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0. 23 (토)

[우리 세대 이야기] 1954년생 말띠들의 거침없는 질주, 그룹사운드 '겨울나무'

기사입력 2015-06-02 08:45:09기사수정 2015-06-02 08:45

김택근 언론인·시인

▲2014년 10월 평촌 아트홀에서 겨울나무 공연을 성활리에 개최했다.

그룹사운드 ‘겨울나무’가 있다. 아니, 있었다. 어림 40년 전이다. 밴드를 그룹사운드로, 보컬을 싱어로, 기타리스트를 기타맨으로, 콘서트를 리사이틀로 부르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4인조 그룹을 결성했다. 나는 기타를 치며 싱어로 활동했다. 비틀스는 당시에도 전설이 되어 있었고, ‘딥퍼플’과 ‘시시알’, ‘박스탑스’, ‘산타나’ 등이 빚어낸 선율이 지구촌을 뒤덮고 있을 때였다. 우리는 1974년 겨울 고향인 작은 읍내에서 처음 공연을 했다. 그러나 이를 기억하는 사람은 세상에 몇 명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가 만들어낸 선율은 누군가의 가슴에 아직 남아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럼 영화 ‘즐거운 인생’의 줄거리보다 훨씬 오래된 이야기를 펼쳐보겠다.


어깨너머로 배운 ‘슬픈 악기’ 기타

어릴 적, 기타는 슬픈 악기였다. 어른들은 기타로 뽕짝조의 옛노래를 뜯었다. 나도 기타를 배우고 싶었다. 어깨너머로 보고 있다가 음 자리를 짚어 흉내를 내자 마을의 (다리가 아파 늘 휠체어를 타고 다니던) 아픈 형이 한번 배워보라 했다. 주법도 익히지 않고 바로 ‘생일 없는 소년’과 ‘애수의 소야곡’을 따라서 쳤다. 디마이너(Dm)의 슬픈 곡들이었다. 국민학교 졸업 무렵에 몇 곡을 익혔다. 작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기타를 튕기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내 기타 실력이 별 것 아니라는 것을 이내 알았다. 팝송 열풍이 불어왔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기타 소리를 들으니 기타는 더 이상 슬픈 악기가 아니었다. 특히 전자기타에서 뿜어 나오는 다양한 음색은 나를 다른 세계로 끌고 갔다.

중학교에 들어간 후로는 기타를 치지 않았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다시 기타를 쥐었다. 잊고 있던 기타를 다시 껴안게 된 연유가 있었다. 문학의 밤이 열린 어느 가을날이었다. 저마다 한껏 말[言]에 멋을 부린 시를 낭송했다. 계속 듣다 보니 지루했다. 1부가 끝나고 초청손님으로 한 남학생이 나오더니 들고 온 기타를 튕기며 글렌 캠벨의 ‘타임’을 불렀다. 모두 ‘타임’ 속으로 우아하게 빨려 들어갔다. 문학은 개뿔이었다. 한순간에 팝송이 장내를 압도했다. 나는 순간 다시 기타 치며 노래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곧바로 기타교습소에 등록했다. 비로소 디마이너(Dm)의 ‘슬픈 기타’에서 벗어나 다양한 리듬과 코드를 익혔다. 3개월 정도 학원에서 배운 뒤에는 홀로 음악책을 뒤적이며 노래를 찾았다. 나는 작곡하며 노래도 하는 싱어송라이터를 꿈꿨다.


