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의 세계는 냉혹하다. 승부사에게 따뜻함을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가슴 따뜻한 선수가 승리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골프 월드에서 이런 내 소망이 이뤄지는 일은 드물다. 인간미 넘치는 선수가 행운까지 따라줘야 가까스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 그 반대는 허다하다. 악당이 득을 보는 일 말이다.
‘골퍼는 신사 혹은 숙녀’라고 믿기로 한 골프 정신의 빈틈일까? 2021년 골프 시즌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가까운 골프 전문 기자에게 전화가 왔다. 골프 중계 보고 있냐고. 미국프로골프협회(PGA) 투어 파머스 인슈어런스 대회 3라운드(사흘째 경기)를 하고 있었다. 악동으로 불리는 패트릭 리드가 경기위원을 불러 러프에 박힌 볼 구제를 받고 있는데 찜찜하다고 했다. 리드가 페어웨이 벙커에서 친 볼이 제법 높이 떠서 한 번 튀는 장면을 카메라가 잡았다는 것이다.
한 번 튀었다가 멈췄다면 낙하 충격으로 볼이 박히지는 않을 터. 그러니 박힌 볼 구제를 받을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맞는 말이다. 골프 규칙에 박힌 볼은 구제를 받을 수 있긴 하다. 박힌 볼은 벌타 없이 들어 올려 가까운 곳에(물론 한 클럽 이내 거리에) 드롭하고 플레이하면 된다. 그런데 원칙이 있다. 볼 일부가 지면 아래로 내려가 있다고 다 무벌타 구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볼이 공중에서 떨어진 충격으로 박혀야만 된다. 이미 있던 홈에 굴러 들어가면 구제가 안 된다.
서둘러 사회관계망(SNS)에 올라온 영상을 봤다. 그랬다. 리드가 친 볼은 멈추기 전에 한 번 튄 것이 분명했다. 구제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리드는 볼을 마크하더니 들어 올리고는 볼이 박혀 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볼을 원래 자리가 아니라 근처에 내려놓고는 경기위원을 불렀다. 경기위원은 무벌타 구제를 받도록 해줬다.
리드는 꽤 깊은 러프에 있던 볼을 풀이 조금 덜 깊은 곳에 ‘합법적으로’ 드롭하더니 멋지게 샷을 해서 홀 가까이에 붙였다. 그러곤 파 세이브를 해냈다. 그런데 평소 리드의 행동거지가 바르지 못한 탓일까? 현지 방송 해설자는 리드가 규칙을 위반한 것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같은 조 선수에게 먼저 알리지 않고 볼이 박혔는지 확인하려고 집어 든 것은 규칙에 어긋날 수 있다고 말이다. 또 집어 올린 볼을 다시 제자리에 내려놓지 않고 옆에 놓고 경기위원을 부른 것도 잘못됐다고 했다. 전화한 기자도 해설자 말이 맞는지 물었다. 리드가 규칙을 어긴 것 아닌지 말이다.
나는 잠깐 호흡을 가다듬고 다음과 같이 답했다. 리드에게 벌타를 줄 수 없다. 우선 볼이 박혔는지 확인할 때 남에게 알리지 않아도 된다. 예전에는 미리 알려야 했는데 2019년에 규칙을 바꿨다. 집어 올린 볼을 옆에 내려놓고 경기위원을 불러도 규칙에 어긋나지 않는다. 경기위원을 부르기 전에 꼭 원래대로 되돌려놓으라는 조항은 없다.
혹시 볼을 손에 들고 있거나 캐디에게 맡겼다가 무심코 볼을 닦는 실수를 하지 않으려는 행동이니까, 지혜롭다고도 할 수 있다. 경기위원이 와서 박힌 볼이라고 판정하면 무벌타 구제를 받을 수 있다. 이때는 볼을 닦을 수도 있다. 그런데 박힌 볼이 아니라고 판정하면? 볼을 닦을 수 없다. 이미 볼을 닦아버렸다면? 벌타를 받을 수밖에 없다.
패트릭 리드가 하는 행동을 보면서 나는 이 선수가 ‘멍청한’ 악당은 아니라고 느꼈다. 골프 규칙을 상당히 깊게 잘 이해하고, 그것을 잘 이용해서 이득을 봤기 때문이다. 나쁘게 말하면 악용한 것이고. 리드가 한 행동은 그 다음 주까지 골프 세상에 회자됐다. 대개 리드를 욕했다. 볼이 튄 것을 알거나 짐작하고도 시치미를 뗐다고 본 골프 팬이 많은 것이다.
그런데 진짜 실수는 경기위원이 했다고 봐야 한다. 물론 내 의견이다. 그날 리드는 선두 조였다. 경기위원은 문제가 된 샷을 카메라맨이 잡았는지 확인해야 했다. 본부에 무전을 해서라도 리드가 한 샷을 잡은 화면이 있는지 체크해야 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볼 놓인 상태만 보고 재정을 내린 것이다. 그 덕에 리드는 기적처럼 파 세이브를 했고. 리드에겐 더없이 값진 파였다. 여러 타 앞서서 선두를 달리다 그 전 홀에서 실수를 해서 2위와의 격차가 갑자기 줄어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튿날 리드는 승부사답게(어쩌면 뻔뻔하게) 샷을 날렸고 우승컵을 손에 쥐었다. 우승을 하자 리드가 한 행동에 대한 비난은 더 커졌다. 급기야 PGA 경기위원회가 리드는 죄가 없으며, 경기위원의 판정도 문제가 없다는 해명을 내놓았다. 현장에서 최선을 다한 판정이었다고 밝힌 것이다. 내가 보기엔 변명이다.
리드에게 운이 따른 것일까? 매너가 좋아 팬이 많은 로리 매킬로이도 같은 날 똑같은 상황을 똑같이 처리한 사실이 드러나자 비난은 사그라들었다. 평판이 나쁘면 무슨 짓을 해도 곱게 봐주지 않는다. 재능이 뛰어나고 큰 성과를 내도 말이다. 리드 사건을 보며 나도 타산지석으로 삼으려고 한다.
설 연휴를 앞둔 초저녁이었다.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황현서 프로가 문자를 보냈다. ‘파3 티 샷 할 때 생수 병뚜껑을 티(tee)로 쓰는 게 가능한가요?’라고. ‘이상한 남성 프로 골퍼를 만나서요’라는 말과 함께.
황현서 프로는 나처럼 늦깎이로 골프를 시작해 지금은 KLPGA 챔피언스투어를 뛰고 있다. 골프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대단한지 나는 견주지도 못할 정도다. 내가 골프를 가르치는 대학원 석사과정에서 겸임교수와 대학원생으로 만났다. 말이 교수와 학생이지 누가 누구에게 가르친단 말인가? 둘이 골프 얘기를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혹시 대전에서 골프를 배울 생각이라면 나는 그녀를 자신 있게 추천한다. 아차 얘기가 딴 길로 샜다. 그녀가 한 질문에 나는 웃음부터 나왔다.
병뚜껑이라니?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코리안투어 경기위원이다 보니 골프 규칙에 대한 질문을 받는 일은 내겐 일상사다. 별별 해괴한 상황을 다 들어봤지만 ‘생수 병뚜껑 사건’은 처음이었다. 파3 홀에서 누군가 티 샷을 했는데 생수 병뚜껑이 휘익 날아오는 모습이라니. 나는 순식간에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그래서 ‘일단 안 될 것 같은데요. 생각 좀 더 해보고요. 혹시 놓치는 부분이 있을지 모르니’라고 답을 했다. 그러곤 골프 장비에 관한 규칙을 떠올렸다.
