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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년 만에 꿈을 이룬 일흔의 어린 왕자, 쁘띠프랑스 한홍섭 회장
- ‘너의 장미꽃이 그토록 소중한 것은 그 꽃을 위해 네가 공들인 그 시간 때문이야.’ 생텍쥐페리의 속 한 문장이다. 어린 왕자가 자신의 소행성을 길들였던 것처럼, 한홍섭(韓弘燮·71) 회장은 자신의 마음속 소행성 ‘쁘띠프랑스’를 길들이기에 여념이 없다. 그는 ‘돈’이 아닌 ‘꿈’ 덕분에 지금의 작은 프랑스 마을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고 말한다. 청평호반 언덕 위의 아름다운 소행성, 반짝이는 그 꿈은 30년 전부터 빛나고 있었다. 1980년대, 연 매출 100억원의 페인트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한 회장은 기술제휴 건으로 유럽 출장이 잦았다. 프랑스에도 종종 오가며 혼자 미술관 나들이를 하곤 했는데, 어느 날 신문 문화면의 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피카소의 딸이 아버지의 소장품을 처음 공개하는 전시회를 연다는 기사였다. 그길로 프랑스를 찾은 한 회장에게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전시장에 관람객들이 긴 행렬을 이룰 정도로 성황이었어요. 그 광경을 보면서 문득 ‘프랑스 미술을 한국에 소개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 무렵 내 형편에 맞는 작은 미술관 하나 있었으면 하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막상 구체적으로 검토하다 보니 생각이 바뀐 거예요. 미술 작품보다는 그 나라의 생활과 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이 더 유익하리라 판단했죠. ‘그래, 프랑스 마을을 한국에 옮겨 놓아보자!’ 하고는 그때부터 꿈을 키우기 시작했어요.” 떼섭이 왕자의 집념으로 길들여진 소행성 그가 프랑스 마을을 계획할 당시에는 88서울올림픽 개최로 국제화 바람이 한창이었다. ‘국제화 시대에는 우리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도 상대의 문화를 알아야 경쟁할 수 있으리라!’ 그의 마음에는 남모를 사명감까지 움트고 있었다. “중소기업 경영자로서 큰일은 못하더라도 열심히 하다 보면 나라에 보탬이 되고 개인적으로도 보람된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프랑스 문화에 대한 자료도 열심히 찾아보고, 일 년에 서너 번씩 현지에 직접 찾아가 골동품을 수집했죠. 틈만 나면 차를 몰고 마을 부지를 물색했는데, 1995년에 지금의 터를 찾았어요. 명의 이전을 마치고 허가가 난 건 3년 뒤였죠. 묘지 이장 문제랑 IMF 여파로 지체됐거든요. 페인트 사업을 병행하며 준비하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꿈에 대한 열정과 각오가 남달랐기 때문에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는 동안에도 서울대·고려대·홍익대 등 대학원 최고위 과정을 30년에 걸쳐 10군데 이상 수료하는 등 경영과 문화에 대해 익히고자 노력했다. ‘잘나가는 중소기업 CEO가 뭐가 아쉬워 저렇게 사서 고생을 하나?’ 하고 우려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그의 꿈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런 자신의 고집스러운 성향 덕분에 꿈을 이룰 수 있었노라 말하는 한 회장이다. “어렸을 적 별명이 ‘떼섭이’였어요. 한번 고집부리면 아무도 못 말릴 정도로 포기를 몰랐으니까요. 회사를 경영하면서 먼 프랑스에 비싼 여비를 들여가며 발품을 파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죠. 그러나 강한 집념으로 밀고 나갔기 때문에 이렇게 꿈을 이룰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페인트 사업은 내가 달리 아는 게 없어서 생계를 위해 선택한 일이었다면, 쁘띠프랑스는 나 스스로 보람된 일을 하고 싶어서 작정하고 시작한 일이었어요. 그래서인지 힘들긴 했어도 목표를 이뤄가는 과정에서 더 큰 기쁨과 보람을 느낀 것 같아요.” 한 회장은 쁘띠프랑스라는 소행성은 떼섭이라는 어린 왕자가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 이야기한다. 그가 100여 차례 유럽을 오가며 직접 발품을 팔아 마련한 골동품과 미술품 등으로 꾸며진 이곳에서 떼섭이의 면모(?)를 가장 잘 드러내는 공간은 바로 주택전시관이다. 150년 된 프랑스의 전통 가옥을 목재와 기와, 바닥까지 모두 해체해서 한국으로 싣고 와 재현한 것이다. 프랑스 시골집의 향수가 물씬 느껴지는 이곳은 현지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전통 가옥이라고. 그만큼 한 회장의 고난이 뒤따른 산물이기도 하다. “수년간 시골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마음에 드는 프랑스 전통 가옥을 찾으려고 무척 애를 썼어요. 막상 마음에 드는 고택을 사도 뜯어서 한국으로 가져간다고 하면 거절당하기 일쑤였죠. 프랑스인들은 자기 문화에 대한 애착이 강하거든요. 겨우 찾아낸 150년 된 목조 가옥을 해체해 한국으로 옮겨오는 것도 만만치 않았어요. 우리와 건축 방법이 다른 데다가 설계도면도 없으니 다시 조립하기도 어려웠죠. 그러나 무엇 하나 대충하려 들지 않았어요. 내가 생각하는 인생의 지름길은 ‘정직’이거든요. 100명 중 99명이 몰라본다 할지라도 오리지널을 고수하고 제대로 하려고 노력했죠.” 수익보다 유익을 추구하며 이뤄낸 값진 꿈 주택전시관 안에는 그가 20년 동안 프랑스를 돌아다니며 구한 19세기 장롱이며, 200년이 넘은 타피스리 의자와 가구, 장식품들이 놓여 있다. 이 공간뿐 아니라 쁘띠프랑스를 둘러보면 어딘지 모르게 정겨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애초에 이곳을 계획할 당시 150년 전의 프랑스 시골 마을을 모티브로 해 옛날식 인테리어와 골동품이 많기 때문이다. “파리에 처음 갔을 때 가이드가 ‘200년 전 사진과 현재가 똑같은 마을이 있는데 한번 가보실래요?’ 하는 거예요. 밀레의 생가가 있는 바르비종이라는 마을인데, 가서 보니 정말 옛날 모습 그대로더라고요. 새로 지은 것보다는 자연스럽게 오래된 마을이 좋겠다 생각했죠. 손때가 묻은 골동품을 보면 그 나라 사람들의 문화와 정서가 더 와 닿거든요. 또 디자인이 좋고 물건 상태가 좋아야 100년, 150년을 가는 거지 나쁜 물건은 그렇게 오래 남아 있기도 힘들죠. 그만큼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고 봐요.” 그가 수집한 골동품만큼이나 쁘띠프랑스에서 가치 있는 공간은 ‘생텍쥐페리 기념관’이다. 떼섭이의 집념과 인생의 좌우명과 같은 정직 덕분에 프랑스 생텍쥐페리재단과 정식으로 국내 라이선스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어느 날 현지 통역사를 통해 생텍쥐페리 외삼촌의 손자가 생텍쥐페리재단의 대표로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2000년 한 해 동안 네 차례나 재단을 방문해 내가 왜 이 사업을 시작했고, 어떤 의미로 기념관을 만들려고 하는지에 대해 무던히 설명했죠. 페인트 사업을 할 때도 오로지 ‘정직’을 무기로 그 흔한 접대 한 번 안 해봤어요. 좋은 제품을 만들고 열심히 이야기하면 언젠가는 알아주는 사람이 생기거든요. 그런 경험이 생텍쥐페리재단과의 협상 때도 통했죠. 덕분에 쁘띠프랑스를 개장했을 때 생텍쥐페리 기념관에 작가가 입었던 옷 등 유족으로부터 기증받은 유품을 전시할 수 있었어요.” 생텍쥐페리 기념관에 가면 1943년에 출간된 의 초판본을 비롯해, 작품 구상 당시 작가가 직접 그린 그림과 자필 원고 등을 볼 수 있다. 오르골 전시관, 인형 박물관 등도 프랑스 현지 못지않은 소장품을 전시하고 있어 역사적, 문화적 의미를 지닌다. 그런 점 때문에 더러 ‘지방자치단체나 정부에서 만든 공공 문화시설 아니냐?’며 묻는 이들도 있다. 개인의 노력으로 일궈진 마을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저마다 감탄을 마다치 않는다. 수익보다는 유익을 위해 시작한 사업인 만큼 쁘띠프랑스는 아직도 개관 당시 입장료(8000원)를 받고 있다. 그동안 그가 들여놓은 볼거리, 즐길거리가 더 풍성해졌으니 오히려 손해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는 자신의 보람에 무게를 둔다. “나는 자선사업가는 아니지만, 내가 목표로 했던 것을 이뤘고 그것에 사람들도 즐거워하고 만족하니 더 바랄 게 없어요. 지금도 인스타그램(사진 공유 소셜 미디어 플랫폼)을 보면 우리 마을을 찾아간 사람들이 올린 사진만 4만7000장이 넘어요. 참 뿌듯하죠. 그전에 페인트 사업을 할 때는 인화성 물질, 니스, 신나 같은 것을 다루니 늘 조심스러웠는데 지금은 아름다운 미술품, 예쁜 소품을 만지니 한결 기분이 좋죠. 또 사업을 할 때는 100여 명의 직원을 신경 쓰고, 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야 해서 정신적으로 여유가 없었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나를 위한 즐거운 목표를 찾아 움직이고 있어요. 경쟁사회 속에서 무언가를 이룰 때와는 전혀 다른 기쁨을 느끼고 있죠.” 완벽한 꿈을 향해 여전히 발품을 팔다 프랑스 마을 조성을 꿈꾼 것이 1988년, 터를 잡은 것이 1998년, 그리고 쁘띠프랑스가 문을 연 것이 2008년. 중년 사나이의 가슴에 피어오른 순수한 꿈은 꼬박 20년 만에 이뤄졌다. 그는 40년 넘게 공을 들였던 페인트 사업을 정리하고 ‘문화마을 촌장’으로 본격적인 제2인생을 맞이했다. 어느덧 고희를 넘겼지만, 여전히 발품을 팔고 있다는 한 회장이다. “처음 문을 열었을 땐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우려가 있었어요. 그런데 개관하고 2개월 만에 드라마 촬영지로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관광객이 몰리기 시작했죠. 막상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니 부족한 것들이 보이고,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부지런히 프랑스를 오가며 모은 수집품들로 3년에 걸쳐서 건물 두 개를 더 지었죠.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은 직접 수집하러 다닐 생각이에요.” 꿈을 이룬 지도 어언 10년이 다 되어간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꿈을 이뤄가고 있다.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자신의 꿈에 완성도를 높여가고 있다. “그저 하루하루 먹고살기 위해 보내는 평범한 삶은 무의미하죠.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끊임없이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쁘띠프랑스를 만들면서 막연했던 꿈은 이뤘지만, 아직도 더 하고 싶고 해야 할 것들이 많아요. 지금은 이탈리아 마을을 조성하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여전히 우려하는 사람도 있고,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죠. 그러나 어떤 이해관계를 떠나 제2인생의 꿈을 위한 일이기 때문에 이번에도 멀리 내다보고 열심히 발품을 팔아보려고요.”
