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위한 내 꿈, 다시 뛰는 4050’ 캠페인
‘브라보 마이 라이프’와 ‘서울시50플러스재단’은 서울시 보람일자리사업을 통해 인생의 재도약을 꿈꾸는 4050 세대를 응원하기 위해, ‘모두 위한 내 꿈, 다시 뛰는 4050’ 캠페인을 펼칩니다. 본지는 서울시와 서울시50플러스재단이 함께한 보람일자리 사업을 통해 사회 곳곳에서 공공에 기여하고 있는 중장년들을 소개합니다.
15년 가까이 사회복지사로 일해온 윤소진(62) 씨. 은퇴 후 이웃돌봄지원단 활동으로 이웃의 삶의 질과 인권을 높이고자 노력하고 있다. 꾸준히 힘쓰다 보면 모두에게 더 나은 미래가 찾아올 거라 기대하면서.
퇴직할 무렵 윤소진 씨에게 고민이 생겼다. 사회복지사로서 다른 사람을 위해 힘써왔지만 정작 자신의 여생을 어떻게, 무엇을 하며 보낼지 깊이 생각해본 적 없었던 것이다. 막막한 마음을 안고 서울시50플러스 서부캠퍼스를 방문한 어느 날, 보람일자리 이웃돌봄지원단 공고를 발견하고 ‘이거다!’ 싶었다. 평소 돌봄 서비스에 관심이 있어 지역사회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던 터였다. ‘나를 위해 다시 일해보자’고 결심했다.
경험에 기반한 열정
윤소진 씨는 이웃돌봄지원단으로서 서울 관악구 신림동 정다운우리의원 재택의료센터에서 활동한다. 이웃돌봄지원단은 돌봄 관련 사회 경험과 역량을 가진 중장년층을 위한 사회공헌 일자리다. 주거, 교육·문화, 사회적 안전망 강화 등 손길이 필요한 지역사회 이웃의 돌봄을 보조하는 활동을 한다. 주로 해당 활동에 대한 이해가 있는 사람이 참여하기 때문에 업무 활동을 지속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정다운우리의원 재택의료센터는 거동이 불편해 병원에 찾아와 진료받기 어려운 사람을 대상으로 의사·간호사·사회복지사가 방문 진료 서비스를 제공한다. 윤 씨는 주로 행정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전화 상담을 통해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고 일정을 조율하며, 회의 자료를 정리한다. 재택 치료를 위한 준비물을 챙기고, 종종 의사나 간호사와 함께 나서기도 한다. 정다운우리의원은 관악정다운의료복지 사회적협동조합에서 개설한 센터라 사례 관리, 복지 체계 안내 등 폭넓은 사회적 서비스 지원 관련 업무도 수행한다.
“현역 시절 상담 및 행정 관련 부서에 있었어요. 이웃돌봄지원단에서도 장점을 발휘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지역사회 복지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활동한 경험이 실제로 도움이 됐어요. 환자들 가정에 직접 찾아가 보면 진료 외에 해야 할 일이 적지 않아요. 생활에 필요한 물품이라든지 불편한 요소들이 꽤 있거든요. 최대한 자세히 살펴보고, 지역 센터와 연계해주기도 해요. 곰팡이 핀 벽지나 헐거워진 문고리 교체 등을 요청하죠. 특별한 일을 하는 건 아니지만 굉장히 보람 있어요. 제가 만난 재택의료 신청자들은 병원에 가지 않아도 진료를 받을 수 있어 좋다고 말씀하십니다.”
한번은 어느 노부부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남편은 다리가 불편해 누워 있었고, 아내는 인지 장애가 있는 듯했다. 이들을 제대로 보살펴줄 보호자가 없어 어렵게 생활하는 걸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다른 가족들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우연히 담당 요양보호사를 통해 손주가 있다는 걸 들었어요. 그분께 상황을 말씀드리고 앞으로 치료를 어떤 방향으로 하면 좋을지 의논하도록 했죠. 이외에도 돌봄이 필요한 사람이 무척 많더라고요. 센터에서는 매주 사례 관리 진단을 하는데, 각기 다른 상황이라 어려움에 처한 환자들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치료할지 함께 고민해요.”
대상과 시스템의 확대를 꿈꾸며
윤 씨는 이웃돌봄지원단으로 활동하면서 환자뿐 아니라 그 가족도 돌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환자를 돌보면서 취미나 일상을 소화하지 못해 스트레스가 쌓이고, 우울감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아들과 남편을 동시에 보살펴야 할 상황에 놓였다거나, 보호자 생활을 오래 한 경우 등이다. 동네 사랑방처럼 같은 처지인 사람들끼리 모여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부담 없이 서로 대화하고 공감하며 환기할 시간을 갖는 셈이다.
