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선이 서로 의지하며 맞닿은 형태의 사람 인(人)은 책과 또 다른 책을 잇는 징검다리 같은 모양새다. 김태경 임상수사심리학자는 범죄 피해자들이 후유증을 극복하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돕는다. 이번 북人북에서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조심스레 사람들의 흔을 어루만지는, 그만의 미지근한 응원을 담았다.
“안녕하세요, 오시는 길은 불편하지 않으셨는지요. 물 한잔 드릴까요?”
담백한 인사와 함께 컵에 물을 가득 따라 건넨 뒤 ‘꼴깍꼴깍’ 소리가 멈출 때까지 침묵을 지킨다. 잠시 말을 고를 여유를 확보해주는 듯 유난스럽지 않은 고요함이 지나고, 차분히 명함을 건넨다. 상상과는 다른 무게감에 이유를 물으니, 초반의 침묵은 오랫동안 많은 사람을 대면하며 터득한 방법이란다.
“상담자마다 방식이 조금씩 다르겠지만, 저는 전략적으로 첫 만남 때 기본적인 인사 외에는 말을 아끼는 편이에요. 그러면 오히려 상대방이 말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곤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이야기를 시작하죠. 보통은 요즈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주제를 먼저 꺼내요. 그러다 ‘아 참, 제가 요즘 이런 고민을 하고 있었네요!’라며 깨닫는 경우도 많습니다.”
범죄자에 서사 부여하는 세상
김태경 심리학자는 서원대학교 인권센터장·학생상담센터장, 법무부 위탁 스마일센터 총괄지원단장을 지내고 있다. 그의 역할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임상심리학자로서 대학생들을 가르치고,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치료한다. 더불어 범죄심리학자로서 형사사법기관의 의뢰를 받아 가해자와 피해자의 심리를 분석하고, 진술에 신빙성이 있는지 판단한다.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2015년 세 모자 사건의 진술 분석, 2017년 인천 초등학생 살인사건 심리 분석을 맡았다. TV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 ‘PD수첩’, ‘책 읽어주는 나의 서재’, ‘차이나는 클라스’, ‘궁금한 이야기 Y’ 등에 출연해 냉철한 분석가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운이 나빠 범죄 피해를 본 사람들이 삶을 재건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일에 큰 비중을 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김 교수를 향해 범죄자에 관한 질문을 쏟아낸다. “프로파일러가 아닌지라 그런 종류의 자문이나 섭외는 조심스러워요. 이미 벌어진 사건을 놓고 그 사람이 어떤 심리 때문에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는지 이야기하는 건, 범죄자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만들어 정당성을 부여하는 일이 될 수 있거든요. 개인적으로 대중 매체에서 살인마에게 별칭을 붙여주고 몇십 년 지난 사건을 다시 끄집어내는 걸 보면 불편해요. 피해자는 ‘왜 저 사람의 행위를 전문가들이 나서서 대변해주지? 그러면 내 가족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는 뜻인가?’라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아슬아슬한 거리두기
인간의 내면은 여러모로 무궁무진하다. 상처의 크기와 깊이, 내담자의 성향, 상황에 따라 따스한 말이 도움이 될 때도 있고 반대로 냉정한 태도가 필요할 때도 있다. 상담을 통해 수많은 상처를 위로한 김 교수도 냉담과 몰입 사이 교묘한 줄타기는 언제나 어렵다. 내담자와 몇 칸을 떨어져 앉아야 할지, 식사 여부를 물어도 되는지와 같은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 써야 한다. 워낙 변수가 많아 상담 전에 미리 사례를 수집한 뒤 실무자들과 심도 있는 논의를 거친다. 적절한 거리 조절을 위한 고민을 거듭하고, 지혜를 모으는 과정이다.
“거리 유지에 실패한 적도 물론 있어요. 살인 사건으로 아이를 잃은 분들이었는데, 2차 피해가 우려돼 자택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상담센터 입소 시설에 머물던 중에 피해자의 49재가 있었던 거예요. 그러면 안 됐는데, 저도 자식이 있는 입장이라 마음이 많이 흔들렸어요. 조심스럽지만 사비를 들여 국화 한 다발 보내드렸다가 욕을 바가지로 먹었죠. 가족들만의 시간을 방해받는다고 느끼셨나 봐요.”
힘에 부칠 때도 있지만, 내담자가 점차 나아지는 모습을 보면 인간은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을 느낀다. 눈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아무 이유 없이 폭행당해 몸이 망가지는 일을 당해도 결국 이겨내고 성장한다. 늘 인간의 내면에는 지혜가 있다. 극복을 응원하며 기적을 목격하는 경험은 무엇보다 값지다.
우리의 시선이 향할 곳
그는 ‘공감한다고 착각하지 않는 것’을 가장 중요한 타인의 태도로 꼽는다. 스스로 공감을 잘하는 성격이라고 말하는 사람 중에 공감의 개념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는 경우는 드물단다. 가만히 곁에서 자리하며 상대방이 마음을 터놓게끔 믿음을 주는 편이 좋다. 가끔 고구마를 캐듯 마음 깊은 곳에서 한 번에 딸려오는 감정만 가지치기해주면 된다.
“예전에 우리 아이가 생일 기념으로 머리를 염색하고 싶다고 해서 미용실에 간 적이 있어요. 얼마나 잘 어울릴지 내심 고대하고 있었는데, 미용사분이 ‘어유, 요즘 애들이 다 그런가 봐요. 우리 애도 똑같았어요’라면서 저를 섣불리 위로하려 하시는 거예요. 가볍게 동조하고 넘겼는데, 아이가 집에 와서 ‘필요하지 않은 조언을 한 사람과 그걸 받아준 사람 모두가 무례하다고 생각해’라고 말하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범죄 피해자들에게는 더욱 조심해야 하죠. 사실 말을 아끼는 게 제일 좋아요.”
자신의 감정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김 교수는 찾아온 감정의 원인을 파악하고 일시적인 이상 상태를 인정하면 응어리를 빨리 흘려보낼 수 있다고 조언한다. 일종의 자기 조절 전략이다. “젊을 때는 감각과 경험을 추구하고, 욕구를 적극적으로 표출하고 싶어 하는 시기예요. 40대부터는 청년 시절 바깥으로 향했던 에너지를 내면으로 들어오게끔 바꿔야 해요. 습득한 경험 중에 이해하지 못하고, 처리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던 부분을 나머지 시간 동안 다루는 셈이죠. 저도 그 시기를 겪고 있어요.”
20년, 누군가의 안정을 위해 스스로를 제쳐둔 배려의 시간이다. 앞으로는 짐을 내려놓고 그저 숲을 누비며 ‘방학’을 보내고 싶단다. 가만히 거닐다 보면 그의 삶이 무엇을 원하는지 답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고민의 끝이 조금이라도 홀가분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할 테니 말이다.
마음 근육을 단련할 수 있는 책
by 김태경
나는 내가 좋은 엄마인 줄 알았습니다 (앤절린 밀러 저)
“책에 등장하는 ‘인에이블러’는 우리말로 ‘조장자’입니다. 가족, 연인, 직장 동료 등 다양한 관계에서 발견할 수 있어요. 타인을 사랑해서 헌신하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도움을 받는 대상이 삶을 능동적으로 수행할 기회를 뺏는 존재예요. 어설프다며 아이의 신발 끈을 대신 매주고, 자식의 부채를 대신 갚아주는 부모가 대표적인 예죠. 누군가의 좋은 엄마, 아빠, 친구가 아닌 온전한 나 자신으로 살 수 있도록 생각을 전환할 계기가 될 겁니다.”
아이와 함께 나누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 (얼 그롤먼 저)
“가족을 잃은 아이에게 어디까지 설명해야 하냐는 질문을 종종 받아요. 죽음을 이해하기에는 어리다고 생각해 ‘아버지는 멀리 여행을 가셨어’라는 식으로 에둘러 말하기도 하는데, 그러다 보면 자녀뿐 아니라 어른들도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이 책에는 어른들조차 선뜻 다듬어보지 않은 죽음에 대한 개념이 잘 정리돼 있어요. 우리나라는 죽음에 대한 언급 자체를 금기시하는 문화지만, 오히려 피하지 않고 마주해야 공포를 덜어낼 수 있어요. 어쨌든 누구나 겪을 일이고, 삶이라는 건 유한하기 때문에 더 값어치 있는 거니까요.”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저)
“저자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는 스물여섯 살에 대기업 임원이었지만, 모두 내려놓고 스님이 됐어요. 루게릭병을 진단받고 2022년 1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유쾌하고 따뜻한 지혜를 세상에 전했죠. 저는 이 책을 접했을 때 심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어요. 하지만 ‘인간이 겪는 심리적 고통 대부분은 자발적인 것이며 스스로 초래한 고통이다’라는 문장을 통해 얽매여 있던 감정에서 순간 해방되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마음을 괴롭히던 분노의 원인이 ‘내가 옳고 너는 틀려’라는 생각에서 왔다는 걸 깨닫게 해준 책이에요.”
