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있는 일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모습. 허송세월의 정의다. 새해를 허송세월로 지내고 싶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보다는 매 순간 의미 있는 일들로 꽉 찬 한 해를 바랄 테다. 윤정구(64) 이화여자대학교 경영대학 교수는 이를 위해선 체험하는 시간의 개념인 ‘카이로스’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카이로스는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기회의 신’으로도 불린다. 인생의 기회는 경험의 시간을 사는 가운데 맞이하는 선물과도 같다.
하루 24시간 1년 365일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일정한 속도와 방향을 갖고 기계적으로 흐르는 시간을 크로노스(Kronos)라 한다. 윤정구 교수가 언급한 카이로스(Kairos)는 경험을 통해 형성되는 특별한 시간이다. 가령 똑같은 10년이라도 허송세월로 보내는 이에게는 마치 100년처럼 길게 느껴지겠지만, 다채로운 경험을 통해 바삐 사는 이에게는 1년처럼 짧게 여겨질 수 있다. 절대적인 시간(크로노스)은 10년이더라도, 상대적 시간(카이로스)이 저마다 다른 것이다. 즉 크로노스는 양적인 시간, 카이로스는 질적인 시간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인사조직 전략, 조직경영 개발 등을 연구해온 윤 교수는 이런 차원에서 접근할 때, 현재 노동 현장에서 적용하는 시간의 개념도 달라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세상이 바뀌는데, 여전히 시간 개념은 산업화 시대 생산 노동자에게 적용했던 방식에 머물러 있어요.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를 벗어나지 못한 거죠. 아직은 주 5일 근무가 일반적인데요. 가령 자신의 능력을 최대로 활용해 회사에 약속한 일을 끝내는 데 4일이 걸렸다고 쳐요. 주 5일이라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채우지 않았지만, 카이로스의 시간으로는 목표를 달성한 거잖아요. 그런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혁신은 일어날 수 없어요. 시간으로 산정한 임금이 책정되는데, 근로자가 애써 생산성을 늘리는 혁신을 감행할 이유가 있나요.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재택근무 등 일터에서의 논쟁 대부분이 본질을 벗어났다는 걸 알 수 있죠.”
기술의 민주화 시대, 나이의 한계를 뛰어넘다
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둔 현재, 일자리 이슈 중 하나는 ‘정년 연장’이다. 윤 교수는 카이로스의 개념에서 볼 때 은퇴 기준점을 ‘나이’로 책정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생각이라 지적했다.
“양적인 시간으로 책정된 나이만 고려한 거예요. 개인의 경험이나 노력 등 질적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느냐에 따라 카이로스 개념에서의 나이는 다를 수 있죠. 결국 회사가 고객에게 약속한 가치를 자신의 인적 자원을 통해 누가 더 많이 창출하느냐가 관건이잖아요. 한때는 젊은 직원들이 기술을 습득하고 활용하는 능력이 뛰어나 인정받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아요. 생성형 AI나 로봇 등이 보편적으로 보급되면서 누구나 기술에 대한 접근이 가능해졌기 때문이죠. 코딩, 알고리즘 등에 대한 지식이나 전문 자격증이 없어도 챗GPT 같은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처럼요. 이러한 기술의 민주화, 전문성의 민주화로 나이와 같은 태생적 요인이 인적 자본에 미치는 영향이 크게 줄었어요.”
최근 인공지능의 발달로 수많은 직업이 사라지거나 대체되리라는 우려가 적지 않다. 일각에서는 고령자 일자리가 더욱 위협을 받으리라는 예측도 있었다. 그러나 윤 교수는 이러한 시대 변화가 고령자에겐 기회라고 역설했다. 카이로스의 또 다른 이름(기회)처럼 말이다.
“그동안 기술이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는 수단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해왔다면, 이제는 조직의 공유된 목적을 위해 기술과 인간이 협업하는 관계로 설정해나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나이와 무관하게 생산 프로세스를 최적화하는 대안적 방법들이 마련될 수 있죠. 이때의 기술은 고령자에게 오히려 득이 됩니다. 고령 인력이 지닌 체력이나 모빌리티(기동성·유동성)의 한계를 상당 부분 해결해주니까요. 즉 정년을 따질 것 없이 기술과 잘 협력하면 장기간 안정적인 직장생활도 가능하리라 예상해요.”
대한민국의 미래는 고령 인력에 달렸다
지난해 말 한국고용정보원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노인 부양비(20~64세 100명당 65세 이상 인구)는 날로 증가하며, 2075년에는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할 전망이다. 한편 고령 경제활동 참가율은 OECD 주요국을 웃도는 동시에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지만, 급증하는 노인 부양비를 감당하긴 쉽지 않아 보인다. 이렇듯 우리 사회의 저출산·고령화 문제에 대해 윤 교수는 고령 인력 활용이 단초 역할을 해낼 수 있으리라 진단했다.
“당장 저출산 문제를 해결한다 해도, 그 아이들이 경제활동 인구로 성장하려면 20년을 기다려야 해요. 그나마 현실적인 대안이 고령자 중 아직 활용되지 않은 인력을 동원하는 겁니다. 최근 매킨지 보고서를 보면 정년퇴임을 했는데 일을 안 하거나, 정년퇴임을 준비하는 이들이 경제활동에 참여하면 GDP가 얼마나 올라갈지를 예측했어요. 그 결과 우리나라의 경우 GDP의 14.7%가 성장한다고 나와요. 비교된 20여 개 국가 중 1위를 차지했을 만큼(일본 8.6%, 미국 7.2%, 영국 4.8% 등) 월등히 높은 수치죠. 우리가 매년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경제성장률이 2% 미만이잖아요. 고령 인력의 활용이 돌파구가 될 수 있다는 얘기예요. 그렇게 당분간 대한민국의 미래는 고령 인력에서 찾아야 합니다.”
고령 인력은 조직원으로 일하기도 하지만 리더의 위치에 놓인 이가 상당수다. 저서 ‘진성 리더십’을 펴내고 대한리더십학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리더십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해온 윤 교수는 중장년·고령 리더들이 거버넌스의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 세계적으로 거버넌스가 역피라미드 구조로 바뀌고 있어요. 가령 글로벌 기업 리더들은 조직원들에게 이렇게 설명해요. 회사는 일종의 플랫폼이고, 리더는 그런 플랫폼을 디자인하는 사람이고, 이것들을 이용해서 네가 얼마나 성장할 수 있는지 증명해보라는 식이죠. 즉 회사보다는 개인의 성장을 위한다는 취지인데, 이렇게 말해도 직원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토로하는 분들도 있어요. 솔직히 말해 그건 진정성이 없어서일 가능성이 큽니다. 속으로는 회사의 성장과 이익을 우선하면서 겉으로만 그 직원을 위하는 것처럼 포장했기 때문이죠. 말뿐인 독려라는 걸 직원들도 느낄 텐데, 동기부여가 되지 않을 수밖에요.”
리더 입장에서 진정성을 갖기 힘든 건 직원에 대한 신뢰가 영글지 않은 탓도 있겠다. 신뢰라는 건 상호의 개념이다. 그런 점에서 윤 교수는 서로 간의 ‘신뢰 자본’을 만드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A라는 사람이 내게 100만 원을 빌려달라 했을 때 그 돈을 못 받을 걸 전제로 손해를 감수하고 빌려준다면, 신뢰 자본 100만 원이 생긴 셈이에요. 반대로 A도 나에게 그렇게 해준다면 둘 사이의 신뢰 자본은 200만 원이 되죠. 그렇게 신뢰라는 건 서로가 상처받을 개연성에 대해 인정하는 거예요. 그러니 손해를 전혀 안 보겠다고 생각하는 관계에서는 신뢰가 생길 방법이 없어요. 그런 신뢰의 결여 때문에 요즘 젊은 조직원 중에는 공정성 같은 덕목을 따지는 이들이 많은 편입니다. 서로가 손익 계산기를 두드리는 거죠. 결국 그런 상황에서는 건강한 조직을 기대하기 어려워요. 이럴 때 리더가 할 수 있는 일은 긍휼감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긍휼감은 공감이나 연민을 넘어서는 행동 지향의 도덕적 정서인데요. 긍휼감을 가진 리더는 조직원의 고통도 자신의 것으로 내재화해 함께 풀어가려 하죠. 이런 태도를 보였을 때 조직원들도 리더에게 진정성과 신뢰를 느낄 수 있다고 봐요.”
우리 사회 빙산의 밑동을 복원하는 시간
현실적으로 흘러가는 크로노스의 시간 앞에 윤 교수의 정년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나 카이로스의 시간 속에서 건강한 조직과 리더십, 지속 가능한 기업에 대한 연구를 이어갈 예정이다. 그는 특히 기업의 근간이 되는 조직원들의 고통을 눈여겨보고자 한다.
“조직에서 직면한 거의 모든 문제는,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고통을 해결하지 않고 오랫동안 돌보지 않은 결과예요. 돌봄을 받지 못한 고통이 문제로 터져 나왔을 때, 많은 리더가 원인인 ‘고통’을 해결하지 않고 밖으로 드러난 ‘결과’만 봉합하려 하죠. 일단 그렇게 문제를 덮고 시작하기 때문에 근원적 해결이 불가능하고, 반복되는 거예요. 조직과 경영을 연구한 학자로서 늘 안타깝게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그는 빙산의 형상에 비유해 설명을 이어갔다. 기업의 경우 수면 위로 드러난 빙산의 일각, 즉 핵심 사업이나 수익을 키우는 데 주목한다. 그러나 이러한 빙산의 윗동이 잘 성장하려면 이를 잘 지탱하는 수면 아래 밑동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 밑동에 비유할 수 있는 게 바로 조직원이다.
“눈에 보이는 비즈니스 모델을 강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밑동을 이루는 조직원들의 고충이나 아픔에 대해 인정하고 치유하는 노력이 필요해요. 이러한 현상은 기업에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전반적으로 정치•종교 등 우리 사회 전 분야에서 이런 밑동을 간과한다고 생각해요. 정년퇴임 후에는 잃어버린 밑동을 어떻게 복원해나갈 것인가에 대해 더 깊이 연구하며 카이로스의 시간을 채워가려 합니다.”
건강을 잃고서야 절절한 심정으로 세상과 자신을 돌아보는 게 사람이다. 위중한 병을 얻었을 때 인생의 유한함을, 시간의 소중함을 비로소 뼈저리게 절감하며 새롭게 눈을 뜬다. 함지애(58, ‘지애의 봄향기’ 대표)는 40대 때 폐암 1기 선고를 받고 투병을 했다. 용케 조기에 발견된 암인 데다 수술이 잘돼 예후가 좋았다. 천운으로 병마를 다스렸으니 정상적인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을 듯싶었다. 하지만 얼마 뒤 폐암보다 무섭다는 폐섬유증(폐가 굳어지면서 심각한 호흡 장애를 불러일으키는 질환)이 다시 기습했단다. 어이하나? 어떻게 일어서야 하나? 폐섬유증 수술을 마친 함지애는 고심 끝에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인 김제로 내려갔다. 그건 요양을 위한 낙향이었지만 귀농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남은 인생을 덤으로 여기고, 이제 시골에서 제대로 한번 잘 살아보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다는 점에선 당찬 투신이자 기꺼운 모험이었다.
서울에 살 때 그는 의류유통업을 했다. 중년에 이르기까지 긴 세월을 동대문 상가, 남대문 상가에서 뛰었다. 뛰더라도 그냥 뛴 게 아니라 경주마처럼 열렬한 질주를 했나? 그의 가게엔 자주 고객들이 줄을 섰다지. 아마도 그의 천성일 패기와 근성이 성과를 불러들였던 것 같다. 마침내 자수성가로 우뚝하게 일어선 이라는 소리를 듣기에 이르렀다. 몸에 중병이 찾아와 위세를 부리는 일이 없었다면 서울을 뜰 일이 없었으리라. 시골살이? 그건 그의 사전에 아예 없었다. 생각만으로도 시골 생활은 무섭고 싫었다고 한다. 그러나 병을 통과하면서 생각이 변했다. 삶의 방향이 확 바뀌었다. 이렇게 뜻밖에 찾아온 변곡점은 차라리 하나의 기쁜 선물이었다. 낙향 이후의 삶이 한결 새롭고 만족스럽다는 게 아닌가. 시골에 내려와 비로소 인생의 향긋한 열매를 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 이왕 삶을 바꿀 거라면 다 내려놓고 가자!”
낙향 때 그의 머리에서 나부낀 기치가 그랬다. 인생을 레이스하는 데 쓸모가 큰 방편으로 여겼던 욕심과 경쟁심을 모두 내려놓기로 했다. 물질이든 행복이든 가급적 손아귀에 한가득 움켜쥐고자 했던 지난날의 타성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그는 생존의 정글에서 지친 노루가 쉴 만한 물가를 찾아가듯이 마음을 비우고 낙향했다. 사람이 마을을 비우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싶지만,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무가치한 것들을 종량제 봉투에 담아 내다 버렸다. 그게 병에서 벗어나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유력한 길이라고 봤다. 함지애가 김제로 내려간 건 2012년. 초기 한동안은 요양에 전념했다.
