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인가 추석 즈음 닭실마을에 간 적이 있다. 푸른 논 너머로 기와집들이 보였다. 기와지붕 뒤로는 나지막한 산이 봉긋 솟았다. 마을 앞에는 계곡이 흘렀다. 풍수지리를 몰라도 이곳이 명당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을 아낙네들은 부녀회관에 모여 추석 한과를 만드느라 분주했다. 한 할머니가 손에 쥐여준 한과를 맛봤다. 500년 전통을 이어온 닭실한과였다. 그 뒤로 이맘때면 닭실마을이 생각난다.
걷기 코스
봉화공용터미널에서 택시 탑승▶ 석천계곡 입구 하차▶ 삼계서원▶ 석천계곡▶ 석천정사▶ 솔숲길▶ 징검다리▶ 닭실마을 충재박물관▶ 청암정▶ 충재고택▶ 닭실마을 부녀회관▶ 닭실마을 정류장에서 버스 탑승▶ 봉화공용터미널 하차
전통마을인 닭실마을은 조선시대 중기의 학자 충재(冲齋) 권벌(權橃, 1478~1548)이 세운 마을이다. 충재 선생이 기묘사화 때 이곳으로 내려와 정착하면서 안동 권 씨 집성촌을 이루었다. 그의 후손이 지금까지 전통을 지키며 대대로 살고 있다. 마을에 충재 종택, 청암정, 석천정사, 삼계서원 등의 충재 선생 관련 유적지가 남아 있어 사적 및 명승으로 지정됐다. 2012년에는 살기 좋고, 풍광이 뛰어난 마을로 인정받아 ‘대한민국 농어촌 마을’ 대상을 수상했다.
닭실마을은 ‘닭 모양의 마을’이란 뜻이다. 한자로는 닭 酉(유), 골짜기 谷(곡), 마을 里(리)를 쓴다. 닭을 닮은 산이 알을 품듯 마을을 감싸고 있는 모양이어서 옛날부터 길지로 알려졌다. 경상도에서는 닭을 ‘달’로 발음해 마을 사람들은 달실마을이라 부른다.
닭실마을을 구석구석 여행하려면 삼계서원을 먼저 둘러보고 석천계곡을 지나 마을로 들어가는 코스가 좋다. 닭실마을의 옛 입구인 석천계곡으로 가기 전에 왼쪽 길로 빠져 삼계서원에 잠시 들른다.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이정표 삼아 시골길을 걷는다. 5분쯤 걸으면 은행나무 앞에 있는 삼계서원에 닿는다. 이곳은 충재 선생의 장남인 권동보(1518~1592)가 안동 부사의 도움을 받아 부친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충재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서원을 둘러보고 석천계곡으로 향한다. 삼계서원에서 석천계곡 입구까지는 코 닿을 거리다.
석천정사를 품은 석천계곡
석천계곡은 폭이 넓고 골이 깊지 않다. 여름철에는 봉화 사람들이 이곳에서 물놀이와 견지낚시를 하며 피서를 즐긴다. 석천계곡 입구의 포장도로가 끝나는 지점부터 조붓한 솔숲길이 이어진다. 숲길에 들어서자 ‘청하동천(靑霞洞天)’이 새겨진 커다란 바위가 버티고 섰다. 청하동천은 ‘하늘 아래 신선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다. 옛날 기암괴석이 많은 석천계곡에 밤마다 도깨비들이 몰려와 놀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선비들 공부에 방해가 되자 충재 선생의 5대손인 명필 권두웅(1656~1732)이 바위에, ‘이곳은 신성한 곳이니 오지 말라’는 뜻을 품은 청하동천을 새기고 붉은 칠을 했다. 그 뒤로 도깨비들이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청하동천 바위를 지나 물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콸콸” 경쾌한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걷는 발걸음이 가볍다. 계곡 입구에서 400m 정도 걸으면 소나무 사이로 석천정사가 보인다. 석천정사는 권동보가 봉화의 곰솔인 춘양목으로 지은 건물이다. 기암괴석과 금강소나무 숲과 어우러진 풍경이 병풍에서 튀어나온 듯 운치 있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석천정사를 바라보고 섰는데 그 모습에 반해 발걸음을 떼기 어렵다. 석천정사로 가기 위해 계곡에 놓인 외나무다리를 건넌다. 석천정사에 관리인이 있으면 내부를 구경할 수 있다. 석천정사 마루에 올라 문을 열면 석천계곡이 앞마당이 된다. 계곡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난간에 앉아 있으니 마치 신선이 된 것 같다. 고요한 밤에는 우렁찬 계곡물 소리가 도깨비 떠드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다. 문득 선비들이 도깨비 때문에 공부를 못했다는 건 핑계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선계가 눈앞에 있는데 글이 눈에 들어왔을까.
거북바위에 올라앉은 청암정
석천정사를 지나자 시야가 트인다. 기품 넘치는 소나무 숲길이 이어진다. 멀리 닭실마을이 보이기 시작한다. 키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높이 자란 소나무들이 마을로 인도한다. 이 길 왼쪽에는 개울이 흐른다. 간밤에 비가 내려 개울물이 제법 불었다. 꼴깍꼴깍 자맥질하는 징검다리를 아슬아슬하게 건넌 뒤 왼쪽 찻길로 접어든다. 1차선 찻길을 따라 조금 걷다 보면 닭실마을 초입에 있는 충재박물관에 도착한다. 박물관 옆에 닭실마을의 대표 명소인 청암정으로 통하는 쪽문이 있다.
청암정은 충재 선생이 집 안에 지은 정자다. 충재고택의 솟을대문 쪽으로 들어가면 집 안 깊숙한 곳에 안방마님처럼 자리했다. 단풍나무, 소나무, 느티나무가 둘러선 연못 한가운데에 거북 모양의 너럭바위가 솟아 있다. 바위 위에 丁자 모습을 한 청암정이 올라앉아 있다. 마치 연못에 사는 커다란 거북이 등에 청암정을 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북바위를 평평하게 다듬지 않고 청암정의 주춧돌과 기둥 길이를 조절해 균형을 맞추는 등 자연미를 한껏 살렸다. 연못가에는 ‘충재’라 이름 붙인 서재가 있다. 충재 선생이 청암정보다 먼저 지은 건물이다.
연못 안에 있는 청암정에 오르려면 각목처럼 생긴 돌다리를 건너야 한다. 충재 선생이 청암정을 신의 영역이라 여겨 돌다리 폭을 좁게 만들었다고 한다.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발을 떼며 돌다리를 건너 신선의 세계로 든다. 청암정 난간 앞에 서면 풍요로운 논과 석천정사가 자리한 남산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청암정 천장에는 퇴계 이황, 미수 허목, 번암 채재공과 같은 대학자들이 쓴 편액이 상장처럼 걸려 있다.
500년 전통의 닭실한과
청암정 쪽문으로 나와 마을 앞 큰길로 나선다. 솟을대문을 갖춘 큰 고택이 충재고택이다. 종손이 대대로 살고 있다. 사유지이므로 문이 닫혀 있을 때가 많다. 돌담 아래 핀 꽃을 구경하며 마을 끝에 있는 부녀회관까지 걷는다. 부녀회관에 닭실마을 아낙네들이 모여 닭실한과를 만든다. 아낙네들은 대부분 70~80대 고령이다. 닭실마을이 안동 권 씨 집성촌이므로 모두 한집안 식구다. 이들이 충재 선생 불천위 제사에 올리는 오색 한과의 500년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닭실한과는 화려하다. 흑임자, 자하초 등의 천연재료로 물들이고, 쌀 튀밥으로 꽃 모양 고명을 올린다. 분홍색 유과는 아기 꽃신처럼 예쁘다. 달지 않고 바삭하며 입안에 들러붙지 않게 만드는 것이 맛의 비결이다. 여름에는 습도가 높아 유과를 만들지 않고 약과만 만든다.
제사상에 올리던 닭실한과가 입소문을 타고 전국적으로 팔린다. 작업장 선반에 발송 대기 중인 한과 상자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명절을 앞두면 닭실마을 아낙네들이 더 바빠진다. 찹쌀 반죽을 온돌에 48시간 말리고, 반죽을 늘려 튀기고 조청을 발라 튀밥 옷을 입혀 완성한다. 꼬박 사흘이 걸린다. 수작업으로 만들기 때문에 하루에 생산하는 한과 세트는 서른 박스 정도다. 명절용 한과는 일찌감치 예약 마감된다. 어느 댁 혼례에 쓰일 한과인지 할머니들이 바구니에 오색한과를 색깔 맞춰 담고 분홍색 보자기로 곱게 포장한다. 곁에서 작업 과정을 지켜보고 있으니 한 할머니가 맛보라며 유과를 건넨다. 바삭하면서도 폭신한 유과가 깨물자마자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다. 닭실마을 주소 경북 봉화군 봉화읍 충재길 963.
주변 명소 & 맛집
봉화 송이돌솥밥
봉화는 전국 송이 생산량의 15%를 차지하는 대표적인 송이 산지다. 송이는 살아 있는 소나무 뿌리에서 자란다. 봉화의 금강소나무숲에서 자란 봉화송이는 육질이 단단하고 향이 짙어 최고 품질로 손꼽힌다. 봉화에 송이로 돌솥밥을 짓는 이름난 식당이 여러 곳 있다. 그중 솔봉이식당, 용두식당, 인하원이 송이버섯돌솥밥과 능이전골로 유명하다. 올해 봉화송이버섯축제는 9월 27일부터 30일까지 열린다.
