때문에 예능을 할 수 없었어요. 이제는 좀 자유롭게 저를 표출하고 싶어요.”
1986년 울산MBC에서 방송생활을 시작해 SBS 공채 1기로 들어와 현재까지 활동하는 최고령 여성 아나운서. ‘여성 아나운서로서 최초’ 타이틀은 왜 이리도 많은지, 33년 여성 방송인으로서의 삶은 마치 ‘가시밭길 몸소 닦아 새길 만드신 신여성 일대기’와도 같았다.
“여성 아나운서는 일을 오래하지 못하던 시절이었어요. 저는 살짝 그런 시절을 비껴갔는데 결혼한 여자가 회사에 있기 힘든 시절이었죠. 그런데 저는 결혼과 함께 SBS에 입사했습니다.”
결혼을 앞둔 와중에 SBS 공채 1기 채용 공고가 났다. 결혼을 미룰 수도, 응시를 안 할 수도 없었다. 채용 공고가 언제 또 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솟아날 구멍은 있었다.
“당시 저희 팀장님이 ‘SBS를 오래도록 빛내고 기여할 아나운서인데 결혼이 뭐가 그리 문제냐’며 윗선의 날선 시선을 잠재워주셨어요. 덕분에 결혼과 신혼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동기들보다 두 주 늦게 출근했습니다. 임신 9개월까지 뉴스 앵커석에도 앉아 있었고요. 두 달 출산휴가 마치고 앵커석으로 돌아온 여자 아나운서는 제가 최초였어요.”
여자 아나운서가 출산을 하고 다시 뉴스를 맡은 전례가 당시에는 없었다. 내가 잘해야 후배들이 이 길을 따라올 거라 믿었다.
“임신했을 때 뉴스 하지 말라고 했으면 여성운동했을 거예요. 빡빡한 세상이었지만 미래를 바라보는 선배들이 있었어요. ‘능력 있고 일 잘하는데 결혼하고 애기 낳는 게 무슨 상관이냐, 뉴스 앵커가 뉴스만 잘하면 되지’ 하면서 응원해줬어요. 선배의 역할은 좋은 선례를 남기는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공채 1기이다 보니 여자 아나운서 선배가 없어요. 그래서 뭘 해도 늘 최초가 된 거죠. 요즘 세대에게는 너무 당연한 것들을 그때는 싸워서 얻어야 했어요.”
건물 내 흡연이 만연하던 1990년대 말에는 뜻있는 여성 사우들과 함께 ‘꽃을 든 금연 운동’도 전개했다. 사무실에서 금연하는 사람에게 꽃을 주고 박수도 쳐주는 운동이었다. 요즘 건물 밖에서 담배 피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 시절 생각이 절로 난다고 말했다.
피겨 중계, 웃고 울다 남은 생채기
유영미 아나운서를 만나니 스포츠 중계 관련 이야기가 듣고 싶어졌다. 그녀 이름은 뉴스 앵커와 교양 프로그램 진행자, 라디오 PD 겸 DJ로 회자되지만 우리나라 최초로 스포츠 중계를 한 여성 아나운서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개·폐막식과 피겨스케이팅,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을 중계했다.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이 열리기 전, 김연아 선수와 일본의 아사다 마오 선수가 세계 주니어 무대에서 주목받으면서 피겨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일던 때였다. 피겨스케이팅 중계를 준비하지 않은 타 방송사에 SBS 유영미 아나운서의 중계가 송출됐다. 이후 SBS는 국제빙상연맹(ISU) 독점 중계권에 이어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 중계도 독점하면서 동계스포츠 중계에 모든 것을 걸었다. 유영미 아나운서 또한 2000년부터 피겨 중계를 준비하고 있었으니 이변이 없는 한 김연아 선수의 ‘007 본드걸’ 중계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러나 가혹하게도 이변은 일어났고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하고 중계석 마이크를 내려놓아야 했다. 그녀는 방송 인생에서 가장 아픈 사건이었다고 회고했다.
“녹화 중계였는데 제가 ‘한 선수가 성장하기 위해서 많은 지도자의 노력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하던 중에 김연아 선수를 위해했던 코치가 지나갔답니다. 그 사람을 지칭해 한 말도 아니었는데 난리가 난 거예요. SBS 스포츠 인터넷 사이트가 마비될 정도로 공포 그 자체였어요.”
중계를 녹화할 당시 수많은 스태프가 함께 있었지만 원망의 대상은 유영미 아나운서의 몫이었다.
“제가 마이크를 던졌어요. 조직을 위한 결단이었죠. 그저 침묵이 약이었습니다.”
한참 후 담당 팀장이 스포츠 중계를 권했지만 돌아가지 않았다. 스스로를 위로할 시간이 필요했다.
