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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로 돌아보는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
- 한국의 20세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격동적이었다. 본격적인 개항, 일제 강점기와 광복, 전쟁과 분단, 그리고 독재정치와 민주화 운동까지 혼란하고도 찬란한 세월을 보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이뤄진 비극적인 역사와 수많은 사람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니어들은 이 같은 역사의 현장에서 때로는 참여자로 때로는 방관자로 때로는 관계자로 활동했다. 그렇기에 시니어들에게 근현대사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기억이고 생활에 가깝다. 이번 주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한국전쟁 이후의 경제 성장 과정부터 군사정권의 독재와 민주화 운동까지 시니어들과 함께했던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다룬 영화 세 편을 소개한다. 세 작품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날 수 있다. 국제시장 (Ode to My Father, 2014) “내는 그래 생각한다. 힘든 세월에 태어나가 이 힘든 세상 풍파를 우리 자식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기 참 다행이라꼬.” 영화 ‘국제시장’은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격변의 시대를 관통해 살아온 우리 시대 아버지 ‘덕수’의 이야기를 그린다. 함경남도 흥남에서 태어난 덕수는 소년기에 전쟁을 겪으며, 아버지와 여동생과 떨어지며 남은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온다.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된 덕수는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많았다. 하지만 평생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다. 20대 청춘 시절에는 동생의 대학 등록금을 위해 독일에 가서 석탄을 캤다. 독일로 파견나온 간호사와 고국에 돌아와 결혼도 하고 해양대에 합격하며 오랜 꿈을 이룬다. 그러나 막내 동생의 결혼자금을 벌기 위해 다시 베트남으로 떠난다. 덕수의 희생 덕분에 온 가족이 화목한 가정을 이루며 영화는 끝이 난다. 2014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개봉 당시 천만 관객을 돌파하여 ‘국민 영화’ 대열에 올라섰다. 남북 분단으로 가족을 잃고, 가족과 나라를 위해 평생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던 산업화 세대의 삶을 전체적으로 보여주며 대중의 공감을 얻었다. 이산가족으로 갈라섰던 여동생과의 재회 장면은 수많은 관객의 눈시울을 붉히며 영화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남산의 부장들 (The Man Standing Next, 2019) “너하고 나하고 그냥 머슴살이한 거야, 규평아.”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은 대한민국 대통령을 암살한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40일 전, 미국에서는 전 중앙정보부장 박용각이 청문회를 통해 전 세계에 대한민국 정권의 실체를 고발하며 파란을 일으킨다. 그를 막기 위해 중앙정보부장 김규평과 경호실장 곽상천이 나서고, 대통령 주변에는 충성 세력과 반대 세력들이 뒤섞이기 시작한다. 흔들린 충성과 그 날의 총성, 대통령이 암살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 영화는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18년간 지속된 박정희 독재정권의 종말을 알린 이 사건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으로 꼽힌다. 영화의 서사는 대통령 암살사건 발생 40일 전, 청와대와 중앙정보부, 그리고 육군 본부에 몸담았던 세력들의 관계와 인물들의 심리를 면밀히 따라가며 담담하게 진행된다. 실제 인물들의 과열된 ‘충성 경쟁’과 이를 표현하는 배우들의 명품 연기가 관객들을 영화에 푹 빠져들게 만든다. 1987 (1987:When the Day Comes, 2017)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습니다.” 1987년 1월, 경찰 조사를 받던 스물두 살 대학생이 사망한다. 증거인멸을 위해 경찰은 시신 화장을 요청한다. 하지만 사망 당일 당직이었던 최 검사는 이를 거부하고 부검을 밀어붙인다. 또 경찰은 단순 쇼크사인 것처럼 거짓 발표를 이어간다. 그러나 계속해서 고문에 의한 사망을 증명하는 흔적들이 나타나자 윤 기자는 ‘물고문 도중 질식사’라고 보도한다. 이렇게 영화는 어떤 대학생의 억울한 죽음을 조사하고 알리려는 사람들과 이를 막으려는 부패된 공권력 사이에서 뜨거웠던 1987년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 영화는 20대 초반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고 박종철의 비극적인 죽음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대한민국 민주화 역사의 정점이었던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지며, 한국 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 중 하나가 됐다. 부패한 독재정권에 열렬히 맞서 싸우는 민주화 운동가들의 모습은 현재를 살아가는 관객들에게도 강렬한 역사의식을 일깨운다.
- 2021-09-03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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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과 마음’ 임석범, 채유정이 마음에 품고 있는 꿈
- 1985년 MBC 강변가요제에서 발표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끈 노래가 있다. 그 시절을 산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었을 ‘그대 먼 곳에’가 바로 그 노래다. 당시 건국대학교를 다니던 임석범(58)과 김복희가 마음과 마음이라는 듀엣으로 부른 이 노래는 752개 팀 중에서 대상을 차지했을 정도로 부드러운 포크 발라드로서 완성도가 단단했다. 그로부터 36년이 지난 지금도 아내 채유정(57)과 함께 마음과 마음을 이끌며 음악과 라이브 카페, 유튜브에 이르는 다양한 활동을 이어나가는 임석범을 만나 노래의 숨결, 그리고 삶에 대한 그의 굳은 의지를 들었다. 마음과 마음의 리더, 중학생 때부터 가수가 꿈이었던 임석범의 본격적인 음악 생활은 홍서범이 몸담았던 걸로 유명한 건국대 밴드 옥슨에서부터였다. “그런데 단체 생활이 저는 도저히 안 맞더라고요. 그리고 ‘불놀이야’를 부르면 홍서범 스타일을 따라 해야 하는 것도 스트레스였죠. 저는 내 스타일로 부르고 싶어서 갈등이 많았어요. 그래서 나왔죠.” 그러나 옥슨을 나온 이후는 좌절의 연속이었다. 프로덕션에 가서 오디션을 보고 대학교 노래 좀 한다는 사람들은 다 참가하는 대학가요제, 강변가요제에도 도전했다. 그러나 모두 떨어졌다. 훗날 대표곡으로 자리매김하는 ‘그대 먼 곳에’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당시에는 ‘하다 하다 안 되니까 군대나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군대 가기 전에 김복희 씨와 강변가요제에 나갔는데 운 좋게 대상을 받은 거예요. 1985년 7월 말 남이섬에서의 일인데, 11월에 영장이 나와서 3일 만에 군대에 가야 했죠. 그때 아내가 강변가요제에 나간다니까 명동에서 써지오바렌테 청바지 사주고 그랬죠.(웃음)” 37년 동안 연인처럼 함께하다 평생을 같이하고 있는 임석범과 채유정의 첫 만남은 1984년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음악으로 인해 만난 게 아니었다. 