충재박물관
충재박물관은 충재 선생 관련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이다. 충재일기, 근사록을 비롯한 보물 482점과 고서 및 고문서, 서첩 총 5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전시물 중에 당시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유물이 상당하다. 재산 분배에 관해 적어놓은 분재기, 양자 입양과 관련한 예조입안, 과거시험 합격자 명단, 과거시험 답안지, 서원에서 제사지낼 때 쓰던 제기, 닭실마을 종부들이 온종일 만들었던 동고떡 모형 등이 전시돼 있다. 봉화군 봉화읍 충재길 30, 개방 10:00~17:00(동절기 10:00~16:00) 매주 월요일 휴무.
바래미전통문화마을
바래미마을은 봉화읍 해저리에 있는 전통마을이다. 의성 김 씨 집성촌이며 마을이 생긴 이래 200년 동안 과거 급제자가 수십 명에 달한다. 일제강점기에는 50여 가구에서 독립운동가가 14명이나 배출됐다. 토향고택, 만회고택, 남호고택, 개암종택, 김건영가옥, 소강고택 등 옛 모습을 잘 간직한 한옥도 많다. 만회고택, 남호고택, 소강고택은 여행자를 위한 고택 체험 및 한옥스테이 시설을 갖추고 있다. 경북 봉화군 봉화읍 바래미1길.
여행 정보 걷기 Tip
•봉화공용버스터미널이나 봉화역에서 21번, 23번 버스를 타고 삼계정류장에 하차하면 된다. 택시로 5분 거리이며 도보로는 15분 걸린다. 닭실마을에서 나올 때는 닭실마을 정류장에서 53번, 50번, 51번, 25번, 16번 버스를 타고 봉화공용버스터미널로 이동한다. 약 15분 소요.
•봉화공용버스터미널 앞에 봉화장터가 있다. 2, 7일마다 오일장이 선다.
•석천계곡 입구에서 닭실마을까지는 도보로 한 시간 남짓 걸린다.
한복을 입고 표지 촬영을 진행하는 연기자 정혜선을 보면서 새삼 한복이 무척 어울리는 배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시청률 60%를 넘긴 전설적인 드라마 ‘아들과 딸’에서 딸을 구박하는 독한 어머니 모습으로 기억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그 이전이나 이후로나 국민 어머니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많은 드라마에서 어머니 역을 맡아 열연했던 그녀는 곧 팔순을 바라보는 1942년생이다.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생기가 넘치는 자태를 보니 어쩌면 긴 세월 빚어낸 어머니 상이 우리에게 영원처럼 고정된 게 아닐까 싶었다.
정혜선은 1961년 KBS 공채 탤런트 1기로 연예계에 처음 입문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학예회에서도 뽑히고 무용도 하고 노래도 잘하는 편이었어요. 수도여고에서는 방송반 활동과 웅변을 하며 상도 꽤 받았고요. 아버지가 원고를 써주는 등 많이 도와주셨어요. 심지어 탤런트가 뭔지도 모르던 때에 아버지가 지원 원서를 가져다줬어요.”
대부분의 가정집에 TV가 없던 그 시절, ‘뭔가를 알았던’ 부모님의 적극적인 지원을 보면 아무래도 그녀는 연기자로 살아갈 운명이었나보다. 당시만 해도 연예인을 딴따라로 부를 만큼 인식이 좋지 않았을 것인데 딸의 재능을 알아본, 열린 생각을 가진 아버지 덕분에 시작이 평탄했다.
가족의 지원으로 연기자 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1967년 KBS ‘실화극장’에서 간첩 두목 등 캐릭터가 강한 역할에 캐스팅되어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다. 이후 그녀는 성격파 배우로서의 이미지를 쌓기 시작했다.
“어머니 역할을 그때부터 많이 했어요. 그 시절은 배우가 별로 없었으니까. 얼굴에 주름 그려가며 어머니, 할머니 역을 소화해내면서 연기력을 인정받았죠.”
연기자, 그리고 어머니 역을 주로 하게 된 것은 운명 같은 일이었을까? 그녀는 30대부터 할머니 역할을 주로 맡았다. 불과 31세에 MBC 드라마 ‘새엄마’에서 시어머니 역을 연기했다.
1977년에 한 설문조사에서 할머니 역할을 잘하는 연예인 2위로 뽑히더니, 1978년에는 아예 1위가 되었다. 연기자로서의 첫 절정기는 1983년이었다. 마흔 즈음에는 MBC 드라마 ‘간난이’에서 손주들을 데리고 거친 세상을 사는 80세 꼽추 할머니 역할을 완벽히 소화해 각종 상을 수상했다.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의 연기자
그녀는 멜로 드라마의 주인공보다는 ‘쎈’ 역할을 주로 맡았다.
그런데 인기가 많아지자 재미있는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녀가 한때 가수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간난이’ 에서 80세 할머니로 출연해서 불쌍한 손주들을 지극히 보살피는 역할로 각종 연기대상을 휩쓸었던 그해 1983년 대한민국을 빛낸 사람이라고 해서 롯데호텔에서 디너쇼를 열어줬어요. 그때는 철딱서니가 없었죠. 그 재주로 디너쇼를 했다니.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별거 다 했어요.”
같은 해에 매니저 제안에 앨범도 하나 녹음했다. 잠깐 가수활동을 하며 남긴 유일한 이 앨범의 타이틀곡은 ‘망각’. 발라드풍의 처연한 노래인데, 직접 가사도 썼다.
잊어야만 했기에 잊었노라고
지워야만 했기에 지웠노라고
너와 나의 아름다운 그 옛날 추억이 못 잊어 생각나면
아 강물 위에 내 마음 띄워보리
여자로서의 삶은 불행했다
노래 가사에 배인 슬픔과 애잔함을 증폭시키는 애절한 창법을 들으니 자연스레 그녀가 겪은 고통이 떠올랐다.
“서른두 살에 다시 싱글이 됐죠. 여자로서 정혜선은 불행했지. 그 부분에서는 인생의 패배자라고 생각해요. 여자로 태어나 남편 잘 만나 아이 행복하게 키우면서 가정 잘 이끌어가고 그랬어야 했는데… 짚신도 짝이 있는데 지금까지 혼자 살았다는 건 비극이에요. 물론 그동안 날 좋아하는 이도 있었고 중매도 들어오곤 했지만 지금은 혼자야.”
TV에서 보는 정혜선은 거칠고 과격한, 세월의 풍파에 시달려 독해진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 그 자체였다. 그러나 실제의 정혜선은 조용하고 나긋나긋하며 차분한 목소리를 지닌 천생 여자의 모습이다. 담담하게 자신을 패배자라고 말하는 그녀에게서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을 이가 있을까. 그 모습에서 자기 삶을 희생하며 사는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30·40대에 할머니역을 맡던 그녀는 60대가 넘으면서 카리스마와 온화함이 있는 ‘사모님’과 ‘여사님’ 연기를 주로 했다. 또 기품 있는 한복 차림으로 각인시켜주는 존재감이 느껴지는 역할엔 그녀만 한 배우가 없다.
그렇지만 “나도 살았는데…”
남편과의 결별은 이혼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세 아이를 키우면서 남편의 빚까지 갚아나가야 했다. 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던 것은 최소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고통스러웠지만 기대어 신세를 질 만한 사람도 없었어요. 그래도 채권자 분들이 순순히 기다리기로 해서 제 출연료를 3분의 2씩 가져갔죠. 그런 걸 생각하면, 그분들에게 고맙죠. 지금은 다 고인이 되셨지만.”
“스스로 일어나지 않으면 누가 단돈 100원도 안 준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다. 그래서 그녀는 요즘 급격히 높아진 자살률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나 같은 사람도 죽지 않고 잘 사는데 왜 자살을 하지…. 나는 자살이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안 죽었어요. 빚을 갚아야 된다고 생각했기에 죽음은 생각도 안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죽는 방법도 있었네. 그런데 그걸 몰랐던 거예요.(웃음)”
허공 속으로 흩어지는 그녀의 퍽퍽한 웃음소리에 좀 아팠다.
나누고 베풀며 겸손하게
개인으로서, 여자로서 정혜선은 불행했을지 모르지만, 모두의 배우로서는 불행하지 않았다. 그녀의 방송활동에는 슬럼프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았다. 연기하며 힘들었던 순간이 없다 할 정도로 매일 최선을 다했으므로 기억이 안 난다고.
“프로그램이 끝나면 다음 프로그램이 예약되어 있었고. 그러다 보니 방송국에서 시청률 높으면 보내주는 해외여행도 제대로 못 갔죠. 늘 바빠서 쉴 틈이 없었어요. 내 인생은 완전히 일의 연속이었어요. 물론 내가 워커홀릭 성향도 있지만, 연출자들이 나를 도와주려고 더 불러줬던 것 같아요.”
그녀는 문득 자신이 지금까지 한 번도 이탈리아를 가본 적이 없다는 걸 알고는 잠시 억울해했다. 요즘은 여유만 있으면 누구나 다 가는 유럽 여행 아닌가. 수십 년을 대한민국 국민의 어머니로 살았던 사람이 일하느라 이탈리아도 못 가봤다는 얘기는 그야말로 우리 시대의 어머니답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일만 하는 정혜선이었죠. 일 안 하면 죽는 줄 알았으니까.(웃음) 그런데 요즘 쉬면서 생각해보니 일이 다가 아니구나 싶어요. 너무 늦게 알았지. 지금은 쉬면서 봉사도 하러 다녀요. 내가 나서기만 해도 같이 참여하는 사람들이 좋아해서 시간이 나면 자주 가고 있어요. 무엇이든지 내가 쓰임이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잖아요”
이번 표지 한복 협찬을 해주신 박술녀 한복 디자이너는 “20여 년 곁에서 지켜봐온 정혜선 선생은 한결같은 성실함과 노력으로 늘 수수하게 살아서 때로는 연예인인지 자연인인지 분간이 안 간다”며 뚝배기처럼 소탈하시다 거들었다.
