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과 습지와 호수를 함께 둘러볼 수 있는 둘레길이다. 고인돌박물관을 출발점으로 해 고인돌유적지와 매산재를 거쳐 분곡습지에 닿기까지의 거리는 약 4km. 역으로 분곡습지까지 차로 간 뒤 매산재를 넘어 고인돌박물관에 도착해도 된다. 분곡습지 산기슭엔 동양 최대의 고인돌이 있다.
호수를 따라 굽이굽이 휘고 꺾이는 길. 그지없이 수려한 시골길이다. 차로 휘익 지나기엔 아깝다 느끼며 한껏 서행을 한다. 숲에 사는 귀 달린 생명들은 자동차 소음이 성가실 게다. 내 길을 쉬 가자고 덤불 속에 깃든 고라니를 놀래니 이게 민폐다. 옛 스님들은 지팡이를 앞세워 땅을 노크하며 길을 걸었다. 행여 무심한 발길에 죄지은 바 없는 개미며 지렁이 밟힐까 저리 가라 통고하기 위해서였다.
야산 모롱이를 돌 때마다 풍경이 바뀐다. 혹은 솔숲 사이로, 혹은 대숲 사이로, 혹은 자작나무 군락 옆댕이로 길이 나서. 기우는 하오의 햇살을 받은 호수에, 혹은 하얀 물무늬 아롱지고, 혹은 초록 물빛 너울처럼 일렁거려서.
호숫가 나무들은 내내 호수에 시선을 던지고 산다. 물 위에 비친 제 그림자를 바라보며 한 생애를 살아가는 저 나르키소스들. 나무들의 그 붙박이 시선에도 생의 희로애락이 어릴까. 뒤죽박죽 꼬이고 풀리다 다시 꼬이는 생의 아이러니를 바라볼까. 외투 깃을 세우고 망연히 길에 멈춰 서 전율하는 겨울 나그네처럼 쓸쓸한, 저 물가 나무들의 정경.
운곡습지 구역에 이르러 차에서 내려 길을 걷는다. 이곳엔 오래된 마을이 있었다. 운곡(雲谷)이라는 지명이 붙었으니 ‘구름골’이다. ‘오베이골’이라고도 한다. 매산재, 행정재, 호암재, 백운재, 굴치재 등 다섯 고개가 이 골짜기에서 갈리거나 모여 ‘오방곡(五方谷)’으로 통했다. 오베이골은 오방곡의 이 지역 사투리다. 오베이란 이름, 오 맛깔스럽구나. 사투리란 우리가 고이 간수할 만한 언어의 순수 오지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산야의 젖을 물고 살았던 오베이골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1983년 영광원자력발전소의 냉각수 조달을 위한 저수지가 이곳에 조성되면서 모든 주민이 물러났다. 농토의 경작도 철저하게 금지되었다. 냉각수의 오염을 우려해서였다. 이후 이곳은 인적 끊긴 적막강산일 따름이었다지. 그렇게 30여 년이 흐르자, 어라,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생태계가 완연히 살아난 것. 삵과 수달과 담비, 황조롱이와 황새와 팔색조 등 멸종 위기종 생물들이 대거 나타난 것. 폐농경지가 습지로 변하며 생물들의 서식 조건이 좋아진 덕이었다. 비무장지대(DMZ)에 버금갈 생태 경관을 보유하게 된 이 분곡습지는 2011년 람사르습지로 등록되었다. 자연과 사람은 길항한다. 사람이 극성을 부리면 자연이 망가진다. 사람이 발을 빼면 자연이 살아난다.
겨울 가뭄 탓일 테지. 물을 담지 못한 습지 일원의 경관은 아쉽게도 무덤덤하다. 봄비 내리고 봄꽃들 자지러지게 필 때면 습지에 수생식물들이 번성하리라. 이채로운 물 위의 야생 화원이 펼쳐지리라. 봄은 벌써 발길을 내딛을 채비를 하는가? 운곡서원 앞 매화나무엔 꽃망울이 소담스레 맺혀 있다. 소녀의 볼우물처럼 앳되고 곱살한 매화꽃이 머잖아 설레며 피어나겠지. 겨울과 봄의 어간에서 들썩이긴 사람도 마찬가지다. 천국과 지옥 사이를 오가는 게 인생이지만, 삶도 사랑도 죄짓는 일의 연속방송극일 수 있지만, 매화 망울에서 봄을 예감하는 자의 마음은 소망으로 슬며시 부푼다.
운곡습지를 뒤로 하고 매산재 고갯길로 접어들자 참 걷기 좋은 숲길이 가지런히 펼쳐진다. 우리네 삶의 골목골목엔 축축한 상처가 고여 있기 십상이지만 이 숲길에선 가슴 밑바닥부터 말끔한 생기가 돋는다. 이를 신비하다 말하지 못할 것도 없겠다. 고개 넘어 길 끝엔 고창고인돌 유적과 고인돌박물관이 있다. 유적지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 477기가 무리를 이루고 있다.
고인돌. 가장 오래되고 가장 단단하며 가장 비밀스런 무덤이다. 빗돌이 있을 리 만무하니 파묻혀 흙으로 돌아간 주인공의 정체를 알 수 없다. 그저 사람의 덧없는 소멸에 관한 적시다. 바위처럼 닳지 않는 영원을 향한 갈망의 표식이고 말이다. 영원이라니. 하루살이에 불과한 게 사람이라지만 영원은커녕 단 하루라도 제대로 사는 일조차 벅찬 게 삶이거늘. 그러나 죽어서라도 영원을 꿈꾸는 게 사람이다. 영원한 고요와 침묵은 거저 얻어지겠지만.
맵찬 추위 때문이겠지. 길 위에 인적이 끊겼다. 산과 산 사이 길에 적막감만 흥건하다. 풍광은 곳곳마다 수려해 미학의 경연을 펼친다. 티 없이 미끈한 기암과 정교한 단애, 백색 비단을 치렁치렁 휘감은 양 하얗게 얼어붙은 냇물, 거기에 나목들이 수묵을 입히고 솔숲이 초록을 칠하니 가히 가작이다. 저마다 자신들의 살과 뼈를 재료로 써 화폭을 채운 게 아닌가. 길을 덮은 포장재와 몇몇 상점들이 이물감을 자아내지만 그건 시야에서 걷어내면 그만일 일. 발길에 탄력이 붙는다.
화양구곡(華陽九曲)은 화양동 일대에 전개되는 아홉 군데 승경을 일컫는다. ‘곡(曲)’이란 일테면 자연 속의 정원이다. 원본은 중국의 무이구곡(武夷九曲). 경영주는 주자(朱子). 주자는 무이구곡을 노닐며 성리학적 유토피아를 구가했다. 이 주자학파의 충실한 당원이었던 조선의 거유(巨儒)들도 무이구곡을 본 삼아 흔히들 ‘곡’을 꾸렸다. 그들은 벼슬에서 물러난 뒤엔 청산에 은거해 무욕의 노년을 누리는 게 선비의 도리라 여겼다. 때가 되면 낙향을 했다. 감흥이 돋는 경승지에 ‘곡’을 조성해 공부와 음풍영월을 병행했다. 화양구곡의 경영주는 우암 송시열이다.
고요한 길을 걷자니 안심이랄까, 허심이랄까, 모처럼 평온해진 마음을 자각한다. 헐벗은 겨울나무 숲을 바라보자니 짠하여 애틋하나 알고 보면 정말 짠한 건 나의 진상임을 자각한다. 맥락 없이 엄습하는 자괴감이 싫지만, 그러나 이 순간 나는 나로 돌아온 셈이다. 헌걸찬 바위벼랑에 굳세게 선 소나무의 내심엔 무엇이 들었을까? 메마른 절벽 끝에서 기어이 견디는 일, 살아남는 일. 미친 듯이 두 눈을 부릅뜨고 폭풍 속을 항해하는 어부의 위험이 이보다 더할까.
초록은 어디서 건져오는가? 차고 흐린 겨울 하오에 눈부신 초록을 뿜는 솔이 경이롭다. 저 요동치는 초록을 보라. 잎잎이 낱낱이 기적이지 아니한가. 초록이라곤 미세한 기미조차 없는 이슬과 빛과 바람을 움켜쥐고서 소나무는 초록을 토한다. 지수화풍을 능히 거머쥐는 실력과 전략이 아니고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창의가 아닐 수 없다. 바위틈에 틀어박은 실낱같은 잔뿌리 하나하나마다 용을 쓰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생존이니 찬연하다.
계곡을 건너 숲으로 스며드는 뱁새 한 마리는 또 어떠한가. 놈은 옷을 지어 입을 방법이 없으니 그냥 맨몸으로 산다. 태어날 때 걸치고 온 한 벌 털옷만으로 혹한을 견딘다. 단지 나뭇가지 하나나 마른 덤불을 집삼아 겨울밤을 보내며, 새벽이면 부리나케 깨어 명랑하고도 낙천적인 노래를 부른다. 세찬 날개를 펼쳐 거침없이 허공을 비상한다. 산야의 얼음 같은 겨울을 사는 뱁새의 생의(生意)에서 또 느낀다. 그 완벽한 자립을. 그 고독한 자유를.
화양구곡의 절승은 아무래도 암서재(巖棲齋) 일원이다. 암서재는 냇가 숲속에 세워진 아담한 조선 정자. 기묘하게 늘어서거나 솟거나 겹친 바윗장 틈서리에 들어앉은 우암의 서실이다. 우암이 세상의 풍파와 겨루었던 항해일지는 영광과 파란의 이중주로 점철되었다. 노론(老論)의 우두머리로 정쟁의 회오리 속에서 살았던 그는 결국은 임금의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우암의 사후 이곳 화양동엔 그를 사액한 화양서원이 들어섰다. 이때부터 화양동은 정치적 불나방들의 소굴로 둔갑했으며 각축과 폐단과 착취가 극에 달하게 되었다. 오죽했으면 매천 황현이 화양서원의 건달들을 일컬어 ‘서민들의 가죽을 뚫고 골수를 빨아먹는 남방의 좀’이라 했을까. 대원군조차 화양동을 말을 탄 채 진입했다고 해서 유생들에게 패대기를 당했다.
오늘따라 미세먼지가 짙다. 유목민처럼, 난민처럼 허공을 떠도는 저 누런 혼돈. 산림에 들어와서조차 미세먼지를 들이마셔야 하다니. 황당무계한 현실이지만 자연을 거스른 문명의 야만이 불러들인 필연이다. 알 수 없는, 알 수 없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저 카오스.
탐방 Tip
널리 알려진 관광지구이지만 사람 드문 겨울엔 호젓하게 걸을 만하다. 숲과 기암과 물의 하모니를. 눈 내리면 사진가들이 일부러 찾아든다. 우암의 유적지로는 암서재, 화양서원, 만동묘 등이 있다.
