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한식은 탕반(湯飯) 음식이다. ‘반’은 밥이다. ‘탕’은 국물을 뜻한다. 우리는 국물 없는 밥상을 상상하지 못한다. 우리 밥상에는 밥과 국이 있고, 반찬을 더한다. 밥과 국은 우리 밥상의 기본이다.
“일본에서도 밥과 국을 같이 먹더라” 이야기하는 이도 있다. 그렇다. 일본의 비즈니스 호텔 등에서도 밥과 국 그리고 몇 가지 반찬을 내놓는다. 종류가 한정적이다. 아침 밥상의 ‘미소시루(일본 된장국)’ 정도다. 낮이나 밤의 밥, 술자리에서는 흔하지 않다. 아침에 먹는 국 한 종지 정도다.
한식 밥상은 국의 향연이다. 우리 어머니들은 늘 “오늘 저녁은 무슨 국을 끓일까?” 고민했다.
우리 밥상은 밥과 국을 빼고는 성립하기 힘들다. 웬만한 밥상에는 늘 국이 등장한다. 국, 밥, 김치만 있는 밥상도 즐겁다. 탕반 음식은 우리의 핏속에 녹아 있는 음식문화다. 국도 여러 종류다. 고깃국, 생선국, 각종 채소국, 이도 저도 아닌 된장국까지 국물 없는 밥상은 상상하기 힘들다. 한여름철에는 근대국과 아욱국을 따로 끓인다. 얼핏 보면 비슷한 아욱과 근대. 그러나 국으로 끓이면 그 맛이 각별하다. 콩나물, 미나리, 무, 시금치, 각종 시래기와 우거지까지. 한반도의 국물은 끝이 없다.
한국 사람들은 탕, 국물이 없는 밥상은 ‘국물도 없는’ 것으로 여겼다. 인간관계를 끝낼 때도 “국물도 없다”고 말했다. 밥상에 반드시 있어야 할, 기본이 국물이다. “넌 앞으로 국물도 없다”는 말은 인간관계 단절을 의미한다. 최소한의 것도 주지 않겠다는 뜻이다. 국이 없는 밥을 먹으면 목이 메었다. “국물도 없다”는 것은 아무것도 줄 것이 없다는 매정한 표현이다.
국물의 기본
국물의 기본은 ‘대갱(大羹)’이다. 대갱은 고기 곤 국물, 고깃국물이다. ‘대’는 크다는 뜻과 더불어 으뜸, 시작, 바탕이라는 의미도 있다. 아무런 양념이나 부재료인 채소 없이 국을 끓이면 대갱이다.
‘대갱’은 중국에서 시작된 개념이다. 오래전에는 매실과 소금으로 기본적인 양념을 대신했다. 대갱은 ‘매실이나 소금 양념’도 하지 않는, 고기를 곤 국물이다. 맛을 따질 일은 아니다. 맛이 있으면 양념한 화갱을 찾을 일이다. 국물에 채소나 양념을 넣으면 ‘화갱(和羹)’이다. 중국에는 화갱이나 대갱 모두 사라졌다. 화갱은 그나마 중식 코스 요리 중, 각종 채소를 넣고 생선이나 고기를 더한 국물 음식이 남아 있다. 한식에는 아직도 대갱이 살아 있다. 곰탕이 대갱이고, 제사상의 곰국, 곰탕이 바로 대갱의 변형이다.
우리 밥상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화갱이다. 채소에 고기를 넣고 끓여도, 채소만으로 끓여도 화갱이다. 고깃국, 채소, 생선이나 여러 가지 양념을 더한 것이 모두 화갱이다.
한국 사람들의 밥상에는 화갱이 늘 자리한다. 시래깃국, 김칫국, 배춧국, 뭇국, 시금칫국, 토란국, 아욱국, 근대국 그리고 해조류를 넣은 미역국, 톳을 넣은 국, 몸국(모자반국)과 해산물을 이용한 북엇국 등 숱한 국물 음식들이 그것이다.
곰탕과 설렁탕
곰탕과 설렁탕은 비슷한 음식이다. 약 100년 이상 곰탕과 설렁탕은 경쟁하고, 상대의 장점을 서로 더했다. 두 국물은 전혀 다른 음식이었다.