- 2017-03-06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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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문상 전 EBS 부사장 “나이듦의 미덕은 거리두기, 멀리보기, 방향잡기”
- 윤문상(59) 전 교육방송공사(EBS) 부사장은 대한민국의 숨 가쁜 교육현장을 유아교육에서부터 초·중·고 교육에 이르기까지 생생하게 담아온 현장 PD 출신이다. 그는 2016년 2월 교육방송 부사장을 퇴직하고 새로운 인생 2막을 준비하고 있다. 그의 인생 2막 계획은 6개월씩 타국에서 생활인으로 살아보기다. 이를 통해 “인생 리타이어가 아닌 리셋을 해보겠다”는 계획이다. 2016년 하반기는 대만에서 생활했고(4~10월), 2017년 상반기는 베트남에서 한국어와 언론학을 강의하며 거주할 예정이다. 마침 방학을 틈타 잠깐 한국에 머물고 있는 그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장 퇴직 후 여행은 많은 사람들이 세우는 계획이지요. 관광이 아닌 6개월씩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기식 ‘생활 거주’는 흔치 않습니다. “6개월씩 타국에서 살아보기 프로젝트는 나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강제적 공간 이동을 해보자는 의미에서 시작됐어요. 단지 타이어를 바꿔 끼는 리타이어가 아니라 처음부터 새롭게 리셋하고 싶었어요. 의식을 바꾸기 위해선 본인의 자발적 노력뿐 아니라 공간을 바꾸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요. 타국 거주의 강제적(?) 환경 설정으로 리셋한 것이지요. 버스를 타는 사람은 버스 안에선 자세히 볼 수 있지만 바깥 풍경은 자세히 보지 못합니다. 달리는 버스 밖에서 보면 안은 들여다보지 못하지만 객관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객관적 보기가 절실히 필요했던 이유가 있었습니까? “퇴직 후 인생 2막 하면 기존에 하던 것의 연장선으로 강도-속도만 늦추는 것을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저는 과거의 경험과 지식을 연장하는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앞으로도 30, 40년 이상 일을 하고 살아가야 할 것이기에 ‘새로운 시작은 새 무대’에서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익숙한 서울의 아파트 방에 앉아서 머리로만 생각을 하는 것과 말 설고 사람 설고 풍경 낯선 외국에서 생각하는 것은 다르잖아요. 한국에선 아무래도 한계가 있어요. 반면 외국에 갔을 때는 친한 사람도 없고, 언어와 문화 등 많이 불편하지만 원점에서 시작해 나를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게 되지요. 외국에서 생활인으로서 살아보니 단지 출장이나 관광으로 접하던 것과는 달리 새로운 것을 느끼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나에 대해서도 깊이 성찰해보게 되더군요.” 리타이어와 리셋은 어떻게 다른가요? “리셋은 한마디로 원점에서부터 새롭게 하는 적극적, 원초적 환골탈태라고나 할까요. 리타이어가 같은 트랙에서 속도만 늦추는 소극적 의미라면 리셋은 속도와 방향, 관점 이것들을 총체적으로 합쳐 객관적으로 보자는 의미예요. 그러기 위해 내가 나를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필요하지요. 한국이라는 익숙한 환경에선 내가 잘 아는 사람, 나를 잘 아는 사람만 만나게 돼 나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기 힘들어요.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은 조직 브랜드, 계급장을 떼고 자연인으로서 자신만의 정체성, 주제 파악을 하는 것입니다.” 리셋은 의식과 환경을 함께 바꾸는 것이군요. 월화수목금금 열정적으로 일한 분들일수록 ‘관성의 법칙’에서 벗어나기 힘들어하시던데요. “하하. 군대 속담에 ‘졸병보다 제대병이 더 마른다’는 말이 있는데요. 퇴직자들에게 갑자기 시간이 주어지면 자율적 관리를 하지 못해요. 제 경우엔 마인드 세팅을 이렇게 했어요. ‘브랜드 없는 사무실에서 봉급 받지 않고 일할 뿐이다. 초조해하지도 말고, 시간에 끌려가지도 말고 시간을 자유자재로 끌었다 놓았다 하는 여유’를 갖자고요. 현직에 있을 때는 시간에 나를 맞췄지만, 이제 나에게 시간을 맞추자고요. 여기에 환경 리셋 작업으로 ‘6개월 낯선 국가에서 살아보기ʼ를 더한 것이고요.” ‘살아보기’ 리셋 경험 국가로 베트남과 대만 등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기본적으로는 한국어, 언론학을 강의하며 생활인으로서 거주 환경이 마련될 수 있는 곳을 골랐지요. 엄밀히 말해선 자기성찰뿐 아니라 세상 관찰에도 목적이 있습니다. 인생 2막 프로젝트를 위한 사전 심층답사라고나 할까요.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하는데 한 템포, 아니 반 템포라도 빨리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힘은 두 배가 들면서 성과는 반 토막이기 쉽습니다. 아시아에서 사업을 할 경우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미리 준비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호치민이라는 도시가 이런 발전 단계에 있는데 미래에는 어떻게 바뀔까, 무슨 씨앗을 뿌리고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에 안테나를 세우고 관찰하고 통찰해보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노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미리 생각하고 준비하는 것이지요. 앞으로 기회와 잠재력의 나라인 탄자니아나 가나 등 아프리카 대륙으로도 가보고 싶습니다. ‘집 떠나면 고생’이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막상 타국에서 사실 때 생각과 생활이 많이 달랐을 것도 같습니다만… “외국에 살아보니 일단 퇴직했다는 사실을 저절로 잊어버리게 되더군요. 낯설고 어색한 환경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해결해야 하니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어요. 대만에선 대학에서 언론학과 특강을 하는 한편 6개월간 랭귀지센터에서 중국어 공부를 했습니다. 말하자면 선생님과 학생 역할을 동시에 한 셈이지요. 큰 사무실, 비서와 기사 딸린 임원생활을 하다가 작은 책상에서 중국어 기초부터 배우고, 북적거리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아내와 함께 해내야 했지요. 불편하기도 했지만 신선하다는 느낌이 더 컸어요. 특히 젊은이들과 함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이제는 대만을 가이드 없이 자유자재로 돌아다닐 수 있으니 그것만 해도 큰 소득 아닙니까. 성장과 발전이라는 불편함을 통해 익숙함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큰 소득은 아내와 동지애로 끈끈하게 뭉치게 된 것입니다. 이역만리에서 한 지붕 아래 같이 사는 네이티브 한국인은 우리 둘밖에 없으니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의논하고 의지할 수밖에 없더군요(웃음).” 윤 부사장의 지인들은 그의 성공력을 넘어 성장력의 원천으로 독서를 꼽는다. 동기들 중 차장, 부장 승진은 가장 늦었지만, 임원 승진은 제일 빨랐던 역전의 힘은 바로 독서력에서 나왔다. 낯선 것을 이질감보다는 호기심으로 수용했고 그 기저에는 책이 자리한다. 신입사원 시절부터 월급의 10%는 무조건 책 사는 데 쓰셨다면서요. “네. 솔직히 말하면 직장생활 초년병 시절 10년간은 불평쟁이였어요. 늘 사표 던질 타이밍만 재며 불만이 가득한 채로 보냈어요. 그러다가 ‘이래선 안 되겠다’ 변화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됐는데 책이 계기가 됐어요. 당시 월급이 40만원 정도였는데 4만~5만원은 꼭 책 사는 데 썼지요. 독서에 빠지다 보니 현재의 불만을 한 걸음 뒤에서 보고, 또 한 치 더 깊이 보게 되더군요. 사고력, 판단력을 넘어 힐링의 치유력을 줬다고나 할까요. 상계동 집에서 서초동 직장까지 두 시간 이상 지하철을 타고 다녔는데, 매일매일 정거장 숫자나 세면서 가는 것이 참 지루했습니다. 어느 날 문득 지하철을 도서관으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 독서삼매에 빠져 지하철역을 몇 정거장 후딱 넘길 때의 기쁨은 뭐라고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제 인생에 영향을 끼친 , , 등 수백 권은 20년 동안 모두 지하철에서 읽은 책들이랍니다. 나중엔 누군가 집에 와서 다양한 책들을 보더니 ‘교수 같긴 한데 전공을 모르겠다’고 말하더군요(웃음).” 독서삼매에 빠졌던 이유가 궁금합니다. “PD란 직업의 숙명 같아요. 여러 분야의 사람을 만나야 하는 직업상 필요에 의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누구를 만나러 갈 때 그 사람과 관련한 책을 미리 읽는 것이 기본 예의란 생각을 한 게 독서의 직접적 동기였습니다. 라는 책은 과학 관련 내용이라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용어나 이론이 나올 때마다 그 부분을 쉽게 풀어쓴 책들을 다시 사서 읽으면서 진도를 나갔지요. 1년 뒤에 보니 관련 서적 50권 정도를 읽었더라고요. 극구 언론을 기피해 30분 내에 인터뷰를 끝내는 조건으로 겨우 인터뷰를 했던 어느 교육 전문가와 서로 좋아하는 책 관련 대화를 하다가 친해져 6시간 정도 대화를 했던 일도 있습니다. 책은 사교력뿐 아니라 판단력, 자신감도 키워주지요. 위로 올라갈수록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예측력과 큰 그림에 대한 파악력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윤 부사장은 ‘독서력은 퇴직 이후에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퇴직자들의 공통 트라우마는 ‘할 일이 사라졌다’는 목표 상실이다. 거기서 스트레스가 생긴다. 이럴 때 관심 주제를 정하고 2주 내에 관련 책 몇 권 읽기 등으로 목표 설정을 해놓으면 성취감뿐 아니라 정신건강과 목표관리에도 좋다”며 책은 시간 관리, 스트레스 관리의 해결책이자 좋은 친구라고 덧붙였다. 최근 1년 새 부모상을 잇달아 치렀다는 그는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사유하며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곧 ‘어떻게 살 것인가’와 통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삶의 마지막을 미리 생각해봄으로써 남아 있는 현실을 좀 더 소중하게 느끼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죽음에 대한 준비란 어떤 의미인가요? “‘죽음’ 하면 먼 일이라 생각하기 쉬워요. 그리고 ‘임종의 사전 준비’ 하면 상조회사, 묘자리 예약 등을 퍼뜩 떠올리는데요. 진정한 죽음의 준비는 세대 간 대화라는 생각을 했어요. ‘아버지(할아버지)는 누구이고, 어떤 고민을 해왔으며, 이렇게 살아왔다’를 책이든 뭐든 다양한 형식을 통해 들려주고 공유하는 것이지요. 어느 학교, 어느 직장 어느 직급까지 올라갔다는 이력서 상의 궤적을 넘어 한 인간 고유의 고민, 즉 삶의 흔적을 나눠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본인에 대한 파악부터가 필요해요. 후손이든 누구든 대화를 나누려면 스스로를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기억을 되살리고 기록을 남기는 것, 생을 마무리하는 인간의 의무이자 권리라는 생각을 부쩍 하고 있습니다.” 존경받는 어른이란 무엇일까요? “‘노인 하나가 사라지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는 말이 생긴 것은 그만큼 지혜의 기록화가 필요하다는 의미의 반증이라고 봅니다. 주관적 기억이 아니라 객관적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있다는 거지요. 우리나라가 현재의 부강한 국가가 된 것은 그냥 저절로 된 것이 아닙니다. 이 과정을 경험하지 못한 다른 세대, 다른 국가에게 이 무형의 자산을 무형의 기억이 아니라 유형의 기억으로 알려야 합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기성세대는 충분히 자신감과 자부심을 가질 근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유배생활 18년 동안 500여 권의 저서를 남긴 것은 사헌부 기록만으로 세상에 알려지는 것보다, 자신을 정확히 알리고 싶다는 강한 욕구 때문이었다”며 “일부 젊은 세대들이 기성세대를 꼰대라고 무시하고 폄하하는 것은 ‘잔소리만 많고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기록’은 남기지 않은 원인일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마지막 질문인데요. 인생 2막의 기준을 속도보다는 방향에 두고 말씀하시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하하. 네, 맞습니다. ‘거리두기’를 통해 보다 객관적으로 보고,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을 깊이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진짜 의미가 있고 재미있었던 것이 무엇이었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돌아보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중요한 것은 시설이 잘된 회의실에서 하는 대규모 회의도, 큰 예산이 들어가는 사업도 아니더군요. 의견이 맞는 사람들과 가치 있는 성과를 하나하나 이뤄간 것이었습니다. 인생 2막은 일의 규모나 외형보다는 삶의 질에 무게중심을 두고 싶습니다. 진정한 삶의 성과는 ‘어디까지 올라갔나’보다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을 했는가’에 있지 않겠습니까.” 점심에 만나 시작된 인터뷰가 끝났을 때는 어느덧 땅거미가 지는 저녁시간이었다. 귀갓길, 저 멀리 있는 입간판 글씨가 선명하게 보이고, 코앞의 버스정류장 노선안내 글씨가 희미하게 보이면서 읽히지 않았다. 요즘 부쩍 심해진 원시(遠視)의 증상이었다. 예전이라면 ‘노안(老眼)’의 시그널로 심란했을 텐데 문득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이듦이란 가까이 보기보다 멀리 보기의 장점, 이점이 있는 것 아니겠는가.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는 한 발짝 떨어져 거리두기, 멀리 보기를 할 때 보다 더 잘 보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 2017-03-02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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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지금은 라디오 시대> DJ, 그리고 <최유라쇼>의 쇼호스트 최유라의 인생 후반전은 지금이 최고의 순간
