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종경(卞鍾敬·68) 국일제지(주) 사장에겐 ‘촉’이 있다. 신규 사업을 하면 길이 열린다. 만년 적자에 허덕이던 기업도 그가 손을 대면 황금알을 낳는다. 사람들은 그의 촉을 부러워하고 타고난 기획전략가라고 인정한다. 그런데 그의 촉이 이번엔 제조업에 뻗쳤다. 60대 후반의 나이에 특수지 제지업체 국일제지(주)를 드라이빙하는 중책을 맡았다. ‘아직 제지업계 초보’라고 자신을 겸손하게 소개하는 그는 삼성맨으로서, 그리고 전문 경영인으로서의 경험을 살려 국일제지가 나아가야 할 길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안주하는 삶은 재미없다”고 말하는 그의 인생과 재미있는 일, 그리고 추구하고 있는 미래에 대해 들어본다.
변종경 사장의 이력은 화려하다. 서울대와 UCLA 대학원을 졸업하고 삼성물산 경영기획부장, 삼성그룹 비서실 임원, 사회공헌위원회 부사장 등 삼성맨 시절을 거쳐 삼부토건그룹 계열 (주)신라밀레니엄 대표이사 등을 역임한 그는 올해 초 국일제지(주) 사장으로 선임됐다.
‘고희록’ 써 경험과 지혜 전수하고파
사장으로 취임할 때 마침 그의 나이는 60대 후반에 들어섰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은퇴해도 여러 번 은퇴했을 나이, 그는 김형석 교수의 말을 빌려 이제야 자신이 전성기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원로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96세의 나이에도 강의 등 아직도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65~75세의 나이가 쓴맛 단맛 다 보고 인생의 소중함을 음미할 수 있는 인생의 황금기라고 말씀합니다. 저는 지금 김형석 교수가 말씀한 인생 황금기에 3모작을 하고 있어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는 종전에는 매주 수요일 등산, 주 1회 골프 등으로 건강관리를 했으나 요즘에는 매일 아침 20~30분 시트업 등 스트레칭을 하고 주말에 등산이나 골프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건강관리는 킬리만자로,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했을 정도로 여행을 좋아하는 그에게 필수적인 것이다.
“여행 마니아는 못 되고요, 등산이나 트레킹은 자주 했지요. 여행은 새로운 풍광과 문물을 통해 색다른 경험을 하는 것이 좋고요. 등산이나 트레킹의 경우 목표에 도전하고 정상에 이르렀을 때 희열은 말로 표현할 수 없지요. 그리고 등정 과정에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성찰할 시간을 갖는 것도 보람이지요. 지난번 킬리만자로 등정 시에는 그동안 내 자신을 되돌아보며 70세가 되면 그동안의 삶을 담아 을 써보기로 한 것이 수확이지요.”
살면서 지켜야 하는 3가지
은 제목 그대로 70세에 이른 자신을 돌아보며 쓰고자 하는 책이다. 베스트셀러가 되겠다는 욕심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후손에게 자신이 평생 배운 지식과 지혜를 전수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70 가까이 살면서 꼭 지켜야 할 3가지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째는 자신을 책임지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올바른 가치관과 도덕성을 가지고 신뢰를 지키는 삶의 자세를 견지하는 것입니다. 영국 속담 ‘인생의 평판을 쌓는 데는 30년이 걸리지만 평판을 잃는 데는 30분이면 충분하다’가 이를 잘 대변해준다 할 수 있겠지요.
둘째는 경제적으로 생활력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돈이 수단이 될지언정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자신과 가족을 건사할 최소한의 경제적 여유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베푸는 것도 마음만이 아니라 금전적으로 베풀어야 효과가 높습니다. 우리 속담에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도 있습니다.
셋째는 주변과 사회성을 잘 유지하는 것입니다. 저희 세대는 대체로 앞만 보고 달려와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게 후회됩니다. 가족에게도 미안하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그랬고요. 요즈음은 가족, 친구들과 어울리려 노력해 많이 좋아졌지요. 평소부터 가족, 친구들에게 잘해야 노년에도 관계가 좋지 않을까요.”
기업은 복합적 가치를 지닌 조직
그는 최근 새롭게 회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각종 회의를 주재할 때 오프닝 멘트를 통해 자신이 경험했던 노하우 등을 간단한 사례 등과 연결시켜 전수해 주고 있는 일에 보람을 느끼고 있다.
“물론 사전 준비 등으로 힘들기도 하지만 임직원이 경청하고 활용할 때 보람을 느낍니다. 에 나오는 ‘가르치면서 절반은 본인이 배운다’는 글귀대로 저도 준비하며 또한 배웁니다. 최근의 예는 ‘역발상 아이디어’를 강조하며 2006년 독일 월드컵 축구대회 당시 한국과 프랑스가 1:1 무승부일 때 프랑스의 지네딘 지단 선수가 후반 46분 경고 누적으로 퇴장 당한 뒤 홧김에 라커룸 사물함을 발로 차 찌그러졌는데 라이프씨티 축구경기장 측에서 배상 청구을 검토하다 오히려 찌그러진 사물함에 금테를 두르고 11유로 입장료를 받고 관광객을 유치해 성황이라고 얘기해준 게 생각나네요.”