곰탕은 ‘고기를 곤 국물’이다. 쇠고기 양지 부위를 중심으로 푹 곤 국물은 반가의 음식이기도 하다. 서울이나 나주 등에서 곰탕이 유행한 이유도 간단하다. 서울, 한양은 궁궐이 있었던 도시다. 각종 관청도 많았다. 궁중의 제사를 모시는 종묘가 있고 공자의 제사를 모시는 성균관, 대성전이 있다. 제사에는 귀한 쇠고기를 사용한다. 공식적으로 쇠고기 도축을 하는 이들이 있었고, 곰탕을 비교적 흔하게 사용했다. 서울, 한양의 곰탕집들은 이런 쇠고기 소비문화를 뒤따른 것이다.
나주 곰탕도 마찬가지다. 나주는 큰 도시였고 큰 관청, 관사가 있었다. 역시 향교가 있고 외부 손님들의 방문도 잦았다. 한양 도성에도 외국에서 온 사신과 외부 관리들의 방문이 잦았다. 역시 쇠고기 소비문화가 일찍부터 발달했다. 나주 곰탕, 진주냉면이 발달한 까닭이다.
설렁탕은 출발부터 다르다. 곰탕이 고기 곤 국물이라면 설렁탕은 뼈와 내장 곤 국물이다. 때로는 소머리를 곤 국물도 더했다. 오늘날 서울 인근 경기도 몇몇 곳에 소머리 국밥이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설렁탕을 만들 때 소머리도 이용했다. 그 방식이 그대로 전해진 것이 바로 소머리 국밥이다.
오늘날의 설렁탕에는 쇠고기도 더한다. 양지나 우둔살의 일부, 업진살 등을 넣는 설렁탕 전문점도 많다. 곰탕의 장점을 받아들인 결과다. 출발은 곰탕과 다르다. 내장, 소 머릿고기 등을 사골, 잡뼈 곤 국물에 더했다. 이른바 ‘부산물’들이다. 부산물은 정육의 대칭어다. 곰탕은 정육에서, 설렁탕은 부산물에서 출발했다.
육개장과 닭개장
닭은 개체가 너무 작다. 가정에서 식용으로 사용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닭은 귀한 달걀을 낳는 존재. 그나마 풀과 벌레가 흔한 여름철과 달리 추운 겨울에는 먹이가 마땅치 않았다. 봄에 병아리에서 시작, 늦가을 대부분 닭을 ‘정리’했던 이유가 있다.
조선시대 후기 급격히 발달한 주막에서 개장국을 끓인 것은, 그나마 개가 개체가 크고 구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내내 개장국은 주막의 주요 메뉴였다.
개장국은 ‘개고기+장(醬)+국[羹, 갱]’이다. 개고기는 일상으로 먹는 상식(常食)이었다. ‘명의록(明義錄)’은 정조대왕 즉위 원년(1776년)에 작업을 시작해 이듬해 완성한 책이다. 정조의 대리청정을 반대했던 홍인한, 정후겸 등을 사사한 과정 등을 기록했다. 할아버지 영조를 대신해서 대리청정했던 세손, 정조대왕이 즉위한 직후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반대하고 궁궐에 자객을 침투시킨 반대파를 엄벌한 것이 정당했음을 밝힌 책이다.
이 책의 상당 부분이 드라마 ‘이산’과 영화 ‘역린(逆鱗)’의 소재가 되었다. ‘이산’과 ‘역린’에 공히 정조 암살을 위해서 자객이 궁궐에 침투하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 반대파에 의한 정조 시해 시도는 있었다. ‘명의록’의 공초(供招) 기록에 의하면 전병문, 강용휘 등 범인들은 궁궐에 침투하기 전 ‘궁궐 밖 개 잡는 집’에서 저녁을 먹고, 거사 실패 후 남대문 언저리로 도주, 다시 ‘개 잡는 집’에서 만난다. 사건 수사기록인 공초에 아무렇지도 않게 ‘궁궐 밖 개 잡는 집’, ‘남대문 언저리 개 잡는 집’이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18세기 후반에는 한양 도성 곳곳에 개 잡는 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개장국은 저잣거리 주막의 평범한 음식임을 알 수 있다. 1670년 무렵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는 안동 장 씨 할머니의 ‘음식디미방’에도 나온다. 개장국은 반가, 저잣거리를 따지지 않고 널리 퍼져 있었다. 조선시대 말기와 일제강점기에는 육개장과 설렁탕 등으로 바뀐다.