“텃밭 농사로 거둔 깨끗한 채소류를 먹거나, 산야에서 약초를 얻어 섭취했다. 도시에 비할 수 없이 맑은 공기도 몸에 좋았다. 무엇보다 반가운 건 시골 생활이 주는 평온함이었다. 마음이 그토록 편안해지다니, 예상과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맛보며 안도했다. 건강도 좋아졌다. 빠른 속도로. 웃음을 달고 살다시피 했으며, 이웃들과 좋은 사이로 지냈다. 아, 시골에 오기를 잘했어. 좀 더 빨리 내려올걸! 자주 그런 생각을 했다.”
유능한 강소농 모델로 떠올라
잃었던 건강을 어느 정도 되찾으면서 함지애는 슬슬 농사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별일이 일어나지 않는 고즈넉한 생활은 적성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일을 해야 성장한다는 게, ‘일에 대한 불타오르는 열정이 있어야 즐거울 수 있다’는 게 그가 인생에서 배운 일종의 공리다. 농사에 뛰어드는 방식은 다분히 조직적이었다. 여러 농업 교육기관을 통해 공부부터 충실히 하는 한편, 대담하게도 5000여 평의 전답까지 마련해 바닥을 다졌다.
“농토에 벼, 찹쌀, 보리, 콩 등을 재배했다. 농사 방법은 친환경 농업을 추구하기로 했다. 안전하고 깨끗한 농산물로 고추장, 된장, 청국장, 간장을 만들자는 게 기본 방향이었다.”
혼자서 5000평이나 되는 너른 전답에 농사를?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주로 위탁영농 방식으로 농사를 했다. 이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더라. 봄철의 논밭 갈이부터 가을철 수확까지 전 과정을 대행해주니까. 그런데 귀농에서 가장 중요한 건 교육이다. 사전에 부지런히 교육을 받아야 한다. 난 나름대로 열심히 농업을 공부했다. 건강에 자신감을 갖기 시작하면서 농사에 뛰어들었지만, 사실 초기 5~6년은 수련기였다. 거의 공부 기간이었다. 이때 다수의 농업 관련 자격증을 따기도 했다.”
어디서 어떤 교육을 받았나?
“전주에 있는 한국농수산대학 가공학과에 적을 두고 배웠다. 버섯과 화훼 공부도 병행했다. 김제에 있는 농업기술센터를 통해서도 배운 게 많았다. 전통장류, 조청, 꽃차 등에 관한 이론과 실재를 교육받았으니까. 이렇게 공부하며 농어촌체험지도사, 전통장류제조사, 꽃차 소믈리에, 천연발효식초 제조관리사 등 자격증 여러 개를 취득했다.”
농업에서 가장 중요한 건 판로 부문이다. 판로와 관련해서도 사전에 공부해둔 게 있었나?
“판로 문제야말로 농업 경제의 핵심이라는 걸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따라서 정보화 공부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덕분에 농사 시작과 동시에 SNS 마케팅을 위해 블로그를 운영할 수 있었다.”
본격적인 농사의 출발은 식초 사업으로 열었다지?
“2018년에 식초 생산의 기반을 조성할 수 있었다. 작업장과 체험장을 지어 생산과 체험 교육을 병행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가공 분야 가운데 식초를 선택한 이유는?
“아까 말했지만 난 농업 관련 공부에 많은 시간을 썼다. 딴엔 제법 공부를 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어느 수준인지, 뭐 좀 실력을 갖고 있는지, 스스로 테스트할 필요가 있었다. 테스트 수단으로 식초 사업을 택한 건 식초가 사람 몸에 가장 좋은 식품이라고 생각해서였다. 나의 건강을 위해서도, 남의 건강을 위해서도 식초만큼 좋은 게 없다고 봤으니까.”
촘촘한 사전 준비에 힘입어 식초 사업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특유의 현미식초를 만들어 특허 등록을 냈으며, 연잎식초라는 희귀한 제품을 만들어 역시 특허를 받았다. 스스로 설정한 테스트를 좋은 성적으로 통과한 셈이다. 이후 그는 식초의 이웃사촌인 술 만들기에 뛰어들었다. 전통주에 관한 공부를 미리 해둔 상황에서였다. 따라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일단 필이 꽂히면 냅다 덤벼들어 몰두하는 평소의 습성과 기량을 풀가동해 전통주 개발과 생산에 주력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성과가 주어졌다. 각종 경연대회에 출품한 그의 술이 큰 상을 연달아 받으며 일약 알아보는 눈이 꽤 많은 실력자로 부상했다는 게 아닌가. 그는 2019년 충남도 농업기술원이 후원한 ‘우리 발효술 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2021년엔 ‘대한민국 명주대상’ 경연에서 청주 부문 대상을, 2022년엔 광주MBC가 주관한 ‘우리 술 어워즈’에서 ‘왕중왕’상을 거머쥐었다. 전통주 초심자가 거둔 만만치 않은 성취였으니 이변이라 말 못 할 것도 없겠다. 이제 그는 술과 더불어 유능한 강소농의 모델로 떠올랐다.
투병 이후의 삶은 덤으로 주어진 것
“난 술에 미친 여자다.(웃음) 좋은 전통주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양조엔 디테일한 기술력이 필수다. 누룩에서 발생하는 미생물 효모로 단맛과 신맛 등 풍미를 지닌 술을 빚어내기 위해선 반복적 실험이 선행돼야 한다. 술맛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일도 쉽지 않다. 미치지 않고선 도달할 수 없는 게 양조다.”
어떤 술들을 만들고 있나? 가장 자부하는 술을 꼽는다면?
“현재 6종류의 술을 생산한다. 대표 상품은 ‘초야’(初夜)라는 청주다. 신혼 첫날의 로맨틱한 분위기를 술에 담았다는 의미로 지은 이름이다. 탁주인 ‘순애보’ 역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술이다.”
시중에 수많은 민속주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당신의 술은 어떤 차별성을 가지고 있나?
“남들은 흔히 말한다. 여러 가지 꽃을 양조 재료로 삼은 꽃술은 함지애의 것이 뛰어나다고. 민속주를 만드는 이라면 누구나 ‘이게 바로 한국의 술이야!’라고 자신할 만한 술을 만들고자 노력할 텐데, 나 역시 그렇다. 그런데 술의 풍미 수준을 가르는 건 기술력보다 정성스러운 마음과 손길에 달렸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를테면 어머니가 어린 자식에게 먹일 음식을 만들 때처럼 사랑과 정성을 다하는 마음. 그게 좋은 양조의 비결이라 믿는다.”
양조란 창의적 감각이 요구되는 난해한 장르다. 자력으로 단기간에 일정한 성취를 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궁금하다. 누군가에게 도제식 수업을 받은 적은 없었나?
“운 좋게도 좋은 스승들을 만났다. 명품 전통주 ‘호산춘’의 명인 이연호 선생님에게서 많은 걸 배웠다. 한국전통주연구소 소장인 박록담 선생님을 통해서도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이 스승들 덕분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사실 시골에 내려온 이후 나는 이렇다 할 실패나 착오를 겪지 않았다. 이건 순전히 좋은 인간관계가 가져다준 선물이었다. 좋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좋은 걸 배웠고, 배운 걸 토대로 일의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일뿐만이 아니다. 삶의 질 자체가 아등바등 살았던 서울에서보다 훨씬 좋아졌다.”
좋은 사람들과의 관계로 일과 생활, 양면에서 선순환을 해왔다는 얘기다. 남의 가르침과 의견을 경청해 피드백으로 삼기. 이웃과 도타운 우정을 나누는 일에도 사업 이상의 정성을 쏟아 감흥을 누리기. 이쯤이면 결함 없는 생활이다. 인생의 중세시대라 할 만한 투병기는 어느덧 종료됐다. 여러 측면에서 서울에 살 때와 완연하게 변했다. 이제 그가 지닌 지배적인 감정은 만족감, 그 하나란다.
다만 서울에서와 마찬가지로 유지되고 있는 양상이 있으니, 여전히 바쁘게 산다는 게 그렇다. 함지애가 만드는 건 식초와 전통주만이 아니다. 들에선 곡물을 생산하며 장류 사업도 여전히 지속하고 있다. 대파에서 피어나는 보랏빛 꽃을 부재료로 가미한 이색 꽃두부도 생산한다. 마을 부녀회장을 맡기도 했던 그다. 김제 시내에 오픈 스튜디오를 두고 대표를 맡고 있는 ‘징게맹갱 우리술 협동조합’의 기지로 활용하고 있기도. 독거노인과 결손가정을 돌보는 자선활동에도 적극적이다. 시내의 침체된 구역 일부를 놀이문화 공간으로 재생하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일의 가짓수가 이토록 넘치다니. 그는 남몰래 비명을 지르는 건 아닐까? 일에 치여 부질없이 소비되는 뭔가가 있는 건 아닐까?
“투병 이후의 삶은 덤으로 주어진 거라고 생각하자 모든 게 감사하게 다가왔다. 희로애락은 여전하고 때로 눈물도 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걸 비로소 하고 있다는 실감으로 행복하다. 돈을 벌려고 바동거렸던 과거에서 벗어난 것만도 어딘가? 밝고 에너지 넘치는 본성을 회복한 건 또 어떻고? 욕심을 내려놓고, 짧고 굵게 살다 가면 된다는 생각이다.”
돈보다 소중한 가치를 가진 게 많다는 걸 알면서도 흔히들 까먹고 산다. ‘욕심에 휘둘리는 삶은 이제 싫어!’ 함지애의 드라마를 난 그런 외침으로 새겨두기로 했다.
함지애가 주는 귀농 Tip
•땅과 집을 마련하기 이전에 귀농 교육부터 충분히 하라. 지자체마다 운영하는 ‘1년 살아보기 프로그램’ 같은 걸 통해 농촌 생활을 미리 경험하는 것도 좋다. 그 과정에서 나의 숨겨진 역량을 발굴할 수 있으며, 과연 귀농을 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귀농 초기 3년 정도는 성공을 위한 수련기로 삼아 나를 알아가는 시간 내지는 농사의 방향을 모색하는 기간으로 활용하자. 농업의 경제 효과는 현명한 운영을 했을 경우에도 대체로 귀농 5년 이후에나 발생한다고 보면 된다.
•도시에서 쌓은 경륜이나 특기를 살려 재활용하라. 이를테면 꽃에 조예가 있다면 꽃차 사업에 도전하는 식으로.
•여성의 단독 귀농을 두려워하지 마라. 다만 남다른 용기와 자신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귀농 초기엔 소득 발생이 전혀 없을 가능성이 많다. 예비비 확보가 필수다.
수년 전 실버 생활체육에 지각변동이 감지됐다. 곧이어 ‘파크골프가 인기’라는 말이 전국 곳곳에서 들려왔다. 반짝 흥행이 아니었다. 파크골프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단계적 일상 회복이 되면서 아예 실버 생활체육 주요 종목으로 부상했다. 인근 공원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즐길 수 있어서. 단지 그뿐일까? 현장에서 들은 파크골프의 진짜 인기 이유는 꽤 흥미롭다.
양평교 초입에 들어서며 걱정이 앞섰다. 전국 대부분 지역에 돌풍과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성 장맛비가 예고돼 있었고, 서울도 예외는 아니었다. 잠시 소강 상태를 보이고 있었지만, 먹구름과 대기를 감도는 꿉꿉함은 양평교 아래 오가는 이 하나 없다 해도 이상할 것 없었다. ‘영등포 파크골프장’ 표지판이 가리키는 쪽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 순간 불안함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야말로 ‘줄 서서’ 파크골프를 즐기고 있었다.
매일 영등포 파크골프장을 찾는 이는 500여 명. 영등포구파크골프협회 ‘사랑클럽’ 회원 A씨가 전한 인기는 그 이상이다. “파크골프가 정말 인기예요. 말도 못 해요. 체감상으로 매년 두 배씩 느는 것 같아요. 이거 봐요, 치려고 밀려 있는 거!”
영등포뿐만 아니다. 파크골프는 일대 붐을 맞았다.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회원이 그 방증이다. 대한파크골프협회에 따르면 2020년 4만 5000여 명 수준이던 회원은 2022년 10만 명을 넘어섰다. 2023년 6월 기준으로는 12만 명을 돌파했다. 협회에 등록하지 않고 즐기는 동호인쪾비동호인까지 합하면 그 수는 대략 40만~5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1983년 일본 홋카이도 마쿠베쓰 강가에서 시작된 파크골프는 도심 속 공원이나 유휴부지에서 즐기는 게임이라고 해서 ‘공원 골프’(PARK GOLF)라는 이름이 붙었다. 국내에는 2000년 경남 진주에 위치한 노인복지시설 상락원에 6홀이 들어서며 처음 소개됐다. 실버 세대 생활체육 핵심 종목으로 부상한 건 수년 사이다. 2022년 9월 발표된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의 ‘스포츠 빅데이터 인사이트’ 제13호에 따르면 현재 실버 세대 생활체육 유행은 ‘게이트볼에서 파크골프로 전환’되고 있다.