- 롯데홈쇼핑의 인기 프로그램 를 시작하기 위해 현장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최유라(51)의 모습은 전문 CEO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그녀를 MBC 표준FM 의 DJ로만 기억하는 사람은 그녀의 절반만을 알고 있는 셈이다. 그녀가 진행하는 는 2009년에 시작해 올해 무려 8년 차를 맞이하고 있는 독보적인 홈쇼핑 프로그램이다. 가 세운 매진과 완판의 기록은 최유라를 명품 비즈니스 업계의 블루칩으로 각인시켰다.그녀가 말하는 쇼호스트로서의 삶 그리고 인생 후반전을 들어본다. “저는 살면서 홈쇼핑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직접 만지고 느껴보고 사는 것이 재미가 있거든요. 어떻게 남의 말을 듣고 사느냐 하는 생각이 있었죠. 그리고 그걸 파는 사람이 물건을 얼마나 알아서 저렇게 말할 수 있는가 싶었어요. 그래서 아예 안 봤죠.” 현재 홈쇼핑에서 가장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는 독보적인 홈쇼핑 프로그램 의 쇼호스트이자 를 이끌고 있는 베테랑 라디오 DJ로 모르는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운 최유라가 하는 말이다. 홈쇼핑에 전혀 관심도 없었기에, 그녀가 홈쇼핑 쇼호스트가 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쇼호스트, 결정까지 1년이 걸리다 “홈쇼핑 회사들이 저한테 제안을 해왔어요. 결정하는 데 1년이 걸렸죠. 이들이 제 요구사항을 결정하는 데 8개월 걸렸어요. 제 요구사항은 ‘내가 쓰는 것, 먹는 것, 우리 집에 있는 것부터 하자. 그럼 하겠다’였어요.” 그녀는 “내가 쇼호스트도 아닌데 직접 써보지 않은 걸 어떻게 팔아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말에 회사들은 매우 당혹스러워했다. 그러나 그녀의 입장은 단호했다. “지르듯 한 말이었기 때문에 요구사항을 보낸 후에는 잊고 있었어요. ‘그게 될까?’ 싶은 마음도 있었죠. 그런데 받아들이지 않으면 할 필요가 없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좀 답답하게 사는 사람이라…. 굳이 돈벌이하려는 거면 방송에서 벌면 되지 싶었고.” 당시 그녀의 제안을 가장 심사숙고한 회사는 롯데홈쇼핑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계약이 체결되고, 최유라는 홈쇼핑 무대에 서게 된다. 그게 벌써 7년 전 이야기다. “2년 차, 3년 차까지는 참 힘들었어요. 일단 업체들의 검증도 필요했고, 업체들에서는 ‘저희는 아직 홈쇼핑 계획 없습니다’라고 하고. 특히 외국 업체들은 명품 홈쇼핑 개념을 모르더군요. 독일도 일본도 마찬가지였죠. 저가 물건들의 판매를 홈쇼핑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홈쇼핑의 위력은 시간이 흐르면서 꾸준하게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나갔고, 마침내 폭탄이 터졌다. 최유라가 쇼호스트를 맡은 제품들 중 명품 가전제품을 만드는 다이슨의 제품들이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연속 매진을 기록한 것이다. “직접 영국 다이슨 본사에 가서 확인하고 공장도 보면서 공을 많이 들였어요. 신제품을 방송하면서 대박을 쳤죠. 다이슨을 수입하는 수입사가 깜짝 놀랐어요. 그러면서 다이슨의 모든 신상품은 백화점과 최유라에게만 준다는 방침을 세웠죠.” 마담 초이, 인생이 바뀌다 최유라의 인생도 그때를 기점으로 변했다. “그때부터 계속 해외에 나가게 됐어요. 매해 2월에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암비안테 박람회가 열려요. 세계의 주방 가전 명품이 모이는 세계 최고의 박람회죠. 물건 판매는 안 하고 계약만 체결되는 자리예요. 그러다 보니 각 업체 CEO들과 친분도 쌓게 됐어요. 참 신기한 일이죠.” 그녀는 초청을 받아 암비안테 박람회 휘슬러 부스에서 라이브 요리쇼를 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요리를 소개하면서도 휘슬러의 우수성을 선보이는 일석이조의 자리다. 이제는 박람회에 가면 ‘마담 초이’ 안 오냐며 그녀를 찾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그녀의 인스타그램에는 박람회와 비즈니스 업계를 통해 친해진 친구들로 가득하다. “제가 정말 꿈에 그리던, 이건 이뤄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런 사람이 돼버렸어요.” 그녀가 확고한 자부심을 갖고 있음은 인터뷰 도중에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는 단순한 쇼호스트가 아니라 자신이 데리고 있는 스태프들과 함께 기획에서부터 디렉팅까지 전부 컨트롤하고 있었다. 인터뷰 도중에도 스태프들에게 꼼꼼히 지시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프로페셔널한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자신답지 않은 것’을 거부하는 여자 최유라는 마흔다섯 살 때부터 은퇴를 준비했다고 한다. “남편에게 말했어요. 은퇴를 할 때는 신중히, 오랜 시간을 두고 놓치는 거 없이 차근차근 마무리하고 싶다고. 그래서 은퇴에 걸리는 시간을 10년으로 잡자고.” 그녀는 예순 살이 되기 전에 뭔가를 이뤄놓고, 예순 살을 전후로 앞뒤 10년을 자신이 ‘키운 아이들’ 모습을 보면서 쉬고 싶었다. 남편은 좋다고 승낙했고, 그때부터 최유라의 인생 후반전은 시작된 셈이다. 그때 마침 홈쇼핑에서 제안이 들어온 것은 운명적인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방송 출연, MC 섭외도 많이 와요. 그런데 제가 재미가 없어요. 30대라면 할 수도 있겠는데 은퇴 준비를 하면서 방송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거죠. 너무 소모적이기 때문이에요. 감각적인 재미와 과장된 그 무엇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자리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생각해보니 지금 하는 라디오와 홈쇼핑의 와 역행하는 거예요.” 그녀는 자신의 신념과 맞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뒤에서 욕도 많이 들었다고 한다. “저건 뭐 혼자 잘났다고 잘난 척하고…. ‘아니, 를 왜 안 해? 웃기다 이거지?’ 이런 얘기도 듣고. 그런데 저는 정말 할 얘기가 없어서 안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따지는 사람도 있었어요. ‘웃기고 있네, 네가 왜 할 얘기가 없어? 너같이 말 잘하는 애가.’” 그녀는 정말 할 얘기가 없어서 나가지 못한다. 대부분의 방송 프로그램, 특히 가족 이야기가 주가 되는 토크형 프로그램은 아이들이 말썽도 부리고 가출도 하는 등 갈등이 있어야 시청자들이 재밌다. 그런데 최유라의 아이들은 너무 ‘평범하게’ 자랐다. 아침 먹고 학교 가고 돌아오는 일상의 반복. 그러니 방송에서 원하는 ‘에피소드’가 없는 게 당연하다. “다 상술인 줄 알았는데 믿음이 간다”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는 최유라의 성격은 쇼호스트 일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이 쓰는 물건만을 소개한다. 그래서 소위 ‘지르는’ 식의 제품소개를 질색한다. 그녀가 생방송 중에 실제로 요리를 하는 것은 꼭 필요한 사람만 사도록 하기 위함이란다. 방송 진행 중에 단점까지 다 말해버릴 정도로 그녀는 정직하다. “솔직히 홈쇼핑의 모든 용어가 불편해요. ‘추가 구성’이라는 말도 어떻게 보면 미끼죠. 살 것도 아닌데 사게끔 만드니까. 그래서 ‘추가 구성이라고 하지 말고 선물이라고 하자’ 했어요. 그런데 선물이라는 표현이 심의에 걸리더군요. 너무나 걸리는 게 많아(웃음). 결국 부속이 아니라 동급의 명품으로 함께 줄 수 없으면 본 제품만 판매하고 가격을 낮추자는 쪽으로 정리를 했죠.” 그녀의 성공적인 도전은 소비자들의 반응으로 확인되고 있다. “중심을 잡아주는 게 정말 중요해요. 사람들은 다 느껴요. 내가 잘난 척을 하는지 말로만 어떻게 하려는 건지. 그래서 명확하게 해야 해요. 어떤 분이 문자를 보낸 적이 있어요. ‘홈쇼핑은 다 상술인 줄 알았는데 믿음이 간다’고. 그래서 저는 모든 의견을 받을 수 있는 SNS를 개방했어요. 물건 예고편, 개인적인 얘기까지 알려주는 공간을 만든 거죠.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쓰는 사람들의 의견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나는 정직으로 승부한다’고 말하는 그녀는 기업에서 봉급을 받는 게 아니라 롯데홈쇼핑에서 월급을 받고 있다. 그래서 기업에 ‘물건만 잘 만들라’고 말할 수 있다. 물건에 하자가 있으면 방송에 올라오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다. “어떤 때는 포장이 안 좋아 방송을 그만둔 적도 있어요. 회사가 고맙긴 해요. 그런 내 만행을 다 받아주니까. 그러잖아요, 고객을 만나는 건데, 부실하면 말이 안 되죠.” 내 이름을 걸고 하는 ‘토크쇼’ 좋은 물건은 소통의 매개체이며 그걸 잘 이용하고 싶다는 최유라는 혼자 해도 어색하지 않은 토크쇼를 할 수 있는 게 행운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최유라는 지금 자신의 이름을 내건 토크쇼를 하고 있는 셈이다. 소위 MC들이 가지는 꿈, 자신의 이름을 내건 토크쇼를 하고 싶다는 꿈을 그녀는 이미 이루고 있다. 그녀는 휘슬러를 판매하기 위해 쇼를 시작할 때, 그날의 시사와 사회, 가사에 대한 내용으로 오프닝을 한다. 스토리가 있는 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자신의 쇼를 대하는 진정성의 증거다. 그리고 그 진정성은 자신이 판매하려는 제품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물건을 팔 때 그 물건을 왜 써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잘 사용하는 것인지도 알려줘야 소비자들의 마음이 움직이겠다 생각했죠. 그런 촘촘한 배려가 소비심리가 얼어붙은 요즘에도 계속 매진행렬을 만들어내는 이유라고 봐요.” 이제 51세. 그녀가 말한 예순 살 이전 10년이라는 인생 후반전의 초반이다. “작년은 건강과 환경이 캐치프레이즈였어요. ‘좋은 명품은 환경적으로 우수한 것’이라는 생각에서 실행했죠. 그럼 2017년은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가 어떤 캐치프레이즈를 제시해야 할까? 스태프들에게 물으니 다들 거창하게 생각하더군요. 저는 올해 ‘우리의 기본 밥상을 바꾸는 것’이 목표예요. 특히 설탕, 소금에 대한 것들을 바꿀 거예요. 설탕은 참 백해무익하죠. 그런데 안 들어가면 안 되는 재료예요. 바로 그 부분에 대한 답을 드리려고 해요.” 스쳐가더라도 기억에 남는 사람 되고파 “요즘이 가장 좋아요. 우리 부부는 살면서 더 좋아지는 중이에요. 서로가 서로에게 느꼈던 아픔과 상처들이 있지만, 지금은 편안해요. 가감 없이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거든요. 젊었을 때 저 사람 없이 못 살겠다는 생각 해본 적 없는데 이제는 저 사람과 끝까지 살 수 있다는 게 행복해요.” 최유라는 아이들에게 ‘내가 이렇게 너희들을 위했는데’ 하는 기대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아이들과 인생에 대한 얘기를 나눌 수 있게 됐다. 이제 그 나이에 이르렀음이 행복하고 요즘 그 행복을 온전히 누리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언뜻언뜻 스치는 기억들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고 말한다. “사정이 각각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위로를 준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좋은 연예인, 괜찮은 사람, 그렇게 스쳐가더라도 남는 사람.” 그녀의 소망을 듣고 있자니 마치 라디오를 듣는 듯 편안했다. 그녀의 아날로그적 매력이 훅 하고 밀려왔다. ‘마음’, ‘진정성’, ‘기준’이라는 단어들과 아주 잘 어울리는 사람.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참 드문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최유라가 만들어갈 인생 후반전이 기대되는 이유다.
- 2017-01-31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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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회가 만난 CEO 스토리] 인생 3막의 장밋빛 인생, 이길원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명예이사장
- 나이 듦은 원숙일까, 낡음일까. 누군가에겐 연륜으로 작용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고집불통의 외통수를 만들기도 한다. ‘불로초’를 찾아 헤매는 ‘영원한 젊음에 대한 집착’도 안쓰럽다. 또 ‘너희는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다’로 나이를 계급장인 양 밀어붙이며 유세하는 것도 볼썽사납다. 여기 밥 잘 사고 젊은이들과 무람없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지덕체의 균형을 이루며 사는 진정한 ‘어른’이 있다. 바로 이길원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명예이사장이다. 영원한 현역으로 산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글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장 정보화 사회의 키워드인 사이버는 그리스어 ‘키베르니테스(kybernetes)’에서 유래했으며 ‘키’를 잡고 있음을 의미한다. 원로가 젊은이와 다른 것은 인생에서 ‘가상의’ 키를 잡고 저어갈 줄 아는 능력이 있다는 점이다. 이길원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이사장(72)을 이 코너 인터뷰 대상자로 섭외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늘 젊은 친구가 모여들고, 일상을 놓지도 않고 꽉 움켜쥐지도 않은 채 여유롭게 ‘키를 제대로 잡고’ 지덕체의 균형을 이루며 사는 ‘어른’이라 생각해서였다. 처음 인터뷰 섭외를 청했을 때, 그는 눈웃음을 지으며 “90까지는 활동해야 하는데 인생 은퇴가 어디 있느냐”며 “나는 영원한 현역이다. 단지 노는 물이 달라졌을 뿐이다”라고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이 있지요. 저는 패러다임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박수칠 때 새로운 것을 시작하라는 것으로요. 옛날에는 인생을 2막으로 나누었지요. 30세까지의 준비기와 60세까지의 활동기로 양분했습니다. 이제는 90세까지 사는 세상. 저는 인생을 3막으로 구분합니다. 태어나서 20대 후반까지가 준비기, 그 이후부터 60대까지가 활동기 그리고 90대까지가 서드 에이지(third age)입니다. 서드 에이지 시기에도 마음먹기에 따라 하고 싶은 것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이길원 이사장은 장년기에는 성질이 불같아 아내와 티격태격 싸움도 자주 하고 밖으로 나돌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이가 드니 역시 배우자뿐이라는 생각이 든단다. 서로 등 긁어주는 배우자가 최고란 마음이 절로 들면서 부부금실도 좋아졌다고 털어놓는다. “건강이 최고로 중요하다”는 그는 아내에게 “아프면 범죄다. 무슨 짓을 해도 좋으니 아프지만 말라”며 오후 4시엔 무슨 일이 있어도 손잡고 꼭 헬스클럽엘 간다. 아내 역시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절정기”라며 행복해한단다. 자녀들도 자립했고, 이제는 스스로의 삶에서 뭔가를 이뤄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없어 욕망을 내려놓으니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자유로워진다는 설명이었다. 회장님의 본업 내지 생업은 사업이십니다. 국제PEN클럽 이사장 등 활동을 활발히 하시면서도 시를 500편, 시집은 8권이나 발간하셨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시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만…. “제 본업은 시를 쓰는 일이고 생업이 사업이지요. 그런데 사업가와 시인은 모순된 것이 아닙니다. 사업이 인간의 마음을 얻는 것이라면, 시 쓰기는 인간을 탐구하는 작업입니다. 서로 통합니다. 제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에 드는 시 한 편을 쓰고 나면 짜릿한 쾌감을 느낀답니다. 시를 쓰면 사물이나 사람을 폭넓은 시각으로 이해하고 공감하게 됩니다. 그런 것이 사업에도 도움이 됐습니다.” 국제PEN클럽 회장을 역임하셨지만 본래 특수인쇄업체인 스티커 회사 ‘태평양그랜드’를 창업, 38년간 운영해오셨지요. 오너 경영자들은 한결같이 스스로 현직에서 물러나기 쉽지 않다는 말씀을 하시던데요. “내가 죽고 난 후 회사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보았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결론이 간단하더군요. 