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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풍에 돛을 매단 귀농? “아주 드문 사례다”
- 뜻대로 풀려나가지 않는 게 인생이라는 극장이지만, 귀농 드라마만큼 난감한 장면을 복잡다단하게 보유한 장르도 드물다. 폭풍 속의 질주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귀농은 매우 역동적인 인간사의 전시장이다. 자칫 고난과 고통에 갇힐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모험적인 도전이다. 귀농 10년이 지나서도 두 발로 서지 못한 사례가 드물지 않으니까. 이에 비하면 한철영(65, 태경농산 대표)은 순풍에 돛을 매달고 내달렸다. 출발은 소박했다. 그러나 10여 년이 지난 현재는 기세등등하다. 몇천만 원에 불과했던 초기의 매출은 우상향을 거듭해 지난해엔 12억 원을 기록했다. 올해 매출 목표는 20억 원. 비약이다. 흔치 않은 케이스다. 한철영은 30여 년을 근무한 삼성전자를 퇴사하고 2012년에 귀농했다. 애당초 귀농에 뜻을 둔 건 아니었다. 복잡한 서울을 벗어나 한가하게 인생의 가을을 영위할 수 있는 귀촌을 염두에 두었을 뿐이다. 그는 안성시 대덕면의 한적한 농촌에 땅을 미리 마련해뒀다. 시골에 세컨드 하우스를 짓고 전원생활을 맛볼 작정으로. 그러다 상황이 바뀌었다. 그가 미리 사둔 땅은 10년을 묵혀둔 배 과수원이었다. 면적은 1300평. 이걸 주말농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대략 손질하기 시작했는데, 어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푹 빠져들었단다. 의도하지 않았던 귀농에 덜커덕 뛰어든 셈이었다. “농사 초심자가 배 농사를 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모든 게 엉성하고 서툴렀지만 다행히 결실이 있어 주변 지인들과 나누어 먹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반응이 좋았다. 맛이 아주 좋다며 판매하라는 요구가 많아 내심 놀랐다. 배 농사에 흥미와 의욕을 느낀 계기였다. 이듬해엔 시설을 보완해 본격적으로 농사에 나섰다. 결국 엉겁결에 귀농을 하게 된 것인데, 이듬해 농사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도시 직장인 연봉 수준의 판매수익이 났으니까.” 초기에 생산한 배 품질로 벌써 남들의 인정을 받았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지? 노련한 농부도 품질 유지에 차질을 빚는 게 과수 농사인데. “미숙한 기술에도 불구하고 10년을 묵어 오히려 좋아진 토질에 힘입어 괜찮은 배를 거둘 수 있었던 것 같다. 농사 기술과 물정을 익히기 위해 이웃들에게 도움을 청해 지도를 받아 얻은 성과물이기도 하다. 통장님을 찾아가 도와달라 요청, 배 농사에 조예가 깊은 주민을 멘토로 소개받을 수 있었다. 그건 큰 힘이 됐다. 농업이란 혼자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좋은 인간관계, 믿음을 기반으로 한 유대감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경험으로 체득하며 살아왔다.” 아무리 돈독한 사이라도 핵심 기술은 잘 안 알려주는 게 일반적인 경향이지 않나? 며느리에게도 안 알려주는 맛집 레시피처럼. “다년간의 경험으로 얻은 노하우를 노출하고 싶지 않은 심리는 인지상정이라 본다. 사실 주변 농부들에게 물어도 마땅한 답을 들을 수 없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그렇다면 스스로 공부해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게 상책이겠지. 따라서 나는 아내와 함께 경기농업마이스터대학에 입학해 2년간 공부했다.” 농업 교육기관의 교육이 이론에 치중돼 실제와 괴리가 있다는 얘기가 있던데. “교육장에서 접할 수 있는 건 강사의 교육만이 아니다. 수강생들과 교류하며 인맥을 쌓을 수 있는 소중한 장이기도 하니까. 농업마이스터대학엔 수십 년간 배 농사를 지어온 지역 농민 다수가 학생으로 참여했다. 나는 그들의 도움으로 많은 걸 배웠다. 그들을 통해 배 농사의 실제를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배나무에게 모차르트 음악을 한철영은 농사에 공을 들이는 일 못지않게 좋은 인간관계 형성에도 각별한 정성을 쏟았다. 그걸 귀농의 리스크를 사전 방비할 수 있는 울타리로 삼았다. 자칫 외로운 섬처럼 고립될 수 있는 무심한 처신 대신, 마음을 열고 사람들 속으로 쑥 들어가 친선을 도모했다. 그건 곧 농사에 활기를 부여하는 동력원이 됐다. 그는 이렇게 귀농으로 바뀐 삶의 환경에 빠르게 적응했다. 능동적으로 관여했다. 농사 기술 확보에도 민첩한 감각을 발휘해 다양한 방식을 시도했다. 신뢰할 만한 기술 정보를 입수하면 바로 농장에 끌어들였다. “농사의 기본으로 삼은 건 일명 ‘게으름뱅이 농법’으로 알려진 자연농법이다. 이를테면 억세게 올라오는 풀들을 갈아엎지 않고 퇴비를 만들어 활용했다. 유황 퇴비를 투입해 토질을 북돋우기도 했다. 덕분에 한결 풍미 좋은 배를 생산할 수 있었다.” 농작물은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지? 작물을 애지중지하는 농심은 늘 감동을 주더라. “배나무라는 생명체에게 어떻게 하면 자연 그대로의 생기로운 최적 조건을 만들어줄 수 있을지 생각했다. 배나무가 배를 만든다는 건 후세를 남기는 고귀한 일이니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게 농부의 의무이지 않겠는가. 모차르트 음악을 배나무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듣는 귀가 있으려니 하며.” 사람도 모차르트 음악을 들으면 머리가 잘 돌아간다고 하더라. 그렇다면 배나무와 사람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애기인가? “사람에게도 농작물에게도 좋을 게 별로 없는 화학비료는 최대한 배제했다. 자연스러운 생태 환경이 유지되도록 농장의 흙과 경관을 가급적 건드리지 않았다. 덕분에 지렁이들과 두더지들의 천국이 됐다.(웃음)” 귀농인들은 흔히 판로 문제로 고심한다. “실로 중요한 게 판로 확보다. 귀농 초기에 나는 팔 수 있을 만한 타깃을 미리 설정해 집중 공략했다. 예컨대 규모가 큰 기업에 4년 정도 해마다 배를 무상으로 선물해 관심을 유도했다. 그러면 기업은 마침내 대량 구매를 한다. 우리의 배를 직원들에게 줄 명절 선물용으로 채택하는 것이다. 이렇게 맺어진 인연은 오래 이어지게 마련이지.” 한철영은 1300평 배 과수원을 통해 연평균 매출 8000만 원을 올렸다. 남들은 그게 큰 액수라며 곧이듣지 않았다지. 그러나 그는 비좁은 경기장에서 뛰는 게 영 마뜩잖았던 모양이다. 확장 욕구가 그의 내부에서 마그마처럼 들끓었나? 그는 2018년 상당한 규모의 가공공장을 설립해 가공식품 생산에 나섰다. 주도면밀한 연구와 조사가 선행된 뒤의 일이었다. 가공사업의 당찬 개시. 이건 확실하고도 명민한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단순한 생과 판매에서 나아가 사시사철 소비될 가공품을 생산하는 게 승산이 있다고 봤다. 고객의 니즈 역시 고품질 가공식품에 있다고 판단했다. 처음엔 위탁 전문업체에 맡겨 배를 재료로 한 즙과 농축식품을 만들었다. 그러나 품질에 문제가 있더라. 이건 아니다 싶어 직접 가공하기로 하고 가공공장을 설립한 거다.” 어떤 식품들을 생산했나? “주력 상품은 배와 도라지를 섞어 만든 발효 농축액 4종이다. 생강, 무말랭이, 맥문동, 감초 등을 넣은 발효식품 다종류도 생산해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해 좋은 판매 성과를 거두었다. 가공품 생산 첫해부터 순항했다.” 차질이 빚어지진 않았나? “뜻한 대로 일이 진행됐다. 시장의 트렌드와 소비자의 요구를 나름대로 분석해 타기팅을 정확하게 한 덕분이었다. 상품 개발을 할 때면, 이게 과연 시장의 호응을 얻을 수 있을지부터 숙고했다. 식품의 내용은 물론 포장 디자인을 고급화해 어디에 내놔도 뒤질 게 없는 상품을 만들었다. 현재 백화점 납품은 물론 수출도 하고 있다.” ‘고난의 서사’가 없다 한철영의 실력은 해외까지 알려졌다. 2021년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국제 식음료 품평회’(International Taste in Stitute)에 ‘통째로 갈아 만든 오미자’를 출품해 ‘최우수 미각상’(Superior Taste Award)을 수상하는 쾌거를 거둔 것. ‘통째로 갈아 만든 음료’ 시리즈엔 오미자, 청귤, 생강, 매실, 유자 등으로 만든 제품 8종이 있다. 그가 만든 가공식품은 어쩌면 창의의 산물이다. 시장을 유심히 관찰하고 고안한 아이디어의 힘, 풍미를 담은 상품, 게다가 매력적인 디자인까지 가미한 디테일 요소로 차별화를 구현했다. 그는 자못 새로운 유형의 농산물을 개발한 것이다. 새롭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으랴. 혁신하지 않고 멀리 갈 수 있으랴. 그는 삼성전자에서 쌓은 경륜과 재능을 끌어모아 농업에 쏟아부었다. 체질처럼 뇌에 정착한 과학적 사고를 풀가동해 귀농이라는 게임을 흥미진진한 쪽으로 밀어붙인다. 공부는 또 어떻고? ‘열공 모드’를 상시 가동한다. “가공공장을 설립한 뒤 단국대 죽전캠퍼스에서 식품영양학 석사과정을 공부했다. 지금은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식품공장 경영을 제대로 하기 위해선 심도 있는 식품 공부가 필수라고 생각했다.” 당신의 귀농 장정엔 ‘고난의 서사’가 거의 없다. 매사 잘 풀려나간 것 같다. 어떤 배경이 있다고 보나? “운이 좋았을 뿐이다. 좋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보내준 선의의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까. 사실 내가 잘 아는 게 얼마나 되겠나? 다만 남들이 하는 방식을 답습하지 않으려는 노력은 했다. 농업의 프로세스를 과학적으로 파악해 손실과 차질을 사전에 차단하기도 했다. 나의 스타일, 나의 틀에 갇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고수해왔다. 그래야 새로운 걸 빨리 흡수할 수 있어서.” 누군가 귀농을 하겠다고 할 경우 어떤 얘기를 해주고 싶나? “사실 귀농으로 뜻을 성취하기란 쉽지 않다. 안정적인 궤도에 올라서기가 매우 어렵다. 도시에서의 직업 활동보다 한결 고달픈 게 귀농 생활이다. 하루치 일을 하루에 마치기가 버거운 게 농사다. 난 예전 직장에서보다 서너 배쯤 더 많은 노동력을 쏟으며 뛰었다. 이처럼 팽팽한 생존 여건을 감내할 자신이 없다면 아예 귀농을 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 그러나 도시보다 더 풍부한 기회가 농촌에 내재해 있다.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 있다는 얘기다.” 그의 음성은 나직하고 태도는 수굿하다. 내놓는 언설엔 옹골찬 차돌이 박혀 있다. 그렇다면 그는 지금 무엇을 향해 그토록 맹렬히 달려가는 걸까? 돈? 아니다. 행복? 이 역시 아직은 아니란다. 그의 얘긴 이렇다. “지금의 목표를 말하자면 ‘보람’이라고나 할까? 행복은 어느 정도 레벨이 됐을 때 찾아도 늦지 않을 테고.” 한철영이 주는 귀농 Tip •귀농 목표를 분명하게 설정하고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자. 작목 선택, 판로 문제, 투자자금 규모 등에 관한 연구를 미리 충실히 하라. •귀농 뒤 농업 소득이 발생하기까지 긴 세월이 걸린다. 최소 4~5년은 버틸 수 있는 여유자금을 마련해 귀농하자. •소비 시장은 냉정하다. 내가 좋아하는 작물을 생산하기보다 소비자가 좋아할 작물을 선택하자. •특수작물에 섣불리 뛰어들지 말자. 시장성을 예측하기 힘들어 리스크가 커질 수 있다. •미리 1~2년 정도 농사를 지어보고 귀농을 추진하자. 그래야 정착이 수월해진다. •귀농교육 프로그램에 적극 참여해 인맥을 쌓을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라. •농토를 서둘러 살 일 아니다. 바가지 쓰기 쉽다. 수도권 외의 지역에 있는 농지 구입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 투자가치가 낮을 수 있기 때문이다.
