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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BS 유영미 아나운서, 뉴스 Queen 내려놓고 시니어와 동백꽃처럼 피다
- “앵커, 명예 졸업합니다. 고맙습니다.” 8년 전 마지막 뉴스를 전하던 날, 유영미(柳英美·57) 아나운서의 마무리 멘트에는 후련함, 시원함 그리고 섭섭함이 담겨 있었다. 그녀 나이 오십. 여성 앵커로서 최장기, 최고령이라는 타이틀을 얻었지만 그 말이 무색할 정도로 젊고 아름다운 시절에 뉴스 인생을 마감했다. 강단 있는 목소리로 SBS 여성 앵커의 표본이던 유영미 아나운서. 한동안 안 보이나 싶더니 작년 말 ‘2018 아나운서 대상’ 시상식에 모습을 드러냈다. TV 시청자 눈을 떠나 라디오 청취자들과 만나고 있었단다. 그것도 빨간 오픈카(?) 타고 ‘마음은 언제나 청춘’을 외치면서 말이다. 시니어와 소통한 보람을 인정받다 “놀랐어요. 내가 벌써 공로상을 받을 나이가 됐나 하고요. 저희 프로그램은 시니어에게 도움이 되고자 1991년 SBS가 창사하면서 시작한 최장수 프로그램입니다. 일찍 일어나는 새벽 청취자들을 위한 방송이었죠. 다른 선배님께서 3년 정도 하시다 제가 바통을 이어받아 지금까지 했는데 이런 큰 상도 받네요.” 작년 말, 2018 아나운서 대상 시상식에서 유영미 SBS 아나운서의 이름이 불렸다. 시니어 세대를 위한 SBS 러브FM ‘유영미의 마음은 언제나 청춘’을 25년간 진행해온 공로였다. 오랜 시간 프로그램을 이끌어온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유영미 아나운서는 DJ는 물론 2010년부터 PD도 겸하고 있기에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2015년에는 한국방송대상에서 사회공익 라디오 부문 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SBS 간판 아나운서로 뉴스를 비롯해 다양한 교양 프로그램을 진행하느라 눈코 뜰 새 없었던 30대 초반에 만난 ‘마음은 언제나 청춘’. “유영미 선배의 목소리가 너무 따뜻해서 라디오와 잘 어울린다”는 담당 PD의 사탕발림(?)에 못 이기는 척 승낙한 방송이 인생 역작이 됐다. “처음에는 부모님이나 선배 세대를 생각하면서 방송했어요. 청취자와 서서히 녹아들고 세월이 지나고 보니 저도 어느새 시니어 대열에 합류했네요. 그동안 잘 걸어왔어요.” 매일 새벽 5시. 그 누구도 듣지 않을 것 같지만 유영미 아나운서는 멀리서 묵묵히 라디오를 켜는 시니어의 관심과 사랑을 깊이 감지한다. 진행을 더 잘해보고 싶은 마음에 2000년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사회복지 대학원에서 노인학을 공부했다. 2010년에는 시니어 프로그램 DJ 경험담을 엮어 ‘두 번째 청춘’도 발간했다. SBS로 채널을 돌리면 ‘또 유영미’ 소리가 나오던 때에 말이다. 금기를 깨고 얻은 타이틀 ‘최초’ 유영미 아나운서는 시청자로서 봐왔던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파스텔 톤 정장에 정돈된 머리 스타일의 그녀가 밝은 갈색 머리에 꽃무늬 로브룩으로 나타났다. 예능의 끼가 느껴진다 말하니 투정 섞인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 재미난 것을 왜 안 했는지 몰라. 늙기 전에 진작할걸. 옛날에는 뉴스 앵커 이미지 때문에 예능을 할 수 없었어요. 이제는 좀 자유롭게 저를 표출하고 싶어요.” 1986년 울산MBC에서 방송생활을 시작해 SBS 공채 1기로 들어와 현재까지 활동하는 최고령 여성 아나운서. ‘여성 아나운서로서 최초’ 타이틀은 왜 이리도 많은지, 33년 여성 방송인으로서의 삶은 마치 ‘가시밭길 몸소 닦아 새길 만드신 신여성 일대기’와도 같았다. “여성 아나운서는 일을 오래하지 못하던 시절이었어요. 저는 살짝 그런 시절을 비껴갔는데 결혼한 여자가 회사에 있기 힘든 시절이었죠. 그런데 저는 결혼과 함께 SBS에 입사했습니다.” 결혼을 앞둔 와중에 SBS 공채 1기 채용 공고가 났다. 결혼을 미룰 수도, 응시를 안 할 수도 없었다. 채용 공고가 언제 또 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솟아날 구멍은 있었다. “당시 저희 팀장님이 ‘SBS를 오래도록 빛내고 기여할 아나운서인데 결혼이 뭐가 그리 문제냐’며 윗선의 날선 시선을 잠재워주셨어요. 덕분에 결혼과 신혼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동기들보다 두 주 늦게 출근했습니다. 임신 9개월까지 뉴스 앵커석에도 앉아 있었고요. 두 달 출산휴가 마치고 앵커석으로 돌아온 여자 아나운서는 제가 최초였어요.” 여자 아나운서가 출산을 하고 다시 뉴스를 맡은 전례가 당시에는 없었다. 내가 잘해야 후배들이 이 길을 따라올 거라 믿었다. “임신했을 때 뉴스 하지 말라고 했으면 여성운동했을 거예요. 빡빡한 세상이었지만 미래를 바라보는 선배들이 있었어요. ‘능력 있고 일 잘하는데 결혼하고 애기 낳는 게 무슨 상관이냐, 뉴스 앵커가 뉴스만 잘하면 되지’ 하면서 응원해줬어요. 선배의 역할은 좋은 선례를 남기는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공채 1기이다 보니 여자 아나운서 선배가 없어요. 그래서 뭘 해도 늘 최초가 된 거죠. 요즘 세대에게는 너무 당연한 것들을 그때는 싸워서 얻어야 했어요.” 건물 내 흡연이 만연하던 1990년대 말에는 뜻있는 여성 사우들과 함께 ‘꽃을 든 금연 운동’도 전개했다. 사무실에서 금연하는 사람에게 꽃을 주고 박수도 쳐주는 운동이었다. 요즘 건물 밖에서 담배 피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 시절 생각이 절로 난다고 말했다. 피겨 중계, 웃고 울다 남은 생채기 유영미 아나운서를 만나니 스포츠 중계 관련 이야기가 듣고 싶어졌다. 그녀 이름은 뉴스 앵커와 교양 프로그램 진행자, 라디오 PD 겸 DJ로 회자되지만 우리나라 최초로 스포츠 중계를 한 여성 아나운서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개·폐막식과 피겨스케이팅,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을 중계했다.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이 열리기 전, 김연아 선수와 일본의 아사다 마오 선수가 세계 주니어 무대에서 주목받으면서 피겨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일던 때였다. 피겨스케이팅 중계를 준비하지 않은 타 방송사에 SBS 유영미 아나운서의 중계가 송출됐다. 이후 SBS는 국제빙상연맹(ISU) 독점 중계권에 이어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 중계도 독점하면서 동계스포츠 중계에 모든 것을 걸었다. 유영미 아나운서 또한 2000년부터 피겨 중계를 준비하고 있었으니 이변이 없는 한 김연아 선수의 ‘007 본드걸’ 중계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러나 가혹하게도 이변은 일어났고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하고 중계석 마이크를 내려놓아야 했다. 그녀는 방송 인생에서 가장 아픈 사건이었다고 회고했다. “녹화 중계였는데 제가 ‘한 선수가 성장하기 위해서 많은 지도자의 노력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하던 중에 김연아 선수를 위해했던 코치가 지나갔답니다. 그 사람을 지칭해 한 말도 아니었는데 난리가 난 거예요. SBS 스포츠 인터넷 사이트가 마비될 정도로 공포 그 자체였어요.” 중계를 녹화할 당시 수많은 스태프가 함께 있었지만 원망의 대상은 유영미 아나운서의 몫이었다. “제가 마이크를 던졌어요. 조직을 위한 결단이었죠. 그저 침묵이 약이었습니다.” 한참 후 담당 팀장이 스포츠 중계를 권했지만 돌아가지 않았다. 스스로를 위로할 시간이 필요했다. “제가 매화랑 동백꽃을 좋아하는데 꽃이 질 때 뚝 하고 떨어져 내려요. 그땐 나 스스로를 부러뜨려야 했어요. 그저 회사만 생각했습니다. 고통스러웠어요. 안티팬 글을 보고 나면 방송 절대 못해요. 그래도 동계올림픽 최초 여성 캐스터라는 타이틀은 되게 좋았어요. 그런 일들이 있었네요. 아나운서 33년 동안 일이 많았네.(웃음)” 힘들 때 달려와 안긴 곳은 라디오 그러고 나서 힘든 마음을 내려놓은 곳이 시니어 청취자를 만날 수 있는 라디오 부스 안이었다. 스포츠 중계석에서 떨어진 동백꽃은 라디오로 되돌아와 다시 예쁘게 자라났다. 마음속 얘기도 꺼낼 수 있고 제작까지 하니 한결 자유로웠다. “힐링도 하고 자존감도 높아졌어요. 청취자들이랑 늙는 얘기 진짜 많이 해요. 오십견 온 얘기도 하고, 자전거 타다가 넘어져서 한쪽 손으로 방송한 얘기도 하고요. 남들은 25년 한결같이 어떻게 했냐고 하지만 저는 매일매일이 새로웠어요. 제 방송을 듣는 분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면 좋겠어요. 행복하게 사는 방법도 공유하고요.” 앞으로의 꿈이 뭐냐고 물었다. 대답 참 간단했다. SBS 최초로 정년퇴임하는 여성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고 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초라한 성적표일지는 모르겠지만 위대한 여정의 마침표를 찍고 싶단다. “유영미였습니다. 사랑합니다.” 또 다른 내일을 기약하는 그녀의 마무리 멘트다. 맞다! 방송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 2019-02-01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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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기’만큼은 내가 고수!
