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의 다른 말 ‘復古’ 이경숙 동년기자
조국을 떠난 지 한참 된 사람도 정말 바꾸기 힘든 것이 있다. 울적할 때, 특히 몸이 좋지 않을 때면 그 증세가 더 심해진다고 한다. 어려서 함께 먹었던 소박한 음식에 대한 그리움이다. 식구는 많고 양식은 빈약하던 시절, 밥상에서는 밥만 먹었던 것이 아니었나보다. 둥근 상에 올망졸망 모여 앉아 모자란 음식을 나눌 때 느꼈던 진한 가족애와 혈육의 뿌듯함이 DNA에 녹아들기라도 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가마솥 누룽지, 지겹던 보리밥,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던 시래기죽도 각자의 추억과 함께 잊히지 않는 음식이 되어 ‘그것만 먹으면 내 병이 다 나을 것’처럼 그리워지는 것 같다.
골목에 있는 만화방 주인은 청년이었다. 가끔 내게 만화방을 맡기고 외출을 하기도 했는데, 대신 보고 싶은 신간 만화를 실컷 볼 수 있어 좋았다. 만화방 앞에는 약간의 학용품이 놓여 있어 그것도 팔아야 했다. 그날도 만화방을 봐준다는 명목으로 독서(?)에 빠져 있었다. 누군가 나를 ‘툭툭’ 쳐서 보니 군인 아저씨가 물건을 들고 얼마냐고 묻고 있었다.
그렇게 몰두할 만큼 만화책은 너무 재미있었다. 그 만화방엔 안데르센 동화책도 많았다. 울적할 때면, 나는 동물들과 숲속 방앗간 짚 덤불에서 자던 소녀를 떠올리곤 했다. 샘물을 마시고 동물들과 대화하던 맑고 밝은 소녀가 아직도 가슴속에 있다. 지칠 때면 그 소녀가 가만히 내 창을 두드린다.
나팔바지를 입고 집을 나설 때마다 듣던 말이 있다. “동네 다 쓸고 다닐 거니?” 어깨는 각이 지고 허리는 잘록하고 엉덩이는 딱 맞고 바지통은 아주 넓은 디자인이었다. 그 시절엔 사실 유행이 일률적이었다. 지금처럼 다양한 취향을 주장할 만큼 당당하지도, 식견이 풍부하지도 못했다. 개성을 개인적 취향으로 인정해주기보다는 모자란 사람 취급을 하던 그런 시대였다. 그래서 좀 멋쟁이다 싶으면 일제히 미니스커트, 일제히 맥시스커트를 입는 그런 분위기였다. 어찌 보면 마치 유니폼을 입은 것 같았다.
테이블마다 달랑대는 조명등이 달려 있거나, 촛불을 켜는 낭만적인 카페도 많았다. 종종 작은 무대에서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흥얼거리고, 술이 아니더라도 20대는 늘 무엇인가에 취해 있었다. 쉽게 흥분하고 자주 슬펐던 우리들의 20대. 끝도 없는 논쟁으로 밤을 새우고, 모든 게 다 진지하기만 했던 시절. 사랑하고 싶었던 사람들은 사랑 얘기를 쉼 없이 되풀이했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모두 정의의 순교자라도 되고 싶어 했다.
미팅 땐 생맥줏집, 볼링장, 극장엘 갔다. 애프터 미팅은 카페에서 만나 주로 비원이나 경복궁, 덕수궁을 걸었다. 가난한 젊은 커플들은 버스를 타고 종점을 오가며 대화를 나눴다.
이런 추억들에 젖어보기 위해 옛 시절을 떠올리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복고의 매력이라 할 수 있겠다. 그냥 먹고 마시기만 하자니 심심하고 무미건조해 그리움이라도 불러와 옛 필름들을 다시 돌려보고, 식어버린 가슴을 조금이라도 데워보려는 것이다.
벼룩시장에서 보물찾기 윤종국 동년기자
“내가 나를 생각하는 만큼 남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
나는 이 말을 엄청 좋아한다. 난 늘 나를 생각한다. 나는 키도 작고 몸집도 작다. 그러나 머리는 크다. 표준 사이즈로 옷을 고르면 거의 맞는 게 없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 드나들기 시작한 곳이 있다. 30여 년은 족히 된 듯하다.
독자들이 궁금해할 것 같아 먼저 알려준다. 바로 ‘벼룩시장’이다. 수백, 수천 가지의 물건이 있는 곳이다. 옛날에는 청계6·7가에 있었고, 지금은 동묘(동대문구) 일대에 시장이 형성돼 있다. 벼룩시장에서 레트로를 본다. 내게는 수만 가지 물건이 레트로 대상이다. 한 달에 두세 번 보물을 찾는 기분으로 간다. 내 작은 체구를 잘 알기에 어울리는 옷도 찾아본다. 손에 주로 들리는 옷은 복고풍의 외투다. 벼룩시장에서 입수한 옷은 꼭 수선 집을 거친다. 그래야 진짜 내 것이 된다.
누구나 알고 있듯 없는 게 없는 곳이 벼룩시장이다. 그렇다고 아무나 덤빌 곳은 또 아니다. 내게는 오랜 세월의 경험이 있다. 레트로를 사랑하려면 요령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레트로인이 된다. 예를 들면 맘에 드는 복고풍 옷을 하나 발견했다 치자. 구매의사가 있을 경우 먼저 입어보고 가격을 흥정하면 초보자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구매자 몸에 어울린다 싶으면 가격이 달라진다. 가격 매기기는 벼룩시장 주인들만의 특권이다. 그러므로 먼저 가격을 물어본 다음에 흥정을 해야 하는 게 원칙이다. 설사 맘에 들더라도 그 맘을 들키면 절대 안 된다. 그래야 원하는 가격에 살 수 있다.
또 하나의 팁. 다른 물건에 관심이 있는 척하다가 진짜 맘에 드는 물건을 들고 슬쩍 “이건 얼마죠?” 하고 물으면 점포 주인은 대부분 낮은 가격을 부른다. 이것이 지혜롭게 레트로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수년 전 딸아이가 벼룩시장이 궁금하다며 따라나섰다. 그날 지나다 발견한 물건은 흙이 묻어 다소 지저분해 보이는 신발이었다. 신을 만해서 단돈 5000원에 손에 넣었다. 집에 와서 닦고 손질해보니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고가 브랜드 신발이었다. 딸아이가 좋아라 했다. 내가 벼룩시장 마니아로 인정을 받은 건 사실 그날이었다.
한 달 전 큰손주의 생일이 있었다. 그날을 위해 몇 번이나 벼룩시장을 찾아 헤맸다. 인라인스케이트를 찾기 위해서다. 신제품도 생각했지만 하루가 다르게 키가 크는 녀석의 발 사이즈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라인스케이트를 선물로 선택한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전국, 특히 서울에서 인라인스케이트 붐이 일었다. 그러다가 아파트 내에서 어린이 안전사고가 일어났고 그 충격으로 슬쩍 사라져버렸다.
벼룩시장을 갔던 날, 다행히 손주에게 맞을 것 같은 인라인스케이트를 발견하고 흥정을 시작했다. 일단 가격부터 묻고 사이즈를 확인한 뒤 며느리에게 전화를 걸어 손주 발 사이즈를 물어봤다. 그러면서 주인의 눈치도 살폈다. 발 사이즈가 잘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듯 대화를 나눈 뒤 주인과 흥정을 했다. 결국 내가 원하는 가격으로 물건을 손에 넣었다. 이런 요령을 터득해야 비로소 벼룩시장의 프로가 된다. 집으로 돌아와 깨끗하게 정비하니 새 물건보다 더 정감이 갔다.
손주 생일에 인라인스케이트를 건네주며 “지금은 키가 부쩍부쩍 크는 나이니까 일단 이것으로 먼저 타는 연습을 하자”라고 말했다. 갖고 싶어 했던 거라 그런지 손주도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그날 나는 손주바보 할아버지에서 멋진 할아버지로 거듭났다.
옛것들에서 한 수 배우며 사는 삶 육미승 동년기자
“넌 조금만 더 나중에 태어났더라면 뭔가 해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심심찮게 이런 말을 해주는 친구들이 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민망하지 않은 표정으로 다정하게 미소를 짓는다. 친구들 말은, 내 패션이나 생각 그리고 사는 방법이 자기들과는 전연 다르다는 의미다. 그도 그럴 것이 레트로가 내 생활이니….
특히 패션에 대한 생각이 그렇다. 옷을 살 때 겉옷은 지금 당장 유행을 타는 것들 중 나중에도 입을 수 있고 멋지게 소화해낼 수 있는 디자인을 고른다. 그리고 다른 옷들은 옷장 문을 열어 예전에 신나게 입고 즐겼던 옷들에서 선택한다. 그날의 모임 콘셉트에 맞고 남의 눈에 거슬리지 않으면서도 유행에 뒤떨어짐이 없는 은은한 멋을 지닌 그런 의상을 즐기는 거다. 나는 옛것을 너무 좋아한다. 옛것들 버리지 않고 여전히 아끼고 사랑하는 나를 보고 “어머 얘, 너무 잘 어울린다아~’ 하고 해주는 말들을 좋아하는 것도 같다.
회상하고 추억에 빠지는 시간은 천천히 꼼꼼하게 내 생각들을 정리하는 데 꼭 필요하다. 그러고 보니 인연이 끝나 지금은 만나지 않는 사람들과의 대화도 마음 한구석에 감춰두고 있다. 어느 날 그들과의 추억을 꺼내 감상하는 게 내 취미다. 나는 옛것들은 대부분 귀하게 여기고 좋아한다. 가끔은 그동안 읽었던 책 속에서 또는 영화 속에서, 예를 들면 사마의 같은 중국의 책사들에게 한 수 배우길 희망한다. 그 놀라운 생각의 회로를 닮아보려고 혼자 부단히도 노력한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반짝이는 젊은이들. 그 두뇌를 못 따라가는 나는 느린 사고방식이 편하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단 한 번도 싸워보질 못했다. 갈등이 일어날 것 같으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거나 가만히 듣고만 있는 게 내 모습이다. 져주는 게 상책이라 생각하며 지내왔기 때문이다. 일처리를 할 때도 나를 뺀 모든 관계자들이 편한 쪽으로 해답을 구한다. 어느 면으로 보면 답답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나를 길들이며 살아왔기에 불편하지 않다. 그러나 지인들은 불똥이 내 발 바로 앞에 떨어져도 “이게 뭐지?” 하며 그제야 슬쩍 뒤로 물러날 사람이라며 핀잔 섞인 말을 한다.
