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 전에 결심한대로 이번 5월 말에 오랜 세월 몸담았던 회사를 떠난다. 그동안 임기 연장에 대한 여러 유혹이 있었다. 일을 멈추는데 대해 불안 해 하는 아내의 저항도 만만찮았다. 무엇보다도 35년이 넘도록 새벽에 출근하고 밤에 퇴근하던 패턴을 어떻게 바꿀까 고민을 많이 했다. 떠나기로 결심하고 6개월 동안 이 문제를 고심했다. 결론은 60 이후의 삶을 좀 더 느리게 살자는 것. 이를테면 지금까지의 삶처럼 앞만 보고 뛰면서 살지 말고 옆도 바라보고 뒤도 바라보면서 느리게 걷듯 사는 게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느리게 걷듯 사는 것... 그러나 어떻게 사는 것이 그렇게 사는 것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떠나는 것은 정리를 의미한다. 그동안 희로애락을 같이했던 직원들과 정리해야한다. 업무는 워낙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었으므로 정리가 필요 없다. 업무와 관련하여 당부하는 것조차도 사족이 될 듯싶다. 다만 감정 정리가 필요하다. 회사 전체에서 필자의 나이가 제일 많다. 신입사원들의 이력서에서 부모 나이를 보면 필자보다 어린 경우가 많다. 그동안 어린 직원들과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나이 든 직장 상사로서 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의 고민을 많이 들어 주었다. 우리가 살면서 ‘미리 준비 했더라면’이나 ‘미리 알았더라면’하고 후회하는 일들이 있다. 그들이 필자와 이야기하면서 이런 것을 한 가지라도 알게 되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동안 업무를 하면서 관계를 맺었던 회사관계자들과의 정리도 필요하다. 필자가 떠나더라도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우리 직원들과 외부 회사와의 연결고리를 인계해 주어야한다. 그 회사들과 협업하여 진행할 향후 업무도 많고 콜라보 행사도 있어서 지속가능한 관계가 필요하다. 살아가면서 좋은 친구가 자산이 되듯이 좋은 협력회사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회사의 자산이 된다. 오랜 세월 겪은 후에 진정한 친구가 생기듯 좋은 협력회사도 하루아침에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책 욕심이 많다. 필기구 욕심도 많다. 특히 손에 잘 잡히고 써지는 느낌이 좋은 필기구는 참지 못하고 구입한다. 건축을 전공했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책을 보니 건축 책보다 시집이나 인문학, 자기 계발서 등이 더 많다. 최근에 구입한 책들은 거의 ‘시니어’ 관련 책들이다. 그동안 저자 강연을 찾아다니면서 모아둔 책도 많다. 각종 건축 프로젝트의 서류를 모아 둔 파일도 엄청 많다. 이것들을 다 가지고 갈 수 없다. 그래서 서류 중에 중요한 것은 사진을 찍어서 그림파일로 저장하고 나머지는 파쇄 해 버린다. 책은 일부 주변 사람들에게 기증하고 나머지는 그냥 서가에 두고 떠나기로 했다. 필기구는 전부 가져간다.
그동안 전시회나 여행지에서 구입한 각종 소품과 도자기, 액세서리 등이 제법 많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사내 바자회를 열기로 했다. 직원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참여했다. 더 감사한 것은 여러 직원들이 자기들의 애장품을 바자회에 기증해 주어서 바자회가 한층 풍성해 졌다는 것이다. 수입금은 필자가 운영위원으로 있는 장애인 복지관에 기부하기로 했다. 필자는 짐을 정리하게 되었고 직원들은 기부에 동참하니 일석이조의 좋은 행사가 되었다.
그동안 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졌다. 그 중에는 아쉽게 떠난 사람도 많았고 떠나는 날 얼굴을 못 본 사람도 많다. 가장 적당한 때 잘 정리하고 떠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안다. 어쩌면 떠날 때 뒷 모습이 그가 살아온 모든 것을 대변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오늘 아침에도 책상 옆에 붙여놓은 이형기 시인의 ‘낙화’를 읽어본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
암과 같은 질환 환자의 말기는 무척이나 힘겹다. 진통제가 투여되어도 고통은 잘 가시지 않고, 치료를 중단하고 빨리 죽게 해달라고 빌고 싶어도 말을 꺼내기 힘든 상태가 된다. 그리고 환자 입장에선 무의미할 수도 있는, 인간다운 삶을 살기 힘든 상황이 몇 달 혹은 몇 년 지속될 수 있다. 올 8월 이러한 악순환을 막기 위해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이라는 긴 이름의 법이 시행된다. 그리고 이 법의 중심에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라는 한 장의 서류가 있다.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 약칭 연명의료결정법은 흔히 ‘김할머니 사건’으로 불리는 사건의 촉발 계기가 됐다. 이 사건은 2008년 세브란스에서 고인의 뜻에 따라 김할머니의 가족이 병원 측에 연명치료 중단을 요청하면서 시작됐다. 병원 측은 연명의료 중단을 거절했고, 결국 1년여에 걸친 법적 공방 끝에 법원은 연명의료(인공호흡기 사용) 중단을 허용했다. 하지만 얄궂게도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이후에도 김할머니는 200여 일을 자가호흡으로 생존했다. 이 사건은 국내 최초로 존엄사를 인정한 사례로 기록되면서 우리 사회에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는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관한 문제와 의료기관이 중단을 결정할 수 있는 연명치료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의문 등이다.
이런 연명의료 거부에 관한 법률은 전 세계적으로 사례가 많은 편은 아니다. 가까운 일본만 하더라도 아직 관련 법률이 제정되어 있지 않다. 다만 엔딩노트 등을 통해 자신이 앓고 있는 병의 종류와 여명에 대한 고지 여부, 연명의료와 존엄사에 대한 의견 또는 장기기증, 의학용 시신기부를 위한 등록 유무를 작성해 가족에게 알리도록 유도하고 있다.
연명의료결정법이란?
김할머니 사건으로 인해 촉발된 환자의 자기결정권 문제는 연명의료결정법의 제정으로 이어졌다. 보건복지부의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지난해 2월 제정됐고, 올해 8월 4일부터 정식으로 시행된다. 그러나 연명의료 중단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연명의료 중단의 결정을 위한 관리 체계나 이행과 관련한 법률의 일부 조항은 2018년 2월 4일에 시행될 예정이다. 사실상 연명의료 거부는 내년에나 가능한 셈이다.
연명의료결정법을 요약하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암이나 후천성면역결핍증, 만성폐쇄성호흡기질환, 만성간경화로 인해 회복 가능성이 없고 수개월 이내에 사망할 것으로 예상되는 말기 환자가 임종 과정에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통해 연명치료 중단을 요청할 수 있고, 담당 의료진은 환자의 의견과 환자 상태 등을 고려해 연명의료 중단을 결정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연명의료는 김할머니 사건에서 핵심이 됐던 인공호흡기뿐만 아니라 심폐소생술,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등을 의미한다. 통증 완화를 위한 의료 행위나 물, 산소, 영양분 공급은 중단할 수 없다.
