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그 순간] 외교적 수사(修辭)와 대한제국

기사입력 2015-07-23 21:27 기사수정 2015-07-23 21:27

국제관계에서 애매모호한 표현을 ‘외교사령적(外交辭令的)’ 혹은 ‘외교적 수사’라고 한다. 외교관이 명확히 yes라고 하지 않으면, no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요구를 거절하는 데 적절한 방식이다. 당연히 외교관들은 상대방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파악하고 이에 대응해야 하며 대부분의 경우 큰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개항 이후 우리 정부는 이 같은 외교관례에 익숙하지 않아 실수를 연발한다. 문제는 이 같은 실수가 단순한 웃음거리로 끝난 게 아니라 국권 상실과 연결되었다는 점이다.

▲고종 황제

조선말기/대한제국 시기, 고종은 간단없이 강대국들의 보장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지키려 했다. 러일전쟁이 눈앞에 다가오면서 독립 상실이 현실로 나타나자 그의 시도는 더욱 적극성을 띠게 된다.고종은 1904년 말 미국에 밀사를 파견하여 동아시아 문제의 최종 해결에서, 즉 러-일 평화조약이 체결될 때 미국은 조-미 조약에 따라 한국의 독립을 위해 영향력을 행사해 줄 것을 요청한다.

당시 조선 외교관들은 주재국 관리들을 상대로 현안문제를 논의할 능력을 구비하지 못했다. 전회에서 다룬 이한응은 특이한 케이스라 할 것이다. 1997년 IMF 위기 때에도 금융구제 등 복잡한 문제는 미국인 고문들이 나섰다고 한다. 1904년 말 한국 공사관을 대리해서 미 국무성을 방문, 존 헤이(John Hay) 국무장관을 만난 인물은 공사관 법률 고문인 니드햄(C. W. Needham, 1848~1935) 박사였다. 그는 시카고와 워싱턴DC에서 변호사로 일하면서 1902년에는 현 George Washington 대학의 7대 총장이 되었으나 대학을 확충하는 과정에서 비리로 1910년 사임한 인물이다.

헤이 장관은 니드햄과의 대담에서 ‘조심스럽고도 신중한 표현’으로 한국에 대해 우의와 깊은 관심을 표명했으나, “미국의 이해관계는 정치적이기보다는 상업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헤이 장관은 한국의 요청을 애매하고 회피적인 표현으로, 그러나 분명히 거절한 것이다.

그런데 니드햄은 대담의 결과를 한국 공사관에 보고하면서 ‘극동에서의 전쟁은 곧 모든 관련 당사국들에게 명예롭게 종결될 것’이라고 쓰고 있다. 이건 좀 애매한 표현이다. 우선 니드햄 자신의 견해이다. 그러나 ‘모든 당사국에게 명예롭게 종결될 것’이라는 표현은 헤이의 의도를 살렸다고 할 수 있다. 러-일 간의 전쟁에 미국이 공정하게 중재할 수 있다는 의미도 포함할 수 있으며, 또 종전 후 사태는 이런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면 조선은? 정확히 말하면 전쟁의 당사국이 아니다. 그러나 만주와 조선이 분쟁의 핵심(bone of contention)이었다면 조선이 ‘당사국’이라고 강변할 수 있지 않을까? 즉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말이다.

조선 정부가 이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영국 외교문서에 의하면 이 보고서가 번역되는 과정에서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주는 것으로 둔갑하였으며, 고종은 이를 보고 큰 위안을 받았다고 한다. 그 여파는 엄청난 것이었다.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왔으며 후일 ‘조선의 비극’과 ‘한국의 자유를 위한 투쟁’ 등 친한-반일적 저술과 기사로 유명한 영국 The Daily Mail지의 특파원 프레데릭 매킨지(Frederick McKenzie)는 러일전쟁 직전 한국 정부의 실력자인 이용익(李容翊)과 대담을 가지고 기절초풍한다.

전쟁이 일어나기 수일 전 이용익은 매킨지에게 한국의 독립은 미국과 유럽 열강들에 의해 보장되고 있으므로 한국은 전쟁에도 불구하고 위험이 없다고 설명한 것이다. 매킨지는 한국이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하는데 어느 나라가 한국을 보호하기 위해 싸우려 할 것인가 하고 묻자, 이용익은 ‘미국’이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미국으로부터 약속을 받고 있다. 미국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우리의 맹방이 될 것이다.”

2차 대전이 일어나자 미국에 있던 한국인들이 “과거 미국은 한국을 버렸다. 이제 속죄(atonement)할 때가 되었다.”고 외쳤다. 바로 이 상황을 미국의 ‘배신’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국난을 눈앞에 두고도 정부 당국자는 환상에 젖었으며, 군주의 비위를 맞추는 상소문에 익숙했던 관리들이 빚은 오역 혹은 의역(意譯)의 결과라 할 것이다.

영국과도 비슷한 상황을 연출한다. 러일전쟁 발발을 2주일 앞둔 1904년 1월 21일 한국은 중립을 선언하며 그 문서를 서울의 영국 공사관에 보내는데 영국은 외교관례에 따라 단순히 ‘수교(手交, acknowledgement)’한다. 수교란 상대방의 문서를 잘 받았다는 수취증명이다.

그런데 조선정부는 이를 영국이 한국의 중립을 보장한 것이라고 감사하며 나아가서 중립선언이 효력을 발휘하도록 영국의 충고와 지원을 구한다. 다른 열강들도 이 문서를 수교하자 조선정부는 중립이 대외적으로 보장된 것으로 착각한다. 물론 러시아와 일본은 “일어나지 않은 전쟁에 무슨 중립이냐?”면서 수교조차 거부했다.

이후 조선의 반응은 더욱 가관이다. 개전(開戰) 직전 한 관리는 영국공사 조던(John Jordan)에게 한국은 평화보다 전쟁이 더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조던은 ‘이 놀랄 만한 발언’은 열강이 한국의 중립선언을 단순히 수교한 것을 한국 영토의 불가침성이 국제적으로 보장된 것으로 오해한 것이라고 알아차린다. 평화가 유지되면 일본-러시아간의 협상 여하에 따라 한국은 일본의 정치적 통제 아래 들어갈 위험성이 있으나 이제 중립이 보장되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도 걱정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존 헤이 美국무장관

1905년 8월 2차 영일동맹에서 영국이 한국의 독립보장 조항을 철회하고 한국에서 일본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하자, 한국정부는 한영 수교 조약과 상치한다는 이유로 이 조약을 철회하라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조던 공사는 한국의 이 ‘괴이한 요구(the strange request)’에 대해 수교했다는 관례적 회신을 보내는 것조차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쓰고 있다. 당시의 ‘한국인들의 성정(temper)으로 보아’ 공식 접수조차도 한국의 주장이 정당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으로 오해되어 엉뚱한 희망을 줄 것이라는 이유였다.

이것이 110년 전 우리의 외교였다.

<글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ㆍ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삼국통일의 정치학><한국 국제관계사 연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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