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운을 타고나 이룰 것 다 이뤘는데도 탁구 천재 현정화의 눈매는 아직도 살아 있고 견고한 에너지를 방출 중이다. 시사평론가 이봉규의 강한 스매싱(?)과 날카로운 서브를 넣어도 그녀의 핑퐁 토크는 명불허전이었다. 역시 레전드와의 만남이었다.
용인시에 있는 ‘현정화 탁구교실’에 들어서서 그녀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분명 얼굴은 현정화가 맞는데 마치 고등학교 탁구선수가 훈련을 준비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비쩍 마른 체구에 얼굴은 조막만 하고 짧은 머리가 영락없는 고교생 이미지였다.
6~7명의 중·고생 탁구 유망주들이 그곳에서 현정화의 지도를 받기 위해 준비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문밖에서 보니 나이 오십인 현정화도 그 학생들과 또래처럼 보였다. 걱정도 되고 궁금하기도 해서 “왜 이리 말랐나?” 하고 물었더니 “나태한 걸 싫어한다. 많이 일하고 움직이다 보니까 살찔 시간이 없는 것 같다”고 대답하면서 건강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안심시킨다.
몸매도 몸매이지만 눈매도 아직 배고픈 선수처럼 살아 있었다. 탁구선수로 최고의 위치까지 올라갔고 지금도 부러울 것 없는 탁구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눈매가 살아 있는 것이 신기했다.
인터뷰하는 동안 한시도 흐트러짐 없이 목소리도 카랑카랑했다. 이 같은 눈매와 자세가 그녀를 만리장성의 벽을 깨고 세계 최고로 만든 원동력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이룰 거 다 이루고 나이도 오십쯤 되었으니 이젠 느슨해질 때도 되었건만 아직도 그녀는 견고한 힘을 유지하고 있다.
기러기 엄마, 독수리 엄마
현정화의 강직한 힘을 빼기 위해 한량 이봉규가 슬쩍 찔러봤다. “당시 현정화 선수는 실력이나 외모 등 지금의 김연아급 인기를 끌었는데 실감했나?” 그러자 담담한 대답이 돌아왔다. “재미없게 살았다. 탁구만 쳤다. 운동 잘하는 선수로 국민들이 인정해주는 줄만 알았다.” 현정화의 대답에 다시 꼬리를 물었다. “예쁜 얼굴에 인기 절정의 현정화에게 대시하는 남자가 없었나?” 급작스런 질문에 현정화는 몇 초간의 인터벌을 갖더니 “당시 선수촌에서 남자 상비군인 연습 파트너와 짜릿한 비밀 데이트를 했다”고 털어놨다.
다소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의 이봉규를 달래기라도 하듯 곧바로 “그 남자와 10년 후 결혼했다”고 마무리를 했다. 당시 다른 선수들은 몰랐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녀에게 아마 다 눈치 채고도 남았을 텐데 현정화 본인만 그 사실을 몰랐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그녀는 “그래봤자 탁구 잘 치면 그만이다”라며 당당한 표정이다.
중2 딸과 고2 아들을 둔 지금에 와서야 편하게 말하는 것이겠지만 당시 인기 절정의 현정화가 선수촌에서 몰래 데이트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007작전을 방불케 했으리라 짐작된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연애가 결실을 맺어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지금 두 아이는 미국에서도 유명한 명문 학군인 캘리포니아 얼바인에서 아빠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이른바 ‘기러기 엄마’인 셈이다.
현정화 본인은 ‘독수리 엄마’로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미국 가고 싶을 때 언제든지 갈수 있기 때문에 기러기가 아니라 독수리라는 해명이다.
남편은 미국에서 탁구 레슨을 하면서 두 아이를 돌보고 있다. 현정화 감독도 시합이 끝나면 무조건 미국으로 달려가 일주일 정도 머물며 가족들과 함께한다. 다행히 딸이 미국의 대입시험인 SAT 1600점 만점에 1500점이라는 높을 점수를 얻어 스탠포드대학교나 존스홉킨스 의대 진학을 희망하고 있다. “엄마 아빠가 운동선수 출신인데 왜 운동을 안 시켰나?” 하고 따지듯 물었더니, “일부러 운동을 안 시켰다. 운동은 너무 힘들어서”라고 말꼬리를 힘없이 흩뿌렸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아이들이 중간만 하고 살면서 행복하면 좋겠다”는 것. 즉 평범하게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본인이 훈련에 힘들었고 온 국민의 기대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해서 자식들에게는 그러한 고통을 물려주기 싫었을 것이다. 현정화는 “육체적 훈련보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더 견디기 힘들었다”고 실토했다.
태극마크에 대한 소중함을 안다
운동 얘기가 나온 김에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남북 단일팀 이야기로 넘어갔다.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구성에 대해 현정화는 결과적으로 단일팀은 선수들에게 나쁘지 않은 결정이었다고 했다.
“온 세계가 주목하는 올림픽에서 일생의 큰 경험과 기회가 됐을 것”이라고 단일팀을 경험해 본 선배로서 의견을 비췄다. 그런데 1991년 일본 지바 세계탁구선수권 대회는 사정이 좀 달랐다고 설명했다. 참가규정 인원이 5명인데 당시에는 이번 여자 하키 단일팀과 달리 국가별 참가 선수 인원을 늘려주지 않았다. 만약에 단일팀을 꾸리지 않았다면 “다른 남한 선수들이 출전 기회를 얻었을 테고 설령 금메달은 따지 못했어도 은메달이나 동메달은 딸 수 있지 않았을까”라며 과거를 회상했다.
그러면서도 “국가가 있어야 선수도 있고 국민도 있다”고 강조한다. “태극마크에 대한 소중함을 안다”고 부연 설명도 한다. 당시 같이 출전 못한 국가대표팀 동료에게 다소 미안한 마음도 있었겠지만 국가의 결정을 따르는 것이 대표선수의 당연한 의무였기에 복잡한 심경이었으리라 이해된다.
어쨌든 당시 현정화는 북한의 리분희와 함께 단일팀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으니 복 받은 선수임에 틀림없다. 본인도 “나는 정말 운을 타고난 운동선수”라고 겸손하게 인정했다.
천운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선수
현정화의 타고난 운은 사실 88서울올림픽이었다. 그때 탁구 종목이 처음으로 채택됐는데 그 대회를 위해 국가는 수년 전부터 어린 꿈나무를 육성시켰다. 그 선수들 중 한 명이 현정화였다. 당시 현정화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시대적 상황으로도 천운이라 할 만했다. 그때 그녀는 복식에서 양영자 선수와 함께 금메달을 땄다. “우리는 금메달 딸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복식에서 금메달을 따야 한다고 해서, 단식을 접고 복식 연습을 3년간 하루에 서너 시간씩 했다. 나중에는 눈만 쳐다봐도 언니가 뭘 원하는지 알 정도로 서로가 완벽하게 호흡이 잘 맞았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평창올림픽에서 아이스하키 단일팀이 화제가 되었다. 단일팀의 원조격인 현정화에게 탁구 남북 단일팀 결정으로 인한 당시의 심경이 어땠는지 물어봤다.
“사실 진짜 제 속마음은 ‘이거 왜 하지?’ 하는 마음이었다. 그렇지만 만들어져서 해야 하는 상황이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면 빨리 우리가 단합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했다. 또 나는 개인적으로도 성적을 잘 내는 걸 원하는 선수였기 때문에 서로 간에 합심해서 성적을 잘 낼 수 있도록 노력하자, 그런 마음으로 했다. 우리가 한 달간 합숙훈련을 하고 보름을 같이 시합해서 45일 정도 함께 지냈는데, 절대로 긴 시간이 아니었다. 양영자 선배랑 복식 3년을 준비한 것처럼 준비를 해도 메달을 딸까 말까였는데, 남북 단일팀이 한 달 만에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까 그런 의구심은 들었다. 그냥 결승만 올라가도 우리는 할 일을 다 하는 거라는 생각으로 시합을 했다. 북한의 에이스가 리분희이니까, 그 선수도 마찬가지 심경이었을 것이다. 나는 또 대한민국의 에이스이니까 책임감을 갖고 시합을 해야 한다,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시절을 되돌아보며 그녀는 차분하게 자신의 심경을 설명했다.
남북 단일팀과 리분희에 대한 추억
“북한의 에이스 리분희 선수가 간염으로 아팠다. 그래서 훈련을 제대로 소화 못했기 때문에 예선전부터 계속 리그를 치러야 하는 부담감이 고스란히 나한테 왔다. 북한 선수가 한 명 나가고 내가 나가서 함께 힘을 합쳐 해야 하는 경기여서 정말 부담스러웠다.” 현정화로서는 리분희 선수가 컨디션이 나쁜 걸 아니까 그래서 더 파이팅을 하고 또 집중했을 것이다.