그렇다. 나는 오래 생각하며 말없이 기다린다. 특히 답이 여러 가지로 나올 수 있는 문제는 더더욱 끝까지 기다린다. 엉망으로 뒤섞여버린 물을 가만히 두면 침전물들이 여러 층으로 가라앉고, 맑은 물이 맨 위로 올라온다. 내 앞의 문제도 그렇게 될 때까지 기다린다. 그러면 마치 무위이화(無爲而化)하듯 저절로 아주 유효하고 명쾌한 답이 나온다. 그 신기함을 몇 번이나 경험했다. 이것이 바로 레트로의 진가라고 믿는다. 새로운 기술과 기교도 좋지만 옛 성현들의 말씀에서 더 많은 답을 찾는다. 레트로는 내 단짝이다. 한 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 앞으로도 복고 속에서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찾아내는 마음으로 패션, 음악, 미술, 영화, 텔레비전 프로그램 등을 즐기며 여유작작한 삶을 살아가려 한다.
레트로는 ‘마음의 휴식’이다 손웅익 동년기자
1980년. 그 해 나는 대학교 4학년이었다. 건축과 학생들 중 건축설계에 특히 관심이 많은 학생이 모인 동아리에서 활동을 했다. 회원들은 매년 몇 달씩 동아리방에서 합숙을 하며 건축 작품전을 준비했다. 식사는 2학년생들이 돌아가면서 전체 회원이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러나 집에서 설거지 한 번 안 해본 학생들이 만든 밥은 그야말로 배가 고파서 억지로 먹을 수밖에 없는 정도의 상태였다. 그런 식사로 몇 달 합숙을 하다 보니 대부분 건강이 나빠졌다. 1980년의 교정은 봄부터 최루탄으로 뒤덮였다. 수업도 대부분 휴강이었다. 그렇게 혼란한 상황에서도 건축과 동아리 회원들은 밤낮으로 모여 작품전을 준비했다. 대체로 밤에 설계를 하고 낮에는 잠을 잤는데, 그 와중에도 매일 데모하러 나가는 회원도 있었다. 졸업을 앞둔 4학년 학생들은 최고참이라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저녁에 가끔 학교 앞으로 나가 막걸리도 한잔씩 했다.
그날도 4학년 동기들은 동아리방에서 저녁을 먹지 않고 학교 앞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4학년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막걸리를 마시고 난 뒤에는 학교 교문 근처 문방구점에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중계를 봤다. 당시 텔레비전은 다 흑백이었다. 그런데 선발대회 중에 화면 아래쪽으로 대학교를 폐쇄하겠다는 자막 뉴스가 떴다. 합숙 중이었던 우리는 얼른 짐을 챙겨 집으로 가야 할 것 같아서 학교로 들어가려는데 어느새 장갑차가 교문을 지키고 있었다. 1980년 5월 15일이었다. 17일에는 전국으로 계엄이 확대되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이 5월 18일.
그 해 우리가 준비했던 5월 전시회는 무산되었다. 전국으로 계엄이 확대되면서 집회는 일절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회원들 집에서 만나 작품전 준비를 했고 가을에 전시회를 열었다. 당시 동아리 회장이었던 나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잘 준비해서 내 임기 중에 전시회를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겨울이 또 왔고 어느 날 술친구들이 중국집에 모였다.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고량주를 마시면서 방송 시작 시간을 기다렸다. 그날은 우리나라 텔레비전 역사상 처음으로 컬러 방송을 하는 날이었다. 당시의 자료를 찾아보니 1980년 12월 22일 이었다. 우리는 컬러로 텔레비전을 보면 중국 영화처럼 피가 난무하는 장면은 너무 살벌할 것 같다는 둥, 연예인들이 옷을 더 화려하게 입을 것 같다는 둥 이런저런 추측성 대화를 나눴다. 그날 그렇게 흑백텔레비전 시대가 종료되었고 내 학창 시절도 저물어갔다.
얼마 전에 영화 ‘로마의 휴일’을 텔레비전에서 다시 봤다. 오래전에 갔던 로마 여행의 기억을 떠올리며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옛날 영화를 보다 보면 흑백 화면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흑백이라서 불편하거나 아쉬운 점도 없다. 오히려 로마의 유적이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오고 상상을 자극하는 것 같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컬러 사진이 보편화하기 전의 흑백 사진들은 그 분위기로 시간을 되돌리는 신비로움이 있다. 흑백 사진을 손에 들면 사진을 찍던 순간으로 순식간에 되돌아가는 듯하다. 흑백이라는 무채색의 아름다움은 그래서 복잡하고 바쁘고 혼란스러운 현대인들에게 향수를 자극하고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마음의 휴식을 주는 것 같다. 현대인들은 현란한 색과 형태 그리고 자극적인 소리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정보의 홍수와 자극의 파도를 견디려니 모든 감각기능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다. 이런 현실에서 흑백은 잠시나마 여백의 세계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눈이 편안해지면 마음도 편안해진다.
나는 새벽안개를 좋아한다. 특히 두물머리의 새벽안개는 한 폭의 수묵화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새벽에는 온 세상이 흑백으로 변한다. 안개의 농담(濃淡)으로 그려놓은 수묵화는 화려한 가을날의 유화 같은 풍경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신비로움이 있다. 그 여백은 흑백 사진처럼 아련한 시간의 심연으로 빠져들게 한다.
요즘 펜화 스케치를 하면서 비슷한 느낌을 받곤 한다. 검은색으로만 그림을 그려놓고 원본의 컬러와 비교하면 흑백이 가진 깊이를 분명히 느낄 수 있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가끔 의식적으로라도 흑백의 세계로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고 본다. 흑백은 레트로다. 나는 레트로에서 마음의 휴식을 찾는다.
나는 우연한 기회로 강사 일을 시작했다. 은퇴 후 경로당 봉사를 시작했는데, 많은 사람 앞에서 말을 잘 못해 한국언어문화원에서 스피치를 배웠다. 몇 개월 후 어느 정도 발성 훈련이 된 듯해 대통령기쟁탈 웅변대회 출전해보자 하고 나갔다가 특등을 했다. 그러자 자신감이 생겼고 2년 뒤에 출전한 대회에서는 대상을 받았다. 그 후 우연히 시니어파트너즈 강사 과정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노느니 한번 배워볼까?’ 하는 마음으로 등록했다.
그런데 교육을 받는데 몰라도 이렇게 모를까, 내가 아는 게 너무 없다는 사실에 무척 당황했다. 교육이 끝나면 필기시험을 봐야 했는데 떨어지면 수료증도 못 받고, 실기시험에 떨어지면 강사 자격증을 받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눈앞이 캄캄했다. 얼마나 긴장이 됐는지, 동기생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나만 떨어져 망신당하는 꿈까지 꿨다.
병아리 강사에게도 회사에서 강의 기회를 줬다. 그러나 나는 계속 미룬 채 닥학열공(닥치는 대로 배우고 열심히 공부)하며 내공을 쌓았다. 첫 강의는 29명의 사람들 앞에서 이루어졌다. 어떻게 끝났는지 생각도 나지 않았지만 박수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으며 강단에서 내려오던 순간의 희열은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 됐다. 이날을 계기로 나는 강의를 계속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강의의 매력은 신나고 재미있고 보람찬 데 있다. 강사가 마련한 유쾌한 긴장 속으로 이끌려오는 수강생들, 강의의 본질과 개념을 터득해가는 눈빛들, 그 주인공들과 여백을 서서히 채워나가는 뿌듯함이 있다. 온통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며 사는 이 시대에 눈빛과 마음으로 소통하는 사람은 아마도 강사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강사가 되는 데는 어려운 점이 있다. 강사의 기본은 스피치다. 말은 그냥 말로 끝날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이 누군가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면 그 말은 사람에게 행복의 도구로 사용된다. 그러려면 같은 말도 더 맛깔스럽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강의가 끝나고 이메일 혹은 전화로 상담이 들어올 때 이 직업을 잘 선택했다는 생각을 하며 보람을 느낀다. 학교 다닐 때 공부도 잘 못 했는데 그런 내가 연단에 서고 강사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나를 강사로 이끈 우연한 기회, 그 선택을 이제는 천명처럼 받아들인다.
시어머니는 처음 뵈었을 때부터 쪽진 머리였다. 동그스름하고 몽똑하게 붙은 뒷머리 가운데로 은빛 비녀가 반짝였다. 농사일로 두 손을 호미 삼아 거의 평생을 사신 어머니. 그 시절 부녀자들에게 달리 돈이 될 유일한 게 머리카락을 파는 거였다. 젊은 시절엔 당신의 삼단 같은 머리카락을 내주고 항아리나 그릇 등을 장만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만든 바늘꽂이를 받았다. “머리카락 바늘꽂이는 녹이 안 슬어. 큰 바늘은 이불 꿰맬 때 쓰거라.”나일론 자투리 헝겊에 특별할 것 없는 무늬. “이걸 언제 쓴대요?”라고 되물으며 나는 조금 웃었다. 생활에 쫓겨 허덕이는 내게 바늘꽂이는 영 동떨어진 분위기였다.
어머니 생전에 내가 들었던 ‘피 뽑는 선비 마누라’ 이야기가 있다. 결혼해서 이 얘기를 몇 번이나 들었던 걸까. 그 얘기를 당신만 알고 있는 비밀인 듯 나직하고 조심스럽게 했다. 나 또한 그 이야기가 생의 비밀을 품은 실타래처럼, 어머니를 통해 마치 주문을 외는 제사장의 목소리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결혼하면서부터 어머니와 시동생들과 함께 살았다. 첫애를 낳고 얼마 후, 시동생 결혼으로 우리는 시댁 근처 동네로 분가했다. 다락이 있는 단칸방 월세를 거쳐 방 두 개가 딸린 전셋집을 얻었다. 다락의 책들이 내려와 방 한 칸을 차지했다. 책 사이로 겨우 바람이 통한다 싶을 때 아이는 둘로 늘었다. 아침에 눈을 떠 밤늦게까지 육아와 생계를 잇는 노동으로 여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생활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의 시선이 당신 아들의 책에 머물렀다. 필요한 살림보다 책이 주인인 것 같은 방. 공부하는 아들이 시간제로 강의를 한다는데 그럴듯한 밥벌이는 아닌 것 같았는지 어머니는 짐짓 내게 물었다.
