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나 할 것 없이 제 이야기 하고 싶어 야단인 세상이다. 들어보면 제각기 대단한 구석도 있고, 웃음 나는 구절도 있으며, 눈물 훔치게 하는 구간도 있다. 그러나 그 재미난 이야기 들어줄 사람 없이 혼자 떠들면 무슨 소용 있겠는가. 이성화 관악FM DJ는 ‘듣는’ 아나운서다. 누구보다 말할 기회가 많지만 그에게는 언제나 듣는 일이 우선이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믿고 듣는, 현역 최장수 아나운서로 자리매김했는지도 모른다. 잘 듣는 사람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세상이지 않은가.
이성화 DJ는 1959년 부산 MBC에서 아나운서 생활을 시작한 상업방송 최초의 여성 아나운서다. 이후 서울 MBC, RSB 라디오 서울(동양방송의 전신), TBC 동양방송까지 다양한 방송국의 개국 아나운서로 자리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현재 최장수 라디오 프로그램인 KBS 제2라디오 ‘밤을 잊은 그대에게’ 초대 DJ를 1964년부터 1972년까지 8년 동안 맡기도 했다.
아나운서, 현대사 한복판에 서다
1959년부터 1980년까지, 그가 아나운서로 한창 이름 날리던 때는 한국 현대사의 굴곡진 사건이 많던 시기였다. 부산 MBC 아나운서로 일하던 때였다. 그는 우연히 들어선 다방 창가에 앉아 있는 엄순영 씨를 발견했다. 시선을 사로잡는 미모에 감탄한 이성화 아나운서는 엄 씨를 미스코리아 경남 대회에 출전시키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그를 설득해 심사 3일 전에 아슬아슬하게 후보 등록을 마쳤는데, 부산 미스코리아에 선발되면서 엄 씨는 미스코리아 본선에 진출할 자격까지 얻었다.
당시 한국일보사에서 실시했던 미스코리아 본선 대회는 경복궁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대회 전날 엄 씨와 함께 서울에 올라온 그는 당시 김지태 서울 MBC 사장의 자택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 날 아침 사모님이 그를 깨우며 하는 말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미스 리, 쿠데타가 일어났대요’ 하시는데, 당시에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요. 멍한 채로 대문을 열었더니 집 앞으로 탱크가 지나가지 뭐예요.” 그때가 1961년 5월 16일 아침이었다. 2년 차 사회 초년생이 5·16 군사정변의 순간을 직접 목도한 것이다. 그는 이외에도 아나운서 자리에 앉아 3·15 부정선거, 4·19혁명 등 굵직한 사건을 보도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정치인부터 유명 가수, 배우 등 명사를 만날 일이 많았다. 만났던 당시에는 몰랐으나 후에 역사적 인물이 된 경우도 있다. 그가 부회장을 맡았던 여류방송인클럽이 한 군부대를 위문차 방문한 일이 있었다. “안내받으며 사단 내부를 둘러보고 사단장을 비롯한 장성들과 기념 촬영을 했죠. 굉장히 대접받으며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에는 꿈에도 몰랐죠. 나란히 서서 사진 찍었던 사람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한 역사적 인물이 될 거라고는 말예요.” 그는 지금도 김재규와 함께 있는 사진을 보면 권력이 다 무엇이고, 인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가를 생각한다.
5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목소리와 배짱
인생무상, 덧없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전성기는 빛나기 마련이다. 그는 업계 안팎으로 일찍이 능력을 인정받은 1세대 커리어우먼이었다. 재치 있고 순발력이 좋다고 소문 난 덕분에 당시 생방송 스케줄이 잡힌 PD들에게는 섭외 1순위 아나운서였다. 게다가 당시 발간되던 잡지 ‘아리랑’에서 진행한 아나운서 인기 순위 조사에서 당당히 1위를 거머쥐기도 했다.
“동양방송에서 ‘가로수를 누비며’를 진행하던 시절이었어요. 요즘처럼 방송에서 노골적으로 남녀 간의 문제, 부부간의 문제를 다루는 일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요. 택시 기사와 전화 연결을 할 때 제가 ‘기사님 밤늦게 운전하고 들어가도 부인께서 식사 정성껏 챙겨주시면 덕분에 기운 나시죠? 그러면 기사님도 부인께 친절을 베풀어야지요’ 하면 바로 알아듣고 상대편에서 ‘그럼요. 다음 날 아침상에 달걀프라이가 올라온답니다’ 하고 대답하거든요. 듣는 사람들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지요.”