참고로 말하면 ‘골프 장비 규격’을 다루는 부분은 골프 규칙 본문에는 없다. 따로 있다. ‘장비 표준에 관한 규칙’인데 영국왕립골프협회(R&A) 홈페이지에 가야 비로소 찾을 수 있다. 손쉽게 접할 수 없다 보니 골프 규칙을 착실히 공부하는 골퍼조차 장비 규격에 대해서는 놓치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내가 ‘티는 길이가 4인치(101.6mm)를 넘지 않아야 하고, 방향을 표시하는 기능이 있으면 안 되고, 다른 이득을 플레이어에게 주면 안 되고’ 따위를 떠올리는 동안 황 프로가 문자를 또 보냈다. ‘퍼팅 그린에서 마크도 생수 병뚜껑으로 했어요. 그 뚜껑에 다른 플레이어 공이 맞아서 튀어나가기도 하고.’ 점입가경이었다. 병뚜껑을 티로 써도 문제가 없는지에 대한 최종 결론도 미처 내놓지 못한 나는 순간 멍했다. 그래도 이내 정신을 차리고 ‘마커(퍼팅 그린에서 볼 위치를 표시하는 장비)는 동전 또는 동전 비슷한 것을 쓰라고 하긴 하지요. 티로 마크를 해도 규칙에 어긋나지는 않으니까 병뚜껑으로 마크를 해도 규칙 위반은 아니지요. 그래도 매너가 엉터리인 골퍼네요’라고 답을 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가 길이가 5~10cm 정도 되는 신발 모양 물건도 마커로 쓰더란다. 나는 쓴웃음이 나왔다.
서로 웃고 즐기는 레크리에이션 플레이 때야 얼마든지 재미로 할 수 있다. 손바닥만 한 동전이면 어떤가? 웃고 넘어가면 그만이지. 그런데 황 프로가 그날 평생 처음 봤다는 그 골퍼는 자신도 프로라고 밝혔다는 것이다.
생수 병뚜껑을 티로 써도 되는지 여부를 고민하다 말고 나는 ‘그가 KPGA 회원이냐’고 황 프로에게 물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 협회를 망신 준 책임을 따져볼 심산이었다. 그런데 어느 단체 소속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틈에 나는 장비 표준에 관한 규칙을 내려받아 티에 관한 규정을 번개처럼 일독했다. 그런데도 결론을 못 내렸다. 바로 ‘부당하게 볼 움직임에 영향을 주면 안 된다’는 조항과 ‘플레이에 다른 도움이 되면 안 된다’는 조항 탓이었다. 생수 병뚜껑에 볼을 얹어놓고 치면 혹시 볼이 옆으로 휘는 것을 줄여주는 효과를 얻지 않을까 싶어 고개를 갸웃거린 것이다. 솔직히 그 짓을 한 골퍼가 밉다는 생각이 드니 자꾸 규칙 위반으로 몰아가려고 따져보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테스트 장비도 없이 생수 병뚜껑이 슬라이스(혹은 훅)를 줄여주는지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나는 ‘생수 병뚜껑을 티로 쓸 수 있다’고 잠정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퍼팅 그린에서 생수 병뚜껑으로 마크를 하는 것도 규칙에 어긋나지는 않는다는 답은 이미 내린 상태고.
황 프로는 내 답을 듣더니 ‘혼내줄 방법이 없군요’라며 씁쓸해했다. 나는 황 프로에게 전화를 걸었다. 얘기가 조금 길어서다.
내가 한 얘기는 다음과 같다. 골프 조상들은 잔디 조각을 뭉쳐서 그 위에 볼을 올려놓고 티 샷을 했다. 지금도 세상 어디엔가 그 옛날 방식을 고집하는 골퍼가 있을 수 있다. 그런 역사가 있으니 R&A가 꼭 못처럼 생긴 티를 써야만 한다고 규칙에 못 박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프로 골퍼라면, 아니 골프를 스포츠라고 생각한다면 다른 골퍼를 불쾌하게 만드는 행동을 일부러 하지 않는 것이 매너다. 진짜 멋진 골퍼라면 골프 규칙 본문 맨 앞 페이지에 나오는 ‘플레이어의 행동 기준’을 지켜야 한다.
만약 공식 경기에서 생수 병뚜껑을 티나 마커로 쓰고 다른 플레이어가 따지는데도 고치지 않는 선수가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경기위원으로서 나는 ‘골프 규칙 1-2 플레이어의 행동 기준’을 어긴 책임을 물어 그 선수에게 페널티를 부과할 것이다. 그 페널티는 실격이다. 황 프로는 그가 어느 프로 단체 소속인지 알아보겠다고 했다. 나는 그가 제발 내가 몸담은 KPGA 소속이 아니기를 빌고 있다.
독자는 입스(yips)에 걸려본 적 있는가? 입스가 뭐냐고? 앗! 이러면 얘기가 안 되는데. 골퍼이면서도 입스가 뭔지 모르는 독자는 행운아다. 서너 명 중 한 명은 반드시 경험한다는데. 아예 뜻도 모른다고? 부디 앞으로도 모르고 살기를 바란다. 겪어보면 안다. 왜 모르는 게 낫다고 하는지. 일단 뜻부터 짚고 가자. 입스는 ‘느닷없이 마음이 완전히 움츠러들어 아예 스윙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겨우 두 발 남짓한 짧은 퍼트를 하는데 손을 가늘게 떨면서 백스윙도 하지 못하고 한참을 못 박힌 듯 서 있는 그런 경우 말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말도 안 되는 스트로크를 해서 샷을 망치는 것이 입스다. 좀 더 깊게 알아보자. 뱁새 김용준 프로보다 백 배는 더 박식한 네이버 지식백과에 나온 입스 정의를 옮겨본다. “부상 및 샷 실패에 대한 불안감, 주위 시선에 대한 지나친 의식 등이 원인이 되어 손과 손목 근육의 가벼운 경련, 발한 등의 신체적인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좋다. 내 설명보다 훨씬 분명하다. 계속 들어보자. “뇌 속의 무의식과 의식을 각각 담당하는 편도와 해마의 균형이 깨져 편도가 과잉 활성화되고….” 음, 아무래도 안 되겠다. 여기까지만 하는 게 낫겠다. 절대 원고량을 늘리려고 꾀를 부리는 것이 아님을 밝혀둔다.
김용준 프로, 너는 입스 겪어본 적 있냐고? 그 말 나올 줄 알았다. 입스에 빠져본 적이 없다면 고민이나 해봤겠는가? 나도 입스로 말 못할 고생을 했다. 지금도 마음 한편에 불안감이 남아 있다. 어떤 입스냐고? 다른 것도 아니고 내가 가장 자신 있다고 떠들던 벙커샷 입스에 빠졌다. 그랬으니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힘들 수밖에. 내가 벙커샷 하나만큼은 대한민국에서 세 번째로 잘한다고 큰소리친 것은 다 알 것이다. 처음 듣는다고? 헉, 그럼 아직 애독자가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벙커샷 하면 딱 세 사람이다. 남자 중에서는 최경주 프로, 여자 중에서는 이정민 프로, 그리고 남녀 통틀어서는 누구겠는가? 하여간 동네 놀이터 모래밭에서 아이들 훼방놓고 눈치 봐가며 땀 흘려 긴 세월을 연습한 끝에 마침내 벙커샷 하나만큼은 마스터했다고 자부하는 나였다.
그런데 지난해 그린 주변 벙커샷에 문제가 생겼다. 모래 위에 놓인 볼 앞에 서면 탈출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아니나 다를까.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볼 뒤쪽 모래를 쳐서 볼이 풀썩 뛰어올랐다가 내려앉기 십상이었다. 혹시 탈출을 못할까봐 볼 가까이 치려다 보면 볼을 직접 맞혀 저 멀리 날아가기도 하고. 미칠 노릇이었다. 벙커샷 잘한다고 말이나 안 했으면 좋으련만. 돌이켜보니 언제부터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큰 대회 먼데이(월요 예선)에 나가서 청년들과 한 조를 이뤄 치다가 그린 사이드 벙커에서 볼을 직접 맞힌 것이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아웃오브바운드가 된 그날부터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다.