“애비 공부는 언제까지 하는 거여?”
“언제까지란 게 있나요. 죽을 때까지 하는 게 공분데.”
“음, 그렇긴 허지.”
속 시원한 답을 기대한 건 아닐 터였다. 당신보다 한술 더 뜬다 싶은 며느리 말에 막연히 불안했을까. ‘피 뽑는 선비 마누라’ 이야기가 나오는 적절한 상황은 이때다.
어머니는 “서방이란 사람이 돈 될 일 하기는커녕,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책만 들여다보는 서방. 그렇게 가망 없겠다싶은 날들을 보내던 차에 쌀이 떨어졌다는구나. 논에서 피 뽑아 겨우 생계 유지하던 마누라가 부아가 나 그만 보따리를 쌌다지 뭐니” 하며 이야기를 늘어놓으신다. 이쯤에서 어머니의 의도는 알고도 남았다. 나도 찔리는 구석이 없진 않았다.
식구들이 잠든 어느 일요일 새벽, 집을 나왔다. 전날 술에 절어 들어온 남편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남편 옆으로 여덟 살, 세 살, 두 아이들이 송이버섯처럼 나란히 자고 있었다. 집을 나선 건 계획된 게 아니었다. 식구들을 떠나 나를 돌아봐야 했다. 넘어질 것 같은 내 자신을 추스르려고 안간힘을 썼던 때였다.
얘기 속, 보따리를 싼 마누라는 공부만 하는 서방을 떠나 좀 편하게 살자 했으나 피를 뽑고 사는 궁핍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한다. 조금만 더 참았다면 영광이 있었을 텐데, 끝까지 인내하지 못하고 서방을 떠난 마누라를 어머니는 당신 일처럼 안타까워했다.
머리카락이 들어간 바늘꽂이는 어머니의 체온인 양 은은하다. 평소에 바르시던 동백기름 향이 나는 것도 같다. 바늘꽂이를 보고 있으면 당신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어머니는 백수를 한 해 앞두고 소천하셨다. 살아가는 동안 세상 욕심으로 힘들고 외로울 때, ‘비밀’처럼 들려주던 옛날이야기는 나를 부드럽게 꾸짖으며 따뜻하게 위로하는 메시지가 되었다. 바늘꽂이의 큰 바늘은 행여나 마음속 해지지 않게 한 땀, 한 땀 나를 꿰맨다.
나는 궁벽한 서해안의 한촌(閑村)에서 태어나 중학교 시절까지 보냈다. 소나무가 아주 많은 곳이었다. 고산자 김정호(古山子 金正浩, ?~1866)도 이곳을 다녀간 후 “그곳에 소나무가 많다”고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적었다. 장터 옆 중학교까지는 시오리 길이라 왕복 30리 길을 매일 걸어 다녔다. 신작로 주변의 야트막한 산에도 소나무가 지천이었다. 운동장 서편에는 노송 한 그루가 푸른 잎과 검붉은 보굿(껍질)을 자랑하며 개교 68년이 지난 지금도 모교를 지키고 있다. 뒷동산도 솔밭이라 때론 그 그늘 아래 낮잠을 자며 쉬기도 했다.
송화가 만발하는 5월 무렵 꽃가루를 모아 다식을 만들어 입에 넣으면 달콤하고 매콤한 맛이 목에 오래 남았다. 새순으로 빚은 송순주(松筍酒)의 솔 향도 그만이다. 살아서 수백 년, 베어져서도 궁궐이나 한옥의 기둥과 서까래로 또 수백 년을 버텨내니 나무 ‘목(木)’에 어른 ‘공(公)’을 붙여 예찬할 만하다.
소나무 화가로 첫손을 꼽는 소산 박대성(小山 朴大成, 1945~) 화백은 이 땅의 굴곡진 역사를 헤쳐 온 예술인이다. 해방둥이로 경북 청도에서 태어나 3세에 어머니를 여읜 그는 한국전쟁 직전 한의사였던 아버지마저 잃는다. 빨치산에게 ‘반동 지주’로 찍혀 칼에 맞아 즉사한 것이다. 당시 등에 업혀 있던 박 화백도 왼팔을 잘렸다. 그의 애절한 삶은 그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쪽 팔만으로만 살아온 신산한 일상에서도 “제사 때 둘러친 병풍의 그림과 글씨를 따라 그리는 것이 좋았다”고 회고한다. 예닐곱 살 때, 새들이 와서 부딪쳤다는 신라의 황룡사 벽 ‘노송도’를 그린 천재 화가 ‘솔거’ 이야기를 교사였던 형에게서 듣고 화가의 꿈을 다졌다. 신체의 불구를 야유하던 철없는 학우들 틈에서 내성적이고 비사교적이었던 그는 더 이상 학교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의 학력은 중학교까지가 전부였다. 20대 때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 1892~1979) 화백과 서예가이자 미술평론가인 석도륜(昔度輪, 1923~)을 찾아가 잠시 지도를 받았고 독학의 고행은 계속되었다. 1970년대엔 국전 8회 입선, 1980년 ‘중앙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한다. 대상 수상은 그의 작품이 종래의 화풍을 파격적으로 벗어난 독창성과 창의성을 인정받은 쾌거였다.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의 실경(實景)의 맥을 이으면서도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 1897~1972), 소정 변관식(小亭 卞寬植, 1899~1976) 같은 대가의 반열에 오르고자 열과 성을 다해 그리고 또 그렸다. 1990년대에는 현대미술의 정체성을 찾고자 미국 뉴욕에서 1년여를 보냈다. 그때 “내 것을 모르고 남의 것, 서양이라는 뚱딴지부터 찾았구나” 하며 깨달았다. 귀국 즉시 경주 불국사를 찾아 그곳에서 1년 동안 사찰생활을 했다. 1995년에는 경주 삼릉(三陵) 지역으로 하향한다. 어쩌면 유년기에 가졌던 아련한 ‘솔거’의 꿈을 성취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후 박 화백은 회화 435점, 서예 182점, 벼루·먹·붓 213점 등 도합 800여 점을 경주시에 기증, 2015년 8월 경주시 엑스포공원 내 아평지 인근 연못가에 우뚝한 ‘솔거미술관’을 개관했다. 문기(文氣) 어린 그의 작품 중에서도 용(龍)의 형상을 닮은 노송도(老松圖)는 가히 압권이다. 이 그림[사진1] ‘송풍라월도(松風蘿月圖)’는 소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과 나무에 감긴 담쟁이덩굴이 달빛 아래 흔들리는 아취(雅趣)를 갈필로 단숨에 붓 놀린 작품이다. 성긴 여백에 달빛 가득한 정경이 솔잎 사이로 고즈넉하다.
우리 부부가 서울 종로구 부암동의 홍소안(洪小岸, 1958~) 화가를 찾았을 때 그는 화실 바닥에 엎드려 붓질을 하고 있었다. 200호가 넘는 화폭 위로는 노송 두 그루가 용 비늘 같은 두꺼운 껍질과 부딪고 있었다. “제 고향 전남 곡성에 있는 소나무를 현장에서 일주일 스케치한 뒤 옮겨 그리고 있어요.” 화실 창 너머로 인왕산 등성이와 좁은 길 사이로 소나무가 나란히 보였다. 여기저기 벽에 걸린 크고 작은 그림도 모두 소나무뿐이었다. “10여 년 전에 이곳으로 이사해 인왕산을 매일 산책하며 소나무를 깊게 만났지요. 그 후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며 큰 소나무들을 미친 듯이 찾아다녔고, 현장에서 며칠씩 머물며 그렸지요.” 그는 화폭의 질감을 돋보이게 하려고, 흰 광목에 흰 물감을 발라 말린 뒤 손으로 비벼 구긴 다음 뒷면에 물감을 바르고 다시 뒤집어 색을 입히는 배체법(背彩法)을 활용했다.
홍소안이 개발하다시피 한 이런 화면의 구성은 소나무의 음영과 굽은 가지, 솔잎의 입체적인 표현에 아주 적합하다는 평을 받게 되면서 소나무 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했다. 일찍이 한국화로 국전에서 입선과 특선의 결실을 거둔 것도 오로지 독학으로 이룬 성과였다. 화선지를 사용하며 익힌 선염(渲染)의 묘를 광목에 아크릴 물감으로 실현해보기를 수년간. 시행착오를 겪으며 이뤄낸 1998년 ‘한국의 소나무 전(展)’은 그의 작품세계에 큰 획을 그어주는 전기가 되었다. 그를 수차례 만나 보니 실경(實景)의 “소나무를 통하여 자신의 실존을 확인하며 자신이 속한 시공(時空)을 기록하고, 언제나 푸른빛을 잃지 않는 우직하고 고집스런 꼿꼿함은 그의 성정과 매우 닮아 있다”는 평자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인왕산 소나무’[사진2]는 그의 화실에서 떼어온 작품이다. 인왕산 기슭에서 지금도 잘 자라고 있는 소나무 세 그루를 광목 위에 옮긴 그의 대표 작품이다. ‘자신의 작품을 좋아하고 화실을 찾아간 고마움에 다섯 달 분납하도록 편의’를 주어 위층으로 오르는 계단 벽에 걸고 매일 바라보며 소나무의 정령(精靈)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나무 중에 으뜸인 소나무는 언제 보아도 범접하기 어려운 신령함이 있다. 그런 소나무를 즐겨 그리다 보면 곧 소나무의 고상한 기(氣)가 화폭에 젖어들어, 보는 이들의 마음까지 맑게 한다.