책상을 빼는 것이 회사 간판을 내리는 것보다 낫다. 나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성공한 기업이란 나 아니면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나 없이도 잘 굴러가는 기업이라고 다시 정의를 내려봤어요. 저는 단계적으로 후계자 교육을 시켰습니다. 제 시대 땐 경영자 혼자 장군 멍군 다 일을 했는데, 아들에게 일을 시켜보니 팀워크로, 시스템으로 일을 처리해 나보다 더 잘해낼 것 같더라고요. 내가 며칠 걸려 조사한 일도 반나절에 해내는 걸 보고 물려줘도 되겠구나 싶었습니다.” 경영 승계 수업을 할 경우 아버지의 ‘질문’이 ‘심문’으로 변해 갈등을 빚는 경우도 종종 있던데요. “묻고 기다려준 것이 내 나름의 비결입니다. 일찍부터 ‘너라면 이 경우 어떻게 하겠느냐? 상대라면 어떻게 할 것 같으냐?’라는 질문을 습관적으로 했어요. 직원들에게나 고객들에게나 경영자로서 얼굴이 서려면 물려받아 얻은 게 아닌 나름의 업적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게 부담을 준 말의 전부일 겁니다. 실패를 했을 때도 ‘네가 그러면 그렇지’ 하며 못미덥다고 전권회수를 하기보다는 ‘내가 방풍벽으로 있을 때 실수를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실수도 경영 수업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들들과는 편하게 술친구도 하지요.” 삼성 이병철 회장―이건희 회장―이재용 부회장은 3대에 걸쳐 사업 교훈으로 ‘경청’을 물려주었다고 하는데요. 자제분들에게 강조하신 것은 무엇인지요. “한마디로 신뢰입니다. ‘영업이란 제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너 자신을 파는 것이다, 능력이 야 웬만한 사람들이 다 갖고 있지만 호감을 얻거나 신뢰를 받는 사람은 흔치 않다, 사업의 기초는 상대방에게 신뢰를 주는 것이다, 신뢰하지 않는 사람과 누가 사업 파트너가 되겠느냐, 사업의 핵심은 호감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임기응변으로 얼렁뚱땅 넘기려 하지 말고 솔직해져라, 한 가지 거짓말을 덮기 위해서 백 가지 거짓말을 하게 되는 법이다’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했지요. 사업을 한 지 10년쯤 되자, 아버지 말이 무슨 말인지 ‘머리’가 아닌 ‘몸’으로 알겠다고 하더군요.” 2선으로 후퇴해 이른바 ‘뒷방 노인’이 되면 심리적으로 외롭다고들 하십니다. 한 퇴직 오너분은 실무 경영에 참여하고 싶어도 ‘(현직 사장인) 아들이 부르기 전엔 절대 집무실에 들어가지 않는다며 피눈물 나는 맹세와 마음수련을 거듭했다고 합니다. “허허, 저는 할 일이 많아서인지 더 즐겁던데요. 일주일에 한두 번 회사에 나가면 직원들이 모두 좋아해요. 제가 수전노처럼 굴지 않기 때문이에요. 경영 승계를 한 후 부자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아버지가 손을 놓지 못하고 간섭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은 오히려 아들이 ‘너무 회사에 무관심한 것 아니냐’고 제게 불평할 정도입니다. 저는 문단활동, 국제PEN클럽 활동, 망명 북한작가 돕기, 시창작 강의 등 할 일이 많습니다. 돈 문제도 내가 버는 만큼이 내 돈이 아니라, 내가 쓰는 만큼만이 내 돈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 맞는 사람들과 밥 먹고 술 마실 때 쓸 수 있을 정도면 되지, 뭘 더 바라겠습니까.” 흔히 나이든 분들은 젊은이들과 어울리고 싶은데, 그들이 어렵다며 피한다고 합니다. 젊은이들과 잘 어울리시는 비결이라도 있으신지요. “나이를 먹으면 남을 통해 행복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가 돼야 합니다. 스스로 행복해지는 방법도 찾아야 하고, 사람들에게 행복을 나눠주기도 해야 합니다. 역설적이지만 외로움을 즐길 줄 알아야 사교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즐거워야 남도 즐겁지요. 안 그러면 주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거나 피곤하게 만듭니다. 나이 많다고 거들먹거리며 대우나 받으려 하고 폼만 잡으면 꼰대로 소외당하지요.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저는 모임에 나가면 대우받으려 하기보다는 사람들과 잘 적응할 방법을 찾습니다. 나이 든 선배로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려고 하면 오히려 ‘식욕, 성욕 다 당신들 못지않다. 당신들보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더 젊다’고 농담을 하며 벽을 허물곤 한답니다.” 밥 잘 사고 젊은이들과 무람없이 농담을 주고받는다고 해서 그를 ‘세상모르는 팔자 좋은 금수저 출신 어르신’이라고 보면 오산이다. 이길원 이사장은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이다. 사업이 잘나갈 때는 있는 약속도 취소하면서 만나던 사람들이 사업이 어려워지자 없는 약속도 만들어 핑계를 대며 피했다. 이런 인간의 온갖 행태를 다 경험하고 목격했기에 그는 더 단단해질 수 있었다.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을 보며, 조변석개의 인심을 겪으며, ‘사람은 누구나 제 입에 밥알 털어넣기 바쁘다’는 진리를 뼈저리게 터득했단다. 사람들에게 기대지 않을수록 외로움을 덜 탄다. ‘자립심=사교심’이 그의 지론이다. 역설적이지만, 경제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혼자서 버틸 줄 아는 내(耐) 고독력이 사교력과 모임적응력의 바탕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플루트를 새로 배우신다고 들었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지요?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다시 태어나면 음악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지요.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과학자가 되라고 강권하셔서 화학과로 진로를 정했는데, 막상 가보니 적성에 안 맞지 뭡니까. 또 사업을 할 때는 바빠서 악기를 배울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때 풀지 못한 원을 고희가 지난 지금 이루고 있는 것이지요. 지금 나이에 뭘 새로운 걸 배우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얼마나 즐거운지 모릅니다. 날씬한 플루트 몸매는 내 손놀림에 따라 음계를 달리합니다. 낮은 음으로 속삭이다가 높은 비음으로 유혹하면 저절로 감성에 젖게 되지요. 게다가 휴대도 간편해 노후에 배울 악기로 딱 안성맞춤이라 생각합니다.” 이길원 이사장을 만나는 날 겨울바람이 매섭게 불어댔는데 그날도 플루트 레슨을 받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은 초보 수준이지만 프로 수준에 이를 때까지 꾸준히 연습할 생각”이라며 “손자들 앞에서 데뷔 음악회를 여는 게 향후 목표”라고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인생 3막, 서드 에이지에 대해 쓴 시가 있는지 물어보자 그는 노년의 관조와 여유를 다룬 자작시를 나직하게 암송하기 시작했다. 때론 강한 목소리로, 때론 부드러운 목소리로 시를 읽어나가는 그에게서 거친 파도와 싸우는 손마디 굵은 어부와 열정적으로 연기를 펼치는 배우의 모습이 느껴졌다. 낭만가객, 음유시인의 면모를 잃지 않고 고독하게 인생의 파도를 헤쳐 온 그에게 커튼콜의 힘찬 갈채를 보내고 싶어졌다. “브라보! 브라비시모, 유어 라이프!” 마침표 연습 2 이길원 내 연기(演技)가 비록 마음에 들지 않았더라도 아이야 커튼콜하며 무대 비우는 배우에 갈채 보내듯 박수를 쳐라. 최선을 다한 나의 연기다 막이 내린다고 우는 사람 있더냐. 촘촘히 등 돌려 무대 내려오는 나는 박수를 받고 싶다. 내 서던 무대에 누군가 또 열정을 보일 것 이제는 너의 차례 신(神)이 누구에게나 한 번 주는 배역 비록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해라 산다는 건 주어진 역할에 따르는 한 편의 연극 같은 것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 2017-01-23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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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EO&BIZ] ‘기능성 컴포트슈즈 멀티숍’ 릴라릴라 이재훈 대표 "기능성 신발을 넘어 시니어 케어까지 나아가고 싶다"
- 기능성 신발은 어느 틈엔가 우리 일상의 익숙한 풍경이 되어가고 있다. 신발을 단순한 멋내기용이 아니라 건강을 지키는 중요한 열쇠로 여기게 된 덕분이다. 기능성 신발을 다루는 멀티숍 릴라릴라는 현재 전국 32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는 전문 체인으로서 그 존재감을 높이고 있는 중이다. 이재훈 대표를 만나 기능성 신발의 미래와 포부를 들어봤다. 릴라릴라의 이재훈 대표는 SK종합상사에서 의류 수출 일을 하면서 자신의 적성이 유통 쪽에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확신이 들어 공부를 하다 보니 미국에서 글로벌 패션 매니지먼트까지 익히게 됐다. 그 과정에서 연구를 거듭해 마침내 ‘기능성 컴포트슈즈 멀티숍’이라는, 한국에 없던 사업 모델까지 발굴해냈다. “릴라는 휴식을 뜻하는 릴랙세이션(relaxation)에서 온 말입니다. 해외에서도 편안함을 강점으로 하는 제품에 들어가는 말이기도 해요. 기능성 신발을 파는 멀티숍이니 편안하다는 느낌을 쉽게 주고 싶어서 선택했습니다.” 이제 7년 차. 이재훈 대표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본다. “대형화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현재 26개 브랜드를 운용하고 있는데 지금보다는 네 배 정도 더 브랜드 런칭을 하는 것이 1단계 목표예요. 그리고 기능성 신발을 찾으러 전 세계를 다니다 보니 기능화 시장이 시니어 케어로 이어지는 걸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발 근육이 사라진 부분을 지지해 보행을 도와주는 로봇 같은 제품들도 나오고 있어요. 그런 제품들을 렌털하는 것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의료 비즈니스로 가는 게 2단계 목표죠.” 건강을 최우선으로 편안하고 멋진 제품을 선택 스포츠의학 비즈니스로의 확장도 생각하고 있는 만큼, 이 대표가 제품을 고를 때 중시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건강’이다. 그리고 그다음이 ‘편안하게’, 마직막이 ‘멋지게’라고 밝혔다. 그는 이러한 기준에 맞춰 제품 개발이 잘된 신발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2017년의 초점도 가장 핵심은 발 근육 부분입니다. 근육이 없으면 골격이 틀어지고 작은 골절이나 내부적 손상에도 통증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근육이 유실되지 않도록 잘 걸을 수 있는 제품을 소개하는 것이 목표죠.” 릴라릴라의 판매 철학에는 고객을 위한 정확한 컨설팅에도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 대표는 기능성 신발의 특성상 편안한 부분에 대한 내용을 고객에게 잘 전달하기 위한 풋컨설팅 매니저 서비스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좋은 상품을 개발하거나 찾아내는 것은 본사와 제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죠. 그리고 운영팀은 고객의 상태를 잘 캐치하여 맞는 제품을 권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객이 건강하게 걸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중요해요. 그래서 4단계 교육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시니어 마음은 시니어가 되어봐야 알 수 있는 법이다. 그래서인지 릴라릴라의 매장의 풋컨설턴트 매니저들의 전반적인 연령대는 높은 편이다. 이 대표는 매니저들이 주로 50대 중반 이상이며 자신도 그 연령대의 직원을 선호한다고 밝혔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릴라릴라는 고용 면에서도 사회적인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셈이다. “서비스 교육은 교육을 받는 본인이 직접 체험하고 공감할 때 훨씬 더 효과가 좋습니다. 기능성 신발에 대해 관심이 높은 연령대에서는 자연스럽게 그러한 판매 접점 교육이 가능합니다.” 고객의 건강을 밀도 높게 파악하여 셀렉션해야 기능성 신발 시장은 독일과 미국, 일본에서 그 저변이 크게 형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 대표는 그쪽에서 나오는 라인업과 프로그램을 적용하고 있기에 릴리릴라가 그보다 못하지 않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저도 젊었을 때는 신발을 패션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발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생각이 바뀌었어요. 지금은 건강한 보행을 위한 가장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발에 트러블이 많이 일어날 수 있는 제품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신고 다닙니다. 훨씬 더 건강해질 수 있는 제품들이 많이 있는데 아쉽습니다.” 사실 그의 말처럼 불편한데 마치 기능성 신발인 것마냥 얘기되는 제품들이 많다. 그런 제품들이 많다는 것은 대안도 그만큼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쪽 시장으로 당연히 고객들이 올 수밖에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동안은 대안이 없어서 불편해도 그런 신발들을 신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사업을 할수록 단순한 소개보다 고객의 건강을 꼼꼼하게 살펴 셀렉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대안이 있는데, 잘못된 부분을 잘 설명해드려야 하는데 설명을 잘 못할 경우 아쉽더군요. 그리고 저희가 지금 가진 제품들로 고객의 이슈를 커버할 수 없을 때도 안타깝습니다.” 보다 다양한 기능성 신발 추구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60대에서 90대에 속하는 시니어들의 발 건강에 관한 연구들이 폭넓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은 많은 이들도 공감하고 있다. 현재 이 역할을 릴라릴라가 선도적으로 해나가고 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독일이나 일본은 신체 움직임에 맞는 스포츠화의 발달이 많이 돼서 스포츠화와 제화가 합쳐진 제품들이 늘고 있습니다. 한국은 유수의 몇몇 체육대학교에서 일정 부분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걸로 아는데 아직 활성화는 안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구상 중입니다. 독일과 일본 사례도 계속 알아보고 있어요. 확실하게 세팅이 되면 국내에서도 이 부분을 연구하는 분들과 함께 작업을 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난 7년의 작은 성공들을 주춧돌로 삼아 100년을 내다보고 고령화 시대에 편하고 건강하게 신을 수 있는 신발로 승부하겠다는 그의 바람이 순풍에 돛 단 듯이 힘차게 나아가길 응원한다. 이재훈 대표는 ‘릴라릴라’ 브랜드를 밀어주는 고객들에 대한 보답으로 상품에 내재한 가치를 높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발업을 하는 부친의 사업을 보며 배운것이 신발의 핵심은 편안함이라 말했다.
