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동집 앞에는 공원이 있었다. 11월의 찬바람에 느티나무 잎이 하나둘 떨어지고 있었다. 내가 벗어던져야 할 지난날의 안락했던 생활의 옷처럼 그렇게 낙엽이 떨어지고 있었다. 공원 안에는 낡은 의자가 몇 개 놓여 있었고, 수북하게 쌓인 나뭇잎 위에 소주병이 몇 개 던져져 있었다. 낭만을 말하기에는 현실감의 무게가 너무 큰 풍경이었다. 누군가 먹고 버린 소주병이 낙엽 위에서 뒹굴었다. ‘공원이 있어서 다행이야. 이제 이 공원의 느티나무와 사귀어 친구가 되어야지. 내가 가는 곳마다 다행히도 나무들이 늘 있었어.’ - '행복한 우동가게' 중에서.
비로소 평범함이 좋다
소설 '행복한 우동가게'의 강순희 작가는 전남 강진에서 평범하고 행복한 유년기를 보내며 성장했다. 문학소녀였던 작가가 결혼과 함께 충주 땅에 살면서 안정적이고 평온한 일상은 여전히 이어졌다. 그리고 어느 날 오지게 고단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아 평범치 않은 세상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중학교 때 가출도 해봤어요. 별다른 이유는 아니고 늘 살던 곳이 지루했고, 엄마랑 아버지랑 늘 같이 사는 평범함이 싫었어요. 그러나 보름 만에 돌아왔죠. 쬐끄만한 아이의 머릿속에 평범함이 싫다 해서 달라지는 건 불편함인걸 알았나 봐요. 하하... 이젠 미래에 대한 반전을 기대할 생각도 없고. 비로소 지금의 평범함이 너무 좋아요. 내 인생에 더 이상의 반전이 없길 바라요."
느닷없는 파도에 실리다
누구나 갖고 있을 법한 애환이 서린 IMF는 강순희 작가의 일상에도 태풍처럼 덮쳐왔다. 그리하여 세상 어려움 모르고 살던 그녀는 어느 날 밀가루 풀풀 날리는 주방에서 더딘 손으로 반죽을 하고 우동을 끓여내기 시작했다.
"느닷없는 우여곡절로 마주한 세상은 녹록지 않았죠. 남들이 보기에 열심히 살아온 것 같지만 그러나 지금까지 내 힘으로 산 게 아니고 보이지 않는 힘이 날 이끌고 온 겁니다. 우동 먹으러 오는 분들, 그리고 글 쓰는 이들의 모임이나 성당의 신부님 말씀을 비롯해서 늘 좋은 말들을 많이 들어요. 듣는 것만이 내 할 일이거든요. 그런데 어느날 나 보고도 말을 좀 해보라고 해요. 뭐 근사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딱히 할 말이 없어요. 다만 '사는 게 내 힘대로 안되더라, 다만 남아있는 내 인생도 평범하게 살 수 있다면 최고라고 생각할 뿐이다' 이런 말만 하고 돌아왔어요." 해탈한 듯 편안하게 소리 내어 웃는다.
강순희 작가는 소설가의 꿈을 키우던 시절을 보내고 1996년 평화신문 평화문학상과 1997년 문예사조 '이발사는 가위로 가지치기를 한다'로 등단했다. 그 후 소설 '백합 편지' 등 차분히 창작활동을 하던 중 예기치 않은 삶의 풍파에 떠밀려 시작한 우동가게가 또 다른 전환점을 만들어 주었다.
'어느 날인가부터 내 삶이 지극히 소설적이라는 것을 느꼈다. 다양한 말들을 남기고 간 사람들의 하나하나의 삶 또한 소설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안 쓰곤 못 배기는 이상한 우동가게 아줌마는 어느 날인가부터 우동을 끓이다 조금만 짬이 나면 글을 쓰게 되었다.'라고 작가는 말한다.
우동소설을 쓰다
"이전에는 소설을 썼죠. 문학 소설을 썼는데 내 취향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나만의 글을 써요. 문학 장르의 틀에 맞는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나만의 우동소설을 씁니다. 정석이나 기본을 배제하지는 않으니 반란은 아니겠죠. 한때 난(蘭)을 그렸어요. 선생님께서 '난이라는 식물의 기본이나 속성을 알고 쳐야지 난이 나오지' 말하셨어요. 그렇게 우동소설을 쓰고 있어요."
문학과 생활의 구분이 없는 나날 속에서 틈틈이 적어둔 우동 가게의 단상이 '행복한 우동가게' 라는 한 권의 책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우동가락을 뽑아내며 함께 부대끼고 삶의 애환을 나누던 주방 여인들의 고된 삶의 체취를 순한 눈으로 풀어놓은 두 번째 이야기, 이어서 우동 가게에서 내다보이는 작은 공원의 느티나무와 소통하며 나눈 위안의 시간을 글로 빚은 세 번째 이야기, 이른바 그녀의 우동소설이다.
"우동소설이 언뜻 수필 같지만 소재와 주제가 거의 똑같아요. 조각보처럼 이것저것 옴니버스로 엮어서 책을 만든 것입니다. 이젠 기회가 되면 펴내려고 한 사람을 배경으로 써 놓은 또 다른 장편소설이 있어요. 우동을 끓이면서 소설 쓰는 일은 시간과 공간을 필요로 해서 어려움은 있어요.
제겐 책이 나오고 나면 이어질 책을 또 준비해 두어야 하는 숙제 의식 같은 게 있어요. 요즘도 원고 청탁이 오면 그제야 써보려고 머리를 짜내며 집중하려 하면 진전이 잘 안돼요. 시간에 쫓기며 책임을 완수하고 싶지 않아서 가능한 미리 준비해 두는 편이죠. 나만의 고질적인 준비성이나 책임감도 한 몫 한다고 할 수 있어요. 습작이 되고 말지도 모르겠지만 숙제를 잘하고 싶은 거죠."
"그러나 써내고 나면 잊어버리려 합니다. 써낸 후엔 독자의 몫이니까요. 전에 책 나오고 출판기념 모임이 있었어요. 진짜 하고 싶지 않았어요. 자칫하면 내 자랑이 될 수 있고 책과 내 모습에서 현실감이 떨어지는 시간이니까요."
지금은 충주에서 활동하는 시인이나 여류 등단 작가들과 '문향회‘ 활동을 하며 소통을 한다. 연수동 우동가게 옆 느티나무가 만들어낸 시인의 공원에서 시 낭송회도 하고 문향회의 밤을 열기도 한다.
우동집을 향해 손을 내민 소박한 사람들의 악수
작가의 우동가게에 들어서면 놀라운 풍경에 멈칫하게 된다. 가게 내부의 모든 벽에는 덕지덕지 붙어있는 메모들로 도배되어 있다. 우동을 먹고 가는 사람들이 털어놓은 고단한 삶과 넋두리가 빼곡히 적혀있어서 다가가 읽는 맛이 특별하다. 무명 시인의 가슴 저미는 속 깊은 이야기, 아픔과 슬픔 가득한 몇 줄 글의 애잔함, 누군가의 사랑의 언어, 또는 반짝이는 축하의 말이나 행복한 재잘거림들이 줄줄이 겹쳐서 펄럭인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내 이웃들의 이야기다.
"우동을 먹고 메모쪽지를 남기고 가면 한 장 한 장 찬찬히 읽어봐요. 사람에 대한 진정성을 봅니다. 이웃 사람이거나 또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나 글을 쓰는 사람 등 다 자기의 말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일필휘지 써낸 글에선 자칫 자신감만 엿보일 수도 있어요. 눈물로 쓴 듯 마음 저린 몇 줄도 있고요. 휘갈겨 썼거나 마음 담아 꼭꼭 눌러 쓴 것이나 그 분들이 한 장씩 써 놓고 간 것이 그 사람의 대표작이 될 수도 있기에 소중합니다. 내게 힘을 주는 이유죠.
우동, 사람, 느티나무, 강 작가의 행복의 쓰리콤보
그래서 책 속에는 시원한 우동국물을 우려내고 우동가락을 뽑아내던 사람들과 함께 나누던 속내를 털어놓았다. 시간을 견디며 살았던 날에도 다녀가신 분들이 두고 간 이야기를 읽으며 마음속 깊이 그 진심을 담아 두었다. 마음이 심란할 땐 창밖으로 보이는 시인의 공원에 나가면 느티나무가 그녀의 말귀를 알아들었다. 이런 것들이 작가에겐 더없이 충분한 행복의 쓰리콤보가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가 하고 있는 문학이나 그림이나 사진 등 예술은 어쩌면 사치일지 몰라요. 물론 그들 각자의 삶을 들여다보면 너무나 귀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지만요. 그렇지만 누군가를 위한 휴머니즘이라고 또는 약자를 위한 대변이라고 하면 자칫 오류가 될 듯도 하고요. 어떻게 보면 매체를 통해 굳이 표현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진정한 소설가고 멋진 사람이다 싶어요. 진실을 안고 가잖아요."
가게 안에 붙어있는 작가의 방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나지막한 앉은뱅이 책상 위에 노트북이 열려있었고 몇 권의 책과 필기도구들이 편하게 흩어져 있다. 사람들이 두고 간 이야기들이 그녀의 소설 속으로 저장되고 있는 중일 게다.
다 받아들일 수 있는 품
"이제는 조용히 살고 싶어서 이전의 우동 가게에서 떨어져 뒷골목으로 옮겨왔어요. 서른아홉에 시작한 첫 가게에서 다시 고요하게 이 골목으로 스며든 게 나이 육십이었어요. 이곳도 생각만큼 고요하진 않지만 나름대로 조용하게 이 상황을 즐기려 합니다."
어느덧 시니어로서 넓어진 품도 생겼고 여유로움도 생긴 표정이다. 그 얼굴에서 치열함이나 조바심이 엿보이지 않는다. 누군가 내민 우동소설에 저자 사인을 해주며 그녀는 주방을 향해 파전과 막걸리를 청한다.
"내게 힘든 시간이 있었다고 하지만 신은 너무도 평등해요. 나도 편하게 누리며 잘 살던 시절이 있었죠. 어느 날 갑자기 불어닥친 태풍의 여파로 어쩔 수 없이 한동안 가족들이 해체되고 생계를 위해 우동 가게를 시작한 게 서른아홉 살 때였어요. 하루하루가 견딜 수 없는 시간이었죠. 그러나 젊었으니까 마흔 중반까지는 버틸만 했어요. 생계를 위해서 힘들게 일은 하지만 기운이 있고 젊고 이쁜 때였잖아요. 갱년기가 지나고 조금씩 아프기 시작하며 50이 넘으니까 여자라기보다는 비로소 사람으로 살겠다는 생각이 부쩍 들더라고요."
밤새 우려낸 깊은 우동국물의 담백함이 배인 그녀의 미소가 환하다. 이젠 그 품으로 예기치 않은 세월이 와락 다가온다 해도 두 팔 벌려 받아들일 여유가 생겼다. 세월이란 게 우리에게 그저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것만이 아니란 걸 강 작가는 말한다.