거리의 인문학자라 불리는 김찬호(金贊鎬·57) 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그는 인간의 영혼이란 매우 여리고 취약한 것이라 말한다. 누구든 작은 말 한마디와 눈빛만으로도 타인의 영혼을 파괴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자기 영혼을 다스릴 수 있는 감수성을 키워야 한다고 조언한다. 아울러, 이러한 감수성은 인간의 언어를 ‘경청’하는 경험에서 나온다고 덧붙인다. 그는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서해문집)를 통해 인생 선배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본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구술생애사를 통해 본 희망의 노년 길 찾기’라는 부제의 도서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공동저자인 김찬호 교수와 문학평론가 고영직, 여성학자 조주은은 각자 베이비부머를 한 사람씩 인터뷰하며 그들의 생애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반평생 은행원으로 일하다 늦깎이 시인이 된 최영식 씨, 전업주부로 살며 포기했던 꿈에 다시 도전하는 김춘화 씨, 이우학교를 만들고 현재는 ‘50+인생학교’ 학장이 된 정광필 씨. 그중에서 김 교수가 만난 이는 정광필 학장이다. 일전에도 대안 교육과 관련한 공식 모임에서 만난 적은 있지만, 단둘이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은 처음이다.
“아는 사이지만 사적인 대화를 한 적이 없어 호기심이 생겼어요. 정광필 학장은 고등학생 때부터 정치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고 용기 있는 실천을 해왔습니다. 우여곡절이 많았을 텐데, 모든 일을 게임 감각으로 풀어나가는 경쾌한 분이었어요. 그런 점에서 인생 선배에게 배운다는 게 이거구나, 말보다는 어떤 기운으로 그가 살아온 인생이 묵직하게 느껴졌죠.”
그는 10시간 가까이 정 학장을 인터뷰 했지만, 한 가지 묻지 못한 것이 있었다. “오랜 시간 누군가에게 내 삶을 말 해보니 어떤가요?”라는 것. 질문을 바꿔 김 교수에게 물어봤다. “오랜 시간 누군가의 삶을 들어보니 어떤가요?”
“나의 스토리가 누군가에게 전해질 때, 즉 스토리가 텔링이 되면 또 다른 힘이 생깁니다. 수박 겉핥기이지만, 한 사람의 60년 인생을 따라간 거 아녜요. 일종의 시간 여행이죠. 그분의 삶을 통해 나를 잠깐 떠나볼 수 있는, 나를 객관화하고 낯설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인터뷰할 땐 그 사람의 삶에 온전히 들어가 있으면서 동시에 나와 있어야 하거든요. 살아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그의 표정과 함께 다가올 때, 그 삶을 내가 잠깐 살아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래서 인터뷰라는 게 참 재미있죠.”
삶의 공백을 채우는 자기 언어
김 교수는 생애 전환기의 중장년 세대가 ‘내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가? 그 발걸음이 품고 있는 내재율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자기 삶을 되짚어보길 바랐다.
“베이비부머가 압축 성장한 산업화 시대를 살았다고 하는데, 당시엔 민주화도 아주 급진적으로 이뤄졌어요. 그 시기 산업화와 민주화의 공통점은 자기 삶이 없다는 거예요. 그냥 내던진 거죠. 돈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그 과정에서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친구들이 끌려가고, 가족이 죽고, 자기도 당하고, 그런 아픔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채 살아왔죠. 그런데 세월이 흘러 외적으로는 뭔가 생겼어요. 돈, 지위, 명예… 내적으로는 굉장히 공허한데 말이죠.”
그는 현재 시점에서 자신의 지난날을 음미해볼 것을 권했다. 이를 위해서는 삶의 여백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상대적으로 시간이 여유로운 중장년의 경우 삶의 여백이 많다고 할 수 있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여백과 공백은 다르죠. 디자인도 잘못한 걸 보면 여백이 아니라 공백처럼 느껴지잖아요. 마찬가지로 시간이 비었다고 무조건 여백은 아닙니다. 노후에 할 일이 없고,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의 경우엔 공백이라고 봐야죠. 그러니 공허한 거고요. 빈 시간이 여백이 되려면, 그만큼 자기 마음에 그릇이 생겨야 해요.”
마음의 그릇은 어떻게 만드느냐고 묻자, 김 교수는 ‘자기 언어’가 있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가 강조하는 ‘자기 언어’는 무엇일까?
“언어는 단순한 정보 전달의 도구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의 한마디가 사람들을 울릴 때가 있잖아요. 또 극한의 고통에 빠진 사람이 세상을 향해 외치는 호소, 그때의 언어는 신호가 아니거든요. 그 존재가 다가오는 거지. 이때 느끼는 자기 언어의 생명력은 대단한 학식이 없더라도 누구나 경험하고, 감동할 수 있죠. 자기 언어는 내면에서 생성되는 겁니다. 그런데 대부분 바깥에서 지식으로 언어를 흡수하기 때문에 일상의 언어가 도구화되어 버렸죠.”
그는 특히 중장년 세대가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하고 살아왔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명령의 언어, 힘겨루기의 언어, 과시의 언어 등에 익숙해져버린 것. 이에 대한 해답 역시 ‘경청’이라 제안한다.
“우리는 누군가의 말에 경청할 여유가 없었고, 반대로 온전히 나를 경청해주는 사람 앞에서 말해본 적도 없어요. 늘 대화하면서 내가 이렇게 말하면 저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생각하죠. 그건 상대에 대한 배려가 아닌 견제거든요. 서로 위협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정서적 신뢰를 쌓는 안전한 관계가 필요한 거죠.”
내 남은 생애가 쓰이길 바라며
경청이 중요한 것은 알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 마음먹고 잘 들으려 하다가도 어느새 잔소리를 늘어놓기 일쑤다. 이에 김 교수는 ‘감수성’ 차이에서 오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내가 잘해주고 싶은 것보다 상대가 필요로 하는 걸 헤아려야죠. 그게 감수성이고, 센스인데, 의지만으로 생기지 않는 것들이에요. 먼저 자기 삶을 들여다보는 훈련이 돼 있어야 해요. 관찰, 통찰, 성찰은 함께 이뤄져요. 상대에 대한 이해는 나에 대한 이해와 같습니다. 남에게 친절한 사람은 그만큼 자신을 사랑하는 거고, 늘 화내는 사람은 자신과도 불화 관계에 있다고 생각해요.”
나와 잘 지내기가 곧 남과도 잘 지내는 방법이라는 것. 그렇다고 자신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게 꼭 자기만 생각하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삶을 좋게 만들고자 할 때 자연히 나의 삶과 관계도 편안해질 수 있다고.
“꼰대질이라는 걸 왜 하게 될까요? 에고(ego)에 갇혀 있기 때문이에요. 에고에서 벗어나려면 자기를 넘어선 세계를 지향해야 합니다. 공적인 영역, 시민으로서의 정체성, 역사의식 등이죠. 내 남은 생이 인생 후배들의 삶을 위해 쓰이도록 초점을 맞춰야 해요. 그러면 꼰대질을 덜 하게 되죠. 꼭 내가 인정받지 않아도 되니까요. 여생의 능력이 쓰여 누군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여기면 내가 대접받고 아니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져요.”
책 말미에서 정 학장은 “나이 들어 더 좋은 게 있다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세월이 갈수록 이해가 많이 된다. 스스로 내려놓으면 오히려 많은 걸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김 교수에게 같은 질문을 하자, 비슷한 대답이 나왔다.
“포기할 게 많아진다는 것?(웃음) 선택지가 줄어들거든요. 이미 많은 게 굳어진 상태니까요. 좋은 의미의 체념이랄까? 고민할 게 줄어드니 마음이 한결 편안합니다.”
지금의 50+ 세대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과제는 아마도 자녀교육과 내 집 마련이었을 겁니다. 집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자산증식 수단이었고, 한때 성공과 노후 대비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덧 세상은 변해 대다수 50+ 세대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달랑 ‘집’ 하나인 것이 현실입니다.
50+ 세대는 지금 걱정이 많습니다. 모아놓은 돈은 없고 소득은 점점 줄어드는 상황에서 더욱 길어진 인생 후반의 삶을 계획해야 합니다. 자산의 대부분이 부동산인 현실에서 50+ 세대 인생 재설계의 핵심은 바로 주거계획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집 문제는 생애설계 영역과 분리되어 부동산 자산운용 관점에서만 설명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집에 대한 생각도 바꾸고, 조금은 다른 상상을 해봐야 합니다. 넓은 평수의 아파트가 품위를 유지해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삶을 퍽퍽하게 만드는 건 아닌지, 현재의 아파트 구조가 노년의 사회적 고립을 고착시키는 시스템은 아닌지, 청년주거 문제와 하우스푸어 위기에 놓인 장·노년층의 고민을 함께 해결하는 방안은 없는지, 필요한 최소한의 개인 공간 외 공동 공간을 만들어 어울리며 사회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건 어떨지…. 지금껏 우리가 가졌던 집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새로운 상상과 노력이 요구됩니다. ‘집이란 사는(buy) 것이 아닌 사는(live) 곳’이라는 인식의 전환과 함께, 재무설계 중심의 생애설계가 아닌 머물러 사는 집, 어울려 사는 집의 관점에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저비용 구조로 삶을 다운사이징하고 가치 중심의 관계 형성에 노력해 비록 소득은 줄어도 덜 쓰고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묘수를 찾아야 합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고령화와 장기 저성장 시대가 이들로 하여금 공동체 주거에 관심을 갖게 했습니다.
공동체 주택은 내 공간은 작지만 실용적으로 함께하는 공간은 합리적으로 구성해 주거비용의 절감이 가능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파트처럼 한 공간 안에서도 서로 담을 쌓고 사는 단절된 관계가 아니라, 이웃들과 주거 공동체로 사회적 가족을 이룸으로써 노력하기에 따라 이웃과 함께하는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행복하고 건강한 주거공간으로서 공동체 주택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습니다.
