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그 순간] 운요호(雲揚號)사건이 전쟁으로 번졌다면?

기사입력 2015-04-16 07:43 기사수정 2015-04-16 07:43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주변국들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개항 이후 구한말 시대가 대표적이다.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하자 중국의 속박에서 벗어났다고 기뻐하며 대한‘제국’을 선포했던 시기에 일본과 러시아는 3번의 협정으로 한반도 문제를 입맛대로 요리했다. 이 시대를 러시아-일본에 의한 ‘공동관리(condominium)’시대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의주(義州)로 피난해 있을 때 명의 심유경(沈惟敬)과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조선을 배제한 채 휴전은 물론 조선을 분할하는 문제까지 논의했다. 6·25전쟁 휴전협정도 우리의 입장은 무시된 채 체결된 것이다.

이렇게 잘 알려진 사건들과 달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만약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찔하게 느껴지는 사건도 많다. 개항의 직접적 계기가 된 운요호(雲揚號) 사건이 한 사례이다. 이 사건은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개항시키기 위해 1875년 9월 억지로 만든 것이다. 군함 운요호가 주로 서양 열강의 상품을 만주로 수출하는 항구인 요동반도 북쪽의 우장(牛莊)에서 황해를 측량하며 남하하다가 강화해협으로 들어온 것이다. 인천과 맞닿은 강화해협은 한강을 따라 서울로 연결되는 길목으로, 조선의 국방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 요지 중 하나이다.

강화도의 초지진(草芝鎭) 덕진진(德津鎭)이 개항기 프랑스와 미국 함대, 운요호를 상대로 전투를 벌인 것도 침략군의 서울 진입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강화도 부근은 섬이 많고 수로가 한강과 임진강으로 나뉘는 등 복잡하게 엉켜 있어 뱃길을 잃기 일쑤였다.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에 나오듯 과거엔 경강(京江) 수적(해적)들이 활개 치던 곳이다.

이 뱃길이 외부에 노출되고, 특히 외국 군함이 탐사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당연히 강화포대는 조선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진입한 운요호에 대해 발포했다. 근대적 장비로 무장한 일본 ‘군함’은 이에 응사하여 포대를 파괴하고 영종도를 점령, 관아 민가를 불사르고 포 수십 개를 노획, 9월 28일 나가사키(長崎)로 돌아갔다. 일본 측은 2명의 경상자만 낸 반면 조선군 사망자는 35명, 포로 16명을 기록했다.

조선은 이 사건을 ‘소속이 분명하지 않은 선박’이 강화해협에 침투하여 일으킨 소요 정도로 애써 의미를 축소하려 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전에 프랑스는 선교사와 기독교 박해로, 미국은 상선 제너럴 셔먼호 사건으로 이미 강화도에서 접전을 벌인 바 있다. 더욱이 조선을 개항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미국, 영국, 중국, 일본 등에서 비등하여 그 압력을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열강은 단순히 조선과의 무역을 위해 개항을 강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동아시아 국제정치에서 조선이 차지하는 위상이었다. 조선이 열강과 수교조약을 맺어 ‘국제사회’에서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면 국제정치적으로 무주공산(無主空山, no man’s land)으로 남아 먼저 점령하는 국가의 소유가 된다.

또 하나의 변수는 영국과 러시아 간의 갈등/경쟁이었다. 이것은 19세기 후반 국제정치를 지배하던 주요한 축이었다. 러시아는 크림전쟁(1852~1856)과 농노해방(1861) 후 팽창/남진을 시작하는데, 그 대상이 대부분 영국의 식민지이거나 상업적 영향력이 큰 지역이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이 이에 해당한다. 영국은 중국이 상업적 이해를 방해할 정도로 강력해지는 것을 원치 않지만 정치·사회적 혼란으로 장사에 지장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소위 ‘not strong but stable’이다. 얼마나 교활한 정책인가?

러시아가 한반도에 진출하면 중국의 정치적 중심지인 북경-천진을 위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황해를 통해 올라오는 영국 등 해상세력도 저지할 수 있게 된다. 이에 영국은 조선을 개항시켜 열강과 수교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보았다. 조선이 국가로 ‘승인’되면 한 강대국이 다른 열강의 동의 없이 점령/지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영국 문서는 영국이 중국에게 조선의 개항을 ‘백 번’ 이상 요청했다고 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운요호 사건이 일어났다. 더욱 놀라운 것은 조선과의 교섭이 여의치 않으면 일본은 전쟁을 일으킬 것이고 러시아의 개입을 유도할 것이라는 점이다.

러시아의 남진은 일본에도 안보위협이 된다. 그런데 일본의 추론에 의하면, 전쟁이 시작되면 초기에 일본군이 승리해 서울을 점령할 것이며 조선정부와 국왕은 내지로 피신할 것이며, 중국은 조선을 지원해 전쟁에 개입할 것이다. 이것은 임진왜란의 재판(再版)이며 일본에게는 최악의 시나리오인 전쟁의 장기화를 의미한다.

일본의 전략은 중국의 개입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동경 주재 영국 공사는 일본과 러시아가 공동보조를 취하는 방안에 양해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듣고 경악한다. 러시아가 개입하면 그 대가로 최소한 영흥만을 요구할 것이며 부산까지 진출할 가능성이 있다. 15년 전인 1860년 영국-프랑스와 중국의 전쟁을 중재한 대가로 러시아는 연해주와 북위 42도 선인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남진하지 않았던가!

러시아는 운요호 사건 전 해에 극동함대 소속 전함 한 척을 영흥만에 보내 겨울을 나게 한 바 있다. 영흥만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곳이다. 반면 부산은 영국의 상업적 이권이 집결된 상해나 양자강까지 2일간의 항해거리이며 동해까지는 12시간 거리여서 중국, 일본, 황해의 해상로를 지배할 수 있는 전략상의 요충이었다.

영국으로서는 한-일간의 분쟁에 러시아의 개입을 저지하기 위해 먼 ‘극동’에서 군사적으로 강력히 대응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이에 동해에 파견된 함대에 ‘조선영해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대기하며 제 3국(러시아)의 관여 여부를 관찰토록 하고, 북경의 공사관에는 운요호사건의 경과를 추적할 것을 지시한다. 다음해 1876년 1월 조-일 강화도조약이 평화적으로 체결되자 ‘다행히 전쟁으로까지 발전되지 않은 데 만족’을 표시하며 사건을 종결짓는다.

전쟁으로 비화되었다면 조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조선과 중국, 일본이 싸운 임진왜란의 재판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서양’ 열강이 상륙하여 전쟁이 한반도에만 한정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러시아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만주를 점령하거나, 러-만주 접경지역에 파병하거나, 함경도를 점령할 수도 있다. 기회만 보이면 팽창을 서슴지 않는 러시아의 행태로 보아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면 영국은? 10년 후인 1885년 거문도 사건 때와 같이 대한해협을 봉쇄하여 러시아 함대의 남진을 저지하고 중국을 지원하기 위해 요동반도까지 진출할 가능성도 있다. 중국과 일본이 임진왜란 때와 같이 평양을 두고 대결한다면 영국은 화해를 주선할 것이다. 양측 모두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는 데 잠재적인 동맹세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조선의 운명은? 아마도 이들 열강 간에 흥정 대상으로 전락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 이상은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다.



구대열 (具汏列)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외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 <삼국통일의 정치학> <한국 국제관계사 연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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