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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 성곽을 거닐며
-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가 지정한 남한산성(사적 제57호)은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있다. 찾아가는 길은 서울, 성남, 하남, 광주로 넓게 퍼져 있다. 현재 위치에 따라 전철도 가능하고 승용차나 버스를 이용할 수도 있는 등 접근성이 아주 편리하다. 산세도 험하지 않아 남녀노소 많은 사람이 즐겨 찾는다. 남한산성은 한성백제의 온조가 처음 쌓았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고 통일신라 때 당의 침공에 대비해 쌓은 주장성이라고도 한다. 성다운 성은 이괄(李适)의 난을 겪은 뒤 인조 2년(1624)에 지금처럼 다시 고쳐 쌓았다. 인조는 총융사 이서(李曙)에게 산성의 축성을 명령했는데, 성의 규모는 전체 둘레가 11.76km(본성 9.05km, 외성 2.71km)다. 수많은 등산객이 남한산성을 오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경치에 취해 우리 민족의 수치인 병자호란을 잊을까 두렵다. 병자호란은 조정이 외교정책에 실패해 조선의 왕이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한 전쟁이다. 일국의 주권국가인 왕이 신하의 예를 보여주기 위해 곤룡포를 벗고 검은 호복을 입은 채 차가운 돌계단에서 무릎을 꿇었다. 우리는 삼전도의 수치를 잊으면 안 된다. 불과 3개월의 침략 기간이었지만 포악한 청나라 군대에 수많은 백성이 죽었다. 나는 김훈 작가의 소설 ‘남한산성’을 읽으며 한숨짓고 눈물을 흘렸다. 병자호란은 왜! 일어났으며 당시의 조정은 어떻게 대처했는지 남한산성을 오르는 수많은 등산객은 곱씹어봐야 한다. 광해군은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양다리 외교정책으로 평화를 누렸으나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조정세력은 명나라와만 친하게 지내 후금의 불만을 초래했다. 첫 번째 전란인 정묘호란은 인조 5년(1627년)에 있었다. 군사력이 약한 조선은 후금을 형으로 모신다는 선에서 화해를 했다. 그 후 세력이 더 강해진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이라고 고치고 명나라를 공격하기 전에 후방을 튼튼히 하기 위해 조선을 속국으로 삼는 군신관계를 요구했다. 조정에서는 죽으면 죽었지 청의 속국은 될 수는 없다며 거절했다. 결국 인조 14년(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인조는 강화도로 들어가 청군과 싸워보려 했지만 섬으로 가는 길목을 청군이 먼저 점령해버려 인조 일행은 하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장기전을 계획하려 했다. 하지만 청나라 군대 10만여 명이 쳐들어와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산성 안의 조선 군대는 1만3000명이었고, 식량은 절약해도 50일 정도 버틸 양에 불과했다. 말 먹이가 부족해 초가지붕의 짚까지 걷어내야 했고 추위에 군사들의 발은 동상으로 부어올랐다. 부녀자는 겁탈을 당했고 수많은 백성이 청나라 군사에게 목숨을 빼앗겼다. 굶어죽는 백성 또한 부지기수였다. 장기전은 명분이지 애당초 불가능했다. 이때 목숨을 내놓고 여러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청과 협상을 해서 나라와 백성을 살려야 한다고 인조를 설득한 주화파 최명길이 있었다. 전쟁이 더 길어지면 더 많은 피해가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인조는 국왕이라는 명분보다는 백성을 살리기 위해 항복이라는 수모를 받아들여야 했다. 마침내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서문을 나와 삼전도까지 산길을 걸어내려 갔다. 그리고 추위에 떨면서 청 황제를 기다렸다. 울고 있는 신하들을 차마 보지 못해 외면하면서 늦게 도착한 청 황제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두 손을 땅에 대고 이마가 닿도록 절을 하는 3배 9고두례(三拜九敲頭禮, 한 번 절할 때마다 머리를 땅바닥에 세 번 부딪치는 행위를 세 번 반복하는 방식)를 행하면서 인조의 이마는 피멍이 들었다고 역사는 기술한다.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의 4대 수치를 꼽으라면, 첫 번째가 임금이 무릎을 꿇고 항복한 병자호란의 삼전도 수치이고, 두 번째가 왕이 백성을 버려두고 도망을 간 임진왜란, 세 번째는 조정의 무능으로 나라를 송두리째 일본에 넘긴 한일합방, 네 번째는 동족끼리의 전쟁인 6.25전쟁을 든다. 모두가 백성의 잘못이 아니라 위정자들의 무능에서 파생된 비극이다. 힘이 없으면 외교력이라도 있어야 한다. 실리 없는 명분 싸움으로 허송세월할 때 죽어나가는 것은 백성뿐이다. KBS 방송국에서 추석 특집으로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라는 방송을 했다. 나훈아는 어려울 때 나라를 구한 사람들은 위정자들이 아니고 평범한 보통의 국민이라 했다. 이 말은 많은 사람의 공감을 불러왔다. 역사는 돌고 돈다. 과거를 거울삼아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남한산성을 오르며 위정자들이 심기일전해서 밖으로는 외세에 굴복하지 않을 힘을 기르고 안으로는 국민들이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하길 염원한다.
