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옥임씨(鄭玉任·56)는 6년 전에 이혼하고 황홀한 돌싱(돌아온 싱글) 생활에 푹 빠져 있다. 데이트를 질리도록 하고 난 후 밤에 떨어지기 싫을 정도로 사랑하는 남자가 생겨도 앞으로 다시는 결혼 안 한다고 잘라 말한다. 지금처럼 뭇 남성들의 사랑고백을 받으면서 연애만 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녀의 속내를 들춰보자.
이봉규 시사평론가
정옥임은 미녀 정치인의 대명사이자 베스트드레서로도 꼽힌 바 있는 매력적인 여인이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나이가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날씬했다. 레스토랑에서 저녁 6시에 만났는데 나 혼자만 밥을 먹었고 그녀는 생맥주 한 잔으로 저녁을 대신했다.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평소 저녁을 거를 정도로 필사적이다. 외모에 자신감이 충만해서일까 반지나 목걸이 같은 보석은 착용하지 않았다. 그녀의 외모 가꾸기는 “자기 자신의 관상용”이라고 항변하지만 아직도 뭇 남성들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기에 자신의 외모는 가장 자랑스러운 자산일 것이다.
6년 전에 이혼하고 황홀한 돌싱(돌아온 싱글) 생활에 푹 빠져 있다. 그렇다고 방탕할 만큼 어리석은 여자는 절대 아니다. 자기관리에 충실하면서도 적당히 즐길 줄 아는 앙큼한 여인이다.
“마음에 드는 남성이 나타나면 먼저 대시할 용기 있다”고 말하면서도 상당히 재고 또 잰다. 알다가도 모를 그런 여자다. “여자들은 비밀스러운 스토리가 많아서 양파와 같다”면서 “알려고 파고들면 곤란하다”고 나에게 엄포를 놓는다. 그렇다고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내가 적당히 물러날 리 만무하다. 한량 이봉규가 느물느물하게 파고들어가니 그녀는 서서히 무장해제된다. 앙큼한 것 같으면서도 순진하고 순수한 여인이다.
10세 이상 연하의 남성에 매력이 끌린다고 고백한다. 최근 띠동갑 정도 어린 남자와 야릇한 감정을 교환한 적이 있었다고 털어놓는다. “육체적 관계로까지 발전하기에는 겁이 덜컥 나서 적당히 밀고 당기는 정신적인 감정만으로 짜릿했다”고 말하는 그녀의 볼은 어느새 붉어진다. 몇 년 있으면 환갑인 나이에도 소녀 같은 표정이 묻어 나온다. 띠동갑 연하의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지만 자칫 자신이 무너질까봐 겁이 나서 밀고 당기는 심리일까? 영화 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중년 남자(제레미 아이언스)처럼 주체할 수 없는 격정으로 치닫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처럼 보인다. “인생은 짧은데 후회하지 말고 저질러보라!”는 나의 도발에도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일정 틀 속에 가둔다. 그런데 그 틀이 조만간 깨질 수도 있겠다는 조심스런 예감도 들었다.
정치토론할 때 터프하게 도발하는 그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래서 본인의 입으로 여자는 양파와 같다고 말했는지 모른다. 정당하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나는 완전한 자유인이다”라고 외치면서도 이리저리 까다로울 정도로 재고 또 잰다. 정치인이자 세 명의 딸을 둔 엄마로서 띠동갑 연하의 남자와 대놓고 육체적 사랑을 하기에는 잃어버릴 것이 너무 많아서일까? 아니면 10년 후까지도 가지 못할 사랑이라서 미리 ‘손절매’(주식용어)라도 하는 걸까? 10년 후면 정옥임은 60대 후반인 데 반해, 그는 50대 중반의 팔팔하게 젊고 매력적인 남성이기에 자신이 추해 보일까봐 미리 겁을 먹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우려하는 표정을 읽었는지 그녀는 곧바로 “어느 도사님이 그러는데 나는 늙어서도 남자들이 줄줄 따르는 타고난 남복(男福)이 있다”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본인 입으로는 말을 안 했지만 내 추측으로 띠동갑 연하의 남자와의 정신적인 밀고 당김은 현재도 진행형인 듯싶다. 틀려도 할 수 없고….
눈이 작고 쌍꺼풀이 없는 남자이면서 건강미가 있고 뇌섹남(뇌가 섹시한 남자)을 좋아한다고 하니 그의 모습이 대충 그려진다. 어린 남자를 좋아하는 심리는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누구에게 의지하기보다는 누군가를 보호해주고 싶고 포용해줄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린 남자의 신선한 육체와 순수한 영혼이 늙은이들과 비교되어서 그럴까? 어린 여자를 좋아하는 대부분의 남자들 심리와 같은 것이겠지!
전 남편과 1983년 결혼해서 4년 만에 갑자기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버렸는데 그제야 남편과 안 맞는다는 불편한 진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불행을 타파하기 위해 내놓은 고육지책이 애들 데리고 미국에서 공부하는 것이었다. 단단히 마음먹고 1995년 비행기에 올랐다. 늦은 나이에 공부하면서 아이 세 명을 키우는 일이 보통 어렵지 않았기에 스파르타식으로 살았다고 회상한다. 어릴 적 를 감명 깊게 읽었는데 어려운 시기에 큰 지침이 되었다고 한다. 다행히 아이들도 엄격한 생활을 잘 이겨내고 나름 멋지게 성장해주었다. 대견하게 생각하면서 스스로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남편과 떨어져 살면서 바쁘고 힘든 생활이었지만 오히려 행복감을 느꼈기에 6년 전 이혼하고 말았다.
“전 남편이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하니 돌싱으로 사는 지금이 훨씬 행복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뒤돌아보지 않는 그녀의 화끈한 성격 탓일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여자들은 옛사랑보다는 현재에 충실하다는 어느 심리학자의 말이 떠오른다.
데이트를 질리도록 하고 난 후 밤에 떨어지기 싫을 정도로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도 앞으로 다시는 결혼 안 한다고 잘라 말한다. 지금처럼 뭇 남성들의 사랑고백을 받으면서 연애만 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녀의 본심은 인생의 여백을 즐기기 위함일 것이다. 지금까지 처절하게 살아온 자신에 대한 보상심리일 수도 있겠다.
그녀의 인생은 최고를 향한 처절함의 연속이었다. 서울 성신여대부속여자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고려대학교 정경대학에 특차 수석 입학해 정치외교학을 전공하는 4년 내내 장학생이었고 정경대학을 수석 졸업했다. 결혼 후 딸 셋을 두고도 뒤늦게 고려대학교에서 1995년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 후 과정(Post-doc)으로 스탠포드대학에서의 강의를 시작으로 미국 후버연구소, 세종연구소,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CNAPS(동북아정책센터) 등 국내외 최정상의 연구기관에서 활동했다.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캠프에 참여했고 이후 외교·안보·통일 분야의 전문성을 인정받아 18대 국회 한나라당 비례대표로 당선되었다.
이렇게 최고 전문가로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은 늘 남는다고 한다. 국내 박사라는 이유로 우리 사회에서 차별도 많이 받았다.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최고 전문가를 지향했고 남다른 자존감이 있었기에 그녀 나름의 견디기 어려운 박탈감이 있었을 것이다. 특히 국제정치 분야에서는 국내 박사보다는 미국 박사를 더 우대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상대적으로 차별을 당했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도 자신이 제일 잘하는 일이 외교 분야이고 가장 하고 싶은 일도 외교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다시 태어나도 외교 전문가가 되겠다고 하니 그녀는 천직을 가진 행복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국내 정치 얘기로 화제를 옮겼더니 금방 표정이 달라지면서 흥분한다. “지금 새누리당이 제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고 날선 비판이다. “문재인이 집권하면 위험하다는 위기의식이라도 보여줄 수 있는 대권 후보조차 보이지 않아서 걱정”이라고 탄식한다. “반기문 UN 사무총장은 그동안 스펙만 보여줬을 뿐 대통령으로서 역량과 결기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고 깎아내린다. 김무성 전 대표도 지난 총선 때 자신이 주장했던 ‘오픈프라이머리’를 지키기 위해 온몸을 던졌어야 하는데 대권 주자로서 기회를 놓쳤다고 애석해했다. 김무성 스스로의 대권 욕심 때문에 망쳤다는 진단이다. 당 대표까지만 생각하고 조율자로서 큰 그림을 그려야 했는데 자기 욕심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져 본인 지지율도 떨어뜨리고 당도 망쳤다고 강한 비판을 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지금의 난국과 새누리당을 이 꼴로 만든 것은 결국 대통령이 문제라는 지적이다. 그러면서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자기반추 없이 정권 재창출을 노린다면 양심 없는 행위”라고 힘주어 말한다. 심지어 “지금의 정치를 보고 있노라면 조선시대 내시와 상궁들이 정치하던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비판한다.