큰 경기 중요한 샷에서 실수를 하면서 입스가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 뒤로 틈틈이 벙커샷 연습을 해서 입스에서 벗어났다 싶었다. 그런데 막상 실전 라운드 때 그린 주변 벙커샷을 만나면 다시 입스가 도졌다. 이런 환장할 노릇이라니. 그러는 중에도 남 벙커샷을 잘도 가르쳤다. 볼은 왼발 쪽에 놓고 클럽 페이스를 열고 볼 4인치 뒤를 보통 샷 하듯이 치면 된다고 말이다. 배운 사람은 잘하는데 정작 나는 식은땀을 흘리는 이 기가 막힌 현실. 나보다 훨씬 뛰어난 골퍼들이 입스로 선수생활을 접는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입스를 한참 겪으면서도 나는 입스 원인이 무엇인지 몰랐다. 하기야 털어놓고 상의를 했어야 조언해줄 사람을 만나든지 말든지 할 텐데. 알량한 자존심이 1년 가까이 나를 괴롭혔다. 그러다가 입스에 대해 공부를 하게 됐다. 시니어인 제자 한 명을 입스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도무지 백스윙을 편하게 못하는 그를 고통에서 해방시켜주고 싶었다. 그러다가 나는 무릎을 탁 쳤다. 그 제자의 입스 원인을 이해한 것이다.
그리고 덤으로 내 입스 원인도 찾아냈고. 무엇이었냐고? 내 입스의 원인은 ‘기술’ 문제였다. 점잖게 말하면 벙커샷 기본기를 잊어버린 것이었다. 툭 까놓고 말하면 내가 어느 순간부터 벙커샷을 엉터리로 했다는 말이고. 벙커샷 기본 원칙이야 조금 전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나도 제대로 알고 있었다. 내가 간과한 부분은 스윙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벙커샷을 손이나 팔로만 한 것이다. 다른 스윙처럼 어깨도 쓰고 골반도 회전하면서 해야 했는데. 그렇게 내 입스는 말끔히 사라졌다. 흠흠. 마음 한편에 불안감이 남아 있다가 재발할 수 있으니 자신감을 갖기 위해서라도 ‘입스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큰소리치는 속사정을 이해해주리라 믿는다.
그 제자의 입스 원인은 무엇이었냐고? 바로 ‘기질’ 변화였다. 기질은 유연성이나 힘 같은 것도 포함한다. 그가 시니어가 되면서 그전처럼 스윙을 하지 못한 것이다. 힘 좋을 때는 ‘정석과는 다르게’ 팔로만 스윙을 해도 골프를 즐길 수 있었는데 말이다. 그에게 스윙 정석을 알려줬다. 그리고 기질이 바뀐 것을 받아들여 더 부드럽게 스윙하도록 조언했다. 그것이 실전에서 통하기 시작하자 그는 입스에서 벗어났다. 기질 변화와 기술적 문제가 입스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스포츠 과학자들은 말한다. 나머지가 진짜 마음의 영역이다. 나처럼 전문지식이 부족한 사람이 그 부분까지 아는 체한다면 지나친 것이다.
2020년 골프 월드는 뒤죽박죽이었다. 매년 4월에 열던 ‘마스터스’를 84년 만에 처음으로 11월에 연 것이 대표적이다. 그 바람에 덕을 본 선수가 두 명 나왔다. 한 명은 최저 타수 기록을 세우며 우승한 더스틴 존슨이다. 더스틴 존슨은 늦가을에 촉촉하게 젖은 오거스타 내셔널(마스터스를 매년 여는 골프장) 그린을 장타와 날카로운 아이언 샷으로 공략해 나흘 합계 20언더파를 기록했다. 종전 최저타 기록은 타이거 우즈와 조던 스피스가 갖고 있던 18언더파다. 더스틴 존슨의 기록은 늦가을에 비가 흠뻑 내려 그 악명 높은 오거스타 그린이 딱딱함을 잃은 덕분임이 분명했다.
참, 내 정신 좀 보라. 제목은 최고령 기록 어쩌고 해놓고 엉뚱한 길로 새서 한참 가고 있다. 새해 첫 글의 주제는 독자도 보다시피 ‘최고령 기록과 에이지 슈팅’이다. 더스틴 존슨이 대회 중계 화면을 독차지하다시피 한 그 대회에서 내가 눈여겨본 선수는 따로 있다. 언뜻언뜻 비칠 때마다 진심으로 응원했다. 그는 바로 베른하르트 랑거다. 나는 2019년 마스터스에서 만 62세로 컷 통과를 한 그가 2020년에도 선전하기를 바란 것이다. 결과는 어땠냐고? 그는 내 바람을 훌쩍 뛰어넘어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바로 마스터스 역사상 최고령 컷 통과 기록을 세운 것이다. 만 63세로. 랑거는 1957년생이다. 나흘간 합산한 최종 성적도 빼어났다. 공동 29위. 2019년에는 컷 통과 후 맥이 풀렸는지 컷 통과자 중 최하위를 기록했는데 말이다. 랑거 또한 더스틴 존슨과 마찬가지로 ‘11월에 열린 마스터스’의 수혜자다. 왜냐고? 마스터스를 예정대로 4월에 열었다면 랑거가 컷 통과를 해도 최고령 기록을 달성하지는 못했을 테니까.
랑거의 최고령 마스터스 컷 통과 기록에 내가 환호한 이유는 또 있다. 랑거는 2019년 주로 활동하는 미국 PGA 투어 챔피언스(시니어 투어)에서 시즌 중반 갑자기 부진에 빠졌다. 그는 그해 마스터스 컷 통과를 한 직후 대회부터 몇 개 대회에서 죽을 쒔다. 마스터스에 진을 뺀 후유증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때 ‘시니어 투어를 지배하던 랑거의 시대가 끝났다’는 내용의 칼럼을 여러 골프 칼럼니스트가 썼다. 그때 내 생각은 어떠했는지는 애독자라면 잘 알 것이다. 모른다고? 흑. 애독자가 아니거나 내가 아직도 철저하게 무명이라는 얘기다. 나는 ‘랑거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큰소리를 친 칼럼을 바로 이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썼다. 못 믿겠다면 2020년 3월호 베른하르트 랑거 편을 찾아보기 바란다.
2020년에는 마스터스가 열리기 직전 다른 미국 프로골프(PGA) 투어 대회에서도 멋진 기록이 나왔다. 1956년생 프레드 펑크가 버뮤다 챔피언십에서 컷 통과를 한 것이다. 세상에 만 64세에 말이다. 64세 이상일 때 PGA 투어 대회에서 컷 통과를 한 선수는 프레드 펑크를 빼면 딱 세 명뿐이다. 누구누구냐고? 모두 다 내가 이 칼럼에 소개한 이들이다. 바로 잭 니클라우스와 샘 스니드, 그리고 톰 왓슨이다.
놀라운 선전을 거둔 베른하르트 랑거와 프레드 펑크가 밝힌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독자도 이미 알 것이다. 바로 경쟁에서 이기겠다는 꿈을 꾼 것이다. 꾸준한 운동이 비결 아니냐고? 맞다. 그런데 꿈을 꾸면 훨씬 더 꾸준하게 운동하게 된다. 만 60세로 한국과 일본 시니어 투어 무대에서 뛰는 김종덕 프로는 40세 때 체력 관리의 중요성을 깨달은 뒤 20년째 근력 운동을 하고 있다고 말한 적 있다. 집에서 TV를 보더라도 아령을 든다고 말이다.
그래 김용준 프로 당신 얘기가 다 맞다고 치자. 그렇다면 “시니어 골퍼인 우리는 무슨 꿈을 꾸면 좋을까?” 하고 묻는 독자가 분명 있을 것이다. 순전히 참고하라고 내 목표를 살짝 밝힌다. 골프에서 내 목표는 에이지 슈터(age shooter, 나이보다 더 적은 타수를 기록한 골퍼)가 되는 것이다. 명색이 프로 골퍼라면서 목표가 우승이 아니고 에이지 슈팅(age shooting, 나이보다 더 적은 타수를 기록하는 것)이냐고? 흑! 맞다. 나이보다 더 적은 타수로 한 라운드를 마치는 그 에이지 슈팅 말이다. 에이, 김 프로 당신이야 프로 골퍼니까 에이지 슈팅이 가능할지 몰라도 어디 우리 같은 레크리에이션 골퍼가 가능하겠냐고? 일단 에이지 슈팅은 나도 장담 못한다. 그리고 독자에게는 ‘변형 에이지 슈팅 기준’을 소개한다. 변형 에이지 슈팅 기준이라고? 첨 들어본다고? 당연하다. 내가 세계 최초로 내놓는 것이니까. 변형 에이지 슈팅이란 바로 ‘전성기 핸디캡을 현재 나이에 더하고 그 점수보다 더 낮게 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창때 핸디캡이 ‘12’이고 지금 나이가 칠십이라면 ‘82’를 에이지 슈팅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어떤가? 세계 최초로 제안하는 ‘변형 에이지 슈팅’이라는 콘셉트가. 혹시 변형 에이지 슈팅을 하고 나서 옆 사람이 그런 게 어디 있냐고 깎아내리기라도 하면 꼭 김용준 프로가 만든 개념이라고 당당하게 말해주기 바란다. 변형 에이지 슈팅. 영어로는 ‘모디파이드 에이지 슈팅’(modified age-shooting)쯤 되려나? 그 기록을 달성하면 ‘변형 에이지 슈터’이고.