- 2023-06-30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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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농·귀촌하면 생활비 낮아질까… "현실은 달라"
- 최근에 ‘도시 버리기: 로컬 이주 가이드’라는 제목으로 번역한 책을 출판했다. 원본은 일본의 저널리스트가 귀촌하면서 쓴 ‘도쿄 버리기: 코로나 이주의 실제’인데, 우리나라 사정에 맞춰 제목을 ‘도시 버리기’로 정했 모두가 도시와 아파트, 화려한 조명 속으로 돌진하는 현실에서 생뚱맞게 ‘도시 버리기’가 웬 말이냐 할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그래, 복잡한 도시에서 살 만큼 살았다. 이제 숨 좀 편히 쉬고 산 좋고 물 좋은 데서 속 편히 살아보자’라며 공감할 수도 있다. 꿋꿋하게 도시 생활을 고수하는 것이 익숙한 삶의 방식이라면, 도시 버리기를 택하는 것은 쉽지 않은 낯선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바로 그 선택을 보통은 귀농·귀촌이라고 부른다. 3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서는 귀농·귀어촌이라고도 부른다. 그 연원을 따져보면 몇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오래전의 1세대 귀농·귀촌은 정년퇴임 후 퇴직금을 두둑이 챙겨서 그림 같은 집을 짓는 방식이 대세였다. 그걸 바라보는 사람들은 ‘돈이 많으면 그렇게 살 수도 있구나’ 하고 여기곤 했다. 지금도 그러하다. 지역에 갈 때마다 지역의 오래된 거주 형태와 다른 화려한 집들이 농촌 구석구석까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주민들은 꼭 덧붙여 말한다. 그들의 귀향은 귀농이 아니라 정확하게 말하면 ‘귀촌’이라고. 지금의 40~50대인 2세대 귀농·귀촌은 이른바 지역 활동처럼 목적성이 강한 활동을 지향하며 이루어졌다. 초고령화시대에 아직도 지역에서 막내 역할을 하는 이들은 활발히 지역 활동을 하며 새롭게 지역으로 들어오는 3세대 귀농·귀촌자들의 멘토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들은 자신들의 적극적인 활동을 이어갈 후속 세대가 부족하다는 난제를 고민하고 있다. 3세대 귀농·귀촌은 비교적 최근에 나타난 현상으로 주로 30대 중후반, 즉 연령이 점점 낮아지고 능동적으로 퇴사한 후 얼마 안 되는 퇴직금으로 도시를 이탈한다. IMF나 글로벌 경제위기, 그리고 팬데믹 위기 후에 그 흐름이 더 거세지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3세대가 굳건하게 귀농·귀촌에 성공했는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그들의 행태가 반드시 귀농·귀촌이 아닐 수도 있다. 도시를 떠나는 것은 맞지만 모두가 시골로 가거나 농사짓기 위해 이주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귀농·귀촌자들의 이야기를 엮은 ‘도시 버리기’는 정리해고, 불안한 일자리, 비싼 주거비, 층간소음, 부족한 놀이터 등 육아 부담, 그리고 (일본의 경우) 지진과 방사능 위험 때문에 도시 이탈 현상이 점점 늘고 있으며, 여기에 팬데믹 위기까지 가해져 점점 많은 사람들이 자연에서 살고 싶어 한다고 분석한다. 수도권 거주 젊은이의 40%가 지방 이주에 관심 있다는 통계도 제시한다. 일본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정부의 도시 인구 분산을 독려하는 지원금, 인구도 늘리고 주민세도 늘리려는 지자체의 지원금, 회사에서 지급하는 교통비 지원 등을 통해 이들의 이탈을 촉진한다. 그렇다고 완전 동떨어진 전원 지역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수도권과 어느 정도 연결된, 이를테면 기차로 2시간 이내에 있는 거리를 선호하고, 역세권보다는 집 크기를 따져 이주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살인적인 도시의 집값 때문에 더 나은 주거 조건을 따지는 것이다. 도시 이탈자들의 귀농·귀촌 생활은 어떨까. 우선 경제적으로 극적인 비용 절감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도시 버리기’에서는 인프라 시설, 열악한 인터넷 속도뿐만 아니라 차량 유지비(지역의 교통 상황 때문에 차량 소유는 필수), 난방비, 가스비, 수도세, 전기요금까지 어느 것 하나 그다지 싼 편은 아니라고 말한다. 재미 삼아 요즘 유행하는 AI 서비스에 ‘귀농·귀촌 생활비를 알려달라’고 했더니, 항목별로 산출한 금액이 1인당 족히 100만 원이 넘게 나오기도 했다. 또 다른 고려사항은 일거리다. 귀농·귀촌의 연령이 점점 젊어지는 만큼 경제생활 또한 매우 중요한 과제다. 최근에는 농업만으로 소득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반농반X(半農半X)¹), 즉 농사를 지으면서 다른 일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물론 새로운 귀농·귀촌 생활의 장점도 많다. 여유롭게 자연환경을 만끽할 수 있고, 일거리가 없다 해도 막상 찾아보면 할 수 있는 일도 꽤 되며, 운이 좋으면 인심 좋은 이웃을 만나 사람 사는 따뜻한 정도 느낄 수 있다. 지역마다 속속 설치되고 있는 귀농·귀촌지원센터에서 무료나 저렴한 비용으로 지역살이를 체험하면서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보를 찾아볼 곳이 부족하고, 마음에 드는 정보를 찾기도 어렵다. 공간도 찾기 어렵고, 주민과 소통하는 프로그램도 필요한 상황이다. 일본의 빈집뱅크 같은 정보 플랫폼도 없다 보니 알음알음 현지 주민들을 통해 집을 구하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고, 한 달 살기와 워케이션보다는 사계절을 겪어봐야 안심하고 이주할 수 있는 등 새로운 대안을 선택하려면 (도시에서의 단순 이주와 다른) 훨씬 강도 높은 준비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마지막으로 남는 문제는 소통과 공존이다. 새롭게 이주하는 사람과 그런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주민 간의 갈등이 만만치 않다. 서로 처음 경험하는 상황 속에서 갈등을 풀어가는 방식을 고민해봐야 한다. 집도 필요하고 돈도 벌면서 새로운 삶을 영위하고 싶을 때 가장 먼저 고려해봐야 할 것은 이웃과 같이 사는 방식에 대한 고민일 것이다. 정부의 귀농·귀촌 지원에서는 이런 부분을 얼마나 고려하고 있을까. 1) 일본의 생태운동가 시오미 나오키가 1990년대 중반부터 주창한 생활 방식. 농업으로 가족이 먹을 음식을 충당하고, 나머지 시간은 자신이 하고 싶은 여러 가지 일을 하는 생활 양식을 말한다.
- 2023-06-21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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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곤 위협 지방 경제를 살리는 기적, 고향사랑기부금
- “지방에 집 한 채 지어 텃밭 가꾸며 맑은 공기 마시는 삶 좋지. 문화생활도 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고. 그런데 이제 100살까지 산다는데 지역에서는 어떻게 먹고사나?” 지방 소멸이 코앞인 시대, 그럼에도 지역에서 살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 ‘지역에서 먹고사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지방은 가난하다. 지방자치제도 시행 30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가난하다. 전국 지자체의 평균 재정자립도는 40% 내외다. 100% 자력으로 살기 힘들다는 의미다. ‘빚도 능력’이라는 우스갯소리는 통하지 않는 오래된 비참한 현실이다. 국비와 지방비가 8:2로 굴러가는 지방 재정 수입 구조 속에서 가난을 타개하려면 국비 사업에 목매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다행히(?) 정부 국비 사업은 엄청 많다. 하지만 국비 사업만 따라다니다 보면 지방의 자치나 자율은 안드로메다로 가버릴 수 있다. 국비 사업이 나올 때마다 지방비 매칭이 필요한가 여부를 따지게 된다는 지방공무원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내 돈 들어가는 사업이냐, 남의 돈으로 하는 사업이냐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게 사업에 접근하면 좋은 사업 결과가 나올까 싶다. 결국 악순환의 개미지옥에 빠질 게 분명하다. 아직은 가능성에 국한된 이야기지만 타개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방이 자력으로 노력해서 돈을 확보하면 된다. 지방세를 높인다든지 지방 출신으로 수도권에 가서 크게 성공한 출향민으로부터 돈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누군가 어떤 지방에 관심이 생겼다고 하자. 기부금을 1년에 500만 원까지 보낼 수 있다. 여러 곳에 나눠 내도 무방한데 세액공제가 100% 되는 것은 10만 원이 최대 금액이다. 때문에 여력이 된다면 10만 원씩 50곳에 기부하면 기부자는 완전히 세액공제를 받아서 좋고 돈 받은 지자체는 기부받아서 좋다.(10만 원 초과 금액은 16.5%를 세액공제) 게다가 기부금의 30%는 고맙다며 답례품도 받을 수 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꿩 먹고 알 먹고, 1타 3피의 만만세 대작전이다. 바로 2023년 1월 1일부터 시행되는 ‘고향사랑기부금’이 그것이다. 이 작은 희망이 거센 기부금 열기로 이어져, 국비에 목맬 필요 없이 완전히 자립하여 자기 지역만의 자금으로 자체 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하게 되었다는 사례도 있다. 일본이 2008년부터 시행한(우리나라 고향사랑기부금의 원형인) 고향납세 이야기다. 2021년을 기준으로 일본의 고향납세 기부 건수와 금액은 4447만 건, 8302억 엔에 달한다. 일본 기부자들은 돈이 많고 지역을 너무도 사랑해서 이렇게 많은 기부가 이루어진 것일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남의 지갑을 열기 힘들 듯이 돈이 오가기 위해서는 그 이면에서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우선 누가, 왜 내는가의 문제가 있다. 우리나라의 기부율은 119개국에서 88위 수준이다.1) 정치인에게든 시민단체에게든 북극곰을 살리기 위해서든 지갑을 잘 열지 않는다. 그 지방이 내 고향이라고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 먹고살기도 바쁘다. 답례품으로 기부자를 현혹하는 방법도 있다. 실제로 일본의 많은 고향납세 기부 플랫폼에서는 상위에 랭크되는 답례품 목록이 나온다. 멜론, 성게알, 털게 등이 늘 상위에 오른다. 지방 특산품을 싸게 구입하면서 좋은 일도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색 답례품을 제공하는 곳도 있다. 예를 들면 우리 지역에서는 ‘무료 보육을 실시하고 싶어요. 도서관에 가면 책도 보고 아이들이 뛰어놀고 도서관에 온 할머니들과 편하게 전통놀이도 하는 환경을 만들고 싶어요. 지역 전체에 무료 전기 셔틀버스도 운영하고 싶어요’라며 지역의 노력을 알리는 것이다. 그런 소식을 본 사람이 만약 아이 키우는 부모라면 ‘일단 재미있고 좋은 일이니 기부를 해봐야겠다. 내 기부금이 잘 쓰이는지도 궁금하고, 혹시 내 아이를 키울 만한 곳인지도 모르니 가봐야겠다’고 생각할 수 있다. 가보니 놀랍게도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돈이 잘 쓰이고 있고, 얼른 나도 이주해서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는 지방에서 재미있고 신나게 살고 싶다. 바로 물품 답례가 아닌 정책 답례로 성공한 일본 가미시호로 지역의 이야기다.2) 이처럼 꼭 물품 답례가 아니더라도 정책 답례라는 방식이 가능하다. 정책 답례가 이루어지려면 지방도 창의적이고 매력적인 정책을 제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지, 다른 사람들이 좋게 평가할 수 있는 지방의 매력은 무엇인지 궁리하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지방도 성장하고 튼튼해질 수 있다. 바로 이게 기부의 선순환 효과다. 그러나 아직은 꾸준한 기부를 통해 지방이 발전할 수 있다는 그 좋은 의미가 현실로 나타나기 어렵다. 고향사랑e음 플랫폼이나 농협에서만 기부가 가능하지만, 민간 기부 플랫폼이 열리거나 지자체가 자체적으로 플랫폼을 만든다면 기부가 더욱 활성화될 것이다. 이제 4개월이 지났고 아직 갈 길이 멀다. 요즘 세대는 자기 고향이라는 개념보다는 할아버지 고향 정도의 개념만 있다고 한다. 온라인 게임 리니지가 내 고향이라는 사람도 있다. 고향이 뭔지도 모르는데 고향을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반드시 사랑하지 않아도, 반드시 화려한 답례품을 받지 않아도, 참신하게 노력하는 지방을 찾아서 기부한다면, 그런 곳으로 내가 이주해 행복을 공유하는 기적 같은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올 수도 있다. 1. 영국자선지원재단(CAF)의 2022년 세계기부지수 기준 2. 윤정구·조희정 역. 2021.‘시골의 진화: 고향납세의 기적, 가미시호로 이야기’, 서울: 더가능연구소.(黑井克行. 2019.‘ふるさと創生: 北海道 上士幌町の キセキ’. 木樂舍.)