- 요즘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이 많다. SBS 프로그램 ‘생활의 달인’을 봐도 그렇다. 이렇게 재능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감탄할 정도다. 달인과 비슷한 말로 무언가 남보다 뛰어나게 잘하는 사람을 보고 우리는 흔히 고수라 한다. 말 나온 김에 나는 어떤 걸 잘하는지 생각해봤다. 중년의 문턱에 있는 나이라면 고수까지는 아니어도 바로 떠오르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세울 게 없다. 그동안 뭐하고 산 걸까 문득 회한이 몰려왔다. 나는 서른을 눈앞에 두고 결혼했다. 남편은 아내가 집에서 내조해주기를 바랐다. 아이들이 귀가할 때 무조건 엄마가 집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남편이 퇴근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이런 생각은 남편의 성장기에 사업과 휴게소 운영으로 자주 집을 비우신 시부모님의 영향 때문이 아닌가 싶다. 반대로 나는 결혼하면 소소한 꿈들을 남편과 함께 하나씩 이루면서 살고 싶었다. 혼자서는 망설여지는 배낭여행 같은 것이 그런 것이다. 결혼하고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을 때는 우리 둘뿐이라 가능할 것도 같았다. 그런데 1년쯤 지나 첫아이가 태어났다. 그때부터 아이를 키우고 집안일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다시 둘째가 태어나고 20년쯤 지나자 어느새 중학교 3학년 늦둥이까지 있는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엄마가 집에 있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던 큰딸은 현모양처가 꿈이었는데 바람대로 졸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을 했다. 딸이 평생 친구라고 자랑하는 딸을 낳자 나는 준비도 없이 할머니가 되었다. 내가 문밖으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한 건 둘째와 늦둥이 꼬맹이가 어느 정도 자랐다고 생각할 무렵이었다. 손녀까지 자주 집으로 놀러오다 보니 이러다가 평생 육아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용기가 필요했다. 다행히 뭔가 해보겠다는 내 의견에 가족들은 흔쾌히 지지를 해줬다. 그런데 그동안 하고 싶은 것이 많았어도 막상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자 쉬 떠오르지 않았다. 무엇을 할 때 행복했는지 생각해봤다. 글쓰기와 걷기였다. 그즈음 우연히 92세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99세에 첫 시집 ‘약해지지 마’를 출간한 시바타 도요에 대한 글을 읽었다. 나라고 못하겠나 싶었다. 문득 내 이름으로 된 책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도전을 시작했다. 먼저 2015년에 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을 했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로 하루하루가 바쁘게 지나갔다. 내친김에 2017년에는 서울시50플러스 서부캠퍼스에서 진행하는 전자책출판하기과정도 들었다. 또 인생학교와 전문강사양성과정, 배낭속인문학, 도시해설가양성과정, 여행작가과정도 수료했다. 바쁜 와중에 시니어블로거협회에서 리포터 활동도 했다. 2018년에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동년기자와 서울시50플러스 시민기자 활동을 시작으로 인생학교 수료생 중 소수를 대상으로 진행한 프로젝트 기획자 과정을 수료했다. 이밖에도 장독대아카데미 코디네이터, 1인디지털미디어크리에이터, 어린이스토리텔링3급자격증 등 내가 도전하고 성과를 얻은 것들이 참 많다. 30년 가까이 주부로 살다가 ‘용기’라는 단어를 들고 밖으로 나온 중년 아줌마의 ‘용기’에 놀랐을까. 세상은 따뜻한 시선으로 길을 내줬다. 그 길을 걷다 운 좋게 많은 일을 실행에 옮기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저것 욕심내느라 글쓰기에는 정작 많은 시간을 내지 못했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남다른 내 재능을 알 것 같다. 내 재능은 바로 ‘용기’였다. 하고 싶은 것을 주저 없이 시도하고, 필요한 것들은 배워서 채워가고, 직접 부딪쳐 실행하는 ‘용기’가 그것이었다. 2019년에는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것만 선택에 깊이를 채울 생각이다. 용기를 낸 덕에 몇 년쯤 지나 내 이름이 찍힌 책을 손에 들게 될지도 모르겠다. 주부에서 사회인으로 거듭난 멋진 인생 경험을 들려주며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외치는 내 모습을 상상해본다.
- 2019-01-24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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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켜켜이 주름이 늘어도 여전히 듣고 싶은 말
- 연극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봤다. 이 작품은 2007년 4월부터 약 6개월 포털에 연재된 강풀 작가의 웹툰이 원작이다. 2008년 연극으로 만들어져 대학로 굿시어터에서 무대에 올려졌고, 2011년에는 영화로, 2012년에는 SBS 드라마로 방영돼 사람들의 마음에 잔잔한 여운을 준 바 있다. 영화에서 김만석 역을 맡아 열연한 이순재가 연극에서 박인환과 함께 더블캐스팅됐다. 상대역 송이뿐 할머니는 손숙과 정영숙이 교대로 호흡을 맞췄다. 나는 박인환과 정영숙이 무대에 선 공연을 봤다. 연극은 인생 황혼기에 접어든 네 사람의 우정과 사랑을 잔잔하게 보여줬다. 새벽마다 오토바이를 타고 우유 배달을 하는 주인공 김만석 할아버지는 속마음과는 달리 퉁명스럽다. 홀로 살아가는 송이뿐 할머니는 폐지를 주워 근근이 살고 있다. 두 사람의 덤덤한 사랑과 치매에 걸린 아내 순이 할머니를 보살피는 군봉 할아버지의 희생적인 사랑. 네 사람의 모습은 우리 주변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상황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연극을 보는 내내 친정 부모님이 떠올랐다. 뇌출혈 후유증으로 10년째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돌보던 친정어머니는 지난 추석에 쓰러져서 두 달 가까이 일반실과 중환자실을 오가며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어머니는 다행히 건강을 되찾는 중이지만 여전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현재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로 다른 요양원에 계신다. 처음에 집과 병원 양쪽을 오가던 우리는 어머니의 입원이 길어지면서 결국 아버지를 집 근처 요양원으로 모셨다. 어머니는 치료가 끝나고 병원에서 퇴원하라 할 때까지도 걷지 못했다. 가슴이 철렁했다. 의사는 병을 이기느라 체력이 바닥나고 근육이 빠져나가서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잠시라고 생각하고 어머니를 의사가 상주하는 요양병원으로 퇴원시켰다. 어머니 혼자 돌보던 아버지를 여섯이나 되는 자식들은 힘들다고 요양원으로 보내고 어머니마저 몸이 좋아질 때까지라는 단서를 붙여 요양병원에 보낸 것이다. 친정 부모님이 요양원과 요양병원으로 가신 지 2개월이 되어간다. 우리는 양쪽을 드나들며 부모님을 만난다. 거동이 어려운 어머니와 아버지를 위해 가끔 영상통화를 연결해드리기도 한다. 영상 속 모습으로 서로를 확인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의 보일 듯 말 듯 애잔한 미소는 서로를 위한 응원일 것이다. 영상통화는 늘 어머니의“밥 잘 먹어”라는 말과 아버지의 끄덕임으로 끝난다. 어머니가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맬 때 나는 온갖 백지수표를 남발했다. 일어나면 같이 놀러 다니자고. 연극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니자고. 세상에 더없는 효녀라도 될 것처럼 많은 약속을 했다. 어머니는 이제 조금씩 혼자 걸을 수 있다. 바닥난 체력을 회복하는 중이다. 좀 더 좋아지면 퇴원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요양원에 있다. 집으로 올 날을 기약할 수 없다. 자식이 많아도 선뜻 나서서 모시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건강할 때 아무 문제가 없었던 두 분은 몸이 아프면서 삶의 질이 크게 달라졌다. 연극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주인공들은 내 부모의 모습과 닮았다. 어쩌면 이 시대 모든 부모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우리 세대는 위로는 노년의 부모가 있고 아래로는 부모가 되었거나 부모가 될 만큼 나이가 찬 자녀가 있는 낀 세대다. 지금보다 더 시간이 더 지나면 우리는 만석 할아버지와 이뿐 할머니처럼 홀로 남거나, 돌봄이 필요한 순이 할머니와 군봉 할아버지처럼 될 수도 있다. 연극을 보면서 순간순간 마음이 아팠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수십 년이 지나도 “그대를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여전히 곁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 2019-01-04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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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른에게 주는 동화, 뮤지컬 ‘마틸다’