그녀는 이제는 좀 편안하게 살고 싶다는 속내도 내비쳤다.
“오늘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매 순간 최선을 다합니다. 남의 눈치를 보거나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고요. 어려운 사람 있으면 가능한 한 힘닿는 대로 돕습니다. 그러니 무언가에 꽂히면 에너지를 쏟아 부을 수밖에. 연기자에겐 숙명적 성향 같아요. 그저 일만 하고 살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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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지 못한 예술을 향한 꿈
인터뷰를 하다 보니 그녀가 연기생활을 하면서 안 해본 게 없다는 걸 알게 됐다. 가수, 드라마와 연극은 기본이고 심지어 뮤지컬 배우도 했다. 그녀의 기억 속 뮤지컬은, 정말 원 없이 노래를 불렀던 ‘사운드 오브 뮤직’. 연극은 ‘햄릿’. 무대에 세 번이나 섰다. 물론 영화도 찍었다.
“1970년부터 1980년까지 50여 작품에 출연했죠. 그것도 액션 영화에. 내가 한때 액션 스타였어.(웃음) 그때는 정말 그걸로 잘나갔어요. 지금 들으면 젊은이들은 깜짝 놀랄 테지만.”
그러니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본 이 베테랑 배우에게 욕심나는 작품이 있냐는 질문이 싱거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는 “욕심이 없다”고 단칼에 자르듯 말했다. 다만 그녀에게 다시 삶을 살 수 있다면 하고픈 일에 대해 묻자 오래전 묻어버린 꿈을 아련히 기억해내며 그 시간들에 휩싸이는 듯했다.
“인간이기 때문에 욕심이 많아요. 그런데 ‘부자가 됐으면’이란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어요. 사업은 내 길이 아니에요. 그러나 아무래도 예술에 대한 꿈은 있었죠. 특히 무용. 무용 선생님이 ‘영자야(정혜선의 본명), 넌 무용해야 해’라고 해주시던 말씀이 아직도 생생해요. 사실 집이 가난했죠. 그런데 무용을 하려면 돈이 많이 드니 부모님 생각을 해서 안 했어요.”
아니다 싶으면 결코 하지 않는다
정혜선은 자신의 건강 비결로 편식하지 않고 잘 먹는 것과 운동을 따로 안 하는 대신 걷는 것을 꼽았다.
“사실 이제 내일모레면 팔십이니까 걷는 것도 귀찮죠. 집에 앉아서 선풍기 바람 쐬는 게 가장 행복해요.(웃음) 스케줄 없을 때는 여기저기서 식사하자고 하니 사람을 만나게 되네요. 내가 거절하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그래서 하루에 꼭 두세 가지 일은 있더라고.”
지금까지의 인터뷰에서 예상 가능하듯 그녀는 남다른 고집이 있는 사람이다. 사실 얼마 전 꽤 굵직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파격적인 출연 제의를 받았지만 정중히 고사했다.
“내가 거기 나가서 남을 즐겁게 해줄 용기가 없어요. 과거에는 디너쇼까지 하면서 끼를 보여줬는데 지금은 다 늙어서.(웃음)”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녀의 선택은 오랜 세월 정혜선이란 정체성을 만들어낸 신념 그 자체였다.
그저, 주어지는 대로 열심히 한다
겸손하고 배려심 많은 성품으로 후배들의 귀감이 되어온 그녀는 진정성 있는 삶으로 탄탄한 신뢰를 쌓아왔다. 초심을 지키며 자기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우직함이 그녀의 힘이다. 그녀는 이번 추석 때 다른 사람들보다 더 바쁠 예정이란다.
“지인과의 인연으로 NBS한국농업방송에서 프로그램을 하나 맡았어요. ‘그땐 그랬었지’라는 프로그램에서 제가 내레이터를 하기로 했어요. 한 달에 두 번 방송을 하는데 작업을 해야 하니까,(웃음) 어디로 움직이는 건 당분간 불가능해요.”
작든 크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자신을 다시 돌아보며 충전하는 좋은 시간으로 즐긴다. 그저 평범하면서도 평탄하게 살기를 바라는 이처럼.
“나는 애써 관리해온 게 아니라 책임감 있게 살았던 것뿐”이라는 그녀의 말에는 연륜과 관록이 묻어 있다. 그녀 삶의 원동력을 그대로 보여주는 설명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녀의 삶에서 우리가 봐왔던 강인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고향처럼, 시간이 흘러도 언제나 그곳에 있을 것 같은, 아련하면서도 올곧고 강인한 모습으로서.
연연하지 않는 삶, 이렇게 살아서 또 한 번의 아침을 맞듯 그녀에게 아무 일도 없으면 좋겠다.
한국은 피로사회다. 근로시간 세계 최장, 수면시간 세계 최단. 연간 과로사 300명. 오죽하면 정부에서 근로시간 줄이라고 법으로 명할까.
지난 반세기 산업사회 건설을 위해 우리에겐 밤낮이 없었다. 덕분에 세계가 놀란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다. 이제 우린 정상에 올라왔다. 그만하면 됐다. 하지만 아직 더 올라야 한다는 강박증에 빠져 있다. 산을 오르는 사람은 숨이 차다. 발아래 들꽃 한 송이 즐길 여유가 없다. 더, 더. 소위 ‘MORE 심리’가 작동하는 이상 우린 잠시 쉴 줄도 모른다. 가속페달만 밟을 줄 알지 브레이크가 있는 줄 모른다. ‘더, 더, 더’ 하는 욕심이 채워지면 기분이 좋다. 만족스럽다. 하지만 그게 아니면 즉각 불평, 불만이다.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이다. 지금도 주변엔 소위 일 중독자로 불리는 사람이 적지 않다. “피곤하다”, “졸리다”를 입에 달고 살면서 막상 쉴 줄은 모른다. 쉴 생각도 잘 안 하고 잘 쉴 줄도 모른다.
도시인의 피로는 몸이 아니라 뇌에서 온다. 물론 등산이라도 하고 온 날이나 테니스를 열 게임 정도 하면 몸이 피로하다. 이때는 쉬거나 한숨 푹 자면 거뜬하다. 하지만 뇌의 피로는 그렇게 간단히 풀리지 않는다. 뇌는 몸무게의 2%밖에 안 되지만 에너지는 20%나 소비하는 대식한이다. 연중무휴 24시간 일한다. 우리가 주의집중해서 일할 때는 물론이고 일하지 않거나 자는 동안에도 활동한다. ‘쉬는 동안에 활동하는 뇌’를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 DMN)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뇌 에너지의 60~80%가 소비된다. 이것이 뇌 피로의 주범이다. 이 회로는 상당히 광범위한 부위에 산재하며, 쓸데없는 잡념을 하는 게 주기능이다. 우리가 잠시 일을 멈추고 멍한 상태가 될 때 혹은 일하는 중간중간 잡념이 불쑥 떠오르게 해 일을 방해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부정적인 기능만 있는 것은 아니다. 뇌는 자는 동안에도 긴장한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잠을 깬다. 24시간 비상감시체제 하에 있다. 교감신경의 과잉 흥분이다. 활동 시 교감신경과 휴식 시 부교감신경의 활성비율은 대체로 60대 40 정도이지만 비상감시체제에선 80대 20이 될 수도 있다. 이게 뇌 피로를 부르는 가장 큰 원인이다. 이런 상태를 스트레스라고 부른다. 따라서 스트레스 요인을 정확히 파악, 과학적인 대처를 해야 한다. 다음은 뇌를 피로하게 만드는 원흉들이다.
1 휴식 없이 장시간 하는 일
2 같은 일을 반복할 때
3 싫은 일을 억지로 할 때
4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할 때
5 시간에 쫓길 때
6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그 의미를 모를 때
7 하는 일을 의무로 생각할 때
8 수면 부족
9 작업 환경이 열악할 때
10 일점집중(一點集中)할 때
이런 상황에 자주 처하면 뇌가 피로해진다. 문제는 몸이 피로한 것으로 오해해 흡연, 커피, 드링크류 혹은 피로해소제를 복용해 해결하려는 데 있다. 당장은 기분이 좋아져 마치 피로가 가신 것처럼 착각한다. 실제로는 피로가 오히려 쌓인다. 전문가들은 이를 은폐된 피로(Masked Fatigue)라고 표현한다. 이런 상태는 위험하다. 시판되는 소위 피로해소제가 몸에 작용하는 건지 뇌에 작용하는 건지도 분명하지 않다. 카페인 성분 때문에 잠시 집중이 잘되는 것이지 피로가 가시는 것은 아니다.
뇌 피로를 느끼는 부위는 시상하부다. 생명의 중추가 모여 있는 곳이다. 무리를 하면 시상하부의 항상성 균형이 깨져 피로를 느끼게 된다. 그 느낌은 즉각 변연계(동물 뇌)로 전달, 쉬자는 신호를 뇌의 최고 사령부인 전전두엽으로 보낸다. 이때 적절히 휴식을 취하면 피로는 풀린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일에 집중한 나머지, 가령 연애 중이어서 그 신호를 듣지 못하거나, 인지했어도 전두엽에서 ‘내일 시험인데 자면 안 되지’ 하고 휴식을 연기하라는 신호를 보내면 피로가 풀릴 리 없다.