- 2017-01-16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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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회가 만난 CEO 스토리] 박시호 행복경영연구소 이사장 "은퇴, 충격이 아닌 감격으로 맞이해라"
- 은퇴 이후 인생 2막을 삶의 황금기로 만들 것인가, 황혼기로 만들 것인가. 황혼기와 황금기를 가르는 것은 무엇인가. ‘충분히 쓸 만큼 모아놓고 쟁여놓은’ 돈일까? 그보다 중요하고도 필요한 것은 인생을 재설계할 수 있는 은퇴 멘탈 갑, 즉 새로운 은퇴 마인드다. 과거 경력, 직장, 직책의 아우라를 들어내고, 자기의 진짜 정체성을 떳떳하게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외칠 수 있다. 100세 시대를 앞둔 요즘, 은퇴 이후의 시기는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인생의 3분의 1을 살아내야 하는 인생의 터닝포인트다. 그래서 우리는 은퇴를 충격이 아닌 감격으로 맞고 싶다. 끌끌 혀를 차며 밸이 배배 꼬인 채 훈수나 푼수를 떠는 뒷방 노인이 아닌 적극 참여하는 현장의 선수로 사는 롤모델 인생 선배를 만나고 싶다. 퇴직 5년 차가 아니라 진짜 좋아하는 일을 선택한 ‘취업 5년 차’라는 박시호(63) 행복경영연구소 이사장을 만났다. 인디언 핑크색 니트 상의에 옅은 브라운색 패딩 점퍼, 흰 바지 그리고 빨간색 운동화에 무스로 바짝 세운 밤톨머리 헤어스타일을 하고 나타난 그는 과거 CEO의 물이 쏙 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그에게선 인터뷰 약속 장소인 ‘신촌’의 청춘물결에서 한 치도 뒤처지지 않는 것을 넘어 자유인의 바람마저 느껴졌다. 2003년부터 행복과 관련한 앤솔러지를 사진에 담아 매일 아침 이메일로 배달하던 일은 이제 취미와 봉사에서 ‘주업’으로 승격됐다. 그 외 강연과 원고 쓰기, 사진 찍기 등등 요즘엔 여행기획가로서 행복을 오프(0ff)에서 실현하는 일에까지 관심사를 확장하고 있다. 그의 하루 24시간은 풍요롭다. 은퇴 괴담은 현실적으로 ‘밥’ 이야기로 시작하곤 합니다.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퇴직 가장의 현실을 표현한 단어 중에 ‘삼식이(집에서 삼시세끼를 먹는 가장)’란 호칭이 있는데요. 많은 퇴직 가장들이 “이러려고 지금까지 뼛골 빠지게 일했나”라며 피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감정계좌를 깡통계좌로 만들어놓고 만기일 됐다고 복리로 쳐서 가장 높게 대우해달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집밥만 우기지 말고 칼국수집이든 냉면집이든 같이 맛집 순례라도 해보세요. 찜질방 같이 가서 놀자고 해보세요. 절로 삼식님이 될 겁니다(웃음). 가장이 건강해야 집안을 끌고 간다고 하는데 마찬가지로 부인이 건강하고 행복해야 집안이 유지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남편 혼자 행복하고 즐거우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퇴직 이후 집에서 대우받는 것은 남편 하기 나름이지요.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게 부부입니다.” 그는 “체력관리한다며 주중, 주말 가리지 않고 매일 등산 가던 친구가 있었다”며 부인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석에 누운 후 그 친구가 “부인이 건강할 때 산에 같이 갈걸, 왜 나 혼자 갔을까” 하며 땅을 치고 후회하더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행복은 거창하고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작은 데, 평범한 일상에, 함께 나누는 데 있다”고 말하는 그는 여러 일정 중에서 부인과 맛집 순례 후 하는 공원산책이 그날의 하이라이트라고 덧붙였다. 신혼 때처럼 전기가 찌르르 통하지는 않지만 40년 이상 살아온 인생 동지와 함께하는 ‘침묵의 공유’야말로 가장 든든한 의지가 된다는 이야기였다. 현직에 계실 때보다 더 활기차고 멋져 보이십니다. 부부 금실에서 비롯된 에너지 말고 비결이 있습니까. “현직에 있을 때보다 몸무게를 10kg 정도 뺐어요. 회식이나 약속을 줄이고 운동을 하니 절로 빠지더군요. 제가 BMW족입니다. 버스(Bus)-지하철(Metro)-워킹(Walking),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많이 걷습니다. AMP 동기 부부동반 모임에 갔는데 집사람이 아무 정보 없이도 동기들 중 현직, 퇴직파를 족집게처럼 맞히더군요. 은퇴하면 현직 때의 아우라가 사라져 갈기털 빠진 사자처럼 되기 쉽습니다. 퇴직할수록 용모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합니다. 퇴직하니 공식적 일 없다고 후줄근하게 입고 다니거나 등산복을 평상복으로 입고 다니면 안 됩니다. 오히려 더 산뜻하게,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어야 해요. 뚝배기보다 장맛이 아니라 겉볼안이 더 맞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볼 때 이미지 판단이 6초 만에 끝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전엔 아우라가 우러났다면 이제는 만들어야 한다고나 할까요. 퇴직할수록 의관이 생명이란 게 제 지론입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탓하지 말고, 먼저 남이 알아주도록 갖춰 입을 필요가 있습니다.” 은퇴 준비에도 선행학습이 필요할까요? “일관된 인생 계획을 세워서 현직 시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의미 있는 은퇴의 삶을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선 공부를 해야 합니다.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합니다.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즐기기 위해서라도. 은퇴 이후의 공부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쫓기는 공부가 아닙니다. 자신이 즐길 수 있는 것, 좋아하는 것 뭐든 좋습니다. 사람들은 그동안 자신이 뛰어오던 트랙을 벗어나는 걸 두려워합니다. 그 두려움을 없애야 합니다. 등산도 높은 산을 오르려면 동네 산부터 오르며 준비하지 않습니까. 직장생활을 하면서 은퇴 후 뭘 하면 좋을까 늘 염두에 두고 그 일을 조금씩 준비해둬야 합니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준을 향해 공부하십시오. ‘지금 이 나이에…’ 또는 ‘시간이 없다’ 말하지만 그것은 모두 새로운 것을 배우기 싫어해서 하는 핑계일 뿐입니다. 취미든 기술이든 뭐든 배움은 운명까지도 바꿉니다. 공부를 하고 도전하다 보면 전문가 반열에 오르고, 그것이 새로운 세상의 지평을 열게 해줍니다.” 실제로 미국의 한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은퇴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적응하기 힘들었다고 대답한 은퇴자가 41%나 되고, 대부분 단조롭고 지겨운 일상과 목적 상실 및 지적 자극의 결여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은퇴에서 재정 설계 못지않게 필요한 것이 시간 설계, 즉 은퇴 후 동기 설계임을 보여주는 통계다. 행복이란 것이 요즘에야 흔한 담론입니다만. 행복편지를 시작한 2003년에는 요즘처럼 유행하는 화두가 아니었을 듯한데요. “저도 욕심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정치도 해보고 싶었고, 돈도 많이 벌어보고 싶었지요. 그런데 특별조사부장을 하며 정치인, 재벌 총수들의 영고성쇠한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습니다. 자기가 지은 고충 건물에서 피고인으로 수사를 받아야 하는 기업 총수를 보며 권력, 금력의 무상함을 보았습니다. 또 부도가 나 자살을 한 금융인,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표변하는 인심의 허망함을 한꺼번에 압축해봤어요. 권력도 금력도 아닌 세상에서 진정으로 변치 않고 행복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봤지요.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생각에 미쳤습니다. 저의 어렸을 때부터의 꿈인 그림그리기를 시작했지요. 그러다 점차 재능의 한계를 느껴 사진으로 바꾸게 된 것이고요.” 그는 사진을 공부하면서 행복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쳇바퀴 같은 삶을 바쁘게 살던 그가 ‘저녁이 있는 삶, 주말이 있는 삶’을 애써 찾으며 여유를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번 주엔 이 꽃을 이런저런 각도에서 찍어봐야지” 하는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단다. 또 사진을 찍으면서부터는 ‘집에 꿀단지를 묻어놓은 것처럼’ 퇴근을 기다렸고, 주말 새벽마다 강남고속터미널에 가서 꽃을 사는 행복한 마음은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하단다. 지인들에게 꽃 사진 선물을 하고, 그들이 감사인사를 전해오고, 급기야 행복편지까지 쓰게 된 계기가 되었다. 지인 700명 정도를 엄선해 보내는 행복편지는 감동적인 내용으로 ‘작지만 강한’ 행복 공유의 플랫폼이 됐다. 직장 후배들에겐 멘토로 여전히 환영받는 ‘퇴직 상사’라는 말씀 들었습니다. 그 비결이 있습니까? 어떤 분은 퇴직하니 알던 사람들 중 절반은 모른 척하며 떨어져 나간다고 ‘동선하로(冬扇夏爐, 여름 난로와 겨울 부채라는 뜻으로 철에 맞지 않는 물건을 이르는 말)’의 신세를 한탄하기도 하시던데요. “하하. 저는 연락 안 해도, 거절당해도 고까워하지 않습니다. 또 조금도 불편하게 하지 않고요. 그러니 오히려 환영받네요. 잘해주면 고맙지만, 못 해주는 것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 고까운 마음이 전혀 안 생깁니다. 상대도 부담스러워하지 않으니 오히려 더 찾더라고요. 부하직원들이 초대하면 병권을 맡깁니다. 예컨대 동석할 사람을 상대에게 정하라고 선택권을 주는 겁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정해 만나자고 하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또 그 밥에 그 나물인 예전 사람들만 만나면 재미없는데 후배들이 새로운 사람 소개해주니 저도 좋지요. 폐쇄성을 나부터 없애야 합니다. 자기를 열고 세상에 맞추면 세상살이 편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자기를 낮추고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또 상대가 누구든 불편하지 않도록 마음을 더 내어 배려해주는 것이 존중받는 비결입니다.” 박 이사장께서는 퇴직 후 제일 먼저 할 일로 명함 만들기부터 권하신다면서요. “은퇴한 사람들이 모임에 나가면 제일 먼저 당황하는 게 명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명함이 없으면 몸을 꼬며 온갖 군말을 갖다 붙여요. ‘제가 회사를 그만둔 지 얼마 안 돼서요’ 등등. 스스로도 초라하고 서로 당황하기 쉬워요. 명함을 만들려고 구차한 자리 부탁하기도 하거든요. 당당한 명함은 당당한 자기정체성과 통합니다. 이제 과거의 후광은 벗어던지고 자기정체성을 드러내는 명함을 만드는 게 필요합니다. 하다못해 ○○를 연구하는 사람 ○○○라는 명함이면 어떻습니까. 말로 구구하게 설명하기보다는 자기정체성을 잘 드러내줄 수 있는 한 줄짜리 문장을 만들어보는 것입니다, 스스로 초라해질 필요 없습니다. 명함 주고받는 게 부담스럽고 부끄러워지면 대외활동은 끝나는 겁니다. 그만큼 중요해요. 아날로그 구세대에겐 직책과 직장이 필수이지만 젊은 디지털 세대는 그보다는 업, 좋아하는 일, 하고 있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사진이면 사진, 서예이면 서예, ‘이것에 대해선 나한테 물어봐. 내가 설명해줄 수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전문 분야가 있다면 더 좋고요.” 박시호 이사장의 명함엔 사진가, 행복경영연구소 이사장이라는 직함과 함께 연락처(전화번호와 이메일)가 간결하게 들어가 있다. 퇴직 후 부딪히게 되는 어려운 점 중엔 경조비 부담도 빠지지 않더군요. 국민연금 100만원 이상을 받는 사람들의 가계부에서 경조비 비중이 16%나 됩니다. 의료비보다 높은 비중입니다. “퇴직 상태에서 대소사가 한꺼번에 밀려들면 아무래도 부담감이 커질 수밖에 없는데요. 은퇴한 사람들의 고민이 ‘경조사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이지요. 체면과 얽히고설킨 과거의 인연 때문이지요. 저는 기분, 체면보다 기준을 분명히 합니다. 과거의 주고받은 인연보다 1년간의 교류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아이들 결혼 때의 방명록도 그 자리에서 없애버렸습니다. 1년 동안 만나지 않은 사람은 교류가 없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은 연락이 와도 경조사에 가지 않습니다. 정말 필요한 사람만 부르고, 성의만큼 성의를 표하자. 허례허식은 없애자는 게 제 주의랍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돈을 벌었지만 이제는 다르지 않습니까? 동창회 단체 공지에 올랐다고, 안 하면 욕먹는다고 찜찜해하면서 자주 보지도 않는 사람의 경조사까지 챙겨야 하는 것은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니 주위에서 욕을 먹기도 해요. 그러나 욕을 먹더라도 자신의 기준을 지켜나가는 맷집과 용기도 은퇴 멘탈 갑의 마인드 중 하나입니다.” 박시호 이사장은 은퇴지능개발의 핵심 키워드로 배움을 꼽았다. 기술이든 지식이든 뭐든 배우고, 남의 눈 때문에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거나 그 반대의 경우가 없도록 하는 것. 그는 “좋은 사람과 맛있는 것을 나눠 먹을 때 행복을 느낀다”며 이 모든 것을 합친 것이 여행이라고 했다. 앞으로 여행 프로그램도 꾸준히 운영할 계획이라고. 지난 경험보다 앞으로의 계획을 말할 때 그는 더 설레면서 반짝였다. 은퇴 이후 새로운 삶의 설계와 도전도 마찬가지다. 용기 있는 사람만이 구태의연함에서 벗어나 신세계에 도전할 수 있다. 마음속에서 불을 뿜는 두려움의 용을 처단하고…. 박시호 이사장이 말한 ‘배움’은 구태의연함을 처단하고, 마음속에서 불을 뿜는 용을 무찌르는 날카로운 무기가 될 것이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 2017-01-06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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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황보환 메트라이프 보험설계사, 트로트 가수 ‘하진필’로 데뷔