그의 인기에는 뛰어난 순발력과 더불어 듣기 좋은 음성이 한몫 단단히 했다. 연극 연출가 오사량은 ‘5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목소리’라며 그의 목소리를 극찬했다. 목을 써야 하는 직업을 가졌음에도 평생 목 관리를 모르고 살았으니 천직이나 다름없다.
이성화 DJ의 방송 인생을 논할 때는 당찬 성격을 빼놓을 수 없다. 부산 MBC의 방송요원 모집 공고를 보고 응시했다가 덜컥 합격해 방송 인생이 시작된 것, 예상 못한 순간에 순발력을 발하는 기지도 그의 당찬 성격에서 비롯됐다.
전국체육대회가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리던 시절, 육영수 여사가 직접 방문한 일이 있었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전국체육대회 중계방송의 진행석에서 방송 준비를 하던 그는 마이크를 쥐고 대뜸 육 여사가 앉은 단상으로 올랐다. 단상 밑을 지키고 서 있던 경호원 둘이 막아섰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동양라디오에서 나왔는데 잠깐 인터뷰만 할게요’ 하고서 그 둘이 망설이는 틈을 타 단상에 올라섰어요. 올라가는 동안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고민한 다음 육영수 여사한테 ‘안녕하십니까. 이따 방송 시작하거든 날씨가 어떤지만 여쭤볼게요. 오늘 날씨가 좋지요? 하고 물으면 ‘네’ 하는 대답이랑 선수들 잘 뛰라는 말씀만 해주세요’ 그랬어요. 돌이켜 생각해도 보통 배짱으로는 하기 어려운 일이었지요.” 결국 그는 계획에 없던 영부인의 인터뷰를 따내는 데 성공했다.
쾌지나 청춘에서 제2의 청춘을 열다
이후 1980년 신군부의 주도로 언론통폐합이 이뤄지면서 당시 몸담고 있던 TBC 방송이 문을 닫았다. 이때 그의 활약상에도 일시정지 버튼이 눌렸다. 밖에서 그만 일하고 가정으로 돌아오라는 남편의 반대 때문이었다. 이후 방송에 대한 욕심, 재능, 외부의 인정을 모두 던져두고 30년을 주부로 살았던 그는 9년 전 뜻하지 않게 아쉬움을 풀 기회를 얻었다. TBC 방송국 막내 PD였던 동료의 소개를 받아 비영리 라디오 방송국 관악FM에서 라디오를 진행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서울 관악구에 사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회화를 가르치는 프로그램을 맡았다. 목소리가 또랑또랑하고 발음이 정확해 한국어 선생님으로 발탁된 것이다. 그러나 반응이 좋지 못했고, 방송을 맡은 그 역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이에 제작진과 함께 고민한 끝에 폐지됐던 ‘쾌지나 청춘’ 방송을 되살리는 카드를 선택했고, 그는 현재 9년째 ‘쾌지나 청춘’의 월요일 DJ를 맡고 있다.
‘쾌지나 청춘’은 국내 최초 어르신 방송단이 만드는 라디오 프로그램이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6일간 오전 6시에 한 시간 동안 진행되는 ‘쾌지나 청춘’은 고정 코너 ‘생활의 지혜’, ‘생활 건강’과 요일마다 다른 여섯 가지 단독 코너로 이뤄진다. 이성화 DJ와 함께하는 월요일에는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인터뷰 코너가 진행된다. 코너의 아이템 기획부터 게스트 섭외, 인물에 대한 사전 취재와 원고 작성은 모두 그의 몫이다. 녹음을 진행해보고 더 끌어낼 이야깃거리가 있다고 판단하면 회차를 늘려 추가 녹음을 진행하기도 한다.
하지만 기획 및 진행자만으로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완성할 수 없다. 관악FM 내의 오랜 파트너인 김우신 PD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이다. 베테랑 DJ로서 방송이 어떻게 제작되는지 알기에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같은 자리를 지키며 방송 제작에 힘써준 그가 고맙기만 하다. “지금까지 기획진행 이성화, 기술편집 김우신 프로듀서였습니다.” 매 방송마다 빠짐없이 넣는 멘트만큼이나 그를 향한 애정이 빼곡하다.
