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생이 초조한 중년에게… “우리는 아직 성장 중입니다”
- 중년이 되면 초조함에 휩싸일 때가 있다. 어영부영하다가 인생이 허무하게 지나가 버리면 어떡하나 싶다. 세상은 그 나이 먹도록 해놓은 게 얼마나 있냐고 다그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자괴감에 빠져든다. 그래서일까? 딸이 당연히 알아서 잘살고 있으리라 여기면서도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한성희 원장의 신간 ‘벌써 마흔이 된 딸에게’는 그 걱정에서부터 시작됐다. 한성희 원장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서 한 살 아기부터 85세 노인까지 마음이 아픈 사람이면 누구든 만났다. 그 과정에서 평생에 걸쳐 맞닥뜨릴 수 있는 여러 정신적 문제를 지켜보고 치료해왔다. 43년간 다양한 사례를 접한 그지만 자식에게는 서툰 엄마였다. 10여 년 전, 딸이 공부를 위해 떠난 미국에서 직장을 구하고 사랑하는 이를 만나 결혼한다 했을 때 깨달았다. 더 이상 품 안의 어린아이가 아님을, 이제는 독립할 만큼 자랐다는 사실을 말이다. 진료실을 찾은 환자들에겐 했지만 정작 딸에게는 하지 못한 말이 많았다. 그 마음을 담은 글은 2013년 ‘딸에게 보내는 심리학 편지’로 세상에 나왔고, 독자들의 공감을 받으며 21만 부가 판매됐다. “살면서 작가라고 불리는 날이 올 줄은 몰랐어요. 죽기 전에 책을 한번 내보면 좋겠다는 어렴풋한 생각은 있었지만요. ‘딸에게 보내는 심리학 편지’가 이렇게까지 좋은 반응을 얻으리라 상상도 못 했어요. 이제 아이가 결혼한 지 10년이 넘었고, 서로 떨어져 산 지 15년이 됐네요. 작년에 직접 마흔 번째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어 미국에 갔는데, 늘 앳돼 보였던 딸이 나름의 고민도 생긴 것 같고 지쳐 보였어요. 진짜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중년의 위기’를 겪고 있었던 거죠.” 중간 지점, 또 한 번의 파도 한 원장도 서른일곱에 떠난 미국 연수 당시 이른 ‘중년의 위기’를 겪었다. 진로 문제로 고민하며 초조한 와중에 일은 홍수처럼 쏟아졌다. 체력적인 한계에 부딪혀도 경력이 쌓이는 만큼 의미 있는 성과를 만들어야 했다. 자유로운 시기는 끝났다고 여기며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자세로 살았다. 딸의 얼굴에서 과거의 자신이 겹쳐 보였다. 만약 마흔 살의 성장통을 겪고 있다면 엄마로서, 정신분석가로서 너무 늦기 전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신간 ‘벌써 마흔이 된 딸에게’는 인생의 중간 지점에서 바람 잘 날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모든 이에게 전하는 응원을 담았다. “두 돌이 지나면 말이 시작돼야 하듯, 인생 단계별 발달 과업이 있어요. 40대는 생산성을 다뤄야 할 단계입니다. 삶의 스펙트럼이 폭발적으로 확대되고, 회사와 가정의 일을 모두 신경 써야 하는 시기거든요. 매일매일 전쟁일 거예요. 요즘 40대는 그 어느 세대보다 최선을 다해 버티고 있다고 느껴요. 노고를 알아주는 사람은 별로 없고요. SNS가 지배하는 세상에는 이미 부와 명예를 이룬 사람투성이죠. 그러다 보니 보통의 삶은 부족한 것이 돼버리고, 박탈감이 들 수 있어요. 게다가 오늘 열심히 한 그 일을 내일도 똑같이 반복해야 하는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온전한 ‘나’는 없다며 우울해질 때도 있을 겁니다.” 더불어 바쁜 일상에 지치면 뭐든 새롭지 않다. 벌써 해봤거나, 했던 것의 변주 정도다. 