불과 30분 전에 연애 얘기 할 때와는 사뭇 다른 톤으로 거침이 없다. 정치 얘기에는 이리저리 재질 않는다. 이래서 정옥임은 정치를 하는구나!
“자기 자신의 일생에 대해 몇 점을 줄 수 있나?”는 질문에 주저 없이 “A플러스”라고 대답하면서 “자기 자신은 못 속인다”고 덧붙인다. 그만큼 자신의 인생에 당당할 수 있다는 자기 진단이다. 당찬 모습 뒤에는 여리고 순수한 모습도 어른거린다. 알 수 없는 앙큼한 양파 같은 여인과의 짜릿한 시간이었다.
김진 세계문학사 편집장
비로소 편안해졌다
20대, 30대의 소위 결혼 적령기를 지나 40대에 이르도록 나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결혼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받아야 했다. 혼자 산다는 이유만으로, 어느 자리에서나 ‘남자’와 ‘결혼’에 대한 질문을 받아야 했고, 나는 원하지 않는 대답을 강요받아야 했다.
“독신주의자는 아니지? 그래도 결혼은 할 거잖아.”
40대에는 심지어 내가 아무 남자라도 만나 결혼을 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처럼, 결코 내가 원하지 않는 만남을 주선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술자리를 만들거나 모임을 만들어서 슬쩍 남자를 끼워 넣어서는 강제로 짝을 맞춰주는, 그들의 호의는 폭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제발 나를 내버려 둬! 내가 원하는 때 원하는 사람과 할 테니까!’
이런 외침을 수도 없이 했다.
나는 물론 독신주의자가 아니다. 한 번도 연애를 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다만 결혼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혼자 사는 삶’에 대한 불안을 나 자신보다 더 크게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혼자 사는 사람들은 나와 같은 경우를 많이 겪었을 것이다. 하지만 50대가 되자 그런 일들도 거의 사라졌다. 50대쯤 되면 이젠 어떤 변화라든가 새로운 시작을 꾀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깨닫게 해준다. 비로소 편안해졌다.
마냥 자유롭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먼저 음악을 틀고, 느긋하게 저녁 준비를 한다. 무엇을 먹을까 하는 고민은 않는다. 그때그때 마음에 달렸다. 어떤 날은 국수를 삶는다. 멸치육수를 내고, 호박과 양파 등을 볶고 달걀지단을 부쳐 고명을 만들어 근사하게 먹을 수도 있고, 그냥 삶은 국수에 간장을 휘휘 뿌리고 참기름 둘러 슥슥 비벼먹기도 한다. 어떤 날은 삼겹살을 굽는다. 그리고 어떤 날은 햇반을 돌려 김치 한 가지를 놓고 먹어도 된다. 나는 음식을 먹으면서 자유로움을 만끽한다. 아무렇게나 먹기도 하고, 성찬을 차려 먹기도 한다. 식구가 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식구들의 취향도 생각해야 하고, 건강도 생각해야 하고, 예의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녁을 먹은 후에도 자유롭다. 무엇을 하든 내 맘 대로다. 멍하니 있어도 좋고, 책을 읽어도 좋고 영화를 봐도 좋다.
혼자 사는 것의 가장 좋은 점은 자유로움이다. 행동에 걸림이 없다. 내가 원하는 일만 할 수 있다. 얼마든지 게을러질 자유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게으름을 ‘불온’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게으름이야말로 최대의 자유이고 정신의 빈 공간이며 무엇이든 채울 수 있는 무한한 여백의 공간이기도 하다. 게으름은 혼자 있을 때만 완벽하게 가능하다. 단 한 사람만 있어도 게으름이 찾아오기란 쉽지 않다.
두려움이 찾아올 때면
우주의 물질이 가진 총 질량은 물질이 변화를 가져와도 변하지 않는다는 질량보존의 법칙이 있다. 흔히들 이를 빗대 인생에는 총량의 법칙이 있다고 한다. 삶을 살면서 겪어야 할 고통이나 기쁨, 즐거움, 외로움, 두려움 등등은 누구나 공평하게 주어지고, 그것은 인생 어느 때든 주어진 양만큼은 꼭 채운다는 것이다. 그저 재미있는 농담처럼 만들어진 이 말은 사실은 우리 삶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이 총량의 법칙으로 헤아려보면 삶은 참 공평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물질적으로 많이 가지거나 가지지 않거나, 혼자 살거나 가족과 살거나 총량의 법칙은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삶에 대한 두려움도 마찬가지이다. 누구나 삶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할 것이다. 혼자 사는 나의 두려움은 지금보다 더 늙고 병들었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가 가장 큰 문제이다.
잠자리에 들 시간이면 문득문득 그런 고민에 가슴이 무거워질 때가 있다. 몇 년 전 한밤중에 갑자기 열이 나면서 몹시 아팠던 적이 있다. 그때 이러다가 혼자 죽겠구나, 싶었다. 그때부터 생긴 고민이다. 아플 때 옆에서 돌봐줄 사람이 없으면 자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죽음 앞에서 사람이 있든 없든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으로 두려움을 가라앉히곤 한다.
외롭지 말고 고독하라
“외롭지 않은가.”
혼자 사는 사람들이 흔히 듣는 질문이다. 물론 외롭다. 외로움은 인간의 본질적인 정서다. 오욕칠정처럼 밑바닥에 있는 감정이다. 외롭기 때문에 사람들은 타인과의 관계를 맺는다. 관계 속에서 소통을 해 외로움을 해소하고 위로를 받고자 한다. 하지만 타인과의 관계를 한다고 해서 외로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소통이 되지 않을 때 외로움은 괴로움으로 변질이 되고 만다. 부처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이처럼 인간의 본질적인 감정인 외로움이 혼자 산다고 더하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때때로 나는 외로움보다는 고독하기를 즐긴다. 외로움은 타인을 통해 위로를 받아야 하지만, 고독은 스스로의 힘으로도 위로를 받는다. 고독은 내면의 공간을 확장시키는 힘이 있다. 고독할 때만이 내면 깊숙이 들여다보면서 성찰할 수 있다. 인간은 성찰을 통해 성숙해진다. 고독의 공간이 넓을수록 삶은 평화롭고 고요하고 아름다워진다.
최상의 노후는 미니멀리즘으로
백세시대라고들 한다. 나는 이 말에 대해 긍정적이지 않다. 산다는 것은 단순히 수명의 연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스스로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비로소 사는 것이다. 건강한 몸으로 사유와 성찰을 하며, 삶을 살지게 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살진 삶을 위한 가장 큰 요건은 경제적 문제이다. 수명의 연장은 비용이 드는 일이다. 정년까지 근무해서 벌어놓은 돈은 한정되어 있고, 이에 반해 삶의 비용은 늘어날 것이다. 이런 생각 끝에 나는 차츰 삶의 규모를 줄이고 미니멀리즘을 실천하기로 했다. 일단 새로운 물건은 가급적이면 구입하지 않는다. 사실 물건을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비용은 발생하기 마련이다.
갑자기 소유한 물건을 줄이려면 그것도 큰 비용이 든다. 지금부터 하나씩 줄여나가는 것이 좋다. 소유한 것들이 적으면 적을수록 정신의 여백은 넓어지고, 보다 풍요롭고 깊은 삶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여백서원(如白書院)의 주인장 전영애(全英愛·65) 서울대 교수에게 “정말 나이가 안 들어 보이신다”라고 말하자 “철이 안 들어서”라는 대답이 웃음과 함께 돌아온다. 어쩌면 이 각박하게만 보이는 세상에, 서원이라는 고풍스러운 세상을 만든다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철이 안 든 일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는 철이 안 든 게 아니라 자신이 올바른 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에 실천할 수 있는 일일 수도 있다. 서원에서 확인한 책과 책의 가치에 관한 문답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 사진 이신화 여행작가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걸은리의 여백서원(如白書院)은 말 그대로 책의 집이다. 전영애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가 아버지의 호 여백(如白)을 빌려 와 ‘맑은 사람들’을 위해 만든 이 공간에는 전원의 한적함과 생명력이 함께 어우러지고 있었다. 인터뷰는 늦은 매미 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지고 있는 가운데 소장한 책이 몇 권이냐는 질문부터 이뤄졌다.
“우와, 책이 얼마나 되나요?”
“몰라요. 그런 거 알아 뭐해요.(웃음)”
서원을 통해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다
전 교수는 올해 모교인 서울대에서 20년 동안의 교수 생활을 마치고 은퇴했다. 2009년에 국내 최초로 괴테 시 전집을 번역하고 독일 바이마르 괴테학회로부터 괴테 금메달을 받는 등 독일문학 분야에서 학문적인 업적을 탄탄히 쌓은 그녀에게 아쉬운게 있는지 궁금했다.