한창때는 하루에 10시간도 방송했던 베테랑 방송인에게, 30년이란 기나긴 공백기를 뛰어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청취자에게 신청곡을 주문받으면 막내 작가가 서고로 뛰어올라가 CD를 찾는 동안 즉흥에서 멘트를 지어내던 시절과는 사뭇 딴판이지만, 라디오 DJ 일은 그에게 여전히 즐겁기만 한 분야다. 그는 매 방송이 끝난 뒤 직접 준비한 원고를 일일이 개인 블로그에 올리곤 한다. 젊을 때부터 습관처럼 하던 기록을 위한 일이기도 하고, 방송과 게스트를 홍보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여성·드라마, 그가 전할 새로운 이야기
평생을 진행자로 살았지만 다른 분야에 도전하는 꿈도 꾼다. 이를테면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끝까지 구상하고 제작하는 일 말이다. 만약 PD가 될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는 중장년 여성들을 조명하는 프로그램 ‘라떼’를 만들고 싶다. 누군가의 어머니, 혹은 아내로만 살아오며 나이 들어버린 이들의 세월을 조명하고픈 욕심 때문이다.
“여성들이 남모르게 겪은 고통과 고난 같은 사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싶어요. 가부장 사회의 제도와 법률에서 가장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던 사람들이거든요. 화려한 꽃을 피울 수 있었는데 각자의 가정에 자양분으로 쓰이고 만 거예요. 그래서 유능한 여자들이 가슴에 응어리가 많아요. 어디 가서 이런 이야기를 할 곳도 없으니 친구들이랑 만날 때나 털어놓고 말죠. 그런 얘기를 자주 듣는데 정말 가슴이 아파요.”
그만 해도 그랬다. 일에 욕심이 있고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남편의 반대를 거스르지 못해 끝내 집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시대를 살았다. 은행에 입사할 때 결혼하면 그만두겠다는 각서를 써야 했고, 여자가 남편과 아이를 두고 바깥일을 하면 손가락질하던 시절이었다. 당대 여성들에게 선망받는 방송인이었던 그도 방송을 마치면 아내이자 엄마로서 일할 줄만 알았지 자기 계발에 시간 쓸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주부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아나운서로서 아무런 활약도 하지 못한 채 흘려보낸 30년의 시간이 그에게 아쉬움으로 남았다.
아쉬운 만큼 그는 현재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 지금에 열중하다 보니 새로운 목표도 계속해서 생겨난다. 그는 80대에 들어서면서 드라마 공부를 시작했다. 예전부터 드라마 대본을 쓰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이제야 도전할 여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촬영 현장에서 어엿한 스토리텔러로 활약하고픈 열정이 샘솟아 4년 전에는 전문 학원까지 등록해 수업도 들었다.
“쾌지나 청춘 기획하고 진행하랴, 집에 가면 블로그 글도 올리랴. 게다가 남편 밥도 챙겨줘야 해요. 쉴 새 없이 바쁜데도 드라마가 너무 쓰고 싶어서 없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면서 대본을 썼어요. 드라마라는 게 제각기 다른 갈래의 사람들이 한데 얽혀 진행되는 이야기잖아요. 저도 그렇게 멋진 예술의 한 줄기로 끼고 싶은 거죠.”
‘옛날 사람’인 그는 그가 실제로 보고 들은 ‘옛날이야기’를 50분짜리 대본 한 편에 풀어냈다. 요즘 사람들의 AI, 우주 공간 같은 요즘 이야기 말고 욕심쟁이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명예를 탐하면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담았다고 했다. 그 대본으로 당장 드라마를 제작할 수 없고, 촬영 현장에서 스토리텔러로 활동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지금은 아는 것이 없지만, 그는 꾸준히 방법을 찾아볼 생각이다. 처음 아나운서 일을 시작했던 그 당찬 성격과 배짱을 무기로 내세우면서.
1세대 아나운서인 그는 아나운서가 갖춰야 할 최고의 덕목으로 친화력을 꼽았다. 친화력이 있으려면 배려와 친절은 기본으로 갖춰야 한다. 처음 보는 상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파악하며, 이를 이끌어내는 능력까지. 아나운서에게 필요한 모든 능력이 친화력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관악FM에서만 400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을 만났다. 400개의 이야기를 듣고 400개의 아름다움을 뽑아낼 줄 아는 그는 친화력 그 자체나 다름없다. 이야기가 익숙하거든 잘 알고 있는 내용이라 좋고, 몰랐던 세월의 이야기라면 새로워 좋다. 들을 줄 아는 아나운서, 한결같은 그의 인생이 아름답다.
“숙면 외에 또 다른 바라는 것이 있다면?”
“다른 인생”
영화 ‘세상의 모든 계절’ 도입부에서 심리상담사 ‘제리’와 불면증과 우울증을 앓는 ‘자넷’이 대화하는 중에 나온 말이다. 자넷은 행복했던 삶의 기억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어둠 속에서 사는 60대 언저리의 여자다. 그녀를 통해 우리는 관계를 제대로 맺지 못하고 삶도 소중하게 가꾸지 못하는 현대인의 허기진 영혼을 본다.