김용준
한마디로 소개하면 ‘골프에 미친놈’이다. 서른여섯 살에 골프채를 처음 잡았고 독학으로 마흔네 살에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프로가 됐다. 영국왕립골프협회(R&A)가 주관하는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KPGA 경기위원.
독자는 어려운 골프 코스가 좋은가? 쉬운 코스가 좋은가? 쉬운 코스가 좋다고? 그렇다면 즐겁게 치는 것이 목표인 행복한 골퍼다. 부럽다. 에이, 좀 어려워야지 너무 쉬우면 맛이 안 난다고? 이런 독자라면 ‘골프는 도전’이라고 생각하는 골퍼임에 틀림없다. 기량도 상당할 테고.
뱁새 김용준 프로, 너는 어떠냐고?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니 나는 두 얼굴이다. 이중적이다. 겉으로는 어려워야 제맛이라고 말하긴 한다. 그런데 어려운 코스에서 고전하고 나면 맥이 풀린다. ‘내가 이것밖에 안 되나’ 하는 좌절감이 밀려오기 때문이다. 조금 쉬운 코스에서 어쩌다가 언더파라도 칠라치면 어깨가 절로 으쓱해진다. 변별력이 높은 난코스에서는 맥도 못 춘 주제에 말이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독자에게만 살짝 털어놓자면 나도 어려운 듯하면서도 쉬운 코스가 좋다.
느닷없이 웬 코스 난이도 타령이냐고? 바로 멋진 골프장과 그 골프장을 만든 사람 얘기를 하려고 그러는 것이다.
어려운 골프장 특징이 뭘까? 퍼팅 그린에 굴곡이 심하다고? 그렇다. 감자 칩처럼 구겨진 그린이 주는 압박감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기껏 레귤러 온(예를 들어 파4라면 두 번 만에 온그린하는 것)을 하고도 쓰리 퍼팅을 한다면? 어쩌다 한 번 그랬다면 머쓱하게 넘어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번번이 그런다면 욕이 절로 나온다. 창피하지만 나도 별수 없다.
난이도 높은 코스의 또 다른 특징은 뭘까? 그렇다. 러프가 깊다. 일단 러프에 들어가면 탈출하기가 만만치 않다. 멀쩡하게 볼이 떨어지는 자리를 보고 찾으러 나섰는데 로스트 볼(찾지 못한 볼을 말한다)이 나면 어떨까? 속으론 고소해하는 동반자도 안타까운 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코스를 따라 나무가 주욱 늘어서 있다면?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코스다. 슬라이스나 훅이 나서 페어웨이를 벗어날라치면 어김없이 한 타 이상 까먹을 수밖에 없다. 그 밖에 벙커가 많거나 깊거나 페어웨이 폭이 좁거나 오르막과 내리막이 아주 심한 코스도 어렵다.
멋진 코스란 이런 어려움을 곳곳에 담은 곳을 말한다. 그런데 오늘 소개하는 골프장은 정반대다. 무슨 소리냐고? 바로 퍼팅 그린에 굴곡도 없고 거친 러프도 없고 코스에 나무도 없다. 이른바 ‘3무(無) 코스’다. 그런 코스가 어떻게 멋진 코스냐고? 왕초보를 위한 파3라면 모를까 정규 홀 중에 그런 곳이 어디 있냐고? 있다. 그것도 한적한 시골에 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미국 뉴욕주 엔디코트에 있는 엔조이골프클럽(En-joei Golf Club)이다. 이 골프장은 1927년에 문을 열었다. 설립자가 혹시 골프 실력이 형편없어서 자기 기량에 맞게 지은 것 아니냐고? 아니면 재원이 모자라서 공사비를 아끼기 위해 최대한 단순하게 설계한 것 아니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엔조이골프클럽을 만든 조지 조던은 당시 상당히 큰 사업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 지역에서 가장 큰 신발 공장을 운영했다. 엔디코트 슈 컴퍼니가 바로 그 회사다.
조지 조던은 골프를 매우 사랑했으며 당연히 실력도 뛰어났다. 아차! 그러고 보니 골프를 사랑해도 실력은 부족한 골퍼도 당연히 있다. 사과한다. 하여튼 조지 조던은 자신이 너무 좋아하는 골프를 자기 회사 노동자들이 즐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다. 당시는 고무로 만든 볼(발라타 볼)이 세상에 막 나와 골프가 부흥하기 시작한 시대였다. 그래도 여전히 골프 용품과 그린피는 비쌌다.
조지 조던은 가난한 노동자들을 위해 골프장을 열었다. 그 코스가 바로 엔조이골프클럽이다. 그는 노동자들에게 그린피를 25센트밖에 받지 않았다. 요즘으로 치면 18홀에 1만~2만 원 정도밖에 안 되는 금액이다. 그래도 여전히 부담을 느끼는 노동자들을 위해 골프백도 75센트에 팔았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 골프는 여전히 ‘부담’스런 운동이었다. 골프 클럽이야 큰맘 먹고 한 번 사면 오래 쓴다고 치자. 여차하면 잃어버리는 골프 볼 값은 만만치 않았다. 발라타 볼이 나오면서 러버 코어 볼(rubber core ball, 고무 코어에 고무줄을 칭칭 감고 그 위에 구타페르카 재로 커버를 씌운 볼)을 대체해 볼 값이 떨어지긴 했다. 그래도 여전히 부담이 됐던 것이다.
이런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엔조인골프클럽 창시자 조지 조던은 코스 디자인에 세심함을 담았다. 골프 볼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코스를 만든 것이다. 러프를 없애고 나무도 심지 않았다. 그건 그렇다 치고 퍼팅 그린을 쉽게 만든 게 볼 안 잃어버리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냐고? 날카로운 독자다. 그렇다. 조지 조던은 볼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신경을 썼을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더 라운드할 수 있도록 더 쉽게 만들었다고 한다.
골프장 이름에도 그의 철학이 배어 있다. 엔조이골프클럽의 ‘En-Joei’는 ‘즐기다’라는 뜻을 지닌 영어 ‘enjoy’에서 따온 것이 틀림없다. 상표등록을 위해 변형하기만 했을 뿐. 이런 코스이지만 1998년에는 리모델링을 했다. 시대의 변화를 영원히 거스를 수는 없는 노릇 아니었겠는가? 그러면서 퍼팅 그린에 언듈레이션도 주고 나무도 제법 많이 심었다. 러프도 기르기 시작했고. 그래도 엔조이골프클럽이야말로 진정한 퍼블릭 코스의 원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코스를 만든 조지 조던의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골퍼의 그것이라고.
김용준
한마디로 소개하면 ‘골프에 미친놈’이다. 서른여섯 살에 골프채를 처음 잡았고 독학으로 마흔네 살에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프로가 됐다. 영국왕립골프협회(R&A)가 주관하는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KPGA 경기위원.
독자는 몇 살에 골프를 시작했는가? 아직 시작도 안 했다고? 하다가 뜻대로 안 돼서 지금은 손을 놓았다고? 그렇다면 지금부터 들려주는 얘기를 듣고 꼭 용기를 내면 좋겠다.