내 그림자에게 말 걸기 (로버트 존슨, 제리 룰 저)
“내가 의식하지 않은, 가려진 나의 또 다른 측면인 ‘그림자’는 융 심리학의 핵심 개념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용할 수 있는 일과 포기해야 하는 일을 끊임없이 구분하고 선택해요. 그중 선택하지 못한 삶은 사라지지 않고 그림자가 되어 무의식의 어딘가에 쌓이며, 어느 순간 무의식을 뚫고 나와 우리 삶을 이리저리 휘두르려 한다는 겁니다. 나의 억눌렸던 내면을 들여다보고 보살피는 ‘그림자 대면하기’는 슬기로운 마음 챙김의 방법입니다. 특히 중장년에게는 더욱 중요하죠.”
제2의 인생을 살고 싶은 시니어들을 위해 유망 직업을 소개한다. 1월호에서는 반려동물 수제 간식 전문가에 대해 다뤘다. 반려견 천만 시대. 반려견과 관련된 직업이 늘어나고 있다. 그 가운데 애견 간식을 만드는 반려동물 수제 간식 전문가가 있다. 펫푸드 요리사로 불리기도 한다. 특히 살림을 오래 한 여성 시니어라면 누구나 어렵지 않게 일할 수 있다고 하는데, 어떤 직업인지 자세히 알아봤다. 현직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도 들어봤다.
반려동물을 가족 구성원으로 생각하는 펫팸족(Pet과 Family의 합성어)이 전체 인구의 4분의 1인 시대다. ‘가족’이기 때문에, 반려인들은 반려동물에게 좋은 것만 해주고 싶다. 그러다 보니 펫푸드에 대한 관심도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이제 펫푸드는 단순히 식사용이 아닌 헬스 케어를 위해 필요해지고 있다. 과거 사료, 통조림 위주였던 것과 달리, 현재는 건강식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애호박, 토마토, 당근, 고구마 등의 재료를 넣어 영양소를 고루 갖춘 수제 간식은 건강한 먹거리로 통한다. 방부제, 합성 감미료, 색소 등 어떠한 첨가물도 안 들어가는 것을 선호한다.
요즘 인기를 끄는 반려동물 수제 간식을 보면 펫푸드가 맞나 싶게 예쁘고 다양하다. 닭고기·오리고기·연어 등의 저키(육포)를 비롯한 건조식, 황태 오리고기 말이, 고구마 닭가슴살 말이 등의 자연식이 있다. 또한 쿠키, 과자, 빵도 있고 피자, 치킨, 케이크 모양으로 재밌게 만들기도 한다.
이와 같은 건강하고 맛있는 수제 간식을 만드는 사람을 ‘반려동물 수제 간식 전문가’라고 부른다. 반려동물 수제 간식 전문가는 2020년 서울시 여성능력개발원이 선정한 여성 유망 직종 20개 안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남녀노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음식 만드는 일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주부 경력이 있으면 더욱 쉽게 할 수 있다. 특히 주부 경력 30년 이상인 50~60대 여성 시니어에게 맞춤형 직업이다. 자식, 손주에게 건강하고 맛있는 요리를 해주던 경력을 십분 활용할 수 있는 것.
여기에 반려동물을 키운 이력이 있다면 일에 적응하기 쉽다. 반려동물 수제 간식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반려동물이 섭취 가능한 재료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더불어 반려동물의 필수 영양소도 잘 알고 있어야 균형 잡힌 애견 간식을 만들 수 있다. 즉 요리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조리 능력 등의 자질이 필요하다. 미적·색채 감각을 지니고 있다면 더욱 이점으로 작용한다.
반려동물 수제 간식 전문가에 대해 알아보거나 배우고 싶다면, 교육을 들을 수 있는 창구는 많다. 한국펫영양협회에서는 반려동물 수제 간식 전문가, 반려동물 베이커리 전문가, 펫푸드 지도사 1·2급 과정 교육을 진행한다. 교육을 수강한 후 협회에서 발행하는 민간 자격증 취득도 가능하다.
평생교육원에서도 수업을 들을 수 있다. 현재 충북대학교, 서원대학교, 동의대학교 등에서 관련 교육이 진행 중이다. 보통 15주 과정으로 진행되며, 이론 및 베이커리, 자연식, 건조간식 과정이 포함돼 있다. 이밖에도 지자체에서 교육을 진행할 때가 있으니 잘 찾아보는 것이 좋겠다. 한 예로 창원여성새로일하기센터에서는 지난 12월에 4주에 걸쳐 반려동물 수제 간식 만들기 교육을 했다.
시니어를 위한 일자리도 점점 확대되고 있다. 2018년 문을 연 반려동물 수제 간식 전문점 ‘장수하개’는 강남학원·강남대학교와 용인기흥노인복지관이 운영하는 곳이다. 노인 일자리 사업으로, 반려동물 수제 간식 제조 전문 교육 과정을 수료한 15명 내외의 어르신들이 직접 제조한 수제 간식을 판매한다. 소· 닭·오리고기부터 캥거루 갈비, 메추리 등 특이한 재료를 이용한 건조식품이 주요 판매 상품이다.
소셜 벤처 기업 ‘개로만족’도 빼놓을 수 없다. 2019년 보건복지부 노인 일자리 사업에 선정된 회사로, 60세 이상의 셰프들을 기용해 노인 문제 해소에도 앞장서고 있다. 한아름 대표는 모교 한국외대가 위치한 동대문시니어클럽과 파트너십을 체결해 할머니 셰프들을 소개받았다. 2022년부터는 노인 일자리 사업을 성북50플러스센터 등과 함께 시범 운영한다.
◇ ‘개로만족’ 김복순 셰프 “손끝 야무진 60대에게 추천해요”
개로만족은 처음 다섯 명의 셰프 할머니로 출발했다. 앞서 말한 대로 동대문시니어클럽에서 소개받은 시니어들이다. 그중에 김복순(64) 씨가 있다. 베이비부머를 대표하는 1958년생이다. 그녀는 위생 책임자 셰프를 맡았다.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는 김복순 씨는 인생을 즐겁게 살았다. 남편과 함께 동대문에서 의류 사업을 30년 넘게 했고,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노래 교실을 다녔는데 코로나19로 못 가게 되면서 삶이 무료해졌다. 이에 일이라도 해보자는 생각으로 동대문시니어클럽을 찾았다.
여러 일자리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개로만족을 선택했다. 당시 지원 조건은 ‘60세 이상, 펫푸드 요리사를 꿈꾸며 열정 있는 건강한 어르신’으로 단순했다. 김복순 씨는 “강아지를 20년 동안 키워봤고, 재밌을 것 같았다”고 선택 이유를 밝혔다. 그녀가 개를 키울 당시에는 수제 간식이 일반화됐을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펫푸드 요리사라는 직업은 생소했다.
“저는 1년 넘게 일했고 이제 근무 기간이 끝났어요. 2020년 10월부터 일했는데 12월에 코로나19 때문에 중단됐어요. 그리고 1월은 원래 방학이라고 쉬는 기간이었고, 2월부터 12월까지 일했죠. 일주일에 두 번, 36시간 일하고 32만 5000원을 벌었어요. 일하면서 사람들 만나는 것도 좋고, 30만 원이 적은 돈 같아도 매달 들어오니 좋더라고요. 제가 월급쟁이가 아니었으니 월급을 처음 받아보잖아요. 월급날이 기다려지고 재밌었어요.”
직무 교육은 셰프가 된 이후 이뤄졌다. 한아름 대표가 친절하게 레시피를 알려줬고, 할머니 셰프들은 요리하면서 점점 손에 익히는 과정을 거쳤다. 김복순 씨는 “저희가 나이가 있다 보니 한두 번 배워서는 모른다. 처음에 애를 많이 먹었다. 칠판에 레시피가 적혀 있는데 글씨가 잘 안 보이니까 사진으로 찍어 크게 확대해서 보고는 했다. 지금도 레시피 그대로 요리한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반대로 연륜이 장점이 되기도 했다. 할머니 셰프들의 나이는 60~70대. 주부 경력 또한 40~50년이다. 주부로서의 내공이 일하면서 곳곳에서 발휘됐다. 예를 들면 고구마를 어떻게 쪄야 더 맛있을지, 색이 예쁘게 구현될지 알고 있었고, 불이나 물 조절을 기가 막히게 했다. 그리고 좋은 재료에 맛을 더하기 위해 반죽할 때도, 빚을 때도 정성을 기울였다.