- SBS ‘영재발굴단’이라는 TV프로그램에서 반가운 얼굴의 소녀들이 소개됐다.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마틸다’의 주인공들이다. 이번 뮤지컬 ‘마틸다’는 쿼드 캐스팅(한 배역에 배우 4명을 캐스팅하는 것)으로 4명의 어린이가 같은 배역을 맡았다. 4명의 배우 중 내가 관람한 회차의 주인공 설가은 양의 체구가 가장 작아 보였다. 하지만 뮤지컬을 보는 내내 어찌나 당찬지 정말 놀랍다는 생각을 했다. 어디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똑 부러지게 연기와 노래를 잘 해냈다. 어떤 평론가가 우스개로 말했듯이 아동학대가 아닐지 우려될 만큼 긴 대사와 노래를 한다. 다섯 살인 마틸다는 도서관의 책을 모두 읽을 만큼 독서광이고 천재성을 가졌다. 반면 마틸다의 부모는 매우 천박하고 무식하다. 마틸다를 낳을 당시에도 엄마는 화려하고, 야한 옷차림으로 춤 경연대회에 가야겠다고 하는 등 딸에게 조금의 관심도 두지 않는다. 춤바람 난 엄마와 사기꾼 기질이 다분한 사업가 아빠는 마틸다를 학대하고 방임한다. 부모는 책을 좋아하는 딸에게 책을 보지 말고 게으른 오빠처럼 TV를 보라고 윽박지른다. 엄마 역할은 뮤지컬의 대모라 할 수 있는 최정원 배우가 연기했다. 부풀린 머리, 천박하게 느껴지는 말, 옷차림이 잘 어우러져 관객에게 웃음을 준다. 학교에 간 마틸다는 천재성을 보이지만 이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사람은 담임인 ‘미스 허니’ 선생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힘이 없고, 겁이 많아 교장 선생에게 꼼짝을 못 한다. ‘미스 트런치불’이라 불리는 교장 선생은 아이들을 몹시 싫어하는 괴팍한 여자다. 아이들을 혐오해서 마틸다를 포함한 학생들을 괴롭힌다. 트런치불 교장 선생의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학교운영으로 친구들과 미스 허니 선생은 공포에 떤다. 그러나 조그마한 여자 어린이인 마틸다는 용감하게 맞서 “옳지 않아!”라고 소리친다. 무대에서 미스 트런치불이 워낙 체구가 크고 과장된 모습을 보여서 긴가민가했는데 그 역할을 남자 뮤지컬 배우 최재림이 여장을 한 것이었다. 올백의 쪽진 머리를 하고 어깨를 부풀린 투피스, 긴 부츠를 신었는데 그 모습이 참 잘 어울려 재미를 더했다. 아이들이 여러 줄의 긴 그네를 타는 장면은 무대를 벗어나 관객석까지 닿을 듯 아슬아슬하게 펼쳐져 신선했다. 뮤지컬 ‘마틸다’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한 아이가 자신의 행복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옳지 않은 세상을 향한 재기발랄한 일침이 돋보이는 이 뮤지컬은 어린이만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어른에게도 주는 메시지가 커서 가히 어른 동화라 해도 될 만하다. 어른들도 자기주장을 잘하지 못하고 사는데, 아니라고 생각되면 아니라고 외치는 용감한 마틸다의 모습이 매우 인상 깊다. 또한, 아이들이 많이 등장해서인지 매우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뮤지컬이다. 등장하는 어린이 배우들을 보니 우리나라 뮤지컬의 장래가 매우 밝겠다는 생각에 흐뭇하다. 지금도 당찬 아이가 불의에 맞서 당당하게 허리에 두 손을 짚고 외치는 카랑카랑한 대사 “옳지 않아!”가 귀에 맴돌고 있다.
- 2018-12-21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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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은 지금 박항서 열풍
- 12월 15일 저녁 9시 30분, SBS에서 2018년 AFF 스즈키 컵 결승 2차전을 중계했다. 베트남과 말레이시아 간의 경기였는데 시청률이 인기 드라마 수준을 넘어 무려 20%대를 기록했다. 결과는 베트남이 1대0으로 말레이시아를 꺾고 우승했다. 열광하는 베트남 사람들을 보며 2002년 한일 월드컵 때의 환희가 그대로 떠올랐다. 이 경기를 주목한 이유는 박항서 감독 때문이다. 그는 베트남 U-23(23세 이하) 축구대표팀을 3개월 만에 2018년 아시아축구연맹 U-23 챔피언십에서 준우승이라는 성적으로 이끌었다. 이뿐만 아니라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도 베트남 축구대표팀을 사상 최초로 4강에 진출시켰다. 그의 나이 올해 60세, 거스 히딩크 감독 밑에서 배운 리더십과 테크닉을 베트남에 가서 꽃피운 것이다. 국내 프로팀 감독을 맡았던 시절에는 좋지 않은 성적으로 외면당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보기 좋게 활약하며 인생의 절정기를 맞이했다. 그의 미담도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부상 선수를 마사지해준 일, 비즈니스석을 선수에게 양보한 일 등 그의 배려 넘치는 행동 하나하나가 베트남 국민을 더욱 열광시켰다. 외교관 수백 명이 해도 못 할 일을 해내고 있는 그가 자랑스럽다.
- 2018-12-19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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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의 아그네스’ 닥터 리빙스턴 役 배우 오지혜
- 처음에는 “무슨 추모공연이냐” 반문하며 차갑게 돌아섰다. 공간예술을 하던 이를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추모한다는 말인가. 의미 없다며 외면하려던 찰나 불현듯 생각났다. “선배님이 이 연극에서 연기 참 잘했지.” 좋은 작품을 한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평소 성격답게 세상과 쿨(?)하게 안녕하고 떠난 그녀를 대신해 무대에 오르기로 했다. 조명이 켜진다.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나긋하게 깔리던 닥터 리빙스턴 역의 윤소정, 아니 배우 오지혜(吳芝惠·50)가 빛을 따라 걸어간다. “안녕, 무대에 계신 엄마.” 왜 우리 엄마를 추모하시려는 거죠? 10월 5일 동양예술극장에서 막이 오르는 연극 ‘신의 아그네스’의 닥터 리빙스턴 역에 배우 오지혜가 낙점됐다. 작년 6월 향년 72세 나이로 작고한 윤소정 배우 추모 헌정공연의 의미가 있는 이번 공연에서 27년 차 중견배우인 오지혜가 윤소정의 역할을 맡았다. 자신의 또 다른 직업을 ‘엄마아빠 딸’이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배우 오지혜. 우리나라 대표 배우 오현경과 윤소정의 딸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했던 영화감독 윤봉춘의 외손녀, 1960~70년대 한국 영화 중흥기를 이끌었던 시나리오 작가 윤삼륙의 외조카로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조금 의아했어요. 나야 엄마를 누군가가 기억해주는 것이 고맙기는 한데 왜죠? 하루 정도의 추모제는 이해하겠는데 추모공연이라잖아요. 좀 미적거렸더니 이번 ‘신의 아그네스’를 기획하신 신연욱 대표님이 제가 안 해도 작품을 무대에 올리겠다 하더라고요.” 작년 6월 갑작스레 패혈증 증세를 보이다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떠난 배우 윤소정. 오지혜의 말을 빌리면, 영화 필름 빨리 돌리기하듯 허망하게 세상과 이별을 고했다. 생사라는 것이 인간의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예쁘고 멋진, 아름다운 모습만을 남기고 떠난 배우가 오지혜의 어머니 윤소정이다. 그런데 이건 좀 아니었다. ‘故 윤소정 선생 추모 헌정공연’이라는 부제가 붙었는데 배우인 딸이 출연을 안 한다? 