연명의료 거절 방법
연명의료결정법에서 규정한 환자의 연명의료 거절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환자가 본인이 치료받고 있는 병원(의료기관)에 연명의료계획서 작성을 요구하는 방법이다. 연명의료결정법에서 정한 말기 환자가 담당의사에게 연명의료계획서 작성을 요청하면, 의사는 연명의료 중단 결정이나 호스피스 이용 여부 등을 논의한 내용을 포함해 서류를 작성하게 된다. 물론 환자의 서명이나 담당의사의 서명은 필수다.
말기 환자는 아니지만 본인의 신념에 따라 사전에 미리 연명의료에 대한 중단 의사를 정해놓고 싶을 때 등장하는 것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의료기관뿐만 아니라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관한 사업을 수행하는 비영리법인이나 단체에서도 등록이 가능하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는 연명의료 중단에 관한 결정과 호스피스 이용 여부, 작성 일시와 의향서의 보관 방법 등을 기재하도록 되어 있다. 실제로 아직 법 시행 전이지만 일부 사단법인에서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양식을 공급하고, 작성된 의향서를 보관하거나, 의향서 기록에 관한 카드를 제작해주는 서비스를 진행하고 있다. 비영리기관의 형태를 띠지만 일부 서비스를 받기 위해서는 소액의 기부금을 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제는 현재 운영되는 사단법인이 연명의료결정법의 본격 시행 이후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의 등록기관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또 등록기관으로 공식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 해도 이들이 현재 제공하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법에서 정해놓은 규정과 다르거나 시행 전 개정 등으로 인해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는 점 역시 주의해야 한다.
의료계에서는 여전히 논란 중
이 법 시행에 대해서는 아직 의료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대상 환자가 사실상 암이나 후천성면역결핍증, 만성폐쇄성호흡기질환, 만성간경화 환자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그 외 죽음을 앞둔 많은 환자들의 권리는 보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논란이 되고 있다.
또한 법에서 정한 임종 과정이나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 등의 표현이 모호해 이를 의료인이나 의료기관이 죽음을 목전에 둔 환자에게만 적용하는 보수적 태도를 취하면 오히려 연명치료 중단을 원하는 환자의 고통을 늘려 원래의 법 취지를 상실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법의 구조상 환자가 본인의 연명의료 거부를 분명히 밝히더라도 최종 집행에 관한 결정권은 의료인과 의료기관에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원활한 제도의 시행을 위한 여러 가지 보완 노력은 정부 부처와 의료계를 통해 지금도 이뤄지고 있다. 이로 인해 본격적인 시행이 이루어지는 내년 2월에는 시행령이나 시행 규칙에 따라 현재의 예상과 달라질 수 있다. 때문에 연명의료결정법이나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의 확실한 윤곽은 제도의 시행 시기까지 기다려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365mc 비만클리닉은 서울365mc병원 김하진 대표병원장이 기부금 1억5000만원을 경북 청송에 위치한 양로원인 ‘소망의 집’에 기부했다고 8일 밝혔다.
365mc측은 기부금 전달식을 4월 29일 서울성모병원 대강당에서 진행했다. 기부금 전달식에는 소망의 집을 운영하는 황금련 원장과 소망의 집 사무국장 김병환 목사도 참석했다.
365mc병원·비만클리닉의 공동설립자인 김하진 대표병원장은 “현대사회의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고향의 자리도 좁아지는 것 같다”며 "마음의 고향과 같은 소망의 집에 도움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소망의 집은 365mc가 2010년 전달한 기부금 4억원을 기반으로 2011년 10월 건립됐다. 소망의 집은 60세 이상의 노인이 입소할 수 있으며, 기초생활수급 대상자는 무료로 입소받고 있다.
“아마 남대문 방화도 문화해설 체험을 통해 문화재의 소중함을 알았다면 없었을 일일지도 모르죠.”
우리문화숨결 궁궐길라잡이 오정택(吳政澤·52) 대표의 말이다. 그냥 넓은 공터가 있는 옛날 건물이 아니라, 누가 살았고 어떤 역사가 있었고, 왜 우리가 아껴야 하는지 들어볼 기회가 있었다면 방화 같은 어처구니없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것.
궁궐길라잡이들은 그런 면에서 중요한 사람들이다. 우리 문화유산의 가치와 소중함을 알리고 보존활동에도 참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들은 2002년에 덕수궁터 미대사관 아파트 건축 반대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궁궐길라잡이가 설립된 것은 1999년. 당시 청년단체였던 ‘서울KYC’가 중심이 돼 출범했다. 오정택 대표는 초창기부터 참여하다 대표를 맡은 지는 10년이 넘었다.
궁궐길라잡이는 오랜 역사 속에서 변화도 많았다. 초창기에는 경복궁과 창경궁, 덕수궁만 해설하다가 이후 창덕궁과 경희궁, 종묘까지 해설을 맡았다. 대한민국 문화유산상, 대통령상 등 수상 내역도 화려하다. 그만큼 정부로부터 수고를 인정받은 것이다. 현재는 서울시에 비영리민간단체로 등록되어 있다.
이들의 각 궁궐에서 하는 해설은 모두 무료로 진행된다. 문화재청에서 단체 운영에 필요한 일부 예산을 후원받을 뿐 대부분의 활동은 회원들의 재능기부로 이뤄진다.
“비영리단체이고 해설에 대한 비용도 없어 운영이 쉽지 않긴 하죠. 하지만 그만큼 이해관계나 갈등의 요소가 적어 원활한 모임 운영의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해요. 혹시 궁궐길라잡이분들을 보시면 자부심과 보람만으로 하시는 일이니 꼭 응원해주셨으면 해요.”
매주 일요일 각 궁궐에서 해설을 하고 있는 궁궐길라잡이는 대략 400여 명. 해설이 가장 많은 경복궁의 경우는 하루 10회 이상 해설이 이뤄지기 때문에 문화해설사도 그만큼 필요하다. 오 대표는 그중 상당수는 시니어라고 말한다. 현역 최고령 회원은 1943년생이다.
“약 20% 정도는 은퇴하신 분들이죠. 자긍심과 보람을 찾을 수 있는 일이다 보니 나이가 많으신 분들에게 적합한 것 같아요. 일요일 궁궐 해설뿐만 아니라 청소년 대상 사업이나 심화강좌 등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어서 시니어가 참여할 수 있는 일거리가 적지 않습니다.”
교육을 통한 길라잡이 배출도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9개월 교육기간에 비용은 20만원에 불과한데 강사진 중 상당수는 대학 강단에서 활동을 할 정도로 수준이 높다. 올해는 45명이 교육을 받고 있다.
오 대표는 경희궁 해설 활동을 최초로 시작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경희궁은 입장료조차 받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었지만 역사적으로 중요한 현장 중 한 곳입니다. 저희의 해설 활동 시작이 경희궁의 가치를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리적 복원이 어려울 때 해설로 그 가치를 복원하는 셈이죠. 또 달라진 관람문화도 저희가 기여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둘러보고 쉬다 가는 관람문화가 지금은 체험하고 이해하는 문화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우리 해설사들의 노력이 있습니다.”