“처음에 간식을 만들 때는 우리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를 떠올렸어요. 정성 들여 만들었는데 얼마나 맛있을까 하고요. 처음에 무지개우유껌을 보고 얼마나 놀랐다고요. 어떻게 이렇게 예쁘냐 했죠. 간식이 그렇게 예쁘게 만들어지면 저도 기분이 매우 좋더라고요. 그리고 홈페이지에 좋은 후기들이 올라오면 대표님이 보여주시는데 뿌듯하고 보람을 느꼈어요.”
김복순 씨는 누구나 펫푸드 요리사가 될 수 있다면서 시니어들에게 추천했다. 특히 “나와 동년배인 60대 초중반이 하기에 좋은 일 같다. 주부 경력이 있으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고구마, 호박을 자르고 찌는 것은 주부에게 너무 쉽지 않나”면서 “손끝이 야무진 사람들에게 특히 추천한다. 강아지를 좋아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개로만족은 어떤 회사?
강아지들을 위해 형형색색 예쁜 간식을 만드는 셰프들. 평균 나이는 68세다. 소셜 벤처 기업 ‘개로만족’은 ‘개(犬)와 노인(老) 모두를 만족시킨다’는 뜻을 지녔다. 반면에 회사 대표 한아름 씨는 24세의 젊은이다. 할머니 손에서 자란 한 대표는 손주를 생각하는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을 잘 알고 있었고, 애견 간식 사업과 연결시켰다. 그렇게 할머니가 손수 만드는 애견 간식 회사가 탄생했다. 개로만족의 시그니처는 우리나라 전통 간식인 한과 모양의 간식이다. 더욱이 모든 재료가 국산으로 최고만을 엄선했다. 거기에 할머니들의 손맛까지 더해졌으니 무슨 말이 필요할까. 개로만족은 고품격 애견 간식을 만드는 사회적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의 서원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 불현듯 떠난 여행길. 가장 보고 싶었던 곳은 단연코 병산서원이었다. 안동 하회마을을 돌아보고 난 후, 병산서원을 향해 차를 몰았다. 지도에서 보면 낙동강의 물줄기는 S자로 흐른다. S자가 만든 골짜기 안에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이 나란히 있다. 하회마을을 투어하고 병산서원을 방문하면 꽉 찬 1일 코스로 손색이 없다.
병산서원은 하회마을에서 6km 떨어진 거리에 있으니 멀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불편하기 그지없다. 하회마을에서 곧장 갈 수 있는 대중교통 수단이 없다 보니 버스를 타고 가다 중간에서 내려 한참을 걷든지 아니면 다시 안동까지 가서 병산서원으로 가는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한다. 안동의 관광 구역을 묶어 투어 버스를 운행해보는 것이 필요해 보였다.
운전하면서 온갖 아이디어로 안동 지역 관광을 증진하는 말의 향연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신장이 족히 190cm 정도는 되어 보이는 체격 좋은 외국인이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무거운 배낭 차림으로 포장도 안 된 도로를 걷고 있는 옆을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다.
“잠깐, 저 친구 병산서원 가는 거 아닐까?” 우리 일행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고 길 한쪽에 차를 세우고 그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Are you going to Byeong San?” 맞았다. 안동 하회마을에서 걸어오는 길이란다. 아직 4km도 넘게 남은 길이었다. 이 친구를 앞좌석에 태우고 병산서원을 향해 다시 출발했다. 연세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독일 청년이었다. 1년 전에 한국에 왔고 시간이 날 때마다 한국 곳곳을 혼자서 돌아다닌다고 했다.
한국어도 거의 하지 못하는 독일 청년이 안동까지 혼자 여행 와서 걸어 다니는 것을 보니 마음이 짠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습하고 무더운 여름 날씨에 고생이 심해 보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가다 보니 어느새 병산서원 주차장이었다. 돌아갈 때도 태워줄 테니 편하게 서원을 관람하고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한 후 독일 청년과 헤어졌다.
이제부터 병산서원을 차근차근 훑어볼 시간. 중장년층 세대의 병산서원에 대한 관심은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3’에서 시작됐을 듯싶다. 유 교수는 “인문적·역사적 의의 말고 미술사적으로 말한다 해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원 건축으로 한국 건축사의 백미”라며 병산서원의 아름다움을 극찬했다. 아울러 “하회의 답사적 가치는 어떤 면에서는 하회마을보다 꽃뫼 뒤편 병산서원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많은 사람이 병산서원에 들어서자마자 만대루에 감탄한다. 다른 서원에서는 볼 수 없는, 200여 명은 함께 모여 강학할 수 있을 만큼 규모가 큰 망루다. 만대루를 떠받치고 있는 휘어진 모습 그대로의 기둥들과 주춧돌, 커다란 통나무를 깎아 만든 계단까지 자연의 모습이 건축물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모래사장의 풍경과 낙동강 물줄기를 감싸 안은 산세들을 만대루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니 옛 서생들이 품었던 기개가 느껴진다. 자연의 섭리를 깨우치며 공부할 수 있도록 대자연을 건축으로 끌어들인 한국 건축의 백미라는 유홍준 교수의 찬양에 고개를 끄덕였다.
만대루 밑을 통해 마당으로 들어서면 좌우로 동재와 서재가 있고 맞은편으로는 입교당이 있다. 입교당에 앉아 만대루가 들어선 서원의 앞쪽을 바라보면 산을 끼고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만대루 기둥 사이사이로 보이는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인 듯해 잠시 말을 잃을 정도다.
병산서원 곳곳에는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다. 예로부터 선비, 유학자들이 서원 혹은 향교에 심었고 사찰에서도 많이 심었던 꽃나무다. 이 나무를 심는 데는, 1년에 한 번씩 나무껍질이 벗겨지는 배롱나무처럼 정진을 거듭해 심신을 수련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그러나 꽃이 흐드러지게 핀 배롱나무가 너무 황홀하다. 가끔 수련에 지장이 되는 날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배롱나무 자태에 취하고 만대루 풍경에 취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병산서원을 나서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독일 청년이 의자에 앉아 우리를 기다리다 반겨준다. 우리가 떠나버린 건 아닌지 걱정한 모습이다. 오늘 밤 숙소를 물어보니 다시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며 안동버스터미널에 내려줄 수 있는지 물어본다. “Of course!!” 병산서원의 황홀한 자태에 취한 저녁, 우리는 안동버스터미널에 눈동자 파란 외국인을 내려주며, 저 친구가 오늘을 평생 기억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병산서원
병산서원은 고려 중기부터 안동 풍산에 있던 교육기관인 풍악서당(風岳書堂)을 모체로 건립됐다. 지방 유림의 자제들이 모여 공부하던 곳으로, 고려 말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왕의 행차가 풍산을 지날 무렵, 풍악서당의 유생들이 난리 중에서도 학문에 열중하는 것을 보고 왕이 크게 감동하여 많은 서책과 사패지(賜牌地)를 주어 유생들을 더욱 학문에 열중하도록 격려하였다.
200년이 지나면서 서당 가까이에 가호가 많이 들어서고 길이 생기며, 차츰 시끄러워지면서 유림들이 모여 서당을 옮길 곳을 물색하던 중에 서애 류성룡 선생께서 부친상을 당하시고 하회에 와 계실 때 그 일을 선생에게 문의하니, 서애 선생께서 병산이 가장 적당할 것이라고 권하게 되었고 유림들은 선생의 뜻에 따라 1575년(선조 8) 서당을 병산으로 옮기고 ‘병산서원’이라고 고쳐 부르게 됐다.
1614년(광해 6)에 우복 정경세, 창석 이준, 동리 김윤안, 정봉 안담수 등 문인들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존덕사를 창건하여 선생의 위판을 봉안하였다. 1662년(현종 3)에 선생의 셋째 아들인 수암 류진(柳袗, 1582~1635) 공의 위패를 종향하였다.
병산서원은 1863년(철종 14)에 조정으로부터 '병산서원'으로 사액을 받았으며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이 내려졌을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중 하나다. 1978년 3월 31일에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애 선생의 문집을 비롯하여 각종 문헌 1000여 종 3000여 책이 소장되어 있다. (병산서원 공식 홈페이지에서 발췌)
◇ 백 살까지 유쾌하게 나이 드는 법 (이근후 저ㆍ메이븐)
베스트셀러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의 저자 이근후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의 신작이다. 죽음의 위기를 수차례 경험하고도 7가지 병과 더불어 지내며 여생을 유쾌하게 살겠다고 다짐하는 노학자의 인생 내공이 느껴진다. 유년기와 청년기에 지독한 생활고를 겪었던 저자는 “사람은 마지막까지 유쾌하게 살아야 한다. 사소한 기쁨과 웃음을 잃어버리지 않는 한 인생은 무너지지 않는다”며 즐거움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와 함께 50년 경력의 정신과 의사로서 중년 이후 마주하게 되는 일, 자아, 인간관계 등의 문제에 대해 실질적인 조언을 담았다. 소중한 사람에게 연락 미루지 말기, 죽도록 일만 했다고 후회하기 전에 열심히 일한 자신의 노고 인정하기, 다 큰 자식은 되도록 빨리 독립시키기 등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제안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유용한 인생 지침서가 되어줄 것이다.