- 2020-10-05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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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막의 개장국이 화려한 육개장으로…
-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육개장은 ‘오래된’ 전통음식일까? 전통음식이지만 ‘오래된’ 음식은 아니다. 육개장의 역사는 불과 100년 남짓이다. 늘려 잡아도 200년이 되지 않는다. “육개장은 대구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이 다수설이다. 그럴까? 부분적으로는 맞다. “육개장을 외부 공간에서 팔기 시작한 것은, 대구의 식당 혹은 시장통이었다”는 표현이 맞다. 이미 민간에 널리 퍼진 음식이었다. 그 음식이 대구의 시장통 등지에서 처음으로 상업화됐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육개장은 ‘우육(牛肉, 쇠고기)+개장국[狗醬羹, 구장갱, 개고깃국]’이다. ‘우육개장국’이 육개장이 된 것이다. 원래 된장 등을 푼 물에 개고기를 넣고 국을 끓였다. ‘구장갱’ 혹은 ‘구장’, ‘개장’, ‘개장국’이라 불렸다. 그러다 개고기 대신 쇠고기를 넣고 마치 개장국처럼 끓였다. 그래서 육개장이라는 게 다수설이다. 개장국 대용품이다. 이 음식이 대구의 시장통으로 나온 것이 바로 지금의 육개장이다. 역사는 100년 남짓 왜 대구일까? 교통 요지였기 때문이다. 일제는 효율적인 한반도 약탈을 위해 경부철도를 건설했다. 만주의 물자를 한반도를 세로로 질러 부산항에 운반해 배로 일본으로 보냈다. 군산, 목포, 여수, 부산이 모두 만주 혹은 한반도의 목재, 쌀, 밀 등을 일본으로 보내기 위해 세운 항구들이다. 대구는 경부철도의 주요 거점 도시다. 철도와 더불어 도시가 커지면서 시장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시장 상인들과 손님들을 위한 식사 공간이 필요해졌다. 식당이나 허름한 천막 아래서 옹기종기 모여 국밥 한 그릇씩을 먹었다. 조선시대에는 역원(驛院) 제도와 주막(酒幕)이 있었다. 역원은 초기부터 있었던 공식 숙박 시설이다. 사용자는 공무원들이다. 조선시대에는 역원 제도를 통해 공무원의 이동을 도왔다. 주막은 사설 기관이다. ‘막(幕)’은 집이 아니다. 주막의 시작은 정식 건물이 아니다. 비바람을 가리려고 천막을 쳤다. 임시, 가설 시설이다. 이곳에서 목을 축일 만큼만 술을 팔았다. 사설, 불법 시설물이다. 조선시대 후기, 숙종시대를 거치며 이들 주막이 슬슬 공식화(?)된다. 공무원들은 공식적이고 합법적인 역원을 이용한다. 민간 여행자들은 이용할 공간이 없다. 결국, 주막이다. 주막은 조선시대 후기 ‘탈법적’인 공간으로 변한다. 합법도 아니고 불법도 아니다. ‘눈감아주는’ 정도의 공간이 확대된다. 역원과 주막에서 개장국을 내놓았다. 유교는, 사람이 여섯 가지 가축을 먹도록 허용했다. 소, 말, 돼지, 개, 양, 닭이다. 소는 금육(禁肉)이다. 농사의 도구라 식육을 엄하게 금했다. 살아 있는 말의 가격은 도축한 말고기 값보다 비쌌다. 말을 도축할 일은 없었다. 교통, 통신의 수단이지 고기로 먹을 일이 아니다. 양은 한반도에서 잘 자라지 않는다. 돼지도 마찬가지. 한반도의 춥고 건조한 기후는, 습하고 따뜻한 기후를 좋아하는 돼지와 맞지 않는다. 돼지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인간과 ‘먹이’를 두고 다툰다. 사람이 먹는 걸 먹는다. 사람이 먹을 것도 귀했던 시절이다. 돼지 키우기는 쉽지 않았다. 개, 닭이 만만했다. 닭은 개체가 적다. 여러 사람이 몰려드는 역원, 주막에서 닭은 어울리지 않는다. 결국, 개다. 개고기, 개장국은 보양식이 아니라 늘 먹는 상식(常食)이었다. 육개장의 전신 개장국 조선시대 후기. 역원과 주막에서 널리 사용했던 개고기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다. 중국 청나라 때문이다. 청나라는 개고기 식용을 피했다.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개의 지위(?) 때문이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수렵, 기마민족이다. 개는 사냥의 동반자이자 목숨을 지켜주는 동료다. 농경민족의 개와는 지위가 다르다. 인간은 동반자, 동료를 먹지 않는다. 유목, 기마민족의 청나라가 개고기 식용을 피한 이유다. 또 다른 이유는 청나라를 세운 태조와 개의 인연 때문이다. 청나라(후금)를 세운 이는 누르하치(Nurh achi, 努爾哈赤, 1559~1626)다. 개가 누르하치의 생명을 두 번이나 구해줬다고 전해진다. 청나라의 통치자는 만주족이다. 이들이 개를 먹지 않자 피지배자인 중국 한족들도 따른다. 중국인들이 개고기를 피한 이유다.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 ~1637)을 겪으며 조선은 견디지 못할 치욕과 약탈을 당한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명나라를 그리워하고 ‘오랑캐 청나라’를 증오, 멸시했다. 시간이 흘렀다. 강희제, 건륭제, 옹정제 등 명군들은 청나라를 세계 최강의 나라로 바꿨다. 서양 문물들이 급격히 중국으로 몰려들었다. 청나라의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 된다. 사절단으로 중국에 간 조선 사신단은 발전한 중국과 서양의 문물을 중국, 북경에서 본다. 북학파도 생긴다. 명나라에 대한 막연한 호감, 모화사상(慕華思想)이 엷어지고 청나라에 대한 호기심, 흠모가 생긴다. ‘문명 개화된 중국, 청나라’는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개고기를 먹는 것은 야만의 짓이라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개고기를 피하는 이들까지 생겨났다. 이유원(1814~1888)은 조선시대 말기의 문신이다. 고종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임하필기(林下筆記)’를 남겼다. 그가 듣고, 보고, 기록한 내용은 19세기 후반, 고급 관리의 시각으로 본 조선시대 후기의 사회상이다. ‘임하필기’에 조선시대 후기, 개고기 식용에 대한 재미있는 내용이 실려 있다. “연경(북경) 사람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을뿐더러 개가 죽으면 땅에 묻어준다. 심상규가 북경에 갔을 때 경일(庚日, 복날)을 맞아 개고기를 삶아 올리도록 하였다. 북경 사람들이 크게 놀라면서 이상히 여기고 팔지 않았다. 심상규가 그릇을 빌려 삶았는데 그 그릇을 모조리 내다 버렸다. (황해도) 장단의 이종성은 잔치에 갔다가 개장국을 보고 먹지 않고 돌아와 말하기를, ‘손님을 접대하는 음식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달랐다.” 두 사람이 등장한다. 심상규와 이종성이다. 심상규는 개고기 식용론자이고, 이종성은 식용 반대론자다. 두 사람 모두 이유원보다는 앞선 시대의 사람이다. 이종성은 심상규보다 더 앞선 시대 사람이다. 