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죽음(?)’이란 무엇일까

기사입력 2019-07-30 10:18:24기사수정 2019-07-30 10:18
  • 인쇄하기
    글자 크기 작게
    글자 크기 크게

며칠 전에 유명 정치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치인의 자살은 대부분 검찰 수사를 받을 때다. 그러나 그는 수사와 관련이 없었다. 정치인은 낙선했을 때 좌절한다지만 선거가 끝난 지 오래다. 정치인은 연예인처럼 대중으로부터 잊혀지는 것을 두려워한다지만 그는 정치평론가로서 명성도 높았다. 최근에는 생업이 있어야 한다며 일식집을 열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스스로 삶을 놓아버렸을까.

(사진= 박미령 동년기자)
(사진= 박미령 동년기자)

죽음의 종류도 수없이 다양하다. 중한 병으로 예고된 죽음이 있는가 하면 교통사고처럼 뜻하지 않은 죽음도 있다. 안타까운 죽음도 있고 관심을 못 받는 죽음도 있다. 고통스러운 죽음도 있고 편안한 죽음도 있다. 대부분의 죽음은 병이건 사고이건 원인이 명확히 드러난다. 그런데 자살은 이유가 불분명한 경우가 많다. 우리가 어찌 깊고 깊은 인간의 내면을 알랴. 잘 모르므로 그저 우울증으로 치부하고 마는 경우가 많다.

딱히 유명인의 죽음이 아니더라도 죽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추세다. 소위 ‘웰다잉’ 열풍이다. 한때 ‘웰빙’이라 하여 행복한 삶에 쏠리던 시선이 갑자기 행복한 죽음에 꽂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거 고도성장 시대에 풍요에 취했다가 외환위기,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삶이 팍팍해지고 아울러 고령사회로 넘어가면서 자연스럽게 관심이 이동한 것인지 모른다. 아무튼 과거 운명처럼 맞던 죽음을 이제 평가하고 분류하게 되었으니 좀 더 문명화(?)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죽는 당사자에게 죽음에 관한 가치 평가는 무의미하다. 죽음의 강을 레테, 즉 ‘망각의 강’으로 부르듯이 죽음의 문턱을 넘는 순간 모든 지각과 의식이 사라지니 자신의 죽음을 평가할 수도 없으려니와 평가한다는 것도 의미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죽음에 관한 논란은 결국 살아있는 자의 몫일 수밖에 없다. ‘좋은 죽음’이 ‘좋은 삶’으로 귀결되는 이유이다. ‘웰다잉’이 도덕성이 가미되긴 하지만 ‘웰빙’이나 ‘웰다잉’이나 지향점은 같다는 얘기다.

죽음에 대한 평가가 살아있는 자의 몫이라면 자연스럽게 그 죽음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현재와 미래에 어떤 기여를 하는가 하는 점이 평가 기준이 될 것이다. 이를테면 전쟁에 나가 전사함으로써 나라를 지키는 것은 남은 자들의 행복에 막대한 이익을 선사했으니 좋은 죽음으로 기리는 것이 마땅하다. 반면에 범죄를 저지르다 죽는 것은 지탄을 받는 죽음일 것이다.

안타까운 죽음은 또 어떤가. 전장에서 젊은 나이에 스러져 간 병사들도 그렇지만 남을 구하다가 목숨을 잃은 경우도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런 좋은 심성의 사람이 오래 살면서 사회에 더 크게 기여할 수 있을 텐데 일찍 갔으니 안타까운 것이다. 그럼에도 사회에 이타적인 본을 보였으니 좋은 죽음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좋은 죽음은 타인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는다.

자살이 좋은 죽음인지는 분명치 않다. 유명인의 죽음이 베르테르 효과처럼 다른 자살을 부른다는 점에서 나쁜 죽음일 수 있다. ‘설국’의 작가 가와바다 야스나리는 더 이상 좋은 작품을 쓸 자신이 없어 자살했다. 좋은 죽음은 아니지만 자신의 존엄성은 지켰다. 어쩌면 좋은 죽음은 타이밍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조금 다른 얘기로, 연명치료는 좋은 죽음을 방해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저작권자 ⓒ 브라보마이라이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