◇ 오늘의 메뉴는 제철 음식입니다 (박찬일 저ㆍ달)
여름은 물론 봄부터 겨울까지 사계절 제철 식재료 27가지에 대해 정리했다. 식재료가 나는 현장에 직접 찾아가 취재한 결과물로 재배 과정부터 산지 환경, 보관 방법, 맛의 절정을 맛볼 수 있는 비법들을 다채롭게 소개한다.
◇ 엄마는 이제 졸업할게 (사이바라 리에코 저ㆍ해의시간)
최근 떠오른 ‘졸혼’처럼 ‘졸모’(卒母)를 선언한 엄마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저자는 졸혼이 혼인은 유지하되 서로 간섭하지 않듯, 졸모 또한 자녀와의 관계는 지키면서 아이의 독립과 엄마의 생활을 동시에 인정해주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 정신 위에 지은 공간, 한국의 서원 (김희곤 저ㆍ미술문화)
유생들에게 단순 지식 전달뿐만 아니라 삶과 죽음을 가르쳤던 인문학당과 같은 공간으로 서원을 의미 있게 다룬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한 서원 9곳을 중심으로 ‘정신 위에 지은 공간’으로서의 가치를 재조명한다.
◇ 백년편지 (이만열 저ㆍ삼우반)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100분의 독립운동 선열에게 100명의 국민이 쓴 편지를 엮었다.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참여해 독립운동가의 삶에 대한 존경심과 고마움을 드러냈다.
매달 시니어의 제2인생과 직결된 새로운 직업을 소개해온 이 코너가 2017년 정유년(丁酉年)을 맞이해 새해 각오와 어울릴 만한 주제를 준비했다. 바로 특정한 직업이 아닌 ‘창업’이다. 취미활동이나 공부를 통해 익숙해진 일 혹은 남에게 도움이 되는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회사를 세우는 것. 창업은 시니어에게는 거창한 일로 여겨지지만, 벤처나 스타트업이 뜨고 있는 요즘 사회에선 어렵지만도 않다. 또 시니어의 창업을 돕기 위한 관련 기관의 도움도 쏠쏠하다. 새해 계획을 이미 세워놨다면 ‘창업’이라는 꿈을 하나 더 집어넣어보면 어떨까?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올해 사업 활동 결과는 이상이며, 내년 사업 계획을 보고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스크린의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응시하는 사람은 말쑥한 정장 차림도, 대기업 임원도 아니다. 머리가 희끗한 중년 여성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니어의 모습.
지난해 12월 7일 도심권50플러스센터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도심권50플러스센터가 진행하는 인큐베이팅 지원사업에 참여한 단체들이 지난 1년간 사업 결과를 평가하고 다음 해 활동을 소개하는 자리. 현장에선 센터에 의해 ‘보육’되고 있는 스타트업 기업 10개 업체의 대표자들이 모여 성과를 자축했다.
비록 프레젠테이션이 서툴러도, 아직 대표라는 직함이 쑥스러워도, 한 회사를 설립해 성장시키고 있다는 보람 때문인지 이들의 표정은 밝아보였다. 이들은 어떻게 회사를 설립하게 되었을까.
창업은 ‘소자본’ 1억원 내외로
현대경제연구원은 최근 ‘2017년 한국경제 7대 이슈’ 보고서에서 60대 이상의 연령층에서 경제활동인구 증가가 취업자 증가보다 커 고용 여건이 악화될 것이란 전망을 내놓았다. 그만큼 시니어들의 취업활동이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취업활동이 어렵다면 생각해볼 수 있는 대안 중 하나는 ‘창업’. 그러나 막상 사업을 시작하려 해도 종목 선정이나 자금 마련, 동료나 직원 확보, 판로 개척 등 막막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시니어들은 어떻게 창업을 추진할 수 있을까?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는 최근 은퇴 후 창업 시 망하지 않는 5가지 원칙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소자본으로 창업하기 ▲365일 묶여 있는 창업 피하기 ▲가족의 지지 확보하기 ▲잘 알고, 좋아하는 일 선택하기 ▲사업가 마인드로 무장하기 등이다.
소자본 창업을 추천하는 이유는 상당수의 시니어들이 창업할 때 은퇴 자금을 한꺼번에 투자해놓고 사업이 안 되면 곤란을 겪기 때문이다. 또 잘 알지 못하거나 가족의 도움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다면 그 사업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설명이다. 창업 금액은 1억원 내외가 적당하다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창업진흥원의 시니어 창업기술센터 프로그램을 활용하자
창업을 원하는 시니어들을 제도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장치들이 정부기관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기관 중 하나는 창업진흥원. 만약 어떤 ‘아이템’을 갖고 사업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창업진흥원을 노크해보라. 창업진흥원에서는 각 지역 23개 시니어 창업기술센터를 운영하면서 시니어의 창업을 돕고 있다. 또 별도의 시니어 기술창업스쿨을 통해 창업에 필요한 기술교육도 제공하고 있다.
창업진흥원 지식서비스창업부 이경희 대리는 창업진흥원의 활동을 이렇게 설명한다.
“창업진흥원에서 기술창업, 즉 기술을 바탕으로 한 창업을 지원하는 이유는 시니어의 창업에 가장 적합한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시니어들은 창업에 올인할 경우 사회적 약자가 되기 쉽고, 완벽하게 준비하지 않은 창업은 폐업률이 높습니다. 때문에 창업에 필요한 지식과 준비 과정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기술교육을 지원해 안정적인 창업활동이 이뤄질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창업진흥원은 지난해까지 진행했던 시니어 기술창업스쿨을 올해부터는 각 지역의 시니어 창업기술센터로 이관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할 계획이다. 시니어 창업기술센터는 교육뿐만 아니라 설립된 회사들이 제대로 활동할 수 있도록 입주공간지원 사업, 창업자금지원, 마케팅활동지원 등 다양한 도움을 주고 있다. 기업이 설립되는 데 필요한 대부분의 것들을 지원받을 수 있는 셈이다. 또 시니어에 국한된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창업진흥원의 창업지원 교육이나 프로그램들은 연령 제한이 없기 때문에 창업 전 꼼꼼하게 살펴보고 도움을 받으면 좋다.
모임과 함께 사업 계획 다듬은 뒤 출발해도 늦지 않아
하고 싶은 사업은 있는데 누군가의 힘을 빌리고 싶다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바로 서울50플러스재단 산하 각 지역의 50플러스센터에서 운영하고 있는 커뮤니티와 인큐베이팅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앞서 소개한 도심권50플러스센터가 대표적인 사례다.
도심권50플러스센터의 정현주 대리는 현재 센터를 통해 성장하고 있는 회사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센터에서는 2016년 현재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을 통해 10개 기업들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2016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이 사업은 사업계획 심사와 인터뷰를 통해 10개 업체를 선정해 사무공간을 제공하고, 각 분야 전문가들의 멘토링을 통해 사업이 다듬어질 수 있도록 돕고 있어요. 또 지자체나 다른 기관과의 연계가 필요하다면 저희가 다리 역할을 하고, 사업 내용에 따라 센터가 직접 돕기도 합니다.”
센터에서 지원 기업을 선정할 때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은 일반 창업지원 기관과는 다소 다르다. 기업 활동을 통한 이윤이나 생존을 위한 기존 기업 혹은 청년창업 기업과의 경쟁에 그 초점이 맞게 되면 취지와 어긋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있다거나, 사회 참여적 조직, 협동조합, NPO(비영리 민간단체)를 지향하는 곳을 우선시한다. 물론 사업성이 있어야 함은 기본이다.
이 때문에 상당수 기업들은 전 단계로 센터 내 커뮤니티를 선택한다. 동호회 활동과 비슷한 커뮤니티 활동을 통해 사업 계획을 보완하고 아이디어를 덧붙이는 과정을 거치기 위해서다. 또 센터 내 활동을 통해 인력을 확보하기도 한다.
