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무릎은 시니어에게는 일종의 훈장이다. 좁은 부엌에서 땡볕이 내비치는 밭에서 혹은 도심의 높은 계단을 열심히 오르며 치열하게 살아온 탓이다. 통계만 확인해 봐도 무릎 통증으로 고통받고 있는 시니어들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9년 기준 퇴행성 관절염으로 병원을 방문한 환자의 수가 400만 명을 돌파했다. 이 중 남성 환자 140만 명에 그친 반면, 여성 환자는 277만 명으로 2배가량 많은 수치를 보였다.
의료현장의 전문가들은 퇴행성 관절염의 주요 원인으로 ‘연골’을 지목한다. 무릎 연골은 우리가 걷거나 뛸 때 충격을 완화해주는 핵심 조직이다. 뼈와 뼈가 맞닿으며 마모되는 것을 방지하고, 관절이 빠지지 않도록 연결고리 역할도 한다.
남성보다 여성이 무릎 질환에 취약
그 중요한 역할과는 달리 연골에는 신경이 존재하지 않는다. 거의 마모돼 그 충격이 뼈에 전달되기 전까지 연골이 손상되거나 얇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 어렵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이미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연골이 손상되어야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알아챈 이후에는 회복이 어렵다. 기본적으로 연골에는 혈관도 존재하지 않아 닳아버린 조직이 재생되거나 상처가 회복되지 않는다. 두께 3mm 남짓의 얇은 조직이지만 소중히 관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한국인의 경우 무릎 연골에 더욱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방바닥에서 식사부터 수면까지 모든 일상이 이뤄지는 좌식생활이 무릎 건강에는 좋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국인이 좋아하는 ‘양반 다리’라고 부르는 바닥에 앉는 방식 역시 연골에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노화도 무릎에 건강에 영향을 준다. 실제로 여성의 50대 이후에서부터, 남성은 60대 이후서부터 환자가 증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성 환자가 더 많은 것은 기본적으로 여성의 연골이 더 얇기도 하고, 운동부족이나 비만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전문의들은 ‘폐경’을 원인으로 지목한다. 호르몬의 변화가 연골 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치료과정 고통스러워, 미리 예방해야
무릎 건강이 시니어에게 치명적인 이유는 삶의 질이 급속도로 하락하기 때문이다. 무릎 통증이 심해지면 살림 등 일상생활이 어려워지고, 외부 활동도 자연스레 피하게 된다. 걷는 것 자체가 고통이 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생계유지도 지장을 받을 수 있다.
다른 질환과는 달리 쉽게 수술을 선택하기도 어렵다. 심각하게 악화된 무릎 관절을 수술하는 방법으로 ‘인공관절 치환술’을 선택하게 되는데, 말 그대로 무릎관절을 잘라내고 그 자리에 금속 관절을 고정시키는 방법이다. 당연히 수술 후 통증도 적지 않고, 일정기간 물리치료도 견뎌야 한다. 수술을 경험해 본 환자들은 “치료 효과는 뛰어나지만, 그 과정이 출산에 비교될 정도로 고통스럽다”고 증언한다. 치료가 끝나도 금속으로 만든 관절이다 보니 사람의 무릎만큼 자연스럽게 움직여주지도 않는다는 단점도 있다.
최근에는 제대혈 줄기세포 기술을 활용한 연골 재생 치료도 활발하게 시도되고 있지만, 아직은 가능성을 확인했을 뿐 보편적인 치료로 꼽힐 수준은 아니라고 평가받는다.
건강기능식품 ‘관절’기능성 확인해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가장 좋은 무릎 건강관리 방법은 ‘예방’이라고 전문의들은 입을 모은다. 치명적으로 무릎 건강이 나빠지기 전에 연골 상태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는 것.
연골은 기본적으로 콜라겐과 관련이 있다. 연골에서 수분을 제외하면 75%는 콜라겐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연골의 탄성은 콜라겐에서 나온다. 마치 연골 속 수분을 감싸고 있는 질긴 풍선같은 성질을 띤다. 연골 세포를 단단하게 묶어주고 무게를 견디는 기둥 역할을 하는 것이다.
문제는 노화로 인한 콜라겐의 상실이다. 노화가 시작되면 콜라겐은 급속하게 감소한다. 20대부터 매년 상실돼 40대에는 20대의 절반 밖에 남지 않는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물론 연골 속의 콜라겐도 노화의 영향을 받는다.
때문에 한때 우리 사회에서 돼지 껍질이나 소의 연골, 닭 날개에 콜라겐이 많다며 피부 미용과 관절 건강을 위해 무턱대고 먹는 일이 늘어났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음식 속 콜라겐 성분은 소화과정에서 에너지원으로 사용될 뿐 피부나 관절까지 도달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저분자 콜라겐을 섭취해야 한다는 것이 알려져 많은 콜라겐 제품들이 우후죽순 생겨났지만 저분자 콜라겐이라고 모두 피부와 관절까지 도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반 식품 콜라겐은 분자구조가 크거나 체내콜라겐과 구조가 달라 실제 흡수와 도달이 어려울 수 있지만, 인체동일구조인 ‘저분자 콜라겐 펩타이드’ 형태로 섭취하면 체내 흡수율과 효과 측면에서 많은 차이가 발생한다. 실제로 많은 연구를 통해 저분자 콜라겐 펩타이드 섭취 후 피부, 관절 등 각종 조직에 콜라겐이 도달됨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콜라겐을 먹어 관절 건강을 유지하고 싶다면 원료를 반드시 확인해보는 것이 좋다. 아니면 식약처의 기능성 평가를 따져보는 것도 방법이다. 건강기능식품 중 ‘피부’가 아닌 ‘관절’에 대한 기능성을 인정받은 콜라겐 원료는 시중에 많지 않아 잘 따져봐야 한다.
옷장 깊숙한 곳에 있는 셔츠, 철 지난 바지도 얼마든지 멋지게 입을 수 있다. 10년, 20년 뒤를 꿈꾸게 하는 ‘취향 저격’ 멋쟁이를 발견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좋다. 취향 앞에 솔직하고 당당한 태도를 배울 수 있다면, 노인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김동현 사진작가의 사진과 감상의 일부를 옮겨 싣는다. 첫 번째 주제는 손이다.
1 내게 손은 가장 의미 있는 부분이다. 삶의 흔적이 가득 묻어 있기 때문이다. 손을 찍은 사진을 보면 인생이 느껴진다. 나이테와 같은 주름살과 결혼반지가 어우러진 친할머니의 손은 할아버지와의 사랑과 추억을 증명한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0년이 넘었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반지를 끼고 다닌다. 그런 할머니의 손을 보면서, 언젠가 내 손에 새겨질 삶의 나이테는 어떤 모습일지 기대하게 된다.
2 각얼음을 연상시키는 액세서리로 무장한 아버님의 손.
3 삼천포에서 미용실을 하는 어머님의 손. 어머님의 머리는 핑크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거의 모든 색상으로 염색을 해보시고는 뻔한 색이 재미없어 핑크색으로 염색했다고 말했다.
4 성북동 새이용원 이덕훈 이발사의 손. 그는 19세부터 이발사인 아버지의 어깨너머로 이발 기술을 배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이발사다. 누구보다 멋진 손에 염색약이 묻어 있다.
5눈에 띄는 지팡이를 지닌 아버님. 연락처를 ‘스핑크스 아버님’으로 저장해뒀다.
6 ‘디올 어머님’. 별칭은 처음 뵈었을 때 ‘디올’(Dior) 브랜드 로고가 박힌 옷을 입고 계신 데에서 착안했다. 호탕하게 웃는 모습이 정말 멋있는 분이다. 그의 당당한 모습이 내 눈에는 코코 샤넬(패션 브랜드 ‘메종 샤넬’의 설립자이자 디자이너)처럼 보인다.
노인들이 안락하게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만족할 만한 주거 환경을 마련하는 것은 어려운 숙제다. 우리보다 먼저 고령화의 난제에 부닥쳤던 해외 여러 나라는 노인의 주거 환경 개선을 위해 어떤 대책을 마련했을까? 지구촌의 다양한 노인 주거 형태를 살펴보자.
은퇴 후엔 거주지를 옮겨 다니기가 쉽지 않다. 질병, 노환 등 신체적으로 한계가 올수록 더욱 불편하다. 그래서 집을 고르는 기준의 변화와 새로운 거주 방식이 필요하다. 현재 병원과 시설의 상황은 만족도가 낮다. 2020년 노인 실태조사에 의하면 ‘거동이 불편해도 내 집에서 간병 관련 재가 서비스를 받으며 살고 싶다’는 응답이 56.5%로 요양 시설 31.3%, 가족 합가·근거 거주 12.1%보다 많다.
초고령사회 초입에 선 지금, 혼자 생활하는 노인 가구가 점점 늘어나고 자택에서 돌봄이 필요한 노인 수도 급증할 전망이다. 노인성 질환으로 거동이 불편해지면 이동이 쉽지 않고 식사를 챙겨 먹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가족 중 누군가가 오랫동안 간병하거나 간병인을 고용해야 하는데, 비용이 만만치 않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는 새로운 주거 대안을 선보이고 있다.
네덜란드의 노인 마을
대표적으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외곽에 치매를 겪는 이들이 모여 사는 호헤베이크 마을이 있다. 중앙정부와 지역 기관들의 협조, 치매 요양 전문 간호사의 아이디어로 2009년 시작됐다. 1만 2000㎡ 규모에 영화관, 카페, 마트, 헬스장, 레스토랑, 미용실 등 웬만한 편의시설을 다 갖췄다. 거주 시설은 치매 환자 개인의 삶과 취향을 조사해 일곱 가지 인테리어로 지어 선택하도록 했다.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하는 이들을 위한 공방, 음악을 즐기는 이들을 위한 클래식 감상실도 있다.
환자의 안전을 위해 250여 명의 간병인·의사·요양보호사·직원 등이 마을 곳곳에 상주한다. 이들은 평소 슈퍼마켓 직원이나 미용사 등으로 생활하다 환자들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만 나선다. 마을 주민들은 함께 모여 요리하고, 사교 행사를 열고, 장도 본다. 치매 환자의 일상생활 수행 능력은 최대화하고 간병인의 개입은 최소화하는 게 원칙이다. 정신이 흐릿하고, 손과 머리를 떨고,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있어도 일반 요양원처럼 종일 침대에 누워 있지 않아도 된다. 치매 등급을 받은 입소자들은 개인 형편에 따라 한 달 최소 500유로(약 64만 원), 많게는 2500유로(약 322만 원)를 정부에 내면 된다.