물론 그들의 주요 데이트 코스는 당시 대표적인 포크 가수들이 모이는 라이브 카페로 유명했던 무교동의 코스모스 코러스였지만, 채유정 입장에서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난 거였지 정작 본인이 가수가 되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그런데 군대를 제대한 후 솔로와 듀엣 사이에서 고민하던 임석범은 결국 ‘마음과 마음의 프리미엄을 살리기로 하고, 다른 여자랑 노래를 하는 것보다는 여자친구를 꼬여서 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아내에게 가수 훈련을 시키느라 전지훈련도 갔었어요.(웃음) 얼떨결에 가수가 된 거예요. 1987년에 소집 해제되자마자 첫 음반을 서울음반에서 냈죠.” ‘노래를 연습한 날은 울면서 집에 갈 때도 있었다’고 말할 정도로 임석범의 혹독한 ‘훈련’을 받아 가수로 거듭난 채유정은 이후 CM 가수 활동도 하고 교육방송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프로그램도 진행하는 등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그 과정에서 잘 따르던 후배가 조갑경이었는데 지금은 학교 선배의 형수님이 됐으니 세상모를 일이다. 유독 좌절이 많았던 음악 활동 분량상 본 기사에 수록하지 못한 이야기들까지 듣다 보니 좌충우돌 즐거운 에피소드가 많은 부부였다. 그러나 음악 활동은 쉽지 않았다. 두 사람이 합작한 마음과 마음 1집은 활동 시기를 잘못 맞췄다. 하필 88올림픽이 열릴 때 나온 것이다. 아무리 히트곡이 있다지만 이제 막 1집을 완성한 신인이 낄 자리는 없었다. 2집은 1993년에 나왔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좌절은 끝나지 않았다. 하필 서태지와 아이들이 엄청난 인기를 얻으며 같은 시기에 데뷔한 것이다. 당시 가요계는 장르가 뭐든 간에 무조건 서태지로 마무리되던 시절. 그 때문에 ‘웃픈’ 일도 있었다. “제작자 선배님이 가만 보니 서태지와 아이들 같은 팀을 하나 만들면 돈을 빨리 벌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6인조 팀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팀 이름을 잘못 지었어요. 이름이 ‘쇼크’였거든요.(웃음)” 지금이나 그때나 아이돌 그룹치고는 꽤 충격(Shock)적인 이름이긴 했다. 그리고 아이돌 그룹을 처음 만든 제작자에게 닥친 시련도 ‘쇼크’였다. 의상이며 먹는 거며 자동차, 춤 선생까지 그렇게 돈이 많이 들어갈 줄 몰랐던 것이다. “매일 세 끼 식사만 해도 그게 얼마예요. 결국 회사가 부도났어요. 일이 그렇게 되니 누구 탓을 하기도 어려웠죠.” 시대를 앞선 스트리밍 사업을 하기도 가요계가 아이돌 그룹 위주로 체질이 변화하면서 포크는 침체되었다. 마음과 마음도 주 무대를 미사리로 옮겼다. “제가 처음 미사리에서 노래할 때는 라이브하는 데가 두 군데 있었어요. 그러다 점점 늘어난 거죠. 한때는 라이브 카페가 70개였고 가수는 200명에 이를 정도였어요. 미사리에 당구장 하나 차리면 장사가 될 거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올 정도였죠. 그러나 미사리가 점점 호객이 되는 가수들 위주가 되고 싸움이 나다 보니까 잘 안 되게 되었죠.” 그는 인터넷 사업도 한 적이 있다. 그야말로 시대를 앞선 사업, 이제는 모두의 일상이 된 음악 스트리밍 사업이었다. “‘앞으로 음악은 디지털화되어 파일로 노래를 살 것이다’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미사리나 공연장을 다니면서 가수들 동영상을 찍었어요. 그걸 데이터로 만들어 유니텔에 서비스했죠. 그런데 사실 돈이 될 거란 생각은 전혀 안 했어요. 5분짜리 노래를 다운받는 데 15분 걸리던 시절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데이터가 쌓이다 보면 회사가 어떤 길로 갈 것인지 확실하게 방향을 잡을 수 있거든요. 너무 빨리 시작한 거예요.” 유튜브에서 부활한 마음과 마음 그 실패의 경험이 약이 된 것일까. 마음과 마음은 요즘 유튜브와 잘 맞는 편이다. 코로나19가 본격화되면서 가수들의 무대가 사라지자, 아내 채유정이 유튜브에 뛰어들 것을 적극적으로 ‘독촉’한 덕분이기도 하다. 그녀는 남편이 시대를 앞선 인터넷 사업 경험도 있는 만큼 ‘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아내에게 설득된 남편은 7명이 들어오든 8명이 들어오든 유튜브에 마음과 마음의 자리를 만들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만든 채널 ‘마음과마음7080TV’의 현재 구독자는 3600명 정도. 2시간 넘는 실시간 라이브 공연과 토크를 하고, 공연이 끝나면 영상을 올리고 있다. 마음과 마음은 그 외에도 ‘은혜로운찬송가’라는 찬송가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기독교인인 부부는 요즘 교회에서 그들이 어렸을 적 불렀던 찬송가 대신 매번 새로운 가스펠을 부르는 걸 보고 찬송가를 제대로 불러보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일주일에 두 곡씩 올리기로 했다. 그런데 오로지 사명감으로 시작한 이 실험이 성공한 것이다. “집에서 컴퓨터로 반주와 코러스를 다 만들어요. 그리고 영상도 만드는 거죠. 한 곡 만드는 데 이틀 정도 걸리더군요. 3월 3일에 구독자가 120명이었는데, 지금은 9200명이에요. 하루에 200명씩 늘어난 거죠. 구독자가 늘어나자 조회 수 30만 회 넘는 영상들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이거였구나 싶었죠.” 여백의 음악을 추구하다 그는 현재 강남 도산공원 앞에 자리한 라이브 카페 마음과마음을 운영하고 있다. 벌써 11년째 운영 중인 라이브 카페로,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명소다. 라이브 카페 운영, 유튜브 채널 운영, 그리고 새롭게 발표할 계획인 싱글 곡까지, 요즘 임석범의 하루하루는 바쁠 수밖에 없다. 어찌되었든 그의 본분은 가수. 음악 얘기를 할 때 그는 가장 활기찬 목소리를 냈다. 그가 하고 싶은 음악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여백이 많은 음악’이다. 그가 말하는 여백의 음악이란 듣는 사람이 들어갈 자리가 있는 음악을 뜻한다. “어떤 가수는 슬픈 노래를 부를 때 본인도 슬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면 듣는 사람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요. 여백이 많은 음악은 듣는 사람이 들어갈 자리를 만들어놓죠. 그래서 아주 슬픈 노래는 슬프지 않게 불러야 진짜 슬플 수 있는 거라고 봐요. 진짜 슬픈 노래는 마이너가 아니라 메이저 코드라는 거죠. 담담하게 여백을 주며 부르면 가사가 들리고, 그러면 듣는 사람이 자기 감정을 넣어 아픔을 간직할 수 있거든요.” 정말 좋은 노래를 만드는 사람 되고파 임석범의 음악적 롤모델은 언더그라운드 포크의 대부라고 불렸던 조동진과 정태춘이다. 조동진의 ‘작은 배’, ‘어떤 날’ 같은 노래는 임석범의 여전한 애창곡이다. “부끄러운 기억이 있어요. 데뷔하기 전에 방송 활동을 많이 했거든요. MBC 라디오에 정태춘 선배와 함께 출연한 적이 있어요. 사회자가 한 곡을 쓰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냐고 질문하더군요. 저는 곡 쓰는 데 오래 걸리지 않고 한 방에 끝내는 타입이어서 하루면 다 만든다고 대답했어요. 그런데 정태춘 선배는 일 년 걸린대요. 써놓고 다시 보고 다시 보고 하다 보니 곡을 쓰는 게 너무 어렵다는 거예요. 저는 너무 쉬웠거든요. 그게 너무 창피했어요. 그렇게 노래 하나도 정성 들여서 만드는 가수가 되고 싶어요.” 대중적인 인기가 없어도 동료 선후배 가수들이 ‘정말 좋은 노래를 만든다’고 말하는 가수가 되고 싶다는 게 그가 지금도 뜨겁게 품고 있는 꿈이다. 그의 끈질긴 꿈이 어떤 결실을 맺게 될지, 새롭게 나올 노래들을 들어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 2021-07-2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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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사자도 헷갈리는 베이비붐 세대 기준…생물학에 사회ㆍ역사 혼합 때문