- 2023-05-31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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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인’ 꿈꾸며 귀촌, 마침내 찾은 인생의 화양연화
-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풍파가 잦은 게 귀농 생활이다. 성실하게 농사를 지어도 어찌된 영문인지 흔히 혼선이 빚어진다. 무주군 설천면 산기슭에 사는 신현석(62) 역시 두루 시행착오를 겪었다. 올해로 귀농 13년 차. 이제 고난을 딛고 완연하게 일어선 걸까? 어느덧 산정에 성큼 올라섰나? 그의 얘기는 이렇다. “내 인생에서 지금이 가장 행복한 시절이다!” 그러나 농사로 손에 쥐어지는 건 여전히 변변치 않다. 어쩌면 이제야 본격적인 레이스에 뛰어들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행복하다고? 신현석이 귀농을 한 건 어지러운 도시를 벗어나 마음 편하게 살고 싶어서였다. 도시라고 매력과 평화가 없으랴. 그러나 직업상의 스트레스에서 오는 괴로움을 씻기 위해선 시골로 들어가는 게 상책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대전에 살며 긴 세월을 매진한 건축 인테리어 사업으로 선량한 가장의 역할을 다했다. 하지만 심하게 지친 몸과 마음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단다. “건축업이라는 게 스트레스가 많다. 공사를 마치고도 대금을 회수하지 못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이러면 속이 탄다. 심지어 사기를 당하기도 했다. 이런 식의 불상사가 반복되자 사람 자체가 싫어지더라.” 사람 드문 시골에 살면 한결 나은 삶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나? “도시보다 스트레스를 덜 받을 수 있는 게 시골이라고 봤다. 농촌에서도 새로운 삶의 방식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바라기론 TV에 나오는 ‘자연인’처럼 살고 싶었다. 약초를 기르며 마음 편하게, 그 무엇에 쫓기지 않고 느긋하게 살고 싶었다. 이건 사실 막연한 희망에 불과했지만 여하튼 시골에 살 작정으로 농토 3000평을 미리 사둔 게 있어 귀농을 추진하는 게 수월했다.” 첫 농사 작물은 어떤 것이었나? “매실이었다. 미리 사둔 땅이 묵은 매실밭이어서 비교적 용이하게 농장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어떤 작물을 기르든 유기농을 추구하자는 기본 방침대로 나름 충실한 농사를 했다. 첫 농사였지만 성과가 있었다. 당시 매실 가격이 상당히 좋기도 했고. 그러나 어느 날 매실청이 설탕물에 가깝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당시 전국의 매실 농가 대부분이 큰 타격을 받았는데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활로를 찾기 위해 매실 식초를 생산했으나 영 신통치 않았다.” 결국 매실 농사를 접고 새로 도전한 게 다래 농사였다지? “무주군이 다래 농가를 정책적으로 육성하던 때였다. 따라서 승산 있는 작물로 판단해 다래를 재배, 토핑용 가공 상품화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잔뜩 재배만 권장하고 후속 연계 지원은 전혀 없는 농정의 얄팍함을 실감했다.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대안을 가진 농정이 아니었다. 당시 나 역시 기대를 가지고 주변에 토종 다래를 많이 보급했다. 결과적으로 욕만 먹었지만.(웃음)” 매실 농사에 이어 다래 농사에서도 쓴맛을 본 셈인데, 귀농 초기에 홍역을 단단히 치른 것 같다. 이를 피할 방법은 없었던 걸까? 귀농 교육이라거나 사전 준비에 소홀한 측면은 없었나? “비록 손실이 컸지만 매실 식초와 머루 가공품을 공부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긴 했다. 사전 준비는 충실하지 않았다. 귀농 뒤 교육을 받아 물정을 익혔으니까. 하지만 농사 초심자에겐 어떤 작물이든 만만치 않았다. 실패한 작물이 다수였으니까.” 대충 농사지었을 리 만무하지만 신현석은 그저 ‘자연인’처럼 살고 싶다는 기분을 가지고 시골 생활을 선망했을망정 막연한 충동에 이끌려 일을 추진하진 않았다. 그는 아마도 삶이라는 교실에서 배운 대로, 매사 구체적으로 숙고하는 버릇을 몸에 붙이고 사는 게 유능한 방법이라는 걸 알고 실천하는 인물이다. 이를테면 그는 귀농 전에 토지를 미리 장만해뒀지만 서둘러 집을 짓지 않았다. 집은 천천히 짓기로 했다. 일단 농장 저 아래 마을의 빈집을 임대해 5년쯤 살며 농사를 했다. 지역의 풍토와 경향을 파악하고, 농사 물정을 익히고, 아울러 자금을 효율적으로 분배해 사용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충분히 고려하고 헤아려 귀농 생활의 리스크를 줄여나가고자 했다. 그러니 농사인들 대충 생각하고 대충 덤벼들어 대충 지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실패에 가까운 기록이 즐비하다. “남의 논을 빌려 벼농사를 한 적이 있다. 화학비료를 배제한 자연농법으로. 그런데 이게 품이 무척 많이 들더라. 반면 소득은 보잘 게 없었다. 남들이 쌀 열 가마를 거둘 때 난 겨우 두세 가마를 수확했으니까.(웃음)” 재배 기술이 부족한 탓이었을까? “그렇다. 의욕만으로 안 되는 게 농사다. 게다가 귀농 교육장에서 배운 이론적인 기술로는 한계가 자명했다. 벼농사 실패 뒤엔 콩 농사를 했는데 죽정이 수준의 콩을 소량 수확했을 뿐이다. 보리 농사도 했지만 실패했다. 전통주를 만들기 위해 누룩용 밀도 재배해봤지만 아예 제대로 자라지 않더군. 멧돼지나 고라니 등 야생동물들도 흉작에 기여했다. 무엇 하나 만만한 게 없었다.” 손을 댄 작목마다 어긋나다니. 농사란 왜 이렇게 어려운가? “이론보다 농사에 박사인 농민들에게 농사를 배우는 게 중요하다는 경험을 확실하게 했다. 귀농을 할 경우엔 현지 멘토를 선정해 도움을 받는 게 좋겠다. 그런데 크든 작든 실패의 경험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어려운 과정을 거치면서 노하우라는 게 생기니까. 덩달아 자신감도 생긴다.” 현재 주력하는 분야는 어떤 것이지? “토종 다래로 만든 청고추장을 생산하는데 꽤 인기가 있다. 주력 상품은 머루 발사믹(Balsamic) 식초다. 전에 매실 식초를 생산했던 경험을 살려 고품질 발사믹 식초 제조에 전념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유래한 발사믹 식초는 샐러드드레싱과 스테이크 소스 등으로 활용되는 식재료로 일반 식초보다 향과 풍미가 뛰어나다. 신현석은 무주군에서 유일하게 머루를 원료로 하는 발사믹 식초를 생산해 주변의 관심을 사고 있다. 가내수공업 방식으로 정통 발사믹 식초를 만든다. 그가 식초에 뜻을 둔 건 10년 전부터인데, 이제 머루 발사믹 식초로 본격적인 행진을 할 참이라고 한다. 귀농 이후 난항과 혼선이 흔했지만 발사믹 식초를 견인차 삼아 대차게 질주하고 싶은 것이다. 비로소 얻은 마음의 여유 “귀농 이후 가장 난처한 건 경제 문제였다. 사실상 이렇다 할 농업소득이 발생하지 않았으니까. 반면 거듭 자금을 투여할 일은 많았다. 시설과 장비 확보에 자주 큰돈이 들어갔다. 귀농엔 자금력이 기본적으로 중요하다는 걸 절감하며 살아왔다.” 생활비는 그간 무엇으로 충당했나? “틈틈이 건축 일을 해 생계 문제를 해결해왔다. 대전에 살 때 벌어들인 소득수준에 미치지 못하지만 아내와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늘 쫓기는 기분으로 고민에 사로잡히곤 했다.” 농사와 건축업을 병행한 형국이다. 이건 이상적인 배합이지 않을까? 농외소득을 최대한 끌어올려 농사의 부진을 메워나가는 건 고육지책이라기보다 진취적인 방식으로 보인다. “단점도 있다. 건축 일을 하다 보면 농사에 전념하기 어렵다는 게 바로 그렇다. 나와 아내는 이 산골에서 여생을 살다 흙으로 돌아갈 걸 작정하고 귀농했다. 농업에 전적으로 몰두하며 살 수 있는 여건 마련이 향후 숙제다. 이제 발판은 마련됐다. 매우 긍정적인 전망을 하고 있다.” 당신은 무주군귀농귀촌협의회 리더 그룹에 속해 있다. 귀농인들의 실정에 밝을 테지. 농사 문제를 제외할 때 귀농인들은 흔히 어떤 사안에 가장 큰 애로를 느끼는가? “토박이 주민들과 융화하는 문제다. 대체로 원주민들은 귀농인들에게 심적 불편을 느끼는 것 같다. 일부 주민들은 대놓고 ‘굴러온 돌’ 취급을 한다. 내가 사는 마을에선 다행히 예민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마을에서 13년을 살며 좋은 유대관계를 맺어온 나를 내심에선 여전히 이방인으로 여긴다. 불화와 반목이 심한 마을에선 귀농인이 견디지 못하고 철수하는 사례도 발생한다. 반면 일부 귀농인들이 물을 흐려놓는 경우도 있다. 어느 한편에만 문제의 원인이 쏠려 있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해결책이 있다면? “깊이 들어가 보면 농업지원금 문제로 갈등이 유발되는 걸 알 수 있다. 토박이들은 귀농인들이 지원금을 독식한다 하지만, 귀농인들은 혈연과 학연의 힘을 가동하는 원주민이나 귀향인들에게 혜택이 주어지는 불합리를 지적한다. 그렇다면 관에서 매우 공정한 룰을 운용하는 게 필요할 것 같다.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융합교육도 시급하다는 생각이다.” 올더스 헉슬리라는 작가는 ‘우리가 사는 지구가 다른 행성에서 바라보면 지옥일 수 있다’고 했다. 어디서든 유쾌한 인간관계를 맺고 살 수는 없다. 내 생각에 시골의 풍속은 기본적으로 순한 것 같더라. “정중하게 다가가면 마음을 열어주는 게 시골 사람들이다. 본심은 다 좋다. 순박하다. 이해관계가 발생했을 때 서로 아량을 베푸는 마음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신현석의 산골 거처는 고요하고 평온하다. 집은 집주인을 닮는다던가? 정갈하면서도 묵직한 기운을 품은 집만큼이나 그가 풍기는 분위기 역시 담백하다. 눈길은 따사로워 뿔도 발톱도 없이 사는 초식동물처럼 양순하다. 도시에서 그의 영혼까지 쥐어박았던 스트레스와 번민은 어느덧 바람처럼 흩어졌나? 농사에선 혼선과 부진이 많았지만 삶의 질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아졌다고 한다. 중심을 놓치지 않고 한 방향으로 달려온 덕분인데, 그의 중심엔 ‘가족 사랑’이 들어 있다. “귀농으로 얻은 게 많다. 비로소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게 됐다. 게다가 아들 내외까지 이곳에 합류해 각자의 일을 한다. 네 식구가 단란하게 산다. 난 어릴 적 혼자 성장하다시피 해 한없이 외로웠다. 따라서 가족과 동행하는 삶에 가치를 두었는데, 그걸 성취한 셈이다. 내겐 지금보다 더 행복한 시절이 없었다.” 신현석이 주는 귀농 Tip •냉정한 현실 감각을 가지고 귀농의 제반 상황부터 면밀하게 파악하라. •농사를 시작한 뒤 일정 정도 소득이 나오기까지 최소 4, 5년은 걸린다는 걸 유념하자. 여유자금 비축이 필수라는 뜻이다. •집부터 먼저 짓지 마라. 임대하거나 지자체가 운영하는 ‘귀농인의 집’에서 일단 살아보고 물정을 충분히 파악한 뒤 천천히 짓는 게 현명하다. 농토 역시 처음엔 임대해 쓰는 게 좋다. 찾아보면 무상으로 빌릴 수 있는 전답도 있다. •농업 기술은 현지에서 멘토를 선정해 배우자. 그래야 재배 작목 선정은 물론 판매망 문제 등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부부가 과수 농사를 할 경우 3000평 정도 규모가 적당하다. •반짝하다가 추락하기 쉬운 유행 작물보다 기본 작물을 충실하게 짓는 게 안정적일 수 있다. •농사는 1년 내내 하는 게 아니다. 농한기나 여유시간엔 봉사활동이나 취미생활을 해 활력을 돋우자.