"이제 60이 넘었어요. 쉰의 아홉수를 지나고 60 초반엔 나이가 나를 위축시키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나이 먹는 게 차츰 나쁘지만은 않아요. 내 나이 63세. 이젠 누군가 객기를 부리고 무슨 말을 해도 잘 받아들여요. 나랑 다르다고 불편해서 우물쭈물하지 않고 그렇구나 이해하고 빨리빨리 받아들일 수 있어요. 이제는 다 받아들일 수 있어요. 하하하..."
△갬성 충만, 주변에 가볼 만한 곳
-카페 식물원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초록의 푸릇푸릇함과 유니크한 의자와 테이블이 눈에 들어온다. 한 옆의 라운지로 나가보자. 바람이 통하는 야외 공간의 자연 속에서 건강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꽃을 피운 선인장과 높은 천정에 닿는 떡갈나무와 함께 편안함에 잠길 수 있는 힐링 포인트다. 커피, 녹차라떼 등의 다양한 음료가 있고 와플이 맛있는 충주의 감성 카페다. *주소:충주시 연수동 1154
-정봉기 아뜰리에
충주는 온천지역으로 알려진 수안보가 아주 가깝다. 충주 사람들은 수안보 온천물에 세수하러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충주에서 조금만 달리면 수안보에 조각가 정봉기 님의 작업실과 갤러리가 있다. 이탈리아 유학 후 수안보 숲 속에 자리 잡은 작가의 안목을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입구의 마당에서부터 조소 작품이 가득하다. 뜰에서 바람 쐬며 구경하다가 카페에 들어가면 독특한 내부구조와 조각 작품들로 눈이 호강한다. 인체와 꽃을 오브제로 한 조소 작품들이 창을 통해 비치는 햇살을 받으며 전시되어 있다. 2층 테라스 테이블에 앉으면 푸른 숲 속에 잠긴 채 계곡 물소리를 듣는 시간이 된다. *주소: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관동 길 74-1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라는 유명한 시구(詩句)가 있듯, 엄동설한(嚴冬雪寒) 겨울을 물리고 봄을 불러온 건 8할이 바람입니다. 그리고 그 봄바람에 기대어 새록새록 피어나는 봄꽃의 8할은 바로 바람꽃입니다. 변산바람꽃, 너도바람꽃, 나도바람꽃, 홀아비바람꽃, 꿩의바람꽃, 회리바람꽃, 태백바람꽃, 만주바람꽃, 남바람꽃, 풍도바람꽃… 등등. 다양한 이름의 바람꽃들이 이르면 2월부터 늦게는 5월 말까지 봄바람 따라 바람처럼 피었다가 바람처럼 사라집니다.
얼음장처럼 꽁꽁 언 땅이 채 풀리기 전 갈잎을 비집고 올라오는 ‘바람꽃’들은 대개 콩나물 줄기처럼 가늘고 연약한 꽃대 끝에 작은 꽃을 한 송이씩 피웁니다. 대부분 키도 작고 흰색의 꽃송이가 단정한 게 이른바 ‘범생이’ 같은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어디에나 돌연변이가 있듯, 문제아 또는 이단아처럼 삐뚤빼뚤 건들거리는 바람꽃이 있어 눈길을 끕니다. 특산식물인 변산바람꽃 등 친숙한 바람꽃에 비해 조금은 생소한 이름, 들바람꽃이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머뭇거리는 겨울을 단호하게 내치는 햇살이 강렬하게 내리쬐는 봄날, 북한강 변의 야트막한 숲으로 한 발 두 발 내딛자 한 무리의 바람꽃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가관입니다. 고개를 처박은 놈, 하늘과 맞짱이라도 뜨겠다는 듯 곧추세운 놈, 외로 꼰 놈, 꽃잎을 활짝 펼친 놈, 아예 벌러덩 뒤로 젖힌 놈…. 제각각 난장 춤을 추고 있습니다. 야망(野望)이니 야욕(野慾)이니 ‘들’ 야(野) 자가 들어가는 단어들이 주는 느낌이 단번에 전해져 옵니다. 황량한 들판을 어슬렁거리는 사내들의 거친 야성이라고 할까. 키 10cm 안팎의 변산바람꽃이나 너도바람꽃 등 여타 바람꽃에 비해 15cm 정도로 다소 크다 보니, 줄기 끝에 달린 꽃의 무게를 주체하지 못해 봄바람에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는 꼴입니다. 얼레지가 봄 숲의 ‘바람 난 여인’이라면, 들바람꽃은 바람 부는 봄 하릴없이 빈둥대다 짝다리 짚고 건들대는 ‘숲의 건달’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듯싶습니다.
하지만 ‘바람꽃류’가 갖는 순백의 미는 들바람꽃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흰색의 꽃잎은 아침 햇살이 그대로 투과할 만큼 투명하고 여립니다. 게다가 희게만 보이는 꽃잎의 연분홍 뒤태가 아는 이에게만 보이는데, 그야말로 “이렇게 예쁜 줄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바람꽃류 가운데 가장 예쁘다는 남바람꽃의 미모에 절대 뒤지지 않는다는 말을 들을 만합니다. 이처럼 들바람꽃의 핑크빛 뒷모습은 황량한 들판을 홀로 누비는 ‘스라소니’와 같은 거칠고 투박한 이미지를 단숨에 날려 보냅니다.
Where is it?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은 “우리나라 강원도 이북에 분포한다”고 모호하게 설명하는데 실제로는 강원도는 물론, 비슷하거나 다소 낮은 위도의 경기도 산에도 자생한다. 화야산과 명지산 근처가 서울에서 가깝고 많이 알려진 자생지. 강원도 대암산은 몇 해 전 인제군의 생물자원조사 결과 국내 최대의 군락지로 밝혀졌다. 물론 대암산뿐 아니라 태백산과 가리왕산, 청태산, 소백산, 치악산 등 강원도의 높은 산 정상부에는 대개 들바람꽃이 자라는데, 다만 꽃 피는 시기가 4월에서 5월로 경기도 등지에 비해 한 달 가까이 늦다.
조선 원림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원림 양옆으로는 너르디너른 다원(茶園)들이 펼쳐져 풍경에 이색을 보탠다. 월출산 등산과 연계해 답사하기에도 적격이며, 원림 지척엔 천년고찰 무위사가 있다.
옛 선비들에게 자연은 배워야 할 경전이거나 미더운 연인이었다. 벼슬을 살며 지지고 볶을 때에도 늘 산수(山水)의 뜻을 되새겨 경책으로 삼았다. 언젠간 나 산야에 묻힐래! 그런 기약도 그들의 생필품에 가까웠다. 산수가 멀리 있더라도 그들의 머리와 감관에는 자연이 들어 있었다. 그래 늙어 흰 터럭이 갓 아래로 삐져나올 즈음엔 흔히 낙향을 해 자연을 벗 삼았다. 못 말릴 산야의 기질, 그게 옛사람만의 것은 아니다. 어제에서 면면히 전승되어 내일로 승계될 산천 애호의 민간 유전자. 우리의 뿌리에는 그런 뜨거운 게 들어 있다.
산림 선비의 살림살이에도 경향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청빈해 몸에 걸친 것만으로도 자족했다. 토방 하나에 뜯어먹을 고사리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이름깨나 날린 이들은 경관을 골라 원림(園林)을 지어 이름값을 치렀다. 전국 곳곳에 그런 원림들이 의외로 많이 남아 있다. 강진 백운동(白雲洞) 원림은 담양 소쇄원, 완도 보길도의 부용동과 함께 ‘호남의 3대 원림’으로 꼽힌다. 월출산 옥판봉을 뒷배로 삼은 이 아름다운 원림은 조선시대 중기의 선비 이담로가 꾸렸다.
자연에 결례가 되지 않게끔 가급적 인위를 자제해 만든 게 원림이다. 집과 뜰, 누정, 연못 등속을 조영해 담장을 두른 내원과, 굳이 과욕을 부릴 거 없이 그저 자연숲 상태로 가만히 놔둔 외원으로 이루어진다. 백운동 원림은 그 전형이다. 슬그머니 자연에 편승해 유유자적 생의 하오를 살고자 했던 선비들의 꿈이 가시화된 공간의 표본이다.
쾌청한 한낮이다. 그러나 백운동 원림 숲 안은 어스레하다. 빼곡 들어찬 갖가지 나무들이 하늘을 가려서다. 한줌 햇살이라도 더 움켜쥐기 위해 까치발로 지내는 어린 나무들은 진땀을 빼리라. 저희끼리 마주보고 선 큰 나무들은 유년의 풍상을 얘기하려나. 나무들은 죽마고우로 자라 서로의 속사정을 잘 안다. 대나무는 곁에 있는 비자나무네의 살림 형편에 환하다. 비자나무는 옆집 소나무와 은근히 사귀는 사이일 수 있다. 숲속에 이미 파다하게 소문났을지 모른다. 그러나 동백꽃 개화 뉴스에 묻혀 입들을 닫았나? 숲이 고요하다. 동백나무들만 부산히 붉은 물감을 툭툭 찍어 제 몸에 칠한다. 이럴 줄 몰랐다. 여느 해보다 이르게 만개한 동백꽃을 볼 줄을.
동백꽃이 아니더라도 “이럴 줄 몰랐어!”라고 찬탄할 수밖에 없는 풍치의 연쇄다. 양껏 품을 벌려주는 대숲 사이 오솔길은 다정해 누이의 살가운 눈짓을 생각나게 한다. 예사로이 작은 숲이지만 능선과 계곡이 감각적으로 얼크러져 깊은 맛을 풍긴다. 계곡에 늘어선 나무들은 웅덩이의 명경지수에 홀렸구나. 물속으로 투신한 제 그림자를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으니.
내원의 별서(別墅) 경관도 어엿하다. 초당과 정자, 담과 수로 등 근래에 복원한 게 많지만 원형을 충실히 재현해냈다. 지난 2001년, 백운동 원림의 전모를 알게 하는 ‘백운첩’(白雲帖)이 발견돼 이를 복원의 근거로 취한 덕분이다. ‘백운첩’은 강진 만덕산의 다산초당에서 유배를 살았던 정약용이 백운동 원림의 승경을 둘러본 뒤 흥에 겨워 만든 서첩이다.
귀양살이란 고독을 벗 삼을 수밖에 없는 것. 가끔은 산에라도 올라 갈증과 울화를 달래야 했을 게다. 어느 가을날 다산은 해남 일지암의 초의선사와 함께 월출산을 등산했다. 하산을 해서는 백운동 원림에서 하룻밤 묵으며 풍정을 누렸다. 이후에도 찾아가 재차 정취를 즐기고 풍색을 눈에 쏙 넣었을 테지. 이렇게 되면 뭐라도 써서 헌정하게 마련이다. ‘백운동 12승사(勝事)’라, 이는 백운동 원림 12경(景)을 연작시로 읊은 다산의 선물이다. 그러고서도 아쉬웠던 걸까. 초의에게 백운동 실경을 그리게 해 ‘백운동도’(白雲洞圖)를 얻었다. 이 둘을 집어넣은 게 ‘백운첩’이다.
백운동 원림 답사의 즐거움은 ‘백운첩’으로 용케 남아 전해진 다산 시의 안내를 받을 수 있어 한결 특별하다. 원림에 비치된 초의의 그림을 보며 과거의 백운동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다 떠나 여기에서 다산과 초의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숲을 흔드는 솔바람처럼.
