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세대 이야기] 1946년生, 내겐 과분했던 내 인생

기사입력 2015-10-19 11:14 기사수정 2015-10-19 11:14

윤정모(尹靜慕) 소설가

1946년 양력으로 11월 3일에 태어났다. 경주 외곽에 있는 나원, 외갓집에서였다. 아버지는 나의 출생이 당신의 호르몬 작용의 산물이라 했고, 엄마는 운명이라고 했다. 1947년에 서울로 갔고 1950년 한국전쟁이 나서 다시 나원으로 돌아왔다. 서울에서는 아궁이에 검은색 토탄 가루를 뿌려가며 밥을 짓던 것과 고무줄 장사를 따라다녔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윤정모(尹靜慕) 소설가

전쟁이 났다. 양친이 이혼한 뒤였고 엄마는 나를 이끌고 피난행 열차를 탔다. 엄마는 아버지가 거짓말쟁이에 술고래여서 헤어졌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전쟁 기간에 통역관을 지냈다던 것도 믿지 않았는데 성장한 뒤에 만난 고모와 작은아버지가 보여준 아버지의 사진, 미군과 찍은 것들을 보고 그건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고 했다. 피난 열차가 오산에서 쉴 때 엄마가 나를 개울로 데려가 몸을 씻겨주었다. 그때 기차가 폭발했다. 오지리 폭격기가 위치 오착으로 폭격했다는 것은 엄마의 얘기와 기록에서 확인했다. 엄마와 나는 몇 날 며칠 걸어서 경주, 외가로 갔는데 걸으면서 잤던 기억, 자느라 엄마를 놓쳐 울고불고했던 일, 원두막에서 참외를 훔쳐 먹던 일들이 지금도 흐린 필름처럼 떠오른다.

엄마는 나를 외갓집에 맡기고 그날로 떠났다. 내가 잠든 사이였다. 나는 밤새껏 울었고 외삼촌들이 번갈아 가며 나를 업고 달래주었다. 큰외삼촌은 나보다 14세, 막내 삼촌은 10세가 많았다. 그들은 나의 어버이이자 정신적인 지주였다. 공부를 잘하고 시를 쓰던 막내 삼촌은 공일이면 새를 보면서 책을 읽었다. 그는 ‘사상계’ 애독자였는데 그가 모은 책들을 나에게 전수했으나 이사가 잦았던 나는 수년 전 그 책들을 정리하고 말았다.


나는 문제가 많은 아이였다

전쟁이 난 다음 해, 우리 나이로 여섯 살 때 나원초등학교에 입학해서 두 번 낙제를 했다. 입학 당시 내 동기로 14세 소녀도 있었다. 최초로 본 활동사진은 아홉 살 때 동사(洞社) 마당에서 본 나운규의 ‘아리랑’이었다. 남자주인공이 낫을 쳐들던 장면은 어린 내게 충격이었던지 오래도록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1957년, 부산 동래온천으로 이사를 했다. 우장춘 박사가 돌아가셨을 때 원예고등학교 학생들이 운구를 하고 온천장을 한 바퀴 돌았고 그때 행렬을 따라다녔던 것은 그분이 훌륭한 육종학자라는 걸 알아서가 아니라 관을 멘 오빠들이 잘 생기고 멋있어서였다.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은 사회 선생님이셨다. 선생님 댁은 동래였고 나는 종점인 온천장이라 가끔 같은 전차를 타기도 했다. 어느 날, 반 아이들과 어울려 선생님 집엘 갔는데 딸이 넷이었다. 나는 대뜸 “기생을 맞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학생이 할 수 없는 말을 하고 말았다.

내가 살던 온천장엔 권번이 있었고 세 살던 집 다른 방에도 기생들이 살아 첩이나 씨받이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 아들을 낳아 대접받는 기생들이 생각나서 그렇게 지껄인 것인데 선생님은 내 저능한 말에도 화를 내지 않고 “그런 말을 하면 못쓴다”고 조용히 나무라셨다.

나는 확실히 문제가 많은 아이였다. 시험기간 동안 생물시험지 뒷장에는 또 만화 라이파이 여주인공 제비를 그려 교무실이 발칵 뒤집혔다. 생물 선생님은 나의 정신 감정을 주장했고 담임 선생님은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단속하겠다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못생긴 데다 공부도 못하는 나를 선생님은 왜 그렇게 두둔하고 또 챙기셨을까?