“늘 그렇죠. 절대적인 낙원이 어디 있겠어요. 이곳도 사람들 보고 숨 좀 쉬라고 만들었지만, 언제나 위협이 있죠. 예를 들면 여기에 조경을 잘 해놓으니까 주변에서는 농사도 못 짓는 땅인데 비싸게 내놓고. 갑자기 수영장 딸린 별장을 짓는다는 등 뭐 그런 얘기들도 있고. 도리 없죠.”
못다 한 걸 물으니 개인이 아니라 서원을 먼저 생각한다. 서원의 완성을 떠올린다. 전 교수에게 여백서원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좋은 사람들이 많이 오세요. 좋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더 바랄 게 없어요. 조경하시는 분도 오고, 을 읽으시고 암 치료 받는 분도 오시고. 그분들 중에 놀라운 분들이 많아요. 세상에 이상한 사람들이 난리 쳐도 귀한 분들이 숨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 처음 만난 사람들이 여기서 밤새도록 얘기하고 그래요.”
전 교수는 만난 사람들에 대해 연신 예쁘고 아름답다는 표현을 거듭했다. 마치 세상을 다시금 발견하게 된 사람처럼. 그녀는 자신이 운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어머니와 할머니가 참 좋은 분이어서 순전히 조상 덕에 잘 사는 게 아니냐며 웃음 짓기도 했다.
귀하게 여긴 책에서 느낀 힘
전 교수는 오래된 보자기에 싸 놓은 책들을 조심스레 꺼내 보였다.
먼저 어머니(김한섭)의 책. 1990년에 작고한 어머니는 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않았다. 평생 고생만 한 그 어머니가 필사한 책이 있다. 배움에 대한 욕망이 컸던 어머니는 책이 귀했던 시절, 한지에 책을 베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보고 외웠다. 소설본, 조선시대 가사를 적은 두루마리들이 전 교수의 손에 남았다.
그리고 아버지(전우순)의 책.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으로 사업을 했던 아버지는 60대 후반에 등산을 시작해 90세까지 매년 에베레스트를 올랐다. 그의 조부는 소수·도산서원장을 지낸 유학자인데, 250년 전 괴테의 글은 줄줄 읽는 딸이 증조부의 글을 못 읽는 게 안타까워 조부의 문집을 한글로 번역해 1000장의 종이에 붓으로 썼다. ‘91세 우순이 피로 번역하고 쓰다’라고 서명한 번역 작업을 2011년 6시간 반에 걸친 담도암 수술을 받은 뒤 마무리하고 6개월 만에 별세했다.
여백서원에는 괴테의 초간본(1819), 희귀본(1853)을 비롯한 200여 권의 독일문학 관련 서적이 있다. 바이마르 괴테학회 재정 감사였던 홀레씨는 별세하기 직전 다시 전 교수를 식사에 초대했고, 며칠 후 “당신이 갖고 있는 게 가장 좋겠다”면서 항공편으로 자신의 장서를 부쳐 왔다. 홀레씨가 임종을 앞두고 정리를 해서 보낸 것이다. 다들 훌륭한 사회인들인 당신 자녀들도 있는데 홀레씨는 가장 귀중한 책들을 전 교수한테 보냈던 것이다.
“그 책들을 누구에게 보내야 가장 귀하게 읽히고 잘 보관될 것인가를 많이 생각하신 것 같았어요. 11일 동안 그 집에 쌓인 수많은 편지를 보고 여러 일화를 들으면서 그의 생애가 얼마나 아름다워 보였던지요.”
여백서원에는 이 책들과 함께 전 교수가 시의 스승으로 모시는 동독 출신 시인 라이너 쿤체의 책, 학문의 스승으로 모시는 헨드릭 비루스 교수의 책, 자신이 쓰고 번역한 책, 교양수업 ‘독일 명작의 이해’를 수강한 제자들이 종강 때 각자 한 권씩 만든 책, 서원에 다녀간 사람들의 책까지 소중하게 간직돼 있다.
전 교수는 여백서원의 존재 이유로 이처럼 좋은 책의 보관과 함께 좋은 사람들의 보존을 든다. 책과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 한국에 대해 알고 싶은 외국 시인 누구에게나 여백서원은 열려 있다. 책이 있는 집, 서원에서 삶의 여백을 찾도록 해주고 싶다고.
힘들면 책을 읽어요
전 교수는 몸이 힘들면 책을 읽고 책을 읽다 머리가 아프면 몸을 움직인다. 그녀는 글을 알면 세계가 열린다고 말한다. 그래서 시험을 보려고 배우거나 출세하려고 배우는 건 너무 불쌍하다고도 했다.
“차 한 잔을 마셔도 사람이 가까워지는데 누군가가 온 힘을 기울여 쓴 책을 읽는다는 건 상당히 많이 받는 거예요. 그러면서 남들을 이해하게 되고 그러는 거지. 그래서 나이 먹어서 책을 읽는 것은, 아무 거나 읽어도 좋은 거예요.”
그녀와 괴테의 인연은 남다르다. 어떻게 괴테를 접하게 됐는지 물어봤다.
“중학교 때 어디선가 시를 하나 봤어요. 그때는 괴테도 모르고 시 제목도 몰랐어요. 그런데 괴테가 쓴 이라는 만년의 시집이 굉장히 중요하고 정말 어렵거든요. 그 책 한 권을 다 읽으니 끝에 괴테가 그 시집에 넣지 않고 버린 것을 편집자가 넣은 시가 몇 편이 붙어 있었어요. 그런데 거기에 제가 중학교 때 봤던 시가 들어 있는 거예요. 하도 놀라서 중학교 때 읽은 그 시가 어떻게 아직까지 잊히지 않고 기억 속에 남아 있었을까, 그 이유가 뭘까 고민하며 그 시를 분석하는 게 제가 독일의 출판사에서 낸 괴테 연구의 첫 페이지입니다.”
40여 년 만에 다시 만난 괴테의 시
중학교 때 본 시를 다시 보게 되기까지 어언 40여 년이 흘렀다. 그 세월 동안 남아 있는 괴테 시의 힘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괴테 본인이 많은 힘을 거기에 쏟은 거예요. 그게 읽는 사람에게 다가온 거죠. 놀라운 체험이었어요. 괴테는 자기가 경험하지 않은 건 하나도 안 썼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평생 연시를 썼어요. 그렇다면 평생 연애 경험이 있다는 건데, 그게 뭘 저지른 게 아니고 아름다운 글을 남김으로써 그 단계를 넘어선 거예요.”
전 교수는 자연스럽게 예술의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선 숭고한 단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런 괴테가 전 교수에게 어떤 롤모델로 작용한 부분이 있을지 궁금했다.
“괴테에게서 탐나는 점이라면 자만이 아닌 자긍심이었어요. 예를 들어 저는 계단을 꼭 뛰어다녀요. 그런 제 모습을 보면 어떤 사람은 스포티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바쁘다고 해요. 그런데 제가 계단을 뛰어다니는 건 계단을 걷는 게 힘들어서예요. 물론 괴테가 계단을 뛰어다니고 그러진 않았어요. 그런데 그 사람의 생활 태도가 그랬어요. 힘든 게 있을 때 그렇게 극복하더군요. 그게 자긍심이죠. 눌리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극복하는 것. 세상을 대하는 훨씬 더 적극적인 태도죠.”
우리 의젓하게 살자
그녀가 인터뷰 내내 강조한 말이 있다. 나만 힘든 게 아니라 모두가 다 힘드니까, 힘든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말이었다.
“자기 분야에서 잘하시는 분에게는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박수를 치고 싶어요. 힘 안 드는 일이 어디 있어요. 하지만 의젓하게 살아야 해요. 옆도 좀 돌아보고. 애들이에요? 울기만 하면 돼요?”
최근에 흔히 쓰이는 헬조선이라는 말에 대해서, 그녀는 매섭게 비판했다.
“우리나라를 헬조선이라 치고, 우리를 누가 여기에 넣은 건가요? 우리가 만든 건데. 금수저, 흙수저… 뭐 어쩌라고요. 형편이 어려운 건 다 알지만 누구나 어려워요. 그런데 승복이라는 게 없고 ‘넌 운이 좋아서 그런 거고 난 재수 없어서 이러고 있어서 너 미워’, 이거 아니에요? 나보다 힘들지만 열심히 사는 사람을 돌아보면 나도 힘을 얻고 그러는 건데 애들처럼 찡찡거려서 되겠어요? 부딪혀서 아프면 자기가 부딪힌 거지 그게 기둥이 때렸어요, 땅바닥이 때렸어요? 자꾸 남 탓하고 여건 탓하는 건 아닌 거 같아요. 그런데 이상하게 정서가 그렇게 가는 것 같아서…. 남 탓하는 건 어마어마하게 잘 하고 자기를 돌아보는 건 못 하는 것 같아서 걱정돼요. 우리 좀 의젓하게 살자고요.”
책이 즐거우면 계속 하고 싶어진다
서원 본관을 둘러보니 그녀의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이 만든 책들이 보였다. 한 학기 교양 수업을 듣고 만든 책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책들이었다. 그녀의 수업은 교재가 없고 시험이 없는 대신, 각자 학기말에 교재를 만들어 내게 한다. 그녀가 갖고 있는 공부 철학이다.