그 결과 만리장성의 벽을 남북 단일팀으로 넘을 수 있었다. 현정화와 리분희는 서울올림픽 때 만나서 1993년 세계선수권대회 때 한 번 보고, 그 후로 25년 동안 한 번도 못 봤다. 이번 평창 패럴림픽 때 리분희가 올지도 모른다는 기사도 있었다. 이에 관해 현정화는 “얼마 전에 리분희가 인터뷰한 걸 봤는데, 현정화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중 한 명이라고 얘기해서 사실 감동받았다”고 말한다. 그 표정을 보니 온 마음을 다해 리분희와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는 눈치다.
평창 패럴림픽 개막식이 3월 9일인데 이 잡지가 나간 후 아마 둘이서 만나는 장면이 각 언론사 톱뉴스로 실릴지도 모르겠다. 25년 만의 현정화와 리분희가 다시 만날 때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또 어떤 옷을 입고 TV 화면에 나타날지 몹시 궁금하다. 천운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치열한 노력을 해야 한다. 천운을 타고난 현정화의 여정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북한 핵 개발을 소재로 한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1993)로 밀리언셀러에 이름을 올린 김진명(金辰明·60). 그 후 ‘한반도’, ‘제3의 시나리오’, ‘킹 메이커’, ‘사드’ 등을 펴내며 한국의 정치·외교·안보 문제에 촉각을 내세웠던 그가 이번엔 ‘미중전쟁’으로 돌아왔다.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에 올랐지만, 묵직한 주제인 만큼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고. 그는 정말 두려운 건 북핵도, 트럼프의 불가측성도, 중국의 경제 보복도 아닌,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않고 눈치만 살피는 우리의 모습이라 강조하며 용기와 결단 없이 해결할 수 있는 난제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KAL 007기 피격사건을 다룬 소설 ‘예언’ 이후 5개월 만에 ‘미중전쟁’이 나왔다. 1·2권으로 나뉘어 총 600페이지에 달하는 장편을 발 빠르게 내놓은 데에는 김진명 작가의 급급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게다가 ‘미중전쟁’이라는 단도직입적인 제목까지 달고, 그가 독자들에게 서둘러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미국은 원산 앞바다까지 가공할 위력의 B-1B 전략폭격기를 들이대고 북한은 워싱턴까지 날아가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발사하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북핵을 둘러싸고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의 이해관계가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데도 우리는 그저 눈치만 보고 있어요. 분명한 입장 없이 그들의 비위만 맞추다가는 구한말 때와 다름없는 상황이 벌어질 거라 예상해요. 그럼 현재의 문제를 어떻게 타개할 것이냐, 이에 대한 솔루션을 하루빨리 이야기하려고 급히 쓰게 됐어요. ‘미중전쟁’이라는 제목은 단순히 남북의 문제만이 아니라 시야를 더 넓히자는 뜻에서 붙인 거고요.”
나라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소설을 썼다는 김진명의 말에 작가로서의 남다른 사명감이 느껴졌다. 소설가이지만 작품에 대한 문학적 해석보다는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는 그의 모습이 대중에겐 더욱 익숙할 것이다. 혹시 그런 자신의 이미지로 인해 작품활동에 불편함은 없는지 묻자 “전혀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해외에서는 나라의 정치학을 세우거나 정책을 마련할 때 톰 클랜시 같은 전문 작가들의 작품을 참고하잖아요. 그만큼 글로써 사회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작가는 어떤 전문가나 정치인보다 더 해박하고, 예지력이 있어야 해요. 웬만한 식견 가지고는 어림없죠. 그런데 한국 사회는 소설의 영역을 너무 좁혀놨고, 작가들은 그 좁은 세계에 갇혀 있어요. 작가는 자기만의 영역을 벗어나 사회 문제에 대해 방향성을 제시할 정도의 세계관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한국에는 그런 작가가 얼마 없기 때문에 내가 좀 특별하고 이상해 보이는 거죠.”
허용된 거짓이 요구하는 소명
김진명의 소설 속 캐릭터는 대부분 실존 인물이며 실명을 그대로 사용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 한 가지 특징은 그가 창조한 주인공은 대개 비범하고 전지전능한 인물이라는 것. ‘미중전쟁’의 주인공 김인철 역시 세계은행 법무팀 조사요원으로 문재인, 블라디미르 푸틴, 시진핑 등 국가 정상들과의 접촉이 가능할 정도로 특출한 면모를 지녔다. 때론 비현실적인 인물 설정에 대해 비평하는 독자들이 있는데, 그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덧붙였다.
“작품마다 주인공이 한결같이 천재적이고 전지전능하다는 것에 불만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죠. 그러나 소설 속에서 그들은 세계 최고 권력자를 상대로 아주 내밀한 비밀과 약점을 캐내는데 그걸 보통 사람이 해낸다면 더 비현실적이지 않을까요? 사실 내가 쓰는 소설은 일반 소설과 다르게 주인공이 큰 의미는 없어요. 주인공은 숨겨져 있는 무서운 비밀을 밝히는 한 도구일 뿐이지, 그의 내면이나 감정에 의해 어떤 일이 벌어지지는 않거든요.”
소설 속 주인공들은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동시에 김 작가의 주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한다. 혹시 소설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자기 생각을 펼치고 싶지 않은지 묻자 그는 “소설이 가장 편하다”고 대답했다.
“사회에서는 사람들의 이해가 부딪치기 때문에 법으로 엄격히 규제를 하죠. 조금만 이상하면 정보보호법이나 명예훼손에 걸려 법의 영역을 뚫고 진실을 파헤치는 건 굉장히 어려워요. 그러니 대중은 민감하고 중요한 정보에 접촉할 방법이 없죠. 언론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지만, 진실을 드러내려 하면 그들 내부에서 굉장히 겁을 내고, 역시 법으로 제재를 받을 테니 알맹이는 감춰진다고 봐요. 그런데 소설은 거짓말을 허용하잖아요. 단순한 사실의 나열로는 결코 알 수 없는 진실을 드러낼 수 있죠. 물론 거짓말을 허용하는 대신 소설가에게는 그만큼 소명의식이 요구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방식으로 이야기하잖아요. 나는 작가이고, 그런 측면에서 허구를 통해 진실을 끌어내는 인류 최고의 장치는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고구려 정신의 회복이 필요한 때
‘미중전쟁’의 또 다른 주인공 최이지는 북핵 문제, 중소기업 인재난 등에 대해 잡지에 글을 쓰고 대통령에게 제언하는 등 김진명의 생각을 일목요연하게 전달하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이번 소설을 통해 북핵 문제 외에도 한국 경제난, 미래 먹거리, 인구절벽 등의 고민을 공유하고 싶었다고 한다. 아울러 한국 사회의 큰 문제 중 하나로 경제 지표는 좋은 데 반해 그 돈이 소수에게 몰리는 현상을 꼽았다. 대기업이나 부자들이 돈을 내놓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 이에 관해 중장년층의 인식 전환도 필요한 시점이라 역설했다.
“우리 세대는 학교에서 저축을 장려했어요. 어렸을 때 배운 사고에서 멈춰 돈을 쌓아두고 쓸 줄 모르죠. 그게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굉장히 장애가 돼요. 자본주의는 수요만 있으면 잘 돌아가는데 이 수요를 막고 있는 거죠. 저축으로 부자가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부동산 투기예요. 나눠야 할 자본을 나만 잘살자고 쥐고 있으면 젊은이들은 어떡해요. 취직이 안 되면 장사나 사업을 해야 하는데 비싼 땅값에 임대료에 집도 마련 못하니 결혼, 육아는 엄두를 못 내죠. 우리 세대는 노력해서 벌은 거고 애들은 노력을 안 해서 못 벌었다는 인식도 문제예요. 과거야 한창 경제가 성장할 때니까 가능했죠. 현 상황을 인식하고 젊은이들 처지에서 생각해봤으면 해요. 얘들아, 안심하고 결혼해서 애 낳아라, 우리가 키워주마, 이런 마음의 유대가 없으면 아무리 지원금을 쏟아 부어도 우리에게 오는 인구절벽을 피할 수 없다고 봐요.”
김진명은 세대뿐만 아니라 친미와 친중, 보수와 진보 등 한국 사회 면면이 다 갈라져 있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를 대표할 가치관이 없다는 것에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며 그는 고구려 정신을 강조했다.