이상적인 병원 터는 어디일까. 아랍 의학의 아버지 라제스는 도시 곳곳에 신선한 고깃덩이를 걸어두고 장소를 물색했다. 가장 부패가 덜 된 고기가 걸린 곳에 병원을 세웠던 것. 한의사 김두섭 원장(62, 세종한방힐링센터)은 조용한 자연 속에 병원을 꾸리는 게 옳다고 봤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라는 생각으로. 해서, 자못 후미진 산속으로 귀촌했다. 굳이 외진 산골까지 찾아들 환자가 몇이나 될까마는, 그는 즐겁다. 자신의 지향과 실천에 만족하기에.
준비기간은 길었다. 귀촌을 내심에 담고 이미 십수 년 전에 터를 장만해뒀다. 젊으나 늙으나 사람의 대망(大望)은 주로 서울로 쏠린다. 하지만 일찌감치 산골살이를 숙원으로 삼은 김두섭 원장에겐 오직 귀촌이 소망스런 답이었던 거다. 공들여 낫을 갈고 나서야 땔나무를 벨 수 있다. 오랫동안 공들여 귀촌 준비를 해왔기에 본격적인 시동은 한결 가뿐했다. 드디어 산골에 들어가 시작한 건 4년여 전 군의관으로 근무했던 군생활을 마치고서였다.
육사 37기 출신으로 군에 들어가 대령으로 예편하기까지 흐른 세월은 37년. 군에서 인생의 절반쯤을 살았구나. 애당초 군에도 의업(醫業)에도 청운의 꿈을 묻은 바가 없었다지. 우연이 그의 길잡이였던 모양이다. 소싯적에 부풀린 청운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부자로 살고 싶다는 것, 그 하나였더란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성장기의 시골생활에 넌더리가 났기에.
“가난이라는 게 너무도 싫었어요.
9남매를 건사하느라 부모님은 모진 수고를 하셨지만 다들 늘 배를 곯았어요. 아, 나는 이다음에 농고를 나와 새마을지도자가 돼 돈을 벌 거야! 꿈이랬자 겨우 그쯤이었죠. 머리가 굵어지면서는, 그러니까 고3 땐 그 가당찮은 꿈을 버리고 해양대학을 가기로 맘먹었어요. 외항선을 1년만 타면 1억을 번다는 얘기를 듣고서였죠.”
“해양대학에서 육사로 목표를 바꾸었군요.”
“해양대학 입시 준비 중에 연습 삼아, 실력 테스트 삼아 육사 시험을 봤는데 묘하게도 덜커덕 붙었어요. 뜻을 두지 않았음에도 우연히 엉겁결에 육사 생도가 돼버린 겁니다. 그러나 곧 방향을 잃었어요. 육사 나와서 뭐하나? 농사 기술을 배울 곳도 아니고, 돈을 맘껏 벌 일도 못되고,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인가?
1학년 말에 그런 심각한 회의에 빠졌어요. 그러던 차 과외활동으로 참여한 동양철학반에서 침술을 만나게 됐습니다.”
“그게 한의사로 변신한 우연한 계기?”
“바늘 하나로 환자를 다루는 침술에 강렬한 흥미를 느꼈어요. 침을 잘만 배우면 돈을 모을 수도 있을 것 같았고, 그래서 열심히 침술을 익혔어요. 그러자 점차 한의학 전반으로 관심이 확장됩디다. 한의사가 되고 싶다는 포부가 생기더라고요. 결국 장교 임관 뒤 우여곡절을 거쳐 경희대학교 한의대에 들어가게 됐어요. 육본에서 운영하는 위탁교육생 자격으로 5년간 공부하고 졸업했죠.”
육사 생도와 운명처럼 만난 한의학
한의사 자격증을 받은 김 원장은 이후 줄곧 한방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전역 시의 직책은 국군수도병원 건강증진센터장. 건강증진! 그게 김 원장의 평생 소임이자 방향이다. 즐겁게 살지 않고서 건강할 수 없다. 건강하지 않고서 즐거울 수 없다. 생의 모든 명암은 어쩌면 몸 건강 문제에서 파생하거나 귀결된다. 불가의 통신에 따르면, 이 세계의 근본은 고(苦). 죽음 앞에 서 있는 게 생이지 않던가. 불친절한 죽음이 우리를 방문하는 날까지 가급적 건강을 지속하고자 용을 쓸 수밖에 없는 게 모든 살아 있는 존재의 숙명이다. 늘그막에도 삶은 때로 슬프도록 아름답다. 눈부신 노을빛처럼. 하나 몸은 부질없이 낡고 닳고 시들어간다.
머잖아 조락할 수밖에 없는 건강에 관한 쓸쓸한 사념은 낯선 게 아니다. 그러나 김두섭 원장의 생각은 영 다르다. 어허! 그게 아니오! 늙어서도 청년의 몸으로 살 수 있는 이치가 여기에 있는 것을! 그는 그리 탕탕 외치고 싶은 것 같다. 들어볼까. 경청해 모실 만한 대책이 흘러나올 수도 있으니.
“제가 내심 장담하는 게 뭐냐면, 난 얼마든지 장수할 자신이 있다, 칠팔십 살이 되더라도 청년처럼 건강한 몸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런 겁니다. 지난 수십 년간 수많은 환자를 진료하고 치료하고 관찰했는데요, 늘 궁금했던 건, 일단 병 치료를 잘 마쳤더라도 일상생활로 복귀하면 다시금 병증이 도지는 사람이 많다는 점이었어요. 이게 왜 이러지? 무엇이 원인이지? 궁리 끝에 내린 결론은 나쁜 생활습관이 근본 병인이라는 거였어요. 타성에서 벗어나 좋은 습관을 길들이는 게 무병장수의 첩경이라는 얘기.”
“매사 습관의 노예로 살다 스스로 궁지에 몰리는 게 사람이죠. 그걸 알면서도 쉬 고치지 못하는 게 인생이라는 희비극일 테고.”
“무엇보다 식습관부터 바꿔야 해요. 저의 식생활을 들어보실래요? 부디 따라 해보시길. 아침엔 잡곡밥을 지어 말린 뒤 프라이팬에 볶은 튀밥 형태의 밥 한 공기를 아주 천천히 먹습니다. 아주 천천히! 이게 핵심이에요. 천천히 먹기 위해 오래 씹어야만 목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좀 딱딱한 밥을 일부러 만드는 겁니다. 천천히 오래 씹을 경우 밥알에 침이 충분히 섞여 위장으로 내려갑니다. 입안의 침! 이거 놀라운 보약이에요. 침에 함유된 효소(酵素)와 프티알린(ptyalin). 이게 음식물이 위로 내려가기도 전에 입안에서부터 벌써 소화 작용을 해내는 겁니다.”
“침이 입안에서 소화 작업을 왕성히 하도록 음식물에 침을 충분히 섞어줘라? 그게 결국 위장기능을 극대화한다?”
“위장은 내장기관이라는 공장 시스템에서 중추 역할을 합니다. 위라는 장비가 부드럽게 가동할 경우, 위장이 튼튼할 경우, 오장육부가 평화로워져 온갖 병을 예방하거나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겁니다.”
“점심도 저녁도 딱딱한 밥을 먹는 거예요?”
“지나친 음식 금욕은 오히려 스트레스를 가져오는 법. 점심은 몸이 원하는 대로, 먹고 싶은 대로, 최대한 잘 먹습니다. 밥상 가득 다양한 찬을 차려 식구들과 둘러앉아 천천히 즐겨요. 저녁엔 금식을 합니다. 밤엔 콩팥과 간이 하루치 독소를 거르기 위한 맹활약을 하거든요. 이럴 때 음식을 집어넣어 훼방을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정 출출하면 과일즙 한 잔을 마시면 되고.”
좋은 습관이 무병장수의 첩경
인생은 육십부터라지? 이젠 백세 시대라지? 성난 수말처럼 부지런히 뛰어 세상의 정글을 괴롭게 통과한 뒤의 노후란 실로 진정한 낙원의 삶을 누릴 찬스일 수 있다. 그러자면 건강해야 한다. 그래서 누구나 무병장수를 선망한다. 어떤 신들은 인간이라는 별난 종족이 오래 사는 걸 싫어할 수도 있다. 인간의 세력이 커지면 지상의 소음과 잡음도 그만큼 커지니까. 인간들 때문에 도대체 시끄러워 편히 낮잠을 잘 수가 없다니까! 그렇게 툴툴거리는 신도 있을 게 아닌가. 그렇다면 거북이보다 목숨이 짧고 플라스틱 바가지보다도 빨리 썩는 게 인간 몸뚱이임을 명석하게 알아 저승사자가 호명하는 대로 겸손히 응하는 게 순리일 성싶다. 하지만 욕망의 공식이라는 게 그렇게 간단하던가. 내남없이 한사코 병 없이 오래 살기를 숙원사업으로 여기지 않는가. 그 숙원사업을 성취하고 싶걸랑 아침밥만이라도 침을 담뿍 섞어 드소서! 김 원장의 훈수가 그렇다.
엄동설한에도 맨발로 돌아다니는 건각이 있다. 굳이 양말을 꿰신지 않아도 발이 이미 따뜻해서다. 이 사람은 벌목장에서 얻어온, 절집 대웅전 기둥만 한 통나무를 둘러메고 사뿐사뿐 행진한다. 절구통처럼 굵다랗게 토막 낸 통나무를 퍽퍽 도끼로 패 순식간에 장작을 만든다. 힘 좋기로 인근에 소문났다지? 이 중뿔난 장정이 바로 김두섭 원장이다. 난 아직 청년이오! 늘 그리 외치는 모양이다.
건강상태가 유난하니 귀촌의 나날이 영일(寧日)이다. 자연 속에 살고자 자원한 산골살이에 별다른 시름이 없다. 이게 거저 주어진 게 아니란다. 지난날 오랫동안 시난고난 지병에 시달렸단다. 의사라도 병을 달고 살 수 있는 일이지만, 여하튼 스타일 심히 구겼겠다. 그러나 그는 병을 털어냈다. 지병에서 해방되고서야 안심과 자족이 있는 일상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이고.
“일찌감치 위장에 이상이 왔어요. 소위 시절부터 근 30년, 그 긴 세월을 위장병에 부대끼며 지냈어요. 그 덕분에 술이라는 걸 거의 마시질 못하고 군생활을 했어요. 위장이 비정상적으로 축 처져서 오는 소화 장애, 즉 심한 위하수증이었어요. 만성피로에 늘 시달렸죠. 원인은 과식에 있었는데 침, 뜸, 부황, 보약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소용이 없더라고요.”
“30년 된 병증을 결국 무엇으로, 어떻게 다스렸죠?”
“침이나 보약 같은 치료 수단은 결국 보조제에 불과하다는 걸 뒤늦게 알았어요. 즉, 나쁜 생활습관을 개선하지 않고서는 건강을 회복하기 어렵다는 걸 깨달은 거죠. 간소하고 절제 있는 생활, 지나친 이기심에 사로잡히지 않는 정신, 자연을 마음에 담는 태도, 그런 게 좋은 건강과 좋은 삶을 가져온다는 겁니다. 식습관의 개선은 물론, 규칙적인 운동도 그 무엇에 앞서 중요해요. 귀촌 초기에 철저하게 식습관을 변화시키고 좀 격한 스트레칭을 하자 몸이 대번에 달라집디다. 현재 저의 몸 상태나 체력은 20대 시절보다 한결 낫습니다.”