실제로 현재 인큐베이팅에 참여하고 있는 기업 중 일부는 이미 협동조합을 갖췄거나, 사단법인의 형태로 운영되는 곳도 있다. 참여 기업 중 한 곳인 주식회사 리스타트의 경우 창업투자회사를 통해 자금 투자를 약속받기도 했다. 준비하고 있는 기업의 일자리와 은퇴 후 구직자들을 맞춰주는 서비스가 좋은 평가를 받은 덕분이다.
| 전국 시니어 창업 기술센터 |
서울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로 232 서울테크노파크 1203호(02-944-6038), 서울특별시 마포구 매봉산로 18 마포창업복지관 601호(070-7727-4101), 서울특별시 성북구 화랑로 211 성북벤처창업지원센터 B104(02-941-7257) | 경기 경기 의정부시 경의로 114 영빈빌딩 4층(031-828-8877), 경기 수원시 영통구 광교로 107 창업보육동 B2(031-259-6692), 경기 성남시 분당구 야탑로 205번길 26, 213호, 214호(031-707-5962) | 부산 부산광역시 남구 신선로 365 행정관 302호(051-629-7971) | 울산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곡천동문길 20-22(052-277-1996), 울산광역시 동구 방어진순환도로 1138(HRC빌딩8층)(052-219-8632) | 대구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수로 64, 1층(053-784-8261),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로 128, 1층(053-643-7994), 대구광역시 달서구 달서대로 675, 복지관 3층(053-589-7932) | 경북 경북 칠곡군 왜관읍 공단로 1길, 2층(054-973-9605) | 인천 인천광역시 남동구 인주대로 506-1 서울외과 4층(032-567-5051) | 광주 광주시 동구 금남로 238 무등빌딩 10층(062-236-3262) | 경남 경남 양산시 주남로 288 영산 테크노폴리스 산학협력관 3314호(055-380-9577), 경남 진주시 동진로 33 경남과학기술대학교 8동 3층(055-751-3610) | 강원 강원 춘천시 동면 장학길 48 한림성심대학교 산학관 1층(033-240-9833) | 충북 충북 청주시 흥덕구 무심서로 377-3 서원대학교 글로벌관 B203호(043-217-1311), 충북 청주시 상당구 교서로 8-2, 3층(070-4814-6515) | 전북 전북 전주시 덕진구 기린대로 945-6 소상공인희망센터 희망관 1층(063-717-1322), 전북 익산시 인북로 187, 1층(063-841-7480) | 전남 전남 목포시 석현로46 목포문화산업지원센터 1층(061-280-7492)
여백서원(如白書院)의 주인장 전영애(全英愛·65) 서울대 교수에게 “정말 나이가 안 들어 보이신다”라고 말하자 “철이 안 들어서”라는 대답이 웃음과 함께 돌아온다. 어쩌면 이 각박하게만 보이는 세상에, 서원이라는 고풍스러운 세상을 만든다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철이 안 든 일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는 철이 안 든 게 아니라 자신이 올바른 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에 실천할 수 있는 일일 수도 있다. 서원에서 확인한 책과 책의 가치에 관한 문답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 사진 이신화 여행작가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걸은리의 여백서원(如白書院)은 말 그대로 책의 집이다. 전영애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가 아버지의 호 여백(如白)을 빌려 와 ‘맑은 사람들’을 위해 만든 이 공간에는 전원의 한적함과 생명력이 함께 어우러지고 있었다. 인터뷰는 늦은 매미 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지고 있는 가운데 소장한 책이 몇 권이냐는 질문부터 이뤄졌다.
“우와, 책이 얼마나 되나요?”
“몰라요. 그런 거 알아 뭐해요.(웃음)”
서원을 통해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다
전 교수는 올해 모교인 서울대에서 20년 동안의 교수 생활을 마치고 은퇴했다. 2009년에 국내 최초로 괴테 시 전집을 번역하고 독일 바이마르 괴테학회로부터 괴테 금메달을 받는 등 독일문학 분야에서 학문적인 업적을 탄탄히 쌓은 그녀에게 아쉬운게 있는지 궁금했다.
“늘 그렇죠. 절대적인 낙원이 어디 있겠어요. 이곳도 사람들 보고 숨 좀 쉬라고 만들었지만, 언제나 위협이 있죠. 예를 들면 여기에 조경을 잘 해놓으니까 주변에서는 농사도 못 짓는 땅인데 비싸게 내놓고. 갑자기 수영장 딸린 별장을 짓는다는 등 뭐 그런 얘기들도 있고. 도리 없죠.”
못다 한 걸 물으니 개인이 아니라 서원을 먼저 생각한다. 서원의 완성을 떠올린다. 전 교수에게 여백서원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좋은 사람들이 많이 오세요. 좋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더 바랄 게 없어요. 조경하시는 분도 오고, 을 읽으시고 암 치료 받는 분도 오시고. 그분들 중에 놀라운 분들이 많아요. 세상에 이상한 사람들이 난리 쳐도 귀한 분들이 숨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 처음 만난 사람들이 여기서 밤새도록 얘기하고 그래요.”
전 교수는 만난 사람들에 대해 연신 예쁘고 아름답다는 표현을 거듭했다. 마치 세상을 다시금 발견하게 된 사람처럼. 그녀는 자신이 운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어머니와 할머니가 참 좋은 분이어서 순전히 조상 덕에 잘 사는 게 아니냐며 웃음 짓기도 했다.
귀하게 여긴 책에서 느낀 힘
전 교수는 오래된 보자기에 싸 놓은 책들을 조심스레 꺼내 보였다.
먼저 어머니(김한섭)의 책. 1990년에 작고한 어머니는 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않았다. 평생 고생만 한 그 어머니가 필사한 책이 있다. 배움에 대한 욕망이 컸던 어머니는 책이 귀했던 시절, 한지에 책을 베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보고 외웠다. 소설본, 조선시대 가사를 적은 두루마리들이 전 교수의 손에 남았다.
그리고 아버지(전우순)의 책.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으로 사업을 했던 아버지는 60대 후반에 등산을 시작해 90세까지 매년 에베레스트를 올랐다. 그의 조부는 소수·도산서원장을 지낸 유학자인데, 250년 전 괴테의 글은 줄줄 읽는 딸이 증조부의 글을 못 읽는 게 안타까워 조부의 문집을 한글로 번역해 1000장의 종이에 붓으로 썼다. ‘91세 우순이 피로 번역하고 쓰다’라고 서명한 번역 작업을 2011년 6시간 반에 걸친 담도암 수술을 받은 뒤 마무리하고 6개월 만에 별세했다.
여백서원에는 괴테의 초간본(1819), 희귀본(1853)을 비롯한 200여 권의 독일문학 관련 서적이 있다. 바이마르 괴테학회 재정 감사였던 홀레씨는 별세하기 직전 다시 전 교수를 식사에 초대했고, 며칠 후 “당신이 갖고 있는 게 가장 좋겠다”면서 항공편으로 자신의 장서를 부쳐 왔다. 홀레씨가 임종을 앞두고 정리를 해서 보낸 것이다. 다들 훌륭한 사회인들인 당신 자녀들도 있는데 홀레씨는 가장 귀중한 책들을 전 교수한테 보냈던 것이다.
“그 책들을 누구에게 보내야 가장 귀하게 읽히고 잘 보관될 것인가를 많이 생각하신 것 같았어요. 11일 동안 그 집에 쌓인 수많은 편지를 보고 여러 일화를 들으면서 그의 생애가 얼마나 아름다워 보였던지요.”
여백서원에는 이 책들과 함께 전 교수가 시의 스승으로 모시는 동독 출신 시인 라이너 쿤체의 책, 학문의 스승으로 모시는 헨드릭 비루스 교수의 책, 자신이 쓰고 번역한 책, 교양수업 ‘독일 명작의 이해’를 수강한 제자들이 종강 때 각자 한 권씩 만든 책, 서원에 다녀간 사람들의 책까지 소중하게 간직돼 있다.
전 교수는 여백서원의 존재 이유로 이처럼 좋은 책의 보관과 함께 좋은 사람들의 보존을 든다. 책과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 한국에 대해 알고 싶은 외국 시인 누구에게나 여백서원은 열려 있다. 책이 있는 집, 서원에서 삶의 여백을 찾도록 해주고 싶다고.
힘들면 책을 읽어요
전 교수는 몸이 힘들면 책을 읽고 책을 읽다 머리가 아프면 몸을 움직인다. 그녀는 글을 알면 세계가 열린다고 말한다. 그래서 시험을 보려고 배우거나 출세하려고 배우는 건 너무 불쌍하다고도 했다.
“차 한 잔을 마셔도 사람이 가까워지는데 누군가가 온 힘을 기울여 쓴 책을 읽는다는 건 상당히 많이 받는 거예요. 그러면서 남들을 이해하게 되고 그러는 거지. 그래서 나이 먹어서 책을 읽는 것은, 아무 거나 읽어도 좋은 거예요.”
그녀와 괴테의 인연은 남다르다. 어떻게 괴테를 접하게 됐는지 물어봤다.