이 영화는 현대사회의 물질적이고 이기적인 문화를 비판해온 영국 감독 ‘마이크 리’가 만든 또 하나의 걸작이다. 영화 제작 당시 60대였던 마이크 리 감독은 같은 60대를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통해 삶의 방식과 태도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한다. 카메라는 지질학자인 톰과 심리상담사인 제리 부부를 따라가 어느 한 해에 생긴 일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시간 순으로 보여준다.
런던에 사는 60대의 노부부 ‘톰과 제리’는 내면의 진실에 귀 기울이며, 주변 사람들을 존중하고 안아주며 살아간다. 톰의 어릴 적 친구 켄은 은퇴 후 닥쳐올 외로움이 두려워 술에 의지해 살아간다. 제리의 친구 메리는 콤플렉스와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불안과 고독에 휩싸인 채 지내는 불안정한 독신이다. 영화 내용은 이들이 아픔과 결핍을 끌어안고 각자의 안테나로 세상과 관계하면서 만들어내는 삶의 순간들로 채워진다. 생에 대한 어떤 정의나 교과서적인 메시지는 없다. 그저 강약 없이 희미하게 인물들의 살아가는 시간을 나열한다.
인생을 살면서 ‘내 삶’과 ‘내 삶을 바라보는 또 다른 나’ 사이에 거리 조절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이 영화는 영감을 준다. 메시지 전달의 매개는 주로 대사로 이루어진다. 영화에서는 두 곳의 중요한 공간이 나온다. 한 곳은 ‘톰과 제리’ 부부의 이상적인 삶을 상징해 보여주는 주말농장이다. 이곳은 시간의 흐름과 계절을 보여주는 장치로도 사용된다. 다른 한 곳은 ‘톰과 제리’의 집이다. 두 사람이 쉬고 위로받고 소통하는 공간이며 삶의 빛과 그림자를 보듬어주는 곳이다. 나아가 타인을 위로하고, 사랑하며, 세상의 모든 길이 막혔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벗이 되어주는 장소다. 영화의 주 무대인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치유의 공간이 된다.
초반부터 긴장하고 보게 만드는 인물은 ‘자넷’이다. 얼굴 표정과 시니컬한 대화 내용이 이 영화를 끌고 갈 것이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처음에 얼굴을 보여준 후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자넷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강렬했던 자넷의 얼굴 표정은 메리의 신들린 연기로 이어진다. 감독은 메리에게로 바통을 넘기며 그녀가 서사를 끌고 가게 하는 전략적 선택을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넷의 표정과 비교되도록 수십 초 동안 정지된 프레임으로 메리의 얼굴을 보여준다. 감독이 의도해서 보여준 메리의 표정 변화와 눈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 해석은 오롯이 관객의 몫이다.
이 영화의 매력은 등장인물들에 대해 공감을 하게 된다는 데 있다. 메리에게서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사는 많은 현대인의 모습을 본다. 그래서 그녀의 외로움, 좌절, 질시, 공허는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우울증을 앓고 있는 켄의 이야기에는 아픔과 연민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또 상실의 슬픔조차 보이지 않는 로니의 눈길을 보면 살며시 다가가 어깨를 감싸주고 싶어진다.
몇몇 사람들은 인생을 성공적으로 완성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버티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자신을 돌보고, 어떤 상황에서도 조건 없이 사랑하고, 계약 없이 사랑하고 싶은 작은 꿈이 피어오른다.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힘이다.
감독 ‘마이크 리’는 배우들과 함께 캐릭터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배우의 연기력을 끌어내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녔다는 평판이 자자하다. ‘레슬리 맨빌’(메리 역)은 이 영화로 미국과 영국의 비평가협회상을 휩쓸었다. 그녀가 두 눈으로 보여주는 연기가 이 영화의 진가를 알렸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끝나고 난 뒤에도 우리 삶으로 이어진다. 이 영화가 특히 그렇다.
수많은 실력파 가수들을 배출했던 대학가요제에서, 우순실(57)은 1982년 ‘잃어버린 우산’으로 동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가요계에 데뷔했다. 발라드 곡 ‘잃어버린 우산’은 1970년대 포크송에서 1980년대의 발라드로 넘어가는 가요계 조류에서 분명하게 각인된 노래였다. 그녀의 묵직한 목소리는 경험을 통해 체득한 깊은 진심이 묻어난다. 그녀의 삶은 가혹했다. 뇌수종으로 잃은 첫째 아들, 전 남편의 사업 실패로 짊어져야 했던 빚 29억 원. 그러나 막상 만나본 그녀의 모습은 밝고 평온했다. 그녀가 겪어야 했던 남다른 삶의 여정과 그 속에서 얻은 깨달음을 들어봤다.