덴마크 코하우징·일본 컬렉티브 하우스
코하우징(Co-housing)은 1970년대 덴마크에서 시작해 스웨덴, 노르웨이, 미국, 캐나다 등으로 전파됐다. 공동생활 시설과 소규모 개인 주택으로 구성돼 사생활과 공동체 생활을 동시에 할 수 있는 협동 주거 형태다. 일반적으로 거주하게 될 입주민이 주체가 되어 그룹을 형성한 뒤 지방정부, 건축가, 은행 등과 협조해 설립한다. 그중 ‘시니어 코하우징’은 핵가족화와 고령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대표적인 시니어 코하우징은 ‘미드고즈그룹펜 코하우징’이다. 코펜하겐의 공영주택회사 라이예보에서 지은 560채의 아파트 중 5층 아파트 단지 4개 열을 개조해 만들었다. 대부분 1인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자기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1층에 공동 거실, 식당, 회의실, 부엌, 창고가 있는 코먼하우스를 반드시 거쳐야 해서 서로 자주 만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일본에는 코하우징과 유사하지만 약간 다른 세대 결합 주택, 컬렉티브 하우스(Collective House)가 있다. 도쿄 아리카와구에 위치한 ‘캉캉모리’는 노인 시설과 보육원이 함께 입주한 12층 건물의 2층과 3층에 있다. 이곳에는 유아부터 80대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살고 있다. 공용 주방과 식당, 게스트룸 등이 있으며, 관리하고 운영하는 일은 거주자들의 몫이다. 사람들은 일주일에 몇 번씩 공동 식사 자리에서 얼굴을 마주한다. 공동 식사는 월 1회 당번제로 거주자 몇몇이 날을 정해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독립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시간과 공간의 일부를 공유하는 식이다. 아이들은 노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공동체 의식을 배우고, 노인들은 아이들 덕에 삶의 활력을 얻을 수 있어 세대 교류 효과를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주목할 만한 국내 노인 주거 형태
세 할머니의 유쾌한 동거, 노루목 향기
여주시 금사면. 이혜옥, 이경옥, 심재식 씨는 자신들이 마련한 공간에 ‘노루목 향기’라 이름 붙이고 5년째 함께 살고 있다. 젊은 시절부터 알고 지낸 직장동료, 친구 사이인 이들은 요양원이나 복지 시설이 아닌 마을형 노인 생활공동체를 꿈꾼다. 마을 노인들을 집으로 초대해 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많은 이들과 즐겁게 사는 방법을 실천하고 있다.
노인과 청년이 서로 돌보는 청춘발산마을
광주광역시 서구 발산마을은 도심 공동화 현상으로 몇몇 노인만 남아 있었지만 2015년 도시재생사업으로 청년들이 다시 거주하게 됐다. 노인과 청년이 한데 모여 골목이웃회를 열고 거리 청소, 분리배출 등 마을의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며 자연스러운 이웃 문화가 만들어졌다. 또 할머니들이 폐품을 모아 마을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거나, 청년들의 가게 일을 도움으로써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가 형성됐다.
‘펨테크’(femtech)는 여성(female)과 기술(tech)을 합친 말로, 여성의 건강과 삶의 질 향상에 초점을 맞춘 기술과 서비스를 말한다. 국제시장정보업체 글로벌마켓인사이츠는 세계 펨테크 시장 규모가 2020년 225억 달러(약 26조7000억 원)에서 2027년에는 650억 달러(약 77조3000억 원) 이상 성장할 것으로 예측했다. 초기 펨테크 시장은 월경, 임신, 수유 등 젊은 여성 타깃이었으나, 최근 중년여성 건강이나 갱년기 등을 테마로 한 서비스가 확대되고 있다.
해외 펨테크 시장 정보 플랫폼 ‘펨테크 애널리틱스’(FemTech Analytics, FTA)에 따르면, 지역별 펨테크 기업 수는 북미(52%)가 1위, 유럽(24%) 2위, 아시아(14%) 3위로 타나났고, 국가별로는 미국이 49.1%로 절반가량을 차지했다. 해외에서는 여성의 생애주기에 따라 월경, 임신, 난임, 갱년기, 피부미용, 건강 등을 중심으로 펨테크 서비스가 이뤄지는 모습이다.
지난해 10월 FTA가 펨테크 전문가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Global FemTech Survey, 2021) 결과 펨테크를 이끄는 주요 트렌드 1, 2위로 ‘난임과 임신’(36%), ‘갱년기’(27%)가 뽑혔다. 한때 팸테크 시장의 주류를 차지했던 ‘월경’(19%), ‘성’(17%) 문제 등을 제치고 ‘갱년기’가 주요 트렌드로 자리 잡은 것이다. 수명 연장과 더불어 늘어난 폐경 이후의 삶이 이러한 결과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서비스 내용을 살펴보면, 갱년기 증상 모니터링을 통한 개인 맞춤형 치료와 상담이 주를 이룬다. 아울러 여성호르몬 감소와 폐경에 따른 신체적, 심리적 변화에 대응하는 개별 정보 제공과 지료를 통한 증상 완화를 지원한다. 또, 안티에이징에 초점을 맞춘 미용 시술 등에 대해 원격 진료와 처방약을 배송해주기도 한다. 해당 앱 등을 통해 증상이나 병력 등을 입력하면 전문가의 상담을 거쳐 처방약을 배송 받을 수 있어, 정기적으로 병원을 찾는 수고와 부담을 덜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펨테크 서비스인 ‘카리아’는 앱을 통해 건강 상태를 모니터링해 갱년기 증상 완화를 위한 방법 들을 제안한다. 아울러 사용자의 일상생활을 기록, 분석해 전문 영양사의 맞춤형 레시피를 제공하거나 인지행동요법 등을 소개해 증상 완화를 돕는다. 또, 안티에이징 분야에 대한 원격 진료와 처방약을 배송하는 ‘뉴알엑스’, 폐경 전후 신체적, 심리적 건강관리 및 주름, 검버섯 등 개인 맞춤형 화장품을 배송해주는 ‘로리’ 등도 주목받는 서비스다. 이밖에 미국의 ‘버추헬스’는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노화 관련 질환을 치료하는 방법을 개발 중이며, 싱가포르의 ‘엘로케어’는 복약 시기를 놓치거나 약물을 과다복용 하지 않도록 돕는 모니터링 기기의 출시를 앞두고 있다. 글로벌 뷰티 기업 ‘로레알’ 역시 사춘기부터 폐경기까지 월경주기를 고려한 개인 맞춤형 스킨케어 서비스 출시를 목표로 개발 중이다.
국내 펨테크 현황은?
아직까지 국내 펨테크 산업은 월경주기 관리나 여성용품 등 월경 케어나 임신, 출산 전후 관리 및 육아 등에 집중되어 있는 편이다. 즉, 중장년만을 위한 펨테크 서비스는 미국 등과 비교하면 매우 미미한 상황이다. 유방암 정보 및 맞춤 솔루션을 제공하는 ‘루닛케어’를 비롯해 비대면 진료 및 처방약 배송을 지원하는 ‘닥터나우’, ‘올라케어’, ‘닥터콜’ 등 전 연령대를 대상으로 한 건강 관련 서비스는 적지 않다. 해외 펨테크 서비스의 초창기 모델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미루어볼 때, 점차 그 수요에 따라 관련 서비스도 개발될 것으로 보인다.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 김도연 연구위원은 25일 발표한 ‘여성의 건강과 삶의 질을 높이는 기술, 펨테크’ 보고서를 통해 “최근 디지털 헬스 케어 서비스를 확대하는 국내 보험사들은 여성의 생애주기를 고려한 솔루션 개발을 통해 서비스 차별화가 요구된다”며 “보험사의 헬스케어 서비스는 건강 상태 분석을 통한 운동과 식단 추천, 멘탈 케어가 일반적인 형태이며, 여성 고유의 건강 특성은 아직 반영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종합적인 헬스케어 플랫폼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여성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며, 여성 호르몬 변화를 고려한 건강관리 지원 역량이 플랫폼 이용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 생명을 집에 들인다는 것은 큰 책임이 따르는 일이다. 각자의 ‘조건’이 반려동물 키우기에 적합한지 심사숙고해야 한다는 조언이 빗발친다. 그러나 어떤 조건을 얼마나 만족시켜야 반려동물을 키워도 된다는 것인지, 예비 집사들은 가늠하기가 어렵다. 전문가에게 예비 시니어 집사가 갖춰야 할 조건에 대해 들어봤다.
반려견 행동교정 전문가 이웅종 연암대학교 동물보호계열 교수는 주거 환경, 경제력, 견종별 특성 등을 확인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 교수는 주거 환경에 대해 “현재 거주하는 집 주변 에 반려견을 산책시킬 수 있는 공원이나 운동장, 최소한의 산책로가 있는지 체크해야 한다”며 “주거지 주변에 산책 가능한 공간이 적다면, 보호자와 반려견 모두 산책으로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다음으로는 견종별 특성을 꼼꼼히 확인해봐야 한다. 과거 마당에서 개를 키웠던 것과 달리, 아파트에 거주하며 집 안에서 함께 사는 경우가 많아졌다. 따라서 실내에서 적응하기 용이한 품종인지 등을 미리 알아둬야 현명한 예비 집사가 될 수 있다. 슈나우저, 코커 스패니얼, 비글, 웰시코기 펨브로크, 테리어 견종의 경우 요구되는 운동량이 많아 시니어 예비 집사가 체력적 한계에 부딪힐 가능성이 크다.
경제력이나 입양 희망자 본인의 건강 상태 등 개인적 요소도 빼놓을 수 없다. 이 교수는 견종의 크기나 모량에 따라 미용 및 관리비가 달라지며, 추후 병원비, 반려용품, 교육비 등의 기타 비용이 추가로 들 수 있어 스스로의 경제적 여건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동물 털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이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 또한 필수다.
이 교수는 “입양 전 전문가와의 상담을 통해 견종 매칭받기를 추천한다”며 “입양 후에도 펫 코칭 서비스, 펫시터 등 전문가에게 상담을 신청하거나 지자체에서 개최하는 반려동물 교육, 세미나 등의 프로그램에 많이 참여하라”고 덧붙였다. 올바른 양육법이나 문제 행동을 보였을 때 취하면 좋은 대처법 등을 미리 알아둬야만 반려동물과 행복한 여생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유기 동물 입양의 40%가 5060세대
유기 동물과 동물권에 대한 의식 수준이 높아지면서, 유기 동물 입양을 고려하는 예비 집사들도 늘고 있다. 유기동물보호소와 입양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비영리 시민단체 동물권행동 카라(이하 카라)의 이현주 입양팀 팀장은 “입양 신청서를 작성해 보내주시는 분들 중 40% 내외가 5060세대인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여러 차례 가족들과 회의를 거친 뒤 본인이 직접 보호소를 방문하거나, 자식들이 방문해 신청서를 작성하고 상담에 참여하는 식이다.
카라는 개농장이나 과도하게 많은 동물을 키워 동물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상태인 ‘애니멀 호딩’(Animal Hoarding) 등의 열악한 환경에서 개와 고양이를 구출해내고, 새로운 가정으로의 입양을 돕는다. 입양이 성사되기까지 판단해야 하는 요소는 다양하지만, 기본적으로 5060 시니어들에게는 유기 동물 입양을 추천하는 편이다. 이 팀장은 “50~60대의 경우 생활이 안정돼 있으며 은퇴를 했거나 앞두고 있어 개인 시간이 많고, 경제적 문제가 없는 편”이라며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데 쓸 수 있는 시간이 많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보호자”라고 설명했다.
센터 홈페이지에 올라온 유기 동물의 사진과 짧은 소개글을 확인한 희망자가 신청서를 작성하면, 신청서를 확인 후 입양 적합 판단을 내린 신청자에 한해 답신을 보낸다. 신청서가 입양 성사의 80%를 좌우하므로 동물을 정말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물건이 아닌 생명으로서 소중히 여길 수 있다는 점을 진심으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 팀장은 “경제력과 생활환경 등의 요소보다 중요한 것은 동물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라며 “입양을 고민 중이라면 시민들이 직접 나설 수 있는 구조 활동인 유기 동물 입양도 고려해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반려견 입양 시 동물등록은 필수
반려견을 입양한 후에는 동물등록을 해야 한다. 2014년부터 전국에서 의무 시행 중인 동물등록제는 동물을 보호하고 유실 및 유기를 막기 위해 도입됐다. 주택·준주택에서 기르거나 그 외의 장소에서 반려 목적으로 기르는 월령 2개월 이상인 개를 대상으로 하며, 동물보호법상 고양이는 등록 의무 대상이 아니다.
