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세라니? 전혀 믿기지 않는다. 주혜란 박사의 몸매와 패션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사람은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자칭 타칭 한량인 이봉규가 그동안 수많은 여인을 만나봤지만 70세가 넘은 섹시한 여성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보다 열 살이나 많은 누나인데 딱 달라붙는 원피스에 망사스타킹을 입고 춤추며 노래하는 모습은 언뜻 스치듯 보면 40대로 보인다.
아무리 자세히 관찰해도 스테이지에 선 그녀의 모습은 최소한 스무 살은 젊어 보인다. 한량의 잣대로 좀 더 솔직하게 외모를 분석한다면 몸매는 30대이고 얼굴은 50대, 목소리는 60대로 보인다. 71세에 신인 가수로 활동하면서 제2의 인생을 만끽하고 있는 그녀는 인생은 70부터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갓 잡아 올린 생선처럼 에너지가 넘친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와 레이 찰스의 ‘I Can′t Stop Loving You’를 멋들어지게 부르면서 흑인들이나 취할 수 있는 몸짓을 한다. 얼마 전 그녀의 하우스콘서트에서 라운지를 꽉 메운 100여 명의 관객들은 그녀의 노래와 춤과 섹시한 모습에 흠뻑 취했다.
주혜란 박사의 과거가 얼마나 화려했고 집안이 대단하건,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단지 지금 주혜란의 70대 가수 인생에서 펼쳐지고 있는 모습에 박수를 보낼 뿐이다.
콘서트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그녀의 재능도 대단하고 용기도 높이 평가하고 즐길 줄 아는 철학도 존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는 무대에서 마치 ‘Bravo My Life!’를 온몸으로 토해내는 것 같다.
사실 그녀가 살아온 이력과 집안 내력을 알면 지금 스테이지에서 열창하는 모습은 조금 생소하고 과하게 보일 수도 있다. 1975년 고려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그 이듬해에 충북 청원군에 있는 작은 마을 보건소에 소장으로 부임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보건소장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그 후 UN과 워싱턴 정가에서 에이즈 퇴치운동 등 각종 국제적인 사회활동을 하면서 특유의 친화력과 유창한 영어 소통 능력으로 이름을 알렸다. 힐러리 클린턴, 카터 전 대통령 부부와도 인연이 깊다.
김대중 대통령을 오빠라고 부르는 누나
1984년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도 만나 친해졌다. ‘오빠’라는 호칭으로 스스럼없이 지낼 정도였다.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인 임창렬(전 경기지사) 씨와 데이트를 하면서 결혼을 망설일 때도 DJ의 조언이 결정적이었다고 털어놓았다. “똑똑한 사람 같다”는 DJ의 말에 결혼을 결심했다.
임창렬 전 지사와는 산전수전 다 겪고 살다가 이혼하고 지금은 친구처럼 지낸다고 한다. 임창렬 전 지사와 부부 관계일 때 정치적으로 성공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유명해진 탓에 불필요한 오해도 많이 받고 살았다. 그때만 생각하면 천당과 지옥을 한꺼번에 오간다. 그 당시 구속도 당하면서 “이것이 정치구나!” 통감했다고 회상한다. 세월이 지난 지금 또다시 그때의 일을 자세하게 묻는 것은 실례가 될 수도 있고 행복한 그녀의 지금 삶을 방해하기 싫어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 당시 노래가 아니었다면 아마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서 진작 죽었을지도 모른다. 양평 강가에서 스트레스 풀려고 목이 터져라 노래하면서 돌아다녔다”고 주저 없이 말하는 주혜란의 모습에서 처음 어두운 표정이 묻어나온다.
부친 주인호 박사 그리고 100세 모친
주혜란이라는 이름과 ‘Helen Chu’라는 영문 이름은 이승만 박사가 지어줬다고 한다. 예방의학계의 개척자이자 주혜란 박사의 부친인 주인호 박사는 27세 때인 미군정 시기 의정국장(醫政局長, Medical Police) 자리에 있었는데 인연이 된 이승만 박사가 딸(주혜란)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주인호 박사는 함경도 함흥 출신으로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보건’이라는 단어를 한국에서 처음 사용했고 한국에 노인대학을 최초로 설립한 분이다(2000년 80세로 타계). 아프리카 대륙을 돌본 한국의 슈바이처로 알려진 분이기도 하다.
그는 1996년부터 17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세계보건기구(WHO) 수석고문관으로 활동하면서 각종 전염병 퇴치에도 앞장섰다. 세계 최초로 일본뇌염바이러스 분리에 성공한 의학자로서도 명성이 자자하다. 이 정도로 세계가 알아주는 의사였는데도 “아버지는 평생 자가용보다는 버스나 전철을 이용하시고 검소한 삶을 사신 분이었다”고 딸 주혜란은 말한다. 아버지 생각만 하면 존경심이 저절로 묻어나온다.
주인호 박사의 제자 중 한 명은 2000년 8월 9일 중앙일보 홍혜걸 의학전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3남 4녀 모두 해외로 유학을 보냈기 때문에 일부에선 재력가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왕십리에 있는 허름한 18평 자택에서 살고 있다. 무소유의 철학을 평생 실천하고 사신 분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녀의 어머니도 신여성 엘리트로서 아버지 못지않았다. 이화여자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고 서울여자의대(현 고려대 의대 전신) 출신의 의사였으며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일어, 이탈리아어 등 6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올해 100세인데 작년까지만 해도 아침에 피아노와 가야금을 연주할 정도로 총명했고 혼자 미국 여행을 할 만큼 건강했다. 그런데 3월 초에 갑자기 치매 판정을 받아 지금은 병원에서 요양 중이다. 갑자기 치매가 발명한 이유는 올해 미국을 방문하려니까 작년까지 요구하지 않던 진단서를 갑자기 가져오라 하더라는 것. 어머니는 “내가 의사인데… 내가 건강하게 여행을 할 수 있다는데… 100세가 되었다고 작년까지 요구하지 않던 진단서를 요구하다니… 나도 이젠 죽을 때가 되었구나!” 하는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그래서 치매로 이어진 게 아닌가 하고 주혜란 박사는 추정하고 있다.
71세 된 딸이 100세 어머니가 조만간 자기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어 바쁜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병원을 찾는다 한다. “70년 동안 ‘엄마’를 부르며 살다가 엄마의 삶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슬프다”고 말하며 그녀의 눈은 어느새 충혈된다.
“너무 바빠서 늙을 시간도 없다”
분위기를 바꿀 겸 해서 조심스레 물었다. “100세나 되시고 작년까지 미국 여행도 다니실 정도로 건강했으면 어머님이나 딸인 주 박사도 여한이 없는 것 아닙니까? 욕심이 크신 것 아닙니까?”라는 이봉규의 우문(愚問)에 주혜란의 현답(賢答)이 돌아왔다. “어머님이 몇 년 만이라도 더 건강하게 살아주셔서 행복한 시간을 같이 보내주길 바라는 것이 인간의 욕심”이라고 말하며 살짝 미소를 띠웠기 때문에 분위기가 다소 진정되었다.
사실 그녀의 어머니는 아프리카 지역 5개 나라 대통령의 주치의를 하셨고, 불과 몇 년 전까지 연천 통증의학과에서 90대 중후반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열심히 환자를 돌보셨기 때문에, 비록 100세라고는 하지만 갑자기 치매 판정을 받은 사실을 어머니나 주혜란 박사도 믿지 못하고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가 100세 직전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셨기 때문일까. 주혜란은 늘 “노인들이여, 움직여라, 행복할 때까지!”를 주창하고 다닌다. 대한노인회에서 의료봉사단장을 비롯해 문화, 예술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면서 최근 서울시노인회의 행복건강이사를 맡아 ‘노인행복전도사’를 자청하고 나섰다. 본인도 71세의 노인이지만 “너무 바빠서 늙을 시간도 없다. 신바람 나게 생활하면 젊어진다”고 힘을 주어 강조한다.
유식하고 에너지 넘치고 늙음을 거부하는 주혜란은 어느 인터뷰에서 멋진 말을 남긴 적이 있다.
“If I rest, I rust!(쉬면 녹슨다). 이 말은 플라시도 도밍고가 인생의 모토로 삼고 있는 문구입니다. 저 역시 이 말에 100% 동감합니다. 노년이라는 상황을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건강하고 즐겁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봉규가 아무리 평론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주혜란의 과거 사교계와 정치계의 경력을 이제 와서 가타부타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71세의 나이에 가수로 제2의 인생을 신바람 나게 한바탕 놀고 있는 그녀가 지금은 무척 존경스럽다.
여자들보다 많다. 전문 메이크업 아티스트도 입을 쫙! 하고 벌렸다. 집 안방을 빼곡하게 차지한 아이들(?)의 정체. 스튜디오 사무실 가장 좋은 곳에 자리 잡은 때깔 요망진 것들! 바로 형형색색 다양한 모습의 화장품이다. 그렇다면 주인은 여자? 아니 남자다. ‘댄서킴’으로 불리던 개그맨 김기수가 웃음보따리가 아닌 화장 도구를 들고 나와 대박을 터트렸다. 들어는 봤는가? 뷰티크리에이터 김기수! 어둠 속에서 ‘예뻐지고 싶다!’를 외치던 남자들이여, 이제 당당히 세상 밖으로 나와 김기수와 함께 꽃단장 한번 제대로 해보자.
화장하는 남자의 편견을 깨다
웃기는 일로 오랫동안 사람들 앞에 섰던 김기수. 그가 2016년 11월 말, 세련된 화장을 하고 나와 자신을 뷰티크리에이터라고 소개했다. 뷰티크리에이터란 소위 화장을 통해 ‘예뻐지는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 그는 현재 동영상 사이트인 유튜브(youtube.com)와 포털사이트의 동영상 서비스를 통해 ‘꾸미고 가꿔 돋보이게 하는 방법’을 전파한다. 개인 채널과 SBS 모비딕의 ‘예쁘게 살래? 그냥 살래?’를 진행 중. 1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1억 뷰 돌파! 전 세계 1억 명 이상이 그의 동영상을 시청했다는 뜻이다. 이 여세를 몰아 작년 말 SBS 연애대상에서 모바일 아이콘 상과 한국분장예술인협회에서 주는 메이크업 어워드를 수상했다. 올 초 화장법 노하우를 담은 책 ‘예쁘게 살래? 그냥 살래?’를 출간했고 3월 말에는 자신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운 화장 제품도 출시한다. 북유럽 국가인 노르웨이의 한 방송에서도 김기수를 찾아왔을 정도이니 인기는 상상 그 이상. 대세 중에서도 대세가 바로 맨즈(남자) 뷰티크리에이터 김기수다.
불모지를 앞서 걷는 펭귄의 길을 택하다
개그맨이 아닌 뷰티크리에이터로 전향을 하고 영상을 만들어 인터넷에 올리는 그 과정이 어찌 보면 홧김(?)으로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다. 김기수는 무대 화장을 한 사진을 인터넷에 올렸다가 악성댓글에 시달렸다고. 특히 어머니를 욕하는 것은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중국에서 클럽 DJ로 활동하던 시절이었어요. 제가 트렌스젠더가 됐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졌어요. 트랜스젠더가 됐네, 돌려 깎기를 했네, 성괴(성형괴물)네. 일주일 동안 실시간 검색어 1위에서 제 이름이 내려오지 않는 거예요.”
