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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의 퇴직 이후
- 우리 가족은 6·25 전쟁 납북 피해자 가족이다. 저의 시부모님은 일제 강점기 시절 동경 유학 생활 중에 만나서 당시로서는 드문 연애 결혼을 하셨다. 시어머님은 3남 1녀를 낳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시던 중 6.25 전쟁의 발생으로 시아버님이 납치 되신 것이다. 어머님은 6·25당시 34살의 젊디 젊은 나이에 혼자 되셔서 갖은 고생을 하시면서 자제분들을 대학까지 교육시키셨다. 어머님은 저의 결혼 후 평생 우리랑 함께 사시다가 5년전 95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는데 얼마 전 6·25를 맞아서 정부로부터 를 받고 남편은 많은 감회에 젖었다. 남편은 아버님의 납치 후 직장 생활 초기에는 혹시라도 이북의 아버님과 접촉할까봐 출장 허가도 힘들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맞벌이로 직장에 다니던 필자는 어느 날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 때는 지금처럼 건강 프로그램도 별로 없어 뇌졸중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가 회복은 했으나 후유증으로 지금까지도 몸이 불편한 상태이다. 내가 쓰러지자 가정 생활은 즉시 엉망이 되었고 또 남편은 곧 정년 퇴직을 하게 되었다. 서울의 모 방송국에서 30 년 넘게 근무하고 정년 퇴직을 한 남편의 퇴직금은 그 때로서는 많은 금액이었다. 그 때는 퇴직금도 미래가 어떨지 모른다며 매달 지급되는 연금으로 받지 않고 일시불로 받던 시대였다. 그리고 당시엔 은행의 이자도 상당히 높아서 이자로만 살아도 어느 정도 생활을 유지 할 수 있었다. 또 그 때만 해도 장수 시대가 아니라 거의 대부분 은퇴 후의 생활 준비도 하지 않았고 당연히 어떻게 퇴직금을 관리 해야할 줄도 몰랐다. 그 때는 지금 유행하는 ‘은퇴 이후의 재무 설계’ 같은 말은 존재 하지도 않았다. 남편이 할 일을 못 찾아 힘들어 하던 어느 날 필자는 우연히 인터넷에서 찾은 주례 협회에서 직업적 주례사를 모집한다는 걸 보고 남편 몰래 응모를 했다. 남편이 방송국에서 방송 경험이 있으니 주례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또 실제로 주례 경험도 많았기에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 믿고 남편 대신 응모 서류를 보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을 할 정도로 궁핍하진 않았지만 하루 하루 똑같은 무료한 생활로 시간 보내는 남편에게 봉사하는 마음으로 일을 하면 나름대로 활력을 줄수 있지 않을까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예상대로 합격 통지를 받고 남편에게 기쁜 마음으로 말을 했더니 엄청 화를 내면서 누굴 뭘로 보냐며 자기를 무시 했다고 몇 달 동안 나와 눈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가 그런 아르바이트를 하면 남이 자길 얼마나 궁하게 보겠냐며 자긴 앞으로 돈을 버는 일은 절대로 아무 일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는 거였다. 사실은 돈이 문제가 아니라 남편 출근만 하면 하루 종일 온통 내 세상이었는데 갑자기 하루 종일 붙어 있기가 참으로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필자의 단순한 생각이 남편을 화나게 만든 것이었다. 요즘은 하루 종일 함께 있어도 요령이 생겨, 퇴직 초기처럼 싸우지도 않고 서로 각자 시간을 잘 보내고 있는 필자를 보면 대견한 생각이 든다.
- 2017-12-12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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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년 만에 다시 찾은 초등학교
- 졸업 이후 처음이다. 성당도 군부대도 있었지 아마? 큰길 맞은편엔 한때 어머니가 다니셨던 신발공장도 있었고. 지하철 역세권으로 탈바꿈한 지 이미 오래전이라니 제대로 찾을 수 있을까? 이젠 사라졌을 옛날 우리 집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면 대문 앞에서 찻길까지 그 좁다란 골목길을 따라서 아주 오랜만의 등교를 해보리라. 부산 지하철 2호선 문현역 2번 출구를 나오면서 필자의 발걸음이 미세하게 떨렸다. 헛기침 두어 번으로 호흡을 가다듬어본다. 마치 두 계절을 머금은 듯 선선하면서 차가운 바람은 얼굴을 어루만진다. 3분 정도 걸었을까? 믿기지 않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래 바로 여기야.” 오랜 기억 속의 동네 골목길이 여태 저리 버티고 있었다니. ‘딱지치기’와 ‘다망구’ 그리고 ‘오징어달구지’를 하던, 또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유행가를 따라 부르느라 항상 시끌벅적했던 바로 그곳. 그 시절의 주인공들은 지금 무얼 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한구석 기억의 방에 쌓아두었던 옛이야기들이 여름날 분수대 물줄기처럼 솟구쳐 오른다. 필자가 살던 옛집은 자취를 감추었지만. 아마 일요일이었을 듯싶다.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나서 문을 열고 나가보니 친구 녀석이 교회를 가자며 손짓했다. 귓속말로 비밀스러운 약속까지 했다. “오늘 교회 같이 가면 저애 소개시켜줄게.” 녀석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긴 머리의 여자아이가 나무 뒤에서 우릴 훔쳐보며 서 있는 게 아닌가. 세월 따라 빛바랜 골목 담벼락엔 여기저기 상처투성이, 그 흔적들 사이로 혹시나 남겨두었을지도 모를 깨알 낙서들을 찾아 이쪽저쪽 두리번거린다. 빠져나오기 싫은 어둠속 터널 같은 골목길을 나서자 바로 큰길에 이른다. 이젠 좌회전을 해야 한다. 대로변 K은행에서 학교까지 죽 이어진 신작로를 따라 제대로 등굣길에 오르는 순간이다. 기억보다는 가깝게 느껴진다. 여긴가? 좌측으로 키다리 소나무가 있었을 자리엔 브랜드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새로이 오픈한 듯싶은 삼거리 국수집 앞에서 잠시 서성거린다. “그래 맞아, 이 부근에 제법 큰 공터가 있었지.” ‘소차’ 자전거 빌려 타는 맛에 해가는 줄 모르던, 뭉쳐서 야구시합하느라 밥도 거르던 그를 기어코 만나고야 만다. 지금은 흑백사진 속에나 있는 유년의 필자를…. 퀴즈 하나 내련다. 1970년대 대표 주전부리 중 하나는? 호주머니에 쏙 집어넣고 한 움큼씩 꺼내먹기에 그만이었던 것. 바로 배고픈 하굣길의 파란 봉지 ‘뽀빠이’, 빨간 봉지 ‘자야’다. 오물오물거리며 걸어가던 오르막을 지나자 학교 건물이 성큼 다가선다. 뒷산 황령산과 그 자락을 따라 조밀하게 들어선 집들을 배경으로 드디어 모교가 보인다. 높고 선명한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너무나 깔끔한 외관의 부산 문현초등학교. 정문으로 바로 들어서지 않고 담장 따라 한 바퀴 천천히 돌아본다. 그 시절엔 없었던 색깔 예쁜 유치원과 두 팔 벌려 활짝 반갑게 맞이하는 후문. 때마침 지나가던 어린 후배가 찍어준 인증샷은 오래도록 남을 기념작이다. 그런데 시절이 하수상한 탓이라서 6학년 1반 교실을 둘러볼 수가 없어 두고두고 아쉽다. 책·걸상도 어루만져보고 싶고 게시판 그림들도 들춰보고 싶고 또 손가락으로 분필가루도 찍어보고 싶은데 말이다. 아쉽게 돌아나가던 필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본관 우측 앞에 있는 ‘책 읽는 소녀상’이다.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라고 씌어 있는 기단석 위로 다소곳하게 앉아 무려 40여 년 동안이나 책을 읽고 있다. 요즘 말로 ‘심쿵’하게 하는 모습이다. 은근한 매력의 향나무 교정 아래로 내려서니 눈부신 햇살도 도리 없이 비켜가는 얽히고설킨 등나무 벤치. 휘감아 도는 바람결에 기꺼이 온몸을 맡기고선 살며시 눈을 감아본다. 6학년 체육시간, 한판 제대로 붙던 날. 운동장 모래판 씨름장엔 팽팽한 긴장감이 샅바 위를 감돌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우리 모두는 ‘빵’ 터지고 말았다. 한 친구의 엉덩이, 그것도 하필 그곳에 그만 ‘빵꾸’가 나버렸기 때문이다. 평소 까무잡잡했던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던 녀석.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혹여 이 글을 보게 된다면 함께 웃어나 보고 좋을 텐데. “야, 원래 구멍 난 바지를 입었던 거냐? 아니면 정말 용쓰려다 그리 된 거냐? 설마 기억조차 못하는 건 아닐 테지?” 잘 그려진 눈금 위로 색깔 선명한 인조 잔디 운동장. 모래먼지 흩날리던 지난날은 찾아볼 수 없는 트랙 주변을 어슬렁거려본다. 소꿉놀이하던 옛날의 모래밭은 오간데 없고 누가 저리 시퍼런 융단을 깔아놓았단 말인가. 그런데 정말 이상하고 말이 안 되는 게 있다. 이리도 무심한 사람이었나? 아니면 기억력이 떨어진 건가? 좀처럼 생각나질 않는다. 겨우 서너 명 정도의 이름만 생각날 뿐이다. 그나마 세월이 흘러 그들과도 연결이 끊겼다. 참 어처구니없는 노릇이다. 헛헛한 걸음으로 정문을 나서면서 다시 사진을 찍어본다. 언제라도 꺼내볼 수 있게 폰 속에 제대로 간직해놓고 싶다. 또 다녀갈 날을 쉽사리 기약하기 어려운 게 우리네 현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나오는데 문득 생각난 곳이 있다. 바로 학교 앞 문방구점. 단 몇 걸음 만에 마주한 그곳은 거의 옛날 그대로의 모습이다. 열린 듯 닫힌 창문을 혹시나 하며 두들겨보는데 잠시 후 인기척이 들려온다. 그분일까? 사실 얼굴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드르륵 창문이 열리며 맞아주신 분. 그 시절의 주인장이 분명했다. 졸업연도를 밝히니 이내 기억을 더듬으신다. 악수도 청하고 ‘무극노트’도 몇 권 기념으로 산다. 환하게 웃으시며 사진촬영에도 응해주시고 동기들 만나면 안부 전해달라며 사인펜 두 자루를 덤으로 넣어주신다. 마치 고향의 이웃 아저씨를 조우한 기분이다. 어느덧 기울어가는 해. 왠지 자꾸 뒤돌아보게 된다. 누군가 부르는 소리도 없는데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는다. 어디 근처에서 커피 한잔 할 수 있는 카페 없나? 어쩌면 그 긴 머리 소녀가 거기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지 모를 일이고.