시니어 기관 워크숍에 참여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시니어들 모임은 물론 어떤 단체이든 오래 활발한 활동을 하려면 기금이 마련되어 진행비가 있을 때 좀 더 모임이 활성화된다. 그래서 예상되는 지출 비용보다 회비를 더 많이 걷어 모아뒀다가 1년에 한두 번 큰 행사를 할 때 사용하곤 한다. 어떤 모임에서는 일일찻집을 하거나 경매 행사 등을 통해 기본 진행비를 마련하기도 한다. 야유회 때 기부금을 받는 경우도 많다. 오랜 기간 회비를 모으는 데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국가기관에 제안서를 넣어 비용을 제공받아 단체 성격에 맞게 사용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커뮤니티를 만들면 활동비를 적게는 50만원에서 몇천만원까지 제공받기도 하다. 구성원에 대한 정보와 단체 운영 내용을 제대로 작성해 보고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이 같은 방법으로 기금을 제공받아 활동하는 곳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창업과 창직에 관해서는 청년은 물론 시니어 대상으로 기금까지는 아니더라도 회의나 모임 장소를 제공받을 수 있고 간식이나 식사비용, 그리고 강의가 이어질 경우 강사비도 제공받을 수 있다.
시니어 모임에서 만원의 행복으로 참여하신 분은 매번 본인의 식사와 차 한 잔 비용밖에 안 되기 때문에 입회비 명목으로 혹은 회비 명목으로 미리 1년 회비를 한꺼번에 받기도 한다. 어떤 모임에서는 자신이 아끼는 물건 중에 덜 필요한 물건을 경매 물건으로 내놓도록 해서 워크숍 행사 중이나 연말 송년회나 신년회 때 경매 행사를 열어 기금 마련 시간을 갖기도 한다. 하지만 만원의 행복에서 이런 모임으로 이어지는 것은 친목 모임이든 배우는 모임이든 많아지면 부담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지난 4월 22일, 워크숍 참여기간 중에 기금을 모으기 위해 경매시간을 갖게 되었다. 단체기금을 마련해보는 시간이었는데 놀라운 결과가 있었다. 전체 인원 39명에 여성 참여자들이 17명, 남성 참여자들이 22명이었는데 놀랍게 여성 참여자들이 더 고가의 경매가를 불렀고 남성 참여자들은 훨씬 여성 시니어 참여자들에 비해 경매가가 약했다. 이번 경매 행사를 통해 여성 시니어들의 경제적 결정권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특히 연세가 많아 보이는 한 여성분께서 마치 지름신이 강림한 듯 높은 경매가를 불러 참여자들이 모두 놀랐다. 행사가 끝난 뒤 비용을 많이 쓰게 되셨는데 괜찮으시냐고, 왜 그렇게 높은 가격을 부르셨냐고 물었다. 그러자 우문에 현답을 하셨다. “어디를 가도 자신이 가장 나이가 많은 축에 속하는데 한쪽 구석에 쭈그러져 있는 것보다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 분위기도 고조시키고 뭔가 모임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며 그렇게 나잇값을 하고 산다”고 말씀하셨다. 그 깊은 뜻에 모두가 옷깃을 여미며 숙연해졌다.
나이 들어가면서 형님이 되고, 왕언니가 된다는 것은 대접만 바랄 것이 아니라 다양한 책임도 함께 짊어져야 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달은 날이었다.
199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백인 경찰의 흑인 폭행으로 시작된 흑백 갈등이 엉뚱하게도 코리아타운으로 불똥이 튀었다. LA폭동이었다. 미국 매스컴들의 편파보도는 살림 잘하고 있던 한 한국 아줌마를 ‘욱’하게 만들었다. 현모양처가 꿈이었던 그녀는 그 길로 정치판으로 뛰어든다. 이 드라마틱한 스토리의 주인공은 미셸 박 스틸(62). 미주 한인 커뮤니티에서 가장 사랑받고 있는 여성 정치인이자, 현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 슈퍼바이저 위원장이다. 그녀를 미국 현지, 산타에나 오렌지카운티 청사에서 만났다.
카운티 슈퍼바이저(County Supervisor). 우리에겐 무척 생소하니 단어 정리부터 해보자. 카운티는 미국 주 정부의 하부 행정 구역으로 캘리포니아 주(州) 오렌지카운티 안에는 총 34개의 시(市)가 포함되어 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세 번째, 미국 전체에서는 여섯 번째로 크다. 인구 320만 명에 한해 예산만 6조원에 이르는 오렌지카운티는 한국의 광역시와 비슷한 규모의 자치단체다.
카운티는 각 지역구에서 선출된 5명의 슈퍼바이저(슈퍼바이저 위원회)가 이끌어 가는데 박 위원장은 2014년 선거에서 한인 최초의 슈퍼바이저로 당선됐다. 지난 1월에는 만장일치로 위원장에 선출, 그녀는 명실상부 오렌지카운티의 행정 수장이다.
“한국뿐 아니라 이곳 한인분들도 낯설어했어요. 당선되고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슈퍼바이저가 뭐하는 자리냐는 거였으니까요. 그만큼 한인 정치인이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죠. 저는 한마디로 오렌지카운티의 모든 살림을 맡아서 합니다. 법을 만들고 집행도 하지요. 소방국, 경찰국, 보건국 관리는 물론 교육, 사회복지, 심지어 쓰레기를 수거·처리하는 일까지 모두요.”
얼마나 바쁘냐는 질문에 다이어리를 살핀다. 존웨인공항의 리모델링과 국제선 비행기의 공항 사용료 문제, 야생 코요테의 사체 처리 법안, 등·하교시간 교통 체증에 대한 주민 항의, 노숙자 샤워와 숙박시설 허가…. 박 위원장의 수첩을 꽉 메우고 있는 현안들이다. 오늘 잡힌 미팅만 4개. 자잘한 방문 약속까지 소화하려면 오늘도 칼퇴근은 어렵겠다며 웃는다. 그녀의 기분 좋은 미소 뒤로 성조기가 아닌 태극기가 눈에 들어온다.
그녀가 정치인이 된 이유
한국 이름 박은주. 그녀의 고향은 서울 성북동이다. 어린 시절 뛰놀던 학교 운동장이며 창경원(現 창경궁)에 놀러갔던 일, 경복궁에서 스케이트를 타던 추억이 그녀의 뇌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일본 한국교육문화원으로 발령이 나면서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동경여자대학교 영문학과 1학년이던 1975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페퍼다인대학(Pepper dine University)에서 경영학을 전공할 때만 해도 박 위원장의 꿈은 현모양처였다. 예쁜 앞치마를 입고 쿠키를 구우며 아이들을 키우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고. 1981년 테니스 동호회에서 만난 전도유망한 청년 변호사 션 스틸과 결혼해 예쁜 두 딸도 얻었다. 그렇게 현모양처의 꿈을 이루는 듯했지만 그녀의 길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LA에서 홀로 옷가게를 운영하던 어머니가 어느 날 국세청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어요. 세금을 속였다며 정말 어마어마한 벌금을 부과했더라고요. 분명히 잘못된 것이었어요. 어머니는 한국과 일본에서 교편을 잡았던 분이세요. 평생 정직을 최고의 가치로 알고 사셨던 분이 탈세라니… 너무나 억울했지만 아무도 우리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어요. 그때 처음으로 소수계가 당하는 부당함과 설움을 알게 됐어요. 거기에 불을 지핀 것이 4·29 폭동이었고요.”