내 아버지 김정홍 옹은 2014년 늦가을에 처음 골프채를 잡았다. 진짜로 평생 처음. 그는 1940년생이다. 메이저 대회 세계 최다승 기록을 갖고 있는 잭 니클라우스(Jack Nicklaus)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 그런 그가 골프를 시작한 것은 만 74세 때. 갑자기 골프를 치기로 작정한 이유는 나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동년배 중에 골프를 치는 이가 몇 있어서 어울리기 위해서라고 짐작만 했을 뿐. 아버지는 이듬해 봄에 친구들과 필드에 나가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 당시에 아마추어치곤 기량이 상당했던(실은 기량이 상당하다고 착각했던) 나는 아버지에게 그립부터 가르쳤다. 그리고 클럽 페이스가 상당히 많이 닫힌 드라이버를 구해서 선물했다. 초보 골퍼가 고통받기 마련인 슬라이스로부터 조금이라도 빨리 구해내기 위해서였다. 아버지가 스윙을 제대로 익히는 것만으로 슬라이스를 완전히 극복하기에는 몇 달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버지는 골프에 빠져들었고 입문 후 6개월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연습했다. 진짜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한 시간 가까이 말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한꺼번에 너무 오래 연습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허리를 이따금 삐는 그가 무리할까봐 걱정이 됐던 것이다. 그는 틈이 나면 내게 샷을 배우고 또 혼자서 그것을 익혔다. 진짜 연습다운 연습을 한 것이다. 연습은 한자로 익힐 ‘연’, 배울 ‘습’ 아닌가?
그렇게 6개월이 지났다. 드디어 아버지가 친구들과 필드에 나가기로 한 날이 다가왔다. 이삼 일 전 나는 시뮬레이션 골프 연습장(흔히 말하는 스크린 골프)에 그와 함께 갔다. 실전을 대비해서. 그리고 거기서 부자간 라운드를 했다. 결과는? 그는 109타를 쳤다. 정말이다. 파3인 13번 홀에서는 파도 하나 잡았고. 나는 몇 타나 쳤냐고? 버디 6개 보기 2개로 68타를 쳤다. 그것도 챔피언티에서 대회 모드로 놓고.
아차, 얘기가 딴 길로 샜다. 다시 내 아버지 얘기로 돌아가자. 며칠 뒤 그는 아침 느지막이 데리러 온 친구들과 경기도 용인에 있는 모 골프장으로 첫 필드 라운드에 나섰다. 나는 그날 오후 내내 결과가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라운드가 끝났을 무렵부터 전화를 할까 말까 몇 번이나 망설였다. 그러다가 밤에 집에서 만났을 때야(그렇다 나는 아버지와 한집에 산다) 그에게 물었다. “오늘 재미있게 치셨어요?”라고. 혹시 속이 상했을지도 몰라 ‘몇 타나 쳤냐?’라는 질문은 꾹 참았다. 그런데 곧이어 나온 대답에 나는 눈이 커졌다. 아버지는 “친구들이 연습장 등록해야겠다고 하면서 가더라”고 말했다. 그날 아버지는 레드티에서 98타를 쳤다고 했다. 흔히 숙녀들이 주로 쓴다고 해서 레이디티라고 한다. 그러나 주니어도 쓰고 노신사도 쓰기도 하니 레드티가 더 멋진 표현이다.
98타! 나는 믿어지지 않았다. 독자는 처음 필드에 나간 날 몇 타를 쳤는가? 나는? 셀 수 없이 많이 쳤다. 볼도 무수히 잃어버렸고. 그런데 칠순이 넘은 아버지가 생애 첫 라운드에서 ‘파백’을 하다니. ‘파백’은 100타를 처음 깨는 것을 말한다. 게다가 친구들이 연습장에 등록하겠다며 간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그가 ‘내뿜은’ 장타가 부러워서였다고. 그제야 돌이켜보니 그랬다. 시뮬레이션 골프 연습장에서 아버지의 드라이버 티샷은 160m 가까이 나갔다. 그보다 100m 이상 더 멀리 보내는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아버지의 친구들이 볼 때는 입이 떡 벌어지는 거리였던 것이다.
아들에게 골프를 배웠다고 하니 친구들이 더 부러워했다고 한다. 당시 싱글 핸디캡퍼(평균 핸디캡이 한 자릿수인)인 아들이 그해 10월에는 급기야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프로 선발전을 통과해 프로 골퍼가 된 것은 애독자라면 다 아는 얘기다. 첨 듣는다고? 그렇다면 아직 애독자 인증을 하기엔 멀었다. 이미 10회 남짓 나간 이 칼럼을 첫 회부터 찾아서 읽어보기 바란다.
내 아버지가 늦깎이로 화려하게 골프 월드에 입문한 것은 순전히 행운 덕분만은 아니다. 그는 첫 라운드를 준비하는 6개월간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골프를 수련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이지만 마음을 열고 상수(上手)로부터 조언을 듣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고. 어디 자식에게 조곤조곤 물어보기가 쉬운가?
내 아버지와 동갑인 잭 니클라우스는 지난 9월에 미국 미주리주에서 열린 페이슨밸리컵 때 이벤트 행사에 출전해 건재함을 과시했다. 아일랜드 홀인 파3에서 타이거 우즈 등과 니어리스트(티샷으로 볼을 홀에 가장 가까이 붙인 선수가 이기는 것)를 겨뤘다. 등이 약간 굽고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니클라우스는 거뜬하게 볼을 그린에 올렸다. 그를 보며 6년 전 내 아버지가 골프채를 처음 잡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골프에 나이는 없다. 몇 살에 시작하든 의지만 있다면 실력이 향상된다.”
내가 한 말이 아니다. 벤 호건(Ben Hogan)이 한 말이다.
김용준
한마디로 소개하면 ‘골프에 미친놈’이다. 서른여섯 살에 골프채를 처음 잡았고 독학으로 마흔네 살에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프로가 됐다. 영국왕립골프협회(R&A)가 주관하는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KPGA 경기위원.
“이번 주 토요일에 함께 라운드합시다.” 수천 명이나 되는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회원 중에 딱 한 명뿐인 대학 선배이자 지금은 함께 코리안투어 경기위원이기도 한 최병복 프로가 전화를 한 것은 3년 전쯤 어느 나른한 날 오후였다. 마침 약속이 없던 나는 ‘얼씨구나’ 했다. 그러곤 물었다. “티업 시간 알려주시면 달려가겠습니다. 그런데 다른 분은 누구신지요?”라고. “최상호 프로님이 오시기로 했어.” 황새 최천호 프로(2020 코리안투어 멤버) 아버지이자 스승이기도 한 선배 최 프로가 답했다. 눈이 번쩍 뜨인 내가 물었다. “그 최상호 프로님 말씀인가요?”라고. “누가 또 있겠어. 그 최상호 프로님이지. 내 사부셔. 이번에 한 사람 데리고 오라고 하셨는데 후배님 생각이 나서 말이야.” 선배 최 프로가 사연을 털어놨다. ‘살아 있는 전설 최상호 프로와 뱁새 김용준 프로의 대결’은 그렇게 이뤄졌다. 얼씨구? 대결이라니?
코리안투어에서만 43승. 50세 이상이 참여하는 시니어 투어에서 15승. 다시 60세 이상이 겨루는 그랜드 시니어부에서 10승. 국내에서만 총 68승을 거둬 최다승 기록을 갖고 있는 최상호 프로. 한국 골프에서 이 기록을 깰 선수가 있을까? 내 생애에는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성기 최상호 프로만큼 경쟁자를 압도할 기량을 가진 선수가 나오기 힘들기 때문이다. 기적처럼 그런 선수가 나온다면 더 큰 무대로 진출하기도 할 테고. 미국 PGA투어에서는 1940년대를 지배한 샘 스니드가 세운 PGA투어 최다승 기록을 ‘외계인’ 타이거 우즈가 마침내 달성하기는 했다.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 같던 82승 기록과 동률을 이룬 것이다. 그러니까 최상호 프로는 한국의 ‘샘 스니드’인 셈이다.
