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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석 열차 승차권 31일부터 예매…첫날 고령자·장애인만
- 올해 추석 열차 승차권 예매가 오는 31일부터 9월 2일까지 3일간 온라인과 전화접수 등 비대면으로 진행된다. 예매 첫날인 31일은 만 65세 이상 고령자나 장애인복지법 등록 장애인만 예매할 수 있다. 예매 대상은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9월 17일부터 22일까지 6일 동안 운행하는 무궁화호 이상 모든 열차의 승차권이다. PC와 스마트폰 사용에 익숙하지 않은 정보화 취약계층을 위해 예매 첫날인 31일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는 만 65세 이상 고령자나 장애인복지법 등록 장애인만 예매할 수 있다. 고령자나 장애인이 철도회원이면 PC나 모바일 등 온라인으로 ‘명절 승차권 예매 전용 홈페이지’ 로그인 후 예약할 수 있다. 비회원은 철도회원으로 가입하거나 전화접수(1544-8545)로도 예매할 수 있다. 다만 전화접수는 선착순 1000명만 받는다. 9월 1일과 2일 오전 7시부터 오후 1시까지는 노인·장애인을 포함한 모든 국민이 온라인으로 예매할 수 있다. 1일은 경부·경전·동해·충북·경북·동해남부선, 2일은 호남·전라·강릉·장항·중앙·태백·영동·경춘선 승차권 예매를 시행한다. 예매매수는 1인당 왕복 8매(1회당 4매 이내)까지 가능하다. 다만 장애인·경로 대상 전화접수는 왕복 6매(1회 3매)로 제한한다. 예약한 승차권은 9월 2일 오후 3시부터 5일 자정까지 반드시 결제해야 한다. 결제하지 않은 승차권은 자동 취소돼 예약 대기 신청자에게 배정된다. 전화접수는 결제기간 내 신분증 확인 후 역에서 발권한다. 다만 올해 추석 승차권 사전예매는 승객 간 거리두기를 위해 창 쪽 좌석을 우선 발매한다. 이번 예매에 포함되지 않은 내측 좌석은 9월 중 정부의 코로나19 방역 대책에 따라 판매 여부가 결정된다. 입석은 운영하지 않고 KTX 4인 동반석은 순방향 1석만 발매한다. 판매되지 않은 잔여석은 2일 오후 3시부터 역 창구·홈페이지·코레일톡 등 온·오프라인에서 일반 승차권과 동일하게 살 수 있다. 예매 시작 직후에는 많은 고객이 동시에 집중되어 접속이 지연될 수 있다. 이에 따라 65세 이상 노인이나 장애인은 명절 예매 전용 홈페이지에서 사전 여행정보를 미리 저장하고, 예매 당일 불러오는 기능을 이용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한국철도는 대규모 이동이 예상됨에 따라 코로나19 확산방지를 위한 열차 내 거리두기 및 방역 강화에도 나선다. 정왕국 한국철도 사장직무대행은 "역사는 하루 4회 이상 방역소독하고 승하차 고객 동선을 분리해 접촉을 최소화하겠다"며 "코로나 상황이 엄중한 만큼 열차 안에서는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하고 음식물 취식 금지와 대화자제 등 방역수칙을 철저히 준수해 달라"고 당부했다. 자세한 안내는 철도고객센터(1544-7788)에서 받을 수 있다.
- 2021-08-26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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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6세 노인이 매일 밖으로 나가는 이유
- 빨간색 체크남방, 모자, 장갑, 그리고 빨간 무늬가 돋보이는 허름한 백팩은 세상 밖으로 나서는 노인의 ‘전투 복장’이다. 매일 아침 86세 노인은 누가 떠밀기라도 하듯 밖으로 나간다. 그가 집에 있는 날은 1년에 두 번, 구정과 추석 당일뿐이다. 노인은 이른 아침 배달되는 신문을 보고 그날의 행선지를 결정한다. 마침 5월이라 이곳저곳 축제와 행사가 많아 갈 곳이 많다. 광화문, 서울역, 기차 타고 춘천, 인천에 있는 섬 등. 물론 일주일 중 일정을 정해둔 요일도 있다. 수요일은 싱싱한 생선을 사기 위해 소래 포구를 가고 금요일은 약재를 사러 부인과 경동시장을 간다. 토요일은 쇼핑 하러 마트에 가고 일요일은 산을 찾는다. 걸음도 힘들고 위암 수술 휴유증으로 조금만 배가 고파도 쓰러질 듯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나가는 이유는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어서’다. 노인은 “아직도 볼 것이 너무 많고 가봐야 할 곳이 너무 많다”고 한다. “아까운 시간에 집에 왜 있냐?”고 한다.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늙어감에 적응을 하는 것 같다. 어느덧 ‘시니어’라는 단어를 앞에 붙인 나도 삶을 아주 진지하게 마주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용기있고 열정적으로 매일 세상 밖으로 나서는 저 노인의 딸이기 때문이다.