게다가 닥터 리빙스턴 역할을 하기에 그녀 나이가 적역이었다. “머리에 그림을 좀 그려봤어요. 제가 공연 보러 갈 거 아니에요. ‘잘 봤어요, 수고하세요’ 하고 자리 뜨는 모습? 이건 좀 아니지? 딱히 바쁜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하기로 했죠. 결론을 말하면 우리 연극인들이 윤소정 선배님을 그리워하며 ‘그 사람이 참 잘했었던 작품이지’라고 하면서 좋은 작품을 하나 올린다! 그게 이번 공연의 주제랄까요?(웃음)” 닥터 리빙스턴을 연기하면서 애써 윤소정을 소환해낼 생각은 없다. 무엇보다 현재 입장에서 닥터 리빙스턴을 읽어보니 너무나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배역이었다. “엄마가 리빙스턴 역할을 워낙 잘해서 그렇지 이미지는 제가 더 맞아요. 내가 더 박사스러워. 그리고 여기 캐릭터 딱 나예요. 옳은 거, 그른 거 엄청 막 따지고 드는 게 말이죠. 작품 연습을 하다가 연출가가 저한테 하는 말이 ‘딱히 연기하실 거 없이 무대에 오르시면 되겠네요’ 그러더라고요.” 그래도 문득 자신의 입을 통해 엄마 윤소정의 목소리가 언뜻 나온다고 했다. “공연의 해석이 예전과 다르긴 해도 어떤 면에서는 조금씩 겹쳐지는 부분이 있을 거예요. 제가 비극 연기할 때 엄마의 모습이 보인다는 얘기를 듣곤 했거든요. 실제로 연습할 때 엄마 연기했던 것이 생각나잖아요. 살짝 소름이 돋았어요.” 아그네스를 꿈꾸던 소녀, 성장통을 겪다 “‘신의 아그네스’를 처음 접한 게 중학교 2학년 때였어요.” 1983년 ‘신의 아그네스’ 초연 당시 오지혜가 살던 아파트 지하 마을회관에서 공연 연습을 했다. 학교 갔다 집에 오면 연습실로 가서 책상 밑에 쭈그리고 앉아 배우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아그네스를 연기하던 (윤)석화 언니가 그때 스물일곱 살이었어요. 아그네스가 최면에 걸려서 아이 낳는 장면이 있어요. 어린 나이에 너무 민망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고요. 그러면서 아그네스 역할이 내심 좋았어요.” ‘신의 아그네스’는 어린 오지혜에게 꿈의 무대였다.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졸업 당시 연기로 주목받았기 때문에 내심 아그네스 역할을 기대했다. 그런데 대학 동기인 신애라가 아그네스 역을 맡았다. 마음속에 상처가 났다. “안 예쁜 여배우 설움을 평생 받아서.(웃음) 제가 데뷔했을 때 엄마가 세상물정 모른다면서 여배우는 향후 100년은 무조건 예뻐야 한다고 하셨어요. 병원에 갔더니 당시 턱 성형비가 400만 원이었어요. 엄마한테 원판 불변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면서 대신 그 돈 주시면 유럽여행 다녀오겠다고 했어요. ‘지혜 씨 연기는 잘하는데, 좀…’ 이런 얘기를 제가 살면서 얼마나 많이 들었겠어요? 한참 후 나이 좀 먹어서 고현정 씨 컴백 드라마였던 ‘봄날’(SBS)에서 재즈 가수로 나왔어요. 별로 연락도 없던 언니가 전화를 하더니 ‘텔레비전에 사람 얼굴이 나오니까 너무 좋더라(웃음)’ 하는 거예요. 나이 육십 된 여배우도 얼굴에 손대잖아요. 죽어라고 버텼더니 이제는 선생님 소리 들으면서 늙어가는 것 같아요. 어영부영하다 보니 벌써 오십이 넘었네. 아그네스는 아니지만 리빙스턴 역도 하고 말이죠.” 미안하단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신의 아그네스’는 아기를 낳은 뒤 잔인하게 살해한 20대 초반의 수녀 아그네스, 그녀의 정신분석을 위해 수녀원으로 온 닥터 리빙스턴과 원장 수녀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연극이다. 1979년 미국의 존 피엘마이어가 쓴 이 작품은 종교적 관점의 기적과 구원에 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이번 공연에서는 기적이라는 주제를 현 사회와 좀 더 연결시켜 바라보고자 했다. “제가 먼저 발제했지만 연출가도 공감했던 부분이에요. 이 시대의 기적은 학대받던 아이가 세상으로 나와서 상처를 치유하고, 정상적인 관계를 맺고 스스로 행복을 찾아가는 사람으로 커가는 거라고 봐요. 국가와 사회, 가정과 학교가, 시스템이 상처받은 아이를 구원하는 게 기적인 거죠.” 어른들로부터 제대로 된 도움 한 번 받지 못하고 해맑은 얼굴만 남기고 세상을 떠난 아이들이 결국 우리 시대가 낳은 아그네스라고 했다. 초기 연극이 양심과 신, 신앙, 기적에 관한 이야기라면 2018년에 보여주고자 하는 아그네스에는 아동학대와 기성 간의 부조화, 아이들을 구하지 못한 죄스러움을 담았다. “세월호 사고가 났을 때 많이 힘들었습니다. 연극배우로서도 회의가 왔고요. 시인인 제 친구는 몇날 며칠 고민해 시를 들고 광장에 나가 자신의 시를 시민들에게 읽어주더라고요. 위안을 주는 예술. 그런데 저는 몇날 며칠 대사를 외우고 무대에 서왔지만 사회적인 역할과 동떨어져 있었어요. 배 안에 타고 있던 아이들이 내 딸보다 한두 살 많았어요. 유가족이 거의 다 제 또래였기 때문에, 안 그래도 배우들은 남의 감정에 빨리 이입이 되는 편이잖아요. 죽을 것 같았어요. 언젠가 미안함을 전하고 싶었는데 마침 ‘신의 아그네스’가 저한테 온 거죠.” 열심히 안 뛰면 내 것은 없다 ‘신의 아그네스’ 연습으로 한창 바쁜 요즘. 오지혜만의 닥터 리빙스턴을 만들어가고 무르익은 연기자로서 도리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라다니는 것이 하나 있다. 소위 부모님의 후광을 받고 태어난 사람으로만 보는 날선 시선이다. 나이 먹을 만큼 먹었고 이제 그만할 때쯤 됐는데 유독 오지혜에게만은 가혹해 보인다. “엄마를 추모하기 위해서 이번 연극을 하는 거잖아요. 누군가 저에게 ‘역할을 유산으로 받았네?’ 하더군요. 데뷔하고 지금까지 들어온 얘기지만요. 아! 내가 정말 무지하게 열심히 안 하면 안 되겠구나. 인생을 몰라서 너무 아이 같다는 생각이 콤플렉스였어요. 그래서 20대 때 배낭 메고 미친 듯이 여행 다녔어요. 큰 자산이었죠. 정말 최고의 선생은 여행이에요. 나중에 여행 책도 써볼까 해요.” 천생 배우인 부모님 밑에서 자란 것 때문에 받은 편견 외에 남들에게 모나게 보인 이유가 있다. 때때로 회자된 오지혜의 소신발언이 문제됐다. 그녀는 이 시대의 약자를 위해 사회 참여를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다고 느꼈다. 지난 몇 년간 그녀의 사이다 발언에 미디어들이 예민하게 반응하던 때가 있었다. 아버지 오현경은 앞에는 나서지 말라고 했다. 어머니 윤소정은 달랐다. “어렸을 때도 아빠는 혹시 데모하면 저더러 뒤에 서라고 하셨어요. 엄마는 ‘우리 아버지 故 윤봉춘 감독님께서 말씀하시길 예술가로서 동시대 사람들에게 동시대의 문제를 제시하고 슬픔을 공유시키지 않는 것은 예술가가 아니라고 했다. 지혜 이야기가 맞다’ 하셨어요. 외국은 연예인이나 사회 지도층이 나서서 행동하면 지지하고 응원하는데 우리는 그렇지 않더라고요.” 그녀는 지난 두 정권에서 블랙리스트 문건에 이름이 올랐다. 꽤 오래 라디오 DJ를 했는데 하루아침에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제가 말하는 게 불편하다고 개편도 아닌데 잘렸어요. 처음에는 그런가보다 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어요. 심한데? 장난이 아닌데? 할 정도로요.” 10년을 블랙리스트에 오른 연예인으로 낙인 찍혀 있다 보니 덕분에 책에 파묻혀 사는 시간이 많았다. 매일이 여행이고 산책이었다. SNS에 글을 쓰고 일상을 정리하는 시간을 지속했다. 이 세상에 없는 엄마에게 “우리 엄마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제가 그렇게 묶여 있는 동안 저도 도와주셨어요. 여섯 살 때부터 무대에 섰는데 끝까지 한 번도 쉰 적 없이 말이죠. 평생 소녀 가장으로 살았던 게 지겨웠나봐요. 뭐가 급한지 제 책 나오는 거도 못 보고 가버리셨네요. 엄마가 책을 정말 기다렸어요. 원래 계획대로라면 5월에 나오는 거였는데 늦어졌어요.” 장례를 치르고 난 두 달 후 “딸? 책 언제 나와?” 하고 엄마가 그렇게 기다리던 에세이 ‘날씨맑음-오늘도 여행 같은 하루’가 출판됐다. 지금까지 SNS에 적었던 글들을 모아 만든 책. 책 표지를 열고 본문을 채 읽기도 전에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엄마에게’라는 문구 때문에 눈물부터 쏟아냈다. 어디 나가서 쥐어박히고 다니는 딸이었지만 엄마한테는 크나큰 자랑이었다. “훗날 글 쓰고 살고 싶은데 어쩌다 수필집이 나왔어요. 다음에는 소설도 쓰고 싶고 아직 아무한테도 안 보여줬는데 단편소설도 쓰고 있어요.” 인터뷰를 마치면서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 소감을 물었다. “엄마는 ‘이런 감정으로 대사를 쳤구나’ 혹은 ‘나랑 해석이 다르네’ 하는 부분도 있어요. 연기에 맞고 틀린 건 없잖아요. 보면서 엄마의 해석이 또는 제 해석이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 있는 거겠죠. 참 의미 있고 재미있어요. 특히 부모와 같은 직업인에 무대 위에 서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감정이잖아요. 이런 자산을 가지고 태어난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신께 감사드립니다.”