- 2017-12-11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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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들이 소곤댈까? 홍콩의 밤거리엔?
- 해외여행에 익숙지 않은 초보 배낭 여행객들에게 홍콩은 매우 적격한 나라다. 중국 광둥성 남쪽 해안지대에 있는 홍콩은 1997년 영국령에서 반환되어 국적은 중국이지만 특별행정구다. 다른 자본주의 체제가 적용되는 ‘딴 나라’다. ‘별들이 소곤대는 홍콩의 밤거리’라는 오래된 유행가를 흥얼거리면서 그 속으로 들어가 보자. 병 고쳐 달라 기원하면 낫게 해줄까? 웡타이신 사원 홍콩의 주룽반도(九龍半島)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도교 사원이 웡타이신(黃大仙)이다. 원래는 중국 광저우(廣州)의 황사에 있었는데 1912년 현재의 장소로 이전해 일반인에게 공개된 것은 1956년부터다. ‘웡타이신’은 우리말로 황대선이라는 인물을 뜻한다. 그는 원래 저장성의 한 지방에서 살던 양치기 소년. 15세 때, 정제된 황화수은을 질병 치료 약으로 만들어 인술에 많은 공적을 쌓았다. 그래서 이 사원은 병 치료에 도움을 주는 신앙처로 알려지게 된다. 모습은 여느 사원과 비슷하다. 각자의 소원과 병 치료를 기원하는 제수를 놓고 향초를 피우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사원 안은 눈이 매울 정도로 향내가 진동한다. 특히 사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대나무 산통을 이용해 행운의 점(산통점)을 친다. 일을 그르칠 때 쓰는 ‘산통 깨다’라는 표현은 바로 이 ‘산통점’과 관련해서 생겨났다. ‘산통(算筒)’에 대나무를 잘게 잘라 100개 정도를 넣고 산통의 막대가 나올 때까지 흔들고 막대가 나오면, 막대와 같은 번호의 종이와 바꾼다. 점쟁이는 그 내용을 설명해준다. 하지만 점괘가 나와도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니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다. 또 이 사원에 들러 꼭 찾아야 할 곳은 뒤쪽의 정원. 황대선이라는 이름이 선명한 정원은 연못과 함께 꾸며져 있어 주변 고층 아파트의 삭막함을 무색케 할 정도로 아름답고 정적이다. 홍콩 영화 속 주인공처럼 침사추이 거리 헤매보기 주룽 지구의 침사추이(尖沙咀)는 홍콩 최대 번화가다. 고층빌딩 숲, 옛 향기가 가득 배인 칙칙하고 좁은 골목들. 오래된 재래시장과 파도처럼 일렁대는 사람들의 왁자한 소리의 물결. 과거와 현대를 아우르는, 영화 같은 매력이 폴폴 넘쳐나는 곳. 홍콩 누아르 영화 속에서 이미 친근해진 풍경이 반갑다. 해안 산책로를 따라 영화의 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할리우드 스타의 거리를 모티브로 만든 ‘스타의 거리’다. 2003년에 시작해 1년 뒤인 2004년부터 공개되었다. 너비 4~5m, 길이 440m로, 9개의 붉은 기둥에 홍콩 영화 100년사가 기록되어 있다. 또 영화를 찍고 있는 감독의 조형물, 이소령 동상 등이 눈요기를 시켜주고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길바닥에 새겨진 영화인 명판들. 이연걸, 홍금보, 임청하, 양조위, 오우삼, 서극, 매염방 등 국제적으로 친숙한 홍콩 스타들의 손도장과 사인들이 거리를 장식했다. 이름만 새겨진 배우는 스타 거리가 조성되기 이전에 죽은 사람들이다. 이곳이 유난히 좋은 이유는 주변 바다 풍치가 덧대어져 있기 때문이다. 유람선과 고깃배가 떠다니고 바다 너머로 홍콩섬 금융가의 건물들이 뾰족하게 올라가 있는 주변 풍광이 매력적이다. 이외에도 미술관, 우주박물관, 시계탑, 문화센터 등 볼거리가 풍부하다. 특히 주룽반도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시계탑(높이 44m)은 1910~1978년 중국과 유럽을 오가던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출발역이었던 주룽역 앞에 서 있던 것. 조화롭지 않은 듯 조화를 이루고 있는 침사추이가 매력적이다. 홍콩의 부자 동네, 리펄스 베이 침사추이에서 리펄스 베이(Repulse Bay)로 가려면 일단 홍콩섬으로 들어가야 한다. 페리호와 해저터널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홍콩섬은 홍콩 개항 이후, 상업 및 정치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홍콩섬에서 가장 높은 산, 빅토리아 피크(554m) 고갯길을 넘어서면 차창 밖 모습이 조금씩 달라진다. 빽빽한 건물 대신 초록색 산과 바다가 어우러지고, 띄엄띄엄 고층 아파트가 그림처럼 들어앉아 있다.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은 건축 형태가 자연과 잘 어울리고 있다. 이곳이 바로 리펄스 베이다. 성룡 등 홍콩의 유명 인사들이 주로 사는 부촌이다. 길 끝나는 바닷가 끝에 틴하우(天后) 사원이 있다. 사원 앞에 틴하우 여신이 해탈의 미소를 건네고 있다. 산정이 아니라 바다와 눈높이가 같다. 1865년에 세워진 도교 사원은 독특한 중국 건축 양식을 전하는 지붕의 곡선이나 조각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사원엔 바다의 수호신인 ‘쿤암(Kwun Yum)’과 틴하우를 모시고 있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 틴하우 여신은 뱃사람들이 복을 빌면 소원을 들어주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사람들을 구해준다고 믿었다. 또 건너가면 젊어진다는 장수교와 손으로 문지르면 재물복을 준다는 정재신(正財神) 석상, 만지면 3일 안에 인연을 만들어준다는 인연신이 있다. 특히 인연신 앞에서는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떨어질 줄 모른다. 유럽 거리 걷는 건가? 스탠리 마켓과 머레이 하우스 리펄스 베이 해변을 벗어나 찾아갈 곳은 스탠리 마켓(Stanley Market)이다. 스탠리 메인 스트리트를 중심으로 150여 개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시장 거리다. 마치 서울의 이태원동과 같은 분위기다. 마켓 거리는 고급 제품을 파는 곳이 아니다. 반면 스탠리 베이 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확연히 모습을 달리한다. 아기자기한 유럽식 바와 식당, 숍들이 해변을 따라 이어진다. 세계 음식점들이 즐비하고 외국인도 많이 눈에 띄어 이국적인 풍치가 연출된다. 아기자기한 바와 레스토랑에서는 커피 한 잔, 파스타, 피자 한 조각으로 여행객들을 유혹한다. ‘만(灣)’ 형태의 넓지 않은 바다를 따라가면 머레이 하우스(Murray House)를 만난다. 옛 센트럴에 위치한 1844년대 식민지시대 건축물을 1991년 그대로 옮겨다 놓았다. 40만 개의 벽돌로 지어진 이 건물을 분해해서 옮긴 후 재조립했다고 한다. 아직도 총탄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건물은 딱히 멋은 없지만 홍콩에서 가장 오래된 식민지시대 건물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현재는 레스토랑과 홍콩해양박물관으로 이용된다. 머레이 하우스 앞 바닷가 쪽의 정자와 옹기종기 매여 있는 조각배의 풍치에 반한 여행객은 그 순간 긴장을 스리슬쩍 내려놓는다. 홍콩 야경 보고 레이저 쇼 보니 기분 최고, 맥주 한잔 어때? 홍콩 여행에서 야경을 빼놓을 수 없다. 야경을 볼 수 있는 전망 포인트가 여러 곳 있다. 그중 홍콩섬의 빅토리아 피크는 야경 보는 인기 뷰포인트. 홍콩의 가장 높은 전망대로 서울의 남산타워, 63빌딩이라고 이해하면 될 듯하다. 산정에서 바라보는 야경도 훌륭하지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전망대에 올라서야 완벽하게 멋진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특히 이곳의 명물로 꼽히는 것은 피크 트램. 1888년부터 긴 세월 동안 가파른(373m) 산등성이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어느 순간 건물이 거꾸로 서 있는 듯 몽롱해진다. 특히 피크 타워 바로 옆, 사자 정자는 환상적인 야경을 볼 수 있는 명소다. 또 승강기를 타고 타워 꼭대기 층인 스카이 테라스로 올라가면 더 넓게 조망할 수 있다. 야경을 보는 데에도 피크 타임이 있다. 오후 8시부터 약 20분간 심포니 오브 라이트(Symphony of Lights) 레이저 쇼가 펼쳐진다. 좀 더 가까이 다가서야 한다. 영화 거리와 이어지는 시계탑 근처, 연인의 거리에 마련된 2층 뷰포인트가 명당자리. 바다 건너 홍콩섬의 금융가 건물에서 뿜어대는 광선에 취하는 홍콩의 밤이다. 이런 날, 침사추이 밤거리로 들어가 몽콕 야시장에서 야식을 사먹는 재미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Travel Data 교통편 대한항공, 아시아나 항공, 캐세이패시픽, 타이항공 등에서 매일 인천~홍콩 간 직항편을 운행한다. 2014년부터 제주항공, 진에어와 같은 저가 항공사도 직항편을 운항 중이다. 3시간 30분~3시간 50분 소요. 현지 교통 정보 홍콩 공항에 도착하면 공항고속전철을 타고 20~30분 만에 중심가인 주룽반도와 홍콩섬에 갈 수 있다. 시내를 여행할 때는 배(스타 페리)와 2층 버스, 전차(트램) 등 다양한 교통수단을 이용하면 된다. 옥토퍼스 카드라고 불리는 교통카드를 이용하면 지하철, 배, 전차, 버스 등을 모두 이용할 수 있다. 화폐 단위 홍콩 달러(HKD)를 이용해야 한다. 마카오에서는 홍콩 달러를 사용할 수 있으나 거스름돈은 현지 화폐인 파타카(Pataca)로 받을 수 있다. 화폐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음식과 숙박 정보 홍콩 음식은 우리 입맛에 잘 맞는다. 완탕이 유명하고 시장통에만 가도 먹을 게 지천이다. 유명 호텔 숙박은 몇십만원대이지만 5만~8만원 선에 이용할 수 있는 곳도 있다. 주룽반도 쪽이 가격이 저렴하다. 특히 1928년 문을 연 페닌술라 호텔(香港半島酒店)은 세계 10대 호텔 중 하나로 꼽힌다. 또 40여 년의 전통을 지닌 만다린 오리엔탈 홍콩(mandarin oriental Hong Kong)은 미슐랭 스타(Michelin Star)를 받은 호텔로 10개의 레스토랑, 스파 및 피트니스 센터를 갖추고 있다. 가격은 70만~80만원대다. 물가 정보 홍콩은 면세가 되는 품목들이 대부분이다. 의류, 가방, 시계 등은 한국보다 다소 저렴하다. 그러나 주류, 담배 등의 품목 몇 가지는 한국보다 가격이 더 높고 세금을 부과한다. 전체를 합치면 홍콩 물가는 서울과 비슷하다. 날씨와 옷차림 정보 홍콩의 12월은 평균 최저기온이 15.9℃, 평균 최고기온이 20.2℃로 우리나라 가을과 비슷하다. 일교차가 작아 낮이나 밤이나 서늘하고 쾌적하다. 가을 옷 위주로 챙기고 머플러 등을 준비하면 된다. 시니어 한 달 여행 포인트 홍콩과 마카오(澳門)는 빼놓을 수 없는 밀접한 여행지다. 홍콩 항에서 뱃길로 40여 분(약 60㎞) 달려가면 마카오다. 또 홍콩과 인접한 도시가 심천이다. 홍콩의 지하철(MTR)이 주룽의 홍함에서 중국 국경인 광둥까지 국철(KCR)로 연장되지만 통과하려면 비자가 필수다. 심천은 경제특구 지역으로 새로 생긴 신흥도시. 건물들도 깨끗하고 홍콩보다 물가도 싸다. 매우 좁은 도시여서 여유롭게 여행을 즐기면 된다.