현장은 클럽 한 개와 공 한 개, 그리고 티만 있으면 누구나 인근에서 즐길 수 있는 파크골프의 편의성과 접근성에 열광한다. 몇 천 원이면 즐길 수 있는 저렴한 비용도 현실의 걱정을 덜어주고 있다. ‘사랑클럽’ 회원 A씨는 “파크골프가 노인들에겐 최적의 운동”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운동 여러 가지 해봤지만, 이보다 좋은 운동은 없습니다. 접근하기 좋고, 이용료 저렴하고, 잔디 밟으면서 많이 걷고요. 나이 들어서 할 수 있는 운동이 뭐가 있어요? 고작해야 산책하는 건데, 산책은 지루해서 오래 못 해요. 근데 파크골프는 3시간이고 4시간이고 하죠!” 옆에서 듣고 있던 회원 B씨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장점이 정말 많아요. 마음이 젊어지는 것 같아요. 나이 먹어서도 할 수 있다는 게 삶의 활력이 돼요.”
파크골프가 사랑받는 주요 요인 중 ‘커뮤니케이션 효과’를 빼놓을 수 없다. 종주국 일본의 파크골프협회는 파크골프가 퍼진 요인에 대해 “경기보다 커뮤니케이션을 지향하는 데 중점을 둔 것을 들 수 있다”고 할 정도다. 일반 골프장은 1번 홀에서 티업하면 다른 팀을 만날 수 없지만 파크골프는 한눈에 다 들어오기 때문에 교류가 이뤄지기 용이하다는 것이다. 실제 ‘사랑클럽’은 회원 60여 명의 사랑방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회원 C씨의 말이다. “하면 할수록 재밌어요. 파크골프를 접하고 사람도 많이 알게 됐습니다. 자주 보니까 빨리 친해졌지요. 한번 어울리면 아침에 만나서 저녁까지 있다 가기도 합니다. 그게 너무 재밌어요.”
여기에 ‘한국판’ 파크골프만의 매력이 더해졌다. 경기의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진화해온 것이다. 파크골프는 하프 9홀(파33) 1라운드 18홀(파66)로 진행된다. 파3 네 개, 파4 네 개, 파5 한 개로 기본 제원은 일본과 같다. 차이는 한 홀의 거리다. 위험 방지, 연령이나 남녀 차이에 의한 핸디캡 최소화 등을 위해 거리를 100m 이내로 제한하고 있는 일본과 국내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일본은 9홀까지 연장 길이가 500m지만, 국내는 790m까지 가능하다. 파5 홀의 경우 일본은 60~100m, 국내는 100~150m다. 현재 국내는 대개 최장 거리인 150m를 선택하는 추세다.
이경호 대한파크골프협회 사무처장은 “국내 파크골프를 즐기는 인구가 증가한 요소”로 이를 지목한다. “일본은 ‘놀이’이고 우리는 ‘생활 스포츠’, 나아가 ‘경기’에 가깝습니다. 일본은 여전히 80대 이상이 파크골퍼의 주류를 이루고 있어요. 우린 연장 길이가 기니까 보다 젊은 세대가 많이 유입됐습니다.”이 사무처장은 배우기 쉬운 점도 파크골프 인구 증가 원인으로 꼽았다. “파크골프는 6개월 정도 열심히 하면 3년, 5년 배운 사람과 대결할 수 있을 정도가 됩니다. 이것도 또 하나의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스포츠는 10년 이상 해야 우승할 수 있어요. 1~2년 바짝 해서는 대회 정상을 꿈꾸기 어렵지요. 그런데 파크골프는 노력 여하에 따라 6개월~1년 만에 전국 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는 실력이 갖춰지는 운동입니다. 전국 투어를 다니는 분들도 그 수가 상당합니다.”
파크골프는 ‘경기’로 자리 잡고 있다. 대회 규모로 확인된다. 국내 대회 상금이 3000만 원까지 오른 상황이다. 경제 효과는 현장에서 먼저 체감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여파로 산천어축제를 연이어 취소했던 강원도 화천군은 파크골프 대회를 유치해 특수를 누렸다. 약 한 달간 이어진 대회에 1500여 명의 선수단과 가족이 방문해 지역 음식점, 숙박업소는 물론 편의점과 카페까지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고 한다.
이경호 사무처장은 “경제 효과는 두말하면 잔소리”라고 말한다.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가 ‘파크골프장에도 라이가 있어요?’입니다.(웃음) 당연히 있지요. 다 다르고 각각의 특색이 있습니다. 대회 당일 처음 가서는 성적을 낼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보통 연습하러 현장에 일주일 전이나 열흘 전에 가서 현지에 체류하며 꽤 많은 비용을 씁니다. 1억 원을 투자해서 대회를 치른다고 하면, 그 열 배 이상의 경제 효과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한 대회에 나가는 선수만 해도 500~600명입니다. 그 지역에 머물면서 쓰는 돈은 엄청납니다. 지자체에서 계속 유치 신청이 들어오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파크골퍼들에게 놀라운 이야기가 아니다. ‘사랑클럽’ 회원들은 스포츠로 자리 잡은 파크골프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지고는 못 삽니다. 대회 나가는 사람들은 죽기 살기로 해요. 진짜 장난 아니에요!(웃음)”
현장은 단기적 경제 효과 그 이상을 기대하고 있다. 파크골프가 고령 인구 증가에 따른 사회적 비용을 절감할 대책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우리나라의 평균 수명은 2007년에 이미 OECD 국가의 평균 수준을 상회하는 장수 국가군으로 진입했다. 2025년에는 초고령사회로 들어설 전망이다. 고령자의 진료비, 의료비는 당면한 문제다. 통계청이 2022년 9월 발표한 ‘2022 고령자 통계’에 따르면 2020년 65세 이상 고령자의 1인당 진료비는 475만 9000원, 1인당 본인 부담 의료비는 110만 6000원에 달한다. 전체 인구 대비 각각 2.8배, 2.7배 수준이다. 반면 생활체육 참여자의 1인당 연관 의료비는 비참여자 대비 절반가량에 그친다. 생활체육 참여만으로 의료 비용 감소에 직접적인 역할을 기대할 수 있다는 뜻이다.
현장은 파크골프가 현재 최일선에 있는 운동이라고 입을 모았다. ‘사랑클럽’ 회원 A씨의 말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봅시다. 노인들이 집에만 있으면 자식이고 며느리고 손주고 누가 좋아하겠어요? 우리도 다 압니다. 근데 파크골프장에 나오면 운동하고, 여기서 만난 친구들끼리 점심 먹고, 커피 한잔하고, 때론 반주하기도 하고, 내내 놀다가 저녁에 집에 가서는 피곤해서 바로 잡니다. 아프다는 소리도 안 합니다. 아프다고 하면 가지 말라고 할까 봐요.(웃음) 또 실제로도 아프면 못 합니다. 그러니까 파크골프를 하기 위해서 스스로 건강을 잘 챙겨요. 본인 건강하지, 가정의 평화 가져오지, 종국에는 사회적 비용 안 들지. 파크골프는 삼박자를 다 갖춘 운동이라니까요!”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세상 사람들, 이제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신다면 그 자체만으로 참 감사할 것 같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으신 후 몇 마디 조언을 해주신다면 더욱 감사할 것 같습니다. 만약 돌을 던지신다면 제 영혼 구원에는 더없이 소중할 테니 무엇보다 감사하겠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옳은 일을 행하지 못한다는 성경 말씀으로 핑계 대고 도망치려는 저를 붙잡아 바로 세워주시려는 거니까요.
저는 올해 95세 남자입니다. 죽음이 코앞에 닥친 늙은이지요. 30년 전에 아내와 사별했습니다. 이후 30년을 혼자 살았습니다. 이렇게 오래 살 줄 알았으면 진작 재혼할걸 하는 후회가 없지 않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는 말처럼 지금에야 아무 소용 없는 소리지요.
아내 떠난 후 재혼을 하지 않으려던 건 아닌데, 솔직히 제가 가진 돈이 좀 있다 보니 그게 걸림돌이 되더라고요. 돈이 있으면 재혼에 좋은 조건 아닌가 하실 테지만 그게 꼭 그렇지가 않더란 거죠. 새사람이 들어와 평생 피땀 흘려 일군 재산 한 축이 허물어지는 건 아닌가, 나라는 사람을 보기 전에 내 돈을 먼저 보고 접근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되었더랬습니다. 돌이켜보면 재산을 지키느라 행복을 포기한 참으로 어리석은 노인네지요, 제가. 물론 지금도 ‘그깟 돈’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나이가 이렇게 많이 들고 보니 헛것을 붙잡고 허송세월을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단 돈뿐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이 부질없게 느껴지긴 합니다만.
아내 사별 후 90세에 만난 여인
그런데 지금 제 곁에는 한 여인이 있습니다. 5년 전에 만났습니다. 그 사이 마음이 달라졌냐고요? 아니요, 결혼한 사이는 아닙니다. 90세에 만난 사람과 법적으로 맺어지는 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번에도 돈이 작용했습니다. 돈이 많아서 재혼을 포기해야 했던 과거가 있었다면, 돈이 있기에 한 사람을 곁에 둘 수 있는 현재의 제 모습이라니….
그 사람은 50대 중반으로 저하고 나이 차는 무려 40년입니다. 이 대목에서 추하게 늙은 고약한 노인네라고 저를 비난하시겠지요. 비난하실 일은 비단 나이 차만이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는 남편이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저와 그 사람은 불륜 관계입니다. 저는 그 사람의 남편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솔직히 알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물어보지 않았고요. 나이가 면죄부가 될 수는 없지만 그 사람과의 관계에 관한 한 저는 나이 많음이 무슨 해방구라도 되는 양 느껴집니다. 죽으면 공소권이 없어지는 것처럼. 저는 나이가 너무 많아 곧 죽을 거니까요. 추잡한 늙은이가 이기적이기까지 하다고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요?
그 사람을 만난 것은 동네 은행에서였습니다. 역시 돈과 연관이 있군요. 그 사람은 입구에서 번호표를 뽑고 해당 창구로 안내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직접 은행 출입을 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그날은 왠지 운동 삼아 가고 싶었습니다. 아마도 그녀를 만나려고 그랬던가 봅니다. 제가 워낙 고령이라 그랬을 테지만 유난히 친절하고 살갑게 대해주는 그 사람에게 업무에 충실한 것뿐이란 생각 이상을 품게 되었으니 역시나 늙은이의 주책이었지요.
그런 그 사람에게 저는 마치 자석처럼 끌렸습니다. 저의 은행 출입이 잦아졌지요. 혼자 살고 있으니 자식들 눈치 볼 것도 없었고, 자식들도 나 대신 은행 일을 봐주는 게 은근히 귀찮기도 했을 테니 이래저래 저의 행보에는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처음에 저는 그 여자가 혼자 사는 줄 알았습니다. 뻔한 수작 부리지 말라고요? 아니요, 정말입니다. 그 여자가 제게 그렇게 말했으니까요. 그럼 꽃뱀에게 걸려든 거냐고요? 딱히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그 여자는 제게 돈을 요구한 적도 없었으니까요. 그 여자는 그저 친절한 사람이었고, 그 친절을 제 쪽에서 왜곡했던 것이지요. 달리 왜곡이 아니라 제가 금전적으로 좀 여유가 있다 보니 그 여자의 친절에 작은 답례를 하고 싶었던 거고, 그 여자도 그것을 굳이 사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혼자가 아니면서 왜 혼자라고 했을까 싶지만, 그 정도로 나에 대해 그쪽은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어떻게 말한다 한들 그 여자로선 무슨 상관이었겠냐는 거지요.
돈으로 맺어진 일방적 관계
그렇게 우리는 가까워졌습니다. ‘남녀 사이’가 된 구체적 과정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더 이상 은행을 가지 않아도 그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으로 특별한 관계가 되었음을 암시하겠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저를 먼저 찾은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제가 연락하면 집으로 와주었습니다. 그렇게 우리 만남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거지요.
그 사람은 자식은 없는 것 같습니다. 남편은 있지만 무슨 일을 하는지, 어디가 아픈 건지, 생활력이 있는지 없는지 그것도 모르겠고요. 그 사람이 은행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으로 봐서 형편이 그다지 넉넉하지는 않을 거라는 게 제 짐작이지요. 가정 형편과 무관하게 할 일이 있다는 자체에 의미가 있지만. 제가 아는 것은 그 정도뿐입니다. 아니, 하나도 모른다고 해야겠군요. 솔직히 더 묻고 싶지도 않았고, 굳이 묻지 않는데 답할 사람도 아니고요.
돈을 주기 때문에 나를 만나는 것만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지난 5년 동안 먼저 연락해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 단순히 돈을 목적으로 나를 만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돈을 주지 않는데 만나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돈 때문에 나를 만나는 건 사실인데 돈에 얽매이진 않는 여자, 저로서는 파악이 안 되는 묘한 상대인 것 같습니다. 그 돈을 어디에 쓰는지도 모르겠고요.
저는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 사람은 내게 무색무취의 존재인 것 같다는. 100세를 바라보는 늙은이를 행여 좋아할 리는 없고, 그렇다고 딱히 내 돈에 눈독을 들이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왜 나를 만나는지 세월이 지날수록 아리송합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저를 향한 동정과 연민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깊은 사이라니까요.