등록 대상에 해당하는 개를 동물등록을 하지 않을 경우 최고 100만 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반려동물 등록을 하려면 반려동물과 함께 지정된 동물병원이나 동물보호센터 등의 등록대행업체를 방문해야 한다. 무선식별장치를 장착하기 위함으로, 내장형 장치를 삽입하거나 외장형 장치를 부착하게 된다. 대리인이 신청할 때는 위임장, 신분증 사본 등이 필요하니 사전에 등록기관에 연락해 필요한 서류를 확인하고 준비해야 한다. 지자체 조례에 따라 대행업체를 통해서만 등록이 가능한 지역이 있으니 시·군·구청 등록을 원할 때는 가능 여부를 사전에 확인하면 된다. 대행업체는 ‘동물보호관리시스템’ 홈페이지 ‘동물등록’ 게시판에서 조회할 수 있다.
나이 듦의 과정에서 많아지는 것들이 있다. 가족에 대한, 업무에 대한 책임. 이것을 우리는 ‘무게’로 표현한다. 이러한 것들이 단지 마음속 짐으로만 남아 있으면 좋겠지만, 무게는 외형적으로도 우리를 변화시킨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얼굴’이다. 나이가 들면서 피부와 그 밑 지방의 무게로 살이 늘어지고, 깊은 골이 생긴다. 늘어나는 책임에 어깨도 무거운데 처지는 얼굴살은 시니어를 더욱 슬프게 한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최근 간단하게 세월을 되돌리는 방법들이 의료계를 통해 소개되고 있다는 것. V턱선리프팅도 그중 하나다. 남동우 디에이성형외과 원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턱과 회춘의 상관관계를 알아봤다.
V턱선리프팅이라는 표현은 사실 공식적으로 쓰이는 명칭은 아니다. 학술적으로는 최소절개리프팅이라는 단어가 통용된다. 그럼에도 이런 이름을 쓰는 이유에 대해 남동우 원장은 “최소절개리프팅의 다양한 방법 중 턱선을 살리는 데 최적화된 시술법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별도 미용성형 분야에서 턱선에 주목하는 이유는 턱살 자체가 노화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중력을 이기지 못한 살들은 턱에 모이기 마련이고, 이런 살은 얼굴 윤곽을 흐리게 만들어 더 나이 들어 보이게 하고, 좋은 인상에 방해가 되죠. 얼굴 살이 많지 않아도 피부가 처지면 더 턱살이 많아 보이는 것도 시니어들에게는 큰 문제가 됩니다.”
처짐, 중력만의 문제 아냐
단지 중력의 문제만은 아니다. 노화에 의해 피부 속 콜라겐이나 히알루론산 성분이 부족해지는 것도 처짐의 원인이다. 이러한 결체조직 성분을 보충해주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미용성형 분야에선 리프팅을 추천한다.
이때 추천하는 시술법 중 하나가 V턱선리프팅이다. 남 원장은 “V턱선리프팅은 말 그대로 턱선을 살리기 위해 피부를 당기는 방법이다. 귀 뒷부분을 2cm 정도 절개한 후 피부를 끌어당기는데, 이 과정에서 심부 볼살과 처진 턱선이 매끈해지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V턱선리프팅을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낮은 부작용 발생률이다. 리프팅과 관련한 가장 빈번한 부작용은 표정과 관련 있다. 관련 신경에 문제가 생겨 얼굴 표정이 어색해진다거나 얼굴 근육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 원장은 “턱선 부위에는 표정근이 없기 때문에 관련 부작용 가능성이 낮은 것이 특징”이라며 “절개 부위가 매우 작기 때문에 시술 후 회복 기간이나 일상생활 적응에 필요한 기간도 짧은 것이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V턱선리프팅은 일반적으로 수술 다음 날 바로 일상생활이 가능하고, 최소 절개한 부분의 봉합물은 일주일이면 제거 가능하다. 100만 원 미만의 치료비도 매력적인 요소 중 하나.
또 다른 피부 리프팅 방법인 실리프팅과 대비되는 것은 고정력이다. 실리프팅이 얻는 탄력 효과는 실이라는 물리적 특성과 피하조직에 실이 들어가는 과정에서 생긴 상처가 아물면서 발생하는데,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아물기 때문이다. 당김 효과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나면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그에 반해 V턱선리프팅은 고정하는 힘이 더 강해 지속력이 우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달라진 인상 얻자” 남성도 찾아
그렇다면 남성도 가능할까? 남 원장은 “남성들도 인간관계 개선, 자신감 회복 등을 위해 리프팅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추세”라며 “남성과 여성은 호르몬 분비 등의 이유로 노화의 진행이 다르고 피부의 두께도 차이가 있어 치료 계획에 영향을 주지만, 시술 후 효과는 거의 같다”고 설명했다.
볼살이 많거나 노화가 심각하게 진행된 경우에도 적용할 수 있다. 만약 살이 많이 찐 체질이라면 지방흡입을 병행하거나 아큐레이저 등 레이저 장비를 이용해 지방을 줄여주면서 리프팅을 진행한다. 또 ‘인생의 깊이’가 심한 경우 실리프팅을 함께 실시하는 경우도 있다.
남 원장은 “간단한 시술만으로 외모의 드라마틱한 변화를 얻는 경우가 많고, 이를 통해 사업이 잘 풀린다든가 재혼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감사 인사를 받을 때마다 달라진 인상이 주는 효과에 대해 새삼 놀란다”라고 말했다.
시니어에게 MZ는 가깝지만 먼 세대다. 어디에서나 마주하지만, 이해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은퇴를 준비하는 시니어와 달리 그들은 사회로의 진입 혹은 사회 내에서의 성장에 몰두한다. 소비를 통해서 지향하는 가치를 드러내며, 때로는 SNS를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이른바 ‘가치 소비’를 지향하는 MZ세대는 시장 내에서 핵심 소비층으로 자리 잡았다. MZ를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다양한 소비문화를 살펴본다.
MZ세대는 시장에서 주목하는 핵심 소비층으로 거듭나고 있다. 서울시가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MZ세대는 2020년 기준 서울 인구의 35.5%로 연령대 중 가장 큰 세대 집단을 형성하고 있다. 이와 달리 베이비부머 세대는 13.4%에 불과했다. MZ세대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67.2%로 베이비부머 세대의 경제활동 참가율을 추월했다. 베이비부머의 은퇴와 더불어 MZ세대가 경제활동인구로 진입하면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MZ세대는 명품을 통한 플렉스(Flex) 소비문화를 즐긴다. 실제로 샤넬을 사기 위해서 꼭두새벽부터 줄을 서는 오픈런도 마다하지 않았다. 플렉스는 미국의 힙합 문화에서 유래한 것으로, 부와 성공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사람인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20·30대의 52.1%가 플렉스 소비문화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50% 이상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이유로 ‘자기만족’을 꼽았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치료학과 교수는 “스타벅스 사은품을 얻기 위해 커피 몇 잔을 더 마시는 것도 그들에게는 플렉스다”라며 “MZ의 플렉스는 과시보다 심리적 만족과 보상에 가깝다”라고 설명했다.
MZ세대에게 소비란 가치를 증명하는 일종의 표현 수단이다. 이들은 이른바 ‘가치 소비’를 지향하며, 신념(Meaning)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Coming Out) 소비를 줄여 미닝아웃(Meaning out)이라 부르기도 한다. 단순히 비싸고 품질이 좋다는 이유로 소비를 결정하지 않는다. 제품의 무해성, 회사 경영인의 도덕성, 기업의 사회적 책임 등 다양한 가치를 꼼꼼히 살펴보고 결정한다. 성장관리 앱 그로우가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MZ세대의 10명 중 8명은 자신을 가치 소비자로 평가했다.
MZ세대는 소비의 지속가능성에 주목한다. 지속가능한 소비란 현재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미래 세대가 사용할 자원을 낭비하거나 희생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들은 다음 세대를 위해 환경과 자원을 소중히 다루고, 이러한 것이 지속가능할 수 있도록 현명한 소비를 실천 중이다. 친환경 재료 유무, 재활용 가능성 등 환경적 가치를 위한 소비를 지향하고 있다. 이영애 인천대학교 소비자학과 교수는 “MZ는 제로웨이스트나 비건, 리사이클링 등과 같은 지속가능한 소비를 한다. 소비의 목적을 소유보다는 실용성과 지속가능성에 초점을 맞춘다”라고 말했다.
지속가능한 소비를 실천하는 제비족
실제로 지속가능한 소비를 실천하는 ‘제비족’이 생겨났다. 중년에게 제비족은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지만, MZ세대에게는 다른 개념이다. 과거의 제비족은 몹쓸 짓을 하던 나쁜 부류의 사람으로 취급받았지만, 최근의 제비족은 지구의 환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을 말한다. 제로웨이스트(Zero Waste)와 비건(Vegan)을 실천하는 이들을 일컫는 신조어다.
제로웨이스트는 쓰레기를 0(제로)에 가깝게 만드는 활동이다. 쓰레기 배출량을 줄여 환경을 보호한다. 예컨대 플라스틱 빨대 사용을 자제하고, 일회용 컵 대신 텀블러를 이용하며, 장 볼 때 일회용 봉투 대신 장바구니를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제로웨이스트숍 ‘비그린’에서 일하는 MZ세대 박민지(가명) 씨는 “기후위기 등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실감하고 2년 전부터 제로웨이스트의 삶을 지향하고 있다”라고 말하며 “다음 세대를 위한 선택이라고 생각하며, 개인의 변화로 전 지구적인 변화를 만들 수는 없겠지만 이런 소비를 통해 작은 목소리마저 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 같다”라고 밝혔다.
지난해 ‘용기내 챌린지’가 인기를 끌었다. 이 챌린지는 음식 포장으로 발생하는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서 용기(勇氣)를 내서 용기(容器)를 내자는 취지를 담은 캠페인이었다. 배우 류준열과 그린피스 서울사무소에서 처음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어 확산됐다. 챌린지는 각종 SNS에 비닐이나 플라스틱이 아니라 천 주머니나 다회용기 등에 음식과 식재료를 담아온 각양각색의 사례를 게시한 뒤, ‘#용기내 챌린지’ 또는 ‘#용기내 캠페인’ 등의 해시태그를 붙였다.
아울러 비건의 인기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비건은 동물성 식재료나 동물실험을 거친 성분을 사용한 제품을 소비하지 않는 엄격한 채식주의자를 뜻했다. 하지만 비건은 최근 3년 사이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이노션 인사이트 그룹이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이전까지 연평균 약 300건에 불과했던 비건의 버즈량은 2019년부터 32배 이상 급증했다.
MZ에게 비건은 새로운 라이프스타일 중 하나다. 대학내일20대연구소의 자료에 따르면 MZ세대의 약 27%는 비채식 위주로 먹되 필요에 따라 채식을 섭취하는 간헐적 채식을 하고 있었다. 조사에 따르면 이들이 채식을 지향하는 이유는 건강과 체중 관리,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에 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실제로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SNS에 꾸준히 자신의 비건 제품 사용 후기 혹은 식단에 대한 평가를 남기는 이들이 늘어났다.