육개장은 ‘육[肉=쇠고기]+개장국’이다. 즉, 쇠고기로 마치 개장국같이 끓인 음식이 육개장이다. 나중에 등장하는 닭개장은 ‘닭고기+개장국’ 형태의 음식이다. ‘닭계장’으로 쓴 것은 틀렸다. 닭개장이 맞다.
개장국이 사라진 것은 청나라의 중국 문화를 받아들인 결과다. 청나라는 유목, 기마민족이다. 개의 존재가 농경민족인 우리와는 다르다. 개는 동반자 때로는 생명의 은인이다. 청나라는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우리도 청나라 문화를 받아들인다. 개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 늘어나고, 저잣거리에서도 개고기를 피하는 이들이 생긴다.
조선시대 말기 소의 생산량도 늘어나고 국가의 금육 정책도 힘을 잃는다. 나라가 망한 일제강점기, 금육은 허물어진다. 쇠고기를 더한 육개장과 쇠고기로 끓인 곰탕, 소의 부산물을 중심으로 끓여낸 설렁탕이 널리 퍼진다.
한반도의 국물 음식 중 으뜸은 곰탕, 설렁탕, 육개장 그리고 육개장을 중심으로 변형된 해장국들이다. 선지해장국과 뼈다귀해장국이 있다. 선지에 각종 채소를 더한 것도 등장하고 장터에서 간단히 만들어 내놓았던 장터해장국도 선보인다.
한반도만의 국물 문화
전 세계 모든 문명국에는 라면이 있다. 동남아, 중동, 유럽, 미국, 아프리카까지 진출했다. 라면을 먹지 않는 나라는 드물지만, 라면 국물을 알뜰하게 먹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일본에서 라면을 먹었던 이들은 “듣기와는 달리 일본 라면이 짜더라” 말한다. 당연하다. 일본인들은 라면 국물을 우리처럼 알뜰하게 먹지 않는다. 일본은 면 중심으로, 우리는 국물 중심으로 라면을 먹는다. 면을 먹는 이들은 면에 국물이 배어든 맛을 즐긴다. 우리는 라면 국물에 밥까지 말아 먹는다. “나트륨이 많은 국물을 먹지 말자”는 캠페인은 허망하다. 우리는 ‘국물도 없는’ 음식을 싫어한다. 면보다는 국물에 만 밥에 김치를 얹어 먹어야 속이 후련하다.
이제는 사라지고 있는 수반(水飯)도 마찬가지다. 물에 만 밥. 입맛이 없거나 간단한 상으로 손님을 접대할 때 정식으로 수반을 내놓았다. 왕(성종)도 즐겨 먹었고, 아버지 묘소에서 간단하게 수반을 먹었다는 기록을 남긴 왕도(정조) 있다.
각종 채소를 넣고 끓인 후 일상적으로 먹는 나물국, 생선, 고깃국, 개장국과 설렁탕, 곰탕, 육개장 그리고 라면과 수반까지.
한반도만의 독특한 국물 문화다.
황광해 맛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년간의 기자생활 동안 회삿돈으로 ‘공밥’을 엄청 많이 먹었다. 한때는 매년 전국을 한 바퀴씩 돌았고 2008년부터 음식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KBS2 ‘생생정보통’, MBC ‘찾아라! 맛있는 TV’, 채널A ‘먹거리 X파일’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한국 맛집 579’, ‘줄서는 맛집’, ‘오래된 맛집’ 등이 있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냉면이 뜨겁다. 2018년 봄,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평양냉면을 대접하면서 열기가 폭발했다. 그날, 서울의 냉면집들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섰다. 북한 ‘옥류관’ 냉면 때문에 평양냉면 붐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그 이전부터 평양냉면은 음식, 맛집을 넘어서 하나의 문화 현상이 되고 있었다. ‘평양냉면의 슴슴한 맛’이라는 표현이 여러 미디어와 개인 블로그, 유튜브 등에 떠돌아다녔다. ‘평양의 옥류관 냉면’은 불타는 장작더미에 기름을 얹은 격이었다.