중3 때, 5·16 군사 정변이 터졌다. 중2 때 담임, 정선우 선생님이 교노조(교직원노동조합)원으로 잡혀가셨다. 잡혀가신 선생님들이 부산에서만도 수백 명이라 했고 그분들이 갇혀 있는 곳은 서면에 있는 태화극장 뒤였다. 학교와 멀지 않은 거리여서 점심시간마다 그곳으로 달려갔다. 철조망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단 한 번도 선생님이 계신 것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선생님은 나를 보았다고 학교로 돌아온 뒤 다른 반에서 말씀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2000년도에 그분 아드님을 만났다. 교노조 사건 뒤에 태어났다던 잘생긴 아들이 “아버님은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에 자주 내 얘기를 하셔서 꼭 한 번 만나고 싶었다”고 했다. 선생님은 어찌 아들에게까지 내 얘길 하셨고 또 만나보라고 하셨을까. 중학교 때 내가 했던 실언들이 생각나면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대학에 와서는 김동리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 곁엔 우수하고 잘난 제자들이 많았다. 학생 스타들이 여럿이었고 한 해에 시와 소설이 동시에 당선된 천재도 있었다. 그들에 비해 나는 열등생이었고 그럼에도 나는 재학생 작가가 되기를 열렬히 소망했다. 장편을 써서 김동리 선생님에게 가져가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제가 선생님 제자로선 수준 미달이란 것 알아요, 그런데 어떻게 해요? 책은 내고 싶고 출판사에서는 선생님 추천서가 있어야 한다는데요.”

며칠 후 추천사 원고를 주시면서 “앞으론 단편을 많이 쓰면서 문장을 치밀하게 직조하는 공부를 해라”고 하셨다. 이때부터는 문예지로의 진입이 내 열렬한 소망이 되었고 한분순 선배가 문을 열어주어 간신히 꿈을 이룰 수 있었다.(한 선배, 정말정말 고마웠어요!)

대학 졸업 후 여러 출판사를 전전했다. 내 독서량은 대부분 교정을 보면서 채운 것들이다. 세계명작들, 종교와 사상에 대한 책들도 그때 읽었고 전에 본 것들을 수차례나 다시 본 것들도 많았다.

1971년 범우사에서 일할 때였다. 범우사는 ‘다리’라는 시사잡지사에 속한 출판사였고 간행은 주로 번역물로 하이데거, 융, 러셀, 칸트, 토인비, 문예물 등이었으며 더러는 시대진단 비평지도 출간했다. 이때 ‘상황’이라는 시사지 교정을 보았는데 내 무지로 몇 개의 오자를 내고 말았다. 그때 그 책을 주관하던 임헌영씨가 “오자가 하나도 없으면 읽을 때 지루하잖아요. 괜찮아요”하고 오히려 위로해주었다. 임헌영 선생은 지금도 내겐 자상한 선배님이다.


▲윤정모 소설가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
▲윤정모 소설가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

주어진 인생 뚜벅뚜벅 걷다

1972년 10월 17일, 경향신문사에 있던 임헌영씨가 사무실로 들어오며 “광화문으로 탱크가 들어오고 있다”, “쿠데타인 것 같으니 어서 피하라”고 말했다. 마침 주변에 김상현 의원 차가 있었고 우리는 모두 차로 몰려가서 유신선포에 대한 방송을 들었다. 윤형두 사장은 도피를 하면서 내게 중요 원고들을 옮길 것을 지시했고 나는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 출간을 앞둔 원고와 서류 등을 챙긴 뒤 뒷길로 해서 귀가했다. 그 이후로는 살벌한 시기였다. 출판물은 전부 사전 검열을 했고 검열 장소는 시청이었다. 내가 가져간 교정본들은 거의 반 이상이 빨간 줄이 그어졌고 그게 귀찮아 나는 동서문화사로 직장을 옮겼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 대학동창 오정희가 이상문학상을 받던 날이었다. 그녀의 축하연은 다음 날 식당에서 열었는데 그때 모인 동창들은 그 충격 때문에 제대로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1980년, 제 5공화국이 들어섰다. 출판사가 줄줄이 문을 닫았다. 5, 6년 가까이 해오던 리라이팅(극본을 소설로 쓰는 일)도, 외주로 나오던 교정일도 다 끊겨 버렸다. 5월 말경이었다. 광주에서 여성회를 하던 홍희담(깃발을 쓴 소설가)씨가 올라와 광주항쟁 수배자 두 사람을 숨겨주면 매달 생활비를 20만원씩 주겠다고 했다. 돈도 받고 좋은 일도 하고, 그건 횡재였다. 더 행운이었던 것은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는 것이었다. 실학과 사회, 역사는 물론 리얼리즘 공부도 했다. 1982년, 남영동 정보원으로부터 은닉에 대한 조사를 받긴 했지만 그건 내가 받은 은혜에 비하면 2초쯤 지나간 소나기에 불과했다.