- 2017-12-11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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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 라이프] 2017년 정유년 대중문화 트렌드와 스러진 별들
- 2017년 정유년의 한 해도 저물고 있다. 올해는 국정농단으로 헌정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에 의해 파면되는 초유의 일이 벌어져 5월 9일 조기 대선을 통해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19대 대통령에 당선돼 취임하는 등 격변의 한 해였다. 대중문화계 역시 세월호 특별법 서명, 야당 후보 지지 등의 이유로 송강호, 정우성, 김혜수 등 수많은 연예인을 포함한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와 김여진, 문성근, 김미화, 김제동, 김규리 등 82명의 연예인을 좌파 연예인으로 규정해 여론 조작, 방송계 퇴출 등을 시도한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 보고서가 공개돼 큰 파문이 일었다. 또한 사드로 촉발된 중국 당국의 한한령(限韓令·한류금지령)으로 대중문화 산업계가 직격탄을 맞는 등 크고 작은 일이 많았다. 2017년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고 유행을 선도한 대중문화 트렌드와 키워드는 무엇일까. 우선 영화계에선 역사적 사건과 인물 등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쏟아져 흥행에 성공한 것이 가장 눈에 띄는 트렌드다. 한국 민주화에 큰 역할을 한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 병자호란 당시 고립무원의 남한산성을 소재로 한 김훈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영상화한 , 2007년 미 의회 공개 청문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사죄결의안 통과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이용수 할머니의 가슴 아픈 실화를 모티브로 한 , 일제 강점기 일본 하시마 섬에 강제 동원된 800여 명의 조선인 참상을 다룬 , 3·1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본으로 가 항일운동에 매진했던 독립운동가 박열을 전면에 내세운 , 1986년 명성황후 시해범을 죽이고 사형선고를 받는 등 청년기의 김구 선생을 다룬 등 많은 영화가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다뤄 눈길을 끌었다. 가 121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 한국 영화로는 15번째 1000만 영화로 등극하는 등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다룬 실화 영화들이 흥행도 호조를 보였다. 올해 방송 드라마의 가장 큰 특징은 ·· 등 검사나 변호사, 재벌 등 권력과 자본의 탐욕과 비리를 다루거나 · 등 언론계를 조명한 작품들과 을 비롯한 갑질을 소재로 한 드라마들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거나 화제가 됐다는 점이다. 이들 드라마는 지도층의 부패가 심각하고 갑질이 심화하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줬다. 대중문화계의 큰손으로 등장한 20~40대 여성들의 절대적 지지로 영화와 드라마에서 남자 스타들이 압도적 흥행 성적을 거둔 것도 2017년 대중문화계를 지배한 트렌드 중 하나다. 121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송강호 주연의 , 718만 명이 본 현빈, 유해진 주연의 를 비롯해 ··· 등 올해 들어 흥행 상위를 차지하는 영화들이 한결같이 남자 주연 영화였다. 드라마 역시 마찬가지다. 케이블 TV 드라마 사상 최초로 20%대를 돌파한 공유 주연의 (tvN), 28% 시청률을 기록한 지성 주연의 (SBS), 20%대를 유지한 남궁민 주연의 (KBS2) 등 성공한 드라마 모두 남자 주연 작품이다. 대중의 관심이 높은 예능 프로그램은 (SBS), (MBC에브리원), (JTBC), (JTBC2), (JTBC), (OLIVE), (KBS1), (TV조선) 등 외국인 출연 예능과 (채널A), ·(tvN), ·(TV조선), ·(E채널), ···(SBS), (KBS2), (KBS드라마), (MBN) 등 연예인의 남편, 아내, 자녀, 부모 등이 출연한 연예인 가족 예능이 대세를 이뤘다. 또한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지 말고 지금의 삶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자는 ‘욜로(YOLO)’와 혼술·혼밥 등 급증하고 있는 ‘1인 가구’의 문화가 예능 키워드로 등장해 (SBS)에서부터 (MBN)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능 프로그램의 소재로 활용됐다. 2017년 대중음악계는 신세대 가수와 아이돌 그룹의 1970~1990년대 히트곡 리메이크 열풍이 강타했다. 양희은이 1991년에 불러 인기를 얻은 ‘가을 아침’과 1970년대 정미조가 불러 히트한 ‘개여울’이 올해 아이유의 노래로 재탄생해 음원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큰 인기를 얻었다. 아이유는 9월 발표한 리메이크 앨범 ‘꽃갈피 2’에서 정미조의 ‘개여울’, 소방차의 ‘어젯밤 이야기’, 김건모의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등 1970~1990년대 히트곡을 완성도 높게 리메이크해 큰 관심을 모았다. 걸 그룹 마마무의 솔라도 김도향의 ‘바보처럼 살았군요’, 여진의 ‘그리움만 쌓이네’, 해바라기의 ‘행복을 주는 사람’ 등을 리메이크한 앨범을 발표해 젊은층뿐만 아니라 50~60대 중장년층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올해 대중음악계를 관통한 리메이크 트렌드는 젊은 세대에게 과거의 명곡들을 소개하는 동시에 중장년층에게는 추억을 선물하는 효과가 높아 대중음악의 수용층을 확장하는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세대 간 이해의 접점을 확대했다. 1996년 H.O.T. 데뷔를 시작으로 젝스키스, S.E.S., 핑클 등 1990년대 중·후반 본격화한 아이돌 그룹 시대는 2000년대 들어 2PM, 슈퍼주니어, 원더걸스, 소녀시대 등 2세대 아이돌 그룹 중심으로 세대 교체가 됐다. 올해 들어 원더걸스, 씨스타 등 많은 아이돌 그룹이 해체되고 소녀시대의 멤버 서현이 탈퇴하는 등 2세대 아이돌 그룹들이 본격적으로 퇴장했다. 올해는 방탄소년단, 트와이스, 여자친구, 블랙핑크 등 2015년 전후로 데뷔한 3세대 아이돌 그룹이 국내 음악계를 평정하고 K팝 한류를 이끄는 주체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연예계에 안타까운 일도 많았다. 큰 사랑을 받던 스타들이 숨져 대중의 곁을 영원히 떠났다. KBS2 주말극 촬영을 끝낸 지 얼마 안 된 4월 9일 중견 스타 김영애가 췌장암으로 66년간의 삶을 마무리했다. 46년간 연기자 생활도 끝나는 순간이었다. “연기는 내게 산소이자 숨구멍 같은 의미예요. 배우가 아닌 나를 생각할 수가 없어요. 다음 생에 태어난다면 다시 배우를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천생 배우였던 김영애는 20세에 연기를 시작해 , , , , , , , 까지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정교한 연기력과 빼어난 캐릭터 창출력으로 시청자와 관객에게 감동을 줬다. 와 사극 등에서 보인 강렬한 카리스마 연기에서 영화 의 일상적 연기까지 스펙트럼 넓은 연기로 관객과 시청자에게 기쁨을 준 중견 배우 윤소정은 패혈증으로 6월 16일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73년의 삶 중 연기자로 살아온 세월이 55년에 이를 정도로 윤소정에게 있어 배우라는 직업은 삶의 전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57년 동안 연극무대에서, 스크린에서 그리고 TV 화면에서 빛나는 조연 연기와 사투리 연기로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던 중견 배우 김지영도 폐암으로 2월 19일 79년간의 삶을 마감했다. 2017년 10월 30일에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빼어난 연기를 선보이며 왕성한 활동을 펼친 김주혁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김주혁은 선 굵은 연기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김무생의 아들로 1998년 SBS 탤런트로 연예계에 데뷔한 뒤 드라마 , , , , 영화 , , 등 수많은 작품에 주연으로 나서 아버지를 능가하는 인기를 얻었다. 20년간의 배우생활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난 김주혁의 나이는 45세였다.
- 2017-12-11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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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퇴 후 인생, 드론과 함께 하늘에 맡겨볼까?
