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마와 마주친 오철근(77세) 어르신은 오로지 집 주위에서만 맴돌다가 10년의 세월을 속절없이 보내버리고 말았다. 뇌경색으로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대인기피증에 시달렸고 삶에 대한 의미는 퇴색되어 하루하루를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열면서 10년 만에 외출을 했다. 영영 잃어버릴 수도 있는 시간들을 다시 찾게 해준 외출이었다.
운동 잘하고 공부도 잘했던 핸섬 보이
청소년 시절의 어르신은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는 핸섬 보이였다. 그의 부친은 지방의 기초의회의원이었다. 어르신은 어린 시절 스케이트를 아주 잘 탔는데, 당시 지방에서 스케이트를 탈 정도면 주위의 부러움을 살 만한 집안이었다. 그 시절 농촌은 몇몇 집을 빼고는 다 고만고만한 살림이었다. 겨울철, 꽁꽁 언 논배미에서 썰매는 타는 아이는 많았지만 스케이트를 탈 수 있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특별히 선택된 아이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었다. 운동이면 운동 공부면 공부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았고 외모까지 출중했으니 여학생들에겐 늘 선망의 대상이었다. 어르신에게 청소년 시절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날들이었다.
한때는 잘나가던 스피드스케이팅 선수
당시 부친은 장남의 될성부른 떡잎을 알아보셨는지, 아니면 유난히 운동신경이 뛰어난 아들의 소질을 파악했는지 스케이트를 선뜻 사주셨다. 은빛 스케이트 날을 번쩍이면서 얼음을 가르던 그는 고등학교 때 전국체전 경기도 대표로 출전해 입상을 했고, 상을 탈 때마다 운동장 조회 때, 전교생 앞에서 교장선생님의 칭찬을 듣곤 했다.
군 생활도 운 좋게 카투사로 했다. 당시 카투사에게는 일반 군대와는 다른 환경을 제공했다. 어르신은 미군들과 복무하면서 오로지 영어에 매진했다. 통역을 할 정도의 실력은 제대 후 사회생활에 많은 도움이 됐다. 군 생활을 하면서도 전국체전이 열리면 경기도에서 보낸 협조 공문으로 도 대표 선수로 출전하곤 했다. 하계체전 때는 육상선수로, 동계체전 때는 도 대표 스케이팅 선수로 활약했다. 스케이트는 나이가 들어서도 자주 즐기는 운동이었다. 칠십에 가까운 나이에도 태릉은 물론 잠실 롯데월드 빙상장으로 스케이트를 타러 다녔다. 세월이 한참 흘렀는데도 그의 스케이트 실력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스케이트만 신으면 펄펄 날았다. 어르신은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다. “술 먹다가 술자리에서 죽거나 얼음판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다가 쓰러져 죽으면 여한이 없겠다”는 말을 할 정도로 술과 스케이트를 사랑했다.
스물한 살 어린 나이에 결혼
지병이 있던 아버지의 병치레로 장남인 그는 스물한 살 어린 나이에 이웃 마을에 살던 세 살 아래 소녀와 결혼을 했다. 어른들의 권유 때문이었다. 이른 결혼 후 아내는 곧바로 임신을 했고, 그 사실도 모른 채 그는 군대에 입대하고 말았다. 제대 후 집에 돌아오니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떡두꺼비 같은 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가 아빠라고 부르며 엉금엉금 다가오면 어른들 눈치가 보며 슬며시 자리를 피하곤 했다. 그 시절에는 자식 한번 제대로 예뻐해주지도 못하고 안아주지도 못한 채 살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지난 시절을 돌이킬 때마다 그는 자식들에게 사랑 표현 못하고 산 걸 제일 안타까워했다.
잃어버린 10년
60대 중반이 막 지나던 어느 날, 머리에 열이 오르고 뜨거웠다. 그게 뇌경색의 전조증상인지도 모른 채 방치하다가 결국 병원으로 실려 갔다. 중증의 뇌경색이었다. 좌측 팔과 다리가 마비됐고 음식물을 씹어 삼키는 게 어려운 삼킴 장애까지 발생했다. 어르신 건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잘 먹는 것’인데, 제대로 삼키지 못했으니 잘 먹지도 못했다. 당연히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 여기에 심리적 상실감까지 더해져 우울증이 생기면서 삶의 의지를 잃어갔다.