원림과 작별하는 길목엔 붉은 땅거죽. 떨어진 동백꽃들 나뒹굴며 선혈을 흘렸다. 어떻게 살아왔기에, 얼마나 깊은 상처를 끌어안고 낙화했기에 저토록 처연한가. 아서라, 동백에게 물을 일 아니다. 꽃 피어 절정의 일순에 서럽게 저무는 게 동백의 일이기만 하던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2020년도 한 달이 지났다. 시간의 속도가 빠르게 느껴지는 만큼이나 자기 인생도 스스로 매니지먼트하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 가지는 마음일 것이다.
내가 속해 있는 세상의 모습을 알아야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기가 더 쉬울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서울대학교 소비트렌드분석센터’에서 낸 ‘트렌드 코리아 2020’을 읽었다. 책에서 이야기한 여러 트렌드 중에서도 ‘공간의 재탄생, 카멜레존’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성수동은 변해 있었고, 변해 가는 중
지난해 우리 사회에 나타났던 도심의 낡은 시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개선해 새로운 공간으로, 새롭게 만든 트렌드에 대한 이야기다. 책에서는 공간을 재해석하고, 체험형 성격 중심으로, 서로 다른 성격의 업종들을 모아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이런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될 트렌드라고 예측했다.
책에서 언급한 여러 사례 중 서울 성수동에 있는 ‘성수연방’을 찾아갔다. 내 기억 속의 성수동은 사각형 모양의 2층으로 된 건물과 마당을 가진 영세한 공장들, 구두가 가득 진열된 쇼윈도의 수제화 점포들이 밀집해 있는 주거, 공업 지역이었다.
지하철 2호선 성수역에서 내린 후 만난 ‘성수이로 길’은 기억의 성수동과 달랐다. 여전히 많은 소규모 공장과 차량 정비공장, 공장 창고, 수제화 점포들이 대세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기억에 있는 거리의 을씨년스러움이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달라질 정도로 해일이 몰려와 거리를 바꿔놓은 것은 아니었다. 옛것의 낡음을 재해석해서 탈바꿈시킨 몇몇 공간과 건물들이 길의 풍경을 바꾸는 중이었다.
창고의 외벽을 그대로 살린 채 투박스러운 나무로 꾸민 카페는 세상살이에 꽁꽁 얼어붙은 사람들의 날 선 경계심을 조금씩 늦춰 주고 있었다.
들어가는 입구를 찾기가 어려운 그림 전시장은 나만의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 생기게 했다.
가난한 화가 지망생의 캔버스가 되어버린 골목길 어귀의 담장 스페이스는 자꾸 눈길을 끌었다.
길 건너편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는 공간의 세련된 음식점들이 계속해서 나를 유혹했다.
이제 ‘성수이로 길’에서는 뉴욕 브루클린(Brooklyn)의 향기가 조금씩 나기 시작했다. 억지로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뒤에서 천천히 바라볼 수 있어 더 많은 시간의 모습이 보였다. 길을 걸을 때 어깨에 살포시 내려온 겨울 햇살이 지나간 시간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켰다.
삶 속에서 나를 안아주는 길. 그런 길을 또 하나 찾은 2월의 오후였다.
화학공장에서 변한 ‘성수연방’의 모습
‘성수연방’은 화학공장이었던 건물을 리모델링해서 복합문화공간으로 만든 곳이다. 성수동의 랜드마크가 된 이곳은 ‘ㄷ’자 모양의 3층 건물이 양옆으로 서 있으며, 건물과 건물 사이의 1층 공간은 정원과 파빌리온으로 구성되어있다. 각 건물 2층 양 끝에는 건물을 서로 연결해 주는 통로가 있다. 새로운 트렌드의 복합문화공간 ‘성수연방’을 구성하는 각 공간을 소개한다.
띵굴마켓(Thinggool)
Better day, Better living가 컨셉인 라이프스타일 편집 숍이다. 각종 주방용품부터 생활용품, 음식까지 각 카테고리의 상품들을 예쁘게 잘 정리 해놓았다. 가격과 디자인 모두 실용성을 추구하는 매장이나 편집 매장의 특성상 만만한 가격은 아니다. 하지만 전시된 제품과 인테리어를 보면서 일상생활을 꾸밀 상상을 한다면 행복해질 것이다.
인덱스(index caramel): 수제 캐러멜 판매 매장. 설탕 대신 100% 사탕수수 등 천연재료로 자연스런 단맛을 내는 12가지 캐러멜을 판매하는 매장.
리카리카(likalika): 반려동물 토탈라이프 스타일 제품 판매 매장. 반려동물과 관련된 음식, 봉제품 등 판매.
샤오쟌: 구아바오 등 대만식 음식 전문점
창화당: 만두, 튀김, 떡볶이를 판매하는 익선동 맛집으로 유명한 곳
JAFA 브루어리: 소규모 맥주 제조 시설을 갖춘 브루어리, 도수가 가볍고 마시기 쉬운 독일식 맥주를 지향해 만든다. 품질이 검증된 재료로 한정된 수량만을 생산한다.
아크앤북: 전문 큐레이션에 의해 취급 도서와 관련 제품을 선정해서 판매하는 편집형 서점이다. 현재 전국에 4개 매장이 오픈되어 영업 중이다. 성수연방의 카테고리 콘셉트는 마일(Mile 책과 독자 사이의 거리를 의미한다).
- 1마일: 평소 독자가 늘 곁에 두고 보는 책과 소품들
- 10마일: 생활 관련 도서와 집을 나설 때 드는 물건들
- 100마일: 국내 여행, 문학 관련 책. 밖에 나가서 놀고, 쉬고 싶을 때 사용하는 가볍고 단순한 소품들
- 1000마일: 해외 여행 관련 책과 소품, 가방들,기타 미술 등 전문 서적 공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서 외에 액세서리, 캐리어, 일상 소품과 자체 브랜드인 ‘로우로우(RAW ROW)’의 잡화도 취급하고 있다.
존 쿡 델리 미트: 오픈형 공장 형태로 매장을 꾸민 육가공 식품 전문회사. 햄, 소시지 등 다양한 가공식품을 판매하며, 제조 생산 과정을 이곳에서 다 볼 수 있다. 플레트 메뉴를 취식할 수 있는 테이블도 구비되어 있으며, 소시지 제조 클래스 수업도 진행한다.
천상가옥: 명실공히 성수동의 핫 플레이스인 예쁜 카페. 투명한 천장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 압권이다.
온 나라가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 시상식(Academy Awards) 작품상과 감독상 등 4개 부문 석권 소식에 떠들썩하다.
뜨거웠던 시상식의 열기만큼이나 시상식장의 면면도 관심이 가는데, 바로 2016년부터 시계 명품 브랜드 롤렉스가 디자인하고 있는 돌비극장 내 그린룸이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돌비극장 내 그린룸은 아카데미 시상식 때 시상자와 특별 게스트들이 무대에 오르기 전 머무는 특별한 공간으로 유명하다. 매년 시상식 때마다 다양한 주제로 꾸미고 있다. 올해의 테마는 ‘극지 탐험’이었다.
롤렉스는 올해 그린룸의 디자인을 통해 극 지대의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그린룸 방문자는 북극 한가운데에 있는 목재 장식의 아늑한 전망대에서 차가운 순백의 설경을 바라보며 얼음 세상을 체험하는 듯한 경험을 했다.
특수 조명이 일출과 일몰 시간의 흐름을 실감 나게 연출할 뿐만 아니라 북극 특유의 햇살과 음영을 느끼게 한다. ‘시간’ 역시 그린룸 디자인의 핵심 콘셉트다. 따라서 극한 환경 탐험에서 필수적인 롤렉스 익스플로러 II가 내부 장식에 중요하게 사용됐다.
오탁번의 시는 쉽고 통쾌하고 재미있다. 술술 읽혀 가슴을 탕 치니 시 안에 삶의 타성을 뒤흔드는 우레가 있다. 능청스러우나 깐깐하게 세사의 치부를 찍어 올리는 갈고리도 들어 있다. 은근슬쩍 염염한 성적 이미지들은 골계미를 뿜어 독자를 빨아들인다. 시와 시인의 삶은 정작 딴판으로 다를 수 있다. 오탁번은 여기에서 예외다. 그의 시와 삶은 별 편차 없이 닮았다.
올해로 77세. 어느덧 으슥한 노경에 접어들었지만 오탁번의 시작(詩作) 활동엔 휴업이 없다. 작년에는 시집 ‘알요강’으로 ‘목월문학상’을 받았다. 나는 ‘알요강’을 펼쳐드는 순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길이 없었다. 앞 페이지에 나오는 ‘서문’부터가 ‘오탁번표’ 해학의 폭죽이지 않은가. 그지없이 짤막한 서문의 내용을 보시라.
“오탁번 새 시집 ‘알요강’이 나온대/아직 안 죽었나?/죽긴, 요즘도 매일 소주 한 병 깐대/정말?”
오탁번과 마주앉은 곳은 충북 제천시 백운면 산촌에 있는 원서문학관 작업실. 그는 고려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은퇴했다. 폐교를 손질해 꾸민 원서문학관은 퇴직 이후의 삶이 실린 창작공간이다. 용인시에 있는 시니어타운의 자택과 이곳을 오가며 지낸다. 날마다 소주 한 병을 눕힌다고 서문에 드러냈지만, 이곳에서 그가 하는 일은 아마도 주로 창작일 게다. 여차하면 흥겨워 한잔 마시듯이, 여차하면 설레어 작품에 손을 대는 사람. 그게 오탁번이니까. 이즈음엔 손에 쥔 물처럼 새나가는 세월에 눈이 가고 마음이 닿아서일까? 그가 나이 얘기부터 꺼낸다.
“이 나이 먹도록 내가 살아 있을 줄 몰랐다. 다행히 남들에게 욕을 먹지는 않고 살았다. 밥값은 하고 살았거든. 그렇더라도 이건 너무 오래 산 거 아닌가?”
“장수시대다. 오래 살고 싶지 않으신가?”
“얼마 전, 투병 중인 이어령 선생을 만났는데 이런 얘기를 하시더라. 김유정이나 이상이나 다들 30세가 못 돼 죽었다고. 선생 자신도 30세를 넘겨 살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고. 뭔가 공감되는 기분이더라. 오래 산다는 거, 그거 좋은 것만은 아니다. 불편한 게 많거든. 요즘 이빨이 흔들린다.”
“동양의 정신 중에는 노경을 삶의 절정으로 보는 관점이 있다.”
“육체적 노쇠를 빼고 따지자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꽃으로 말하면 가장 활짝 핀 상태가 노경이지 않겠는가. 핀 꽃이 마침내 지는 게 죽음이고. 내가 바라는 건, 통째 톡 떨어지는 동백꽃처럼 순간의 미학 속에 지고 싶다는 것이다.”
“나이 들며 찾아오는 태도의 변화에는 어떤 게 있을까?”
“난 담낭절제수술을 받아 쓸개 빠진 인간이 됐다. 이제 줏대 없이 그냥저냥 살면 된다. 그동안 줏대 있는 척 사느라고 무지무지 애먹었다고. 어휴! 속 시원한 거라. 늘그막에 내 인생의 표리부동을 청산했거든.”