“공부는 자기가 스스로 해야죠.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는 것 정도로 제가 잘 가르칠 자신이 없어요. 내 자식들에게도 마찬가지였고. 요즘 부모님들은 어떻게 그렇게 자신이 넘치는지 모르겠어요.”
가끔씩 독자들이 물어보는 말, 손주가 책을 안 읽는데 어떻게 읽게 하느냐는 고민에 대해 전 교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했다.
“세상에! 아이가 책을 읽지 않으려 하면 읽지 말아야죠. 왜 읽어라 마라 해요. 아이는 책 읽는 시간이 즐거우면 나중에도 즐겁게 책을 읽게 돼요. 전 아무리 바빠도 잘 때가 되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줬어요. 아이들도 그 시간이 너무 즐겁기 때문에 책에 익숙해졌어요. 아이들에게 피아노 배우라고 들들 볶으면 아이들은 피아노를 배우는 게 아니라 들들 볶는 걸 배우게 돼서 대대로 들볶게 돼요. 그러나 엄마가 즐겁게 피아노를 치면 애들도 피아노를 치죠. 그걸 왜 억지로 시켜요? 책을 같이 재미있게 읽으세요. 즐거우면 즐거운 시간의 기억을 되풀이하고 싶어지죠. 그런데 즐거운 시간이 안 만들어지니 책과 멀어지는 거죠.”
고서의 향기를 품고
즐거움과 보람은 전 교수가 지향하는 공부법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자녀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행해졌다.
“사람들이 운동이 중요하다는 거 다 알잖아요? 그런데 돈을 내고도 안 하기도 하고. 하지만 운동보다 훨씬 더 중요한 건 노동이에요. 노동을 하면 보람이 있으니까. 그래서 아이들에게 일을 시키는 게 제 주장입니다. 일을 안 시키면 약해져요. 제 아이들이 걷기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시킨 일은 현관에서 냉장고까지 우유를 배달하는 거였어요. 자기가 우유 배달을 안 하면 온 식구가 우유를 못 먹게 되죠. 얼마나 보람 있어요?”
전 교수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을 ‘말도 아닌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녀는 대신 ‘올바른 목적이 있는 길은 그 어느 구간에서도 바르다’는 말을 믿고 있었다. 그러한 마음이 그녀의 삶의 태도를 결정하고 지금 여백서원의 주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이가 들어가는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도 그녀다웠다.
“나이 들면 얼마나 좋은데요. 저는 젊었을 때도 나이 들기를 소망했어요. 언제나 지금이 좋은 때여서, 두려움 등의 온갖 생각이 하나도 없어요.”
고서(古書)의 기품이 나는 전 교수 같은 분들이 세상에 온전히 남아 있으면 그게 바로 세상이 나아지는 길이 아닐는지. 여주에서 올라오는 차 안에서 내내 ‘말이 서야 나라가 선다’던 함석헌 선생의 문구가 맴돌았다.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
서울대를 졸업하고, 1996년부터 모교인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지내다 올해 은퇴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 고등연구원 수석연구원, 뮌헨 대학과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대학의 초빙교원을 겸임했다. 2011년 바이마르에서 ‘괴테금메달’을 수상했다. , , (공저), , , , , , 등 60여 권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이재준(아호 송유재)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67년 늦가을부터 종로구 관철동의 고서점 ‘통문관’을 드나들었다. 한문 시간에 설악산인(雪嶽山人) 김종권(한학자1917~1987) 선생님의 강의가 너무 감명 깊어 교무실로 자주 찾아뵈었더니 “학교 도서관에는 관련 책들이 별로 없으니 가까운 ‘통문관’에 가서 나 등을 찾아 읽어보라”고 하셨기 때문이었다.
주말에는 통문관 구석에 서서 역사책들을 읽으며 자연스레 서점 주인이며 서지학자인 산기(山氣) 이겸로(李謙魯·1909~2006) 선생과 가까워졌는데, 동그란 의자를 내어 주며 “맘 놓고 앉아서 책 보게”하여 여러 귀중한 책들을 읽을 수 있었다. 당시 그곳은 고명한 교수며 석학들의 사랑방이기도 해서 담배 심부름도 간혹 해드린 일이 있었는데, “이군, 이분이 검여(劍如) 선생이시네. 인사 여쭙게”하여 유명한 서예가 유희강(柳熙綱·1911~1976) 선생을 친견하였다.
두터운 뿔테 안경에 수염이 많은 온후한 인상이었다. 검여 선생은 통문관 3층에 서예실을 하고 계신고로 출타할 때는 작품을 통문관에 맡기고, 찾으러 오면 전달해 달라고 하셨다. 산기 선생은 가끔 당신이 부탁한 작품이라며 먹 냄새 싱싱한 화선지를 펴서 한문을 풀어 읽어 주셨다. 여러 작품을 보았으나 ‘文字香 書卷氣(문자향 서권기)’만 제대로 떠오른다.
검여 선생은 인천의 유학자 집안에서 출생하였으나 부친을 일찍 여의고 백부 밑에서 한학을 배웠다. 그러나 신학문에 뜻을 두고 성균관대학의 전신인 ‘명륜전문학교’에서 3년 과정 기초 학문을 익히고 중국으로 건너가 서화의 견문을 넓혔다. 서양미술 공부에 전념하기도 했으며 중국 위진(魏晉) 남북조(南北朝)시대(220~589)의 비학(碑學; 비석에 새긴 글씨 연구)을 비롯 서첩(書帖)을 두루두루 공부하였다.
광복과 함께 8년간의 중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그림(서양화)과 서예에 정진, 1953년 제2회 국전에는 서예와 서양화에 모두 입선하므로 서예가의 반열에 오른다. 검여(劍如)라는 아호는 “검(劍)처럼 날카롭고 돌처럼 단단하고 박처럼 둥근 글씨를 쓰고 싶어 검여(劍如), 석여(石如), 표여(瓢如)의 삼여(三如)라 하려 했지만 그 뜻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검여(劍如)라 했다”고 자호(自號)의 변을 하였다. 그의 글씨는 깊은 학문과 서법의 조예 있는 연구로 중국 위(魏)나라의 웅혼(雄渾)한 서체(書體)를 검여체로 혼융(混融) 발전시켰다. 추사 이후 제일의 서예가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1968년 뇌출혈로 반신불수가 되어 오른손을 쓸 수 없으니 서예가로서 치명상이었다. 이후 가족과 제자들의 희생적인 보살핌과 정신적인 재활의지를 불태워, 왼손에 붓을 잡고 소위 좌수서(左手書)의 시대를 열었다. 왼손 글씨만으로 세 번의 개인전을 열어 그 강인한 의지와 독특한 예술세계를 유감없이 펼쳐 보였다.
평소 그분의 작품을 소장하고자 열망하다가 1965년 작 ‘강락무극(康樂無極)’을 20여 년 전 어느 서예가로부터 입수하였다. 글의 뜻도 좋지만 그 힘차고 당당한 검여의 서체가 마음에 끌렸다. 더불어 하세(下世)하기 1년 전인 1975년에 쓴, 좌수서 현판과 행서(行書)의 대련(對聯)도 수집할 수 있었다.
옛 속담에 ‘왕대밭에서 왕대 난다’고 하였듯 검여 선생의 문하에는 남전(南田) 원중식(元仲植·1941~2013)이라는 우뚝한 수제자가 있다. 그가 제물포고등학교 2학년인 1958년부터 검여 선생과 인연을 맺어 서울대 농대를 진학한 1960년부터 검여 선생이 서거한 1976년까지 16년간 인격도야의 서예 교습을 받았을 뿐 아니라 검여 선생의 관철동 서예실에 상주, 그 서맥을 잇고자 정진하였다. 검여 선생의 뇌출혈 이후는 수족처럼 곁에서 스승을 모셔 좌수서의 그 빛나는 서예 업적을 이루는 데 수훈을 세웠다.
서울의 여러 구청 녹지과장과 서울대공원 식물과장 등의 공직에 종사하면서도 한학, 금석학, 서예의 깊은 연구로 개성 있는 글씨의 세계를 표출하였다. 검여풍의 강건한 북위(北魏)의 해서(楷書), 행서(行書), 예서(隸書), 초서(草書) 등을 두루 섭렵, 1990년에는 서예에 전념코자 공직을 내놓고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으로 이주하고 1999년에 ‘원중식 서법전’으로 남전체의 서예를 발표, 서예계를 긴장시켰다. 2003년에는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화진포에 서원을 짓고 후학뿐 아니라 어린이들에게 서예를 지도하였다.