"인생이 순탄하기만 하면 감사함이 없게 돼요. 굽이굽이 좌절도 해봤다가 올라가기도 하고 그래야 참 감사하고 기쁘다는 걸 느끼게 되죠."
인생에 대한 얘기를 할 때, 가수 우순실만큼 그 주제에 어울리는 이도 없을 것이다. 노래를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였다고 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딸 다섯을 홀로 키워야 했다. 그때에는 여러 가구가 모여 사는 동네에 스피커가 있었는데, 거기서 매일 일정한 시간에 노랫소리가 들렸다. 특히 이미자 등의 트로트 가수들 노래가 자주 나왔는데 어느 순간 그녀는 그 노래들을 따라 부르고 있었다. 동네 아주머니들도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노래를 해보라고 시키기도 했단다. 그래서 음악적 후원자였던 큰언니는 그녀에게 ‘너는 말보다 노래를 먼저 배웠다’고 말하곤 했다.
타고난 가수의 어린 시절
“초등학교 6학년 때는 큰언니가 피아노 학원을 보내줘서 음악적 소질을 발견하게 해줬어요. 고등학교 교련시간에는 휴식시간마다 불려나가 노래를 불렀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가수가 되었죠. 대학교를 작곡과로 들어간 것은 노래하는 데 필요한 지식들을 습득하기 위해서였어요.”
한양대학교 작곡과에 다니던 그녀는 1학년 때인 어느 어스름한 저녁, 국악과 연습실에서 들려오는 청아한 목소리를 듣고 반해버렸다. 그 무렵 대학가요제 출전으로 자퇴를 해야 했고 이후 그녀는 추계예술대학교 국악과를 들어가게 된다. 20대까지의 그녀의 삶에는 순수한 음악적 매혹에 의한 선택들이 있었다. 음악적 욕심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말을 안 하고 있으면 자신을 드러낼 수가 없는데 저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게 노래예요. 예를 들어 화가들이 자기 철학이나 인생관을 그림과 조각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저에게 있어 노래는 간절한 표현 도구인 거 같아요. 아프면 아프다, 슬프면 슬프다 하고.”
병간호 속에서도 행복을 마주했다
우순실은 1991년에 결혼하면서 가수로서의 삶을 접는다. 그리고 첫째 아들이 시한부 뇌수종 판정을 받자 이후 13년 동안 함께 투병생활을 한다. 천생 가수였던 그녀가 대중의 시야로부터 멀어졌던 시간이다. 그때 그녀의 마음은 어땠을까?
“가수가 노래를 놓고 있을 때, 괜찮을 리는 없죠. 아쉬웠죠. 그러나 아이를 순탄하게 키우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 과정에서 느끼는 행복과 기쁨이 있었어요. 어느 날 시댁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오백년’을 부르는데, 감정이 안 살더라고요. 그 순간 행복한 상태에서는 한스러움이 표현되질 않는구나 했어요. 그러니까 그때는 나름 행복하고 만족했던 거예요.”
우리가 보는 그녀의 삶의 굴곡은 마음을 착잡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정작 그녀 자신은 그런 삶과 고통을 덤덤하게 받아들인 것 아닐까. 어쩌면 그 마음의 크기야말로 그녀가 가진 천성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있을 자리는 저 자린데 하면서도 옆에 아이가 있는 게 보이면 지금 할일은 이거라는 생각이 들곤 했죠. 늘 지금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 했어요. ‘너무 힘들었겠다’면서 위로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저는 제 앞에 놓인 상황을 잘 받아들이는 편이었죠. 그리고 받아들이면 스트레스도 덜해요.”
많이 겪은 자의 성숙함
인터뷰를 하던 도중 그녀가 잠깐 판소리의 한 대목을 가볍게 불렀는데 그 목소리의 맑음에 놀랐다. 동안만큼이나, 노래 실력만큼이나, 그녀는 세월의 변화에 초연한 듯 보였다.
“1982년에 데뷔를 했으니 벌써 37년의 세월이 흘렀네요. 어찌 보면 그때 노래한 걸 들어봐도 애늙은이 같았죠.(웃음) 감정이 막 요동치는 게 아니라 그냥 평행선이었어요. 어릴 때도 초월해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었어요. 친구들이 캔디 만화에 열광하고 로맨스에 빠질 때 저는 교정 벤치에 혼자 앉아 상념에 잠기고 고독을 씹는 애늙은이 같은 모습이었으니까요.”