고통이 엄습해도 얻어 채울 게 있다
이미 속세에 물든 범인으로선 모범적인 생활을 고수하며 살기가 쉽지 않다. 자기 억압적인 절제는 자칫 인생을 따분하게 만들 수도 있겠고. 조선의 거목 추사 선생은 사람이 마땅히 즐겨야 할 세 가지 일을 꼽았다. 첫째는 독서, 둘째는 음주, 셋째는 호색. 독서를 첫째로 친 걸 보면, 야야 놀더라도 공부는 하고 놀아라, 뭐 그런 뉴스가 아닐까 싶지만, 일테면 하늘과 땅의 결합을 지상의 인간들이 재연하는 신성한 의식이 성(性)이지 않겠는가. 김 원장의 생각을 들어볼까.
“노년에 이르러서도 주색을 참답게 사용하는 게 현명하겠죠. 그게 무질서에서 벗어난 것이라면 사랑의 범주에 들 테니까. 그러기 위해서도 건강하게 살자는 겁니다. 비아그라 없이도 행복하게 살자는 겁니다. 몸 건강이라는 기초공사를 충실하게 하자는 거, 가급적 자연 가까이로 귀촌해 온유한 품성을 기르자는 거, 저 숲속에서 상생하는 생명들처럼 나 혼자만이 아니라 남들과 함께 잘 사는 노후를 즐기자는 거, 이런 것들을 생각의 중심에 놓고 삽니다.”
생활습관을 바꾸라! 산속에서 맨발로 돌아다니는 남자의 입에 붙은 소리가 그렇다. 귀촌으로 모호한 낭만을 구가할 게 아니라, 몸을 남김없이 쓰는 노동으로 심신의 건강부터 복구하라는 얘기에도 뼈가 들어 있다. 편리 대신 불편을 추구해 기른 야성으로 자연을 닮으라는 권장 역시 대안이겠지.
“이런 생각 곧잘 합니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부족하기에 태어났겠지. 완벽했다면 이미 전생에 해탈했겠지. 그런 생각으로 불편과 고통마저 긍정하며 살고 있어요. 불편과 고통이 엄습했을 때, 내가 깨졌을 때, 그때 오히려 얻어 채울 걸 발견하게 되니까. 생활을 바꿀 수 있는 기회이니까.”
김두섭 원장이 주는 귀농준비 Tip
•검소한 생활을 작정하고 귀촌하자. 그게 자연에 가까워지는 길이다.
•가급적 모든 일들을 손수 처리하자. 인건비를 들여가며 남의 손 빌릴 것 없이 몸 단련 삼아 직접 노동을 하자. 젊게 사는 방법이다.
•감상적인 생각을 앞세운 귀촌은 실패의 첩경이다.
•처음부터 큰돈 들여 집 살 필요 없다. 일단은 세를 얻어 살며 차근차근 적응하는 게 옳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겨울 칼바람이 맵차게 몰아치는 산골이다. 마을의 품은 널찍해 헌칠한 맛을 풍긴다. 산비탈 따라 층층이 들어선 주택들. 집집마다 시원하게 탁 트인 조망을 자랑할 게다. 가구 수는 50여 호. 90%가 귀촌이나 귀농을 한 가구다. 햐, 귀촌 귀농 바람은 바야흐로 거센 조류를 닮아간다. 마을 이장은 김종웅(76) 씨. 그는 이 마을에 입장한 1호 귀농인이다. 김 씨의 이주 이후, 그의 소개나 추천에 이끌려 이곳으로 덩달아 귀촌한 지인들도 많다고.
귀농 이전, 김종웅 씨는 줄곧 서울에서 살았다. 특별할 것도 모자랄 것도 없이 무난하게.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서울을 벗어나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더 이상 서울에서 살다간 목숨을 보존하기 어렵겠는걸!” 그런 투의 독백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절절하게 치올라 목으로 터져 나오는 걸 깨닫고서였다. 몽둥이를 높이 쳐든 빚쟁이들에게 주야로 쫓겨서가 아니었다. 위험한 사상을 유포하거나 발칙한 범죄를 자행해서도 아니었다. 그는 선량한 소시민의 노릇을 다하며 살아왔노라 자부하는 인물이다. 사적으로 원한을 사거나 공공의 적으로 몰릴 행장 따위를 눈곱만치라도 지은 바가 없었기에.
그렇다면 뭣 땜에? 단순하고도 절박한 이유 하나가 있었다. 몸이 자지러지는 적색경보를 울렸던 것. 심혈관질환을 가지고 있었던 김 씨는 어느 날 졸도를 해 응급실 신세를 졌더란다. 뇌졸중이었다지. 다행히 위기를 잘 넘기긴 했으나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쯤에서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면 하나밖에 없는 명줄을 졸지에 놓칠 수도 있는 상황임을 직시하고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던 것 같다. “옳다구나, 시골로 가자!” 여러 밤을 잠 못 이루고 눈을 끔벅이며 심오한 연구를 하다 어느 아침에 내린 결론이 그랬다. 얘기를 들어볼까.
“아이쿠, 이러다가 나 죽겠구나, 칠십도 안 된 나이에 그럴 순 없지, 설령 죽을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산골에서 죽자, 과수 농사를 지어 좋아하는 과일이나 실컷 따먹다가 죽자,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어요. 그런데 말이죠, 시골에 살다 보니 건강이 엄청 좋아지더라고. 그 무엇보다 서울에서 받고 살았던 스트레스라는 게 사라진 덕분이라 봐요. 맑은 공기와 깨끗한 먹거리도 도움이 됐겠죠. 귀농으로 얻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건강 회복은 가장 크게 얻은 선물입니다.”
사람의 몸뚱이는 내남없이 조만간 땅에 묻혀 한 줌 풋거름으로 돌아간다. 그러하니 숨이 붙어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남은 시간을 선용해야 한다. 김 씨는 산골을 요번 인생 최후의 근사한 정처로 점찍은 뒤 미련 없이 서울생활을 청산했다. 미련이 남을 만큼 화려하거나 열광할 만한 서울생활도 아니었다. 근면과 성실을 인생의 교사로 여기고 오로지 바지런히 일하고 또 일했을 뿐이다. 그로써 처자를 어엿하게 건사하고, 아울러 건전한 세상과 명랑 사회 건설에 암암리에 이바지했던, 그지없이 평범하고 떳떳한 서울살이였다.
일 중독이 행복한 에고이스트
김 씨는 오랫동안 전파상을 운영했다. 전파상이 사양길에 접어들면서부터 자동차 정비일을 했다. 그의 별명은 맥가이버. 드라이버 하나면 뭐든 뚝딱 뜯어 고치고 헤집어 살려낸다. “누가 뭐래도 난 유능한 전자 기술자야!” 그런 자부심으로 자신의 직분에 충성과 충실을 다했던 모양이다. 도대체가 방황이나 일탈은 물론, 시련과 굴곡이 없는 인생이었다는 거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신비할 지경이지만, 운명의 신은 보디가드처럼 그를 각별히 수호해 이 살벌한 세상의 파랑을 사뿐히 건널 수 있도록 도운 것 같다.
그런 김 씨에게 귀농이란 어쩌면 생애 최초이자 최후의 도전이거나 반전일 게다. 그는 아내 방성녀(71) 여사에게 ‘고지식한 남정네’라는 소리를 넌덜머리나도록 숱하게 들으며 살아왔다. 그러고 보면, 조용하고 점잖은, 좀 딱딱한 이 남자의 돌연한 산골 이주란 ‘남산 위의 저 소나무’가 도봉산으로 이사 간 것만큼이나 신기하고 기발한 행보라 할 수밖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난제를 기어이 풀어야만 할 특유의 사정이 그만큼 절박했겠지. ‘건강 회복’이라는 미션 말이다.
“전파상이 호경기일 땐 수입도 짭짤했어요. 하루에 쌀 두세 가마에 해당하는 수입을 올렸으니까. 그것참, 그 당시 재테크에 눈떴다면 꽤나 재미를 봤을 테지만, 그런 재주, 도통 없었기에 그저 저축이나 부지런히 했어요. 서울을 뜨려고 자산을 정리해 보니 7억 정도의 자금력이 되더라고. 이것의 절반가량을 귀농 비용으로 썼어요. 농토 구입과 집짓기에 필요한 자금으로.”
“귀농하신 지 9년이 지났죠? 일흔 나이를 목전에 두고서 농사를 택하셨어요. 그게 무모한 선택은 아니었을까? 최대치로 몸을 쓰는 게 농사라서. 게다가 건강에도 적신호가 왔는데.”
“제가 천성적으로 일을 좋아해요. 나는 왜 사는가, 무엇이 가장 즐거운가, 어느 날 제가 조용히 앉아 곰곰이 생각해보니 오직 일이 좋아 일에 사는 사람이더라고요. 서울에서도 열심히 일했지만, 서울보다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시골에선 더욱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하게 되더라고요. 농사는 제게 적격이거든요. 게다가 과일을 좋아해 과수원을 하고 있으니 일석이조라 할까.”
“오직 일을 좋아한다는 말씀, 얼른 곧이들리질 않아요.(웃음) 일보다 더 즐거운 것들이 많은 게 인생이지 않나요?”
“집사람이 저를 두고 말하길, 너무나도 부지런한 사람, 불쌍할 정도로 일만 아는 남자, 놀아본 적이 없어 노는 방법 자체를 모르는 남자라 합니다. 그러나 어쩌나? 저는 일에서 성취감을 느껴요. 아마도 일종의 일 중독자이겠으나 저는 그게 만족스러워요.”
“과수원의 수익성은 어때요?”
“지금은 사과농사를 하지만 몇몇 작목을 두루 경험해봤어요. 매번 신통치 않더라고. 농사 기술 자체가 서툴기도 했지만 판로가 늘 문제였어요. 현재는 사이버 판매망을 구축해 그럭저럭 무난하게 굴러갑니다. 부부 두 사람의 인건비 정도 건지는 수준이지만 이마저도 행운이지 않겠어요? 이 늙은 나이에 일하고 싶은 만큼 실컷 일할 수 있다는 건 농사가 주는 최상의 즐거움이고요.”
