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의 화려한 외출

기사입력 2020-06-22 09:00 기사수정 2020-06-22 09:00

병마와 마주친 오철근(77세) 어르신은 오로지 집 주위에서만 맴돌다가 10년의 세월을 속절없이 보내버리고 말았다. 뇌경색으로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대인기피증에 시달렸고 삶에 대한 의미는 퇴색되어 하루하루를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열면서 10년 만에 외출을 했다. 영영 잃어버릴 수도 있는 시간들을 다시 찾게 해준 외출이었다.

▲오철근 어르신은 종묘에서의 산책을 좋아하셨다.(사진 김종억 시니어기자)
▲오철근 어르신은 종묘에서의 산책을 좋아하셨다.(사진 김종억 시니어기자)

운동 잘하고 공부도 잘했던 핸섬 보이

청소년 시절의 어르신은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는 핸섬 보이였다. 그의 부친은 지방의 기초의회의원이었다. 어르신은 어린 시절 스케이트를 아주 잘 탔는데, 당시 지방에서 스케이트를 탈 정도면 주위의 부러움을 살 만한 집안이었다. 그 시절 농촌은 몇몇 집을 빼고는 다 고만고만한 살림이었다. 겨울철, 꽁꽁 언 논배미에서 썰매는 타는 아이는 많았지만 스케이트를 탈 수 있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특별히 선택된 아이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었다. 운동이면 운동 공부면 공부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았고 외모까지 출중했으니 여학생들에겐 늘 선망의 대상이었다. 어르신에게 청소년 시절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날들이었다.

한때는 잘나가던 스피드스케이팅 선수

당시 부친은 장남의 될성부른 떡잎을 알아보셨는지, 아니면 유난히 운동신경이 뛰어난 아들의 소질을 파악했는지 스케이트를 선뜻 사주셨다. 은빛 스케이트 날을 번쩍이면서 얼음을 가르던 그는 고등학교 때 전국체전 경기도 대표로 출전해 입상을 했고, 상을 탈 때마다 운동장 조회 때, 전교생 앞에서 교장선생님의 칭찬을 듣곤 했다.

군 생활도 운 좋게 카투사로 했다. 당시 카투사에게는 일반 군대와는 다른 환경을 제공했다. 어르신은 미군들과 복무하면서 오로지 영어에 매진했다. 통역을 할 정도의 실력은 제대 후 사회생활에 많은 도움이 됐다. 군 생활을 하면서도 전국체전이 열리면 경기도에서 보낸 협조 공문으로 도 대표 선수로 출전하곤 했다. 하계체전 때는 육상선수로, 동계체전 때는 도 대표 스케이팅 선수로 활약했다. 스케이트는 나이가 들어서도 자주 즐기는 운동이었다. 칠십에 가까운 나이에도 태릉은 물론 잠실 롯데월드 빙상장으로 스케이트를 타러 다녔다. 세월이 한참 흘렀는데도 그의 스케이트 실력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스케이트만 신으면 펄펄 날았다. 어르신은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다. “술 먹다가 술자리에서 죽거나 얼음판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다가 쓰러져 죽으면 여한이 없겠다”는 말을 할 정도로 술과 스케이트를 사랑했다.

(사진 김종억 시니어기자)
(사진 김종억 시니어기자)

스물한 살 어린 나이에 결혼

지병이 있던 아버지의 병치레로 장남인 그는 스물한 살 어린 나이에 이웃 마을에 살던 세 살 아래 소녀와 결혼을 했다. 어른들의 권유 때문이었다. 이른 결혼 후 아내는 곧바로 임신을 했고, 그 사실도 모른 채 그는 군대에 입대하고 말았다. 제대 후 집에 돌아오니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떡두꺼비 같은 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가 아빠라고 부르며 엉금엉금 다가오면 어른들 눈치가 보며 슬며시 자리를 피하곤 했다. 그 시절에는 자식 한번 제대로 예뻐해주지도 못하고 안아주지도 못한 채 살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지난 시절을 돌이킬 때마다 그는 자식들에게 사랑 표현 못하고 산 걸 제일 안타까워했다.

잃어버린 10년

60대 중반이 막 지나던 어느 날, 머리에 열이 오르고 뜨거웠다. 그게 뇌경색의 전조증상인지도 모른 채 방치하다가 결국 병원으로 실려 갔다. 중증의 뇌경색이었다. 좌측 팔과 다리가 마비됐고 음식물을 씹어 삼키는 게 어려운 삼킴 장애까지 발생했다. 어르신 건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잘 먹는 것’인데, 제대로 삼키지 못했으니 잘 먹지도 못했다. 당연히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 여기에 심리적 상실감까지 더해져 우울증이 생기면서 삶의 의지를 잃어갔다.