그가 현역 경영자임을 다시금 느끼게 만드는 부분이다. 그는 경영에 있어 기업 자체적으로 보면 수익 가치가 중요하겠지만 국가 및 사회와의 관계적 측면에서 볼 때 고용 및 인적 자본 형성, 기술 축적, 양질의 제품 및 서비스 제공, 사회공헌 등 사회적 가치 기여 등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경영해야 한다고 보고 있었다. 기업이야말로 복합적 가치를 지닌 조직이라는 생각이 이유였다.
“경영자의 길을 가지 않았더라면요? 글쎄요. 고위 관료나 정치인의 길을 갔을지도 모르지요. 저는 고등학교 때 이과반이었는데 대학은 문과를 택했지요. 당시 주변에서 저에 대해 나름 논리적이고 언변이 좋다고 부추겨 대입 때는 문과를 지원했습니다. 사실 정치에도 관심이 있었고요. 사주에도 정치를 했으면 ‘한 인물’ 했을 거라고 하네요. 그러나 요즈음 세태를 보면 정치 지망 안 하기를 잘한 것 같고요.”
회사의 미래를 위한 길 닦는다
그는 자신을 ‘제지업계 초딩’이라고 겸손하게 낮춰 표현했다. 그러나 그는 삼성그룹의 구조조정본부의 임원이었다. 기업과 경영의 엔진 구조를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경험과 지식이 그의 커리어에서부터 보여지고 있었다.
1994년 삼성물산에서 삼성그룹 회장비서실로 옮겨 삼성자동차 사업을 성공적으로 진입시켰던 때를 떠올렸다. 그는 당시 삼성이 상공부로부터 자동차 기술도입 신고서를 1차 반려받은 후 비서실에 차출되어 전략지원팀을 만들었고 6개월 뒤 삼성자동차 사업을 성공적으로 진입시켰다. 10여년간 삼성그룹 회장비서실에서 열정과 집념을 갖고 그룹과 회장을 보좌하던 때를 회상하며 새로운 도전에 최선을 다해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간 업무 파악을 통해 회사의 비전을 ‘첨단 정밀 종이로 100년 가는 강한 기업’으로 정하고 선순환적 구조조정, 즉 사업구조를 수익력 있는 기존 품목 이외 부가가치 높은 지종 확충, 영업 인력 확대 등 미래지향적 인력 운용, 쥐어짜기식 경비 절감이 아니라 필요한 것은 과감히 투자하고, 절약할 수 있는 경영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간 본사는 물론 2개 공장 200여 명 전 직원에게 7~8회 경영방침을 설명하고 회식을 통해 공감대를 갖는 기회를 가져 직원들이 ‘한번 해보자’는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어 저 자신도 보람을 느끼고 있고 이와 관련하여, 회사의 미래 토대 마련을 위한 청사진인 중기 계획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노년에 가장 중요한 건 품위를 잃지 않는 것
기업의 체질을 바꾸는 쉽지 않은 미션을 수행 중인 그는 은퇴를 잊고 경영에 매진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그가 나이 먹어도 절대로 잃고 싶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품위를 잃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품위를 유지하려면 조급하지 않고 마음의 여유를 갖는 자세도 중요하고 독서 등을 통해 인격 도야에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며 경제적으로도 여유를 갖고 베푸는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이 들어 품위가 있어야 멋도 있고 존경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에게는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위해 준비 중인 것들도 있었다.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많기 때문이다.
“취업하지 않았으면 지금쯤 트레킹 등 여행을 많이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그리스, 이집트, 터키, 러시아 등을 비롯해 중남미 지역을 여행하지 못해 시간이 나면 몇 년 내에 꼭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2인승 컨버터블 스포츠카를 타고 전국을 일주하는 것이 버킷리스트입니다.”
사회를 은퇴하면서 종합건강검진을 받은 결과 대장에서 상피내암이 발견되었다. 암환자가 되기 전과 후는 하늘과 땅의 차이다. 세상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으나 큰 탈 없이 견디고 있다. 내년 이맘때면 이른바 ‘5년’이 된다.
사회평생교육에서 건강에 대한 강좌를 많이 접했다. 어느 강사는 “건강하니까 건강보험에 가입할 이유가 없고, 설령 불치병에 걸려도 연명치료하지 않겠다.”고 주장하였다. “실제 암환자가 되어서도, 지금과 같이 함부로 말할 수 있겠는가?“ 수강생들의 반응이었다.
국가건강검진에서는 특별한 문제가 없었다. 대장은 1차 검사에서는 별 이상이 없지만, “나이를 감안하여 내시경검사를 받아 보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바쁘고 복잡하다는 이유로 이를 실천하지 못하였다.
보라매병원에서 대장내시경 검사를 받았는데, 용종 1개와 선종 3개가 발견되었다. “용종만 발견되면 곧 시술이 가능하나, 선종은 당장 시술할 수 없고 조직검사 결과에 따라 진행해야 된다.”고 말했다.
한 달 후 내시경 검사 시 채취한 조직에서 다른 이상이 없어, 비수면 대장내시경시술을 하였다. “시술이 잘 되었으니 걱정 말라”는 격려 및 주의사항을 듣고 가벼운 마음으로 집에 왔다.