김기수의 성 정체성에 대한 논란은 늘 있어왔지만 자신의 발언으로 성 소수자들이 눈총받을까 말을 아꼈단다.
“나는 그저 내 화장 실력으로 얼굴을 가꾸어서 무대에 올라간 건데 왜 중국 성괴 같다고 그러지? 제가 당시 칩거하고 힘들어하니까 지인과 팬들이 ‘오빠 화장하는 거 영상을 인터넷에 올려보세요’라고 하는 거예요. 저도 유튜버(동영상 사이트에 영상을 올리는 사람) 남성분들의 젠더리스 메이크업(성별을 구분하지 않는 화장)을 많이 눈여겨봤었어요. 그럼 나도 저렇게 해볼까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컴퓨터를 잘 다루지도 못했지만 제대로 해볼 생각에 영상 편집을 배워나갔다. 한 달 동안 하루에 한 시간 자면서 영상을 올렸다. 첫 영상을 올리고 난 뒤 일주일 동안 댓글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이 ‘저 정도의 화장 실력이라면 자랑할 만하네?’ 했고, 저를 싫어하던 사람들이 팬으로 돌아서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어요.”
김기수는 자신이 뷰티 채널을 시작하고 1년 사이 사회적으로 맨즈 뷰티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실제로 맨즈 뷰티 산업이 크게 성장하고 있고 화섹남(화장하는 섹시한 남자), 잘생쁨(잘생기고 예쁨)이라는 신조어도 김기수의 등장과 함께 생겨났다. 남성이 당당하게 멋져지고 예뻐지는 시대를 김기수가 열었다고 해도 실로 과언은 아니다. 그는 대열 앞에 서서 걸어가는 퍼스트 펭귄(First penguin)이 바로 자신이라 생각한다.
“누군가가 저에게 화장을 하지 말라 하면 지금 제 일을 그만두라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리고 남자가 이렇게 화장을 하고 있는데 그 정도의 루머가 또 돌지 않는다면 나는 이일을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에요. 관심이 있어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구나. 물론 처음에는 분했어요. 활동을 접을 생각도 했고요. 무엇보다 지금은 저에게 많은 질문을 하십니다. 남자분들도 용기를 내서 화장법에 대해 묻고요. 그런 분들을 도와드리는 것이 제 일이죠.”
분장실 옆 아역 탤런트, 화장에 눈뜨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언제부터 화장에 관심이 있었던 것일까? 뜬금없이 왜? 남자 개그맨이? 그리고 근육 팍팍 보이면서 클럽 DJ를 하는 남자가 언제부터 화장에 심취했을까?
“중학교 때부터 아역 탤런트를 했는데 그때 화장에 관심이 생겼어요. 야외 촬영 현장에서 평범한 중년의 엑스트라 두 분이 트레일러에 마련된 간이 분장실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아름다운 사람이 돼서 나오는 거예요. 너무 놀라웠어요. 쇼킹했어요. 그곳이 마치 마법 상자처럼 보였어요. 불꽃이 막 파파팍! 튀는 느낌?(웃음)”
촬영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계속 분장실을 드나들었다.
“그랬더니 분장사 누나가 저에게 선크림하고 크림을 주더라고요. 써보라면서요. 다음 날 그걸 바르고 현장에 나갔는데 감독님이 ‘야, 너 왜 이렇게 예뻐졌냐?’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대사 한마디 더 주시더라고요. 자신감이 붙었다고나 할까요? 그다음부터 선크림에 맞는 수분크림과 립스틱을 찾고 또 뭔가 발견하고. 코덕(화장품과 덕후의 합성어)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어린아이였음에도 주위의 시선 때문에 다락방에 숨어 화장을 했다. 그때만 해도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극명했다.
“지금도 남성이 화장하는 걸 이상하게 보는 면이 있지만 그때는 더 심했죠. 남자는 화장을 하면 안 된다 뭐 이런 거요. 저 어렸을 때는 크림 바르고 밖에 나가는 남자가 몇 안 됐어요. 저 혼자 그냥 다락방에서 뭐든 발라보고, 어울리는 색을 찾아보면서 저만의 재미에 푹 빠져버렸어요. 어떻게 그렇게 숨어서 했는지 나도 참 기특해.(웃음) 그렇게 30년 동안을 해왔고, 지금 빛을 발하고 있는 거죠.”
남자들이여! 당당히 화장대 앞에 서라!
김기수가 갑자기 목소리를 죽이며 기자에게 물었다.
“요즘 시니어 남성분들 등산 배낭에 뭐가 들어 있는 줄 아세요?”
바로 BB크림이랑 틴트란다. 모두가 그렇다는 뜻은 아니고 꽤 된다는 말. 그들은 곧바로 목적지로 직행하는 것이 아니다. 공중화장실에 들러 BB크림과 틴트를 바른 뒤 산행을 시작한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냐 했더니 뷰티크리에이터로 일하다 보니 그런 얘기들이 너무나 잘 들려온다 했다. 김기수의 채널 구독자 중 BB크림 바르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50대 중반의 남성도 있었다. 올리브영 맨즈뷰티 코너를 서성이는 시니어 남성에게 제품을 권해드리기도 했다.
“사실 남자들이 그루밍하는 것에 편견이 있으면서도 관심들은 다 가지고 계세요. 제가 예약하려던 눈썹 문신 전문점은 3개월 이후나 돼야 예약이 가능하다고 했어요. 80%가 남성 손님이고요. 성형외과 전문의와도 얘기한 적이 있는데 실 리프팅 하러 오시는 중년 남성들이 꽤 많다고 해요. 그렇게들 몰래몰래 자기 관리하면서 화장을 하는데 저는 왜 안 되는 거죠? 관심은 있으면서 대놓고 표현하지 못하는 거뿐이잖아요.”
요즘 김기수의 개인 채널에는 남성들을 위한 화장법을 모아 따로 분류해놓았다.
“3년 동안 취직 안 됐던 남성분이 제가 알려드린 화장을 한 뒤 면접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해왔어요.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이에요. 붙었다고 하잖아요. 요즘은 자기관리 잘하는 남자가 칭송받는 시대예요. 깨끗한 인상 주는 게 나쁜 게 아니잖아요.”
제발 좀 꾸미고 멋져지고 싶은 남자들이 숨지 말고 나와서 당당해졌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삶에서 행복을 충전하는 최고의 방법은? 좋은 사람들과 여행을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라 한다. 그것을 다하며 사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중견 여행사 ‘베스트래블’을 경영하는 음식·여행 칼럼니스트 주영욱 대표(57)가 그이다. 이외에도 사진가, 팟캐스트 DJ를 비롯해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며 노는 게 일이다. 그의 별명은 문화 유목민, 호모 루덴스(유희하는 인간)다. 한마디로 노는 사람이다. 마케팅 리서치 분야에서 25년을 일해온 그는 2013년 52세의 나이에 여행사를 창업, 인생 2막을 ‘문화유목민’으로 살고 있다. 뛰는 사람에서 ‘튀는 사람, 노는 사람’으로 변하게 된 그의 인생 2막 이야기를 들어보자.
주영욱 대표는 여행, 음식은 물론이고 미술, 음악, 사진 모두 전문가 수준의 취미를 갖고 있다. 57세, 보통 사람은 이제 버킷리스트를 쓰기 시작할 때다. 그는 하나씩 실행해나가며 지워나가느라 오히려 홀쭉하다. 고교 시절부터 꿈꿨던 DJ의 꿈은 팟캐스트 활동으로, 음식 칼럼을 쓰고 싶다는 꿈은 중앙일간지 연재를 통해 실현했다. 이외에도 가상역사소설, 공상과학소설로 저술을 준비하는 등, 그의 꿈은 산지사방 전 분야에 걸쳐 뻗쳐 있고 진행 중이다.
얼마 전 그는 왼쪽 팔목에 ‘매버릭’(Maverick, 개성이 강한 사람)이란 문신을 새겼다. 이순(耳順)을 바라보는 나이에 20대 젊은이들처럼 멋부리기 유행을 타서도, 폭력배처럼 위협을 주기 위해서도 아니다. 매버릭, 말 그대로 개성이 강한 사람으로 편견과 습관에 갇혀 살지 않겠다는 자기다짐이고 자유선언이다. 그는 “세상의 터부 내지 스스로의 금기를 깬 느낌 때문인지 시원했다”며 “세상에 길들여져 탈색되지 않는 자유인으로 살겠다는 의미에서 했다”고 말했다. 그가 정기적으로 단식과 명상을 하며 몸과 마음을 함께 비우는 것도 본질과 개성을 찾기 위한 일환이다. 그는 비우고 내려놓고 편견의 곁가지를 쳐내야 핵심에 집중해 생생해진다고 말한다. 삶이나 몸이나 생각이나, 심지어 음식의 맛도….
마케팅 리서치 분야에서 25년간 일하며 미국, 일본, 프랑스 글로벌리서치 사의 한국법인 CEO를 두루 역임하셨습니다. 52세의 나이에 이종 분야 창업을 하신 게 특이합니다.
“경영상 이견으로 외국 회사 한국법인 CEO를 그만두고 됐어요. 20대 때부터 몸담아온 마케팅 리서치 일을 다시 할까도 생각했어요. 마케팅 리서치는 최적의 대안을 찾아내 본질에 집중하는 일이거든요. 제 성격의 완벽주의랑 맞아 신나게 일했어요. 25년 가까이 해오다 보니 스스로 타성이 느껴지더군요. 현재의 삶에 그럭저럭 안주하는 내 모습이 싫어졌습니다. 아직 젊은데 작은 성공에 취해서 한 달에 보름씩 골프를 쳐가며, 이렇게 살아도 되나 불안하기도 했고요. 재미가 제 삶의 중요 요소예요. 좋게 말하면 글로벌 마인드, 나쁘게 말하면 역마살이라고나 할까요. 익숙한 길보다 가지 않은 길, 새롭게 흥분할 수 있는 것에 도전하고 싶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나를 던지고 싶었어요.”
주 대표께서 생각하는 여행의 재미와 의미는 무엇인가요.
“여행의 가장 큰 의미는 사람을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사고를 유연하게 해줘요. 이분법적 사고에서 절로 벗어나게 한다고나 할까. 여행 가면 늘 낯선 환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룰을 따르고 새롭게 생각해야 하잖아요. 그런 게 제 성격에 맞아요. 철이 안 들어서 그런가봐요. 추하다vs아름답다, 옳다vs그르다의 이분법적 사고를 벗어나게 해줘요. 편견을 깨야 한다는 걸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지요.”
그는 인도 여행을 갔을 때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떤 초라한 행색의 인도인이 자기 배를 타달라고 호객 행위를 심하게 하더란 것. 다음 날 아침 숙소 앞에서 넘어져 잠깐 쉬고 있을 때였다. 그가 다가오기에 또 호객 행위를 하러 온다고 생각해 자신도 모르게 짜증을 냈다고. 알고 보니 약을 주려고 온 것이었다. 그는 “겉만 보고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여행지에서 매번 시시각각 깨닫는다고 털어놓았다.