지독한 뇌경색은 어르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매일매일 빨리 죽게 해 달라고 빌었다. 자살을 생각하던 하루는 실행에 옮겼다. 안방에서 전깃줄로 목을 매고 침대에서 뛰어내렸는데 지지대가 부러지는 바람에 돌침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혔다. 쿵! 소리에 놀라 달려온 둘째 아들에게 발견되어 119구급차로 병원으로 실려 갔다. 미수에 그쳤지만 이후에도 자살 충동이 시시각각 그를 엄습했다.

몸무게 51㎏의 다소 왜소한 체구는 병마로 참혹했다. 한때 펄펄 날던 몸이 한순간에 편마비가 되어 초라한 모습으로 변해버렸으니 그 실망이 오죽했을까. 대인기피증으로 만나는 사람도 없이 하루를 버티다가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 다시는 아침이 오지 않기를 수없이 기도했다. 이렇듯 삶이 지난(至難)했으니 식구들에게, 특히 아내에게 짜증을 부리기 일쑤였다. 아내는 명일역 근처에서 혼자 노점상을 하면서 생계를 책임졌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장사를 마치고 고단한 몸으로 들어온 아내는 온종일 말 한마디 못한 채 보낸 남편의 스트레스를 다 받아줘야 했다. 어르신이 막걸리라도 한잔 마신 날에는 늦은 밤까지 아내를 앞에 앉혀놓고 술주정을 했다. 가부장적인 사고와 직설적인 표현은 자녀들도 힘들게 했다. 2남 1녀의 아이들은 아버지의 모습이 보기 싫어 일찌감치 독립해 나갔다. 관계는 점점 더 소원해졌고 몸이 불편한 어르신의 외로움은 점점 깊어졌다.

▲명동성당에서.(사진 김종억 시니어기자)
▲명동성당에서.(사진 김종억 시니어기자)

진심어린 대화를 통해 위로를 받다

2020년 초에 오철근 어르신을 만났다. 편마비의 불편한 몸과 피폐해진 정신으로 자존감이 한없이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삶의 의미를 잃은 채, 막걸리를 마시며 하루하루를 견디는 어르신에게 도움이 필요해 보였다. 마음도 삭막하게 닫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심으로 위로를 건네는 나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더니 말문이 트이기 시작했다. 청소년 시절 문학에 관심이 많았고 역사에 대한 식견도 높아 한국의 고대사를 포함해 근현대사에 해박했다. 나와 대화가 통해서인지 어르신은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10여 년간 잊고 살았던 스케이팅에 대한 추억도 하나하나 끄집어냈다. 어르신은 잠실의 123층 롯데월드타워가 건설되었다는 걸 뉴스로만 봤다며 꼭 한 번 가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어르신의 흔쾌히 그 요청을 들어드리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한 날에 지하철을 이용해 롯데월드타워에 도착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일시적으로 문을 닫는다는 안내를 들어야 했다. 오랜만의 외출이라 그냥 귀가하기는 너무 아까웠다. 기왕 나온 김에 화려한 벚꽃과 연산홍이 화사하게 핀 석촌호수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어르신은 어린아이 같은 순진한 미소를 감출 줄 몰랐다. 연산홍과 어우러져 더욱 홍조를 띠었다. 푸르게 변해가는 나뭇가지에서 지저귀는 새소리와 유유히 호수를 헤엄치는 백조들의 자유로움을 넋을 놓고 바라봤다. 그렇게 한동안 시선을 고정한 채 자신의 지나간 10년의 세월을 찾아갔다.

며칠 후에는 함께 종로로 향했다. 장애인 리프트와 엘리베이터를 몇 번씩이나 갈아타고 도착한 종로에서 지난 시절을 추억하며 거리를 걸었다. 휠체어를 밀면서 힘들었지만, 어르신의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힘을 냈다. 종묘를 찾았다. 종묘는 조선 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받들고 제례를 봉행하는 유교 사당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 1번지에 있으며, 사적 제125호로 지정되어 있다. 휠체어를 타고 종묘를 탐방하면서 어르신은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했다. 그 해박한 식견에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새록새록 떠오르는 추억들이 좋았는지 어르신은 내친김에 명동에도 가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후, 우리는 명동 거리로 나갔다. 명동을 거쳐 종로 송해거리의 한 음식점에서 늦은 점심을 먹으며 막걸리도 한 잔 곁들였다. 점심을 먹은 뒤에는 인사동 거리를 탐방했다. 그날, 겨우내 꽁꽁 얼었던 얼음이 봄과 함께 해동하듯 어르신의 마음도 서서히 봄빛으로 물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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