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시 할아버지

기사입력 2020-10-28 15:14 기사수정 2020-10-29 00:46

[임철순의 즐거운 세상]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정확히 30년 전인 1990년 10월, 나는 미 국무부의 ‘국제교류 연수 프로그램’(IVP, International Visitor Program)에 초청을 받아 한 달간 미국을 여행했다. IVP는 각국 사람들을 초청해 돌아보게 함으로써 미국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국익을 증진하기 위해 만든 제도다. 영어가 서투른 나 같은 사람에게는 통역안내인을 붙여주고 매일 얼마씩 용돈(per diem)도 준다.

그때 나는 ‘미국의 교육’을 살펴보기로 여행 주제를 정하고, 땅을 딱 반 갈라 북쪽만 돌았다. IVP는 워싱턴에서 1주일간 국무부 의회 등 여러 군데를 방문(이건 필수)하고 나서 자유여행을 하게 돼 있다. 땅덩어리가 크니 나머지 3주 동안 욕심내지 말자고 그리 한 건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바보짓이었다. 미국 남부를 돌아볼 기회는 그 뒤 한 번도 없었으니까.

워싱턴 일정을 마친 뒤 나는 뉴욕, 보스턴을 거쳐 일리노이주의 프리포트(Freeport)라는 작은 도시에 가서 보스턴에 이어 두 번째 민박을 했다. 거기서 만난 분이 유리시(Urish) 할아버지다. 보험회사 부사장이었던 그는 명랑 쾌활하고 남을 잘 배려해주는 사람이었다. 이틀 묵는 동안 느슨하지 않고 즐겁게 나를 성심성의껏 안내해주었다.

▲유리시 할아버지 부부와 식사할 때. 부인은 말수가 적고 얌전했다.
▲유리시 할아버지 부부와 식사할 때. 부인은 말수가 적고 얌전했다.

그는 내 이름을 듣자마자 “아 찰스! 앞으로 널 찰스라 부르겠어”라고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미국 와서 젊은 아가씨들을 거의 보지 못했다”(이 주책아!)라고 했더니 자기 회사에 데리고 가서는 “여기 이 한국에서 온 찰스라는 청년이 젊은 아가씨들을 찾고 있다”며 이 방 저 방 떠들고 다녔다. 여직원들이 “나 젊은데”, “나도 젊은데?”라며 들이대 나는 거의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나는 유리시 부부, 통역안내인과 함께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 “어떠냐?”라고 묻기에 “맛이 별로다”(이 주책아!)라고 해서 그들 부부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솔직한 게 좋은 줄 알고 그랬던 건데, 옆에 앉아 있던 통역안내인은 자기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데도 유리시 할아버지는 별일 아니라는 듯 나를 따뜻하게 배려했다. 그 지역의 전직 하원의원(상원의원이었나?)을 만날 때, 나는 “미국 하원의원(상원의원이었나?)의 절반은 도둑놈이다”라는 미국 어느 신문의 보도를 거론했다(이 주책아!). 의원들이 들고 일어나 항의하자 그 신문은 “미국 하원의원(상원의원?)의 절반은 도둑놈이 아니다”라고 정정했다. 말하자면 정정을 하지 않은 건데, 통역안내인이 “그들은 도둑놈이 아니다”라고 정정했다고 옮기기에 잘못된 통역이라고 알려주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유리시 할아버지는 말뜻을 알아듣고 배꼽을 쥐며 크게 웃었다.

나는 신이 나서 미국 정치가 어떻고 한국 의회제도는 어떻고 하고 떠들어댔다(영어가 아니라 우리말로 하니까 얼마든지!). 코리아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던 그 의원은 내내 떨떠름한 표정인 채 “한국 의회도 양원제냐?”, 이런 걸 나에게 물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올 때 유리시 할아버지는 내게 엄지를 치켜 올리며 “Charles, I’m proud of you!(찰스, 네가 자랑스러워)”라고 말했다. 자기 조카가 장한 일을 한 것처럼 즐거워하면서.