남전 선생이 서울에 주거할 때 수차례 찾아가 그 겸손하고 공손한 인품에 머리 숙인 적이 있었다, 이 작품 ‘피갈회옥(被褐懷玉’은 1979년 38세의 작품이다.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70장에 나오는 글귀로 ‘겉으로는 거친 삼베옷을 입고 있으나 마음속에는 귀한 옥을 품고 있다’는 뜻으로, 선비는 귀한 속내를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는 은유의 의미도 있는 글이다. 힘차고
그러나 거친 갈필(渴筆)의 여백이 남전 선생의 젊은 날의 기개를 느끼게 한다. 검여 선생의 작품들과 ‘대상무형(大象無形)’, ‘만리무촌초(萬里無寸草)’, ‘일이관지(一以貫之)’, ‘수신독행(修身篤行)’, ‘도광양덕(韜光養德), ‘송암서실(松菴書室)’ 등 남전의 2000년대까지의 작품들을 펴놓고 향을 사르며 깊은 감회에 젖는다.
검여 선생이 평생 경모(敬慕)하던 소식(蘇軾, 東坡1036~1101)과 김정희(金正喜, 阮堂 1786~1856)에서 따온 소완재(蘇阮齋)라는 당호(堂號)를 말년까지 썼듯, 남전 선생도 완당(阮堂)과 검여(劍如)에서 한 글자씩 취해 완검재(阮劍齋)로 당호를 삼아 그 맥을 이었다. 이렇듯 사제(師弟)가 같은 길을 가면서도 각기 우뚝한 예술의 봉우리를 쌓고 새 길을 열어 놓으니 후학들의 홍복일 터이다.
한자 문화권의 한·중· 일 삼국에서만 모필(毛筆)로 된 붓으로 글씨를 쓰게 되면서 중국에서는 서법(書法), 일본에서는 서도(書道), 우리나라는 서예(書藝)라 부르되 교육의 필수 요건으로 삼아 수천 년을 이어왔다. 붓은 부드럽기 그지없어서 마음먹은 대로 운필하기가 어려워 오랜 시간 숙련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다른 사람의 글씨도 흉내[臨書] 낼 수 있고, 나아가 자신만의 서체도 이룰 수가 있다. 하물며 깊은 공부가 없으면 글에 마음을 실어 낼 수 없으니, 붓의 기교만 익혀 먹물로 칠한다고 다 서예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는 말은 곧, 글씨로 쓴 사람의 인품과 심상이 배어 나온다는 말이다.
오랜 과정 꾸준히 붓을 잡고 연마해야 성과를 나타내므로, 빠른 결실만을 원하는 요즘 젊은 세대에 맞지 않아서 서예 인구가 급감하는 추세라니 통탄스럽다. 미술품 시장에서도 육칠십 한평생을 서예에 바쳐온 노대가의 작품이 고작 100만 원 미만으로 대접받고 있는 현실이 서글프다.
벼루 하나 가득 먹을 갈아 놓고 그 향에 취해도 보고, 붓을 잡고 붓장난이라도 하다 보면 들뜬 마음이 가라앉고 고요한 묵상에 잠기게 된다. 힐링은 먼 데만 있는 게 아니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초등학교 5학년 때로 기억된다. 반에서 글씨 잘 쓴다는 두 녀석이 누가 더 잘 쓰는지 글씨 경쟁을 하게 되었다. 그 중 하나가 필자였다. 친구들은 우리 둘 주위를 빼곡히 둘러싸고 숨을 죽였다. 우리는 각자 공책에다가 정성스럽게 글씨를 써 내려갔다. 누가 이겼는지 결과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의견이 분분했기 때문이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중 고등학교 학창시절 내내 미화부장을 했고 벽을 꾸미는데 그림을 그리고 글씨도 직접 써 넣곤 했었다.
언제부턴가 손 글씨를 쓸 일이 없어졌다. 이제 글씨를 ‘쓴다’는 개념이 사라지고 ‘두드리는’시대가 되었다. 그 결과 글씨를 누가 더 잘 쓰느냐 보다 컴퓨터 자판이나 휴대폰 자판을 누가 더 빨리 두드리느냐 하는 속도가 관심거리로 되었다. 속도에 따라 자격증도 준다. 글씨의 모양이나 크기도 지정하는 대로 만들어 진다. 누군가 계속 멋진 글씨 모양을 만들어 낸다. 개발된 글씨 모양은 돈을 주고 사야 된다.
글씨를 두드리게 되면서 대부분 손 글씨 필체가 망가졌다. 글씨를 써도 모양이 재대로 안 나오므로 더 안 쓰게 된다. 요즘 젊은 사람들의 필체는 더 심각하다. 필체도 엉망이지만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판독이 안 되는 글씨를 쓰는 사람이 많다. 심지어 자기가 써 놓은 글이 무슨 내용인지 해독을 못하는 경우도 봤다.
컴퓨터로 인해 자꾸 손 글씨를 멀리하게 되고 필체가 망가지는 것이 아쉬워서 필자는 최근에 캘리그라피 공부를 시작했다. 그동안 지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나 간단한 기록정도만 손 글씨로 쓰면서 겨우 글씨체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글씨 공부를 하면서 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화선지를 앞에 두고 생각으로 미리 써 본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쓸 지, 여백은 어떻게 둘 지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먹을 찍는다. 글씨는 손에서 나오지만 온 몸으로 쓴다. 쓰다보면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집으로 오는 지하철에서 자리에 앉자마자 꾸벅꾸벅 앞 사람에게 계속 인사하며 졸 정도로 힘든걸 보면 온 몸으로 쓰는 게 확실하다. 그렇게 몇 달 공부해서 일단 자격증 하나를 추가했다. 글씨를 두드려 만드는 속도자격증이 아니고 손으로 쓰는 자격증이라고 생각하니 글씨를 쓰는데 좀 더 신중해졌다.
글씨와 그림은 맥락을 같이한다. 요즘에는 글씨를 그림처럼 쓰고 그림과 조화롭게 쓰는 것을 연습하고 있다. 아직 작품으로 내 놓기는 부족하지만 좋은 시를 골라 쓰고 작은 액자를 만들어서 지인들에게 선물하고 있다. 선물이라고 생각하니 쓰는데 더 신중해졌다. 쓰는 동안 잡념이 사라진다. 집중하는 시간도 좋다. 그동안 잊고 있던 손 글씨 쓰는 맛을 다시 느끼고 있다.
도사 되는 법?
무림의 비급은 인연 있는 자의 것이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누구나 가질 수 없어 비급이라 했던가
어언 나이 70을 넘었다
고령사회에서 평균연령 100세 이상을 산다고 하는데 우리도 피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하루가 다르게 빠르고, 계속해서, 새롭게 변하는 IT 세상에서 알파고 아이들과 어울려 살아가려면 앞장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뒤따라가기도 버겁고, 쳐지면 짐이 되어 걸림돌이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지난날에는 명절이다 하면 시끌벅적 건너 뛴 시간 이어주는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요즘은 “안녕 하세요” 인사만 끝나면 각자 스마트 폰 하나씩 들고 어느 구석 찾아 벽에 기대 카톡, 게임, 페북에 열중하며 혼자서 웃고 찡그리고 즐겨서 명절이어도 고향이 조용하다는 쓴웃음 소리도 있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귀엽고, 궁금한 게 많으신 조부모님께서 말을 붙여보지만 눈길 한번 없이 입으로만 단답식 대답에 부모가 꾸지람도 해 보지만 소용없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아 내 자신이 바뀌어보자 생각하고 IT를 배워보기로 했다.
우선 컴퓨터를 배워 메일이라도 보내봐야겠다는 소박한 생각에 시작한 컴퓨터.
시작은 켜고, 끄고, ID 만들고 독수리 타법이었다.
친구들에게 짧으나마 10행 미만의 글 하나 보내는데 한나절
그런데 격려의 답장이 오고
곧 이어 전화가 와 컴퓨터 배우길 참 잘 했다며 별 다섯짜리 도장을 찍어준다느니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신났다.
뭔가 하나 시작 했는데 주위에서 그게 잘 한 짓이라니 너무 신났다.
문장이 늘어나고 답장이 여러 곳에서 오는데도 글 쓰는 시간은 좀체 줄지 않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엉덩이 진물 날 정도로 앉아 보내고 또 보냈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조선일보와 유어스테이지 (주)시니어 파트너즈에서 강사과정 안내문을 컴퓨터로 받아보니 새삼 신기했고 그 위력을 알 것 같았다
강사과정을 공부하며 아쉬웠던 부분은 파워포인트 강의안을 만들어야하는데 그런 실력이 없어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만들려니 그때마다 부탁하는 것이 너무 미안하고 나의 부족함이 싫어 새삼 컴퓨터를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는데 2015년 도심권 이모작센터에서 SNS기초반이 있다는 광고를 컴퓨터로 접하고 등록해 가보니 베이비부머 수강생이 많아 정말 놀랬다
시작이란 이제까지 해보질 않던 것을 하는 것이니 두근거리는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나처럼 아랫사람에게 지시하면 척척 되던 시절을 겪은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한 울타리에 모아놓은 모습이었다.