“물론 나라에서 실시하는 다양한 지원 정책을 통해 더 나은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앞으로 노후 생활에 걱정이 없는 통합 시스템이 생겼으면 해요. 환자뿐 아니라 그 가족, 넓게는 지역사회가 모두 돌봄의 범위 안에 있도록요. 나이가 들어가니 저보다 더 나이 많은 어르신들께 자연스레 관심이 가요. 그들의 모습이 제 미래를 보는 것 같거든요. 앞으로 어르신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더 많이 해볼 생각이에요. 더불어 이웃돌봄지원단과 같은 다양한 지원 사업이 더 잘 되어 자리를 잡았으면 합니다. 더 나은 사회가 되면, 저도 편안한 여생을 보낼 수 있겠죠!”
여성새로일하기센터(이하 새일센터)에서 경력단절여성의 고부가가치 신산업 진출을 위한 직업교육훈련을 집중 지원한다.
여성가족부는 산업별, 지역별 수요에 맞는 전문인력 양성을 위해 전국 158개 새일센터에서 676개 직업교육훈련과정을 운영한다. 올해는 반도체, 바이오, 인공지능 등 미래 유망분야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지원할 방침이다.
직업교육훈련은 △반도체 등 고부가가치 과정 55개 △기업맞춤형(취업연계) 과정 126개 △지식재산 등 전문기술 과정 96개 △창업 과정 61개 △일반훈련 과정 338개 등 총 676개 과정을 운영한다.
고부가가치 과정은 인공지능(AI)․소프트웨어 개발자(프로그래밍), 3차원 모션그래픽디자이너(디자인개발), 제약바이오 품질보증(QA)․품질관리(QC) 전문가(화학제품제조) 등 다양한 분야의 교육 프로그램으로 구성됐다.
무료로 운영되는 직업교육훈련에는 경력단절여성 등 1만 2000여 명이 참여할 예정이다. 3월부터는 신기술 및 지역별 핵심산업 관련 고부가가치 직종프로그램을 추가 선정하여 새일센터 훈련의 전문성 및 다양성을 제고한다.
지난해 8월 디지털 전환 가속화에 민첩하게 대응하고, 산업현장과의 연계도를 높이기 위해 민·관 협업으로 시범운영했던 신기술 관련 6개 훈련과정(△챗 지피티(GPT(AI)) 활용 마케팅 실무 △디지털 헬스케어 서비스 기획자 △생성형인공지능(AI)을 활용한 크리에이티브 디자이너 △노코드 로우코드 앱/웹 개발자 △시스템 반도체 기초 설계 △디지털 트윈 3차원(3D) 모델링 전문가)을 전국으로 확대한다.
아울러 17개 시․도별 새일센터와 지자체, 지역내 일자리 연구기관이 협업하여 지역 핵심산업 인재 양성을 위한 고부가가치 직업교육훈련을 개발· 운영토록 지원할 계획이다.
교육부와 ‘한국형 온라인 공개강좌(K-MOOC)’ 협업을 통해 디자인, 마케팅 분야의 직업교육훈련이 필요한 경력단절여성 등에게 필요한 기초지식을 제공할 계획이다. 고용부 등 8개 부처의 전문분야 직업훈련 사업에 참여한 여성구직자를새일센터의 취업지원 서비스 등과 연계하는 ‘다부처 협업 취업지원’ 사업(2300명 규모)도 추진한다.
새일센터 직업교육훈련은 평균 취업률 75%에 달하는 성과를 내고 있으며 선발된 훈련생에게 직업교육훈련과 취업상담, 일경험(인턴십), 취업연계 및 사후관리 등 통합(원스톱) 취업지원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전체 운영과정은 여성가족부 누리집을 통해 확인 가능하다.
훈련참여를 원한다면 전국 새일센터 대표전화를 통해 신청할 수 있으면, 3월 중순 이후부터는 새일센터 누리집을 이용하면 된다.
신영숙 여성가족부 차관은 “새일센터가 미래 유망분야 일자리에 도전하는 경력단절여성들의 든든한 지원군이 될 수 있도록 직업훈련 전문성을 높이고, 실제 취업과 연계될 수 있도록 산업계, 지자체와의 협력도 강화해나가겠다”라고 말했다.
요양서비스 스타트업 케어링이 8개 투자사로부터 400억 원 규모의 시리즈B 투자를 유치했다. 케어링의 누적 투자금은 750억 원으로, 국내 요양서비스 스타트업 중 최대 규모 누적액이다.
이번 시리즈B 투자는 SV인베스트먼트가 리드한 가운데 한국산업은행, IMM인베스트먼트, 유진자산운용이 신규로 참여했다. 기존 투자자인 LB인베스트먼트, 현대투자파트너스, 퀀텀벤처스코리아, 아크임팩트자산운용도 후속 투자에 나섰다.