특유의 화통한 언설이 흘러나온다. 언설만이 아니라 오탁번의 시는 흔히 자신의 밑바닥을 샅샅이 훑어 허울과 가면을 잡아내는 자가심문의 시어들로 직조된다. 그는 일찍이 시라는 차가운 수사관 하나를 고용, 자신을 미행하게 하고 불쑥불쑥 불심검문을 하도록 하명해둔 것 같다. 시로써 자신을 치고 때리니 말이다. 공자가 설한 뉴스 제목을 가져오자면 ‘신독’(愼獨, 남이 보지 않더라도 엄히 자신의 행세를 점검하라는 뜻)이다.
어머니라는 이름의 종교
문학은 재능과 열정의 폭발이 있고서야 가능하다. 오탁번의 문예적 발화(發火)는 이르고 화려했다. 20대 때 중앙지 신춘문예에 동화를 필두로 시와 소설까지 연달아 당선, 문단에 화제를 뿌렸다. 이후 소설에 주력하다 중년 즈음부터 시 쓰기에 몰두해왔다. ‘제명대로 못살 것 같은 소설 창작의 어려움 때문’이었다지. 시란 그에게 무엇일까.
“에헴! 하고 목에 힘주어서는 가능할 수 없는 장르가 시다. 자기 부끄러움에 관한 고백! 내겐 시의 의미가 그렇다. 내 안에 숨어 있는 악마적인 걸 다 까발리는 행위가 시이고 문학이다.”
“선생은 지난날 글 쓰는 사람의 처절함과 맹렬함을 자살폭탄조에 빗대었다. 지금도 그런 생각 하시나? 쉽게 읽히는 시로 보자면 한칼에 내려치듯 단번에 가볍게 써내려갈 것만 같은데.”
“한칼에? 어림없는 얘기다. 난 순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벼려 시를 쓰는 사람이지 않은가. 늘 사전을 찾아가며 시를 짓다 보면 하염없이 긴 시간이 소요된다. 진통을 자심하게 겪으면서 말이다. 과거나 지금이나 창작이란 어려워 코피를 쏟으며 쓴다. 문학뿐이겠는가? 삶 자체도 마찬가지. 난 실로 코피를 흘려가며 살아왔다. 아이고, 이런 나를 두고 남들은 누릴 것 다 누리며 살았다고 오해를 하네.”
“조지 오웰은 작가의 창작 동기 네 가지를 꼽았는데 순전한 이기심, 즉 명예욕을 첫째로 꼽았다. 어떻게 생각하시나?”
“명예는 멍에의 다른 이름 아닌가? 난 명예를 얻기 위해 문단의 패거리 놀음에 끼거나 눈웃음을 판 적이 없다. 내가 최고라는 자부심은 가지고 산다. 그런 게 없다면 어떻게 쓰며, 어떻게 견디겠는가. 그러나 오탁번의 시에 숨겨진 보석을 보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뭐 어쩌겠나? 보석을 몰라보는 사람만 손해볼 뿐이다.”
“좋아하는 시인은?”
“시라는 건 거미줄에 맺힌 아침이슬 같은 것이다. 거기에 돌을 얹어 거미줄을 끊어버리는 식의 시를 쓰는 시인이 흔하다. 그런 점에서 정지용은 단연 빼어난 시인이지. 그의 시 ‘백록담’을 보라. 기막힌 수작이지 않은가. 고어와 토속어를 빈번히 사용해 시어의 영역을 넓히고 모국어를 확장한 백석도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다.”
작업실 밖 뜰엔 겨울나무들. 거머쥔 것 하나 없는 나목들이 수도승처럼 허심한 표정을 짓고 있다. 오탁번은 이곳에서 지내며 많은 나무를 심었고, 텃밭을 일구기도 했다. 이젠 심고 가꾼 게 너무 많아 관리가 버거울 지경이다. 저만치 사방에서 성벽처럼 에워싸고 범람하는 산경(山景)마저 일쑤 허허로운 건, 한 번 가면 다시 못 오는 사람과 달리 자연은 순환과 회춘을 일삼아서일 테지. 그러나 자연이 주는 도저한 감흥은 노시인의 정신적 체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별에 닿을 시, 산야에 맞먹을 시를 쓰고 싶게 하는 열망의 원천일지도.
그런데 오탁번의 삶과 문학의 진정한 원천은 작고한 어머니다. 우리는 흔히 신성한 신전에서 읍소하거나 백두산이 드높아 자세를 낮추지만, 오탁번은 어머니를 생각할 때면 고개를 숙인다. 뜰 한쪽, 햇살이 들이치는 자리엔 어머니의 흉상을 모신 기념비가 고이 세워져 있다.
“어머니는 나의 종교다. 단순히 나를 낳아 길러주신 모성을 향한 고마움 때문이 아니다. 나의 상상력과 몽상의 원천이기도 했거든. 우리 집은 너무도 가난해 소나무 속껍질로 허기를 달랬다. 그 극도의 가난 속에서도 어머니는 밤이면 필사본 심청전 같은 걸 읽으시더라고.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며 자란 과정 자체가 나의 문학공부였던 셈이지.”
“고향에 문학관을 꾸린 건 결국 어머니가 못내 그리워서?”
“그렇지. 나에겐 스승 이상의 길이자 현재진행형의 신앙이니까. 문학청년 시절의 어느 날, 술 마시고 미쳐 한강에 빠져 죽으려 했다. 그런데 어머니 생각이 나서 죽을 수가 없던걸. 요즘도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어머니를 찾는다. ‘어머니! 이거 어떡해요?’ 그러면 어머니가 응답하시더라. 텔레파시로.”
“어떤 응답을?”
“‘너는 큰 인물인데 무얼 망설이느냐, 네 뜻대로 밀어붙여라!’ 매번 그런 답이 돌아온다. 일찍이 어머니는 어린 나에게 항상 말씀하셨다. ‘너는 큰 인물이 될 거야!’라고. 이런 어머니 밑에서 자란 자식이라면 누구나 범죄 없이 잘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글로 자기 어머니를 비난하거나 이상하게 그리는 작가를 증오한다.”
“물적 간난(艱難)의 체험 역시 창작의 자산일 수 있다. 그러나 가난은 괴롭다. 가혹한 가난에 시달린 성장기에 느낀 감정의 기류는 어떤 것이었을까.”
“분노의 감정이 컸다. 그래서 대학생 때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서너 번 징병 거부를 했지. 나라를 지키기 위한 신성한 의무라 하지만, 내겐 지킬 게 하나도 없었다. 집도 땅도 없다, 국가가 나를 위해 해준 게 무엇이냐, 그런 원망으로 죽을 셈 치고 입대를 거부했지. 나중에 뒤늦게 병역을 마치긴 했지만 울분이 들끓더군.”
히말라야 설산에서 글 쓰고 싶다
오탁번이 냉장고에서 꺼내온 술병을 탁자에 올리더니 잔을 채운다. 이슬처럼 투명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소주다. 큰 공 들이지 않고도 판타지의 회랑을 산책할 수 있게 하는 게 소주 한 병이다. 오탁번은 주량보다는 음주가 주는 감각의 광량(光量)에 심취하는 술꾼이다.
“내가 좋아하는 글귀가 있다. 일독 이호색 삼음주(一讀 二好色 三飮酒)라! 이건 제주 유배에서 풀려난 시절에 추사가 쓴 현판 글이다. 이것의 원전은 청나라 ‘소대총서’(昭代叢書)이지만, 독서와 색과 술을 즐길 만한 것들 중에서 으뜸으로 쳤으니 인생의 정곡을 찌른 게 아니겠는가. 음주를 세 번째에 둔 건 술로 자칫 망가질 수도 있어서일 거라 본다.”
“반면에 독서를 첫손에 꼽은 건, 놀 때 놀더라도 독서를 먼저 해 정신부터 채우라는 뜻일 것 같다.”
“호색의 색을 반드시 섹스로 읽을 일도 아니겠지. 색즉시공의 그 ‘색’과도 무관하다곤 할 수 없을 테니까.”
“술이 아니더라도 삼라만상에 취하기 쉬운 게 시인이다. 선생 역시 자연에 취해 지내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자연과 더불어 늙다 보니 내가 이젠 어린애 다 됐다. 순진성, 천진성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걸 느끼는 것이지. 내가 사물을 찾아 바라보는 게 아니고, 어린아이처럼 그저 사물이 보여주는 그대로 보게 되더라고. 일부러 찾을 때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더라는 얘기다. 이거 아는가. 갓난아이는 촛불을 보면 예쁘니까 만지고 싶어 하고 먹고 싶어 한다. 촛불의 아름다움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느끼는 갓난아이의 마음. 이게 바로 시인의 마음이다.”
노구에 서린 세월의 흔적이 좀은 쓸쓸하지만 카랑카랑한 결기와 시퍼런 촉은 여전하다. 안경 너머 핼쑥한 두 눈은 간간이 빛을 뿜는다. 언젠가 그는 말했다. 시인의 시선은 나무를 밑에서 보는 게 아니라 독수리처럼 위에서 내려다본다고.
“감히 물아일체(物我一體)를 느낀다고 하면 건방진 소리이겠지만 이젠 일체의 것들에 감정이입이 자연스럽게 된다. 그 무슨 힘으로 나리꽃 새싹은 굳은 땅을 뚫고 거침없이 솟아올라오는가? 경이로워 새싹의 마음이 되곤 한다. 이젠 마음대로 별짓을 다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러나 단 하나, 건강 문제엔 불편을 느낀다. 자다가 꼴깍 숨넘어가야 제일 좋을 텐데, 중풍이나 치매에 걸려 허우적거리다 떠나게 되면 이는 치욕이지 않겠는가.”
훗날의 일을 미리 앞당겨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 당장 문밖에 나가 무슨 변을 당할지 알 수 없는 게 사람의 일이다. 그러나 그 진상을 알 길이 없는 인생의 폐막에 그는 불안한 것이다. 그럼에도 끝내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으니 바로 글쓰기라는 숙업. 그러고 보면 그의 불안은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는 종막에 관한 것일 수밖에 없겠다.
“요즘 내가 구상하는 게 있다. 히말라야에 가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살아남는 날까지 설산을 바라보며, 일기 형식의 글을 쓰고 싶은 거다. 당신 생각엔 어떤가? 괜찮아 보이는가? 내가 떠난 뒤엔 책이 나오겠지.”
아침 녘 꽤 눈이 내리기에 겨울다운 모습을 볼 수 있으려나 기대했는데 사르르 녹아버린다. ‘눈이 와야 겨울이 겨울다운데’라는 아쉬움이 든다. 눈의 왕국이 보고 싶은 이라면 흰 눈이 하염없이 내려 동화 속 세상을 만드는 한라산으로 겨울여행을 떠나보자.
한라산 겨울산행, 어느 코스가 좋을까?