검진결과를 기다라는데 담당의사가 “선종제거시술 시 채취한 선종 한 군데에서 암세포가 발견되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귀를 의심했다. 산정특례 등록절차를 취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뭔가 심각하게 변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암 세포가 추가로 발견되지 않고 시술 부작용도 없으니 안심하고, 통상 암환자에게 실시하는 치료과정도 아직은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이 말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나에게 유일한 위안이 될 뿐이었다.
앞으로 3개월, 6개월, 1년 단위로 주기적인 추적 관찰이 필요함을 친절히 설명하면서, “상심하지 말고 건강관리에 유념하라. 한마디로 암은 자각증상이 나타나면 너무 늦다”고 말했다.
‘암환자!’ 암 확진 전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줄 알았던 말이다. 가족력을 보아도 암은 부모님, 형제자매 누구에게도 없다. 절제와 성실한 생활규범을 잘 지키면서 살아 왔다고 자부했는데, 왜 내가 되어서는 안 되는 암환자가 되었단 말인가!
뱃속에는 꼭 시한폭탄이 들어 있어 곧 터질 것 같은 기분이다. 검진 받으러 병원에 가는 동안은 뱃속이 뒤틀리고 쑤시다가, 별 이상이 없다는 검진 결과를 들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하다.
대장암과 함께 종합검진 때 체크되었던 다른 분야도 혈액검사, 초음파, C/T촬영 등 검진을 1년에 몇 차례씩 계속하고 있다. 검진 때마다 의사선생에게 물었고, 대답은 항상 같았다. “특별히 좋거나 나쁜 음식이 없으니 섭생에 연연하지 말라. 과음과 과식을 삼가고 스트레스와 체중관리에 노력하라.”고 말하였다.
별 이상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결과에 위안을 받았다. 완쾌할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고 즐겁게 살려고 노력하였다. 이제 ‘5년’이 되어간다. 처자식과 손주, 친구들과 어울려 관악산 동네에서 살면서 평범한 방식으로 암을 이기는 건강을 관리할 것이다.
건강한 사람을 부러워 할 때도 많았다. 지금은 친구들과 어울려 산에 오르고 사회공헌 자원봉사에 앞장섰다. 즐겁게 살려고 노력한다.
천재 조각가 권진규(1922∼1973)는 ‘나의 자식들’이라 부르던 작품들만 덩그러니 남기고 52세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떠난 지 42년, ‘자식들’을 품은 곳이 강원도 춘천시 동면 월곡리에 문을 열었다.
권진규는 박수근, 이중섭과 함께 한국 근대미술의 3대 거장으로 불리던 조각가다. 1922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춘천고등보통학교(춘천공립중학교, 현 춘천고)와 일본 무사시노(武藏野) 미술대학에서 공부했다. 석조(石造), 테라코타(점토(를 구운 것), 건칠(옻칠 기법)을 사용해 주변 인물을 모델로 수많은 초상과 자소상 등 작품을 제작 한국과 일본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조각 초대전을 여는 등 살아생전 대중의 폭넓은 사랑을 받았던 권진규. 그의 작품 세계를 원 없이 만날 수 있는 권진규미술관은 춘천의 옥 생산업체인 대일광업(옥산가)이 지역사회 공헌사업으로 2015년 12월 말 건립했다.
권진규미술관은 4개 층에 전시실이 마련돼 있다. 1층에서 곧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가 내려오면서 관람한다.
2층이 권진규 전용 전시실이고 3층과 4층은 장난감 박물관과 고서 자료실로 꾸며져 있다.
4층에는 아이언맨, 헐크 등 대형 피규어를 비롯해 , , 등 헐리우드 영화 캐릭터, , 등 일본 지브리사 대표 캐릭터들을 감상할 수 있다.
4층에 있는 일제강점기 때 잡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청오 차상찬 잡지기념관’도 볼거리다. 교과서에서 공부했던 , , 등 잡지를 실물로 볼 수 있다.
청오(靑吾) 차상찬(車相.1887~1946)은 일제강점기 꾸준하게 잡지를 펴냈던 최고의 잡지 발행인이다.
3층은 일본 만화 캐릭터와 오래전 문방구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완구류 등을 전시하고 있다. 조립식 장난감과 종이인형 등이 한 층을 가득 메우고 있다. , , , 등 일본 TV 애니메이션 캐릭터와 한국을 대표하는 캐릭터 등을 감상할 수 있다.
2층이 바로 주 전시실인 권진규 미술관이다. 취재를 갔을 때는 개관기념전인 ‘권진규와 연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현재는 ‘또 다른 권진규전’이라는 이름으로 권진규의 작품 31점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권진규의 첫 사랑 오기노 도모를 모델로 한 ‘도모’와 권진규가 일본에서 귀국한 뒤 음식 수발을 들던 박영희를 모델로 한 테라코타 작품 ‘영희’가 눈에 띄는 작품이다. 기획전은 오는 11월말까지 계속된다.