- 2018-09-25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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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용도변경’ 무조건 다 쓰고 가자!-변용도 동년기자
- 평범하게 사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들 한다. 1990년대 후반 IMF를 악으로 깡으로 견뎌야 했던 부모 세대에게 묻는다면 ‘평범했노라’ 회상하는 이는 극히 드물 것이다. 넥타이를 매던 손놀림이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된 어느 날 아침부터 부지런히 살아야만 했던 수많은 아버지 중 변용도 동년기자도 있었다. 남들보다 이른 ‘용도폐기’ 인생을 딛고 잇따른 ‘용도변경’ 요구에도 능숙 능란 살아온 인생. 세월 역경을 딛고 여유로운 귀촌생활에 도시생활 잘 섞어가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어봤다. 푸른 들판이 바라보이는 땅콩집에 산다 인터뷰가 있기 며칠 전, 변용도 동년기자와 점심식사를 하다가 지금 살고 있는 집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내와 가깝게 지내던 이웃사촌 부부와 마음이 맞아 경기도 고양시에 대지를 사들이고 건물을 지어 두 가구가 같이 사는 이른바 ‘땅콩하우스’에 산다고 했다. 텃밭을 일궈 봄부터 가을까지 다양한 채소를 따먹고 집 주위 논밭 다니며 사진을 찍기도 한다. 변용도 동년기자는 우렁이 알과 관련한 기사를 ‘브라보 마이 라이프’ 온라인에 게재하며 귀촌해서 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아침마다 찾아오는 참새에게 모이도 가끔 준다고.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누리는 귀촌생활이라니. 마침 8월호 커버스토리가 귀농·귀촌 이야기라 변용도 동년기자의 집에 방문하기로 했다. 햇빛 잘 드는 텃밭에서는 상추, 오이, 가지, 파 등이 잘 자라고 있었다. 집 안 마당에 깔아놓은 잔디도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아내 이흥열 씨가 집에서 딴 부추로 만들었다며 부추전을 부쳐 내오신다. “논에 가면 우렁이도 있고 오리도 봅니다. 가을이면 밤도 많이 떨어져요. 사실 이곳에는 안사람 때문에 왔습니다. 이렇게 한번 살아보고 싶다 하더라고요. 대신 아내가 제 매니저 역할을 종종 해줍니다. 지방 강의가 있을 때 운전을 해주기도 하고 주변 역까지 차로 바래다주고 마중도 나오고 말이죠.” ‘좌절할 시간에 뭐든 했다 멀리 내다보이는 들이며 밭이며 마음 참 편안하게 해주는 곳에 사는 것을 보니 부럽기도 하다. 이 정도면 성공한 인생을 사는 사람 아닐까? 현재 변용도 동년기자의 직업은 전문강사다. 여가 설계와 생애 재설계뿐만 아니라 사진이나 스마트폰으로 찍는 사진 등을 또래 시니어에게 가르친다. “정년퇴임 후 여가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취미생활이라든지 봉사활동, 학습 이런 것들에 관해 강연합니다. 제 경험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요. 다행히 강의를 듣는 분들이 잘 호응해주셔서 강의시간이 즐겁습니다.” 뿐만 아니다. SBS러브FM ‘유영미의 마음은 언제나 청춘’ 리포터로 시니어 소식을 전하고 있다. 시니어 자격으로 노크할 수 있는 매체란 매체는 두루 섭렵했다. 글을 좋아하다 보니 저서도 출간했고 육십 넘어서부터는 사진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최근에는 연기에 관심이 생겨 연극무대에 설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미투 운동을 ‘춘향전’에 접목한 창극 ‘어화둥둥 아.우.성’에서 변사또 역으로 출연합니다. 50플러스영등포센터에 있는 연극 소모임 작품인데 저는 회원은 아니고 이름이 특이해서 뽑혔대요. 이래봬도 제가 고등학교 때와 군 시절에 연극무대에 서본 경험이 있거든요. 7월 30일 공연이고 10월에도 서울시청에서 공연한다는군요.” 말 그대로 액티브 시니어의 삶을 살고 있는 이가 바로 변용도 동년기자다. 하지만 은퇴는 그의 생각보다 빨랐다. “마흔일곱 살에 회사 그만뒀거든요. 쌍용화재 영남권 본부장이었는데 IMF 앞두고 하루아침에 해임됐습니다.” 꽤나 잘나가던 시절이었다. 우리나라 보험 상품을 최초로 개발한 이들 중 한 사람이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낚시보험, 골프보험 등 특색 있는 보험에서부터 가정종합보험, 해양시추보험 등을 개발했다. 텃새 심한 제주도권 본부장으로 지낼 때 만났던 직원들은 아직까지도 변용도 동년기자가 제주에 떴다 하면 만나기를 청한다. “회사에서 나오고 나서 참 많은 일을 했어요. 청학동 산골에서 나고 자라다 대학교를 다녀야해서 서울로 왔고 졸업한 뒤로 회사에만 있었으니 제가 뭘 어떻게 했겠어요. 회사 나와서 처음으로 한 사업이 만화방이었습니다. 화정 L마트 옆에서 한 3년 했어요. 요즘 만화방이 유행이던데, 예전에 집에서 만화 보던 식대로 드러누워서 만화를 볼 수 있게 만들었는데 잘됐어요. 처제에게 인수하고 부대찌개 집을 한 1년 했습니다. 술도 팔다 보니 늦게 끝났습니다. 안사람 고생이 심했죠.” 힘에 부쳐 부대찌개 가게를 팔았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 들어간 곳이 당시 호황을 누리던 생활정보지 회사 건물. 보직은 조경관리사였다. “고양, 일산 이쪽에서 생활정보지가 상당히 잘됐습니다. 그 회사 건물에서 조경관리사를 뽑더라고요. 말이 좋아 조경관리사지 쓰레기도 치우고 허드렛일 다 했죠. 그때 월급이 40만 원이었습니다. 제가 가끔 강의할 때 그 시절 이야기를 하는데 ‘명색이 대기업 임원이던 양반이 대비전 마당쇠 했다’ 그래요.” 나무 좀 가꾸다 쓰레기 치우고, 단풍 치우고, 잔디도 깎았다. 마음이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런 것도 기회라 생각했다. 열심히 하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겼다. “한창 정육식당 바람이 불 때였어요. 생활정보지 회사가 500평 정도 잔디밭을 가지고 있었어요. 거기다 정육식당 하면 딱 좋겠다 생각하고 회사에 건의를 했더니 그럼 저더러 점장을 하라더군요. 마당 쓸다가 대형 식당 점장이 된 거죠. 처음엔 젊은 사람 시키라면서 못하겠다고 고사했는데 그동안 제 얘기를 들었는지 믿고 맡기더라고요.” 마음에 안 차도 열심히 덤벼들었더니 새로운 길이 열렸다. IMF 때는 드라마 엑스트라 출연도 해봤다. 정치인의 주례가 잠시 금지됐던 시절에는 예식장 전속 주례사도 했다. “여하튼 돈 되는 일이라면 다 했습니다. 지나고 보니 잘했든 못했든 이 모든 것들이 나중에 큰 자산이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지금 제가 사람들 앞에서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는 거예요. 어쨌든 기회가 되면 그냥 한번 도전해보자고요. 규모가 작건 소소하건 해보면 뭐든 얻는 것이 있습니다.” ‘중요한 한 가지, 하고 싶은 것을 한다 변용도 동년기자를 만나서 얘기하다 보니 ‘안 해본 일이 거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제대로 인정받을 때까지 파고드는 근성은 타고난 것 같다. 가족을 위해 살고 자신의 행복을 찾기 위해 쉬지 않고 문을 두드리고 찾아다니게 된 계기가 있다고 했다. “두 친구가 비슷한 시기에 죽었어요. 건강하던 친구들이 하루아침에 한 명은 산에 갔다가, 한 명은 차를 몰고 가다가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간 거야. 술도 안 먹고 건강관리도 잘했어요. 다른 친구는 100억대 자산가였고요.” 죽고 나니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어느 날 허망하게 갈 수도 있는 인생,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바람처럼 불었다. 그래서 시작한 게 사진이었다. “어렸을 때 친구 권유로 ‘촌놈의 세상보기’라는 문패를 달고 인터넷 사이트에 글을 쓰고 있을 때였습니다. 디지털 카메라가 마침 있어 글 쓸 때마다 사진과 같이 올렸어요. 좀 더 잘 찍고 싶고 배우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두 친구가 죽고 난 뒤에 사진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기 시작했죠.” 점점 사진에 취미가 붙으면서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사진을 찍을까 고민을 하게 됐다. 일산동구청에서 하는 무료 사진교실이 있다기에 찾아가 일주일에 두 번 사진도 배웠다. “때마침 첫째 아들이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온라인 쇼핑몰 사업을 하겠다며 사두었던 카메라가 있었어요. 아이가 그 사업을 접으면서 카메라를 저에게 줬습니다.” 2010년 7월에 사진 공부를 시작했고, 그해 10월에 공모전에 당선됐다. 스물여덟 번 도전 끝에 이뤄낸 결과였다. 시니어 기자로서 다양한 방면에서 두각을 보이고 블로그에서도 덤덤하게 인생 표현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방송 프로그램 출연 요청이 들어왔다. 케이블TV 출연 뒤 KBS ‘아침마당’에 은퇴준비 전문강사 중 사진 분야 강사로 출연하며 인생에 큰 계기를 맞이했다. 진짜 다른 사람들 삶에 귀감이 되는 전문강사가 된 것이다. “육십이 돼서 사진을 배우기 전까지는 먹고살기 위해 이 일 저 일 가리지 않고 살았습니다. 