LA 4·29 폭동은 박 위원장에게 ‘행동하지 않으면 변화하지 않는다’는 신념과 자신이 ‘한국인’임을 각인시켜준 사건이었다. 1992년 4월 29일 흑인 로드니 킹을 폭행한 백인 경찰관들이 무죄 선고를 받자 흥분한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공권력은 부유한 백인들이 살고 있는 비벌리힐스를 보호하기에 바빴고 결국 폭도들에게 한인 타운으로 가는 길을 내준 꼴이 되었다. 맨손으로 일군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한인들은 직접 총을 들었고 미국 매스컴들은 앞다투어 한·흑 갈등으로 몰고 갔다.
닷새간 이어진 방화와 약탈로 2300여 한인 업소가 피해를 입었고 피해액만 5억달러에 이르렀다. 돈 벌기 위해 너무 앞만 보고 달렸다는 각성의 목소리도 나왔지만 그 대가치고는 너무나 참혹했다. 한인 타운은 그야말로 잿더미로 변했다.
“한마디로 미디어의 횡포였어요. 뉴스, TV 쇼에서 잘못된 내용을 말하고 있는데 누구 하나 정정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뭔가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어요. 정치인 친구들이 많았던 남편에게 부당함을 쏟아냈고 뭐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고 말했어요. 정말 뭐라도 해야 할 거 같았어요. 남들 앞에 나서기를 지독히도 싫어하던 제가 말이죠.”
1993년 LA시장에 출마한 리처든 리오든 선거캠프 자원봉사를 시작으로 그녀는 미국 정치판으로 뛰어들었다. 안 하면 안 했지 적당히 하는 꼴은 못 보는 한국 아줌마의 힘은 어디서나 단연 돋보였다.
시장에 당선된 리오든 시장은 그녀를 LA소방국 커미셔너로 전격 발탁했고 이후 LA공항, LA아동복지국 커미셔너를 역임했다. 커미셔너는 해당 분야의 정책자문 역할을 하면서 시의 전반적인 행정에 간접적으로 관여하는 직책이다.
박 위원장은 이어 1999년 한미공화당협회 회장, 2001년 부시 행정부에서는 아시아태평양 자문위원을 거치며 차근차근 정치 이력을 쌓게 된다.
한인 커뮤니티가 사랑하는 선거의 여왕
사실 박 위원장이야말로 ‘선거의 여왕’이라 불릴 만한 전력의 소유자다. 24년 정치인생에서 세 번의 선거에 출마, 모두 승리했다. 특히 2006년 당시 ‘듣보잡’ 후보에 가까웠던 그녀가 도전한 ‘캘리포니아 조세형평국 위원’은 캘리포니아 조세 정책을 총괄하는 막중한 자리였다.
그녀는 이 선거에서 정치 거목이었던 상대 후보를 꺾고 60.5%라는 득표율로 압승했다. 한국 커뮤니티는 물론 그녀가 속한 공화당 내부에서도 놀란 결과였다. 목소리까지 가냘퍼 보이는 그녀의 이런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박 위원장은 서슴없이 ‘한국인의 DNA’ 덕분이라고 말한다.
“처음 출마선언을 하고 후보 인준을 받기 위해 연설을 한 날이었어요. 얼마나 무서웠던지 연설을 마치고 나와서는 자동차 뒷좌석에서 결국 울음이 터졌죠. 옆에 앉은 분이 걱정이 되어 남편에게 전화를 하더라고요. 전화를 끊고 아무 말이 없길래 남편이 뭐라고 하더냐 물었더니 그냥 놔두라고 했대요. 금방 다시 씩씩해질 거라고. 미셸은 한국 여자라고요(웃음)!”
박 위원장은 2010년 재선에서도 거뜬히 승리하면서 8년간 조세형평국 위원으로 재직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그녀의 이름 앞에는 ‘가주 내 한인 최고위 선출직 공직자’,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공화당원’ 등의 수식어가 붙게 된다.
미셸 박 스틸의 러닝메이트는 바로 한인 커뮤니티다. 그녀는 한인 커뮤니티로부터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다며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것은 모두 한인들 덕분이라고 말한다. 미국의 선거는 선거자금이 당락을 결정짓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미국 정치인들에게는 선거자금 캠페인, 모금행사 등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기부금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한인들에게는 이것이 낯설기만 하다. 또 사는 게 바쁘다 보니 유권자 등록이나 투표는 늘 딴 세상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아쉬운 이야기이지만 한인 유권자 등록률과 투표율은 아시안 커뮤니티에서 늘 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셸 박 스틸이 출마하는 선거는 유독 한인들의 투표율이 높다. 박 위원장이 슈퍼바이저로 당선된 지난 2014년 선거에서 오렌지카운티의 한인 유권자 투표율은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미셸 박 스틸만큼은 밀어줘야 한다는 분위기다. 이렇다 보니 미주 한인사회의 오랜 숙원인 연방하원에 입성할 인물로 박 위원장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박 위원장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시정에서는 한인 커뮤니티를 어떻게든 메인스트림으로 끌고 들어오려는 노력이 느껴진다. 카운티에 공식적으로 미주 한인의 날을 만드는가 하면, 한인 단체가 벌이는 행사를 카운티가 공식 후원함으로써 힘을 실어주고 있다.
조세형평국 시절에는 정부 공식 홈페이지에 한글로 된 안내문을 올리기도 했다. 부당한 세금이 청구된 납세자가 있다면 자신에게 연락하라, 혐의가 입증되기 전에는 무혐의로 믿고 끝까지 보호하겠다는 취지의 글이었다. 그녀 어머니가 당했던 억울함을 한인들에게 다시는 없게 하겠다는 의지였다. 강철 벽처럼 느껴지는 주 정부 홈페이지에 한글로 된 안내물이라니… 어찌 한인들이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연한 일이에요. 메인스트림 안에서 한인을 대변하기 위해 정치를 시작했으니까요. 임기 동안 하나라도 더 정착시켜놓으려 합니다. 제가 이 자리를 떠나더라도 카운티 차원에서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요. 그만큼 어깨가 무겁기도 하지만 보람도 있습니다. 초심을 잃지 않으려 해요. 내가 왜 이 자리에 오려 했는가를 생각하죠. 정치인은 유권자의 선택으로 살아남는 사람들이에요. 유권자가 내려가라 하면 내려가야죠. 다행히 아직까지는 저를 많이 사랑해주고 계세요(웃음).”
박 위원장은 내년 그녀의 네 번째 선거를 치러야 한다. 슈퍼바이저 재임에 도전하는 것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역시 선거자금을 모으는 일이다. 이제 곧 후보들 간의 모금 현황부터 비교하며 당락 가능성을 점치는 언론들의 보도가 쏟아져 나올 것이다. 다시 전쟁이다.