그는 개고기가 먹을 음식이 아니라 하고 심상규는 복날에 삶아 올리라 했다. 영조, 정조시대를 지나며 조선시대의 사회는 개고기 식용과 반대가 뒤섞여 있었다. 민간도 마찬가지. 문제는 봉제사(奉祭祀) 접빈객의 음식이다. 제사를 모시거나 손님맞이에 음식은 필수다. 혼례와 제사에도 국수가 필수적이다. 국수는 귀한 음식이었다. “언제 결혼하느냐?” 대신 “언제 국수 먹여주느냐?”라고 묻는 이유다. 일반 인들은 결혼식에나 국수를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상(喪)’을 당했을 때는 음식을 미리 준비할 수 없다. 급작스럽게 닥치지만, 손님맞이 음식은 필요하다. 지금도 상가에서 늘 육개장을 만날 수 있는 이유다. 시작은 개장국인데 피하는 이들이 늘어나 어느 날부터인가 육개장으로 바뀐 것이다. 대구 시장통에 등장한 ‘육개장’ ‘대구가 육개장의 시작’은 아니다. 조선시대 후기, 민간에서 꾸준히 육개장을 먹었다. 이 음식이 처음 식당에 등장한 것이 ‘대구 육개장’이다. 사족 하나. “왜 육개장은 매운 고춧가루를 많이 쓰고 붉을까?”에 대한 엉터리 대답 둘. 귀신을 쫓기 위해 붉은색 음식을 만들었다! 엉터리다. 상가는 돌아가신 조상을 모셔서 먼 길 떠나기 전에 대접하는 자리다. 붉은색으로 귀신을 쫓는다? ‘벽사(辟邪)’의 붉은색이다? 도대체 상가에서 혼령을 모시자는 건가, 아니면 혼령을 쫓자는 건가? 또 하나 엉터리. “대구는 분지라서 춥다. 그래서 매운 고춧가루를 많이 쓴다?” 틀린 말이다. 대구보다 추운 지방은 훨씬 많다. 남쪽치고는 추운 편이지만 서울 이북보다는 춥지 않다. 분지? 대구만 분지도 아니다. 다른 지역에도 추운 분지 많다. 육개장의 붉은 고춧가루는 개장국의 영향이다. 개장국은 누린내가 심해 매운맛으로 감춘다. 향신료 사용량도 많다. 개장국이 육개장으로 발전하면서 고춧가루, 붉은색을 본뜬 것이다. 황광해 맛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년간의 기자생활 동안 회삿돈으로 ‘공밥’을 엄청 많이 먹었다. 한때는 매년 전국을 한 바퀴씩 돌았고 2008년부터 음식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KBS2 ‘생생정보통’, MBC ‘찾아라! 맛있는 TV’, 채널A ‘먹거리 X파일’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한국 맛집 579’, ‘줄서는 맛집’, ‘오래된 맛집’ 등이 있다.
- 2019-12-09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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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덕이 밭’
- 봄의 문턱이다. 머지않아 새싹이 돋을 게다. 이즈음이면 시니어가 많은 관심을 갖는 게 텃밭이다. 인간은 죽으면 누구나 한줌 흙으로 돌아간다. 흙과 가까이하고 싶은 마음은 일종의 귀소본능이다. 더구나 햇볕을 쬐며 안전한 먹거리를 직접 가꾸며 소일할 수 있으니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삭막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더 그러한 꿈을 꾸기 마련이다. 미래에셋은퇴연구소가 빅데이터를 이용해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를 살펴보니 일, 여행, 친구, 홀로, 텃밭이었다. 내게 사진을 배우는 시니어와 함께 서울시 종로구 동숭동 대학로를 거쳐 낙산공원을 찾았다. 이곳에서 역사 속의 텃밭, ‘홍덕이 밭’을 보았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삼전동에서 항복하면서 봉림대군이 청나라 볼모로 잡혀갔을 때 봉림대군 시중을 들기 위해 궁인 홍덕이라는 여인이 따라갔다. 그녀는 청나라 심양에서 직접 가꾼 채소로 담근 김치를 밥상에 올렸다. 볼모에서 풀려 본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봉림대군(효종)은 홍덕이의 김치 맛을 잊을 수가 없었다. 낙산 중턱의 밭을 그녀에게 주어 채소를 가꾸게 했다. 임금의 안전한 먹거리를 제공하는 텃밭이 된 셈이다. 서울시는 낙산에 ‘홍덕이 밭’이라는 지명이 전해지고 있는 데 착안해 낙산 공원 중턱에 ‘홍덕이 밭’을 만들어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홍덕이의 텃밭이 있었던 낙산은 숲이 우거지고 깨끗한 약수터가 있는 산책로다. 기이한 암석, 울창한 수림, 맑은 물이 있는 절경이다. 이런 곳에 마련된 '홍덕이 밭'은 청정 지역이라서 안전한 먹거리 생산이라는 텃밭의 조건을 충족한다. 예나 지금이나 텃밭은 우리의 건강한 일상을 책임져주고 있다.
- 2019-03-05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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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 라이프] 2017년 정유년 대중문화 트렌드와 스러진 별들
- 2017년 정유년의 한 해도 저물고 있다. 올해는 국정농단으로 헌정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에 의해 파면되는 초유의 일이 벌어져 5월 9일 조기 대선을 통해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19대 대통령에 당선돼 취임하는 등 격변의 한 해였다. 대중문화계 역시 세월호 특별법 서명, 야당 후보 지지 등의 이유로 송강호, 정우성, 김혜수 등 수많은 연예인을 포함한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와 김여진, 문성근, 김미화, 김제동, 김규리 등 82명의 연예인을 좌파 연예인으로 규정해 여론 조작, 방송계 퇴출 등을 시도한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 보고서가 공개돼 큰 파문이 일었다. 또한 사드로 촉발된 중국 당국의 한한령(限韓令·한류금지령)으로 대중문화 산업계가 직격탄을 맞는 등 크고 작은 일이 많았다. 2017년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고 유행을 선도한 대중문화 트렌드와 키워드는 무엇일까. 우선 영화계에선 역사적 사건과 인물 등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쏟아져 흥행에 성공한 것이 가장 눈에 띄는 트렌드다. 한국 민주화에 큰 역할을 한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 병자호란 당시 고립무원의 남한산성을 소재로 한 김훈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영상화한 , 2007년 미 의회 공개 청문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사죄결의안 통과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이용수 할머니의 가슴 아픈 실화를 모티브로 한 , 일제 강점기 일본 하시마 섬에 강제 동원된 800여 명의 조선인 참상을 다룬 , 3·1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본으로 가 항일운동에 매진했던 독립운동가 박열을 전면에 내세운 , 1986년 명성황후 시해범을 죽이고 사형선고를 받는 등 청년기의 김구 선생을 다룬 등 많은 영화가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다뤄 눈길을 끌었다. 