지독한 뇌경색은 어르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매일매일 빨리 죽게 해 달라고 빌었다. 자살을 생각하던 하루는 실행에 옮겼다. 안방에서 전깃줄로 목을 매고 침대에서 뛰어내렸는데 지지대가 부러지는 바람에 돌침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혔다. 쿵! 소리에 놀라 달려온 둘째 아들에게 발견되어 119구급차로 병원으로 실려 갔다. 미수에 그쳤지만 이후에도 자살 충동이 시시각각 그를 엄습했다.
몸무게 51㎏의 다소 왜소한 체구는 병마로 참혹했다. 한때 펄펄 날던 몸이 한순간에 편마비가 되어 초라한 모습으로 변해버렸으니 그 실망이 오죽했을까. 대인기피증으로 만나는 사람도 없이 하루를 버티다가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 다시는 아침이 오지 않기를 수없이 기도했다. 이렇듯 삶이 지난(至難)했으니 식구들에게, 특히 아내에게 짜증을 부리기 일쑤였다. 아내는 명일역 근처에서 혼자 노점상을 하면서 생계를 책임졌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장사를 마치고 고단한 몸으로 들어온 아내는 온종일 말 한마디 못한 채 보낸 남편의 스트레스를 다 받아줘야 했다. 어르신이 막걸리라도 한잔 마신 날에는 늦은 밤까지 아내를 앞에 앉혀놓고 술주정을 했다. 가부장적인 사고와 직설적인 표현은 자녀들도 힘들게 했다. 2남 1녀의 아이들은 아버지의 모습이 보기 싫어 일찌감치 독립해 나갔다. 관계는 점점 더 소원해졌고 몸이 불편한 어르신의 외로움은 점점 깊어졌다.
진심어린 대화를 통해 위로를 받다
2020년 초에 오철근 어르신을 만났다. 편마비의 불편한 몸과 피폐해진 정신으로 자존감이 한없이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삶의 의미를 잃은 채, 막걸리를 마시며 하루하루를 견디는 어르신에게 도움이 필요해 보였다. 마음도 삭막하게 닫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심으로 위로를 건네는 나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더니 말문이 트이기 시작했다. 청소년 시절 문학에 관심이 많았고 역사에 대한 식견도 높아 한국의 고대사를 포함해 근현대사에 해박했다. 나와 대화가 통해서인지 어르신은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10여 년간 잊고 살았던 스케이팅에 대한 추억도 하나하나 끄집어냈다. 어르신은 잠실의 123층 롯데월드타워가 건설되었다는 걸 뉴스로만 봤다며 꼭 한 번 가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어르신의 흔쾌히 그 요청을 들어드리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한 날에 지하철을 이용해 롯데월드타워에 도착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일시적으로 문을 닫는다는 안내를 들어야 했다. 오랜만의 외출이라 그냥 귀가하기는 너무 아까웠다. 기왕 나온 김에 화려한 벚꽃과 연산홍이 화사하게 핀 석촌호수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어르신은 어린아이 같은 순진한 미소를 감출 줄 몰랐다. 연산홍과 어우러져 더욱 홍조를 띠었다. 푸르게 변해가는 나뭇가지에서 지저귀는 새소리와 유유히 호수를 헤엄치는 백조들의 자유로움을 넋을 놓고 바라봤다. 그렇게 한동안 시선을 고정한 채 자신의 지나간 10년의 세월을 찾아갔다.
며칠 후에는 함께 종로로 향했다. 장애인 리프트와 엘리베이터를 몇 번씩이나 갈아타고 도착한 종로에서 지난 시절을 추억하며 거리를 걸었다. 휠체어를 밀면서 힘들었지만, 어르신의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힘을 냈다. 종묘를 찾았다. 종묘는 조선 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받들고 제례를 봉행하는 유교 사당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 1번지에 있으며, 사적 제125호로 지정되어 있다. 휠체어를 타고 종묘를 탐방하면서 어르신은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했다. 그 해박한 식견에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새록새록 떠오르는 추억들이 좋았는지 어르신은 내친김에 명동에도 가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후, 우리는 명동 거리로 나갔다. 명동을 거쳐 종로 송해거리의 한 음식점에서 늦은 점심을 먹으며 막걸리도 한 잔 곁들였다. 점심을 먹은 뒤에는 인사동 거리를 탐방했다. 그날, 겨우내 꽁꽁 얼었던 얼음이 봄과 함께 해동하듯 어르신의 마음도 서서히 봄빛으로 물들어갔다.