남편, 그리고 엄마
박 위원장의 정치인생에 없어선 안 될 사람이 있었다면 그것은 남편 션 스틸 변호사(공화당 전국위원회 위원)와 어머니 정옥희 여사(2011년 작고)다. 박 위원장이 정치를 시작하면서 함께 살기 시작한 세 사람에게는 소소한 추억들이 많다. LA 문단에서 수필가로 활동하기도 했던 정옥희 여사의 수필집 곳곳에는 딸과 사위 이야기가 있다. 특히 사위 스틸 변호사에 대한 묘사에는 애정이 그대로 담겨 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사람. 우리나라 함경도 사람처럼 일하며 처자 권속을 확실히 지키는 사람. 내가 여행이라도 가는 날이면 손에 돈과 정을 같이 쥐어줄 줄 아는 사람이 우리 사위다. 집에 돌아오면 조용한 집 안을 장터같이 활기차게 만들고 장모의 김치볶음밥과 순두부찌개가 최고라고 치켜세우는 사위는 가정을 지키는 것이 생애 최고의 행복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다’. (정옥희 수필집 모음 중에서)
결혼 36년 차의 남편은 박 위원장에게 늘 휴식 같은 존재다. 캘리포니아 공화당협회 의장까지 지냈지만 정치적 조언보다는 시정에 지친 아내를 살피는 일이 우선이다. 타고난 유머감각으로 박 위원장을 늘 웃게 만들어주는 것도 그의 몫이다.
지난해 큰딸 채안(29)이 결혼하면서 박 위원장은 사위를 봤다. 그래서인지 돌아가신 ‘엄마 생각’(박 위원장은 꼭 엄마라고 불렀다)이 더 잦아졌다고.
“참 강하고 현명하셨던 거 같아요. 그때는 엄마로서 이민자로서 살기가 지금보다 훨씬 힘들었던 시절이었는데 말이에요. 처음 일본에 가서 말도 못하고 친구가 없는 저를 보고 엄마는 늘 웃으라고 했어요. 내가 웃기만 하니 아이들이 ‘아호(바보)’라고 하더군요. 엄마는 그래도 계속 웃으라고 했어요. 정치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소리가 미셸은 잘 웃어서 좋다는 말이에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엄마라면 뭐라고 했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엄마가 딸을 위해 내어놓는 솔루션보다 좋은 게 어디 있겠어요?”
박 위원장은 자신이 엄마를 추억하듯, 훗날 딸들이 자신을 그렇게 추억해주기를 원한다. 그녀의 뒤를 이어 한인 커뮤니티를 대표할 차세대 정치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삶에 덕이 되고 싶고, 길을 먼저 가는 선배로서 그들이 올 길을 조금은 편하게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이다.
“정치적 야망이요? 그렇게 거창한 표현은 안 어울리고요. 정치인으로서 잃고 싶지 않은 것은 있어요. 민심과의 소통, 발로 뛰는 열정 그리고 정직이요. 어디까지 가든 소통과 열정, 정직 없이 가게 될까봐 겁이 납니다. 연방하원… 가야죠. 제가 아닌 누구라도 가야 합니다. 제가 갈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 갈 것이고 혹 나보다 더 좋은 후보가 나타난다면 저는 미련 없이 그를 밀 것입니다.”
인터뷰 말미, 그녀가 고향 성북동의 안부를 묻는다. 두어 차례 한국 지자체의 초청을 받아 남편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지만 정작 추억 어린 곳은 찾지 못했다고 한다. 서울 시내 곳곳이 너무 많이 바뀌었지만 성북동은 아직 옛 정취가 많이 남아 있다고 하니 아이처럼 반가워한다. 남편과 함께 꼭 가볼 거라고 코를 찡긋거리며 웃는 그녀.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으며, 열정적이고, 그대로의 자신을 내어 보이는 미셸 박 스틸은 아름다웠다.
최근 고궁과 같은 사적을 방문하면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역사적 배경을 곁들여 문화재를 설명하는 문화해설사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전하는 ‘이야기꾼’에서 역사적 사건과 그 배경을 설명하는 ‘역사 선생님’으로서, 때론 유적을 안내하는 ‘안내자’로서의 열정을 보여주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문화해설사에 대한 묘한 매력이 느껴진다. 그 매력에 빠지는 것만큼 문화해설사가 될 수 있는 방법도 쉬울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문화해설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이 직업이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 직종인지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문화해설사란 전문성을 갖고 사적이나 특정 지역의 역사와 가치, 문화를 알리고 방문객의 이해를 돕는 사람을 지칭한다. 문화해설사제도가 처음 도입될 때만 하더라도 특정 문화재를 대상으로 고정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최근에는 문화재가 아닌 여러 지역이나 코스를 대상으로 해설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문화해설사라는 명칭 역시 대상이나 주관 기관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문화재청의 경우 제도 시행 초창기에는 문화해설사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현재는 문화재안내해설사라고 구분해 부르고 있다. 광역자치단체에서 공식적으로 활동하는 문화해설사들은 ‘문화관광해설사’라는 명칭이 사용된다. 문화관광해설사제도는 관광진흥법으로 정해져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 그리고 각 지자체가 함께 운영하고 있다.
이밖에 구 단위 소규모 지자체나 민간단체에서 활동하는 인원은 문화해설사, 역사문화해설사, 문화교류해설사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처럼 명칭이 해설 대상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그 취지와 역할은 대동소이하다.
정부 문화관광해설사 취득은 ‘바늘구멍’
문화해설사 중 가장 대표적인 문화관광해설사제도는 어떻게 운영될까? 안을 들여다보면 다소 복잡하다. 문화관광해설사제도의 설립은 2011년 관광진흥법 개정으로 시작됐다. 2001년 ‘한국 방문의 해’를 맞아 당시 문화관광부가 문화유산해설사를 배출하기 시작한 것이 시초다.
문화관광해설사는 자격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다른 제도와 달리 관광진흥법에 따라 문화체육관광부가 인증한 위탁 교육기관을 수료한 사람만이 지원 가능하다. 위탁 교육기관에서 100시간 교육을 통해 배출된 예비 문화관광해설사는 지자체의 평가와 3개월 이상 실무수습을 마친 후에 문화관광해설사 자격을 얻게 된다.
이들 교육기관은 문화체육관광부가 한국관광공사에게 선발을 위탁하는데, 한국관광공사는 3년에 한 번씩 교육기관의 인증을 갱신한다. 현재 인증된 교육기관은 총 25개소로, 교육 시설을 갖춘 대학이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이들 25개 인증 교육기관으로 찾아가면 문화관광해설사가 될 수 있을까? 아니다. 이들 교육기관은 상시적으로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아니라, 각 지자체에서 문화관광해설사의 수요가 있을 때마다 교육을 의뢰받아 시행한다. 다시 말하면 서울시와 같은 광역자치단체에서 문화관광해설사에 수요가 있을 때 문화체육관광부와 협의해 선발 계획을 세우면, 공고를 통해 지원자를 선발하고 이들의 교육을 한국관광공사에서 인증한 위탁 교육기관에 의뢰하는 식이다.