- 2023-05-19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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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름진 손끝으로 피운 인생의 꽃, 김두엽 화가
- 김두엽 할머니의 그림 생활은 여든셋의 어느 날, 달력 뒷장에 무심코 그린 사과 한 알에서 시작됐다. “아따, 엄마 솜씨가 보통이 아닌데!”라는 아들의 칭찬에 춤을 추듯 마음 가는 대로 그렸다. 무심한 남편과의 결혼 생활, 끝없이 이어지는 가난과 싸우며 고생스러운 젊은 시절을 보냈지만 ‘그마저도 추억’이라며 밑천 삼는다. 어느덧 아흔여섯의 화가가 된 그는 오늘도 작은 나무 책상에 앉아 모진 세월을 희망으로 바꾸고 있다. 전라남도 광양시 봉강면. 알록달록 물감 칠해진 시골집에는 늦깎이 예술가, 김두엽 할머니가 살고 있다. 그의 그림은 거실, 부엌, 안방 곳곳을 꿰찼다. 완벽한 직선은 아니지만 꼬불꼬불 섬세하게 이어진 선과 과감한 색 조합은 ‘사람 냄새’를 짙게 풍긴다. 여든셋에 그림을 시작해 올해로 14년 차 화가가 된 그는 현재까지 600여 점을 그려냈다. 그동안 수십 차례 전시회를 열었고, KBS 교양 프로그램 ‘인간극장’, 토크쇼 ‘황금연못’ 등 다양한 방송에 출연했다. 그림 그리기 딱 좋은 나이 김두엽 화가는 매일 아침 8시 반, 아침 식사를 한 뒤 어김없이 그림을 그린다. 한번 앉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영감은 지난날의 기억, 일상에서 본 풍경,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 등에서 다양하게 얻는다. 그저 떠오르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손을 움직인다. 택배 일 나간 아들을 기다리며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끄적인 그림이 이토록 인생의 큰 줄기가 될 줄은 예상치 못했으리라. “아들도 화가예요. 그림을 팔기 위해 그리지 말자는 신조를 지녔죠. 그래서 낮에는 택배 일을 하고, 퇴근하면 틈날 때마다 작업실에 있더라고요. 나는 혼자 있으니까 심심하지. 집에 굴러다니는 연필을 주워 가지고 달력 뒷장에 사과를 그렸어요. 아들이 집에 와서 ‘엄마, 이거 누가 그렸어?’ 그래요. 잘한다, 잘한다 해주니까 신이 났지요. ‘내가 진짜 잘 그리나?’ 싶었어요. 그러다가 읍내 나가서 스케치북을 두 개 사왔어요. 이것저것 그려서 벽에 붙여뒀는데 손님이 우리 집에 와서 보고는 잘 그렸다고 하셨어. 그때부터 기분이 좋아서 그리고 또 그리고 그랬지요.” 그가 창작 활동을 본격적으로 이어나간 데는 아들 정현영 화가의 도움이 컸다. 정현영 화가는 추계예술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뒤, 대한민국미술대전으로 등단해 다수의 개인전과 기획전에 참여했다. 중견 화가의 눈에도 처음 그려낸 어머니의 사과 그림은 놀랍도록 꼼꼼했다. 배우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계속 그리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어 색연필, 물감 등 다양한 색채 도구를 쥐여드렸다. 원색 위주의 과감한 색을 사용하지만 어색하지 않게 어우러졌다. 세월이라는 재료 김두엽 화가는 1928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학교는커녕 공부라는 게 뭔지도 몰랐다. 여성이라는 사실만으로 모든 상황에 제약이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꿈을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해방 다음 해인 1946년 귀국한 뒤 결혼해 아들, 딸을 낳아 길렀다. 너무 가난했던 탓에 그저 굶지 않고 사는 것, 내 가족이 평안한 것, 남편과 다정하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것이 꿈이라면 꿈이었다.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고, 생계를 잇기 위한 노동은 계속됐다. 김 화가의 그림은 구김살 하나 없이 화사하고 또렷하다. 모진 시간이었지만 아팠던 과거를 오히려 사랑하고 마음에 품었기 때문일 테다. 시 ‘풀꽃’으로 유명한 나태주 시인은 김두엽 화가의 그림을 보고 영감을 받아 수십 편의 시를 썼고, ‘지금처럼 그렇게’라는 시화집을 펴내기도 했다. 두근거림이 있는 그림이라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원하는 삶을 산 건 아니었어요. 꽃피는 봄날에 사랑하는 사람과 예쁜 원피스를 입고 나들이 가고, 어스름한 저녁 산책하다 들꽃 한 아름 받고 싶었네요. 지금이라도 내 바람을 그림으로 그려볼 수 있어 좋아요. 괴로웠던 기억도 저편으로 날아가거든.” 최근에는 함께 노년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시니어 컬러링북 시리즈’를 출간했다. 김 화가가 70대 중반부터 시작된 수전증을 그림으로 극복한 것처럼, 동년배들도 손의 감각을 되찾는 기쁨을 느꼈으면 해서다. “참 오래 살았어요. 앞날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이 참이더라고. 나이 먹어서 그림을 매일 그릴 줄 누가 알았겠어. 기력이 없을 때도 있지만 붓을 잡고 있으면 힘이 좀 나는 것 같고 그래요. 느리더라도 천천히, 계속 그려봐야지. 여러분도 다들 힘냈으면 해요.”