“제가 매화랑 동백꽃을 좋아하는데 꽃이 질 때 뚝 하고 떨어져 내려요. 그땐 나 스스로를 부러뜨려야 했어요. 그저 회사만 생각했습니다. 고통스러웠어요. 안티팬 글을 보고 나면 방송 절대 못해요. 그래도 동계올림픽 최초 여성 캐스터라는 타이틀은 되게 좋았어요. 그런 일들이 있었네요. 아나운서 33년 동안 일이 많았네.(웃음)”
힘들 때 달려와 안긴 곳은 라디오
그러고 나서 힘든 마음을 내려놓은 곳이 시니어 청취자를 만날 수 있는 라디오 부스 안이었다. 스포츠 중계석에서 떨어진 동백꽃은 라디오로 되돌아와 다시 예쁘게 자라났다. 마음속 얘기도 꺼낼 수 있고 제작까지 하니 한결 자유로웠다.
“힐링도 하고 자존감도 높아졌어요. 청취자들이랑 늙는 얘기 진짜 많이 해요. 오십견 온 얘기도 하고, 자전거 타다가 넘어져서 한쪽 손으로 방송한 얘기도 하고요. 남들은 25년 한결같이 어떻게 했냐고 하지만 저는 매일매일이 새로웠어요. 제 방송을 듣는 분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면 좋겠어요. 행복하게 사는 방법도 공유하고요.”
앞으로의 꿈이 뭐냐고 물었다. 대답 참 간단했다. SBS 최초로 정년퇴임하는 여성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고 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초라한 성적표일지는 모르겠지만 위대한 여정의 마침표를 찍고 싶단다.
“유영미였습니다. 사랑합니다.”
또 다른 내일을 기약하는 그녀의 마무리 멘트다. 맞다! 방송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추억을 되돌릴 수 있는 이야기나 물건은 삶에 기쁨을 준다. 내게도 그런 추억거리가 하나 있다. 바로 빛바랜 사진 한 장이다. 신혼여행지 제주도에서 우리 부부를 태우고 다닌 택시기사가 찍어준 사진 한 장이 그중 하나다. 공개하기 부끄러워지기도 하나 일흔에 접어드니 부끄러움보다 추억의 소중함이 더 깊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도 같고 가슴도 설렌다. 그 곱던 얼굴에 주름이 늘어난 아내를 떠올리며 더 많은 사랑을 주지 못한 후회의 물결이 인다.
꽤 세월이 흘렀다. 올해 4월 15일이면 우리가 함께 산 지 만 40년이 된다. 1979년 4월 15일, 우리는 스물아홉, 스물넷 꽃다운 나이에 결혼했다. 대부분 외국으로 신혼여행을 가는 오늘날과 달리 그 시절의 신혼부부들은 제주도를 주로 갔다. 우리 부부도 그랬다. 제주도에 가서 택시 한 대를 빌려 여행 기간 내내 돌아다녔다. 당시의 택시기사는 신혼여행 전문 사진가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정평이 나 있었다. 좋은 장소에서 신혼부부의 자세까지 잡아주며 사진을 찍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한두 번 그렇게 찍고 나면 부끄러움도 없어졌다. 택시기사가 메가폰을 잡은 내 인생 드라마 장면이 하나둘 카메라에 담겼다. 당시 택시기사는 꽃이 만발한 유채꽃밭 한가운데 우리 부부를 영화배우처럼 세우고 키스하는 모습을 연출한 뒤 “자 찍습니다. 하나둘 셋!” 하고 외치며 셔터를 눌렀다. 영화감독이 외치는 “액션~ 큐!”였다. 그렇게 남겨진 사진이 일흔 살 문턱에 선 나에게 더없이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그날 우리를 둘러싼 유채꽃 빛깔이 더욱 얼굴을 붉게 만들었다.
허니문베이비로 태어난 큰아들 녀석이 장가를 가서 선물로 안겨준 큰손자가 초등학교 2학년이고 둘째도 다섯 살이나 되었는데, 신혼여행 사진 한 장이 아직도 마음을 설레게 한다. 열정과 꿈이 부풀었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일기도 한다. 옛 모습을 보며 행복한 미소를 떠올리게 하는 이 사진은 내 인생의 보물이다. 나이 들면서 차곡차곡 쌓아둔 물건들을 하나둘 정리하고 있지만, 이 사진은 오래도록 남겨두고 싶다.
새 아파트로 이사했다. 신혼집처럼 설레어 방과 방으로 이륙과 착륙을 반복했다. 에너지가 충만해서 허공을 걷는 듯 했다. 창문마다 다르게 보이는 풍경이 자유이용권을 산 찻집 같다. 그런데 아무래도 무리를 했나보다. 며칠이 지나자 허리가 묵직하고 손목이 저렸다. 고양이자세, 허리꺾기, 허리 돌리기…. 살살 스트레칭을 해봤지만 통증이 멈추지 않아 한의원을 수소문했다. 미리 사귄 이웃이 아파트 상가 2층 한의원을 추천했다.
한의원은 비좁다고 생각될 정도로 아담했다. 평범했지만 깔끔했다. 순서를 기다리며 벽에 걸린 의사의 이력을 보니 좀 특이한 부분이 있었다. 한의원장 이름은 이주일. 코미디언과 같은 이름이다. 왠지 찜찜하다. 넘어지며 얼렁뚱땅 진료하면 어쩌나 걱정했다. 게다가 원래는 치과의사였고 한의학을 공부해 양의와 한의 면허를 동시에 보유하고 있었다.