“옳다 그르다는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생각해요. 옳고 그름은 시시각각 바뀌기 때문에 자기가 맞다고 끝까지 주장하는 사람은 한심한 거예요. 예를 들어 택시가 교통질서를 흐린다는 이유로 택시 정류장을 만든다고 합시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지만, 한편으로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편히 탈 수 있는 택시의 장점이 사라지는 거잖아요. 이런 간단한 문제에도 입장이 나뉘고, 정반대 의견도 다 일리가 있는데, 하물며 나라의 정책이나 외교, 안보 문제는 얼마나 생각이 많이 갈리겠어요. 우리 사회는 나는 옳다, 너는 틀리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너무 많아요. 고구려는 아무리 파가 갈려서 죽기 살기로 싸우다가도 외적이 침입하면 완전히 대동단결했거든요. 고구려 700년 역사가 가능했던 이유죠.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가 고구려 정신을 회복하길 바랍니다.”
필자는 평소 백팩을 메고 다닌다. 캐주얼 의상이든 정장이든 항상 백팩을 멘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일상적인 패션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백팩이 아직 낯선 모양이다. 백팩을 애용하는 이유는 양손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양손이 자유로우면 위기 상황에 민첩하게 대처할 수 있어 좋다. 원래는 댄스 하는 날 댄스용 신발과 의상을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백팩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필자의 백팩은 큰 편이라 쇼핑 물건을 담을 때도 편리하다. 백팩은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재질이나 크기도 중요하다. 한때는 어깨에 메는 숄더백을 주로 메고 다녔으나 숄더백은 한쪽에 메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한쪽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007 백’이라 불리는 서류가방도 마찬가지다. 신체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다. 게다가 내용물을 넣을 공간이 부족하다. 서류가방에 수박을 넣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백팩은 다르다. 내용물의 형태에 관계없이 담을 수 있어 편리하다.
필자의 백팩은 명품 가방들의 역사를 볼 때 원조 백팩에서 진화된 형태의 디자인이다. 인조 가죽으로 만들었고 윗부분을 끈으로 조인 뒤 뚜껑으로 덮게 되어 있다. 클래식한 분위기를 풍긴다. 시중에 나와 있는 백팩의 디자인을 보면 99%가 지퍼 형태로 되어 있다. 그래야 가방 안의 내용물이 빠져 나오지 않을 거라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그러나 상단이 뚜껑으로 되어 있어도 백팩을 뒤집지 않는 한 중력의 작용으로 내용물이 빠져 나올 일은 없다. 지퍼로 되어 있는 가방은 열고 닫을 때 양손을 써야 한다. 한 손으로는 가방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지퍼 고리를 잡고 당겨야 열리는 것이다. 그러나 뚜껑으로 디자인된 백팩은 집어넣기도 빼기도 쉽다. 또한 옆쪽으로 지퍼가 달려 있어 아래쪽에 있는 내용물도 쉽게 꺼낼 수 있다.
필자가 메고 다니는 백팩의 단점은 인조 가죽이라 수명이 짧다는 데 있다. 인조 가죽은 늘어나기도 하고 습도 때문에 오래 쓰면 껍질이 벗겨진다. 발트 연안에 있는 라트비아로 여행을 갔을 때 같은 모양의 가죽 백팩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가격을 물어봤더니 100달러를 불렀다. 그러나 가죽 소재가 너무 무거워 결국 사지 않았다. 백팩은 디자인도 실용적이어야 한다. 몸통 바깥쪽으로 사이드포켓이 있어야 좋다. 한쪽에는 물병을 넣어 다니고 한쪽에는 삼단 우산을 넣고 다니면 편리하다. 생수병과 삼단 우산이 들어갈 만큼 깊이도 있어야 한다. 그 외의 잡동사니는 정면의 사이드포켓에 넣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으면 곤란하다. 몸통에 온갖 내용물을 다 넣으면 찾기가 어렵다. 수납공간이 따로 없어 마구 뒤섞여버리는 것이다. 물건이 섞이지 않을까 우려되면 부직포로 된 별도의 작은 가방을 넣어가지고 다닌다. 필자의 백팩은 디자인 면에서는 명품 흉내를 내고 있지만, 실용적인 면에서는 부족한 게 많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해외여행을 갈 때도 같은 백팩을 멘다. 어지간한 필수품은 백팩 안에 다 들어간다. 해외여행 때는 세면도구와 양말, 여벌의 옷가지 정도가 추가될 뿐이다. 한번은 초봄에 서울 근교에 갈 일이 있었는데 날씨가 추웠다. 눈도 왔다. 일행 중 추위를 유난히 타는 사람이 있어 우산도 꺼내주고 장갑도 꺼내줬다. 가볍고 부피도 크지 않아 항상 가지고 다니는 바람막이도 꺼내줬다. 필자는 모자를 꺼내 썼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도 잡아주고 눈발도 견딜 수 있게 해줬다. 사람들은 백팩 안에 없는 게 없다며 놀라워했다. 다만, 견딜 수 있는 무게가 3kg 정도인데 더 무거울 경우 어깨 근육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주의는 들었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기 전해인 1996년 4월, 필자는 외국인 친구 4명과 중국 구이린(桂林)을 여행했다. 떠나기 전 한국 친구들은 찡그린 표정으로 한마디씩 하며 말렸다. “공산주의 국가에 외국인들과? 꼭 가야겠니?” “하여튼 못 말려!.” 필자도 내심 걱정이 되었지만 ‘기회는 아무 때나 오는 게 아니야. 왔을 때 잡아야지!’ 이렇게 다짐하며 여행을 강행했다.
그림으로만 보던 구이린의 풍광 중에도 가장 기대했던 곳은 리강(漓江)이다. 둥그런 봉우리들과 어우러진 유장한 리강은 명물허전이었다. 일행는 두말없이 남편이 운전하고 부인이 가이드인 배에 올랐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리강은 주변에 둥그렇고 뭉뚝한 산봉우리들과 흐드러진 대나무 숲, 뗏목, 물소와 노는 아이들로 더없이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풍경에 젖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사이 점심시간이 되었다. 일행은 그곳의 음식 사정이 변변치 않은 것을 미리 알고 한국에서 식사 대용품으로 각종 과자를 준비해갔다. 현지 가이드에게도 조금 나누어 주었다. 선장인 남편에게도 과자를 주고 돌아온 오지랖 넓은 가이드는 우리에게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 밥을 짓고 있다는데 조금 드실래요?” 원래 그날 뱃삯에는 점심이 포함되지 않았다. 우리의 친절에 감동한 가이드가 돌발적으로 뱉은 말이었다. 순간 일행 사이에서 알 수 없는 눈빛이 재빠르게 오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곧바로 그들은 대부분 배부르다며 손사래를 쳤다.
잠깐 어찌할 바를 모르던 필자와 미국 친구 이베트는 실망하는 가이드의 눈빛이 안쓰러워 “조금만 주세요.”라고 말해 버렸다. 그러자 그는 흥겨운 뒷모습으로 배 뒷전에 있는 문을 나섰다. 가이드가 사라지자마자 친구들이 이벳과 내게 개미 소리로 꾸짖었다.
“너희들 어찌하려고 그래. 화장실 가며 저 여자가 그 더러운 강물로 밥하는 것 봤어!” 배의 화장실은 하발통이었다. 강물과 그대로 연결된 그냥 뚫린 구멍만 있었다. ‘아~뿔~싸~!!!’
곧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 위에 볶은 돼지고기와 채소를 얹은 점심이 가이드의 상냥한 미소와 함께 우리에게 건네졌다. 이번에도 그가 나가자 린다가 긴박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와 요꼬는 배 뒤편으로 간 가이드를 살피고 사다꼬는 뱃머리의 선장을 망봐. 그동안 너희는 밥을 강물로 버리는 거야. 할 수 있지?” 필자와 이베트는 갑자기 특명을 받은 007대원이 되었다.
“이때야 미령아! 하나 둘 셋에 버려!” “하나, 둘, 셋!” 후딱 잘 처리한 이베트와 달리 필자는 긴장되어 손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밥을 버리려다 그릇까지 던질까 봐 걱정되었다. 떨리는 손으로 겨우 밥을 버리자 필자의 엉성한 태도를 눈치 챘는지 이베트가 한마디 덧붙였다. “미령아 뱃전을 다시 봐. 혹시 밥이 떨어지다 묻었나······.”