- 은퇴가 다가오는 나이가 되면 자연스럽게 제2의 인생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새로운 나로 살 수 있다는 등 제2의 인생에 대한 말도 많다. 하지만 그 달콤쌉싸름한 유혹에도 불구하고 막상 도전하려고 하면 어렵다. 무슨 일이든 첫 시작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베테랑 보험설계사가 트로트 가수로 데뷔했다. 자신감 하나로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낸 주인공은 황보환(黃寶煥·52) 메트라이프 보험설계사. 그는 얼마 전 트로트 가수 하진필이라는 이름으로 ‘난 당신 편이야’를 녹음했다. 보험설계사로서 남부러울 것 없는 경력을 가진 그가 트로트 가수라는 외도를 과감히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본명 황보환. 메트라이프의 베테랑 보험설계사로서 자신만의 탄탄한 영역을 갖고 있는 그는 최근 하진필이라는 이름을 달고 트로트 가수로 데뷔했다. 그는 스스로 멋을 낼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자신의 과감한 선택을 위한 준비를 나름 충실히 하고 있다. ‘행사’를 뛸 준비를 신경 써서 갖출 정도로 말이다. “트로트 가수로 데뷔한 기념으로 교회에서 바자회를 한다고 해서 가죽 재킷을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옷이 요새 패션과는 아주 동떨어져 있어요(웃음). 아는 사람들이 보더니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그런 걸 입냐고 타박하더군요. 하지만 그런 패션이 트로트 행사용으로는 어필할 수 있겠다 싶었죠.” 인연을 통해 이어진 트로트 가수로의 길 보험설계사가 갑자기 가수를 하겠다는 생각은 왜 하게 된 걸까? “10여 년 전부터는 CEO 위주로 보험설계를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워낙 노래하는 걸 좋아해서 CEO 과정에서 일 년 정도 성악을 배우게 됐어요. 거기서 작곡가 최왕국 교수님을 알게 됐는데 그분이 제게 가곡을 하나 선물해주셨습니다. ‘바람이 불어오면’이라는 노래였어요. 그 후 최 교수님이 이번에는 트로트 곡을 작곡했다고, 저에게 맞을 것 같다며 주시더군요. 그러니까 트로트 가수를 해야겠다고 특별히 마음을 먹었던 게 아니고 급작스럽게 이뤄진 거죠(웃음). 그런데 저도 이게 제2의 인생이 될 수 있겠구나 싶어 조금씩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하진필씨는 아직 트로트를 더 많이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데뷔를 위해 트로트 보컬 트레이닝도 받았지만 아직 성악 톤을 완전히 빼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음악과 함께했던 인생 하씨의 도전이 마냥 뜬금없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의 인생을 보면 음악과 떼려야 뗄 수가 없다. 그는 청소년 때부터 노래를 좋아했다고 한다. 학력고사 세대인 그는 옥상에 올라가 자주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그러고 나면 학업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싹 풀렸다고 한다. “제가 84학번인데 대학가요제를 나가서 1차 예선은 붙었지만 2차 예선에서 떨어졌어요. 갑작스럽게 출전 일주일 전에 후배 여대생을 소개받고 듀엣을 하게 됐죠. 300여 팀에서 50팀 뽑는데 통과가 되더라구요. 사실 너무 쉽게 통과한 거예요. 연습도 많이 안 했고. 그때 선배님이 작사 작곡을 해주셨는데, 사회운동을 많이 하던 때라서 가사가 사회 풍자적이었죠. 결국 본선에는 진출하지 못했지만 제게는 큰 추억이 됐습니다. 그때 대상을 유열씨가 탔어요. 이정석씨는 제 바로 앞에서 노래를 불렀어요. 제가 299번, 이정석씨가 298번이었죠.” 그는 또 모교인 연세대학교 100주년을 기념해 연세글리클럽이 조직됐을 때 창단 멤버로도 활동했다. 봉사로 노래를 하고 합창단원으로 행사를 뛰는 등 노래와 함께한 그의 삶은 지금까지 쭉 이어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음악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보험설계사로서의 삶은 어땠을까? “계속 억대 연봉이었죠. 보험 업계에서 19년 일하면 굉장히 오래한 겁니다. 저는 외국계 보험사에서 일한 1세대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나라에 외국계 보험사는 90년대 초반에 들어왔거든요.” 그는 한국타이어에서 신입임에도 불구하고 큰 거래처인 현대자동차를 6년 담당하며 9년동안 다니고 그후 푸르덴셜에 입사하여 영업을 하다 부지점장 업무를 맡으면서 8년을 다녔다. 당연히 사람 관리가 쉬울 리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럴 바에는 다시 영업을 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메트라이프로 옮긴지 12년 째다. 메트라이프에서는 중소기업 CEO 위주로 보험설계 업무를 맡고 있다. 한 달 만에 첫 트로트를 녹음하다 “최왕국 교수님과 통화하다 보니까 저를 위한 트로트 곡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장 보자 해서 다음 날 만났어요. 제목이 뭐냐고 물으니 ‘난 당신 편이야’래요. 그 제목이 마음에 확 와 닿았어요. 누구라도 끝까지 자기편이 돼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길 바라잖아요. 악보를 받아 가사를 보니 가사 내용도 너무 좋은 거예요. 멜로디도 너무 쉽고.” 확신이 들었다. 확신이 들자 트로트 가수를 해보자는 마음도 먹게 됐다. 그는 곧장 보컬 트레이너를 소개받아 트레이닝을 받고 불과 한 달 만에 노래 녹음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그런데 제가 기획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후원해주는 것도 아니고. 열악하죠(웃음). 그래서인지 믹싱 작업이 약간 잘못돼서 제 목소리가 작게 나왔어요. 조만간 수정할 예정입니다.” 트로트 가수로의 삶을 선언한 그에 대한 주변 반응은 다양하다. 의외라는 사람도 있고 ‘너에게 딱 맞는다’ 하는 사람도 있다. 두려움이 없을 리 없다. 그러나 어쨌든 시작된 일이다. 생활에도 변화가 생겼다. “가수로 데뷔했으니 앞으로 노래 부르는 게 경제적인 부분에도 도움이 되겠죠. 그러나 무엇보다 사람들이 제 노래를 듣고 마음이 편해지고 즐거우면 좋겠습니다. 가수 데뷔 전에는 동기들하고 노래 봉사도 다녔어요. 생각해보니 봉사 때는 묘하게 트로트를 많이 불렀네요. 그리고 저 자신도 나이가 들면서 트로트가 마음에 들더라고요. 친구들도 네가 하니까 잘 어울리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고요.” 그는 트로트를 배우게 되면서 트로트의 넓은 세계를 새삼 깨닫게 됐다. “진성씨의 ‘안동역에서’라는 노래는 모르는 노래였는데, 어느 날 친구가 노래방에서 그 노래를 부르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물어봤더니 작년부터 뜨는 노래라고 하더군요. 안동역에는 그 노래의 비석도 있다고 해요. 노래라는 게 그 정도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도 여러 가지가 부족하지만 노래를 통해 베푸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요.” 그가 베푸는 삶을 강조하는 것은 그의 신념과 경험에서 비롯된 듯 보인다. 인생에서 ‘큰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2014년 9월에 큰 수술을 받았어요. 종합검진을 하다가 우연히 췌장에서 종양을 발견한 거예요. 암일 확률이 굉장히 컸어요. 특히 췌장암은 생존율도 적고 암으로 진단받으면 일 년을 살기가 쉽지 않아요. 검사해보고 암이든 아니든 수술해야 한다 해서 9시간에 걸쳐 수술을 했죠. 그때 CEO 과정에서 성악했던 사람들이 병문안을 오고, 최왕국 교수님이 제 소식을 듣고 끝이 안 풀리던 가곡 ‘바람이 불어오면’을 마무리했다고 해요. 다행히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저는 그 노래를 부를 기회를 갖게 된 거죠.” 악보를 보자마자 확신이 든 노래, ‘난 당신 편이야’ 하씨가 트로트 가수를 하겠다고 했을 때 주변 전문가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김영진 한국연예제작자협회 회장이 제 선배예요. 그래서 그분께 ‘이런 곡이 있는데 해도 되겠습니까?’ 하고 문의했죠. 당연히 말리셨죠(웃음). 그분이 워낙 연예계를 잘 아시니까 ‘네가 돈이 있냐, 젊길 하냐, 특출나게 잘생겼냐, 과연 시장에서 먹힐 거냐’ 하는 것들이 의문이었죠. 그런데 지인들에게 노래를 들려주면 반응은 굉장히 좋아요. 가사도 좋고 중독성도 있고. 사실 이건 좋은 쪽 얘기고, 나쁜 쪽으로는 확 부각되는 게 없다는 얘기가 있긴 했어요. 트로트라면 어떤 부분이 확 튀어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그 부분은 제가 잘 모르겠어요. 저는 확 느꼈거든요. 노래를 부르면서 가사도 와 닿았고.” 그는 자신의 음악을 하나로 정의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가곡이든 발라드든 다 좋아했어요. 트로트는 관심이 없다가 우연한 기회에 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트로트는 이렇다’라는 정형화된 스타일을 좇고 싶지는 않아요. 특히 너무 튀고 화려한 정형화된 이미지로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노래도 좋고 가사도 좋은 트로트 가수로 평가받고 싶어요.” 전형적인 트로트 가수 이미지에 국한되고 싶지 않아 하씨는 올해 중에 ‘난 당신 편이야’의 녹음을 새로 할 예정이다. 그리고 현재 유튜브에 노래를 올려놓은 상태다. 물론 이제 막 데뷔한 그가 앞으로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는 그런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있다. 요즘은 늦은 나이에 트로트 가수로 입문하는 사람이 드물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업계에서 30여 년을 있다가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것은 마땅히 박수 받아도 될 일이다. 그는 현실을 냉정히 보면서도 자신의 도전이 앞으로의 삶에 즐거움과 희망과 꿈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중에 디너쇼까지 할 수 있는 경지가 된다면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해보고 싶어요. 트로트, 가곡, 발라드… 다만 댄스는 좀(웃음).”
- 2016-12-14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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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회가 만난 CEO 스토리] 은퇴교육 열정 전도사 윤만호 EY한영 회계법인 부회장
- 글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브라보’는 ‘잘한다’, ‘좋다’, ‘신난다’ 등의 갈채를 의미하는 이탈리아어다. ‘성공적으로 2막을 살고 있는’ 우리 사회 시니어들로부터 ‘인생 2막 설계의 지혜와 조언’을 들어보고자 한다. 리타이어(retire)는 타이어를 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타이어를 새로 바꿔 끼운다는 의미다. 단지 1막의 재현에 불과한 리플레이(replay)도 아니고, 1막을 완전히 지워버린 채 맨땅에서 헤딩하는 리셋(reset)도 아닌, 새로운 재생의 르네상스(renaissance)를 설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은퇴라는 용어를 은퇴시키고’ 멋진 2막의 르네상스를 설계하기 위해 ‘이어야 할 것과 끊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본지를 통해 살아온 길의 여정에 담긴 ‘온기’뿐 아니라 살아갈 길의 이정표를 세우는 데 필요한 ‘용기’를 얻길 기대한다. 윤만호 언스트앤영 어드바이저리 부회장(62)은 한국산업은행 부행장, 산은금융지주 사장 등을 역임하며 평생 ‘경제·금융 전문가’로 살아왔다. 이런 전문가로서의 이력을 넘어 주목되는 점은 열성적 은퇴교육 전도사라는 점. 그는 2011년 금융권 퇴직자들을 재교육, 창업자들에게 금융·입지권 조사 등 컨설팅을 해주는 사회공헌자 프로그램인 ‘시니어 브리지 센터’를 만드는 등 일찍이 퇴직자 재교육에 앞장서왔다. 최근까지도 서울시 50+재단 이사장으로 재임하면서 은퇴자들을 위한 제도적 교육과 일자리를 지원해왔다. 그가 설파하는 신(新)퇴직 또는 은퇴혁명 패러다임의 핵심은 ‘당하는 퇴직을 준비하는 퇴직으로 바꾸라’이다. 과거와 오늘날의 은퇴 의미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인간의 평균수명이 짧았던 과거에는 50이 넘도록 사회생활을 하면 웬만큼 살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요즘은, 생애주기가 바뀌면서 앞으로는 살아온 만큼 더 살아야 할 시간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고령화 사회에서의 퇴직은 마지막 골라인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이지요. 이제 일은 평생 하는 것입니다. 은퇴란 말을 은퇴시켜야 합니다. 평생 현역이 될 각오를 다져야지요.” 평생 현역은 오늘날 은퇴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된 것 같습니다. 말 그대로 인생의 반환점으로 보람찬 2막을 만들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미 고령화가 진행된 우리 사회에서는 80세부터를 본격적 노후 시작으로 볼 수 있습니다. 50~60대에 은퇴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적어도 80세까지 평생 현역으로 일하기 위한 키워드는 3가지입니다. 일, 배움, 나눔이지요. 책을 통해 더 많이 배우고, 사람도 더 만나고, 일을 통해 경험과 경륜을 더 나누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세상이 급변할수록 ‘과거의 경험, 인연, 경력’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일하면서 배우고 나누는 삶이 인생 2막의 패러다임입니다.” 영화 을 보면 대기업 부사장이 벤처기업의 인턴이 되어 젊은 여사장의 시중을 드는 내용이 나옵니다. 영화와 달리 현실에서는 ‘갑에서 을로의 갑작스런 전락’이 2막 부적응의 이유가 될 것 같은데요. “대부분의 시니어들이 퇴직 후 피부로 느끼는 것이 갑(甲)에서 을(乙)로의 입장 변화이지요. 이 변화를 약자라는 소극적 의미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도와준다, 기여한다는 적극적 의미로 재해석하는 시각 전환이 필요합니다. 예컨대 퇴직 후 자신을 대하는 세태 변화에 위축되는 경우가 많은데요. 잘나갈 때는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고 일정이 빡빡했는데, 퇴직하거나 작은 데로 옮기니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일정도 텅텅 빈다면서 우울해합니다. 이럴 때는 인심을 탓하기보다 ‘그동안은’ 만나야 할 사람만 만나느라 선택당했는데 이제는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을 선택해 만날 수 있으니 좋다’라고 시각 전환을 해야 합니다. 을(乙)적 사고야말로 창의적이고 도전적이고 적극적인 것이라고 전향적으로 해석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인생 2막은 성공 마인드보다는 성숙-섬김마인드로 임해야 합니다.” 윤 부회장의 말을 들으니 시니어가 멀리 해야 할 한자로 단단할 ‘고(固)’ 자가 떠올랐다. 고(古)의 울타리[口]에 갇혀 고착돼 있으면 고루해진다는 의미가 떠올라서다. 인생 2막이 힘든 것은 나이가 들어서가 아니라 성장이 멈추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꼰대적 사고를 그쳐야 퇴직을 종착역이 아닌 간이역으로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보통 사람들이 퇴직 때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재정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먼저 현역에서의 퇴직 준비부터 말씀해주시겠습니까? “현역, 퇴직 통틀어 지켜야 할 것은 ‘버는 범위 내에서 써야 한다’는 재정 원칙입니다. 현역 활동 때 현재의 수입을 모두 가처분소득이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평생 내가 쓸 돈이 얼마나 되는지, 60세 이후 100세까지는 무슨 돈으로 살 것인지 꼼꼼히 계산해보십시오. 버는 것의 30%는 무조건 개인연금을 부어야 합니다. 국민연금, 퇴직연금 외에 개인연금을 들어 노후에 ‘3층 연금’의 단단한 방어벽을 준비해놔야 합니다. 특히 요즘은 저금리시대 아닙니까. 10억원을 버는 것도 힘들지만, 이것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매달 100만원씩 나오게 하는 현금흐름을 만들어놓는 것입니다. 자녀 교육비도 과잉투자해선 곤란합니다. 노후를 잘 대비해놔야 자식 앞에 부모가 바로 서고 자식도 바로 세울 수 있습니다.” 이미 퇴직한 분들은 지금이라도 대비해야 할 것들이 있는지요? “있는 범위 내에서 써야 한다는 원칙은 퇴직자도 같습니다. 막연히 불안해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나의 어셋’은 어떻게 되는지 점검하고 이에 따라 할 일을 리디자인하는 게 필요합니다. 퇴직 후 가능한 일자리 형태는 사회공헌형, 봉사형, 생계형, 전문가형 등이 있습니다. 어느 형태가 되든 평생 일을 찾아서 해야 합니다. 이때 연금을 들어놨으면 선택의 폭이 넓어집니다. 퇴직 후부터는 버는 것보다 나눔에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해요. 저는 flowing-흘려보내기란 말을 좋아합니다. 퇴직 후에는 아등바등 살기보다는 ‘지금까지 나에게 위탁된 것을 잘 이용하고 남에게도 흘려보낸다’는 나눔의 사고가 필요합니다.” 인생 1막과 2막, 그 분수령을 전후해 삶의 정비사항, 중점사항도 달라져야 할 것 같은데요? “삶이 변하면 사람도 바뀌어야지요. 1막에선 급한 것에 휘둘려 살았다면 2막에선 정말 중요한 것에 따라 여러 가지를 성찰하고 재조정해야 합니다. 그간 바쁘다는 핑계로 ‘사는 대로 생각’했다면 2막부터는 ‘생각하는 대로 살고 있는지’ 성찰해보고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인지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에 따라 증진시킬 것은 증진시키고, 회복시킬 것은 회복시키는 등 삶의 우선순위를 재편, 재조정해야지요. 다시 말해 돈, 시간, 몸을 우선순위에 따라 써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윤 부회장은 구체적 성찰 및 재정비의 대상을 관계, 시간, 재무, 건강(정신-육체), 웰다잉의 순서로 꼽았다. 그리고 이 5가지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이 ‘관계의 리디자인’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하버드대의 조지 베일런트 교수는 하버드대학 학생 268명의 인생을 72년간 종단연구하면서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가장 큰 조건이 무엇인지를 비교 분석했다. 그 결과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지성이나 계급이 아니라 사회적 적성, 즉 인간관계였으며, 65세에 잘살고 있는 사람의 93%는 형제·자매와 원만하게 지낸 사람들이었다. 