※권진규미술관 관람 정보
주소 강원도 춘천시 동면 금옥길 228 (옥광산 내)
관람시간 하절기 10:00-19:00 / 동절기 10:00-18:00
관람료 성인 1만원 / 학생 5000원(학생증 제시)
전화 033. 243. 2111
대중교통정보 시내버스 66번 남춘천역 9:00, 13:00, 17:00 출발 – 한림대 경유 – 옥광산 도착 1시간 소요 / 시내버스 65번, 75번 춘천 명동 10:20 ~ 20:00 (2시간 간격 배차) – 팔호광장 경유 – 옥광산 도착 45분 소요
‘취업절벽, 창업절벽’으로 표현되는 오늘의 경제상황은 심각한 ‘국가적 문제’가 되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창업지원을 확충하고 있으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정책자금’으로 통칭하는 정부자금 지원제도이다. 그러나 이를 이해하고 제대로 활용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SBA 서울산업진흥원은 교육과 홍보를 하면서 이를 적극 활용하도록 독려하고 있다. 연초부터 서울창업카페 숭실대역지점에서 손문규(59) 정책자금 전문가가 ‘정책자금과 창업’을 주제로 강좌를 열었다. 현장에서 경청한 강의내용을 요약하고 궁금한 점을 물어서 보충하였다.
손문규 강사는 “정책자금이란 뛰어난 아이디어와 사업이 준비되어 있어서, 자본금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아직 자금이나 신용이 부족해서 비용 마련이 어려운 사업자나 초기기업을 위한 자금”이라고 설명하였다.
강의시작 전부터 청장년 창업희망자들이 강의실을 꽉 채웠다. “창업에는 아이템 선정을 잘 하여야 하고, 시장성, 안전성 점검에 유의하라.”고 강조하였다. 한마디로 돈 버는 장사를 해야 한다. 계산으로는 남는 것 같지만 손에 남는 것이 없는 불황형 흑자, 흑자도산으로 지칭되는 껍데기 창업은 말짱 헛것이라는 지적이었다.
정책자금에는 시설, 운영자금을 비롯하여 상환이 필요 없는 지원자금과 상환해야 하는 대출자금으로 나뉜다. 집행기관도 국가, 지자체, 금융회사 등 여러 곳이다. 중소기업청, 미래창조과학부, 고용노동부 등 구가기관과 지방자치잔체가 있다. 중소기업진흥공단, 근로복지공단, 한국여성경제인협회,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 등 공공기관도 많다.
손문규 강사는 “정책자금은 공모 경연대회를 거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서류심사와 심층면접을 한다.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여 철저하게 준비하여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자료를 배부하였다.
수강자의 절반을 넘는 청년 창업자들은 정책자금 신청부터 선정되는 방법까지 경험자만이 알 수 있는 날카로운 질문도 쏟아냈다. 강사는 시원시원하게 답변을 하였다.
사회은퇴 후 창업을 구상 중이라는 한 수강자에게 소감을 물었다. “창업에 따른 정책자금이 이렇게 다양하고 활용할 여지가 많은지 처음 알았다. 현장에서의 풍부한 성공사례 강의 대목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손문규 강사는 왜 정책자금 전문가가 되었을까? “사회은퇴 후 사회공헌을 실현하는 방법을 찾아서 재능기부 활동을 하고 있다. 강의에서 지적한 것처럼 창업자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 자금이라는 점을 알았다. 창업자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방법을 찾아서 창업자금을 집중해서 연구하였다.”
그는 대기업에서 기획과 영업에서 뛰어난 임원으로 활동하다가 회사은퇴 후, 서울산업진흥원에서 창업닥터 겸 담임교수로 사회공헌에 기여하고 있다. 현재 창업정책자금 전문가로 청장년 창업을 이끌면서 지도하는 실전경험이 풍부한 창업닥터이다.
“행운이란 준비가 기회를 만나는 것”이란 클로징 멘트로 강의를 마무리하였다. 강의가 끝난 후에도 젊은 창업가들의 질문이 계속 되었다. 창업 준비생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귀중한 시간을 쪼개서 열정적으로 강의를 하고 취재에 협조해 주신 손문규 강사께 감사드리며 무궁한 발전이 있기를 바랐다.
생물학적 수명은 늘어나고 사회적 수명인 정년은 점점 짧아지면서, 제2 인생을 준비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두 번째 인생을 위해서는 경제적 자유, 즉 은퇴자금 준비가 중요한 문제이지만 제2 직업은 더 중요하다. 시니어들의 이러한 요구에 발맞춰 여러 민·관 기관에서 제2 직업에 관한 다양한 안내와 새로운 직업 소개를 하고 있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찾기보다 교육과 준비과정을 통해 새 인생에 어울리는 새로운 직업을 알아보는 것은 어떨까?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최근 제2 직업을 위해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시니어들과 이들을 대상으로 구인 활동을 펼치는 업체나 기업을 살펴보면 현실과 괴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장년들의 일자리를 위해 노사발전재단이나 대한상공회의소, 중소기업중앙회,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경영자총협회, 대한은퇴자협회 등 여러 기관에서 중장년 일자리 희망센터를 전국 단위로 운영하고 있다. 이 일자리 희망센터를 이용하면 구인구직 정보에서부터, 교육 프로그램, 관련 컨설팅 서비스까지 받을 수 있다.