냉면은 ‘오리무중’이다. 정체를 알기 힘들다. 의견도 분분하다. 정의를 내리기 힘들다. ‘면스플레인’이라는 표현이 있다. ‘면(麵)’+‘익스플레인(explain)’이다. 면, 냉면, 평양냉면에 대해 아는 체하며, 맛집 순위를 매기고, 남을 가르치려 드는 것을 이른 표현이다. ‘맨스플레인(man′s +explain)’에서 시작된 조어다.
이 글도 ‘면스플레인’의 일종이다. 냉면에 관해서 설명한다. ‘면스플레인’인지 냉면에 대한 올바른 지적질인지는 읽는 분들이 판단하시길.
국수, 냉면은 귀한 음식이었다
냉면도 ‘차가운 면’ 국수다. 냉면의 주재료는 메밀이다. 메밀은 ‘메[山]’+‘밀[小麥]’이라고 여긴다. 모가 났다고 해서 모난 밀, 모밀, 메밀이라는 설도 있다. 보리는 대맥, 밀은 소맥, 메밀은 교맥(蕎麥) 혹은 목맥(木麥)이다. 교맥, 메밀을 흔히 구황작물(救荒作物)이라 부른다. 구황작물은 곡식이 부족할 때 대체 작물로 사용한다는 뜻이다. 메밀은 구황작물이라기보다 상용작물(常用作物)이었다. 초여름 무렵 비가 부족해도 메밀을 대파했다. 다행히 메밀은 짧은 생육기간, 60~90일이면 수확할 수 있었다. 지질이 좋지 않아 농사를 짓기 힘든 땅에는 처음부터 메밀을 심었다. “곡식이 부족하니 메밀을 먹어라”가 아니다. 애당초 벼농사, 곡물 농사 짓기 힘든 땅에는 메밀을 심었다. 메밀은 주요 상용작물이었다.
메밀이 좋아서 메밀로 국수를 만든 것도 아니다. ‘메밀국수+동치미’의 조합은 좋아서, 먹고 싶어서 선택한 조합이 아니다. 비교적 편하고 쉬워서 등 떠밀려서 선택한 조합이다.
깊은 밤, 배가 출출하다. 입 다실 게 있으면 좋겠다. 메밀국수를 내린다. 한민족은 탕반(湯飯) 음식을 즐긴다. 국물 없는 밥상은 목이 멘다. 국물을 만들기 힘든 시간, 동치미 한 사발이면 국수를 말아 먹을 수 있다.
국수는 귀한 음식이었다. 안동에는 지금도 ‘국수 제사’가 남아 있다. 강원도 출신들 중 결혼식 때 막국수를 먹었다는 이가 많다. 경조사에만 사용했던 귀한 음식, 국수. 국수의 대중화 역사는 길지 않다. 냉면과 막국수는 크게 다르지 않다. 냉면과 국수, 막국수는 모두 국수다.
메밀 함량 묻지 마라
조선시대에는 메밀 함량이 어느 정도였을까? 추정컨대, 50%를 넘기기 힘들었을 것이다. 제분기술이 낮아 디딜방아, 절구질, 물레방아를 이용해 제분했다. 절구질한 후, 고운 천 혹은 체 등으로 메밀가루를 내린다. 고운 가루는 아래로 떨어지고 깨진 껍질, 나머지 거친 입자는 그대로 남는다. 찌꺼기와 거친 입자를 다시 빻는다. 같은 방식으로 고운 가루를 내린다. 이 힘든 과정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고운 메밀가루를 모은다.
가루 입자가 고우면 국수 만들기 좋다. 거친 입자는 국수 만들기 힘들다. 만들어도 면발이 고르지 않고 잘 끊어진다. 메밀국수 만들기가 쉽지 않은 이유다.