의뢰가 있을 때마다 선발된 인원에 대해서만 교육을 진행하기 때문에 교육기관을 찾아간다고 문화관광해설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각 지자체에서 선발 공고를 내면 그 시기에 맞춰 신청해야 자격 취득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문제는 문화관광해설사의 수요가 광역자치단체마다 사정이 다르다는 것. 강릉시와 공주시, 경상남도의 경우 올 초 문화관광해설사를 선발해 본격적인 교육에 들어갔다. 이에 반해 국내 최대 규모인 214명의 문화관광해설사를 관리하고 있는 서울시의 경우 올해 추가 인원을 뽑지 않기로 했다. 서울시 서울관광마케팅관광사업팀 관계자는 “모집 여부는 지난해 실적을 고려해 판단하는데, 지금 인원으로 충분하다고 판단돼 올해 추가 모집은 없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사드 문제로 인한 중국 관광객의 급감도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문화관광해설사 자격을 얻으면 운영기관 배치에 따라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하게 된다. 서울시의 경우 문화관광해설사들이 활동 가능한 시간과 지역을 설정해놓으면 서울도보관광(korean.visitseoul.net)에서 신청자들의 예약을 받아 자동으로 연결하는 형태로 운영 중이다.
해설사 운영 지자체도 많아
소규모 지자체에서 모든 과정을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문화해설사 과정도 노려볼 만하다. 서울의 경우 중구와 종로구, 영등포구 등이 각 지역의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활동할 문화해설사를 선발해 운영 중이다. 선발이나 운영 방식은 각 구별의 특성을 반영해 차이가 있다.
서대문구의 경우 지난 3월 처음으로 해설사 8명을 선발했다. 총 36명의 지원자 중 8명을 뽑았다. 이들은 40시간의 이론·현장 교육을 받은 뒤 5월 하반기부터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해설을 하게 된다. 서대문구 지역활성화과 박홍표 과장은 “서대문구의 역사문화 자원을 발굴하고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하며 “스토리텔링 개발을 통해 문화재 중심에서 지역을 알리는 골목 해설로의 확대도 검토 중”이라고 설명했다.
문화해설사제도가 지자체의 전유물은 아니다. 서울시 도심권50플러스센터는 지난해 6월 민간단체 한양길라잡이와 함께 세종마을(서촌)해설사 양성 과정을 진행했다. 이들은 7월 23일부터 10월 16일까지 온라인으로 해설 신청을 받아 1개 도보여행 코스를 운영했다. 올해 역시 도심권50플러스센터를 통해 두 번째 세종마을해설사 총 18명을 선발해 지난 3월 수료식을 진행했다.
한양길라잡이 이상욱 대표는 “올해는 해설사 선발에 경력사항을 중점적으로 고려했고, 실제로 반응도 좋다. 지난해보다 단체 신청이 많은 상태”라며, “내년에는 한옥마을로만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갑신정변과 3·1운동의 중심인 북촌과 관련한 프로그램을 운영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민간단체를 통한 경력 확보의 길
현장의 문화해설사들은 문화해설사라는 직업을 쉽게 접하고, 관련 경력을 쌓을 수 있는 방법으로 민간 문화해설 관련 단체를 추천한다. 민간 주도의 ‘재능기부’이기 때문에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워 가입이 쉽고, 교육 내용도 관 주도의 교육보다 실질적이고 체계적이라는 평가가 많다. 현재 민간 문화해설사 양성기관 중 대표적인 곳으로는 비영리 민간단체 우리문화숨결이 운영하는 ‘궁궐길라잡이’와 사단법인 한국의재발견이 운영하는 ‘우리궁궐지킴이’가 있다. 두 기관의 뿌리는 서로 다르지만 1999년 공식적인 문화해설 활동을 협력해 시작한 사이로 국내 문화해설 사업을 이야기할 때 두 단체를 빼놓을 수 없다. 실제로 국내 문화해설사 교육 과정에 참여하는 인력 중 상당수는 이들 단체 출신이고, 두 단체 출신은 선발 과정에서 프리미엄이 붙는다는 이야기까지 나돌 정도다.
두 단체는 1년에 한 번 교육생을 모집하고, 총 9개월간의 이론과 실습 교육 과정을 거쳐 문화해설사를 배출한다. 배출된 인원은 문화재청과의 협의를 통해 주요 궁궐을 중심으로 한 사적에 배치돼 방문객을 대상으로 해설 활동을 한다. 서울의 5대 궁궐(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과 종묘에서 궁궐지킴이는 금요일과 토요일, 궁궐길라잡이는 일요일에 해설을 맡는다. 문화재청 소속으로 활동하는 문화재안내해설사들은 평일에 주로 외국인을 상대로 안내 역할을 한다.
큰 수입 기대하면 낭패
직업으로서 문화해설사는 어떨까. 현실적으로 생활에 보탬이 될 만한 수익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문화재청 소속의 문화재안내해설사들이 급여가 보장되어 있어 그나마 사정이 가장 낫기는 하지만 기간제근로자(계약직)라서 업무성과 평가 후 1년 단위로 계약이 갱신된다. 모집인원도 문화재마다 1~2명씩 선발하는 것이 고작이어서 도전하기가 쉽지 않다.
광역자치단체의 문화관광해설사를 포함해 소규모 지자체의 문화해설사 역시 대부분 급여의 개념이 아니라 교통비와 활동비 정도만 지원해준다. 1회당 지원금은 2만5000원에서 3만5000원 수준이다. 이마저도 해설을 매일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수입은 ‘월 소득’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민망한 액수다. 그래서 자긍심과 보람, 열정이 없으면 하기 힘든 일이다.
중국어 전문 서울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 중인 김선희씨는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에게 우리나라의 자랑스러 문화유산을 알릴 수 있는 것이 이 직업의 매력”이라며, “해설을 들은 외국인들이 여행 후에 다시 연락해 감사인사를 전할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친구가 밥이나 먹자고 전화를 걸어 왔다. 딸의 결혼을 앞두고 있던 필자는 청첩장을 챙겨들고 친구를 만나러 갔다. 모바일 청첩장을 이미 보낸 터라 따로 종이 청첩장을 챙기지 않아도 됐지만 얼굴을 대면해서 직접 건네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친구는 딸의 결혼에 적당한 덕담을 했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결혼식에 참석해 못해 미리 준비했다는 봉투는 꽤 두툼했다. 왜 못 오냐는 필자의 말에 친구는
“토요일에 강남에서 하는 결혼식은 너무 복잡해서 힘들어”
라는 뜻밖의 말을 했다. 40년 이상 이어온 우정을 생각한다면, 특별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길 막히고 복잡한 서울의 결혼식이 싫어서 불참하겠다는 친구의 말은 상식을 벗어난 듯 했다.
“어떻게 결혼식에 안 온다는 얘기를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해?”
“형식이 뭐가 중요하니, 마음이 중요하지”친구는 웃으며 말을 했다. 필자 또한 혼주한테 얼굴 도장 찍자고 인사치례로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에 대해선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서운한 감정이 전혀 일지 않았다. 결혼식의 주인은 결혼 당사자들이니 신랑신부를 잘 아는 사람들이 와서 해주는 축하가 진짜 축하라고 친구는 덧붙였다.