시니어 구인구직 단순직종에 집중
문제는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되는 직업이나 일자리가 시니어들이 원하는 수준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일자리가 경비직이나 청소, 택배와 같은 단순 노무직이고 그나마 이런 일자리의 대부분은 40대를 우선적으로 선호한다. 연령이 높은 시니어들에겐 순서조차 돌아오기 힘들다.
도심권50플러스센터의 정현주 대리는 센터가 최근 사회공헌형 일자리로 사업 방향을 옮긴 것도 이런 현상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경제적으로 자유롭거나 노후 자금이 해결된 시니어들은 단순직 일자리를 원치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대부분 그간의 경력을 살릴 수 있거나 새로운 일자리를 통해 경제적 소득보다는 보람을 찾으려는 분들이 많아요. 수고를 인정받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뜻이죠. 저희 센터에서는 이런 시니어들의 요구에 맞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현장에서 활동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 센터에서 준비하는 직업들은 경제적 소득보다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지원이나 참여 시니어들의 자부심 확보에 중점을 두고 있다.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업 중에는 건강코디네이터 양성 과정이 있다. 지역 치매센터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경도 인지장애(초기 치매) 노인들을 대상으로 상담과 인지학습 역할을 할 사회공헌 활동가를 양성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밖에 바른먹거리전문가 양성과정은 유치원 등 각 교육기관의 학생과 학부모에게 먹거리에 관한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는 전문가를, 다문화가족 서포터스 양성과정은 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요청을 받아 한국생활 정착의 멘토 역할을 할 지원자들을 교육하고 있다.
수익보다 보람과 자부심 얻을 수 있어야
지난해 도심권 50플러스센터를 통해 SNS전문가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종로지역자활센터 등에서 강사로 활동 중인 김희순씨(64)는 경험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시니어들에 대한 직업 교육은 지식 전달뿐만 아니라 삶의 활력을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어요. 재능기부를 통해 교육생들에게 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줄 수도 있고, 사회에 기여한다는 자부심도 갖게 됐습니다. 예전엔 손주들이 와이파이 터진다고 하면 뭐가 터졌냐며 놀랄 정도였지만, 이제는 대화도 통하고 생활이 달라졌어요.”
물론 일자리나 전문가들을 양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현장에선 이야기한다. 기본적으로 실업난을 겪고 있는 청년들의 일자리와 겹치게 되면 사업 자체의 정체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고, 현장에서 원활하게 일할 수 있도록 활동 무대까지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사회적으로 자리 잡은 성공적인 직업에 정리수납전문가가 있다. 정리수납전문가는 여성발전센터, 여성인력 개발센터 등을 통해 민간에 알려졌다가 현재는 협회까지 설립됐다. 한국정리수납협회의 정경자 협회장은 이렇게 조언한다.
“정리수납은 보통 팀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혼자 활동하기 어려운 시니어, 특히 여성들에게 적합한 직업입니다. 평생 살림을 해온 분들은 원칙과 이론을 알려주면 금방 익숙해지거든요. 이렇게 새로운 직업을 만들거나 창업하려면 좋아하는 일보다는 잘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좋습니다. 소비자를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하니까요.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의 전문성, 문제를 해결할 창의성, 구성원과 소비자를 대할 인성을 갖추고 있는지 늘 끊임없이 점검해야 합니다.”
찾을 수 없다면 창직(創職)도 방법
새로운 직업에 대한 단서가 필요하다면 한국고용정보원(www.keis.or.kr)을 노크하는 것도 방법이다. 이곳에선 제2 직업을 필요로 하는 중년들을 위한 자료를 연구하고 개발해 보급하고 있다. 올해 3월에 발간된 자료집 이 대표적이다. 이 책은 인생 2막을 설계하는 베이비 부머들이 도전하기에 적합한 직업 30개를 선정해 하는 일을 소개하고 해당 직업을 가지려면 무슨 준비를 해야 하는지 등을 알려주고 있다. 또 지난 5월부터는 중장년층의 창직 활동을 돕기 위한 라는 지침서를 배포 중이기도 하다.
# 클릭하면 크게 보입니다.
우리나라 해방은 독립투사의 활약에 힘입은 바 크다. 우당 이회영 선생은 온 가족과 전 재산을 바쳐 독립투쟁을 하였다. 그러나 큰 공적에 비하여 잘 알려지지 않았고, 명예나 지위를 탐하지 않았다.
온가족과 모든 재산을 바쳐 독립투쟁
6월 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신교동 소재 ‘우당기념관’을 찾아 그의 공적을 살폈다. 우당 이회영 선생은 1867년 이조판서 이유승의 4남으로 태어나 성장했다.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1910년 한일병탄이 되자 6형제와 일가족 50여 명이 전 재산을 정리하여 독립투쟁을 하기 위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만주에서 본격적인 무관학교 교육을 시작하였다.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성과를 이루고 독립전쟁을 주도하였으며, 광복군을 창설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3.1운동 이후 적극적인 무정부주의 운동을 전개하면서 격렬한 항일운동을 하였다.