사람이 너무 한가하면 수상한 생각이 몰려든다. 그러나 오직 일벌레로만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는 동물이다. 휴식과 놀이도 일종의 생필품이지 않겠는가. 저 명랑하고도 흥겨운 옛날 유행가가 외쳐대듯이, 우리는 틈틈이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를 구현해야 하는 것이며, 늙어서도 짬짬이 잘 놀아야만 한다. 카를 마르크스가 얘기했듯이, 단지 노동에만 매몰된 인간은 짐승보다 불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김 씨는 일을 숭상하기를 단 한 번도 포기하지 아니한 채 살아왔다. 마르크스가 아니라 마르크스 할아버지가 왕림해 뭐라 고상한 조언을 해도 자신의 소신을 수정할 용의가 전혀 없는 인물이다. 서울에서도 그랬듯이, 지지구재재구 귀여운 새들이 종일 노래를 하는 목가적인 전원에 내려와서도 그는 자신에게 일의 대가(大家)라는 임명장을 수여하고서 쾌재를 부른 것 같다. 이렇게 자신의 몸을 오직 자신의 일을 위해 고용한 사람의 집 안팎은 먼지 한 점 없이 청결하다. 농장일을 마쳤더라도 밤늦게까지 외등을 밝혀 마당을 쓸고 닦고 다듬어야 직성이 풀려 비로소 발 뻗고 편한 잠을 자는 사람! 일테면 하늘이 와지끈 무너진다는 특급 뉴스가 들려온다 하더라도 오늘 할 일은 기어이 오늘 당장 완수하는 사람! 그의 아내 방성녀 여사의 증언이 그렇다. 아내는, 이런 일벌레 남편과 사는 일이 때로 끔찍하지 않을까? 숨 막히지 않을까? 이쯤에서 잠깐 방 여사님의 얘기를 들어보자.
“한마디로 일에 미친 양반이에요. 죽기 전엔 못 고칠 버릇이라 봐요. 귀농할 땐 이제 좀 즐기며 부부가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고자 했지만, 이미 몸에 밴 습성이 안 바뀝디다. 한잔합시다, 하면 안 해! 놀러갑시다, 하면 싫어! 개미처럼 일하고 다람쥐처럼 굴레 속에서 빙빙 도는 인생이지요. 건전하고 씩씩한 남편이지만 일 중독을 행복으로 여기는 에고이스트예요. 무엇으로 어떻게 이 양반을 뜯어말릴꼬? 남편으로서도 일이 오직 즐거울 리 있으랴, 하는 생각에 새삼 연민을 느끼기도 해요. 언젠간 저 양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가득 맺히더라고요. 아, 당신, 힘들어하는구나, 덧없이 흐르는 노년을 아쉬워하는구나. 둘이서 껴안고 함께 엉엉 울었어요. 그러면 뭐하나? 이튿날이면 다시 일벌레로 돌아가는걸.(웃음)”
한 달 생활비는 50만 원
일의 대가 김종웅 씨의 일 종목은 농장일과 가사에 그치지 않는다. 귀농 이후 뒤늦게 독학한 컴퓨터 실력을 바탕으로 괴산군청 사이버 기자로 맹활약을 해왔다. 충북 도지사가 임명한 충북 귀농 홍보대사로도 활동한다. 게다가 마을 이장까지 맡아 동분서주! 76세 노인이 후루룩 손쉽게 해치울 수 있는 일들은 아니니 가히 장관이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노구에다 청년의 정신을 이식하는 방법을 일찌감치 터득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귀촌·귀농인들은 흔히 동네 이장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야만 정착이 빠르다고 널리 알려졌다. 이장을 마을의 절대 권력자로 보는 눈들도 있지 않던가. 하나, 김 씨의 생각은 다르다.
“이장의 횡포나 전횡을 말하는 사람이 많지만, 제 경험으로는 그게 다 옛날 얘기예요. 요즘 이장들은 엄청 심한 시집살이를 합니다. 마을 심부름꾼일 따름이에요. 업무도 너무 많아요. 공무원 일의 절반쯤은 도맡아 하니까. 활동비 20만 원이 나오지만, 무척 힘이 들고 내 시간 빼앗기고, 봉사정신이 아니고선 감당하기 쉽지 않을 거라.”
“봉사정신으로 일한다 하더라도 고충이 많겠죠?”
“전엔 원주민과 귀촌·귀농인 사이에 갈등과 충돌이 잦았어요. 그걸 중재하고 화해시키는 일, 그게 이장 몫이라 여기고 나름 애썼어요. 지금은 원주민 비율이 확 줄어 텃세 같은 걸 부릴 세력 자체가 거의 사라졌지만.”
“아마도 이 마을에 전무후무한 일꾼 이장이 납셨다고 정평이 났을 듯.”
“깐깐한 이장이기도 해요. 시골사람들은 흔히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고 태우는데요, 전 그걸 가만히 두고 보질 못하겠더라고. 속으로 꾹꾹 누르고 참노라면 스트레스 받으니까.”
“한 달 생활비는 얼마나 쓰시죠?”
“도시에서보다 지출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게 귀농의 장점입니다. 우리 부부는 한 달 평균 50만 원쯤 쓰며 살아요. 그 이상 지출할 때도 있지만, 남아도는 달도 많았어요.”
“앗! 겨우 50만 원?”
“돈 들어갈 게 없습디다. 먹거리는 거의 자급자족을 해요. 술, 담배 안 하지, 외식 안 하지, 불가피한 외출 외엔 틀어박혀 일만 하지, 뭐 돈 들게 있을까나. 약간의 부식비, 공과금, 차량 유류비 정도만 해결하면 되니까. 애당초 집사람이랑 50만 원으로 살자 다짐하고 귀농했는데 자연스럽게 실행되더라고.”
눈치 빠른 독자라면 뒤에 이어진 김 씨의 언설을 이미 미루어 짐작하리라. 돈보다 귀한 가치, 돈 주고 살 수 없는 만족과 행복의 요소에 관한 견고한 철학의 표명이 있었으니, 그건 일에 관한 예찬이 아니면 달리 무엇일 수 있으랴.
인터뷰를 마치며 마지막 질문을 거창하게 해보았다. 열심히 사시는 당신에게 남모를 회한이 있다면 그건 뭐냐고. 한참을 생각하다 들려준 답은 뜻밖에도 정감에 찬 것이었다.
“허무하게 늙어가는 아내를 농장에 내놓아 얼굴을 그을리게 만든 것. 그 하나예요.”
김종웅 씨가 들려주는 귀농 준비 Tip
•비빌 만한 언덕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는 게 현명하다. 인척이든 지인이든 연고가 있을 경우엔 적응이 빠르고 외로움을 덜 수 있으니까.
•시골에서 만족할 만한 소득을 올리기는 어렵다. 어느 정도의 자금력은 필수다.
•원만한 처세를 하지 않을 경우 원주민들에게 상처를 받을 수 있다. 다분히 보수적인 시골 풍토를 이해, 충돌만큼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금당실 소나무 숲은 인공림이다. 저 옛날, 마을 사람들이 일부러 꾸민 숲이다. 파란도 재앙도 많은 세사(世事). 거센 홍수가 때로 마을을 휩쓸었을 게다. 차가운 북풍이 봉창을 후려치는 세한(歲寒)을 견디기 힘들었을 게다. 해서, 소나무를 즐비하게 심었다. 그 소나무들 쑥쑥 자라 백 살 혹은 이백 살의 나이를 자셨으니 고명한 노구들이다. 늙어 오히려 굳센 솔들이 떼 지어 동거하니 그지없이 푸르러 둥두렷한 숲이다. 물살아, 바람아, 썩 물렀거라! 숲은 그렇게 소리 없는 소리를 내며 마을을 외호해왔다.
비보(裨補)의 목적도 있었겠지. 비보란 지기(地氣)가 센 곳은 눌러주고, 허한 곳은 채워주는 풍수지리의 방책. 숲을 조성하거나 돌탑을 쌓거나 선돌을 세워 기세의 조화를 꾀했다. 조화로운 지세가 사람의 삶을 북돋울 거라 믿어서였다. 그러한들 수시로 찾아드는 삶의 애환으로부터 놓여날 수 있을까마는, 비보를 통해 자연의 가호와 힘을 얻고자 하는 인간의 궁리엔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심정마저 실려 갸륵하다.
인디언들은 자연을 어버이라 부르며 진심을 다해 섬겼다지. 금당실 솔숲도 마을 사람들에겐 모성의 품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사람들이 숲에 안겨 피한 게 단지 물난리뿐이었겠는가. 억누르기 힘든 슬픔과 그리움과 아픔마저 솔숲에서 헹구었겠지. 죄지은 것 없이 억울하게 소박맞은 아낙은 이 숲에서 소나무를 부둥켜안고 사무치게 울었을 것이다. 뼈가 빠지도록 고생해 지은 한 해 농사를 망친 가난한 가장은, 술 취해 불콰해진 얼굴로 꺼이꺼이 울어 간신히 울분을 털어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어린 자식의 손을 잡고 솔숲을 거닐며 저 헌걸찬 소나무처럼 잘 자라달라고 당부했을 것이며, 어떤 이는 밤의 솔숲으로 들이치는 별빛을 바라보며 일기장에 쓸 감흥을 건져 올렸을 것이다. 숲은 이렇게 깊은 위안을 준다. 삶을 일깨워 세상의 홍진을 견딜 용기를 준다.
숲 바깥엔 찬바람이 아우성을 친다. 잔뜩 웅크릴 수밖에 없는 한겨울이다. 그러나 숲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온기가 훅 끼쳐온다. 석주처럼 우람한 지체를 허공으로 벋은 소나무들이 뿜는 훈기와 향에 추위를 잊는다. 말갈기처럼 성성한 침엽의 빛과, 일체를 보듬은 신성한 침묵에 그저 동화된다. 모든 풍경이 유정한 표정으로 다가온다. 아무 일 없는 채로 즐거워진다.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난 시간이니 솔숲의 마술이 완연하다.
금당실 마을 안통으로 접어들자 사방팔방, 미로처럼 펼쳐지는 돌담길이 객을 맞이해준다. 솔숲을 에두른 이 마을은 알아보는 눈들이 많은 동리. 일찍이 ‘정감록’은 이곳을 유난한 길지로 쳤다. 십승지(十勝地)의 하나로 꼽았던 거다. 조선의 걸출한 예언가 남사고는 한강을 닮은 장강이 없는 걸 빼고는 한양과 맞먹을 지세라 논했다. 태조 이성계가 이곳 터전에 도읍을 정하려 했다는 풍설도 전해진다. 돌담장을 두른 고가와 고택, 서원과 사당의 수효와 격조로 금당실의 유서 깊음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 세상에 이름을 떨친 사대부들도 많다.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지? 하지만 터가 상서로워 사람도 덩달아 출세한다는 믿음은 실사구시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신비주의의 소산이 아닐까? 터가, 땅이, 자연의 영혼이 사람을 차별할 리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자연의 일부분일 뿐이다. 나무는 우리의 형제이고, 참새도 고라니도 모두 우리와 같은 부족이다.
발길은 다시 솔숲으로 끌린다. 숲의 외부엔 센 바람에 뒤엉겨 허공으로 나부끼는 눈 알갱이들. 냉랭한 저 눈보라. 그러나 내부는 다사로워 설렌다. 온기에 찬 숲의 서정에 겨워서. 숲의 정령이 스멀거리는 것만 같은 환(幻)으로.
탐방 Tip
볼 것도 머물 곳도 많다. 금당실 솔숲은 마을 숲의 전형이며, 금당실 마을은 돌담길과 고건축의 전시장이다. 주로 복원된 구조물들이지만, 오래된 마을의 유서와 미학과 역사를 느낄 수 있다. 인근에 초간정, 초간종택, 병암정 등 명소가 많다.