- 2023-04-25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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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 은퇴자들, 노후주거 대안으로 빈집 구독 ‘호퍼’ 주목
- 거주지를 정하지 않고 돌아다니는 ‘어드레스 호퍼’(Address Hopper)가 일본 빈집 해결의 키워드로 떠오르면서 주거구독 서비스가 주목받고 있다. 지자체는 다거점 라이프스타일을 즐기려는 사람들의 이동을 반기는 분위기다. 70대의 노만 겐조(乃万 兼三) 씨는 은퇴 후 가족의 사업을 도우며 수도권에서 주로 거주하지만, 사업에 필요한 물건을 구하기 위해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살고 있다. 50대의 세시타 유키에 씨는 리노베이션 전문 건축가로 25년간 일하다가 2021년부터 전국의 시골을 돌아다니며 빈집을 리모델링하는 다거점 생활을 시작했다. 요즘에는 ‘장인’이라고 불리는 고령자들도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을 사용하기 때문에 원격으로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여러 지역에서 일할 수 있다. 다거점 생활 선호하는 ‘호퍼’ 코로나19 발생 이후 정주(定住)보다 다거점(多據點) 생활(여러 지역을 거점으로 두고 옮겨 다니는 것)을 하는 사람이 늘었다. 재택근무를 하는 회사원, 은퇴 후 살고 싶은 지역을 찾기 위해 미리 살아보고 싶은 고령자, 일을 유지하되 살고 싶은 곳으로 이주하고 싶은 시니어들의 관심이 높다. 주거구독 서비스 어드레스(ADDress)의 ‘ADDress 다거점 생활 이용 실태 리포트 2021년판’ 보고서에 따르면 코로나19 이후 다거점 생활을 하는 사람은 프리랜서(30.7%)보다 회사원(40.4%)이 더 많았다. 다거점 생활을 하는 이유로는 ‘워케이션’(일+휴식)이 32.6%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주요 생활 거점’(24.2%)이라는 응답이 높았다. ‘체류지에서 일은 하지 않고 액티비티, 휴가, 관광을 위해’라는 응답은 20.2%였으며, ‘원격근무’라는 응답도 19.7% 수준이었다. 또한 응답자의 40.4%는 ‘머지않아 이주할 곳을 생각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어드레스는 이들을 ‘어드레스 호퍼’(Address Hopper)라고 부른다. 하나의 주거지에 정착하지 않고 돌아다니며 생활하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한다. 어드레스는 “다거점 지역을 이동하는 교통비가 1만 엔 안팎”이라면서 “멀리 떨어진 도시들을 거점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주변 지역을 거점으로 두고 ‘호핑하는 것’(옮겨 다니는 것)이 특징”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식비와 교통비를 가장 많이 지출하는 연령대는 60대로 지역을 더 활발하게 둘러보는 경향이 있었다. 집도 ‘구독’하는 시대 최근에는 주거를 ‘구독’한다는 개념도 생겼다. 정액제로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기간만큼 살아보고 싶다는 수요가 늘어난 것. 주거구독 서비스라는 개념을 처음 선보인 어드레스는 자연과 역사가 풍부한 지역을 중심으로 빈집들을 리모델링했다. 20여 곳의 지자체가 함께하고 있으며, 일정 금액을 내면 어드레스에 등록된 전국의 주택을 돌아다니며 살 수 있다. 또한 사용자들이 단순히 집만 이용하는 게 아니라 지역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도록 각 주택에 ‘야모리’(家守)라고 불리는 생활 교류 서포트 스태프를 두고 있다. 어드레스 이용자들은 야모리 덕분에 지역을 좀 더 알게 되고 지역 커뮤니티에도 녹아들 수 있다는 점에서 높은 만족도를 보였다. 야모리가 운영하는 커뮤니티에는 지역에 오래 살았던 주민이면서 은퇴한 시니어들이 참여해 2만~5만 엔(약 20만~50만 원)의 용돈도 벌고, 빈집을 임대한 집주인에게는 월 약 4만 엔의 임대수익이 보장된다. 지역도 살리고 빈집 문제도 해결하면서 이용자들은 여러 지역을 체험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주목받는 주거구독 서비스다. 크로스 하우스(XROSS HOUSE)는 도쿄도 내에서만 특화된 주거 구독 서비스를 선보인다. 아파트, 개인실, 세미 프라이빗, 다인실 등 네 종류의 주거 형태를 제공한다. 비어 있는 집들을 모아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이용 요금이 같은 집이라면 무료로 이동하며 살아볼 수 있다. 하프(HafH)는 빈집을 활용하는 건 아니지만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의 집을 구독할 수 있어 인기다. 제2의 주거 ‘코리빙’(Coliving), 여행하고 일하는 ‘트래블링’(Traveling), 만남과 배움 ‘코워킹’(Coworking) 등 세 종류의 정액제 서비스를 제공한다. 지자체들도 주거구독 서비스를 반기고 있다. 빈집 이주자를 위해 ‘빈집 뱅크’ 제도를 운영하는 지자체들은 주거구독 서비스 업체들과 협업해 빈집 정보를 제공하고 리모델링 비용을 지원하는 등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를 위해 2017년에는 주택안전망법을 개정했다. 지자체는 구독 서비스를 통해 지역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지역으로 이주하거나, 관계인구가 되어 지역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관계인구는 지역에 거주하지는 않지만 지역 주민들과 소통하며 경제활동을 하는 인구를 말한다. 어드레스 설문조사에서 다거점 생활을 하는 회사원 중 40%는 부업을 하고 있다고 응답했는데, 어드레스는 “향후 기업들이 근로자의 다양한 근무 방식을 인정한다면, 다거점 생활을 하는 회원을 대상으로 지역 고용 창출이 진행될 가능성도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 2023-04-24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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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농이 곧 지옥으로 가는 길일 수도 있지만”
- 김제천(69, 영동자연호두농원)이 아내와 함께 영동군 산골로 귀농해 호두나무 농원을 경영한 지 올해로 15년째. 농사 기술도, 안목도 푹 익었을 연륜이다. 성취한 것의 수효가 드물지 않을 경력이다. 그런데 얄궂게도 소득은 여전히 신통치 않다. 하품 한 번 늘어지게 해볼 겨를 없이 부지런히 뛰었지만 손에 들어오는 게 별로 없다는 게 아닌가. 그럼에도 구겨진 기색이 없다. 웃음이 흔하게 터져 나온다. 난처한 현실을, 남모를 애환을 얼버무리는 웃음이라기보다, 불운과 부진을 통째 이의 없이 받아들여 차라리 긍정하는 심리의 소산일 테다. ‘뭔가 미묘한 간계가 침투해 나를 고생길로 데려간 건 아니지 않은가?’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 김제천은 귀농으로 치르는 홍역의 책임이 일면 섣불리 일을 저지른 자신에게도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김제천의 농원은 완전히 외진 산중에 있다. 마을은 저 너머 멀리에 있어 고독을 벗 삼기에 적격인 곳이다. 숲속의 공인된 가수들인 산새들만 이따금 지지재재 노래할 뿐 별반 들려오는 게 없다. 산세가 기차게 수려한 것도 아니라 경관에 넋 놓고 종일 해찰하는 폐단이 생길 리도 만무하다. 즉 잡념 없이 일에 홀린 듯, 종일 농장에서 이리 뛰고 저리 달리기에 딱 좋은 입지다. 게다가 김제천은 ‘뭐든 자청해 덤벼든 일에는 갈 데까지 가야 직성이 풀리는 성향’의 소유자다. ‘멍 때리기’나 게으름 피우기는 당최 적성에 맞지 않다. 해서 늘 일에 묻혀 살아왔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몸을 쓰겠다는 투로 부단히, 부지런히, 농사 하나에 전념하며 15년 세월을 살았다. 그는 대전에서 회사에 다니다가 그만두고 귀농했다. KT에 근무하다 뜻한 바 있어 명퇴를 하고 이 후미진 산골짝에 들어왔다. 애초 농사에 입문할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그저 물 좋고 산 좋은 시골에서 나빠진 건강을 회복하며 한가하게 살고 싶었던 거다. 유유히 노닐기를 생활의 중심에 두고서 인생의 가을을 참신하게 누리고자 했다. “귀농보다 귀촌하는 기분으로 이곳에 자리 잡았다. 농사를 지어 소득을 올리는 쪽으로 방향을 정하고 내려온 게 아니었다. 부부 둘이 먹고살기에 지장 없을 정도의 연금이 나오기 때문에 굳이 농업 소득을 바랄 이유가 없었다.” 터는 어떻게 마련했나? “귀농 전에 3만 평 규모의 임야를 사들였다. 마음을 내려놓고 한적하게 살기에 좋은 곳이라서. 그저 소소하게 텃밭 일구고, 가족이 따먹을 수 있을 정도의 몇몇 과일나무를 기르며 살기에 적당한 땅이라고 생각했던 거지.” 땅을 살 때엔 신중하게 고민부터 하라는 충고는 고대 로마의 ‘농업론’에도 나오더라. 당신의 얘기는 널따란 임야의 활용 방안을 구상하지 않은 채 덜커덕 사들였다는 걸로 들린다. “별 생각 없이 매입했다. 면적이 넓은 데다 가격도 싼 편이라 일단 사들였으니까. 그렇게 시골 생활을 시작하고서 감나무, 포도나무, 다래 등을 몇 그루씩 심었다. 도시에 사는 손자들을 가끔 불러들여 자연학습의 기회를 제공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별 할 일 없이 지낸다는 게 예상보다 따분했다. 성격상 마냥 놀면서 지내지 못하겠더라고. 도시에서와 달리 일에서 해방돼 좀 편하게 살고 싶다는 뜻이 있었지만, 딱히 몰두할 일이 사라지자 갑갑증이 몰려들었다. 그래 시작한 게 호두 농사다.” 호두를 작목으로 선택한 이유는? “작목 선정을 위해 임업진흥청 같은 곳에서 농업교육을 받았는데 호두 농사를 권했다. 임야를 이용한 과수 농사 가운데 호두가 유망하다는 얘기였다. 여느 과수와 달라 나무를 소독해주지 않아도 되는 등 관리와 수확에 용이하다고 했다. 한마디로 한결 쉽고 편하게 다룰 수 있는 작목이라는 거였다. 이러한 홍보에 이끌려 호두 농사를 시작한 이들이 많았다. 나 역시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실상은 달랐다.” 어떻게 다르던가? “재배부터 생산까지 일반 과수 농사에 필요한 공정보다 수월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퇴치가 어려운 외래 해충의 발생에 따른 피해와 어려움이 컸다. 호두나무가 1000그루로 늘어나면서는 감당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힘겨웠다. 다른 과수들은 관련 기관에서 생산물을 수매해주지만, 호두 유통엔 그런 시스템조차 없다는 것도 뒤늦게 안 약점이다. 이래저래 작목 선정을 제대로 하지 못한 착오가 있었던 셈이다.” 귀농 교육장 강사들의 얘기를 곧이곧대로 믿지 말라는 충고가 흔하던데. “강사들은 교과서적인 이론에는 밝다. 그러나 실제 상황엔 둔감하다. 농업의 현장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있다는 거. 나는 이러한 정황을 미처 몰랐다.” 김제천은 귀농의 목적을 또렷하게 정하지 않은 채로 호두 농사에 뛰어들었다. 물샐 틈 없는 사전 준비와 구상을 하고도 일이 이상하게 풀려나갈 수 있는 게 귀농인데도 말이다. 따라서 그는 예상하지 못한 곤란을 수시로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성실한 근로와 기민한 머리로 상황을 돌파하길 거듭했지만, 어쩌면 그의 내부에 풍성하게 서려 있을 강인하고 낙천적인 기질에 힘입어 주저앉는 시늉조차 해본 적이 없지만, 15년간 흘린 비지땀과 남모를 고뇌의 총량은 아마도 드럼통에 담고도 넘칠 정도일지도. 귀농 자체를 만류하고 싶다 고달픈 노역은 임야의 토질을 보강하는 데에서부터 가시화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알고 보니 땅 거죽 하부엔 온통 돌투성이더란다. 척박하기 그지없는 땅이었던 것. 해서 그는 땅을 파 돌들을 끄집어냈다. 큰 돌은 정으로 깨부숴 파냈다. 그러곤 퇴비를 듬뿍 묻어주는 작업까지 손수 다 했다. 지하에 일일이 배관을 하는 관수 시설도 필수였다. 