항일투쟁 현지 지도 차 잠입하던 중 대련에서 체포되어 여순 감옥으로 이송하였다. 모진 고문과 굶주림으로 66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1962년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독립투쟁에 일생을 다한 경우도 많지만, 가족과 재산을 조국에 다 바친 경우는 드물다. 항일투쟁의 기틀을 마련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후에 아우 시영이 임정요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조국에 돌아왔을 때 살아남은 가족은 20여명 밖에 되지 않았다. 조국에 모두를 바쳤다.
위대한 독립투사요 사상가, 혁명가
우당은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으로 명문세가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보는 시각과 선각자적인 안목이 뛰어났다. 약관 20세부터 신지식을 받아들여 평민적 사고와 행동으로 독립운동사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긴 독립투사이자 위대한 사상가이며 혁명가였다.
이회영은 스무 살을 지나면서부터 집안의 노비에 대해 존대 말을 씀은 물론 평민으로 풀어주기까지 했다. 새로운 제도와 사상을 배웠으면 이를 즉각 행동에 옮겼다. 이들 형제 중 우당은 가장 먼저 봉건적 인습과 사상을 타파한 개방적이고 활달한 성격이었다. 온 몸을 던져 자신의 생각을 실천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대가족 망명 역시 우당이 주창했음은 물론이다.
명예나 지위를 탐하지 않다
명예나 지위에 대한 욕심이 없어 선생은 평생을 독립운동과 혁명가의 길을 걸었다. 어떤 단체․모임에서도 장을 맡은 적이 없다. 이 때문에 우당은 동생 시영의 그늘에 가려져 후세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벤트성 행사나 치르고 공을 과대 포장하는 것이 요즘의 세태다. 평범한 사람은 결코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더라도 노력하다가 죽었다면 이 또한 행복인 것이다.”라는 선생의 말씀이 되새겨진다.
가족들은 사회에 공헌하는 귀감
광복 후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된 아우 시영은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와 독주에 맞서 부통령직을 스스로 헌신짝처럼 버렸다. 손자들은 정·관계에서 사회에 공헌하고 있다. 월요일 오후 우당기념관은 한적하기만 했다. 선각자의 공적을 기리고 교훈으로 삼는 후대들의 노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대목이다. 바쁜 중에도 친절하게 안내해 준 황원섭(75 서초동) 상임이사와 담당 직원에 감사한다.
100세 장수시대가 우리 앞에 활짝 열렸다. 덕분에 ‘인생은 60세부터’라는 말이 일반화하고 있다. 하지만 그곳은 건너기 싫은 강이다. '고령자'가 싫어서 59세에서 나이 먹기를 멈추고 젊은 오빠인 양 10년을 살았다. 삶길 어언 70년! 살길 30년을 아름답게 살고 싶다.
학생 시절에 읽은 어느 유명 여류작가의 ‘29세 10년’이라는 글귀가 실감 나게 다가왔다. “25세부터 노숙미를 자랑하려고 29세 행세하였으나 막상 그때가 되니 불효하는 노처녀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음부터는 나이가 겁나서 35세까지 29세로 10년을 살았다”라는 줄거리였다.
50대까지 삶은 희망이 있었다. 샛별 보고 출근하고 달을 벗 삼아 집을 찾으면서 열심히 살았다. 은퇴 후 생활이 안락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너머에는 뛰어넘기 어려운 절벽이 버티고 있다. 노인생활의 문제점을 세계에서 제일 많이 안고 있는 게 한국이다. 아들보다 어린 청년들과는 취업 전선에서 맞서야 하는 기막힌 처지에 놓였다.
50대 초반 사회에서 은퇴가 시작되나 국민연금 지급은 오히려 65세로 늦춰졌다. 은퇴는 일찍 오고 복지는 오히려 늦어는 어려움에 부닥쳤다. 그래서 60대 되는 것이 매우 싫어졌다. 그냥 59세로 작정하고 살았다.
평균수명은 매년 늘어나 세계 최고수준인데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지공거사(地空居士)가 돼려면 65세 이상이어야 한다는 기준도 문제다. 한창나이를 왜 ‘고령자’라고 하는가?
지하철을 타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경로석 앞에서 서성인다. “그 자리에 앉는 것이 젊은 세대에 대한 배려다”는 이야기에 공감한다. 곤란하지 않게 알아서 처신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얼굴에는 주름이 깊어가고 행동은 굼떠졌다. 나이를 속일 수 없는 증표가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60대 중반 은퇴 후에는 자원봉사와 사회교육에 참여하면서 보람차게 살고 있다. 도시락으로 점심을 들면서 즐겁게 자원봉사하시는 사람들도 만났다. 그들에게 숭고한 인간의 모습을 보았다.
필자는 평생교육에 참여해 사회에 공헌하는 방법을 익혔다. 이제는 사회에서 터득한 귀중한 경험을 사회에 되돌려야 할 때가 되었다. 평생교육 참여는 스스로를 발전시킨다.
평생교육도 그동안 많이 변했다. 얼마 전까지는 취미, 여가 활용 등 시니어의 은퇴 후 생활교육이 주를 이루었다. 이제는 일자리 창출, 창업 위주로 청장년 교육처럼 교육과정이 변하고 있다. 시니어도 새 삶을 찾아야 한다.