청천벽력 같은 이별 통보
그렇게 관계를 이어가던 어느 날, 그러니까 석 달 전, 그 사람 쪽에서 먼저 만나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5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 묘하게 가슴이 설레면서도 마음 한편에선 불안이 스멀스멀 피어올랐습니다. 올 것이 왔다는 예감과 함께. 거동이 불편한 저로서는 그 사람이 먼저 만나자는 말에도 평소 그대로 집으로 오라고 할 수밖에 없었지요.
나쁜 예감은 적중하는 법이죠. 아니나 다를까, 그 사람이 이제 그만 만나자는 말을 꺼냈습니다. 제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았지요.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었음에도, 언제든 각오하고 있었음에도. 본인보다 40살이나 많은 늙은 남자에게 정이 떨어졌다는데야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관계를 5년이나 이어온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요.
그럼에도 저는 매달렸습니다. 지난 5년간 단 한 번도 내 만남에 응하지 않은 적이 없었던 사람이라 저는 더욱 허둥댔습니다.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아니 당연히 돈을 더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그 사람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제가 가진 게 돈뿐이라 비참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유라도 알자고, 헤어지고자 하는 이유를 말해달라고 졸랐습니다. 95세 남자가 50대 여자에게 말이지요. 사랑에는 나이가 없다는 상투성을 유일한 위안 삼아.
그런데 그 이유가 어이없었습니다. 아니,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남편이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겁니다. 그 와중에 저는 내심 기뻤습니다. 그렇다면 나와의 관계가 보다 가까워질 가능성이 있기에. 가까워지지는 않는다 해도 최소한 자유로울 수는 있기에. 내친김에 둘이 합쳐서 살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돈 아까워서 어쩌냐고요? 그렇게 빈정대실 것까진 없지 않나요? 물으시니 답하자면 제가 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으니까요.
사람 이전에 돈을 저울질했던 30년 전, 사별 초기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우쳐준 것도 바로 이 사람이었지요. 돈을 지키려는 알량한 생각을 버리고 진작에 마음을 열었다면, 저는 지금 이런 추한 모습으로 40살이나 적은 여자에게 사랑 구걸을 하고 있지는 않겠지요.
여하간 그 사람은 남편이 죽자 저와의 관계도 청산하고 싶어 한 것입니다. 제가 아무리 이 세상을 곧 떠날 사람이라고 해도 따지고 보면 불륜남이었는데, 불륜 관계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만날 때는 언제고 이제는 신분이 자유로워진 마당에 굳이 헤어지자고 하는 이유가 뭔지 저로서는 당혹스럽습니다. 물론 그 여자가 저를 사랑해서 만난 건 아니었지만, 여하간 제약이 없어졌다는 것은 반가운 일 아닌가요? 돈을 더 줄 수도 있다는 말을 넌지시, 아니 노골적으로 해보았으나 역시 돈도 소용없어진 마당에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을 붙잡을 수 있을까요?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작품 속 캐릭터를 보고 실제 배우의 성격을 오해할 때가 있다. 배우 최수린(49)은 악한 캐릭터를 주로 맡았던 터라 실제로도 까칠하거나 차가운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실제의 그는 작품 속 모습과, 머릿속 막연한 생각과는 180도 달랐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천성이 선한 사람이었다. 5월 봄날의 햇살을 꼭 닮은 그의 해맑음은 연기로는 나올 수 없는 본연의 것이다.
최수린은 과거 MBC ‘밥줘’, KBS 2TV ‘내사랑 금지옥엽’ 등에서 얄미운 캐릭터를 맡아 연기했고, 근래 작품에서는 주로 못된 시어머니 역할을 소화했다. 최근 작품인 KBS 2TV 일일드라마 ‘태풍의 신부’에서도 그는 비슷한 역할로 등장했다. 최수린은 사실 다양한 역할을 소화한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다. MBC 사극 ‘김수로’와 ‘마의’에서는 선한 캐릭터를 연기하기도 했다.
“악녀 연기, 시어머니 연기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그냥 제게 들어온 캐릭터를 최선을 다해서 연기했을 뿐이고, 그 역할들이 연이어 나오거나 대중의 눈에 띄었던 것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지금까지 맡은 역할에 대한 후회나 아쉬움은 없어요. 다만, 늘 제 연기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편견 탈피한 여배우 행보
1995년 SBS 드라마 ‘까치네’로 데뷔한 최수린은 베테랑 배우다. 활동한 지 거의 30년 차가 되어가는 그는 지난해부터 부쩍 시청자의 눈길을 끌고 있다. 제2의 전성기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정도다. KBS 2TV 주말드라마 ‘현재는 아름다워’에서 밉상 시누이로 시청자들에게 눈도장을 강렬하게 찍은 후, ‘태풍의 신부’로 기세를 이어갔다.
‘태풍의 신부’는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전성시대에 15%(닐슨코리아, 전국 기준) 내외의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인기를 끌었다. 최수린이 연기한 ‘태풍이 엄마’ 남인순은 미워할 수 없는 악녀였다. 자기 자식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엄마지만, 사랑스럽고 허당 매력이 넘치는 인물이다. 최수린은 스펙트럼 넓은 연기로 남인순을 표현했고, 시청자들에게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남인순을 연기하면서 정말 행복했어요. 배우가 여러 감정선을 보여주는 캐릭터를 만나기란 쉽지 않거든요. 여자로서 질투, 돈과 자식에 대한 집착과 사랑, 미래에 대한 두려움 등 인간이 가진 여러 가지 심리를 골고루 보여줄 수 있어서 좋았어요. 연기를 하면서 몰입도 많이 했고, 즐거웠습니다.”
최수린은 드라마가 방영되는 동안 연기 호평과 함께 ‘젊은 엄마’라는 평도 많이 들었다. 그는 어린 나이부터 ‘어머니’나 ‘시어머니’ 역할을 맡아왔다. 최수린은 “20대와 30대 때 나이에 맞는 젊은 역할을 연기하지 못했다. 30대 때는 이미 40대, 40대 때는 50대 역할을 연기했다”고 말했다.
배우 중에서는 나이대가 높은 캐릭터 또는 누군가의 엄마 역할을 기피하는 사람이 꽤 있다고 알려져 있다. 최수린은 이런 편견을 깨는 반전의 행보를 펼치는 셈이다. 여기에는 그만의 스토리가 있다. 최수린은 1994년 SBS 1기 공채 MC 출신으로 연예계에 발을 디뎠다. 그러다 배우로 전향했는데,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았다. 그는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았고 연기 제안도 거의 없었다. 그게 많이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이후 30대가 되면서 최수린은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서른 살에 아들을 낳고 배우로 복귀한 그는 본격적으로 최선을 다해 일하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최수린은 “항상 일이 간절했다. 나이대가 안 맞는다는 이유로 연기를 못 한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역할을 선택할 처지도 아니었고,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이를 낳은 후 30대가 됐고, 젊은 역할을 맡기에는 애매한 상황이 됐어요. 그때 제가 살을 원 상태로 다 빼지 못해서 좀 통통했거든요. 아예 머리도 볶아버렸고, 실제보다 나이가 많은 역할을 맡게 됐죠. 그게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2009년에 ‘내사랑 금지옥엽’을 만났어요. 다른 제작진분들은 다 반대했는데, 작가님이 저를 추천했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좋은 결과가 나왔고, 저한테도 터닝포인트가 됐죠.”
그렇게 최수린은 실제보다 나이 많은 역할도, 악한 캐릭터도 마다하지 않았다. 항상 최선을 다했고, 죽기 살기로 연기했다. 일을 하면서, 작품이 쌓여가면서 점점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과 애정도 생겼다.
“예전에는 잘 몰랐는데 요즘 생각해보면 연기는 제가 좋아하는 일이고, 그래서 계속 하는 거예요. 저는 연기를 하면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무슨 역을 맡든지 그저 잘 해내고 싶었고, 잘한다는 칭찬의 말을 듣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 드라마로 인해 다음 드라마가 이어서 들어오기를 바랐죠. 그래서 욕심을 과하게 부릴 때도 있었는데, 그러면 연기가 미워 보이더라고요. 배우는 연기할 때 완급 조절을 잘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명상 통해 온화함 찾아
배우가 되지 않았다면 그는 어떤 일을 했을까. 최수린은 “미술 쪽 일, 뭔가 만드는 일을 하지 않았을까”라는 예상치 못한 답변을 했다. 그리고 “워낙 그림 그리고 만드는 것을 좋아해서 미대 진학을 생각했다. 특히 자개장을 좋아해서 나전장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우리 전통문화예술을 잇는 전수자들이 계속해서 나왔으면 좋겠다”라고 설명을 이었다.
최수린의 이야기를 들으며 언제 진로를 바꾸게 됐는지 궁금했다. 그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배우를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열 살 많은 친언니이자 배우인 유혜리의 영향도 조금은 있었다. 그러나 정작 유혜리는 동생의 내성적인 성격을 걱정하며 배우 활동을 반대했다고 한다.
“결국 고등학생 때 마음먹은 대로 배우를 하게 됐죠. 저도 처음에는 제 성격이 연예계 활동을 하기에는 맞지 않다고 느꼈어요. 연기를 하면서 내성적인 성격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한 것 같아요. 저의 모든 것을 보여줘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내성적인 사람은 평소에 표현을 많이 하지 않지만 연기라는 기회를 통해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잖아요. 그러다보니 이제는 내성적인 편은 아닌 것 같아요.(웃음) 연기를 하고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서 성격이 중화됐고, 나를 표현하는 방법도 좀 능숙해진 것 같아요.”
얘기를 나누어 보니 최수린의 성격은 내성적이라기보다는 온화하다는 표현이 맞아 보인다. 그의 일상 또한 단조로우면서도 건강하다. “나이가 들수록 체력이 떨어지는 것을 체감한다”는 최수린은 건강관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꾸준한 운동과 식단을 통해 몸 관리를 하고 있다. 요리를 좋아하는 터라 한식 위주로 건강하게 식사하는 편이다. 마음은 명상을 통해 다스리고 있다.
“만약 누가 저를 기분 나쁘게 하면, 저는 그 사람한테 뭐가 기분 나빴는지 다 말했어요. 그러면 상대방한테 상처를 주게 되니까 결국 제가 스트레스를 받더라고요. 그래서 올해부터는 ‘한마디 더 할 걸 하지 말자’라고 스스로 다짐했어요. 말을 줄인 후 스트레스를 덜 받고 있죠. 그리고 스트레스는 명상을 통해 풀어요. 명상을 한 지는 5년 정도 됐어요. 눈을 감고 내 마음에 있는 더 큰 세상을 보는 게 명상이에요. 저는 매일 하고 있는데,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리얼한 연기하는 배우 되고파
이처럼 평온한 일상과 달리 연기할 때는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한다. 소리도 지르고, 울고, 누군가의 뺨을 때려야 할 때도 있다. 최수린은 역할에 워낙 몰입하는지라 감정 소모도 심한 편이라고. 그래서 그는 작품을 마칠 때마다 훌쩍 여행을 다녀온다. 자신이 연기한 캐릭터를 보내주고 온전한 나로 돌아오는 시간이다.
“이번에 ‘태풍의 신부’를 마치고는 헝가리, 체코, 벨기에, 프랑스 등 유럽 여행을 다녀왔어요. 저는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면 오랜 시간 머무는 편이에요. 관광지도 너무 열심히 돌아다니지 않고 일상을 지켜요. 아침에 일어나서 명상하고 운동하고, 식사도 천천히 하고요. 여행을 통해 내 마음의 중심을 찾는다는 생각이 커요. 여행을 다녀오면 차분하게 마음 정리가 되고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좋더라고요.”
최수린은 꼭 여행이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려고 한다. 친구나 가족과 대화할 때, 지나가는 행인의 모습 등에서 자연스럽게 발견되는 표정이나 감정이 있다. 그는 그것들을 연기에 투영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최수린의 배우로서 목표는 ‘리얼(Real)한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우’가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슬플 때, 또 어떤 사람은 즐거운 순간에 기가 막힌 톤이 나오더라고요. 그 예상치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는 게 너무 재밌어요. 또 저는 고향이 안성이거든요. 어렸을 때 들었던 사람들의 말투, 느꼈던 정서, 그런 것들을 잊지 않으려고 해요. 실생활에서 연기를 배우는 거죠. 배우는 사람에게 공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감정에 공감해야 자연스럽게 연기로 나오는 거죠.”
최수린의 지나온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항상 배움의 자세를 잃지 않는 겸손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높이 평가하지 않으며 세상만사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120세 시대이니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이 남은 만큼, 최수린도 찬란한 미래를 설계해본다. 늘 발전하는 배우가 되고 싶고, 인간적으로는 버킷리스트를 이루며 가족과 행복하게 살고 싶단다.
“저는 하고 싶은 게 많아요. 스카이다이빙도 해보고 싶고, 어학 공부를 해서 새로운 언어를 마스터하고 싶기도 해요. 50대는 친구들끼리 여행을 많이 다닐 때라고 하던데, 이제 성인이 된 아들하고도 같이 여행을 다니고 싶어요. 함께 같은 걸 보고 느끼면서 배우는 부분이 많을 것 같아요. 꼭 여행이 아니더라도 아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겠다고 생각해요. 여러분도 하고 싶은 것을 하시면서 인생을 즐기면서 사세요.”