살아 있는 전설과의 대결은 어떻게 됐냐고? 라운드가 끝나고 클럽하우스 식당에서 뜨거운 음식을 먹으면서 나는 최상호 프로에게 공손하게 물었다. “선배님, 저는 어떻게 하면 볼을 좀 더 잘 칠 수 있을까요?”라고. 전설이 잠깐 생각하더니 답했다. “볼을 너무 세게만 치다가는 실수를 하기 쉬워요. 조금 더 부드럽게 치면 어떨까요”라고. 그랬다. 나는 하이브리드로 페어웨이 한가운데 갖다 놓은 파5 첫 홀 티샷을 빼고는 모든 샷을 강력하게 했다. 아니 힘이 잔뜩 들어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그러고는 숱한 위기를 자초했다. 티샷이 벙커나 러프 같은 고약한 자리에 들어간 적이 많았다. 세컨샷이 그린을 훌쩍 지나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고. 심지어 티샷한 볼이 하늘 높이 떴다가 한참 있다 툭 떨어지는 이른바 ‘뽕샷’도 나왔다. 그래도 그날 나는 퍼터 하나만큼은 전설에 버금가게 했다. 내가 그날 스크램블(그린을 놓치고도 파를 하는 것)을 대여섯 개나 한 것은 순전히 퍼터 덕분이었다. 물론 그 전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간 티샷이나 세컨샷 탓이기도 했고.
그날의 대결은 아니 도전은 결국 두 타 차 뱁새의 패배로 끝났다. 최상호 프로 71타, 뱁새 73타였다. 안간힘을 쓴 내가 초반에 기적처럼 한 타 앞서간 적도 있었다. 에이, 설마? 진짜다. 그러나 내가 제풀에 무너지는 동안 전설이 침착하게 경기를 풀어가며 승부를 뒤집었다. 나는 마지막 파5 홀에서도 투 온을 시키는 등 막판까지 완력으로 어찌해보려고 했으나 절정 고수를 상대로 한 번 기운 승부의 추를 돌리지는 못했다. “퍼터를 어떻게 그렇게 잘해요?”라는 전설의 칭찬은 한편으론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많은 위기상황을 만드느냐’는 질책이기도 했다. 전설과 라운드를 한 뒤로 내 샷은 크게 변했을까? 그의 조언을 듣고 부드러워졌을까? 흐흐. 그날로부터 3년 가까이 지난 어제서야 문득 ‘정말 부드럽게 샷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떠먹여줘도 못 먹으니 내가 발전이 더딜 수밖에.
전설을 오랜만에 다시 본 것은 몇 주 전 챔피언스 투어 대회에 경기위원으로 근무하러 갔을 때였다. 첫 홀 그린 옆에서 일부러 기다렸다가 그와 인사를 나눴다. 스물두 살에 프로 골퍼가 돼 지금까지 40년 넘게 뛰고 있는 전설이지만 여전히 꼿꼿하고 단정했다. 최상호 프로는 올해 65세다. 3년 전인 만 62세에 매경오픈 컷 오프를 통과해 코리안투어 최고령 컷 통과 기록을 경신한 그다. 미국 PGA투어에서도 베른하르트 랑거가 2019년에 마스터스(메이저 대회 중 하나)에서 62세로 컷 통과한 것이 기록이니 대단한 일이다.
오랜만에 전설을 다시 본 날 나는 최병복 프로에게 전설 얘기를 하나 들었다. 전성기 때 전설이 대회를 마치고 부인에게 전화를 할 때 “오늘은 잘했어요”라고 조용히 얘기한 날은 우승한 날이라고. “오늘은 조금 잘 안 됐어요”라고 한 날은 준우승한 날이라고. 그렇게 많은 우승을 했으니 준우승도 얼마나 많이 했겠는가? 톱10에 든 적은?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우승은 잘한 것이고 준우승은 조금 잘 안 된 것이라니? 최병복 프로에 따르면, 전설은 전성기 시절 대회에 나가면 ‘우승하러 왔다’고 생각했단다. 헉! 아직도 한 홀 한 홀 풀어가기 급급한 뱁새와는 차원이 다르다. 나는 전설과 같은 마인드와 실력을 한 번이라도 가질 수 있을까?
김용준
한마디로 소개하면 ‘골프에 미친놈’이다. 서른여섯 살에 골프채를 처음 잡았고 독학으로 마흔네 살에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프로가 됐다. 영국왕립골프협회(R&A)가 주관하는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KPGA 경기위원으로, 골프채널코리아에서 골프 중계 해설을 맡고 있다.
독자는 악동을 좋아하는가? 나는 어떠냐고?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왜 좋아하지 않을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니 그 예측 불가함이 불편해서다. 나와 달리 악동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서 열렬한 팬이 되는 이도 있고. 이런 이는 악동이 보여주는 ‘파격’을 높게 치는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골프 세상에도 악동이 여럿 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 선수 얘기를 하려고 한다.
몇 년 전 일이다. “혹시 잔 데일리라는 선수를 아시나요?” 그 무렵 나를 후원하던 골프용품 업체 대표가 전화를 걸어 대뜸 물었다. “잔 데일리요?” 나는 ‘잔 데일리’가 누군지 선뜻 떠오르지 않아 되물었다. “네, 미국 에이전트가 잔 데일리 선수를 후원하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서요.” 그가 내게 물은 이유를 설명했다. 그제야 나는 그가 말하는 선수가 ‘존 댈리’임을 알 수 있었다. “혹시 존 댈리를 말씀하시나요?” 내가 물었다. “그런 것 같은데요.” 골프용품 사업에 뛰어든 지 얼마 안 돼 해외 선수들까지 꿰고 있지 못한 그가 답했다. 한국계 미국인인 현지 에이전트가 존 댈리(John Daly)를 그렇게 발음한 것이 틀림없었다.
“존 댈리는 유명한 선수입니다. 지금은 PGA 시니어 투어인 챔피언스 투어에서 뛰고 있습니다. 최근에 챔피언스 투어에서 1승을 거뒀구요. 젊어서도 장타자로 유명했는데 지금도 챔피언스 투어에서 최장타자입니다.”
나는 아는 대로 존 댈리에 대해 짧게 설명했다. ‘존 댈리’ 하면 떠오르는 많은 얘기는 꿀꺽 삼킨 채 말이다.
“존 댈리에게 연간 30만 달러 정도 후원하고 우리 용품을 쓰게 하면 어떨까요? 물론 경기에 나갈 때는 우리 로고를 달고요.”
그는 에이전트가 제안한 내용을 조금 더 자세히 말했다. 나는 얼핏 생각하기에 일리 있다고 느꼈다. 존 댈리를 후원하는 것 말이다. 그 골프용품 업체는 그 해 미국 시장에 막 진출한 참이었다. 그러니 브랜드를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을 거다. 물론 상업적으로만 따졌을 때 말이다. 그런데 내게 존 댈리에 대해 물은 대표는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함께 일하면서 충실한 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존 댈리라는 사내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줄 수밖에 없었다. 꿀꺽 삼켰던 것을 되새김질해서 말이다.