- 택시운전사를 선망하던 시대가 있었다. 차량의 증가를 운전자가 제대로 따라잡지 못하던 시절. 그때만 해도 운전면허증은 우월함의 상징이었다. 미래에도 그런 시대가 올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바로 최근 유행하는 드론 얘기다. 이제 드론은 사람을 나르고, 농기계로 쓰고, 짐을 배달하고, 군사용으로도 쓰인다. 현재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드론을 보면 자동차 문화가 시작되던 시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자동차도 처음 나왔을 땐 지금의 용도를 상상하지 못했다. 드론도 그렇다.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다변화하고 있다. 이런 급격한 성장은 시니어에게 어떤 기회를 제공할까. 드론을 정확히 정의하면 무선전파로 조종할 수 있는 무인항공기를 뜻한다. 드론 하면 떠올리게 되는, 프로펠러가 여러 개 달린 형태의 비행체 외에 정찰이나 지상목표물 공격 등 다양한 임무를 맡고 있는 군용 무인비행기도 드론에 속한다. 우리가 드론이라고 생각하는 비행체는 항공안전법상 무인비행장치에 속하는 무인멀티콥터다. 프로펠러가 여러 개 달려 멀티콥터라고 부르는데 장비에 따라 대개 4~6개의 프로펠러가 작동한다. 드론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 계기는 역시 기술 발전 때문이다. 과거 드론 형태의 원격조정 비행체는 제 몸 하나 띄우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늘로 날아올라도 조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원격조정 헬리콥터는 동호인 사이에서도 난이도가 최고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조종이 어렵다. 그러다 약 5년 전부터 드론이 일반인에게 보급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카메라를 거뜬히 싣고 날아올랐고, 방송용 헬리콥터에 사람이 타고 촬영한 것보다 떨림 없는 안정된 화면을 제공했다. 적재할 수 있는 무게도 늘고, 조종이 쉬워지면서 드론의 용도는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방제 조종사 성수기에 연소득 올려 대표적인 드론 관련 직종은 역시 영상이나 사진 촬영 분야와 연관이 있다. 이미 드론을 활용한 항공촬영 업체가 여러 곳 성업 중이다. 일반 방송촬영뿐만 아니라 기업 홍보용 영상, 지도제작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곳에서 쓰인다. 또 다른 유망 직종 분야는 농업. 그중에서도 드론을 활용한 농약 살포가 최근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농업용 드론 시장은 세계적으로도 급성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에서는 드론 조종사의 평균 연봉이 약 1억원에 이른다는 발표도 있었다. 상용 드론 시장의 세계 최강국으로 불리는 중국은 넓은 농토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일본은 농촌의 고령화에 대응하기 위해 드론 도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국내에서도 방제용 드론의 도입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2015년부터 농약살포용 드론을 ‘무인항공방제기’로 분류해 정부융자지원 대상 농기계로 등록시키고 있다. 아직은 중국산 업체가 시장을 선점하고 있지만 국산 업체들도 하나둘 뛰어들고 있다. 업계에선 드론을 이용한 수요가 늘면서 “3개월 일하면 1년 쉬어도 된다”는 말까지 나온다. 능숙한 드론 조종사는 월 소득이 300만~500만원 선으로 알려져 있다. 농약 살포시기가 정해져 있고, 아직은 공급보다 수요가 많다. 일부 지자체에선 공동구매 형식으로 지역 농민을 대신해 드론 방제업체와 일괄 계약하기도 한다. 산업용 드론은 12kg이 넘으면 자격증 소지자만 운용이 가능하다. 농가에서 정부 융자를 통해 드론을 구매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운용하려면 자격증을 따야 하는 등 쉽지 않다. 농약 살포에 드론 활용이 선호되는 데에는 시간 절약뿐만 아니라 그 효과도 한몫하기 때문이다. 농민 5~6명이 하루 종일 살포해야 하는 면적을 드론은 한 시간이면 방제한다. 게다가 사람이 뿌리는 방식은 농약이 비처럼 떨어져 농작물의 윗면만 도포가 되지만, 드론으로 방제할 경우 강한 바람으로 와류가 발생해 농약이 앞뒷면에 골고루 묻는다. 면적당 농약 사용량도 줄일 수 있어 토양 관리에도 유리하다. 국내에서 대표적 드론 개발 기업으로 알려진 바이로봇의 홍세화 이사는 “방제용 드론은 아직 모든 조정을 사람의 손으로 해야 하는 수준이지만, 현재 개발 중인 제품은 방제 지역의 위치나 면적을 사전에 입력하면 자동으로 농약이 살포되고, 살포된 양까지 빅데이터로 기록해서 농작물의 생육까지 관리할 수 있는 수준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바이로봇에선 완구용 드론 생산뿐만 아니라 어린이 대상의 드론 코딩 교육도 하고 있는데, 드론의 위치, 고도, 동선, 비행시간 등을 프로그래밍해서 드론 동작을 제어하는 것이다. 이런 코딩 방식이 산업용 드론에 적용되기 시작하면 방제 등 드론을 응용한 각종 작업이 간편해진다. 이 밖에도 드론은 사람 손이 미치지 못하는 여러 분야에 쓰인다. 한국산업기술진흥원은 드론 조종자를 미래 유망 직업으로, 한국고용정보원은 5년 내 부상할 새로운 직업으로 선정했을 정도. 군이나 경찰, 소방 등 공공기관에서 드론 운용 전문가 수요는 꾸준히 늘 것으로 예상된다. 수색이나 정찰, 구조 작업에 드론이 쓰이고 원자력 발전소 같은 주요 건축물 점검이나 교통 상황 분석 등에도 활용된다. 자격증 취득 비용은 300만원 선 기본적으로 완구나 경량 드론은 비행 가능 지역이라면 누구든 날릴 수 있다. 그러나 12kg이상의 무게가 나가는 드론은 초경량 비행장치 비행자격증명 중 무인회전익비행장치 자격증을 취득해야 한다. 14세 이상의 운전면허나 운전면허 취득이 가능한 수준의 신체검사증명이 있는 사람이면 지원할 수 있다. 또 국토교통부와 교통안전공단이 지정한 기관에서 20시간 이상 비행 경력을 쌓아야 한다. 파일럿의 숙련도를 인증받은 비행시간으로 구분하는 것과 비슷하다. 비행시간을 쌓기 위한 비행은 교관 입회 하에 휴일과 날씨가 안 좋은 날을 제외한 날 중 낮에만 가능하기 때문에 단기간에 획득하기는 어렵다. 비교적 시간 여유가 많은 시니어가 자격증 취득에 유리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격증 취득은 학과시험을 본 후 항공이론 구술과 실제 비행시험을 거쳐야 한다. 자격 취득을 위한 지정 교육기관은 항공교육훈련포털(www.kaa.atims.kr)을 통해 찾을 수 있다. 조종자격 취득 희망자는 포털을 통해 국내 모든 전문교육기관의 교육과정이나 교육기관에서 이수한 교육이력 및 증빙자료, 자격증명 취득 방법 등의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올해 자격을 획득한 인원은 지난 2월까지 총 1536명. 그간 전문교육기관이 부족해 배출 인원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국토교통부는 “각종 규제혁신, 조종교관 요건완화, 교육기관 설립지원 등을 통해 전문교육기관이 확대돼 지난해 교육수용 가능인원 994명에서 두 배가량인 1700명 이상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수강생이 부담해야 할 교육비는 기관마다 다르지만 국가자격증 과정은 약 300만원 내외다. 시니어 취미로도 안성맞춤 전문가들은 드론이 시니어에게 알맞은 분야 중 하나라고 강조한다. 직업이 아닌 취미로 즐길 수도 있고, 또 맘만 먹으면 충분히 수익 사업으로 활용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의미다. 한국드론교육협회 이재윤 대구시협회장은 “시니어들이 드론을 배우고 나면 집중력도 늘고 손주나 다른 가족에게 아직 늙지 않았음을 자랑하는 계기로도 삼는다”며 “드론 조종이 산책이나 운동을 유도하고, 치매예방 등 교육 외적인 효과도 있어 노인대학 등에서 학과개설을 준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그는 “드론은 잘 알려진 촬영이나 방제뿐만 아니라 드론의 유지 보수, 강사 등 다양한 직업 창출 효과가 기대되고 있으며, 조종교관자격 취득이나 숙련도를 확보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시니어에게 유리하다”고 말했다. 부산인적자원개발원과 함께 시니어드론기술창업스쿨을 운영했던 동의대학교 임환섭 교수도 “모집과정에서부터 시니어가 상당히 높은 관심을 보였고 결과도 성공적이었다”며 “드론과 관련한 창업에 성공한 분과 수료생들의 취업 소식을 접했는데, 보람과 함께 지속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느꼈다”고 밝혔다. 또 방제업계 관계자들은 만약 귀촌을 고려하고 있다면 지역 주민들의 인심을 얻는 수단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고 귀띔한다. 귀촌의 성공은 지역 주민들과 어떻게 관계하느냐에 달려 있는데, 드론 방제 기술이 있다면, 연고가 없거나 마을발전기금을 내놓지 않아도 환영받는 존재가 될 거라는 이야기였다.