가 121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 한국 영화로는 15번째 1000만 영화로 등극하는 등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다룬 실화 영화들이 흥행도 호조를 보였다. 올해 방송 드라마의 가장 큰 특징은 ·· 등 검사나 변호사, 재벌 등 권력과 자본의 탐욕과 비리를 다루거나 · 등 언론계를 조명한 작품들과 을 비롯한 갑질을 소재로 한 드라마들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거나 화제가 됐다는 점이다. 이들 드라마는 지도층의 부패가 심각하고 갑질이 심화하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줬다. 대중문화계의 큰손으로 등장한 20~40대 여성들의 절대적 지지로 영화와 드라마에서 남자 스타들이 압도적 흥행 성적을 거둔 것도 2017년 대중문화계를 지배한 트렌드 중 하나다. 121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송강호 주연의 , 718만 명이 본 현빈, 유해진 주연의 를 비롯해 ··· 등 올해 들어 흥행 상위를 차지하는 영화들이 한결같이 남자 주연 영화였다. 드라마 역시 마찬가지다. 케이블 TV 드라마 사상 최초로 20%대를 돌파한 공유 주연의 (tvN), 28% 시청률을 기록한 지성 주연의 (SBS), 20%대를 유지한 남궁민 주연의 (KBS2) 등 성공한 드라마 모두 남자 주연 작품이다. 대중의 관심이 높은 예능 프로그램은 (SBS), (MBC에브리원), (JTBC), (JTBC2), (JTBC), (OLIVE), (KBS1), (TV조선) 등 외국인 출연 예능과 (채널A), ·(tvN), ·(TV조선), ·(E채널), ···(SBS), (KBS2), (KBS드라마), (MBN) 등 연예인의 남편, 아내, 자녀, 부모 등이 출연한 연예인 가족 예능이 대세를 이뤘다. 또한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지 말고 지금의 삶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자는 ‘욜로(YOLO)’와 혼술·혼밥 등 급증하고 있는 ‘1인 가구’의 문화가 예능 키워드로 등장해 (SBS)에서부터 (MBN)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능 프로그램의 소재로 활용됐다. 2017년 대중음악계는 신세대 가수와 아이돌 그룹의 1970~1990년대 히트곡 리메이크 열풍이 강타했다. 양희은이 1991년에 불러 인기를 얻은 ‘가을 아침’과 1970년대 정미조가 불러 히트한 ‘개여울’이 올해 아이유의 노래로 재탄생해 음원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큰 인기를 얻었다. 아이유는 9월 발표한 리메이크 앨범 ‘꽃갈피 2’에서 정미조의 ‘개여울’, 소방차의 ‘어젯밤 이야기’, 김건모의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등 1970~1990년대 히트곡을 완성도 높게 리메이크해 큰 관심을 모았다. 걸 그룹 마마무의 솔라도 김도향의 ‘바보처럼 살았군요’, 여진의 ‘그리움만 쌓이네’, 해바라기의 ‘행복을 주는 사람’ 등을 리메이크한 앨범을 발표해 젊은층뿐만 아니라 50~60대 중장년층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올해 대중음악계를 관통한 리메이크 트렌드는 젊은 세대에게 과거의 명곡들을 소개하는 동시에 중장년층에게는 추억을 선물하는 효과가 높아 대중음악의 수용층을 확장하는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세대 간 이해의 접점을 확대했다. 1996년 H.O.T. 데뷔를 시작으로 젝스키스, S.E.S., 핑클 등 1990년대 중·후반 본격화한 아이돌 그룹 시대는 2000년대 들어 2PM, 슈퍼주니어, 원더걸스, 소녀시대 등 2세대 아이돌 그룹 중심으로 세대 교체가 됐다. 올해 들어 원더걸스, 씨스타 등 많은 아이돌 그룹이 해체되고 소녀시대의 멤버 서현이 탈퇴하는 등 2세대 아이돌 그룹들이 본격적으로 퇴장했다. 올해는 방탄소년단, 트와이스, 여자친구, 블랙핑크 등 2015년 전후로 데뷔한 3세대 아이돌 그룹이 국내 음악계를 평정하고 K팝 한류를 이끄는 주체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연예계에 안타까운 일도 많았다. 큰 사랑을 받던 스타들이 숨져 대중의 곁을 영원히 떠났다. KBS2 주말극 촬영을 끝낸 지 얼마 안 된 4월 9일 중견 스타 김영애가 췌장암으로 66년간의 삶을 마무리했다. 46년간 연기자 생활도 끝나는 순간이었다. “연기는 내게 산소이자 숨구멍 같은 의미예요. 배우가 아닌 나를 생각할 수가 없어요. 다음 생에 태어난다면 다시 배우를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천생 배우였던 김영애는 20세에 연기를 시작해 , , , , , , , 까지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정교한 연기력과 빼어난 캐릭터 창출력으로 시청자와 관객에게 감동을 줬다. 와 사극 등에서 보인 강렬한 카리스마 연기에서 영화 의 일상적 연기까지 스펙트럼 넓은 연기로 관객과 시청자에게 기쁨을 준 중견 배우 윤소정은 패혈증으로 6월 16일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73년의 삶 중 연기자로 살아온 세월이 55년에 이를 정도로 윤소정에게 있어 배우라는 직업은 삶의 전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57년 동안 연극무대에서, 스크린에서 그리고 TV 화면에서 빛나는 조연 연기와 사투리 연기로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던 중견 배우 김지영도 폐암으로 2월 19일 79년간의 삶을 마감했다. 2017년 10월 30일에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빼어난 연기를 선보이며 왕성한 활동을 펼친 김주혁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김주혁은 선 굵은 연기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김무생의 아들로 1998년 SBS 탤런트로 연예계에 데뷔한 뒤 드라마 , , , , 영화 , , 등 수많은 작품에 주연으로 나서 아버지를 능가하는 인기를 얻었다. 20년간의 배우생활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난 김주혁의 나이는 45세였다.