- 베이비붐 세대들이 은퇴하면서 고령화 사회가 가속화되고, 최근 이들에 의해 소비 트렌드가 바뀌고 있다는 전망 등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신문이나 방송 등 보도를 살펴보면 미디어마다 베이비붐 세대에 대한 기준을 다르게 쓰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실제 베이비붐 세대에 속한 어르신들도 자신이 해당 세대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도대체 베이비붐 세대는 언제부터 언제까지이며, 기준은 무엇일까? 고려대한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베이비붐은 ‘출생률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어떤 시기의 공통된 사회적 경향을 이르는 말. 인구의 자연 증가율이 현저하게 높아지는 경우로, 대체로 전쟁이 끝난 후 또는 경제적이나 사회적으로 풍요롭고 안정된 상황에서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로 정의한다. 보통 미국과 일본, 유럽 등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6년부터 1965년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을 베이비붐 세대로 정의한다. 기간은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가 난다. 독일의 금융그룹인 알리안츠 등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은 1946년에서 1964년까지,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1946년에서 1967년까지, 스웨덴은 1946년에서 1953년까지다. 일본은 1947년에서 1949년까지로 기간이 짧다, 반면 우리나라는 한국전쟁이 끝난 1955년부터 베트남 전쟁 참전 전인 1963년까지를 베이비붐 세대라고 밝혔다. 이처럼 나라마다 시기가 다르기 때문에 미디어에서 보도할 때 어떤 나라와 관계된 베이비붐 세대 이야기인지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 그래야 언제 태어난 사람들, 지금 나이가 몇 살까지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생물학적 출생자수와 조금 다른 베이비붐 세대 기준 이렇게 널리 알려진 기준이 있는데 왜 미디어마다 국내 베이비붐 세대에 대해 다른 기준을 적용하는 걸까? 그 이유는 실제 출생자수와 출산율이 해당 기간을 다른 기간과 차별화하기가 쉽지 않아 기준을 다르게 적용하는 학자나 관련 전문가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베이비붐 세대를 나누는 가장 큰 기준은 생물학적으로 출생자수가 기존보다 크게 늘어났을 때다. 김태헌 한국교원대 인구학과 교수는 ‘우리나라 인구전개에서 베이비붐 세대의 의미’라는 보고서에서 “우리나라 베이비붐 기간을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과 달리 출생자수가 급증한 1960년과 1971년 두 시점을 중심으로 전후 각 10년씩 총 20년간으로 정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태헌 교수는 우리나라 베이비붐 시기를 1955년부터 1974년까지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전문가들 다수는 세대는 단순히 생물학적 나이를 넘어 사회와 역사적 특성을 공유하는 묶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 단순히 출생자수로 판단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최초로 세대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한 만하임에 따르면 세대에서 중요한 것은 ‘생물학적 세대’가 아닌 ‘사회와 역사적 세대’다. 만하임은 비슷한 시기에 출생한 사람들은 같은 문화와 역사 경험을 통해 연대감을 가지며, 같은 세대는 생물학적 특성 뿐 아니라 생각이나 행위, 감정 등 상식을 판단하는데 필요한 표준 기준인 준거틀을 공유한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세대라는 특성을 고려해 생물학적 특성보다 사회와 역사적 특성을 고려해 우리나라에서 베이비붐 세대를 1955년부터 1963년으로 규정한다는 것이 관련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실제로 이에 해당하는 연령대는 군사독재 시절과 민주화 투쟁, 급격한 경제성장을 경험했다. 또 1997년 외환위기 때 갑작스런 실직을 경험하며 경제적 타격을 가장 크게 받은 세대이기도 하다. 이 같은 맥락에서 베이비붐 세대를 크게 3차까지 나눠서 보는 전문가들도 있다. 즉 앞에서 언급한 기간의 세대를 1차 베이비붐 세대라고 규정하고, 1968년부터 1974년까지를 2차 베이비붐 세대, 1979년에서 1992년까지를 3차 베이비붐 세대라고 규정한다. 108만명으로 가장 많은 인구수 기록한 1960년생 왜 이렇게 다양한 주장이 나오고, 얼마나 타당성을 갖고 있을까? 실제 데이터를 토대로 주요 연도별 출생자수를 확인해본다. 이 기사에서는 통계청이 공식적으로 1970년 이후 자료만 제공하고 있어, 세계은행 등에서 얻은 자료를 종합해 정리한 위키백과 ‘대한민국 인구’ 자료를 토대로 분석했다. 대한민국 연도별 출생자수와 사망자수 1955년 출생자수를 보면 90만8134명이다. 1954년 83만9293명과 비교하면 출생자수가 8.2% 늘어 1925년부터 1955년까지 봤을 때 1946년을 제외하고 가장 크게 오른 시점이다. 하지만 1000명당 출생자수를 뜻하는 조출생률은 42.9명으로 가장 높은 시점이었던 1956년과 1960년의 43.2명보다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1955년 이후 계속 올라 1960년에 108만535명으로 최고 출생자수를 기록했다. 1960년생은 2021년 5월 25일 기준으로 만 60-61세에 해당한다. 1961년부터 조금씩 줄기 시작해 1965년에 99만6052명까지 줄었다. 다시 1966년에 103만245명으로 오르기 시작해 1968년 104만3321명, 1969년 104만4943명으로 역대 3번째 출생자수를 기록한 뒤 다시 하락세로 전환했다. 1959년부터 1971년까지 1965년을 제외한 12년 동안은 출생자수가 모두 100만명을 넘어섰다. 1979년은 출생자수가 86만2669명으로 1978년 75만728명에 비해 14.9%나 늘어 역대 2번째로 전년도에 비해 가장 높은 비율로 오른 시점이다. 이후 1981년 86만7409명까지 출생자수가 늘다가 1987년에 62만3831명까지 줄어든다. 다시 1988년부터 1992년까지 오른 뒤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후에는 조금의 변동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크게 하락하는 추세가 이어졌다. 이와 같이 연도별 출생자수를 보면 앞에서 제시한 3가지 베이비붐 세대에 대한 의견이 어느 정도 근거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베이비붐 세대인 1955년부터 1963년까지는 출생자수를 다른 년도와 구분 짓기가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반면 김태헌 교수가 주장한 20년 동안은 출생자수를 이용해 구분하기가 쉽다. 1955년에 처음으로 90만명을 넘어 1974년까지 90만명 대를 유지해 출생자수 90만명 이상을 기준으로 정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 기간을 제외하면 우리나라 역사에서 출생자수가 90만명을 넘은 해는 존재하지 않는다. 베이비붐 세대, 3가지 의견 다양하게 쓰여 그렇다면 베이비붐 세대는 언제부터 어디까지를 봐야 할까? 다양한 보고서나 연구논문 등에서 공식적으로 언급하는 베이비붐 세대는 1955년부터 1963년까지 9년간을 뜻한다. 2021년 5월 24일 기준으로 보면 만 57세(생일이 지나지 않은 1963년생)부터 66세(생일이 지난 1955년생)에 해당하는 분들이다. 따라서 특별한 언급이 없다면 베이비붐 세대는 이 기간에 태어난 사람들을 말한다고 보면 된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생물학적 특성보다 사회와 역사적인 환경을 함께 경험하고 공감하는 동질 세대라는 특성이 더 크다는 의미다. 하지만 학자와 미디어에 따라서 베이비붐 세대를 더 확장해서 보기도 한다. 기존 기간을 1차 베이비붐 세대로 보고, 그 이후에도 비슷한 출생자수와 비슷한 사회와 역사적 세대 특성을 나타낸 1968년부터 1974년까지(만 46세~53세)를 2차 베이비붐 세대로 보는 의견이 있다. 학계나 미디어에서도 널리 인용하는 편이다. 하지만 1979년에서 1992년까지를 3차 베이비붐 세대로 보는 의견은 아직 소수로 자주 언급되지는 않는다. 다음으로 최근에 출생자수를 중심으로 구분하기 쉽게 제안한 1955년부터 1974년까지(만 46세~66세) 20년간을 보는 의견이다. 최근에 나온 주장이지만 2차 베이비붐 세대를 포함할 뿐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구분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 특히 많은 인구수에 의미를 두고 미래를 전망하거나 분석할 때는 이 기준을 주로 활용하는 편이다.
- 2021-05-25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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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과 궤짝에서 카네기홀까지!