그녀가 대학교 1학년 신입생 환영회 때 부른 노래도 ‘한오백년’이었다. 그녀의 안에 그런 한과 우울이 많았던 때였다.
“지금은 더 밝아지고 긍정적인 사람이 되었죠. 뭔가 많이 겪은 자의 예전과는 다른 성숙함이라고나 할까요.(웃음)”
사소한 달콤함에 감사
‘뭔가 많이 겪은 자’ 우순실이 도달한 깨달음은 나 자신의 소중함이다. 그녀는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노래할 때도 컨디션이 좋은 사람은 장비 탓을 안 해요. 내 상태가 좋으면 생마이크에서도 노래가 잘 나오죠. 인간관계에서도 내가 밝은 에너지가 있어야 해요. 그래야 상대가 뾰족한 사람이라도 품을 수 있는 포용심이 생기니까요.”
그녀가 둘째 딸과 셋째 아들에게 하는 말도 이와 같다.
“‘너 자신을 사랑하는 게 첫 번째다, 친구관계가 고민될 때는 너 자신을 사랑하면 된다’고 말해줘요. ‘지금 관계가 꼬여 힘들다면, 그런 자신의 힘든 마음을 먼저 알아줘라, 자신을 위로하는 게 우선이다’라고 말이죠. 그런 일은 상대와 나와의 문제 같지만 실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충돌이에요. 그래서 자신을 사랑하면 상대방과의 문제가 별것 아님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사람과의 관계는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바가 크다. 친구와의 갈등이 빚어지는 것은 대부분 상대에게 기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스로의 마음만 충만하다면 상대가 나를 사랑하든 안 사랑하든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게 그녀의 설명이었다.
“사실 나 자신은 생각보다 더 큰 에너지를 갖고 있는데 세상사에 치여서 작아지잖아요? 명상을 하면서 스스로를 들여다보면 정말 맑고 순수한 모습이 보여요. 그걸 발견할 때 충만함 그 자체를 느끼게 되죠.”
혼자여서 너무 좋다
홀로 지내는 그녀는 남는 시간에는 이것저것 공부하며 음악 연습과 요가를 한다. 꾸준히 하고 있는 요가는 그녀가 심신이 고달팠을 때 선배 가수가 자신을 돌봐야 한다고 권해서 시작했다. 그녀에게 요가 시간은 곧 에너지가 충전되는 시간이다. 그녀에게 어울리는 운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건강해지고 마음이 편안해져요. 노래의 힘과 호흡 등을 좋아지게도 하고요.”
그녀는 자신이 혼자라서 좋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외롭지 않냐고 묻기도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아주 자유롭고 좋습니다. 혼자만의 시간이 있어 자신을 더 충만하게 채울 수 있으니까요.”
시니어 중에는 유독 고독을 심하게 느끼며 마음을 나눌 친구를 찾는 이가 많다. 그녀가 혼자 잘 지내는 비법은 무엇일까?
“어차피 인생은 외로운 거예요. 같이 살아도 외롭죠. 그러니 인간은 고독하다는 걸 전제하면 그런 감정에 연연하지 않게 돼요. 인정할 건 빨리 인정해야 좋죠. 그리고 나를 위한 선물을 해야 해요.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걸 하는 게 좋아요. 저에게는 그게 음악, 요가, 힐링, 집안청소 등인 거죠.”
벚꽃이 흐드러진 날에 새로운 여정
우순실은 다시 태어나도 여전히 가수를 하겠다며 존 레논처럼 인류가 살아가는 데 메시지를 주는 힐러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마침 그녀는 얼마 전 전영록에게서 곡을 받아 새 앨범을 발표했다. 타이틀 곡은 ‘어느 벚꽃이 흐드러진 날에’. 봄날을 연상케 하는 어쿠스틱함이 강조된 발라드 곡이다.
“원래 받을 곡은 이 노래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전영록 선배님이 우순실에게 곡을 줘야겠다 해서 녹음을 하게 됐는데, ‘어느 벚꽃이 흐드러진 날에’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한 번 불러봤는데 바로 선배님이 ‘이건 네가 불러야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래서 열몇 곡 중 일곱 곡을 추려 앨범을 만들었어요.”
그녀는 오는 4월 26일 여의도 마리나에서의 디너쇼 콘서트를 시작으로 6월까지 공연 스케줄을 잡아 놨다. 그녀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이 관객과의 만남인 콘서트였던 만큼 그 소망을 이루는 시간이 될 것이다.