- 2017-12-11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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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은 안 된다
- 1636년 인조 14년 청의 수십만 병사가 조선으로 쳐들어왔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고 했지만 정세가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자 세자만 보내고 남한산성으로 길을 바꿔 청군에 포위당한 채 47일간을 버텨야했다. 사가들은 이를 병자호란이라 불렀다. 김훈 원작, 황동혁 감독의 영화 남한산성은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김상헌(김윤식 분)은 홀로 남한산성으로 가기위해 안내를 받아 얼어붙은 강을 건넌 후 안내를 한 뱃사공을 단칼에 베어버린다. 영화에서 척화파를 대변하는 그를 넌지시 악으로 암시하는 장면이다. 그렇다면 선은 누구일까. 김상헌의 대척점에서 외롭게 주화파를 자처하고 있는 최명길(이병헌 분)이다. 최명길은 “누구를 위한 대의와 명분이냐”고 물으며 “청과 화친하여 전쟁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화는 이분법적 사고로 선과 악을 구분하는 듯하다. 그러나 역사를 선과 악으로 나누기는 어렵다. 과거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도와 일본을 몰아낸 경험이 있는 신하로서는 명을 위한 의리 즉 대의명분을 중요시 여기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민중의 어려움이다. 죽어도 명분을 지켜야 한다는 척화파의 주장보다 당장은 자존심 상하지만 살아서 백성을 보듬고 죽는 것이 임금인 위정자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청은 여진족의 후손이다. 여진은 사실 고구려와 발해의 후손들과 구분하기 쉽지 않다. 청은 같은 여진족이라고 생각했다. 조선에 대해 커다란 적대감도 없었다. 다만 명과의 전쟁 중 후방의 조선 때문에 혼란이 야기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일 인조가 광해군처럼 중립적 외교정책을 썼더라면 병자호란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는 심상치 않았다. 중원의 명나라 동북부, 옛 발해의 진원지에 청이 들어서 중원을 위협했다. 청을 세운 누르하치는 명을 증오했다. 여진족인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같은 여진족을 정벌하는 전쟁에 참여했다가 명의 군사에게 피살당했기 때문이다. 누르하치는 명에 대한 복수의 칼을 숨기지 않았다. 마침내 옛 발해지역을 대부분 통일하여 칸의 지위에 오른 누르하치는 후금을 칭하며 호시탐탐 명을 위협했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명과의 전쟁 중 사망한다. 이후 누르하치의 8남인 청태종 홍타이지가 황제로 등극했으나 여전히 후금은 중원의 위협이었다. 광해군 재위 때 명으로부터 군사를 보내라는 요청이 왔었지만 절묘한 중거리 외교로 당시 후금으로부터 적대시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인조반정 후 명과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대의명분 때문에 조선은 2대 황제 홍타이지의 눈 밖에 났다. 홍타이지는 먼저 조선을 정벌하여 배후의 위험을 제거하고자 했다. 홍타이지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남한산성까지 왔다. 결국 인조는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갖춰야 했다. 오랑캐라 부르며 그토록 멸시했던 여진족의 수장에게 말이 예이지 이마에 피가 날 만큼 아홉 번이나 땅에 머리를 박았다고 하니 그 참혹함이야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그뿐이 아니었다. 봉림대군과 소현세자를 비롯해 50만여명이 인질로 잡혀갔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500여 만이었으니 인구의 10%를 끌고 간 셈이다. 어떻게 더 참혹한 전쟁이 있겠는가. 당연히 김상헌을 악으로 묘사할 수밖에 없을 터다. 영화는 소설처럼 차분히 사실의 묘사에 치중했다. 얼어붙은 한강을 비롯해 배경은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 대비되는 청군과 조선 병사의 생활상은 더 한층 대비되었다. 청군도 조선 병사도 조선의 음식을 먹었다. 점령군인 청군은 조선인이 키운 소와 돼지를 잡아먹었고, 조선병사는 줄어드는 주먹밥으로 허기를 채우며 먹일 사료가 없어 죽은 말고기를 기다려야 했다. 옷이 없어 가마니를 뒤짚어 쓰고 추위를 이겨야 했고 동상 걸린 손가락 발가락에는 돼지기름을 바르며 견뎌야 했다. 총포는 쏘아도 명중이 되지 않았고 급기야 대장장이 서날쇠의 도움으로 총신을 펼쳐야 했다. 설날 아침. 조선의 왕은 오랑캐에게 술과 함께 고기와 떡을 하사했다. 명절이면 이웃과 음식을 나누어 먹는 아름다운 풍습을 오랑캐에게 보여주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먹을 음식이 많으니 가지고 가 너희 왕에게나 주라는 말에 분노보다는 차라리 슬픔이 앞선다. 풀 수 없는 문제를 마주했을 때의 느낌이다. 척화를 주장한 김상헌에게 다시 분노의 화살이 돌아가는 이유이다. 왜 실리를 챙기지 못하는 것일까. 왜 관리들은 자기들의 이익에 눈이 멀어 선과 정의를 배척하는가. 부패한 관료상은 서날쇠가 임금의 칙서를 가지고 도원수를 찾아갔을 때 극에 달했다. 죽을 고생을 하고 찾아간 서날쇠가 관리가 아닌 천민이라는 소리에 도원수는 오히려 그를 죽이고자 했다. 사실인지는 모르나 그로 인해 도원수의 군은 청군에게 섬멸 당하고 만다. 악의 척결로 후련해야 했지만 이 또한 풀지 못할 문제를 만났을 때만큼 착잡하기만 했다. 오늘 날 한반도의 운명은 당시만큼 복잡하고 위중하다. 만일 전쟁이 일어난다면 남과 북이 모조리 쑥대밭이 될 것은 명약관화하다. 어찌 전쟁을 입에 담을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해서든 평화로운 방법으로 북핵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북한의 핵개발도, 한미동맹도 중요한 사실이고 팩트지만 그 어떤 대의나 명분도 우리 민족의 생존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 남한산성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안 된다는 교훈을 뼈아프게 전해 주었다.