피로가 쌓이면 뇌에는 단계별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처음엔 피곤하다. 그러다 지치면 차츰 자율신경 부조증, 내분비 대사, 면역계에 이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최종 단계에선 암, 고혈압, 당뇨병 등 생활습관병이 발병한다. 뇌가 피로할 때는 휴식법이 따로 있다. 뇌 에너지를 가장 많이 쓰는 DMN에 휴식을 줘야 뇌 피로가 풀린다. 효과적인 방법은 마음챙김 명상(Mindful Meditation)이다.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것이다. 어쩔 수 없었던 과거나 아직 닥치지도 않는 미래에 지레 겁먹지 말고 ‘지금 여기’에 집중하면 된다. 무슨 생각이 떠올라도 그대로 둔다. 마치 강가에 서서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듯 생각이 흘러가게 놔둔다. 특정 생각을 하려고 하지도 말고 자세를 반듯이 하고 천천히 부드럽게 호흡을 하면서 마음을 ‘지금 여기’에 집중한다. 미국의 세계적인 기업에서도 이 방법을 권하고 있다. 이제 동양의 신비가 아닌 증명된 과학으로서 명상을 선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후 미국 대기업을 위시해서 명상 붐이 일어났다.
뇌가 피로하면 뇌 속에선 여러 변화가 일어난다. 먼저 뇌 온도가 올라간다. 일하다 말고 세수를 하거나 머리를 감으면 기분이 상쾌해지는데, 이는 뇌 온도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열이 나면 예민한 신경회로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신경전달 물질을 과용한 나머지 고갈상태가 되면 뇌 기능이 저하된다. 또 전술한 바와 같이 시상하부의 주요 생명기능들이 난조에 빠진다. 오감이 이상해지기도 한다.
뇌 피로 해소에는 숙면이 좋다. 특히 오후 10시~오전 2시 사이의 잠이 중요하다. 잠이 부족하다 싶으면 점심식사 후 15분 정도 낮잠을 잔다. 뇌 피로 해소에 아주 효과적이다. 싫은 것을 억지로 해서 뇌 피로가 온다면 뇌가 좋아하는 것을 해보자. 피로 해소에 좋은 몇 가지 뇌과학적 방법을 추천하면 다음과 같다.
1 여행 같은 새로운 시도를 하라.
2 가벼운 모험, 스릴을 즐겨라.
3 발전과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라.
4 뇌는 시간제한을 좋아한다. 가벼운
압박감은 신경회로를 효율적으로 만든다.
5 지적 자극과 쾌감을 얻도록 하라.
6 가끔 몰입 상태를 경험하라.
7 가벼운 운동을 하라.
8 감성에 젖을 수 있는 시간을 가져라.
9 자연 속에서 오감을 자극하라.
10 좋은 사람과 만나라.
이외에도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하면 된다. 단 ‘건설적인 일’ 이어야 한다. DMN이 처음 발견될 당시엔 뇌 활동의 훼방꾼, 에너지 낭비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했지만 최근엔 긍정적인 측면이 많이 강조되고 있다. 우리가 창의적인 일을 기획하거나 문제점을 해결할 때 제대로 진행이 안 되면 뇌의 잠재의식인 큰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 숙성시간을 갖고 다른 생각들과 조합을 이루고 융합을 한다. 그리고 어느 날 기막힌 아이디어가 불쑥 튀어나온다. 창조 발상의 순간이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대체로 정신이 멍할 때 떠오른다. 술 한잔한 뒤 흥얼거리며 가는 귀가길, 잠이 들락 말락 하거나 잠이 덜 깬 상태, 즉 자아의 감시가 약해질 때 기막힌 발상이 떠오른다. 바로 이 순간이 뇌의 DMN이 활동하는 시간이다. 뇌 휴식을 잘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창조적 발상은 DMN 활동에 달려 있다. 쉬지 않고 열심히 일만 하는 일 중독자들에겐 이런 축복이 오지 않는다. 바쁜 시간에 무슨 명상과 휴식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런 사람일수록 뇌 휴식시간이 필요하다. 대기업에서 명상, 낮잠을 권유하는 이유는 아욕을 없앰으로써 동료 간의 시기, 질투, 라이벌 의식을 없애고 상부상조, 협동하는 진정한 동료의식을 함양하기 위함이다.
과학적인 뇌 휴식이 한국의 미래를 좌우한다면 과언일까?
별별 생각과 궁리를 다하고도 망설이게 되는 게 귀촌이나 귀농이다. 그러나 김석봉(62) 씨는 별생각 없이 시골엘 왔더란다. 무슨 성좌처럼 영롱한 오밤중의 현몽이 그를 이끈 건 아닐 것이다. 그는 매우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거니와, 자나 깨나 귀촌을 숙원으로 여긴 바가 없었으니 하필 후미진 산골로 데려가는 계시를 받았을 리 만무하다. 여하튼, 별 생각 없이 귀촌한 석봉 씨는 별 탈 없이 살아왔다. 별생각이 없었으니 별 볼일도 없었을 성싶지만, 사실은 별 볼일이 벌어졌다. 별별 일이 일어나며 삶이라는 숙제가 술술 풀려나갔다. 지금 석봉 씨는 별나게 즐겁게 산다.
“운명이라 해두죠! 하하하!”
귀촌 내력을 묻자 돌아오는 석봉 씨의 쾌활한 답이 그렇다. 운명이라는 게 인간에게 미리 주입돼 있다는 운명론을 단단히 믿어서 하는 말이 아닐 게다. 사람은 때로 참 알 수 없는 상황이나 추세를 운명에 빗대어 적당히 눙치곤 하지 않던가. 그러니까, 별생각 없이 우연찮게 ‘필’이 꽂혀, 또는 충동의 대리운전에 편승해 산골로 이주했다는 뜻으로 들으면 되겠지.
“어느 날, 친구 따라 지리산엘 놀러왔다가 빈집 하나를 보게 됐어요. 아, 마당에 들어서고 보니 너무도 좋더라고요. 2년째 비워둔 시골집이라 꼴이 말이 아니었으나 마음이 그지없이 편해지는 것이었어요. 마치 집이 저를 끌어들인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래서 운명적 만남인가보다, 그런 생각까지 했던 겁니다. 좋아, 이 집에서 살아보자! 그런 결심을 바로 하고 한 달 뒤 이사했습니다. 아내 역시 찬동했기에 걸릴 건 하나 없었어요.”
석봉 씨의 거처는 경남 함양군 마천면 산중턱에 있다. 집 앞으로 펼쳐지는 조망이 기차다.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이 한눈에 쑤욱 들어온다. 거봉(巨峯)을 바라보노라면 뭔가 새삼 거한 꿈이나 참신한 결의가 부푸는 법. 그러나 석봉 씨는 일단 규격화된 도시, 각박한 일상에서 벗어났다는 그 자체로 이미 모든 꿈을 이룬 것과 같은 만족감을 느꼈던 것 모양이다. 귀촌을 계기로 이제 무엇을 새로 시작하겠다거나, 무엇을 하지 않겠다거나, 그런 생각조차 없었다지. 당장 집수리가 화급하기도 했다. 그는 이삿짐을 풀자마자 거처의 환경 보수에 나섰다.
사실 석봉 씨는 ‘환경’에 관한 한 선수다. 젊어 한때 교도관으로 근무했지만, 주로 환경운동가로 분주히 뛰어 중년기를 통과했다. 그의 오랜 거주지였던 진주시의 환경운동연합 상임의장을 맡는 등 열렬한 활보를 했다. 전국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로 지내기도 했다. 이런 그가 돌연 산골로 들어가 처음 한 일이 바로 낡고 헌 옛집의 환경 보수였다. 대대적인 개조가 아니었다. 쓸 만한 기본은 물론, 나무와 흙을 주재료로 지어진 산골집 특유의 소박하고 아담한 본색을 그대로 살린 단장이었다. 그 결과 이젠 시골에서도 흔히 보기 어려운 정갈한 재래식 가옥으로 변신했다. 그게 2007년의 일, 어언 12년이 흘렀다.
“하루아침에 느닷없는 이주를 하자 주변 사람들이 놀랐어요. 환경운동을 하던 사람이 별안간 지리산으로 사라졌다며, 별 쓸데없는 오해들을 하기도 했죠.(웃음) 저로서는 새로운 삶의 서막이었어요. 도시에서는 누리지 못한 자유로운 시간 속에서 감성이라는 걸 되찾을 계기였으니까. 환경운동, 그건 가치 있는 일이지만, 그 이면엔 부대끼고 시달릴 일이 많았습니다. 업무와 사람들에게 말이죠. 삭막한 감성, 그런 걸 느끼며 힘들었어요.”
“감성적인 일상이란 멋진 것이지만, 도시에서나 산골에서나 벌어야만 지속 가능한 생존 조건은 다르지 않겠죠. 생계엔 어떤 대책을 세우셨을까?”
“도시생활을 청산하자 4000만 원 정도가 총재산으로 남더라고. 그걸로 이 집을 샀어요. 은행 대출을 끼고서였죠. 한마디로 돈 없이 들어온 겁니다. 그런데도 걱정이 전혀 없었어요. 아이고, 돈은 물론 농사기술 없지, 무슨 자격증 하나 없지, 산골에서 뭘 해서 먹고사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머리 싸매고 그런 걱정부터 했다면 여길 오지 못했을 겁니다.”
“좌우간 가서 부닥치고 보자! 그게 대책이었어요?”
“느낌이나 용기. 귀농귀촌엔 그런 게 가장 중요하다 생각해요. 그런 게 선행한다면 산골에서 무슨 일을 하든 굶지는 않을 테고요. 아내 역시 경제 문제로 불안해하지 않았어요. 제가 진주에서 환경운동을 하며 박봉으로 겨우 살았어요. 밤엔 아내와 함께 포장마차도 했습니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심하게 애쓰는 삶, 그건 별로 좋지 않다고 봅니다.”