허리 휘어질 고생이 자심했을 걸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야생 짐승들의 훼방도 그를 괴롭혔다지. “멧돼지들이 수시로 들이닥쳐 열매를 먹기 위해 호두나무 줄기를 마구 찢어놓더라. 청설모, 삵, 담비, 때까치 등도 방어하기 어려운 애들이다. 특히 무리 지어 날아와 호두 열매를 노련하게 파먹는 때까치의 실력엔 당할 재간이 없다.” 감전 효과를 발휘하는 전선을 설치하고, 심지어 대포 쏘는 소리를 내는 장비까지 동원해 방어하는 농가를 보자면 농사라는 게 실로 만만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저 옛날 전통사회의 농부들은 짐승들과 사이좋게 반반씩 나눠 먹는 걸 관습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이게 차라리 현명한 걸까? “딱히 방비책이 없다. 그런데 짐승들도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 아니겠는가. ‘야야! 애들아! 적당히 먹고 가라. 너희들이 먹고 남은 걸 우리가 거두면 된다!’ 이렇게 체념하고 그냥 놔두는 거다. 그게 상책이라 생각해서다. 고만한 일로 속 끓일 게 뭐 있겠나?(웃음)” 호두 농사에서 가장 어려운 대목은 어떤 것일까? “호두가 훼손되지 않게 열매를 따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 어렵다. 이건 기계 작업이 불가능하다. 대나무 장대로 조심스럽게 털어야만 한다. 호두의 딱딱한 껍질을 벗겨 알맹이를 일일이 끄집어내는 작업도 쉽지 않다. 펜치를 들고 하나하나 껍질을 까 형태가 손상되지 않도록 분리한다. 세심한 손놀림이 필요하며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다. 겨울철엔 주로 아내와 함께 이 작업을 한다. 농한기가 없는 게 호두 농사다." 연간 순수익을 말해줄 수 있나? “800만 원쯤 된다.” 저런! 너무 적다. “호두 농사의 수익성이 이렇게 열악하다. 그러니 내가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겠나?(웃음) 잘나가는 포도 농가나 복숭아 농가의 수익에 비하면 10%도 안 되는 수준이니까 말이다. 다행히 연금이 있어 의식주 생활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귀농하려는 이들에게 내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농사로 돈 벌기 어렵다는 거! 연금이라거나 믿을 만한 게 없다면 아예 시골에 오지 말라는 거!” 원점으로 돌아가 귀농을 다시 한다면 어떤 작물을 재배하고 싶지? “복숭아 농사 정도가 좋겠지. 복숭아가 이 지역 특산물이기 때문이다. 귀농하려거든 부디 지역 특산물에 관심을 가지는 게 좋겠다. 생산 여건과 유통 구조가 훨씬 안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귀농 자체를 만류하고 싶다. 형편이 된다면 귀농보다 귀촌을 해 농사 없이 편안하게 사는 게 현명하다.” 성장하는 나무들의 신비로움 시골에서 느긋하게 살기. 족쇄 없는 영일(寧日)을 보내기. 그는 그런 걸 원했다. 그러나 어쩌다 보니 원했던 삶과 현재의 삶이 상당히 불일치한다. 그렇다고 낙심으로 찡그리고 살면 우습다. 별처럼 마냥 빛나는 삶이 어디에 있겠나. 그는 15년간 정당하게 일하고 호두나무들을 공정하게 대했다. 따라서 여전히 당당하다. 내가 기죽을 일 있나 봐라, 하듯 부진한 행진을 해온 호두 농사에 새삼 발동을 건다. 으슬으슬 진저리칠 만한 현실이지만 이왕 내친걸음 끝까지 가보겠다 한다. 농사 기술이야 이미 일취월장했다. 크고 알맹이가 꽉 찬 고품질 호두를 생산한다.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덕분에 배우고 깨달은 게 많다. 궁리 끝에 늘 도달하는 건 반성이더라. 삶도 농사도 반성으로 돌아보면 얻을 게 많다.” 산중에서 반성을 일삼아 뭔가 환해지는 게 있다면 그게 도인(道人)인데?(웃음) “어! 내가 도통하려나? 하하하. 여하튼 시골의 삶을 로망으로 삼은 이들이 많지만 돈 욕심을 다 내려놓지 않고선 어렵다. 귀농이 곧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일 수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 의식주 걱정 없고, 몸 안 아프고, 게다가 괜히 터져 나오는 웃음을 입에 매달고 산다면 그보다 나은 게 있을까. “내가 감성적인 인간은 아닌데 산골에 살다 보니 전에 느끼지 못했던 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내 자식처럼 아끼며 기르는 호두나무들이 우렁차게 성장하는 걸 바라보면 신비로움이 느껴진다. 이건 깊은 감동을 준다. 이러한 재미에 내가 농사를 짓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호두 농사에 헌납한 15년 세월. 말 못 할 고통이 왜 없었으랴. 그러나 도스토옙스키의 말처럼, ‘고통스러워야 살아 있는 것’이다. 게다가 고통도 지옥도 다 지나가게 마련이다. 김제천이 주는 귀농 Tip •시골 생활에 낭만적인 로망을 품은 이들이 많지만, 현실의 시골은 낭만을 누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사고를 하자. •무턱대고 집이나 땅부터 사는 건 위험하다. 사전에 1, 2년 정도 농촌 빈집을 빌려 살아본 뒤 적응 가능성부터 판단하라. •부부가 뜻이 맞지 않은 채 귀농하거나 단신 귀농은 금물이다. 정착에 실패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임야에 농사를 지으려 할 경우엔 인허가 사항부터 꼼꼼히 점검하고 진행하라. 지자체의 농촌활력센터를 찾아 문의하면 원스톱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농산물 유통을 위한 공부와 고민을 많이 하라. 좋은 농산품을 생산해도 유통의 벽에 가로막히는 경우가 숱하다.
- 2023-04-20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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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촌을 풍요롭게 만드는 새로운 힌트 ‘관계인구’
- “지방에 집 한 채 지어 텃밭 가꾸며 맑은 공기 마시는 삶 좋지. 문화생활도 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고. 그런데 이제 100살까지 산다는데 지역에서는 어떻게 먹고사나?” 지방 소멸이 코앞인 시대, 그럼에도 지역에서 살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 ‘지역에서 먹고사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관계인구’라는 말이 있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 때 자원봉사가 끝난 후에도 지역을 오가는 사람들을 관계인구라고 지칭했다고 한다. 일본 정부는 2018년에 이 단어를 공식 채택했다. 지역 주민이나 뜨내기 관광객이 아니라, 관심 갖고 지역 상품을 계속 구매하고, 자주 방문하며, 기꺼이 자원봉사를 하거나, 아예 지역과 도시에 하나씩 두 개의 거점을 두고 생활하는(일본에서는 더블 로컬이라고 부른다) 등 지역에 도움 되는 활동을 하면서 여러 방면으로 ‘관계’하는 사람들이 관계인구다. 관계인구사업을 전개한 지 5년이 지난 지금, 일본 전체 지자체의 65%가 관계인구 늘리기 사업을 시행하여 전국의 관계인구는 총 1800만 명에 이른다. 지역 정부는 지역 생활과 사람들을 소개하며 지역의 매력을 끌어내어 ‘나도 한번 가보고 싶다. 오래 그 안에서 삶을 느끼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만드는, 일종의 ‘지역 매력 표출 대작전’을 전개한다. 일상을 보여주고 ‘여기에 오면 당신도 할 일이 있고 꽤 살 만하다’고 알리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2023년 1월 1일부터 정부가 ‘생활인구’라는 개념을 법으로 제시했다. 각종 혜택도 쏟아진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이렇게까지 준다고?’ 할 만큼 지원사업을 꽤 많이 찾을 수 있다. 조건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일정 기간 집도 주고 체류비도 준다. 위기를 관계로 극복하자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지역이 ‘위기’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적당히 많은 사람, 인프라, 밥벌이 그리고 괜찮은 문화가 있다면 굳이 위기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25년 전 IMF 위기, 15년 전 글로벌 경제위기로 휘청거리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3년간의 팬데믹 위기가 빙하기처럼 사회를 얼어붙게 했다. 그 안에서 갑질, 번아웃, 공황장애를 외치는 피곤하고 절망적인 목소리가 용광로처럼 끓고 있다. 비수도권 지역도 마찬가지다. 중앙정부가 막대한 지원금을 뿌린들 그 돈은 흉물스러운 거대한 건축물로 바뀐다. 석양이 물드는 지평선을 여유 있게 감상하며 오늘의 수확을 감사하고, 제철 음식으로 따뜻하게 차린 식탁에서 다정한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하며 행복하게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은 꿈에 불과하다. 모두 바쁘고 모두 피곤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지역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많다. 과거에는 대형버스를 타고 지역의 핫플을 방문하고, 소셜미디어에 올릴 사진을 적당히 찍고, 유명 식당에서 맛있는 것을 먹고 오는 관광이 대부분이었다면, 이제는 한달살기처럼 오래 머물기도 하고, 워케이션처럼 일하면서 쉬기도 하고, 창업도 한다. 하루하루 살아내기 바쁜 직장인들에게는 주말이나 휴가를 이용해도 언감생심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꽤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지역을 오가며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지역이 무조건 끌렸어요”, “여기 사람들은 개방적이고 너무 좋아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관계인구가 많이 만들어질 것만 같은 희망적인 의견들이다. 얼마나 지역을 좋아하면 ‘리틀 포레스트’라는 영화까지 나왔겠는가. 사회적 거리가 관계로 변하려면 대부분의 도시인들은 여전히 지역과의 끈끈한 관계보다 적당한 ‘사회적 거리’를 원한다. 전국을 철도 중심으로 연결하다 보니 대부분 지역은 긴 시간 동안 자차 운전으로 가야 한다. 병원 없는 곳이 많아서 ‘이 지역에서 아프면 그냥 죽는 거라고 생각한다’는 무시무시한 말도 있다. 쇼핑몰, 갤러리를 가려면 차 타고 인근 도시로 가야만 한다. ‘문 닫는다’는 말이 상가뿐 아니라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도 들린다. 한달살기 하려고 호기롭게 시골에 왔는데 벌레 보고 기겁해서 ‘나는 간다’는 말을 톡으로만 툭 던지고 야반도주하듯 하루 만에 사라져 주최 측이 황당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여유 있는 전원생활이 그리워 전원주택을 지어도 지역 주민이 ‘어서 옵쇼’ 하고 환대하는 것은 아니므로 ‘시골 사람들은 배타적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각종 기회비용과 심리적 부담 때문에 관계 맺기 힘들다는 일본 정부의 조사 결과도 있다. 현실과 관계 형성 사이에는 큰 장애물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는 재빠르게 더 나은 인생을 설계하며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도전한다. 삶의 여유와 질을 가늠해보고 그 기회가 지역에 있다고 ‘착안’한다. 도시에서보다 더 풍부한 경험을 하고 재미있는 사람도 많이 만난다며 부지런히 집을 나선다. 지역도 더 좋은 환경을 함께 만들자며 외지인에게 기꺼이 마음을 열고, 때로는 “기후위기 시대에 우리 지역의 좋은 공기를 사라”며 호기롭게 외치기도 한다. 언제나 변화 가능성은 있다. 결국 모든 것은 선택이다. 그 선택을 좀 더 확실하게 성공시키려면 기본적인 인프라와 교통 문제를 정부가 빨리 해결하는 일만 남았다.