이쯤에서 필자가 살고 있는 공동체 주택 ‘여백’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여백은 30대에서 60대, 1인 가구와 부부 가구, 3대 가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세대가 모인 공동체 주택입니다. 여백은 힘들고 불안한 도시의 주거 문제를 함께 힘을 모아 해결하길 원했던 사람들이 모인 생활 공동체입니다. 전혀 서로를 알지 못했던 우리는 2015년 초 하우징쿱주택협동조합의 공동체 주택 입주 희망자 모집을 통해 만났으며, 이후 서로를 알아가며 조금씩 공동체를 이루어갔고, 집짓기를 병행한 끝에 2016년 8월 여백에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의 집터(경기도 고양시)를 잡으면서부터 적극적으로 마을과 소통하며 같은 주민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 틈에 둘러싸여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잘 아는 이웃들과 더불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수많은 사람 속에서 익명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인식하는 공동체의 주민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동체 주민으로서의 인식은 누가 학습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변화에서 스스로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시에서와 같이 타인을 경계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 누군가 옆에 있다는 안정감이 정서적인 변화라면, 공동구매나 일상에서 수시로 이루어지는 소소한 나눔과 교환, 도움 주고받기 같은 활동은 경제적으로도 적지 않은 생활비 절감 효과가 있습니다. 또한 에너지 절감이나 쓰레기 분리수거와 같은 생활 문제에서 지역사회는 물론 좀 더 거시적인 사회 문제에 이르기까지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조금씩 친환경적이고 생태적인 삶을 지향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구성원 각자가 “공동체로 살아보니 좋구나!” 하는 자각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공동체 주거는 매우 별난 사람들의 특별한 주거라고 여겨져 왔습니다. 하지만 우리 같은 보통 시민이 전혀 몰랐던 사람들과 만나 공동체 주택을 짓고 잘 사는 것을 보았을 때, 이제 더 이상 특별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증명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공동체 주택은 더 이상 집값에 연연해하는 사적 재산이 아니라 지역사회와 소통하는, 지역에 열려 있는 사회적 자산입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주거 공유로 모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더 친해지고 각자가 가진 재능을 집단 지성으로 발휘하고 조직화할 때, 지역사회에 필요한 다양한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나이 들어가면서 주택을 중심으로 노년기 삶에 필요한 생활서비스 등을 전개하며 시설에 의지하지 않고도 스스로 공동체 복지를 이루어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복지 정책은 지금처럼 가족의 부재와 빈곤의 증명을 요구하며 노인을 복지센터 등 시설로 끌어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가정과 소규모 공동체의 일원으로 복귀시키는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지금의 복지제도는 청·장년이 가족의식으로 연대할 수 있도록 돕지 않는 데다 인간을 더욱 파편화하고 물화시켜 더 소외된 존재로 만들고 있습니다. 각종 시설 등 하드웨어에 쏟아 붓는 막대한 비용을 가정이나 가족의 회복, 공동체 육성을 위해 투입해야 합니다.
보통의 서민들이 생각하는 노년의 삶은 공공복지의 최저생활 보장도, 고급 실버타운의 비싼 서비스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터전에서 이웃들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다가 인생을 마감하는 것입니다. 공동체 주거는 바로 이들에게 노년의 안정적 주거와 새로운 관계망 형성을 지원하는 훌륭한 주거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백만매택 천만매린(百萬買宅 千萬買隣)’이란 옛말이 있습니다. 좋은 이웃과 함께하고 같이 산다면 천만금이라도 아까울 것 없다는 의미입니다. 중국 남북조시대 송계아(宋季雅)라는 관리가 가격이 백만금밖에 안 되는 집을 천만금을 주고 산 뒤 여승진(呂僧珍)이라는 사람의 이웃집으로 이사했습니다. 사람들이 의아해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는 백만금은 집값으로 지불했고[百萬買宅] 나머지는 여승진과 이웃이 되기 위한 값[千萬買隣]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누구나 언젠가는 홀로 남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과연 누가 나의 이웃이며, 나는 어떤 이웃일까요? 거필택린(居必擇隣). 좋은 이웃을 선택해 살 집을 정해야 한다는 옛사람들의 지혜를 우리는 지금 다시 배워야 합니다.
목적지는 충청남도 부여다. 그곳에서 태어나고 묻힌 시인 신동엽을 만나기 위해서다. 서울남부터미널의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여행의 설렘을 더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알록달록한 단풍잎은 가을을 보내기 싫다는 듯 나뭇가지 끝에 겨우 매달려 몸을 흔든다. 두 시간 정도 지났을까, 호젓한 부여에 도착했다.
부여시외터미널에서 신동엽문학관까지의 거리는 멀지 않다. 5분 정도 이정표를 따라 걷다 보면 신동엽의 시 ‘껍데기는 가라’의 한 구절을 써놓은 게스트하우스 담벼락이 눈에 들어온다. 이는 문학관에 거의 다 도착했다는 의미다. 100m도 채 지나지 않아 신동엽문학관과 신동엽 생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2013년 개관한 문학관과 복원된 생가는 서로 다른 매력을 보여주지만, 함께 어울려 신동엽 시인에 관해 이야기한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껍데기는 가라’는 1967년에 발표됐다. 이후 ‘참여시의 절정’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비로소 문단의 조명을 받았다. 같은 해에는 4800행에 달하는 장편서사시 ‘금강’을 팬클럽의 작가기금을 받아 발표한다. 깔끔한 외모의 젊은 국어선생님이었던 신동엽은 평소에도 인기가 높아 여학생들로부터 편지를 많이 받았다. 그런 그를 보고 아내인 인병선 여사가 화를 많이 냈다고 한다. 신동엽은 자신의 작품인 오페레타 ‘석가탑’을 무대에 올리고 다음 해인 1969년, 국민방위군(1951) 때 감염된 간디스토마가 간암으로 악화되어 만 3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신동엽문학관은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승효상의 작품이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낡아가는 자연스러운 문학관의 모습이 신동엽의 시를 닮았다. 마치 종이를 바른 듯한 느낌의 외벽에는 여백이 넘치고 내부는 외부로 자연스레 연결된다. 진보적인 시인이었던 신동엽. 이곳을 순례하는 자들의 발길은 여전히 잦다.
전시관에서는 시인의 육필 원고를 비롯해 인병선 시인과 주고받은 편지와 사진, 즐겨 읽던 책, 교무수첩, 신분증 등 다양한 유품을 관람할 수 있다. 그와 관련한 자료들은 시간이 많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유가족의 노력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전시관을 다 둘러봤다면 옥상정원으로 올라가봐야 한다. 푸른색 기와의 신동엽 생가를 한눈에 넣을 수 있다.
신동엽이 자라고 신혼생활을 했던 생가의 앞마당 웅덩이는 지금은 풍성하게 자란 잔디가 그 자리를 메꿨고 초가지붕은 기와로 바뀌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시인이 살던 집은 조금씩 모습을 바꿨지만, 생가 안의 물품은 그 시절 그대로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흰 고무신과 책상 위의 잘 익은 감을 보고 있으면 마치 시인이 살아 돌아올 것만 같다. 방문 위에 걸려 있는 목판에는 인병선 시인의 작품 ‘생가’가 새겨져 있다. “있었던 일을 늘 있는 일로 하고 싶은 마음”이란 구절에서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나버린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느껴진다.
우리의 만남을/ 헛되이/ 흘려버리고 싶지 않다// 있었던 일을/ 늘 있는 일로 하고 싶은 마음이/ 당신과 내가 처음 맺어진/ 이 자리를 새삼 꾸미는 뜻이라// 우리는 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살며 있는 것이다.
―인병선, ‘생가’
관람 정보
주소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신동엽길 12
전화 041-833-2725
관람시간 09:00~18:00 (11월~3월은 17:00까지)
휴관일 매주 월요일, 명절 입장료 무료
1972년부터 1979년까지 대한민국을 흔들었던 디바 정미조가 오랜 우회로를 거쳐 다시 우리에게 돌아왔다. ‘개여울’과 ‘휘파람을 부세요’와 같은 다양한 히트곡들이 가수 정미조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떠오르겠지만, 사실 그녀는 가수로서의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을 화가로서의 인생 2막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인생의 제3막에서 가수로 돌아온 그녀는 그동안 쌓은 세월의 깊이를 유감없이 선보이고 있다. 웅숭깊고 밀도감 있는 호흡을 가지게 된 그녀의 노래와 함께 삶의 궤적을 들여다봤다.
글 김영순 기자kys0701@etoday.co.kr
1972년, ‘개여울’로 데뷔한 정미조는 그 후 7년 동안 대한민국을 휘어잡았던 시대의 디바였다. ‘휘파람을 부세요’, ‘그리운 생각’, ‘아! 사랑아’와 같은 히트곡들로 차트의 정점에서 활동하던 그녀는 1979년이 되자 돌연 가수생활을 접고 프랑스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미술을 공부해 박사 학위까지 받은 그녀는 1993년 한국으로 돌아와 화가이자 미대 교수로서의 삶을 살며 인생 2막을 열었다. 그리고 이제 인생 3막. 다시 가수로 복귀한 그녀가 기자 앞에 앉아 있다. 브라운관에서 볼 수 있었던 젊은 시절의 에너지 넘치던 모습은 이제 온화한 무게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38년 만에 나에게 맞는 옷을 찾았다”
“2015년에 23년간 일했던 교수직에서 은퇴했죠. 마음이 홀가분했어요. 은퇴한 사람들은 흔히 ‘저녁에 집에 가면 뭘 하지?’ 하는데 난 행복했어요.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됐으니까요.”
37년. 정미조가 수원대학교 조형예술학부 서양화과 교수로 있다가 다시 무대로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이다. 그 시간 그대로, 그녀는 ‘37년’이라는 제목으로 2016년 자신의 앨범을 내놨다.
“‘내가 정말 할 수 있을까?’ 싶어 걱정됐죠. 그리고 CD로 앨범을 만들어 내놔야 하니 부담감과 책임감이 컸죠. 그런데 이주엽 JNH뮤직 대표님이 정말로 함께 작업해보고 싶은 목소리였다고 응원해주셨고 제가 부르게 될 노래들의 가사도 너무 마음에 들었고요.”
그리고 지난 11월 17일, 그녀는 앨범을 또 발표했다. 이번 앨범의 제목은 ‘젊은 날의 영혼’. 라틴 음악, 팝 재즈, 모던 포크 등 수록된 14곡에는 다양한 음악적 시도가 들어 있다. 그녀는 ‘38년 만에 자신에게 맞는 옷을 찾았다’고 표현했다. 마침 올해는 그녀의 가수 데뷔 45주년이기도 하다.
