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실에 앉자마자 고재윤(65, 경희대 호텔관광대학 외식경영학과) 교수가 보이차를 내놓는다. 중국의 6대 명차에 속하는 만전(蠻磚) 보이차. 수령 500년에 이르는 차나무에서 딴 잎을 5년간 숙성시킨 차란다. 목으로 넘기자 상쾌한 뒷맛이 혀에 고인다. 진귀한 차라고 굳이 내세우지 않으나, 고재윤의 표정은 은근히 득의양양하다. 그는 보이차에 풍덩 빠져 산다.
삼년산성을 ‘유럽의 이름난 고대 산성보다 빼어나다’고 보는 이도 있다. 최고 22m에 달하는 성벽의 높이로 대변되는 삼년산성의 위용과 정밀한 축조과학을 우월하게 평가해서다. 그러나 오랫동안 별로 거들떠보는 이가 없었다. 흔히들 소가 닭 보듯 했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야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의 답사와 학술 연구가 시작됐다. 이젠 깊숙이 들여다보는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은 한국 근현대미술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장욱진(1917~1990)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미술관이다. 장욱진은 이렇게 썼다. “나는 심플하다. 이 말은 내가 항상 되풀이하는 단골말이다.” 심플! 그게 말 그대로 심플하게 거저 얻어지는 경지이겠는가? 인간사란 머리에 쥐나도록 복잡한 카오스이거늘. 명쾌한 삶의 실천과 창작의 순수한 열망
이 꽃 저 꽃 좋아라고 다투어 피어나지만 결국은 모두 진다. 사람의 일도 이와 같아 종국엔 모두 지상을 떠난다. 이 단순한 진실을 흔히들 잊고 산다, 천년만년 살 것처럼 흥청망청 시간을 허비한다. 장례 명장 유재철(61)은 이 기이한 착오에서 인생의 많은 병통이 생긴다고 본다. 그는 외치고 싶다. 기억하시오, 언젠간 닥쳐올 죽음을!
그리스의
자연과 건축은 좋은 사이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건축은 자주 자연을 도발한다. 도시 근교 산자락을 파 젖히고 들어앉은 건물들의 현란한 형형색색을 보라. 자연하고 불화를 즐기는 취향? 심술? 그러려면 그러라지, 자연이야 대범하여 그저 태연하다. 지나다니며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들만 피곤하다. ‘이응노의 집’을 향해 걸어가며 떠오르는 생각들이 이러하다.
소나무들 휘늘어져 산사 초입이 시퍼렇다. 나무 중 매양 으뜸으로 치는 게 소나무다. 고난이 덮쳐도 떠나지 않는 친구가 소나무라 했다. 사명대사는 한술 더 떠 ‘초목의 군자’라 일렀다. 솔에 달빛이 부서지면 그걸 경(經)으로 읽는 게 수행자다. 산사에 꽉 찬 솔의 푸름을, 그린 이 없이 그려진 선화(禪畵)라 해야 할까보다.
오래 묵어 한결 운치 있는
내비게이션을 따르다 보니 차가 산으로 들어간다. 자연을 한 자락 슬쩍 걸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연 속에 있는 미술관이라 들었다. 그러나 이토록 깊은 산중일 줄이야. 씨억씨억 초록을 뿜는 숲 사이 언덕을 올라 주차장에 도착하자 아예 산꼭대기이지 않은가. 기발하게도 산정(山亭) 미술관이다. 그래서 뮤지엄 산(山)? 그러나 ‘山’이 아니라 ‘SAN’이다
종교를 뛰어넘는 곳에 예술이 있을 것이다. 예술이란 자유로운 정신의 산물이기에. 그 어떤 권능에도 휘둘리거나 꼬리치지 않는 자율적 행위이기에. 그러나 자유 혹은 자율을 근간으로 삼기가 쉽던가. 매사 스텝이 꼬이고 뒤엉겨 좁은 세계에 갇히는 게 사람이다. 신의 이름을 간절히 불러 위안을 구하고서도 돌아서면 외로워 보채는 게 사람이다. 도돌이표처럼 자주 되돌아
봄볕이 포근히 내려앉은 숲길이다. 풀 틈새엔 홀로 암팡지게 피어난 노란 민들레꽃. 언제부터 몸을 들이민 놈일까, 벌이 꽃 속에서 삼매경에 잠겼다. 미동조차 없으니 이미 취해 혼곤한 게다. 영락없이 낮술에 대취해 엎어진 한량 꼴이다. 봄이란 탐닉하기 좋은 철이다. 그렇다고 다 가질 수야 있겠나. 꽃을 밝히는 벌인들 무슨 수가 있으랴. 무릇 아름다운 것
그의 집은 바다에 있다. 바다 위에 집을 짓고 산다는 얘기가 아니다. 꿈과 정신의 집, 그걸 바다에 두고 산다. 다시 말해 바다에 홀린 사람이다. 요트를 타고 대양을 누비는 모험에 심취해 달리 남은 욕망이 없다. 이렇게 몰입이 깊어지자 즐거움이 커졌다. 즐거움이 커 몰입이 깊어졌을 수도 있겠다. 여하튼 단 한 번 주어진 생을 으으 즐거운 쪽으로 몰아가는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