무엇을 먹어도 비슷한 맛이고, 누구를 만나도 비슷한 얘기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면서 지루하다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고, 옛날에 재미있었던 순간만 기억난다. 그렇게 과거의 기억과 습관에 갇히게 된다. 다 해봐서 새로울 게 없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현재를 과거의 방식대로 살려고 하니 매사 심드렁해진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변한 까닭이다. 딛고 나아가며 성장하기 마흔 이후 혼란을 겪더라도 한 원장은 “겁먹지 말고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시간은 유한하고 힘든 시절은 영원하지 않으며, 지나고 보면 가장 풍성한 때였구나 알게 된단다. 지금이야말로 세상의 기준에 맞춰오느라, 세상이 부여한 역할과 책임을 다하느라 억눌러온 내면의 욕구를 돌아봐야 한다. 하고 싶은 일, 되고 싶었던 모습을 찾다 보면 생의 의미와 목적을 찾게 되고, 어떤 시련이 오든 무너지지 않을 힘이 생길 테다. 남들이 뜯어말려도 강하게 끌리고 포기가 안 되는 길이 있다면 가보는 것도 방법이다. 나이가 몇이든 무슨 상관이랴. 처음엔 의아한 선택처럼 보여도 선택이 쌓이고 쌓여 고유한 스토리가 된다. 대신 방향을 완전히 틀어 새로운 도전을 하기보다, 인생의 여정에서 좀 더 집중할 만한 거리를 찾는 게 먼저다. “그저 더 나아지고 싶은 건강한 본능을 들여다보면 됩니다. 저는 환자 한명 한명을 심도 있게 치료하고 싶어 오십에 뒤늦은 개원을 준비했고, 지금까지 해왔던 정신분석 공부를 좀 더 깊이 있게 해보고자 예순에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왔습니다. 주변의 시선이 호의적이지 않았고 고민이 깊었지만, 시작도 해보지 않고 그만두기는 싫었어요. 의사로서 걸어온 길이 흔히 말하는 성공 공식과는 거리가 멀었죠. 그래도 자신의 느낌을 믿고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그게 행복한 인생이지 않을까요. 스스로 완전한 어른이 됐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제야 조금씩 성숙해지고 있구나 짐작해요.”
- 2024-04-23 08:49
-
- [카드뉴스] 딸과 함께 읽고 싶은 도서들
- > 딸과 함께 읽고 싶은 도서들 - by 한성희 나는 젊음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찰스 핸디 저) 다양한 배경과 경험을 지닌 각계각층 60대 여성 29명의 이야기. ‘요즘 60대의 초상’을 콘셉트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경영철학자인 찰스 핸디가 글을 엮고, 그의 부인 엘리자베스 핸디가 사진을 찍었다. 온 더 무브 (올리버 색스 저) 인간의 고독을 바라보며 얻은 통찰을 글로 담아낸 시대의 지성 올리버 색스의 자서전. 사람과 지적 탐구에 대한 열정, 성 정체성에 대한 고뇌 등을 비롯해 자신에게 영향을 준 작가, 과학자들과의 우정 등을 들려준다. 호밀밭의 파수꾼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저) 20세기 청춘들을 열광하게 한 성장소설. 사립학교의 문제아인 주인공이 퇴학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며칠간의 일화를 그린다. 10대들의 언어를 고스란히 살린 문장과 기성세대를 향한 예리한 성찰이 돋보인다.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호모 사피엔스부터 인공지능까지, 방대한 역사를 한 권에 담았다. 생물학, 경제학, 종교학 등 다양한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인류의 시원부터 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 등 인간의 끊임없는 진화를 조명한다.