이제 여유가 좀 생겼어요. 요즘은 아침이 되면 사진기를 들고 나갑니다. 장애인 시설에 가서 사진 찍어주는 봉사도 하고요.” 물론 변용도 동년기자의 사진 실력은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서도 빛을 발한다. 온라인에 게재하는 기사에 적절한 사진은 기본이고 다른 동년기자 취재에도 사진기자로 참여한다. “2017년 1월호 ‘브라보 마이 라이프’ 커버스토리에 장영희 동년기자가 취재했을 때 제가 사진을 찍어드렸습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 물으니 사진을 가르치는 학교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변용도 동년기자의 집 3층은 개인 사진 전시 공간으로 쓰인다. 최근 ‘한 달 자서전 쓰기 프로그램’을 통해 써낸 자서전에서 자신을 청학빛그림학교 교장으로 소개한 바 있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죠. 영상도 배우고 싶고, 책도 3년에 한 권은 내고 싶어요. 무엇보다 사진을 더 잘 찍고 싶고 말이죠. 사진이 빛그림이잖아요. 사진은 카메라로 쓰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또는 카메라로 그리는 수채화이기도 하고요. 제 사진 전시회 제목도 ‘카메라로 그리는 수채화’였습니다. 저희 집 3층도 좋은 전시 공간이니 야외전시도 할 수 있겠죠. 두세 명은 이곳에서 충분히 합숙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아침에 주변을 돌변서 산책도 하고요.” 훗날 때가 되면 아내 이흥열 씨와 함께 이 지역 저 지역을 돌아다니며 살고 싶다고 했다. 집의 규모를 땅콩하우스로 줄인 것도 훗날 여행을 하면서 살 계획이 있기 때문이란다. “이곳저곳 다니면서 사진도 찍지만 사람들을 찾아가 봉사도 하니 찾아가는 사진교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사람하고도 오랫동안 얘기했습니다. 지금은 강아지 때문에 못 가요. 아직은 챙겨줘야 하니까.” 집 안 가장 따뜻한 자리에서 이불 깔고 사는 반려견 헨리 때문에 아직은 계획을 이행할 수 없다고 했다. 함께 산 지 19년, 앞도 잘 못 보고 귀가 나빠져 잘 듣지도 못해 재롱도 부리지 않지만 가족이기에 늘 마음이 쓰인다. ‘용도변경’ 그리고 ‘다쓰가’ 인터뷰를 마치고 변용도 동년기자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자신을 뒷받침하는 두 가지 용어인 ‘용도변경’과 ‘다쓰가’에 대한 설명이었다. “첫째 사자성어가 용도변경입니다. 후반생을 바쁘고 즐겁게 살자고 만든 말입니다. 60세에 제 삶을 용도변경했습니다. 사진이 그 출발점이었고요. 취미에 머물지 않고 영역을 확대해 강사로 방송인으로 사진강사로 저술로 활동하고 있죠. 현재 사진작가로 나름의 브랜드도 만들었고요. 포토스토리텔러, 제가 만든 세계 유일한 말이에요. 마지막으로 ‘다쓰가’는 ‘다 쓰고 가자!’를 세 글자로 줄인 말입니다. 은혜를 되갚고 경험과 지혜, 재물을 다 쓰고 가는 것을 후반생 삶의 철학으로 삼고 있습니다.” 인터뷰가 있던 날에도, 뭔가 물어보려 연락했던 오늘도, 여전히 바삐 살고 있는 변용도 동년기자. 그렇게 부지런히 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지만 이미 걸음을 옮겨 어디론가 떠나 걷고 있다. 너무도 이른 절망 속에서 희망의 빛을 찾고 행복한 삶을 사는 모습에 미소가 절로 스민다. 브라보 3기 동년기자 릴레이 인터뷰를 본지 에디터가 진행합니다.
- 2018-08-13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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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미, 천사 같은 마음씨와 내공으로 매력 발산하는 국보급 배우
- 김수미 씨와는 각종 행사장에서 몇 차례 마주친 적이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말을 트고 지낸 건 ‘문화예술 최고위과정’에서다. 당시 내가 사회를 봤는데 귀빈소개를 할 때 “국민가수 하면 조용필이 있고, 국민여배우 하면 이분이다”라고 분위기를 띄우면서 그녀를 소개했다. 그날 식사시간에 같은 테이블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하면서 친해졌다. 그녀와 만나 직접 대화를 하기 전에는 “배우 김수미의 연기는 최고지만 여자로서는 내 타입이 아니다”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생김새를 떠나 우선 드세 보이는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 후 또 다른 식사 자리에서 깊은 얘기를 나눈 후 내 선입견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음을 자성했다. 천생 여자이면서 천사같이 착한 마음씨를 지녔고 삶의 철학도 깊었다. 호불호(好不好)가 강한 것도 이봉규와 코드가 맞았다. 나는 김수미 씨가 좋지만 두세 번 만나 식사를 한 나를 그녀가 좋아할지는 알 수 없었다. 어찌되었건 나는 그녀의 성격이 마음에 든다.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간도 쓸개도 다 줄 만큼 천사같이 헌신적이다. 반대로 마음에 안 들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싫다는 표현을 확실하게 하고 만다. 그래서 마음을 주고받는 친구도 많지만, 그녀의 화끈한 호불호 성격 때문에 가끔 불화의 구설수에 오르내리기도 한다. 김수미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그녀가 직접 만든 정성스런 음식 선물을 안 받아본 사람이 없다. 서두에 설명한 ‘문화예술 최고위과정’에서 강원도 홍천으로 워크숍을 갔을 때, 김수미는 일정상 참석하지 못했다. 그 대신 그녀가 직접 담근 열무김치, 묵은지, 간장게장, 보리굴비 등 100인분이 봉고차로 배달되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며칠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100명이나 되는 원우들을 위해 준비했던 것. 그런데 그 맛이 일품이어서 또 한 번 기절초풍했다. 여러 방송을 통해 김수미의 요리 솜씨는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직접 맛을 보고는 무르팍을 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 많은 양의 김치와 간장게장을 만들었는데 이토록 맛있을 수가? 공장도 아닌 보통 가정에서 음식의 양이 많아지면 맛을 내기가 쉽지 않다. 더욱이 열무김치는 날짜에 맞춰 적당히 익힌 것이라서 그 정성도 대단했다. 거기 모인 요리깨나 한다는 여인네들이 이구동성으로 혀를 찼다. 배우로서 방송인으로서 엄청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힘든 그녀가 어떻게 100인분의 양을 준비했고 이렇게 맛까지 있을까? 그녀는 그 이유에 대해 “내가 이 평생에 제일 그립고 행복했던 시절이 어렸을 때 우리 집 평상에서 쭉 식구들이 둘러앉아 밥 먹을 때였다. 그 추억이 너무 좋고 엄마가 보고 싶으면 나도 모르게 부엌으로 들어가서 엄마가 해줬던 음식을 해본다. 자주 부엌에 들어가 요리를 해왔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음식을 만들어도 힘들지 않고 즐겁다”고 말했다. 밥 잘해주고 사람 잘 챙기는 누나 최근 방송국에서도 그녀의 요리를 높이 사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바로 tvN의 ‘수미네 반찬’이다. 이 방송에서 김수미가 다양한 요리를 선보였는데 그중 단연 눈에 돋보인 요리는 묵은지볶음. 그녀는 자신만의 독특한 노하우를 설명할 때 강한 카리스마를 선보이며 요리 솜씨와 산전수전 다 겪은 인생 대가의 면모를 뽐냈다. 방송 후 각종 매체에서 분석한 전문가들의 평가에 따르면, “세련되거나 자극적인 맛은 없지만 묵직하게 전해지는 정성, ‘수미네 반찬’이 매일 먹는 우리 밥상을 더욱 따스하게 만들어줬고 밥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웠다. 정확한 계량 대신 정성으로 이뤄진 김수미의 레시피는 브라운관을 넘어 안방까지 훈훈함을 전했다”고 극찬했다. 특히 ‘눈대중’이 주목을 끌었는데. 끓는 물에 묵은지와 무청, 올리브유를 넣어주는 과정에서 물은 ‘자박자박하게’ 올리브유는 ‘니글거리지 않도록 알아서’ 조절하라며 그녀 특유의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설명해 스튜디오에 있던 방송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녀는 계량컵이나 온도계 그리고 시간계측기 등을 사용하지 않고 대충대충 눈대중으로 요리를 한다. 그 모습은 마치 요리 전문가가 아닌 보통 우리네 엄마가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는 모습과 오버랩이 되어 더 큰 공감대를 형성했다고 본다. 이를 반영하듯 시청률은 1회 3.6%(닐슨코리아 전국 유료가구 기준)에서 2회 4.5%로 껑충 뛰었다. 특히 오후 8시라는 시간대의 한계와 지방선거 개표 등의 이슈에도 불구하고 케이블 및 종편 동시간대 1위를 기록했기에 그 의미가 더 컸다. 