- 2019-06-03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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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설날, 서른 번째 설날연휴
- 올해 설날은 2월 16일 금요일로 주말을 포함해 나흘의 연휴를 즐길 수 있다. 지난해 추석 황금연휴처럼 쉬는 날이 많지는 않지만, 30년 전만 해도 음력설에 이러한 연휴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1989년, 민속의 날로 정했던 ‘구정’을 ‘설날’로 개명하며 동시에 이틀의 연휴가 더해졌으니 말이다. 한편 당시 3일 동안 쉴 수 있었던 신정연휴가 2일로 단축되며 설날연휴에 고향을 찾는 귀성객이 점차 늘어났고, 연휴를 여유롭게 즐기러 고궁과 테마파크 등을 찾는 이도 많아졌다. 설날 귀성 열차표 대란 1994년 설날연휴를 맞아 고향에 내려가기 위해 서울역에서 기차에 탑승하고 있는 가족의 모습. 당시만 해도 설날 귀성 열차표를 구하려면 수개월 전부터 추운 날씨에 담요를 뒤집어쓰고 기다려야만 했다. 그해 철도청은 승객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예매제도 개선책으로 컴퓨터 추첨 방식 도입을 추진하는 등 귀성 열차표 예매 묘안을 찾기 위해 대규모 여론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고속터미널에 시찰 나온 서울시장 1986년 설날(당시 민속절) 당일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의 풍경. 새벽부터 귀성객으로 붐빈 터미널에 염보현 서울시장이 방문해 시민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그해 교통부는 귀성인파 총 200만 명 중 고속버스를 이용한 승객을 45만5000명으로 추산했다. 한복 입고 고궁나들이 1989년 첫 설날연휴가 시행되던 해, 일찍 세배를 마치고 귀경한 시민들은 한복을 입고 경복궁과 덕수궁 등 고궁나들이를 즐겼다. 또 가볍게 극장가, 어린이대공원, 대학로 등을 찾거나 스키장, 온천 등에서 여유를 보내는 이도 많았다. 당시 포근한 날씨와 긴 연휴 덕분에 거리에는 색동옷 차림의 아이들과 한복을 입은 어른들이 여느 해보다 많았다. 흥겨운 민속놀이 1990년대 초 설날을 맞아 가족이 함께 한복을 입고 널뛰기를 즐기는 모습. 당시 설날연휴 동안 서울 시내 고궁에서는 풍물과 남사당놀이 등 민속예술과 널뛰기, 투호, 윷놀이 등 다양한 놀이를 체험할 수 있었다. 1988년 개장한 국내 최초의 테마파크 서울랜드와 1989년 개장한 롯데월드 등에서 열리는 놀이마당과 풍물패 공연 등을 보러 가는 것도 인기였다.