자생의료재단은 상생하는 사회를 위해 도움이 필요한 노인, 청소년 등 맞춤현 사회공헌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특히 올해는 글로벌 사회공헌 활동을 비롯해 봉사활동을 통해 총 3100여명의 고령 지역 주민들이 혜택을 받았다.
2011년부터 올해까지 진행된 한방 의료봉사활동을 종합하면 그 수혜인원은 4만3000여명. 잠실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의 최대 수용인원이 2만5000여명임을 감안하면, 잠실구장 약 2개를 채울 수 있는 인원이 자생의료재단의 치료를 받았다는 의미다.
또한 자생의료재단은 미래를 이끌어갈 청소년과 아동들이 학업에 정진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대표적인 공헌활동은 ‘자생 희망드림 장학사업’이다. 2014년부터 전국 지역 저소득가정 중고생 가운데 구청, 학교 등의 추천을 받은 장학생들을 지원하고 있다. 올해는 37명이 선발돼 총 3700만원의 장학금이 전달된다.
더불어 한의학 세계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글로벌 인재 육성을 위한 ‘자생 글로벌 장학사업’과 경제 사정이 어려운 예비 한의사를 지원하는 ‘자생 꿈키움 장학사업’을 통해서도 총 5명의 대학생에게 약 4000만 원의 등록금이 지원됐다. 올해 총 7700만 원 규모의 장학금 지원을 통해 청소년들의 미래를 응원하고 있다.
자생의료재단은 금전적인 지원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물품도 전달했다. 자생의료재단과 자생한방병원 임직원, 봉사자들은 ‘사랑의 연탄 나누기’ 행사를 통해 매년 기초생활수급자 및 차상위계층이 사용할 1000장의 연탄을 직접 전달하고 있다. 지난 11월에는 김장철을 맞아 저소득가정, 독거노인 등 취약계층 400여 가구에게 총 1500kg의 김장김치를 마련해 제공한 바 있다. 저소득층 여성 청소년들에게 위생용품을 제공하는 ‘자생 엔젤박스 나눔 사업’의 경우, 120명분의 1년치 여성용품을 전달했다.
특히 올해 자생의료재단은 3ㆍ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독립유공자 유족지원사업을 전개하는 데 힘썼다. 이는 자생의료재단 신준식 명예이사장의 선친인 독립운동가 청파 신현표 선생이 강조했던 ‘긍휼지심(矜恤之心)’의 정신을 잇고자 함이기도 하다.
2월부터 전국 21개 자생한방병•의원과 협력해 독립유공자 및 후손 100명의 척추•관절 질환을 치료하는 의료지원을 실시하고 있다. 최근에는 국가보훈처와 함께 매년마다 독립유공자의 자녀•손자녀 고교생 100명을 선정해 총 3년간 장학금을 지급하는 장학사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자생의료재단 박병모 이사장은 “자생의료재단은 국내 최대 공익 한방의료재단으로서 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내년에는 더 많은 분이 건강을 되찾고 꿈과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사회공헌 활동 범위를 더욱 넓혀나가겠다”고 말했다.
TV 화면에 눈에 익은 장면이 보였다. 세계적인 공연단 ‘태양의 서커스’에 관한 다큐멘터리였다. 동화나라를 연상하게 하는 뾰족뾰족한 빅탑 모습에 작년 말 관람했던 서커스 ‘쿠자’가 떠오르며 반가웠다.
서커스라는 단어를 마주할 때는 왠지 애잔한 그리움과 아련한 슬픔이 밀려온다. 천방지축 선머슴처럼 동네 친구들과 뛰놀던 대전 인동의 개천 변 다리 밑에는 심심치 않게 약장수 극단과 작은 규모의 서커스단이 와서 무대를 만들곤 했다. 약장수의 쇼는 인동 다리 밑 어디서에서든 구경할 수 있었지만 텐트를 치는 서커스단이 오면 돈을 내고 봐야 했다. 가끔 뒤편 천막을 들추고 들어갈 수 있는 개구멍을 찾아낸 동네 오빠들을 따라 마음 졸이며 몰래 입장했다.