4인조 그룹사운드 탄생의 전말

대학 입시에 예상대로 낙방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책은 손에 잡히지 않았고 사는 게 시시해 보였다. 그때 집에서 튕겼던 기타소리가 울 밖으로 넘어갔고, 자연 음악 친구가 생겼다. 우리는 자주 만나 기타를 치며 듀엣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 친구는 드럼도 잘 두드렸다. 어느 날 친구가 (혹 내가 먼저 말했는지도 모르지만) 그룹사운드를 해보자고 했다. 서로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여름 끝자락에서 또 한 명의 음악 친구가 나타났다. 그는 읍내 고등학교 밴드부 출신으로 채보(採譜) 능력이 출중했다. 레코드 음반에서 나오는 노래를 오선지에 그대로 옮겨 우리 앞에 내밀었다. 우리는 비틀스처럼 멤버를 기타(퍼스트, 세컨드)와 베이스, 드럼으로 구성하기로 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상상 속에서 살았다. 장발 단속에 걸릴지라도 머리를 결사적으로 기르고, 공연 막판에는 ‘딥퍼플’처럼 드럼과 기타를 부숴버리자며 낄낄댔다. 그룹사운드 이름은 ‘겨울나무’로 정했다. 그러면서 겨울에만 나타나 공연을 하고 홀연 사라지는 신비의 그룹이 되자고 했다. 또 삭풍이 부는 벌판에서도 봄꿈을 장만하는 겨울나무처럼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자고 했다.

첫 공연은 연말쯤 하기로 했다. 꿈은 부풀어 올랐지만 현실은 막막했다. 우선 퍼스트를 맡을 만한 기타맨이 있어야 했다. 나는 싱어였으니 당연히 세컨드 기타를 치며 노래해야 했다. 또 퍼스트를 감당하기에는 내 실력이 턱없이 부족함을 알고 있었다. 퍼스트 기타는 아무나 맡을 수 없었다. 간주 또는 후주에 애드리브(즉흥연주)를 구사할 수 있어야 했다.

우리는 기타맨을 널리 구했다. 하지만 기타도 귀한 시절이었으니 기타맨이 나타날 리 없었다. 그러다 누군가 희소식을 전했다.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는 기타맨이 고향에 내려와 어슬렁거린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하늘이 내려준 인물이었다. 우리는 기타맨을 찾아 나섰다. 그의 집은 멀었다. 전주에서 버스로 한 시간쯤 가야 했다. 들녘에 우람하게 정미소가 서 있었고, 기타맨은 그 집 아들이었다. 우리 얘기를 들은 그는 기타는 만지지만 무대에 설 만한 실력이 아니라고 했다. 자신의 형이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한 것이지 자신은 아니라고 했다. 그 겸손이 더 맘에 들었고, 그가 기타맨임을 의심치 않았다. 그 집에서 한 밤을 자며 밤새 설득했다. 그렇게 퍼스트 기타맨을 얻었다. 4인조 그룹사운드가 결성되었다.


1974년 12월 첫 리사이틀

하지만 사람은 있는데 연주할 악기가 없었다. 자신의 악기는 자신이 구해야 했다. 기타맨은 형 것을 빌려 쓰기로 했지만 나는 전자기타를 구할 수가 없었다. 그만그만한 살림에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전자기타는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전자기타를 찾아 읍내를 뒤졌지만 헛수고였다. 공연 날짜는 다가오지만 정작 악기가 없으니 가슴이 타들어갔다. 누가 전자기타를 빌려준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달려갔을 것이다.

그런 어느 날 전자기타를 집에 ‘모셔놓고 있는’ 선배가 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선배의 집은 읍내에서 20리쯤 떨어져 있었다. 초겨울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을 지나 묻고 물어서 그 집을 찾아갔다. 선배는 집에 없었다. 대뜸 이 집에 기타가 있느냐고 물었다. 선배의 아버지는 날 한참 노려보더니 외양간을 가리켰다. 외양간을 살피니 정말 전자기타가 있었다.

그러나 목이 부러진 채 소 여물통 옆에 나뒹굴고 있었다. 아마도 일은 하지 않고 기타나 튕기는 자식이 꼴 보기 싫어 아버지가 부숴 버렸을 것이다. 갈 때는 몰랐는데 읍내로 돌아오는 길이 무지 멀었다. 들녘에서는 삭풍이 불어왔다. 그리고 하늘에서 눈이 왔다. 눈물이 났다.