- 2017-10-16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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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 그래도 백성이 있었다
-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는 동ㆍ서ㆍ남ㆍ북 4곳의 성문이 있었는데, 동문은 좌익문, 북문은 전승문, 서문은 우익문, 남문은 지화문이라고 불렸다. 등산객들은 보통 마천역에서 서문으로 들어가거나 산성역에서 남문을 거쳤다. 어느 문으로 들어갈지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산행은 달랐다. 남쪽 지화문을 이용하였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죄인 조선왕은 남문으로 나올 수 없다. 서문으로 나와서 항복하라.’는 청태종의 항복조건을 보고나서다. 남한산성은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산성이다. 조선시대 인조 2년에 지금처럼 다시 고쳐 쌓았다. 그 뒤 순조 때까지 여러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가장 시설이 잘 완비된 산성으로 손꼽힌다.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게 인정되어 2014년 6월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신규 등재되었다. 영화 '남한산성'은 조선 인조 14년인 1636년에 청나라가 침입한 '병자호란'을 다뤘다. 당시 청나라에서 군신관계를 요구한 것을 조선이 거부하자, 청태종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다. 이에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했던 인조는 결국 45일 만에 항복하고 청나라에 대해 신하의 예를 행하기로 한 굴욕적인 화약을 맺었다. 50만 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노비로 전락했다. 병자호란은 임진왜란과 함께, 외세에 의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적을 몰아냈던 임진왜란과 달리, 병자호란은 가장 처절하고 치욕적인 패배였다. 영화 '남한산성'이 척화파 김상헌과 주화파 최명길의 논쟁을 크게 다루고 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자기의 주장을 폈다. 최명길은 단순히 주화론자만이 아니었다. 그는 강화도 가는 길이 막혀 할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인조 일행이 피신할 때, 홀로 청군의 지휘관 마부대 진영을 찾아가 항의담판을 함으로서 피신할 시간을 벌어준 사람이었다. 최명길은 난세에 항상 현실을 직시하고 균형 있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의 목표는 현실적으로 약소국인 조선의 생존을 찾는 것이었다. 척화ㆍ주화 방법은 달랐지만 그들의 머릿속에는 항상 백성이 있었다. 얼어 죽는 백성을 살리려고 가마니를 모으고 굶주린 말을 위하여 초가지붕을 걷어냈다. 어떻게 보면 아무 준비 없는 허망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가정이지만 45일 만에 항복하건 결사항전하건 결과는 별 차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들은 백성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헌데 오늘의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진흙탕 싸움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다. 국민은 안중에 없다. ‘나 살고 너 죽자’식이다. 아니다. 국민커녕 자기 한 몸 사는 방법도 모른다. 불속으로 뛰어드는 부나비 같다. 자기 생각 하나 말 못하고 눈치를 보고 줄을 섰다. 감옥 가기 싫어서인지 모르쇠를 자랑한다. 자기 자신은 허깨비였다고 실토하는 추태도 부린다. 나중에 국가를 경영할 수 있겠는가 회사를 운영할 수 있겠는가. 남한산성, 백성을 생각하였던 선각자를 다시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다.
- 2017-10-13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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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의 추천 전시, 도서, 영화, 공연
- ◇exhibition 덕수궁 야외프로젝트: 빛·소리·풍경 일정 11월 26일까지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올해로 120주년이 되는 대한제국 선포(1897년)를 기념하며 대한제국 시기를 모티브로 덕수궁이라는 역사적 공간에 조형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강애란, 권민호, 김진희, 양방언, 오재우, 이진준, 임수식, 장민승, 정연두 등 한국 작가 9명의 작품 9점이 덕수궁 내에 전시된다. 덕수궁 대한문부터 그동안 일반인에게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던 함녕전 앞 행각까지 전시는 관람객들의 입장 동선에 따라 이어진다. 특히 함녕전 앞 행각에서는 오재우의 VR 작품 을 행각 내부에서 누워 체험할 수 있다. 9월부터 11월 사이에는 참여작가를 초청해 일대일 토크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이뿐만 아니라 전시와 연계해 특별강연과 영상 상영, 공연 등이 개최된다. 영국 국립미술관 테이트 명작전:NUDE 일정 12월 25일까지 장소 소마미술관 영국 국립미술관 테이트는 테이트 모던, 테이트 브리튼, 테이트 리버풀, 테이트 세인트 아이브스 등 4개의 미술관을 운영하며 영국 미술을 포함한 세계 최고 수준의 근현대 미술 컬렉션으로 유명하다. 소마미술관은 ‘누드’를 주제로 테이트의 작품을 엄선해 18세기 후반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약 200년 동안의 누드 변천사를 살핀다. 윌리엄 터너, 헨리 무어 등 영국을 대표하는 30여 명의 작가를 포함해 세계적 거장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오귀스트 로댕, 루이즈 부르주아 등 총 66명의 작품 122점을 선보인다. 전시는 ‘역사적 누드’, ‘개인 누드’, ‘사실주의와 초현실주의 누드’, ‘에로틱 누드’ 등 누드를 시대별·경향별로 구분한 총 8개의 섹션으로 구성된다. ◇book 유토피아(미나토 가나에 저·영상출판미디어(주)) 같은 마을에 살면서 소속된 커뮤니티도, 가치관도 다른 여성들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가는 모습을 그려냈다. 등장인물은 표면적으로는 선의를 가지고 행동한다. 하지만 그 선의는 선의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어긋난 배려, 쌓이기만 하는 분노, 반전하는 선의 등 인간의 어두운 심리를 묘사했다. 