불행히도 메밀은 점도가 약하다. 국수 만들기가 간단치 않다. 점도가 약한 거친 입자. 기껏 국수를 만들어도 툭툭 끊어진다. 방법은 전분(澱粉)을 넣어 반죽하는 것이다. 전분은 녹말가루다. 전분을 넣으면 점도가 높아진다. 그나마 낫다.
막국수 노포에서는 대부분 ‘여름철에는 메밀 40%, 겨울에는 메밀 60%’를 고집한다. 나머지는 밀가루 혹은 전분이다. 전분이 많으면 국수는 반들반들 윤기가 난다. 냉면이나 막국수 모두 같다.
국수의 검은 점은 메밀껍질이다. 요즘은 메밀껍질이나 보리 태운 가루 혹은 색소로 검은 색깔을 낸다. 메밀껍질이 남아 있던 예전의 거친 냉면, 막국수처럼 보이려는 것이다.
메밀 함량이 몇 퍼센트이면 가장 좋은 냉면 혹은 막국수일까? 우문(愚問)이다. 시쳇말로 ‘개취(개인의 취향)’다. 어느 정도의 메밀 함량이 맛있는지를 묻는 것은 어리석다. 각자 개성에 맞춰서 고를 일이다. 메밀 함량이 낮고 높은 것은 ‘다르다’고 표현해야 한다. 어느 쪽이 틀린 것은 아니다. 이게 맛있고 저게 맛없다는 표현은 틀렸다.
1980년대 이전에는 대부분 사람의 힘으로 냉면, 막국수를 내렸다. 조선시대 말기, 대한제국 시기를 화가로 살았던 기산(箕山) 김준근(생몰년 미상)은 ‘국수 누르는 모양’이라는 풍속화를 남겼다. 사내가 벽의 높은 곳에 발을 딛고 온몸으로 국수를 내리고 있다. 유압식 제면기가 나오기 전에는 “국수 뽑는 사람치고 앞니 성한 사람 없다”는 말이 있었다. 국수 만들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저녁에 국수나 한 그릇”도 쉽지 않았다.
예전에는 메밀 함량을 따지기 힘들었다. 귀한 음식, 국수, 냉면, 막국수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맛봤던 음식이었고 주방, 부엌에서 일하는 하인들이 있는 집에서나 먹었던 음식이다. 해방 후, 깊은 산골에서 잔치 때 나왔던 음식이 대중화했다. 메밀 함량을 따질 일이 없었다. 함량? 중요치 않았다. 그저 ‘국수를 내릴 수 있을 정도’면 됐다. 지금도 마찬가지. 자신이 원하는 면을 고르면 될 일이다.
계곡 장유의 ‘자장냉면’
언제부터 냉면, 막국수를 먹었을까? 막국수도 냉면과 다르지 않다. ‘막국수’라는 이름은 1960년대 이후 생겼다. 강원도의 메밀국수를 상업화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막국수와 달리 냉면은 뚜렷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 계곡(谿谷) 장유(1587~1638년)의 ‘계곡집(谿谷集)’에 나오는 냉면 기록이 가장 오래되었다. 이른바 ‘자장냉면(紫漿冷麪)’이다. 계곡은 이 시에서 “자줏빛 육수가 노을처럼 영롱하고, 옥가루가 마치 눈꽃처럼 내렸다”고 표현했다. 제목이 이미 ‘냉면’이다. 냉면에 대해 처음 언급한 문장으로 친다. 계곡이 ‘처음’ 냉면을 먹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기록으로는’ 처음이라는 뜻이다. 이전에도 냉면은 있었다.
계곡이 먹었던 냉면의 정체는 불확실하다. 자줏빛 육수가 무엇인지, 눈꽃처럼 내린 옥가루가 무엇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계곡은 광해군, 인조 시대에 높은 벼슬을 지낸 유학자다. 딸이 효종비 인선왕후다. 계곡은 우의정까지 지냈다. 지체 높은 집안이었으니 냉면을 먹었을 것이다. 국수는 귀한 음식이었고, 냉면은 반가의 음식이었다.
