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리 시인 "살아 있는 한 인생은 언제나 미완성이다"

기사입력 2019-07-11 08:31:41기사수정 2019-07-11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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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와 함께하는 북人북] ‘시의 인기척’,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시인은 시를 품은 인식으로 산다”고 말하는 이규리(李珪里·64) 시인. 그런 그에게 가장 구체적이고 확실한 인식을 심어준 문장은 바로 ‘종이는 종이 아닌 것으로 이루어졌다’(틱낫한)이다. 종이는 종이 그 자체가 아닌 물, 나무, 바람, 햇빛 등 수많은 요소로 이뤄졌다는 것. ‘종이’와 ‘종이 아닌 것’이 같다는 걸 알고 난 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 이렇듯 시로써 다 말하지 못했던 깨달음을 모아 그는 ‘시의 인기척’과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에 담았다.


▲‘시의 인기척’과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를 펴낸 이규리 시인(오병돈 프리랜서 obdlife@gmail.com)
▲‘시의 인기척’과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를 펴낸 이규리 시인(오병돈 프리랜서 obdlife@gmail.com)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이후 5년 만에 펴낸 이규리 시인의 새 책은 시가 아닌 아포리즘(격언, 경구 등의 글귀)으로 채워졌다. 책에는 오랜 세월 시인이 삶과 자신에게 던져온 숱한 질문과 대답의 흔적들이 녹아 있다. 아포리즘의 형태를 가져왔지만, 책을 읽다 보면 시인다운 표현들이 눈에 띈다. 어쩌면 시를 통해서도 같은 의미를 전할 수 있었으리라. 특별히 아포리즘으로 일괄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시라는 건 굉장히 압축되고 비유되고 또 감춰져 있어서 정작 저자의 의도를 알아차리기 어려울 때가 많아요. 그에 비해 아포리즘은 말하려는 바를 더 논리적으로 드러낼 수 있죠. 그동안 살면서 제가 품었던 궁금증이나 질문들은 책과 사람을 통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어요. 나와 같은 고민을 가진 독자가 있다면 내가 정리한 답이 도움 되지 않을까 생각했죠. 그런 이야기를 보다 명징하게 전달하고 싶었기 때문에 아포리즘이 적합하다고 봤어요.”


▲이규리 시인의 ‘시의 인기척’과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표지, 시인이 직접 적은 글귀
▲이규리 시인의 ‘시의 인기척’과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표지, 시인이 직접 적은 글귀

뒤를 바라보며 지나는 삶

독자에게도 도움을 주는 글들이겠지만, 그는 집필기간 무엇보다 자신을 돌아보고 정리하는 의미있는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책을 위해 단기간에 글감을 찾아 모은 것은 아니다. 지난 10년여 동안 메모노트에 적어둔 글들을 바탕으로 3년 정도 엮는 과정을 거쳤다. 아주 오래전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함께할 메모노트는 그에게 ‘재산’과 같단다.

“메모노트는 늘 가지고 다녀요. 노트 중간에 간지를 끼우고 절반은 제 생각이나 글을 쓰고, 나머지 절반은 독서나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통해 얻은 것들을 적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좋은 글인데 이게 내 생각인지, 다른 데서 들은 이야기인지 구분이 안 될 때가 있거든요. 그렇게 쓴 메모노트 내용 중 시로 탄생한 것도 있고, 아포리즘으로 풀어낸 것도 있죠.”

▲‘시의 인기척’과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를 펴낸 이규리 시인(오병돈 프리랜서 obdlife@gmail.com)
▲‘시의 인기척’과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를 펴낸 이규리 시인(오병돈 프리랜서 obdlife@gmail.com)