- 2020-05-22 09:42
-
- 자녀로부터의 독립, 오롯한 ‘나’로 성장하다
- 2013년 ‘딸에게 보내는 심리학 편지’를 통해 수많은 딸들의 마음을 다독여주었던 한성희(韓星姬) 이한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딸의 결혼을 앞둔 한 엄마이자, 정신과 전문의로서 건넨 진정 어린 조언이 큰 사랑을 받으며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잠시 절판됐던 도서가 최근 다시 출간됐다는 희소식이 들려왔다. 시간의 흐름 때문일까? 표지에 그려진 딸의 모습은 한층 더 성숙해져 있었다. 당시 50대였던 한 원장 또한 어느덧 60대에 이르렀다. 딸 못지않은 인생의 전환점을 지났을 터. 그녀는 “잘 성장하고 있다”며 담담히 안부를 들려줬다. 하나뿐인 딸아이의 결혼, 그것은 한 원장이 책을 펴낸 계기이자 크나큰 성장통을 앓게 한 사건이었다. 자녀의 독립이 시원섭섭한 건 어느 부모나 마찬가지이지만, 그녀의 상황은 좀 달랐다. “딸이 미국 유학을 갔는데, 당연히 언젠가 다시 돌아오리라 여겼죠. 그런데 어느 날 결혼 얘기를 꺼내더니 아예 미국에서 살 거라더군요. 제 나이와 여건을 감안할 때, 앞으로 20년 동안 1년에 한 번씩 본다 해도, 평생 딸을 볼 기회가 20번 남짓인 거예요. 너무나 기가 찬 노릇이었죠. 영원한 이별은 아니더라도, 그 못지않은 심정이었어요. 공항에서 서로 엉엉 울며 헤어졌지만, 즐거운 신혼을 앞둔 젊은 딸과 점점 늙어만 가는 엄마가 느끼는 아픔은 천지차이죠. 그 옛날 우리 친정엄마도 같은 마음으로 나를 보냈을 텐데, 이 정도로 상실과 아픔이 크리라고는 그땐 상상도 못했어요.” 아직 어린 딸을 이것저것 챙겨주고 가르쳐주고 싶었지만 상황이 녹록지는 않았다. 아쉬운 마음도 달랠 겸 그동안 딸에게 하지 못한 이야기를 담아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딸에게 보내는 심리학 편지’가 완성됐고, 덕분에 그녀는 엄마로서의 삶 1부를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자녀가 부모로부터 독립하기도 어렵지만, 부모가 자녀로부터 독립하는 건 더욱 쉽지 않다는 걸 경험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부모가 말로는 ‘독립하라’고 하면서도 막상 자식을 떠나보내지 못한 채 주변을 맴돌죠. 아이를 한 인격체로 존중해야 하는데 내가 외롭고 힘들다고 계속 붙잡아두는 거예요. 겉으로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그럴싸한 이유를 대겠지만, 사실상 소유욕에서 비롯된 착취나 다름없죠. 물론 저도 아주 쿨하게 딸을 보내지는 못한 것 같아요. 그만큼 자녀에게서 독립하는 건 누구에게나 참 힘든 일이죠.” 입체적 삶을 위한 경험 투자 그토록 힘든 일임에도 해내야 하는 까닭은 한 인간으로서의 ‘성장’에 있었다. 딸의 성장은 물론 엄마의 성장까지 말이다.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것, 여자에서 엄마가 되는 것, 그리고 엄마에서 다시 ‘나’로 돌아오는 것. 한 원장은 이러한 성장을 통해 오롯이 나로서 존재하고 보다 성숙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과정 같지만, 역할 변화에 따른 전환점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 시기가 고통스러워서 어떤 이들은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기도 하죠. 자신에게 주어졌던 역할의 고리들을 과감히 끊어내는 용기가 필요해요. 물론 그것이 더러 외롭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겠지만, 인간으로 태어난 존재라면 다 겪어야 할 일들이죠. 