- 왕년 전성기에 누렸던 최고의 영웅담이나 에피소드를 꺼내보는 페이지입니다. 가수 남궁옥분의 시간을 되돌려본 그 시절, ‘우리 때는 이것까지도 해봤어, 나도 그랬어, 그랬지!’라고 공감을 불러일으킬 추억 속 이야기를 넘겨보는 마당입니다. 글 사진 남궁옥분 어릴 적 동네 사람들이 저를 사과 궤짝 위에 올려놓고 노래를 시키면 곧잘 불러 뜨거운 반응을 받았다는 어머니의 증언! 시작은 미미하고 초라했으나 유년 시절의 그런 일들이 밑거름이 되었던지, 데뷔 후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를 만나 방송국과 국내외 무대를 종횡무진했지요. 하루에 12군데 스케줄을 소화해내며 달리던 1981년부터 지금까지 ‘대한민국 최초’라는 기록들도 세우며 운 좋게 아직 현역으로 남아 무대를 지키고 있습니다. 40년의 세월 속에서 아름답고 영광스러웠던 기억 몇 가지를 꺼내봅니다. 1983년 봄! ‘귀국서약서’를 비롯한 수십 장의 서류를 작성해 통과해야만 출국이 가능하던 시절, 첫 해외 공연을 앞두고 혹시나 무슨 일이 생겨서 취소되는 건 아닐까 조바심 내던 때가 생각납니다. 대한항공이 주최하는 미주 공연이었기에 생애 첫 국제선 비행기는 퍼스트 클래스였습니다. 지상에서는 꿈도 꾸지 못했던 수준의 식사와 서비스는 지금 생각해도 황홀합니다. 처음 타보는 국제선에 처음 밟아보는 미국 땅은 콜럼버스가 미 대륙을 발견했을 때만큼의 기쁨이라 해도 좋을 만큼 설렘 가득했습니다. 외국에 대한 동경이 컸던 시절이라, 쌀쌀한 초봄에 서울을 떠나 날짜변경선을 경험하고 만난 사계절 여름인 하와이는 가히 충격적이었지요. 당시 교포들도 고국의 소식조차 여러 날을 두고 시간차로 접하던 미국에서 고국의 많은 가수들을 만난다는 건 꿈같은 일이었을 겁니다. 대한민국 당대 최고의 연예인으로 구성된 공연단이 워싱턴DC의 ‘케네디센터’,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가든’,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등을 순회 공연하는 일정이었지요. 첫 도착지 하와이에서 동부 뉴욕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가수 최초의 대형 공연장에서의 공연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답니다. 이미자, 김상국, 조영남, 하춘화, 바니걸스, 국악인 조상현, 이춘희 등 대중가요와 국악계를 빛낸 국내 최고의 가수들이 밴드까지 이끌고 미국 최고의 공연장에서 노래한다는 것은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이었습니다. 현지 교민들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한 감동이었다 할 정도였으니, 그때 막내였던 저로서도 꿈에 그리던 큰 무대에서의 공연을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당시 국내엔 큰 공연장이 없었던지라 무대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한참을 달려야 도달하는 ‘메디슨 스퀘어가든’은 명성만큼이나 저를 주눅 들게 했는데, 훗날 다시 서보니 그때보다는 많이 작아져 있었습니다. ‘케네디센터’는 주변의 모든 시설들까지 대리석으로 완성돼 눈에 띄는 아무 곳에나 대고 셔터를 눌러도 그냥 작품이 될 정도였습니다. 그런 곳에서 최초로 공연을 했다는 자부심은 이 글을 쓰면서 되살려본 기억 속에서도 여전히 뿌듯한 기쁨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감동도 ‘카네기홀’을 넘어설 수는 없을 듯합니다. 1989년인가? ‘조영남의 카네기홀 콘서트’를 함께하자 해서 무작정 따라나섰던 일이 제 생애 가장 잊지 못할 영광스런 일이 되었습니다. 메인홀 최초 공연자는 조영남이 아닌 패티김이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아니 그 후로도 아주 오랫동안 메인홀 공연자는 패티김, 조영남, 남궁옥분뿐이었습니다. 콘서트홀이 아닌 메인홀! 노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꾸며 서고 싶어 하는 가장 영광된 무대에서 노래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전 충분히 행복합니다. 대한민국의 예술인 의전이 최악이던 시절, 미니 칵테일바까지 있는 하얀 리무진이 뉴욕 시내를 돌아 카네기홀에 내려놓을 땐 이곳을 다녀간 예술가들의 모습이 한꺼번에 머릿속을 스쳐갔습니다. 그곳을 거쳐간 영혼들이 지켜준다는 전설 덕분인지, 리허설 때의 긴장감은 아랑곳없이 정말 무언가에 이끌리듯 아주 편히 노래를 했던 기억이 나네요. 미국 스태프들이 공연 중 카메라 촬영도 불허하는 바람에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못한 점이 정말 큰 아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게다가 그런 일에 별로 관심 없던 조영남 선배의 성향 때문에 결국 허접한 사진 두 장만이 카네기홀의 그 영광스런 순간을 이야기해주네요. “이게 정말 카네기홀이야?”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평범한 사진이기에 좀 억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계적인 많은 예술 거장들이 실황음반을 남기며 사랑했던 역사적인 문화 현장,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 한 귀퉁이를 지키는 남궁옥분에게도 그곳에 설 기회가 있었다는 사실은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도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사진을 찾다가 카네기홀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게 옷에 붙이는 백스테이지 스티커를 만나니 감회가 새롭네요. 이렇듯 살아가면서 ‘최고’, ‘최초’를 경험하는 것은 참으로 신나는 일입니다. 가수를 직업으로 삼아 살아오면서 참 많은 특혜를 누리고 참 많은 곳에서 대우를 받은 지난 시절이 생각할수록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번엔 호주로 가봅니다. 1987년 호주 공연은 연예인 공식 초청 1호였고, 우리 연예인단은 모두 이민 비자를 받아 입국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민을 꿈꾸던 그 시절! 그곳에 그냥 눌러앉아도 되는 분위기였습니다. 아마도 외국을 동경했다면 합법적인 호주 이민이 될 수도 있었겠지요. 정말 모든 게 지금에 비해 허술했던 아날로그 시대의 추억입니다. 호주에서의 잊지 못할 또 다른 추억 하나는, 교민들이 우리에게 건네준 어마어마한 선물들 때문에 공연단 일행 모두가 당시 100달러 남짓 추가 운임을 지불해야 했던 웃지 못할 일이 있었답니다. 그렇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정이 있었고 따뜻한 마음이 넘쳐났지요. 공연 마지막에는 언제나 태극기를 흔들며 ‘고향의 봄’을 함께 불렀습니다. 우리를 보내는 아쉬운 마음에 무대를 향해 눈물을 훔치며 한없이 손을 저어주시는 모습은 어디서든 똑같은 풍경이었습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유년 시절을 함께 지켜준 사람들! 평범하게 고무줄놀이, 공기놀이를 하고 가끔 풍금 치며 노래하던 남궁옥분이 이렇게 최고의 경험을 하며 최초의 역사를 간직하고 살 거라는 건 감히 생각도 못 했을 겁니다. 저도 꿈처럼 느껴질 때가 있으니…. 그렇게 준비 없이 등 떠밀려 뛰어들었던 가요계에서 이렇듯 좋은 추억이 많다는 건 축복이고 행운입니다. 언제나 제 삶 속에서 아름다운 추억으로 빛날 것이기에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래서 저는 행복합니다.