점검에 들어간 필자는 뱃전에 묻은 여러 개의 밥알을 발견했다. 들킬까 봐 속을 태우며 나는 휴지로 창 넘어 뱃전을 닦기 바빴다. 웃음을 참으며 요꼬는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다시 온 가이드에게 이베트와 필자는 감사의 말과 함께 여유 있게 웃으며 빈 밥그릇을 건넸다. 가이드도 흐뭇한 미소로 답했다. 일행은 007작전을 완벽히 해낸 정보 요원처럼 자랑스러웠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인 구이린이지만, 수교 직후 가로등도 없이 어두컴컴한 공산주의 중국의 시골에서 필자가 거둔 처음이자 마지막 큰 업적으로 남아 있다.
그리스는 아름다운 곳이 많은 나라다. 아테네 거리에서는 여신이 금방 환생한 듯한 아리따운 여성들이 활보한다. 특히 그리스 여행의 백미는 ‘섬’ 여행이다. 200개의 유인도 중에서도 국내에 가장 많이 알려진 곳은 ‘산토리니’다. 그곳뿐 아니라 꼭 가봐야 할 곳은 ‘메테오라 수도원’이다.
그 아름답고 멋진 풍경은 시댁 어른들과 함께 떠난다 해도 모든 스트레스를 다 감싸 안아줄 것이다.
글·사진 이신화(on the camino의 저자, www.sinhwada.com)
화산섬 보트 투어는 유용한 패키지
TV 프로그램 에 소개되면서 광고 시너지 효과를 톡톡히 본 곳이 그리스다. 그리스의 수많은 여행지 중에서도 한국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곳은 산토리니(Santorini) 섬이다. 특히 한국 사람들의 신혼여행지로 큰 인기를 누리지만 이 섬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어느 누구하고 동행하더라도 상관없다. 단언컨대 ‘묵은 시름’이 많은 사람들이 동행해도 그 아름다운 풍치에 반해 스트레스를 다 녹여줄 것이다.
산토리니는 에게해 남쪽 그리스령 키클라데스 제도(Kykladhes Is.) 남쪽 끝에 있다. 아테네에서 235㎞ 떨어져 있으며 중심 마을인 피라(Fira)를 포함해 13개의 마을이 있다. 보통 사람들이 산토리니라고 부르지만 정식 명칭은 티라(Thira) 섬. 티라는 크레타 문명과 미케네 문명의 중간에 위치해서 두 문명과 교류하며 발전했던 키클라데스 문명의 중심지였다. 기원전 1500년경, 이곳에서 대규모 화산폭발이 일어났고 이후 한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다. 1956년에도 화산폭발로 피라와 이아(Oia) 마을이 파괴된 적이 있다. 한때는 원형 섬이었는데 초승달 모양으로 변했고 잘려나간 절벽 위에 하얀 집들이 들어섰다.
산토리니의 중심 도시는 피라다. 하지만 여행이란 ‘첫인상’이 참으로 중요하다. 피라 마을이 산토리니의 중심지라 해도 섬 끝의 이아 마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움이 뒤떨어진다. 이럴 때는 먼저 ‘화산섬 보트 투어(Volcano Tour)’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부분 마을 여행사에서 티켓을 판매하는데 1일 코스를 이용하면 된다. 아티니오스 신항구나 피론(Firon) 구항구에서 배에 오르게 된다. 배는 가장 먼저 산토리니 서쪽에 있는 네아 카메니(Nea Kameni)와 팔레아 카메니를 간다. 나무 하나 없는 허허벌판의 척박한 화산섬의 돌멩이에는 아직도 지열이 남아 있다. 그다음 코스는 바닷속에서 용출되는 온천수에서 수영을 즐기는 것이다. 40도가 넘는 고온이다. 이어서 유인도인 티라시아(Thirasia) 섬에 다다른다. 배가 없으면 접근할 수 없는 작은 섬이지만 천혜의 매력을 갖춘 곳이다. 이 마을에서는 맛있는 해산물 요리를 먹거나 마을까지 올라서 멋진 전경 사진을 찍으면 된다. 이때 당나귀(동키)를 타보는 것도 재미가 쏠쏠하다. 화산섬 보트는 이아 마을을 잇는 항구에서 내릴 사람에게 선택권을 준다. 대신 저녁 8시에는 셔틀버스가 운행되고 있어서 숙소로 이동하는 데 전혀 부담이 없다.
온통 캘린더 사진을 만들 수 있는 곳, 이아(Oia) 마을
이아 마을을 산토리니 첫 마을로 보게 된다면 ‘아, 정말 산토리니에 오길 잘했군’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어느 곳에서나 내 몸을 조금만 움직여서 셔터를 누르면 캘린더 사진이 된다. 깎아지른 절벽 위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하얀색 집들. 미로처럼 나있는 좁은 길목에 피어난, 화사한 부겐빌레아 꽃이 눈 시리다. 앙증맞고 귀여운 숍들이 열지어 이어지는 곳. 지붕이 파란 곳은 그리스 정교회의 돔 지붕뿐이다. 하얀 교회의 파란색 돔과 에게해의 푸른 물빛이 어우러진 풍경에 넋을 잃는다. 발길은 내내 하늘을 날아다니는 듯하다.
그나저나 이 섬의 건물들은 왜 하얀색일까? 건물 색채에 대한 사람들의 설명은 제각각이다. 외세에 대한 저항의 의미가 있다는 얘기가 많다. 그리스가 외세에 점령당했을 때 국기 좌상단의 십자가 색을 따 외벽을 하얗게 칠했고, 파랑 바탕색으로 창틀을 장식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산토리니를 빛나게 하는 곳은 이아 마을이고 석양시간이 되면 굴라스 성채 쪽으로 몰려드는 인파로 인산인해가 된다.
이아 마을을 먼저 보고 난 후 피라 마을을 찾아보자. 피라 마을은 산토리니의 명동 격으로 테오토코플루(Theotokopoulou) 광장이 중심이다. 골목을 구경하거나 교회나 수도원, 고고학 박물관 등을 보면 된다. 또 절벽 아래 항구까지 566개의 지그재그 계단 길이 놓여 있는데 당나귀나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내릴 수 있다. 또 피라에서 10분 거리에 이메로비글리(Imerovigli) 마을이 있다. 산토리니에서 유일하게 언덕 위에 지어진 성채 마을로 스카로스(Skaros) 성까지 걸어보자.
렌터카를 이용한다면 동쪽 해변의 블랙, 레드, 화이트 비치를 따라 해안 드라이브를 즐겨보자. 블랙 비치라고 불리는 ‘카마리(Kamari)’는 해변 길이가 1㎞가 넘는 산토리니 대표 해변으로, 별칭처럼 온통 검은빛의 모래가 깔려 있다. 카마리 비치 인근에는 고대 티라 유적지가 있는데 메사 보우노 봉우리(369m) 꼭대기까지 트레킹하면 된다. 또 페리사(Perissa) 해변 근처에는 워터파크가 있다. 피라의 남단 아크로티리(Akrotiri)에는 선사 유적지가 있다. 에게해에서 발견된 선사시대 유적지 가운데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이곳에는 붉은 퇴적층이 침식되면서 만들어진 레드 비치와 화이트 비치가 있다.
기암 위에 세워진 수도원 6곳 메테오라(Meteora)
그리스 여행 중에서 메테오라를 빼놓는다면 여행의 재미 하나를 잃어버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테오라는 그리스어로 ‘공중에 떠 있다’라는 뜻으로 ‘하늘의 기둥(columns of the sky)’이라고 불리는 지역이다. 유네스코는 이곳의 기묘한 자연경관과 경이로운 종교 건축물의 가치를 인정해 1988년 세계복합유산으로 지정했다. 칼람바카(Kalambaka) 마을에 도착하면 우선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마을 뒤로 거대한 암산이 산봉우리처럼 연이어진다. 400m 이상의 바위 봉우리들은 테살리아(Thessalia) 평원에 있는 페네아스(Peneas) 계곡과 칼람바카라는 작은 도시를 에워싸고 있다. 이 봉우리들은 약 6000년 전, 강에서 원추형으로 나타났다가 지진 활동으로 변형되면서 생긴 것으로 조사되었다. 메테오라의 기암들은 사암과 역암이 강물에 의해 침식되어 생겨난 거대한 암산이다. 그것보다 더 강렬한 것은 기암 위에 지어진 수도원이다.
그나저나 어떻게 기암 봉우리에 건물을 지었을까? 이곳은 11세기부터 수도사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정치가 상당히 불안했던 14세기에 테살리아의 수도원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봉우리 위에 건축된 것이다. 성 아타나시우스가 최초로 수도원을 세웠다고 한다. 전성기인 16세기에는 20여 개의 수도원이 있었다. 현재는 수도원 5곳과 수녀원 1곳이 남아 있는데, 2차 세계대전때 파손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최초로 창건되고 가장 큰 대메테오라 수도원, 바를라암 수도원, 암벽에 붙어 있는 모습인 로사노 수도원, 성 니콜라스 아나파우사스 수도원, 가장 올라가기 힘든 트리니티 수도원(007시리즈 의 로케이션), 성 스테파노 수녀원 등이다. 현재 수도원에는 수사와 수녀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관광객들의 방문이 제한된 범위에서 허용된다.