나는 존 댈리가 천재적 골퍼인 것은 틀림없다고 말했다. 1966년생인 그는 대학을 마치고 스물한 살에 프로로 전향했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은 1991년에 메이저 대회인 ‘PGA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그것도 출전이 확정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차를
8시간이나 몰아 대회장 근처에서 기다리다 얻은 출전 기회를 살려서 말이다. 이어 1995년에는 ‘디 오픈 챔피언십’도 거머쥐면서 PGA 챔피언십 우승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그런 존 댈리이지만 스윙만 볼 때는 도무지 메이저 대회를 두 번이나 우승한 선수로 보이지 않는다. 물론 내 기준으로 볼 때 그렇다. 그는 클럽 헤드가 머리 뒤를 넘어 땅에 닿을 것 같은 오버 스윙을 한다. 이런 스윙으로 PGA에 장타 시대를 열었다는 사실은 더 믿을 수 없다. 존 댈리는 1997년 PGA 투어 최초로 시즌 평균 드라이버 거리 300야드를 넘겼다. 이어 1999년부터 2008년까지 다시 10년 연속 시즌 평균 드라이버 거리 300야드 이상을 기록했다. 2003년까지 시즌 평균 드라이버 거리 300야드를 넘긴 선수는 존 댈리가 유일했다. 작은 키 탓에 ‘땅콩’이라고 불리는 LPGA 선수 김미현은 거리를 늘리기 위해 존 댈리 스윙을 모방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존 댈리는 골프 팬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인데 PGA 투어에서는 단 5승뿐이다. 5승이 대단하지 않다는 얘기가 절대 아니다. 그의 재능이나 인지도로 따지면 훨씬 더 많이 우승했을 것 같은데 아니라는 말이다. 같은 시대 선수들보다 어마어마하게 멀리 치던 그의 파워로만 따져도 그보다 우승 기록이 많았어야 마땅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그렇지 못했을까? 아마 골프 자체에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알코올에 심각하게 의존했다. 대회 때도 종이 봉지에 술을 담아가지고 다니며 몰래 홀짝거리거나 혹은 대놓고 마시며 경기를 치른 경우가 숱했다. 그를 무명에서 영웅으로 만들어준 1991년 PGA 챔피언십 때도 나흘 내내 술을 마시며 경기했다. 도박 중독도 심각했다. 대회장 근처에 카지노가 있으면 어김없이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경기를 했다. 잠이 부족하면 어떻던가? 내 경우엔 숏 게임과 퍼팅이 안 된다. 술과 도박에 빠져 있었으니 성적이 들쑥날쑥한 건 당연했다. 성격이라도 좋았으면 조금 나았을지 모른다. 그는 갤러리하고도 이따금 다퉜다. 경기가 뜻대로 안 풀리면 라운드 중에 클럽을 내던지는 일도 잦았다. 갑자기 기권하고 백을 싸서 떠나는 일도 흔했고.
가슴이 너무 뜨거웠던 탓일까? 그는 개인사도 순탄치 않았다. 네 번이나 결혼했고 네 번 다 헤어졌다. 그 때문인지 2004년 뷰익 인비테이셔널에서 통산 다섯 번째 우승한 뒤로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그래서 2007년부터 PGA 시드권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런 그인데도 골프 팬은 그를 경기장에서 이따금 볼 수 있다. 초청 선수로 가끔 불러주기 때문이다. 누가 그를 부르냐고? 당연히 대회 스폰서다. 그와 같은 악동도 골프 월드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는 시대가 한국 골프에도 올까? 쉽지 않아 보인다. 결국 골프용품 업체는 존 댈리를 후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김용준
한마디로 소개하면 ‘골프에 미친놈’이다. 서른여섯 살에 골프채를 처음 잡았고 독학으로 마흔네 살에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프로가 됐다. 영국왕립골프협회(R&A)가 주관하는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KPGA 경기위원으로, 골프채널코리아에서 골프 중계 해설을 맡고 있다.
2008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연장전 첫 홀. 두 선수가 파3인 17번 홀에 들어섰다. ‘제5의 메이저’로 불리는 이 대회 우승컵을 놓고 벌이는 연장전이었다. 두 선수 중 한 명은 가르시아였다. 그렇다. 홀에 침을 뱉기도 하고 퍼팅 그린을 퍼터로 찍기도 한 ‘버르장머리 없는’ 세르지오 가르시아 말이다. 다른 한 선수는? 이름 없는 선수다. 누군지 몰라도 그가 가르시아 콧대를 꺾어놓으면 좋겠다. 그가 먼저 티샷을 한다. 그가 친 볼이 멋지게 날아서 홀 바로 옆에 꽂히면 얼마나 좋을까? 언감생심. 그의 볼은 패널티 구역(당시로는 해저드)에 빠지고 만다. 그렇게 2008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우승컵은 악당 가르시아 손에 들어갔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못 외우면 맞던 시절에 외운 시라 그런지 지금도 생각이 난다. 원숙한 아름다움을 국화꽃에 비유했다는 설명을 듣고 그때는 고개만 끄덕였다. 가슴으로는 그 뜻을 몰랐다. 그런데 30년도 더 지나 다시 떠올리는 것은 이 구절에 걸맞은 사람을 봤기 때문이다. 바로 PGA 투어 챔피언스에서 뛰고 있는 폴 고이도스(Paul Goydos)다. 2008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연장전에서 가르시아에게 아쉽게 패한 사람이 바로 그다.
내가 골프채널에서 미국 PGA 투어 챔피언스 경기를 해설할 때다. 유난히 묵묵히 플레이를 하는 선수가 눈에 들어왔다. 기가 막힌 아이언샷으로 볼을 핀에 바싹 붙여도 기쁜 내색을 별로 안 한다. 반대로 대여섯 발짝짜리 퍼팅을 몇 번이나 놓쳐도 마찬가지다. 탄식하는 법이 없다. 그런데 리더 보드 상단에는 매번 이름이 올라온다. 저 선수가 도대체 누군지 궁금해졌다. 그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다가 나는 눈이 커졌다. 2015년 투어 챔피언스에 들어온 뒤 꾸준히 우승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이 정도면 젊은 시절 PGA 투어에서도 한가락 했을 법해서 찾아봤다. 그런데 웬걸? 단 2승뿐이다. 스물아홉 살에 PGA 투어 시드를 처음 받은 뒤 무려 21년간이나 뛰었는데도 말이다. 물론 2승도 쉽지 않다. 스타플레이어와 비교하면 덜 화려하다는 얘기다. ‘이거 싱거운걸’ 하고 마음을 닫으려다가 깜짝 놀랐다. 그가 한 라운드에 59타를 기록한 몇 안 되는 선수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PGA 투어에서 59타를 기록한 선수는 지금까지 단 아홉 명뿐이다. 말이 쉬워서 59타이지 68타가 최고기록인 내게는 꿈같은 숫자다. ‘뱁새 김용준 프로, 골프 좀 치는 줄 알았더니 겨우 68타가 최고기록이냐’고 비웃지 말기 바란다. 어디까지나 풀백티에서 대회 규칙에 따라 친 점수다. 그래도 59타 발끝에도 못 미친다.
아차! 얘기가 딴 길로 샜다. 폴 고이도스로 돌아가자. 폴 고이도스는 2010년 존 디어 클래식 1라운드에서 59타를 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59타를 기록한 선수는 단 네 명뿐이었다. 그를 포함해서. 그 뒤로 다섯 명이 더 늘었다. 총 아홉 명 중에 대기록을 수립할 당시 나이가 가장 많은 선수가 바로 폴 고이도스다. 그는 마흔여섯 살 때 59타를 쳤다. 믿어지는가? 마흔여섯 살에 잭 티클라우스가 마스터즈를 우승했을 때 골프 세상은 얼마나 놀랐는지. 노장의 승리라고 말이다. 폴 고이도스도 노장으로 불리는 나이에 59타 대기록을 작성한 것이다. 그가 꽃길만 걸었다면 나도 ‘국화꽃’을 들먹이지 않았을 거다.
그는 골프를 일찍 배우기는 했다. 어려서 입문해 고교 시절 지역 대회에서 우승도 한 모양이다. 제법 잘 친 덕에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도 진학했다. 그런데 곧바로 프로로 전향하지 못했다. 내 짐작엔 조금 부족한 기량과 가정 형편 탓이었을 것이다. 그는 대학 졸업 후 기간제 교사로 몇 년간 일했다.
끓는 피를 참을 수 없었던 걸까? ‘끓는 피’라니? 아까는 그의 경기 스타일이 차분하다고 칭찬하더니. 하여간 뱁새 칼럼은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많다.
하여간 그는 스물일곱 살에 다시 골프채를 잡았다. 1991년과 1992년 벤 호건 투어를 뛴 것이다. 지금은 콘 페리 투어로 부르는 미국 PGA 2부 투어 말이다. 그러다 이듬해 PGA 큐스쿨(PGA 투어 참가 자격을 얻기 위해 치르는 시험으로 흔히 지옥 같은 대회라고 한다)을 가까스로 통과했다. 그리고 그의 스타일대로 묵묵히 3년을 도전한 끝에 1996년 마침내 첫 우승을 거뒀다. ‘베이힐 인비테이셔널’에서였다.