딸과 사위는 비용이 적게 드는 작은 결혼식을 원했다. 그러나 작은 결혼식을 알아보면서 하객 규모만 작아질 뿐 전체 예식 비용은 만만치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또한 양가 부모님이 초청할 하객과 신랑신부의 직장 동료, 교회 친구들을 꼽아 보니 작은 결혼식으로 수용될 수 있는 인원이 아니었다. 소박하되 낭만적인 결혼식을 원했던 아이들은 현실과 이상을 적절하게 버무려 작지도 크지도 않은 결혼식을 치르게 됐다.
필자는 결혼식의 규모와 상관없이 딸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해줄 만한 사람들에게만 청첩장을 돌리기로 했다. 결혼식장은 딸과 사위의 지인들로 채우고 싶었다. 연락이 끊긴지 오래된 사람으로부터 모바일 청첩장을 받았을 때 부조를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부담스럽고 난처했던 적이 있다. 인연이 있었으니 청첩장을 보냈겠지만, 받지 않았으면 부조를 하지 않았을 사람에게서 청첩장이 날아오면 솔직한 심정으로 이건 아니지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부조가 경제적으로 부담이 될 때가 많아서 그랬을 것이다. 남편도 시어머니도 ‘부조는 빚’이라며 필자의 생각에 흔쾌히 동의해 주었다. 물론 필자와 친하다고 생각한 사람 중에 연락을 받지 못해 서운해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청첩장을 남발해 불편한 것보다는 청첩장을 받지 못해 서운해 하는 사람들을 달래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다.
요즘 예식문화가 바뀌고 있다. 화려하고 성대한 결혼식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한편에선 가족과 친인척들만 모여 조촐한 예식을 치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또한 기존 형식을 벗어나 개성적인 결혼식을 올리는 한편 축의금을 사양하거나, 화환 대신 쌀을 기부 받아 어려운 사람을 돕는 뜻 깊은 결혼문화도 생겨나고 있다.
자신의 결혼식은 스스로 치르겠다는 결혼 당사자들도 결혼식문화를 바꾸는데 한 몫 하는 것 같다. 아직까지는 부모의 경제력으로 결혼하는 가정이 많아 부모 뜻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있지만, 결혼식의 주체가 부모에게서 당사자로 조금씩 바뀌고 있다. 이렇게 되면 부모 얼굴 때문에 봉투 들고 찾아오는 부조문화도 점차 달라 지지 않을까.
이태문 일본 통신원 gounsege@gmail.com
정년퇴직 이후의 삶, 제2의 인생을 어떻게 하면 알차게 즐길 수 있을까? 아마도 누구나 한번쯤 고민하며 그 실마리를 찾으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릴 것이다. 하지만 나이 들어 새로운 취미를 만드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의욕과 체력이 따라주는 젊은 시절부터 ‘취미의 씨’를 뿌려두는 게 중요하다. 취미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사람들에게 그 비결을 물으면 “젊었을 때 했던 취미생활을 다시 시작했다”고 대답하는 분들이 꽤 된다.
그러나 새로운 취미에 도전하는 걸 방해하는 건 의욕도 체력도 아니고 ‘오래 계속하는 것’이라는 선입견일지도 모르겠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기회이자 타이밍’이니 남은 삶에 지금까지 맛본 적 없는 ‘재미’와 ‘보람’을 선물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자기 삶의 ‘애호가’일 것이다.
일본 시니어들의 취미
일본에서는 고령자가 계속할 수 있는 취미로 주식, 등산, 워킹, 낚시, 독서, 자수, 골프, 볼링, 시쓰기, 체스, 데생, 원예, 역사, 장기, 분재, 서예, 유화, 과자만들기, 수묵화, 시계수집, 게이트볼, 꽃꽂이 등을 꼽는다. 크게 몸을 움직이는 취미, 머리를 쓰는 취미, 손동작이 필요한 취미 등으로 나눌 수 있겠다. 이러한 취미는 운동 부족을 해소해주고, 치매 예방에도 좋다. 또한 같은 취미를 즐기는 사람들과의 교류도 넓혀주고 쓸쓸한 노후의 고독도 피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60대 남녀의 인기 취미 순위
350개 이상의 취미를 소개하는 일본의 ‘취미찾기닷컴’이 조사한 인기 순위를 잠깐 살펴보자. 먼저 60대 남성은 혼자 하는 여행, 사이클링, 오토바이, 재택근무, 사진, 전자공작(PIC), 절과 신사 순례, 주식, 워킹 순으로 조사됐다. 60대 여성의 경우는 혼자 하는 여행, 재택근무, 온천 순례, 절과 신사 순례, 워킹, 자수, 양궁, 등산, 심리학 순으로 인기가 있었다. 참고로 50대 남성의 취미로 사격, 50대 여성의 취미로 소설쓰기, 기타, 퍼즐 맞추기 등이 눈에 띄었다.
내 꿈을 찾아라~ 인생은 60부터
일본의 주쿄(中京) TV는 매주 일요일 아침 5시 45분부터 을 방송하고 있다. ‘아라칸’은 Around Kanreki의 줄임말로 칸레키는 우리말로 환갑을 의미한다. 이 프로그램은 환갑 전후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꿈에 도전해 제2의 인생을 즐길 수 있는 힌트를 제안하고 있다. 이 방송에서 소개된 이색 취미 몇 가지를 소개해보겠다.
2015년 12월 6일 방송에서는 빙상 위의 컬링(curling)이 아닌 날씨와 관계없이 체육관에서 즐길 수 있는 ‘커롤링(curolling)’이 소개됐다. 20여 년 전 나고야에서 시작된 이래 경기 인구 40만 명을 자랑하는 인기 스포츠로 체력보다는 두뇌게임이라는 점에서 ‘마루 위의 체스’라고도 불린다.
2016년 1월 10일에는 미술 취미로 ‘어탁(魚拓)’이 소개됐다. 낚시를 좋아하지 않아도 누구든 즐길 수 있는 ‘어탁’은 기존의 수묵(水墨) 중심이 아니라 색채와 구도 등을 바꿔가며 다양한 느낌을 줄 수 있다. 꼭 물고기가 아니어도 되며 모든 사물의 본을 떠서 작품으로 만드는 ‘탁화(拓畵)’라는 장르가 새롭게 소개됐다.
그다음 주인 1월 17일에는 카우보이 복장으로 차려입고 컨트리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컨트리 댄스가, 3월 13일에는 1960~1970년대에 붐이 일어나 일렉트릭 기타에 빠졌던 세대들이 밴드를 결성해 제2의 청춘을 만끽하는 모습이, 4월 17일에는 실제 동물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력적인 리얼 양털 퀼트 아트가, 8월 7일에는 다양한 무늬가 특징인 넥타이를 재활용해 가방과 인형 등을 만드는 리폼이 소개됐다. 이 밖에 9월 4일에는 경이로운 종이접기의 세계, 9월 11일에는 걸리버 여행기를 방불케 하는 미니어처의 세계, 10월 9일에는 종이를 오려내 그림을 만드는 ‘키리에(切り絵)’, 10월 23일에는 실제로 사람을 태우고 증기를 뿜으며 달리는 철도 모형 등이 소개됐다. 2017년에 들어와서는 우쿨렐레와 돌하우스(미니어처 장난감 집), 천사의 소리 핸드벨 음악, 볼펜 그림의 세계 등이 전파를 탔다.