바위의 평균 높이는 300m, 가장 높은 것은 550m나 된다. 좁은 바위 꼭대기에 아찔하게 서 있는가 하면, 절벽 옆에 붙어 있는 형상이기도 하다. 분명코 바위 위에서 수도원을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아 저곳으로 훨훨 날아보고 싶다’고 말이다.
Travel Tip!
항공편 한국에서 그리스 직항편은 없다. 프랑크푸르트, 파리, 로마, 이스탄불, 두바이 등을 경유해 아테네로 들어가면 된다. 많은 이들이 터키 여행과 함께 그리스를 선택한다. 터키항공을 이용해 이스탄불을 거쳐 그리스 아테네로 들어간다. 인천~이스탄불 구간은 주 11회, 이스탄불~아테네 구간은 주 42회 운항한다.
음식정보 그리스의 일반 식당인 타베르나(Taverna)가 있다. 전통 음식으로는 수블라키(Souvlaki), 게미스타(Gemista), 무사카(Moussaka), 기로스(Gyro, 기로, 자이로, 지로스라고도 함) 등을 꼽는다. 수블라키는 흔한 꼬치구이라 말할 수 있다. 게미스타는 피망 등 야채에 고기와 밥을 넣어 만든 것으로 동양인 입맛에 잘 맞는다. 무사카는 야채와 고기를 볶아 화이트소스를 뿌려서 구운 것. 기로스는 피타 빵(Pita bread)에 바삭하게 구워진 고기를 잘라 넣고 소스, 야채를 넣어 케밥처럼 만든 요리다. 또 슈퍼 등지에서 간단하게 사 먹을 수 있는 돌마데스(Dolmades), 혹은 돌마스(Dolmas)가 있다. 일명 ‘포도잎 꼬마 쌈밥’으로 간단하게 요기하기에 좋다.
전통 술 그리스의 국민 술이라 일컬어지는 우조(Ouzo)와 메탁사(Metaxa)가 있다. 2006년부터 오직 그리스에서 생산되는 ‘우조’는 40도 이상의 독한 술로 미틸리니에서는 해마다 축제를 연다. 포도+아네스씨+각종 허브로 만든 이 술은 문어요리를 안주 삼아 함께 마신다.
숙박정보 트립어드바이저(www.tripadvisor.co.kr) 사이트에서 순위를 확인하면 숙박 전문 인터넷 사이트로 연계가 가능하다. 가족 인원수가 많다면 메테오라에서 캠핑장을 이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통화정보 유로 사용
사용 전압 표준 전압 220V, 50㎐를 사용
인터넷 정보 대부분의 식당이나 숙소에서 인터넷이 잘된다.
치안정보 그리스는 비교적 치안이 좋은 편이다. 하지만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지하철역 등에서는 날치기나 소매치기 등을 유의해야 한다.
기타 여행지 미코노스, 델로스, 낙소스 섬을 비롯해 희랍인 조르바의 배경이 되었던 크레타 섬 여행도 해봄직하다. 그 외 델피, 테살로니키, 올림피아, 칼라마타, 코린토스, 티바스 등 갈 곳은 너무나 많다. 아테네 시내와 수니온 곶 여행도 좋다.
불현듯 옛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좋았을 때가 생각나면 크게 문제 될 게 없겠지만 아쉽게도 안타까운 것들이 대부분이다. 하지 않았어야 할 말들, 해야 했지만 하지 못한 행동들, 만나지 말아야 했을 사람들, 겪지 않아도 좋았을 경험들….
무심결에 실수하거나 다분히 고의로 악행을 저지르는 과거의 나와 머릿속에서 마주칠 때마다, 또는 내게 그렇게 하는 다른 누군가와 마주칠 때마다 고개를 세차게 가로젓는다. 반성보다는 후회를 먼저 하는 것이, 그래서 곱씹어서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작심하기보다는 그저 떨쳐버리려 하는 것이 나라는 용렬한 인간의 한심한 습성이다.
저마다 삶의 무게는 다르다, 트라우마도 다르다
요즘 부쩍 늘어난 그런 현상을 정신과 의사인 친구에게 ‘트라우마’라는 단어로 설명했더니, 대뜸 용어 정리부터 해주었다. 트라우마(trauma)는 옛날 그리스말로 ‘상처’를 뜻하는 단어라고, 그러므로 내가 의도한 뜻으로 쓰려면 앞에 ‘정신적’이라는 말을 붙여야 좀 더 옳다고, 트라우마가 ‘심적 외상’이라는 뜻으로 곧장 쓰이는 분야는 정신의학과밖에 없다고. 누가 이과 출신 아니랄까봐 자못 까다롭다.
그러면서 큰 인심 쓰듯 걱정 말라고 했다. 후회와 미련은 누구나 갖고 살아간다면서 그 정도는 정신적 외상 축에도 끼지 못한다고 했다. 하긴 11월 13일 프랑스 파리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거나 끔찍한 테러를 가까이에서 경험한 사람들에 비하면 나의 고민은 차라리 사치스럽다.
친구는 그러면서도 당부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정 견디지 못할 정도면 언제든 병원에 찾아오라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실은 거의 빠짐없이 과거 자신이 한 일이나 겪은 일 때문에 고통 받는다. 그렇게 되는 과정을 의학적으로 설명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우리 뇌의 변연계에 존재하는 편도와 해마라는 두 부분의 구실에 대해 안다면 이야기를 풀어내기가 아주 쉬워진다.
편도와 해마는 외부에서 들어온 정보를 처리하고 저장하는 곳이다. 쉽게 말해 편도는 무의식, 해마는 의식과 연관된 반응과 기억을 담당한다. 예를 들어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라는’ 심리 상태는 편도 때문이다. 해마는 그 뒤 자라가 아니라 솥뚜껑이었다면서 놀란 가슴 진정시키는 몫을 떠맡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이 끝나고 편도와 해마는 당시의 경험과 감정을 각각 나눠 저장한다.
문제는 정신적 트라우마가 될 정도로 격렬한 경험을 하게 되면 편도와 해마가 제 할 일을 제대로 가려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노르에피네프린이 급증하고 세로토닌은 급감하는, 나로서는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을 생화학적 과정을 거치면서 편도의 힘이 지나치게 세지고 해마의 힘이 지나치게 약해진다.
전에 없이 활발해진 편도는 조그만 자극에 시도 때도 없이 그때 그 기억을 끄집어낸다. 세상에서 부지런한 바보처럼 해로운 것이 없다는데, 해마가 바로 그런 ‘부지런한 바보’가 되는 것이다. 정신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라는 마음의 병은 바로 그 때문에 생겨난다.
이 어려운 이름의 정신질환은 창작물, 그 가운데에서도 영화, 그 가운데에서도 스릴러 장르에 애용된다.
영화 속 트라우마의 두 얼굴
어떤 영화의 악당이 지나치게 잔혹하다면 십중팔구 이 병을 앓고 있다. 영화에는 플래시백이란 편집 기법이 있다. 우리말로 풀어보면 ‘과거 회상 장면’이다. 현재 장면과 구별되게 촬영되거나 알기 쉽게 흑백 또는 세피아 톤으로 처리되곤 한다. 악당이 눈을 크게 뜨고 인상을 푹 쓰면서 천연색 영상이 세피아 톤으로 바뀐다면 ‘어릴 적 나쁜 기억이 등장하겠군’ 하면 된다.
악당만이 아니다. 배트맨 같은 슈퍼히어로 역시 부모가 흉탄에 죽음을 맞이한 끔찍한 기억과 어릴 때 우물에 갇힌 폐쇄 공포의 기억 때문에 정체성에 혼란을 겪으며 밤낮으로 브루스 웨인과 박쥐 사나이라는 두 얼굴로 살아간다.
007 시리즈의 신작이 개봉돼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데, 그 능글맞은 제임스 본드조차도 실은 어릴 때의 기억 때문에 정신적으로 고통 받는 것으로 설정돼 있다. 전작 에서 제임스 본드의 어린 시절을 지켜본 킨케이드(앨버트 피니)는 부모가 죽을 때 어린 제임스가 밀실에 사흘 동안 갇혀 있었다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나왔을 때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었지.”