산골짝 사이로 강물이 흐른다. 강 따라 이어지는 숲길은 선율처럼 부드럽다. 오솔길 위에 곱살한 낙엽들 폭신히 얹혀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숲엔 화염이 너울거렸으리라. 붉디붉은 단풍이 산을 태우고 숲을 살랐으리라. 그즈음, 조용히 흐르는 강물 위에 어린 건 홍조(紅潮) 아니면 황홀한 신열이었을 테지.
강가엔 절이 있어 풍경에 성(聖)을 입힌다. 여기에서 부처에 이르는 길이 가까운가? 반야사(般若寺)다. 항상 새벽처럼 깨어 있으라! 반야의 지혜를 길어 올려라! 불가의 전갈은 친절하다. 그러나 내 안에 뒤엉킨 무지몽매는 진흙처럼 뻑뻑해 깨어날 기색이 없다. 진흙을 움켜쥐고서도 꽃을 피워 올리는 연(蓮)의 뉴스는, 그저 잠시 잠깐 귓전을 스쳐갈 뿐이다. 하릴없이 저무는 가을이, 덧없이 지는 잎들이 애잔해 마음만 마냥 잠 못 이루는 밤처럼 뒤척인다.
법당 뜰에 선 배롱나무는 오백 살 나이를 자셨다. 어쩌면 반야사의 최고참 선승에 속할 이 나무는 이미 일체의 잎을 떨군 알몸이다. 오백 년을 살았으니 오백 번을 옷 벗었겠지. 오백 차례의 늦가을마다 서둘러 군더더기 털어내듯 훌훌 잎을 떨구었을 터이다. 분연한 정진의 화신이라 해야 하나? 속진을 세속을 후련히 털어버린 성자처럼 개결한 모습이다. 허영을 말끔히 벗은 뒤 드디어 본질만으로 존재하는 것 같은 자태이지 않은가.
벗이여! 삶이 기막혀 홀로 외로운 그대여! 반야사에 가거들랑 배롱나무와 눈 맞출 일이다. 버리고 또 버려 가뿐해지는 무욕의 이치를 선생으로 삼아볼 요량이라도 해볼 일이다. 싱긋, 노거수에게 윙크라도 하며 억지로 붙잡아 낑낑거렸던 마지막 사랑마저 놓아버릴 일이다.
산의 이름은 백화산, 강 이름은 구수천(일명 석천). 강과 산과 절을 함께 음미할 수 있는 반야사 둘레길은 근래에 조성되었다. 급작스레 인기를 누리는, 일테면 둘레길의 신예다. 여보게! 우리 반야사 둘레길이나 걸어보세! 거기가 엄청 좋다는 것이여! 그리 선창하며 찾아드는 사람이 많다.
숲속 나뭇잎들은 거의 누렇게 말랐다. 찰랑이며 쏟아지는 햇살의 조명에도 아랑곳없이 핼쑥한 산색이 마냥 스산하다. 여전히 붉은 빛을 머금은 나무들도 있지만, 부질없다. 이수일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심순애처럼, 서둘러 떠나는 가을을 애써 잡아두려 하지만, 이미 홍염의 한때는 저물었다.
오솔길 길섶에 뒹구는 돌들을 주워 모아 자그만 돌탑을 쌓는다. 돌 하나에 희망을 담고, 돌 둘에 용서를 쓰고, 돌 셋에 슬픔을 얹고, 돌 넷엔 슬픔 뒤에도 남는 한 점의 기쁨을 기입하며…. 그러고 보니 여기저기에 돌탑이 있다. 기원하거나 기도하지 않고서 견딜 수 있는 삶이 있던가. 형체 없는 게 마음이지만, 돌탑을 쌓은 이들의 마음이 숲속에 서성거리는 것만 같다.
숲길에 정적이 고인다. 떨어진 낙엽을 보듬으며, 비처럼 눈물처럼 떨어지는 마른 잎들을 껴안으며, 늦가을 오솔길은 묵은 시간처럼 고요하다. 문득 일렁이는 바람의 기척인가. 다시금, 간신히 나무의 몸에 달려 있던 잎사귀들이 흩날려 내린다. 조락의 연속이다. 잎은 입이 없으니 지면서도 유언이 없다. 눈이 없어 눈물이 없고, 여한이 없으니 부음을 전갈할 일이 없다. 떠나면서 티를 내는 건 어쩌면 사람뿐이다.
시드는 단풍 빛은 어디로 가나. 떨어진 잎들은 어디로 가나. 차가운 숲속 맨땅이 종착역일 리 없다. 일일호시일(日日好是日)이라. 어쨌거나 절정의 날은 오늘 바로 이 순간이다. 조락조차 괜찮으니 애도하지 마소! 낙엽이 그리 말하는 걸 늦가을의 숲에서 깨닫는다. 질 것들 지고, 떠날 것들 떠나는 오늘도 길일(吉日)인가?
탐방 Tip
반야사 둘레길 총연장은 7km. 경부고속도로 황간IC를 벗어나 10분을 달리면 반야사 주차장에 닿는다. 반야사, 망경대 문수전, 임천석대, 옥화서원 등 볼 만한 게 많다. 충북 영동군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경관이라 꼽는 이가 많은 숲길이다.
어디로 귀촌할까, 오랜 궁리 없이 지리산을 대번에 꾹 점찍었다. 지리산이 좋아 지리산 자락에 자리를 잡았단다. 젊은 시절에 수시로 오르내렸던 산이다. 귀촌 행보는 수학처럼 치밀하고 탑을 쌓듯 공들여 더뎠으나, 마음은 설레어 일찌감치 지리산으로 흘러갔던가보다. 지금, 정부흥(67) 씨의 산중 살림은 순조로워 잡티나 잡념이 없다. 인생의 절정에 도달했다는 게 아닌가.
처음엔 미친 짓이라는 소리를 흔히 들었다지. 정부흥 씨는 임야 1만8000평을 사들여 일을 개시했다. 이 거창한 행세에 쓴소리들이 난무했던 모양이다. 외지고 으슥하고 가파른 산 덩어리여서다. 긴 고행이 빤히 보여서다. 그러나 기꺼이 자청한 고행은 고행이 아니라 순행(順行)이다. 절박한 눈으로 뒤를 돌아본 정 씨는 도시에서의 지난 생이 오히려 고행에 가까웠음을 알아차렸던 것 같다. 어라? 나를 목줄 채워 끌고 다닌 도시를 벗어나겠다는 데 왜들 난리람! 아마도 그쯤의 생각과 각오가 머릿속을 굴렀을 게다.
정 씨는 전남대학교 자원공학과를 나온 공학 박사다. 대전 대덕연구단지에 있는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서 책임연구원으로 일하다 2012년에 퇴직했다. 임야는 은퇴 이전에 이미 사뒀다. 수시로 터를 드나들며 정을 붙였다. 귀촌 마스터플랜을 근사하게 준비하고서 임야에 길을 닦고, 기반공사를 하고, 임시 거처를 지었다. 퇴직 후에는 완전한 이주를 하고 본집을 거하게 지었다. 크고 너른, 반듯하고 웅장한 그의 거처는 이제 숲속 대궐에 가깝다. 부부 단둘이 살기엔 너무 방대한 규모로 보이지만 정 씨의 꿈과 이상이 실린 공간이다. 그의 수완과 통과 너름새가 비치는 구색이다.
터에 들어선 품목들이 크고 많으니 해온 일, 헤쳐나온 시련이 산더미였을 것이다. 신역도 신산(辛酸)도 자심했을 테지. 그러나 그는 일에 신명을 냈더란다. 오지게 터진 일복에 심취할 절호의 찬스를 만났다는 투로. 그렇다면 그는 근력 짱짱한 장한(壯漢)? 실은 정반대다. 지병을 달고 살아왔으니 말이다. 50대 후반쯤 당뇨병 여파로 들이친 풍을 맞아 반신마비에 빠졌고, 강철 같은 의지로 마비에서 탈출했으나 여전한 당뇨는 신중히 관리하며 지내왔다. 지리산으로 가자, 그게 살길이다! 그는 그렇게 부르짖으며 산중으로 귀촌했다. 몸이 망가졌으니 흐느껴 나온 생각들이 많았을 게다. 마음의 비장한 물결에 젖어 한탄을 거두고 속으로 다진 것도 많았을 테지. 그럴 즈음 지리산이 그를 호명했고, 그는 득달같이 응했던 모양이다. 이 불운하고도 야무진 사람의 눈은 단춧구멍처럼 간신히 째졌을 뿐이지만, 얼굴엔 자주 홍소(哄笑)가 출렁거린다.
“직장생활이라는 게 스트레스 많은 정신노동의 연속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두주불사가 잦았어요. 결국 몸을 망쳐 당뇨와 뇌졸중이 겹치는 지경까지 갔던 겁니다. 인생을 통틀어 가장 극심한 시련이었죠. 5년여에 걸친 재활치료로 다행히 반신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이대로 계속 도시에서 살다간 죽을 수도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귀촌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어요.”
“귀촌이, 산골생활이 건강을 호전시킨 셈인가요? 귀촌을 통해 중병을 고쳤다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두 가지 요인에 힘입어 건강을 도모할 수 있었어요. 하나는 아내의 헌신적인 조력입니다. 까다로운 식이요법을 아내 덕분에 철저하게 행해왔으니까. 생명의 은인이랄까, 그런 아내에게 제가 꼼짝을 못합니다.(웃음) 또 하나의 요인은 귀촌을 해서 만난 좋은 자연환경이에요. 숲길을 날마다 걸었어요. 배수진을 치고, 즉 목숨을 걸고, 운동 아니면 죽음이다, 라는 각오로 줄기차게 걸었죠. 요즘도 마찬가지예요. 아직 당뇨병이 있지만 내 몸 안에 들어온 평생 친구라 생각하며 관리하는 중이에요.”
“이 너른 터전과 다수의 건조물, 숲과 텃밭, 이런 것들을 어떻게 능히 짓고 가꾸고 관리해왔죠? 온전치 않은 건강으로 말이죠.”
“젊음과 자금력, 이 둘의 추진력이었어요.”
“인생의 하오에 젊음이라니요?”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이 산골에 들어온 초기엔 엄청 젊었던 것 같아요. 하늘을 잡고 도리뱅뱅이질을 쳤죠. 무모하긴 했어요. 그거 아세요? 저희 같은 연구원들의 특질이 뭐냐면, 항상 도전한다는 거.”