“이번 앨범에서는 젊은 친구들과 함께했어요. 음악감독은 재즈 기타리스트 정수욱씨가 맡았습니다. 그리고 집시 기타리스트 박주원 씨가 작곡한 노래가 있고요. 박주원씨 어머니가 제 팬인데, 박주원씨가 그런 어머니를 위해서 작곡한 곡이에요. 편곡이 얼마나 좋은지, 기타와 다른 악기 연주자들과의 합이 너무 좋았어요. 그리고 Mnet의 오디션 프로그램 에서 나왔던 제주소년 오연준과는 듀엣으로 손자와 대화하듯 노래를 불렀죠.”
대한민국이 사랑한 목소리
오래전 얘기다. 가수로 데뷔하기 전 정미조는 이화여대 안에서 노래 잘 부르기로 유명한 스타였다. 그러나 학교 안에서만 노래를 부르는 것은 그녀로선 갑갑한 일이었다. 그런데 대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 레코드 회사 사장이 직접 그녀를 찾아왔다. 당연히 그녀의 이름을 건 앨범을 내고 싶다는 제안이었고, 서양화과에서 4년 동안 과 대표를 내리 맡을 정도로 성실한 학생이었던 그녀는 본격적으로 ‘가수를 하느냐, 마느냐’라는 갈림길에서 고민에 빠졌다. 그런 그녀의 고민을 해결한 것은 그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학과장이자 지도교수인 은사의 한마디였다.
“해봐라, 내 나이 되어 그때 한번 해볼걸 하며 후회하지 말고. 너는 공부 잘하니까 일단 가수로 활동하다가 나중에라도 대학원 가서 다시 공부하면 된다.”
지도교수의 한마디, 그리고 그녀의 결심은 적중했다. 세상 밖으로 나온 그녀의 목소리에 대한민국이 사랑에 빠진 것이다.
화가로서 자리매김한 인생 2막
“유학을 떠나서 몽마르트 언덕 8층 건물 꼭대기에서 살았어요. 한국에서 매니저, 운전기사 등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다가 혼자 지내며 밥까지 스스로 지어 먹어야 해서 너무 힘들었어요. 막 울기도 했고.”
그러나 힘들다고 돌아올 수는 없었다. 한국을 떠날 때 은퇴를 공언했고, 당시 최고의 인기 예능 프로그램이었던 TBC(옛 동양방송) 예능 프로그램 에서 신인가수로 막 데뷔한 최백호 한 명만을 초대가수로 초청한 고별 특집까지 했었다.
“최백호 선생은 거기서 처음 만났어요. 정민섭 선생이 그때 나를 위해 ‘나 여기 있어요’를 써줬는데 그 노래를 중간쯤 불렀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 거예요. 내 의지로 떠나는 거라 눈물이 안 나올 줄 알았어요.”
그렇게 했는데 파리까지 가서 다시 돌아올 수는 없었다. 그녀는 물방울 그림으로 유명한 김창렬 작가의 추천으로 파리에 있는 두 개의 국립학교 중 아르데코에 입학했다. 그리고 그 후는 가수가 아닌 재불 화가로서의 삶이었다. 6년 3개월 동안의 박사과정을 완료했고 모나코 전시회에서 상까지 받으면서 성공적인 서양화가로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1993년부터 수원대학교 교수로 지내면서 화가이자 교육자로서의 인생 2막의 삶을 살았다.
최백호, 손성제, 이주엽과의 인연
“어떤 전시회에 갔을 때 보니 최백호 선생이 자신의 그림 3점을 출품했더라고요. 그 그림들을 보니 너무 좋았어요. 미술계에서는 내가 중견이었으니까, 그림에 대해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죠. 그때부터 다시 최백호 선생과의 교류가 다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교수생활을 한 20년쯤 했을 때, 최백호 선생이 점심을 먹자는 거예요.”
최백호가 정미조를 만난 이유는 간단했다. 다시 가요계로 돌아와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녀는 최백호를 통해 앨범 ‘37년’의 음악감독을 맡은 색소포니스트 손성제, 제작을 맡은 이주엽 JNH뮤직 대표 등 그녀와 함께 작업하게 될 음악계 인사들과도 만날 수 있었다. 그녀의 음악적 성과를 알고 다시 시작될 가능성을 확신했던 그들의 조력을 통해 그녀는 가요계를 떠난 1970년대와는 너무도 다른 환경 속에서 오래 닫혀 있었던 자신의 문을 다시 열었다.
“저는 37년 만의 녹음이라 잠도 못 이뤘죠. 그런데 손성제 교수가 굉장히 속도감 있게 작업을 잘했어요. 어떤 노래는 녹음하자마자 오케이 사인을 했어요. 첫 곡이 가장 좋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죠.”
어렸을 때는 정말 신나게 불렀었구나 싶었다
마침 얼마 전에 나온 아이유의 리메이크 앨범 ‘꽃갈피 둘’에는 정미조의 대표곡인 ‘개여울’이 리메이크되어 실려 있다. 아이유 특유의 여리고 애조가 깃든 곡 해석은 비슷한 나이대의 정미조가 보여줬던 목소리의 힘과 비교하면 묘한 재미가 있다. 아이유가 구사하는 창법은 ‘37년’ 앨범에 실린, 리뉴얼된 ‘개여울’에 더 가깝다. 그런데 막상 정미조는 자신의 인생 1막을 채웠던 가수로서의 엄청난 인기와 삶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다고 술회했다.
“제 인생 1막은 20대였는데, 한국에 돌아와 그 시절의 모습을 다시 보니 ‘아, 내가 정말 신나게 불렀구나, 젊음의 설익은 패기로 마구 전진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많은 경험이 인생에 녹아들면 그 경험이 바로 소리가 되죠. 옛날의 제 소리가 시원시원해서 듣기 좋았다면 지금은 삶의 서러움, 슬픔이 배어든 소리가 됐어요.”
그녀의 말대로, 지금 그녀의 목소리는 젊었을 적 목소리와는 사뭇 다르다. 깊은 호흡, 긴 감성, 나이 든 이의 여백과 회한이 묻어나는 그녀의 창법은 한때 전설이었으나 오랜 시간을 돌아 다시 무대에 선 그녀의 모습에서 저 저명한 아프로 쿠반 밴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여성 보컬인 오마라 포르투온도가 떠오르는 것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어른의 음악이 사라진 시대, 전설이 돌아오다
인터뷰에 함께 동석했던 이주엽 JNH뮤직 대표의 말대로 지금 한국은 ‘어른의 음악’을 들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어른의 음악에는 인생의 끝자락에 이른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정서가 담겨 있기 마련이다. 7년 동안 우리나라 가요계를 뒤흔들고 사라졌다가 37년 만에 다시 나타난 정미조의 노래에는 그런 마법 같은 순간들이 담겨 있었다.
“이번 앨범은 곡들을 너무 잘 만났고 덕분에 제대로 만들었어요. 그러나 우여곡절이 유난히 많은 앨범이기도 했죠. 예를 들어 믹싱과 마스터링까지 다 됐는데, 들어보니 너무 화려해서 제가 가진 오리지널함이 줄어든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그 시점에서 완전히 새로 고치기도 했어요. 듀엣을 하기로 한 제주 소년 오연준군은 목소리는 아이인데 아이 같지 않은 성숙한 느낌이 있었죠. 그런데 막상 함께 불러보니 처음에는 음역대가 안 맞아서 노래가 제대로 안 나오기도 했어요. 하지만 마지막에 극적으로 노래가 완성됐죠.”
이번 앨범 ‘젊은 날의 영혼’에는 정미조가 작곡한 노래들도 세 곡 들어갔다. ‘오해였어’는 작사와 작곡을, ‘난 가야지’와 ‘비 오는 오후’는 공동 작사·작곡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녀가 이번 앨범에 갖고 있는 열정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 열정은 그녀의 인생 3막이 금방 끝날 것 같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듯했다.
“인생을 살아보니 때가 있어요. 수십 년 동안 이 노래들을 위해 시간을 보낸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전에는 들지 않았던 감정이죠. ‘지금이 내 때가 온 건가?’ 싶어요.”
아이디어 닥터, 트렌드 몬스터, 강연여행가, 브랜드 전문가…. 이장우 브랜드 마케팅 그룹 회장(62)의 여러 별칭이다.
이 별칭들엔 이장우 회장의 개인 브랜드 혁신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현재 전통제조업에서 IT 스타트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업종의 기업 7곳에서 고정·비고정의 급여를 받는다. 1년에 최소한 5~6회는 미래 유망 트렌드를 찾아보고자 해외 아이디어 탐방 여행을 가 브랜드의 촉과 감을 갈고 온다. 삶 자체가 ‘살아 있는 브랜드’로 부단한 자기 혁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을 햇빛이 투명한 어느 멋진 날, 인사동의 한 찻집에서 그를 만났다. 화려한 컬러의 통 좁은 바지에 선글라스, 중절모는 물론 반지와 팔찌 등 액세서리 일습을 갖춘 그는 말 그대로 꽃중년 그 자체였다.
인터뷰 다음 날, 그는 인도로 3주간 홀로 명상연수를 떠날 예정이라며 한껏 부풀어 있었다.
보통 사람은 한 곳에서 월급을 받는 것도 좌불안석입니다. 무려 일곱 군데에서 급여를 받으신다니 부럽습니다(웃음). 퇴직 후 급여가 오히려 더 많아졌겠습니다.
“돈의 재미를 넘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세상이 날 필요로 한다는 의미이니까요. 현재 다섯 군데가 고정급여이고 두 군데는 비고정급여인데 늘었다가 줄었다가 합니다(웃음). 솔직히 퇴직을 앞두고 걱정을 많이 했어요. 최고경영자들이 퇴직 즈음해선 쪼잔한 상념이 많아지거든요. 부러진 날개 신세에서 영웅담을 생각한다는 것은 뻥이에요. 하다못해 국민연금, 4대보험 문제는 어떻게 하나, 별 게 다 걱정이 됐어요.”