꼬마가 더 이상 꼬마가 아니었다니, 제임스 본드의 해마 역시도 비정상적으로 활발해진 게 틀림없다. 부모의 비극적 죽음이라는 처절한 경험과 폐쇄 공포라는 극단적 경험을 한꺼번에 치른 이후에.
스스로 진단하는 기준이 있다
얼마나 힘들어야 힘든 것일까? 바보 같은 해마가 얼마나 부지런해져야 ‘마음의 병’이라고 부를 수준일까?
이런 질문을 하면 일반적으로 의사들은 ‘생활하기 힘들 정도면 전문의 상담을 받아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좀 젠체하는 의사라면 미국정신의학회의 에 실려 있는 정신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진단기준을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말이 나왔으니 그곳에 실린 진단기준이라는 녀석을 써보기는 하겠는데, 과히 기대는 않는 게 좋겠다. 문장이 너무 까다로워서 쉽게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르니까.
거기에 따르면 이 병에 걸리려면 이런 경험을 해야 한다. ‘실제적 죽음 또는 죽음의 위협에 대한 사건들 또는 심한 부상, 자신과 다른 사람의 신체적 온전성에 대한 위협을 경험, 목격하거나 직접 직면한 적이 한 번 또는 여러 번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뒤 ‘강한 두려움, 무력감 또는 공포를 포함한 감정’을 느껴야 한다.
이 정신없는 진단기준은 심지어 자주 바뀌기까지 한다. 1980년에 처음 정해진 뒤로 벌써 다섯 번 이상 고쳐졌다는 것이다. 정신의학자들 사이에서 기준에 대한 연구와 주장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란다.
과거의 극심한 경험 탓에 트라우마가 생겨 복잡하고 골치 아픈 게 병적으로 좋다면 또 몰라도, 미국정신의학회의 진단기준 따위는 그냥 잊도록 하자. 다행히 미국정신의학회도 자신들의 기준이 좀 심란한 줄은 알았는지 일반 사람들이 스스로 진단할 수 있는 기준들을 제시하고 있다. (‘PTSD 자가 진단 기준’ 참조)
물론 이것은 테스트용일 뿐이다. 정확한 진단은 전문의에게 맡겨야 한다.
완벽한 해결방법은 없음을 인정하는 것
많은 의사들은 말한다. 과거의 끔찍한 기억 때문에 현실이 힘들다면, 그 끔찍한 기억에 스스로 대항하는 수밖에 없다고. 피하기보다는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는 뜻이다.
“한 번 상처 난 마음은 결코 예전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에게 자신의 심리상태에 대해 설명해보라고 했더니 적절하게 예를 들더군요. 종이 한 장을 집어 들더니 꾸깃꾸깃 구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뒤 ‘지금 이 종이 같습니다’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렇습니다. 한 번 구겨진 종이는 두 번 다시 예전처럼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짙건 옅건 구김이 남아 있지요. 트라우마 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히 그 사건을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직시함으로써 ‘덜 괴로운 상태가 되는 것’, 나아가 자신의 대처능력에 자신감을 갖는 것입니다.”
일본 무사시노대학 심리임상센터의 고니시 세이코(小西聖子) 박사의 말이다. 완벽한 해결방법은 없음을 인정하고 과거에 용감히 맞부딪치면서 이겨나가는 것, 적어도 그렇게 마음먹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이다.
주위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섣불리 “그냥 잊어”라고 종용하는 것은 술 마신 다음 날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이기지도 못할 술을 왜 그리 마셨어?” 하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술 마시는 사람은 다음 날 괴롭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알면서도 마시는 것이다.
PTSD 환자들도 마찬가지다. 자신도 잊고 싶다. 다만 잊히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괴로울 뿐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스스로 이겨낼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현대해상 블로그에 트라우마와 관련해 흥미로운 제안이 실려 있어 소개하기로 한다.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관한 나름대로의 답안이다.
결국은 욕심을 버리고 더 부지런하고 솔직해지면서 착해지자는 말인데, 비단 정신질환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충고는 아닌 것 같다.
>> 김유준(金裕俊)
1966년생. 20여 년 동안 영화전문지 , 남성교양지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도서출판 현재) 등을 번역했다. 현재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
‘아름다움’은 지극히 주관적이어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정의가 필요치 않은 것은 기본이 충만할 때다.
스위스의 전 지역에 대한 평가는 구구절절한 설명이 필요치 않다. 스위스는 가는 곳마다 ‘아! 너무 좋다’, ‘이 도시를 떠나고 싶지 않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 아름다움 속에서 살아온 덕분일까? 스위스 사람들은 여행객들에게 한결같이 친절을 베풀어 준다. 보드라운 속살처럼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다가와 상대를 배려한다.
>>글 이신화 여행작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베른에서 만난 아인슈타인
필자는 알프스를 기대고 있는 프랑스 남부의 안시(Annecy)에서 국경을 벗어나 제네바(Geneve)에 도착한다. 제네바의 레만 호수에는 하늘 높이 분수가 솟구치고 있다. 롤렉스 간판들, 거리의 꽃시계 등이 시계의 나라임을 다시 인식시켜 준다. 주마간산으로 도심을 돌아보고 베른(Bern)으로 장소를 이동한다.
스위스의 수도, 베른은 가을비에 촉촉하게 젖었다. 수도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아주 작다. 기차역 주변 말고는 인적도 뜸해 번잡한 구석을 찾을 수 없다. 숙소에서 준 대중교통 프리 티켓도 필요치 않다. 그저 작은 소읍의 풍치를 걸어 다니면서 보면 된다. 베른은 스위스 최초로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구 시가지의 골목에는 유럽에서 가장 긴 아케이드가 이어진다. 베른 도시가 생성됐던 12세기 후반에 지어지기 시작해 16세기 중반에 완성된 건물들이다.
그 건물에는 저장고 형태의 반 지하 상점이 늘어서 있다. 엇비슷한 건물 형태에 잠시 길을 잃을라치면 그럴 때마다 이 도시의 시계탑이 랜드마크 역할을 해준다. 시계탑은 감옥탑 이전에 베른의 출입구 역할을 했던 곳. 매시 정각 4분 전, 곰들과 광대들이 나와 춤을 추는 시간. 그 즈음이면 관광객들은 고개를 외로 꼬고 있다. 아랑곳하지 않고 시계탑 아래로 버스들이 오간다.
그것 말고도 자꾸만 시선과 발길을 멈추게 하는 것은 다양한 테마로 만들어진 인형과 석조물이 아우러진 작은 분수들. 거기에 가는 곳마다 만나는 곰 형상들. ‘베른’이라는 이름 자체가 도시를 세운 체링겐 가문이 곰 사냥을 해서 시작됐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뉘데크 다리 건너편에는 곰 공원도 있다.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장미공원 가는 길목이라서 으레 발길을 멈추지만, 왠지 어설프기만 한 곰 공원에 배시시 웃음 짓는다. 그 외 스위스 최대의 고딕양식 건물인 대성당(높이 100m)과 국회의사당 등이 포인트다.
욕심 없이 베른 시가지를 배회하다가 한 유명한 인물을 만난다. 아인슈타인이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이 많을 텐데 왜 베른에서는 거대한 아인슈타인 박물관을 만들었을까? 아인슈타인과 베른은 어떤 연계가 있을까? 아인슈타인은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는 취리히 공과대학을 다녔고 베른에 온 것은 직장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의 이력은 어느 곳에서나 많이 나오니까 생략하기로 하고 흥미로운 사적인 삶을 들여다보자.