여행을 좋아하는 것과 여행 사업을 하는 것은 별개인데요. 창업을 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었어요. 첫 번째는 고품격 여행 상품을 개발하고 싶었어요.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 하잖아요. 저는 그게 여행 자체가 아니라 프로그램의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400회 이상 해외 여행한 경험이 있으니 그런 기획을 잘할 거라고 생각했지요. 여행 계획을 짜면 모두들 즐거워하며 ‘이런 프로그램은 여행사도 못 짠다. 너, 나중에 여행사 차려라’ 하고 농담할 정도였거든요. 두 번째는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에 여행업은 미래 산업으로 성장 가능성이 있다고 나름 판단했지요. 세 번째는 인맥에 대한 자신감이었지요. 제가 온갖 모임의 총무, 회장을 맡아 마당발이었거든요. 아는 VIP들만 모객해도 걱정 없겠다 생각했지요. 금방 착각임을 깨달았습니다만….”
즐기던 여행을 막상 사업으로 해보니 어떻던가요.
“일과 취미는 전혀 달라요. 지금까지 여행사를 하며 실제 고객은 모르는 분들을 개척한 거예요. 아는 사람과 도와주는 사람은 전혀 별개예요. 처음엔 섭섭하기도 했는데요. 그게 인지상정이에요. 나도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친분보다 전문성을 갖고 냉정하게 판단하거든요. 인생 2막, 새로 도전하면서 과거 인맥을 바탕으로 뭘 해보겠다는 사람을 보면 적극 말려요. 사업은 아는 사람 믿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준비와 자금력을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기본인데도 잊기 쉬워요.”
그는 “내가 여행상품 기획은 잘하니 호텔, 항공료 절감 등 원가 관련 문제 같은 부족한 실무 요소는 남을 통해 보완하면 되겠지 하고 안이하게 생각한 것도 실수였다”며 “사장이 큰 그림 보며 해야 할 일을 직원이 대신 해줄 수는 없더라”고 말했다. 만일 창업 초기로 돌아간다면 여행 가이드를 하든, 자격증을 따든, 직원을 하든 현장에서 밑바닥 경험을 1~2년 반드시 해보겠다고 털어놓았다. 그나마 자신은 충분한 투자금을 확보해놓고 시작해서 버틸 수 있어 다행이었다는 고백이었다.
그가 히트를 친 것은 고품격 테마여행 중국 장강삼협 크루즈 관광상품 출시다. 동종 상품의 3~4배 가격으로 고품격의 명품패키지를 기획한 게 먹힌 것이다. 2016년 그는 여행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해외여행자와 서비스 제공자(여행사/랜드사/가이드/해외교민/유학생 등)를 직접 연결시키는 맞춤형 여행 도움 플랫폼 ‘티비스켓’을 창업해 사업 영역을 넓혔다.
주 대표는 “얼핏 마케팅 리서치 경력이 여행업과 상관없어 보이지만 결국은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마케팅 리서치의 본질은 옥석을 가려 최고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라며 “이는 여행업에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설명했다. 직관적으로 ‘좋다, 나쁘다’로 끌리기보다 호기심의 본질과 원인을 분석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주 대표와 대화를 하며 특이한 모습을 발견했다. 인생의 우선순위로 재미를 이야기하고, 본인도 재미있게 살지만,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거나 유머가 넘치는 편은 아니었다. 첫째, 둘째, 셋째 하는 식으로 정리를 해서 설명하고 단어의 정의를 내린 후 논리를 전개해나가는 방법으로 대화를 했다. 알고 보니 그는 우리나라 상위 2%의 지능지수를 가진 사람들의 모임인 멘사 회장을 지냈다.
음식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시지요. 일간지에 연재도 하셨고 ‘이야기가 있는 맛집’이라는 책까지 내셨습니다. 일반 음식 칼럼과는 달리 식당 셰프, 사장의 인생 사연을 곁들이는 게 특색이더군요. 잘되는 식당의 비결은 무엇이던가요.
간단히 말하면 기본에 충실한 식당입니다. 말은 쉬운데 오래 유지하긴 어려워요. 이런저런 핑곗거리와 유혹 때문에 넘어가기 쉽거든요. 유명한 집과 맛 좋은 집은 달라요. 진정한 맛집의 음식에선 주인의 정성과 열정이 느껴져요. 손님을 지갑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음식 자체에 자부심을 가진… 결국 음식은 재료맛, 손맛, 칼맛의 조합이거든요. 주인의 정성이 깃든 음식은 첫맛, 중간맛, 끝맛이 일관되게 같아요. 단맛이나 자극적 조미료로 맛을 낸 음식은 첫입엔 당기지만 끝맛이 좋지 않아요.”
주 대표는 ‘맛집을 고르는 비결’로 2가지를 귀띔해줬다. 사장이 직접 요리하는 곳, 오랜 전통을 가진 곳, 이 두 기준으로 고르면 틀림없다는 것.
요즘 상(上)남자는 상(床)남자, 상 차리는 남자란 농담도 있더군요. 집에서 요리를 잘 하십니까.
“한동안 열심히 배웠지요. 내 손으로 메뉴에 따라 음식을 만드는 게 신기하더라고요. 의욕이 넘쳐 비싼 칼이랑 파스타 냄비만 잔뜩 사놓고선 그만뒀어요. 손이 입을 못 따라가 중년 남자의 작심삼일 셰프놀이에 그쳤지요.(웃음) 애들이 먹지 않으니 요리할 마음이 없어지더군요. 그냥저냥 요리는 재미있는데 뒷정리 설거지하는 게 너무 힘들어요. 아내의 고마움을 뒤늦게 깨달았답니다. 요리를 배우겠다는 동년 친구들에게 충고해주는 게 있습니다. 음식 맛은 고가의 장비랑 상관없으니 비싼 그릇과 도구는 사지 말라고요. 고급 골프채를 새로 샀다고 골프 스코어가 바뀌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말해주지요.”
음식 칼럼니스트가 꼽는 최고의 음식은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제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 하는 음식은 아내가 해준 김치찌개입니다. 힘들고 지쳤다가도 돼지고기 넉넉하게 넣고 끓인 김치찌개만 먹으면 마음이 순식간에 풀려요. 나의 소울 푸드라고나 할까요. 밖에서 일하느라 바쁘고 지친 와중에서 집밥 해주는 정성을 알기에 일절 불평 없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반찬투정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답니다. 음식은 입보다 마음으로 먹는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해주셨던 소박한 집밥 한 끼가 어느 산해진미보다 더 맛있게 기억되는 것도 그 때문이지요.”
최근 아프리카 여행 때는 가수 휘성 씨 뮤직비디오 촬영도 하셨다면서요. 산악자전거 타기, 사진가, 종횡무진 다양한 활동을 하시는데요. 앞으로의 꿈은 무엇인가요.
“여행 관련 콘텐츠를 만들어 여행 전문 케이블 TV를 만들고 싶어요. 경영자로서 저는 수치에 그렇게 밝은 편이 아닙니다. 선한 영향,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사업이 자리가 잡히면 직원들을 소사장으로 만들어 파트너 관계로 경영하고 싶어요. 좋은 음식이 그렇듯 뒷맛이 좋고 오래가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어머니의 김치찌개같이 질리지 않고 따뜻한 사람으로요.”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그가 핸드폰을 꺼내 자신이 DJ로 활동하는 맛집탐방 팟캐스트를 들려주었다. 촉촉한 7080의 감성 어린 목소리로 사연을 곁들여 맛집을 소개하고 있었다. ‘꿈이 있는 자는 늙지 않는다’고 했던가. 다음에 만날 때 그가 얼마나 더 ‘홀쭉해진’ 버킷리스트를 갖고 나타날지 궁금해졌다. 그때 같이 먹을 추천 식당도….
서둔야학교 학생 중 몇 명은 주로 인근에 있는 ‘푸른지대’로 일당을 받고 일을 다녔다. 푸른지대는 그 당시 딸기로 유명한 곳이어서 5월 말에서 6월 중순까지는 서둔벌이 온통 선남선녀의 물결이었다.
농대 후문에서 도보로 3분 이내 거리의 유원지로 개발이 잘된 푸른지대는 갖가지 수목이 우거졌는데 커다란 백합나무가 군데군데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빨갛게 핀 해당화, 아침 이슬을 머금고 보랏빛 또는 흰색으로 청초하게 빛나던 아이리스, 꽃말이 ‘젊은 날의 추억’이라는 라일락의 보랏빛 향기, 기품 있는 여인의 자태. 목련이 있었고, 주목, 눈향나무 등의 관목들도 곳곳에 자리해 있었다.
푸른지대 주인집은 많은 화초가 우거진 곳에 들어앉아 있어서 언제 봐도 녹색 지붕의 빨간 벽돌 집은 ‘꿈의 집’이었다. 왼쪽의 커다란 2층 건물은 식당으로 썼고 오른쪽에는 딸기 판매점이 있었다. 그중 철골조로 둥근 아치를 만들어 그 위에 등나무를 얹었는데 보랏빛 등나무꽃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 아련했다.또 정원 중앙에는 연못이 있었는데 그 가장자리로도 수국, 해당화, 장미 등이 피어 있었고 집 앞에는 함박꽃의 자줏빛 웃음이 흐드러지곤 했다.
아침 8시쯤에 일을 나가면 우선 딸기를 담는 채반부터 물에다 불려서 솔로 닦아 헹군 후 건조시켜야 했다. 5월의 태양은 눈부셨고 초록빛 타원형의 잎사귀 밑에는 빨갛게 익은 딸기가 수줍게 숨어 있었다. 이제 막 하얀 꽃이 핀 것도 있었고 대개는 중심이 되는 가지에 아직 익지 않은 올망졸망 크고 작은 열매들이 달려 있었다. 익은 것은 딸기 한 그루에 한 개 또는 두 개 정도였고 어느 것은 아예 익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침 이슬이 딸기 잎에 맺혀 있다가 딸기를 따려고 잎사귀를 젖히면 딸기 밑에 깔아둔 볏짚 위로 이슬 진주가 '또르르’ 굴러내리곤 했다. 또 어느 때는 조그맣고 귀여운 청개구리가 잎에 앉아 가슴을 ‘팔딱팔딱’거리다가는 ‘펄쩍’뛰어서 달아나기도 했다.
딸기를 딸 때는 다른 것을 건드려 고개를 부러뜨리면 안 되었다. 아주 조심해서 익은 것만 따되 줄기를 너무 길게도 그렇다고 짧게도 자르면 안 되어, 엄지와 검지로 꼭지를 잡고 먹기 좋게 꼭지 줄기가 1㎝ 정도만 달리게 손톱으로 잘라냈다. 그래서 딸기를 따다 보면 어느새 손톱에는 초록빛 풀물이 잔뜩 들어 있곤 했다.