퇴직 후 바로 이장우 브랜드 컨설팅 그룹을 만드셨지요. 직원 한 명을 둔 미니 지식기업을 창직(創職)하셨습니다. 퇴직 후, 현직 때 마지막 연봉의 두세 배를 번다고 들었습니다. 성공 비결이 무엇입니까.
“우리나라 실정과 저의 현실을 냉정하게 본 것입니다. 조직 브랜드와 개인 브랜드를 헷갈리지 않은 것이지요. 퇴직 후 회사를 만들지 않겠다고 결심했어요. 조직을 키우기보다 개인으로서 나, 이장우를 키우는 게 효과적이란 생각을 했어요. 규모의 경제에서 제가 대기업, 다국적 컨설팅 그룹과 경쟁하려 한다면 백전백패입니다. 그런 기업들의 CEO와 경쟁한다면 승부수를 던질 만하지요. 개인 브랜드로 승부를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퇴직 후 공황을 겪는 것은 조직 브랜드와 개인 브랜드를 헷갈려서입니다.”
퇴직 CEO들이 과거의 성공 스토리에 머물러 인생 2막 설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더군요.
“강의, 컨설팅 모두 부단한 콘텐츠 개발 싸움입니다. 대중의 열광, 과거의 영광 모두 거품이고 잠깐이에요. 길어야 1~2년 가기도 힘들고 곧 고갈되지요. 강의는 말이 아니라 콘텐츠로 하는 것입니다. 말 못해도 콘텐츠 있으면 오래 갈 수 있어요. 콘텐츠 없이 말만 잘하면 금방 바닥이 나게 돼 있지요. 멀리 보고 깊이 보려면 끊임없는 공부를 해야지요. 저는 책 공부보다 여행 공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개인 차원에선 스몰데이터, 감(感)이 브랜드 차별성이에요. ○○에서 들었다, 읽었다는 개인의 스몰데이터가 기업의 빅데이터를 이기기 힘들어요. ‘내가 직접 해봤다, 가봤다, 느껴봤다’를 이야기해야 먹히지요. 경쟁력은 기능이 아니라 나만의 느낌에서 옵니다.”
브랜드 전문가, 아이디어 닥터, 그리고 강연여행가로 별칭이 계속 진화하고 다각화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가 담겨 있습니까.
“브랜드 연구는 제 평생의 업으로 한 일입니다. 여행은 콘텐츠 개발을 위해 하다 보니 어쩌다 본업이 돼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여행인문학 강의를 좋아하더라고요. 트렌드의 발상지, 원산지를 직접 방문해보자는 데서 출발했는데요. 요즘은 여행인문학으로 관심이 확장됐어요. 저는 관심의 촉, 미래의 촉이 느껴지면 배울 만한 곳이 어디에 있나 찾아봐 세계 어디든 직접 가보려고 합니다. 가령 2009년 도쿄 책방을 갔을 때의 일인데요. 트위터에 관한 책이 한 코너를 다 차지하고 있더군요. SNS가 뜨겠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미국 뉴저지 스테이트대학으로 공부하러 갔어요. 동양의 중년 남자가 그 먼 곳으로 한겨울에 SNS 공부를 하러 왔다니 학교에서 놀라더군요(웃음). 공부는 선(先)투자이자 선(善)투자예요. 공부하면서 계발하고, 계발하면서 공부해야지요.”
일반인이 ‘트위터’의 ‘트’란 말에도 익숙하지 않을 때 조기유학(?)을 한 덕분에 그는 SNS 브랜딩 홍보 분야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또한 현재 페이스북 팔로워 6만 명. 카카오스토리 5만 명, 인스타그램 1만 명의 팬을 확보하는 기틀이 되었다.
그의 ‘본산지, 원산지 찾아 아이디어 탐방 삼만리’는 SNS에서 그치지 않았다. 프랑스 치즈학교, 미국 포틀랜드 커피 바리스타스쿨, 영국 수제맥주 학교, 이탈리아 전통 베네치아 파스타 학교 등 관심 분야도, 아이디어 탐방 지역도 무궁무진하다. 전국 방방곡곡, 아니 세계 도처를 누비며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맛보고, 손으로 익혔다. 말 그대로 ‘왔노라 보았노라 배웠노라’였다. 그곳에서 벌어지고 부딪치는 소소한 사고와 우연한 사건들. 그것이 경험이 되고 이야기가 되고, 느낌이 되어 그만의 브랜드로 승화된다.
제가 소심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비용이 먼저 걱정되는걸요. 항공비, 체재비, 게다가 연수비용까지 만만찮을 것 같습니다.
“저는 버는 것의 20%는 자기계발에 투자한다는 주의입니다. 되도록 스폰서를 잡지 않고 제 돈으로 가는 게 원칙입니다. 후원을 받으면 여행 순서를 깨뜨리고 구속이 되거든요. 미국과 이탈리아에서 커피를 공부하는 데 2000만~3000만원 정도 들었어요. 결과적으로 강연, 컨설팅 요청이 들어와 투자한 것의 10배 정도는 뽑게 되더군요.”
그는 처음인 일을 나만의 것으로 차별화하면 브랜드가 된다고 말했다. 가령 커피 바리스타 강의를 하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대중을 상대로 커피와 맥주를 전문적으로 강의하는 브랜드 전문가는 흔치 않다.
흔히 “관광이 아닌 현지 체험, 풍경이 아닌 사람을 만나라”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이 회장님처럼 여행을 즐기면서 아이디어 탐방 기회로 만들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여행은 필연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연을 만나기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일단 떠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가고 싶은 곳을 가보세요. 너무 목적, 목적 하며 따지지 마세요.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틀에 갇히기 쉽습니다. 기회는 인과관계 밖에서 터져 나옵니다. 많이 가야 합니다. 삶은 가고 싶은 목적지를 갖는 것입니다. 여행은 꿈입니다. 꿈을 가져야 여행을 가게 되고, 여행을 가야 자꾸 꿈을 키울 수 있지요.”
이장우 회장은 “여행은 꿈이고 도전”이라며 “목적을 갖고 가지만, 가서 새로운 목적과 도전을 얻는 우연, 세렌디피티가 더 크다”고 말했다. 그는 “목적지를 정하면 온갖 정보를 검색, 6개월 전부터 치밀한 계획을 짜지만, 막상 가서는 널널하게 현지에서 자유여행을 즐긴다”고. 사전 계획 때는 채우고, 막상 가서는 비운다. 말하자면 서양식 사고의 과학적 플래닝과 동양적 사고의 인문학적 여백의 결합형이다. 이번에 가는 인도행은 이름하여 소울 트립(soul trip). 트렌드의 촉을 읽으면 정통 원산지를 찾아 도전하고, 스토리를 만들고,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다듬어 전달하고 퍼뜨린다. 그것이 바로 브랜딩 아니겠는가.
외국어가 가능하다는 점도 세계 도처 어디든 도전하시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를 포함해 6개 국어를 하시지요. 최근에는 힌두어, 라틴어까지 공부하신다고요.
“새로운 언어를 하나 더 배운다는 것은 머리가 하나 더 생기는 일입니다. 언어를 한다는 것은 사고를 한다는 것이거든요. 여행한 곳을 더하면 새로운 마음의 눈이 하나 더 생기고요. 외국어 공부는 자기를 다른 세상으로 집어넣는 일종의 유체이탈 행위입니다. 리얼하지요. 비유하자면 번역이 사진 속 풍경이라면, 원어는 풍경 그 자체라고나 할까요. 아무리 인공지능 즉시 통번역 시대가 온다 하더라도, 외국어 공부는 필요하다고 봅니다. 리얼한 것을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니까요. 그것은 단지 속도가 아니라 느낌의 문제예요. 앞으로 세상은 지식이 아니라 필(feel)의 경쟁시대가 될 거예요. 지식과 상식은 보편화돼 검색하면 나오니까요. 느낌 있는 사람만이 살아남아요. 새로운 아이디어 탐방을 멈추지 않는 이유입니다.”
요즘 문제되는 것은 세대 간 소통입니다. 기업 자문을 하실 때 신세대 직원들과 같이 일을 하셔야 할 텐데요. 그들이 어려워해 소통이 어렵진 않던가요.
“제가 얼마나 신세대랑 잘 노는데요(웃음). 저는 나이듦을 장점으로 활용해요. 바깥바람 막아주지, 아이디어 아낌없이 공유하지, 성과 올려주지, 이들의 입장에선 ‘성과와 실력은 향상시켜주면서 경쟁하지 않아도 되고, 일은 쉽게 풀어가면서 어려운 책임은 상대가 가져가고’ 당연히 좋을 수밖에요. 신세대가 저처럼 나이 든 멘토와 일하는 장점이지요.”
그는 세대 간 불통은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매력 자원이라는 무기의 문제라고 진단하면서 “신세대가 기성세대와 소통을 안 하는 것은 어렵거나 겁먹어서가 아니다. 기성세대를 무시해서다. 기성세대에게 배울 게, 물어볼 게, 아쉬울 게, 부러울 게 없다고 생각해서다. 기성세대가 신세대와 소통하려면 호통이나 비위 맞추기는 불필요하다. 그보다 실력을 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본인은 재미와 의미를 갖고 일하지 않으면서 ‘나처럼 돼보라, 해보라’고 하면 누가 따르겠냐는 반문이다.
평생 재미와 의미로 점철된 흥미진진한 삶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삶에서의 ‘그늘’이 궁금합니다.
“웬걸요. 제가 콤플렉스 투성이인걸요. 콤플렉스가 힘이 되니, 인생은 알 수 없어요. 단점이 강점이 되고, 엎치락뒤치락이에요. 집은 가난했고, 머리는 나빠 구구단도 못 외울 정도였어요. 다행인 것은 지식이 들어가기 힘든 대신 나가기도 힘들더군요. 외우는 데 오래 걸렸지만, 한 번 외우면 잘 안 잊어버렸어요. 그게 외국어 공부의 동력이 되었지요. 또 집이 가난해 구멍가게를 했고, 상고에 진학해야 했지요. 어렸을 때부터 물건 팔고 장사를 하다 보니 세일즈에 일찍 눈을 뜨게 됐어요. 머리 좋은 사람이 끝까지 하는 사람을 못 이겨요. 제 삶의 모토가 ‘긴 호흡으로 살자’입니다.”