끊이지 않았던 사건 사고
그가 도전한 종목은 여럿이다. 귀촌의 성공 모델을 본때 있게 실현하겠다는 것, 몸을 아끼기보다 닳도록 써 건강을 살리겠다는 것, 자연과 호형호제하며 마음의 평화를 누리겠다는 것, 오누이처럼 부부가 다정하게 잘 늙어 여생을 동행하겠다는 것. 가련하고 허무한 게 인생사이지만 선한 지향이 뚜렷한 사람의 발길엔 정채(精彩)가 서린다. 안간힘을 다하면 갈 것은 가고 올 것은 온다. 그는 열렬한 활보로 귀촌의 나날들에 생기를 부여했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 정 씨는 거의 미친 듯이 일에 몰두해왔다. 울울한 숲을 파헤치는 토목공사를 주도했다. 귀촌을 위해 미리 배워둔 목공기술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목공실을 만들어 수많은 목재를 손수 자르고 깎고 다듬었다. 3차원 건축설계 소프트웨어를 활용, 60평과 40평짜리 두 채의 집 설계도 직접 해치웠다. 건축 공사도 업자에게 도급을 주지 않고 직영했다. 이 많은 일들을 해내는 중에 사고도 많았다지. 요상하게 줄줄이 이어진 사건기록을 들어보시라.
“귀촌 초기, 사건 사고들이 끊이질 않았어요. 한번은 석축을 쌓다가 바윗돌에 깔렸는데, 발목뼈가 여러 조각으로 부서집디다. 덕분에 반년 동안 깁스를 했고, 1년 반 정도 재활치료를 받았죠. 포클레인 작업 중 전복사고를 당해 부상을 입기도 했어요. 예초기로 풀을 베다 벌집을 건드려 벌떼의 집중 공격을 당하기도 했고. 그때마다 응급실에 실려가 누울 수밖에 없었고요. 하하핫! 아내에게도 역시 사고가 많았어요. 집사람이 소형 덤프트럭을 몰아요. 어느 날 언덕에서 트럭이 뒤집혀 굴렀어요. 해충과 독충에게 시달리는 건 소소한 일상이었죠. 아내는 독사에게도 물렸어요. 응급실에 달려가 해독주사를 맞고 위험을 면했죠.”
“아이쿠, 괜히 산골에 왔어, 돌아가야겠어, 그런 회의는 없었나요?”
“모든 사고들이 알고 보면 다 인재(人災)였어요. 숙달 과정으로, 필수적인 시행착오로 여겼어요. 요령과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기회였기에 나쁜 것만도 아니었어요. 회의나 후회는 조금치도 없었고요. 산골살이는 오래 묵은 꿈이었으니까.”
“대부분의 아내들은 귀촌에 흥미를 못 느껴요. 고생길이 훤히 보여서죠. 잘난 당신이나 혼자 내려가소서! 그런 소리 나오기 십상이죠.”
“산골생활에서 피할 수 없는 외로움을 즐길 수 있는 정서가 기본적으로 필요하겠죠. 조용한 자연 속에서 과연 즐겁게 살아갈 소양이 있는가를 따져보는 게 중요하다는 거. 저나 아내는 그런 면에서 시골과 적성이 맞았어요. 그러나 아내가 귀촌을 선뜻 동의하진 않았어요. 지역 선정에 반영할 네 가지 조건을 겁디다.”
“어떤?”
“대학병원 수준의 병원이 15분 안짝 거리에 있는 곳, 평소 늘 해왔던 요가를 계속할 수 있는 요가원이 있는 곳, 수필가로서 독서를 좋아하는 아내가 쉽게 찾아갈 도서관이 있는 곳, 항상 온천욕을 할 수 있는 곳. 이렇게 네 가지였어요. 이곳 구례군은 갖가지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습니다. 아내의 요구조건을 충분히 충족할 수 있는 지역이죠.
저절로 생긴 수입
마당에 서서 바라보는 경관이 후련하고 수려하다. 노고단을 중심으로 어깨를 겯고 일렁이는 능선 마루로 파란 하늘 자락이 겹쳐진다. 빼어난 뷰! 동향으로 앉은 집이니 새벽이면 침실 창으로 햇살이 두근대며 들이칠 게다. 집 뒤 숲엔 편백나무 수림이 조성돼 있고, 숲 사이로는 구불구불 휘어지는 산책로와 정자를 꾸며뒀다. 뭐 하나 빈틈도 결함도 없어 보이는 입지이자 장원(莊園)이자 저택이다. 이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정 씨는 서울에 있었던 아파트 두 채를 처분했다.
이제는 수고롭게 돈 버는 일은 작별이야. 부부는 그렇게 합의하고 내려왔다. 그러나 돈이 저절로 들어오는 일이 생겼다. 뜻밖의 수익이란다.
“저희 임야 안에 고로쇠나무들이 다수 있어요. 봄철이면 수액을 받는데, 이걸 사겠다는 사람이 많아 약간의 노동이 필요한 채취 작업을 해 연간 1000만 원쯤 수익을 올립니다. 비워두었던 아래채 2층집에서도 수입이 발생할 걸 미처 몰랐어요. 1층은 월세를 주고, 2층은 민박 손님을 받았더니 해마다 1000만 원 정도의 돈이 들어오더라고요. 가끔 귀촌인 상대의 목공 강의를 통해서도 약간의 강사료가 들어옵니다. 이렇게 모아지는 자금은 해외여행 경비로 씁니다.”
이래저래 이젠 순풍에 미끄러지는 돛배처럼 순항이다. 지루하진 않을까? 그렇잖아도 함께 오래 살아온 부부가 새삼 24시간을 늘 같이 지내야만 한다는 건 끔찍한 일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귀차니즘’이 풍선처럼 부푸는 건 아닐까?
“제가 집사람에게 독불장군이라는 소리를 듣고 살아요. 간간이 마찰이 없을 리 없죠. 대판 다투고 난 뒤 아내가 잠시 가출을 하기도 했어요.(웃음) 그런 일을 겪으면서 나름의 독립적인 생활방식을 찾게 됐어요. 오전엔 같이 텃밭이나 마당에서 일하고, 오후에는 함께 산책을 하지만 저녁식사 후엔 각자의 공간으로 들어가 각자의 일을 합니다. 아내는 1층에서, 저는 2층에서.”
“귀촌인들은 흔히 조언해요. 가급적 집을 작게 지어라! 작은 집이라야 유지 관리가 쉽다는 얘기죠. 선생께서 집을 크게 지은 이유는 뭐죠?”
“내 손으로 한 번은 집다운 집을 제대로 짓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어요. 자손들이 찾아오면 맘껏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도 싶었고. 하지만 바람직한 집은 아니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곤 해요. 우리 둘 가운데 하나만 남을 날이 머잖아 찾아올 텐데, 그땐 혼자서 이 너른 집과 터를 어떻게 간수할꼬, 그런 염려도 생기고.”
“산골살이의 즐거움은 어디에 있죠?”
“계절마다 달마다 날마다 다변하는 자연을 느끼며 배우며 사는 즐거움이 으뜸입니다. 몸이 녹아나는 혹독한 노동의 날들도 즐거웠어요. 건강을 유지할 에너지를 얻었으니까. 뭔가 떳떳하다는, 죄짓지 않고 산다는 기분 역시 노동을 통해 실감했어요. 노동에 휴식을 가미한 생활방식을 취하면서는 만족감이 더 커지기 시작했어요. 드디어 인생의 정점에 올라섰다는 행복감이 커요. 그러나 모자란 사람일 뿐이죠. 자연은 저토록 온전한데 나는 틀려먹었구나! 그런 생각을 자주 합니다. 불가(佛家)에서 가르치는 ‘공(空)’을 마음속으로 늘 되뇌이고…. 한 마리 배추벌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걸 또한 기억하려 하고….”
세상의 탐욕과 광기가 침범 못할 이 고요한 산중. 몸 낮춰 마음을 평온으로 채운다면 고요마저 열락(悅樂)이겠지.
정부흥 씨가 주는 귀촌 Tip
•사전에 시골생활을 체험하자. 한두 달로는 부족하다. 최소한 1년 정도는 월세 집이라도 얻어 살며 물정을 파악하는 게 좋다.
•집을 지을 경우 사전에 집짓기 교육을 받아두는 게 좋다. 건축은 업자에게 맡기지 말고 직영을 하자. 건축비를 크게 절감할 수 있다. 대신 고생을 각오해야 한다.
•귀촌생활에 텃밭은 필수다. 그래야 적당한 노동의 즐거움을 누리고, 깨끗한 먹거리를 얻을 수 있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하늘과 구름, 강물과 바람소리, 햇살, 새들의 합주, 강변 단애, 그리고 숲 사이 오솔길. 있을 게 다 있다. 언제나 거기에 있어온, 본래 그러한 채로 있는, 자연스러운 자연의 저 완전한 충만. 그래서 아름답고, 그렇기에 신성하고, 그럴 수밖에 없도록 진실하다. 사람 안엔 결핍된 수려한 맑음과 밝음으로, 그지없이 온전한 자연다운 푸른 아우라를 뿜으며 순수의 향연을 펼친다.
모두가 청량산의 식솔들이다. 저만치서 우뚝한 청량산의 모성을 젖줄 삼아 태어나거나 성장한 낙동강과 야산들과 나무들이 오케스트라처럼 어우러져 풍경의 절창을 빚어낸다. 청량산이라 하면 생각나지 않는가? 청량산인(淸凉山人)이란 호를 쓰며 줄곧 청량산을 사랑한 사람, 도학(道學)의 부흥을 평생사업으로 삼으며 수많은 저작을 쏟아냈던 공부벌레, 천 원짜리 지폐의 인물 도안에 불려나온 영감님. 바로 퇴계 이황(1501∼1570)이시다.
이 숲길에 ‘퇴계 오솔길’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 퇴계가 거닐었던 길이어서다. 퇴계의 시구(詩句)에서 따 지은 ‘예던길’, 혹은 ‘녀던길’이라는 이름으로도 부른다. 청량산 자락에서 모태를 박차고 나온 퇴계는 평생 청량산을 애지중지했다. 끝내는 청량산 자락에 묻혔다. 그는 소싯적부터 청량산에 들어가 공부를 했다. 기력이 쇠한 노년에도 느릿느릿 산언저리를 산책하기를 좋아했다. 그러하니 지금 내가 걸어가는 이 숲길에 퇴계의 숨결이 감돌 수밖에. 퇴계가 내딛었던 발길에 내 발자국이 포개지고 있을 테니 홍복(洪福)이다.
퇴계 오솔길은 퇴계 종택에서부터 청량산으로 이어지는 길 50여 리 구간에 걸쳐 있다. 도산면 가송리 농암종택 일대의 강변 오솔길이 단연 백미다. 농암 이현보(1467~1555)는 34세 연하의 퇴계와 격의 없는 교유를 했다지. 서로의 거처를 방문해 즉흥시를 주고받고 술잔을 주고받았다. 덧없는 세사와 뜻 깊은 자연을 교감했다. 이 연상연하 커플의 교제는 문사들답게 낭만적이었다. 실천적 도학자들답게 준절했으며, 산천 애호가들답게 관조적이었다.
숲길에 강물소리 들이친다. 맑고 세차고 기찬 물줄기와 고요하게 좌정한 나무들의 숲길이 동행을 하니 절경이다. 숲에서 강으로, 강에서 숲으로 불어제치는 바람의 거친 애무에 산천이 부르르 통째 몸을 떤다.