켜고, 끄기부터 시작해 자판을 외우라는 숙제가 떨어졌고 독수리 타법을 생소한 10손가락 운지법으로 고치는데 집에 와서도 계속 연습하다보니 이젠 독수리 타법으로는 오히려 불편해지며 점차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애국가, 명시 등을 치며 어느 시점에서 행을 바꾸고, 여백의 아름다움을,
글자체의 종류와 적용 사례, 내용에 따라 한 장에 들어가는 글자 크기, 배열 그리고 속도를 익혀갔다
노트북을 하나 사 지참하고 교육을 받다보니 손에 익숙해져 슬슬 넘어가는 손놀림만으로도 신기했다
3개월 후 시험에서 1/2 합격선에 들어 심화반에 들어갔다
문제는 스마트폰이었다
컴퓨터와 함께 스마트 폰 교육이 병행되었는데 컴퓨터보다 어려운 게 스마트 폰이란 걸 처음 알았다
그러나
스마트 폰만 제대로 알면 컴퓨터를 대신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페이스 북, 트위터, 밴드로 영역을 넓히다보니 재미있어 하나하나 신기함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블로그, 카페, 동영상을 배우며 숙제는 간단했다
단 한줄, 한 컷도 좋으니 매일 올리라는 것이었다.
남들은 매일이라는 이게 쉽질 않았나보다
나는 무슨 일이든 남보다 빠르질 못 해 오죽하면 별명이 “느림보”일까.
그렇지만 느리기는 해도 꾸준함은 있기에 하루도 빠짐없이 올리길 해
3개월 후 1/2 탈락자 명단에서 빠져 전문가반으로 올라갔다.
구글의 여러 기능, 스프레드시트, 모두, 마인드맵, 음악 동영상 시간과 분위기에 맞는 것 골라 넣기, 유튜브 옮겨 자르고, 붙여 필요 부분만 사용하는 법 등을 신나게 배웠다
무엇보다 강사로서 PPT 배우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가장 백미는
누구나 팀을 이뤄, 새로 공부하시는 분들 기초반에서 선생님 보조강사 하는 것이었다.
그때 보조강사는 물론이고 누군가를 가르쳐봐야 가르치기 위해서도 자신이 배운 걸 제대로 익힐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수료를 위한 마지막 시험은
자신의 스프레드시트 만들어 자신의 전문분야 동영상 15분 이상 6개 만들어 그 주소를 넣을 것
SNS 관련 모임 6번 개최한 기록 만들어 넣을 것
타 SNS 관련 모임 6번 참석해 자신이 타 모임에서 기여, 보조한 기록 만들어 넣을 것 등을 스프레드시트 지정 란에 채우고 클릭 한 번으로 바로 열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니 거짓말도 못하는 것이었다.
강사다보니 내 강의 장면을 누군가 동영상 찍어주질 않으면 안 되는데 미리 알았으면 틈틈이 준비했으련만 발등에 불이 떨어져 약 한 달을 만사제치고 그 일에 매달려도 쉽지 않았는데 다행히 강의가 곳곳에 있어 첫 번째는 채울 수 있었다
SNS관련 모임 6번과 타 SNS관련 모임 참석은 동기생들과 짜고 서로 모임 주선하고 참여해 주는 것으로 하렸다가 선생님께 들켜 자신의 집 구역을 설정하고 그곳에서 모임 하라니 지역이 각각이라 동기들도 가고 오기가 버거워 잘 되질 않았고 나 자신도 멀리까지 찾아가 참석해 줄 형편이 되질 않아 애를 먹다 미완성인체 겨우 턱걸이로 수료증을 받고나니 어느새 1년이 지났다
평생 써먹을 걸 배웠는데 얼마나 큰 성과인가
스마트 폰이 내 손 안에 착 달라붙은 기분이다
바로 IT 비급은 내가 차지한 것이었다.
요즘 중학생 학습 방법은
한 반을 1팀 5~6명, 4~6팀에게 다음 시간 수업할 내용을 팀별로 나눠주고 각 팀별로 주제 만들어 PPT 만들어 발표하게 해 시험, 발표 각각 50%씩 반영 성적을 낸다고 한다.
효과는 팀웍의 중요성과 협동의 가치를 자연히 익히게 하며, 있을 수 있는 지진 한 친구를 어떻게, 각기 다른 능력의 조화여부, IT는 물론 회전식 역할분담까지 하다보면 자연히 인성을 익히고 학습을 놀이형태를 빌려 재미로 승화시키는 것이라 한다.
중학생들 IT 능력은 뛰어나다
노트북, 스마트 폰은 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장난감에 불과하다
우리와 실력인지도 모르고 일상에서 즐기며 놀이로 자유자재 다루는 그들과는 게임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사실 버겁다
IT 도사되는 비급을 열어보니
“IT 지름길은 없다
꾸준히 만지며 실패하고 익히는 길만 있을 뿐이다“
라고 쓰여 있었다.
최성환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영어사전에서 ‘버킷 리스트(bucket list)’를 검색하면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나 달성하고 싶은 목표 리스트’라고 나온다. 버킷은 얼마 전까지 바께쓰라고 부르던 양동이나 들통을 말하는 것이고, 리스트는 명단이나 목록을 뜻한다. 그런데 두 단어의 조합에서 왜 이 같은 풀이가 나오는 걸까? 해서 좀 더 찾아보니 버킷 리스트라는 단어가 원래 ‘죽다’라는 뜻을 가진 영어 속어 ‘kick the bucket’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중세 유럽에서 교수형에 처하거나 자살할 때 목에 밧줄을 걸어 놓고 발밑에 놓인 양동이를 걷어찬 데서 나온 것이다. 영화 의 마지막 부분에서 유대인수용소장 아민 괴트를 교수형에 처할 때 발밑의 나무로 된 받침대를 걷어차는 모습을 떠올리면 이해가 갈 것이다.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
필자의 두 번째 의문은 다음과 같다. 왜 이처럼 끔찍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단어를 많은 사람이 챙기고 만들기를 좋아하는 것일까? 아마도 누구나 양동이를 걷어차기 전에, 즉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 또는 하고 싶은 일들이 있기 때문이어서 그렇지 않을까?
버킷리스트라는 단어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영화 제목이 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2007년에 나온 영화 는 6개월 시한부 삶을 선고 받은 두 사나이가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씩 실행해 가는 이야기이다. 평생을 자동차 수리공으로 살아온 카터 챔버스(모건 프리먼)와 재벌 사업가인 에드워드 콜(잭 니콜슨)은 우연히 중환자실에서 만난다. 카터의 어릴 적 꿈은 역사학 교수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장(家長)으로서의 책임감과 흑인이란 이유로 포기하고 TV쇼를 보면서 위안을 삼으며 살았다. 반면 에드워드는 자수성가해 전용 비행기까지 갖게 됐지만 세 번의 결혼 실패로 딸에게조차 잊힌 사람 취급을 당하고 있다. 이른바 성공한 만큼 외로움의 빈자리도 큰 사람이다.
이 두 사람이 중환자실에서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되면서 의기투합한다. 급기야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적은 버킷 리스트를 들고 병원을 뛰쳐나간다. 그리고는 3개월 동안 ‘스카이다이빙하기, 문신하기, 아프리카 초원에서 사냥하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과 키스하기, 모르는 사람 도와주기, 눈물이 날 때까지 웃어보기’ 등을 하면서 흥미진진한 나날을 보낸다. 영화에서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에 임박해서, 혹은 건강을 잃고 나서야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그러면서 미리 하지 않은 사실에 후회하고 그것들이 너무나 쉽고 간단한 일이라는 데 또 한 번 절망한다. 영화는 ‘인생에서 가장 많이 후회하는 것은 살면서 한 일들이 아니라, 살면서 하지 않은 것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유명인사들이 갑자기 현직에서 사임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2014년 3월 애플의 재무최고책임자(CFO) 피터 오펜하이머는 무려 430억원 규모의 주식을 포기하고 그 해 9월에 은퇴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이유는 단순명쾌하다. 1996년 애플에 입사해 2004년부터 만 10년째 CFO로 근무하고 있는데 이제 ‘자유인’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이는 51세로 아직 한창이지만 회사는 세계 최고가 되었고 돈은 벌 만큼 벌었으니 ‘앞으로는 회사와 일이 아닌 자신과 가족을 위해 시간을 쓰고 싶다’는 것이었다. 결국 430억원과 내가 하고 싶은 일, 즉 버킷 리스트와 맞바꾸겠다는 것이었다. 구글의 CFO 패트릭 피체트 역시 52세때 ‘아내와 여행을 다니기 위해서’라면서 2015년 3월 회사를 미련 없이 떠났다. 짐 로저스와 피터 린치 등 펀드매니저 중에도 억만장자가 된 다음 유유자적하며 지내겠다고 40~50대에 은퇴한 이들이 수두룩하다.