미국 남부의 목화 따는 아가씨들을 감독하던 감독이 그렇게 무서웠을까? 전체적으로 깡마르고 얼굴이 까만 최 씨 아저씨가 우리를 감독했는데 그분은 늘 장화를 신고 팔짱을 끼고 있었다. 필자는 그분이 어찌나 무서웠던지 조금 큰 소리만 내도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딸기를 딸 때는 앉아서 따면 안 되고 꼭 엎드려서 따야 했다. 아저씨는 우리들에게 늘 반대로 말했다. “좋은 것은 먹고 나쁜 것만 골라 담아라.” 한참 일하다 보면 아침 이슬에 신발이랑 양말이 다 젖어버리고 허리가 아파왔다. 그리고 따끔따끔한 5월의 태양에 팔이 까맣게 타다 못해 허물이 벗겨졌다.
딸기는 한 채반에 2㎏ 정도씩 담았다. 채반이 다 차면 그것을 양손에 하나씩 받쳐 들고 딸기 파는 매장으로 일렬로 행진해갔다. 딸기를 씻을 때는 큰 그릇에 물을 충분히 부은 후 딸기를 가만히 쏟아 붓고 두 손바닥으로 몸체를 살짝 눌러 물에 잠겼다 올라오게 한 다음 건져서 다시 한 번 맑은 물에 헹궈 깨끗하게 건조된 채반에 담았다. 밭에서 금방 따온 것이기에 그 따글따글한 감촉을 씻으면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분위기에 따라 좋은 음악을 선별해 들려주는 DJ 일은 농대생들이 교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멘델스존의 ‘노래의 날개 위에’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 생상스의 ‘백조’ 타이스의 ‘명상곡’등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소품이 흐르는가 하면 ‘홍하의 골짜기’, ‘여름날의 세레나데’, ‘체인징 파트너’등 부드럽고 달콤한 팝송들이 한낮의 태양 아래 조용히 울려퍼졌다.
특히 차이코프스키의 ‘안단테 칸타빌레’는 그 꿈을 꾸듯이 아름다운 선율이 일시에 나른한 환상의 나라로 인도하곤 했는데 어찌나 필자를 사로잡았던지 지금도 그 흐느적거리는 음의 선율이 아련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일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하루 종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몰랐다. 또한 지금 나오는 곡이 누구의 무슨 곡인지 생각하며 반복해서 들으니 자연스럽게 음악 공부도 되었다.
‘딜라일라’와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는 팝송이 한창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하루는 주인집 아줌마가 노래 중에 ‘딜라일라’를 좋아한다고 하니까 DJ 보는 농대생들이 "아마 그것밖에는 아는 게 없겠지" 하면서 자기들끼리 ‘킥킥’대며 아줌마를 무시하는 것이었다.
비록 집이 가난해 그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할망정 '지적으론 우리가 우월해' 하며 과시하는 것 같았다.
매점에서는 두 명의 이대생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그중 살집이 넉넉한 여학생이 하는 얘기가 “자고로 미운 여자란 없는 법이란다. 마른 여자는 골격미인이고 살찐 여자는 육체미인, 아는 것이 많은 여자는 지성미요, 좀 모자란 듯한 여자는 백치미인이란다” 했다.
필자는 딸기 따는 일은 초기에 잠깐 했고 이내 매점에서 일을 보았다. 매점에서 일을 보던 우리들은 점심을 특별히 푸른지대 주인집에서 먹었는데 우리 집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식탁이 풍성했고 간혹 처음 보는 음식들도 눈이 띄었다.
이때 처음으로 야채샐러드를 맛보았는데 그 싱그러운 맛이 기가 막혔기에 기억을 되살려 나중에 집에서 해먹었는데 이상하게도 물만 많고 도무지 그 맛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때까지 ‘마요네즈’라는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줄도 모르던 필자가 야채를 준비해놓고는 우유를 들이부은 것이다. 그 당시 필자가 갖고 있는 상식으로는 흰 색깔이 나는 액체는 우유뿐이었으므로.
필자는 어쩌다 며칠에 한 번씩 점심을 먹고는 거의 걸렀다. 밥을 얻어먹는 것 같아서 자존심이 상했기에 주인집 아줌마가 먹으라고 몇 번씩 채근을 해도 먹지 않았다. 그때마다 하얀 얼굴, 작은 눈의 아줌마는 눈을 곱게 흘기며 말했다.
"너는 왜 그렇게 고집이 세니?"
대개는 상품 가치가 떨어져서 골라낸 찌꺼기 딸기로 배를 채웠다. 다른 사람들은 딸기에 연유를 부어서 먹기도 했다. 대부분은 설탕을 찍어서 먹었지만 필자는 설탕을 찍지 않고, 딸기도 잘 익은 것은 맛이 싱거운 듯해서 덜 익어서 파란 부분이 많은 딸기를 즐겨 먹었다. 그때 딸기 맛의 감별법을 익혀두어서 지금도 어떤 딸기가 맛이 있는지 훤히 알고 있다.
당시의 딸기 품종은 주로 ‘대학 1호’와 ‘아모아’였다. 딸기를 사러 매점에 찾아온 손님들은 필자의 피부에 감탄하곤 했다.
"딸기를 많이 먹어서 피부가 고운가보네."
"어쩌면! 이런 시골에 피부가 백옥 같은 아가씨가 있네!"
딸기는 씻어서 채반에 담고 지름이 10㎝쯤 되는 하얀 플라스틱 접시에는 흰 설탕을 적당히 담아서 손님들이 원하는 자리에 배달했다. 갖가지 수목과 화초 사이에 벤치가 놓여 있어 손님들은 거기서 먹었고 때로는 잔디밭에 앉아서 먹는 사람도 있었다.
대부분은 젊은 남녀 아베크족들이었고, 가족 단위로 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여자들은 저마다 개성 있는 예쁜 옷들을 입고 와서는 고운 자태를 뽐내었다.
필자는 그들과 처지를 비교해보며 과연 어른이 되면 딸기를 따는 신분에서 딸기를 부담 없이 사 먹을 수 있는 신분이 될 수 있을까 하면서 회의에 빠지곤 했다. 여자 손님들의 밝고 화사한 모습이 부러워서 한참 동안 쳐다보기도 했지만 곧 일에 빠져 잊어버렸다.
하루는 한 남자 손님이 손을 씻겠다고 해서 우리가 물을 부어주었다. 그러자 “당케이”라고 말해 우리가 까르르 웃었더니 “아, 독일 말로 고맙다는 뜻이야” 하고 당황해하며 설명했다. 아마도 그 손님은 우리가 땡큐도 제대로 발음 못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웃는 줄로 오해했던 것 같다.
푸른지대는 딸기 외에도 수익사업으로 밍크와 앙고라토끼를 키웠는데 앙고라는 눈만 빼꼼 내놓고 온몸이 털북숭이었다. 밍크는 사람도 마음대로 못 먹는 양미리라는 생선을 먹고 살았다.
푸른지대는 어려웠던 시절 우리에게 이모저모로 도움을 많이 준 곳이다. 일자리가 부족할 때 우리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주어 필자는 열네 살 때부터 언니와 함께 찬바람이 몰아치는 들판에서 어린 소나무의 묘목을 캐서 나르기도 했고, 햇볕이 따가운 딸기밭에서 일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때는 하루 품삯이 20원이었는데 푸른지대는 우리 동네 구멍가게와 계약을 맺어 푸른지대의 일당표를 가져가면 가게에서 현금처럼 취급해주었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식량난에 허덕이게 되니 가게에서는 면발이 가느다란 국수의 양을 20원짜리로 만들어놓았고 주민들은 대개 이 국수와 일당표를 맞바꿈했다. 우리는 그것을 끓여먹으며 일을 다녔다.
주인아저씨와 아줌마는 많은 아이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우리 형제를 귀여워하여 햇볕이 없고 시원한 매점에서 일을 보게 해주었고, 점심도 제공해줬다. 또 서둔야학교 선생님들이 도움을 청하니 전선을 제공해줘 학교에 전기가 들어오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번창일로에 있던 푸른지대가 딸기술인 ‘파라다이스’를 개발했다가 판로가 신통찮은 바람에 일시에 부도가 나버렸다. 당시 아저씨와 아줌마는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 필자에게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해주셨던 두 분이었기에 너무도 가슴이 아팠다.
사람들에게 욕심이 없다면 발전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 이 욕심이라는 풍선은 적당 양의 바람만 넣어야지 너무 많이 넣으면 터져버린다. 문제는 그 적정선이 어디까지인지 미리 감을 잡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2018년 1월 1일. 짝지의 60세 생일이다. 이제는 헤아리기도 버거운 시간을 지내왔다는 사실이 낯설다. 그 많은 시간 무엇을 하며 지냈을까? 어쩌다 보니 같이한 세월도 34년이다. ‘인생 금방’이라는 선배들의 푸념이 실감나는 요즘이다.
그 시절 데이트는 대부분 ‘두 발로 뚜벅뚜벅’이었다. 좋아서 걷고, 작업하려고 걷고, 돈이 없어서 걷고, 사색하느라 걷고. 애꿎은 다리만 중노동하듯 시달렸다. 남자 친구가 학교에서 여자 친구를 만나 집까지 데려다 주다가 통금에 걸려 파출소에서 잤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남산, 능동 어린이대공원, 경복궁, 덕수궁, 동숭동, 인사동, 명동, 북한산, 수락산, 소요산 등등 참 많이도 걸었다. 그중 최고는 조국순례대행진! 8월 1일 전국 각지에서 출발한 대학생들이 한곳에 집결해 광복절 기념식을 하는 국가적 행사였다. 학교당 4인 1조로 참여하는 이 걷기순례에서 많은 추억과 인연이 만들어졌다.
필자 팀은 김천에서 출발해 청주까지 꼬박 14박 15일을 걸었다.
8월 한여름 태양을 머리에 이고 걷던 수많은 청춘의 진한 땀 냄새가 가득했다. 필자 인생에서 더 이상 가보지 못한 길들이다. 50대에 시작한 등산에는 그 시절에 대한 로망이 묻어 있음을 본다. 특히 지리산 종주 산행은 그때의 용기를 떠올리게 하는 자조의 시간이기도 했다.
조국순례대행진 때 추억을 만들어준 몇몇 인연이 58년 개띠였다. 아삼삼한 기억을 돌려보면 온통 개판이다. 참가자들의 학번이 대부분 77, 78이었으니 말이다. 두 발 데이트에 딱 어울리는 것은 영화와 연극 관람이다. 국도극장, 대한극장, 명보극장, 단성사, 피카디리극장, 동숭동 소극장, 덕수궁 옆 창고극장, 명동 소극장, 장충동 국립극장. 그 이름만으로도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DJ의 에코 멘트와 리퀘스트가 있던 음악다방. 어둠침침했던 레스토랑! 서양 필이 나던 커피 맛! 공강시간이면 내 아지트처럼 달려갔던 구석진 그곳! 학교 주변 호프집과 시장통 선술집 기억은 거의 없다. 그 주님(?)과 친하지 못한 관계로 특별한 에피소드도 없다.
그 시절 인기 있는 장소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또 있다. 바로 동네마다 들어서 있던 작은 서점과 만화방이다. 서점도 데이트 장소로 인기였다. 필자의 취미이자 특기인 독서는 만화책 읽기와 연애시집 사기에서 시작됐다. 가끔씩 집 정리를 하다가 발견되는, 자식 나이보다 더 오래된 누런 책을 아이에게 권해본다.