가을 들꽃들로 오솔길이 밝다. 핀 꽃술이 바람에 너울거리는 억새, 청초해서 애틋한 쑥부쟁이, 살랑살랑 몸 흔들어 향을 뿜는 산국(山菊). 저 멀리 도시는 소음과 매연의 저주에 붙들려 있지만 이 숲길엔 가을꽃 향 그윽하니 이방(異邦)이다. 숲길 어간의 쉴 만한 자리에 이르자 물가에 도드라진 너럭바위가 보인다. 퇴계가 그 이름을 지었다는 경암(景巖)이다. 자연을 통한 격물치지(格物致知)와 궁구(窮究)를 일삼았던 퇴계는 이 바윗덩어리를 보고 버릇대로 시 한 수를 지었다. 천년을 변함없이 흐르는 물과 부평초처럼 덧없는 인간사를 빗댄 시를.
길을 돌아 나와 고산정(孤山亭)에 닿자 다시 시야에 가득 차오르는 찬연한 풍광! 가슴이 두근거린다. 강물과 단애(斷崖)와 산이 합작한 풍경의 드라마를 속수무책으로 멍하니 바라만 볼 뿐이다. 아, 이 견디기 어려운 난해한 세상 속에도 개결한 세상이 있었구나! 풍경의 매혹에 고단한 인생을, 별 볼 일 없는 삶의 남루를 돌아보게 된다.
고산정은 퇴계의 제자 금난수(1530~1604)가 세운 정자다. 퇴계는 자주 고산정을 찾아 노닐었다. 주변 일대의 가경을 한눈에 쓸어 담을 수 있는 이 누각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시를 두레박으로 길어 올렸을 퇴계의 심취한 모습이 환(幻)처럼 정자에 아롱진다. 이곳에서 수많은 시편을 썼다 하니 말이다.
나는 퇴계를 뵌 적이 없고, 고인(古人) 역시 나를 알 바가 없다. 그러나 유려한 숲을 서성이며 종일 퇴계를 만난 것만 같다. 퇴계를 생각하면 왜 심장이 뛰나. 그는 자신의 기질이 산야(山野)와 닮았다 했다. 독일의 거장 괴테가 울고 갈 만한 학문의 숲을 쌓았다. 그러고서도 겸양으로 일관했다. ‘학문의 길은 구할수록 멀었다’고 토로하지 않았던가. 퇴계의 풍모는 임종 때 더욱 빛을 발했다. 국장(國葬), 그런 거 부질없다. 비석도 세우지 마라! 그는 그리 당부했다. 이승을 떠나는, 이토록 가뿐한 행보를 본 적이 있는가?
탐방 Tip
농암종택 주차장에 주차하고 농암종택, 경암, 학소대, 고산정을 답사한다. 평평한 강변 숲길이 걷기에 좋다. 등산으로 벽력암까지 오르면 강물 굽이치는 통쾌한 산경(山景)이 저 아래에 전개된다. 퇴계 오솔길 인근엔 도산서원, 퇴계종택, 퇴계묘소가 있다.
깊고 외진 산골에 마녀들이 산다. 오순도순 친자매들처럼 정겹게 지낸다. 산골짝 여기저기, 멀거나 가까이에 떨어져서들 살지만 여차하면 만나고 모이고 뭉친다. 모임 전갈이 떨어지면 빗자루를 타고 나는 마녀처럼 모두들 득달같이 달려와 자리를 함께한다. ‘마녀들’이라지만 위험하거나 수상할 게 없는 아줌마들이다. ‘마음씨 예쁜 여자들’, 그걸 줄인 게 ‘마녀들’이라지.
‘마녀들’ 여섯 명은 모두 귀농인이다. 산골에서 산 세월의 길이는 저마다 다르지만 다들 농업을 통해 소득을 올린다. 모임을 제안해 만든 건 된장사업을 하는 임미숙(60) 씨. 지금으로부터 6년 전, 그녀는 귀농 동기인 강성대(70, 명박골 표고버섯) 씨를 왕언니로 해 동아리를 꾸렸다. 임미숙 씨는 도시에서 사업상의 부침을 거듭하다 활로를 찾아 7년 전에 이 산골로 귀농을 했다. 나 이제 욕심을 싹 비우고 살래! 그런 다짐을 하며 어버이처럼 푸근한 시골의 자연 속으로 거침없이 이주했다. 이후 용케도 그녀는 발랄한 또래 아줌마들을 만나 사교를 했다. 마침내 죽이 맞아 단단한 우애를 쌓게 되었다. ‘마녀들’이라는 모임 이름은 그녀의 작명.
“귀농으로 맺어진 우연한 인연이지만 친자매 같은 정을 나누고 지내니 큰 행운이죠. 귀농 직후 저는 갖가지 어려움을 겪었어요. 무엇보다 된장을 만드는 기술도 힘도 부족했어요. 혼자 끙끙거리며 남들 몰래 공부를 하고 실습도 하고 그랬어요. 그러던 중 인근 마을의 또래 아줌마들이 드나들며 일을 도와주었지요. 모두들 귀농 선배들이라 일 외에도 여러모로 배울 게 많았어요. 게다가 살가운 여자들이라 순식간에 정도 들었고요. 그게 ‘마녀들’ 모임의 배경이에요.”
우정이란 고독한 인생을 보완해주는 보약. 소소한 사교 이상의 결속력으로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마녀들’ 모임은 시골살이를 한결 생동하게 하는 힘이 돼주었다. 이들이 모이면 일이 벌어진다. 또는 일이 생길 때면 재까닥 모인다. 생일 같은 축일엔 파티를 펼친다. 김천농업기술센터가 개설한 음식연구회에 참여해 함께 요리를 배운다. 귀농 교육생들이 찾아들면 모두 발 벗고 나서 일을 거들거나 팜파티를 펼친다. 농번기엔 일손이 딸려 애를 먹는 곳이 농촌이지만 이들은 끄떡없다. 우르르 자매들의 농장으로 번갈아 달려가 일을 해치운다는 게 아닌가. 품앗이의 귀감이다.
“마녀들 또 뭉쳤네!”
때로 외롭거나 따분할 수 있는 게 산골살림이다. 뒷산 소나무 외엔 불만을 털어놓을 상대가 더 이상은 없는 상황에 빠질 수도 있는 게 귀농생활이다. 하지만 ‘마녀들’은 자기들끼리 알아서 해결한다. 끝없는 수다와 깔깔대는 웃음이 꽃처럼 피어 내부에 웅크렸던 그늘을 헹궈낸다. 멀리 대구로 나가 뮤지컬이나 영화를 즐기기도 하고, 더 먼 곳으로 함께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주변 사람들은 탄성을 내지른다지. “어라? 마녀들이 또 뭉쳤네!”
농사란 어쩌면 희한한 방식의 고행. 난다 긴다 하는 고수가 아니고선 실패하기 십상이지 않던가. 그런데 말이다, 놀랍게도 마녀들은 모두 순항하고 있다. 다들 김천 관내에서 손꼽히는 강소농으로 알려졌다. 면면을 볼까? 마녀들 가운데 유일한 독신인 임미숙 씨는 된장사업에 야무지게 매달려 기반을 잡았다. 조현숙(60) 씨는 보리떡을 만들어 기세를 돋운다. 구나윤(58, 삼도봉 천마농장) 씨는 천마 재배로 5억 원의 연매출을 올리고 있으며, 전경정(58, 새송이 청암농장) 씨는 고품질 유기농 새송이버섯을 생산하는 유력 농군으로 부상했다. 양봉으로 꿀을 생산하는 이선화(57, 도마네 꿀집) 씨도 억대농.
화려한 이력들이다. 모든 귀농인들이 사력을 다해 성공을 추구하지만 숫제 물거품이 되는 경우마저 숱하다. 마녀들은 하늘의 자비로운 협찬을 유달리 옹골차게 누렸을까? 그럴 리가. 그들은 남들보다 더 분발하고 남들보다 더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러고서도 참담하게 무너지기도 했다. 바닥으로 굴러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바닥을 친 그 좌절의 힘으로 다시 튀어 올랐다. 인생이란 실로 역전과 반전의 드라마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얘길 들어볼까.
구나윤 “천마 재배 이전에 다른 작물을 다양하게 재배했어요. 하지만 실패만 거듭했죠. 가지고 있던 자금을 다 털어먹고 빚만 잔뜩 남았을 때 실의 속에서 착안한 게 천마 재배였어요. 그러나 이마저 뜻대로 되질 않았어요. 복잡한 재배와 생산 과정을 숙달하고서도 판로가 여의치 않더라고요. 게다가 값싼 중국산마저 마구 밀려들었고요. 그러나 끈질기게 한 우물을 파겠다는 신념으로 포기하지 않았어요. 초기엔 한 해 빚만 1억 원에 달할 정도로 큰 실패를 봤지만 무심한 하늘을 원망하는 것으로 실의를 털고 다시 일어서야만 했어요.”
전경정 “저는 귀농 1세대에 속해요. 원래 시골을 좋아했기에, 시골에 사는 게 꿈이었기에, 귀농에 만족했어요. 하지만 농업이란 정말 만만치 않았어요. 본격적으로 새송이버섯 재배에 나선 게 10년 전이었는데 처음엔 고전의 연속이었죠. 모든 재산이 경매로 사라지는 곤경에 처하기도 했어요. 벼랑 끝까지 몰렸던 셈이죠.”
구나윤 “저희 농장의 문제는 판로에 있었지요. 제아무리 고품질 천마를 생산한다 하더라도 안정적인 판로를 구축하지 못하면 헛수고에 그치고 말아요. 그래서 인터넷 마케팅에 주력했고, 그건 매우 정확한 타깃이었어요. 현재 인터넷 단골 고객만 600여 명에 달해요.”
전경정 “한순간에 부도가 나자 주변 사람들이 말도 안 걸더라고요. 배척하는 그 분위기, 참 서글펐어요. 급기야 제가 간암 판정을 받는 상황까지 맞이했어요. 제대로 잘 살아보기 위해 귀농을 했는데 죽을병에 걸리다니…. 금전적 압박이 중병을 가져온 것인데 의지로 떨쳐야만 했어요. 암 치료 중에 부단히 운동을 하고, 모든 현실을 받아들여 순응을 하고 긍정심을 키우고…. 그런 노력 덕분에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어요. 버섯 재배에도 더 각별한 공을 들였어요. 남편과 함께 새벽까지 농장에서 불을 밝히고 일했어요. 그 결과 5년 전부터 빛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지금은 안정적인 운영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아요. 저 들에 핀 꿋꿋한 풀꽃처럼.”
고진(苦盡)의 짝꿍은 감래(甘來)
하늘엔 때로 느닷없는 비구름이 엉기고, 인간사엔 자주 우환이 끼어든다. 하지만 지구상의 가장 강인한 생물에 속할 인간은 때로 무적함대처럼 용맹하다. 운세를 경영하는 촉이 살아 있을 경우 우환이라는 놈은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귀농으로 고진감래의 여정을 연수한 두 ‘마녀’의 술회엔 가슴을 파고드는 감명이 서려 있다. 뜬구름처럼 덧없는 게 인간사라지만, 어떤 상황에서고 할 일을 능히 찾아 치열히 행하고 볼 일이렷다.