감정이라는 무기(수전 데이비드 저·북하우스) 감정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 수전 데이비드가 보다 단순한 삶에 대해 말한다. 아울러 감정 활용법을 제시하며 우리 사회가 감정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를 요구한다. 감정의 핵심 가치를 약화시키는 부정적 요소를 잠재우면서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법을 사례와 이론을 근거로 다양하게 서술하고 있다. ◇movie 남한산성 이병헌, 김윤석, 박해일 등 연기라면 이미 증명된 영화계의 흥행 보증 수표들이 대거 출연한다. 이들은 1636년 인조 14년 병자호란, 고립무원의 남한산성 속 조선의 운명이 걸린 가장 치열했던 47일간의 이야기를 다룬다. 김훈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은 신념이 달랐던 두 신하를 중심으로 팽팽한 구도 속 영화적 상상력을 더한다. 같은 충심을 지녔음에도 다른 신념으로 팽팽히 맞서는 이조판서 최명길(이명길)과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의 팽팽한 대립이 긴장감을 선사한다. 5개월의 혹한을 견디며 1636년 병자호란을 재현한 은 생생한 볼거리를 선보인다. 개봉 10월 3일 장르 드라마 감독 황동혁 출연 이병헌, 김윤석, 박해일, 고수 등 어메이징 메리 수학 천재인 7세 ‘메리’를 두고 행복한 삶을 위해 수학자의 길을 반대하는 삼촌 ‘프랭크’와 세상을 바꿀 수학자가 되기를 희망하는 메리의 할머니 ‘에블린’ 사이의 갈등을 그렸다. 에서 세심한 연출력을 인정받은 마크 웹이 메가폰을 잡으며 다시 한 번 영화를 통해 감동을 선사한다. 한국에서는 의 슈퍼히어로 ‘캡틴 아메리카’로 잘 알려진 크리스 에반스가 조카 바보 삼촌으로 변신해 ‘프랭크’ 역을 맡은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 실제 천재 수학자들의 인터뷰와 자문을 통해 영화에 사실감을 더했다. 수학적 능력을 지닌 영재들을 스크린 밖에서 바라보는 관점이 흥미롭다. 개봉 10월 4일 장르 드라마 감독 마크 웹 출연 크리스 에반스, 맥케나 그레이스, 린제이 던칸 등 ◇stage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뜨겁게 사랑했던 시인 ‘백석’을 잊지 못해 평생 헤어지던 순간을 기억하며 사는 기생 ‘자야’의 사랑 이야기를 그렸다. 백석의 시와 사랑 이야기로 만들어진 창작 뮤지컬로 한 편의 시를 읽는 듯한 여운을 선사한다. 장소 대학로 유니플레스 일정 10월 19일~2018년 1월 28일 연출 오세혁 출연 강필석, 정인지등 엘리펀트 송 정신과 의사 로렌스 박사의 실종 사건을 둘러싸고 병원장 그린버그와 마지막 목격자인 환자 마이클, 그리고 그의 담당 수간호사 피터슨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강렬한 스토리, 팽팽한 긴장감으로 관객을 압도한다. 장소 수현재씨어터 일정 9월 6일~11월 26일 연출 김지호 출연 이석준, 고영빈, 고수희 등 M. Butterfly 국가 기밀 유출 혐의로 법정에 선 전(前) 프랑스 영사 버나드 브루시코의 실화를 모티브로 푸치니 오페라의 을 차용해 무대화한 작품이다. 남성과 여성, 서양과 동양 등의 주제를 기반으로 인간의 본질적인 심리와 욕망에 대해 그렸다. 장소 아트원씨어터 1관 일정 9월 9일~12월 3일 연출 김동연 출연 김주헌, 김도빈, 장율 등 사랑해요 당신 연기 배테랑 이순재, 장용, 정영숙, 오미연 배우의 리얼한 부부 연기를 무대 위에서 만난다. 아내와 자식에게 큰 애정을 가지고 있지만, 마음과 다르게 항상 퉁명스러운 남편이 아내가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변화하는 과정을 그린다. 장소 대학로 예그린씨어터 일정 9월 29일~10월 29일 연출 이재성 출연 이순재, 장용, 정영숙, 오미연 등
- 2017-10-12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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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꼽은 서울 최고의 벚꽃명소
- “현충원에 벚꽃 필 때가 됐을 텐데...” 올해도 어김없이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3년 전 현충원에 벚꽃 구경을 다녀온 후, 해마다 이맘 때가 되면 수양벚꽃 보러 가자고 엄마한테 전화가 온다. 처음 현충원에 꽃구경 가자고 했을 땐 묘지에 웬 꽃구경이냐고 손사래를 치더니 한번 와보곤 홀딱 빠지고 말았다. 전화기를 타고 오는 엄마의 목소리에도 봄바람이 불었다. 4월이 되자 여기저기서 봄꽃축제가 열리고 있다. 그 중 으뜸은 벚꽃이다. 여의도 윤중로나 남산길, 석촌호수 등 벚꽃 명소에는 벚꽃나무 아래서 꽃비를 맞으며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그 만큼 벚꽃이 만들어 내는 풍경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가 서울 최고의 벚꽃 명소로 꼽는 곳은 따로 있다. 바로 국립현충원이다. 우리나라 벚꽃은 대부분 왕벚꽃나무인데 비해 국립현충원의 벚꽃은 수양버들처럼 가지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수양벚꽃이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수모를 겪은 효종이 북벌 계획의 일환으로 활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하기 위해 수양벚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봄꽃을 즐기기에 국립현충원이 좋은 이유가 있다. 우선 현충원에 들어서면 묘역을 감싸고 있는 산 위에 형형색색의 꽃들에 눈호강이 시작된다. 벚나무 외에도 진달래, 개나리, 철쭉, 산수유, 목련 등 알록달록한 꽃들이 가득하다. 국립묘지이긴 하지만 43만 평이나 되는 넓은 곳이어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이 나온다. 20km 제한 속도를 지키면 승용차를 타고 현충원을 크게 한 바퀴 돌 수 있어 나이 드신 부모님도 만족해 하신다. 게다가 넓은 주차장이 곳곳에 있으니 벚꽃축제가 한창일 때도 주차 걱정이 전혀 없다.현충원을 한 바퀴 돈 후엔 수양벚꽃을 감상하기 위해 정문 근처 충무정을 찾아간다. 수양벚꽃이 무리지어 심어져 있는 데다 벚꽃의 가지가 땅에 닿을 정도로 늘어져 있어 숨막히게 아름답다. 산책을 나온 사람들은 카메라를 들고 아름다운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그래서 충무정 앞은 늘 붐빈다. 필자와 부모님도 이 곳에서 인증샷은 필수다. 널리 알려진 벚꽃 명소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인파에 휩쓸리느라 꽃구경을 제대로 하기 힘들다. 하지만 국립현충원은 대지가 워낙 넓으니 사람이 많아도 인파가 분산돼 호젓하게 꽃놀이를 즐길 수 있다. 또, 공원처럼 잘 꾸며져 있어 가족들과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산책하기 참 좋다. 이번 주말 쯤 벚꽃은 만개해 장관을 이룰 것이니 서둘러 나들이를 계획해야겠다.