아인슈타인은 취리히 공과대학 동창으로 상대성 이론 논문 작성을 거들었던, 첫 아내 밀레바 마리치와 결혼했다. 그가 결혼해 살았던 아파트는 구 시가지에 ‘아인슈타인 하우스’로 남아 있다. 그런데 역사박물관에서 더 자세하게 아인슈타인의 사생활을 엿보게 된다. 그의 첫사랑은 물론이고 그가 사랑했던 마지막 사랑까지 소개되어 있었다. 오직 연구만 하는 ‘샌님’이라는 고정관념이 확 깨지는 순간이었다. 아인슈타인에게는 몇 명의 여자가 있었던 것일까? 아인슈타인은 결혼생활 16년 만에 이혼했다. 이혼 사유는 아인슈타인의 간통이었다. 이혼 위자료는 아직 타지도 않은 노벨상의 상금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이혼 후, 달랑 넉 달 만에 내연의 관계였던 사촌 엘자 뢰벤탈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의 바람기는 재혼 후에도 잠들지 않아 평생 비서와 유부녀, 소련의 여성 스파이 등 여러 명의 연인을 두었다. 더불어 그는 아이들도 살갑게 돌보지 않았다. 밀레바와 혼전에 얻었던 딸은 출생 이후의 기록이 존재하지 않으며, 이혼 후에는 두 아들과 거의 연락하지 않았다. 둘째 에두아르트는 아버지가 가족을 버렸던 일을 평생 용서하지 않아 두서없는 원망의 편지들을 보내곤 했고, 결국에는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쳤다. 아인슈타인은 1932년 히틀러 집권 3주 전에 아슬아슬하게 미국으로 이주했지만 미국에서도 생활이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하여튼 유명인들의 ‘가십(gossip)은 오랫동안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젊은 처녀의 어깨’라는 융프라우 요흐에 올라
베른에서 기차로 툰(Thun)호수 - 스피에츠(Spiez) - 인터라켄(Interlaken)까지 40분 정도밖에 소요되지 않는다. 융프라우 요흐((Jungfrau Joch, 3454m)까지 오르려면 산악열차를 타야 한다. 시작점은 인터라켄의 동역(Ost)이다. 동역에서 라우터브루넨(Lauterbrunnen)까지 올라가 다시 열차를 갈아타면 북벽 아이거 바로 밑 동네인 클라이네 샤이덱(Kl Scheidegg, 2061m)에 멈춘다. 이곳은 융프라우 정상과 그린델발트(Grindelwald, 1034m)로 가는 열차가 두 갈래로 나뉘는 환승역이다. 만년설을 가득 덮고 있는 위풍당당한 아이거 북벽이 우뚝 서 있다. 설산을 눈앞에 두고 마을 길 따라 1~2시간 정도 트레킹을 즐긴다. 가까스로 오르내리는 산악열차와 넓은 초지에 펼쳐지는 야생화, 햇살과 시간에 따라 바뀌어가는 산 그림자, 그림 같은 집들, 작은 호수, 레포츠를 즐기는 사람 등. 그 아름다움의 매력은 군더더기 말이 필요치 않다.
이 마을을 비껴 융프라우 정상으로 이어지는 산악열차에 오른다. 아이거와 묀히의 암반을 뚫고 설치한 톱니바퀴 레일은 총 9.3㎞. 1896∼1912년 건설되었으며, 최대경사도 25도의 압트식(Abt-System)으로 오르는 데 50분이 걸린다. 열차를 내려서는 그저 화살표만 따라가면 된다. 레스토랑도 있고, 초콜릿을 직접 만들어 판매도 하고 한 조각 선물도 준다. 얼음궁전(Ice Palace)을 관람한 후 통로를 따라 나가면 900m 두께의 눈밭, 플래토(Plateau)에 도착한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스핑크스 전망대(3571m)가 있다. 북동쪽에는 묀히와 아이거, 남동쪽에는 알레치 빙하, 남쪽에는 알레치호른, 더 멀리에는 몬테로사 산이 있다. 하지만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기상 때문에 온전한 풍치를 보는 일은, 순전히 운에 맡겨야 한다. 결국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클라이네 샤이덱 주변에 펼쳐지는 풍광과 그린델발트 마을을 에둘러 봤으니 충분히 행복한 여정이다.
◇007 촬영지, 쉴트호른의 길목 마을, ‘뮈렌’ 아름다워
융프라우보다 느낌이 더 좋은 곳은 쉴트호른(Schilthorn, 2970m)이다. 라우터브루넨(806m)을 기점으로 찾아가야 한다. ‘울려 퍼지는 샘’이란 뜻을 가진 라우터브루넨은 정말로 아름다운 산골 마을이다. 247m의 슈타우프바흐 폭포를 비롯해 70여 개의 폭포가 연이어 높은 암벽을 타고 흘러내린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1749∼1832)는 1779년, 이곳에서 문학적 영감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낭만파 음악가 멘델스존(1809∼1847)은 폭포 앞에서 괴테와 함께 그림을 그리며 보냈다. 시인 바이런(1788∼1824)도 이 폭포에 시를 남겼다.
폭포를 지나 마을 농장 길을 따라 4㎞ 정도 걸어가면 쉴트호른 케이블카를 타는 곳이다. 5~6번 정도 정차와 운행이 반복된다. 특히 가는 길목에서 만나는, 산비탈을 등지고 사는 뮈렌(Murren, 1650m)이라는 마을은 그림 같이 아름답다. 고요할 정도로 조용한 고산 마을, 거칠고 척박한 높은 산봉우리 속에서도 화사한 꽃 화분으로 예쁘게 꾸미고 가꿀 줄 아는 사람들. 이 마을에 어찌 반하지 않겠는가? ‘이 높은 곳에서 뭐 먹고 살지?’ 하는 한국식 사고가 부끄러워지는 마을이다.
쉴트호른 전망대는 융프라우하고는 다르다. 터널이 아닌 시원한 야외 공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융프라우 요흐를 비롯해 묀히와 아이거 봉우리 3개가 한눈에 들어온다. 또 이곳은 유명한 시리즈 영화인 007 촬영장소로 활용되어 마치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재미도 준다. 전망대의 식당(피츠 글로리아, Piz Gloria)’은 야외 풍경을 보면서 즐기라고 뱅글뱅글 움직이고 있다. ‘007 제6탄-여왕 폐하 대작전’에서 주인공 제임스 본드가 식사한 곳에서 주인공인 것처럼 파스타를 먹는다. 분명코 융프라우만 보고 왔다면 반쪽 여행만 하게 되는 꼴이 될 것이다.
◇귀족, 부자들이 만든 휴양도시, 생 모리츠
한국 여행객 대부분이 융프라우 다음으로 가는 곳은 루체른(Luzern)이다. 필자는 루체른을 거쳐 생 모리츠(ST.Moriz)로 향한다. 스위스 여행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열차 여행이다. ‘Express’라는 이름으로 열차 관광 상품이 만들어져 있는데 그중 빼어난 명품 열차가 베르니나(Bernina) 익스프레스다. 베르니나는 스위스를 가로질러 이탈리아로 넘어가는 오래된 산악 열차다. 2008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열차 코스가 있다. 투시스(Thusis) ~ 생 모리츠(61.6㎞, 알불라 라인), 생 모리츠 ~ 티라노(Tirano)(60.6㎞, 베르니나 라인)를 합친, 122㎞ 구간이다.
이 열차 구간에 생 모리츠가 있다. 생 모리츠는 스위스 동쪽 끝 부분인 그라우뷘덴(Graubunden) 주의 엥가딘(Engadin)산맥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세계적인 휴양도시다. 스위스에서는 가장 일조량이 많다. 365일 중 320일이 맑은 마을. 그래서인지 생 모리츠에 도착하면 ‘그 맑음’에 눈이 부시다. 이 마을에는 예로부터 이름난 명사(코코샤넬 등)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스위스가 관광산업을 시작했을 때 돈 많은 영국 귀족들이 유서 깊은 호텔을 세웠고 스위스에서 가장 먼저 전기를 끌어들인 곳도 바로 생 모리츠다. 봅슬레이가 처음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당시엔 영국 귀족들의 스포츠였다고 한다. 그 흔적들이 생 모리츠에 그대로 남아 있다. 마을은 고산을 기대어 터전을 잡았고 그 중간에 호수가 있다.
가파른 언덕이 있는 도르프(Dorf)와 온천이 모여 있는 바트(Bad), 두 마을로 이뤄져 있다. 도르프란 독일어로 ‘마을’, 바트는 ‘온천’이라는 뜻인데, 예로부터 온천으로 유명해 붙여진 이름이다. 호화로운 호텔과 부호들의 별장이 즐비하고, 류머티즘이나 심장병에 효험이 있다는 온천 근처에는 리조트도 들어서 있다. 그저 휴양도시라서 오래된 문화유적도 없다. 긴 역사의 흔적도 없다. 마을에 짙게 내린 가을 풍치와 산정의 겨울 풍치를 보면서 호숫가를 에돌아보면 된다. 흰 설국이 된다면 더 멋질 것이며, 이 도시는 엄청나게 북적거릴 것이다. 생 모리츠를 벗어나면서 자꾸만 미련이 남는다. 너무 아쉬워서 베르군(Bergun, Bravuogn) 역에 내려 한참이나 시간을 소요했다.
또 취리히로 나오는 길목에서는 ‘마이엔펠트(Maienfeld)에서 하룻밤을 유했다. 이 마을은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배경이 된 곳. 이 마을에는 하이디와 할아버지가 살았던 집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박물관이 있다. 조용한 스위스의 시골마을에서의 하룻밤. 와이너리가 유난히 많은 이 마을의 호텔 바에 앉아 와인 잔을 기울인다. 동네사람들만 왁자하게 떠들던 그날 밤, 여행객의 상념은 깊어간다. 왜 스위스를 떠나는 게 이리도 힘이 드는 것일까? 단지 고국 떠난 여행객의 짙은 외로움만은 아니었으리라.