“저 사람이 노래하면 내가 뭔가 힐링이 되는 거 같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다, 제 노래를 들으면서 위안이 됐다는 말을 듣고 싶어요.”
멋진 왕언니에게서 사랑스런 여성의 모습도 보인다. 당차고 또 열정적이다. 1990년 이후 30년 만에 다시 노래 부르는 신인처럼 그녀는 눈빛을 반짝였다.
미국에도 우리나라 주민등록증 같은 것으로, 소셜 넘버라는 것이 있다. 그것이 있어야만 운전면허증을 딸 수도 있고, 은행구좌 및 생활 모든 곳에 자기 신분을 증명할 수가 있다.
예전에는 비자가 없어도 그나마 쉽게 발행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9.11테러 이후로는 아주 어려운 과제 중의 하나였다. 첫 번째로 적법하게 비자를 만들었다면, 그다음으로 행하는 것이 소셜 국에서 자기만의 고유의 번호를 받아 평생 사용을 한다. 미국 내에서는 그 넘버 하나면 다 통할 수가 있었다.
다음으로는 운전면허증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 정도면 미국에서 생활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물론 코리아 타운이 아닌 외곽지역에서는 영어를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대체로 한인타운의 많은 한인들이 영어가 안되니, 겁이 나서 코리아타운을 벗어나지 못한다.
한인들은 코리아 타운 외곽 도로인 프리 웨이로 운전하는 것을 매우 꺼려한다. 생각해보면 아주 답답한 노릇이다. 더구나 비자가 없어 많은 한인들이 운전면허증을 딸 수가 없으니, 무면허 자들도 가끔은 있었다. 물론 불법체류자가 대다수인 멕시코인들은 거의가 무면허자 들이었다.
필자는 어렵사리 위대한 비자를 받았으니 바로 소셜 국으로 달려갔다. 지역마다 여기저기 있었으나, 그나마 영어가 부족한 것에 위안을 삼아 한인타운에서 가까운 곳으로 갔다. 아침 일찍부터 소셜 국에는 이미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있었다.
어찌나 많은 인간들이 들어오고 나가는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곳은 늘 그렇다고 했다. 밖에서 두어 시간을 지나서야 겨우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번호표를 빼어 들었다. 실내에도 온갖 인종들이 가득 차 있었다. 여기저기 갖가지 묘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유난히 많은 멕시코인과 흑인들, 그리고 간혹 털이 덥수룩한 무슬림 계열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독한 향수 냄새를 온몸에 품고 다닌다. 언제 어디서나 야릇한 향수 냄새는 그 또한 미국의 문화였다. 오전 내내 기다려야 했다. 미국의 공무원들은 모두들 아주 천천히 일을 했다.
공무원들이 손톱은 기다랗게 붙여져 있고, 몸은 비대할 대로 뚱뚱해서 엉덩이를 씰룩 거리며 급할 것이 없었다. 한국이 빨리 빨 리가 대명사라면, 미국인들은 너무 느리고 근무가 태만한 것 같았다. 모든 것들은 세월 가는 줄 모르게, 인내심으로 기다려야만 미국의 일상적인 문화에 적응하는 것이기도 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 서 너 시가 지나서야 겨우 필자의 이름이 마이크를 통해 호명이 되었다. 두껍게 무장을 한 투명 유리 사이로 마이크가 달려있었다.
그곳에다 대고 묻는 말에 대답을 해야만 했다. 다행히도 영어로 단답형 질문을 하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단지 어딘가 모르는 어두운 분위기와 인상이 좋지 않은, 각양각색 인종들의 집합 소에서, 강하고 지독한 냄새의 분위기가 긴장을 하게 만들었다.
이것저것 간단한 질문과 함께, 드디어 모든 절차가 끝나고 접수증을 받았다. 소셜 번호가 담긴 카드는 약 보름 후에나 집으로 메일에 의해 온다고 했다. 온종일을 긴장감으로 기다리며 아주 힘들게 받아낸 소셜 번호 접수증, 그 종이 한 장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모른다.
그것이 있어야만 미국에서 사람 구실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정식으로 운전면허증을 딸 수가 있고 비즈니스도 떳떳하게 할 수가 있게 되었다. 길게 안도의 한숨이 입안 가득 터져 나왔다. 남편에게 기쁜 소식을 빨리 전하기 위해, 속도를 내며 프리웨이를 달려갔다.
낯선 땅의 선선한 가을바람이 창문 틈으로 불어와 축하를 해주었다. 지루한 하루에 몸은 지쳤으나 보람이 있어 기분이 좋아졌다. 제아무리 힘든 일도 참고 인내하며, 하나하나 또 얻어 가는 것은 저마다의 매력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저녁에는 서둘러 일을 마치고 LA 코리아 타운으로 다시 나가, 조선 갈비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았다.