“중학교 때 어디선가 시를 하나 봤어요. 그때는 괴테도 모르고 시 제목도 몰랐어요. 그런데 괴테가 쓴 이라는 만년의 시집이 굉장히 중요하고 정말 어렵거든요. 그 책 한 권을 다 읽으니 끝에 괴테가 그 시집에 넣지 않고 버린 것을 편집자가 넣은 시가 몇 편이 붙어 있었어요. 그런데 거기에 제가 중학교 때 봤던 시가 들어 있는 거예요. 하도 놀라서 중학교 때 읽은 그 시가 어떻게 아직까지 잊히지 않고 기억 속에 남아 있었을까, 그 이유가 뭘까 고민하며 그 시를 분석하는 게 제가 독일의 출판사에서 낸 괴테 연구의 첫 페이지입니다.”
40여 년 만에 다시 만난 괴테의 시
중학교 때 본 시를 다시 보게 되기까지 어언 40여 년이 흘렀다. 그 세월 동안 남아 있는 괴테 시의 힘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괴테 본인이 많은 힘을 거기에 쏟은 거예요. 그게 읽는 사람에게 다가온 거죠. 놀라운 체험이었어요. 괴테는 자기가 경험하지 않은 건 하나도 안 썼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평생 연시를 썼어요. 그렇다면 평생 연애 경험이 있다는 건데, 그게 뭘 저지른 게 아니고 아름다운 글을 남김으로써 그 단계를 넘어선 거예요.”
전 교수는 자연스럽게 예술의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선 숭고한 단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런 괴테가 전 교수에게 어떤 롤모델로 작용한 부분이 있을지 궁금했다.
“괴테에게서 탐나는 점이라면 자만이 아닌 자긍심이었어요. 예를 들어 저는 계단을 꼭 뛰어다녀요. 그런 제 모습을 보면 어떤 사람은 스포티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바쁘다고 해요. 그런데 제가 계단을 뛰어다니는 건 계단을 걷는 게 힘들어서예요. 물론 괴테가 계단을 뛰어다니고 그러진 않았어요. 그런데 그 사람의 생활 태도가 그랬어요. 힘든 게 있을 때 그렇게 극복하더군요. 그게 자긍심이죠. 눌리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극복하는 것. 세상을 대하는 훨씬 더 적극적인 태도죠.”
우리 의젓하게 살자
그녀가 인터뷰 내내 강조한 말이 있다. 나만 힘든 게 아니라 모두가 다 힘드니까, 힘든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말이었다.
“자기 분야에서 잘하시는 분에게는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박수를 치고 싶어요. 힘 안 드는 일이 어디 있어요. 하지만 의젓하게 살아야 해요. 옆도 좀 돌아보고. 애들이에요? 울기만 하면 돼요?”
최근에 흔히 쓰이는 헬조선이라는 말에 대해서, 그녀는 매섭게 비판했다.
“우리나라를 헬조선이라 치고, 우리를 누가 여기에 넣은 건가요? 우리가 만든 건데. 금수저, 흙수저… 뭐 어쩌라고요. 형편이 어려운 건 다 알지만 누구나 어려워요. 그런데 승복이라는 게 없고 ‘넌 운이 좋아서 그런 거고 난 재수 없어서 이러고 있어서 너 미워’, 이거 아니에요? 나보다 힘들지만 열심히 사는 사람을 돌아보면 나도 힘을 얻고 그러는 건데 애들처럼 찡찡거려서 되겠어요? 부딪혀서 아프면 자기가 부딪힌 거지 그게 기둥이 때렸어요, 땅바닥이 때렸어요? 자꾸 남 탓하고 여건 탓하는 건 아닌 거 같아요. 그런데 이상하게 정서가 그렇게 가는 것 같아서…. 남 탓하는 건 어마어마하게 잘 하고 자기를 돌아보는 건 못 하는 것 같아서 걱정돼요. 우리 좀 의젓하게 살자고요.”
책이 즐거우면 계속 하고 싶어진다
서원 본관을 둘러보니 그녀의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이 만든 책들이 보였다. 한 학기 교양 수업을 듣고 만든 책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책들이었다. 그녀의 수업은 교재가 없고 시험이 없는 대신, 각자 학기말에 교재를 만들어 내게 한다. 그녀가 갖고 있는 공부 철학이다.
“공부는 자기가 스스로 해야죠.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는 것 정도로 제가 잘 가르칠 자신이 없어요. 내 자식들에게도 마찬가지였고. 요즘 부모님들은 어떻게 그렇게 자신이 넘치는지 모르겠어요.”
가끔씩 독자들이 물어보는 말, 손주가 책을 안 읽는데 어떻게 읽게 하느냐는 고민에 대해 전 교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했다.
“세상에! 아이가 책을 읽지 않으려 하면 읽지 말아야죠. 왜 읽어라 마라 해요. 아이는 책 읽는 시간이 즐거우면 나중에도 즐겁게 책을 읽게 돼요. 전 아무리 바빠도 잘 때가 되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줬어요. 아이들도 그 시간이 너무 즐겁기 때문에 책에 익숙해졌어요. 아이들에게 피아노 배우라고 들들 볶으면 아이들은 피아노를 배우는 게 아니라 들들 볶는 걸 배우게 돼서 대대로 들볶게 돼요. 그러나 엄마가 즐겁게 피아노를 치면 애들도 피아노를 치죠. 그걸 왜 억지로 시켜요? 책을 같이 재미있게 읽으세요. 즐거우면 즐거운 시간의 기억을 되풀이하고 싶어지죠. 그런데 즐거운 시간이 안 만들어지니 책과 멀어지는 거죠.”
고서의 향기를 품고
즐거움과 보람은 전 교수가 지향하는 공부법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자녀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행해졌다.
“사람들이 운동이 중요하다는 거 다 알잖아요? 그런데 돈을 내고도 안 하기도 하고. 하지만 운동보다 훨씬 더 중요한 건 노동이에요. 노동을 하면 보람이 있으니까. 그래서 아이들에게 일을 시키는 게 제 주장입니다. 일을 안 시키면 약해져요. 제 아이들이 걷기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시킨 일은 현관에서 냉장고까지 우유를 배달하는 거였어요. 자기가 우유 배달을 안 하면 온 식구가 우유를 못 먹게 되죠. 얼마나 보람 있어요?”
전 교수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을 ‘말도 아닌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녀는 대신 ‘올바른 목적이 있는 길은 그 어느 구간에서도 바르다’는 말을 믿고 있었다. 그러한 마음이 그녀의 삶의 태도를 결정하고 지금 여백서원의 주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이가 들어가는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도 그녀다웠다.
“나이 들면 얼마나 좋은데요. 저는 젊었을 때도 나이 들기를 소망했어요. 언제나 지금이 좋은 때여서, 두려움 등의 온갖 생각이 하나도 없어요.”
고서(古書)의 기품이 나는 전 교수 같은 분들이 세상에 온전히 남아 있으면 그게 바로 세상이 나아지는 길이 아닐는지. 여주에서 올라오는 차 안에서 내내 ‘말이 서야 나라가 선다’던 함석헌 선생의 문구가 맴돌았다.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
서울대를 졸업하고, 1996년부터 모교인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지내다 올해 은퇴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 고등연구원 수석연구원, 뮌헨 대학과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대학의 초빙교원을 겸임했다. 2011년 바이마르에서 ‘괴테금메달’을 수상했다. , , (공저), , , , , , 등 60여 권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이 아이는 물을 많이 먹어요.” “저 아이는 추위에도 잘 자라죠.” 애정 어린 말투로 야생화들을 ‘아이’라고 부르는 백경숙(白慶淑·63) 백경야생화갤러리 대표. 그녀는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고등학생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갑작스러운 병마로 교단을 떠나야 했지만, 야생화 아이들과 싱그러운 ‘인생 2교시’를 맞이하고 있다는 그녀의 정원을 찾았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교사 시절, 시험 감독을 위해 교실에 들어선 백 대표는 이내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화장실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방광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통증과 빈뇨(頻尿)가 점점 심해졌고, 결국 병원을 찾은 그녀는 ‘발작성 방광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유명하다는 비뇨기과를 수소문해 가보고, 좋은 치료법이라면 뭐든 해보았지만 일상으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별수 없이 퇴직을 결심한 그녀는 한동안 실의에 빠져 눈물로 하루하루를 이어갔다.
“몸이 아프고 집에 있으면 정말 울음밖에 안 나와요. 내가 뭘 잘못했길래 이런 고통을 주시나 하늘이 원망스러웠죠. 병에 좋다는 건 안 해본 것 없이 다 해봤는데 그래도 안 낫더라고요. 암 같은 병도 아니라니까 이런저런 치료를 해가며 집에서 지냈죠.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그게 참 더디고 힘들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백 대표는 “꽃구경 가자”는 동생의 권유로 양재동 꽃시장 구경에 나섰다. 그때, 순백의 청초한 자태를 뽐내는 꽃 한 송이가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말발도리’라는 야생화였다. 말발도리의 아름다움에 매료돼 당장 꽃을 사려 했지만 꽃가게 주인은 “그 꽃은 팔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못내 아쉬워하는 백 대표에게 솔깃한 이야기를 꺼냈다.