- 2021-03-04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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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흔의 남편 간호하며 얻은 '진짜 부부의 삶'과 행복
- 15년 넘게 파킨슨을 앓았지만, 왕복 네 시간 사무실을 오갈 정도로 건강했던 남편. 그러던 남편이 85세 되던 해, 갑작스러운 병고로 쓰러지며 4개월여를 병상에 누워 지냈다. 당시 아내 유선진 씨의 나이 80세. 병원에만 갇혀 사는 남편에게 다시 일상을 선사하고자 그녀는 의사의 만류에도 재가 간병을 택했다. 그렇게 남편을 돌본지 어느덧 5년이 훌쩍 지났다. 이제 남편은 아흔이 넘었고, 아내도 여든 중반이 됐다. 혹자는 인생의 황혼기에 병 수발드는 아내의 모습을 안쓰럽게 여길지 모르지만, 그 어느 때보다 현재의 부부생활이 즐겁고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녀다. 비로소 ‘진짜 부부’가 되어 사는 하루하루가 감사하다는 유선진 씨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한 평 반의 행복’을 펴내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온라인상에 제 글이 몇 편 올라가 있었어요. 여고 동문 카페랑 동생이 운영하는 카페 등등. 그런 글이 공유되다가 지금 출판사 사장님 눈에 들어온 거죠. 제 글이 마음에 드셨는지 이렇게 노부부의 생활을 책으로 엮었으면 한다고 제안하더군요. 저는 원래 수필을 써왔던 사람인데, 그 글은 남편하고 사는 일상을 틈틈이 적어놓은 거였거든요. 해서 정통 수필도 아니고, 어디 발표하려고 준비한 것도 아니라 문학성이 부족하다 느껴 출간을 주저하긴 했어요. 그런데 100세시대다 보니 저처럼 배우자를 수발하는 분이 많잖아요. 그런 분들에게 제 이야기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더군요. 감사하게도 책을 읽은 분들이 도움이 됐다고 연락을 많이 주셨어요. 조금이나마 선한 영향력을 끼친 것 같아 보람을 느낍니다. ‘한 평 반의 행복’이라는 책 제목의 의미가 궁금한데요. 우리 부부는 한 30년 가까이, 정말 오랜 세월 각방을 썼었어요. 한 사람은 야행성, 또 한 사람은 아침형이라 도저히 패턴이 맞이 않았거든요. 그러다 남편이 85세 되던 해에 쓰러졌는데, 계속 병상에 있는 걸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더라고요. 의사와 자식의 반대를 무릅쓰고 억지로 남편을 집으로 데려왔어요. 그에게 삶을 주고 싶었거든요. 당시 우연히 엄청 큰 침대가 생겼죠. 그 침대 사이즈가 바로 한 평 반이에요. 그렇게 우리는 한 침대를 쓰게 됐는데, 남편 입장에서는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삶이 가장 행복했으리라 생각해요. 지난날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잠 한번 편이 못 자본 사람인데, 이제야 비로소 잠을 아주 편하게 자거든요. 하루에 18시간 이상을 자기도 할 정도로요. 그런 의미에서 한 평 반의 침대가 그에겐 참 편안하고 행복한 공간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제목을 그리 지었습니다. 책에서 그렇게 결혼 생활 53년 만에 ‘완전 일체의 부부가 되었다’고 했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뜻인가요? 내가 나를 사는 게 아니라, 내가 그를 산다는 것. 즉, 이제야 내가 남편을 살아요. 그와 똑같이 괴롭고, 똑같이 감사하고, 똑같이 즐겁고, 매사를 한 사람인 것처럼 나를 그에게 일치시키게 되었으니까요. 간호를 하면서 보니 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내가 바로 그 사람이더군요. 그전까지는 몰랐던 감정이죠. 그런 점에서 ‘완전 일체의 부부가 되었다’고 표현했어요. 신혼 때는 각자 자기 의견이 강하고 생성이 뚜렷해서 아무리 좋아도 그런 부부 일체는 어려웠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남편이 아주 어린 아이처럼 되어버려서, 다른 의견을 가질 것도 없어요. 제가 거기에 맞추면 되니까요. 그러니 갈등도 없고 마찰도 없고, 사실 집안에서 잘 걸어 다니고 밥 씹어 넘기는 것만 해도 다행이니, 별다른 기대도 없어요. 젊은 시절에 그런 걸 감사할 사람이 어디 있나요? 그땐 당연하게 생각했던 모든 일이 감사한 요즘입니다. 재가 환자인 남편을 수발한 지 5년이 넘었는데,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인지요? 저도 천사가 아니거늘 힘들 때야 있죠. 아무래도 인지력도 많이 떨어진 상태고요. 사실 크게 힘든 점은 없는데, 남편이 퇴원하고 한동안은 식사 시간이 참 곤혹스러웠어요. 제가 간호를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바로 세끼 식사였거든요. 나름 섭생에 최선을 다해 준비했는데, 식사하러 나오는 과정에서 참 속을 썩였어요. 그때가 가장 힘들어서, 식사 시간만 잘 지켜주면 다른 건 바랄 게 없다 싶을 정도였죠. 반대로 가장 즐거운 일은 무엇인가요? 그냥 다 전체적으로 함께 살고 있다는 그 자체가 즐거워요. 무엇보다 남편이 엄청 행복해하는 게 느껴지거든요. 정말 예전에는 못 봤던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을 때가 있어요. 그런 모습을 보면 저도 참 즐겁고 행복한데, 저희 아들이 그런 말을 하더군요. 환자의 상태에 따라 너무 일희일비하지 말라고요. 환자가 상태가 좋다고 해서 기분 좋아지고, 아프다 해서 기분 나빠지고 하지 말라는 거죠. 그저 이만큼이라도 나아져서 일상을 함께하고, 그동안 잘못했던 것을 만회할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하라 하더군요. 그 말을 잘 새기고 보니 현재가 감사하고, 또 즐거운 일 천지더라고요. 사실 저는 남편에겐 아주 나쁜 아내였거든요. 아들의 조언처럼 고약하게 굴었던 지난 세월을 만회할 수 있는 지금의 시간이 참 소중하고 감사합니다. 남편과의 여생을 어떻게 보내고 싶으신지요? 남편도 아흔이 넘었고, 인지력도 거의 없다 보니 앞으로 함께할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건 알고 있어요. 그러니 지금이 한 인간으로 태어나 보내는 인생의 마지막인 순간인 거잖아요. 지금 나하고 보내는 일상을, 이 삶을 간직하고 떠나게 될 텐데, 모쪼록 좋은 기억으로 남아 ‘이 세상이라는 게 참 좋고 따뜻한 것이구나’라는 걸 마음에 품고 갔으면 해요. 그게 제 소망입니다. 그러기 위해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다정한 목소리로, 늘 웃는 얼굴로 남편을 맞이하고, 내 자신이 먼저 즐겁고 행복해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런 모습이 남편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물론 그렇게 사는 것이 제게도 충만한 삶이고요. 2021년 한 해 바람이 있다면요? 올해 1년뿐만 아니라, 매일 아침에 기도할 때마다 ‘오늘만 같게 하소서’라고 빌어요. 더 낫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오늘만 같길 바라는 거죠. 어쩌면 지금의 우리에겐 그게 가장 어려운 바람일지도 모르겠네요. 그건 어떤 물리적인 상황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제 마음이 오늘만 같길 바란다는 의미도 있어요. 하늘이 주시는 대로, 어떤 위기가 오든지 욕심 없이 감사하며 같은 마음으로 살았으면 해요. 남편도 이제 거의 노환의 마지막 단계이기 때문에 헛된 바람 같은 건 가지면 안 되거든요. 가능한 한 병원 신세 안 지고, 저하고 이렇게 오늘처럼 평안한 삶을 살다가 떠난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유선진 저자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미동초등학교, 경기여중·고를 거쳐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고, 1987년 ‘월간문학’ 수필 부문에서 신인상에 당선되며 등단했다. 2002년에 발표한 첫 수필집 ‘섬이 말한다’가 같은 해 한국문예진흥원 우수도서로 선정됐다. 현재 한국문인협회 회원이며, 2009년 산문집 ‘사람, 참 따뜻하다’, 2014년 수필선집 ‘쓴맛 단맛’, 2020년 어르신 이야기책 ‘그와 내가 있는 삽화’, ‘내 사랑 엄지’, ‘딸’을 출간했다.