내용은 다 생각나지 않지만, 약장수 쇼는 주로 슬픈 이야기였던 것 같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자주 훌쩍거렸다. 서커스단에는 동물들이 출연했는데 익살스러운 그 모습이 내겐 왠지 모를 슬픔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 후에도 곡예사의 슬픈 사랑 이야기나 단원들의 사정 등을 들어서인지 서커스 관람이 그리 재미있진 않았다.
몇 년 전 태양의 서커스 ‘퀴담’을 관람했다. 성인이 된 뒤로는 처음이었고 너무 재미있었다. 작년인가 했는데 벌써 3년 전이다. 아들과 둘이 보았던 ‘퀴담’에서는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서커스단의 비애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이 가지고 다닌다는 뾰족 지붕의 빅탑이라 부르는 공연장 모습도 동화나라처럼 아름다웠다. 각종 공중 묘기는 물론 관객과 소통하며 펼치는 서커스가 환상적이었다. 특히 ‘퀴담’은 우리나라 공연이 마지막이고, 영원히 재공연을 안 한다니 그 의미도 컸다. 곡예사의 모습은 멋지고 유쾌해서 내가 알고 있던 우리나라의 서커스단 사정이 매우 안타깝게 느껴졌다.
작년 12월, 아들이 친구와 같이 가라며 ‘쿠자’ 티켓을 두 장 보내왔다. ‘퀴담’을 관람하며 즐거웠으므로 들뜬 마음으로 잠실 종합운동장 서커스공연장을 찾았다. ‘쿠자’는 ‘퀴담’에 이어 두 번째 관람이지만 태양의 서커스는 시리즈가 매우 많다. 아들이 보내주는 티켓은 항상 VIP석이었는데 무심코 그쪽으로 들어가려다 보니 이번엔 SR석이었다. ‘퀴담’을 볼 때도 느꼈지만 VIP석은 공연자와 더 많은 소통을 할 수 있는 자리다. SR석이 17만 원이나 하는 걸 보니 VIP석은 엄청 비쌌던 모양이다. 그래도 원형 서커스장은 어디에서든 잘 보이게 되어있고 공연자들이 심심치 않게 무대 곳곳을 누비고 다니며 사진도 같이 찍어 소외감이 덜했다.
1부 60분에 인터미션 30분, 그리고 2부 60분 공연이 시작되었다. 인터미션이 30분인 건 다음 공연 무대를 설치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서커스의 특성상 안전장치는 매우 중요하다.
2007년 4월 초연된 후 전 세계 19개국의 관객들을 열광시킨 ‘쿠자’는 태양의 서커스 중 최장 기간 투어 기간을 갱신하고 있는 작품으로 초기 태양의 서커스 정신과 본질로 회귀한 작품이라고 한다. 인간의 몸으로 표현할 수 있는 최고 난이도의 화려함과 유연함을 공연예술로 승화시켰다고 한다. 실제로 놀라운 인체의 신비를 봤다. ‘컨토션’과 아크로바틱. 인간의 몸이 어떻게 저렇게 꺾이고 유연할 수 있는지 경이로웠다. 서커스의 정석인 공중곡예와 외줄타기, 높이 쌓은 의자 위에서 펼치는 묘기 등 아슬아슬한 장면들이 시선을 끌었고 라이브로 연주하는 드럼의 경쾌한 음향도 신났다. ‘퀴담’에서 보여줬던 로켓포 쏘는 묘기 등은 생략되어 아쉬웠지만 몸으로 표현하는 서커스 본질로의 회귀라는 점에서 이해가 되었다.