“가게 주인이 꽃을 파는 대신 야생화 강사를 한 분 소개해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당시만 해도 야생화를 배운다는 건 생소했죠. 시민녹화교실이나 분재 수업을 들은 적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야생화를 배운 건 그때부터였어요. 점점 집에 화분이 늘어났고, 제 삶도 활기를 더하게 됐죠.”
몸 상태가 몹시 안 좋았을 때는 패드를 하고 다닐 정도로 잦은 고통이 찾아와 그녀를 괴롭혔다. 야생화와 함께할수록 베란다에 화분이 가득해졌고 백 대표의 일상에도 한층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갑갑하고 지루한 하루하루 속에서 고통으로 눈물짓던 그녀가 꽃처럼 화사한 미소를 머금게 된 것. 그러나 그런 중에도 고민은 생겨났다.
“꽃에 집중하다 보니 화장실도 차츰 덜 가게 됐고, 화분에 물을 주고 다듬는 등의 활동이 소근육 운동이 돼 몸도 건강해졌어요. 온갖 치료법을 동원해도 낫지 않던, 그야말로 난치병이었는데 말이죠. 모두 야생화 덕분이에요. 그런 야생화가 많아져서 좋았지만, 좁은 아파트 베란다에서 키우기엔 공간의 한계가 있었어요. 그렇다고 그 고마운 아이들을 처분할 수도 없었죠. 야생화를 위해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결심했어요. 그건 나를 위한 선택이기도 했죠.”
이사를 하려고 마음먹었을 즈음 화분 수는 200여 개에 이르렀다. 백 대표는 동생과 함께 전원주택이 있는 지역을 둘러봤고, 고심 끝에 현재 백경야생화갤러리가 있는 서원마을(서울시 강동구 암사동)에 정착했다.
“동생 도움이 컸어요. 아파트에서 살다가 전원주택으로 옮기기 힘들다고들 하잖아요. 동생이 ‘언니 우리 함께 살며 의지하면 어떨까?’라고 제안했죠. 그 말에 힘입어 식구들을 설득해 두 가족이 편안하게 지내면서도 야생화 갤러리를 꾸밀 수 있는 ‘모던한 전원주택’을 콘셉트로 설계했어요. 함께 살다 보니 어려움을 나눌 수 있게 됐고, 경제적으로도 더 여유가 생겼죠. 무엇보다 야생화를 자유롭게 키울 수 있다는 점이 좋았고요.”
‘서로가 원하는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 서원마을에 온 지도 어언 7년. 화분은 점점 늘어나 이제 600여 개에 달한다. 보살펴야 할 꽃이 많아지면서 백 대표의 손길은 더 분주해졌다. 야외 정원에서 활동하는 시간이 늘어나다 보니 어느새 그녀의 피부도 건강한 빛으로 그을려져 갔다. 백 대표는 이 마을에 오고 자신의 건강이 95% 정도는 회복됐다고 자부한다. 몸에 활력이 생길수록 야생화를 향한 그녀의 애정은 더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어느 날 갤러리를 찾아온 분이 ‘원예치료사’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했죠. 처음 그 단어를 듣고는 ‘아, 꽃도 아플 수 있으니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식물을 이용해 사람과 소통하고 마음을 치유하는 거더라고요. 괜찮겠다는 생각에 찾아봤더니 건국대학교 평생교육원에 커리큘럼이 있었어요. 그 길로 등록하고 논문 쓰고 실습도 다니며 원예치료사 자격을 취득했죠.”
전문가가 되고 나니 강사 자격으로 야생화갤러리, 유치원, 주간노인복지요양원 등에서 야생화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20년 넘게 교사생활을 했던 덕분에 수강생을 가르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 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참여한 이들이기에 수업 분위기는 늘 화기애애했다.
“꽃을 배우러 오는 수강생 얼굴을 보면 찡그리고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그게 꽃이 주는 즐거움이기도 하죠. 더군다나 자기가 필요해서 배우러 오는 분들이기 때문에 적극적이라 힘들이지 않고 수월하게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어요.”
지난 2년간은 외손주를 돌보기 위해 미국을 오가느라 야생화 교실이 뜸했지만, 여전히 찾아오는 이들이 있어 행복하다는 백 대표다. 특히 자신과 같은 중년 여성들의 방문을 적극적으로 환영한다.
“여자들은 정말 갈 데가 없어요. 그런 분들이 야생화갤러리에 와서 꽃도 보고 수다 떨고 하는데 저는 그냥 오라고 안 해요. 기왕 오는 거 옷도 아름답게 입고 예쁜 앞치마도 하나 가져오고 기분 좋게 찾아오라 이야기하죠. 여기 오면 바람도 선들선들 불고 우리끼리 소통하면서 꽃과 함께 예쁘게 놀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 공간에서 그런 즐거움을 나누며 지내고 싶어요.”
박정희 혜담(慧潭) 인상코칭 연구원장 ilise08@naver.com
1975년 8월 발행된 1000원권의 인물은 조선중기 문신이며 성리학의 대가로 영남학파를 형성한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이다.
영남학파는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유파로, 조선 중기에 영남좌도에서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과 예학(禮學)을 바탕으로 한 사변적(思辯的)인 성리학을 더욱 중시하였다.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에 대칭되면서 학문적으로는 주리론(主理論), 정치적으로는 동인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성군을 바라는 지어 올려
또한 이황은 살아 있을 때부터 유종(儒宗 : 유학에 통달한 권위 있는 학자)으로 불렸다. 그동안 유학을 하는 선비들은 주자학(朱子學)을 단순하게 받아들여 실천하는 데 불과했으나, 이황은 사상적으로 깊이 파고들어 주희(朱熹)에 버금가는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황은 이로 인하여 많은 후학들을 길러냈고, 영남학파를 이끌어 가는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황은 시와 서화에도 뛰어났으며 벼슬보다는 학문 탐구를 더 원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의 정치 성향은 전반적으로 왕권을 중시하고 군주의 책임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군주의 자리는 백성의 지도자로서 모든 책임이 모이는 곳으로 온갖 욕심을 부리고 조금이라도 직무에 태만하고 소홀히 한다면 산이 무너지고 바다에 해일이 일어나는 것 같은 위기가 온다. 그것은 곧 백성에게 화(禍)가 미칠 것이라는 마음에 이황은 선조를 위해 를 지어 올렸다. 자신이 보필하지 못하더라도 학문을 열심히 하고 늘 경계하는 마음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추어 성군이 될 것을 주청(奏請)한 것이다. 성학십도는 병풍으로 만들어져 지금도 도산서원에서 퇴계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진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관리)
1000원권 지폐가 처음으로 나온 해인 1975년은 유신헌법의 찬반을 묻는 국민 투표(2월12일)가 실시된 해였다. 당시 대통령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에 특별선언을 발표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보호는 물론 국제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한다는 명목 아래 계엄을 선포하였다. 이와 동시에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을 중지시켰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구성된 비상 국무회의는 즉각 헌법개정안을 제출, 의결하였으며 이를 국민투표에 부쳤던 것이다.
아이러니라 할 수 있지만 퇴계 이황이 성군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던 선조 시대, 사림들의 극심한 대립으로부터 당파가 생겨났다. 동인 서인으로 나누어진 동기는 이조전랑(정5품), 좌랑(정6품)의 벼슬자리가 원인이 되었는데 그때 서울 동쪽에 살면 동인, 서쪽에 살면 서인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황이 지폐의 인물이 된 이유는 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존경하는 인물이라서라는 말이 있었다. 박 대통령은 성군을 바라는 이황의 마음을 간절하게 담아 임금을 교육하고자 하는 의지력과, 매화를 사랑하는 섬세함, 손주를 아끼는 인간적인 마음 등이 부러웠을 것이다. 사람의 향기와 굳은 절개를 두루 갖춘 그의 모습을 닮은 협조자를 휘하에 두고 싶은 간절함을 담았을 수도 있다고 볼 수 있다.