1974년 성탄절 즈음에 우리는 읍내 우체국 앞 예식장을 빌려 공연을 했다. 예식장 입구에 현수막을 걸었다. ‘그룹사운드 겨울나무 리사이틀’이 펄럭였다. 하지만 무대 위는 초라했다. 전자기타를 구하지 못한 나는 통기타를 멨고, 역시 베이스기타를 구하지 못한 친구는 색소폰을 들고 무대에 섰다. 나는 통기타로 코드를 짚으며 ‘Have ever seen the rain’, ‘Beautiful brown eyes’, ‘Help me make it through the night’ 등 10여 곡을 불렀다. 전자음에 맞춰 미친 듯이 노래하고 싶었는데, 그날 공연은 너무도 촌스러웠다. 베이스가 없으니 고음이 공중으로 떠다니고 음악은 거칠고 소란스러웠다. 그래도 그룹사운드 공연을 처음 본 읍내 젊은이들은 곡이 끝날 때마다 환호했다. 처음으로 하객 아닌 관객을 맞아들인 예식장 주인아저씨도 박수를 쳤다. 그렇게 7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첫 공연을 마쳤다.

나는 전기 대학 시험을 치르지 않고 후기 대학에 응시했다. 나만 아니라 첫 번째 음악 친구도 후기 대학에 입학했다. 나는 서울, 그는 이리(익산)에서 대학에 다녔다. 그리고 이듬해 우리는 다시 모여 연습을 했다. ‘겨울나무’가 되었다. 공연장소로 읍내 극장을 빌렸다. 원래 멤버에 색소폰과 클라리넷이 추가되었다. 겨울나무 공연 소식은 별 볼일 없는 읍내의 심심한 겨울철에 최대 관심사로 떠올랐다. 요즘 말로 ‘빅 이벤트’였다. 연습 장소로 자원봉사자들이 몰려들었다. 서로 포스터를 붙이고 공연 티켓을 팔겠다고 나섰다. 젊은 사람들이 한데 모이니 별별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 함께 포스터를 붙이겠다고 나간 남녀 한 쌍은 훗날 열애 끝에 결혼을 했다. 그러자 여러 말들이 나왔다.

“포스터를 역 앞에 붙이랬더니 으슥한 하천에는 왜 갔을까. 포스터는 안 붙이고 서로 입술만 붙였고만.”

그해 ‘겨울나무 리사이틀’은 극장 좌석이 거의 찰 정도로 관객들이 많았다. 서울에서 빌려온 악기와 장비는 제법 섬세하고 육중했다. 우리는 열심히 연주하고 노래했다. 공연이 끝날 때까지 무수한 얘깃거리가 많지만 당시 일은 이쯤에서 줄인다. 그 후 겨울나무 공연은 멤버가 바뀌면서 여러 해 동안 이어졌다.


‘겨울나무’ 싱어로서의 자존심

군대에 가고 취직을 하며 우리는 흩어졌다. 그러나 겨울이면 겨울나무가 됐던 그 시절을 어찌 잊을 것인가. 어쩌다 멤버들이 만나면 음악 얘기로 술자리가 길어졌다. 우리는 한 번도 제대로 된 유료 공연을 해본 적이 없고 또 음반을 낸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음악적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다. 우리가 계속 음악을 했으면 오늘날 조용필이나 전인권은 없었을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다. 서로의 음악성을 치켜세워주며 언젠가는 꼭 제대로 공연을 해보자고 했다. 그래서 겨울나무를 세상에 알리자고 다짐했다. 헤어지면서는 꼭 이런 말을 했다.

“겨울나무 리사이틀 한번 해야지. 각자 집에서 연습하자고. 그날을 위해서.”