인생에서 가장 평온한 시절 누려
석봉 씨는 세상과 담을 쌓고 지리산 고사리로 살려고 산에 들어온 게 아니다. 백수건달은 더구나 생리에 맞지 않다. 집을 고친 뒤 그는 슬슬 일을 찾았으니 이게 순행(順行)이다.
“현재 제가 1800평 규모의 밭농사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 땅은 아니고, 이웃들의 밭을 빌려 쓰죠. 초기엔 200평 정도를 빌려 농사를 지었어요. 농사로 거둔 생산물들로 한과나 김장김치를 만들어 팔기도 했지요. 농사 외 봄엔 산나물을, 여름엔 오디를, 가을엔 야생오미자를, 겨울엔 얼어붙은 채 나무에 매달린 모과를 따러 다니는 게 일이었고요. 그걸 또 가공해서 판매했고요.”
석봉 씨네 동네는 산촌 특유의 납작하고도 포근한 토담집들이 돌담길 따라 이어져 평화롭다. 초록 물감을 흩뿌리는 숲과 능선과 봉우리들이 마을을 휘감아 어디를 봐도 씽씽하다. 이 청명한 산촌에서 석봉 씨는 뜻밖에도 쓴맛을 경험했다. 마을 사업을 주도하다 도중하차한 것. 그는 원주민들의 동참 유도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한계에 봉착했던 것 같다.
“아쉽더라고요. 마을 공동사업이 차질 없이 진행됐더라면 참 자랑스러운 마을이 됐을 텐데 중도에 올 스톱됐으니…. 마을 사업 성사를 위해서는 때로 관과 맞붙어야 합니다. 그러나 연로하신 분 일색인 마을 주민들은 저항이라는 걸 모릅니다. 사업으로 마을 공동이익이 발생할 것을 알면서도 아예 자기 생각이나 주장 자체를 드러내질 않아요. 과거의 권력자였던 관리들을 아직도 두려워하는 거죠.”
“지리산 산간마을이라는 특성 때문이지 않을까요? 육이오를 처절하게 겪은 트라우마에서 기인하는 소극적 태도…. 빨치산 토벌대로 참전했던 저의 부친은 아직도 지리산 근처조차 가기를 싫어합니다.”
“바로 그겁니다. 낮엔 국방군이, 밤엔 빨치산이 마을을 쥐락펴락했던 세월을 살았으니 그 상처가 얼마나 깊을꼬. 손가락질 한 번에 죽고 사는 세상이었으니 말이죠. 충분히 이해할 만한 기질적 형성이라 봐요. 사실 주민들의 심성은 순박합니다. 작은 것이라도 남에게 신세를 지면 기어이 갚아요. 그게 그들의 오랜 삶의 관습이에요.”
구제받을 길 없는 중생마저 관음보살처럼 살뜰히 보살핀다는 지리산의 슬하라고 하지만, 삶은 이모저모 고역스러워 번뇌를 고이 털어버리긴 힘들 것이다. 그러나 석봉 씨에겐 시름이 없다. 그렇다는 건, 그렇게 보인다는 얘기다. 인생에서 가장 즐겁고 평온한 시절을 누린다는 게 아닌가. 상추씨처럼 흙에 살짝 묻혀 사는 그는, 가족과 함께 담백한 푸성귀 식사를 하는 즐거움을 나날의 꿈이 아롱진 수채화로 여기는 기색이다. 평소의 버릇인 따뜻한 시(詩) 쓰기로, 저 드높은 천왕봉이 소리소문없이 열강하는 겸양의 도리를 가다듬기도 하겠지.
민박 손님이 며느리 된 사연
고리키 왈, 일이 즐거우면 낙원이고, 일이 의무이면 지옥이라지? 석봉 씨는 일이 즐거워 낙원에 사나? 그렇다. 그는 일이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투의 표정을 짓기를 삼가질 않는다. “제가 참으로 좋은 일을 선택했어요!” 그는 그리 당당하고 유쾌하게 토로한다. 대체 무슨 일을 선택했기에 그러나? 민박이다. 민박을 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재미와 만족을 구가하게 되었다는 거다. 들어보자.
“저희 집이 자그만하지만, 본래 모습을 유지해 손질한 덕에 나름 시골집다운 토속적 운치를 되살린 것 같아요. 어느 날 하루를 묵어간 지인이 그러더라고. 저 사랑채가 너무도 근사하다, 시골집에 향수를 가진 이들이 환호할 것 같다, 민박을 한번 해보라! 그 귀띔에 민박을 시작했어요.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죠.”
“살림에 크게 보탬이 됐다는 점에서?”
“물론 가계에 도움이 됐죠. 운이 좋았던 게 뭐냐면, 어느 날 우리 집 앞으로 별안간 ‘지리산둘레길’이 났다는 건데요, 이게 호재로 작용했어요. 상상하지 못한 행운이었죠. 별안간 손님들 발길이 잦아지기 시작했으니까. 그런데 민박을 하는 진정한 즐거움은 수익성에 있는 건 아닙니다.”
“사실 취향에 맞지 않을 경우, 민박도 고달프긴 마찬가지겠죠. 대체 진정한 즐거움이란 뭐죠?”
“제가 환경운동을 하던 도시에서의 나날들은 업무와 타인들, 이 양자 사이에서 냉정한 처신을 해야만 했어요. 감성이나 정감이 끼어들 틈새가 전혀 없는 건조한 관계의 연속이었어요. 그런데 민박 손님과의 관계는 전혀 달라요. 함께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고, 온갖 하고 싶은 얘기들을 나누다 보면 ‘타인’이라는 감각이 사라집니다. 가족적인 유대감이 형성되는 거라. 그러다 보면 단골이 되고, 수시로 안부를 전하고, 진심을 나누게 되고, 그렇게 좋은 관계를 지속하게 되더라고요. 이게 제 즐거움과 만족의 원천입니다.”
쌍방향 여행이랄까. 손님은 석봉 씨의 내부로 여행을 하고, 석봉 씨는 손님의 생각 속으로 여행을 한다. 그는 이 공정하고도 허심탄회한 관계에 쾌재를 부른다. 도시에서 그가 자주 목말라했던 인간관계의 따뜻한 생태계를 민박으로 구현하는 기쁨을 누려서다. 그는 딱 부러지는 성격의 소유자로 보인다. 그런 그의 내면에 웅크린 의외의 사교적 성향이 푸드덕 날갯짓을 해 관계의 신세계로 인도했을 수도 있겠다.
민박이 불러들인 선연(善緣) 혹은 선물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석봉 씨는 민박 손님으로 가끔 찾아들던 한 아가씨에게 깊은 호감을 느꼈다. 참하고 곱살하기 이를 데 없어서. 그는 결국 이 젊은이를 며느리로 맞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제 아들놈이 현재 지리산 환경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합니다. 저 참신한 처녀를 이 녀석에게 소개했는데요, 처음엔 서로 심드렁하더니 어인 영문인지 기특하게도 결혼에 이르렀어요.(웃음) 현재 며느리는 우리 집 아래편에 아담한 카페를 차려 둘레길 탐방객들을 맞이합니다. 손녀도 이미 봤고요.”
“3대가 한동네에 사는 게 불편하진 않으세요? 젊은이들이란 때로 발칙한 도발을 하는 법인데 말이죠.”
“‘저는요, 시골이 너무도 좋아요!’ 며느리의 말이 그렇습니다. 불편도 단점도 전혀 없어요. 아이들에게 제가 가끔 잔소리는 하죠. 과욕을 부린다고 돈이 벌리는 거 아니다. 찡그리며 살아봤자 일이 풀리는 거 아니다. 이 애비가 그랬듯이 바르게, 옳게 살아다오. 나쁜 일을 보고서는 참지 마라. 그렇게.”
“그런데 말이죠. 농사하랴, 민박 손님들 맞이하랴, 선생의 일상이 너무 바쁜 거 아네요? 산중의 낙은 한가하게 노니는 데에도 있지 않나?”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즐기는 것에 무슨 결함이 있을까. 좋아하는 일에 시간을 쓰고, 사랑으로 사람을 만나는 것, 그게 자유롭게 사는 길이며 좋은 삶이라 생각합니다.”
석봉 씨의 집, 꽃그늘 나무그늘이 푸르다. 이 푸른 공기 속에서 별다른 불안이나 허기가 없이 산다면 인생도 소풍처럼 가뿐할 테지. 세상의 광기와 탐욕이 침범하지 못할 것이고.
한 무리의 민박 손님들이 들이닥친다. 오늘도 신났다, 석봉 씨.
김석봉 씨가 주는 귀촌 Tip
•귀촌 준비에 너무 강박감을 갖지 말자. 준비를 충실히 해도 실패할 수 있다. 미장이나 목공처럼 실용적인 기술을 미리 배워두는 건 현명하다. 돈벌이 목적의 귀농이라면 더욱더.
•농사에 미리 겁먹을 필요 없다. 수익은 열악하지만 내가 뜻한 대로의 영농을 할 경우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일테면, 기계나 비료를 쓰지 않는 줏대 있는 농법이 그렇다.
•가급적 마을 변두리에 거처를 마련하자. 원주민들과의 갈등 소지를 줄일 수 있으니까.
•민박을 할 경우엔 일단 돈벌이 목적보다 손님과의 소통을 중시하자. 열쇠만 건네면 그만인 펜션과 달리, 민박은 우정을 나눌 수 있다는 것, 그게 매력이며, 성공의 첩경이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작년 연말 ‘브라보 마이 라이프’ 행사에서 운 좋게 행운의 1등 경품에 당첨이 되었다. 경품은 고속터미널 근처 고급 호텔의 하루 숙식권이었다. 50만 원에 상당하는 경품이라고 했다. 경품 1등이라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 없다며 무대에서 노래 한 곡 하라는 주문까지 받아 ‘빗속의 여인’을 불렀다.