그는 매일 3마일씩 걷는다고 했다. 덕분에 나는 1마일이 1.6km라는 걸 확실히 알게 됐다. 핼러윈이 다가오는 무렵이어서인지 유리시 할아버지는 나를 차에 태워 호박 등을 파는 농산물 시장에도 데려갔다. 미국 사회의 속살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 집의 넓은 지하실을 혼자서 쓰는 동안 나는 화장실 변기에 남은 미제 똥도 보았다. 그때 이문구의 연작소설 ‘관촌수필’ 중 한 대목을 생각했다. 그 소설에 열차를 탄 미국인들이 철로에 남긴 똥을 주워 맛보다가 ‘고바또’(고씨+세퍼드)라는 별명을 얻은 사람이 나온다. 미제 똥이 궁금해서 그랬던 거다.

유리시 할아버지는 유대계였던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유대의 ‘유’ 자에다 ‘영광의 탈출’(Exodus)의 작가 레온 유리스라는 이름이 유리시와 겹쳐져 유대계라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그때 그는 거의 일흔에 가까워 보였다. 그러니 지금은 이미 돌아가셨을 것이다. 내가 두고두고 미안한 건 귀국한 뒤 소식을 주고받지 못한 것이다. 유리시 할아버지는 두 번인가 편지를 보내 “Charles, what’s new?”라며 소식을 물었는데, 나는 한 번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찰스 왕세자를 싫어하기도 했지만 이유는 사실 한 가지, 영어로 작문을 하는 게 어려웠기 때문이다(이 한심한 멍청이, 주책아!). 그 편지는 지금 찾기도 어렵다. 미국 여행에 관한 기록이나 문서도 버리진 않았지만, 어디 처박혀 있는지 모르겠다.

▲미국 여행 막바지에 LA에서 가수 조영남을 만났다. 그가 노래를 부르고 난 뒤 웬 미국 할머니가 나한테 다가와 “너 노래 잘하더라” 하고 칭찬해주었다(아니 내가 못생긴 조영남과 닮았다구?).
▲미국 여행 막바지에 LA에서 가수 조영남을 만났다. 그가 노래를 부르고 난 뒤 웬 미국 할머니가 나한테 다가와 “너 노래 잘하더라” 하고 칭찬해주었다(아니 내가 못생긴 조영남과 닮았다구?).

그분에게서 내가 배운 것은 유머, 관용과 배려, 이웃에 대한 관심과 선의, 인류 번영에 대한 신뢰 이런 것들이었다. 9·11테러를 겪은 데다 트럼프라는 인물이 대통령이 된 이후의 미국과 미국인은 많이 달라져 있겠지만, 30년 전에 미국, 미국인의 좋은 점을 알게 해주었으니 IVP는 큰 성공을 거둔 셈이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전 프랑스 대통령, 가이후 도시키 전 일본 총리, 이런 사람들도 젊어서 IVP 여행을 경험하고 미국을 호평하는 글을 남긴 바 있다.

▲내가 IVP 50년을 주제로 썼던 칼럼. 1990년 12월 5일자 한국일보.
▲내가 IVP 50년을 주제로 썼던 칼럼. 1990년 12월 5일자 한국일보.

이 제도는 지금도 운영되고 있으나 10여 년 전부터 여행기간이 3주로 줄어들었다. 한 달씩 시간을 내기가 부담스럽다는 의견이 있어 조정했다고 한다. 사실 한 달간 직장과 가정을 비우고 자기가 정한 주제 아래 마음대로 원하는 곳을 찾아다니는 건 보통 행운이 아니다. 미국인들도 수도 워싱턴에 가보지 못하고 평생을 마치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한다.

시인 최승자(崔勝子)가 어느 시에선가 “10월의 자유는 아름다웠다”라고 썼던 거 같은데, 그 10월은 아름답고 즐거웠다. 그리고 그 10월은 미안하고 빚진 기분으로 되살아나곤 한다.

▲통역안내인 류지식 씨와 보스턴에서. 이분 소식도 궁금하다.
▲통역안내인 류지식 씨와 보스턴에서. 이분 소식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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