실제로 11월 기준 인스타그램의 비건 해시태그만 해도 약 70만 건에 달했다. 이기원 서울대학교 식품·동물생명공학부 교수는 “비건은 소수의 채식 생활에서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환경보호의 필요성을 느낀 개인들의 사회적 책임 의식에서 비롯된 현상으로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소비는 경제적 투표권
MZ세대는 환경적 기준과 더불어 윤리적 기준을 토대로 소비를 결정한다. 올바름에 대한 기준이 높은 세대이기에, 불편함에 목소리를 내고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행동한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그들은 선한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온라인에서 공론화하고, 뜻을 같이하는 이들을 모아서 주도적으로 선한 변화를 끌어낸다. 이렇게 선한 변화를 취하는 능력을 선취력이라 부른다. 그들에게 선함은 중요한 가치다.
MZ세대의 ‘선취력’은 소비문화에 고스란히 영향을 미쳤다. 이른바 돈으로 혼내주는 문화, 돈쭐 문화가 탄생했다. 돈쭐은 반어적 의미로, 착한 소비를 지향하는 행위다. 개인·소상공인·기업이 사회적으로 선한 행동을 했을 때 선행자가 매출로 보상받을 수 있도록 하는 소비다.
반대의 경우엔 불매로 대응한다. 2019년 당시 일본의 수출규제에 반발해 대규모 불매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일본의 한 의류 브랜드 매출은 70% 가까이 하락했으며, 편의점 수입 맥주 1위를 달리던 일본 맥주 브랜드는 급격하게 떨어졌다. 당시 #가지 않습니다, #사지 않습니다 등과 같은 해시태그를 통해 불매운동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이영애 교수는 “MZ세대에게 소비는 경제적 투표권과 같다. 투표를 통해 권리를 행사하듯이 선행을 실천한 회사나 자영업자에게는 착한 소비를 통해 매출로 보상을 해주고, 윤리적 기준에 어긋난 회사나 상품은 불매를 통해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드러낸다”라고 말했다.
MZ세대, 가치 기부로 판을 짜다
현재 MZ세대는 기부를 주도하는 세대로 거듭나고 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발표한 ‘2021 기부 트렌드’에 따르면 코로나19 특별모금에 참여한 기부자 중 MZ세대 비율은 38.2%에 달한다. 2014년 세월호 특별모금(25.6%), 2019년 강원도 산불(32.1%)과 비교했을 때 기부에 대한 관심도가 증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부에 관심이 많은 MZ세대는 기부의 방식도 남다르다. 통상적인 모금 이외에 기부런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기부에 참여하고 있었다. 기부런은 비대면 기부 마라톤을 말한다. ‘기부’와 ‘런’(run)이 합쳐진 형태로 후원금 형식의 참가비를 내고 일정 거리를 달린 후 SNS에 인증 게시물을 올리는 방식이다. 최근 미용의료 정보 플랫폼 바비톡이 기획한 ‘퍼플라이 마라톤 기부런’ 참가 티켓이 판매 오픈과 동시에 3분 만에 완판됐다. 이 캠페인은 암 환우들의 가발 구입비를 지원하기 위해 기획된 것으로, 참가비는 강동경희대학교병원에 기부될 것으로 알려졌다.
직접 기부의 판을 짜는 경우도 발생했다. 지난해 SNS상에서 자발적으로 기부를 독려한 ‘#1339 국민성금 캠페인’이 대표적인 예다. 대구 청년단체에서 시작한 캠페인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이 캠페인은 질병관리청의 감염병 콜센터 번호 1339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1339원, 1만3390원, 13만3900원 등 1339를 연상할 수 있는 금액을 기부하도록 독려했다. 1명이 지인 3명과 공유하면 3일간 9명이 기부에 참여할 수 있다는 의미도 담았다. 두 달간 약 5만8000명이 참가했으며 약 1억6000만 원을 모금했다.
최근에는 NFT를 활용한 기부도 등장했다. NFT는 대체 불가능한 토큰으로 불리며,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하기 때문에 복제나 위조가 불가능한 디지털 자산이다. 디지털 자산의 소유주를 증명하는 일종의 정품 인증서다. 최근 NFT가 기부 수단이 됐다. NFT 스타트업 ‘도어랩스’는 2020 도쿄패럴림픽에 출전한 선수들의 모습을 NFT 카드로 만들어 판매하고 수익금은 전부 대한장애인체육회에 기부했다.
다양한 기부 방식이 등장했지만 MZ세대 기부의 본질은 그들의 가치관을 보여주는 기부다. 임명호 교수는 “MZ세대의 특성은 공존을 위한 공정에 관심이 많고, 자기 주도적인 태도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적극적인 태도로 사회 내에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노력한다. 가치 소비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가치관을 기부로 표현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일단 미국의 시니어들은 많이 움직여요. 장거리 운전도 하고, 봉사도 하고, 집도 고치고, 바느질하고, 뜨개질도 해요. 책도 많이 읽고요.” 미국에 이민 와 20년을 현지 사회와 접해온 20대 후반의 딸이 바라보는 미국 시니어들의 모습이다. 이민 1세대로서 삶에 치여 그들과의 교제와 접촉이 그리 많지 않지만, 딸의 시각과 시선을 따라 미국 시니어들의 일상 습관을 들여다보았다.
미국인들, 특히 백인들은 피부가 좋지 않아 실제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인다. 그럼에도 그들은 부지런히 외모를 가꾼다. 손·발톱과 모발을 정기적으로 관리하고, 가까운 마트에 갈 때도 옷·가방·구두의 색을 맞추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타인에 대한 예의이자 자신의 자존감이라 여긴다. 멋지게 차려입고 동네의 작은 박물관이나 아담한 식물원을 삼삼오오 방문한 후 카페에서 한가로이 담소하는 시니어들의 모습 역시 낯설지 않다. 시니어 관람객을 안내하는 제복 차림의 시니어 직원들의 활기찬 표정에도 자부심이 묻어난다.
미국의 시니어들은 대체로 부부가 같이 움직인다. 순한 눈을 한 나이 든 애완견을 사이에 두고 느릿한 걸음으로 산책하는 노부부의 모습은 아름답다. 거동이 심히 불편한 늙은 아내나 남편을 똑같이 연로한 배우자들이 조심조심, 느릿느릿 돌보는 모습은 병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우리처럼 간병인에게 맡기는 경우는 드물다.
남자들은 나이 불문하고 집 고치기가 일상화되어 있어 홈디포(대형 건축자재 스토어)를 즐겨 찾고, 차고에 깔끔하게 정리된 연장들은 그들의 재산 목록이다. 또한 백발 여성들은 수예나 뜨개질, 바느질 취미에 열중하여 옷감이나 실을 구입한 후 가게에 상주하는 강사들에게 직접 배워가며 각종 소품을 만든다.
미국 시니어들은 20대 후반부터 노후 대책을 세운다. 은퇴 후에는 사회보장연금이나 경제활동할 때 적립했던 퇴직연금 등으로 살아간다. 대부분의 은퇴자들은 미국 은퇴자 협회에 가입하여 의료 및 각종 보험 안내, 신용카드 사용액 포인트 적립, 여행, 쇼핑 등에서 할인 혜택을 누린다.
한편 봉사는 미국 시니어들의 진정한 힘이다. 이민자 영어학교 봉사자인 70대 초반의 린다는 늘 웃는 얼굴이다. 그녀는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건너온 이방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것은 물론이고, 미국 생활의 어려움에도 귀를 기울인다. 그녀는 3남매와 남편, 어머니와 사별 후 홀로 된 아버지까지, 대가족을 보살피기 위해 초등학교 교사직을 그만뒀다. 자녀들이 어느 정도 성장하자 일터로 복귀했으나, 기업체의 중견 지위에서 은퇴한 후 빨래방 두세 곳을 운영하는 남편과, 아흔을 훨씬 넘겨 점점 더 완고해지는 아버지를 돌보는 일은 여전히 그녀의 몫이다. 일요일에는 교회에 가고 지역 봉사단체에 짬짬이 일손을 보태며 바쁘게 살아가는 그녀가 어느 날 자신의 SNS에 가족사진을 올렸다. 성인 자녀들, 귀여운 손주들, 그리고 남편 틈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는 그녀에게서 70대가 아닌 20대의 눈부신 아름다움이 읽혔다.
보람 있고 헌신적인 삶을 살아가는 린다와는 대조적인 시니어로 신디가 있다. 미모와 명문대 출신이라는 것에 엄청난 자부심을 가진 81세의 그녀는 남편과 사별 후 늙은 개와 단 둘이 산다.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매주 화요일 오전 10시 30분에는 20여 년 단골 미용실에서 머리와 손·발톱을 매만져야 하기에 코로나 자가격리 기간 중에도 미용사를 집으로 불러들였다. 그녀는 미용사 앞에서 여왕처럼 군림하며 매번 처음처럼 미용사 가족 하나하나의 안부를 묻고 나름대로의 충고를 지치지 않고 해댄다. 조울증과 강박 증상을 가진 그녀는 배타적이고 안하무인의 고압적인 자세로 주변 사람들을 질리게 한다. 외로운 그녀는 점점 더 괴팍해지는 중이다.
나이 들어 가족이 있고, 자신의 집에서 노후를 보낼 수 있는 건 행운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시설로 들어가는데, 그곳의 휠체어 노인들은 거의 무표정하고 타인을 경계하며 웃지 않는다. 그나마 유일한 행복감은 젊은 시절 이야기를 할 때 잠깐 느낄 뿐.
노화는 피할 수 없는 자연스런 삶의 과정이다. 그러나 감사한 마음으로 주어진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고, 주변과 따스하고 넉넉한 마음을 나누는 것은 나의 선택이자 나 하기 나름 아닐까.
길을 잃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길을 잃었습니다. 사업이 무너지니 가정도 파탄되고 종교생활도 다 무너졌습니다. 그동안 알던 모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불편하고 싫었습니다. 자격지심(自激之心)인지 저의 현재 상황을 일일이 설명하는 것에 비참함을 느꼈습니다. 방황하며 현실을 도피했습니다. 일부러 서울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타지(他地)에 가서 머물렀습니다. 그러다가 중국까지 도망치듯 오게 되었습니다.
흔히 인생을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라고 합니다. 태어나서 죽기까지 매번 선택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는 뜻입니다. 그중에 중요한 3대 선택을 결혼, 직업, 종교라고 하는데, 나이 50세에 이 모든 것들의 기반이 한순간에 붕괴된 것입니다.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나는 어떤 선택이 잘못된 것일까?’ 지나온 저의 50년을 곰곰이 반추해보았습니다.
나의 1차 꿈
저는 가난한 집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저의 아버님은 1·4후퇴 때 월남해온 이산가족입니다. 남한에 친척이 없었고 저의 어머님을 중매로 만났지만 가정에 정(情)을 못 붙이시고 한평생을 유랑하듯 밖으로만 떠도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님이 홀로 저희 3남매를 키웠습니다.
어머님의 고생을 익히 보고 자란 저는, 빨리 커서 돈 벌어 어머님께 집 한 채 사드리는 것이 1차 목표였습니다. 대학 갈 때쯤 우연히 저의 주민등록초본을 떼어보았는데, 거기에는 제 나이보다도 주소지 이전 횟수가 훨씬 많았습니다. 그만큼 더 싼 곳으로 자주 이사를 다녔다는 의미입니다.
대학 시절엔 저를 특별히 아끼시는 교수님께서 제게 미국에서의 7년간 석·박사 유학 코스를 권하며, 공부하고 돌아와 우리 대학의 교수가 되라고 기회를 주셨는데, 저는 거절했습니다.