- 2018-02-09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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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인의 애인 ‘주모’를 만나다, 부산포 주모 이행자
- 아침 6시 40분 부산행 무궁화호 열차에 몸을 실었다. 덜컹덜컹 몸이 흔들린다. 바깥 풍경은 오랜만에 선명히 잘도 보인다. 세련되지 않지만 뭔가 여유롭고 따뜻한 느낌이랄까? 한국 예술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부산포 주모(酒母) 이행자(李幸子·71)씨를 만나러 가는 길. 옛 추억으로 젖어들기에 앞서 느릿느릿 기차 여행이 새삼 낭만적이다. 한껏 기대에 부풀어 들어간 부산포. 작은 낙서, 그림 하나, 스치는 공기까지 어느 것 하나 특별하지 않은 것이 없다. 부산의 마지막 주모를 만나다 부산 지하철 1호선 중앙역에서 용두산 공원 방향으로 걸어가는 길은 깨끗하고 단정하다. 신식으로 잘 닦인 거리. 오래된 주점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오른쪽으로 난 작은 골목에 釜山浦(부산포)라고 쓰인 간판이 보인다. 이곳에 우리나라 예술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온 주모 이행자씨가 있다. 깡마른 체구에 걸걸한 목소리가 매력적인 이행자씨는 중앙동 바로 옆 동광동에서만 42년째 주모로 살고 있다. 혹자는 이행자씨를 부산의 마지막 주모라고 말한다. 남들 다 떠나갈 때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옛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주막은 현재 부산포 하나다. 의미를 모르면 동네 흔하디흔한 주막, 조금만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면 세상 그 어느 것보다 값진 역사와 예술가의 정이 흐르는 곳, 부산포다. 주막의 분위기는 주모가 잡는다 부산의 중앙동과 남포동 일대는 10여 년 전만 해도 부산의 굵직한 화랑들과 함께 인쇄 골목이 형성돼 있어 문인과 화가들이 넘쳐나는 이른바 예술의 거리였다. 지금은 해운대 일대로 예술 관련 사업이 옮겨가 작가들의 발길이 뜸해진 지 오래다. 외딴섬처럼 덩그러니 남겨진 부산포지만 그 안에는 옛 예술가들의 체취와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낙서 하나하나, 벽에 펜으로 휘갈긴 듯 그린 그림 속 인물은 한국 문단과 화단을 주름잡던 일류 작가군단이다. 매일 문지방이 닳도록 부산포를 오간 문화 예술인만 수백은 될 것 같다. 부산포 주모 이행자씨가 이토록 작가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내 고집대로 한 거지 뭐. (화장) 진하게 하고 나와서 하하 호호 하는 꼴을 내가 못 봐. 그러니까 손님은 없어. 옛날이야 줄 섰지만. 내 성질이 개떡 같아. 손님들도 내쫓아요. 욕하는 사람, 슬리퍼 신고 오는 사람 다 쫓아내. 슬리퍼는 점심에 밥 먹을 때는 괜찮은데 저녁엔 옛날 어르신들 계시고 이라니까. 분위기도 내가 만들어주는 거지. 그냥 손님들이 만드는 게 아니야. 그래서 뺨때기도 때리고 젊을 때는 말 못해. 마대자루 들고 패지, 물바가지로 퍼붓지. 소문이 났어. 좋게 날 리가 없지.” 베테랑 주모의 애틋한 고객 관리(?)는 바로 어르신들을 제대로 알아보고 보살피는 게 전부였다. 이행자씨가 말하는 그 어르신들이란 1900~1920년생 한국 예술계 전설적 인물이 줄을 잇는다. 독립운동가이자 예술인 먼구름 한형석을 비롯해 오제봉, 김정한, 김종식, 오영재, 천재동, 공초 오상순, 하인두, 시인 구상까지 평생을 살아도 만나 뵙지 못할 귀한 인물들을 주모로서 극진히 맞이했고 술동무로 가시는 날까지 정성을 다해 모셨다. 손님을 가려서 받게 된 것도 문화계 원로 선생님을 모시는 일종의 방법이었다. “손님들이 이상한 행동 하는 꼴을 내가 못 봐. 들어왔는데 뭔가 느낌 이상한 사람이 들어오면 장사 안 한다고 하고, 소주 보여도 소주 없다고 하고. 보면 알지. 매너가 엉망인 사람이 보인다고. 술 먹고 변할 사람들도 보이고.” 그런데 이행자씨에게는 철칙 하나가 있다. 