방송에 같이 참여한 셰프들이 김수미의 호통에 꼼짝 못하는 것도 그녀의 캐릭터에 눌려서라기보다 김수미식 눈대중의 절묘함에 기가 죽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녀만의 독설유머에 반한 대중 외국의 요리학교나 학원에서 유명한 강사로부터 다년간 가르침을 받았거나 수련을 통해 완성해낸 레시피를 가지고 각종 방송 등에서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는 셰프들이 이날은 김수미 앞에서 꼼짝 못하고 오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배우 김혜자와는 매우 절친한 사이이고 둘 다 한국인의 대표적인 어머니를 연상케 하지만, 이미지는 많이 다르다. 김혜자가 전형적인 현모양처의 이미지라면, 김수미는 억척스럽고 성격 괄괄한 욕쟁이 어머니 이미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김수미가 오히려 요리의 달인이고 정작 현모양처 이미지인 김혜자는 찌개도 제대로 못 끓인다고 소문이 나 있다. 요리 말고 김수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몇 개 있지만 그중 하나가 독설유머다. 한량 이봉규도 나름대로 독설유머를 한다고는 하지만 김수미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이다. 그녀의 그런 점을 내가 존경하기에 김수미의 팬인지도 모른다. 또한 나의 그런 면을 좋아하는 내 아내도 김수미의 광팬이다. 어느 행사장에서 한 강연자가 강연 도중 다소 흥분이 되기도 했고 청중의 주목을 끌기 위해 일본인을 비하하는 약간 과한 발언을 했다. “일본 놈들이~”를 연발하며 강연을 이어가던 중 청중 속 중앙 테이블에 앉아 있던 김수미가 “나 일본 사람인데!” 하고 크게 외쳤다. 청중들 사이에선 웃음이 터져 나왔고 강연자는 웃으면서 “그런 줄도 모르고 놈~놈~이라고 자꾸 말해서 죄송합니다”라고 받아치며 그 장면을 모두가 재미있게 넘겼다. 김수미의 독설유머 한 방으로 분위기를 반전시킨 것이다. 김수미의 독설유머 일화는 차고 넘친다. 최근 방송된 SBS 프로그램 ‘미운 우리 새끼’에서도 김수미가 이상민, 탁재훈에게 독설을 날렸다. 이날 방송에 출연한 김수미를 사이에 두고 이상민과 탁재훈이 폭로전을 벌였는데 그 치열한 설전은 지켜보던 ‘母벤저스’들이 “두 아들이 서로 엄마한테 고발하는 것 같아”라고 말할 정도였다. 탁재훈이 먼저 자신의 농담을 잘 받아주지 않는 이상민을 향해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자 이를 들은 김수미가 “빚에 쪼들리다 보니 유머감각이 없어진 거 아니야?”라고 말해 이상민을 당황하게 했다. 이에 질세라 이상민도 탁재훈의 암흑기 시절을 폭로하며 반격하자, 김수미는 탁재훈에게도 “뜨거운 밥, 찬밥 가릴 때가 아니다”, “너 어렸을 때 엄마 말 안 들었지?”라며 독설유머를 날렸다. 또 계속되는 두 사람의 유치한 폭로전을 김수미가 듣고 있다가 “너희들 중2니?”라며 일갈해 녹화장을 초토화시켜버렸다. 그녀는 자신이 유머를 좋아해서 그런지 “나는 재미있는 사람을 좋아해!”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닌다. 종잡을 수 없는 마력의 배우 마지막으로 김수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로 하나만 더 말하라면, 아무래도 ‘전원일기’의 ‘일용 엄니’를 빼놓을 수 없다. 그녀는 21년간이나 일용 엄니 배역으로 열연했는데, 처음 촬영할 당시 32세의 나이에서 노인 연기까지 역대급 연기로 칭송받고 있다. 게다가 아들인 일용이 역의 박은수보다 그녀는 나이가 어렸다.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 사실을 털어놓은 적이 있는데, 녹화 때 “일용이 너 이눔 시키” 하고 혼내다가 촬영이 끝나고 나면 시치미 뚝 떼고 “선배님, 수고하셨습니다”라고 공손히 인사했다고 한다. 나와 아내는 최근 KTV에서 ‘전원일기’를 매일 방영하는 탓에 푹 빠져 산다. 2002년 겨울에 끝났으니까 오래전 드라마인데도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고 훌륭한 작품이다. 김수미의 맛깔스런 일용 엄니 연기는 가희 일품이다. 20년 전에 지금 김수미 나이의 연기를 했으니 그만큼 인생을 더 살았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그녀의 내공이 깊은 건지도 모른다. 드라마 배역에 열중하면 그 인물이 된다고들 흔히 말한다. 김수미의 실제 나이는 70이지만 경험한 나이는 100세쯤 되어 보인다. 그런데 외모와 패션의 나이는 거꾸로 50쯤 되어 보인다. 종잡을 수 없는 김수미의 모든 면이 매력으로 발산되어 국민여배우의 자리를 굳건히 하고 있는 것 같다. 30년쯤 연기생활을 더 보태 국민여배우를 넘어 국보가 되는 날을 같이 맞이하고 싶다. 그러려면 나부터 건강을 야무지게 챙겨야겠다.
- 2018-07-05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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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골이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 아내는 필자가 젊어서 코를 골며 잘 때는 피곤해서 그러려니 했단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한 단계 더 높이 발전하여 무호흡증세가 나타나니 방관할 수 없어 나와 상의를 해왔다. 자다가 숨이 멈출 것 같아 걱정이 되어 잠을 잘 수가 없다는 것이다. 코골이가 심하다는 말을 대충 듣고 넘겨온 세월이 10년이 넘었으니 무시하고 지냈는데 아내가 잠을 이룰 수 없다고 하니 이제 관심을 두고 문제점에 대한 대책을 수립해야 할 것 같았다. 실제로 사무실에 가면 노곤하고 졸리면서 자도 옛날같이 개운하지 않은 것이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아 건강에 심각한 적신호가 울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원인도 정확하게 모르겠고 마땅한 치료법을 몰라 방치하다가 어느 날 직장 근처인 지하철 2호선 선릉역(삼성역) 부근에 코골이 전문의원 간판을 보고 찾아가서 상담을 했다. 서울대 출신 의료진이 운영하는 수면클리닉 전문 병원이었다. 뒤에 알고 보니 MBC News, SBS News, ‘내몸사용설명서’ 및 ‘나는 몸신’이다와 같은 프로그램에서도 소개되고 있는 전문병원이었다. 신흥범 박사가 주치의였으며 사계의 전문가로 코골이치료관련 저서도 많이 출간하신 분이었다. 하루 저녁 병원에서 자면서 코골이 정도와 수면 방법의 문제점을 기계로 점검해야 진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장 그날 밤 입원하여 측정결과 코골이 원인을 찾아내었고 어떻게 자야 하는지 숙면을 위한 방법까지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결론은 양압기라는 기계를 착용하고 자면 숙면을 취할 수 있고 몸 컨디션도 정상적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기계의 수명은 반영구적이라 했다. 대안이 없는 상황이라 의사의 처방대로 양압기를 사서 당장 사용하기 시작했더니 코골이는 해결되었으나 양압기에서 나오는 소음도 그냥 무시하기 곤란한 단점도 있었다. 그러나 아내는 걱정하던 코골이와 무호흡 문제가 해결되니 관대하게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나의 건강도 예전처럼 좋아지고 기억력 감퇴증도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았다. 내가 처음 코골이 진단 받던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집으로 오는 길에 하얀 눈을 밝고 왔으니 금 번 겨울이 양압기 착용한지 딱 10년이 되는 해가 되었다. 원장 선생님 말씀처럼 양압기는 스위치를 한 번 수리한 이후 아직까지 잘 작동되고 있다. 양압기를 처음 구입 시 약 100만원 가까운 경비가 발생했으나 최근 임대 형식으로 월 만원 정도의 금액으로 새로운 장비를 올해부터는 사용 가능하다고 하니 경비에 대한 걱정 없이 이제 코골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양압기 사용 시 단점은 기계 장치와 연결 호스 등 부피가 커서 장거리 이동이나 해외 출장 시 부담스럽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양압기 대신 치아에 끼워서 코골이를 예방하는 구강내 장치 기구인 ‘바이오가드’를 추천받아 이를 국내외 출장 시나 타지에서 숙박을 해야 하는 경우 사용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본 장치는 코골이 전문병원에서 직접 맞춰서 구입도 하지만 구강 내 장치이므로 치과에서도 의사와 상의하여 구입이 가능하다. 단, 지속적인 코골이 치료를 위해서 나는 코골이 전문병원에서 맞춰 구입하였다. 주) 바이오가드 외관 지난 10년 동안 양압기와 구강 내 장치인 ‘바이오가드’의 덕택으로 현재 고희를 맞고 있지만 아주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 숙면을 취한 후 아침에 기상하는 즐거움은 지금도 30대의 나와 다름없이 상쾌하다. 처방을 받고 나서 안 사실이지만 코골이는 그냥 피곤하면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지만 심하면 질병으로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많은 휴유증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수면무호흡증을 치료하지 않으면 숙면방해는 물론이고, 심근경색, 심장마비, 심혈관계 질환 및 부정맥으로 인한 사망 위험이 높아질 뿐만 아니라 여러 합병증을 앓게 될 수 있다고 한다.