제게는 현재의 대학생도 과분하며, 저는 제가 교수되는 것보다, 빨리 돈을 벌어 어머님을 편히 모시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교수님께서는 “사람이 돈을 쫓으면 추해진다. 돈이 너를 쫓아오도록 해야지” 하시며 저를 훈계하셨지만, 그때 저는 그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군(軍) 입대할때도 경제생활을 고려해 장교를 선택했고, 대기업에 입사했다가 1년 반 만에 대형 증권사로 이직(移職)을 합니다. 거기서 3년 만에 드디어 꿈을 이룹니다. 드디어 어머님께 집을 사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때의 제 나이가 서른 살이었습니다. 이후 증권사에서 저는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고 승승장구합니다.
고민이 시작되다
그리고 이어 제가 서른한 살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때에 아들 이름을 지으며 저는 처음으로 인생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저처럼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차를 타며, 가족끼리만 잘 먹고 잘 사는 게 목표일까? 그 이상의 인생은 없는 걸까? 나중에 크면 아들에게 인생이란 무엇이라고 말해줘야 할까?’ 그런 생각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들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금강산(金剛山)’. 저의 성이 김(金)이니, 김강산이나 금강산이나 한자(漢字)의 표기는 같았습니다. 제가 그때는 교회도 열심히 다닐 때였기에, ‘역사의 하나님’께서 앞으로 우리 민족의 미래를 열어주실 때, 제 아들 녀석을 ‘금강산 찾아가는’ 통일의 도구로 써주십사 하는 의미였습니다.
저는 비록 제 가족밖에 모르는 인생이지만, 제 아들만큼은 그 이상의 가치 있는 인생을 살게 해달라는 기도의 산물이었습니다.
한편 증권사 시절은 가히 저의 전성시대였습니다. 최연소 영업추진부장, 지점장, 연수원장, 홍보실장, 강남본부장(11개 지점 총괄), KBS 라디오 증권방송 등 종횡무진(縱橫無盡)했고, 급여도 억대 연봉이었습니다. 20여 년 전에 연봉 1억 원이면 거의 상위 1% 수준이었습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위치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왠지 가슴 한구석이 허전했습니다. 경제적인 풍요가 더 이상 나를 행복하게 하지 않았고, 가시적 1차 목표가 사라진 인생은 조금씩 허무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IMF 때 저는 증권사 신촌지점장이었는데, 문득 제가 하는 일에 회의(懷疑)가 생겼습니다. ‘조국 대한민국은 현재 달러가 없어서 국가부도 사태인데,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이 혼란 속에서도 돈 있는 사람들에게 돈을 좀 더 벌게 해주는 역할 정도가 아닌가? 과연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 걸까?’ 본질적인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증권회사에 사표를 제출하게 되었을 때, 저를 아끼셨던 사장님께서 제게 물었습니다. “지금 잘하고 있는데, 왜 갑자기 사표를 내는가?” 그때에 저는 ‘재미가 없어서요’라고 답한 기억이 있습니다. 진심이었습니다.
그 말에 사장님께서는 씨익 웃으시며 “사표는 유보할 테니, 유급으로 한두 달 푹 쉬고 충전해서 돌아오라”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그렇게 처리해주셨지만, 저는 결국 사표를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헤드헌터(Head Hunter)사의 유혹
증권사 퇴직 얼마 전부터 강남의 유명 헤드헌터사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대기업이나 국가기관이 소수의 전문가를 특별 채용하고자 할 때는 공개채용을 하지 않고, 헤드헌터사가 보유한 분야별 전문 인력 풀에서 추천을 받곤 합니다. 어찌된 일인지 그쪽 추천 리스트에 저도 포함되어 있었나 봅니다. 기분 나쁘지 않았고 신기했습니다.
첫 번째 제안은 외국계 증권사의 홍보팀장이었는데 제가 거절했습니다. 우선은 IMF 시기에 외국 회사라는 게 싫었고, 저의 공식적인 답변은 그쪽 역할이 지금보다 작고, 연봉도 저의 현재 수준이 더 높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러자 2개월 후 다시 제안이 왔습니다. 이번엔 역할도 크고 연봉도 맞춰주겠다고 했습니다. 그게 우리금융그룹 홍보실장이었습니다.
일단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우리금융은 IMF 때 공적자금을 받은 5개 은행을 통합하여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금융지주회사인데, 빨리 회생하여 주가를 높여야 우리나라가 IMF로부터 벗어나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단 면접이라도 보아달라는 헤드헌터사의 거듭된 요청을 받아들여, 면접을 보고 결국 입사를 결정하게 됩니다.
가서 만나보니, 하나은행을 성공적으로 경영하셨던 윤병철 회장님께서 우리금융그룹 초대회장으로 오셨고, 이후에 금융감독원장이 되신 전광우 부회장님이 제 직속 상관이셨습니다. 두 분 모두 능력도 탁월하시고 인품도 훌륭하셨습니다. 특별히 저를 많이 아껴주시고 믿어주셔서 가까이서 많은 일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무여건은 녹녹지 않았습니다. 산하의 은행들은 지주회사를 마치 점령군처럼 인식하여 노조를 중심으로 사사건건 반발했고, 언론도 호의적이지 않아, 매일 밤 언론사를 찾아가 부정적인 기사를 막아내는 것이 저의 주된 업무가 되었습니다.
또다시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고, 저는 결국 1년 만에 최종 사직을 합니다. 저의 사표에 대한 답신으로 윤병철 회장님이 써주신 덕담 가득한 친필 서한(書翰)에, 저는 한 번 더 감동하며 고별인사를 드렸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엿보다
총 18년간의 직장생활을 정말 미련 없이 정리하고 나서는, 직장인 시절에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일들에 관심을 갖고 시간을 보냈습니다. 첫째는 각종 동문회 참가였고, 둘째는 강사 활동이었습니다.
동문 모임으로는 서울시립대학교 대학동창회와 ROTC 총동기회가 있었는데, 나름 열심히 하다 보니, ROTC 21기 총동기회장으로 전국을 누볐고, 당시 ROTC 중앙회장이셨던 5기 차인태(전 MBC 아나운서) 회장님과도 좋은 신뢰를 쌓았습니다.
이어 회사 다닐 때부터 간간이 요청이 있었던 몇몇 대기업에서의 강의 요청을 이제는 편하게 다닐 수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삼성그룹, 효성그룹, 푸르덴셜생명 등에 리더십, 프레젠테이션, 커뮤니케이션, 네고시에이션(협상기술) 등을 주제로 4~8시간까지 강의를 진행하곤 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푸르덴셜생명으로부터 한 가지 큰 제안을 받게 됩니다. 난치병 어린이들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한국 메이크어위시(Make A Wish) 재단’의 초대 사무총장을 맡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제겐 생소한 분야였지만, 자원봉사자 선발 및 교육, 소원행사 감동연출 및 홍보, 그리고 기업으로부터 후원금 조달업무 등을 총괄하는 역할이어서, 저를 적임자로 평가한 것 같았습니다. 저에 대한 기대도 감사하고 좋은 일이어서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한국 메이크어위시 재단의 사단법인 인허가 설립부터 총 2년여를 봉사했는데, 미국재단으로부터 매뉴얼 교육을 받고, 소아암병원으로부터 소원 대상자를 추천을 받아, 최선을 다해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수십 건의 소원성취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때에 저는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약값이나 치료비를 지원하지 왜 소원성취인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꿈꿀 수 없는 어린이들에게 단 한 번의 소원은 무얼까? 인간에게 진정한 소원이란?’ 이런 물음을 통해 사회봉사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고, 이런 생각은 후일 중국에 와서도 나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새로운 큰 도전, 그리고 실패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깊이 생각한 것은, 돈 이상으로 의미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한류문화 관광사업’ 이었습니다.
이 사업을 선택한 이유는 첫째, 우리 문화를 사랑하고 상품화하는 것은 제가 잘할 줄 아는 분야였고, 둘째, IMF를 겪고 보니 국가적으로 달러 버는 일이 중요했는데, 이 일이 바로 그쪽 분야의 일이었고, 셋째는 우리나라 환율이 오르니, 이른바 인바운드(inbound, 한국 입국) 관광사업에 경쟁력이 높아졌던 시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 맞춰서 일을 시작하려던 계획이었는데, 여기저기 세상을 엿보다가 좀 늦어져서 2004년에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오는 외국 관광객들에게 한국적 감동을 추가로 전하며, 1인당 100불씩 더 쓰게 하자는 내부 경영목표를 세우고, 독창적 한류문화 전시 및 상품개발 사업을 기획합니다.
그리고 김포공항 국제선 제2청사 지하 1층에 약 1000㎡ 규모로 ‘한류스타 홍보관’을 제법 호화롭게 개장했습니다. 전시관 조성에만 총 9억 원을 투자했습니다. 당시 일본에 한류 붐이 있었고, 국제선 제2청사는 도쿄 하네다공항을 직행하는 항공편이 매일 16편이 있었습니다. 김포공항의 한국공항공사는 물론, 문화관광부, 한국관광공사 등의 기대와 관심을 한껏 받으며 사업을 자신감 있게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초기에 공동으로 지분투자를 약속했던 일본 도쿄의 파트너 관광사업자가 약속을 어기면서 틀어지기 시작했고, 개장 6개월 후부터 갑자기 일본의 한류 붐이 식으면서 위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한류 페스티벌 행사에도 참가하고, 말레이시아와 중국 등에도 직접 진출을 시도했습니다. 중국은 그때 처음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수익 다변화를 위해 국내 이벤트 기획사로도 사업영역을 넓혔습니다. 당시 오세훈 시장 시절에 서울시 장애인 예술제도 연출했고, 노인협회 주관의 세계노인문화예술제를 8개국을 초청하여 속초와 설악산에서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포천 양귀비 꽃 축제, 대기업 행사 등을 수주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불황과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개장 4년 만에 전시시설을 김포공항에 기부체납하면서 사업장의 문을 닫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부채청산을 위해 모든 개인 재산 정리를 했고, 가정도 파탄을 맞습니다. 돌이켜보면 뜻만 좋았지 저 자신이 자신감을 넘어 너무 교만했고, 위기대응 준비가 충분하지 못했고, 모두가 저의 부덕한 탓이었습니다.
어머님이 계시기에
졸지에 더 이상 갈 곳도 없고 반기는 곳도 없었습니다. 낮에는 대인기피증이 생겼고, 밤에는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습니다. 개인적으로 나쁜 생각도 참 많이 했었지만, 그때마다 어머님이 슬퍼하실 얼굴이 떠올라서 참고 참았습니다.
어머님은 당시에 큰아들이 고생한다고 제가 사드린 집을 처분하여 제게 마지막 힘을 보태주셨는데, 저는 그 기대마저도 부응하지 못하고 무너진 것입니다. 저 때문에 졸지에 어머님마저도 다시 사실 곳이 마땅치 않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사실은 그 몇 해 전부터 어머님은 몸이 많이 상하셔서 거의 거동을 못하시는 상태셨습니다. 한약방에서는 맥박도 약하고 보약도 효험이 없다고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업이 망하고 가정파탄마저 겪게 되자, 어머님은 기적처럼 아픈 몸을 털고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이유는, 갈 곳 없는 저의 끼니를 챙기시고 저의 옷을 세탁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정녕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말을 저는 그때 다시금 느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원인도 모른 채 제가 밤새 심한 복통으로 끙끙 나뒹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님은 두 손으로 저의 아픈 배를 계속 문지르시며, 당신은 평소 불교 신자셨는데 제가 믿는 하나님을 외치시며 ‘우리 큰아들을 제발 살려달라’고 밤새 우셨습니다. 너무도 아프고 길었던 그날 밤, 어머님의 그 뜨거운 눈물과 안타까운 외침 소리를 저는 결코 잊지 못합니다.