병약해 보이는 초상화 실제와 다른 듯
이황의 초상은 세종대왕이나 율곡의 모습에 비해 몹시 여위고 말라 보인다. 어렸을 때부터 잔병이 많았고, 성품이 깔끔했다는 고증을 반영하여 1974년 이유태 화백이 그린 상상화로 당시에 논란이 많았다. 2007년에 발행된 1000원권에서도 인물 초상은 이황을 그대로 유지했다. 앞뒷면에 초상을 동시 반영해 파격적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1000원권의 이황 초상을 접할 때마다 과연 이분이 그 많은 저서를 남겼고 수많은 제자를 길러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남기신 인물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큰 인물의 초상을 그릴 때는 많은 고증을 통해 그의 성품을 먼저 파악하여야 한다. 진성(眞城)이씨 대종회에서 발간한 제20호, 2005년판에 실린 내용을 살펴보면 선생은 평소 “털 하나라도 틀리면 나의 진면목이 아니다” 라는 말씀을 하신 바 있으며, 진영은 남기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용모를 짐작할 수 있는 기사로는 잡기19칙 제1에 ‘선생, 안각풍광(顔角豊廣) 송재기애지(松齋奇愛之) 상호왈(常呼曰), 광상(廣?),이불명언(而不名焉)’ (이안도(李安道) 선생 , 퇴계선생언행록에서)이다. 해석하자면 “선생은 이마가 모가 나고 풍성하여 송재께서는 이를 기이하게 여기고 사랑하여 평상시에 부르기를 廣?(넓은 이마)이라 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위의 내용이 전하는 바도 있지만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의지력으로 퇴계는 300여년을 성리학의 대가로 인정받으며 우리 시대를 이끌어 가는 큰 학자로 추앙받고 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과 중국 등에서도 성리학을 완성 한 큰 인물로 존경 받고있다. 유럽에서도 퇴계 연구가 왕성한 것을 보면 초상화 속 인물보다는 턱이 넓고 단단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하게 된다.
우리는 퇴계 이황이 완성한 성리학을 예(禮)의 근본으로 삼아 바르고 밝고 어질게 살아가려고 한다. 인상학자의 작은 바람이지만 우리의 위대한 성인의 모습을 제대로 고증, 복원해 훌륭한 인물을 정확한 모습으로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해본다.
벚꽃의 계절이 돌아왔다.
본격적인 봄을 알리는 4월로 접어들면서 지역마다 벚꽃축제가 계획돼 있다.
그중 서울에서 대표 벚꽃 명소로 꼽히는 여의도 윤중로는 4월15일에서 20일이 벚꽃 개화가 절정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기상청은 올해 윤중로 벚꽃 개화시기는 4월11일이며 절정은 15일 전후로 예상된다고 예보했다.
보통 벚꽃은 절정 시기를 기준으로 5~7일 정도까지 만개상태가 이어지기 때문에 4월 셋째 주 주말인 20일까지 나들이객들은 윤중로의 벚꽃 향연을 만끽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맞춰 프리미엄 경제신문 이투데이는 서울영등포구청과 영등포문화재단 공동으로 ‘여의도 사랑의 봄꽃길 걷기대회’를 개최한다.
올해로 4회째를 맞는 이 행사는 4월 20일 오전 10시 국회동문 앞 특설무대에서 진행된다.
본지는 벚꽃이 만개한 여의도 국회일대 3㎞를 걸으며 가족 연인 친구 모든 시민이 함께 어울리는 축제의 한마당을 만들기 위해 매년 4월 이 행사를 열고 있다.
걷기대회 완주 후에는 행운권 추첨을 통해 LED TV, 최신 스마트폰 등 100여점의 푸짐한 선물을 증정하고 참가자 전원에게는 소정의 기념품과 간식도 제공한다.
자원봉사 참가 중ㆍ고등학생에게는 4시간(오전 8시30분~12시30분)의 자원봉사확인서를 발급한다.
서울에서는 윤중로 외에도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벚꽃길이 펼쳐진다. 가지를 치렁치렁 늘어뜨린 수양 벚꽃이 특징으로, 벚꽃 행사가 열리는 다음달 14∼20일엔 저녁 9시까지 연장 개장한다. 또 이 기간 동안 금천구 벚꽃십리길도 장관을 이룬다.
벚꽃 축제는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한국관광공사는 3월 말∼4월 초부터 벚꽃이 만개하기 시작하면서 전국 곳곳의 꽃놀이 명소를 소개했다.
경남 창원 진해는 벚꽃 축제의 명소 중 명소로 꼽힌다. 4월 1∼10일 진해군항제를 기점으로 중원로터리, 여좌천, 진해내수면환경생태공원, 장복산 공원, 안민도로, 경화역, 제황산 공원, 해군사관학교 등 도시 곳곳을 벚꽃이 뒤덮을 것으로 전망된다.
제주에서는 4월 초 벚꽃이 만개할 것으로 보인다. 꽃잎이 크고 화사한 왕벚나무의 원산지답게 4∼6일 제주종합경기장 부근에서 열리는 제주왕벚꽃축제를 필두로 전농로, 제주대학교 진입로 등 곳곳에서 꽃망울이 터진다.
전남 순천에서는 송광사의 벚꽃 터널이 유명하다. 고속도로에서 송광사길로 접어들어 주차장까지 이어지는 10㎞ 구간에서 꽃비가 쏟아진다. 송광사 삼거리에서 주차장까지 이어지는 2㎞ 구간은 산책로로도 좋다.
전북 익산에도 곳곳에 벚꽃 명소가 숨겨져 있다. 보석박물관, 함벽정, 왕궁리 유적지, 송천마을, 함라산임도산책로 등이 가볼만 만하다.
충북에서는 충주호 주변을 따라 벚꽃이 줄지어 핀다. 4월 11∼13일 열리는 충주호봄나들이한마당을 전후해 푸른 물빛을 벚꽃이 새하얗게 물들인다. 18∼20일 열리는 수안보 온천제에서는 온천욕과 벚꽃놀이를 함께 즐길 수 있다.
또 대구에서는 달성군 옥포로가 세갈래 벚꽃길로 변신한다. 두류공원과 화원유원지, 인흥마을, 마비정 벽화마을, 대구수목원, 옛 구암서원 등도 명소다.
아울러 강원 강릉 경포호는 호수 주변을 따라 벚꽃이 만개하는 4월이 1년 중 가장 아름다운 때로 꼽힌다.
바야흐로 벚꽃의 계절이다. 전국이 벚꽃에 잠겨 본격적인 봄의 시작을 알리는 때다.
남에서 북상하는 벚꽃의 경로를 따라 축제 분위기도 고조된다. 벚꽃에 묻힌 향락객들의 발길이 바빠지고, 그 발길 속에서 약간은 들떤 듯한 기대감 같은 것에도 빠져든다.
한국관광공사는 3월 말∼4월 초부터 벚꽃이 만개하기 시작하면서 전국 곳곳의 꽃놀이 명소를 28일 소개했다.
경남 창원 진해는 벚꽃 축제의 대명사다. 4월 1∼10일 진해군항제를 기점으로 중원로터리, 여좌천, 진해내수면환경생태공원, 장복산 공원, 안민도로, 경화역, 제황산 공원, 해군사관학교 등 도시 곳곳에서 벚꽃이 눈송이처럼 흩날린다.
서울에서는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호젓한 꽃길이 펼쳐진다. 가지를 치렁치렁 늘어뜨린 수양 벚꽃이 특징으로, 벚꽃 행사가 열리는 14∼20일엔 저녁 9시까지 연장 개장한다.
제주에서는 4월 초 벚꽃이 만개할 것으로 보인다. 꽃잎이 크고 화사한 왕벚나무의 원산지답게 4∼6일 제주종합경기장 부근에서 열리는 제주왕벚꽃축제를 필두로 전농로, 제주대학교 진입로 등 곳곳에서 꽃망울이 터진다.
전남 순천에서는 송광사의 벚꽃 터널이 장관을 이룬다. 고속도로에서 송광사길로 접어들어 주차장까지 이어지는 10㎞ 구간에서 꽃비가 쏟아진다. 송광사 삼거리에서 주차장까지 이어지는 2㎞ 구간은 산책로로도 좋다.
전북 익산에도 곳곳에 벚꽃 명소가 숨겨져 있다. 보석박물관, 함벽정, 왕궁리 유적지, 송천마을, 함라산임도산책로 등이 가볼만 만하다.
충북에서는 충주호 주변을 따라 벚꽃이 줄지어 핀다. 4월 11∼13일 열리는 충주호봄나들이한마당을 전후해 푸른 물빛을 벚꽃이 새하얗게 물들인다. 18∼20일 열리는 수안보 온천제에서는 온천욕과 벚꽃놀이를 함께 즐길 수 있다.
대구에서는 달성군 옥포로가 세갈래 벚꽃길로 변신한다. 두류공원과 화원유원지, 인흥마을, 마비정 벽화마을, 대구수목원, 옛 구암서원 등도 명소다.
강원 강릉 경포호는 호수 주변을 따라 벚꽃이 만개하는 4월이 1년중 가장 아름다운 때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