- 2018-03-13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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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장 잘하는 남자 김기수, 남자분들! 차라리 대놓고 예뻐지세요!
- 여자들보다 많다. 전문 메이크업 아티스트도 입을 쫙! 하고 벌렸다. 집 안방을 빼곡하게 차지한 아이들(?)의 정체. 스튜디오 사무실 가장 좋은 곳에 자리 잡은 때깔 요망진 것들! 바로 형형색색 다양한 모습의 화장품이다. 그렇다면 주인은 여자? 아니 남자다. ‘댄서킴’으로 불리던 개그맨 김기수가 웃음보따리가 아닌 화장 도구를 들고 나와 대박을 터트렸다. 들어는 봤는가? 뷰티크리에이터 김기수! 어둠 속에서 ‘예뻐지고 싶다!’를 외치던 남자들이여, 이제 당당히 세상 밖으로 나와 김기수와 함께 꽃단장 한번 제대로 해보자. 화장하는 남자의 편견을 깨다 웃기는 일로 오랫동안 사람들 앞에 섰던 김기수. 그가 2016년 11월 말, 세련된 화장을 하고 나와 자신을 뷰티크리에이터라고 소개했다. 뷰티크리에이터란 소위 화장을 통해 ‘예뻐지는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 그는 현재 동영상 사이트인 유튜브(youtube.com)와 포털사이트의 동영상 서비스를 통해 ‘꾸미고 가꿔 돋보이게 하는 방법’을 전파한다. 개인 채널과 SBS 모비딕의 ‘예쁘게 살래? 그냥 살래?’를 진행 중. 1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1억 뷰 돌파! 전 세계 1억 명 이상이 그의 동영상을 시청했다는 뜻이다. 이 여세를 몰아 작년 말 SBS 연애대상에서 모바일 아이콘 상과 한국분장예술인협회에서 주는 메이크업 어워드를 수상했다. 올 초 화장법 노하우를 담은 책 ‘예쁘게 살래? 그냥 살래?’를 출간했고 3월 말에는 자신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운 화장 제품도 출시한다. 북유럽 국가인 노르웨이의 한 방송에서도 김기수를 찾아왔을 정도이니 인기는 상상 그 이상. 대세 중에서도 대세가 바로 맨즈(남자) 뷰티크리에이터 김기수다. 불모지를 앞서 걷는 펭귄의 길을 택하다 개그맨이 아닌 뷰티크리에이터로 전향을 하고 영상을 만들어 인터넷에 올리는 그 과정이 어찌 보면 홧김(?)으로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다. 김기수는 무대 화장을 한 사진을 인터넷에 올렸다가 악성댓글에 시달렸다고. 특히 어머니를 욕하는 것은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중국에서 클럽 DJ로 활동하던 시절이었어요. 제가 트렌스젠더가 됐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졌어요. 트랜스젠더가 됐네, 돌려 깎기를 했네, 성괴(성형괴물)네. 일주일 동안 실시간 검색어 1위에서 제 이름이 내려오지 않는 거예요.” 김기수의 성 정체성에 대한 논란은 늘 있어왔지만 자신의 발언으로 성 소수자들이 눈총받을까 말을 아꼈단다. “나는 그저 내 화장 실력으로 얼굴을 가꾸어서 무대에 올라간 건데 왜 중국 성괴 같다고 그러지? 제가 당시 칩거하고 힘들어하니까 지인과 팬들이 ‘오빠 화장하는 거 영상을 인터넷에 올려보세요’라고 하는 거예요. 저도 유튜버(동영상 사이트에 영상을 올리는 사람) 남성분들의 젠더리스 메이크업(성별을 구분하지 않는 화장)을 많이 눈여겨봤었어요. 그럼 나도 저렇게 해볼까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컴퓨터를 잘 다루지도 못했지만 제대로 해볼 생각에 영상 편집을 배워나갔다. 한 달 동안 하루에 한 시간 자면서 영상을 올렸다. 첫 영상을 올리고 난 뒤 일주일 동안 댓글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이 ‘저 정도의 화장 실력이라면 자랑할 만하네?’ 했고, 저를 싫어하던 사람들이 팬으로 돌아서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어요.” 김기수는 자신이 뷰티 채널을 시작하고 1년 사이 사회적으로 맨즈 뷰티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실제로 맨즈 뷰티 산업이 크게 성장하고 있고 화섹남(화장하는 섹시한 남자), 잘생쁨(잘생기고 예쁨)이라는 신조어도 김기수의 등장과 함께 생겨났다. 남성이 당당하게 멋져지고 예뻐지는 시대를 김기수가 열었다고 해도 실로 과언은 아니다. 그는 대열 앞에 서서 걸어가는 퍼스트 펭귄(First penguin)이 바로 자신이라 생각한다. “누군가가 저에게 화장을 하지 말라 하면 지금 제 일을 그만두라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리고 남자가 이렇게 화장을 하고 있는데 그 정도의 루머가 또 돌지 않는다면 나는 이일을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에요. 관심이 있어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구나. 물론 처음에는 분했어요. 활동을 접을 생각도 했고요. 무엇보다 지금은 저에게 많은 질문을 하십니다. 남자분들도 용기를 내서 화장법에 대해 묻고요. 그런 분들을 도와드리는 것이 제 일이죠.” 분장실 옆 아역 탤런트, 화장에 눈뜨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언제부터 화장에 관심이 있었던 것일까? 뜬금없이 왜? 남자 개그맨이? 그리고 근육 팍팍 보이면서 클럽 DJ를 하는 남자가 언제부터 화장에 심취했을까? “중학교 때부터 아역 탤런트를 했는데 그때 화장에 관심이 생겼어요. 야외 촬영 현장에서 평범한 중년의 엑스트라 두 분이 트레일러에 마련된 간이 분장실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아름다운 사람이 돼서 나오는 거예요. 너무 놀라웠어요. 쇼킹했어요. 그곳이 마치 마법 상자처럼 보였어요. 불꽃이 막 파파팍! 튀는 느낌?(웃음)” 촬영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계속 분장실을 드나들었다. “그랬더니 분장사 누나가 저에게 선크림하고 크림을 주더라고요. 써보라면서요. 다음 날 그걸 바르고 현장에 나갔는데 감독님이 ‘야, 너 왜 이렇게 예뻐졌냐?’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대사 한마디 더 주시더라고요. 자신감이 붙었다고나 할까요? 그다음부터 선크림에 맞는 수분크림과 립스틱을 찾고 또 뭔가 발견하고. 코덕(화장품과 덕후의 합성어)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어린아이였음에도 주위의 시선 때문에 다락방에 숨어 화장을 했다. 그때만 해도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극명했다. “지금도 남성이 화장하는 걸 이상하게 보는 면이 있지만 그때는 더 심했죠. 남자는 화장을 하면 안 된다 뭐 이런 거요. 저 어렸을 때는 크림 바르고 밖에 나가는 남자가 몇 안 됐어요. 저 혼자 그냥 다락방에서 뭐든 발라보고, 어울리는 색을 찾아보면서 저만의 재미에 푹 빠져버렸어요. 어떻게 그렇게 숨어서 했는지 나도 참 기특해.(웃음) 그렇게 30년 동안을 해왔고, 지금 빛을 발하고 있는 거죠.” 남자들이여! 당당히 화장대 앞에 서라! 김기수가 갑자기 목소리를 죽이며 기자에게 물었다. “요즘 시니어 남성분들 등산 배낭에 뭐가 들어 있는 줄 아세요?” 바로 BB크림이랑 틴트란다. 모두가 그렇다는 뜻은 아니고 꽤 된다는 말. 그들은 곧바로 목적지로 직행하는 것이 아니다. 공중화장실에 들러 BB크림과 틴트를 바른 뒤 산행을 시작한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냐 했더니 뷰티크리에이터로 일하다 보니 그런 얘기들이 너무나 잘 들려온다 했다. 김기수의 채널 구독자 중 BB크림 바르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50대 중반의 남성도 있었다. 올리브영 맨즈뷰티 코너를 서성이는 시니어 남성에게 제품을 권해드리기도 했다. “사실 남자들이 그루밍하는 것에 편견이 있으면서도 관심들은 다 가지고 계세요. 제가 예약하려던 눈썹 문신 전문점은 3개월 이후나 돼야 예약이 가능하다고 했어요. 80%가 남성 손님이고요. 성형외과 전문의와도 얘기한 적이 있는데 실 리프팅 하러 오시는 중년 남성들이 꽤 많다고 해요. 그렇게들 몰래몰래 자기 관리하면서 화장을 하는데 저는 왜 안 되는 거죠? 관심은 있으면서 대놓고 표현하지 못하는 거뿐이잖아요.” 요즘 김기수의 개인 채널에는 남성들을 위한 화장법을 모아 따로 분류해놓았다. “3년 동안 취직 안 됐던 남성분이 제가 알려드린 화장을 한 뒤 면접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해왔어요.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이에요. 붙었다고 하잖아요. 요즘은 자기관리 잘하는 남자가 칭송받는 시대예요. 깨끗한 인상 주는 게 나쁜 게 아니잖아요.” 제발 좀 꾸미고 멋져지고 싶은 남자들이 숨지 말고 나와서 당당해졌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 2018-03-12 15: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