- 2017-12-11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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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인생을 위해 노래하다, 아모르파티! 가수 김연자
- 한 시대를 풍미하고 아스라이 손 흔들며 사라졌던 대형 가수가 있었다. 화려한 드레스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와 1980년대 가요계를 주름잡던 가수, 바로 김연자(金蓮子·58)다. 오랜 시간 일본에서 ‘엔카(えんか)의 여왕’으로 군림하던 그녀. 한국으로 돌아와 조용히 활동하는가 싶더니 8년 만에 시대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트로트도 엔카도 아닌 강렬한 사운드의 댄스음악 이른바 EDM으로 말이다. 세대를 뛰어넘어 젊은이들의 마음까지 단숨에 사로잡은 김연자와의 만남. 수은등 불빛 아래를 지나 찬란한 인생을 다시금 맞이한 그녀는 이렇게 외친다. 아모르파티(Amor Fati!)!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고. 김연자는 몰라도 ‘아모르파티’는 안다 가수 김연자가 부른 ‘아모르파티’의 인기는 대단하다. 좋아하는 연령대도 어린이에서부터 시니어 세대까지 다양하다. TV는 말할 것도 없고 거리 곳곳에서 심심치 않게 ‘아모르파티’가 흘러나온다. 한 번 들으면 헤어 나올 수 없는 전자악기 리듬에 몸을 맡기다가 결국에는 가사의 매력에 더 빠져버리고 마는 노래가 ‘아모르파티’다. “이 곡을 쓴 작곡가 윤일상씨가 어떤 음악을 만들고 싶냐고 묻더라고요. 지금까지 내가 굴곡진 인생을 살았지만 이 모든 것이 앞으로 다가올 내 인생을 위해서 있는 거라고 말했습니다. 후회하지 않고 앞만 보고 살겠다는 ‘인생 찬가’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죠. 그렇게 탄생한 곡이 ‘아모르파티’입니다. 가사는 ‘철이와 미애’의 신철씨가 써줬어요. 아모르파티란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이라 하더군요.” ‘아모르파티’는 2013년 발표곡이다. 윤일상씨는 이 노래가 뮤직비디오를 만들어놓아야 할 대박곡이라고 예견했지만 지금과 같이 폭발적이지 않았다. 노래가 빠르다 보니 따라 부르기 힘들어 중년 팬들에게 어려운 곡이었다. 4년이란 시간이 흘러 이 곡의 매력 포인트를 찾아낸 이들은 중년 팬이 아닌 10대 팬들. 올해 TV의 한 음악 프로그램을 방청한 10대들이 김연자가 부르는 ‘아모르파티’를 듣고 SNS에 퍼트린 것. 신나고 모든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을 유행에 민감한 젊은이들이 찾아내 그들의 문화로 김연자와 ‘아모르파티’를 끌어당긴 것이다. 음악 순위 역주행 신화는 이렇게 탄생했다. “어제 무주 구천동에서 노래를 하고 무대에서 내려왔는데 학생들이 ‘꺅! 언니!’ 하고 난리가 났어요. 저인 줄 몰랐는데 시선이 저를 향하고 있더라고요. 어머니들이 환호해 주시는 건 있었어도 이런 기분 처음이죠.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거든요. 근데 어쩜 그렇게 꺅 하고 소리를 잘 내요(웃음)? 육십을 바라보는 나한테 언니래요. 근데 너무 좋더라고요. 새로운 행복감에 젖어 있어요.” 국보급 가수 한류 열풍 초석을 다지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하여 김연자의 인기는 톱스타란 말로 부족했다. TV만 틀면 안 나오는 곳이 없었다. 가요 프로그램이며 합동 공연이며 대미는 늘 김연자 차지.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간드러지면서도 폭발적인 목소리는 국보급이었다. 그러던 그녀가 홀연히 사라졌다. 너무 갑작스러운 행보. 대스타가 한순간에 떠나는 일이 있었던가. “사라진 게 아니에요. 시댁이 일본이었고, 속으로 늘 그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때 우리나라에서 계속 일이 잘되니까 갈 기회를 놓치고 있었던 거죠. 마침 무슨 사정인지 당시 매니저가 일본에 가도 된다고 했어요. 이때다 싶어 얼른 간 거죠. 그런데 그때가 일본에 처음 간 것은 아니었어요.” 이발소를 하던 아버지 손에 이끌려 열네 살 어린 나이에 가요계에 데뷔한 김연자는 일본 음반회사 오디션을 통해 일본에 진출할 기회를 얻었다. 그때 나이가 열여덟이었다. “제가 운이 좋은지 주위 사람들 도움으로 좋은 기획사에 들어갔어요. 월급이 꽤 괜찮았던 곳입니다. 25만엔을 벌면 집으로 20만엔을 보냈어요. 엔화 가치가 높을 때라 그런지 한국에 갈 때마다 집이 바뀌더라고요.” 김포공항으로 가족이 마중 나오지 않으면 집을 찾아갈 수 없을 정도였다. 마지막 일본 생활을 접고 들어갔을 때는 작은 연립주택을 장만했다. 일본에서 보낸 돈을 어머니께서 열심히 모아주신 덕이다. “3년 동안의 일본 생활이 성공적이지 않았지만 제 인생에는 많은 도움이 됐어요. 실패의 원인을 생각해봤는데 일본을 갈 때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더라고요. 진짜 몸만 갔죠. 일본에 다시 가려면 일본에 대해서 알아야겠다 싶어서 일본어와 일본 문화, 한문 등을 따로 공부했어요. 스물아홉 살에 다시 갔을 때는 마음이 참 편했어요.” 한류의 원조, 20년 생활의 막을 열다 서울올림픽 찬가였던 ‘아침의 나라에서’를 일본어로 번안해 부르며 자연스럽게 일본 음악계에 진출했다. 각종 공연이며 TV며 행사며 한국에서는 대형 가수였지만 신인의 자세로 매사 임했다. 언어의 장벽도 내려앉았다. 일본인들도 감탄하면서 그녀의 노력에 박수를 보냈고 응원해줬다. “다 내려놓고 마음만은 스타라는 생각으로 갔어요. 캠페인에도 나가고요, 일본 신인들하고 똑같이 했죠.” 유독 공연 무대가 많은 일본에서는 노래 가사를 완벽하게 외우는 것만이 살 길이었다. 엔카 가수이지만 탱고, 블루스, 발라드 등 다양한 노래를 배우고 관객 앞에서 선보이는 것이 일상이었다. 무대에서 최소 20곡은 소화해야 하는 강행군. 한국어도 아니고 일본어로 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솔직히 어려운 일이었다. “매년 가을에 3400석 규모의 NHK홀에서 콘서트를 했어요. 공연을 위해서 여름에는 계속 노래 연습을 했어요. 가끔 쉴 때는 집 앞 공원으로 반려견들을 데리고 나가 산책하면서 노래 가사도 외우고 그랬어요. 사람들이 없으면 노래 연습을 하느라 중얼중얼… 그때 당시 저희 집에 많을 때는 반려견이 다섯 마리도 있었는데 사람들이 저를 얼마나 이상하게 생각했겠어요(웃음). 일본에서의 여름은 그렇게 보냈습니다.” 나도 뮤지컬 배우였다! 일본에서의 다양한 활동 이야기를 하다 보니 뮤지컬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자연스럽게 김연자의 뮤지컬 도전기로 이어졌다. “니나가와 유키오(1935~2016)라는 유명한 연출가가 계셨는데 제 목소리가 좋다고 불러주셨어요. 라는 작품에서 집시 역할을 맡았어요. 연기 진짜 어렵더라고요. 노래는 5절까지 이어져도 하나도 안 잊어버리는데 대사는 맨날 까먹는 거예요(웃음).” 역시 김연자의 이름에 걸맞게 개런티도 주연배우 다음으로 많이 받았다고. 그런데 개런티로 받은 돈을 의상비로 다 써버렸다는 톱스타 김연자. “사실 말이 좋아 주인공 다음이지 뮤지컬 한 달 하고 받은 개런티가 제가 노래 하루 불러서 받는 개런티에도 못 미쳤어요. 원래 의상팀에서 의상을 다 준비해주기는 했는데 너무 값싸 보이는 거예요. 역할이 집시이지만 밍크도 가짜고, 자존심이 너무 상했어요. 그래서 선생님께 제 옷으로 다 하겠다고 허락받고 따로 준비했어요. 그랬더니 개런티가 그렇게 없어지더군요(웃음).” 동경과 오사카에서 공연하는 동안 동생들도 공연을 관람하러 왔다고. “나 같지가 않았나봐요. 저는 노래 부를 때 외에는 저 같지가 않아요. 다른 거 하면 작아 보이고 불안해 보이고요. 아, 연기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구나. 그때 알았죠.” 단 한 번의 배우 체험 뒤 연기 분야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일본에서 한국 가수 그리고 한국 사람 지금 젊은이들에게는 생소하겠지만 김연자가 일본으로 무대를 옮겼을 때는 일본 문화가 개방되기 전이었다. 문화·정치적으로 냉랭하던 시절을 버티고 이겨내 엔카 여왕의 자리에 앉은 김연자. 결코 쉬운 일도 아니었고 모두에게 허락된 일도 아니었다. 처음보다 마음이 편했다지만 한국인으로서 막중한 책임감은 물론이고 숱한 편견과 맞서야 했다. “제가 그냥 보통 가수였다면 진작 문제 일으키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거예요.” 한창 일본에서 활동할 때 일이 힘들면 여권을 들고 길을 나서기도 했다는 충격 발언. “한국에 가려고 공항으로 갈 택시를 잡는 거죠(웃음). 그런데 살던 동네가 시내와 너무 떨어져서 택시가 안 오는 거예요. 그러면 택시 기다리다 생각을 하는 거죠. 가수 김연자에 대한 것은 참겠는데 ‘한국 가수’ 김연자가 뭘 잘못했다는 기사는 견디기 힘들더라고요. 내가 한국으로 가버리면 이런저런 매스컴에서 ‘한국 가수’가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떠들어댈 것이 뻔하잖아요. 한국 사람으로서 어떤 부정적인 말 한마디도 듣기 싫었어요.” 길에 서서 망설였던 적이 몇 번인지 모른다 했다. 그때마다 다음 날 신문에 올라갈 지독한 기사 제목이 떠올랐다. ‘한국 가수 김연자가 스케줄 펑크 내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래, 우리나라를 힘들게 하면 안 되겠지. 그러고는 마음 다잡고 집으로 돌아갔어요. 도망가고 싶을 때마다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내 감정을 억누른 것 같아요. 그렇게 20년을 일본에서 생활했어요.” 아버지 때문에 한국행을 결심하다 “우리 아버지는 말이 안 통했어요.” 이렇게 말하면서도 아련하게 말끝이 잦아든다. 광주에서 이발소를 하시던 아버지에게 노래 잘 부르는 딸은 그저 자랑이었다. 아버지의 “야! 너 서울 가서 가수 돼!” 한마디에 무대에 올라갔다가 아직도 그 위에서 내려올 줄 모르는 삶을 살고 있다. “아버지 때문에 가수가 된 거죠. 감사하죠. 가수 될 운명을 알아보시고 어린 시절에 빨리 뭔가를 겪게 해주셨죠. 한국 복귀도 아버지 때문이었고요.” 8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하지만 가족들은 바쁜 김연자에게 이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돌아가시고 열흘이 지난 다음에 엄마가 전화를 하셨어요. 스케줄이 있는지 물으셔서 없다고 했더니 그제야 아버지가 떠났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날 일본의 작은 고깃집에 앉아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아버지도 공연 보러 일본에 많이 오셨었죠.” 아버지가 타계한 후 한국으로 돌아온 김연자는 한국과 일본을 동시에 오가며 활동 중이다. 그사이 재일교포 남편과는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하고 헤어졌다. 김연자가 일본에서 거액의 돈을 벌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남겨진 재산은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매니저 겸 밴드 단장이던 전 남편을 평생 동반자로 생각했기에 쓰지 않았던 계약서가 문제였다. 일본에서는 계약서를 쓰지 않은 김연자를 오히려 더 이상하게 생각했다. 일본 팬들과 연예 관계자들을 마주하면서 사정을 얘기했고 조금씩 김연자의 말에 귀기울여주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전 남편과 지낸 세월이 아깝지 않은지 물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거액은 숫자일 뿐이죠. 제 눈에 현금이 오가는 것도 아니고요. 사실 제가 후회를 별로 안 해요. 이 순간이 제일 중요해요. 지금이 이 순간이 있어야 내일도 있잖아요. 난 항상 그렇게 살기 때문에. 어떨 때는 좋은 기억이건 나쁜 기억이건 다 잊어버려요(웃음). 단념도 빠르고 꿈도 빨리 꾸고. 그런 거 없어요. 그리고 저는 부자는 아니지만 하루 삼시 세끼 잘 챙겨먹고 사니까 괜찮아요. 나름 부동산도 있고 집도 있어요.” 어렸을 때 많이 의지했던 전 남편에 대해 그녀는 남은 감정이 없는 듯했다. 오히려 고마운 마음을 내보였다. “솔직히 저나 전 남편이나 0에서 시작했죠. 오랜 시간 정신적으로 의지했어요. 일본 연예계에 대해서도 그 사람이 전부 알려줬어요. 서로 상부상조한 거죠 뭐.” 미국에 셰어가 있다면 한국에는 김연자! “어머니가 오래전 저에 관한 점을 보셨다는데 제가 일흔까지 노래를 부른대요.” 처음에 그 얘기를 우습게 들었는데 이제 슬슬 현실이 돼가는 느낌이 밀려온다고. 하고 싶은 공연만 하고 여유롭게 사는 것을 꿈꿨는데 젊은 가수들하고 똑같이 뛰고 있어 자기 모습이 아닌 것 같으면서도 좋다. 김연자와 인터뷰를 마치고 미국 가수 셰어(Cher)가 떠올랐다. 1960년대까지 포크 가수로 활약하던 셰어. 한참을 배우로 지내더니 1999년 ‘빌리브(Believe)’란 음악을 선보이며 전 세계를 전자 음악 열풍에 빠뜨렸다. 올해 71세인 셰어는 지난 5월 빌보드 뮤직 어워드에서 빌보드 아이콘 어워드를 수상했다. 김연자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성인 팬을 상대로 노래 부르다 어느 날 갑자기 세대를 뛰어넘어 EDM 열풍에 불을 지폈다. 71세의 셰어 언니도 망사옷 입고 무대를 누비고 있으니 한국 ‘EDM 대모’, ‘연자방아’로 거듭난 70세 김연자의 무대도 기대한다.