엄마로서 때로는 아내, 며느리, 딸, 강사 등 상황에 따라 한바탕 역할극을 해내야 하는 필자에게 가면(페르소나, Persona)은 어쩌면 반드시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역할에 맞는 가면을 쓰는 것은 가정, 학교, 직장 등 크고 작은 집단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의 좋은 점을 드러내고 나쁜 점을 감추려는 지극히 당연하고 본능적인 행위이기도 합니다.
희비쌍곡선 롤러코스터 인생
글쓰기는 필자가 제일 좋아하는 일입니다. 두 번째로 좋아하는 일은 강의입니다. 필자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글쓰기입니다. 강의는 두 번째로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이 무슨 장난이며 조화란 말입니까. 저만 이러는 걸까요? 똑같은 일이 어떨 땐 정말 행복하고, 어떨 땐 너무 고통스러워 도망치고 싶고 당장 그만두고 싶으니 말입니다. 어느 힙합 뮤지션은 ‘음악은 행복이자 깊은 고통’이라고 노래했습니다. 행복과 고통은 둘이 아닌 하나라 앞뒤로 딱 붙어 있나 봅니다. 희비쌍곡선을 그리며 여러분도 하루하루 지내시나요?
칼춤 추는 여자
필자는 막대기처럼 뻣뻣한 몸이라 춤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럼에도 자칭 춤꾼입니다. 30년이 넘도록 주부로서 싱크대를 점령하고 있는 망나니이기 때문입니다. 망나니가 술 뿜어내고 칼춤 추듯 저도 도마 위에서 바다며 뭍에서 포획한 먹잇감 대가리 치고 몸통 자르며 식구들 위해 칼춤 추니까요. 살리기 위해 죽이는 역설, 이게 어쩌면 삶의 양면성 아닐까요. 먹이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거잖아요. 죽여서 먹이기도 하고요. 쓱싹쓱싹! 탕탕탕탕! 칼자루 쥐고 김치 썰고, 양파 다지고, 오징어 저미다가 혹 원망 한 줄기 툭 터져 나오면 칼끝에 살기 실려 손톱이 썰려나갈 때도 있습니다. 싱크대 앞에서 칼춤 추다 나쁜 생각 못 하도록 마음 단속해주는 하늘의 보살핌 아닌가 합니다.
두 얼굴의 사나이, 지킬 박사와 하이드
자기 내면에 억눌렀던 추악함과 잔인함을 가감 없이 표출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1886년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발표한 단편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서 학식과 덕망이 높아 존경받던 지킬 박사는 쾌락을 탐하는 욕망을 억누르며 두 개의 본성 사이에서 고민하다 선과 악을 분리해내는 약물을 만듭니다. 지킬 박사로서 품위에 흠집을 내지 않고도 하이드로 변신해 깊숙이 눌러놨던 쾌락을 만끽합니다. 하지만 약을 마시지 않아도 지킬 박사가 계속 하이드로 변신하면서 본성의 균형이 깨지고 내면이 악으로 차올라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결국 청산가리를 마시고 자살하고 맙니다.
앞뒤가 똑같은 동전
500원짜리 동전을 볼까요? 어느 쪽이 앞면인가요? 필자도 갑자기 헷갈리네요. 하여튼 한쪽에 학이 그려져 있고 다른 면에 숫자 500이 새겨져 있습니다. 또 하나 볼까요. 1000원짜리 지폐 앞면엔 퇴계 이황 초상이 있고, 뒷면을 보면 겸재 정선이 그린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가 있습니다. 막연히 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던 도산서원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완락재라는 작은 정자에 앉아서 조용히 ‘주자서절요서’(朱子書節要序)를 집필하는 퇴계의 모습을 그려놓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돼지저금통에서 동전을 꺼내 은행에 입금하려는데 동전 하나가 앞면도 학이고 뒷면도 학이지 뭡니까. 또 어느 날은 편의점에서 거스름돈을 받았는데 앞면도 퇴계 이황 얼굴이고 뒷면도 똑같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 동전과 지폐는 돈 구실을 할까요? 500원과 1000원이라는 돈값을 치를 수 있을까요? 물건을 살 수 있는 교환이라는 값어치를 전혀 할 수 없게 됩니다.
둘이면서도 하나인, 하나이면서 둘인
손바닥이 있고 손등이 있는데 우리는 이 두 면을 합쳐 ‘손’이라고 부릅니다. 양면이 손바닥만 있거나 손등만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차피 하나인데 경우에 따라 둘로 구분해 부를 뿐입니다. 우리 삶, 사건, 사람도 흡사합니다. 양면이 있어야 제값, 제 역할을 합니다. 음이 있으면 양이 있고, 햇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고,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습니다. 건전지 한 몸에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있습니다. 두 극성이 같이 있어야 전기 에너지가 생깁니다. 감정에도 애증(愛憎)이 함께합니다. 마치 동전 양면처럼 하나로 맞붙어 있습니다. 햇빛은 좋기만 하고, 어둠은 나쁘기만 한 것일까요. 양(陽)은 선(善)이고, 음(陰)은 악(惡)일까요.
겉과 속이 다른 게 나쁠까요?
어떤 사람을 평가하면서 “그 사람은 참 표리부동(表裏不同)해. 겉은 번지르르한데 속은 아주 형편없어.” 이렇게 말할 때가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속마음을 겉으로 곧장 드러내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이고 올바른 것일까요?
평소에 시기하고 미워하던 사람을 만났는데 그 앞에서 대놓고 “나는 당신의 이러저러한 면이 정말 밥맛없고 가증스럽기 짝이 없어요. 어쩌면 그렇게 재수가 없는지, 당신이 잘 안 됐으면 정말 쌤통이겠네요.”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맞을까 생각해봅시다. 싫어하는 내색은 감춘 채 “저번에 만든 그 상품은 정말 근사하던데요. 아이디어가 탁월하십니다. 저는 그쪽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어요. 하하하!” 이런다고 나쁜 사람일까요?
오히려 겉과 속이 똑같은 사람이 더 위험하고 무례한 것은 아닐까요? 겉과 속이 하나라면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아수라 백작 같은 당신 그리고 나
우유부단(優柔不斷)과 심사숙고(深思熟考)는 똑같은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문제입니다. 어떤 한 사람을 놓고도 누구는 “참 깊이 있고 침착한 사람이야”라고 말하지만 다른 누구는 “어째 사람이 결정장애야, 뭐야. 판단을 못 해”라고 하니까요. 한 사람, 한 사건을 놓고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상반된 입장에 놓입니다.
말수가 적고 신중을 기하는 면이 좋아서, 또 남들 앞에서 나대지 않고 잘난 척하지 않는 게 좋아서 그 남자랑 결혼했다는 301호 김 여사. 결혼 30년 차가 되도록 살다 보니 심사숙고하는 모습이 징글징글 싫어졌다고 합니다. 우유부단하고 임기응변도 제대로 못 하는, 융통성이라고는 1도 없는 꽉 막힌 남자라는 겁니다. 처세도 젬병인 데다 상황 판단하는 능력도 느려터진 한참 못난 남자로 보인다나요. 선택이나 결단을 미루는 것도 그렇고요. 내가 좋아서 선택했던 성격이나 특징, 외양이 싫어지곤 합니다.
인공지능(AI)의 양면성
도대체 양면성이 무엇일까요. 사전적인 정의를 풀자면, ‘한 가지 사물에 속해 있는 서로 맞서는 두 가지 성질’을 양면성이라고 합니다. 풀이는 간단해 보이는데 언뜻 와 닿지 않습니다. 최근 화제만발인 ‘챗GPT’라는 인공지능 오픈AI 시스템에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AI 가라사대
“인간의 양면성은 사람 안에 긍정적인 특성과 부정적인 특성이 공존하는 것을 말한다. 모든 개인은 선과 악, 빛과 어둠, 그리고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행동 모두에 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관대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은 경향도 있다. 이것은 인간 본성의 근본적인 측면이며 관계, 감정, 의사결정 등 삶의 많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일반 사전이나 학문적 정의보다 인공지능이 훨씬 풍부하고 상세하게 개념을 설명하는 것 같아 놀랍고 고마운 마음이 생깁니다.
“이러한 특성은 문학, 철학, 종교에서 공통 주제이며, 많은 사상가들에 의해 탐구되어왔다. 그것은 인간의 복잡성과 그들이 일차원적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인 특성과 부정적인 특성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다면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인간 본성의 이러한 측면을 이해하는 것은 개인이 더 자각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개발하고, 더 균형 있고 조화로운 삶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쯤 되면 작가나 학자나 기자 같은 글 쓰고 분석하는 직업에 인공지능이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하는 것 아닌가 싶어 마냥 기쁘지는 않습니다.
덜 미워하며 살아가려면
필자가 강의 말미 칠판에 분필로 이런 글을 또박또박 적습니다.
“모든 인간은 각기 존경스럽고, 각기 추악하다.”
이 양면을 어떻게 다스리고 잘 조절할지는 우리의 숙제입니다. 내게 허물이 있더라도 그 허물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 옛말에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안다’고 했듯이요. 동전이나 건전지가 음양이 있고 앞뒤가 공존해야 가치가 있고 제 역할을 하는 것처럼, 사물도 사람도 그렇습니다. 숙명처럼 붙어 있을 수밖에 없다면 나만의 방식으로 균형과 조화를 찾아야겠습니다. 잘하려고, 인정과 칭찬만 받으려고 안달복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언행일치하고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강박에 너무 주눅 들거나 위축되지 않아야겠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먼 나라 이야기로 들릴 때도 많습니다. 대신에 자신을 덜 미워하며 살아보면 좋겠습니다. 내 안의 허물, 추악함, 부끄러움을 너무 미워하지 말아요. 장점만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점만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장단이 고루 있는 게 사람입니다. 그 장단을 조율하며 오늘은 굿거리로 신명 나게, 내일은 세마치로 사뿐사뿐 가볍게, 모레는 진양조로 느릿느릿 장단 맞추며 살아보아요.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남편의 장례식에 그 여자가 왔다. 경황이 없던 터라 옆에 있던 친구가 “혹시 저 여자 아니냐?”며 귀엣말을 해주지 않았다면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상주에게 인사를 건네기는 고사하고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안개처럼 스며들어 소리 없이 조문을 하고는 그림자처럼 홀연히 자리를 떴으니. 나중에 부의금을 챙길 때도 그 여자 것은 없었다. 철저히 존재를 감춘다는 것이 오히려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고 할지. 다녀간 걸 알고 나니 부의금을 내지 않은 이유가 짐작되면서, 꽁꽁 감춘다고 감춘 것이 티를 낸 꼴이라 피식 웃음이 났다.
남편 장례식에 그 여자의 등장이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딱히 나쁠 것도 없었다. 이제 와서 좋다 나쁘다 할 게 뭔가. 이미 남편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두 여자의 심리적 줄다리기도 남편의 사망으로 맥없이 끝이 나버렸으니. 한쪽 줄은 남편과의 내연 관계인 그 여자가, 다른 쪽 줄은 아내인 내가 잡고 있던 줄다리기.
간호사와 환자로 만나 결혼
위암 판정을 받은 남편은 꼬박 1년을 투병한 후 세상을 떠났다. 47세였다. 평소 소화가 잘 안 되고 속이 더부룩한 증상이 잦아 소화제로 버티다 못해 위내시경 검사를 받았고, 결과는 암이었다. 남편은 크게 충격을 받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암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라 치료는 하되 아울러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의사의 말에도 “사람은 언젠가 죽게 마련이니까요” 하는 말로 대꾸했을 뿐이었다. 문학청년, 아니 문학장년다운 말이었다고 할지.
감정적 동요를 거의 보이지 않는 그를 보며 ‘이이가 이 정도로 담대한 사람이었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아니면 도저히 믿기지 않아 실감을 못 하는 건가?’ 하고 놀란 건 되레 나였다. 아니면 본인이 진단받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내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의연함을 가장하는 건가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남편의 암 진단 후에도 나는 계속 일을 해야 했다. 그렇지 않겠나. 현실은 더 힘들어졌으니. 지금 돌이켜보면 야속했던 건 남편이 아니라 오히려 나였던 것 같다. 결혼 전부터 해오던 일을 결혼 후 아이 출산하고 산후조리 때 잠깐 쉬었을 뿐 20년 넘게 해오면서, 막말로 죽을 날 받아놓은 남편이건만 그때조차 옆에 있어 주질 못했으니. 남편을 떠나보낸 지금, 만약 옆에 있어 주느라 생활비에 치료비도 감당하지 못했다면 그나마 1년 투병도 채우지 못했을 수도 있다며 나 자신을 위로하는 것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나는 간호사다. 30대 초반에 일을 시작해 경력 따라 연륜 따라 52세인 지금은 중간급 병원의 수간호사로 근무 중이다. 남편은 나의 환자였다.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로맨틱한 설정의 영화나 소설에서처럼 간호사와 환자 관계에서 부부가 된 경우였다. 우리 부부의 결혼 생활은 로맨틱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무난했다고는 말할 수 있다. 그 무난함을 지탱해준 것은 두말할 여지 없이 내가 가지고 오는 일정한 수입이었고. 결혼 후 지금까지 돈을 벌어본 적 없는 남편이 묵묵히 가사와 살림을 꾸려온 것도 우리 결혼의 무난함에 일조했음을 물론 인정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남녀의 전통적 역할을 바꾼, 바깥일하는 아내 집안일하는 남편 구도의 가정이었던 것이다.