이규리는 서두 ‘작가의 말’에 “오래전부터 메모되었던 글들이 모였을 때 그 흔적이 아픔이고 견딤이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썼다. 많은 것을 견디며 살았다는 그는 책에서 ‘견디고 있다’와 ‘지나고 있다’는 두 말을 ‘결혼시키고 싶다’고 표현했다. 그 독특한 문장이 지닌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누가 ‘어떻게 지내?’라고 물었는데 ‘견디고 있다’고 대답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곱씹어보니 견딘다고 하면 내가 뭔가 수고했다는 게 포함된 말 같은 거예요. 그보다 더 적확한 표현이 없을까 생각하니 ‘지나고 있다’가 떠오르더라고요. 물론 둘 다 좋고 아름다운 말이에요. 이런 말들을 새기고 산다면 경멸을 느끼는 순간이 찾아와도 잘 견디고 지날 수 있죠. 그때가 지나면 언젠가 말할 기회가 찾아오는데도 우리는 늘 성급해서 먼저 얘기해버리고 후회를 하잖아요. 견디고 지나며 살아갈 때 인간은 성숙해지고, 세상은 평화로우리라 생각하니 두 말이 참 아름답게 느껴져 짝지어주고 싶었어요.”

그렇게 누군가가 견디고 지나는 모습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처럼 그는 보이지 않는 ‘뒤’라는 존재에 대해 오래전부터 고찰했고, 그 생각들은 이번 아포리즘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의 3부에는 “뒷모습은 정확함보다 정직함에 가깝다”는 문장이 나온다. 그는 특히 시인이라면 겉이나 앞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 그 내면과 뒤의 모습까지 이해하고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우리는 즐거움을 느끼죠. 그 음식을 내놓기 위해 어떤 사람들이 얼마나 수고했는지까지는 생각하지는 않아요. 어쩌면 그날 해고된 직원이 식당 뒤에서 울고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단순히 잘 차려진 식탁만 봐서는 헤아릴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글을 쓰는 사람, 특히 시인은 보이지 않는 삶과 세계까지 살피고 이해해야 해요. 그런 점에서 앞보다는 뒤, 밝음보다는 어둠, 만복보다는 공복 쪽에 서서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시의 인기척’과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를 펴낸 이규리 시인(오병돈 프리랜서 obdlife@gmail.com)
▲‘시의 인기척’과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를 펴낸 이규리 시인(오병돈 프리랜서 obdlife@gmail.com)

완성은 과정이 머물다 멈추는 지점

이규리 시인은 불안(不安), 불리(不利), 부족(不足) 등 ‘아니 부(不)’를 지닌 단어들도 가까이하고 좋아한다. 그렇다고 ‘부’가 들어간 단어 모두를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부정(不正), 불법(不法), 불신(不信) 등은 멀리한다. 어떤 기준으로 단어들의 호불호가 나뉘는지 고민하던 그는 결국 해답을 찾았다.

“칼날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어요. 불안, 불리, 부족 등은 내가 불편하고 손해를 보기 때문에 칼날이 나를 향하지만 부정, 불법, 불신 등은 칼날이 상대를 가리키고 다치게 하죠. 그걸 발견한 뒤부터는 어떤 결정을 내릴 때면 칼날의 방향을 따져보고 판단해요.”

그렇게 인생을 알아가고 자신만의 기준을 세워나가는 동안에도 고민과 물음은 끊이지 않았다. 젊은 시절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 해답을 고요히 스스로 찾을 수 있게 해주는 연륜이 생겼다는 것. 자신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삶을 살아낸 중장년이라면 대부분의 문제는 자기 인생 안에서 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내린 답은 모두 정답일까? 그는 몇 번이고 다시 묻고, 부정해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내가 어떤 답을 내렸을 때, ‘그래 이게 맞아’라고 끝내기보다는 ‘과연 내 답이 맞을까?’라고 의문했을 때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어요. 마찬가지로 어떤 일을 할 때도 ‘완성했다’고 여기지 않으려 합니다. 화가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마지막 초상화를 그릴 때 완성에 가까운 작품인데도 18일 동안 지우고 또 지우며 다시 그렸다고 해요. 그렇게 완성이란 무언가를 계속하는 과정 속에서 멈추는 지점일 뿐이지, 완벽한 완성은 없다고 봐요. 같은 맥락에서 우리 인생 역시 죽음에 이르렀을 때야 비로소 완성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살아 있는 한 삶은 미완성일 수밖에 없고,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의문하고 부정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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