- 2023-04-18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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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촌으로 여유로운 삶 찾아” 충북서 대추 농사로 활로 찾은 귀농인
- 서울에 살던 장영수(65, 보은 두드림농원)가 충북 보은군으로 귀농한 건 건강에 이상이 생겼기 때문이다. 물 좋고 산 좋은 시골에 살며 몸은 물론 마음까지 다스리고 싶었다. 그는 광고대행사 직원으로, 또는 개인사업자로 일하며 긴긴 서울 생활을 했다. 과로와 스트레스를 달고 살았다. 폭탄주를 돌리는 술자리도 매우 잦았다지. 마침내 심혈관 질환이 그를 방문했는데, 좁아진 관상동맥을 스텐트 삽입으로 뚫는 시술을 한 뒤 2011년에 귀농했다. 장영수가 사는 마을은 딱히 경관이 빼어나거나 유별한 특징 없이 그저 평범한 농촌이다. 인가와 전답이 고르게 섞여 아늑하다. 그는 이 한적한 농촌에서 여생을 원만하게 누리고 싶었던 것이다. 농사를 통한 건전한 육체노동으로 몸을 북돋우고, 마음엔 여유를 부여해 즐겁게 살고 싶다는 또렷한 목적을 정하고 귀농했다. 부연하자면 농사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경제적 성과를 거둘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돈벌이야 도시에서나 가능하지 시골에서 가당키나 하겠나?” 귀농 이후 시종일관한 그의 기본 관념이 그렇다. 한마디로 쉬엄쉬엄 살고 싶었던 것이며, 귀농은 그러한 삶의 방식에 적격일 뿐 결코 돈을 가져다주는 수단이 아니라는 신념을 고수해왔다. 귀농 초기 개척기에 장영수는 혼자 살았다. 농업 소득이 발생하기까지 한동안 동갑내기 아내는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계속해 가계를 꾸려나갔던 것. 한편 장영수가 선택한 재배 작목은 보은군의 전통 특용작물인 대추. 1800평 규모의 농원을 조성해 600여 주의 대추나무를 심었다. 이 아담한 농장에서 소득이 나오기 시작한 2014년부터 비로소 아내가 서울에서 내려와 합류했다. 순리를 좇아 세운 계획대로 차질 없는 행진이었다. 대추나무 묘목이 성장해 생산물이 나오기까지 3년여 동안 장영수는 또 다른 일거리를 만들어 수입을 올렸다. 이 역시 서울에서 미리 구상한 시나리오에 따른 것이었다. “원래 내가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다. 귀농 전엔 소비자 심리와 경영 마케팅을 공부했다. 이게 유용하게 쓰였다. 대학에서 잠시 강의를 했으며, 충북농업기술원이 주관하는 강소농 교육 프로그램에 강사로 참여할 수 있었으니까. 여기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귀농 초기의 필요비용을 충당하기도 했다.” 농사 경험이 없었던 귀농 직후 강소농 강사로 나서는 게 어떻게 가능했지? “강소농들을 모아놓고 강의를 하는 식의 프로그램은 아니었다. 개별 농가를 방문, 재배 기술이 아닌 경영 마케팅을 가르쳤다. 나에겐 매우 유익한 기회였다. 농촌과 농업, 귀농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었으니까. 농사를 짓는 기본 자세와 흙을 대하는 태도를 배우기도 했다. 음으로 양으로 나의 대추 농사에 큰 도움이 됐다.” 대추를 전공 작목으로 선택한 이유가 있겠지? “사실 처음 관심을 가진 건 소나무 농원이었다. 강원도로 귀농해 소나무를 기르고 싶어 한동안 적지를 찾아 강원도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마땅치 않아 고심하던 차에 마침 보은군으로 귀촌한 처형 내외의 권유에 이끌려 이곳으로 귀농한 뒤 대추 농사를 선택했다.” 보은군은 조선 중기부터 대추 주산지로 이름을 날렸다. 현재 1200여 농가가 대추를 재배한다. 귀농인들은 가급적 지역 특산물을 재배하라는 충고를 듣는다. 이점이 많다는 얘기인데 과연 그렇던가? “장점이 많다.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게 판로 확보인데 특산물의 경우 이 점에서 확실히 유리하다. 이미 꽤 안정된 유통 루트를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편적으로 재배 기술 수준도 높아 도움이 된다. 그러나 초심자에겐 당연하지만 어려움이 많다. 우선 병충해에 관한 대처 능력을 갖추기 어렵더라. 수확 뒤의 전면적인 전지 작업에도 진땀을 쏟아야 한다. 무엇보다 난감한 건 종잡을 수 없는 기상 변동에 속수무책이라는 점이다. 이래저래 자칫 흉작을 볼 수 있다.” 심신 치유에 치중하다 장영수는 작년의 대추 농사에서 최대의 흉작을 기록했다. 날씨 조건이 따라주지 않아서였다. 보은엔 예로부터 ‘삼복에 비가 내리면 보은 아가씨들이 시집을 못 갈까 봐 운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대추알이 영그는 여름철에 가장 필요한 게 햇빛인데, 줄기차게 비가 내리면 성숙이 부실해 거둘 게 적어진다. 장마가 길었던 작년, 그는 평년 대비 50% 남짓 수확했을 뿐이다. “농사의 관건은 사람의 손길이 얼마나 가느냐에 달려 있다지만, 농작물은 농부의 발소리를 들으며 자란다고 하지만, 요즘은 이게 통하지 않는 것 같다. 기후 변동이 심하기 때문이다. 하늘이 하는 일을 어떻게 인간이 제어하겠나. 이상 기후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게 상책이지만 대추 전문가도, 대추 연구기관도 이 문제에 관한 대안을 갖고 있지 않다. 물어볼 곳조차 없는 것이다. 따라서 노련한 농부들도 전전긍긍한다. 이는 물론 대추 농사만의 난제는 아니다.” 당신은 보은군 귀농귀촌협의회장을 역임했다. 이 지역 귀농 현실에 누구보다 밝을 테지. 대추를 재배하는 귀농인들의 일반적인 실태는 어떻다고 보나? “복합영농을 하는 고령층 중심의 원주민 농부들에 비해 귀농인들이 한결 좋은 방식으로 대추 농사를 하는 것 같다. 그러나 농가마다 편차가 크다. 농사를 접고 역귀농을 하는 사례도 가끔 보인다.” 누군가 귀농을 해 대추 농사를 하겠다고 한다면 어떤 조언을 하고 싶나? “갖가지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는 굳센 의지가 있는지부터 스스로 점검하라 말하고 싶다. 또 하나. 농사로 큰돈을 벌겠다는 목표를 설정하는 건 위험하다고 조언하고 싶다. 은퇴자들에겐 더욱 버거운 게 농사다. 몸을 부지런히 써야 하는 게 농업이니까. 힘과 패기를 갖춘 젊은이들의 귀농은 비즈니스로서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 그러나 농촌 청년들이 대부분 도시로 빠져나간 현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농촌에서 경제 효과를 거두기 어려운 현실 상황을 냉정하게 직시해야 하는 거다.” 대추 농사 경력이 10년이다.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이제 안정 궤도에 올라섰나? “겨우 10년 차일 뿐이다. 아직 뭘 잘 안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부부 둘이 감당할 수 있는 소형 농원을 그럭저럭 원만하게 운영하고 있다. 순소득은 연평균 2500만 원가량이다. 이쯤이면 무난하다고 생각한다. 아내와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데, 여행 경비까지 나오는 수익 수준은 아니라 아쉽긴 하지. 하지만 먹고사는 데는 별 지장 없다. 도시보다 생활비가 한결 덜 드는 게 시골이니까.” 다년간 귀농인 취재를 해온 내 경험에 따르면, 귀농 10년이 지나도 안정 기반을 갖추지 못한 채 고심하는 사례가 많았다. 농업이란 왜 이렇게 힘든가? 무엇이 문제라 보는가? “첫째는 농사로 돈을 벌기엔 구조적 한계가 너무 많다. 과격하게 말하면, 귀농으로 대단한 수준의 수입을 올리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둘째, 흔히 치밀한 준비 없이 대충 귀농하는 경향도 문제다. 가령 중국식당을 하려면 사전에 짜장면을 만들 수 있는 정도의 실력은 갖추고 뛰어들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무작정 식당부터 차려놓고 보자는 식의 귀농이 너무 흔하다. 난 귀농 전에 이러한 상황을 미리 간파하고 아예 돈벌이에 목적을 두지 않았다. 수입은 소박한 수준에 만족하자, 대신 심신 치유에 더 치중한 생활을 하는 걸 지향으로 삼았다.” 됐다! 이쯤에서 만족하며 산다 귀농으로 경제적 성취를 해 삶을 고양하기보다 몸과 마음을 돌보는 데 방점을 찍었다는 얘기다. 농사는 물론 최선을 다했다. 몸을 아끼지 않고 닳도록 썼다. 그러자 피가 잘 돌지 않던 혈관의 형편이 좋아지더라는 게 아닌가. 근면한 노동만이 아니라, 시골에 지천으로 존재하는 햇빛과 바람과 꽃과 새소리 역시 쓰러질 듯 궁지에 몰린 그의 건강을 일으켜 세우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귀농 전엔 야트막한 언덕을 걷기조차 어려웠다. 얼굴색이 너무 안 좋다는 소리를 수시로 듣고 살았다. 그러나 귀농 후엔 한라산 정상도 가볍게 오를 수 있을 만큼 호전되더라. 몸 건강이 좋아지면서 마음도 평온해졌다. 사실 도시에 살 때 내 성격은 그리 좋은 게 아니었다. 늘 화를 품고 살았으니까. 그러나 귀농 이후 변하더군, 상당히 느긋한 인간으로.” 마을 원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게 없다는 얘기가 흔하다. 어떤 처신이 필요하다 보나? “무조건 인사 잘하는 습관을 들이면 된다. 진심을 담아서. 소소한 일에 도움 주는 걸 인색하지 않아야 하고. 그러나 10년을 살았더라도 원주민들에게 귀농인은 여전히 외지인이라는 관념이 남아 있다. 이걸 인정하고, 마을의 기본 질서를 존중하는 게 좋겠다. 그런데 텃세니 불화니 하는 건 대체로 땅 문제에서 발생한다. 토지 경계가 모호한 게 시골인데, 귀농인들은 대뜸 측량부터 하고 자기 땅에 울타리를 친다. 이렇게 되면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양보와 양해를 통해 해결하는 게 속 편하게 살 수 있는 지름길이다.” 소형 농원의 이상적인 모델을 추구하며 대추 농사를 한층 성장시킬 구상을 가지고 있진 않은가? “(정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이쯤에서 만족하며 산다. 특별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농원이지만, 그저 평범한 일상을 누릴 수 있는 기반은 마련됐다. 여기에서 무엇을 더 바라랴. 큰 굴곡 없이 무난하게 정착한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게다가 나이 들어 이젠 힘도 좀 딸린다. 아내와 나의 건강을 유지하며 이대로만 살면 행복하겠지. 그런데 어떻게 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지? 아는 게 있다면 말해달라.(웃음)” 재미있게 살며 하루에 15초만 크게 웃어도 근육은 물론 장기까지 운동이 돼 건강해진다 하더라. 문제는 크게 웃을 일이 별로 없다는 거겠지.(웃음) “모든 하루를 즐겁게 살고 싶다. 가급적 간소한 생활을 하면서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즐거운 삶이라는 생각으로 귀농했다. 그 목적을 꽤 달성한 셈이다. ‘아, 나도 이렇게 편안하게, 여유롭게 살 수 있다니!’ 속으로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자연과 근접해 사는 것만으로도 시골 생활의 가치는 크다는 생각도 하고.” 그의 얘기는 자주 맥락이 끊겨 뒤엉기곤 했다. 하지만 할 말 다 했다. 간추려놓고 보니 애써 최선을 다한 언설이었다 할까? 이게 좋은 여운으로 남는다. 장영수가 주는 귀농 Tip •사전에 귀농의 목적을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설정하자. 그러기 위해선 귀농 교육기관을 통한 학습을 미리 충실하게 해야 한다. •농토를 임대해 농사를 짓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제약 조건이 많아 시설물 설치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집은 빌려 쓰더라도 농토만은 내 소유여야 유리하다. •가급적 부부가 함께 귀농하라. 단신 귀농을 할 경우엔 불안정하고 불규칙한 생활을 피할 수 없어 손실이 커진다. •이왕 귀농할 거라면 한 살이라도 젊은 나이에 귀농하자. 농사는 체력과 순발력이 필요한 직업이다. •귀농지에 특화된 농작물을 재배하라. 생산품의 마케팅과 유통에 유리하니까. •반짝하다 사라지기 십상인 유행 작물에 편승하는 건 위험하다.
- 2023-03-31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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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지 목장에서 그가 행복하게 사는 연유는?