- 2017-12-04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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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장 핫!했던 신조어 BEST 5
- 온라인상에서 유행하던 신조어를 이제는 일상생활에서도 어렵지 않게 사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글 파괴, 문법 파괴라는 지적도 받지만, 시대상을 반영하고 문화를 나타내는 표현도 제법 있다. 신조어 이해는 젊은 세대와 자연스러운 대화를 위해 필요해 보인다. 2017년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신조어 5개를 꼽아봤다. 01. 넵병: 메신저로 오는 어떠한 제안이나 요청에 대해 ‘네’라고 답변해야만 하는 직장인들이 겪는 병. 이를 ‘넵병’으로 부르기 시작하면서 유행했다. ‘넵병’은 넵, 네, 넵!, 네에, 네넵 등 다양한 형태의 대답을 포함하는데 이 중 몇 가지 유형을 살펴보자. 넵: 가장 무난한 대답으로 ‘우선 알겠습니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넵!: 충성충성충성! 느낌표를 더해 강력한 인상을 준다. 네?: ‘다시 말해봐라’ 즉 싸우자는 의미다. 네에: 모두가 ‘넵’이라 할 때 ‘네에’를 사용함으로써 단톡방의 분위기를 풀어준다. 넵ㅋ: ‘이 정돈 해줄 수 있다’ 하지만 요청 사항이 많아지면 ‘네?’로 바뀌는 건 한순간. 넵^^: 애써 친절함을 강조하는 듯한 대답. ‘나는 당신을 해치지 않습니다’라는 점을 어필한다. 넵~~~: ‘알았으니 그만하라’는 뜻이다. 넵;;;: ‘뭐라는 거야’의 의미로 말 같지도 않은 지시를 받았을 때의 리액션이다. 02. 급식체: 급식을 먹는 학생(초·중·고)들이 쓰는 문체로 허세, 자문자답, 논리성을 상실한 문장이 특징이다. 오지고요 지리고요: 오달지다, 생리현상을 참지 못할 정도로 놀랍고 대단하다는 의미의 감탄사다. ㅇㅈ? 어 인정: ‘인정’의 초성으로 다른 사람의 동의를 구할 때 사용하며 주로 자문자답식으로 이루어진다. 동일한 의미로 ‘용비? 어 천가’, ‘동의? 어 보감’, ‘오징? 어 볶음’ 등이 있다. ㄹㅇ: ‘레알’의 초성. ‘real’을 발음대로 부르다가 이것마저 줄여서 초성만 사용한다. ~각: 온라인 게임에서 나온 용어로 ~할 것 같다, ~할 상황이나 상태를 뜻한다. 03. 혼-: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6년 우리나라 1인 가구가 520만 가구를 넘었다. 혼자 즐기면서 사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관련된 신조어도 생겨났다. 혼자 밥을 먹는 혼밥, 술을 먹는 혼술, 영화를 보는 혼영, 여행을 가는 혼행 등이 대표적인 예다. 04. 야민정음: 눈에 보이는 글자를 모양이 비슷한 다른 글자로 바꿔서 사용하는 게 특징이다. 예를 들면 대통령을 ‘머통령’으로 표현하는데 ‘ㄷ’과 ‘ㅐ’를 바짝 붙여서 보면 마치 ‘ㅁ’과 ‘ㅓ’처럼 보인다고 해서 ‘머’ 자로 바꿔 쓴다. 아래 단어들이 대표적 사례다. 댕댕이 = 멍멍이 팡주팡역시 = 광주광역시 띵곡 = 명곡 재석 = 유재석 머통령 = 대통령 05. 아무 말 대잔치: 말 그대로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상황을 뜻한다. 앞뒤 말의 연결고리가 없고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말들을 쏟아놓는다. 슬럼프가 왔을 땐 무조건 자괴감에 빠질 게 아니라 잠은 충분히 잤는지 스트레스 받는 일은 없었는지 밥은 먹었는지 치킨은 먹었는지 연어는 먹었는지 소고기는 먹었는지 삼겹살은 먹었는지 체크해봐야 한다. 그리고 저걸 다 먹었다면 부럽네요.
- 2017-12-04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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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회가 만난 CEO 스토리] ‘미스터 콜라보’ 윤은기 한국협업진흥협회 회장
- 세상에 이기지 못할 것이 운발이라고 한다. 운칠기삼(運七技三), 운이 70%라면 재능과 노력은 30%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심지어는 운11. 기 마이너스 1이란 이야기조차 있다. 운이 좋아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윤은기(66) 한국협업진흥협회장은 그 답을 협조와 협업에서 찾는다. 그는 개인이나 기업이나 공생, 상생하는 것이 운을 좋게 만들고, 지속가능경영을 가능케 한다고 말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가 아니라 ‘남을 돕는 자’를 돕는다”가 그의 신조다. 남과 나눠야 운이 따른다. 운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라기보다 후천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다. 별명이 ‘미스터 콜라보(Mr. collabo)’인 그를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윤 회장께선 일찍이 미래의 물결, 정보화사회를 이야기하는 등 미래 트렌드를 남보다 앞서 예측하시고 강의해왔습니다. 그런데 운 이야기를 강조하시는 게 좀 모순 같습니다. “정보화를 넘어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운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내가 말하는 운이란 덕행의 인과법칙입니다. 지극히 과학적입니다(웃음). 남을 돕지 않는 자에겐 운이 따르지 않아요. 아무리 똑똑하고 잘난 사람도 남이 도와주지 않거나 방해를 하면 성과를 낼 수 없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노력뿐만 아니라 남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는 점입니다. 귀인을 만나야 운이 좋아질 수 있습니다. 귀인을 만나려면 먼저 인간 존중,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최근 를 쓴 일본의 원로 변호사 니시나카 쓰토무도 국내 언론 인터뷰에서 ‘운=도덕과학’이라고 풀이한 바 있다. 니시나카 변호사는 “도덕적 과실이 운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하다.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라도 갚지 않으면 운이 나빠진다. 은혜를 받기만 하면 ‘도덕적 부채’로 쌓인다”고 말했다. 도덕적 선행과 나눔이 운을 불러온다면, 도덕적 부채와 독과점은 금전적 부채보다도 더 큰 불운을 초래한다는 지적이다.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 자보다 남을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은 과학적 근거가 있다. 남을 돕는 봉사를 하고 난 뒤에는 거의 모든 경우 심리적 포만감, 즉 ‘하이(high)’ 상태가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지속된다. 의학적으로도 혈압과 콜레스테롤 수치가 현저히 낮아지고 엔도르핀이 정상치의 3배 이상 분비되어 몸과 마음에 활력이 넘친다. 이른바 마더 테레사 효과다. 기업의 사회적 공헌(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리더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개인의 사회적 공헌(PSR, Personal Social Responsibility) 실행은 이타적이라기보다는 운을 불러들이는 이기적 행위인 셈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말은 많이 합니다. 반면에 일반 개인의 사회적 공헌(PSR)은 그만큼 강조되진 않지요. “‘사회 공헌, 기부’ 하면 거대 담론으로만 생각합니다. 나중에 여유 생길 때 기부한다고 미뤄두면 평생 하기 힘듭니다. 기부는 물질적 여유가 아니라 평상시 태도, 습관입니다. 저는 재능기부 차원에서 군에 강의를 갑니다. 또 공군 순직 조종사 유자녀 장학금을 매년 1000만원씩 지원하는 일을 7년째 해오고 있습니다. 기부를 꾸준히 하는 것은 남을 위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 행복하게 사는 비결입니다.” 그는 “돈이 많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앰뷸런스를 이용하며 운전기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소개했다. “부자들은 앰뷸런스에 시체가 실리는 순간부터 가족이 싸우는 경우가 많다는 거예요. 그렇게 산다면 부자인들 무슨 삶의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는 있어야 나누는 것이 아니고 나누어야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부자는 돈이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을 나누는 사람입니다.” 1년에 기부금 1000만원을 약정하고 꾸준히 하는 것, 쉬운 일은 아닌데요. 사모님도 처음부터 동의하셨는지 살짝 궁금합니다. “저는 집사람을 설득해야 할 때 집에서는 절대 말을 꺼내지 않습니다(하하).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나 술집에 데려가 이야기를 시작하지요. ‘사는 게 뭐 별것 있나, 잘사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등등으로요. 먼저 길을 닦고, 마음을 촉촉하게 적신 뒤 본론을 꺼내지요. ‘우리 여행 한 번 덜 가고, 골프 한 번 덜 치자, 소비를 조금 줄이더라도 좋은 일을 해보자, 돕고 사는 게 재미지, 혼자 잘사는 게 무슨 재미인가’ 하고요. 똑같은 이야기라도 반응이 전혀 달라요. 집사람이야 콩나물값 깎아가면서 알뜰살뜰 살림하는 전업주부인데 처음엔 좋아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지금은 저보다 더 기부에 적극적이랍니다.” 윤 회장은 스스로의 전공을 심경학, 즉 심리경영학(그는 학부는 심리학, 석·박사는 경영학을 전공했다)이라고 말하곤 한다. 심리를 경영할 줄 안다는 의미에서다. 그는 “정의파, 대의명분파들이 설득에 실패하고 저항에 부딪히는 이유는 단 하나다. ‘옳으냐’로 ‘좋으냐’를 무시하거나 압박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진정한 소통은 ‘옳다’를 넘어, 마음속으로 ‘좋다’고까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이성보다 감성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베스트셀러 비결도 사모님과의 심경학 소통 덕분이라면서요. “하하. 