절대 욕은 안 한다. “내는 고함은 지르는데 욕은 하지 않아. 근데 누가 나더러 욕쟁이 할머니래. 와? 내가 욕하는 거 봤나. 내가 욕하면 쫓아내는데. 욕하는 사람이 나는 제일로 혐오스럽다. 나도 욕할 줄 알거든. 그런데 안 할 뿐이야.” 누부야 누부야 그냥 갈 수 없잖아展 이행자씨는 서른 초반이던 1970년대 말 ‘대구집’으로 문을 열었다. ‘골목집’이란 이름을 지나 1994년 지금의 부산포로 주막 간판을 바꿨지만 주모도 그대로 추억도 그대로다. 그렇다고 마냥 행복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03년에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몸에 이상신호가 왔다. 일생일대의 위기였다. “믿고 지냈던 사람에게 보증을 서줬다가 건물이고 가게고 순식간에… 30여 년 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것을 한 번에 다 날렸으니 난 어땠겠어.” 며칠씩 잠도 안 자고 하루 종일 담배만 3갑씩 피웠다. “1세대 선생님들은 동동주하고 맥주하고 타서 ‘동맥’이라고 하시면서 섞어 드셨다 아이가. 그게 맛이 괜찮아. 30~40대부터 그렇게 술을 먹었는데 일 터지고 한 달 내내 그렇게 마셨어. 돈이고 뭐고 다 귀찮고. 술도 안 받는데 계속 그렇게 먹었어. 결국 몸이 고장 난 기지.”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한 달도 안 돼 치아가 빠지기 시작했다. 위암 초기였다. 그때 이후로 술은 끊었지만 담배는 손에서 떼지 못했다. 그렇게 쓰러진 주모 이행자를 위해 부산 예술인들을 주축으로 대단한 일이 벌어졌다. 판화가 주정이가 주축이 돼 주모 이행자씨를 돕는 특별전을 펼친 것. 그게 바로 ‘누부야 누부야 그냥 갈 수 없잖아展’(2009. 7. 14~8. 31)이었다. “옛날 1세대 어른들을 내가 잘 모셨어. 부산포를 살려야 한다 그라셔서 살려주신 거지. 대학에 있는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 전업 작가들이시고. 정말 십시일반 해서 도와주셨어. 부산비엔날레 운영위원장 하시던 이두식 선생님도 돌아가시기 전에 작품을 내주셨고.” 이 전시회를 통해서 3000만원이 훨씬 넘는 자금이 모였다. 그래서 현재의 부산포 자리로 옮겨 명맥을 다시 이어갈 수 있었다. 새로운 곳으로 이전해 다시 활기차게 생활을 하지만 몸은 성한 곳이 없다. 예전에는 일하는 사람을 뒀지만 지금은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다 주모 이행자씨의 손을 거친다. 이렇게 한 것이 6년째. 손가락에는 류마티스가 왔고 복숭아뼈 양쪽에 물이 차 추석쯤 병원에 가 치료를 받을 생각이다. 위암 정기검진을 받아야 할 시기가 지났는데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나는 지금 병원에 가면 눕혀서 못 나와. 병원 가면 문 닫아야 해. 그래서 안 간다 아이가. 한 1년 넘었어. 병원에서 전화 오면 ‘괜찮소. 나 아직 빨딱거리고 잘 돌아다니거든’ 이런다(웃음)! 약만 먹고 안 간다.” 젊었을 때부터 그렇게 좋아하던 산도 다리가 좋지 않아 갈 수 없다. 지리산이고 설악산이고 선생님들과 많이 오르고 종주도 했다. “그 대신에 용두산 공원은 좀 걸어. 시간 있으면 올라가. 이제 아픈 것도 모르겠어. 이러다 병도 친구 삼아서 함께 같이 있다가 같이 죽자 한다(웃음).” 부산포 주모, 문화계 원로와 어깨를 나란히 “그림 작품 같은 거 잘 보시겠어요?” 이 질문에 피식 웃으면서 짧게 대답한다. “살다 보면 눈에 보이지 뭐. 세월이 40년인데 좀 안 보이겠어?” 문화계 원로에 대한 얘기를 듣다 보니 주막 주모가 아니라 화랑 관장님과의 대화라 해도 믿을 것 같다. 이행자씨도 그런 얘기를 여러 사람에게 들었다. 주모가 아니라고. “많이 배우지. 좋은 얘기를 많이 듣고 해서 가끔 보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입으로만 떠드는 사람들도 보여. 자기 스스로 공부한 것이 아니라… 시인들한테도 이게 시냐? 편지 썼냐? 그런다(웃음).” 문화계 인사는 물론 방송국, 신문사 등 언론인, 대학 총장, 의사 등등이 주모 이행자씨의 고객이자 친구, 모시는 선생님들이었다. “여행도 그런 분들이랑 많이 다녔어. 1993년도에 러시아에 갔었는데 그때만 해도 러시아 가는 게 쉽지 않을 때잖아. 