많은 가장들이 ‘처자식 먹여살리느라’ 바쁘게 일하다 보니 가정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막상 퇴직하고 나자 ‘찬밥 신세’라며 서러움을 호소하기도 하는데요. 윤 부회장께선 가족관계 경영을 어떻게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저도 월화수목금금 일해야 하는 산업화 시대에 공직자로 살았으니 집사람,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갖진 못했습니다. 야근은 물론이고 주말에도 나가서 일해야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지요. 하지만 ‘온가족이 함께하는 시간을 일주일에 한 번은 꼭 갖고 대화를 나누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습니다. 명절 때면 온 가족이 모여 ‘가위바위보게임’을 하는 등 소소한 재미 디자인을 했지요. 매년 가족사진도 찍습니다. 아이들이 자라고 가족들이 늘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큰 즐거움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가슴에 따뜻한 가족 램프를 걸어두며 사는 것, 그것 이상 삶의 성공,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의 선친은 고(故) 윤재건 전 제주체신청장이다. 윤 부회장은 “우편제도가 열악했던 시절, 지방이든 해외든 출장을 가면 ‘부인에 대한 사랑, 자녀에 대한 자상한 관심’을 담은 엽서부터 보내는 아버지를 보며 알게 모르게 가족사랑은 ‘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표현해야 함을 배운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일, 재물도 그렇지만 가족관계 역시 ‘공짜로 얻어지는 것은 없다’며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난 8월 부친상을 당하셨는데요. “(눈시울이 붉어지며) 아버님은 건강하게 사시다가 간암 선고를 받은 지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답니다. 소천 전 일주일간 오 남매를 불러 각각 독대 면담을 하며 당부의 말씀을 일일이 남기셨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다 지키고 계획한 대로 산 삶이었다는 점에서 웰리빙, 웰다잉의 표본이셨다고나 할까요. 선친께서는 늘 ‘요행을 기대하지 마라, 노력으로 거둔 보람만이 참된 것이다. 대가를 바라지 말고 끝없이 사랑을 주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하셨는데 제 삶의 피가 되고 살이 된 말씀이랍니다.” 선친이 그에게 남겨준 가보 제1호는 17세 때부터 61세 노년기까지 44년간 고이 모아온 우표책 한 질이다. 체신부(지금의 정보통신부)에서 한길을 걸어온 소신과 자부심의 표상을 아들에게 담아 물려준 것이다. 그 역시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우표 수집을 이어가고 있다. 윤 부회장은 지난 1997년 부친의 고희 때 만든 가족 문집 를 가져와 필자에게 보여주었다. 문집에는 부부-부모자녀-손주 간 사랑이 듬뿍 담긴 편지글, 사진 등 3대 가족의 역사가 오롯이 담겨 있었다. 그는 자신이 팔순이 될 때 이 같은 가족 문집이 더 만들어지면 좋겠다고 환하게 웃었다. 인터뷰를 진행한 회의실 8층 창문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여의도공원의 늦가을 경치가 아름다웠다. 같은 낙엽이지만 ‘추풍낙엽’의 조락의 의미로도, ‘만산홍엽’의 서정적 의미로도 묘사된다. 이는 퇴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당신은 지금 미래의 계획 아래 ‘추일서정’의 퇴직을 준비하는가, 계획 없는 미래에 손 놓고 ‘추풍낙엽’의 조락을 당하고 있는가. >>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등이 있다.
- 2016-11-30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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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풍미식품 유정임 대표 '김치와 함께 익어가는 맛있는 인생 이야기'
- 11월 22일은 대한민국김치협회에서 지정한 ‘김치의 날’이다. 김치 재료 하나하나가 모여 발효 과정을 거치면 22가지 효능을 낸다는 의미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김치의 날에 태어나 김치와 한평생을 동고동락한 이가 있다. 바로 포기김치명인 2호 유정임(兪貞任·61) 풍미식품 대표다. 소금에 절인 배추가 양념과 함께 숙성되듯, 인생의 우여곡절을 버무려 명인의 삶으로 승화시킨 그녀에게 김치는 우연이 아닌, 운명과도 같았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누가 김치를 사 먹어? 미쳤군!” 30년 전, 김치를 사 먹는다는 것은 생소하고 의아한 일이었다. 당시 김치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던 유 대표 역시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마주해야 했다. 명함을 건네면 뒤에서 박박 찢어버리는 이도 있었고, 험한 말을 들을 때도 있었다. 다행히 솜씨 좋은 유정임표 김치는 금세 입소문을 탔고 김치를 사서 먹겠다는 사람이 점점 늘어났다. 고난도 끊이지 않았지만 ‘포기란 배추를 셀 때나 하는 말’이라는 우스갯소리처럼 그녀에게 결코 포기란 없었다. “치욕스러울 때도 많았어요. 그럴수록 더 잘하자고 마음먹었죠. 김치는 기계로 찍어내는 게 아니잖아요. 그해의 배추 농사나 재료의 질, 만드는 사람에 따라 맛이 좌우되니 김치 맛이 늘 똑같을 순 없죠. 그래서 힘든 점이 많았어요. 한번은 배추밭을 사놨는데 수확시기에 가보니 노랗게 배추꽃이 펴 있더라고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죠. 하지만 거기서 멈출 수는 없었어요.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문제를 파악하고 점검하며 해결 방법을 찾으려 했죠. 매해 환경이 달라지니 여전히 공부하고 있는 셈이에요.” 우리 땅에서 자란 재료만을 사용하는 게 원칙 15평 다락방에서 김치를 팔던 평범한 주부가 2000평 규모의 연 매출 100억원에 달하는 식품회사 대표가 되기까지, 그녀는 지난 30년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환희의 순간도 많았겠지만, 그동안의 우여곡절을 떠올리는 듯한 말투였다. 달콤했던 순간에 현혹되기보다는 쓰디쓴 나날들을 기억하며 경각심을 잃지 않는다는 유 대표다. “승승장구하다가도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게 사업이잖아요. 오너는 항상 긴장하고 살아야 해요.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생길까? 외부에 있다가도 회사에서 전화가 오면 불안해지곤 하죠. 그런 긴장감이 나를 채찍질하고 언제나 최선을 다하도록 하는 것 같아요. 김치명인이 되고 인증패를 받던 날에도 기쁨보다는 잘 지켜야겠다는 부담이 컸어요. 그때부터는 옷차림도 화려하지 않게, 수수하지만 격식을 갖춰 입고 행동도 겸손하게 하려고 노력했죠.” 그녀는 사무실 한편에 드레스룸을 마련했다. 특별한 상황과 만나는 사람에 따라 알맞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다. 인터뷰 당일에도 캐주얼한 차림으로 다른 일정을 마치고 온 그녀는 “5분만!”이라고 외치더니 고운 한복으로 갈아입고 나타났다. 하루에 5~6번 옷을 갈아입을 때도 있다는 유 대표에겐 그만한 이유가 있다. 회사를 경영하며 한국농식품여성CEO연합회 회장, 대한민국김치협회 이사로 활동할 뿐만 아니라, 수원시 제12대 혜경궁 홍씨로도 선발되는 등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바빠도 ‘김치를 만드는 일’에는 소홀함이 없다. “예나 지금이나 아침에 출근하면 바로 현장부터 내려가요. 배추가 잘 절여졌는지, 깍두기를 얼마나 담그고 열무를 몇 단이나 다듬어야 하는지 등을 직접 점검하죠. 만드는 김치를 매일 맛보냐는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당연하죠. 그게 내 일이니까요.” 본업에 충실해야 다른 일도 떳떳하게 마음놓고 할 수 있다는 유 대표는 김치를 만들 땐 좋은 재료가 기본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우리 땅에서 자란 재료만을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단다. 그해 상황에 따라 배추 등 채소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을 때도 있지만 그녀에게 가격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조금 손해를 보면 봤지 비용을 아끼기 위해 재료의 품질을 낮추는 일은 절대 없다. “싼 김치를 만들어 팔자는 제안도 받았지만, 그런 유혹을 뿌리치고 우리 김치를 지켜낸 건 정말 잘한 일 같아요. 사업이라는 게 잘될 때도 있고, 손해 볼 때도 있는 건데 얕은수를 써가며 돈을 벌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이윤만 따졌다면 맛과 신뢰를 잃었을지도 모르죠. 나와 내 가족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김치를 담갔고, 앞으로도 그 마음은 변치 않을 겁니다.” 김치는 재료의 품질도 좋아야 하지만, 기계가 아닌 사람의 손을 거쳐 만드는 식품인 만큼 만드는 이의 ‘손맛’ 또한 중요하다. 즐거운 마음으로 김치를 담가야 그 맛도 좋아진다는 게 유 대표의 생각이다. 그래서 간혹 부부싸움을 하고 왔거나, 안 좋은 일이 있는 직원은 김치 담그는 작업에서 제외시키고 다른 업무를 보도록 한다. 만드는 사람의 감정이 김치 맛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그래왔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직원들의 속사정까지 살피는 유 대표의 살뜰한 모습이다. 이러한 면모는 ‘사원은 가족처럼’이라는 풍미식품의 사훈에서도 잘 드러난다. “우리 회사는 정년도 없고, 나이에 대한 기준도 없어요. 누구든 일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함께할 수 있죠. 80세가 넘었는데도 김치를 담그는 분이 계시고, 70대 직원도 많아요. 모든 김치의 속을 내가 다 채울 수는 없잖아요. 나를 대신할 직원들의 정성 어린 손길이 필요하죠. 서로 가족처럼 여기고 믿고 의지하며 일하는 게 바탕이 돼야 해요. 그런 분위기가 원활히 회사를 경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보다 풍미식품의 경영 목표 중 하나는 ‘수입의 사회 환원’이다. 김치를 만드는 곳이므로 김치 기증이나 김장 봉사 활동 등 다양한 방법으로 그 목표를 이뤄가고 있다. 올해 9월, 유 대표는 아너소사이어티(사회복지공동모금회 1억원 이상 고액기부자클럽) 회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회사 자금이 아닌, 그동안 강의 활동 등을 하며 모은 개인 재산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선뜻 내놓은 것이다. 밤낮으로 김치만 생각하며 어렵게 번 돈이지만, 그렇게 거액을 기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유년시절의 아픔이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 대신 동생들 끼니를 챙겨주곤 했어요. 당시 형편이 어려워 학교도 못 갔고 졸업도 미뤄졌었죠. 아마도 그런 아픔 때문에 배움에 대한 갈증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예전의 나처럼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학용품을 사주거나 학비를 지원해줄 때 가장 행복하고 가슴이 벅차요. 내 작은 도움으로 한 아이가 꿈을 키우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이지 자다가도 즐거워진다니까요. 방에 분홍색 돼지저금통이 하나 있거든요. 번외 수입이 생기면 거기에다 돈을 모아 일 년에 한 번씩 직원 중 어려운 사람을 돕거나 노인복지회관 등에 기부하고 있어요.”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에는 진도 팽목항에 김치를 보냈는데, 그 어느 때보다 좋은 재료로 정성을 다해 만든 김치가 슬픔에 잠긴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길 바랐다. 대개 김치를 기증한다고 하면 상품가치가 떨어진 것을 나누어주는 것 아닌가 하는 오해도 있지만, 그럴수록 따뜻한 마음을 담아 더 좋은 김치를 내놓는다는 유 대표다.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본다는 그녀는 ‘내 가족이 먹을 수 있는 김치’, ‘직원들을 가족처럼’ 등 인터뷰 내내 가족이라는 말을 내려놓지 않았다. 여성 직장인들은 사회생활을 하며 살림도 하고 엄마 역할도 해내야 하기 때문에 1인 2역의 고충이 있다고 토로한다. 유 대표 역시 예외는 아닐 터. 가족의 일원으로서 그녀는 어떤 모습일까? “여성은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 그리고 여사장은 더 강하다는 생각으로 여기까지 달려왔어요. 행여나 사업에 실패해서 가세가 기울면 우리 가족이 나를 원망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남편과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내, 엄마이고 싶어 더 악착같이 일했어요. 그런데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더라고요. 사업을 하기 전에는 음식 솜씨가 좋아서 가족들에게 맛있는 반찬도 자주 만들어줬는데, 그런 게 소홀해져서 미안하죠. 이제는 아이들도 바빠져서 일주일에 한 번 가족이 모여 식사하는 것도 힘들더라고요. 함께하는 시간이 부족한 건 꼭 우리 가족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아요. 여느 가족들처럼 우리 가족도 같이하는 시간을 자주 가지려 노력하고 있어요.” 유 대표는 사업이 30년 동안 탄탄대로를 달릴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의 외조 덕분이라고 말한다. “여성들은 남편의 이해와 신뢰가 없으면 사업하기 힘들어요. 저녁에 업무 약속이 잡히거나 거래처에 가야 할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마다 남편이 간섭하거나 불편한 소리를 했다면 지금처럼 왕성하게 일하지 못했을 거예요. 늘 감사한 마음이죠. 가끔 식당에 가면 ‘고객을 가족처럼’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안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가족은 편하니까 허물없이 대하고 잔소리도 하지만 고객은 그렇지 않잖아요. 그래서 저는 ‘가족을 고객처럼’이라고 반대로 말해요. 그렇게 하고 나니 가족을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달라지더라고요.” 글로벌 김치 홍보대사가 되는 게 꿈 김치에 대한 열정과 가족의 지원으로 회사를 잘 키워가고 있는 그녀에게 ‘성공’이라는 단어는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그러나 정작 유 대표는 ‘성공’이 아니고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말한다. 성공이라는 단어를 받아들이면 자칫 안일해질 수 있기에 거리를 두기로 한 것. 늘 그렇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사업을 이끌어왔지만, 요즘은 그 끝을 염두에 두기도 한다.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그때까지 지금처럼 일할 수는 없잖아요.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칠십 정도 되면 일선에서 물러나 적임자에게 회사를 물려줘야겠죠. 사업을 이어받아 잘 키워나갈 수 있는 자식이 있으면 승계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기꺼이 사회에 환원하려고 합니다. 후계자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나면, 그때부턴 교육사업이나 강의 등을 하면서 여유롭게 살고 싶어요. 남들처럼 여행도 가보고요. 그런데 일 중독인지는 몰라도 아직은 놓지 못한 것들이 많아요. 천천히 하나씩 내려놓을 준비를 해야겠죠.” 노인들을 대상으로 강의나 봉사를 하며 노후를 보내고 싶다는 유 대표는 일찌감치 레크리에이션과 성교육 자격증 등도 따놓았다. 그녀는 차분하게 노후생활을 설명하다가 어느새 김치 이야기를 하며 눈을 반짝였다. 아직은 내려놓을 때가 아님이 여실히 느껴졌다. “이만큼 살아보니 사람 일은 알 수가 없더라고요.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매일 최선을 다해, 지금 이 순간을 열정적으로 사는 게 지혜로운 것 같아요. 하지만 나름의 꿈과 목표는 있어야겠죠. 그것이 매 순간 한 걸음씩 나아가는 방향을 제시해주니까요. 요즘 내 목표는 김치 홍보대사가 되는 거예요. 우리나라에 계시는 세계 대사들을 모셔와 김치 담그기 퍼포먼스를 하고 싶어요. 대사들이 담근 김치는 각 나라로 보내고요. 그러면 우리 김치가 전 세계인의 식탁에 올라가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게 바로 제 꿈입니다.”