다만 남편은 나 말고 다른 여자를 또 하나의 아내처럼 의지하며 지냈고, 나는 그런 두 사람 관계를 묵인한 채 결국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정리되는 것을 보아야 했다. 그렇다. 무난했다는 말은 거짓말이고, 처음부터 결코 무난할 수 없었던 결혼 생활이었음을 인정한다. 애초 우리의 결혼은 세 사람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문학폐인 단짝이 내연녀로
그해 추석 명절 연휴 마지막날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밤늦게 병원에 온 30대 후반의 남자. 그날 나는 야간 근무 중이었다. 미혼인 데다 뒤늦게 간호학을 전공한 나이 많은 새내기 간호사였던 나는 명절마다 당직이나 야간 근무에 배정됐다. 가정을 가진 선배 간호사들을 대신해 당연한 양보라고 생각했기에 딱히 불만도 없었다. 명절이라 봤자 갈 곳도 없었기에 더욱.
오빠 집에 갈 수도 있었지만 부모님이 안 계신 친정은 이미 친정이 아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이 연이어 돌아가신 지 2년, 3년 정도밖에 안 되었던 때라 명절에 간다고 해도 눈치나 푸대접을 받지는 않았겠지만, 오빠는 몰라도 별로 반가워하지 않을 올케 앞에 나타나고 싶지 않았다. 교회에 다녔던 우리 집은 차례도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차례 핑계를 대고 찾아갈 명분도 없었다. 세상 아래 피붙이라곤 오빠와 나 남매뿐이었지만, 부모님이 살아 계셨을 때도 그다지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으니 부모님이 떠나신 마당에 새삼 가까이 지내지도 않았다.
이래저래 명절 근무는 갈 곳 없는 나를 편하게 해주었다. 연휴에는 환자가 많을 때도 있고 아주 없을 때도 있다. 그야말로 환자 마음. 그해 추석 명절은 환자가 없는 편에 속했다. 밤 11시경 응급처치를 받은 그 남자, 미래의 내 남편은 장염에 걸렸던 것이다. 그는 다음 날 정식으로 치료를 받고 며칠 입원하는 정도로 회복되었는데, 그 며칠 사이에 그와 나는 상당히 가까워져서 1년 만에 결혼을 했다. 내 나이 40을 넘긴 때였다.
내가 남편 내연녀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결혼 후 5년 만이었다. 두 사람은 대학교 때부터 알던 사이. 연인 중 한쪽이 결혼을 하자 둘의 관계를 정리하지 못한 채 결혼하지 않은 여자 쪽이 내연녀로 자리를 옮겨 앉은 것이었다. 내 입장에서 남편은 애인이 있는 남자, 그 관계를 정리하지 않은 채 결혼한 남자였던 것이다. 둘은 왜 결혼하지 않았을까. 이유는 단순했다. 남편의 무능력 탓이었다. 돈 벌 재주가 없었던 사람, 어쩌면 돈 벌 생각이 없었던 사람이니 두 사람은 결혼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그렇게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 쪽에서도 돈 벌 능력이 없었을 테고.
두 사람은 작가 지망생이었다. 둘 다 대학 문예창작과를 다니던 중에 어느 문학 단체에서 만났다고 했다. 세월이 흘러갔지만 두 사람 모두 글은 써지지 않았고, 그럴수록 서로 간의 연민과 공감대가 깊어갔을 것이다. 고시폐인, 공시폐인 등 폐인증후군 중에서 이른바 ‘문학폐인’이 되어가고 있을 무렵, 경제력 있는 내가 남편 눈에 띄었고 남편은 운 좋게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던 것이다. 물론 그는 결혼과 동시에 그 여자와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뜻대로 안 됐을 뿐. 나는 병원 일로 정신없다 보니 남편의 정서적 빈자리는 풋풋할 때부터 알고 지내던 그 여자가 메워주었을 것이다.
남편의 죽음으로 관계 정리
만약 남편이 자기 일이 있었다면, 규칙적으로 출퇴근하는 직장이 있었다면 결혼과 함께 그 여자와 멀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편은 그러지 못했다. 마흔 살이 넘으면서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커졌고, 그럴수록 그 여자와의 유대는 더 깊어졌을 것이다. 그 여자로선 어차피 결혼 상대가 없을 바에야 남편만큼 편한 사람이 또 있으랴. 내가 번 돈이 그 여자한테로 쏠쏠이 넘어갔을 걸 생각하면 울화가 치밀 때가 있지만 그 또한 다 지나간 일이다.
둘 사이를 알게 된 것은 소설을 쓴답시고 두 사람이 주고받은 인터넷 메시지를 통해서였다. 어느 날 내가 퇴근하기 직전까지 둘이 속닥거리다가 미처 컴퓨터를 끄지 못한 상태에서 들켜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병원에 있는 낮 시간 동안 두 사람은 SNS나 전화로 늘 교류해왔던 것인데, 핑곗거리로도 얼마나 좋은가. 글에 관한 대화 중이었다고. 자기들 스스로도 단지 글 이야기를 하는 거라며 관계를 합리화했을 테고. 돌이켜보면 남편이 그 오랜 세월 묵묵히 살림을 맡아 꾸려준 것도 내가 출근한 사이에 가지는 그 여자와의 밀회 덕이었으리라.
내가 알게 된 이상 두 사람의 관계는 표면적으로는 정리되었다. 다시는 연락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내 쪽에서 그 여자를 만나 헤어져달라고 말한 것도 정리에 대한 경고의 몸짓은 되었을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이혼하지 않는 이상 어쩔 것인가. 남편을 믿을 수밖에. 그러나 내 쪽에서 다시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말이 더 맞다. 그랬다. 나는 묵인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3년 후 남편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내가 두 사람의 관계를 안 후에도 두 사람이 계속 만났는지, 아니면 관계를 정리했는지 나는 모른다.
남편이 떠난 지금 남편과의 추억을 그 여자와 나눠 가진다고 해서 억울할 것도 없다. 다만 추억의 부피로나 깊이로나 나보다 그 여자의 것이 훨씬 두껍고 깊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나를 쓰라리게 한다. 그의 아내는 내가 아니라 그 여자이고 내 인생은 두 사람을 먹여 살리느라 흘러간 게 아닐까 하는 자학적 망상에 빠져들 때도 있지만, 어쨌든 세 사람의 인연은 이걸로 끝이 나게 됐으니….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서이숙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여배우 중 한 명이다. 얼마나 바쁜가 하면, 동시에 네 작품의 촬영 스케줄을 소화해야 할 정도다. 많은 작품에서 찾는다는 것은 그만큼 인정받는 배우라는 뜻이다. 그러나 서이숙은 아직 목마르다고 말한다. 전성기 또한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언제, 어떤 작품을 통해 서이숙(56)이라는 배우를 알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다양할 것이다. 누군가는 JTBC ‘부부의 세계’ 속 최 회장의 아내로, 누군가는 tvN ‘호텔 델루나’의 마고신을 통해 알았을 것이다.
서이숙이 드라마에 출연해 연기를 펼친 지는 10여 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혜성처럼 등장한 배우가 아니다. 그가 드라마에 출연하기까지 무려 25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그중에 무명 연극배우로 지내며 빛을 보지 못한 시간이 20년이다.
서이숙은 긴 어둠의 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했기에 지금의 자신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믿는 시간의 공력을 스스로 입증한 셈이다. 시간의 공력이란 시간을 들인 만큼 값진 결과가 언젠가는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이숙은 시간의 공력 끝에 행복의 경지가 있고, 언젠가 도달할 것이라고 믿는다.
“저는 아직 전성기가 오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럼 도대체 전성기는 뭘까 하는 질문이 생기죠. 제 연기에 대한 만족감이 10점 만점에 5점을 넘겨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아직 전성기가 안 왔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언젠가는 올 거예요. 왜냐하면 저는 시간의 공력을 믿거든요. 그래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 초조함이 없답니다.”
갑상선암, TV 출연으로 전화위복
서이숙은 배우로서 행복을 연극 무대에 섰을 때 마지막으로 느꼈다고 말했다. 그때도 자신의 연기에 만족해서는 아니었다. 관객과의 호흡을 통해 짜릿함을 느꼈다. 그는 “정동환 선생님과 함께한 ‘고곤의 선물’과 ‘오이디푸스’ 무대에서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꼈다”면서 “내 연기에 관객들이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로 행복했다”고 말했다.
무대에서 행복을 느끼기까지 서이숙은 지난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스무 살에 우연히 연극 ‘신의 아그네스’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서이숙은 수원예술극장 단원에 지원해 합격했다. 궁핍한 배우 생활을 이어가던 그는 1989년에 극단 미추에 입단했지만, 15년간 코러스로 무대에 올라야 했다.
그러다가 2003년, 마침내 보상의 시간이 찾아왔다. ‘허삼관 매혈기’로 첫 주연을 맡은 서이숙은 동아연극상 연기상, 히서연극상 기대되는 연극인상 등을 휩쓸었다. 동시에 연극계에 서이숙이라는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까지 거의 20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허삼관 매혈기’ 때 연기가 정말 재밌었어요. 대본이 좋으면 연기가 그냥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깨달았어요. 20년 만에 주연을 맡은 것인데, 시간의 공력이 저를 그렇게 만들어줬다고 생각합니다. ‘허삼관 매혈기’로 상을 받기 시작했으니까 인생작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드라마는 아직 인생작을 못 만났다고 생각합니다.”
드디어 인생의 빛을 보려던 때인 2011년, 서이숙은 갑상선암을 선고받았다. 그는 “진짜 이건 뭐지 싶었다. 열심히 20년 넘게 연기한 것밖에 없는데 내가 뭘 잘못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갑상선암 치료와 수술로 무대에 서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한 서이숙은 이때부터 방송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는 2010년 홍창욱 감독의 SBS 드라마 ‘제중원’을 통해 드라마에 발을 내딛은 상황이었다.
“제가 활동하는 산악회 모임에 홍창욱 감독님도 계셨죠. 감독님께서 ‘제중원’을 준비 중이셨어요. 명성황후 역할이 있는데 신선한 얼굴을 캐스팅하고 싶으셨나 봐요. 저한테 출연 제안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중원’에 출연했고, 시청자분들이 ‘저 배우 누구야, 목소리 좋다’ 하면서 관심을 보이셨죠. 그 이후 계속 드라마에 출연하게 되면서 지금까지 온 거죠. 그때를 생각하면 인생이 마냥 코너로 몰리지는 않는구나, 힘든 일도 결국은 지나가는구나 하고 느껴요.”
이후 서이숙은 MBC ‘짝패’, ‘기황후’, KBS2 ‘착하지 않은 여자들’, tvN ‘호텔 델루나’, JTBC ‘부부의 세계’ 등에 출연하며 얼굴을 알렸다. 최근작은 tvN ‘슈룹’이다. 폐비 윤 씨 역을 맡은 그는 카리스마 넘치는 열연을 펼쳤다. 서이숙을 향한 시청자의 연기 호평은 나날이 쌓여가는데, 그는 여전히 자신의 연기에 만족하지 못한다.
“드라마를 처음 찍을 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제가 연극배우로서는 베테랑일지 모르지만 방송국에서는 초보잖아요. 매일 촬영을 마치고 집에 가면 그때 그렇게 하지 말걸 하는 후회만 남는 거죠. 지금 10년이 지났는데도 똑같이 매일 후회해요. 제가 성향상 한번 연기한 것을 다시 반복하는 것을 힘들어하거든요. 드라마는 똑같은 장면을 여러 번 찍어야 하는데, 저는 매번 100%의 감정이 나오지 않는 거죠. 드라마 위주로 활동한 배우들은 그 감정 배분을 잘하더라고요.”
촬영 때 100%의 감정이 나오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한 번에 100%의 감정을 쏟기 때문에 촬영이 지속되면 그 강도의 에너지가 계속 나오긴 어렵다는 뜻이다. 연극할 때의 연기가 몸에 밴 그는 상대방이 연기할 때도 100%의 감정을 실어 리액션을 해주기 때문이다. 서이숙은 이 부분을 단점이라고 생각하지만 함께 연기하는 배우들은 장점으로 본다.
현재 ‘여배우가 찾는 여배우 1순위’로 통할 만큼 이러한 연기 방식은 방송가에 입소문이 났다. 호흡을 맞춰본 배우들은 그때의 감동을 기억하며 서이숙을 또 찾는다. 같이 연기를 해본 적 없는 배우들도 소문을 듣고 러브콜을 보낸다는 후문이다.