그럼 이렇게 유명하고 돈 많은 사람들만 버킷 리스트를 작성할까? 아니다. 평범한 사람 누구나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2014년 6월 EBS의 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신권식씨(당시 86세). 경기도 평택에 사는 평범한 농부인 그는 환갑이 되던 해에 농사를 접고 땅도 거의 다 팔아치웠다. 아버지가 평생 일만 하다가 77세에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는 결심을 실행한 것이었다. 그 때부터 배운 서예가 늘어 가르칠 정도가 됐고 동네 향교(鄕校)에서 하는 행사에는 제관(祭官)으로 빠지지 않고 참여하고 있다. 처음에는 땅을 파는 것을 반대했던 부인이 남편이 하고 싶은 대로 살라고 마음을 내려놓은 것도 큰 힘이 됐다. 그래서 그런지 여든이 넘은 두 분 다 건강하다. 조용한 시골에서, 그것도 평생 농사지은 곳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데 부러울 게 뭐 있으며 스트레스가 어디 있겠는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아직 은퇴하지 않았다면 오지 않은 은퇴를 걱정하느라 인생에 단 한 번뿐인 소중한 오늘을 놓치지 말고 지금 당장 나만의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보자. 버킷 리스트를 작성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말은 꺼내지도 말자. 영화 속 이야기이기는 해도 6개월 시한부 인생도 얼마든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지 않는가?
미국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포수 중 하나인 요기 베라는 말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니까!(It ain’t over till it’s over)” 그의 말처럼 설사 은퇴했다고 하더라도 은퇴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은퇴(retire)’란 말 그대로 타이어를 다시 갈아 끼우는 것(re-tire)일 뿐이다. 9회 말을 지나 잠시 배트를 놓고 글러브를 벗었지만 다음 게임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정식 리그가 아니라 동네 야구일 수도 있지만 포기할 이유는 전혀 없다. 골프에서의 성패 역시 18홀을 끝내고 장갑을 벗을 때까지 모른다고 하지 않는가? 최선을 다하는 삶이라면 마지막 순간까지 나만의 버킷 리스트는 살아 있고 거기다 뭔가를 적어 넣을 여백과 그 리스트를 실행할 용기 또한 충분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설가 박경리 선생(1926~2008)을 떠올려보자. 선생은 한국전쟁 통에 남편을 잃고 아들을 먼저 보내는 큰 슬픔을 당했다. 참으로 모진 세월이었다. 누구보다도 불행했지만 누구를 원망하거나 그 뒤에 숨지 않았다. 불행에 이은 고독과 병마를 와 같은 불후(不朽)의 작품들로 바꾸어 우리에게 남겼다. 말년에는 원주로 내려가 소박한 농부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돌아가기 얼마 전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모진 세월 가고, 아 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선생의 버킷 리스트에는 버리고 갈 것만 남았다는 것이다. 우리도 버리고 갈 것만 남은 홀가분한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보자.
“평생 공무원으로 살았지요.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사진도 정형화된 틀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젠 공무원이 찍은 사진 같다는 말은 듣지 않으려고요. 제가 셔터를 누르던 찰나의 느낌을 사진을 보는 이들에게도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사진을 찍고싶어요.”
그렇다. 그는 한평생 공무원이었다. 1972년 3월 건설부(현 국토교통부) 초급 공무원부터 시작해 2007년 4월 행정도시건설청기반시설본부장(국장급)으로 퇴직하기까지 35년간 국토정책 전문가로 나라의 녹을 받고 국가에 봉사했다. 퇴직 이후 2012년 4월까지 몸담은 건설공제조합(전무이사)까지 감안하면 40년 이상 사실상 공직생활을 한 셈이다. 그런 그가 퇴직 후 사진 찍기 삼매경에 빠져 있다. 그의 사진 얘기가 궁금했다.
현역시절엔 신문 스크랩으로 아쉬움 달래
공무원은 눈코뜰새 없이 바쁘다. 특히 국토부 공무원은 주택이라는 국민과 가장 근접한 이슈를 다루면서 일을 한다. 기본적은 정책 업무뿐만 아니라 언론 기사 대응까지 24시간이 모자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주말을 편안하게 보내 본 기억이 없다. 공직에 발을 들여 놓고선 긴장의 끈을 놓고 살아본 적이 없다는 얘기다.
그런 그의 유일한 취미가 사진찍기였다.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멋진 풍경을 찍어야 하는데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 그래서 일단 모으기 시작한 것이 일간지 신문에서 주말판으로 제공하는 투어나 여행 관련 섹션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다니며 그림 같은 풍경을 찍겠노라고 모은 여행 섹션지가 큰 사과박스로 2개가 넘는다. 어느 순간엔 퇴직하고 나면 반드시 가겠노라며 차곡차곡 모아 놓은 것이다. 공직 퇴직 후 7년이 넘은 지금. 그의 도전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 들어보셨지요? 진짜 (현역때보다) 더 바쁘더라구요. 동창회를 비롯해 업무상 지인들, 가족 모임까지 몸이 몇 개라도 모자랄 판이었어요. 아직 스크랩한 지역들을 다니지 못한 것이지요. 게다가 투어 섹션은 여전히 매주 발행되고, 또 새로운 여행지가 쏟아져 나와 이젠 감당이 힘들 정도예요.”
“예술사진반서 공부… 달력사진 안 찍어요.”
그래서 그가 선택한 곳이 계원예술대학교 예술사진반이었다. 전문가에게 사진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한 달에 두 번 전국에서 사진 찍기 좋기로 유명한 곳들을 좋은 분들과 함께 다닐 수 있었기 때문.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사진을 전문적으로 배우기 시작하다보니 지금까지 찍었던 사진들은 한낮 풍경만 담은 달력사진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특히 같은 사진반 회원들이 찍은 작품을 살펴보다 풍경만 있고 감성은 없는 무미건조한 자신의 사진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이를 스트레스라고까지 말했다.
“공무원이 찍은 사진 같다는 얘기가 그렇게 듣기 싫더라고요. 틀에 박힌 사진이란 얘기지요. 여백을 담아내기도 하고 감성을 이끌어 내는 다른 분들의 사진과 비교할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게되더라고요. ‘난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라는 고민이 시작된 것이지요. 그래서 요즘은 무조건 멋진 풍경을 담기보다 풍경을 차분히 보고 제가 보고 느낀 감정을 같이 표현할 수 있는 사진을 찍기 시작하고 있어요. 점점 고민하고 진지하게 사진을 대하고 있는 셈이지요.”
몽골·미얀마 사진전 열어
그의 사진에 대한 열정이 최근 결실을 맺기도 했다. 계원예술대학교 전문사진반이라야 갈 수 있는 몽골과 미얀마 투어에 참가하게 된 것. 이를 계기로 올해 2월과 8월 각각 몽골 사진전과 미얀마 사진전에 준 프로급 전문가들과 작품을 함께 전시하는 영광을 얻게 됐다. 실력으로 보면 몽골과 미얀마 동행은 물론 사진전도 동참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의 열정과 함께 주변의 도움을 받아 작품을 선보일 수 있었다.
그는 몽골과 미얀마가 각기 다른 매력을 품고 있다고 했다. 먼저몽골의 키워드는 ‘광활함’이었다. 그리고 메마르고, 거칠었다. 한반도 넓이의 7배에 달하는 드넓은 땅이었지만 춥고 척박했다. 그런 땅에서도 가족단위로 소·말·양·염소 등의 가축을 키우며 살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한때 대제국을 건설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초라한 변방국가가 돼버린 그들에게서 ‘우리가 사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것을 놓치고 사는 것은 아닌가’라는 잔상이 남기도 했다고.
반면 미얀마의 매력은 ‘사람’이었다. 한없이 맑고 순박한 표정과 평화로운 사람들이 그를 매료시켰다.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독실한 불교국가라는 점에서 그연유를 찾고 있었다. 특히 사원이 많다보니 거의 맨발로 돌아다니며 유적지에서 사람들을 만나 사진을 찍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사진전 작품들은 지인을 비롯해 자식들에게 선물했어요. 그 전에 몸담았던 건설공제조합에도 기부했고요. 이제 사진은 제가 사람들과 소통하는 매개체 역할도 하고 있지요.”
문화해설가로 재능기부 하고파
사실 그의 인생에서 사진을 빼고 얘기하기도 어렵다. 이는 국토부 공무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본부 과장 시절 국토부 내 처음으로 사진 동호회를 운영하게 된 것이다. 청사의 사계 등 사진전도 열고 사진을 팔아 어려운 이웃을 돕기도 했다.