네. 제 책의 첫 독자, 안테나 마켓은 집사람입니다. 작가에겐 책 내용이 정리돼 영감이 오는 ‘유레카’의 순간이 있습니다. 한밤중이라도 깨워 한바탕 책 내용을 설명하지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심드렁해하면 책의 콘셉트 혹은 틀을 바꿉니다. 베스트셀러가 된 책은 대부분 집사람이 한밤중 잠결에 들어도 흥미롭게 들은 책, 말 된다고 집사람이 동의를 표한 책이었습니다(웃음).이번 협업 책도 그렇고요.” 진정한 소통은 같은 세대, 같은 수준의 말을 쓰는 사람뿐 아니라 이질적 그룹의 사람과 통하는 것이다. 그의 강의가 폭넓은 호응을 얻는 것도 그 덕분이다. 이장우 브랜드마케팅그룹 회장, 차동엽 신부, 장용동 목사 등 숱한 명사들이 윤 회장의 강의를 ‘내 인생에 영향을 준 명강의’로 꼽는 것도 소통력 때문이다. 윤 회장께서 살아오시면서 겪은 가장 큰 고비는 무엇인가요. “1980년도에 발간된 앨빈 토플러의 을 읽고 우리나라가 살 길은 정보화사회에 빨리 도전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갖게 됐습니다. 잘 다니던 종합무역상사에 사표를 내고 1983년 여의도에 정보전략연구소를 차렸는데 2년 만에 퇴직금까지 모두 까먹고 엄청난 부채를 지게 된 거예요. 하루가 지나면 부채는 늘고 철수하자니 빚 감당을 못하겠고. 그때가 내 인생의 최대 위기였습니다. 마침 1985년 앨빈 토플러가 방한해 붐이 일어나면서 극적으로 위기를 벗어나게 됐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은 세상 모든 일은 반드시 때가 있다는 거였습니다. 너무 늦어도 안 되지만 너무 빨라도 안 된다는 겁니다. 이후, 무슨 일이든 최적의 타이밍을 찾아내려고 심사숙고했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아이디어가 생기면 자신감이 넘쳐 성급하게 뛰어드는데 그러면 실패하기 십상이지요.”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 칼럼니스트로 골프와 경영을 접목한 글로 인기를 끄셨지요. “우리 사회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치고 저랑 골프를 치지 않은 사람은 드물지요. 골프를 치면서 인생의 깊은 내공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글로 써본 것이지요. 특히 김종필 전 총리랑 골프를 치면서 들은 인생 허업(虛業) 이야기가 제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정치는 허업이야. 잘났다고 하는 저 사람(정치인)들이 하는 일이 뭐가 있어? 온갖 폼은 다 잡지만 남는 게 뭐 있어? 정치는 자기들끼리 싸우다 다 잃는 거야. 제일 어리석은 직업이 정치야’라고 허무하게 말씀하신 게 기억에 남아요.” 인생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분께 그런 이야기를 들었기에 허명(虛名), 허업(虛業)에 대한 내려놓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지나치게 욕심을 많이 부리면 반드시 터지거나 넘어지게 돼 있다. 윤 회장은 인생의 욕심을 풍선과 계단오르기에 비유해 설명한다. 계단을 하나씩 올라가면 문제가 없지만 한꺼번에 많이 오르려 하면 반드시 고꾸라지는 게 인생의 법칙이다. 풍선도 마찬가지다. 있는 힘껏 풍선을 끝까지 불 수는 있지만 그러다가 터질 수도 있다. 그래서 80~90% 정도만 불고 남겨둬야 한다. 너무 빵빵하게 불면 언제 터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힘을, 마음을 내려놓아야 하는 이유다. 탈속의 이야기만 했네요. 세상 이야기로 돌아와 볼까요. 정보화사회, 협업 등 늘 기업 경영의 화두를 먼저 설정, 새바람을 일으키셨습니다. 또 시(時)테크, 골드칼라 등 시사용어를 선도해 유행시키셨는데요. 그 촉(觸)의 비결이 무엇인지요. “지도자라는 것이 무슨 의미겠습니까. 선지자, 선견, 먼저 보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지도자는 지도를 가진 사람입니다. 즉 방향성을 제시하는 게 중요합니다. 청년기에 군에서 훌륭한 리더를 만나 생각의 틀을 다진 게 제겐 큰 도움이 됐습니다. 청년 장교(중위) 때 투스타 김동호 장군의 부관을 하다 보니 엄청난 용량의 공부가 필요했습니다. 인생의 한창때 존경할 만한 롤모델을 만나는 것은 큰 운입니다. 책 100권, 아니 1000권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칩니다.” 책 에서 귀인효과를 말씀하시는데요. 김동호 장군이 윤 회장님의 귀인이셨나보군요. “맞습니다. 김 장군은 영어, 일어 등 외국어 실력도 뛰어나시고, 유도, 검도 유단자에다 특히 인품이 뛰어난 분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지덕체, 문무를 겸비하신 분이었습니다. 김 장군이 면접하는 모습을 보고 단번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제 실력을 묻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이력, 종교, 꿈을 들려주시며 리더로서 이렇게 노력하겠다고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겁니다. 당시 제 주변 동료 장교들은 퇴근 후 취직 공부를 해야 한다며 24시간 근무해야 하는 부관을 기피했어요. 저는 퇴근 후 두 시간 공부보다 이분을 모시는 게 훨씬 큰 공부가 되겠다는 느낌이 한 번에 오더군요. 존경받는 것도 기쁘지만, 존경하는 사람을 가까이 두는 것이 더 기쁜 일입니다.” 윤 회장은 그 후 4년간을 한결같이 김 장군을 곁에서 ‘모셨다’. 제대하는 토요일, 오후 3시까지 초과 근무를 자청한 것은 초급 장교 중 전무후무해 공군 본부에서 화제가 될 정도였다. 윤 회장은 김 장군과의 인연을 40년째 이어오고 있다. 지금도 1년에 두세 차례씩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고 예전 어록과 교훈을 같이 추억하며 이야기꽃을 피우곤 한다. 김 장군도 훌륭하시지만 그분을 한눈에 알아본 윤 회장님도 대단합니다. 더구나 20대 중반의 청년 장교 때요. “그런가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알아보는 용인술도 중요하지만,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알아보는 ‘역용인술’도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롤모델을 만나고 싶어 하지만 스스로 찾아보려고 노력하진 않거든요. 존경하는 사람이 없으면 반쪽 인생이에요. 한 번도 사랑해보지 못하고 죽는 것보다 더 불행하고 불쌍한 삶이지요. 어려운 의사결정을 할 때 ‘김 장군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자기객관화가 되면서 답이 보여요. 존경할 대상이 생기면 상대의 장점 DNA가 보이고 배워야 할 사항이 쏙쏙 들어와요. 존경하는 사람을 가지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지요. “앞으로 10년 정도는 우리나라 모든 영역, 모든 분야에 협업문화를 확산시키는 일에 매진할 계획입니다. 그 후에는 청소년 시절부터 꿈이었던 소설가로 데뷔하고 싶습니다. 소설은 현실에서는 추진할 수 없는 이상향을 마음껏 그릴 수 있으니까요. 제가 존경하는 소설가 김주영 선생님도 수시로 만나고 있고 최근에는 김홍신 선생님도 몇 번 만났습니다. 평생 동안 경험한 일들과 상상했던 일들을 융합시켜 멋진 소설을 쓰는 게 내 인생의 마지막 직업이 될 겁니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 2017-11-29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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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말 패션, 내 파티 룩의 비밀
- 부르는 곳도, 갈 곳도, 챙겨야 할 날도 많은 한 해의 마지막 한 달. 어떤 자리에서도 당신을 초라하게 만들지 않을 연말 패션 전략을 준비해봤다. ‘옷장 파먹기’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음식문화가 있다. 특별한 날 고가의 화려한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대신, 자신의 집 냉장고에서 먹다 남은 재료를 꺼내 근사한 음식을 완성한다. 일명 ‘냉장고 파먹기’라 불리는 이 식문화가 패션에도 전이되고 있다. 즉 이젠 무엇을 입는가보다는 어떻게 입는가가 더 중요한 시대라는 얘기. 지금 줄줄이 소시지처럼 연이어 잡혀 있는 연말 모임을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건 쇼핑이 아니라 당신의 옷장을 탐색하는 일이다. 만일 여성들끼리의 모임이라면 좀 더 튀는 스타일로, 부부 동반이라면 커플 분위기를 맞춘 격식 있는 룩이 어울린다. 전자의 모임에는 옷장 속에서 가장 손이 덜 탄 옷을 골라보자. 평소에 잘 입지 못했던 옷을 이번 연말 모임에서 ‘데뷔’시키자. 분명 안 입은 이유는 화려하거나, 불편하거나(대부분 사이즈에 관한 문제일 터)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모임에서는 튀어도 좋고, 조금 타이트해도 좋다. 평소의 나와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이니. 이번 시즌 트렌드 중 하나인 ‘원 컬러’ 스타일링에 도전해봐도 좋고, 믹스 매치로 패션에 재미를 더해봐도 좋을 듯. 영국 여왕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톤의 컬러로 통일해서 입으면 별다른 액세서리 없이도 눈에 띈다. 이때 12색 크레파스 같은 원색보다는 파우더리 핑크, 다크 그레이, 스카이 블루같이 ‘중간 컬러’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믹스 매치의 경우에도 캐주얼한 원피스에 포멀한 재킷을 더한다든지, 반듯한 화이트 셔츠에 화려한 디테일의 스커트를 매치한다든지 아이템들 사이에 온도 차이를 두어 지루하지 않게 룩을 완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포멀한 자리에는 스커트’라는 공식을 머리에서 지우고 팬츠에 눈을 돌려보자. 연말 시상식에 블랙 슈트 차림으로 등장한 김혜수를 기억하는가. 모두들 여성스럽게 입을 때, 오히려 매니시한 팬츠 슈트로 차이를 두는 것. 이것이 고수의 전략이다. 남자의 경우에는 터틀넥이나 컬러감 있는 스웨터를 이용하자. 나이 불문하고 터틀넥은 여자들을 설레게 한다. 