이장우 회장과의 인터뷰를 떠올리며 원고를 한 자 한 자 치고 있었다. 마침 그의 블로그에 인도에서 쓴 따끈따끈한 새 포스트가 올라왔다. 아쉬탕가 요가의 요람인 인도 마이소르의 한 수도원에서 올린 사진과 글이었다. 검은색 뿔테 안경에 주황색 승려복을 걸친 모습이 얼핏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를 연상시켰다.
“요가와 명상을 배운다는 사실이
설레었고, 그 느낌은 참 편안하고 좋았다.
영혼이 춤추는 세상을 찾아가는 새로운
배움의 여정임에 틀림없다.
몸과 마음이 지쳐버린 현대인들에게
명상과 요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by 이장우
어느 날 문득 그가 명상과 요가 브랜드 전도사로 새롭게 나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연여행가 뒤에 붙을 그의 새로운 브랜드 네임이 문득 궁금해진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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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가수 진미령은 한 설문조사에서 재혼하고 싶은 여자 1위에 뽑힌 적이 있을 정도로 매력적인 여성이다. 아직도 소녀 같은 진미령이 내 나이와 비슷하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 나이에 이토록 섹시한 스타는 가요계 통틀어서도 드물다. 아직도 잘록한 허리에 조막만 한 얼굴과 긴 머리가 잘 어울리는 섹시하면서도 청순한 소녀와 마주하고 가을 냄새를 느꼈다.
가수는 “히트곡에 따라 인생이 결정된다”는 속설이 있다. 그 때문일까? 불행하게도 요절가수들의 히트곡은 대부분 엄청 슬프다.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부른 차중락, ‘마지막 잎새’를 부른 배호, ‘슬픈 노래’와 ‘안녕 친구여’를 부른 김광석, ‘슬퍼하지 말아요’와 ‘이별의 종착역’을 부른 김현식 등 요절가수 대부분의 노래 가사가 슬프다. 그에 반해 진미령은 ‘소녀와 가로등’으로 히트를 쳐서 그런지 아직도 청순한 소녀 같다. 5년 전에 발표한 ‘미운 사랑’이 중장년층에 큰 호응을 받고 있는데 그 가사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녀의 인생과 닮아 있다.
남몰래 기다리다가 가슴만 태우는 사랑 어제는 기다림에 오늘은 외로움 그리움에 적셔진 긴 세월 이렇게 살라고 인연을 맺었나 차라리 저 멀리 둘걸 미워졌다고 갈 수 있나요 행여나 찾아올까봐 가슴이 사랑을 잊지 못해 이별로 끝난다 해도 그 끈을 놓을 순 없어 너와 난 운명인 거야
-‘미운사랑’ 1절 가사
진미령이 가사를 직접 쓴 이 노래가 실제로 전유성과의 이별과는 상관이 없겠지만, 한량 이봉규가 듣기에는 아픈 이혼의 경험이 절절히 묻어나오는 듯하다. 진미령은 전유성과의 이혼에 대해 더 이상 말하기를 꺼렸다. 그러나 나와 술 마시다가 불쑥 뱉어낸 적이 있다. 냉면을 먹다가 이혼을 결정했다는 것.
냉면 먹다가 이혼을 결심했다
진미령은 “냉면이 먹고 싶어 전유성과 단골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도착해보니 전유성은 이미 냉면을 다 먹고 난 후였다”며 “자신이 냉면을 먹는 동안 함께 있어주겠다고 한 전유성이 갑자기 지루한지 먼저 가겠다고 일어섰다”는 것. 당시 서운한 감정을 떠올리며 “냉면을 먹는 이 짧은 순간도 기다려주지 못하는 남자인데 앞으로 함께 살아가기는 어려울 것 같아 이혼을 결심하게 됐다"고 실토한 적이 있다. “전유성과 헤어지고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또 다른 사랑이 있었나?” 물었더니 먼저 한숨부터 튀어나오더니 “남자들이 입이 가벼워 그들의 무용담에 내 이름이 오르내리기 싫어서”라며 말문을 막는다. 급히 화제를 돌리려 하기에 이에 질세라 나도 물고 늘어졌다.
“그동안 육체적 욕망은 어떻게 참을 수가 있었나?” 도발했더니,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여자는 성적인 충동을 잘 조절할 수 있고 혼자 어느 정도 기간이 흐르면 성적으로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고 진지하게 대답한다. 각종 행사 등 바쁘게 가수 활동을 하면 엔도르핀이 돌아서 나름 행복하고 또 요즘은 골프 삼매경에 빠져 시간 날 때마다 골프를 치니 외로움 따위는 없단다.
자유로운 사랑이 좋아
“앞으로 남은 평생을 이렇게 계속 혼자 살 작정인가?”라며 또 파고들었다. 그녀는 “좋은 남자 생기면 결혼하고 싶다. 그런데 따로 살면서 각자의 생활에 충실하고, 보고 싶을 때만 만나 데이트하면서 살고 싶다”며 한술 더 뜬다. 보통 우리네 평범한 여인네들의 생각과는 너무나 달랐다. 마치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사랑과 철학을 엿보는 듯했다.
진미령은 사실 전유성과도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계약결혼 비슷하게 살았다.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전유성의 전처 밑으로 호적이 올라가는 게 싫어서”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작고 귀여운 외모와는 다르게 남자에게 의존적이지 않고 독립심이 강하고 사랑도 주체적으로 끌고 가려는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이 대목에서 갑자기 진미령과는 정반대 스타일의 내 아내의 엉뚱함이 떠올라 혼자 피식 웃었다. 내 아내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나의 전처를 ‘형님’이라고 호칭하면서 가끔 나를 놀리곤 한다. 내 아내의 그런 놀림에 당황스러울 때도 있지만 유머 코드로 치부하고 넘어가곤 한다. 정신 차리고 다시 진미령과의 인터뷰에 탄력을 붙였다.
“어떤 남자와 결혼하고 싶나?”라는 질문에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진다. “아침에 남편보다 먼저 일어나서 화장하고 싶지 않아서 연하는 곤란하고, 그렇다고 다섯 살 이상 많은 할아버지랑 사는 것도 썩 내키지 않고 내 나이와 시추에이션이 난처하다”는 것.
다시 말하면 나이가 비슷하고 친구였던 사람이면 좋겠다는 뜻이다. 맥 라이언과 빌리 크리스탈 주연의 영화 의 주인공 커플처럼 되고 싶다는 고백으로 이해했다.
故 김동석 영웅의 딸
화제는 진미령의 아버님 얘기로 이어졌다. 사실 진미령과 내가 알기 시작한 것은 그녀의 아버님 때문이었다. 진미령의 아버지 김동석 대령은 미국이 선정한 ‘6·25전쟁 4대 영웅’ 중 한 사람이다. 미국 측의 맥아더 장군과 리즈웨이 장군, 그리고 한국 측의 백선엽 장군과 김동석 대령이 그들이다. 의정부 미2사단 전쟁박물관 내에 마련된 김동석 영웅실에는 훈장을 비롯한 유품과 각종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미국도 김동석 대령을 영웅으로 선정해 극진히 대접하는데 모국인 대한민국이 그를 푸대접하는 것이 안타까워 내가 방송에서 여러 번 다룬 적이 있다. 그때 진미령이 내 전화번호를 방송국에서 수배해 연락을 해왔다. “아버님을 제대로 평가해줘서 너무 고맙다”고 울먹이며 통화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후로 나이도 비슷해서 가끔 만나 술도 한잔하면서 친구처럼 지낸다.
김동석 대령은 육사 8기 출신으로 한국전쟁에 참여해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북한군 15사단을 전멸시키기도 했고 맨몸으로 정보참모부 소속 미군 연락장교로서 적진에 침투해 결정적인 첩보를 수집했고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는 데 1등 공신이 되었다. 당시 맥아더는 김동석 사진을 가리키며 ‘This man!’이 준 첩보는 믿을 만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사실 인천은 조수간만의 차도 크고 여러 가지 여건상 상륙작전을 하기에는 부적절했지만 김동석의 결정적인 첩보가 맥아더 장군의 선택에 용기를 부여했던 것이다. 김동석 대령은 이때부터 맥아더 장군에게 ‘This man’이라는 별칭을 받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눈을 무서워했던 진미령은 아버지 같은 사람하고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기야 목숨을 내놓고 북파 공작원으로 살았기에 보통 사람의 눈매를 가졌을 리 만무하다. 아버지는 칠십이 넘어 눈이 부드러워졌고 그때부터 아버지가 좋아졌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어눌한 말투의 부드러운 눈매를 지닌 전유성과 살았는지 모를 일이다.
요리도, 노래도 잘하는 다재다능한 가수
진미령은 요리 프로그램 진행을 맡을 정도로 요리를 잘한다. 프랑스의 유명 요리학교인 르 코르동 블루(Le Cordon Bleu)에서 정식 디그리(degree) 과정을 마쳤다. 이 때문에 그녀는 요리와 관련해 가장 많은 섭외를 받는 연예인으로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중국어, 일본어, 영어 등 외국어도 능통하다.
다재다능한 재주를 지녔기에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직업을 갖길 원하나?”라고 물었더니 그녀는 “골프를 아주 잘 치는 가수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한다. 가수가 천직이라는 말.
솔직히 말해 한량 이봉규도 다시 태어나면 평론가보다는 가수가 되고 싶다. 그만큼 가수라는 직업은 참 매력적이다.
가수로서 진미령은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만족한다. 그런 점에서는 참으로 복 받은 여인이다. 하느님은 공평해서 모든 걸 다 주지 않는가보다. 본인은 그 나이에 혼자 살아도 행복하다고 주장하지만(나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완벽한 부부생활을 즐기고 있는 이봉규가 보기에는 진미령이 다소 외롭게 보인다. 다재다능한 재주에 가수로서도 성공해 만족스러운데 거기에 완벽한 부부생활까지 누린다면 시샘을 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하느님이 진미령에게 사랑의 여백만은 남겨두신 걸까? 아니면 조만간 그 여백을 채워주실까? 누군가 어렵다면 주머니 털어서 다 주고 재능기부를 하도 많이 해서 ‘진 봉사’라는 별명을 가진 그녀이기에 후자에 기대를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