정말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몰입해서 즐겁게 관람했다. 우리나라 사람도 재주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텐데 서커스가 활성화되지 못한 점이 아쉽기만 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명맥을 이어가는 ‘동춘서커스’가 있다. 지난여름 아들네와 대부도로 놀러 갔다 오는 길에 허름한 동춘서커스 공연장을 봤다. 우리나라 서커스는 왜 태양의 서커스단만큼 크지 못하는 걸까? 우리의 서커스도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1982년 출범한 국내 프로 야구 KBO 리그 35번째 시즌이 지난 4월 1일 시작했다. MBC 청룡과 삼미 슈퍼스타즈 같은, 이제는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구단을 비롯해 6개 팀으로 닻을 올린 KBO 리그는 올 시즌 10개 구단으로 두 번째 페넌트레이스를 펼친다.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와 고척스카이돔이 새롭게 문을 열면서 올해 프로 야구 관중은 800만 명을 바라본다. KBO 리그는 머지않은 장래에 1000만 관중 시대가 열릴 수도 있는 가파른 인기 상승세를 타고 있다.
1군 진입 4년째인 NC 다이노스가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힐 만큼 KBO 리그는 변화무쌍한 판도를 보이고 있다. 야구 팬들로서는 흥미진진한 판세다. 그러나 이런 예상은 어디까지나 예상일 뿐이다. 팀당 144경기, 리그 720경기의 장기 레이스에서는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누구도 자신 있게 내다볼 수 없다. 1982년 프로 야구 원년, 대부분의 야구 전문가들은 삼성라이온즈를 우승 후보로 꼽았다. 황규봉과 이선희, 이만수 등 가장 많은 아마추어 국가 대표 출신 선수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그런 이유로 1982년 3월 27일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프로 야구 개막전에서 MBC 청룡과 겨룰 수 있었다.
그런데 원년 우승은 많은 전문가들이 중하위권 즉 4위 정도로 예상한 OB 베어스가 차지했다. 미국 프로 야구 마이너리그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박철순의 투구력을 간과한 측면도 있지만 프로 야구 시즌 예상은 많은 변수를 안고 있기에 족집게 같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프로 야구 원년 많은 이들의 예상을 깨고 OB 베어스를 초대 챔피언으로 이끈 김영덕이 이번 호의 주인공이다.
김영덕은 1982년부터 1993년까지 OB 베어스와 삼성 라이온즈, 빙그레 이글스에서 감독으로 활동했기에 어지간한 야구 팬이라면, 나이가 그리 많지 않아도 알 만한 인물이다. 그런데 선수로서의 활약상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 듯하다.
필자는 최근 경기도 분당에서 여든을 막 넘긴 나이로 행복한 노후를 보내고 있는 노(老) 감독을 만났다. “교토에 있는 부모님에게 1, 2년만 (한국에서 야구를)하고 돌아오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떠난 게 반세기가 훌쩍 지나버렸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노 감독의 얼굴에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인연을 맺은 70여 년의 야구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 사이 그의 이름은 가네히코 나가노리(金彦永德)에서 김영덕(金永德)으로 바뀌었다. 가네히코는 본관인 경남 언양(彦陽)에서 따온 성이고 그의 부모는 경남 합천이 고향이다. 한국에 오기 전에 그가 듣고 배운 우리말은 경상도 사투리였다. 28살의 적지 않은 나이에 한국에 왔을 때 땅 설고 물 설은 환경은 둘째 치고 서울 말씨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도 큰 어려움 가운데 하나였다.
1940년대 거의 모든 일본의 야구 소년들이 그랬듯이 김영덕도 초등학교 때까지는 동네 야구 를 하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체격도 좋았고 형이 유도 선수로 명문 메이지대학교에 입학할 정도였으니 집안 내력으로 운동신경도 좋았던 김영덕은 나라현(奈良縣)에 있는 즈시가이세이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6년 난카이(南海) 호크스(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전신)에 입단했다.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고졸 신인의 길을 택했다. 그 무렵 일본에서도 맏아들은 어떻게 해서든 대학에 보냈다.
3년간의 2군 생활 끝에 1959년 1군에 올라간 투수 김영덕은 그해 6승6패 평균자책점 3.09의 수준급 성적을 올렸다. 이후 한국행을 결정하기 직전인 1963년까지 4시즌 동안 7승9패 평균자책점 3.57의 기록을 남겼다. 청·장년 야구 팬들과 달리 글쓴이에게 김영덕은 감독보다는 선수로 더 익숙하다. 까까머리 청소년 때,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본 키 큰 투수 김영덕의 기억이 워낙 강렬하기 때문이다.