레코드판도 서점에서 구입했던 것 같다. 용돈 아껴 한 장씩 사 모았던 LP판. 이제는 골동품이 되었다. 서점 한쪽에 LP판을 매입한다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추억을 팔 수는 없다! 하고 간직하고 있지만 보관이 어려워 애물단지다. 최근 턴테이블을 찾아 모양을 갖춰봤다. 어느 날 한 번은 꼭 틀어볼 셈이다. 옷과 가방을 구입할 때는 명동이나 이대 앞, 동대문시장이 최고였다. 전자제품은 세운상가나 용산전자상가로 갔다. 그러고 보니 당시 핫 아이템이었던 소니 워크맨을 사러 신촌 미제시장까지 갔던 기억이 난다.
우연히 들어갔던 당구장은 남자들과 담배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금녀의 공간이라기에 분위기가 어떨지 조금 궁금했는데 딱히 충격적이거나 기억에 남는 장면은 없었다. 40대 초반에 배운 포켓볼. 담배 냄새 없는 집 근처 당구장을 찾아 열공했던 시절도 있다. 주인장은 온종일 당구장에서 큐대를 들고 낑낑대는 필자를 보고 “아줌마! 밥하러 안 가세요?” 했다. 그러면 “밥 미리 해놓고 왔어요~” 했다. 그것도 벌써 20년 전 일이다.
그 시절은 포크송이 대세였다. 송승환과 왕영은이 사회를 보던 1980년대 인기 음악 프로그램 ‘젊음의 행진’에서 이어진 대학가요제, 강변가요제, 해변가요제의 등장으로 누구나 한 번쯤은 통기타 메고 가요제 참가를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필자도 길거리에서 밴드 보컬 제안을 받은 쑥스러운 기억이 있다. 교내 축제 공연이 있던 날, 술자리에서 급조된 짝지네 팀 밴드는 딕패밀리의 곡 중에서 신중하게 ‘나는 못난이’를 간택(?)해 참가했다. 공연하는데 전기가 나가 비록 앰프와 마이크는 꺼졌지만 젊은 혈기는 청춘의 생목으로 끝까지 완창하는 투지를 발휘했다. 과 동기의 의리로 베이스 담당 짝지에게 꽃다발 들고 응원을 갔건만 노래 제목처럼 되어버린 기억은 지금 떠올려도 재미나다. 결과와 무관하게 지난 시간들은 모두 그리운 추억이 된다.
이제 그 청년은 한쪽 어깨에 통기타를 메고 ‘동해 하조대해수욕장’이라는 간판을 배경으로 빛바랜 사진 속에 서 있다. 나팔바지에 청재킷을 걸치고 긴 머리를 쓸어 올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고혈압을 조심하는 육순의 장년이 되어 있다.
필자는 견공(犬公) 세 분과 산다. 12세 레드 닥스훈트와 2세 믹스 유기견, 그리고 58개띠 짝지 그분이다. 34년을 동고동락한 그분과의 세월보다 선한 눈빛과 따스한 체온, 변함없는 신뢰의 견공 두 마리에게 더 맘이 간다.
‘호모 사피엔스 짝지 vs 거의 호모 멍멍이우스’
필자와 동종이신 그분은 두 마리 견공에게 질투와 부러움을 대놓고 내비친다. 무엇을 해도 ‘개판’이 된다며 툴툴대는 58개띠 짝지님의 씩씩 건재함에 감사를 보낸다.
“저기요~ 앞으로 남은 시간 사이좋게 지내봅시다!”
필자는 58년생 개띠다. 당시 대학에 입학하면 가장 하고 싶은 게 미팅이었다. 미팅하러 대학에 들어간다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 시절 대학 1~2학년생들에게 미팅은 대단한 로망이었다. 내성적이어서 미팅을 기피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미팅을 수십 번이나 한 친구도 있었다. 한창 이성에 눈을 뜰 때니 그럴 만도 했다. 이성과 교제하고 싶어 안달이 난 친구들은 입학식 다음 날부터 미팅타령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맘에 드는 여자 친구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성 사귀기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 두세 달마다 여친을 바꾸는 선수(?)들도 드물게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미팅에 성공하지 못했다. 마음에 안 들거나 이성 교제 경험이 없어 서툴었기 때문이다. 또 데이트를 하려면 돈이 좀 필요한데 그 시절엔 모두들 주머니 사정이 안 좋았다. 집이 가난해서 중·고생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비를 벌어야 하는 친구들도 꽤 있었다.
미팅은 주로 학과 대표가 여대 학과 대표들과 연락을 해서 이루어졌고, 발이 넓은 남학생들이 여자 친구들을 통해 모임을 주선하기도 했다. 미팅 인원은 세 커플 정도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한두 커플이 오붓하게 만나는 경우도 있었다. 미팅 자리에 나오면 먼저 “00학과 0학년 000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런 뒤 각자 소지품을 꺼내어놓고 마음에 드는 사람의 물건을 선택하기도 하고, 드물게는 주선자가 눈치껏 파트너를 정해주는 경우도 있었다. 또 남학생들끼리는 미리 점찍어둔 여학생을 서로 고백해 은근히 자기가 원하는 파트너에 다른 학생이 관심 갖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파트너가 된 여학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레스토랑이나 커피숍에서 커피만 마시고 바로 헤어졌다. 그러나 여학생이 마음에 들면 커피도 마시고, 영화도 보고, 레스토랑에 가서 햄버그스테이크, 비프스테이크, 돈가스 등을 먹으며 늦게까지 데이트를 했다.
필자는 두 번의 미팅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한번은 대학 1학년 때 했던 미팅이었다. 늦은 가을날, 학과 사무실 옆을 지나는데 우편함에 단정한 글씨로 쓴 엽서가 얼핏 보였다. 필자에게 온 엽서였다. ‘누가 보냈지?’ 하며 엽서를 꺼내서 보니 하단에 주희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처음에는 ‘주희가 누구지?’ 했다. 그러다 2주 전쯤 미팅에서 만난 한 여학생 얼굴이 떠올랐다. 아담한 체구의 귀여운 여학생이었다. 마침 시험기간 중이어서 그 여학생을 깜빡 잊고 있었다. 엽서엔 단정하게 써내려간 글자들이 빼곡했다. 그간의 일상과 계절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글이었다. 그녀의 감성적인 표현들이 필자 가슴에 와 닿았다.
글로 자기 마음과 생각을 상대에게 전달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닌데, 그녀는 글 쓰는 재주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필자는 글 쓰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대학신문을 보내주면서 “엽서 보내줘서 고마워, 연락 못해서 미안해”라고 간단히 메모를 썼다. 그리고 1주일쯤 뒤 그녀에게서 또 엽서가 왔다. 이번에도 글이 빼곡했다. 엽서 하단에는 “깊어져 가는 가을 자꾸만 생각 키워지는 이에게 보냅니다”라고 씌어 있었다. 필자는 그녀가 엽서로 데이트 신청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그 마음이 고마워서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가서 커피도 마시고 대화도 나누고 맛있는 저녁도 먹어야지 했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만 먹고 실천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어쩌다 그 시절이 생각나면 그녀가 생각나면서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자로서의 자존심도 접고 먼저 엽서를 보냈을 텐데 말이다.
기억이 나는 또 하나의 미팅은 대학교 2학년 초겨울 무렵에 있었다. 다른 대학에 다니는 친구가 같은 학과 여학생들과의 자리를 마련했는데 깔끔하고 단정해 보이는 K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첫눈에 마음을 빼앗긴 그녀와 대화를 나누다가 밖으로 나왔고 가는 방향이 같아 버스를 함께 탔다. 빈자리가 없어 손잡이만 잡고 나란히 서 있었는데 버스가 갑자기 급정거하는 바람에 필자에게 그녀가 넘어졌다. 필자는 얼떨결에 한 팔로는 손잡이를 잡고 한 팔로는 그녀가 쓰러지지 않도록 꼭 안았다. 그녀는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붉혔다.
그녀도 필자가 싫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자연스럽게 광화문의 한 커피숍으로 갔다. 그 시절은 커피숍에도 DJ가 있어 노래를 신청하면 틀어주곤 했다. 커피를 마시다가 그녀도 음악을 신청했다. 그런데 노래 제목이 필자가 좋아하던 노래여서 깜짝 놀랐다. 그 노래에 대해서는 얘기도 나누지 않았는데 그녀가 우연히 그 노래를 신청했던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커피숍을 나온 뒤에는 세종로를 함께 걸었고, 쌀쌀한 날씨인데도 추운 줄도 몰랐다. 만난 지 몇 시간 안 된 사이인데도 오래 만나온 사람처럼 편안했고 잘 통하는 기분이 들었다.
필자는 지나가다 리어카에서 파는 햇귤을 두 개 사서 그녀에게 건넸다. 상큼하고 싱싱한 귤 냄새가 좋았다. 그녀도 좋은지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오후 2시에 만나 커피를 마시고 좀 걸었을 뿐인데 시간은 벌써 오후 6시 반이 지나고 있었다. 약간 출출했지만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았던 필자는 옛 한국일보사 옆에 있는, 기자들이 자주 다니는 식당으로 가서 냄비우동을 시켰다. 밀가루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냄비우동이 그렇게 맛있는 음식인 줄 그때 처음 알았다. 물론 좋아하는 그녀랑 같이 있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밤 10시가 지나서야 우리는 헤어졌다. 필자가 버스를 타고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줬다. 그녀는 집 근처에 이르자 좀 망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첫눈 펑펑 내리는 날, 우리가 갔던 광화문 ‘그 커피숍’에서 다시 만나요.”
다시 만나자는 그녀의 말에 필자의 가슴은 쿵쾅쿵쾅 뛰었다. 10여 일쯤 지났을까. 기다리던 첫눈이 펑펑 내렸고 필자는 그녀가 말했던 커피숍으로 달려갔다. 혹시 그녀가 그새 맘이 변해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약속 장소에 가자 환하게 웃으며 그녀가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우리는 그곳에서 첫 만남 때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 나눈 대화와 진한 커피 맛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날 그녀는 필자에게 따뜻한 겨울장갑을 선물로 줬다. 눈 내리던 경복궁 옆길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서울대 사대에 다녔던 그녀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낼까? 필자는 가끔 그 시절로 돌아가 추억에 젖곤 한다.
‘꽃잎은 바람결에 떨어져 강물을 따라 흘러가는데…’
나의 명동 쉘부르 입성 즈음 대한민국은 온통 전영 씨의 ‘어디쯤 가고 있을까’의 나라였다. 그 노래 하나로 모두가 행복한 모습이었다. 그때 ‘쉘부르’를 빛내던 전영 씨였기에 내 상업적인 무대의 시작은 이 노래와 함께 출발한다.
나와 비슷한 시절을 보낸 청춘들은 한 번쯤 다녀갔을 명동의 통기타 생맥주 살롱! 아니 그보다 통기타 가수들의 요람이라 함이 옳을 듯싶다. 그곳은 돈 없고 기댈 곳 없는 수많은 무명가수들의 등용문인 동시에 ‘쉘부르’라는 이름 안에 가두어 자부심을 갖게 하는 통기타의 메카였던 것이다. 지금 열광하는 오디션의 효시인 셈이다. 그랬기에 객관적 평가를 받으려는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노래를 준비해 국민 DJ 이종환 씨의 평가를 받으려고 토요일 오후마다 북새통을 이뤘다.