50대처럼 살아온 10년이 훌쩍 지나가고 있다. 70세로 훅 뛰어야 할 때가 다가왔다. 두려워하지 않고 새 삶을 떳떳이 맞이할 것이다. 안락한 은퇴생활만 기대하기는 너무 젊다. 30년 살길이 바로 내 앞에 있다. 희망을 설계하고 즐겁게 살고 싶다.
서대문구 충정로에 위치한 ‘(사)한국마이크로크레디트 신나는 조합’(정명기 이사장)이 주최한 ‘시니어 취·창업연계교육’에 참가하였다. 시니어가 땀을 흘리면서 길을 찾는 교육현장을 살폈다.
서류심사, 면접을 거쳐 소수정예 교육생을 선발하였다. 민성삼(54) 수강생은 “2년 전 명예퇴직하고 한창 나이이기에 취·창업이 쉬울 줄 알았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교육을 잘 받고 귀중한 체험을 활용하여 취업에 꼭 성공하고 싶다. 궁극적으로는 사회에 공헌하는 창업을 할 예정이다.” 자기소개 때 명쾌하게 포부를 말하였다.
신나는 조합은 저소득층 및 사회적 소외계층을 위한 사회적 금융과 사회적 기업·협동조합 지원활동을 한다. 2012년도 부처형 예비사회적기업 지원기관, 2013년도 서울권역사회적기업 통합지원기관으로 선정되어 현재까지 사회적 기업 교육과 경영지원, 지역별 네트워크 구축 등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교육총괄 김진호 과장은 오리엔테이션 때 교육계획을 설명하였다.
“3월부터 오리엔테이션과 공통교육, 심화교육을 진행한다. 5월부터 창업팀은 전문적인 추가교육과 멘토링을 거쳐 10월부터 법인설립을 진행하고, 취업팀은 사회적 경제조직에서 약 3개월간 인턴십 과정을 거쳐 취업을 성사시킬 예정이다.” 현재 강의교육 마치고 교육 후 사업 진행 중이다.
공통교육은 사회혁신센터, 성미산 마을 방문 등 현장체험 중심으로 진행하고 심화교육은 실무에 활용 가능한 사례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창업희망자는 경험이 없는 고차원적인 사업모델보다는 자신이 직접 경험을 해보았거나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연계자원이 풍부한 창업아이템을 선정하는 것이 성공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강사가 힘주어 강조하였다.
취업희망자는 어떻게 취업절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가?
“신입직원의 자세로 새로운 조직에서의 적응능력을 키우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취업희망자와 구인기업을 1:1 연결하여 취업이 성사되도록 꾸준히 지도한다. 이점이 교육으로만 끝내는 것과 다른 방법이다.“
취·창업 성공사례를 구체적으로 소개하였다.
“한국의 전통차와 차문화 예절에 대해 오랫동안 종사해 오신 분을 여러 창업지원 공모사업에 참여토록 지도하였다. 덕분으로 2016년 사회적 기업가 육성지원 사업에 선정되어 지원금을 받고 창업을 준비 중에 있다. 취업의 경우 비영리조직에서 다양한 자원봉사 경력이 있던 분을 경영지원을 돕는 사회적 기업으로 재취업을 도왔고 매출향상에 기여하였다.“
취·창업 준비자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영리에서처럼 나 혼자 잘 살겠다는 마음으로는 이 분야에서 어떠한 응원이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근무환경도 어렵고 보수도 적지만 새로운 인생 2막을 사회적으로 유익한 활동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분들에게 사회적 경제영역은 다양한 역할과 일할 수 있는 기회들이 주어진다고 생각한다.“
시니어의 취·창업이 성공적으로 성사되기 바라며, 김진호 과장의 보충설명에 감사한다. 연락처: 070-7600-0510 홈페이지: www.joyfulunion.or.kr
지난 5월 2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대방로 372 여의도복지관에 어린이부터 중장년층, 어르신까지 모든 세대가 함께할 수 있는 통합 복지시설이 완공돼 개관했다.
이 시설엔 중장년층의 제2인생을 지원하는 ‘영등포50플러스센터’(3, 4층), 어르신들의 활기차고 건강한 삶을 지원하는 ‘구립여의도어르신복지센터’(2층), 꿈을 키우며 사랑을 나누는 ‘둥근마음어린이집’이 입주해 있다. 특히, 다른 복지관과 차별화를 둔 시설은 ‘영등포50플러스센터 다. 이 센터는 인생 이모작을 창조하고, 지원하는 지역 기반 거점으로서의 ‘미션’을 가지며, 장년층의 삶의 모델을 선도하고자 하는 ‘비전’을 가지고 있다. '핵심가치’는 존중, 연계와 협력, 도전이다. 이를 바탕으로 설정한 ‘전략 방향’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당사자들이 계획하고 만들어갈 수 있도록 지원한다.
둘째, 배움, 일, 여가, 관계를 함께하는 일상 공간을 지원한다.
셋째, 지역, 마을 기반 활동 지원을 한다.
이 모든 총체적 운영은 학교법인 원광학원이 맡고 있다.