이색(異色) 취미보다는 다양한 취미
인구가 많아지고 평균수명이 계속 늘어나면서 취미도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과거 이색적이라는 이유로 주목을 끌던 취미들은 최근 덕후(마니아, 광)들이 등장하며 주류와 당당하게 어깨를 겨루고 있다. 그만큼 취미를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 셈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증명하는 것 역시 새로운 취미에 도전해 개척하는 자세일 것이다. 전문가들은 고령자들에게 무리하게 몸을 움직이기보다는 치매 예방 차원에서 손가락과 뇌를 자주 사용할 수 있는 주산, 바둑, 장기, 손글씨, 그림, 색칠하기, 민요, 노래방, 꽃꽂이 등을 권한다. 간단한 요리를 만들게 하거나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시키는 것도 좋다.
몸 푸는 기분으로 이런 취미는 어떨까?
사단법인 일본 화살불기 레크레이션협회는 폐활량에 자신이 없는 사람은 물론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취미로 화살불기를 권한다. 실제로 전국의 화살불기 교실에는 60~70대 회원들이 많은데 90세가 넘은 고령자도 있다고 설명한다.
또한 수집이 취미인 사람들은 모으는 것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수집한 물건을 이용하는 방향으로 취미활동을 확대해보는 것도 좋겠다. 예를 들어 도자기 수집을 하는 사람이 도예 교실을 다니며 직접 만들어보거나,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 바리스타 자격증에 도전해 실력을 인정받는 것은 어떨까? 또 인물과 동물, 자연 풍경 등 사진 찍기를 즐기는 사람은 독거노인의 영정사진을 찍어주는 등 자신의 취미와 능력을 사회에 환원하는 재능기부 나눔을 실천해보는 것도 좋다.
이처럼 좀 더 관심을 갖고 주변을 살펴보면, 의외로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취미들이 많다. 먼저 발품을 팔아 정보를 찾아보고 자신에게 ‘안성맞춤’인 취미를 선택해보자.
슬슬 발동을 걸어보자
지난 2014년 5월에 구성된 댄스 그룹 ‘TGK48’은 일본 기후 현 다지미 시의 고령자들이 만든 그룹이다. 그룹명은 일본의 인기 여성 아이돌 그룹 AKB48의 이름에서 힌트를 얻어 ‘다지미, 겐키(건강), 고레샤(고령자)’의 머리글자를 따서 지었다.
‘노래하고 춤추고 먹고 마시고’를 기치로 내걸고 2016년 8월 60대 42명, 70대 21명, 80대 1명 등 총 64명(남성은 5명)으로 구성된 ‘TGK48’은 힙합도 소화하는 본격 댄스 그룹으로 공공시설을 빌려 일주일에 한 번씩 두 시간가량 연습을 하며 구슬땀을 흘린다. 최근 춤을 잘 춘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크고 작은 행사와 스포츠 대회에 출연,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뽐내고 있다. 강사 레슨비 등 연간 100만엔가량의 운영비는 다지미 시로부터 지원받고 있다. 고령자의 의료비와 개호비 등의 삭감과 관련해 길게 내다본 다지미 시의 획기적인 투자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2016년 3월 16일자 마이니치 신문에 따르면, ‘TGK48’ 멤버 35명의 체력을 측정한 결과 전 항목에 걸쳐 동세대의 일반인들을 훨씬 뛰어넘는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깜빡이는 빛을 보고 도약하는 데 걸리는 ‘전신 반응속도’는 무려 0.3초대로 20대 수준으로 나타났다. 5초간 빠르게 스텝을 밟는 ‘서서 스텝핑’의 평균 횟수도 60대 멤버가 40.1회, 70대 멤버가 37.7회를 기록해 젊은이 못지않은 결과를 보여줬다. 이들의 체력을 측정한 기후대학교 교육학부의 가스가 히카루 교수는 “힙합은 빠른 템포의 음악에 몸의 움직임을 맞추는 춤으로 신경에 좋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100세 장수시대에 다 자란 자식을 부양하는 부모는 늘어나고, 어버이를 모시는 자식은 줄어들고 있다. 부모 품을 못 떠나는 이른바 ‘난 캥거루족’은 그 이유로 경제적으로나 인지적으로 모두 독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노부부만 사는 경우는 50%가 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의 시니어는 사회의 주역으로 열심히 살아 왔으나 노후생활 준비가 부족한 실정이며, 후세대나 국가의 ‘복지지원’은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시니어가 30년을 살아가기 위하여 자기 스스로 설계하고 실천해야 하는 엄숙한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실패하면 만회할 기회도 오지 않는다.
시니어는 현금흐름 수지균형을 실현하는 데 재무 설계 목표를 두어야 한다. 오늘의 시니어는 고도성장 속에서 눈뜨고 나면 재산이 불어나는 경험도 하였으나 이제는 수입과 지출이 거의 축소되거나 국민연금 등으로 고정되어 있다. 재산이 남는 경우에는 상속, 증여, 사회기부 등 지출을 늘려 규모를 줄이고, 부족한 때에는 수입을 창출하고 소비지출을 줄여서 ‘재산제로’를 달성해야 한다. 앞으로 살길 30년 장기계획을 세워야 하는 이유다.
월 100만 원의 가치를 30년 가치로 계산해 보자. 원금으로 3억 6천만 원이다. 100만 원이라면 관심이 적게 보일 수 있지만 3억6천만 원이라면 눈이 번쩍 뜨이는 금액이다. 세금, 물가상승률 등을 감안한 연 순수익률을 2%로 가정하고 매월 100만 원씩 30년 동안 수입창출하거나 소비 절약하여 운용하면 4억 8천9백만 원이 되고, 반대로 매달 100만 원씩 소비한다면 2억 7천만 원이 당장 필요하다. 월 100만 원은 앞으로 살아야 할 30년을 좌우할 귀중한 자원이다.
젊은 시절 추구했던 수입창출도 좋고, 고통이 덜 하는 방법으로 낭비요인을 줄이는 방법도 좋다. 월 10만 원이라도 목표를 세우고 꾸준히 실천하는 것이 시니어가 살길이다. 시니어의 수입은 대체로 연금, 자산운용 수익, 수동산 임대소득, 근로소득, 기타소득 등으로 이루어진다. 직업에 따라 50세 이전부터 은퇴가 진행되는 경우도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제는 성공한 사업가도 은퇴할 때가 되었다. 나이 절벽에 막혀 창업이나 재취업으로 수입을 창출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새롭게 수입창출하기가 매우 어려운 형편이니, 우선 소비지출을 검토하여 낭비를 억제하는 방법부터 찾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 설령 재산을 많이 남겨봐야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어차피 빈손으로 갈 것이다.
지출은 주거관리비, 식생활비, 세금과 공과, 일상활동비, 건강관리비, 경조사비, 의료비, 품위유지비, 금융비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세히 검토해 보면 조정할 수 있는 낭비요인이 많음을 발견할 수 있다. 실천 가능한 것부터 차근차근 챙기라는 뜻이다.
지난날의 귀중한 경험은 깊이 간직하고 화려했던 과거는 내려놓으라. 그러면 앞길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