흔들리다가도 중심을 찾는 오뚝이처럼 스스로 바로 설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것이 성장하는 과정이고, 그렇게 성숙해야 왜곡과 갈등 없이 자녀와 잘 분리될 수 있습니다.” 삶의 키워드를 ‘성장’이라고 언급한 한 원장은 몇 해 전 과감히 유학을 결정했다. 딸도 결혼하고 안정적으로 병원을 운영하던 차였기에 사람들은 그녀의 선택을 의아해했다. 늦은 나이에 웬 공부냐는 반응이었다. 단순히 커리어만을 위했다면 단행하지 못했겠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성장을 바랐기에 가능했다. “커리어는 성장을 통해 얻는 일종의 부산물이죠. 애당초 그걸 목적에 둔 건 아니었어요. 물론 현실적인 면에서 내가 잃는 것과 얻는 것을 두고 저울질을 많이 했었죠. 금전적인 리스크도 있었지만 거기에만 초점을 맞추면 바보 같은 선택을 한 거예요. 그러나 돈이란 것은 결국 나의 잠재성을 실현하고 내 삶을 더욱 입체적으로 만드는 데 쓰이는 거잖아요. 나중에 죽음에 이르렀을 때 돈이나 나이 등등 때문에 성장의 기회를 잃었다고 생각하면 너무 후회할 것 같더라고요. 갑자기 남자가 된다거나, 공학자가 된다거나 하는 비현실적인 바람도 아닌데 말이죠. 그저 내가 해오던 것을 더 심화하려는 욕구였기에 조금만 발돋움하면 되는 거였어요. 그렇게 ‘돈을 경험에 투자하자’고 마음먹었죠.” 기품 있는 중년의 아름다움 그러나 이제 막 가정을 꾸린 자녀 세대의 경우 개인의 성장보다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하는 이가 대부분일 것이다. 한 원장은 자신을 찾아오는 워킹맘들의 우울한 심정을 절절히 공감한다고 말했다. 그녀 역시 워킹맘으로 고단한 현실을 체감했기 때문이다. 단, 허덕이며 사는 삶 속에서도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땐 당연히 먹고살려고 일하지 자기실현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요. 생계를 위한 일이 꿈을 이루는 일이면 참 좋겠지만, 그러기는 쉽지 않죠. 그러나 그런 중에도 자기 꿈을 위한 여지는 남겨둬야 한다고 생각해요. 당장은 실현되지 않을 것 같아도 조각을 쌓다 보면 언젠가 실체가 보이기 시작하거든요. 애 키우고 일하느라 아직은 버겁더라도 가슴 한편에 꿈을 품고 살아야 언젠가 이모작, 삼모작의 기회도 잡을 수 있습니다. 짬짬이 단 15분이라도 취미시간을 즐기는 것도 좋은 방법이고요.” 한 원장 역시 수십 년 동안 천천히 조금씩 즐겨온 취미가 있다. 바로 ‘첼로’다. 딸이 세 살 무렵 첼로를 샀는데, 이제 중급 정도의 실력은 된단다. 자신의 여든 살 생일에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연주하리라는 야무진 꿈도 생겼다. “인생 별것 없다. 재미있게 살아라”라며 힘든 시절 그녀를 위로했던 친정어머니의 말씀처럼,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살아가리라 다짐도 해본다. 그런 한 원장 역시 딸아이가 늘 즐겁게 또 아름답게 중년을 맞이하길 바란다. “언젠가 제인 구달이 한국에 왔을 때 백발을 늘어뜨린 수수한 모습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여든이 넘은 나이에 민낯이었는데도, 메이크업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기품이 느껴지더군요. 코코 샤넬은 ‘스무 살 때의 얼굴은 자연의 선물이고, 쉰 살의 얼굴은 당신의 공적이다’라고 했는데, 자기 삶을 잘 다져온 이가 뿜어내는 고유의 아우라가 있는 거죠. 그렇게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신만의 향기를 품는, 아름다운 중년의 딸을 보고 싶습니다.”
- 2020-05-18 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