2인용에 금년 3월 말일까지가 유효기간이다. 알아보니 오후 3시 이후에 체크인해서 3시간 동안 클럽에서 칵테일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1박 후 아침 식사까지 제공한다고 했다. 단 조건이 있었다. 일주일 전에 예약해야 하고 성수기인 크리스마스, 연말에는 사용할 수 없다고 했다. 저녁 식사도 포함돼 있지 않았다. 저녁 식사는 밖에서 하거나 호텔 레스토랑에서 별도 비용을 지불한 뒤 해야 한다. 클럽도 여러 명이 갈 경우 2명 초과 인원에 대해서는 추가 요금을 내야 하고 자리가 없으면 입장이 거부될 수도 있다고 했다. 항공사 마일리지를 막상 사용하려면 걸리는 문제들과 비슷했다.
이럴 경우 1순위로 생각할 수 있는 게 여자 친구와의 멋진 하룻밤이다. 단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하이네의 ‘노래들’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아침에 일어나면 나는 묻지요.
오늘은 내 사랑이 찾아오려나?
저녁이면 나는 쓰러져 한탄하지요.
오늘도 그녀는 오지 않았다고.
위의 시처럼 불행하게도 여자 친구와의 멋진 하룻밤 꿈은 물거품처럼 희미하게 사라져갔다. 같이 술 마실 수 있는 상대야 구할 수 있지만, 배우자가 있는 사람들이 1박은 무리라서 결국 혼자 자는 것도 생각해봤다. 그러나 술 취해 잠들고 나면 아침. 한창때 해외 출장 다니던 시절, 고급 호텔을 이용했을 때 그랬다. 그처럼 실속 없고 허망한 일은 없다.
책 ‘혼자 놀기’에서 읽은 대목도 계속 맴돌았다. 저자가 얹혀살던 언니네 집에 언니의 남자 친구가 자고 간다 해서 친구네 집에 가서 하루 자고 올 요량으로 집을 나왔으나 가지 못하고 동네 모텔에서 하룻밤을 보냈는데 제대로 힐링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읽을 때는 공감했으나 막상 내가 실행하려니 좋은 생각 같지 않았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아쉽지만, 남자끼리 가서 실컷 술이나 마시다가 오자는 사람도 있었다. 애인이 있는 후배가 저녁은 자기가 살 테니 숙박권을 넘기라는 제의도 있었으나 내키지 않아 거절했다.
경품권을 손에 쥐고 나서 꿈만 100일 정도 꿨다. 결국 마음대로 안 되고 시간만 가자 오히려 스트레스가 되었다. 이래저래 유효기간이 다가왔고 일주일 전 예약을 감안하면 더 이상 내가 사용하기에는 무리였다. 아프리카 여행 일정이 원래대로 진행됐다면 남은 시간은 더 촉박했다. 그래서 그동안 바빠 얼굴도 자주 못 보던 딸에게 전화를 했다.
딸은 숙박권을 아들 부부에게 넘기자고 했다. 결혼기념일도 다가오는데 좋은 선물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일단 만나야 하니 겸사겸사 식사나 같이하자고 했다. 결국 경품권을 넘겨주기 위해 아들딸과의 단출한 식사자리가 마련되었다. 딸 그리고 아들 부부가 네 살 된 딸과 같이 왔다. 그런데 아들이 마음만 받겠다며 딸에게 티켓을 넘겼다. 딸은 최근 인사이동으로 헤어진 단짝 여자 친구와 같이 1박을 하겠다고 했다. 아파트도 공동명의로 같이 산 막역한 사이다. 밤새 할 말도 많고 특별한 이벤트가 될 것 같다고 했다. 오늘의 식사비용도 그래서 반반 내기로 했단다. 아들딸을 만나 앞으로 이런 일이 없더라도 자주 만나자고 약속했다. 모두 경품권 덕분이다. 내게 좋은 상대가 생기면 현금을 내고서라도 호텔 1박 힐링을 염두에 두겠다는 생각도 이번에 얻은 소득이다. 화이트데이 다음 날 딸로부터 신나는 하룻밤이었다며 감사의 문자를 받았다.
이대로 일만 하다 죽을 순 없다고 기를 쓰고 해외여행을 가는 사람이 있다. 집안 형편이 넉넉해서 놀러다니는 거야 탓할 일이 아니지만 아직은 일을 해야 할 형편인데도 내가 번 돈 다 쓰고 죽겠다고 한다. 아무도 알 수 없는 게 죽는 날이다. 언제 죽을지 예상하고 돈을 펑펑 쓰다가 막상 오래 살게 되면 어쩔 것인가. 생각지도 않은 암 같은 큰 병에 걸려 병원비에 발을 동동 구를 수도 있다. 안타깝게도 돈 때문에 말년에 고생하는 사람도 많이 본다.
이미 종영된 방송이지만 ‘그 여자 그 남자'란 프로그램이 있었다. 부부간의 불화를 본인들이 해결 못해 방송사에 의뢰하면 전문가들이 개입해 원인을 찾고 함께 해결을 모색해나가는 줄거리다. 불화의 여러 원인 중 돈 문제가 적지 않다. 아니 돈을 벌어오지 못해 파생되는 문제가 많다. 자식 우윳값을 친정 부모에게 빌리러 가는 아내의 처절한 심정을 이해한다면서도 남편은 담배를 사서 피운다. 막노동은 몸이 약해서 못하겠단다. 이 일은 이래서 어렵고 저 일은 저래서 못한다는 핑계를 댈 궁리만 한다. 화목한 가정의 중심에는 돈 벌어오는 사내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에 ‘남한산성’과 ‘칼의 노래’를 쓴 김훈이 있다. 이분이 자기 아들에게 쓴 편지글을 읽고 깜짝 놀랐다.
“아들아, 사내의 삶은 쉽지 않다. 돈과 밥의 두려움을 마땅히 알라. 돈과 밥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지 말고 주접을 떨지 마라. 사내의 삶이란 어처구니없게도 간단한 것이다. 어려운 말 하지 않겠다. 쉬운 말을 어렵게 하는 자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 (중략) 사내의 한 생애가 뭣인고 하니, 일언이폐지해서 돈을 벌어오는 것이다. 알겠느냐? 이 말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김훈은 돈과 밥은 같은 것이라 했다. 돈이 있어야 밥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돈의 위력을 제대로 못 느끼는 남자를 볼 때마다 참으로 안타깝다. 인생관이 어떻고 우리 가문이 어떻고 하기 전에 남자는 나가서 돈을 벌어와야 한다. 죽는 날까지 벌어와야 한다. 직접 근로소득을 하지 못하면 벌어놓은 예금에서 이자가 나오게 하든 건물에서 월세가 나오게 하든 여하튼 돈이 있어야 한다. 해외여행하다 낮선 곳에서 객사하지 말고 돈 벌다 가족 품에서 죽어야 한다.
전 국민이 일하지 않고 노숙이나 하고 얻어먹으려고만 한다면 나라가 유지되겠는가? 국가는 무소유주의자가 지켜내는 것이 아니고 돈 버는 사람의 세금으로 유지된다. 돈 많은 사람을 부자라고 부른다. 부자는 자유의 다른 이름이다. 부자는 가난한 사람보다 할 수 있는 게 많다. 먹고 싶은 것 먹고, 입고 싶은 것 입고,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일해서 돈을 버는 사람이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내가 번 돈이라고 나를 위해서만 쓰지 말자. 장학금도 내놓고 가난한 이웃을 위해 기부도 하며 살자. 방문 꽁꽁 닫아걸고 혼자 소고기 구워 먹는 삶은 별로 행복할 것 같지 않다.
나이 들다 보니 죽는 것에 관심이 많아진다. 이미 주변에서 또래 사람들이 죽는 것을 많이 보았다. 젊었을 때는 교통사고 같은 사고사가 많았지만, 이제는 질병으로 죽는 사람이 많다. 부모님들도 연로하셔서 작고하시는 분이 많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그래서 이 나이쯤 되면 죽음에 대비하게 된다. 죽어서 매장을 원하는 사람도 많지만, 요즘은 화장이 대세라고 한다. 그다음은 묻힐 장소로 선산, 공원묘지, 납골당, 삼림욕장 등이 거론된다.
어디서 죽느냐도 중요하다. 그전에는 집에서 임종해야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집이 아닌 곳에서 죽으면 객사라고 하여 불쌍하게 봤다. 그러나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최근에는 병원에서 죽는 경우가 무려 73%라고 한다. 병원도 집이 아니므로 객사에 속한다. 그러나 이 비율은 점점 높아질 수밖에 없다. 고령이 되면 병원에 자주 가야 하고 그다음에는 아예 병원 신세를 지다가 죽는 것이다. 집에는 오지도 못하고 바로 병원 장례식장에서 장지로 향한다.