1982년 정신대 이름으로 징집된 위안부 이야기를 썼다. 남태평양 현지 상황까지 사실적으로 쓴 소설은 내가 처음이라고 했고 이 또한 수배자들이 일러준 책 ‘정신대 실록’을 읽은 덕이다. 굳이 이 사실을 밝히는 까닭은 피해국 중에서도 위안부 소설은 내가 쓴 것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이 책으로 나는 여러 나라에 초청되기도 했고, 1992년 호주 멜버른 대학에서 있었던 ‘일제 만행사에 대한 규탄대회 겸 심포지엄’에도 참가할 수 있었다. 이때 내가 발표한 내용은 미얀마 위안소와 직접 취재를 했던 필리핀 상황에 대해서였다. 마지막으로 나는 임종국 선생님을 소개했다. 그분은 정신대로 징집된 위안부 기록을 찾기 위해 매일 도서관에 출근해서 관보 2만 장을 복사했고 신문 기사들을 필사했다. 정신대로 간 여성 20만 명 중에서 반 이상이 성노예로 배치된 실태는 그렇게 해서 밝혀졌다. 이 자리에 서야 할 사람은 그분인데 안타깝게도 수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하자 참석자들이 일제히 추모박수를 보냈다. 4박 5일의 심포지엄이 끝난 후 모나시 대학에 초청을 받았고 일본작가 오다 마코토(小田實)씨와는 시드니 대학에서 합동 강연도 했다. 오늘도 나는 빌고 있다. 할머님들의 상처가 봉합이라도 될 수 있도록 어서 빨리 이 문제가 해결되기를.

1997년, 딸아이가 영국으로 유학을 갔고 그때 나도 따라갔다. 성장한 아이와 함께 지낸 타국생활, 그 3년간이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나날들이었다. 그 행복의 결과는 가산이 모두 탕진된 것이었다. 하지만 어떤가, 그 또한 나에게 주어진 내 인생인 것을.



소설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은…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는 두 가지의 불가사의가 있다. 첫째는 모든 것이 부족하고 정신연령조차 낮았던 내가 참으로 훌륭한 스승들을 만나고 멋진 선후배를 얻었으며 대중소설가로 출발해서 본격작가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외삼촌이 다른 책도 아닌 ‘사상계’를 읽었다는 것, 날 사랑하고 보호해주었던 정선우 선생님이 교노조로 잡혀갔다는 것, 범우사에서 일하면서 유신을 맞았던 일, 광주항쟁 수배자들을 숨겨주었던 것 등이다. 이데올로기나 사회비평에는 관심이 없었던 나에게 주어진 삶이 그랬다는 것, 그 덕에 여러 소설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이 불가사의하지 않은가. 내 삶의 색채가 어떠했든 분명한 것은 내 인생 전체를 통해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아왔다는 것이다.

▲윤정모 소설가.
▲윤정모 소설가.

>> 윤정모(尹靜慕) 소설가

1946년 경북 월성에서 태어났으며, 서라벌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68년 장편 『무늬져 부는 바람』을 출간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단재문학상(1993), 서라벌문학상(1996) 등을 수상했다. 대표작으로 『고삐』 『들』 『나비의 꿈』 『슬픈 아일랜드』 『꾸야 삼촌』 『수메리안』 『길가메시』 『수메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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