- 산바람이 맵차다. 그러나 설경이 눈부셔 추위를 녹인다. 접때 내린 눈발, 그대로 겹겹 쌓여 발목에 휘감긴다. 해발 600m 산협 사이 오지다. 설원에 나는 새 한 마리 없다. 산마루 양달에 선 소나무들 점점이 푸르지만 오롯이 적막하다. 산정 아래론 일망무제한 설경. 적요를 넘어 적멸이다. 그러니 심오하게 아름답다 할 수밖에. 여기는 유산양(乳山羊) 목장(괴산 하늘목장)이다. 눈 오면 강아지처럼 좋아라고 겅중겅중 뛰어다니는 게 산양의 습성이지만, 눈이 쌓여도 너무 쌓였다. 축사 안에 들어박혀 나오지 않는다. 이 목장은 눈에 뒤덮이지 않더라도 오가기가 쉽지 않다. 사륜구동 차량이 아니고선 접근이 어렵다. 그러나 방문자들이 많다. 전국 곳곳에서 사람들이 구경 삼아 찾아온다. 흔치 않은 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산세는 자못 묘하고 깊어 세속 도시를 잊게 한다. 3만 평이나 되는 너른 목장의 초지를 뛰놀며 풀을 뜯는 산양들의 모습은 충분히 목가적이다. 마음에 평화와 낭만을 안겨준다. 입소문이 날 수밖에 없는 풍광이다. 입장료 같은 건 없다. 목장 주인 김운혁(61)은 성가시지 않을까? 불시에 문득 들이닥치는 외지인들로 인해 일에 방해가 될 텐데. 그러나 그는 생각과 처신에 경계를 두지 않고 산다. 오는 사람 굳이 막을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는 오히려 목장 둘레에 꽃길과 돌담길을 만들어 산책자들의 정취를 북돋아준다. 살림집까지 개방, 응접실로 사람들을 불러들여 차 대접하기를 관습으로 삼았다. ‘그대여! 어차피 오셨으니 근심일랑 내려놓고 맘 편히 쉬어가시라!’ 아마도 이게 그의 메시지. 이건 일종의 보시(報施)?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양들이 놀라지 않도록 과격한 행동을 자제하고, 그렇게만 해준다면 언제든 방문자를 환영한다. 요즘 농업의 트렌드로 부상한 치유농업을 내가 추구하지는 않지만 농업 체험의 치유 효과에 대해서는 공감한다. 따라서 도시를 벗어나 이 오지 목장까지 찾아온 이들이 편하게 쉬어가도록 자그만 배려를 하고 있다. 문제는 일단 찾아온 이들이 해가 저물어도 좀체 떠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웃음) 어떤 이들은 산자락에 텐트를 치고 야생의 밤까지 즐기고 돌아간다.” 선택 작목이 무엇이든 농사란 자칫 사람 망가지게 하는 고행을 닮았다. 농업이라는 고도의 난제에 매달려 살다 보면 멀쩡하던 성격과 정신마저 거칠어지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김운혁은 정반대 길을 간다. 방문자를 대하는 그의 양상엔 너그러운 이타심이 실려 있는 게 아닌가. 이는 그의 목장 사업이 이미 안정 궤도에 올라섰다는 반증이거니와, 아울러 수신(修身)을 부업으로 하지 않았을망정 탁 트인 마음 여유까지 보유하게 됐다는 징표로 보인다. 구제역 이후 ‘동물복지’ 실천하다 물론 귀농 초기엔 어지럽고 괴롭고 서러웠다. 시행착오와 좌충우돌을 커리큘럼으로 하는 농업 수련기를 길고 깊게 섭렵했다. 귀농 전 그는 도시에서 잘나가는 건설업체 사장이었다. 그러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에 아내와 함께 귀농열차를 잡아타고 이 꽉 막힌 오지에 도착했다. 이곳이 진정 사는 것처럼 살 수 있는 인생의 참다운 종착역이거니 하고. “건설업이 스트레스 강도가 높은 직업이다. 직원은 많았고, 따라서 사고도 잦았다. 여러모로 견디기 어려웠다. 정신적·육체적 고생이 심했으니까. 이건 아니다, 쉬엄쉬엄 살아야겠다,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며 어릴 적 꿈이었던 목장을 하자는 계획을 가지고 귀농을 했다.” 처음엔 산양 아닌 염소를 길렀다지? “원래 이곳엔 한우를 방목하다가 포기해 방치된 목장 부지가 있었다. 그걸 사들여 흑염소를 입식, 염소목장을 가동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고, 찻길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 지게로 자재를 져 날라 축사 보수 등 필요한 작업을 해냈다. 뭐 하나 쉬운 게 없었다. 한마디로 무모한 도전이었다. 무엇보다 염소 사육 기술이 없어 실패를 거듭했다.” 사육 교육조차 받지 않고 뛰어들었나? “딱히 기술을 가르쳐줄 만한 사람도 없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무작정 덤벼들었던 셈이지. 비교적 수월한 게 육용 염소 기르기라고 알려졌지만 질병에 대처할 능력이 없어 난감했다. 첫해에 150마리를 길렀으나 한 마리를 제외하고 모두 폐사하고 말았다. 차마 예상하지 못한 가혹한 실패였다.” 실패를 경험하고서야 대책을 찾아낼 수 있었나? “실패가 곧 공부였다. 서서히 사육 기술을 터득하게 됐고, 치료 방법에도 요령이 붙어 직접 약을 만들어 쓸 만큼 발전했지. 하지만 시련이 잦았다. 날이면 날마다 종일토록 축사에 매달려 사는 식으로 공을 들였지만 뜻밖의 복병엔 속수무책이더라.” 가장 큰 시련은 어떤 것이었을까? “(침울한 어조로) 2011년에 발생한 구제역 파문 때였다. 전염병이 우리 목장까지 덮쳤다. 기르던 염소 350마리 전체를 매몰할 수밖에 없었다. 졸지에 겪은 당시의 참변을 잊을 수 없다. 너무도 가슴 아팠다. 경악스러웠다.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염소들을, 가족과 다름없는 아이들을 땅에 파묻었으니까. 우리 내외의 상처가 컸지만 자금 손실도 막대했다.” 보상금이 적었나? “남들은 대단한 금액을 받았다고 오해하지만 축산 농가들의 실질적 피해는 컸다. 목장 복구엔 보상비의 두 배쯤 되는 자금이 들어갔다.” 애지중지하던 염소들을 생매장할 수밖에 없었던 구제역의 참극은 김운혁의 생각을 일깨워 목장 운영 방식을 일신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염소들에게 무슨 죄가 있었겠는가. 전염병균은 고도로 지능이 뛰어나 바람처럼 침투했지만, 그걸 슬기롭게 미리 차단하지 못한 김운혁 자신의 책임을 통감했던 것 같다. 그래 친환경 사육법을 도입했다. 나아가 동물복지를 구현함으로써 한결 단단한 단속을 했다. 사육 환경을 청결하게 개선하고, 염소들이 쾌적하고 안전한 생활을 할 수 있음은 물론 행복감까지 느낄 수 있게 이전보다 한결 적극적으로 배려했다. 염소들이 단순히 돈벌이 수단이 아니라, 인간과 마찬가지로 행복하게 살 권리를 지닌 존재라는 걸 또렷이 인식했다. “오랫동안 수익성을 중심에 두고 염소들을 길렀다. 어쩌면 마구잡이로 사육했다. 그러다 보니 염소나 사람이나 쌍방이 다 힘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불완전한 사육 방법으로 염소들이 스트레스를 받아 병에 걸리면 나 역시 고통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평범한 이치를 비로소 알아차렸던 것이다. 결국 염소들이 행복하게 살아 건강해야 나 역시 행복할 수 있다는 진실을 구제역 직후에야 이해했던 셈이다.” 단지 ‘마음 부자’를 지향했다 동물복지의 필요성을 뼈아프게 인식하고 생각을 바꾸어 실천하자 목장 운영에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염소들이 건강하게 자라 단 한 마리도 병들어 죽는 경우가 없었다. 잘 키운 염소는 식용이나 약용으로 팔려나갔지만 산 아래에 차린 염소 요리 식당을 통해서도 수익을 거두었다. 2018년엔 또 하나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염소 사육을 청산하고 뉴질랜드에서 들여온 유산양으로 목장을 채웠다. 야심에 찬 새 출발이었다. 현재 산양 사육 두수는 300여 마리. “염소와 달리 산양을 통해서는 젖을 판매해 수익을 거둔다. 아들이 동참한 덕분에 분업 시스템도 구축했다. 우리 부부는 사육과 착유를 하고, 아들은 판매와 마케팅을 전담한다. 이렇게 분업화되자 일이 한결 수월해졌다. 오전 두어 시간 정도 일하고 나면 이후엔 한가한 편이다.” 젖을 이용한 가공 상품도 생산하나? “전량 젖 그대로 판매한다. 가공 필요성이 없어서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달리는 상황이니까.” 염소와 산양의 생태는 어떻게 다른가? “염소는 야생성이 강해 사람을 경계한다. 염소 사육법과 달리 태어나자마자 어미와 분리해 사육하는 산양은 나를 거의 어미로 여긴다.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게 살아가는 데 유리하다는 걸 아는 동물로 보이기도 한다. 강아지 못지않은 친화력을 가지고 사람을 잘 따른다. 그러니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나?” 축사에 들어갔다가 놀랐다. 처음 본 사람이지만 산양들이 거침없이 다가와 스킨십을 해서. 게다가 조잘거리듯 주둥이로, 표정으로 뭔가를 표현하는 것 같아 흥미롭더라.(웃음) “알고 보면 아주 머리가 좋은 아이들이다. 민감한 눈빛과 행동으로 욕구와 요구를 표현한다. 심지어 사람이 하는 짓을 따라 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단지 말할 줄 모르는 사람’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우리가 자주 오해하는 게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 여긴다는 점이지 않을까? 풀 한 포기를 비롯해 살아 있는 것들 가운데 인간보다 못한 자질을 가진 존재가 얼마나 될까 싶다. “산양의 생태에서 느끼는 게 많다. 온순하고 다정해 가축이라기보다 가족으로 느껴진다. 귀농 이전 도시에 살 때 난 비위 맞추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성급한 성격대로 화를 품고 살았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산속에서 순수한 동물들과 함께 살며 나도 모르게 순한 인간으로 바뀐 거다. 스트레스에 찌들어 옹색했던 사람에서 꽤 너그러운 사람으로 변했다.” 당신의 최대 난적이었던 스트레스를 귀농으로 처리했다? 그렇다면 귀농은 널리 장려할 만한 최선의 행위라 보나?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도시에서 몸에 밴 물질적 욕구를 다 내려놓지 않고선 지속하기 어려운 게 시골 생활이자 농업이다. 특히나 시니어의 서툰 귀농은 금물이다. 다 까먹기 십상이니까. 주변에서 많은 사례를 봐서 하는 말이다. ‘난 귀농하길 참 잘했어!’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경쟁을 축으로 돌아가는 도시에서의 삶은 괴롭고, 외롭고, 지겨운 것일 수 있다. 그렇다고 섣부른 귀농으로 활로를 찾을 일은 아니라는 얘기다. 기본적으로 충실한 귀농교육과 자금력 확보가 선행돼야 한단다. 더 중요한 건 세속적인 욕망 덜어내기다. 돈의 추구보다 자연 내지는 작물과 교감할 줄 아는 능력을 키워야 소소한 행복감이 방문한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내가 귀농 이후 지향한 건 ‘마음 부자’다. 이 점에서 만족도가 높다. 산중에서 아내와 충분한 대화를 나누고 함께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며 살아가는 행복감. 이보다 나은 삶이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김운혁이 주는 귀농 Tip •농업 관련 공부를 사전에 충실히 하라. 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연애와 결혼이 다르듯이 귀농의 실상은 기대와 다르다. 농촌에서 최소 한 달만이라도 살아보고 결정하라. •순소득이 아닌 매출액을 내세워 성공담을 전달하는 매체들의 미화된 정보에 현혹되지 말자. •귀농 교육장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달콤한 얘기를 다 믿지 마라. 농업 현장을 통해 판단하는 게 현명하다. 가령 과수농가의 경우 잘나가는 농가와 실패한 농가를 답사, 비교 분석해보라. •자금력만이 다는 아니다. 끈기와 용기도 필수니까. •산양목장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있지만 권하고 싶지 않다. 소규모로 한다 해도 시설 구비와 허가 등에 자금이 너무 많이 든다. 산양 관리에 얽매어 여가를 즐길 수 없다는 것도 단점이다.
- 2023-02-17 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