사실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단순히 상금 때문에 지원해서 두 차례 고배를 마시고 세 번째 도전에서 쉘브르家에 입성하게 된다. 그러는 동안 서로 익숙해진 얼굴들 서로의 실력 또한 어느 정도는 알고 있기에 자주 만나는 사람끼리 눈인사도 하며 하나가 된 분위기… 노래라는 공통분모 덕분에 그리 될 수 있었던 통기타 시대의 역사이기도 할 것이다.
그들 중에는 이문세도 매번 만날 수 있었는데 노래는 예나 지금이나 무척 잘했지만 이종환 씨 눈에 들지 않아 끝내 쉘부르 무대 시간표에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다. 그곳에서 만난 얼굴들 중에 나중에는 유명 가수가 된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실력이 있어도 오디션 문턱을 못 넘은 사람이 많았을 만큼 이종환 씨의 주관적인 평가는 많은 이들의 꿈을 빼앗아가기도 했고 나처럼 가수가 목표가 아니고 상금이 목적이었던 사람들에게 무대를 허락하기도 했다.
내가 1977년 10월에 문을 두드려 얻어낸 자리를 노래보다는 말솜씨가 좋아서 발탁된 첫 케이스, 주병진! 뭔가 멋져 보였고 수줍음 많고 조용했던 청년 하덕규! 그는 시인과촌장으로 대중가요 명반 대열에 이름을 올린 훌륭한 뮤지션으로 훗날 ‘재회’란 노래를 내게 준 음악적 동지이자 은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탄탄한 가창력의 소유자 김승덕은 ‘나의 사랑 그대 곁으로’를 작곡한 친구인데 이들 모두 똑같은 방법으로 내 뒤를 이었다. 40년 전의 일인데 너무도 선명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렇게 청춘은 흘러 이제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쉘부르와 함께 추억에 젖어본다.
젊음! 20대의 기웃거림! 청바지와 통기타를 앞세워 암울했던 시기에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불러댔던 노래들! 그 시절의 명동은 ‘쉘부르’, ‘오라오라’, ‘가젤’, ‘PJ’ 등등 몇몇 통기타 라이브 클럽이 성행했으며 12시 야간통행금지가 있었던 때라 10시가 지나면 마치 썰물처럼 사람들이 순식간에 빠져나가곤 했다.
그 시절 노래하는 사람들 중 형편이 좋은 사람은 많지 않았고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나와 노래했던 터라 용돈이 풍족할 리 만무였다. 그저 좋아하는 노래를 한다는 이유로 우린 늘 굶주림 속에서 배고픔을 안고 생맥주로 휘청거리는 명동, 무교동을 무거운 통기타를 들고 오가며 행복했다. 무명가수였지만 나름 이름을 빛내고 있었고 배가 고파서 불행하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 없는 진정한 딴따라였는지도 모른다.
그 당시 제일백화점 왼편에 있던 제일 값싼 막국숫집에서 거의 한 끼를 해결했고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겨 라면 골목으로 달려가 그냥 라면도 아닌 계란라면이라도 먹는 날은 우리들 모두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때 우리에겐 짜장면도 사치였으니… 지금도 사랑받는 ‘명동교자’ 그땐 ‘명동칼국수’ 집이었는데 상금 타던 날 회식한 이후로 몇 번 가보지도 못한 채 명동 시대를 접었던 기억도 슬픈 추억이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적 있는가?’ 다산으로 인해 모든 게 부족하기만 했던 우리 시대를 살아온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경험했을~ 그리하여 단단해진 우리 세대들이 난 늘 자랑스럽다.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에서 눈을 반짝이며 꿈을 키우던 날들~ 몽당연필의 소중함으로 늘 근검절약을 하던 시절~ 소풍 갈 때 전날 미리 사둔… 계속 손으로 만지작거려 미적지근한 사이다 병이라도 드는 날엔 어깨가 으쓱했던 기억하며 도시락 뚜껑을 열었을 때 뻘건 소시지와 계란프라이가 있는 친구들이 한없이 부러웠던 그런 시절!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던 시절의 추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어떤 것은 더욱 선명하게 남아 있다.
꿈같은 시간들이 흘러 이젠 꿈의 시간으로 왔다. 60세! 예전 같으면 ‘고려장’을 이미 치렀을 나이에 서 있다. 더러는 정년퇴직을 해야 하거나 은퇴를 생각해야 할 나이가 되고 보니 정년 없는 무대에 서의 삶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젊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정받고 달려온 날들이 있는가 하면 나이 들었다는 이유로 관심받지 못함도 견뎌내야 하고 이젠 젊은 친구들이 놀아주지 않는 설움도 감수해야 할 나이다. 하지만 난 예전이나 지금이나 찬란하고 푸르르다. 내 마음이 그러하고 내가 그러하다.
내가 지켜온 40년 동안의 대중문화예술계! 꼭 내가 지켜왔다고 할 순 없지만 수백, 수천의 가수들 중에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지 않은가? 40년을 자의이든 타의이든 무대를 떠나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하기에 축복이라는 생각이다.
지금 노래하는 친구들 중에 과연 40년을 살아남을 자들은 얼마나 될까? 내가 힘들게 올랐던 그 산의 정상에 오를 사람들은 몇이나 될 것이며 과연 몇이나 나처럼 근사한 곡선을 그리며 하산할 것인가? 오르며 만난 수많은 꽃과 나무… 그리고 사람들… 그 아름다운 관계 속에서의 행복을 과연 몇이나 알겠으며 몇이나 나처럼 단단하게 여물겠는가? 중턱에서 바라보기만 할 친구들이 얼마나 많을지는 충분히 상상 가능한 일이다. 노래를 시작한 40년을 되돌아보니 참 잘 살아왔다는 자찬이 절로 나온다. 내가 이 얼굴로 살면서도 성형수술이나 어떤 시술을 하지 않고 예쁜 여배우들한테도 꿀리지 않고 살아왔듯이 나를 사랑하기에~ 진심을 다해 온전히 나를 사랑하기에~ 내가 찬란한 내 인생의 주인공이기에~ 어떤 것도 내가 불행해지게 내버려두지는 않은 듯싶다. 난 누구보다도 건강한 정신이 있기에 절대 행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행복해야 하고 그리하여 지금 행복하다. 그 원천은 건강한 마음에서 시작된다고 본다. 누군 ‘이 나이 육십에 뭘~’ 이런 이야기는 사형선고 받은 사형수들이나 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 않은가!
삼천갑자를 살다간 동방삭의 삶에 비하면 이제 겨우 하나의 갑을 보낸 나이에 뭐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난 거짓말처럼 60세가 되길 기다렸고 24세 개띠 해에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로 가수 인생 최고의 영광 속에 지냈었고 이제 또 개띠 해를 맞게 되니 새로운 열정이 뜨겁게 올라온다. 무엇이든 새로 시작하기에 충분한 나이! 어떤 일도 두려움 없이 도전할 수 있는 나이!
그렇게 하얀 마음으로~ 뜨거운 가슴으로~ 나는 다시 한 살로 태어나고 싶다. 비움으로 순수함으로아름다운 남은 시간들을 맞이하고 싶다. 그렇게 호기심을 놓지 않고 끊임없이 궁금해하며 공부하고 가슴으로 모든 걸 사랑하고 싶다. 내가 태어나던 무술년 그 가을처럼 그렇게~ 60년 만에 다시 돌아온 무술년이기에 그렇게~
2018년 1월 1일
남궁옥분
상영시간 장장 125분의 대작이다. 인도 영화인데 발리우드 영화라 하여 영어 대사가 섞여 나온다. 감독에 산제이 릴라 반살리, 주연에 이튼 역으로 아시아 최고의 섹시남이라는 리틱 로샨, 소피아 역으로 미스 월드 출신의 아름다운 여인 아이쉬와라 라이가 출연했다. 네티즌 평점 10점 만점에 9점을 받은 수작이다. 산제이 감독은 시각, 청각 장애를 가진 소녀와 스승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블랙을 만들었던 감독이다.
여기서 이란 인도 법원에 ‘안락사’를 청원한 것을 말한다. 인도 헌법에 안락사는 금지되어 있지만, 법을 바꿔달라고 청원한 것이다.
이튼은 당대 최고의 마술사였다. 그런데 어느 날 공연에서 피아노 선을 이용하여 공중에 부양되어 있는 순간 경쟁자가 피아노 선을 절단하여 추락한다. 그 후 사지 마비가 된다.
그로부터 14년 동안 아픔과 고통 속에 감옥 같은 나날을 보낸다. 그러면서도 라디오 DJ로 활동하면서 전신마비 환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준다. 그러나 지친다. 그만 죽고 싶다는 것이다.
그의 옆에는 12년 동안 도우미 역할을 하는 아름다운 여인 소피아가 있다. 소피아도 그의 원대로 안락사 청원을 돕는다.
그러나 법원은 이 청원을 기각한다. 그리고 이튼은 재심을 청구한다. 라디오를 이용하여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안락사를 지지해줄 사람들을 공모한다. 대부분은 안락사를 반대하지만, 그래도 동의하는 사람도 더러 나타난다.
그 와중에 한 젊은이가 찾아 와 이튼의 마술 비법을 배우겠다고 한다. 이튼은 기꺼이 자기 기술을 전수해준다. 그런데 이 젊은이가 바로 자신을 사자마비 환자로 만들어 버린 경쟁자의 아들이었다. 알면서도 비법을 전수 시켜준 것이다.
두 번 째 청원 과정에서 마술을 보여주겠다며 뒤주에 검사를 들어가게 하고 60초 동안 있게 한다. 그러나 검사는 30초가 넘어서자 갑갑해서 못 견디겠다며 난리를 친다. 검사가 60초도 버티지 못하는 삶은 14년이나 살아 왔다며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달라고 한다.
두 번째 청원이 기각되고 나서 이튼은 중대 결심을 한다. 법이 허락하지 않으므로 스스로 안락사를 집행하겠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 소피아가 안락사를 집행해 주겠다고 한다. 인도 법으로 안락사도 살인이므로 20년 내지 40년 형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소피아와 결혼하고 다음날 죽기로 하고 마지막 파티를 연다. 이튼 집의 하녀들, 변호사, 담당 주치의, 마술을 전수 받은 젊은이, 성당 신부, 그리고 소피아가 참석한다. 마지막으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위트를 날리며 파티를 장식한다.
고통스럽게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며 그것이 차라리 행복하다는 논리이다. 돈도 다 떨어졌다. 몸이 회복된다는 기적도 바랄 수 없고 희망도 없다. 사지 마비에 더해서 다른 장기들도 점차 병들어간다. 진정제를 맞아가며 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안락사는 그래서 무조건 금지할 것은 아닌 것 같다.
수만 가지의 수를 내다보고 절대 실패하지 않는 삶을 사는 알파고형 인간을 만났다. 계획적이면서도 일정하다. 돌다리는 두드려볼 생각 없이 잘 닦여진 길을 선택해왔다는 사람. 수학이나 과학자를 만나러 갔더라면 대충 짐작이라도 했을 텐데. 그의 직업은 음악 칼럼니스트다. 음악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천국 무지크바움 대표이자 음악 칼럼니스트 유형종(劉亨鐘·56)을 만났다. 인생역전 드라마만 재밌다는 편견은 접으시고, 유형종 대표의 기막힌 인생설계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시라.