200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 18세기 후반, 냉면이 다시 문헌에 등장한다.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년)이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에서 냉면을 언급한다. 시의 제목은 ‘서흥도호부사 임성운에게 장난삼아 지어준 시’다. 이 시에 ‘납조냉면숭저벽(拉條冷麪菘菹碧)’이라는 문구가 또렷이 나온다. “가지런히 당겨 만든 냉면이며, 배추김치는 푸르다.” 냉면과 배추김치[菘菹, 숭저]가 등장한다. 냉면 육수는 배추김치 국물이다. 이 시의 계절은 한겨울이다. 이불을 겹겹이 덮고 냉면과 노루고기 등으로 손님을 접대한다. 다산은 벼슬살이를 할 때 이 시를 남겼다. 냉면을 먹었던 곳은 황해도 서흥도호부로 대도시였다. ‘임성운’ 집안도 쟁쟁하다. 큰 도시의 행정관리 책임자, 권력자와 같이 냉면을 먹었다.
18세기를 넘기면서 냉면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먹는 이들도 다양하다. 서민들도 먹었다. 조선시대 말기의 문신 이유원(1814~1888년)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순조 즉위 초기 궁궐에서 냉면을 테이크아웃했다는 내용이 있다. 깊은 밤 달구경을 나왔던 순조가 냉면을 구해오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이 내용에는 돼지고기도 등장한다. 냉면과 돼지고기를 같이 먹었다.
순조의 냉면은 궁궐 밖 가게에서 구해온 것이다. 19세기 초반, 한양 도성에는 늦은 밤 냉면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냉면은 히트 메뉴였다
영재(泠齋) 유득공(1748~1807년)의 ‘서경잡절(西京雜絶)’에 나오는 냉면도 길거리 가게에서 파는 냉면이다. 영재는 음력 4월의 평양 거리 풍경을 그리면서 “냉면과 찐 돼지고기 값이 오르기 시작한다(冷麪蒸豚價始騰)”고 표현했다. 음력 4월이면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고 냉면 값이 오른다. 냉면은 길거리 주막 등에서 잘 팔리는 히트 상품이었다.
조선시대 후기 문신 이인행(1758~ 1833년)도 냉면에 대해 기록했다. 이인행은 순조 2년(1802년) 평안도 위원으로 유배를 떠난다. 유배 과정을 기록한 ‘서천록(西遷錄)’에 동치미(?) 냉면이 등장한다.
“6월 초 이틀. 냉면을 즐기는 것이 이 지방(위원)의 풍습이다. 교맥으로 (국수를) 만든 후, 김치[沈葅, 침저] 국물로 (맛을) 조절한다. 눈, 얼음이 흩날리는 깊은 겨울에 쭉 마시면 시원하다”고 표현했다.
이미 냉면은 민간의 풍습이 되었다.
냉면은 전국적으로 널리 퍼진 음식이었다. ‘평양냉면’은 조선시대 말기, 대한제국,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대규모 상업화에 성공한다. 오늘날의 평양냉면이다.
계곡 장유(한양 혹은 경기도 안산/자줏빛 육수), 다산 정약용(황해도 서흥도호부/김칫국물), 순조의 냉면(한양/돼지고기), 영재 유득공(평양/돼지고기), 이인행(평안도 위원/김칫국물)의 냉면은 장소와 내용물이 모두 다르다. 메밀 함량을 짐작할 수도 없다. 1930년대 소설가 이무영이 남긴 기록에는 “경남 의령에서 한밤중에 냉면을 배달시켜 먹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장소는 머나먼 경남이다. 메밀 함량은커녕 어떤 색깔의 냉면인지도 불확실하다. 의령에서 한밤중에 냉면을 배달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냉면, 막국수, 평양냉면 요리는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불확실하다. 메밀 함량도 달라지고 있다. 어떤 것이 ‘전통, 정통 냉면, 평양냉면’인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함부로 ‘면스플레인’ 할 일이 아니다.
▲황광해 맛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년간의 기자생활 동안 회삿돈으로 ‘공밥’을 엄청 많이 먹었다. 한때는 매년 전국을 한 바퀴씩 돌았고 2008년부터 음식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KBS2 ‘생생정보통’, MBC ‘찾아라! 맛있는 TV’, 채널A ‘먹거리 X파일’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한국 맛집 579’, ‘줄서는 맛집’, ‘오래된 맛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