제주도의 근원이자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인 한라산의 겨울은 순수 그 자체이다. 백색 치마폭을 두른 듯한 겨울 한라산, 그곳을 오르지 않았다면 한라산의 진면목을 보지 않은 것과 같다. 한라산을 탐방하는 코스는 백록담 정상까지 오를 수 있는 성판악, 관음사 코스와 1700 고지인 윗세오름까지 가는 영실, 어리목 코스 그리고 남벽분기점까지 오르는 돈내코 코스의 총 5개의 등산코스가 있다.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다면 어리목탐방안내소에서 어승생악 정상까지 다녀오는 코스나 짧은 시간에 한라산의 멋을 느껴볼 수 있는 영실, 어리목코스가 좋다. 한라산을 오르는 겨울 코스 중에 최고는 성판악코스다. 천천히 완만한 경사를 유지하면서 오르는 산행로를 따라 숲과 능선이 조화를 이뤄 겨울산행의 묘미가 가득하다. 꽤 등산을 좋아한다면 몇 개의 계곡을 지나는 난이도가 높은 관음사코스를 추천한다.
겨울왕국으로의 여행, 은빛 한라산을 오르다
한라산 겨울산행을 성공적으로 하려면 날씨를 꼼꼼하게 체크해야 한다. 전날 한라산이 통제될 정도로 눈이 내렸고 다음날 맑음이라는 예보가 있다면 최상의 겨울 한라산을 만날 확률이 100%다.
성판악휴게소에서 정상까지는 대략 4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산행을 시작하면 다채로운 눈꽃의 향연에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눈꽃이 펼쳐지면 동화 속 세상으로 들어왔음을 실감한다. 눈꽃을 보며 천천히 걷기 때문에 평소보다 시간을 넉넉하게 잡는 것이 좋다. 진달래밭 통제소를 12시까지 통과해야만 백록담까지 갈 수 있으니 시간 안배가 필요하다. 진달래밭대피소를 지나면 경사가 급해진다. 그동안은 숲길을 산책하는 느낌이었다면 이 지점부터는 산행이다. 앞사람의 발끝을 쫒으며 한 걸음씩 내딛다 보면 급경사의 숲이 끝나고 눈이 시원해지는 너른 벌판이 나타난다. 흰색의 한라산과 구름의 경계가 모호하다. 우뚝우뚝 서있던 구상나무는 내린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가지를 축 늘어뜨리고 있다.
정상에 가까울수록 빙판길처럼 미끄럽고 몰아치는 바람은 살을 에듯 날카롭다. 한라산 최고의 눈꽃인 상고대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상고대는 안개처럼 미세한 입자가 바람과 갑자기 낮아진 온도에 얼어붙은 것이다. 바람의 자국을 선명하게 보여주면 얼어붙은 상고대는 섬세한 눈 조각을 보는 것처럼 아름답다. 맹추위를 지나 겨우 도착한 정상 부위는 대부분 구름이 오락가락 백록담과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매서운 바람이 귓불을 후려치지만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려본다. 1년 중 백록담을 볼 수 있는 날이 그리 많지 않음을 생각하면 화구호에 흰 눈이 수북한 백록담을 잠시라도 볼 수 있다면 크나큰 행운이다.
동절기에는 1시 30분까지 정상에서 내려가야 한다. 하산 길은 마음이 여유롭다. 소담스러웠던 눈꽃들이 햇살 아래 물방울로 변해 떨어진다. 눈 무더기에 싸여있던 붉은겨우살이 열매도 조금씩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는 한라산이 펼쳐 보인 은빛 동화책을 덮어야 할 시간이다. 나태함이 마음속에서 빠져나갔고 그 자리에 삶의 활력을 채워서 돌아간다. 한라산 겨울산행이 사람들에게 건네는 선물이다.
성판악코스 탐방 정보
성판악 탐방안내소 -> 속밭/화장실 -> 사라오름입구 -> 진달래밭대피소 -> 정상(동릉) (진달래밭 3시간, 정상 4시간 30분) 왕복 19.2km, 9시간 소요
입산통제시간 : 동절기 11~2월 입산시간 06:00부터, 성판악탐방로 입구 12:00부터, 성판악 진달래밭안내소 12:00분, 정상탐방 제한, 정상 (백록담) 13:30 하산
매점 : 성판악휴게소 (식수, 김밥, 국수, 해장국, 과자류, 아이젠, 비옷 등 등산장비), 등산로에는 매점이 없으니 미리 준비하도록 한다.
화장실 : 성판악휴게소, 속밭대피소, 진달래밭대피소
한라산 겨울 등반 Tip!!
한라산은 외형적으로는 완만한 형세를 보이지만 바람과 비가 잦아 날씨가 변화무쌍하다. 급변하는 기후와 눈이 많이 오는 겨울 날씨로 인해 각종 조난사고가 빈번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날씨 점검과 겨울산행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겨울 등산 준비물로 아이젠과 스패츠는 필수다. 옷은 보온성을 높이도록 얇은 옷을 여러 겹 껴입는 것이 좋으며 폴라폴리스나 모직이 가볍고 따뜻하다. 방수 기능이 있는 등산화, 등산용 스틱, 귀를 덮는 모자, 핫팩, 방수 재질 장갑 외에 여벌 옷과 양말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초콜릿, 사탕, 에너지바와 같은 칼로리가 높은 간식을 챙기는 것도 잊지 말자.
*2020년 2월~12월까지 성판악(1,000명)/관음사(500명) 탐방예약제가 시행될 예정이다.
창밖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있는 겨울밤에 따뜻한 솜이불 속으로 몸을 담그는 순간 느껴지는 행복감. 그 포근하고 편안한 느낌이 겨울 여행의 맛이다. 뻔한 새해맞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겨울 여행에 갈증을 느꼈다. 그때 하나의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지중해는 푸른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황금빛 방울처럼 딸랑딸랑 울리던 곳…”
레몬 향 실린 따스한 바람과 지중해가 반사한 겨울 햇살이 내 영혼을 포근하게 적셔줄 것 같았다. 오렌지빛 겨울 노을을 가슴 속에 슬그머니 담고 싶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크레타섬’이다.
겨울에 만난 크레타 섬
크레타(Creta) 섬은 그리스 본토와 아프리카 대륙으로부터 각각 300km 떨어진 정확히 중간 지점에 있다. 그리스에서 다섯 번째 큰 섬으로 제주도 면적의 4.5배 크기다. 아테네의 피레우스(Piraeus) 항구에서 밤 페리선을 타고 크레타 섬으로 향했다. 밭이랑을 세우듯 하얗게 물이랑을 일으키는 파도를 밤새도록 넘어 이른 새벽에 크레타의 이라클리온(Heraklion) 항구에 도착했다.
지중해의 겨울은 날씨를 예측할 수 없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바람과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세찬 바람이지만 찬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겨울바람이다. 살갗을 쓰다듬어주는 바람이 피부에 착착 달라붙었다. 나도 모르게 한 마디가 나왔다. “아! 바람 좋다.” 잠시 후 새벽 여명과 함께 나타난 야자수와 파릇파릇한 나무들은 멀리 동쪽에서 찾아온 여행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라클리온의 중심지는 베니젤로(Venizelos) 광장이다. 광장 가운데 있는 1600년대에 만든 사자분수를 중심으로 수많은 레스토랑과 카페들이 주변에 있다. 비수기여서인지 문을 닫은 가게들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밤이 되자 광장 주변은 물론 골목길에 있는 작은 카페와 바까지도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 많은 사람들이 어디에 있다가 어두워진 후에서야 이렇게 나타나는지 놀라웠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밤이 하얗게 새도록 이야기를 나눈다. 이곳 사람들의 삶을 풍부하게 해주는 것은 긴 겨울밤 내내 공감과 소통을 하는 데서 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중해의 겨울밤은 하얀색 이야기의 성(城)이다.
겨울 석양을 맞이하기 위해 바닷가 길을 걸었다. 해안가를 따라 즐비하게 늘어선 예쁜 카페 거리가 아니라 황갈색 바위의 방파제 길을 걸었다. 길 중간에서 1500년대에 만들어진 ‘베네치아 요새’를 만났다. 크레타 섬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를 받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지어진 군사시설이다. 겨울 지중해는 해 질 녘 주황색 하늘을 나에게 선사하지 않았다. 아마 겨울이 오면 여름을 기다리는 섬사람들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에게 선사하기 위해서 참았을 것이다. 방파제에 앉아 한숨을 쉬며 파도로 해변을 핥는 겨울 바다를 지켜보았다. 바다를 지켜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내가 바다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바다가 나를 지켜주는 것 같은 포근함이 밀려왔다.
미노스 문명의 크레타 섬, 크노소스 궁전
크레타 섬은 고대 그리스 문명에 영향을 준 미노스 문명의 중심지였다. 시내에 있는 ‘이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에는 놀라울 정도로 발달한 청동기 시대 미노스 문명의 많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앞에서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크노소스 궁전’으로 갔다. 겨울이라 관광객도 거의 없이 한산해서 여유롭게 궁전을 둘러볼 수 있었다. 크노소스 궁전은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그리스 전설 속의 반은 인간, 반은 황소였던 ‘미노타우로스’가 살았다는 전설로 유명한 곳이다. 미로 같은 건물로 지었다는 이야기가 충분히 나올 만한 규모와 구조였다. 서로 연결된 방이 무려 1,400개라고 한다. 벤치에 앉아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궁전에 얽힌 인물과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꿰어 보는 시간을 가졌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와 만나다
크레타섬 출신으로 유명한 사람을 꼽는다면 화가 ‘엘그레꼬’, 가수 ‘나나 무스끄리’와 작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뽑을 수 있다.
이라클리온을 둘러싼 성벽 위에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가 있다. “최후의 유혹”이라는 작품으로 인해 그리스정교회와 로마가톨릭으로부터 파문을 당했기 때문에 공동묘지에 묻히지 못하고 성벽 위에 있었다. 바람 부는 성벽 위, 그의 묘는 소박했다. 묘비의 글처럼 죽어서도 욕심내지 않은 모습이었다. 평평한 돌과 묘석 그리고 나무 십자가 그것이 모두였다. 묘비에는 그의 소설에서 따온 유명한 문장이 새겨져 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욕심과 욕망을 버리고, 자유롭게 삶을 즐기라는 그의 외침이 바람에 실려 귓가를 맴돌았다. 자유를 갈망하며 거칠고 힘든 삶을 살았지만, 탁 트인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지금의 자리가 그의 영원한 안식처로 선택된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을 것이다. 고개를 돌리면 조금 떨어진 곳에 니코스 카잔차키스 문학의 동료이자 사랑을 알려 준 두 번째 부인 엘리니의 묘가 있다. 그녀의 묘 역시 소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묘 주변을 둘러볼 때 벤치에 앉아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여인을 만났다. 파리에서 프랑스 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페르(Ferr)’였다. 한국에서 교환학생으로 1년 동안 공부했었다는 그녀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와 크레타 섬을 정말 좋아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그의 문학과 그의 외침 ‘자유’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유롭지 못해서 더 자유를 열망하는 것은 아닐까.
사람과 시간, 사연이 오가는 겨울의 항구
크레타 섬에서 이라클리온 다음으로 큰 도시는 하니아(Chania)다. 이곳 역시 베네치아 공화국과 오스만 튀르크의 지배를 받았었다. 여러 문화가 공존하는 낭만적이고 이국적인 분위기의 작은 예쁜 항구다. 하니아는 이라클리온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3시간을 가야 하는 거리에 있다. 하니아로 가는 도로는 해변을 따라가는 풍경이 아름다운 길이다. 가는 내내 올리브 나무가 지천에 깔려있는 구릉지들이 바다와 함께 길옆으로 함께 달린다. 크레타 섬에는 30,000그루의 올리브 나무가 있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올리브 관련 상품들이 특산품으로 많이 판매되고 있었다.