그렇다면 서이숙이 가장 호흡이 좋았다고 느낀 배우는 누구일까. 단번에 ‘부부의 세계’에서 만난 김희애라는 답이 돌아왔다. 서이숙과 김희애가 ‘부부의 세계’ 첫 신을 찍을 때 주고받은 에너지는 압도적이었다고. 당시 현장에 있었던 관계자는 ‘정말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광경’이라고 표현했다. 서이숙과 김희애는 넷플릭스 드라마 ‘퀸 메이커’로 재회했다. 올 상반기 방영 예정으로 두 사람이 보여줄 시너지가 기대를 모은다.
건강하게 잘 늙어가기
서이숙은 좋은 연기를 펼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배우도 결국 사람이고, 그가 살아온 인생이 연기에 영향을 끼친다는 생각이다. 그는 연극계의 거장으로 통하는 고(故) 장민호의 연기를 보고 이 같은 생각을 하게 됐다.
“장민호 선생님은 ‘3월의 눈’이라는 연극 무대에서 명장면을 남기셨어요. 어떤 특별한 장면이 아니고, 그냥 선생님이 걸어가다가 의자에 앉는 장면이에요. 선생님이 걸어가는 모습에서 살아온 삶이 보이더라고요. 이게 연기구나, 살아온 삶이 연기구나라고 그때 깨우쳤죠. 그게 연기의 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는 아직 답이 안 나왔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만족하지 못하고 행복하지 않은 거예요. 저의 답은 죽을 때 나올 것 같아요.”
연기는 삶 그 자체라는 사실을 깨달은 서이숙. 그래서 그의 목표는 ‘잘 늙어가기’다. 한해 한해 나이가 들수록 잘 늙는 게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느낀다고. 서이숙은 최근 갱년기를 겪었다는 사실도 고백했다. “내 나이쯤 되면 흔히 겪는 병이겠거니 했는데 막상 겪어보니 보통 병이 아니더라”는 토로가 이어졌다.
갱년기는 어느 날 불쑥,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 찾아왔다. 서이숙은 신체적인 변화보다 정신적인 변화가 힘들었다고 밝혔다. 그는 “세상에 재밌는 일도, 맛있는 것도 없어졌다. 젊었을 때는 사람들과 술 마시고 수다 떠는 것이 재밌었는데 이제는 뭘 해도 재미없다”면서 “그래서 시니어들이 스트레스가 많은 것 같다. 잘 늙어가는 것은 참 중요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나이가 들면서 서이숙은 사람들과 거리 두기를 하고 있다.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동료들이 많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 그는 “인간관계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다”면서 “나의 제일 친한 친구는 반려견들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2011년생인 반려견 ‘노을이’와 ‘준이’를 키우고 있다.
서이숙에게 반려견들은 가족 그 이상의 존재다. 이를 두고 “사람하고 살아야지 왜 개하고 사느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서이숙이 결혼하지 않고 미혼으로 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결혼에 대한 생각을 묻자 그는 “좋은 사람이 있으면 결혼하고 싶다”면서도 “사람 만나는 횟수를 줄이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안 될 것 같다”고 솔직한 생각을 밝혔다.
“결혼할 때를 놓친 것 같아요. 20대 때는 결혼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때만 해도 사회적으로 여자는 결혼하면 집에서 밥하고 애를 낳아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죠. 저는 그게 너무 싫었어요. 어머니도 일찍 결혼하지 말고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하셨어요. 그때는 제가 연극을 할 때라 돈이 없기도 했죠. 딸이 결혼해서 고생만 할까 봐 어머니가 더 그렇게 말했던 것 같기도 해요.”
서이숙은 하나뿐인 가족, 어머니에 대한 마음이 각별하다.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고, 남동생은 중학생 때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모녀는 서로에게 의지하며 열심히 살았다. 서이숙은 평생 고생만 하신 어머니가 이제는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어머니 생각을 하던 그의 눈가가 어느새 촉촉해졌다.
“어머니는 1938년에 태어나셨어요. 전쟁을 겪은 보릿고개 세대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저를 홀로 키우시면서 정말 힘든 삶을 사셨죠. 돈이 없어서 집에 냉·난방기기가 하나도 없었어요. 한 여인으로서 어머니의 삶이 너무 안쓰러워요. 잘해드리고 싶어서 용돈을 드려도,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잘 안 쓰려고 하시더라고요. 그 모습이 또 안타까워서 저도 마음과 다른 말이 나오게 되고…. 참 속상합니다.”
서이숙은 어머니에게 잔소리하는 자신을 보면서 ‘말실수를 줄이자’는 새해 다짐을 했다. 또 다른 목표는 ‘후회 좀 하지 말자’, ‘내 건강에 신경 쓰자’다. 그중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건강’이다. 그래야 잘 늙어가고, 좋은 연기도 나오는 법이니까. 나이가 들수록 더 짙어질 서이숙의 연기가 기대된다.
“누군가에게 인사할 때 ‘건강하세요’라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얼마나 소중한 말인지 몰랐는데, 이제 너무 잘 알죠. 잘 늙으려면 먼저 건강해야 하는 것 같아요. 몸이 건강해야 정신도 건강하고, 욕망과 미움도 사라지죠. 시니어 독자 여러분, 올 한 해 더 건강하시고 소망하시는 일 모두 이루시길 바랍니다.”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2023년 새해가 밝았다. 나이를 한 살 더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게 된 것이 내 경우는 50세 이후였던 것 같다. 올해부터 우리나라도 법적으로 ‘만 나이’를 적용한다고 하니 한 살을 되돌린 느낌이다. 기분이 나쁘지 않다. 한 살이 어딘가. 그러니까 서양처럼 우리도 이제는 태어났을 때 0살로 시작하는 것이다.
토끼띠인 나는 올해 생일에 환갑을 맞는다. 한 바퀴 돌아 다시 태어났다고 쳐서 0살이라 우겨도 또래 친구들은 함께 웃어주며 공감하리라. 시집 못 간 노처녀가 한해 한해 더할 때마다 속이 타들어가듯이(요즘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초조하고 심란하기는 여전할 테지), 이혼 후 ‘돌싱’ 10년 차인 나도 이제는 막차를 탄 느낌이 확연하다. 60세, 재혼이든 그저 친구 사이든 남자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올해 마지막으로 삼겠다는 뜻인데, 이미 너무 늦었나? 솔직히 50대가 끝나는 작년을 기점으로 했지만 나 스스로 1년 더 연장하는 것이다. 더구나 올해부터는 공식적으로 만 나이가 적용된다지 않나. 이렇게 연장, 연장하면서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을 달래는 걸 테지.
사랑에는 연령도, 국경도 없다지만 그건 그런 사랑을 성취한 사람들에게나 해당하는 말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령에서 걸리고, 국경은 아예 넘어볼 생각도 못 한다. 그렇다고 이혼 후 적극적으로 상대를 찾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먹고사느라 바빴고, 이미 성인이지만 그래도 엄마 마음에 두 아들을 심리적으로 건사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이혼을 하고 나니 아이들에게 더 마음이 쓰이고, 집착까지는 아니라 해도 안쓰럽고 미안해서 그저 마음뿐이지만 그 마음뿐인 마음을 더 쏟게 된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건 막연한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만나면 좋고 못 만나면 하는 수 없고. 그런데 이런 말은 하나마나다. 만남을 위한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말만 그렇게 하는 것이기에. 로또에 당첨되려면 우선 매주 로또를 사야 할 게 아닌가.
내 나이 60, 이성을 만날 수 있을까?
나보다 두 살 많은 이혼 선배 언니는 기한을 정해놓고 남자 찾는 일에 열심이고 부지런했다. 주변에 소개를 부탁하고, 모임에 나가서도 적당한 사람이 없나 둘러보는 등 적극적이었다. 내가 올해까지만 남자를 찾아보겠다고 한 것도 실은 그 언니의 말을 흉내 낸 것이다. 그러니까 그 언니는 만 60세까지 열심히 찾고, 그래도 안 되면 포기하고 혼자 살겠다고 한 것이다. 이혼한 지 30년 된 그 언니는 말했다. 혼자 밥 먹으면서 혼자 늙어가는 것, 너무 쓸쓸할 것 같다고. 결혼은 안 해도 함께 밥 먹고 편안한 차림으로 밤마실도 가고, 그러다 온기 비치는 카페에서 차도 마시고 그런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누구는 그런 사람이 있으면 싫은가? 혼자 사는 사람 백이면 백, 다 그런 사람을 원한다고 할 테지. 하지만 그 언니는 나와 달리 적극적으로 찾지 않았던가. 60세에 소개팅을 하기까지 했으니. 결과는 이번에는 혹시나 했는데 이번에도 역시나였지만. 그렇게 해서 그 언니는 본인이 말한 대로 결연히 ‘연애계’를 떠났고, 지금은 동성 친구들 속에서 다양한 취미생활로 삶의 활력을 찾으려고 노력 중이다.
아무런 시도도 노력도 없이 올해 60세가 된 나는 포기하고 말고도 없다. 포기란 노력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세 가지 카드 중 하나니까. 노력해서 성취하거나, 노력했지만 실패하거나, 노력한 후에 포기하거나. 이런 세 가지 카드 말이다.
떠난 사랑에 10년째 가슴앓이하는 나
서론이 너무 길었다. 이런 사설을 늘어놓으려던 건 아닌데. 실은 내게는 짝사랑 상대가 있다. 사랑 중에 가장 안전하고, 돈도 안 들고, 헤어질 염려가 없는 게 짝사랑이라고 하듯이 내 사랑도 그렇다. 엄밀히는 짝사랑이 아니지만. 그러니까 이혼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딱 3개월을 만난 사람. 가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유부남을 만났다고 손가락질해도 하는 수 없다. 그러곤 10년을 가슴앓이 중이다. 아니 앞으로 30년을 가슴앓이할지도 모른다. 고작 3개월 만나고 30년 가슴을 앓는 사랑. 그 고통이면 유부남을 만난 대가를 충분히 치르는 것 아닐까.
그는 나보다 열두 살 많은 띠동갑이었다. 나이가 많다는 것이 오히려 좋았다. 열두 살보다 더 많았다면 더 좋았을 만큼. 왜냐하면 나는 그에게서 아버지를 찾았으니까.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임에도 왠지 그는 아버지를 닮은 것 같았다. 마냥 푸근하고 의지가 됐다. 물론 이혼한 직후라 쓰라린 상처를 위로받고 기대고 싶은 마음이 커서 더 그랬을 것이다. 그가 유부남이란 게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끌렸던 것도 그에게서 아버지를 발견하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다. 지금이라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심리적·정서적으로 거의 독립적인 삶을 살고 있으니까.
다섯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이었다. 아버지는 선비풍에 우울 기질이 있는 이른바 문학청년이었다고 한다. 학창 시절의 멜랑콜리함이 생활 전선에서는 치명적으로 작용하여 적성과는 무관하게 선택한 금융 계통의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했고, 설상가상 불명예스러운 일로 사표를 쓴 후 우울증을 앓았다고 했다. 지금 같으면 정신과 치료라도 받을 수 있었겠지만 그때는 그럴 상황도 아니었고, 어머니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욕실에서 목을 매어 돌아가셨다. 미처 손 써볼 겨를도 없었던 순식간의 일이었다고.
5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와 단둘이 남게 된 나는 어머니보다 아버지가 늘 그리웠다. 아주 어릴 때라 기억에 아예 없으면 부재만을 느꼈을 테지만, 다섯 살 무렵이면 어렴풋이 기억나는 나이였다. 그렇게 형체 없는 그리움에 아버지 있는 친구들에 대한 부러움이 버무려져 정체를 알 수 없는 상처가 허한 속을 휘젓곤 했다.
이혼한 남편은 차갑고 냉담한 사람이었다. 내가 부성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빈자리를 채워주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거리를 두고 나를 대했다. 때로는 조종을 했다. 사랑을 거래하고 조건을 걸면서 늘 나를 목마르게 했고, 안달나게 했고, 외롭게 했다. 결혼한 지 10년 지났을 무렵부터 외도를 하기 시작하더니, 한 여자를 꾸준히 만나는 것도 아니고 이 여자 저 여자를 바꿔가며 습관적으로 바람을 피웠다. 부부랄 것도 없이 어느 새 우리는 남남이 되어 있었고, 작은애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각자의 길을 택해 떠났다. 그는 지금도 어느 여자의 치마폭에 감겨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환상을 쫓는 사랑
나는 그렇게 늘 쓸쓸했다. 전 남편을 통해서 아버지의 그림자를 붙잡고 싶었지만 말 그대로 그림자처럼 스러져버렸고, 그러고는 그 남자를 만난 것이다. 그는 따뜻하고 배려심 많은 사람이었다. 사랑이 고픈 내게 사랑을 선물로 주러 온 사람 같았다.