이후 행복도시 건설청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사진반을 만들어 직원들이 함께 여가를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건설공제조합 시절에는 찍었던 사진들을 조합에 건네 조합달력을 만들기도 했다. 은퇴 이후에도 국토부 퇴직 공무원 모임인 건설진흥회에서 사진반 총무를 맡는 등 사진 전도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앞으로는 사진으로 재능기부를 하고 싶어요. 관광 가이드가 찍어 주는 사진이 맘에 들지 않을 때 많으셨지요? 제가 문화해설가 역할도 하면서 사진도 찍어드리는 가이드를 하게 되면 ‘더 의미 있는 취미 생활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지금은 평생 찍은 사진을 분류하는 작업도 하고 있어요. 정말 움직이기도 힘들 때가 되면 아내와 둘이서 지난 세월을 음미하면서 사진을 즐기고 싶어서요.”(웃음)
일찍이 1990년대 초, 수원 수채화의 르네상스를 불러들인 장본인, 김주영 작가의 개인전이 수원미술전시관 제2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다.
작가는 대상의 형태를 포착하고 이를 물과 여백의 특유한 기법으로 이미지화 시키고 있다. 그의 작품은 끝없이 흘러내리고 번질 것 같은 색의 움직임, 색채와 색채가 빠레뜨에서 혼합하지 않고 직접 화지에서 혼합하는 영감의 환상적인 이미지를 자아낸다. 이번 전시는 그의 번짐과 흘림의 미학을 만끽할 수 있는 자리다.
특히 수채화만이 가질 수 있는 물맛이 화폭 전체에 녹아 있어 금방이라도 화지에서 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촉촉함이 그득하게 서려 있다. 굳이 봄소풍을 가지 않아도 김주영 수채화에서 봄날의 촉촉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김주영은 작가노트에서 “예술인이 자연에 대한 체험을 통해 애착과 관심을 가질 때 생명있는 작품이 탄생한다”며 “그래서 나는 야외스케치를 즐겨하며 인간도 하나의 색이요, 하나의 점이요, 하나의 획으로서 나의 풍경작품에 등장하는 인간은 자연의 한 부분”이라고 밝혔다.
한편, 김 작가는 지난 1989년 수원에서 처음으로 ‘한국수채화협회’ 회원으로 정식 가입하면서 수원 지역에 수채화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이어 1992년 수원 수채화협회를 결성하고, 2001년 ‘경기수채화협회’로 명칭을 변경하면서 안산, 평택, 성남, 안양 등 경기도내 수채화 붐을 일으키는데 일조했다. 현재 경기수채화협회 고문으로 활동 중이며 후학양성에도 정성을 쏟고 있다. 전시는 16일까지. 문의 (031)243-3647
경기일보 강현숙기자mom1209@kyeonggi.com
감성 글씨·손 글씨·멋 글씨 등으로 불리며 주목받고 있는 캘리그라피(Calligraphy). 캘리그라피는 기계적이고 획일화된 글자가 아닌 직접 손으로 쓴 아름답고 개성 있는 글자다. 유연하고 동적인 선의 방향과 속도·글자의 번짐과 질감·여백의 미 등이 적절한 조화를 이뤄 작가의 감성을 드러낸다. 때문에 각종 드라마·영화 제목이나 브랜드 이름에도 캘리그라피를 이용해 작품의 주제와 브랜드 이미지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하이트진로는 리뉴얼 참이슬 출시와 함께 천연원료 성분을 강화한 깨끗한 자연주의 소주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새로운 캘리그라피 상표를 선보였다. 신선하면서도 젊고 순한 이미지로 참이슬을 재탄생시킨 주인공 캘리그라퍼 이산. 평소 다양한 작품 활동뿐만 아니라 이산 글씨학교 블로그와 강연 등을 통해 캘리그라피를 알려온 그다. 이산작가와 함께 최근 일고 있는 캘리그라피 열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 캘리그라피 열풍, 어떤 매력이 대중을 끌어당겼나
“지나치게 디지털화된 문명사회가 오히려 아날로그를 그리워하는 현상을 불러왔습니다. 이러한 선호는 첨단기기에 손 글씨를 쓸 수 있는 펜이 추가되기도 하며 디지로그(Digilog: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합성어)의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또한, 한글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으며 개성을 중시하는 현대인들은 ‘내 것’·‘나만의 무엇’을 가치 있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성장한 세대들이 자신만의 글씨를 갖고자하는 욕구가 늘어나며 캘리그라피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카페나 블로그 등을 통해 독학으로 캘리그라피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데, 기본기가 없어도 캘리그라피 작품이 가능한가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다 해도 캘리그라피의 일반적 도구인 붓에 익숙해지지 않는다면 좋은 글씨를 쓰기 어렵습니다. 대부분 초등학교 이후 붓을 잡아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기초 단계는 전문가의 지도를 받고 시작하는 것이 시간을 줄여 결과를 얻기에 적당합니다. 글씨는 오랜 수련을 요하는 작업입니다. 너무 서둘러 결과를 원한다면 오히려 스트레스가 되기도 합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늘 습관처럼 글씨를 쓰는 생활과 즐기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 작가의 감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캘리그라피. 작품에 자신의 감성을 표현하기 위한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캘리그라피를 감성글씨라고 부릅니다. 글의 의미에 맞게 자형이 그것을 보여줘야 좋은 글씨라고 할 수 있죠. 그렇게 쓰려면 글의 내용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글씨를 이미지로 이해해야 합니다. ‘사랑’이라면 사랑스러워야 하고 ‘증오’라면 증오스러운 형태의 이미지를 생각하며 써야 합니다. 여러 번 반복해서 쓰는 것은 글자의 구조를 감성에 맞게 잘 구성하는 과정으로 처음과 나중에 관계없이 완료 후에 감성을 가장 잘 담아낸 작품을 결정하게 됩니다.”
# 캘리그라피는 서예와 달리 붓 외에도 나뭇가지·칫솔·면봉 등 독특한 도구를 이용하는 것이 특징. 독창성이 짙은 수많은 작품 중에서도 프로와 아마추어를 구분 짓고 좋은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있는가
“여러 가지 도구를 쓰는 이유는 각각의 도구가 가진 특성이 그대로 글씨에 나타나기 때문이며 붓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획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도구는 개발의 여지가 많지만, 어느 정도의 실용성을 갖지 않으면 퍼포먼스에 불과합니다. 프로와 아마추어를 구분 지을 수는 없습니다만 순수작품이 아닌 상업적 측면에서는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얼마나 부응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가 프로의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 사람들과 감성을 소통하는 도구이자, 따뜻함을 전달하는 매개체 캘리그라피. 작품을 통해 남다른 소통을 이룬 경험이 있는가
“한국자원봉사문화, 아름다운재단 등 여러 곳에 재능기부를 하고 있으며 대학이나 고등학교에서 캘리그라피에 대한 관심으로 강의요청이 오면 언제든 달려갑니다. 강의 후 글씨를 써서 한 장씩 드리는 경우가 많은데 비록 무료로 나눠주는 것이지만 업무적으로 글씨를 쓸 때보다 마음이 훨씬 즐겁습니다. 한 줄의 글로 마음을 전하고 그것을 나눌 수 있는 저의 재능에 늘 고마움과 뿌듯함을 느낍니다. 한 학생이 프랑스로 유학을 가며 제 글씨도 가져가 벽에 붙여두곤 글귀를 늘 마음에 새긴다고 들었을 때 매우 보람을 느꼈습니다.”
# 이산작가가 바라보는 캘리그라피의 미래와 발전방향, 그리고 개인의 노력
“최근 여러 가지 현상으로 보아 캘리그라피는 한동안 르네상스 시대를 맞을 것이라고 봅니다. 한글 손 글씨의 활용성은 이웃 일본의 글자보다 많이 떨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며 일반적인 산업분야를 넘는 전반적인 분야에 아이디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술이나 음악 등 이미 극대화된 시장에 비하면 아직도 확장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을 것으로 봅니다. 대학에서는 아직 캘리그라피 학과가 없으며 서예 과에서 약간의 실험적인 단계로 있을 뿐입니다. 정작 디자인 과에도 가르치는 교수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저는 캘리그라피 자료집을 발간하고 체계적이고 밀도 있는 교육을 위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산
캘리그라피 작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이산글씨학교, 공간노웨이브 아카데미, 디노마드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서울여자대학교·단국대학교·한밭대학 등에서 초청 강연을 했으며, 서울시 교육청 교육 멘토로 숙명여자고등학교·서울여자고등학교·창문여자고등학교 등에서 캘리그라피 직업 특강을 하였다.
활동 이력
▲한국자원봉사문화 홍보대사 ▲SK-Sunny 대학생봉사단 캘리그라피 강의 ▲유니브엑스포 2013 캘리그라피 이벤트 참여(이화여대) ▲대학문화축제 대학로 길거리 전시회(캘리그라피 평화전) 2013 ▲대학생 한국문화홍보단 청계광장 캘리그라피 이벤트 2013 ▲제5회 서울국제초단편영화제 라이브페인팅 캘리그라피 퍼포먼스 등
사진 출처: 블로그 이산글씨학교 (http://blog.naver.com/calliblog/70163395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