교통편 한국에서는 취리히 공항을 경유하는 게 일반적이다. 또 파리, 프랑크푸르트 등 유럽 각지에서 열차가 수시로 연결된다. 취리히 공항에서 베른까지는 1시간 단위로 열차가 오간다. 각 여행지 선택은 다음 일정에 의해 결정하면 된다. 생 모리츠는 이탈리아와 인접해 있고, 베른, 제네바는 프랑스와 통한다.
현지 교통 정보 스위스는 철도가 발달된 도시. 대부분 기차로 이동하면 된다.
스위스 카드 구입하기 스위스 패스는 아주 유용하다. 카드마다 특전이 다르므로 선택을 잘 하는 것이 좋다. 패스를 이용하면 열차는 물론 포스트버스 등 대중교통 대부분을 이용할 수 있으며 케이블카 할인, 박물관 무료 등 혜택이 많다. 머무는 시간이 길지 않다면 날짜에 맞는 카드를 구입하면 된다. 또 스위스 철도는 유레일패스로도 이용할 수 있지만 할인 적용이 다르다. 열차 시간표는 홈페이지(www.rhb.ch)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운행 시간은 유럽 전역에서 아주 정확하다.
대표 음식들 퐁뒤(Fondue)가 있다. 기본적으로 긴 꼬챙이 끝에 음식을 끼워 녹인 치즈나 소스에 찍어 먹는 요리다. 18세기 초 알프스의 사냥꾼들이 사냥 중 모닥불에 치즈를 녹여 마른 빵을 부드럽게 적셔 먹은 것에서 유래했다. 또 초콜릿이 유명하니 선물용으로 구입해도 좋다.
숙박정보 스위스는 우리나라에 비해 환율이 높다. 비싼 호텔을 이용하는 것보다는 값싼 호스텔을 이용하면 된다. 융프라우나 쉴트호른을 가려면 으레 라우터브루넨을 경유해야 한다. 라우터브루넨의 작은 마을의 밸리 호스텔(Valley Hostel)은 편하게 잘 되어 있다. 생 모리츠는 휴양지라서 숙박 가격이 비싼 편. 유스호스텔을 이용하면 아주 좋다. 스태프들이 친절하고 음식이 아주 맛이 좋다.
화폐단위 유로 대신 스위스 프랑을 쓴다.
언어문제 스위스 인들은 노인층까지도 영어를 잘 구사한다.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아 관광 안내소에는 한국어로 된 팸플릿도 있다.
유의할 점 여행 떠나기 전, 융프라우에 대한 정보는 많이 복잡할 수 있다. 미리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현지에 가면 관광체계가 잘되어 있다. 역에 가서 목적지만 말하면 그들이 알아서 표를 끊어준다. 한국에서는 할인 티켓을 프린트해 가는 게 좋다. 또 여행 중 농장의 철조망을 유의해야 한다. 전류가 흐르고 있어서 가까이 가면 감전의 우려가 있다.
음악을 좋아하게 되기 시작한 초기에는 그때그때 새로 유행하는 음악들을 주로 들었다. 그러나 음악실에 자주 다니고 음악을 많이 듣다 보니 그 전에도 좋은 음악들이 엄청나게 많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의 가수나 연주자 중 가장 오래전부터 활동을 시작한 사람은 영화이야기에서 소개한 ‘사랑의 종이 울릴 때’에도 출연했던 루이 암스트롱일 것이다.
그는 1920년대의 St. Louis Blues부터 1930년대 Stardust, When The Saints Go Marchin’ In, 1940년대 High Society, Blue Berry Hil, 1950년대 Your Cheating Heart, Cest Si Bon, La Vie En Rose, Kiss Of Fire, 1960년대의 What A Wonderful World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트럼펫 연주와 함께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음악팬들을 사로잡아 왔다.
그러나 당시 자주 들을 수 있던 것들은 대개 1950년대 이후의 음악들이었다. 지난 달 소개했던 곡 외에 그때 유행하던 50~60년대의 곡들을 살펴보면, 대학 초년생이던 당시도 지금의 집사람과 만나고 있을 때여서 그랬는지 냇 킹 콜이 부른 Too Young이 가사와 함께 마음에 많이 와 닿았고 Mona Lisa나 Ramblin’ Rose도 좋았다.
패티 페이지의 Tennessee Waltz, Mockin’ Bird Hill, I Went To Your Wedding, Changing Partners나 로즈마리 클루니의 Beautiful Brown Eyes, Half As Much 등도 엄청나게 유행했다. 프랭키 레인이 부르는 High Noon, Gunfight At O.K. Corral, Rawhide, Hanging Tree 등 서부영화 주제가들도 많이들 들었다.
에디 피셔의 Oh! My Papa, 앤디 윌리암스의 Love Is A Many Splendored Thing(모정), Moon River, More, Charade, The Shadow Of Your Smile, Love Story, 팻 분의 Love letters In The Sand, Exodus Song, Speedy Gonzalez, 빙 크로스비가 부른 Hawaiian Wedding Song과 크리스마스 캐롤 White Christmas, 토니 베넷의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 페리 코모의 Papa Loves Mambo, The Rose Tattoo, 도리스 데이의 Secret Love, Que Sera Sera, My Blue Heaven 등도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누구보다 두드러지게 활약한 가수는 로큰롤의 황제라던 엘비스 프레슬리일 것이다. 그는 Love Me Tender, Don’t Be Cruel, Kiss Me Quick, Crying In The Chapel, It’s Now Or Never, Anything That’s Part Of You(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의 원곡), Viva Las Vegas 등 수많은 히트곡뿐만 아니라 여러 영화에도 출연하면서 50~60년대의 연예계를 휩쓸다시피 하였다.
폴 앵카의 Crazy Love, Tell Me That You Love Me, 프랭크 시나트라의 South Of Border, My Way, 레이 찰스의 What’d I Say, Unchain My Heart, I Can Stop Loving You, 딘 마틴의 Volare, Sway(Quien Sera), Return To Me, 보비 대린의 Early In The Morning, Mack The Knife, 리키 넬슨의 Lonesome Town, Travelin’ Man, 데비 레이놀즈의 Tammy, Am I That Easy To Forget, 플래터즈의 Only You, Smoke Get In Your Eyes, Harbour Light, 에브리 브라더스의 Bye Bye Love, Let It Be Me, 킹스턴 트리오의 Tom Dooley,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 Greenback Dollar 등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얼 그란트의 The End, 사라 본의 Broken-Hearted Melody, 자니 마티스의 A Certain Smile, The Shadow Of Your Smile, A Time For Us을 많이 좋아했다.
또 닐 세다카의 You Mean Everything To Me, Calendar Girl, 레이 패터슨의 Tell Laura I Love Her, Corina Corina, 보비 비의 One Last Kiss, More Than I Can Say, 짐 리브스의 Am I Losing You, Adios Amigo, 벤 이 킹의 Stand By Me, Spanish Harlem, 브렌다 리의 I’m Sorry, 씨씨알(C.C.R.)의 Cotton Field, Proud Mary, 밥 딜런의 Blowin' In The Wind, 바비 베어의 Detroit City, 500 Miles(Away From Home), 매트 먼로의 From Russia With Love(007 위기일발의 주제가), Wednesday’s Child, Walk Away, 코니 프란시스의 Pretty Little Baby, Lipstick On Your Collar, Everybody’s Somebody’s Fool 등도 다 그 시기에 유행하던 노래들이었다.
이밖에 폴 앤 폴라의 Hey Paula, 노래하는 수녀들(The Singing Nun)의 Dominique, 브라더스 포의 The Green Leaves Of Summer, Try To Remember, 드리프터즈의 Save The Last Dance For Me, 피터 폴 앤 메리의 Lemon Tree, 비치 보이스의 Surfin' U.S.A. 일본가수 사카모토 큐의 Sukiyaki(위를 보고 걸어라), 바비 빈튼의 Mr. Lonely, 알 마티노의 I Love You Because, I Love You More And More Everyday, Spanish Eyes, 닐 다이아몬드의 Sweet Caroline, 존 덴버의 Rocky Mountain High, Sunshine On My Shoulder, 마리안 페이스풀의 As Tears Go By, This Little Bird, 라이처스 브라더스의 Ebb Tide, Unchained Melody, 롤링 스톤즈의 As Tears Go By 등도 내가 좋아했던 노래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