하니아 베네치아 항구의 작은 카페에 앉아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지중해의 겨울 햇살이 내 몸을 관통하고 있었다. 항구는 배만 오가는 곳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과 시간, 사연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 안에 나의 시간도 있었다. 지금까지 나를 지키는 것조차 버거워 얼마나 많은 것들을 외면해 왔는지 크고 작은 것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조르바의 말처럼 매사를 정밀하게 재는 저울 한 벌을 내 안에 가지고 있었다. 이제 저울을 버릴 때다. 필요한 건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뿐이다.
△ 지중해 섬 여행 정보 Tip (아테네에서 크레타 섬 가는 방법 중심으로)
- 아테네 피레우스 항구에서 페리를 타면 된다. ‘미노안 라인’과 ‘블루 스타 페리’ 두 개 노선이 있으며 크레타 섬까지는 9시간 정도 걸린다.
- 피레우스(Pireaus) 역까지는 지하철(Metro) M1 노선을 이용하는 것이 편하다.
- 피레우스 항구 입구에는 배를 타는 각 게이트로 가는 무료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
- 예약서를 페리 타는 게이트(Exit)에 있는 부스에서 탑승권으로 교환하면 된다. 혹은 직접 구매해도 된다.
▪ 미노안 라인 예약 홈페이지 www.ferries.gr/
▪ 블루 스타 페리 예약 홈페이지 www.bluestarferries.com
※ 크레타 섬 외에 산토리니 등 다른 섬을 가기 위한 예약과 승선도 동일한 방법으로 하면 된다.
※ 겨울철에는 숙박비, 렌트비 등 모든 요금이 절반 정도로 싼 편이다. 하지만, 바람이 불고 파도가 높으면 배가 출항을 못 해 발이 묶여 있을 수도 있다. (물론, 비행기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겨울철 지중해 섬 여행은 반드시 시간적 여유가 있는 일정이어야 한다.
△ 크레타 섬 추천 먹거리
베니젤로 광장 꼬치구이 전문점
조선왕릉은 문화유산으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9년 6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20기가 남아있다. 이 가운데 능은 42기, 원이 14기, 묘가 64기이다.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하며, 원은 왕세자, 왕세자빈 또는 왕의 사친의 무덤을 말한다. 그 외 왕족의 무덤은 묘라고 한다.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히 보존된 것은 세계에 그 유래를 찾기가 힘들다. 2019년도 저물어가는 12월 가까이 있는 서오릉을 찾았다. 삶과 죽음, 역사 이야기를 통해 지나온 시간을 되짚어 봤다.
홍릉을 통해 본 영조의 삶은 과연 행복한 삶이었을까?
천한 신분인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열등의식은 그의 개인적인 삶에 한계를 지우는 원인이 되었다. 배다른 형을 세자로 둔 왕자였지만 금수저가 아니라 차라리 흙수저에 가까웠다. 성장기도 궐 밖의 사가(私家)에서 지냈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조선의 21대 왕이 된 이가 영조다.
그는 어려서 궐 밖에서 지낸 경험으로 인해 백성을 위한 정치와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많이 알려진 탕평책(비록 실패했지만)과 균역법은 그의 대표적 업적이다.
그 밖에도 쌀이 부족하면 일시적으로 금주령을 내리기도 했고, 가혹한 형벌을 없애기도 했다.
영민한 군주였지만 그는 콤플렉스로 인해 개인적으로 결코 행복한 인생을 살지는 못했다. 먼저 자신에게 지나치게 엄격했다. 오로지 왕으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만 집중한 외골수였다. 일례로 경연을 자주 열었다. 왕위에 있는 동안 역대 최고인 3458회를 기록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학문 실력을 자랑하기도 하고 신하들을 가르치기도 했다고 한다. 밖으로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피곤한 스타일이다.
그는 철저하게 조선의 왕이라는 신분에 얽매였다. 중요한 것은 그에게 왕이라는 신분이 고난을 견디게 하는 자부심이 아니라 권력을 소유하는 기준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그는 정비인 정성왕후에 대해서도 첫날밤에 소박을 놓기까지 했다. 그 이유가 어이없다. 첫날 밤 연잉군(왕이 되기 전 영조의 호칭)이 말하길 “그대는 손이 참으로 곱소”하였다. 이에 대해 정성왕후는 “소첩이 궂은일을 하지 않아 그런 듯하옵니다.” 딱 한 마디 대답했다. 이 말에 그는 궂은일을 많이 했던 자기 어머니 손을 떠올리며 자신을 우습게 여긴다고 생각했다. 그날부터 그녀는 죽는 날까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이 정도면 거의 병 수준이다. 하지만 그녀는 일국의 왕비로서 끝까지 체통을 잃지 않았다. 남편에게 평생 버림받았을 뿐만 아니라 아비와 자식 간의 관계로 인해 마음의 병까지 얻은 그녀가 죽은 후 자리를 잡은 곳이 서오릉에 있는 ‘홍릉’이다. 홍릉은 조선의 능 중 유일하게 한쪽이 비어있다. 원래 영조는 자신이 사망하면 비워둔 오른쪽 자리에 함께 묻혀 쌍릉으로 조성하길 원했다. 하지만 정조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조는 왜 영조의 말을 듣지 않았을까?
오렌지빛 주황색을 띤 겨울 햇살이 능과 마주 보고 있는 산 정상을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영조의 콤플렉스와 열등의식은 자신의 친아들인 사도세자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3살 때 글을 쓰고 읽을 정도로 영특한 이 선(사도세자의 이름)은 태어난 다음 해 세자로 책봉된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두 사람의 사이는 점점 멀어진다. 영조는 아들이 공부하기를 원했지만, 이 선은 무예에 관심이 많고 능통했다. 영조는 자기 뜻대로 행하지 않는 아들에게 점점 더 심하게 압박을 가했고,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정신병까지 생겼다. 결국, 우리가 잘 아는 세계사에 유례없는 참변에까지 이른다. 사도세자는 홍역을 앓으면서도 사흘 동안 눈 위에 엎드려 영조에게 잘못을 빈 적도 있었다고 한다. 부모가 자식을 엄하게 키워야 한다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영조의 이런 혹독함은 어떻게 보아야 하나. 그는 자식과 공감, 소통한 것이 아니라 소외, 단절한 것은 아니었나.
홍릉 주변을 걸으며 영조를 생각하니 가까이 있는 가족, 사람들과의 관계와 공감에 대해 반성하며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삶을 바라보며 또 다른 나를 통해 지나온 삶에 대해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끊임없이 더 좋은 삶, 더 따뜻한 삶을 향해 노력하는 아름다운 삶의 길을 걷고 싶다.
서오릉은 치유를 통해 새롭게 시작하는 공간
서오릉에는 5개의 능과 2개의 원, 1개의 묘가 있다. 서울의 서쪽인 이곳에 처음으로 조성된 능은 세조의 큰아들이자 성종의 아버지인 추 존 덕종과 그의 비 소혜왕후가 있는 경릉이다. 세조는 그가 지은 죄 때문인지 아들이 두 명이나 20세 때 죽었다.
두 번째 능 역시 세조의 둘째 아들인 제8대 예종과 두 번째 부인인 안순왕후의 능이다. 세 번째 능은 숙종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의 능이다. 네 번째 능은 제19대 숙종과 그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의 능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위에 이야기한 홍릉이 있다.
이번에 돌아본 서오릉은 단순하게 역사적 가치만을 지닌 공간이 아니었다. 51만여 평에 이르는 서어나무 길과 소나무 길이 있는 녹지대는 사색과 사유의 공간이었다. 소나무 향이 흐르는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삶과 죽음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찰나에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살아있음의 경험’임을 깨닫게 되고, 살아있음의 황홀함이 느껴지는 순간부터 우리는 행복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그렇게 서오릉은 치유의 공간이었다.
또 그곳의 자연에서는 봄을 위해 동토에 새싹을 피우는 자연을 만날 수도 있었다. 티 없이 화사한 자연의 미소가 거기에 있었다.
△교통
지하철: 3호선 녹번역 4번 출구 은평구청 방향에서 광역버스(9701),일반 버스(702A,B)
3호선 원당역 3번 출구에서 광역버스 (9701)
6호선 구산역 1번 출구에서 광역버스 (9701)
6호선 응암역 2번 출구에서 일반버스 (701A, 702B)
주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32
2019년 9월 서오릉 앞길이 정비를 끝내고 6차선 대로로 새롭게 길을 열었다. 전 보다 접근성이 아주 좋아졌다. 그러다 보니 요즘 서오릉이 서울 근교의 새롭게 떠오르는 먹방의 성지가 되고 있다.
△가볼 만한 식당
⁕ 대가왕 쭈꾸미
대한민국 요리 명장이 요리하는 곳으로 소문난 이곳의 요리와 메뉴는 퓨전이다. 불 주꾸미의 경우 불맛의 향을 살리면서도 숙주의 아삭함과 파향으로 느끼함을 잡아준 별미다. 식사 후 정원에서 커피도 가능하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07-8
⁕경성빵공장
주인이 말하는 비법은 신선한 재료와 당일 생산, 당일 판매뿐이다. 그런데도 빵 마니아들에게는 소문이 자자한 곳이다.
TEL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406-20
△TIP 정보
⁕ 탕평책: 당쟁(영조 때는 노론과 소론)을 막기 위해 정치 세력 간에 균형을 꾀하려 한 정책.
⁕ 균역법: 백성들의 3가지 세금(토지, 특산물, 노동력)중 노동력에 해당하는 군역(군복무) 은 당시 베 2필로 대신할 수 있었는데, 이를 베 1필로 줄이는 대신 지주나 왕족에게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게 한 제도.
⁕ 경연: 왕과 신하가 유교적인 이상정치를 추구하는 장으로서, 왕이 학문에 애쓰는 것을 드러내는 자리.
여수엑스포역은 관광지 철도역으로는 만점짜리 자리에 있다. 열차에서 내려 역 구내를 빠져나오자마자 엑스포 전시장이 눈 앞에 펼쳐진다. 그 왼쪽에서는 쪽빛 바닷물이 넘실댄다. 일정이 바쁜 사람들은 열차 도착 시각에 맞춰 역 앞에 긴 줄로 늘어서 있는 택시를 바로 잡아탄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끌리듯 엑스포 전시장으로 직진한다. 높낮이 없이 평평하게 설계된 전시장 길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걸어도 걸리는 곳이 없다. 시니어들에겐 맞춤 산책길이다. 자기도 모르게 왼쪽에 있는 바다 쪽으로 접근해 걷게 된다.
조금 걷다 보면 왼편 얼마 안 떨어진 곳에 조그만 섬 하나가 눈에 잡힌다. 소문 난 오동도다. 전시장 끝자락에서 이어지는 다리가 있으니 그 섬에 가지 않을 도리가 없다.
만만한 섬! 천천히 걸어도 30분가량이면 다 돌 수 있다. 이 섬이 소문난 건 동백꽃 덕분이다. 동백꽃은 한창 피어나는 겨울보다는 지기 시작하는 초봄에 장관을 이룬다. 바닥에 무리를 이뤄 떨어져 있는 빨간 꽃송이와 꽃잎들은 처연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우리 인간들에게도 질 때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지라고 충고하는 듯하다! 그 교훈을 실감
나게 체득하려면 동백꽃이 떨어지는 3~4월께 오동도를 다시 찾아야 한다.