미국에도 우리나라 주민등록증 같은 것으로, 소셜 넘버라는 것이 있다. 그것이 있어야만 운전면허증을 딸 수도 있고, 은행구좌 및 생활 모든 곳에 자기 신분을 증명할 수가 있다.
예전에는 비자가 없어도 그나마 쉽게 발행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9.11테러 이후로는 아주 어려운 과제 중의 하나였다. 첫 번째로 적법하게 비자를 만들었다면, 그다음으로 행하는 것이 소셜 국에서 자기만의 고유의 번호를 받아 평생 사용을 한다. 미국 내에서는 그 넘버 하나면 다 통할 수가 있었다.
다음으로는 운전면허증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 정도면 미국에서 생활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물론 코리아 타운이 아닌 외곽지역에서는 영어를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대체로 한인타운의 많은 한인들이 영어가 안되니, 겁이 나서 코리아타운을 벗어나지 못한다.
한인들은 코리아 타운 외곽 도로인 프리 웨이로 운전하는 것을 매우 꺼려한다. 생각해보면 아주 답답한 노릇이다. 더구나 비자가 없어 많은 한인들이 운전면허증을 딸 수가 없으니, 무면허 자들도 가끔은 있었다. 물론 불법체류자가 대다수인 멕시코인들은 거의가 무면허자 들이었다.
필자는 어렵사리 위대한 비자를 받았으니 바로 소셜 국으로 달려갔다. 지역마다 여기저기 있었으나, 그나마 영어가 부족한 것에 위안을 삼아 한인타운에서 가까운 곳으로 갔다. 아침 일찍부터 소셜 국에는 이미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있었다.
어찌나 많은 인간들이 들어오고 나가는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곳은 늘 그렇다고 했다. 밖에서 두어 시간을 지나서야 겨우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번호표를 빼어 들었다. 실내에도 온갖 인종들이 가득 차 있었다. 여기저기 갖가지 묘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유난히 많은 멕시코인과 흑인들, 그리고 간혹 털이 덥수룩한 무슬림 계열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독한 향수 냄새를 온몸에 품고 다닌다. 언제 어디서나 야릇한 향수 냄새는 그 또한 미국의 문화였다. 오전 내내 기다려야 했다. 미국의 공무원들은 모두들 아주 천천히 일을 했다.
공무원들이 손톱은 기다랗게 붙여져 있고, 몸은 비대할 대로 뚱뚱해서 엉덩이를 씰룩 거리며 급할 것이 없었다. 한국이 빨리 빨 리가 대명사라면, 미국인들은 너무 느리고 근무가 태만한 것 같았다. 모든 것들은 세월 가는 줄 모르게, 인내심으로 기다려야만 미국의 일상적인 문화에 적응하는 것이기도 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 서 너 시가 지나서야 겨우 필자의 이름이 마이크를 통해 호명이 되었다. 두껍게 무장을 한 투명 유리 사이로 마이크가 달려있었다.
그곳에다 대고 묻는 말에 대답을 해야만 했다. 다행히도 영어로 단답형 질문을 하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단지 어딘가 모르는 어두운 분위기와 인상이 좋지 않은, 각양각색 인종들의 집합 소에서, 강하고 지독한 냄새의 분위기가 긴장을 하게 만들었다.
이것저것 간단한 질문과 함께, 드디어 모든 절차가 끝나고 접수증을 받았다. 소셜 번호가 담긴 카드는 약 보름 후에나 집으로 메일에 의해 온다고 했다. 온종일을 긴장감으로 기다리며 아주 힘들게 받아낸 소셜 번호 접수증, 그 종이 한 장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모른다.
그것이 있어야만 미국에서 사람 구실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정식으로 운전면허증을 딸 수가 있고 비즈니스도 떳떳하게 할 수가 있게 되었다. 길게 안도의 한숨이 입안 가득 터져 나왔다. 남편에게 기쁜 소식을 빨리 전하기 위해, 속도를 내며 프리웨이를 달려갔다.
낯선 땅의 선선한 가을바람이 창문 틈으로 불어와 축하를 해주었다. 지루한 하루에 몸은 지쳤으나 보람이 있어 기분이 좋아졌다. 제아무리 힘든 일도 참고 인내하며, 하나하나 또 얻어 가는 것은 저마다의 매력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저녁에는 서둘러 일을 마치고 LA 코리아 타운으로 다시 나가, 조선 갈비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