어떻게 죽느냐도 중요하다. 암 같은 질병이 생겨 고통을 받다가 죽는 경우가 가장 불행해 보인다. 돈은 돈대로 까먹고 그 힘들다는 항암치료와 통증, 그리고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뜨는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졸지에 객사하는 경우가 가장 행복할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쓰러져 죽으면 고통은 순간적이다. 고혈압, 고지혈증을 ‘소리 없는 살인자’라 표현하며 무서워하지만, 죽음의 방법에서는 반드시 회피할 상황은 아닌 것 같다. 적어도 고통만큼은 순간적이다. 고혈압이나 고지혈증을 앓고 있으면 기름진 음식, 술 등을 못 먹게 한다.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살다가 죽는 사람에 비하면 불행이다. 차라리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살다가 심근경색이나 뇌경색으로 죽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지 않고 후유증이 남아 고생하다가 죽을까봐 관리를 하는 것이다.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또는 졸지에 죽음을 맞이했을 때 팬티가 깨끗한지 걱정이 된다는 사람도 있다. 죽으면서도 남들 눈을 의식하는 것이다. 쓸데없는 걱정이다. 죽고 나면 그만이다. 본인을 중심으로 보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죽을 때도 남을 의식하는 병폐다.
요즘 나는 여행을 자주 다닌다. 고산병 위험을 무릅쓰고 히말라야에도 가고 각종 전염병이 있다는 아프리카에도 갈 예정이다. 교통수단도 위험하고 여행지에서도 각종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위험하다며 말리는 지인이 많다. 그러나 하고 싶은 것 하다가 죽는 것도 행복이라고 본다. 위험하다고 집에서만 있다가 죽을 수는 없다. 사고로 죽을 수는 있지만, 확률적으로 사고 없이 잘 다녀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히말라야 고봉을 등정하다가 사고로 죽은 등산가도 많다. 그 사람들은 객사를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슬람교에서 해마다 성지순례를 하다가 죽는 사람도 많다. 왜 그런 위험을 감수하느냐고 물으니 성지순례 하다가 죽으면 천당에 간다며 축복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객사(客死)이자 내가 만들어낸 말이지만, 도사(道死))인 것이다.
‘차마고도’에 대해서는 자주 들었지만 그동안 관심이 없었다.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먼 나라 얘기로만 들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히말라야 트레킹을 같이 다녀온 일행들이 랑탕, 무스탕에 이어 차마고도 얘기를 자주 꺼냈다. 히말라야의 엄청난 대자연 속에서 느낀 감동이 아직 지워지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러던 차에 오래전 KBS TV에서 방영되었던 다큐멘터리 ‘차마고도-마지막 마방’ 편과 ‘순례의 길’ 편을 감명 깊게 감상했다. ‘차마고도’는 말 그대로 ‘Tea-Road’, ‘茶馬古道’라 하여 중국의 차(茶)와 티베트의 말(馬)을 교환하기 위해 개통된 교역로다. 중국과 티베트, 네팔, 인도를 잇는 산악 무역로다. 실크로드보다 200여 년이나 앞선 기원전 2세기 이전부터 존재해 있던 길이었는데 이후 도로가 확장되고 차가 다니는 시대가 되자 ‘마지막 마방’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 같다. 해발 4000m가 넘는 험준한 길과 5000m 이상 되는 눈 덮인 설산의 아찔한 협곡을 잇는 길이다. 이 험준한 산길은 모두 인간이 만들어냈다. 교역품은 주로 차와 말이었지만 중간 마을과 종착지인 윈난성의 여정에서는 소금, 약재, 곡식 등의 다양한 물품의 교역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다큐멘터리 ‘마지막 마방’에서는 티베트의 송이버섯을 염장해 보관하고 있다가 중국 윈난성에 갖다 파는 여정을 그렸다. 말에 짐을 잔뜩 싣고 산 넘고 물 건너 고생을 한 대가가 1인당 100만 원 정도. 그 정도면 좋은 가격이란다. 말을 운송 수단으로 쓰는 것은 히말라야에서도 자주 보던 광경이다. 트레킹 도중 말이 나타나면 몸을 산 쪽으로 붙이라는 안전수칙을 가이드로부터 귀가 따갑게 들었다. 절벽 쪽으로 비켜서다가 자칫 말에 밀리기라도 하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시체도 못 찾는다고 했다. 차마고도에서도 이런 상황이 가장 위험하다고 했다. 또 말에 실린 짐이 잘못되어 풀어지거나 말이 발을 헛딛어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지면 줄지어 오던 다음 행렬에도 타격을 준단다. 차마고도를 오가는 사람들은 아내와 형제가 같이 살거나 형제가 한 여자를 아내로 맞는다고 했다. 형제 중 한 사람이 먼 길을 떠나야 하고 남아 있는 형제는 농사를 지어 그동안의 생계를 유지해야 하니 형제공처의 풍습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어 보였다.
두 번째 테마는 ‘순례의 길’. 쓰촨성에서 티베트의 수도인 라싸까지 2400km를 이마, 두 팔, 양 무릎을 땅에 대며 ‘오체투지’로 6개월간을 가는 순례를 소개했다. 3명의 오체투지 순례자와 이들의 짐을 실은 리어카를 끄는 사람 2명이 일행이다. 하루 6km 씩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순례의 길을 이어갔다. 가다가 죽으면 오히려 영광이라며 시체를 토막 내어 독수리 밥으로 내어 놓는다. 종교의 힘은 무섭다. 무슨 죄를 얼마나 지었기에 그런 고통을 감수하는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그들은 이마에 멍이 들고 무릎 관절이 퉁퉁 부어도 길을 간다. 육포나 옥수수 말린 약간의 곡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잠은 노지에서 간단한 이불과 비닐포대를 덮고 잔다. 이 고통스런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정화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다. 최종 목적지인 라싸의 조캉 사원에서는 10만 배 절을 한다. 우리나라보다 행복지수가 월등히 높은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4박 5일 정도의 일정으로 떠나는 차마고도 트레킹 관광 여정을 요즘 자꾸 들여다보고 있다. 비용도 130만 원대로 욕심내볼 만하다. 히말라야 트레킹을 할 때 너무 힘들어 다시는 오지에는 가지 않겠다던 결심이 벌써 흔들린다. “히말라야에 와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온 사람은 없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제 알겠다.
최근 뉴스에 안타까운 사건이 보도됐다. 우리나라 유학생이 그랜드캐니언으로 여행을 갔다가 실족해 병원에 실려 갔는데 병원비가 10억 원이나 나오고 국내에 오려면 2억 원의 비용이 더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라 고국으로 오지 못하고 있다는 사연이었다. 여행사는 가이드가 조심하라고 경고한 장소에서 일어난 일이라며 책임을 미루고 있다는데 해결이 어떻게 날지 결과가 매우 궁금하기도 하고 안타까운 마음이다.
여행지에서는 가이드 안내에 잘 따라야 한다. 이번 사건으로 나도 어느 날의 기억이 떠올라 새삼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시 생각해보면 우습기도 하지만 그 당시엔 정말 심각했었다. 그때 40여 년간 만나온 동창 7명은 홍콩으로 단체여행을 떠났다. 다들 경험했겠지만 여자 7명이 마음 맞춰 여행을 떠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래도 어찌어찌 날짜를 맞춰 출국을 하게 됐다.
낯선 여행지에서는 가이드 역할이 참으로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운 없게도 아르바이트 날라리(?) 가이드를 만났다. 물론 가이드 입장에서는 다양한 여행객들을 인솔하는데 어려움이 있고 책임을 져야 하는 부분도 있어서 그랬겠지만, 너무 자주 경고를 하면서 겁을 줬다. “홍콩에서는 여러분이 하는 영어로는 통하지 않는다. 길을 잃으면 찾아올 수 없다. 그러니 절대 자리를 이탈하지 말라”고 했다.
어쨌든 홍콩에서의 관광은 시작되었고, 여행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들은 신이 났다. 그리고 여행 셋째 날, 우리는 옵션 여행을 하지 않고 우리끼리 자유시간을 가졌다. 간단한 영어로 택시도 타고 침사추이 다운타운에서 아울렛 구경도 하고 망고 주스와 아이스크림도 사 먹고 예쁜 카페에서 커피도 마시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사건은 마지막 날 공항에서 벌어졌다. 가이드는 “비행기 타기 전까지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으니 유명한 홍콩 공항 쇼핑을 하고 안녕히 돌아가시라”면서 “혹시 시간이 좀 늦어도 승객이 한 명이라도 타지 않으면 이륙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홍콩 공항은 정말 크고 넓다. 우리는 각자 선물도 사고 쇼핑도 하러 다니다가 뿔뿔이 흩어졌다. 물론 비행기 타는 시간에 맞춰 탑승구 앞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나는 초콜릿과 과자를 사려고 가게에 들어갔다가 친구들과 헤어졌지만 비행기 시간을 자주 체크하며 약속시간에 맞춰 지하 전동차를 타고 탑승구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탑승 시간이 촉박한데도 친구 3명이 오지 않았다. 비행기 탑승 시간 10분 전쯤 되니 승무원이 어서 비행기에 오르라며 재촉했다. 우리는 일행 3명이 아직 안 왔으니 잠시만 더 기다려 달라고 부탁을 했지만 당장 탑승하지 않으면 다른 손님들을 기다리게 할 수 없어서 그냥 떠나겠다고 했다. 그 순간 우리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모른다. 우리끼리 먼저 타야 하는 게 옳은 건지, 탑승을 포기하고 기다리는 게 나은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결국 우리는 탑승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남겨진 친구들한테는 배신자가 된 듯한 느낌도 들고 그 친구들 걱정도 돼 인천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침울할 수밖에 없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관계자에게 물어보니, 비행기를 못 탄 친구들은 대한항공을 타고 돌아오게 되었다고 알려줬다. 그제야 우리는 안심하고 웃을 수 있었다. 우리는 저가 항공사 비행기로 왔는데 대한항공 비행기 온다니 더 잘됐다며 서로를 위로했다.