실비로 먹는 ‘시골밥상...’ 식당
오동도 구경을 마치고 나올 때쯤이면 뱃속에서 신호가 오게 마련이다. 더욱이 이곳이 맛의 고장 여수임에랴! 오동도 앞에서 돌산으로 가는 해상 케이블카 탑승장 바로 밑에 음식점들이 즐비해 있다.
8000원짜리 여수 가정식 백반을 파는 ‘뚱땡이 할머니의 밥상 시골밥상’ 집은 언제나 손님이 차고 넘쳐 끼니때는 이용이 쉽지 않다. 칠순을 넘긴 뚱땡이 할머니와 마흔도 채 안 돼 아이를 넷이나 출산한 ‘애국자’ 따님이 운영한다. 맞은편 엠블 호텔 투숙객들도 이 식당을 많이 찾는단다.
특별한 반찬은 없지만, 하나하나 간을 잘 맞춘 맛깔스러운 반찬들과 매일 바뀌는 국 종류 때문에 밥 한 그릇을 더 시키는 손님들이 적지 않다. 식사를 끝낸 자리엔 종업원이 큰 통을 들고 가서 남은 ‘아까운’ 반찬들을 모두 담는다. 음식 재활용을 않는다는 걸 손님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좁은 자리가 꽉 차고 기다리는 사람도 많아 사진도 못 찍고 문전에서 아쉬운 발길을 되돌려야 했다. 아쉽기는 뚱땡이 할머니와 따님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문 앞에 서서 손님을 그냥 보내는 눈빛에 미안함과 아쉬움이 가득하다.
진남관 앞 ‘서울해장국’ 식당
그렇다고 애써 맛집을 다시 찾아야 한다면 여수가 아니지.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의 본영으로 사용하던 진남관. 그 오른쪽 앞과 길 건너편 거리에 여수의 오래된 먹자골목이 있다. 모두 다 소개하고 싶은 맛집들이다. 그중에서도 시민들이 많이 찾는 ‘서울해장국’이 있다.
아니, 맛집 고장 여수에서 엉뚱하게 옥호를 ‘서울~~’로 쓰다니! 그러나 사실 이상할 게 없다. 수십 년 전 여수가 관광지로 채 발돋움하기 전에 개업했으며 그 당시만 해도 서울은 대단한 동경의 대상이었기에. 마치 50, 60년대 서울의 빵집과 양복점 등의 이름으로 뉴욕, 파리, 런던 등을 많이 썼던 것처럼.
이 식당은 새벽 5시부터 오후 3시까지만 영업한다. 바싹 말린 우거지를 장어로 국물 맛 낸 된장국에 넣어 푹 끓여낸 우거지국, 바삭바삭한 식감을 즐길 수 있는 콩나물국, 두툼한 선지국은 모두 한 그릇에 6500원, 돼지고기를 아낌없이 넣은 김치찌개(8천 원) 등이 하나같이 별미다. 이 식당은 특히 밑반찬에 들이는 정성이 남다르다. 그 때 그 때 구워주는 생김을 찍어 먹게 집간장과 양념간장을 함께 내주고 갓 만들어 내오는 숙주나물, 고추멸치볶음, 계란부침 등도 모두 싱싱하고 맛깔스럽다.
주인 할머니와 따님이 조그만 식당을 무려 종업원 10명가량을 쓰며 운영한다. 김 굽는 직원, 식재료 다듬는 직원, 우거짓국 끓이는 직원, 김치찌개 끓이는 직원 등이 제각각이다. 맛집에서 흔히 겪을 수 있는 불친절은 찾아볼 수 없고 직원들이 손님상을 수시로 체크하며 모자란 반찬은 알아서 채워주는 친절함까지 보인다. 손님들이 저마다 이 식당 칭찬하기에 바쁘다. 팔순이 넘어 보이는 어르신이 선짓국을 들고 계신다. 궁금해서 말을 붙여보았다. “40년 단골이지. 맛도 맛이지만 정성이 들어간 건강식이고 배고프던 시절 추억을 떠올려 더 좋지.” 여러모로 완벽한 맛집인 셈이다.
그 밖에도 복춘식당, 조롱박 등 여수의 별미를 즐길 수 있는 맛집들이 이 일대에 많다. 서대회, 아귀찜, 아귀탕, 생선 내장탕, 돌게장, 삼치회 등이 주메뉴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일대의 많은 아귀찜 식당과는 비교도 안 되게 풍부한 아귀를 넣은 아귀탕이 1만 원. 둘이서 다 먹기 부담스러운 양의 아귀찜도 2만 원 미만이다. 마산 일대가 주산지로 알려진 아귀는 여수에서 더 풍족하게 요리된다. 여수 앞바다에서 많이 잡히는 삼치의 선어회는 여수의 특징적인 음식 중 하나다. 처음 접하면 물컹한 식감에 다소 거부감을 느끼지만 익숙해지면 삼치회만 찾을 정도로 중독성이 있다. 구이로 먹는 삼치 머리는 클수록 맛이 좋다.
진남관. 이순신광장. 장군섬
식사를 마치고 여수의 상징인 진남관과 이순신 장군 동상이 우뚝 서 있는 이순신 광장을 ‘참배’ 할 차례다. 여수를 하루만 둘러봐도 곳곳에 있는 이순신의 흔적을 발견하곤 새삼 놀라게 된다. 심지어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가 거처했던 곳까지 여수에 있고, 거북선을 건조하고 수리하던 ‘선소’도 세 곳이나 있다. 어머니 처소는 보존작업이 마쳐져 관광객들의 발길이 띄엄띄엄 이어지고 있으며, 현재는 그 앞에 새로 이순신 공원 조성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다른 지역에서는 심지어 실재하지 않은 소설 속 인물까지 끄집어내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데 ‘점잖은’ 여수 시민들은 ‘이순신 자원’을 그리 요란하게 활용하지 않는다. 기자도 여수를 몇 번 찾기 전까지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전 전라좌수사로 여수에 부임해 곳곳에 이렇게 많은 흔적을 남긴 줄은 알지 못했다.
이순신 장군은 사후에도 여수민들을 여러모로 ‘살려주고 있는’ 중이다. 거북선 빵집, 이순신 햄버거 등 여수 상가의 옥호 중 이순신과 거북선이 가장 많이 활용된다. 여수민들의 충무공에 대한 애정과 충성도 역시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생전에도 사후에도 나라와 국민을 위한 충정이 한없는 불멸의 영웅은 여수에서 그 숨결이 가장 생생하게 느껴진다.
진남관은 2020년 봄까지 보수 일정이 잡혀있어 내부 관람이 금지돼 있다. 광장의 장군 동상 앞에 실물 크기로 지어졌다는 거북선도 기자 일행이 찾았을 때는 수리 중이어서 입장을 할 수 없었다. 관람객이 너무 많아 수시로 보수를 해야 한단다.
진남관 입구와 장군 동상 너머 장군섬에 이르는 곳까지 장군의 위세가 당당하게 뻗쳐져 있는 일대를 보는 것만으로 성웅 충무공에 대한 참배를 대신해야 했다. 참고로 해방 즈음까지는 장군 동상 앞에까지 바닷물이 들어차 있었단다.
종포공원 거쳐 오동도 가는 길
이순신 광장에서 오동도 방향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다. 하나는 자산공원이 있는 방향으로 나지막한 언덕길을 거쳐 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몇 해 전부터 여수의 포장마차 촌으로 유명해진 종포공원을 거쳐 바다를 끼고 가는 길이다. 우선 종포공원부터 걸어보기로 한다.
이 일대는 여수의 오래된 바닷가 놀이터 중 하나다. 지금은 공원으로 명칭이 붙여져 있지만, 낚시꾼이 모여들고 고기잡이배가 들락날락하던 곳이다. 그래서 지금도 바로 옆에 새벽마다 경매가 열리고 종일 생선 판매가 이뤄지는 선어 시장이 있고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낚시꾼들도 간간이 모습을 보인다.
몇 년 동안 성시를 이루던 포장마차 촌은 인근 하멜기념관 옆으로 옮겨졌다. 정비 차원이었던 모양인데 아직은 포장마차 촌의 모습으로 보기엔 익숙하지 않다. 행정력도 자연스러움에 초점이 맞춰져야 바람직한데...
종포 공원 일대에 펜션 서너 곳이 있고 펜션 부근에 맛집이 꽤 늘어서 있다. 포장마차와는 구분되는 식당들이다. 여수 특산물 중의 하나인 돌문어 식당이 많다. 돌문어삼합, 돌문어라면 등등. 진화한 여수 음식 종류 중 하나는 해산물을 활용한 라면 요리다. 이 돌문어 식당엔 점심때부터 줄이 늘어서 있다. 젊은 층이 많다. 돌문어라면 뿐만 아니라 해물라면, 돌문어삼합 등 새로운 메뉴가 계속 개발되고 있다. 돌문어라면 1만 원, 네 사람이 먹어도 남을 정도의 푸짐한 돌문어삼합은 3만9000원.
기자도 몇 년 전 여수에 와서 라면 요리를 ‘개발’했었다. ‘꼴뚜기 라면’. 시장 아지매한테 1만 원만 주면 한 접시 가득 주는 꼬록(여수에선 꼴뚜기를 꼬록이라고 부른다)을 특별한 레시피 없이 라면과 함께 끓여주면 색다른 국물 맛을 내는 아주 맛깔스러운 라면이 완성된다. 강추!!!
몰포 나비와 나비 반도 여수
자산공원은 관광객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공원이다.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어 걸어 올라가기에 좀 힘이 들기 때문이다. 관광버스들도 코스로 잘 잡지 않는다. 그러나 노인 체력으로도 천천히 걸어 올라갈 만 하다. 아침저녁으로 산이 아름다운 자색으로 물든다 하여 자산으로 이름 붙여진 그 산속 공원엔 여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고 또 생뚱맞은 이름의 전시관이 하나 있다.
곤충체험관인데 이름하여 ‘빠삐용(나비) 전시관’이란다. 여수에 빠삐용 전시관이라니.. 입구에 영화 빠삐용의 주인공 역을 맡았던 미국 배우 ‘스티브 맥퀸’의 사진이 걸려 있다. 여수에 빠삐용? 생각해보고 거듭 생각해 봐도 생뚱맞다!
전시관에 들어가 설명을 들어봤다. 여수시의 전직 공무원 한 분이 현직에 있을 때부터 집념으로 나비를 채집해 개인적으로 만든 전시관이다. 시에 기증해 지금은 시가 운영하고 있다. 수많은 나비 표본 중에서 대표적인 전시물이 저 멀리 중남미 원산의 몰포나비. 푸른 금속성 광택이 나는 아름다운 몰포나비와 그 나비 모양을 빼닮은 여수반도 그림이 나란히 전시돼있다.
아하! 그제야 조금 몰포나비 채집자의 의도가 이해될 듯했다. 그는 이렇게 상상의 나래를 폈음 직하다.
“지구 저편에서 몰포나비가 너울너울 날아와 한반도 끝자락에 앉았다. 여수반도다!”