1959년 재일동포학생야구단의 일원으로 모국 방문 경기를 한 뒤 1960년 귀국해 성공적으로 한국 실업 야구(교통부→기업은행)에 적응한 김성근을 보고 김영덕은 큰 용기를 얻었다. 한국 진출을 결심할 무렵 도에이(東映) 플라이어즈에서 활약하고 있던 백인천이 대한해운공사를 소개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지인이 제일은행도 소개했다. 이런저런 사연 끝에 대한해운공사에 입단한 김영덕은 말 그대로 펄펄 날았다. 야구 올드 팬들은 스리쿼터 투구 폼에서 뿜어져 나오는 날카로운 슬라이더로 타자들을 손쉽게 처리하는 김영덕을 기억할 것이다.
1964년 시즌 실업 야구는 13개 팀이나 됐다. 전해까지 있었던 춘·추계 리그를 없애고 1~4차 리그로 시즌을 운용해 팀당 48경기, 전체 312경기였으니 1982년 팀당 80경기, 전체 240경기를 치른 프로 야구 원년 시즌보다 전체 경기 수가 많았다. 서울운동장과 육군 야구장(용산), 상업은행 야구장(수유리), 인천 야구장, 대구 야구장 등 전국 5군데 구장에서 5월 11일 개막해 10월 18일까지 107일 동안 경기가 열렸으니 사실상 프로 리그였다.
김영덕은 그해 33경기에 등판해 255이닝을 던져 9자책점만으로 0.32라는 믿을 수 없는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이 부문 타이틀을 차지했다. 그렇게 잘 던졌는데도 그해 다승왕은 김영덕이 아니었다. 24승5패의 신용균이 1위에 올랐고 20승4패의 백수웅, 20승5패의 김성근에 이어 김영덕은 18승5패로 다승 4위였다. 백수웅을 빼고 모두 재일동포였다. 재일동포이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외국인인 이들이 국내 야구 마운드를 장악한 것이다. 이들은 1980년대 초, 중반 ‘빨간 여권’(일본 여권의 표지가 빨간색이어서 나온 말)을 들고 활약한 김일융, 송일수(이상 삼성라이온즈), 장명부, 이영구(삼미슈퍼스타즈), 주동식, 김무종(이상 해태타이거즈) 등 재일동포 2세대의 선배 격이다.
그런데 1964년 실업 야구에서 더 놀라운 기록이 있다. 재일동포인 배수찬이 타율 3할3푼6리로 이 부문 1위를 차지한 가운데 김영덕은 3할로 6위에 올랐고 진원주가 6개로 1위를 차지한 홈런 부문에서는 4개로 재일동포인 김금현과 공동 2위를 기록했다. 1950~60년대 홈런왕 박현식은 3개로 4위였다. 출루율은 4할7푼6리로 3위에 랭크됐다. 김영덕은 요즘 일본 리그 닛폰햄 파이터스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오타니 쇼헤이를 뛰어넘는 투타 겸업 선수였다.
그해 한국 야구사에 길이 남을 두 차례 퍼펙트게임이 펼쳐지는데 9월 23일 고순선이 철도청과의 경기에서, 9월 25일 김영덕이 조흥은행과의 경기에서 각각 대기록을 세웠다.
김영덕은 이후 크라운맥주, 한일은행에서 1969년까지 화려한 선수 생활을 이어 간다. 1967년 시즌에는 팀이 치른 32경기 가운데 무려 25경기에 등판해 17승1패, 승률 9할9푼4리의 놀라운 기록을 수립했다. 그해 54이닝 연속 무실점에 10연승 기록도 세웠고 평균자책점은 0.49였다. 한국 프로 야구에서 0점대 평균자책점은 선동열이 3차례(1986년 0.99, 1987년 0.89, 1993년 0.79) 기록했는데 앞으로 0점대 평균자책점이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
1970년 시즌 실업 야구 2차 리그가 끝나고 강대중 감독의 뒤를 이어 한일은행 사령탑에 오른 김영덕은 곧바로 그해 우승 감독이 됐다. 1971년 제9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는 1차 리그에서 5개국 가운데 4위로 밀린 한국을 2차 리그부터 감독 대행을 맡아 역전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때 받은 체육훈장 청룡장은 인생 최고의 영광으로 간직하고 있다.