- 2021-01-11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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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숫자로 알아보는 추억의 앨범들
- 가슴에서 잊히지 않는 추억 속 음악. 그 곡이 수록된 앨범은 지금까지 몇 장이나 팔렸고 현재 가격은 얼마일까. 그때 그 시절 추억의 영화음악과 희귀 음반의 가치를 살펴봤다. 추억 속에는 항상 음악이 있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즐겨 들었던 음악이나 연인과의 애틋한 시간을 만들어준 음악, 또 기쁘거나 슬픈 순간을 함께한 음악, 남자라면 군대에서 외로움을 달래준 음악도 있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이런 음악을 우연히 듣게 되면 의지와 상관없이 추억이 떠오른다. 그중에서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은 영화 속 추억의 장면으로 빠져들게 한다. 단순한 배경음을 넘어 스토리를 이끌어 몰입시키는데, 관객은 마치 자신이 영화 속 주인공이 되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런 영화음악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추억의 명곡으로 회자된다. ‘영화는 가도 음악은 남는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영화 속 OST 앨범 얼마나 팔렸나 영화 ‘보디가드’(1992년)에서 배우 케빈 코스트너가 휘트니 휴스턴을 받쳐 안았을 때 나오는 음악 ‘I´ll Always Love You’는 보디가드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로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었다. 당시 빌보드 차트 14주 연속 1위를 점령하는 대기록을 세웠으며, 이 곡이 수록된 앨범은 현재까지 가장 많이 팔린 음반으로 꼽힌다. 1993년 불황 속에서도 1000만 장 넘게 팔렸고, 현재까지 4500만 장의 누적 판매량을 기록 중이다. 1970년대 말 디스코 열풍을 전 세계로 확산한 ‘토요일 밤의 열기’(1977년)도 만만찮다. 무명 배우였던 존 트라볼타를 한순간에 청춘의 우상으로 만든 이 영화에는 영국 록 그룹 비지스의 사운드트랙 ‘Night Fever’를 비롯해 ‘Stayin´ Alive’, ‘How Deep is Your Love’ 등이 담겼다. 이 앨범에 수록된 사운드트랙 가운데 4곡은 싱글 차트 1위에 랭크되는 기록을 세웠고, 누적 판매량은 4000만 장에 달한다. 또 존 트라볼타의 영화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영화화해 대성공한 ‘그리스’(1978년)는 존 트라볼타와 올리비아 뉴튼존의 노래와 춤 앙상블로 기억된다. 이 영화 속 사운드트랙은 1978년을 미국 역사상 음반산업이 가장 맹위를 떨친 시절로 만들었다. 앨범에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Hound Dog’과 그룹 마르셀스의 ‘Blue Moon’, 리틀 앤소니 앤 더 임페리얼스의 ‘Tears on My Pillow’ 등이 수록됐으며, 현재까지 3800만 장이 팔렸다. ‘더티 댄싱’(1987년)도 빼놓을 수 없다. 영화의 마지막에 패트릭 스웨이지가 제니퍼 그레이를 양손으로 받쳐 번쩍 들어 올리는 순간은 잊히지 않는 명장면으로 회자된다. 또한 춤을 소재로 한 영화인 만큼 사운드트랙의 인기도 엄청났다. ‘The Time of My Life’, ‘Be My Baby’ 등이 수록된 이 앨범은 1998년 5월에 빌보드 차트 정상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 앨범의 누적 판매량은 3200만 장이다. 셀린 디온의 목소리도 좋지만, 연주곡도 많은 사랑을 받은 ‘타이타닉’(1997년)의 사운드트랙 역시 추억 속으로 빠져들기 충분하다. 이 영화의 음악을 맡은 제임스 호너는 웅장하면서 서정적인 선율이 돋보인 음악을 넣어 감동을 줬다. 메인 테마인 ‘My Heart Will Go On’과 ‘The Sinking’, ‘Death of Titanic’ 등은 두 남녀 주인공의 애틋한 사랑을 아름답게 승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앨범은 그동안 3000만 장이 판매됐다. ◇시대를 대변하는 ‘옛 음반’의 가치 추억을 여는 열쇠는 영화 속 명장면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살아오면서 기억에 남는 순간에는 늘 음악이 함께 있었다. 인터넷의 발달로 언제든 원하는 음원을 다운받거나 스트리밍서비스를 이용할 수도 있다. 구하고 싶은 LP(Long Playing) 음반은 인터넷 사이트나 옛 레코드 가게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찾는 앨범이 희귀 음반이라면 품을 많이 들여야 한다. 이젠 구할 수 없는 앨범도 있다. 생산량이 많지 않고, 대량 폐기됐거나 쉽게 버려진 탓에 남은 수가 매우 적어서다. 이런 희소성 때문에 소위 ‘상태가 좋으면 부르는 게 값’이다. 이런 앨범은 일부 음반 수집가만이 소유한 경우가 많은데, 이들의 거래 소식을 통해 그나마 대략적인 가격을 알 수 있다. 음반 수집가들이 뽑은 국내의 희귀 음반 중 최고가는 윤심덕의 ‘사의 찬미’(1926년)가 수록된 앨범이 꼽힌다. 이 곡은 윤심덕이 연인이었던 극작가 김우진과 현해탄에 투신하기 전 죽음을 결심하고 부른 노래로 알려지면서 당대 조선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국내에서 실체가 확인된 음반은 6장 정도로, 수집가들 사이에서 6000만 원에 거래된 적이 있다. 현재 중고음반 거래시장에서의 가격은 1억 원이 넘을 거라는 얘기도 나온다. 김연실의 ‘아리랑’(1930년)이 실린 음반은 초창기 한국 대중가요가 영화음악과 관련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현재 1000만 원이 넘는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또 베를린올림픽 마라톤대회 우승을 기념한 채규엽·손기정의 ‘마라손 제패가’(1936년) 음반은 당대 최고 가수였던 채규엽의 노래와, 손기정 선수의 당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희소성이 높다. 이 음반 가격은 1500만 원 정도로 평가받는다. 퇴폐적인 가사라는 이유로 두 차례 금지곡이 된 박신자의 ‘땐사의 순정’(1959년)이 실린 음반은 1950년대 여성들의 춤바람이 사회적 문제가 된 시대상을 반영해 수집가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 이 앨범은 200만 원에 거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조용필의 데뷔 앨범 ‘뮤지칼 사랑의 일기’(1971년)도 희귀 음반으로 구분된다. 재밌는 사실은 앨범 재킷 뒷면에 나온 이름이 ‘조영필’로 잘못 표기돼 있다는 점이다. 이 앨범은 300만 원 수준에서 거래되고 있다. ◇세상에 한 장뿐인 음반 값은 얼마? 해외에서는 비틀스 멤버들이 베트남전쟁에 반대한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 머리 잘린 인형, 피 묻은 고깃덩어리를 안고 찍은 사진을 재킷에 사용한 ‘Yesterday and Today’가 희귀 앨범에 속한다. 1966년 발매되자마자 재킷 사진 논란으로 회수 조치됐기 때문이다. 이 앨범은 지난해 경매에서 23만4000달러(약 2억7700만 원)에 낙찰됐다. 프린스의 열 번째 앨범 ‘The Black Album’은 원래 세상에 내보내지 않기로 한 앨범이었다. 1987년 프린스의 변덕으로 초판 50만 장을 출하 직전 전량 폐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홍보용 음반을 받은 관계자 몇 명이 폐기 약속을 어기고 몰래 음반을 간직하면서 희귀 앨범이 됐다. 2016년 프린스가 세상을 떠나고 1년 뒤 세상에 나온 이 앨범은 4만2298달러(약 5010만 원)에 팔렸다. 희귀 음반의 끝판왕이라면 힙합그룹 우탱 클랜의 앨범 ‘Once Upon a Time in Shaolin’일 것이다. 2008~2013년까지 녹음해 단 한 장만 찍은 앨범이기 때문이다. 우탱 클랜은 이 음반을 발매하면서 2103년까지 음반에 실린 곡들을 공개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다만 단 한 장만 존재하는 이 앨범을 파티 등 공적인 장소에서 틀지의 여부는 소유자의 권한이라고 밝혔다. 2017년 이베이에서 102만5100달러(약 12억1400만 원)에 낙찰됐다. 회현지하쇼핑센터로 떠나는 ‘추억여행’ 옛 레코드 가게가 있다는 서울 중구 회현지하쇼핑센터로 향했다. 예전에 이곳은 최신 가요와 팝송은 물론 희귀 음반도 구할 수 있다는 소문에 음악 좀 듣는다는 이들의 성지로 불렸다. 1990년대 중반까진 그랬다. 그런데 이곳을 찾은 날, 20~30대로 보이는 손님이 자주 보였다. 중장년층의 전유물로 생각했던 LP 음반인데, 최근에는 젊은 손님이 늘었다고 했다. 젊은층이 이 음반의 매력에 빠진 건 아날로그 감성 때문일 것이다. 그럴 만도 한 게 LP 음반은 모든 음역대를 왜곡 없이 담아낸다. 그러나 MP3와 CD는 고역대와 저역대의 일부를 잘라내서 인위적인 소리가 난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아날로그를 완벽히 대체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곳의 터줏대감인 리빙사를 둘러봤다. 진열대 바닥부터 천장까지 LP 음반으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다. 총 8만여 장의 중고 LP 음반이다. 음반 찾는 걸 도와 달라고 하니 직접 찾아보길 권했다. 진열장을 하나하나 넘기다 보면 예상치 못한 희귀 앨범을 발견할 수 있다고. 고른 음반은 가게 안 턴테이블에 직접 올려 감상할 수 있다. 음반이 올라간 턴테이블이 빙글빙글 돌고 카트리지의 바늘이 내려앉으니 ‘지지직’ 짧은 잡음 뒤로 음악이 흘러나왔다. 입체감이 살아 있는 묵직한 소리가 세대를 거슬러 과거와 현재를 잇고 있다.