여수의 강남이라는 웅천에서
여수에서는 걷다가 가끔 시내버스도 타볼 만하다. 2층 관광버스도 좋지만 무작정 시내버스를 타고 한가롭게 시내를 돌다 보면 대충 여수 시내의 윤곽이 들어와 다음날 일정에 참고하기에도 좋다.
물어물어 버스 몇 번 갈아타고 여수의 강남이라는 웅천지역으로 갔다. 고급 아파트촌이 있고 인공 해변이 조성돼있으며 입구 상가엔 여수답지 않게 주차난이 심한 모습을 하고 있다. 서울 사람들에겐 식상한 풍경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에게 구원은 ‘예울마루’다. 전시회와 음악회를 수시로 여는 이 건물은 여수 산단에서 매출을 많이 올리는 어느 대기업이 외국인 건축가에 설계를 맡겨 지어서 시에 기부한 것이다. 건물 외벽 없이 자연 친화적으로 지어 건축물 문외한이 보기에도 시원하다. 건물 바깥쪽에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돼있는 것도 특이한 모습이다.
예울마루 관람을 마치고 15분가량 옆의 산길을 돌아 걸어가면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짓고 수리했다는 선소가 나온다.
이순신 장군의 또 다른 작품 ‘선소’
이 선소는 여수반도를 에워싼 바다의 ‘골목길’ 맨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적군에게 노출되지 않는 장소를 고른 것이다. 실제로 가까운 웅천 쪽에서도 선소는 보이지 않고 웅천의 바다 건너편에 있는 아파트촌에서도 이곳이 보이지 않는다. 입지 선택이 탁월했던 셈이다. 그러니 여유롭게 안정적으로 거북선을 짓고 수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거북선과 수전의 각종 전략 외에도 이순신 장군의 지모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순신 장군은 영국의 넬슨 제독과 함께 세계 해전사에서 최고의 명장으로 기록된다. 러일전쟁을 일본의 승리로 이끈 일본의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가 이순신 장군에게 존경을 표한 것도 거북선 뿐만 아니라 해전 전술, 주민 친화력, 그리고 선소 운영 능력 등을 보았기 때문이다. 충무공께 새삼스러운 존경의 묵례를 보내고 이번엔 선소 길 건너의 그 유명한 보리굴비 식당으로.
명사들이 찾는 여수의 보리굴비 식당 ‘석정’
굴비 하면 영광 굴비, 법성포 굴비다. 그런데 여수에 명사들도 즐겨 찾는 보리굴비 전문식당이 하나 있다. 옛 여천 지역, 여수 시청 부근에 있는 석정 식당이다.
이 식당도 덕장은 법성포에 두고 있다. 법성포에서 굴비를 말려 여수로 가져와 조리한다. 식당에서 판매하는 굴비 정식엔 굴비와 함께 해물 보쌈김치, 여수산 각종 나물 등 17가지의 반찬을 내놓고 직원이 각 테이블을 돌면서 먹기 좋은 크기로 굴비를 찢어 준다. 기름기 잘잘 흐르는 보리굴비 속살, 군침이 돈다. 보리굴비 정식 2만 원. 여수엑스포 준비위원장을 지낸 전 건설교통부 장관 강동석 씨, 지금 병마에 시달리고 있다는 윤정희, 백건우 씨 부부 등 명사들이 오래된 단골이란다.
여수에서 11월에 열렸던 세계한상대회 때의 에피소드 한 토막. 대회기간 중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온 참가자들이 각자 이 식당을 찾았다가 우연히 만나는 일이 몇 차례 있었단다. 각국 한인들에게까지 이 식당 소문이 났다는 식당 측의 자화자찬이다.
식당 판매보다는 전국에 보내는 택배 영업이 주를 이루고 있다. 선물 포장된 다섯 마리에 택배비 포함하여 6만5,000원, 10마리 세트는 12만5,000원.
구여수와 신여수
여수시청이 있는 구 여천지역과 구 여수를 잇는 길은 크게 두 갈래다. 내륙 쪽 버스들이 다니는 길과 바닷가로 이어지는 길이다. 웅천지역을 지나 구 여수로 가는 길목 왼쪽에 한국화약 소유 대지가, 있으며 그 건너편엔 여수반도에서 가장 탁 트인 넓은 바다가 있다. 트레킹 코스로 개발하든지 아니면 대단위 리조트로 개발할 만한데, 웬일인지 방치되고 있다. 띄엄띄엄 바닷가 길을 둘러 가면 구 여수의 전통 항인 국동항이 나온다. 옛 여수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국동항엔 항상 낚싯배들이 수백 척 정박해있고 경매장에선 새벽마다 활발하게 경매가 이뤄진다. 바로 앞 경도엔 미래에셋이 경도 리조트 재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경도는 골프장과 함께 여름 한 철 먹거리인 하모(갯장어의 일본말)의 주산지이다. 경도와 고흥 일대의 하모를 최고의 갯장어로 꼽는다. 경도 안엔 하모를 회와 샤부샤부(일본말. 유비끼라고도 함)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들이 있다. 혹자는 일본사람들처럼 갯장어에 기름이 끼는 7월 이후엔 맛이 별로라고도 하고 혹자는 그때의 하모 맛이 일품이라고도 한다. 정답은 없고 각자 취향에 따르면 될 일이다.
자매식당 등 국동항의 맛집들
그러나 여름철이건 겨울철이건 바닷장어 요리를 꾸준히 하는 식당들이 여수에 많다. 특히 국동항 주변엔 갯장어를 통째로 끓여 내놓는 통장어탕 식당이 몇 곳 있다. 그중에서 여수 시민들 사이에서도 소문 난 자매식당을 찾았다.
장어를 잘라서 국 끓이는 게 아니라 통째로 넣어 끓인 후 손님상에 내와서 종업원이 국자로 장어를 으깨서 먹기 좋은 크기로 나눠준다. 된장 국물에 우거지를 넣어 장어 맛과 함께 시원하고 구수한 맛이 잘 어우러진다. 일반적으로는 토막 낸 장어를 숙주나물을 넣어 함께 끓여 내놓는다. 통장어탕 14000원, 장어 소금구이 2만 원을 받는다.
여수에 가장 많은 식당이 장어탕 식당과 돌게 간장게장 식당이다. 장어탕 식당은 수산시장 안, 시청 주변, 시내 곳곳에 있다. 그중 자매식당이 가장 생명력이 있다는 여수 지인들의 전언이다. 이 식당에서 밑반찬으로 내놓는 멍게 젓갈이 또 일품이다. 자꾸 더 달라는 손님이 늘어나 포장 판매를 시작했단다. 한 통(3kg)에 3만 5000 원, 택배비 4000원이란다.
여수의 수산시장
여수에는 수산시장이 몇 곳 있다. 수산시장, 특화시장, 교동시장, 선어시장. 그중 수산시장이 중앙시장 격이다. 몇 년 전에 이 시장에 큰불이 나서 시장이 완전히 전소했었다. 주변의 지원과 상인들의 복구 노력에 힘입어 업그레이드된 새 시장 모습으로 태어났다.
시장 내 수십 곳 되는 활어 판매대에서 펄펄 뛰는 생선을 잡는 활발한 모습은 장관이다. 생선 잡는 사람들의 정신 건강이 매우 좋다는 어느 보고서에 전폭적으로 공감하게 된다.
물새횟집 아지매. 수십 년간 온 가족이 이 업에 종사해왔단다. 종포공원 옆에 자그마한 건물도 소유하고 있다. 재빠르고 시원시원하게 생선을 잡고, 손님과 흥정도 시원시원하게 하며, 횟감은 그야말로 맛깔스럽게 썰어낸다. 전문가가 따로 없다. 일본 시장 상인들과 일 합을 겨루게 해봤으면 좋겠다. 여기서 회를 떠 가져갈 수도 있으나,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2층 식당으로 올라가 상차림 값으로 한 사람당 4,000원과 매운탕값 5,000원을 주고 식사를 한다. 서울의 가락시장, 노량진 시장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실비다. 생선 산지이니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하다. 세 명이 싱싱한 돔, 갑오징어, 농어, 삼치 등 각종 회를 남길 정도로 푸짐하게 먹고도 6만 원 미만을 냈다.
시내의 실비식당 ‘와사비’
게장 골목 소개는 생략한다. 여수의 전통적인 먹거리 중의 하나인 간장게장 식당들은 이제 시설과 메뉴에서 한 등급 더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대신 시내의 횟집 한 군데를 더 소개하고 여수의 맛집 소개를 마친다. 여서동 네거리 근처의 ‘와사비’식당. 옥호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름 때문에 최근 곤욕을 치렀단다. 얼마 전부터 보는 시선들이 좀 누그러지더란다.
옥호를 ‘고추냉이’로 바꿀 생각은? 이제 겨우 정착단계인데요... 이 식당은 문 연 지가 몇 해 되지 않았다. 6년 전께 문을 열자마자 여수에서 오래된 횟집들을 제치고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이유는 초간단. 남자 사장이 새벽에 바다에 나가 직접 생선을 잡아 오고 여수 주변에서 구하기 어려운 건 통영 등지로 달려가 구해와서 오후부터 바쁘게 회를 만든다. 혼자서 몇 사람 역할을 하는지도 모르게 몇 년을 일해 얼굴이 수척해졌을 정도다. 부인은 서비스 메뉴를 개발하고 상차림을 연구하는 한편 수시로 주방에 들어가 남편과 주방 보조 여인을 돕기도 한다. 이들의 노력은 상차림과 회접시에 그대로 반영된다. 이 식당도 갈치회, 삼치회가 일품이다. 가격도 비싸지 않다. 회 한 접시에 4만 원에서 6만 원이면 세 사람이 푸짐하게 즐길 수 있다.
맛집 몇 곳을 소개했지만, 여수의 장점은 어느 식당에 가든 다른 지방에 비해 만족할 확률이 높다는 점이다. 식당마다 자부심이 대단하고 음식에 들이는 정성이 손님들 눈에도 보일 정도다. 전통인지, 요즘의 트렌드인지는 알 수 없지만, 특히 엑스포 이후 시설과 함께 식당들의 자세가 확 달라졌다는 평가가 많다. 먹방과 인터넷에서 칭찬은 많이 받고 악평은 덜 받는 곳, 여수가 됐다.
오동도 입구의 일출
여수에서 일출을 보는 장소로는 돌산섬 일대를 많이 꼽는다. 그중에서도 섬 끄트머리의 향일암(向日庵)은 일출로 유명해진 곳이다. 정동진과 함께 일출 사진이 워낙 많이 나돌아다녀 우리는 다른 곳에서 일출 사진을 찍기로 했다. 여수 현지의 정보로는 요즘 오동도 입구의 일출이 장관이란다.
새벽에 일어나 이틀을 기다렸다. 해는 우리의 애를 태우면서, 햇살만 내려보내 고기잡이배들을 비춰줄 뿐이었다. 붉게 솟아오르는 태양 대신에 빛줄기만 담았다. 일정상 일출 장면 촬영을 포기하고 서울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철수하면서 여수 지인에게 일출 촬영을 간곡히 당부했다. 간곡히 간곡히 거듭 부탁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일출 사진이 메일로 왔다.
쌩큐 오 선생!
쌩큐 여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