1971년 김응룡에게 감독 자리를 넘겨 주고 창구 업무를 보게 된 김영덕은 어려운 한글 받침 때문에 고국에 온 이후 두 번째로 마음고생을 하게 된다. 1977년 장충고등학교 감독으로 야구계로 돌아온 김영덕은 이후 천안 북일고등학교 감독(1977~1981년)을 거쳐 1982년 프로 야구 OB베어스 초대 사령탑을 맡아 한국시리즈 1호 우승 감독의 영예를 누렸다.
그리고 삼성라이온즈 감독(1984~1986년)과 빙그레이글스 감독(1988~1993년)을 지낸 뒤 LG트윈스 2군 감독(1997~1998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났다. 그의 나이 환갑을 조금 넘어서였다.
지난날을 돌아보는 노 감독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얼마 전 건강검진을 하면서 재 보았더니 키가 3cm 줄었다”는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최근 건강이 조금 좋지 않지만 매일 50분 정도 걷기를 하면서 많이 회복됐다고 했다.
고국이긴 하지만 아무런 연고가 없는 이 땅에서 반세기를 넘게 살아오는 동안 그의 곁에는 해운공사 시절 팀 동료 성기영 전 롯데자이언츠 감독의 소개로 백년가약을 맺은 아내 김해영이 늘 함께했고 이제는 성규 성연 성란 1남 2녀가 낳은 친손주 2명과 외손주 2명이 그의 곁을 든든히 지키고 있다 .
한국 야구의 ‘경계인’ 재일동포선수들
재일동포. 일본에 살고 있는 우리 핏줄을 일컫는, 흔히 쓰이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등에서 듣거나 보게 되면 왠지 가슴이 저리다. 직접 경험은 하지 못했지만 일제 강점기 35년 동안 우리 민족이 겪은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말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쓴이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1983년 프로 야구 개인상 시상대에 선 장명부(2005년 작고)와 김무종이 떠오르곤 한다. 그해 10월 21일 잠실구장에서 벌어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해태 타이거즈는 MBC 청룡을 8-1로 꺾고 시리즈 전적 4승1무로 V10의 첫발을 내디뎠다.
장명부는 시즌 30승으로 다승 1위와 함께 투수 부문 베스트 10으로 뽑혀 포수 부문 베스트 10으로 선발된 김무종과 나란히 시상대에 섰다. 당시 기준으로 볼 때 현역 선수로는 적지 않은 나이인 33살과 29살이었던 두 선수는 시상대 위에서 몇 마디 말을 나누더니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조센진’, 한국에서는 ‘반(半) 쪽발이’로 불리며 경계인으로 살아야 하는 재일동포 두 선수는 그 자리에서 복잡다단한 감정이 복받쳤을 것이다.
그때부터 24년 전인 1959년 8월, 까까머리 고교생이 제4회 재일동포학생선수단의 일원으로 서울 땅을 밟았다. 그리고 그 학생은 오직 야구 하나만을 생각하며 이듬해 귀국해 교통부, 기업은행 등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은퇴한 뒤에는 충암고와 신일고 감독을 맡아 지도자로 이름을 날렸다. 1982년에는 OB베어스 코치로 프로 야구 출범과 함께했다. 그리고 2007년 6월 28일 SK와이번스 감독으로 문학구장에서 롯데자이언츠를 10-2로 물리치고 국내 프로 야구 두 번째로 900승 사령탑이 됐다. 그해와 2008년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50여 년 동안 야구 외길 인생을 걸어온 그는 한화이글스 김성근 감독이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강남구 삼성동 한국전력 본사 부지가 국내 최대 규모의 국제업무지구로 탈바꿈한다. 장부가액만 2조원을 넘는 서울의 마지막 개발 부지여서 그동안 세간의 주목을 받아온 곳이다.