- 2020-09-0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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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길 따라 마음 따라 고르는 취향저격 트레킹
- 트레킹의 묘미라면, 정상이나 완주를 목표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발길 닿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쉬엄쉬엄 거닐면 그뿐이다. 그렇게 어디든 걸어도 좋아서일까? 전국 방방곡곡 이름 붙은 코스만 수백여 곳. 이 길과 저 길 사이 고민하는 이들을 위해 올여름 떠나기 좋은 테마별 트레킹 코스들을 소개한다. 참고 한국등산·트레킹지원센터 및 각 지자체 홈페이지 여름에 제격, 탁 트인 해안 트레킹 ◇ 변산반도 마실길 (전북 부안군) 물때를 잘 맞춰가야 길이 드러날 정도로 해안과 인접한 코스다. 특히 1코스 조개미 패총길은 밀물과 썰물에 따라 해안 야산길과 바닷길을 선택해 걸을 수 있다. 변산해수욕장, 고사포해수욕장, 격포항, 솔섬, 곰소염전 등을 거쳐 변산반도를 크게 도는 총 13개 코스로 구성된다. [추천코스] 적벽강 노을길 산과 들, 바다를 동시에 감상하면서 갯벌체험이 가능하고 특히 석양이 아름답다. 격포항 주변 각종 해산물 맛집도 즐비함. 7㎞, 2시간 소요, 난이도 ★★☆☆ ◇ 금오도 비렁길 (전남 여수시) 남해안에서 보기 힘든 금오도 해안단구 벼랑을 따라 조성된 트레킹 코스다. 길 이름 ‘비렁’은 여수 사투리로 ‘벼랑’을 뜻한다. 함구미 마을 선착장에서 출발해 촛대바위, 매봉전망대, 온금동전망대, 숲구지전망대 등을 둘러보는 총 5개 구간으로 조성돼 있다. [추천코스] 3코스 함구미에서 배를 타면 곧바로 3코스의 시작인 ‘직포’에 도착한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기암괴석들이 이루는 장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구간. 3.5㎞, 2시간 소요, 난이도 ★★★★★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옛길 ◇ 내포문화숲길 (충남 예산군) 이중환의 ‘택리지’ 팔도총론에서 언급된 지역으로, 충청남도 최장거리 트레킹 코스다. 가야산 주변에 남아 있는 불교와 천주교 성지, 백제 부흥 운동이 일어났던 흔적들을 따라 원효깨달음길, 내포천주교순례길 등 4가지 테마의 26개 코스가 마련돼 있다. [추천코스] 22코스 여사울성지 입구에서 삽교성당까지 내포문화숲길에서 가장 긴 구간. ‘내포천주교순례길’ 중 한 코스로, 그야말로 순례하듯 오래 걷기 좋음. 23.8㎞, 7시간 소요, 난이도 ★★★★☆ ◇ 밀양아리랑길 (경남 밀양시) 삼문동 밀양강을 따라 걷는 코스로, 아름다운 풍경은 물론 옛 성곽과 읍성, 봉수대 등을 돌아보며 오랜 역사를 만나게 된다. 밀양관아에서 시작해 영남루, 밀양향교, 추화산성, 충혼탑 등을 지나는 3개 코스로, 경남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밀양시립박물관도 들를 수 있다. [추천코스] 2코스 밀양향교에서 시작해 밀양시립박물관까지, 밀양의 역사를 가장 함축적으로 느낄 수 있는 구간. 추화산성 주변으로 깔끔한 휴게시설이 마련돼 있음. 4.2㎞, 2시간 소요, 난이도 ★★☆☆☆ 거동 불편한 시니어도 OK! 무장애 코스 ◇ 가야산 소리길 (경남 합천군) 홍류동 옛길을 복원하고 다듬어 완만하게 걸을 수 있도록 조성한 저지대 수평 탐방로다. 홍류동 계곡을 따라 칠성대, 낙화담 등을 두루 살피며 길상암에서 해인사까지 걷는 단일 코스로 남녀노소 누구나 수월하게 탐방 가능하다. 2.1㎞, 1시간 소요, 난이도 ★☆☆☆☆ ◇ 주왕산 탐방로 (경북 청송군)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인 주왕산과 더불어 용추협곡, 용추폭포 등 자연경관이 빼어난 길이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환자나 노인, 유모차를 타는 아이 모두 함께할 수 있는 무장애 단일 코스로, 곳곳에 장애인 화장실과 쉼터가 마련돼 있다. 2.2㎞, 3시간 소요, 난이도 ★☆☆☆☆ 코로나19 거리 두기에 딱! 인원 한정 예약 구간 ◇ DMZ펀치볼둘레길 (강원 양구군) 민통선 북방지역 화채그릇(punch bowl) 모양의 해안분지 내에 조성된 둘레길로, 형상 자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곳이다. 미확인 지뢰지대와 인접해 탐방객의 안전과 산림자원 보호를 위해 예약제로 운영된다. 가이드와 동행해야 하며 탐방 가능 인원은 하루 200명이다(033-481-8565). ◇ 금강소나무숲길 (경북 울진군) 금강소나무숲길을 걸으며 산림유전자원 보호구역과 천연기념물 서식지를 두루 탐방할 수 있는 코스다. 오지에서의 안전한 트레킹과 산양을 비롯한 멸종위기 동·식물 보호를 위해 숲해설가 동반 없이는 탐방이 불가능하다. 구간별 하루 40명만 예약 후 입장할 수 있다(054-781-7118). ◇ 백두대간트레일 (강원 양구군·인제군·홍천군) 백두대간 트레일 코스 중 아침가리 구간(인제군 기린면~홍천군 내면)은 산림유전자원 보호구역 및 자연휴식년제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산림생태계 보전을 위해 산불 우려가 있는 봄, 겨울은 탐방이 어렵고 5~10월 중 하루 100명 한정으로 예약 후 이용 가능하다(033-461-4453). ◇ 점봉산 곰배령 탐방로 (강원 인제군) 점봉산 정상의 남동향 곰배령을 중심으로 희귀 야생화 및 산약초, 산채류 등이 다량 서식한다. 이로 인해 곰배령을 찾는 방문객이 많아지자 1987년부터 산림유전자원 보호구역으로 지정해 1일 450명 이내로 입산을 통제, 관리하고 있다(033-463-8166, 산림청 홈페이지 예약).
