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09. 24 (목)

12월의 술과 음악회

기사입력 2019-12-11 13:36:20기사수정 2019-12-11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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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 대기 장면(서동환 동년기자)
▲연주 대기 장면(서동환 동년기자)

각종 송년회가 줄을 잇는다. 올해도 송년 모임이 14개 정도 된다. 저녁 약속이 많은 것은 별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저녁 자리의 술이다. 한창때만큼 마시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업 될 정도로는 마신다. 분위기 좋은 날은 좀 오버할 때도 있다.

문제는 내가 술 마시는 것을 아내가 싫어한다는 거다. 지난 시절 술로 인해 몇 번 아내의 속을 태웠던 원죄가 있어 아내의 이해 부족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유일한 해결 방법은 술을 마시지 않으면 되는 것인데, 그렇다고 사느라 안간힘을 다해 붙잡고 있는 이성의 질긴 밧줄을 잠시 야들야들하게 해주는 이 묘약을 완전히 놓아버릴 수가...

이틀 전 초등학교 동창 송년회 때 마신 술 때문에 아내가 화가 잔뜩 났다. 그런 상태에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한국-덴마크 수교 60주년 기념 ‘덴마크 로열 오케스트라’ 초청 공연에 아내와 함께 갔다. 썰렁한 작은 불편함을 마음 한구석에 담아 놓은 채 객석에 앉았다.

▲공연전 모습(서동환 동년기자)
▲공연전 모습(서동환 동년기자)

570년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오케스트라와 세계적인 지휘자 ‘토마스 손더가드’의 첫 내한 공연이었다. 거기에 유명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한국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자리였다.

먼저 ‘헬리오스 서곡(Helios overture), Op.17’로 무대를 열었다. 어둠과 고요 속에서 서서히 호른, 현악기와 목관 악기들의 선율이 등장한 후 트럼펫의 팡파르가 울리며 연주는 신화의 이야기들을 풀어나갔다. 영화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인용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곡이 연상되었다. 오케스트라는 지구별 빛과 어둠이 닿기 시작하는 새벽에서부터 코발트 빛 하늘이 오렌지빛 석양으로 물들어갈 때까지 에게 해의 하루 풍경을 영혼이 울리는 소리의 빛깔로 그렸다. 밤의 여신이 살포시 고개를 들면서 첫 번째 프로그램 연주는 끝났다.

고개를 돌리니 수많은 별 중 지구별에서, 수많은 사람 중에서 인연이 된 유일한 한 사람이 옆에 있었다.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에는 러시아풍의 우수적 정서가 잔뜩 담겨있다 보니 많은 한국 사람들이 그의 음악을 좋아한다. 이날 두 번째 프로그램인 ‘피아노 협주곡 제2번 다단조, Op.18’도 예외 없었다. 처음 부분의 묵직한 베이스 음부터 한국인의 정서에 짝 맞았다. 이어지는 러시아풍 리듬과 차이콥스키의 협주곡 같은 템포와 선율에 이르러서는 점점 깊이 소리에 빠져들어 갔다. 피아니스트의 현란한 연주에 몰입돼있을 때 오케스트라의 격앙된 합주가 정신을 깨웠다. 그 밝고 환한 기세를 몰아 장쾌한 화음으로 연주가 끝났다.

‘인연이 된 유일한 사람을 위해 못 할 게 뭐가 있을까? 한창 연애할 때였으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술로 인해 불편한 아내가 원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마지막 연주는 무소르그스키의 모음곡 '전람회의 그림'이었다. 스케치와 수채화에서 받은 인상과 감흥을 바탕으로 작곡한 이 음악이 이렇게 재미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곡이 연주되는 동안 수십 편의 디즈니 만화영화를 보는 듯한 행복에 빠졌다. 그 소리에는 ‘톰과 제리’ ‘알라딘’ ‘라푼젤’ ‘라이온 킹’등 내가 알고 있는 만화영화의 주인공들이 다 있었다. ‘마음의 정화’ 그렇다! 마음이 정화되는 연주였다. 특히 내게 의미 있었던 소리는 종소리였다. 12월에 들리는 소리로 잘 어울렸다. 연주에서 들은 종소리는 끝을 알림과 동시에 시작을 알리는 의미의 소리였다.

당분간 술을 안 마실 생각이다. 아직 유일한 인연인 사람을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랑은 가슴에 남아있는 것 같다. '전람회의 그림' 연주에서 울린 종소리는 누구에게 울린 종소리였을까? 술에게?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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