근데도 갔었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레 을 봤는데 정말 너무 잘 봤어. 진짜 값진 인생 살았다. 돈 주고도 못 사는 삶을 살았어. 결혼? 안 해도 돼. 외로워? 뭣 때문에 외롭노?” 결국 이 특별한 주모는 선생님들의 사랑에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고 일평생 결혼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안 갔어. 그때 당시만 해도 희귀동물 같은 사람이었어. 드레스를 입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 해본 적이 없어.” 행여나 프러포즈를 해오고 연애하자는 자가 있으면 이행자씨한테 걷어차이기 일쑤였다. “내가 깡패가 됐잖아. 우리 집에 옛날에 왔던 손님들, 어르신들 빼고 내 발로 팔꿈치로 안 차여본 사람이 없다. 어른들 말고는 다 맞았을 거다. 하도 집적거리니까.” 이행자씨는 어떤 누구를 만나는 것보다 매일 찾아오는 어르신과 대화하고 이야기 듣는 그 시간을 기다리고 사랑했다.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대가라는 사람들이랑 대화라도 하려면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신경 써야겠어. 아닌데도 맞다고 해줘야 하고 달래줘야지. 문인들이 아주 잘 삐진다. 붙어 싸우다 술 먹으면 또 화해하고 그랬다.” 당시에는 거의 가족이었다. 옛날 1세대 어르신들이 한창 부산포에 드나들 때는 젊은 사람들은 들어와 앉을 자리도 없었다. “그 시절에는 흥이 나서 놀다 누군가 지명하면 무조건 노래를 불러야 했어. 근데 절대로 젓가락 숟가락 못 두드리게 했다. 여기는 그냥 막걸리집 아니라고 절대 못하게 했다. 끝나면 박수치고 흥 나면 소리 안 나게 박수쳤지.” 이렇게 부산포 안을 가득 채우는 작가들이 많았지만 지금처럼 정확하게 돈을 받을 수 없을 때였다. 가난한 시절 라면값도 없던 분들이 많았다. “대학교수도 있었지만 작품 활동만 하는 사람들도 있잖아. 그래서 그때부터 감자 주고 우거지 주고 그럼 술 마시고 잡숫고 그냥 가셨다. 어른들이라 외상값 장부도 없었다.” 그냥 술만 팔면 될 텐데 스스로 예술가의 가치를 흠뻑 느꼈기에 정성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다르다고 했잖아. 요즘은 택도 없다(웃음). 주는 만큼 받아야지.” 주막이니까 주모로 불러야지 지금도 주모로 부르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이모로 불리는 건 싫다. 누군가 무심코 그렇게 부르면 “내가 느그 이모도 아닌데 왜 그리 부르노!” 하며 부산 사투리가 강하게 터져 나온다. 주모라고 불리는 게 그럼 왜 좋을까? “옛날에 동동주 팔고 그러던 곳을 주막이라고 했잖아? 어르신들이 있었던 곳. 그러니까 주모지. 원래 여기 세 집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거 하나 남았어. 강나루는 시인 마누라가 하는 곳이었는데 거기도 어려울 때 시인들이 시화전도 열어주고 했던 곳이야.” 그렇다고 모두가 주모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아니다. 적어도 부산 사진의 역사라고 불리는 김탁돈(동아대 전 신문방송학과 교수) 정도는 돼야 부를 수 있단다. “내가 올해 일흔두 살이니까 한 10년 더 살면 될까?” 갑작스러웠다. 아직도 젊고 생생한 주모의 입에서 그리움이 느껴졌다. “어른들 참 많이 모셨지. 부산 세관장, TBC 사장, 대학 총장, 회장. 안 온 사람이 없어. 근데 이제 다 돌아가셨다. 나도 선생님들 따라갈 때가 얼마 남지 않았네. 지금도 선생님들 모여서 동맥 한잔씩들 하시겠지?” 부산포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 물려주고 싶은데 아직 물색 중이라고 했다. 술 팔고 밥 팔면서 예술을 하는 사람이 이 자리를 지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정말 부산포를 다 접고 나면 뭘 하고 싶은지 물었다. “옛날에 건물 있을 때는 시골 들어가 살려고 했는데 그건 안 되겠고. 슬슬 산책하고 살 수 있을까 몰라. 성질이 급해서 뭘 할는지. 뭐 일하면서 살겠지.”