클래식 놀이터 주인장 유형종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찾는 놀이터(?) 무지크바움의 주인장인 유형종 대표. 그는 클래식 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예술을 강의하는 강연자로서 삶을 살아간다. 압구정역 근처에 자리하고 있는 무지크바움에서는 요일마다 오페라, 클래식, 발레 감상 동호회 모임을 비롯해 음악과 관련한 각종 강연이 이뤄지고 있다. 클래식 음악을 찾아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늘 유형종 대표와 눈을 맞추고 알고 싶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눠야 하는 직업 특성 때문일까? 유형종 대표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활발할 거라 생각했는데 정작 만나서 한다는 말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저는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좀 폐쇄적이죠. 그런데 여기는 클래식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 좋아요. 욕심 같은 거 별로 없어요. 그저 저의 기쁨을 위해 살아가는데 그 원천이 음악? 클래식인 거죠.”
자발적 은둔형 외톨이의 삶을 택하다
유형종 대표는 주로 오페라와 발레 등 서양 예술의 결정체와도 같은 분야를 전문으로 글을 쓴다. 역사적으로 사교계와도 친밀한 예술이 오페라와 발레 아닌가. 그런데 그가 클래식 음악에 눈뜬 이유가 기가 막히게 남다르다.
“제가 남들 하는 걸 안 해요(웃음). 가령 카카오톡도 안 합니다. 중학교 때는 친구들이 영어공부한다며 팝송을 듣더라고요. 저는 그때 팝송이랑 대중가요 대신 클래식 음악만 듣겠다고 결정했죠.”
마침 집에는 어머니가 가지고 계셨던 클래식 음반들이 여러 장 있었다. 그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바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1867~1957)가 지휘한 푸치니의 라 보엠(La Bohe‵me)과 베르디의 아이다(Aida)였다.
“그거 말고 몇 장 더 있었는데 기억에 남는 것은 ‘토스카니니’라고 적혀진 음반들과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입니다. 그게 제 인생 첫 음반인 거죠. 중학교 들어가서 오페라 음반을 사기 시작하면서 ‘내 취미는 음악이야!’라고 생각했어요.”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 집 안에서 혼자 노는 것을 좋아했던 유형종 대표는 다행히 네 살 터울의 동생과 죽이 잘 맞았다.
“동생이 동아일보 유윤종 기자입니다. 음악이나 문화 쪽으로 저보다 유명할걸요? 둘이 집에서 뭐했냐면 클래식 음악 모음집 15곡을 쭉 듣고 난 다음에 점수를 매겨요. 그러고는 둘이 합산해서 종합 1위를 뽑는 거죠. 그리고 한 달 있다가 또 해요. 순위가 바뀌었는지 확인하는 게 우리 형제의 놀이였습니다.”
클래식 음악만큼 발레의 매력에도 빠져버렸다. 1984년 빈 국립 발레단(오스트리아)과 내한한 러시아 발레리노 루돌프 누레예프의 춤사위를 보는 순간 마치 신이 춤추는 것 같았다. 남자가 무슨 발레냐고 하던 시절이었지만 그렇게 자신만의 세상에서 기쁨을 만끽하고 살아왔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팝송이 싫어요. 뮤지컬도요. 그냥 내가 좋아하는 오페라와 발레를 감상하고 이것에 관심 있는 사람들과 사는 게 재밌습니다.”
내 인생의 원동력은 확률과 통계
클래식을 듣고 오페라를 감상하는 취미는 끝이 없었다. 잠시나마 꿈꿨던 음악대 진학을 접고 상경대를 선택했다.
“성악을 전공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저는 체력도 약하고 성공할 것 같지 않다고 말씀해주시더군요. 여러 가지 생각을 했죠. 나는 튼튼하지 않으니 애호가로 사는 게 더 행복할 수 있겠다 생각했죠. 그런데 어머니 앞에서는 삐져서 다시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습니다(웃음).”
음대 포기의 이유에 맏이라는 가정 안에서 위치도 작용했다. 역사학도 좋았지만 맏이면 당연히 돈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일찌감치 상경대 진학을 생각했다. 어린 나이에 도전 한 번 안 해보고 너무 빨리 포기한 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자신은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저는 경영학을 전공했어요. 수를 좋아했죠. 경영학에도 회계학이 있는데 그것도 재밌었고요. 회사에서도 기획 재무 쪽 일을 했어요. 고등학교 때 미적분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확률과 통계는 아주 좋아했어요. 그래서 제 모든 생활 전반이 확률 통계적 사고로 돌아갑니다. 성악을 선택하지 않은 것도 그렇습니다.”
유형종 대표는 음악대학에서 음악사 수업 외에 공부를 더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화성악 청강을 해봤다. 그런데 음대생의 영역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고 한다.
“음대생이 전공하는 영역은 음악 애호가로서 확률과 통계적으로 좇아갈 수 없는 영역이었어요. 저는 예술가 기질은 없어요.”
무모한 짓은 안 하고 평생을 살았다는 유형종 대표. 굉장히 좋아 보여도 무엇을 희생해야 한다면 하지 않았다. 목적지향, 확률통계. 이런 것을 고려해서 원칙을 세우고 의사결정하는 것이 습관화됐다고 말한다.
“대신 재미가 없죠. 어떤 사람들은 저보고 냉소적이라더군요.”
취미가 인생의 큰 그림이 되다
경영학과에 들어간 뒤 공부보다는 음악감상 동아리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때는 클래식을 듣는 음악감상 동아리의 규모가 꽤 컸습니다. 지금과 비교도 안 됩니다. 동아리에서 음악감상실을 운영했기 때문에 DJ 활동을 의무적으로 했어요. 감상실에서 트는 곡목을 칠판에다 적는 것도 일이었습니다.”
물론 감상실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절반이 숙면에 들기는 했지만 감상실 운영으로 동아리를 유지했다. 가을에 열리는 교내 합창대회는 음악감상에 방해돼 싫었다.
“합창 시즌만 끝나면 속속 커플들이 탄생했어요. 헤어지면 커플이 동시에 탈퇴를 하니까 동아리 모습이 말이 아니었죠. 연애금지령도 있었는데 저는 철저히 그 법칙을 따랐습니다(웃음).”
대단한 모험을 즐기지 않고 확률과 통계를 바탕으로 살아왔다는 유형종 대표. 그는 대학생활 이후에도 나름 순탄했다고 말한다. 1987년 첫 직장인 대우증권에 입사해 2006년 한국신용보증보험의 임원으로 20년 직장생활을 마무리할 때까지 그는 영락없는 금융인의 모습으로 인정을 받아왔다. 칼럼니스트로서의 이중생활도 멋지게 즐겼다.
“졸업 후에 동호회 후배들이 창립기념일 문집을 만들 때 저에게 의뢰하기에 글을 쓰게 됐고, 1995년부터 잡지에 정식으로 음악 칼럼을 쓰기 시작했어요. 음악감상 동아리 후배인 의 기자가 저를 칼럼니스트로 추천했어요. 그때부터 음악 칼럼니스트라는 직함을 얻게 됐습니다.”
금융업계에서 대리, 과장으로 승진하는 동안 업무와 야근으로 음악회는 꿈도 못 꿨다. 대신 음반을 들으며 아쉬움을 달랬다. 매달 밀려오는 잡지사 음악 칼럼을 쓰는 작업도 일상의 큰 업무(?)였다.
“금융회사는 아침 8시가 되면 일을 시작해요. 저는 6시 반에 출근을 했어요. 부서장님이 저더러 부지런하다고 칭찬하셨는데 오해죠. 저는 글을 쓰기 위해 회사에 빨리 간 것이잖아요.”
한 달에 한 번씩 월간지에 기고를 하고 짬짬이 공연 프로그램 글도 썼다.
“그런데 어떤 계기로 제가 하는 다른 일에 대해 사장님이 알게 되셨어요. 표정이 좋지 않더라고요. 임원이 그런 일 하는 것을 몰라서 언짢으셨을 겁니다.”
진짜 인생의 문을 열다
유형종 대표는 2003년 은퇴를 준비해야 할 시기가 왔다고 느꼈다. 회사에서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니 딱 3년이란 시간이 남아 있었다.
“회사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을 확률적으로 알고 있었어요. 다른 회사로 가느냐 아니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느냐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나의 즐거움을 희생해서까지 돈을 벌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클래식 음악 해설가로 살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해오던 일이었지만 좀 더 밀도 있는 공부를 하며 강의자료를 준비했다. 연재하던 글을 모아 은퇴 시기에 맞춰 단행본 출간을 계획했다. 결국 2006년 9월 은퇴, 12월 1권과 2권(시공사) 출간. 꽤 멋진 은퇴 작전이 성공했다. 20년 남짓의 넥타이 삶을 청산하고 난 유형종 대표는 무지크바움에서 음악과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칼럼을 쓰고 외부 강의를 하면서 여전히 음악에 파묻혀 살고 있다. 올해 우리 나이로 쉰일곱인 유형종 대표는 스스로 2년 전까지가 음악 칼럼니스트로서 전성기였다고 생각한다.
“음악 칼럼니스트라고는 하지만 글 써서 먹고살겠어요(웃음)? 제 공간인 무지크바움에서 동호회나 강좌를 열고 외부 강의도 다니고요. 그런데 제 나이가 이제 기업체 특강 강사로는 좀 많아요. 왜냐하면 기업체 사장이 저랑 나이가 같거나 어리거든요. 물론 저도 이제 돈을 열심히, 많이 벌 생각은 없어요. 생업은 55세까지 충분히 했다고 봐요.”
이런 날을 생각해서 20년 직장생활을 했다. 먹고사는 데 당장 큰 문제는 없다. 벌어놓은 돈도 있으니 즐기면서 오래오래 이 일을 하고 싶다.
“마음은 천국이죠.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면 되니까. 대신 제가 일정을 짜놓고 많은 일들을 정해야 하니까 좀 바쁘죠. 마음은 천국, 몸은 지옥? 앞으로도 10년은 잘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리고 10년은 골골거리면서 잘할 수 있을 거 같아요(웃음).”
음악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최근 귀찮지만 꼭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슈베르트에 관한 글을 쓰게 됐다고. 예술서 100권, 문학서 100권, 사상서 100권 총 300권 시리즈를 기획하고 있는 한 대형 출판사에서 유형종 대표에게 제안을 해왔다. 아직 정해진 바는 없지만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이제부터 자료조사를 새로 해야죠. 그런데 사실 쓰겠다고 한 이유가 딴 게 아닙니다. 제 동생도 쓰기로 했더군요. 괜찮은 필자를 출판사에서 저자로 섭외했던데 내가 안 쓰면 소외될 거 같아서 할 수 없이 쓰는 거거든요(웃음).”
그래도 적잖은 사명감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물어보았다.
“불명예는 막아야죠(웃음). 적어도 대한민국 예술 필자 100명 중에 끼지 못한다는 소리는 들으면 안 되잖아요. 불타오를 정도는 아니고 약오름?”