중국으로 떠나오다
그런 어머님을 뒤로하고 저는 중국행을 선택합니다. 당시 중국과는 비록 지지부진했지만, 고구려의 420여 년간 수도였던 집안시(集安市) 정부 관료들과 제가 고구려축제를 협의하던 중이었던 바, 거기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아니 그것을 핑계로 한국을 도망치듯 떠납니다. 어쩌면 아무도 없는 무인도(無人島)를 찾는 마음이란 표현이 더 솔직할 겁니다.
집안시의 고구려 프로젝트는 3개월 뒤 결국 무산됩니다. 제가 한국인이라는 이유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인이 중국에서 고구려를 거론하는 것은 그 자체가 금기시되는 일이었습니다. 집안시 정부 책임자도 처음에는 그 정도로 민감한 문제인 줄을 미처 몰랐던 것 같았습니다.
집안시 프로젝트는 무산되었지만 저는 한국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아무런 대책도 목적도 없이 그저 좀 더 중국에 머물기로 하고 지인이 있는 곳을 찾았는데, 그곳이 바로 단동시(丹東市)였습니다. 단동은 압록강을 사이로 북한 땅 신의주와 마주하고 있으며, 북한 대외무역의 약 80%가 단동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단동은 한마디로 우리말 백화점이었습니다. 당시 단동에는 중국 조선족이 1만 5000명, 북한 사람이 1만 명, 북한에서 태어난 중국 화교(華僑)가 1만 명, 요동대학교 한국·조선(북한)어과 학생들이 1000여 명, 그리고 한국인이 총 2000명 정도 살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대북사업 관계자이거나 선교사였습니다.
누구를 만날 일도 없고 아무 일과도 없는 저는, 매일 새벽 혹한의 추위에도 저를 채찍질하듯 하염없이 압록강 산책로를 걸었습니다. 새벽 교회당을 찾아 무릎 꿇고 홀로 숨죽여 울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밤, 강 건너 불 꺼진 북한의 신의주 땅을 멍하니 넋 놓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저의 ‘살아남아 버티기’의 중국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이 살고 있었네
그렇게 한두 달을 보내다 보니, 점점 주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도 저와 똑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여러 해 전 소설가 황석영이 북한을 다녀와서 쓴 책의 제목이었던 ‘사람이 살고 있었네’가 생각났습니다. 한인교회를 통해 한국 사람들을 접하고 단동한인회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제가 시간이 많으니 한인회 봉사를 제의받아, 당시 막 설립한 단동한국문화원의 부원장직(원장은 한인회장이 겸직)과 한인회 사무국의 사무총장으로 무료봉사를 시작했습니다.
단동한인사회는 대부분 1992년 한중수교 직후와 1997년 IMF 전후로 중국에 건너오신 소상공인 분들이 많았던 바, 아마도 저와 같은 대기업 출신의 사회 경험자가 드물어, 오자마자 졸지에 감투를 쓰게 된 것이었습니다.
봉사의 길에 들어서다
뜻밖에 할 일이 생긴 저는, 대기업에서의 기획력과 이벤트 기획사 대표로서의 경험을 되살려 많은 일들을 추진했습니다.
우선 요동대학교 한국·조선어과를 찾아서는 한국어 말하기 대회와 글쓰기 대회, 그리고 합동 문화공연을 매년 추진했습니다. 재외동포재단에는 기획서를 보내 한인회관 건축지원금을 50% 받고 나머지는 현지 모금하여 3층짜리 아담한 단동한인회관을 건립했습니다.
한편, 장기체류 단동 한인들의 대부분이 현지인과 결혼한 다문화가족들이었는데, 이들에 대한 지원체제가 없어, 문화원 내에 다문화가족 복지센터를 만들고, 당시 단동을 방문한 국회 통일외교안보위의 박선영 국회의원님과 심양총영사관의 협조를 얻어 다문화가족 합동결혼식과 단체 한국 신혼여행을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족학교에 가보니, 70% 이상 대부분 학생들은 부모가 한국에 돈 벌러 가서 없는 결손 가정이거나 조부모 위탁상태였고, 소학교를 졸업해도 별도 우리말도 잘 못하고 중국어도 잘 못하는 언어수준에다, 문화예술 방면 재능교육 발견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비록 몸은 건강해도 스스로는 아무것도 꿈꾸지 못하는 조선족 아이들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문화원에서 조선족 학생들을 대상으로 우리말 교육과정을 시작했고, 해마다 한국어 말하기 대회를 개최하여 수상자들에게 한국문화체험여행을 제공했습니다. 제가 단동에 머문 4년 동안 총 140여 명의 학생들이 한국을 방문했는데, 여행비용은 경기문화재단과 한국 지인들의 개인적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조선족 학생들의 예술적 잠재력을 끌어내기 위해, 나아가 그들 스스로가 무언가를 꿈꾸게 하기 위해, 제가 예술단장이 되어 직접 학교에 가서 학생 67명을 선발하여 ‘압록강 청소년예술단’을 공식 발족하였습니다.
그 뒤 8개월간의 훈련 후에 5성급 호텔에서 1000여 명의 학교관계자과 학부모들을 모시고 ‘내 마음의 북두칠성’이라는 제목의 예술단 창단공연을 성공리에 추진하였습니다. 대부분 첫 무대를 경험하는 것이라 감동은 컸고, 학교를 향한 후원금도 쏟아졌고, 부모님들은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심양으로 진출하다
이런 저의 활동들이 인근 지역에도 소문이 났던 모양입니다. 심양총영사관에서는 당시 조백상 총영사님의 파격적 배려로 저를 총영사관의 경제문화행사 기획자 겸 사회자로 발탁해서 일을 맡겼습니다.
마침 한중수교 20주년도 겹쳐서, 각 도시마다 한중우호의 밤 행사가 있었고, 중국 동북3성(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27개 대학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 말하기 대회 및 K-Pop 경연대회’, 그리고 한국 국경절(개천절) 기념 총영사관 한복패션쇼 등의 행사를 연출했습니다.
그러면서 항일유적연구소장과 동북3성 한국인연합회 사무총장을 맡게 되어 동북3성 최대도시인 심양으로 진출하게 됩니다. 심양은 단동의 10배 규모로, 외곽까지 도농(都農)인구 합계가 총 2000만 명인 대도시입니다.
중국 동북3성에 와서 알게 된 사실은, 전 세계 한민족 항일유적지의 3분의 2가 중국에 있고, 중국 항일유적지의 3분의 2가 동북3성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인은 물론 조선족들도 우리의 항일역사에 대해 잘 모르고, 항일유적지 찾기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항일유적연구소였습니다.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의 항일역사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저는 연구소장으로서 연구원을 모집하고, 안중근 13일간의 이동경로와 거사일정을 뒤따라가 보기도 했고, 윤동주의 생가, 신흥무관학교의 발자취 등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많은 항일열사들의 발자취도 찾아다니며 공부했습니다.
그런 중 우리나라 3대 독립선언 중 하나이자 최초의 독립선언인 ‘무오독립선언’의 내용과 의미를 분석, 발굴하여, 심양총영사관과 국가보훈처의 협조 아래 저희 항일유적연구소가 주관하여, 중국 현지 최초로 ‘무오독립선언 기념식’을 개최하였습니다. 저의 가장 큰 보람 중 하나인 이 행사는, 민주평통 선양협의회의 주관으로 지금도 8년째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중교류문화원을 설립하다
대도시 심양에 와서 저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 제가 잡다하게 벌여놓은 문화예술 봉사활동과 조선족학교 지원, 그리고 항일역사연구와 유적지 방문활동 등을 종합하여,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시스템과 공간 확보의 필요성이 커진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한중교류문화원’을 설립 추진합니다.
한중교류문화원은 심양의 코리아타운 지역인 서탑가 인근에 약 2000㎡ 규모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 2014년 7월 19일 설립하였습니다. 자체적으로 130여 석 규모의 강당을 갖게 된 문화원은 많은 교육활동과 문화예술 공연행사를 연출합니다. 그중에 최고의 대박상품은 ‘실버대학’입니다.
제1기 실버대학은 2014년 가을에 약 15주의 과정으로 진행되었는데, 50세 중반부터 80세 전후의 조선족 어르신들 93명이 첫 신입생으로 입학했습니다. 노래교실, 역사문화특강, 10년 젊어지기 미용특강, 핸드폰 사용법, 기본생활영어, 도전 골든벨, 그리고 졸업여행에 이어 사각모와 졸업가운 입고 졸업식하기 등의 행사에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실버대학은 제가 문화원장으로 재임한 약 3년 반 동안 총 4회가 이어졌습니다.
한편, 실버대학은 제가 특별한 의미로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한국에 두고 온 저의 어머님을 생각하며 만든 행사입니다. 사실 한국에 있을 때, 어머님의 집에 가면 마음으로는 늘 눈물겹게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우리 세대 장남들이 그러했듯이 다정다감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무뚝뚝한 아들이었습니다.
사실은 어머님과 재미있게 놀아드리고도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죄송스러움과 한(恨)을 실버대학을 통해서 조선족 어머님들께 재롱도 부리며 조금이나마 풀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일까요? 실버대학 어머님들의 공통된 감사인사 표현은 “우리 아들도 못 해준 호강을 실버대학에서 받았네요, 너무 행복합니다!”였습니다. 저도 응답합니다. “아닙니다. 행복하시다니, 제가 더 고맙습니다.”
그밖에도 한중교류문화원에서는 항일사진전, 어린이 K-Pop대회, 한국가수 김광석 가요제, 중국가수 등려군 가요제, 장예모 감독 영화제, 한국영화제, 조선족학교 돕기 프로젝트, 청춘콘서트, 사물놀이 강습, 한국 만화도서관 개관, 한중친선 배구대회와 탁구대회 등의 행사를 연출하였습니다.
동주학당, 동북에 물들다
그렇게 3년 반의 초대원장 자리를 마치고, 조선족에게 한중교류문화원 2대 원장을 물려주었습니다. 경영의사결정 과정에서 오해와 어려움도 있었고, 제가 너무 강하게 한국 문화를 중국 조선족들에게 전파한다는 정치적 오해가 깊어져서, 부득불한 조치였습니다.
대신에 저는 조선족 지식인들과 함께 윤동주의 이름을 딴 ‘동주학당(東柱學堂)’이란 모임을 만들고, ‘한중 문화융합연구소’라는 개인연구소를 차린 후, 다시 독립하여 조선족들을 향한 집중 봉사활동을 재개합니다.
동주학당은 민족시인 윤동주를 한민족 디아스포라(Diaspora)의 대표인물로 생각하여 ‘한민족 디아스포라 사랑방’을 추구하는 가운데, ‘찾아가는 민족문화원’을 표방했습니다.
우선 심양에서 ‘윤동주 100주년 기념 시낭송음악회’를 연출했고, ‘동주학당, 대련에 물들다’, ‘동주학당, 치치하얼에 물들다’, ‘동주학당, 영구에 물들다’ 등 동북3성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찾아가는 민족문화원’의 면모를 과시했습니다. 또한 심양 남부 소가툰 지역에 ‘윤동주 문화원’을 건립하여 실버대학도 성황리에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거의 최북단으로, 3만 명의 조선족이 거주하는 흑룡강성 치치하얼에도 ‘치치하얼시 조선족문화원’ 설립을 지원하고, 제가 명예원장을 맡아, ‘치치하얼시 조선족 아리랑 예술제’ 및 대동제를 개최하였습니다.