- 2017-04-07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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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의 숨결 따라 ‘눈 쌓인 남한산성을 걸으며’
- 겨울의 한가운데서 추위가 연일 맹위를 떨치더니 밤새도록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어느 날, 눈 쌓인 남한산성을 등반을 하기로 했다. 송파에 살고 있는 필자에게 남한산성은 매우 근접해 있어 매일같이 조망할 수 있으니 마을 뒷산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늘 그곳을 조망하면서 건강을 위해서 최소한 매주 한번 정도는 등산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지만 실제로는 일 년에 두서너 번이 고작이다. 어제 저녁 내내 소복소복 눈이 오더니 아침에는 제법 많은 눈이 쌓였다. 시내는 눈이 내리면서 녹았지만 산에는 낮은 기온으로 인해 많은 눈이 쌓여있어 모처럼 설원을 구경하면서 역사의 숨결 따라 멋진 눈길산행을 해 볼 요량으로 지인들과 함께 산행 길에 나섰다. 지하철 5호선 마천역에서 내려 만남의 광장에서 합세한 일행은 성불사를 들머리로 산행을 시작하였다. 고즈넉한 사찰의 기와위에 소복하게 쌓인 눈이 눈부시도록 정겹다. 등산을 좋아 하는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본격적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하자 드디어 미끄러운 등산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뭇가지에 소복하게 걸터앉은 눈꽃이 바람이 불적마다 후드득 머리위로 떨어지고 까마귀 울음소리가 까악 까악 산중에 울려 퍼져 우리를 반겨주는 듯 했다. 터벅터벅 올라가는 산행 길에서 만났던 멋진 설경은 덤으로 주어진 귀한 선물이었다. 올라가면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오르락내리락 한 시간을 훌쩍 넘겨서 걷다보니 어느새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힐 무렵, 드디어 산성이 보이기 시작한다. 산성 기와에 소복하게 쌓인 눈은 한층 멋들어진 한 폭의 그림이었다. 산성 위에서 내려다 본 도시(都市)는 엄동설한(嚴冬雪寒)에 묻혀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풍경을 연출해 내고 있었다. 송파 쪽으로 바라보니 눈을 흠뻑 뒤집어쓴 도시 한가운데에 빌딩 하나가 우뚝 솟아 눈앞으로 다가온다. 124층짜리 잠실 제2롯데 빌딩이 그 웅장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빌딩이 이제는 완공단계에 접어들어 그 멋진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반대로 돌아 하남시 쪽을 내려다보니 전형적인 농촌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눈 속에 푹 파묻혀있는 그곳의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왠지 모를 평화로움이 마음 한 구석에서 샘솟듯 올라온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눈 속에 깊게 묻힌 산성은 고요와 함께 태고적 신비로운 모습을 고스란히 느낄 수가 있었다. 수많은 외침을 겪은 민족이지만 특히 병자호란 중에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던 인조임금이 결국은 오랑캐에게 항복을 하기 위해 어떤 심정으로 이 문을 나섰을까 감히 상상해 본다. 인조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47일간 항전을 하였다. 청나라의 12만 대군의 침략을 받은 인조가 서울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항전하다가 끝내 청나라에 굴복하여 송파 삼전도에 나와 청태종 홍타이지 앞에 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조아린 뒤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치욕적인 굴욕을 당해야 했는데 이를 삼전도의 굴욕이라 불렀다. 인조가 땅바닥에 연이어 머리를 짓치며 피를 흘릴 때에 이를 보던 백성들과 신하들은 얼마나 피눈물을 흘렸을 것인가? 예나 지금이나 힘이 없는 나라의 백성은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 한다는 역사의 교훈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이제라도 나라의 근간을 든든하게 하여 두 번 다시 이민족으로부터 핍박 받는 백성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작금의 정치상황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역사의 숨결이 어린 남한산성 위해서 심히 걱정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기우(杞憂)일까? 다시 신발을 졸라매고 하남시를 향해서 눈길을 헤쳐 나갔다. 남한산성과 하남 의 이성 산성으로 이어지는 위례둘레길을 걷기로 했다. 대체로 길이 평평하고 무난한 코스이긴 하지만 등산로에 많은 눈이 쌓여 있어 다리에 한층 힘이 들어갔다. 눈길을 걸은 지도 어느덧 서너 시간이 지나고 나니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팠다. 양지 바른 곳에서 잠시 배낭을 풀고 갈증이 나던 차에 시원한 막걸리 한 잔으로 목을 축이니 이보다 더 행복할 순 없었다. 멋진 설경속에서 따끈한 커피 한잔은 세상 그 어떤 커피보다 맛이 있었다. 다시 산행을 시작하여 이성 산성을 거쳐 덕풍골쪽으로 하산했다. 산행을 시작한지 거의 4시간 반이나 걸려서 끝난 산행에 비록 몸과 마음은 지치고 피로했지만 멋진 설경에 도취되었던 시간들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 것이다.
- 2017-03-02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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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낙의 그림 이야기]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모셰 다얀’을 만나다
- 검은 안대(眼帶)를 한 조선시대 인물 낙서 장만(洛西 張晩, 1566~1629)의 초상화(사진 1)를 보는 순간, 생생한 현대사의 한 장면이 영상처럼 겹쳐졌다. 바로 검은 안대를 한 이스라엘의 전쟁 영웅 모셰 다얀(Moshe Dayan, 1915~1981)의 이야기다. 조선시대 초상화 가운데 그림 속 인물이 실명(失明) 상태인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은 지금까지 네 점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눈가리개’인 안대를 한 초상화는 단 한 작품이다. 장만은 조선시대 선조(宣祖), 광해군(光海君), 인조(仁祖) 때 문신으로서보다는 무인으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그는 국토의 북녘 지역에서 나라를 지켰다. 특히 병자호란 때 북방 수비에 큰 공을 세웠다. 1624년(인조 2년)에는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해 공신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장만은 왼쪽 눈에 큰 부상을 입고 실명하고 말았다. 그 후 진무공신(振武功臣)으로 공신상(功臣像)이라는 초상화를 하사받게 되었는데, 바로 이 공신상에서 검은색 안대가 훈장처럼 크게 눈에 띈다. 1956년과 1964년 두 차례에 걸쳐 중동 지역에 전운(戰雲)이 휘몰아쳤다. 각각 수에즈 운하와 시나이 반도를 둘러싼 전쟁이었다. 1956년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 1918~1970) 대통령이 그동안 영국, 프랑스, 미국이 주도하던 수에즈 운하의 관리 경영권을 박탈해 국유화하자 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이스라엘 군대는 시나이 반도를 넘어 수에즈 운하의 서편 제방(Bank)까지 진격했고, 영국과 프랑스 또한 공군력을 앞세워 참전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967년 이번엔 아랍 연합과 이스라엘 간에 이른바 6일 전쟁이 발발했다. 이때 이스라엘은 이른바 ‘번개전쟁(Blitz Krieg)’이라는 작전으로 자국 국토보다 두 배나 넓은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와 요르단의 동예루살렘 시를 포함한 웨스트뱅크(West Bank) 지역 그리고 시리아의 골란 고원(Golan Heights)을 점령했다. 6박 7일간 그야말로 속전속결로 끝난 전쟁이었다(주: 훗날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에서 철수했다. 하지만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웨스트뱅크와 골란 고원은 지금까지도 이스라엘의 점령지로 남아 있다). 이 두 번의 전쟁에서 1956년에는 총사령관으로, 1967년에는 국방장관으로 이스라엘을 승리로 이끈 인물이 바로 모셰 다얀이다. 나중에 외무장관직(1977~1979)에 오르기도 한 그는 전쟁 영웅으로서 세계 정치·외교 무대에서 활약하며 한 시대를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그런데 모셰 다얀은 1941년, 그러니까 이스라엘 건국 초기에 이웃 아랍국들과 벌어진 크고 작은 무력 분쟁 때 왼쪽 눈에 부상을 입었다. 당시 그의 이름과 더불어 검은색 안대가 마치 ‘훈장’처럼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각인되었다(사진 2). 검은색 안대를 한 조선시대 인물의 초상화를 보며 현대사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던 모셰 다얀이라는 전쟁 영웅을 떠올린 것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검은색 안대 없는 모셰 다얀과 조선시대 초상화의 주인공인 낙서 장만을 생각하며 ‘아이콘’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 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
- 2017-02-20 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