말은 이렇게 해도 어떤 주제로 쓸지에 대해 찾아보고 있다. 너무 어렵게 않게 슈베르트에 대해 사람들이 알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방향으로 책을 쓰게 될 것 같단다.
유형종 대표는 어떤 것을 평가하고 논하는 평론가의 삶을 구하지 않는다고.
“칼럼니스트로서 내가 좋아하는 것에 관심은 갖되 너무 깊숙이 관여하지는 않아요. 관객으로서 내 시선을 내려놓고 싶지 않습니다. 누군가 공연장 사장 할래? 그러면 전 아마 안 할 거예요. 사람 임명하고 관리하는 거 하기 싫어요. 육체는 힘들지만 영혼의 자유를 누리면서 살고 싶어요.”
인터뷰하는 동안 그가 20년 금융 전문가에서 음악 칼럼니스트로 변신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는 원래부터 직장생활 20년 하고 난 다음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그러니 지금이 제1인생이죠. 제1의 인생을 위해 기반을 마련하고 돈을 번 것입니다. 합리적으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처음부터 그의 시작은 음악이었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는 느낌이다. 평생 제1의 인생을 위해 살아온 집념과 고집이 앞으로도 영원하기를 기대해본다.
얘기하다 보니 3분 만에 성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요약하자면 투명하고 맑은 느낌이다. 마치 자신이 부른 노래들의 영롱함을 모습 그대로 보여준다고나 할까. 그 주인공은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꿈을 먹는 젊은이’ 등의 명곡들로 80년대 초중반을 장식한 포크 가수 남궁옥분이다. KBS가요대상 신인가수상, MBC 10대 가수상 등 가수로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그녀는 가수로서만이 아니라 방송 MC, 광고 모델, 라디오 DJ로도 활약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이제 ‘그토록 기다렸다고’ 하는 60을 맞이하며 여전히 행복하게 활동하고 있는 그녀의 현재와 인생관을 들어봤다.
글 김영순 사진 박규민 parkkyumin@gmail.com
인기 DJ 이종환이 1973년 종로2가에서 문을 연 음악감상실 쉘부르는 무교동에 자리한 세시봉의 뒤를 잇는 1970년대 대표적인 음악감상실로 수많은 포크 가수와 진행자 들을 배출했다. 그 쉘부르 출신의 남궁옥분은 포크로 대변되는 청년 문화의 끝자락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가수였다.
그 시절의 청년다운 건강함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60을 맞이하고 있는 남궁옥분이 기자 앞에 있었다. 첫 인상은 섬세하고 차분했다. 그러면서도 호탕하다는 인상을 줬다. 이런 이미지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고 책임져 온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에너지가 있기에 가능하기 마련이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을 이해 못한다
“윤회에 대해서 오래 전부터 확신하고 살아왔어요. 그래서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전생의 업보겠지 하죠.”
남궁옥분은 108배를 17년 동안 했다. 정신적 수련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윤회 사상과 108배를 봐도 알겠지만 그녀의 세계관에는 불교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고 그 불교적 영향력은 삶에 대한 달관적인 시선으로도 드러나고 있었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을 이해하지 못해요. 새장 안에서 사는 새는 새장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도 있죠. 나도 내 영역을 가진 것이니까 행복한 거예요. 누가 나를 보면 답답해 보일지라도, 내 기준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사는 것이 내가 후회하지 않을 일이기 때문에 합니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을 이해 못한다’는 말은 ‘후회하지 않을 일을 한다’는 말과 함께 남궁옥분의 생각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 즉, 그녀에게는 자신만의 확고한 세계를 마련한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외고집이 있다.
“애초에 돈이나 명예에 관한 욕망이 없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그 어떤 직책도 안 맡았었죠. 그러다가 최백호 오빠가 운영하는 한국음악발전소에서 이사를 맡게 됐어요. 과거에는 그런 일을 안 했지만, 이제는 선배가 후배들에게 큰 우산이 되어줘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요. 나도 그 역할을 하고 싶어진 거죠.”
한국음악발전소는 최백호가 독립음악인들의 창작 지원을 위해 운영하고 있는 사단법인이다. 그녀가 한국음악발전소에 몸을 싣게 된 것은 최백호에 관한 믿음 때문이었다. 최백호가 하는 일이라면 타협하지 않으면서 공공적인 선의를 구현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사람을 그토록 전적으로 신뢰하는 경우는 흔치않다.
인터뷰 중 그녀는 물질보다는 관계에서 오는 고통이 더 크다고 말했다. 유명인이 되고 연예인으로서 방송계 일을 하게 되면서 인간관계에서 오는 크고 작은 상처들을 무수히 겪어야 했고, 심지어 허술한 인간관계로 인해 아예 2년 동안 방송을 완전히 안 한 시기도 있었다. 오죽하면 자신을 키운 게 사람이라고 말할까.
오랜시간 다른 사람의 삶을 읽을 수 있게 된 그녀에게는 산과 사람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많은 사람 안에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스승이에요. 사람은 사람을 통해서 크는 것이죠. 제가 사람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때는 자신이 다져지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었을 거예요. 지난 시간 동안 저는 피해자의 입장으로 보는 법을 배웠다고 생각해요. 그런 게 없었으면 정신적으로 단단해지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지리라는 생각이 저를 지탱시켜주죠. 그래도 사람으로 만들어진 상처는 사람이 치유해줘요.”
노력한 만큼의 댓가는 확실히 있다고 믿는 그녀
그녀는 자신을 밟고 올라가서는 그 전과는 완전히 바뀐 사람들을 수없이 봤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가 봤을 때 그들이 걷는 그 길은 잘못된 길이다. 그리고 그렇게 잘못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녀는 무작정 분노하기보다는 스스로를 가다듬는 쪽을 택했다.
“난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고 싶으니까요.”
디딤돌의 마음가짐으로 고통을 깨닫고, 고통이 지나가는 과정을 여러 번 겪으면서도 맥없이 절망에 빠져 버리지 않은 것은 그녀가 가진 인간적 역량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힘은 평등과 박애로 무장되어 있는 어떤 의지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에 관한 얘기를 들으며 그러한 그녀의 박애 정신은 어쩌면 천성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1993년에 돌아가셨어요. 1922년에 태어나셔서 지주 집안도 아니고 가장 평범한 사람의 한 명으로서 대한민국의 가장 힘든 시기를 살다 가셨죠. 근검절약이 몸에 배신, 완전 보살이셨어요. 주변 사람들에게는 중심축과 같은 역할을 하셨죠. 김장철이 되면 김장을 엄청나게 해서는 어려운 동네에 갖다 주시곤 했죠.”
그녀는 자신이 어머니 나이가 되면서 느끼는 바가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어머니가 50대에도, 60대에도, 70대에도 여자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여자임을 포기하고 엄마로만 살다가 돌아가셨죠.”
그녀는 소위 엄마로서의 삶만을 강요당하는 것을 거부한다. 여기서 남궁옥분을 설명하는 단어가 또 떠올랐다. 바로 ‘자유’다. 스스로 원칙을 세우고 그를 단호히 지킴으로써 그녀는 자신만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앞서 그녀가 말한 새장이란 표현은 그녀가 추구하는 법도의 다른 말이기도 할 것이다.
항상 60이 되기를 기다렸다
남궁옥분은 그녀 스스로가 말하듯이 긍정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그녀가 말하는 긍정론은 극단적이고 무조건적인 행복을 강요하는 게 아니다. 대신 그녀는 “안 행복하다고 불행한 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행복은 적을 수도 있는 것”이라는 의미다. 즉, 행복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많느냐 적느냐의 문제라는 것. 행복과 불행이라는 양 극단의 정의가 아닌 행복의 높낮이를 주시하는 그녀의 태도에는 삶을 관조하면서 보다 침착해진 사람의 시선이 담겨 있었다.
“얼마 전에는 가수 선배를 만나서 얘기를 할 일이 있었어요. 그러면서 우리 나이에 싫은 일에 굳이 시간을 갖지 말자고 결론을 내렸어요. 코드가 안 맞는 사람과 시작된 일은 뭔가 트러블이 생겨요. 그럼으로써 잃게 되는 게 있죠.”
남궁옥분은 60 이전이 인연법에 의한 삶이었다면 60 이후부터는 자신이 지난 60년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의 모습이 보이는 출발선이라고 정의했다. 그 말을 증명하는 것처럼 그녀는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멋지게 살아온 것에 자신을 기특하다고 여기며 바쁘게 살고 있었다. 윈드서핑과 볼링 등 운동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고 인터뷰가 끝난 다음에는 김해 공연과 라디오 출연, 봉사활동 등등의 스케줄이 꽉 차 있었다.
또한 그녀는 미술가로서도 활동하고 있었다. 개인전에 관한 제안은 꾸준히 들어오고 있는 중이다. 문필가로서의 능력을 살려 책을 집필하려는 계획도 있다. 그녀는 이 모든 것들을 아울러서 보다 복합적인 프로젝트를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200석 정도 되는 작은 공간에서 책과 전시, 공연을 합친 이벤트를 하고 싶다는 것이다. 60을 새로운 출발선이라고 정의한 사람답게 그녀의 머릿속은 창의적 시도들로 가득한 것처럼 보였다.
“지난 20년 전, 그러니까 40대부터는 정리를 해야 하는 법이죠. 사실 60에 의미를 두고 살아서 그런지 작년부터 뭔가 열매가 맺어지는 것처럼 느껴져요. 60만을 기다렸다고 사람들에게 얘기하고 다니고(웃음). 너무 행복하게 맞아들이고 있어요. 주변의 상황과 함께 할 때 시너지가 생기는 법인데 요즘이 그런 것 같아요.”
사유와 자기 성찰에 전념하다
여전히 무명인 가수 선후배들을 챙기는 남궁옥분은 자신의 그런 행동의 이유를 “힘이 되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이 아직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내는 증거이자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다. 40대부터 60까지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온 자신이 대견하고 사랑스럽다고 말하는 그녀는 자신의 삶의 보람에 대해 “돈보다 멋진 기억들을 얻었다”고 말한다.
“나에게 만족하는 삶, 그리고 타협을 허락하지 않는 삶이 제가 원하는 삶이에요. 천억 원을 준다 해도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나를 가치 있게 만들고 싶어요.”
그녀는 죽음을 절대로 알리지 않고 떠날거라고 한다. 시간이 지나 오랫동안 보이지 않으면 사람들이 그녀를 ‘명예롭게 퇴진하는구나’는 정도의 말을 듣는 게 좋겠다고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오래 지나지 않아 바로 발견하는 누군가가 ‘아무 소리 없이 떠났는데 이걸 해놨네?’라는 말을 하게 만드는 그런 삶. 딱 그 정도가 남궁옥분이라는 존재가 세상에게 가지고 있는 소박한 욕심이다. 그러나 그녀의 진실한 욕심보다는 크게, 아직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있다.
자기 원칙과 소신과 기준이 있는, 그리고 여백을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 남궁옥분이 머지않아 60을 맞이하는 방법은 그렇게 단단하게 다잡고 있었다.
오늘도 그녀의 밴드 에는 행복한 것과 안 행복한 것에 기준을 아는 팬들은 그늘을 내어주는 그녀의 수다로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