농사 혹은 돈벌이만이 마녀들의 본분사는 아니다. 심혼을 촉촉이 적시는 정서적 만족감이 있어야 생이 즐거울 게 아닌가. 젊지도 늙지도 않은 어간에 이른 이 아줌마들이 갈구하는 건 즐거운 나날들의 지속일 테지. 그 어엿한 지향을 실현하기 위해 귀농을 택했고, 시골은 그녀들에게 응분의 선물을 주었다.
임미숙 “여자 혼자 사는 제 입장에선 일 자체가 매우 힘들어요. 하지만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 수 있는 게 시골생활이에요. 마녀들끼리 서로 돕고 의지하고 격려하며 지내는 일에서도 커다란 보람과 즐거움을 느낍니다. 흔히들 시골엔 문화 여건이 열악한 걸로 알지만 사실과 달라요. 가령 김천농업센터만 해도 다양한 문화강좌가 개설돼 있어요. 저는 그곳에서 우쿨렐레와 천연염색을 배웠어요. 제과제빵 기술도 배웠고, 한식요리사 자격증도 땄어요.”
이선화 “시골생활 초기엔 모든 게 힘들었어요. 그러나 원래 허약 체질이었던 몸과 마음이 온전히 건강해졌는데요, 우선은 거짓말 없는 자연에 마음을 두고 산 덕분이라 봐요. 잔바람에 흔들리는 들꽃 한 포기도 사랑스럽고, 하늘과 구름과 달과도 대화가 되는 기분이에요. 저희 부부는 이동 양봉을 합니다. 철 따라 꽃 따라 산천을 찾아다니는 일이 얼마나 만족스러운지 모르겠어요. 제가 사실은 현대판 집시여인이에요.(웃음) 꽃이 좋아 꽃을 따라 늘 여행하는 여자라는 거.”
구나윤 “처음엔 시골이 창살 없는 감옥과도 같았어요. 새벽부터 동동거리며 수많은 일들을 해야 했으니까요.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이었죠. 몸은 망가지고, 부채만 쌓이고, 화병이 생기고, 참 문제가 많았던 시절이 길었어요. 그때를 생각하면, 누군가 귀농을 한다면 뜯어말리고 싶을 지경이에요. 하지만 시련기가 지나고선 서서히 안도와 행복을 느꼈어요. 판로를 구축해 천마 판매에 탄력을 붙이면서였어요. 나름의 부를 일굴 수 있었던 덕이죠. 이젠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삽니다. 사고 싶은 것 사고, 가고 싶은 곳 가고, 먹고 싶은 것 먹고…. 거의 맨날 붙어 지내는 남편과는 충돌이 많지만, 그동안 꾹 참고 살았지만 이젠 눌려 살진 않을 거예요. 밥을 찾아 먹거나 말거나.(웃음)”
전경정 “시골이 싫다는 여성이 많지만 저는 참 좋아요. 그래서 촌스럽게 생겼을까?(웃음) 마음도 촌스러워요. 주변 산과 꽃의 경이로움을 사진에 담는 일이 참 즐거워요. 그보다 좋은 건 ‘마녀’ 언니들과 어울리는 일이에요. 제겐 원래 언니가 없어서 이 언니들에게 더 기대는지도 몰라요. 음, 농사란 좋은 직업이라 봅니다. 생명공학도라 할까? 농부는 항상 자기개발을 하는 사람이라 봐야 할 거 같아요.”
인사만 잘해도 탈날 일 없어
수많은 인구가 넘실거리는 도시에서, 사람들은 대체로 타인을 골똘히 주시하지 않는다. 피차 피곤할 수 있는 간섭을 가급적 자제한다. 그러나 시골에선 다르다. 마을 인구가 워낙 적기에 이웃에게 자연스레 관심이 쏠린다. 게다가 마을 나름의 질서와 풍습을 고수하는 보수적 성향이 강하다. 누군가가 귀촌을 했다면, 그는 이삿짐을 푸는 첫날부터 무대에 오른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에 놓인다. 입길에 오른다. 야무지고도 건실한 마녀들, 이들은 원주민과의 융화에 애로를 느끼진 않았을까. 들어보자.
구나윤 “시골분들이 합리적이진 않을지라도 자연스럽게 물들며 살아왔어요. 가령, 모처럼 치장 좀 하고 외출할 경우, 저걸 옷이라고 입고 다니느냐는 투의 손가락질을 당할 수도 있어요. 지나친 참견이죠. 하지만 귀농인들이 조심하며 지내는 게 상책이라 봐요.”
임미숙 “간섭으로 들릴 수 있는 얘기들을 간섭으로 듣지 않으면 돼요. 그냥 하는 소리니까요. 재치 있게 받아넘기는 게 필요하고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인사만 잘해도 탈날 게 없어요.”
전경정 “시골에 와서 가장 힘들었던 건 이웃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맺는 일이었어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적극 노력을 했어요. 저희 남편은 마을의 초상집을 찾아다니며 시신까지 만졌어요. 궂은일을 도맡다시피 했죠. 이웃과 어울리지 못하면, 결국 도시로 돌아가야 하는 낭패를 볼 수도 있어요.”
마을 전체를 내 집으로, 마을 주민 모두를 내 가족으로 생각한다면 실패할 일이 없겠지. 그게 쉽겠냐마는 마을 공동체를 존중하지 않고선 설 길이 없다. ‘마녀들’처럼, 우정과 공감에 찬 동아리를 만든다면 한결 든든할 테고.
소설가 박원식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우포늪. 한여름의 수면으론 온갖 수생식물들 너울거려 초록 융단을 펼쳤을 테지. 이제 초가을이다. 시들거나 저물거나, 머잖아 다가올 조락을 예감한 식물들은 벌써 초록을 거둬들인다. 초록에서 쑥색으로, 약동에서 침잠으로, 그렇게 한결 내향적인 풍색을 드러낸다. 그러고서도 장엄한 건 광활한 늪이기 때문이다. 몽환적이기까지 한 건 어디서고 좀체 볼 수 없는 이채로 아롱져서다.
우포늪은 국내에서 가장 큰 자연 내륙 습지다. 이 습지의 매력은 축구장 210개를 합친 것과 맞먹는다는 담수 규모에만 있지는 않다. 늪가에, 늪 위에, 늪 속에 수많은 생명이 씨억씨억 거센 숨을 쉬며 살아간다는 것, 즉 생태의 보고라는 데에 진정한 갈채를 보낼 수밖에 없다. 자그마치 1000여 종에 달하는 동식물이 분포한다는 게 아닌가. 이 희귀한 가치를 인정받아 1998년,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에 관한 협약인 람사르협약 보존습지로 등록되었다.
늪가로는 둘레길이 가지런히 펼쳐진다. 도보로 혹은 자전거를 대여받아 타고 우포늪의 전모를 둘러볼 수 있게 해두었다. 늪 들머리에 조성한 우포늪 생태관을 비롯해, 우포늪 생태체험장, 우포생태촌, 산토끼 노래동산, 잠자리 나라 등 체험공간도 다양하다. 늪의 드높은 가치에 걸맞은 보존과 활용에 공을 들인 흔적이 완연하니 다행스럽다.
과거의 우포늪은 참 보잘 게 없었다. 계모에게 구박받는 콩쥐처럼 무시되고 괄시받았다. 늪이란 한마디로 물에 젖어 있는 땅. 해서, 사람들은 우포늪을 쓸모없는 땅으로 여겼다. 툭하면 공장이나 농경지 조성을 위해 매립해버렸고 갖가지 생활 쓰레기를 늪에 묻었다. 1990년에는 늪 인근에 쓰레기 매립장을 건립하려다 중단되기도 했다. 우포늪의 생태와 경관이 살아나기 시작한 건 보호구역 내 사유지 20만 평을 정부가 사들여 보존에 발 벗고 나선 1998년부터였다.
“나를 제발 가만히 내버려둬!” 자연은 그렇게 외칠 테지만 사람의 귀는 어두워 들리지 않는다. 여차하면 파고 묻고, 뭉개고 찢는다. 자연 말살을 일삼는 인간의 인위는 이미 고약한 습이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겸손하고도 적절한 개입은 썩 긍정적인 효과를 거둔다. 인간에 의해 자연이 입은 상처를 인간이 나서서 보듬는 일은 모처럼 자연으로 돌아가는, 자연과 어울려 살고자 하는 인간 내심의 표출일 수 있다. 인간 자체가 또 하나의 자연임을 자각하는 조짐일 수도 있다. 우포늪의 회생은 어쩌면 인간의 회생이기도 하다.
다양한 관목들이 늘어서 숲을 이룬 오솔길로 늪의 향이 번진다. 비릿하고 축축하고 퀴퀴하나 늪의 원초적 향이니 별미가 아니랄 것도 없다. 늪가엔 억새와 줄풀과 창포와 마름이 지천이다. 싹눈처럼 앙증맞은 개구리밥과 생이가래는 물 위에 동동 떠 낙원을 누린다. 늪 속엔 검정말과 통발, 나사말 같은 식물들이 산다지.
생명들은, 풀들은, 물 위에 있거나 물속에 있거나, 지독히도 빛의 유혹에 약하다. 한사코 태양을 향해 손을 뻗는다. 한줌의 햇살이라도 더 부여잡으려는 갈망으로 생명을 지속한다. 물과 태양과 땅, 늪가와 늪 안의 식물들은 이 셋과 굳건히 연결되었다. 늪이란 그래서 명백한 생명의 전당이다. 외면적으로는 고요히 닫힌 세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생명들의 소용돌이로 들끓는다.
그럼에도 ‘늪’이라는 단어는 웬일로 어둡게 쓰이는가. 침체의 늪이니 망각의 늪이니 불륜의 늪이니, 한 번 빠지면 물귀신에게 붙들린 듯 영영 헤어나지 못할 곤경에 처한 상황을 흔히들 ‘늪’을 갖다 붙여 은유한다. 몸부림칠수록 더욱 가라앉는 나락을 ‘늪’에 비유한다. 이는 얄궂은 곡해에 가깝다. 늪은 생성과 생동과 창의의 도가니가 아니던가. 거기엔 침체도 망각도 불륜도 없다. 늪은 헛되이, 신의 이름을 구슬프게 부르지도 않는다.
도시의 난리통 속에서 ‘늪’에 빠진 그대여, 우포늪으로 오라. 그 생명의 숲을 보라. 진흙탕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오직 말짱한 낯으로 핼꼼 웃는, 저 식물들의 환희를 보라. 나의 것이 아니었던 질척한 욕망일랑 늪가에 내려놓고, 그대여, 저 재기발랄한 물풀의 생의(生意)를 가슴에 채우라.
탐방 Tip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둘러볼 수 있다. 대개 우포늪생태관 인근 무료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탐방을 시작한다. 탐방 둘레길인 ‘우포늪생명길’의 총연장은 8.7km. 30분에서 3시간 30분까지, 코스에 따라 탐방 소요시간은 다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