- 2017-10-12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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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보다 어려웠던 삶의 정체 '밀정'
- 추석을 전후해 매년 시대극이 흥행에 성공하는 것이 과거를 기리는 명절의 후광효과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마치 성묘하러 나서는 분위기로 영화 을 보러 온 가족이 나섰다. 개봉 전부터 요란한 홍보로 이미 영화의 반쯤은 알고 있는 듯한 착각 속에 극장 문을 들어섰다. 사실이 그랬다. 이미 김지운 감독의 특징부터 의열단과 실재 인물인 황옥 경부의 실화라든가, 송강호의 연기에 주목하라는 등 사전 지식으로 무장한 채 영화를 보니 그런 느낌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영화의 전개도 초장의 충격적인 시퀀스라든가 열차 속의 액션 신 등 흥행 영화의 익숙한 공식을 잘 따르고 있다. 줄거리는 의열단원인 김우진(공유)이 조선총독부와 일본군 관계자들을 폭살할 목적으로 폭탄을 들여오기 위해 경성 경시청 경부 이정출(송강호)과 접촉한다. 그는 과거 초창기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다 배신하고 의열단에 관한 정보를 총독부에 제공하고 일본 경찰의 간부로 출세한 인물이다. 한편 일본 경찰은 의열단의 정체를 파악하고 일망타진하기 위해 이정출에게 의열단과의 접촉을 지시한다. 의열단은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그를 거꾸로 이용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그를 의열단 본거지인 상해로 부른 것이다. 이른바 반간계다. 이정출은 엉거주춤한 상태로 임하지만, 어느새 상황에 휘말린다. 영화는 기차가 달리면서 격랑에 빠져든다. 폭탄을 실은 열차 속에서 이정출은 마치 의열단원이라도 된 듯 자신을 감시하는 하시모토와 그의 부하들을 죽이고 열차를 탈출한다. 열차가 경성역에 도착하면서 운송 정보를 알고 기다리던 일본 경찰들에게 의열단원들은 무자비하게 죽거나 체포된다. 그 사이사이 무기 운송의 정보가 일본 경찰에 노출된다거나 함께 움직이는 의열단원이 배신자임이 밝혀지는 등 상황은 긴박하게 흐른다. 결국, 무사히 은닉된 폭탄을 이정출이 경시청 고위 간부들의 연회장에서 터트리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그렇다면 이정출은 다시 개과천선한 것인가? 그러나 그게 애매모호하다. 마지막의 법정신은 영화 에서 이정재가 열연한 법정신에 버금갈 정도로 드라마틱하다. 이정출은 법정에서 자신은 의열단이 아니며 그동안 일본을 위해 충성을 다했다는 최후진술을 하고 풀려난다. 영화 속에는 그가 의열단을 진심으로 돕는 증거도, 그들이 일망타진되도록 작전에 임한 증거도 다 있다. 그렇다면 그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송강호는 자유자재로 표정을 바꾸어가며 모호한 경계인을 연기한다. 그래서 진실은 끝내 오리무중이다. 다만 마지막 의열단원 중 단장의 여인인 연계순(한지민)의 주검을 보며 오열하는 장면에서 안소니퀸의 영화 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 것은 왜일까?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하고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회색 지대의 삶은 어떤 것일까? 이정출이 어느 편인가보다 그의 실존이 궁금해지는 이유이다. 그가 삶에 집착했다기엔 그의 처신이 너무 위험했다. 단선적인 캐릭터인 김우진 역의 공유보다 송강호가 칭송받는 것은 이정출이라는 인물에 힘입은 바 크다. 김지운은 자기만의 스타일을 가진 감독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독특한 미장센은 시각적 쾌감을 주며, 루이 암스트롱이나 볼레로 등 상황을 역설로 들려주는 음악은 색다른 재미를 준다. 스파이 극처럼 스릴을 주면서도 심리극으로 끌고 가 철학적인 성찰을 제공한 것은 그의 또 다른 성취이다. “우리는 실패해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실패가 쌓이고 우리는 그 실패를 딛고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의열단장 정채산(이병헌)의 대사가 귀에 남는다. 어쩌면 이 말은 가혹한 시대를 살아냈던 극 중 모든 사람에게 바치는 헌사일지도 모른다.
- 2016-09-23 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