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은 크지 않으나 용장골 냇물은 순수하고 곱살하다. 남산 특유의 허연 화강암 암반과 암벽도 곳곳에서 풍치를 돋운다.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 용장주차장에 파킹하고 이정표를 따라 용장골을 탐승한다. 용장사지까지는 약 2㎞. 용트림하는 아름드리 노송들과 수많은 불상을 볼 수 있는 삼릉골 코스를 통해 용장사지에 오를 수도 있다.
경주 남산을 ‘노천박물관’이라 부르는 건 신라의 유적이 많아서다. 능선과 골짜기에 산재한 절터만 100여 곳이다. 불상, 석탑, 석등, 연화대 등 불교 유산이 200기 이상에 달한다. 이 산을 통째 ‘불국’(佛國)으로 봐도 지나칠 게 없다. 남산을 오르는 탐방로는 20여 개. 그 가운데 수려한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용장골 코스가 썩 빼어나다.
산길이 평평해 활개 치며 걷기에 마땅하다. 그러나 대수롭지 않은 오르막에도 헐떡거린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도 노루처럼 날래게 산을 오르던 때의 몸이 아니다. 이럴 때면 몸을 흘러간 과거 시간의 형적을 느낀다. 아울러, 지금 옷깃을 스치며 지나가는 시간의 기척을 깨닫는다. 기억해야겠다. 다시 오지 않을 이 순간이 삶의 절정임을.
여름 나무들은 크거나 작거나 다들 풍요롭다. 초록 잎사귀들이 허공에 뒤엉켜 길 위로는 푸른 그늘이 내린다. 계류는 참 맑고 풍성하다. 좁은 목에서 돌돌거리던 물소리가 여울에선 솰솰 소용돌이친다. 바위 턱을 만나면 쿵쿵쿵 소쿠라진다. 각색의 물소리가 흥겹다. 물은 제 갈 길 가는 게 즐거운가? 낮은 곳으로, 한사코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하심(下心)으로 흐뭇한가? 사람이 물처럼 살기는 어렵다. 용렬한 자에게 물은 준령처럼 너무 높다. 분수를 알아 조신하게 살기에도 숨이 차 마냥 푼수로 산다. 임제 선사가 이렇게 일렀다.
산은 산, 물은 물, 그대로 두라
하필이면 서쪽만 극락이랴
흰 구름 걷히면 청산인 것을
임제는, 사람들아, 평상심 안에 길이 있다! 그리 귀띔한다. 너무 폼 잡지 말라 한다. 너무 멀리 보지 말라 한다. 산과 물에 기죽어 현기증 느끼지 말라 한다. 극락이 무슨 서천(西天) 허공에 있겠느냐. 지금 네가 발 디딘 자리가 환한 길이다. 저기가 아니라 여기가 청산이다. 그리 가르친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설잠교(雪岑橋)를 건너자 길이 가팔라진다. 설잠은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의 법명으로, 그가 무시로 오간 길목이라 봐 설잠교라는 이름을 붙였다. 김시습이 생의 한때를 이곳 남산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용장골 탐승은, 이 산의 바람소리이거나 물소리이거나, 나무이거나 바위이거나, 하다못해 환(幻)이거나 혼이거나, 그 무엇이로건 가슴으로 느껴질 법한 김시습의 잔영을 탐사하는 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의 생애는 처연했으나, 행장은 올곧았고 정신은 자유로웠다. 나는 좀스러워 쓸쓸하나 일쑤 김시습을 생각하며 위안을 느낀다. 다산, 추사, 그리고 김시습을 조선의 3대 ‘매력남’이라 여기며.
비탈길에 접어들면서 땀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몸은 어리굴젓처럼 물크러지는 기분이니 가관이다. 그러나 짤막한 비탈이라 잠깐 사이에 목적지로 삼은 용장사지(茸長寺址)에 닿는다. 절터라지만 여겨볼 게 없을 지경으로 산등성이의 비좁은 둔덕이다. 그래서겠지, 절터 저편 위 평지나 암벽에 성물을 조성했다. 용장사곡 삼층석탑(보물 제186호), 용장사곡 석불좌상(보물 제187호),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보물 제913호)이 그것들이다. 삼층석탑은 균형미로 아름답고, 마애여래좌상은 사실적 표현으로 생생하다.
가련한 건 석불좌상이다. 머리를 잃은 부처이니 딱하다. 그러나 부처에게 무슨 머리가 필요하겠나. 머리를 버리는 게 부처다. 번뇌가 고이고, 망상이 들솟는 머리를 타파한 게 부처다. 그걸 모르고 우리는 간장종지처럼 비좁은 머리에 의존한다. 잔머리를 최대치로 쓰며 골머리 아파한다. 부처는 이런 중생이 가여워 울고 싶은 심정일 게다.
김시습은 이곳 용장사에서 조선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집필했다. 글을 쓰면서 그가 사용한 게 주로 머리였을까? 머리보다 뜨거운 가슴으로 쓰지 않았을까? 절개로 살았던 생육신(生六臣)의 하나였던 김시습은 타락한 권력의 바깥에서 시대를 절규한 방외자(方外子)였다. 곡학아세의 선수들을 조롱한 아웃사이더였다. 세상이 울지 않을 때 울었고, 세상이 웃지 않을 때 웃었던 독존(獨存)으로 일세의 신화가 되었다. 그리고 그가 유랑한 길섶엔 기화(琪花)처럼 요요한 게 피었으니 바로 시라는 꽃이었다. 김시습이 생시에 남긴 죽음의 메시지는 매우 조촐한 것이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저 ‘꿈꾸다 죽은 늙은이라 써주구려!’라 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