이혼 후 내가 찾은 일은 출판 기획이었다. 대학 졸업 후 결혼 전까지 출판사 일을 잠깐 했을 뿐인데, 단절된 경력에도 불구하고 운 좋게 취직할 수 있었다. 규모도 꽤 되는 곳이었다. 언론 계통의 출판을 의뢰하러 온 그를 그렇게 만났다. 책이 나온 날 자축 겸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며 그가 식사 대접을 제안했고, 그 후 우리는 가까워졌다. 그날부터 3개월 동안 우리는 거의 매일 만났다. 언론사에 근무했던 터라 비교적 자유로이 시간을 낼 수 있는 그에 비해 나는 붙박이로 일해야 했기 때문에 더 자주 만나지 못해 안달이 난 쪽은 처음엔 그였다. 만나는 동안 이제 그만 관계를 끝내야 하지 않겠냐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가 두어 차례 꺼냈을 때 들은 척도 하지 않았을 정도로 그는 내게 푹 빠져 있었다.
그러던 그가 정확히 석 달 만에 관계를 정리하자고 했다. 만나는 내내 그만 만나야지, 그만 멈춰 서야지 하고 늘 생각해왔다면서. 그가 멈추면 멈추는 것인가? 내가 멈추자고 했을 때는 아예 브레이크가 없는 듯이 질주하더니. 가는 데까지 가보자고 했던 게 누구였던가. 결혼도 남자가 하자고 해야 성사된다더니, 만났다 헤어지는 주도권도 남자가 쥐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매달리지도 않았지만 매달려봤자라는 것을 모를 나이가 아니었다. 알았다고 하고, 그러자고 하는 것으로 우리 관계는 끝났다. 그나마 자존심을 그렇게라도 지킬 수 있었던 것이 그와 나의 관계에서 내가 추스를 수 있는 전부였다. 그는 내 눈앞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그때부터 내 마음에서 짝사랑이란 형태로 10년째 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10년간 끌어오고 있는 그에 대한 사랑은 환상이라는 것을. 그는 나에게 상처 준 남편을 대신하고, 목마른 아버지의 사랑을 대신하기 위해 내가 만들어낸 남자라는 것을. 올해 나는 그 남자를 마음에서 지워버리려고 한다. 60세 이후 새로운 10년을 또 그렇게 보내서는 안 될 것이기에. 하지만 자신은 없다. 혹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할 것이다. 그 나이에 그런 짝사랑이나마 마음에 품고 사는 것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데, 때로는 행복하기조차 할 텐데 왜 굳이 지우려 하냐고. 정말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비참한 여자인가. 아니면 그의 아내가 죽기를 빌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그의 옆자리가 비면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그건 환상도 아니고 망상일 테지만.
※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전화 주실 줄 알고 기다리다 다시 해요.”
“응… 손님 만나는 중이어서….”
“그랬어요? 그럼 그렇다고 문자라도 주시지… 나는 함께 점심하려고 전화했던 건데.”
“손님과 점심 약속을 했던 터라… 미리 말하지 그랬어?”
“미리 말한다고 약속 잡아주실 것도 아니면서.”
“뭐 어쨌든. 그나저나 잘 지내고?”
“네, 저는 잘 지내요. 조만간 점심 사드리고 싶네요.”
“점심은 무슨. 됐고.”
“그럴 줄 알았어요.”
앞자리에 앉아 있던 예의 그 ‘손님’이 화장실을 가는 척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주는 바람에 통화가 오히려 길어졌다. 점심 식사 중에 그 여자의 전화가 왔지만 일부러 받지 않았다. 그 손님과의 자리가 대단히 중요해서가 아니었다. 핑계 삼아 그 여자의 전화를 따돌리고 싶었을 뿐. 손님이라야 등산을 함께 다니는 동네 지인으로 별 용건 없이 그냥 점심이나 함께하자는 게 다였으니까.
“그렇게 잘 알면서 왜 전화했어?”
“보고 싶으니까 했죠. 얼굴 본 지도 오래됐고.”
“우리가 얼굴 보고 싶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만날 사인가? 아무튼 난 지금 바빠. 그만 끊자고.”
얼굴 보고 싶다며 자유로이 만날 수 없는 사이, 만나면 부담스러운 사이, 껄끄러운 사이. 그렇다, 그녀와 나는 옛 연인 사이다. 눈 씻고 찾으려 들면야 한 자락 추억이야 없지는 않겠지만 그딴 건 찾고 싶지도 않고, 생각할수록 씁쓰레함만 남은 관계. 그런데 그녀는 그렇지 않다는 건가. 잊을 만하면 연락이 오는 걸 보면 아직도 내게 미련이 있다는 거겠지만, 나는 한마디로 노 생큐!다. 안 그러면 또 뭘 어쩔 건데? 지금 와서 내가 뭘 해줄 수 있다고. 헤어진 지 벌써 3년인데.
사업 실패와 연이은 가정 붕괴
그녀는 두 번 결혼하고 두 번 이혼한 100억 정도 가진 재산가다. 굳이 돈을 강조하는 이유는 돈밖에 가진 것이 없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나이는 나보다 몇 살 적다. 몸매도 좋고 얼굴도 예쁘다. 그런 조건 좋은 여자가 내게 안달이 나 있는 것이다. 그럼 나는? 얼마나 조건이 좋은 남자길래 그런 잘난 여자가 죽자고 매달리는 거냐고? 나는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그렇다고 백수건달이나 제비족은 아닌, 어쨌거나 그녀에게 만만하게 보인 50대 중반 독신남이다. 그렇다면 내가 그녀의 세 번째 남편감이냐고? 천만에 말씀! 누구 맘대로!
10년 전 나는 사업에 실패했다. 40대 중반이었다. 그 여파로 아내가 당시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2학년이던 남매를 데리고 미국으로 가버리자 가족들로부터 보기 좋게 버림을 받았다. 물론 내 잘못이 컸다. 외국 유명 브랜드 의류 수입상을 했던 나는 불황을 맞아 기울어가는 사업체를 정리할 기회가 몇 번 있었으나 어떻게든 살려보리라 무모한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나를 설득하며 마음 졸이다 못해 인내심이 바닥 난 아내는 반은 홧김에, 반은 살 길을 찾아 미국 친정으로 날아갔다. 그렇게 하루아침에 가정과 사업체가 박살났고,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내는 물론 생이별한 자식들의 소식도 듣지 못하고 있다.
실낱같은 희망도 보이지 않는, 자살할 궁리만 모색하던 처참한 나날이었다. 어떻게 하면 고통 없이 고통 많은 세상을 떠날 수 있을까, 머릿속은 온통 자살 생각으로 가득 찼다. 1년 후 이혼 서류를 보내온 아내의 요구에 이렇다 할 대꾸나 변명 한마디 없이 응했던 것도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 탓이었다.
그럼에도 늘그막에 외손주 둘을 경제적으로 뒷바라지해주시는 장인 장모님께 진심으로 감사했다. 처가의 형편이 그다지 넉넉하지 않았음에도. 어쨌거나 두 아이는 미국에서 교육을 받게 되었으니 장담할 일은 아니지만 한국에서보다 장래가 밝아진 게 아닌가. 그 와중에 아내는 나에 대한 원망과 일말의 복수심으로 나와 아이들의 관계를 차단한 것이리라. 나는 나대로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그때는 서로를 이해하고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일단 긍정적인 방향으로 내 삶을 이어가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이렇다 할 일거리도 없고 재기의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간간이 들어오는 경영 계통 강연 수입으로 그때그때 생활비를 벌며 심신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등산과 마음 공부에 전념하고 있다.
망한 나에게 다가온 거부의 여인
아, 그녀는 사업상 나의 고객이었다. 내가 쫄딱 망한 것을 알고 호감을 표해온 것이었다. 쫄딱 망한 중년의 남자에게 다가온 거부의 여인. 게다가 한 미모하는 이혼녀. 로또 대박과 맞먹는 행운이 아니냐고? 게다가 아내까지 미국으로 내뺀 상황이었으니. 글쎄, 계속 들어보시라.
나도 처음엔 그녀라는 동아줄을 붙잡고 재기를 꿈꿨다. 그녀를, 아니 그녀의 돈을 통해 회생할 가능성을 탐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녀도 불쌍한 여자다. 그녀의 인간관계, 특히 남자관계는 늘 돈이 중심이었다. 첫 결혼도 두 집안이 서로 돈을 보고 딸과 아들을 교환했던 것이니 애정 없는 혼인 생활이 평탄할 리 없었고, 결국 남편의 외도로 3년 만에 파탄이 났다.
그녀의 두 번째 결혼은 그녀 측에서 오히려 더 많은 돈을 탐냄으로써 이뤄졌다. 20년 연상의 재벌급 홀아비, 그녀로서는 재력적 지위가 급상승하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기쁨도 하늘을 찔렀다. 재물에 마음이 꽂힌 사람들은 더 많은 재물을, 권력을 탐하는 부류들은 더 높은 자리를, 인기몰이에 집착하는 자들은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무한 인기를 갈구하는 법이니. 사람은 저마다 우상을 모시고 살며, 우상 숭배란 맹목적인 것이지 않은가. 그러니 이미 돈이 그렇게 많으면서도 돈에 집착하고 돈에 갈증이 든 그녀를 탓할 수만은 없는 게 아닌가.
그녀 부부 사이에는 자식이 없어 에너지를 쏟을 곳이라곤 오직 돈에 관계된 것이었기에, 앞뒤 재지 않고 무분별하게 사업을 벌인 것이 화근이 되어 많은 돈을 잃고 그만 이혼을 당하고 말았다. 두 번째 이혼이었다. 그러고는 나를 만난 것이다. 비록 이혼을 했어도 받은 위자료와 본인 재산 등으로 내게 대줄 수 있는 사업자금은 충분했다.
자, 이런 상황이다. 처음에야 나도 횡재한 기분이었다. 속물이라 욕해도 상관없다. 사실이니까. 거처가 마땅찮았던 나는 바로 강남에 있는 그녀의 80평대 아파트로 들어갔고, 그렇게 우리의 동거가 시작됐다. 1년이 지났을 무렵, 한마디로 나는 그녀에게서 환멸을 느꼈다. 그녀는 오직 돈, 돈, 돈만 알 뿐이었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돈 타령에, 아마 꿈조차 돈에 대한 것을 꿨으리라.
그녀에게서는 어떤 내면의 향기도, 내적 감수성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함께 사는 동안 책은 고사하고 글 한 줄 읽는 모습을 보지 못했고, 사색에 잠긴다거나 주변이나 일상에서 감동을 느끼는 일도 없었다. 심지어 자연에 대해서도 교감할 줄 모르는 여자였다. 아마도 푸른 여름은 만 원권 지폐로, 노란 가을은 오만 원권 지폐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1년 만에 그녀의 아파트를 나왔다. 들어갈 때도 맨몸, 나올 때도 맨몸. 여전히 집도 절도 없었던 나는 TV 프로그램 속 자연인처럼 어느 산자락 빈집에서 한 달가량 몸을 의지해 있었다. 그 후 낯선 소도시로 흘러들어 친구와 지인들의 도움으로 작은 강연, 독서 모임 등을 이끌면서 내 입을 먹이며 살고 있다.
나와 그녀의 관계에는 환멸만 남고
혹자는 배부른 투정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내면이니 감수성이니 그딴 게 밥 먹여주냐고. 봉을 잡았으니 빌붙어서 몸이라도 편할 수 있지 않았냐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일단 한번 살아보시라. 입만 열면 돈타령에 무식이 하늘을 찌르는 여자, 나는 열을 준대도 덧정 없다.
만약 그 여자가 그나마 머리에 든 것이 있는 나를 흠모하여 자신에게는 없는 지성이나 교양을 취해보리라는 갸륵함이 눈곱만큼이라도 있었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환멸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애초에 그런 코드가 없었다. 그렇다면 내게서 무엇을 보고, 내가 가진 어떤 점이 그녀를 끌어당겼을까.
돌이켜보면 그녀는 나를 자기 재산 증식시켜주고 관리해주는 머슴 정도로 취급했던 것 같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지, 어디 가서 재산을 불릴지, 하나보다는 둘이 힘이 되니 속된 말로 만만한 나를 ‘꼬붕’으로 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내게 애초 애정 따위는 없었던 것이다. 하긴 그녀에게 애정 같은 감정과 정서가 있기나 할까. 내가 아는 한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더불어 인간에 대한 신뢰나 기본적인 예의도 갖추지 못했으니. 설혹 내게 사업자금을 대주었다 해도 내가 원하는 일을 자유로이 할 수도 없었을 것이며, 그녀의 이해관계와 연결되는 것에 한해서 허용하는 게 고작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그녀가 지금도 내 앞에서 알짱거리고 있으니 불쾌할 수밖에.
내가 만날 수 있는 여자는 지성, 외모, 상식과 자존감을 갖춘 사람이기가 어려울까? 솔직히 그럴 것 같다. 그런 여자들은 남자 또한 엇비슷한 수준에서 만나고 싶어 할 텐데,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능력 면에서 현저히 기울어져 있으니 두루 괜찮은 여자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없을 것 같다. 그러다 보니 한쪽으로 치우친 여자들만 꼬인다고 할지. 겨우 한 여자 만난 것을 두고 성급한 일반화를 하냐고? 내가 설마 한 여자만 두고 그러겠나. 그 사이에 두 여자가 더 내게 호감을 표해왔는데 역시 비슷한 여자들이었다. 돈밖에 없고 천박한. 돈 많고 무식한 여자, 돈밖에 모르는 여자들이 꼬이는 것이 내 운명이고 팔자일까.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