그러나 모진 세월은 우리를 떼어 놓았다. 다들 바쁘게 살았다. 그런데 우리는 뜻밖에, 어쩌면 극적으로 지난해 다시 모였다. 지금도 왕성하게 음악활동을 하고 있는 후배(겨울나무 2기 출신)가 자신들의 동호회 공연에 우리를 초청했기 때문이었다. 2014년 10월 ‘비바앙상블 콘서트’ 무대에 오르게 된 것이다. 우리는 후배의 지하 연습실에 모였다. 기타맨(김홍선)만은 전주에서 올라오지 못했다. 주유소를 운영하는 녀석은 정말 가고 싶지만 마누라가 ‘허락’하지 않아 합류가 어렵다고 했다. 약속하면 늘 늦는 또 한 녀석은 연습 날만은 총알처럼 달려왔다. 우리는 술을 한 잔 걸치고 연습을 시작했다. 베이스 소리가 가슴을 쳤다. 그 옛날 광경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저 아래에서 무엇인가 복받쳐 올라왔다.

‘노래들은 그대로 있는데, 우리는 이렇게 흘러왔구나.’

이곡 저곡을 연습하다 사랑과 평화의 ‘어머님의 자장가’와 전인권이 부른 ‘사랑한 후에’ 두 곡을 부르기로 했다. ‘사랑한 후에’는 음이 높았다. 원곡대로 씨마이너(Cm)로 부르면 높은 음이 (‘라’ 음보다 반음 높은) Bb까지 올라갔다. 멤버들이 무리라며 키를 내리자고 했지만 내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반(半)음에 목숨 거는 것이 싱어 아닌가. 세월이 흘렀어도, 세상이 변했어도 나는 겨울나무의 싱어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음이 나왔다.


40년 만에, 환갑에 올라선 무대

마침내 공연 날이 밝았다. 나는 아내가 골라준 선글라스를 끼고, 소주 한 병 하고도 넉 잔을 마시고 무대에 올랐다. 술은 두려움을 쫓고 고음을 지르는 데 도움을 줬다. 그렇다고 너무 마시면 아예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과거에는 소주 한 병이면 적당했지만 요즘 소주는 도수가 약해서 반 병쯤 더 마셔야 했다. ‘사랑한 후에’는 첫 음을 제대로 질러야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었다. 멤버들 모두 잔뜩 긴장한 채 나를 봤다. 나는 씩 한번 웃어주고 내질렀다.

‘긴 하루 지나~고 언덕 저 편에~’

우리는 해냈다. 600여 명의 관객들이 환호를 보내주었다. 그 속에는 아내도 있었다. 그렇게 별렀던 겨울나무 공연을 실로 40년 만에, 그리고 환갑에야 할 수 있었다. 그럼 겨울나무 멤버를 소개하겠다. 드럼 은희문(익산LED산업단지개발 대표), 건반 김동원(BCP경영기술컨설팅연구소 대표), 알토색소폰 노희천(비바색소폰앙상블 단장), 그리고 싱어 김택근이다. 베이스는 따로 초빙한 정종호 씨가 맡았다. 그리고 우리가 살던 고향은, 아니 우리 그룹사운드의 활동 무대는 정읍시 신태인읍이었다. 한때 4만 명에 육박하던 고향 신태인은 속절없이 쇠락하여 이제 인구가 만 명도 되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도 겨울나무가 되고 싶다. 그리고 초청공연이 아닌 우리만의 리사이틀을 꿈꾸고 있다. 그리고 꼭 공연 말미에 기타와 드럼을 부수고 싶다. 우리는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

그룹사운드 ‘겨울나무’가 있었다. 아니 지금도 있다.



△김택근(金澤根) 언론인·시인

언론인 김택근 필자는 1954년에 태어나 전북 정읍시 신태인읍에서 자랐고 동국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3년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경향신문 문화부장, 종합편집장, 경향닷컴 사장,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2010년 출간된 김대중 전 대통령의 <김대중 자서전>의 대표 집필자로 알려져 있다. 저서로는 <사람의 길 - 도법스님 생명평화 순례기>,

산문집 <뿔난 그리움>, 동화집 <벌거벗은 수박도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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