머릿속에 콜린 퍼스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그의 시그니처 룩이기도 한 블랙 터틀넥과 속에 곰돌이 스웨터를 입은 모습이 자동으로 그려질 것이다. 그가 여자들이 꼽는 지구에서 가장 멋진 남자 중 한 명이란 사실에는 이 옷차림이 8할의 역할을 했다. 연말 패션에서 가장 중요한 건 모임의 성격을 반영한 룩이다. 일찍이 파티 문화가 발달한 서양에서는 파티 초대장에 드레스 코드를 표시한다. 예컨대, ‘블랙 타이’나 ‘포멀’이라고 적혀 있으면 턱시도에 보타이 차림이나, 정장 슈트를 입으라는 것이고, ‘화이트 타이’라고 표시되어 있으면(하얀색 타이를 매라는 것이 아니라) 오후 5시 이후의 예복인 연미복을 입으라는 뜻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이런 드레스 코드를 자주 지명한다. 만일 당신의 파티 초대장에 드레스 코드가 표시되어 있다면 그 의미를 잘 파악해서 입자. 너와 나의 연결고리, 커플 패션 부부 동반으로 참석하는 모임(특히 회사 모임)에는 단정하고 우아한 커플 룩을 연출하자. 이때는 옷의 디자인만큼이나 소재도 중요하다. 겨울 옷, 특히 포멀한 룩에서 고급스러운 소재는 생명이나 다름없다. ‘조명발’ 제대로 받는 벨벳, 자카드, 실크 같은 소재를 활용하자. 그리고 부부 사이에 연결고리를 만들자. 대놓고 커플 룩을 연출하기보다는 남편의 양말 컬러와 아내의 스카프 컬러를 맞춘다든지, 같은 소재의 아우터를 입는다든지, 작지만 요란스럽지 않게 커플 룩을 보여주는 것이다. 패션의 꽃, 액세서리 앞서 얘기했듯이 연말 모임을 위해 새 옷을 살 필요는 없다. 모임 룩에서 중요한 건 옷보다는 액세서리 연출이다. 포멀한 옷차림에서 액세서리의 역할은 더욱 커진다. 진주로 된 액세서리는 언제나 평균 이상의 멋을 내고, 화려한 스톤이 박힌 브로치는 이때가 아니면 옷장 밖으로 나오기 힘들다.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 가장 이슈가 되는 패션은 영국 전통 브랜드 버버리 프로섬의 패션쇼에서 선보인 브로치 스타일링 법이다. 가슴 한쪽을 가득 채운 빅 사이즈의 브로치(혹은 작은 브로치를 여러 개 레이어드한다)는 힘 없는 옷 혹은 주름진 얼굴로 갈 시선을 브로치로 집중하게 만든다. 평범한 니트에도 단번에 생생한 생명력을 선물하는 것이 브로치의 힘이다. 남자라면 보타이나 서스펜더, 모자 같은 액세서리에 눈을 돌려보자. 출근복과 파티 룩 사이에 쉼표를 찍어줄 아이템들이다. 연말 모임을 위한 메이크업 연말 모임 룩은 대부분 블랙을 바탕으로 하기 쉽다. 이때 메이크업은 평범한 룩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연말에는 뷰티 브랜드마다 ‘홀리데이 컬렉션’을 선보인다. 과거에는 컬러에 집중했다면 최근에는 ‘질감’이 중요하다. 어깨나 목 혹은 눈 부위에 화려한 질감의 메이크업을 더해주면 컬러 없이도 화려하게 만들어준다. 립의 경우는 반대로 벨벳처럼 부드러운 질감의 제품이 트렌드다. 얼굴 위의 컬러를 줄였다면, 대신 손끝에 힘을 주자. 펄이 더해진 네일은 다이아몬드보다 당신의 손을 더 빛나게 해줄 것이다.
- 2017-11-29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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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미 계발, 자기 경험에 덧칠하기
- 은퇴한 시니어의 가장 큰 자산은 시간이다. 시간 부자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이 많아도 일상이 무료하다면 고통의 순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장수도 축복이 아니고 재앙으로 다가온다.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면 여가를 즐기는 삶으로 바꿔야 한다. 그 방법의 하나로 취미활동을 들 수 있다. 취미가 필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다. 필자는 손쉽게 취미를 계발하는 방법으로 ‘덧칠하기(Micro Adventure)’를 권하고 싶다. ‘덧칠하기’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일상의 습관이나 관심 가진 분야를 발전시키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등산이 취미였던 분이 산삼을 연구해 산을 즐기면서 산삼을 캐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필자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에 수채화를 그렸다. 그 경험을 살려 60세에 사진을 배움으로써 평생 취미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진과 관련한 영역을 확대해 하루를 25시로 산다. 과거의 경험에 덧칠을 했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하면서 용돈도 벌고 사회공헌도 하는, ‘도랑 치고 가재 잡는’ 삶을 즐긴다. 사진은 취미라기보다 일상생활로 바뀌어가고 있어 직업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어떤 취미보다 돈이 적게 들면서 새로운 직업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 특히 돈이 드는 취미에서 돈이 되는 취미를 계발할 필요가 있는 시니어에 꼭 맞는다. 물론 경우에 따라 돈이 많이 들기도 한다. 장비 구매와 사진 촬영지 여행 비용 때문이다. 그러나 늘 휴대하는 스마트폰으로도 충분히 찍을 수 있고 일상에서 사진 소재를 찾을 수도 있어 비용을 적게 들이고도 훌륭한 취미활동을 할 수 있다. 필자는 저렴한 카메라(일반인이 손쉽게 살 수 있는 보급기로 렌즈 포함 50만원 주고 산 중고품을 지금도 쓴다)를 사용하고 요즘엔 스마트폰을 주로 이용한다. 전시회용 작품을 만들거나 취미활동용으로 부족함이 없다. 사진 재능기부와 사진 기술을 전수하는 사회공헌 활동에도 전혀 지장이 없다. 장애인 시설이나 양로원 등에서 사진 촬영 봉사를 하고 실버대학 등에서 어르신들에게 사진 지도를 하며 보람을 느낀다. 사진 촬영이 필요한 곳이면 발걸음을 아끼지 않는다. 혹자는 필자에게 “돈도 안 되는 일 그렇게 힘들여 봉사하느냐?”고 하지만 재능을 쓸 수 있음에 감사한다. 취미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목표를 설정해 공인 사진작가가 된 필자는 이제 사진으로 돈을 버는 직업인이 됐다. 또한 취미활동이 바탕이 되어 KBS1 을 비롯한 여러 방송 프로그램과 SBS 라디오에 출연하며 방송인이 되었다. 동년기자 선임과 명예기자도 사진이 근간이었고 글을 쓰면서 원고료도 받는다. , , 등 사진과 관련한 책 세 권도 출간했다. 또한 사진 취미생활을 통한 여가생활의 본보기가 되면서 여가설계 강사로도 활발하게 활동하며 강사료를 받는다. 취미에 머무르기만 하면 성장이 없다. 어떠한 취미를 선택하더라도 새로운 목표를 설정해 도전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필자도 처음에는 단순한 취미로 시작했다. 당시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더 좋은 사진을 글에 곁들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고양시 일산동구청에서 무료로 운영되는 사진교실에 참가하게 됐다. 60세의 늦깎이였고 카메라 장비는 소형 카메라 하나였다. 촬영 경험도 많지 않았다. 고급 카메라를 들고 나타나는 동호인들을 볼 때 주눅이 들기도 했으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형편에 맞는 카메라로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촬영을 멈추지 않았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 했듯 공인 사진작가가 되어보자는 욕심이 생겨 사진을 배운 지 3개월 후부터 공모전에 출품하기 시작했다. 잘될 리가 없었다. 28번의 도전 중 절반을 낙선하고 15번 수상해 사진작가 인증을 받았다. 그 후에도 꾸준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 사진을 배운 지 3년이 되던 2013년에 대한민국사진대전(국전)에 입선하고 부산일보 전국사진대전에서도 우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사진작가가 되는 길은 많다. (사)한국사진작가협회가 인정하는 공모전 출품으로 얻어지는 점수가 일정 점수 이상이 되면 정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고 사진작가 명함도 만들 수 있다. 사진 전문가가 되면 다양한 직업으로 연결될 수 있다. 전시회를 열어 작품 판매도 할 수 있다. 향후 작품에 대한 가치도 높일 수 있다. 사진 갤러리를 중심으로 하거나 프로필 사진과 가족사진을 촬영해주는 카페 운영, 사진관 운영, 사진 여행단 운영을 할 수 있다. 수요가 많은 사진 강사로 데뷔할 수도 있다. 전문가는 자기 기술을 다른 사람에게 전수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사람이다. 필자는 사진작가 인증에 그치지 않고 계속 공부하고 활동 영역을 넓혀왔다. 사진을 배운 지 벌써 8년째에 접어들었고 찍은 사진도 50만 장에 이른다. 사진을 찍다가 파파라치로 몰려 곤욕을 치르기도 했고 강화도 군부대 옆에서 석양을 촬영하다 주민의 신고로 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선택한 취미생활을 오래 할 수 있고 제2의 직업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재미있는 분야를 선택해야 한다. 남이 권유하는 취미나 유행하는 취미를 선택하면 중도에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 새로운 분야에 집착하기보다는 평소 관심을 가져왔던 취미가 좋다. 어린 시절에 즐겨 했으나 생업으로 미뤄뒀던 취미를 끄집어내 덧칠하면 평생 취미로 만들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영국의 모험가 제임스 후퍼가 제안한 ‘덧칠하기’다. 필자는 은퇴 후에 수채화를 그리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 꿈을 덧칠해 사진으로 바꾼 셈이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3년 정도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에 몰입하다 보면 새로운 길이 열리기도 한다. 필자는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사진 기술과 취미생활 계발을 선도할 ‘청학빛그림학교’를 꿈꾸고 있다.
- 2017-11-29 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