이어 거기서도 같은 마음으로 실버대학을 진행했는데, 제가 중국에서 총 6번째로 진행하게 된 ‘치치하얼 조선족 실버문화대학’은 무려 1200km 거리(심양-치치하얼)를 3개월간 매주 고속열차로 달려가서 진행한 것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것의 크기는, 자신의 재물과 시간과 열정을 투자한 것에 비례한다는 말을 저는 온전히 믿습니다. 치치하얼이 제겐 그런 곳입니다. 그곳에서 만난 조선족 동포 분들이 제겐 그랬습니다.
한중 갈등에 아파하다
그렇게 해서 어느 새 10여 년이 흘렀고, 50세에 길을 잃고 도망치듯 중국에 왔는데, 뜻밖에 어쩌다 길이 되어버린 조선족 대상 봉사활동을 하다, 어언 환갑을 지나 올해 63세에 이르렀습니다.
앞에서 제가 제법 많은 일들이 성취되었음을 자랑하듯 나열했는데, 그러나 돌이켜보면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고, 어렵고 힘든 문제들은 지금도 계속 발생되고 있습니다.
특히나 한중관계가 어려워지면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숨이 막힐 만큼 생존에 위협을 느낍니다. 평소에도 역사문제는 중국의 동북공정과 부딪치며 민감해서 매우 조심해야 했지만, 설상가상 사드 사태 등 정치적으로 꼬이면 한국인은 택시 탑승을 거절당할 만큼 배척됩니다. 지금도 한중관계가 소원해지면 겁부터 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동주학당이 야심차게 윤동주문화원을 설립했으나, 윤동주의 국적문제가 불거지면서 설립 1년 만에 활동을 접어야 했고, 개인적으로는 문화간첩으로 오해받아 특정 지역에 출입이 막힌 적도 있었습니다.
살펴보면, 중국인들은 조건 없는 봉사를 믿지 않습니다. 조선족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분명히 숨겨진 다른 목적이 있다고 의심합니다. 그리고 문화는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침투 등 정치적인 오해로 몰면, 어느 친구도 나서서 저를 변호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게 중국이고 그게 조선족의 입장임을, 너무 아프고 안타깝지만 이제는 이해하고 인정합니다.
한편, 한때는 한국 정부도 저를 오해해서, 제가 북한과 중국의 국경지역인 압록강 지역을 자주 오고가니까, 인천공항에 입국할 때마다 혹시 친북간첩이 아닐까 조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어쩌다 한국과 중국이 모두 저를 의심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있었습니다.
흔히 우리나라 외교를 ‘안미경중’(安美經中)이라고 말합니다. 안보는 미국이요, 경제는 중국이라는 뜻입니다. 양쪽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다리기 외교만큼, 재중 한국교민들의 마음도 불안하고 위태롭습니다. 어찌되었거나 서로 신뢰하고 미래지향적으로 협조하는 훈훈한 한중관계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조선족 전성시대’가 온다
제가 중국에서 만나본 조선족들은 현재 중국인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아울러 한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그 내면을 살펴보면 어디 가도 비주류요, 이방인처럼 살고 있습니다.
1950년대 초에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인 조선족으로 편입되어, 그동안 중국인으로 산 세월이 미처 70년이 되지 않습니다. 아직 중국의 주류인 한족들과의 융화가 문화 차이로 쉽지만은 않고, 마찬가지로 모국인 한국에 와서도 여전히 차별받는 비주류요, 이방인입니다.
현재 조선족 부모와 자녀들은 매우 고민합니다. 중국에서는 점차 조선족에 대한 우대조치가 사라지고, 얼마 전 조선족학교를 향해 앞으로 조선말이 아닌 중국어로 교육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그동안 조선어로 시험 보아 다소 유리했는데, 앞으로는 대학시험도 중국어로 쳐야 합니다.
그러자 조선족 유치원과 학교에는 학생들이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빨리 중국 한족학교로 옮겨가야 그나마 중국 학생들을 따라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조선족 학생들이 한족 학생들과 경쟁에서 이기기는 어렵습니다. 대학을 나와도 갈 곳이 거의 없습니다.
얼마 전 조선족 대학생연합회 대표들과 대화했는데, 그들의 대다수가 원하는 꿈이 커피숍이나 식당을 꾸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그 외에는 별다른 기회가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 조선족들에게 저는 이제 곧 ‘조선족의 전성시대’가 온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입니다. 이는 굳이 정치적 통일이 아니더라도, 상호간 화해협력을 기반으로 북한이 경제적으로 개방하는 시대를 의미합니다. 이때가 되면 조선족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바, 이를 잘 준비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외칩니다. “조선족은 어디 가나 비주류요 이방인이 아니라, 향후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에 모두가 필요로 하는 핵심인재들입니다. 그래서 하늘이 미리 점지(點指)하고 100년 전부터 중국 땅에 선발대로 보낸, 최고의 일꾼들입니다.” 저는 이런 점들을 우리 조선족들에게 분명히 가르쳐주려 합니다.
저의 그런 주장의 근거는 세계적인 투자자 짐 로저스의 분석에 기초합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는 제 인생 이모작의 꿈도 거기서 같이 출발합니다.
20년 전부터 중국의 획기적 성장을 예견했던 짐 로저스는, 이제 일본의 시대는 끝이 났고, 앞으로는 북한의 개방을 주목하라고 말합니다. 북한의 개방은 분명 대한민국과 한민족의 미래에 가장 큰 기회가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합니다. 저도 이 주장에 100% 공감하며 진실로 기대하며 설렙니다.
‘조선족 희망전도사’의 꿈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중국에서도 가끔은 강의를 할 기회가 생깁니다. 대부분은 조선족단체 모임이고, 한국국제학교 학생들에게도 할 기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공통적으로 빠지지 않고 제가 설파(說破)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조선족이여,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의 실무주역이 되자!’ 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독일 통일 이후의 상황에 주목합니다. 1989년 서독과 동독이 통일할 때 양국의 경제력 차이는 8:1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난 32년간 동독의 발전을 위해 엄청난 투자를 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서독과 동독은 아직 2:1 이상의 격차 상태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과 북한은 3년 전 기준으로 경제력 차이가 무려 44:1입니다. 이 격차를 해소하자면 적어도 향후 50년 이상의 투자와 인적교류가 무조건 필요합니다. 그때에 필요한 실무인력으로 조선족보다 더 경쟁력 있는 집단은 없다고 저는 감히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약 북한이 문을 열면, 서울 청년들이 평양 청년들과 별 갈등 없이 일할 수 있을까요? 저는 매우 어렵다고 봅니다. 당장에 한국인과 조선족도 문화인식 차이가 작지 않은데, 남북한 간에는 불가피하게 갈등해소 시간과 비용이 엄청나게 많이 소요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한국의 자본주의도 충분히 알고, 중국의 공산주의 체제에도 잘 적응하고 있는 조선족만의 실무역할 영역이, 다가올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에 차별적 블루오션(Blue Ocean)으로 분명히 생겨날 것이라 저는 판단합니다.
앞으로 적어도 50년 동안은 조선족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활짝 열릴 것입니다. 그러하니 조선족이라면, 기본적으로 우리말은 무조건 똑똑히 배워두고, 능력이 되면 한국의 기술이나 장점을 잘 공부해두라는 조언을 조선족 청년과 부모들에게 진심을 다해 전해줍니다.
그렇게 강의하며 말하고 다니다 보니, 일부 조선족들이 제게 붙여준 별명이 ‘조선족 희망전도사’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별명이 참으로 과분하지만 제 마음에도 흡족하게 스며듭니다. 더 노력해서 진짜 ‘조선족 희망전도사’로 살아보자는 꿈도 생겨났습니다.
대륙에서 길을 묻다
나라 잃은 슬픔 속에서 민족시인 윤동주는 그의 시 ‘길’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게 나아갑니다.’ 아마도 나이 50에 직업과 가정과 신앙의 동반 몰락을 경험하면서 도망치듯 중국으로 넘어온 때의 제 심정과 조금은 닮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운을 차려, 작고 소박하지만 같은 민족으로서의 안타까움과 애정을 담아, 혹시라도 저의 재능을 필요로 하는 곳에, 특별히 조선족들에게 아무 조건 없이 달려갔던 중국에서의 지난 10여 년을 정리해봅니다.
중국의 대문호 노신(魯迅) 선생이 청년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말했던, ‘처음부터 길은 없었다. 사람들이 다니면서 비로소 길이 되었다’는 구절이 생각납니다. 처음엔 미처 길인 줄 몰랐는데 저도 어찌어찌 십여 년을 지나고 보니, 이젠 나름 하나의 길처럼 느껴집니다.
제 몸 하나 추스르지 못했던 한심한 존재가, 어쩌다 타국 땅에서 문화 봉사를 통한 희망전도사로 모질게 살아남아 있습니다. 30~40대의 젊고 풍요로울 때 그렇게도 갈구했으나 찾지 못했던 인생의 참 의미와 가치를, 어리석게도 60을 훌쩍 넘어 늙고 가난해지면서 비로소 조금씩 깨닫고 배워갑니다.
그동안 중국에 와서 개인적으로 절망하며 힘들었을 때, 제게 특별한 위로가 되어준 시(詩)가 있습니다. 정호승(鄭浩承) 시인의 ‘봄 길’입니다.
봄 길
-정 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 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김영식이 있다’
이제 고백합니다. 정호승 시인의 ‘봄 길’은, 제가 대륙에 와서 길을 묻다가 십 수년 만에 찾아내어 저 스스로에게 답한 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저는 시의 마지막 구절 뒤에 한 줄을 더 보태어, ‘김영식이 있다’를 다짐처럼 홀로 외치기도 했습니다.
오늘도 길을 잃고 다시 길을 찾는 분들에게 지난날 저의 절망도 작은 위로 중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깜깜한 절망 속에서 위로를 받았듯, 많은 분들이 그랬으면 좋겠고, 앞으로 살면서 서로에게 작으나마 위로가 되고, ‘봄 길’의 내용처럼 희망이 되어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하늘이 허락하셔서, 제게도 ‘인생의 이모작’이 가능하다면, 우선은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에 무한 감사하며, 이제부터는 중국 땅에서 한 핏줄 동포를 향한 희망전도사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나아가 더 축복해주신다면, 30여 년 전 제가 아들 이름을 ‘금강산(金剛山)’이라 지었던 그 기도의 응답까지 받아서, 북녘의 아버지 고향 땅에 달려가 입 맞추고, 거기 그분들을 뜨겁게 보듬다, 그곳에서 그분들과 함께 묻히고 싶습니다. 이런 저의 마지막 소망이 너무 큰 욕심일까요?
•수상소감 - 대상 미니자서전 김영식
“중국 조선족 100년의 이야기를 중국판 처럼 작품으로 써 세상에 알리겠다”
•대상 수상을 축하드린다. 수상 소감은?
저는 7살 어릴 적 시골에서, 코 흘리게 손수건을 왼쪽 가슴에 달고 소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학교 가는 게 너무너무 좋아서,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1학년을 마치는 날, 담임선생님께서는 제 이름을 호명하시며 뜻밖에 1등 우등상장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태어나 받은 ‘첫 상(賞)’이었습니다.
우등상 상품은 공책 한 권과 연필 두 자루였습니다. 그걸 들고 낮은 언덕의 신작로 길을 뛰어 어머니께로 달려갈 때, 저는 얼마나 가슴이 뛰며 기뻤는지 모릅니다. 만나는 모든 분들에게 막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로부터 어언 56년이 지났습니다. 어쩌면 ‘마지막 상(賞)’일지도 모르는 이번 상이 저에게는 그때만큼이나 기쁩니다. 그때만큼이나 설렙니다.