‘치과가 잘 안 되었나?’
진료실로 안내 되었다. 한의사는 50대 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키가 크고 몸집도 적당했다. 호감이 가는 얼굴이었다. 가족을 대하듯 반갑게 웃는 얼굴이었다.
‘코미디언과 이름이 같더니 웃음이 헤픈가? 실없는 사람인가?’
감 잡을 수 없었다. 어디가 아픈지 문진을 하더니 손을 달라고 했다. 먹이를 앞에 둔 맹수처럼 손을 쳐다보며, 침의 포장을 천천히 뜯기 시작했다. 이제 뾰족한 침은 이 원장의 손에 들려있고, 언제고 나를 공격할 태세가 갖추어졌다. 언제 침을 꽂을지 모르는 상황이라 긴장하며 침을 바라보았다. 이 원장는 입으로는 문진을 하면서도 눈으로는 내 손과 팔의 혈자리를 찾아 날카롭게 움직였다. 그러더니 빠른 동작으로 손바닥에 침을 꽂기 시작했다.
“아~아!”
숨 돌릴 새도 없이 다시 재빠르게 얼굴에 침을 두세 개 꽂았다. 분명 가늘고 작은 침이었지만 내 몸은 창에라도 꽂힌 듯 꼼짝을 할 수 없었다. 의사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침 꽂힌 손을 깁스한 듯 계속 들고 있자 의사가 팔을 잡아내려 주었다. 잠시 후, 더 심한 주문을 했다. 침을 꽂은 채로 일어나 허리를 움직여 보라는 것이었다. 아픈 것인지 무서운 것인지 분간할 수 없지만 아무튼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의사가 일으켜 세웠다. 묵직하게 기둥이 박힌 것 같던 곳이 가벼워진 느낌은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한의사는 말했다.
“눈도 환해지고 밝아졌죠? 허리도 움직일 수 있어요. 이제 다 나은 거예요.”
한의원을 소개한 이웃이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의사가 침을 몇 대 놓더니 목을 움직여 보라고 했단다. 이제껏 꼼짝 못 하던 목이라 겁을 내며 조심스럽게 움직여보니 과연 목이 좌우로 돌아가더라고 했다.
“어! 목이 잘 돌아가네요. 이런 증상을 방지하려면 무슨 운동을 해야 할까요?”
“걱정 말고 하시던 대로 하세요. 아프면 다시 오세요. 침 맞으면 다시 나을 거예요.”
이런 말을 듣고, 한의원을 방문했던 것이다. 의사의 확신에 찬 표정, 환자의 반응을 기대하는 눈빛을 보니 괜히 민망해서 다 나았다고 거짓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좀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밉지만은 않았다. 그곳은 간호사도 푸근한 중년이었다. 표정이 진심어린 친절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 다음 날 허리가 부드러워지고 손목 통증도 멎었다. 하루걸러 다시 한의원을 찾았다. 치료실에는 10개 정도의 커튼 친 침대가 놓여있었다. 침대마다 따스한 패드가 깔려 있고 발치에는 가죽쿠션이 단정하게 놓여있었다.
나는 누워서, 이 원장이 다른 환자들과 대화 나누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몇 년 전 했던 치료에 대해 중학생과 얘기하는 것 같았다. 다리가 불편한 학생에게 건네는 말이 얼마나 다정한지 듣기 좋았다. 어떤 아주머니는 자전거와 부딪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 딸이 몇 달째 모시고 오고 있었다. 아주머니께서 “아퍼 죽겄어”라고 소리쳤다. 이 원장은 “제가 열심히 치료하는데 죽으시면 어쩌냐”며 “다리가 가벼워야 잘 걸을 수 있으니 살을 빼고 맛없는 음식부터 먼저 먹으라”고 조언했다. 그는 마치 가족 주치의 같았다. 몸의 병 이외에도 환자가 말하지 않은 마음의 상처도 치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주일’이라는 이름값을 하는 듯 사람들을 미소 짓게 했다. 코미디언은 어찌보면 긴장을 풀어주는 심리 치료사나 정신과 의사이지 않은가. 그의 모습을 보니 저절로 행복감이 들었다. 간호사에게 이 원장의 의사 면허가 둘인 이유를 물어보았다. 치과에서 재료비 10만 원짜리 임플란트를 개당 삼백만원씩 받는 것을 보다보니 마음이 불편해 한의학 공부를 했단다. 지금이 그때보다 마음 편해 좋다고도 말해줬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내 병침으로 이 원장이 차트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리곤 다리를 살피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져 비명을 질렀다.
“아직 침도 안 꽂았는데 왜 아파요?”
그럴 리가! 벌떡 일어나 확인하니 정말 그랬다. 혈을 찾느라고 종아리를 손가락으로 훑었는데 겁을 먹고 있어서 그런지 통증을 느꼈었다. 민망했다.
이런 한의원이 가까이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어제도 아프다는 사람에게 그 한의원을 소개해주었다. 지인도 다녀와선 허리가 금방 나았다며 고맙다고 전화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