- 2016-11-01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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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취미가 직업이 된 사진작가 박찬원의 꿈, “내 작품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는 것이 목표다”
- “팔다리는 물론 얼굴에까지 뜨듯한 오줌이 그대로 튀어요. 얼굴은 똥, 오줌 범벅이 돼도 ‘똥은 흙, 오줌은 물’이라고 생각해요, 사실은 이때가 사진 찍기 가장 좋은 때거든요.” 7개월 동안 돼지의 생활을 사진으로 찍으면서 박찬원(朴贊元·72) 사진작가가 겪은 일이다. 그는 돼지만 사진을 찍어서 ‘사진작가는 미친놈이다, 아니면 내가 전생에 돼지였는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했단다. 확실한 것은, 그가 사진에 미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제2 인생의 즐거움과 사진예술 인생의 새로운 가치를 들어본다. 글 사진 김영순 기자 kys0701@ 이제는 사진작가라고 불러야 한다. 과거에는 사장, 한때는 교수라고 불렸던 이다. 바로 박찬원 사진작가의 이야기다. 1944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삼성전자 대표, 삼성그룹 부사장을 지내면서 전 세계로 뻗은 거대한 재벌 기업의 의사결정권자로 일했고, 코리아나화장품 사장을 끝으로 기업에서 은퇴한 후에는 성균관대 석좌교수로 교육자로서의 삶도 겪어 봤다. 그러나 40년을 직장인으로 산 그가 인생 후반전에 도착한 곳은 사진이라는 예술이었다. 그는 지난 6, 7월에 걸쳐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이포’와 은평구 녹번동 ‘서울혁신파크’에서 두 번의 ‘돼지’ 테마 전시회를 마친 뒤였다. 지난 8월에는 12일간 종로구 사진위주 류가헌에서 ‘숨 젖 잠’이라는 초대전도 열었다. “원래 초대전을 여는 걸 사진 배우기 시작한 10년째인 2018년에 계획했는데 기회가 일찍 왔어요. 문래동에 위치한 대안공간 이포가 원래 실험적인 젊은 작품들을 전시하는 곳인데 내 작품을 보고 좋다고 해서 열게 됐죠.” ‘예술은 돈이다’라고 이야기한 피카소의 말이 생각났다. 박 작가한테 전시 작품에 ‘빨간딱지’ 가 붙어 있을 때 기분이 어땠냐고 물었다. “전문 사진가라면 작품이 판매되어야 하죠. 처음 판매되었을 때의 감동은 아직도 잊을 수 없어요. 2011년 코엑스 CEO 특별전으로 기성 작가들과 호주에서 사진전을 열었을 때에요. 가슴이 쿵쾅거렸어요. 구매한 그분께 정말 감사했고 부담도 느꼈어요. 아마추어는 전시만 하면 되지만 프로는 팔려야 하죠. 작가와의 친분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좋아야 사는 거잖아요. 나중에 누가 샀는지 알아보지 말 걸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작품이 팔리고 보니 진짜 작가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웃음)” 작가는 작품이 판매될 때 비로소 첫걸음을 떼는 것이다. 누드 사진을 계기로 사진예술에 눈 뜨다 박 작가와 사진과의 인연은 올해로 8년째다. 2008년에 삼성경제연구소에서 강연을 듣다가 미술과 사진을 배우면서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는 미술과 사진 둘 다 지금도 꾸준히 하는 중이라고 한다. 그러나 역시 ‘본업’은 사진이다. “처음부터 사진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사진작가 조세현 선생이 가르쳤는데 하루에 인물, 풍경, 누드, 종합으로 테마 하나씩을 세 시간에 걸쳐 네 번 찍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세 번째 날인 누드 사진을 찍은 날, 내가 대상을 받았어요. 그때 썼던 카메라들이 모두 삼성 카메라였는데, 조세현 작가가 제 걸 보더니 ‘이건 카메라 광고로 써도 손색이 없겠다’라고 말하더군요. 그 사진이 누드의 실루엣만 찍은 건데, 저는 마케팅 쪽을 했기 때문에 보는 눈은 좀 있다고 자부해요. 그래서 사람들이 몰리지 않는 곳에 가서 엎드려서 찍었는데 성공적이었던 거죠. 그때 ‘야, 이거 할 만하네’라는 생각이 들었죠(웃음).” 박 작가는 이때 때로는 초보도 프로 못지않은 명작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인생 자체가 작품 같은 박찬원 박 작가는 코리아나화장품에서 은퇴하고 성균관대에 석좌교수로 초빙되어 마케팅을 강의하게 됐다. 그런데 하다 보니 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젊은 박사들은 경력을 위해서 강의를 맡는 게 중요한데 나는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아, 내가 할 자리가 아니구나’ 싶어서 한 3년 하고 나서 그만두었어요. 그리고 사진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위해 2010년에 상명대 예술디자인 대학원에 멋모르고 지원했죠. 그러면서 고생 엄청 했어요.” 사진을 배우러 들어갔는데, 정작 대학원에선 사진 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기술은 이미 대학교에서 배웠다고 생각하고 예술가가 되는 훈련을 시켰기 때문이다. 여전히 초보였던 그로서는 많이 힘들었지만 그러한 훈련 덕분에 예술, 예술가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졌다고 말한다. 인생 후반기의 보람을 느끼는 힘,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 쓰는 언어, 노는 물도 달라졌다. 그리고 그간 고생한 것이 아까워 졸업하자마자 라는 책도 썼다. 이제 박 작가의 목표는 영원한 현역이다. “사진작가를 업으로 가는 건 정해졌습니다. 제 작품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는 게 목표예요.” 작품의 진정성을 추구하기 위한 100일 촬영 박 작가는 하나의 주제에 100일 촬영을 목표로 작업하는 순수 사진가로 ‘생명의 의미’를 담았다. 현재 작품 세계의 주요 테마는 ‘돼지’와 ‘염전’이다. 얼마 전에 쟁쟁한 기성 작가들과 함께 전시했던 테마도 ‘돼지’를 소재로 한 ‘꿀 젖 잠’이라는 제목이었다. 각각 ‘꿀’은 돼지가 내는 소리, ‘젖’은 돼지의 젖, ‘잠’은 돼지의 영혼을 사진으로 잡아내고자 한 시도다. ‘돼지’ 테마는 결코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촬영할 수 있는 곳을 섭외하는 데만 6개월이 걸렸다. 그것도 운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겨우 섭외한 양돈장에서 지난해 8월부터 올해 3월까지 매주 2박3일씩을 현장에서 먹고 자며 촬영했다. “똥 냄새 엄청나죠. 지금도 자동차 트렁크를 열면 그 냄새가 날 정도예요. 젖 사진을 찍을 때는 얼굴에 똥이 다 묻어요. 그리고 돼지가 카메라를 들이대면 긴장해서 오줌을 싸고요. 그런데 돼지가 오줌을 싸면 움직이지 않아서, 좋은 사진이 나올 수 있어요. 상황이 이런데 막상 사진을 찍을 때면 냄새가 안 납니다. 의식을 못하는 거죠.” 100일 촬영하기를 한다고 했을 때, 2주에 한 번 간다고 하면 2년이 걸리고 1주에 한 번 가면 1년이 걸리는 긴 시간이다. 당연히 사진 촬영 때문에 다른 모임은 일절 참석할 수 없게 된다. 얼마나 사진에 올인하여 새로운 즐거움을 갖게 됐는지를 알 수 있다. “막상 셔터를 누르는 시간은 얼마 안 걸려요. 나머지는 다 생각하는 시간이죠. 그 시간이 주제가 구체화되는 지점입니다.” 3년 동안 염전 사진을 찍었다 소금밭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염전 안에는 삶과 죽음이 모두 담겨 있더라고요. 처음으로 빛을 느낀 곳이기도 합니다. 바닷물이 노구(老軀)를 끌고 찾아와 햇볕에 몸을 맡기면 육신은 소금으로 남아 생명의 물질이 되고, 영혼은 수증기가 돼 다른 세상으로 날아갑니다. 죽음과 탄생이 공존하는 공간이죠. 나비, 하루살이, 거미 등을 만나 대화를 나눈 것은 인생의 큰 전환점이었어요. 눈을 뜨고 마음을 여니 새로운 세상이 보이는 듯했어요.” 박 작가에게 염전은 성지와도 같다. 처음으로 사진다운 사진을 찍었고 많은 고민을, 많은 생각을 했던 곳이다. 날것 그대로, ‘생명’을 사진에 담는다 어디를 가나 그는 연장자다. 전문작가도 사진을 정리할 나이 65세에 사진을 시작했다. 아랫사람보다 10년 이상 차이가 난다. 나이가 많다고 대접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체력의 한계, 감각의 한계가 핸디캡이 될까 봐 그래서 항상 조심스럽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몸과 마음이 따라 주지 않는다. 최근 사진들은 리터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수준이다. 그런 기술적인 부분까지 직접 다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박 작가는 리터치(보정)를 잘 못하고, 가급적 안 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어쩌면 그러니 제 작품을 어설프지만 인정해 주는 것일 수도 있어요. 리터치를 했는지 안 했는지는 보면 다 알거든요.” 가공이 거의 없는 날것 그대로의 사진. 그래서인지 박 작가의 사진에는 유난히 담백한 맛이 있다. 그것은 다큐로서의 시선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게 그냥 찍는 게 아니고 사람과 사귀어야 하고 동물하고도 사귀어야 하고 그런 것들을 해야만 개념도 잡히는 거죠.” 박 작가가 추구하는 작품세계의 궁극적인 지점은 ‘생명’이다. 다음 테마는 비밀이지만 역시 그가 추구하는 ‘생명’과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이미 결정됐다고 하며 10월 부터 착수한다. “작품 사진이 좋을 때는 언제인가”라는 질문에 답은 간결했다. “즐기면서 찍을 때 좋은 사진이 나오고, 힘을 빼고 작업할 때 좋은 작품이 나온다는 것은 진리예요.”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용기 “우리 집사람은 수채화를 그려요. 그러니 호흡이 딱 맞아요. 저도 처음에 대학원을 갈 적에 그림으로 가느냐 사진으로 가느냐 고민이 많았는데, 그림은 앉아서 하니까 건강에 도움이 안 될 것처럼 보였어요. 반면 사진은 움직이면서 찍으니까 활동적이어서 그쪽을 선택한 것도 있죠. 지금은 더 건강해진 느낌이에요.” 상당수의 시니어들은 뭔가를 새롭게 하려고 해도 늦게 시작하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이 있다. 그래서 감히 못하는 경우 많다. 그러한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해요. 의외로 나이든 예술가들이 자기 명성만 가지고 유지하는 경우가 많아요. 반면 젊은 친구들은 장래가 두려워서 방향을 잘 못 잡고 몰입을 잘 못하죠. 난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됐고 다른 일이 없으니까 필요한 건 용기였죠.(웃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기에 박 작가 혼자 히죽 웃는다. 제2 인생도 용감한 사람만이 즐길 수 있는 것 같다. 영원한 현역을 다짐하다 그는 나이를 먹어서 가져야 할 것은 용기를 내는 것이라는 걸 재차 강조했다. 자신도 주변에 추천은 많이 해줬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용기를 못 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대로 해야 하는데 취미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점도 지적했다. 나이 들어 자기 자신의 역량이나 잠재력을 발견하게 되는 중요한 관점도 거기에 있었다. “호기심, 그리고 노력인 거 같아요. 그림도 사진도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재능 없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제가 찍는 정도의 사진은 누구나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이 시도를 안 하는 거라고 봅니다.” 다소 어리석은 질문 같지만 인생에서 가장 흥분되는 때가 언제인지 물어 봤다. 그의 대답은 즉각적이고, 예상한 그대로였다. “바로 지금이지! 즐거워!” 자기만의 인생을 사는 사람, 박찬원 작가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가는 사람이었다. “2018년은 사진을 시작한 지 10년째 되는 해예요. 10년간 사진 공부를 하고, 10년간 사진가로 활동하겠다는 계획을 잡았어요. 우리 나이 65세에 사진 공부를 시작했고, 75세에 나만의 작품으로 데뷔전을 하고 85세에 마지막 사진전과 사진 책을 발간할 작정입니다.”
- 2016-09-08 0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