서울시는 1일 코엑스-한전 본사-서울의료원·한국감정원-잠실종합운동장을 잇는 약 72만㎥의 부지를 '국제교류 복합지구'로 조성하는 '코엑스-잠실운동장 일대 종합발전계획'을 발표했다. 지난해 10월 발표한 '서울 MICE 마스터플랜'과 '2030 서울플랜'의 구체적인 실행계획으로 강남지역을 국제업무·MICE를 중심 기능으로 부여한 데 이어 추가책이다.
시는 이들 지역에 △국제업무·MICE시설 확충 △탄천·한강·잠실운동장을 연결하는 보행 네트워크 구축 △대중교통인프라 확충 등의 3가지 큰 방향으로 개발할 계획이다.
오는 11월 이전 예정인 한전 본사 부지에는 1만5000㎡ 이상의 전시·컨벤션과 국제업무, 관광숙박시설을 채워 국제업무·MICE 핵심공간으로 조성한다. 또 도시계획변경 사전협상을 통해 제3종일반주거지역에서 일반상업지역으로 용도지역을 상향하고 부지 면적의 40% 내외를 공공기여(토지, 기반시설, 설치비용)로 확보할 계획이다
옛 한국감정원 부지에는 국제업무 및 MICE 지원시설 등을 도입한다. 가로활성화를 위해 저층부에 문화, 상업 등 시설을 설치하며 탄천변까지 공공 보행통로를 연결한다. 시는 제3종일반주거지역에서 준주거지역으로 용도지역을 상향하고 부지면적의 20% 내외를 공공기여로 제공받는다는 계획이다.
시는 민간소유인 한전, 한국감정원 부지에 '사전협상제도'를 적용키로 했다. 이는 시가 제시한 가이드라인에 따라 민간이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해 요청하면 도시계획 변경 사전협상을 거쳐 세부개발계획을 수립·개발하는 방식으로 시는 개별부지에 적합한 용도지역 상향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공공기여를 받아 공익적 개발을 유도할 계획이다.
시가 소유한 서울의료원과 서울무역전시장(SETEC)은 세부개발계획을 별도로 정하기로 했다. 서울의료원 부지 중 일부(2만2650㎡)를 연내 매각, 국제업무·마이스 지원시설로 유치하고 잔여부지는 국제기구 전용공간과 문화시설로 우선 활용하면서 추후 활용방식을 결정할 예정이다.
서울무역전시장은 기존 전시·컨벤션시설 8787㎡를 3만2500㎡로 확장하고 업무·숙박 기능을 갖춘 비즈니스 복합공간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저층부에는 상업시설과 문화시설을 만들어 주민 활용공간으로 꾸밀 예정이다.
시설이 노후화된 잠실종합운동장은 기존의 스포츠 기능은 유지하되 문화·공연·엔터테인먼트 기능을 확충할 계획이다. 외부공간은 공원으로 조성하고 주경기장과 실내체육관은 리모델링하기로 했다. 수영장은 주차장 부지를 활용해 국제규격으로 신축하고, 공연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야구장은 학생체육관 부지를 활용해 돔구장으로 신축한다.
시 소유 부지인 서울의료원과 서울무역전시장(SETEC)은 가이드라인에서 제시한 기준에 따라 세부개발계획을 수립하고 개발방식, 시기, 절차, 방법 등을 정한 후 개발을 추진한다. 잠실종합운동장은 이번 계획을 바탕으로 시민, 전문가 및 관련 단체 등의 의견을 수렴해 개발 방향을 정하고, 시설별 계획내용, 사업 시행시기 및 개발방식 등을 결정한 후 단계별로 추진한다.
봉은사에서 코엑스, 잠실운동장을 거쳐 한강까지 이어지는 보행네트워크도 조성된다. 특히 탄천은 동·서로를 지하화하고, 동부간선도로 진출램프 이전, 탄천 주차장 일부를 이전해 공원화하고 보행전용 브릿지로 연결한다.
대중교통인프라도 크게 늘어난다. 시는 한전부지를 개발하면서 지하철 2·9호선과 코엑스 지하공간 연결을 추진하고, KTX, GTX등 광역철도 등도 연계가 가능한 교통인프라 확보를 추진할 방침이다.
시 관계자는 "민간부문 개발은 선제적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원활한 사업 추진이 되도록 하고 공공부문 개발은 이번 기본안을 토대로 충분한 공론화 과정을 거쳐 실현해 나가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