한국의 국민 평균 수명은 1950년대에는 52.4세, 1980년대에는 65.8세, 2015년에는 83.5세였다고 한다. 그리고 조만간 한국은 백세 시대를 맞이한다. 그러나 한국 은퇴 연령은 50대부터여서 과연 은퇴 후 50년을 위해 우리는 얼마나 준비하고 있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센터는 이 문제에 답을 주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이 센터는 50플러스세대(이미 은퇴했거나 은퇴를 앞둔 50~64세의 장년층)을 대상으로 성공적 인생 후반전을 건강하고 풍요롭게 지낼 수 있도록 지지하고 지원하는 허브 역할을 하는 곳이다. 즉 은퇴 이후를 준비할 수 있는 마지막 시기에 있는 장년층들이 제2의 인생을 위한 새로운 비전을 창조하고 이루어갈 수 있도록 인생 재설계, 일자리, 사회공헌, 여가 등을 종합적으로 지원하는 곳이다.
지난 5월, 집집마다 활짝 피어 올랐던 카네이션 꽃들이 아쉬운 눈빛으로 저만큼 자취를 감추고 그 남은 향내마저 시들어 뒹굴 때쯤이면 부서진 꽃잎들은 흐린 미소로 전해온다. 또다시 6월의 꽃들은 정녕 눈부심이라고 나지막하게 내 귓가에 희망을 담고 속삭여온다.
장하다. 내 딸들아! 그리고 앞으로도 화이팅!
내게는 두 딸이 있다. 그리고 그 딸들은 6월이 되면 한아름의 장미꽃으로 내게 남은 열정을 태워주는 불씨가 된다. 그들이 가져다 주는 행복선물에 나는 고여 드는 눈물로 하늘 우러러 깊은 감사를 드린다. 어느 부모나 자식에게 최선을 다하고 그 자식이 잘 되기를 소원하지만 이 서서히 타오르는 계절, 그것들은 분명 그 아름다운 어떤 보석보다 빛나고 귀한 인생의 값진 선물이리라.
우리 가족은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격은 시련의 시간들이 많았다. 나라의 경제위기와 함께 닥쳐온 가정의 몰락, 그 여파의 빈털터리로 도피해야만 했던 이민생활, 어린 나이에 겪어야 했던 이산가족의 아픔, 낯설기 만한 이국 땅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으로 겪어야 만 했던 수많은 고통들, 그 상처들은 피나는 눈물로 파고들어와 뼈 속으로 스미는 칼날이었다. 험난한 절벽아래 낭떠러지 위기의 고통을, 우리는 어쩌다 상봉하는 가족이었지만 그리움의 빛깔로 채워진 가족이라는 힘으로 빛나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온몸으로 발버둥을 쳤던가.
다행히도 아이들은 긍정의 힘으로 열심히 잘 버티어 주었고 그 초라하고 가난했던 상처들은 이제 얼룩진 추억으로 남아 삶의 한 페이지를 장식해 주었다. 그리고 이제 그 힘겨웠던 돌덩이 들은 멋진 유학생활로 탈바꿈하여 어엿하고 당당한 여의사들이 되어 사회에 공헌을 하고 있다. 이 어찌 더한 빛나는 기쁨이 있으리오.
우리의 삶이 때론 아무리 견디기 힘들다 해도 지독한 고통과 함께 견디어 냈기에 지나고 보면 그래도 견뎌 낼 만했었다고 그리고 참아낸 만큼 또 하나의 찬란한 눈부신 행복으로 우리 곁에 머물러 주기에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가 말이다. 살면서 찾아오는 순간의 기쁨을 또 누릴 수 있기에 그 어떠한 고통도 더 견뎌 나갈 수 있을 것이리라. 또한 그 기쁨 눈물은 기도로써 간절히 갈구했던 부모의 마음이었기에 더 값지게 솟아 날것이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말한다. 물 안주고 너무도 잘 자라주었다고 말이다. 어느 어떤 나무가 물 안 먹고 자랄 수 있단 말 인가. 나는 그저 회심의 미소로 답할 뿐이다. 언젠가 시간과 침묵이 말해줄 것을 기대할 뿐이다. 부모와 자식 그 관계가 뭔지는 아직 잘 모르지만 언제나 부모는 자식 잘 되기만을 위해 온몸을 불사르고 자식은 이 다음 언젠가 또 부모가 되었을 때 아마도 그 때쯤이면 부모마음 어미마음을 이해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내 생일이 담긴 6월이 찾아오면 두 딸들은 호텔 부폐로 프랑스 레스토랑으로, 가난해진 어미를 끌고 다니며 명품으로 포장시키고 그 화려한 선물 아름다운 유혹으로 나를 초대 한다. 이제는 나이 들고 시들어진 어미에게 카네이션 보다 따뜻한 마음으로 잔잔한 가슴에 불씨를 댕겨준다. 누군가 말했듯이 행복은 누구에게나 자기 안에 웅크리고 앉아 언제고 주인님이 꺼내어 줄 때만을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나는 또 나의 그날이 오면 내 안에 잠자고 있던 행복들을 끄집어 내어 아주 찬란하게 환한 빛으로 말하고 싶다.
다시 찾아온 6월의 눈부신 행복이라고.
그리고 그 강하게 퍼부어대던 낯 설은 소나기의 위기 속에서 훌륭한 꽃으로 피어나준 내 아이들에게 고마움의 박수갈채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