그런데 다음 우승은 무려 11년을 기다려야 했다. 2007년 소니 오픈까지. 이 무렵 그의 샷 감이 절정이었나보다. 글을 시작할 때 얘기한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연장전에 나간 것이 바로 그다음 해였으니까.
너무나 아쉬운 연장전 패배 뒤에 폴 고이도스가 권토중래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악재가 겹쳤다. 팔목 수술을 하고 부비강 수술도 하고. 그런데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골프채를 잡았다. 그렇게 도전한 끝에 만들어 낸 대기록이 바로 2010년에 친 59타다. 파71 코스에서 버디 12개에 파6개. 버디 12개라니 믿어지지 않는다. 폴 고이도스는 키가 175cm로 그리 큰 축에 들지도 않다. 드라이버 비거리도 260야드로 대단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거포들 틈에서 묵묵히 자기 경기를 하고 있다. 가을에 피는 국화처럼 기품 있게 말이다. 내 골프도, 그리고 내 삶도 그처럼 원숙함을 갖게 될 날이 오기를.
김용준
한마디로 소개하면 ‘골프에 미친놈’이다. 서른여섯 살에 골프채를 처음 잡았고 독학으로 마흔네 살에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프로가 됐다. 영국왕립골프협회(R&A)가 주관하는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KPGA 경기위원으로, 골프채널코리아에서 골프 중계 해설을 맡고 있다.
부모 혹은 조부모 그림자는 평생 우리를 따라다닌다. 서양처럼 ‘누구누구 2세’ 혹은 ‘아무개 3세’ 하는 식으로 이름을 짓지 않아도 말이다. 특히 부모나 조부모가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대가라면? 그 그림자는 훨씬 크고 무겁다. 부모나 조부모가 잘했으니 자식이나 손주도 당연히 잘할 것이라고 세상이 기대하기 때문이다. 자식이나 손주가 상당히 잘해도 때론 세상 사람들이 깎아내리기도 한다. 조상 덕을 본 것일 뿐이라고 말이다. 물론 이렇게 평가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질투하는 것이다. 조상이 주는, 아니 정확히는 세상이 주는 부담이나 시샘을 이겨내고 큰 꿈을 이루기는 쉽지 않다. 큰 나무 밑에서는 다른 나무가 자라지 못한다는 속담은 이런 경우를 말한 것일까?
무슨 말을 하려고 서론이 이렇게 기냐고? 토미 아머(Tommy Armour) 3세 얘기를 하려다 보니 그렇게 됐다. 토미 아머 3세는 전설의 골퍼 토미 아머(별명 실버 스콧)의 손자다. 토미 아머가 누구냐고? 앗! 이 질문은 예상 못했다. 그의 이름을 딴 골프 용품이 있을 정도이니 골프를 모르는 독자들도 위상만큼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용품업체는 뱁새 김용준 프로와는 아직까지 인연이 전혀 없음을 밝힌다. 아직까지는.
할아버지 토미 아머는 PGA 투어에서 25승을 거뒀다. 마스터즈를 제외한 3대 메이저 대회를 모두 석권한 골퍼로도 유명하다. 마스터즈까지 우승했다면 그랜드 슬램 반열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토미 아머는 바비 존스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다. 그의 기록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이 갈 것이다.
손자 토미 아머 3세는 PGA 투어 챔피언스(시니어 투어)를 벌써 10년 넘게 뛰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 번도 우승을 하지 못했다. 젊은 시절 PGA 투어에서는 2승을 거뒀다. 아니, 너무 싱거운 얘기 아냐? 하고 실망하기엔 이르다. 나도 기록을 찾아보고 나서야 알았다. 그가 엄청난 기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불과 얼마 전까지 ‘PGA 투어 72홀 최저타 기록’을 토미 아머 3세가 갖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72홀에 254타(26언더파). 이 기록은 그가 2003년에 PGA 발레로 텍사스 오픈 때 세운 것이다. 발레로 텍사스 오픈? 오랜 골프 팬이라면 들어봤을 것이다. 최경주 선수가 2라운드 때 선두 턱밑까지 치고 올라갔다가 공동 7위를 기록한 대회다.
토미 아머 3세는 이 대회 때 첫날 ‘64타’, 이튿날 ‘62타’ 그리고 사흗날 ‘63타’를 기록했다. 마지막 날엔 ‘65타’를 쳤는데 이날은 보기가 두 개나 나왔다. 사흗날까지는 보기 없이 플레이를 하던 그였다. 역사에 남을 기록에 대한 부담이 보기로 이어졌을까? 할아버지 토미 아머가 세운 대기록과 나란히 할 만한 업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을까?
토미 아머 3세는 ‘티에이쓰리’(T.A.3)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할아버지 토미 아머의 별명에 3이라는 숫자를 더한 것이다. 할아버지의 후광이 너무 강했다. 큰 부상으로 이른 나이에 은퇴를 하고 당시로서는 가장 비싼 레슨비를 받는 교습가로 변신한 할아버지 토미 아머. 그 거장이 손자에게 골프를 기초부터 탄탄하게 가르쳤을 것이라 지레짐작하기 쉽다. 나도 넘겨짚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토미 아머 3세는 1960년생이다. 할아버지인 토미 아머는 1968년에 세상을 떠났다. 여덟 살에 할아버지를 잃은 것이다. 그랬으니 시간당 50달러나 했다는 토미 아머의 레슨은 받지 못했을 것이다. 겨우 시간당 50달러라고 얕보지 말기를. 1950년대 레슨비다. 지금으로 치면? 뱁새 김 프로 한 달 레슨비보다 더 많을 것 같다.
토미 아머 3세가 할아버지에게 골프를 배우지 못했을 거라고 짐작되는 부분이 또 있다. 둘의 스윙이 전혀 다른 점이다. 남아 있는 영상을 보면 토미 아머는 클래식컬한 스윙을 했다. 당연한 일이다.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자라고 그곳에서 골프의 거장이 된 토미 아머 아닌가? 그에 비해 손자 토미 아머 3세는 원 플레인 스윙을 한다. 둘은 그립을 잡는 방법부터 다르다. 토미 아머는 핑거 그립을 잡았다. 손가락으로 잡는 그립 말이다. 토미 아머 3세는 팜 그립을 잡는다. 손바닥으로 잡는 그립이다. 이 스윙으로 토미 아머 3세는 PGA에서 2승을 거뒀다. 그중 하나가 바로 대기록을 세운 발레로 텍사스 오픈이다.
그는 이 기록으로도 만족하지 못한 것 같다. 할아버지의 명성에 필적할 만한 업적을 남기고 싶었던 걸까? 토미 아머 3세는 PGA 투어에 끝까지 도전했다. 성적을 내지 못해 투어에서 밀려 내려온 뒤에도 큐스쿨(투어에서 뛸 선수를 정하는 테스트)에 나갔다. 그가 마지막으로 PGA 큐스쿨에 나간 건 2012년. 그의 나이 만 52세 때였다. 당시 참가자 중 나이가 가장 많았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마흔네 살에 프로 선발전에 합격해 프로 동기 90명 중 나이가 가장 많았던 내 모습이 떠올라 코끝이 찡해졌다.
190cm에 육박하는 큰 키에 짧은 백스윙과 내던지는 듯한 팔로 스로우를 가진 토미 아머 3세. 그가 세운 72홀 역대 최저타 기록. 전설이 된 할아버지의 명성에 결코 부끄럽지 않은 대기록이다. 이 기록은 2017년 조던 스피스가 253타를 기록하면서 14년 만에 깨졌다. 나는 토미 아머 3세가 은퇴하기 전 챔피언스 투어에서 꼭 1승을 거두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부모나 조부모 명성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는 누군가의 도전도 응원하고 싶다.
김용준
한마디로 소개하면 ‘골프에 미친놈’이다. 서른여섯 살에 골프채를 처음 잡았고 독학으로 마흔네 살에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프로가 됐다. 영국왕립골프협회(R&A)가 주관하는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KPGA 경기위원으로, 골프채널코리아에서 골프 중계 해설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