- 2020-07-17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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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에서 즐기는 이국적 '핫소스'
- 전세계가 매운맛에 빠졌다. 한국의 매운맛이 전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지만, 소스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다양한 나라에도 존재한다. 한국 요리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매운맛이 있는가 하면 외국의 또 다른 매운맛도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종식되지 않았고 해외로 드나드는 하늘길이 거의 막혔을 정도로 왕래가 없는 상황. 외국에 나가지 않더라도 다양한 나라를 여행하듯 즐길 수 있는 매력적인 핫소스들이 있어 소개한다. ◇타바스코 소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핫소스는 타바스코 소스다. 이름만 들으면 멕시코나 코스타리카 같은 중남미 지역이 떠오르지만 우리가 접하는 제품은 1868년 미국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매킬레니 사(社) 창업주인 의 에드먼드 매킬레니는 잘 익은 고추에 식초와 소금을 넣고 참나무통에 3년 동안 숙성 시켜 만든 소스를 ‘프티 앙스 소스’라는 이름을 붙여 판매했는데, 이후 미국 원주민 말로 ‘뜨겁고 온화한 토양’이라는 뜻의 타바스코로 이름을 바꿨다. 타바스코 하면 병에 붙은 다이아몬드 모양의 라벨 역시 하나의 상징이 됐다. 오뚜기를 통해 1987년 처음 우리나라에 수입됐으며 2018년 150주년을 맞아 함영준 오뚜기 회장과 토니 시몬스 CEO가 참석한 가운데 가로수길에서 ‘타바스코 글로벌 키친 이벤트 인 서울’ 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피자에 타바스코 소스를 뿌려 먹는 것은 굉장히 흔한 모습이 됐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타바스코 소스 하면 떠오르는 요리는 바로 피자다. 처음 미국에선 생굴과 함께 먹기 위한 소스로 인기를 끌었다. 맛과 향이 강한 탓에 보통 완성된 요리 위에 뿌려 입맛을 돋우는 데 좋다. ◇마라 소스 2019년 전후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화젯거리였던 외식 트렌드라고 하면 마라(麻辣)를 꼽을 수 있다. 영화에서 마라륭샤를 먹는 장면들이 나오고 중국 여행이나 유학을 다녀온 학생들을 중심으로 ‘혈중마라농도’, ‘마라역세권’ 등 신조어까지 만들어졌다. 이후 마라전문점이 생겨나고 다양한 제품에 적용되는 등 유행을 넘어 하나의 트렌드가 됐다. 마라 소스는 우리나라의 매운맛과는 다른 얼얼한 풍미가 매력이다. 마라는 중국에서 매운맛을 즐기는 쓰촨 지역의 소스로 육두구, 정향, 후추, 팔각 등 자극적인 향신료가 다양하게 들어간다. 그중 핵심은 화조유로 산초 열매에서 추출한 기름이다. 화조유는 얼얼한 맛을 극대화시킨다. 마라는 소스에 다양한 재료를 넣고 끓인 마라탕과 민물 가재를 마라소스로 볶은 마라룽샤, 야채와 마라 소스를 볶은 마라샹궈 등 다양한 방법으로 즐길 수 있다. 뿌려먹는 소스와 다르게 요리 전체의 풍미를 마라의 매력으로 만들어낸다.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마라 소스라 하면 ‘이금기 훠궈 마라탕 소스’를 꼽을 수 있다. 굴소스를 처음 개발한 이금기는 국내에 주로 중화권 소스들을 선보이고 있으며 마라 소스 역시 정통 중국의 맛을 느낄 수 있다. 또한 간편 소스 형태로 출시해 휴대 및 보관이 편리하다. ◇스리라차 소스 인터넷의 발달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인해 미국, 유럽의 음식을 제외한 제3세계 국가들의 요리들을 국내에서도 즐길 수 있게 됐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태국과 베트남을 중심으로 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요리다. 특히 베트남 쌀국수는 이제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정도다. 동남아시아 요리 전문점에 가면 꼭 볼 수 있는 소스가 있는데 바로 스리라차 소스다. 스리라차 소스의 기원은 태국인데 미얀마 출신 노동자들이 시라차(Si Racha)로 이주해 만들었다는 설과 시라차 마을 출신 여성이 방콕으로 이주해 만들었다는 설이다. 스리라차 역시 타바스코처럼 음식위에 뿌려 사용되는 경우가 많으며 동서양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어울리는 것이 특징이다. 스리라차 소스는 다양한 브랜드에서 생산되고 있어 각자 자신에게 맞는 브랜드의 스리라차 소스를 찾는 것이 좋다. ◇촐룰라 핫소스 우리나라만큼 맵부심을 가진 멕시코의 대표 핫소스도 최근 국내 수입 식품관에서 찾을 수 있다. 멕시코의 대표적인 핫소스인 촐룰라는 아르볼고추와 삐낀고추를 향신료와 조화시킨 핫소스로 촐룰라라는 이름은 멕시코의 가장 오래된 도시의 이름을 따왔다. 멕시코와 인접한 미국의 레스토랑에서도 만나볼 수 있으며 신맛은 거의 없다. 멕시코 음식인 나초나 타코 또는 햄버거나 피자 등 다양한 요리에 곁들어 먹을 수 있다.
- 2020-07-0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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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대 총선 민주·시민 압승, 180석 '공룡여당 탄생'
- 제21대 국회의원 선거가 더불어민주당과 더불어시민당의 압승으로 막을 내렸다. 민주당은 지역구와 비례대표에서 180석을 차지하며 ‘공룡여당’으로 탄생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16일 오전 6시 40분 현재 전국 개표율은 99.4%를 기록 중이다. 민주당은 지역구 253석 중에 163석, 미래통합당은 84석, 정의당은 1석, 무소속은 5석을 확보한 것으로 집계됐다. 비례대표의 경우 같은 시각 개표율 95.0%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미래한국당 34.1%, 더불어시민당 33.2%, 정의당 9.5%, 국민의당 6.7%, 열린민주 5.3%, 민생당 2.7%를 기록 중이다. 이 결과로 의석수를 환산하면 미래한국당 19석, 더불어시민당 17석, 정의당 5석, 국민의당 3석, 열린민주당 3석이 예상된다. 합산하면 더불어민주당과 더불어시민당이 총 180석을 차지한다. 통합당과 미래한국당은 103석, 정의당은 6석, 국민의당은 3석, 열린민주당은 3석, 무소속은 5석 순이다. 이로써 더불어민주당과 더불어시민당은 전체 의석수의 5분의 3을 차지하며 공룡여당이 됐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전례 없는 일이다. 국회의 5분의 3을 확보하면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법안을 단독으로 처리할 수 있어 사실상 개정 국회법인 선진화법을 무력화할 수 있다.
- 2020-04-16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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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증시 '최악의 1분기'··· 다우 전장대비 1.84%↓
-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미국 뉴욕증시가 최악의 1분기를 맞았다. 최근에는 이틀 연속 랠리에 실패하면서 3대 지수가 모두 하락했다. 31일(현지시각) 우량주 중심의 다우존스30산업평균지수는 410.32포인트(1.84%) 떨어진 2만1917.16에 거래를 마쳤다. 대형주 중심의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는 42.06포인트(1.60%) 하락한 2584.59에,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종합지수는 74.05포인트(0.95%) 내려간 7700.10에 각각 장을 마감했다. 올 1분기를 살펴보면 다우지수와 S&P500지수는 각각 23.2%, 20.0% 떨어졌다. 특히 다우지수의 손실폭은 1987년 이후 33년 만에 가장 컸다. 또 S&P500지수의 손실도 2008년 이후 최대치를 나타냈다. 뉴욕증시의 하락은 코로나19 확진자의 가파른 증가로 투자심리가 수그러들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뉴욕의 누적 확진자는 7만6000명을 넘어 최초 발병지인 중국 후베이성보다 많은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 전역에서 코로나로 인한 사망자도 3393명으로 중국을 넘어섰다.
- 2020-04-01 1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