저에게 이렇게 설레고 행복한 순간을 선물로 주신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의 주최한 브라보와 신한은행의 관계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인사 드립니다.
이번에 제가 쓴, 미니 자서전 는, 어쩌면 교만했던 인생의 부끄러운 고백이고, 뻔뻔한 반성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특별히 큰 상을 주신 뜻은, 아마도 이 두 가지가 아닐까 저 나름 생각해 봅니다.
하나는, 다시 한 번 힘을 내서 ‘인생 이모작’에 도전하라는 따뜻한 격려로 느껴집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기대만큼 열심히 새로운 길에 도전하며 살겠습니다.
또 하나 이번 상은, 제 글쓰기에 대해 숙제를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글쓰기를 통해, 세상에 조금이나마 ‘선한 영향력을’ 보태라는 명령입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늘 정직하고 공감과 위로를 주며, 보존할 가치가 있는 글을 쓰겠습니다.
다시 한 번, 큰 상을 주신 브라보와 신한은행에 감사드리며, 끝으로, 조국 대한민국의 조속한 코로나 승리를 기도하고 응원하겠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응모 배경이나 동기는?
저는 현재 중국 심양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생활했는데, 코로나로 인해 지난해 설 명절을 지내고 중국에 온 후, 한국에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지난해 말에는 운동 중 아킬레스건이 파열되어, 중국에서 수술을 받고 3개월을 치료한 후 현재는 재활 중입니다.
한국의 가족도 한국의 소식도 모두 그립습니다. 한국뉴스를 검색하다가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을 발견했습니다. 그중에 특별히 ‘50+’라는 표현에 많은 생각이 스쳤습니다. 제가 사업에 실패하고 도망치듯 중국에 온 것이, 바로 50세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타향살이 어언 13년이 흘러, 갑자기 코로나로 멈춘 일상 속에서 지나온 저의 인생을 되돌아 반추해보는, 귀한 시간을 가져 보게 되었습니다. 뜻밖에 좋은 기회를 주셔서 정말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시니어 공모전을 통해 ‘인생 이모작’도 새로이 꿈꾸게 되었습니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글을 잘 쓰기 위한 노력이라기보다는, 기왕에 제가 쓴 글이 독자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며 더 잘 읽히면 좋겠다는 차원에서의 노력은, 제가 많이 부족해서 앞으로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평소 저의 글은 딱딱하고 설명형입니다. 재미없는 제 성격과 꼭 닮았습니다. 게다가 글쓰기로 처음 상을 탄 것이 대학 때 논문공모대회였고, 대기업에서 기획담당자였기에 더더욱 저의 글은, 사사로운 감정이 담기지 않은, 그래서 재미와 감동이 ‘1’도 없는 필법(筆法)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개인적으로 지난 10여 년간, 중국에 와서 여러 종류의 한글 잡지를 만들고 배포했는데, 주된 독자층이었던 중국조선족들은 한국인들에 비해 우리말 어휘력이 30% 수준을 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글은 그저 수준 높고(?) 어려운 글이었습니다.
로 유명한 미국작가 훼밍웨이가 어느 회고문에서 자신의 독자로부터 받은 편지 하나를 소개했습니다. 전쟁 파병(아마도 한국전쟁) 중인 미군병사가 자신의 소설을 읽고 나서, 어려운 단어가 없어 ‘사전(辭典)찾기 ’없이도 100% 공감하며 큰 감동을 받았다는 감사편지였습니다.
저 역시, 쉽고도 감동적인 글, 그리고 오래 간직하고픈 글을 쓰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겠습니다.
•글을 쓰는데 도움을 준 멘토나 동기부여 이유가 있다면?
직접적인 멘토는 아니지만, 제가 특별히 닮고 싶은 작가가 두 분이 있습니다. 한 분은 한국의 유명한 시인 류시화이고, 또 한 분은 의 저자이자 인류학자인 미국의 루스 베네딕트 교수입니다.
시인 류시화는 개인적으로 저와 고등학교 동기동창입니다. 본명은 안재찬이며, 대광고등학교 30회로, 고교 2,3학년을 같은 반에서 공부했습니다. 경희대학교 2학년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당선된 그는, 인도 여행을 다녀와서 쓴 수필집 및 시집 등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인기작가가 되었습니다. 그의 글은 쉬우면서도 깨달음을 줍니다. 저도 글을 쓴다면 그런 면을 배우며 닮고 싶습니다.
다음은 미국의 여성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 교수인데, 제가 단동에서 항일유적연구소장을 할 때, 그분의 저서 을 읽었습니다. 2차 대전 전쟁을 종료하기 직전에 미국이 일본에 대해서 분석한 책으로,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인들에게 일본과 일본인 분석에 관한 제 1의 필독서입니다.
같은 패망국인 독일과는 달리, 일본은 왜 끝까지 반성하지 않는가에 나름의 분석이 명쾌합니다. 일본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상태에서 쓴 글이라는 점도 놀랍고, 냉철한 대안 제시가 전후(戰後) 미국과 일본의 관계설정에 기준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대단히 유효합니다.
일본에 대해 비판만하고 흥분만하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줄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나는 중국인에게 대한민국에 대해 얼마만큼 설명할 수 있는가, 또는 한국에 와서는 중국에 대하여, 그리고 제가 중시하는 중국 조선족에 대해서, 나는 얼마만큼 본질을 명쾌하게 공부했는가에 대해 통렬하게 반성하게 하는 책입니다. 중국판 같은 글에도 도전하고 싶은 이유입니다.
•수상을 계기로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
얼마 전 미국 아카데미상에서 영화 가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70년 전 조선인의 미국 이민사를 소재로 한 영화인데, 이 영화를 보면서 저는 제 주변의 중국조선족들을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대부분 100년 전후로 대륙에 이주해 왔고, 영화 미나리 이상의 휴먼 스토리가 얼마든지 있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향후 중국 조선족 100년의 이야기를 중국판 처럼 작품으로 써서 세상에 알리는 것도, 이번 상(賞)을 통하여 저에게 주신, 귀한 소명 중 하나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감사와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많은 사람이 있지만, 딱 한사람만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저의 여동생 ‘김경희’를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교만한 실패와 방황, 그리고 대륙에서 길을 묻는 지난 10여 년 동안, 개인적으로는 부끄럽게도 맏아들로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저희 어머님께 제가 한 때는 자랑이던 아들이었지만, 이제는 걱정을 끼치는 아들로 살고 있는데, 그 빈자리를 저의 여동생이 말없이 채워주고 있습니다.
여동생 김경희는 제 인생에서 가장 미안하고 가장 고마운 존재입니다. 이번에 받은 저의 수상이, 제 여동생에게도 작으나마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탓에 외출을 삼가던 61세 A 씨는 여름을 맞아 갑자기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하지만 막상 휴가를 가자니 걱정부터 앞선다. 텅 빈 집에 혼자 있을 반려견 감자가 마음에 걸려서다.
반려견의 안전을 위해서는 창문까지 꼼꼼하게 다 닫고 떠나고 싶지만 계속되는 불볕 더위에 그랬다가는 큰 일이 생길 것만 같다. 실제로 더위로 실내 온도가 올라가면 반려견 감자가 탈진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창문을 열어두면 안전을 보장하기 힘들어진다.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부탁해봤더니 “손주가 털 알레르기가 있다”거나 “그날 급한 일정이 있다”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이처럼 펫팸족(Pet+ Family, 반려동물을 가족으로 여기는 사람) 시니어들은 반려동물이 신경 쓰여 휴가를 마음 놓고 떠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지인 찬스’를 쓸 수 있는 환경이면 다행이지만 돌봐 줄 지인이 나타나지 않을 때는 곤란하다. 이런 상황에서도 휴가나 여행을 떠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 강아지를 부탁해! 펫시터
장기간 외출 시 가족 같은 반려동물이 안전하고 편안한 시간을 보낼 방법이 있다. 바로 ‘펫시터(pet+sitter·애완동물을 돌보는 사람)’ 고용이다.
펫시터를 구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반려동물 커뮤니티 게시판을 이용할 수 있다. 중고거래 애플리케이션(앱) 당근마켓에서도 펫시터를 구하는 글을 종종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직접 펫시터 알바를 하겠다고 자청하는 사람들의 글도 다수 올라온다.
최근에는 펫시터와 반려동물 상황을 처음부터 끝까지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앱도 나왔다. 산책 시 반려동물의 목에 무리를 주지 않는 이중 산책 줄을 착용한다거나 기상악화로 산책이 어려울 때는 정해진 프로그램에 맞춰 실내놀이를 진행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다만 주의사항이 있다. 펫시터가 반려동물 훈련사 자격증, 미용사 자격증 등 관련 자격증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돌봄 서비스를 받을 반려견, 반려묘만의 건강 상태와 습관, 개성 등을 잘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다.
애견 동반 호텔도 속속 등장
반려동물을 직접 휴양지에 데려가는 방법도 있다. 위탁 시설에 맡길 수도 있지만 반려동물이 반려인 없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힘들어하거나 혹시 모를 사고가 걱정된다면 애견 동반 호텔을 추천한다.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반려 인구'가 급증하면서 호텔업계도 관련 상품을 다양하게 출시하고 있다. 강원 켄싱턴리조트 설악밸리가 내놓은 펫 전용 상품은 9월 30일까지 주말 예약이 모두 끝났다. 패키지에는 펫 유모차, 펫 보양 간식, 펫케어 룸, 펫 웰컴키트 같은 다양한 서비스가 포함돼 있다.
그랜드 조선 부산이 선보인 반려동물 동반 패키지는 6월 예약 건수가 올해 1월보다 6배가량 증가했다. 콘래드 서울과 조선호텔앤리조트 같은 서울 특급호텔들도 다양한 '펫캉스' 상품을 선보이고 있다. 반려동물용 고급 유모차, 드라이 룸 등을 이용하면서 멀리 떠나지 않고도 개인적인 휴식을 취하고자 하는 반려인을 타깃으로 했다.
반려동물을 홀로 집에 둔다면 이렇게
부득이하게 반려동물을 홀로 집에 두고 가야 하는 시니어들도 있다. 이럴 때는 강아지가 혼자 있는 시간이 1박 2일을 넘기지 않도록 하는 게 좋다. 반면 고양이는 하루나 이틀이면 환경을 바꾸는 것보다 자신의 공간에 머물도록 하는 것이 낫다.
끼니를 잘 챙겨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고양이들은 집사가 집을 비우면 몇 날 며칠을 식음을 전폐하는 사례도 있어 떠나기 전에 캔 같은 걸로 미리 영양을 보충해 주는 것도 방법이다. 화장실 모래도 넉넉히 쌓아두고, 물그릇과 사료는 여분을 준비해 집안 곳곳에 놓아두면 좋다.
강아지는 사료를 한꺼번에 먹어버릴 염려가 있으니 타이머가 달린 자동 배식기 사용을 추천한다. 급식기는 바닥이 뜨거우면 좋지 않으므로 바닥에 카펫 등을 깔아 일정 온도를 유지해 준다.
반려동물을 배려해 외출 시 텔레비전이나 실내등을 켜두기도 하는데, 이럴 때는 화장실 조명처럼 간접 조명을 이용하는 편이 좋다. 모든 준비를 철저하게 마쳤다고 해도 유비무환의 자세로 주변 지인에게 일정 기간마다 한 번씩 살펴보도록 부탁을 하면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