그 친구들은 비행기 값을 더 지급했을 텐데 말을 안 해준다. 쇼핑 때문에 비행기 탑승 시간을 놓쳤다는 사실이 창피하다면서. 어쨌든 실수가 있기는 했지만 여행은 무사히 마쳤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고민할 문제는 아니었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시간은 잘 지켜야 한다는 교훈은 얻었다. 한 사람이라도 오지 않으면 비행기가 떠나지 않는다는 가이드의 말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가이드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우리가 잘못한 걸까. 지금도 우리는 모임에서 가끔 그날의 이야기를 하며 추억을 떠올리곤 한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 50대 중반의 대기업 임원 출신들이 모였다. 그들은 앞으로 계속 퇴직하는 이들이 늘어날 텐데, 함께 의미 있는 활동을 해보자고 의기투합했다. 그렇게 40명이 뜻을 같이하기로 했고, 이름을 ‘엔슬(ENSL)’이라고 지었다. ‘Executive Network for Second Life’의 약자다. 그리고 법적 실체가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협동조합으로 등록했다. 엔슬협동조합의 탄생이었다. 공덕동 서울 허브센터에 있는 엔슬협동조합의 배영효 이사장, 송덕호 이사를 만나 고수들의 고민과 이념과 가치, 미래 비전을 들어봤다.
“엔슬의 활동은 인생을 향유하고, 사회에 봉사하고, 배움을 추구하는 겁니다.”
지난 4년 동안 엔슬협동조합 이사장을 맡고 있는 배영효 이사장은 엔슬은 하나의 실험이라고 밝혔다. 수십 년 동안 한 분야에 몸담고 있다가 퇴직한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유익하게 시간을 보내고,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것인가는 우리 시대의 커다란 과제임이 분명하다. 엔슬은 엔슬의 방식으로 이런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다.
“엔슬이 성공을 거둔다면 다른 많은 사람에게 좋은 선례가 되고 우리 사회에 큰 공헌을 하는 것이 되겠지요. 또한 우리의 시행착오와 경험도 앞으로 같은 길을 걸어갈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행, 지식 나눔, 재취업, 스타트업 투자까지 경험
인생을 즐기고, 봉사하고, 배운다는 차원에서 지난 4년 동안 엔슬은 다양한 활동과 경험을 했다. 여행과 답사, 지식 나눔, 재취업, 창업 멘토링과 스타트업 투자까지, 엔슬협동조합 회원들은 퇴직자들의 도전과 실수와 보람 등을 모두 겪었을 것이다. 그것들이 엔슬협동조합의 유의미한 데이터로 쌓여 있다. 예를 들어 serving, 즉 봉사활동을 봐도 그렇다. 그들의 봉사활동은 이웃돕기 같은 차원의 활동이 아니다.
“기업 경력이 30년 넘는 임원이 많다 보니 그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활동을 벌여왔지요. 최근 창업이 붐이잖아요. 대부분의 창업자가 젊은 친구들이고요. 아이디어와 패기를 가진 창업자라 해도 네트워크나 사업 전개 방식 등에 있어서는 부족함이 있죠. 그래서 우리 멤버들과는 상호 보완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겁니다. 엔슬은 숙련된 전문가들이 멘토링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습니다. 아직 규모는 작아 실험적 단계입니다만, 회원들이 일정 금액을 모아 스타트업 투자도 하고 있고요. 창업 멤버들 중 일부는 투자 전문 기업을 창업하기도 했습니다.”
그루라고 해도 끝까지 성장하고 싶어 한다
내부적으로는 투자 기업 형태의 실험도 진행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엔슬은 회사가 아니다. 따라서 엔슬 조직은 위계도 없고, 멤버들이 보상을 받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조직이 유지되느냐? 의미 있는 활동을 할 수 있느냐?’ 하는 질문들이 있을 수 있다.
“조직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어떤 일을 해야만 하고, 그 일을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거겠지요. 기업이라면 계층 구조 아래 급여를 주면서 일을 시키지만, 엔슬은 그런 조직하고는 다릅니다. 멤버들끼리 품앗이를 하면서 일을 합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서로의 기대도 다르고, 상대에게 강요할 수 있는 관계도 아니고요. 이런 상황 속에서 40명의 멤버가 4년간 활동해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엔슬이 지향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바로 ‘사회적 의미가 있는 일을 하자’이다. 송덕호 이사는 ‘사람과 함께 활동하고자 하는 이들이 오는 곳’이 엔슬이라고 했다.
“퇴임 후 시간 보내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죠. 집에서 쉬고 싶고, 돈이 많으니 골프나 치면서 살겠다는 사람은 엔슬에 오지 않아도 됩니다. 공부라든지, 성장하길 원하는 사람이 오면 됩니다. 공부와 성장은 혼자만으론 힘듭니다. 멀리 가려면 같이 가야 하니까요. 그 니즈를 아는 사람이면 되는 것입니다.”
엔슬은 녹슬지 않는다
2019년의 엔슬은 큰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 과거에는 아는 사람끼리 활동을 해왔지만 이제는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일 계획을 갖고 있다.
“2019년의 가장 큰 변화는 신입회원 모집입니다. 지난 4년간은 초창기 멤버들만 활동을 해왔는데 엔슬도 하나의 조직으로서 신진대사를 해야 할 것 같아 신입회원을 모집하기로 했습니다. 협동조합은 조합원의 상호 작용으로 가치를 창출해야 하는 조직입니다. 품앗이가 제대로 이루어져야 하는 거지요. 그래서 새해부터는 모든 회원이 하나 이상의 역할을 맡기로 했습니다. 무임승차(free riding)를 줄이는 것이 이런 성격의 조직을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엔슬의 변화는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그 의미는 엔슬의 가치가 학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성장과 배움을 이루려면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든지 새로운 환경에 노출되든지 해야죠.”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과거의 관계들로 이뤄져 있다. 과거에 어디서 태어났느냐, 학교가 어디냐, 어떤 직장을 다녔냐 등등. 특히 시니어 세대를 이루는 50~60대는 고등학교와 대학교 동창 모임, 직장 선후배 모임, 종교 모임, 기타 취미활동 동호회 등이 인간관계의 주된 축이다. 미래지향적이라기보다는 과거지향적 관계들인 것이다.
“내가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만나야 발전할 수 있죠. 예를 들어 평소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인문학, 물리학, 블록체인 등의 내용을 처음 접하면서 사유를 넓혀가듯 말이죠. 그래서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끼리 만나는 게 중요하다고 결론을 내린 겁니다.”
‘계급장을 떼고 진짜 새로운 사람과 일을 해보자.’ 엔슬은 그렇게 과감한 판단을 내렸다. 물론 새로운 사람과의 관계가 무조건 장밋빛 미래를 가져오리라는 보장은 없다. 좋은 일도 있겠지만 리스크도 있을 것이다. 기업에서 수십 년간 일하며 온갖 사람들을 다 만났던 베테랑 엔슬 멤버들이 그런 문제들을 인지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평적 관계로서,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게 얻는 게 더 많으리라는 답을 내린 것이다.
당장의 욕구는 인생의 지향점이 될 수 없다
배영효 이사장에게 엔슬의 회원이 될 수도 있는 이들, 바로 곧 퇴임할 베테랑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에 대해 묻자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답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니, 무얼 어찌하라고 말하기는 어렵겠지요. 다만 ‘시간을 잘 쓰자’ 정도의 말은 누구에게나 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시간을 잘 쓴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생각을 많이 해봐야 할 것 같아요. ‘Happiness is not a destination. It is a way of life(행복은 목적지가 아니고 삶의 한 방법이다)’ 라는 개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생은 아무 문제없는 상태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고, 개인마다의 지향점이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그 지향점 찾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보통 정년이 되어 퇴직할 때가 되면 온갖 욕망들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다. 배 이사장은 그런 욕망이 지향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보통은 옷을 벗고 나올 때 하고 싶은 것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런 욕구가 목적이 아닙니다. 회사에서 빨리 탈출하고 싶은 마음에 생기는 욕구이지요. 억압이 풀리면 그 욕구 역시 의미가 사라져요.”
구루가 되기 위한 출발선에 선 사람들
엔슬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단어가 있다. 바로 구루(guru)다. 자신들을 구루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직장에서 오래 생활했다는 것만으로 구루라고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엔슬은 구루 모임이 아니라 구루가 되고자 하는 이들이 오는 자리라는 것이다. 즉, 엔슬은 인생의 끝이 아니라 그 반대로, 구루로서의 첫걸음을 지향한다.
“구루가 되려면 우선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지식을 아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지혜가 중요하죠. 지혜로운 사람은 향후의 변화를 읽을 수 있고 그걸 품을 수 있습니다. 자세히 아는 게 아니라 변화를 마음에 품고 사물을 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배 이사장이 인생의 고수야말로 진정한 구루라고 말하자, 송 이사가 받아서 좀 더 구체적으로설명했다.
“구루가 되기 위해서는 네 가지 포인트가 있다고 봐요. 첫째는 살면서 성장하겠다는 욕구죠. 모든 사람이 성장하려 하지는 않거든요. 둘째는 분야를 정해야 합니다. 분야가 너무 많으니까요. 셋째는 과거와 무관치 않다는 것. 과거를 무시하고 구루가 되기란 쉽지 않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걸 경험해보겠다면 즐길 수는 있지만 구루가 되기란 어렵죠. 넷째는 십 년은 더 활동해야 한다는 겁니다.”
4년을 걸어온 엔슬의 새로운 도전은 2019년부터 전개된다. 신입회원은 최근 1~2년 내에 퇴임한 대기업 임원들을 중심으로, 2019년 1~2월에 걸쳐 모집 선발하고, 3월에는 오리엔테이션 프로그램을 운영할 예정이다. 그들이 바라는 구루의 길이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찾는 고수들에게 어떤 모델로 제시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