케어링은 이번 투자 유치를 바탕으로 보건복지부가 추진하는 통합재가 인프라 구축에 집중할 방침이다. 통합재가서비스는 노인장기요양보험에서 제공하는 주·야간 보호, 방문 요양, 목욕, 간호, 단기 보호 등을 수급자가 살던 곳에서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다.
2024년 1월 기준 케어링 소속 요양보호사는 4만2000명, 서비스 이용자는 누적 약 1만2000명을 기록, 국내 시장 점유율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케어링이 운영하고 있는 직영점은 총 34개로 서울 및 수도권을 비롯해 부산, 경남, 대구, 광주 지역에 방문요양⋅주간보호 센터 각각 14개, 요양보호사 교육원 4개, 복지용구센터 2개 등이 있다. 이를 향후 100개 이상으로 늘려 요양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목표다.
또한 지난달에는 자체 브랜드(PB) 상품을 출시, 커머스 사업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더불어 노인주거와 너싱홈을 결합한 전거(轉居) 기반의 1000세대 이상 대규모 시니어하우징 구축을 본격화하는 등 사업 다각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SV인베스트먼트 정주완 이사, 이성민 팀장은 “노인장기요양보험 시장 규모는 13조 원대로, 5년 뒤 20조가 넘을 것으로 예측된다”며 “케어링은 디지털 기반의 운영 최적화, 차별화된 서비스를 바탕으로 성장성이 높은 시장에서 압도적인 1등 기업이 됐으며, 이번 투자를 통해 전국에 탄탄한 요양 인프라를 구축해 초격차를 만들어낼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케어링 김태성 대표는 “전국에 요양 인프라를 구축해 어르신들이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돌봄을 받을 수 있도록 시장을 혁신 해 나갈 것”이라며 “요양서비스 운영 노하우와 다년간 쌓아온 시니어케어 경험을 바탕으로 이동, 식사, 의료, 거주, 커머스를 아우르는 토털 시니어 라이프스타일 기업으로 도약하겠다”고 말했다.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로 만든 집,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의 호랑이가 달라고 보채던 떡, ‘디즈니 동화’의 오리 스크루지 영감이 끓인 단추 수프… 어릴 적 읽던 책에 나온 음식에 괜히 군침 삼킨 적이 있는가?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우리는 그 요리를 탐내는 것으로 모자라, 참지 못하고 한밤중에 라면 물이라도 올리게 된다. 열혈 문학 독자인 이용재 음식 평론가는 신간 ‘맛있는 소설’을 통해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깊이 있게 먹음직스러운 문학 속 음식들을 차려냈다.
음식은 그 나라의 역사와 전통, 문화와 사회적 인식이 담긴 주요 지표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먹는지 살피면 세상의 외피와 내면을 고루 들여다볼 수 있다. 이용재 음식 평론가는 15년간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식재료, 조리 도구, 요리, 식문화를 폭넓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글로 풀어내 좌표에 올려놓는 작업을 해왔다. 이탈리아 음식 분야 최고의 요리책 ‘실버 스푼’ 외 ‘패밀리 밀’, ‘식탁의 기쁨’ 등 음식 관련서를 번역했으며, 비평의 성격을 띠는 ‘냉면의 품격’, ‘한식의 품격’, 생존을 위한 조리 지침을 담은 ‘조리 도구의 세계’, ‘오늘 브로콜리 싱싱한가요?’ 등을 펴냈다.
세 종류의 맛있는 인생
이용재 평론가의 인생 궤도는 ‘먹고’, ‘읽고’, ‘쓰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맞벌이를 했던 터라 할머니가 해준 음식을 먹거나 직접 요리하는 일이 많았다. 자연히 음식에 관심이 생겼고, 관련 책을 탐독하기도 했다. 스물여덟 무렵 건축학도였던 그는 미국으로 유학 가면서 적적함을 달래려 요리를 독학했다고 한다.
“빵을 반죽하고, 스테이크를 굽고, 와인을 곁들여 마시기도 했어요. 본격적으로 전채부터 후식까지 코스를 짜서 만들고 먹는 모든 과정을 직접 소화해보는 거죠. 문득 취미 생활을 기록해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블로그에 글을 5년 정도 꾸준히 올렸어요. 그러던 중 대학원을 졸업하고 애틀랜타의 건축회사에서 일했는데, 경기가 나빠지면서 정리해고를 당했습니다. 당시 충동적으로 ‘글 쓰는 일을 해볼까?’ 하며 이력서와 몇 편의 글, 미국에서 재미있게 읽었던 책의 번역 기획안 등을 만들어 출판사와 잡지사에 보냈어요. 글쓰기의 뿌리는 그때부터였네요.”
맛을 둘러싼 가치와 철학
평론이나 비평은 가치를 분석하고 판단해 명료하게 전달하는 일이다. 그러나 음식 평론 자체만으로는 전문가의 자격을 심사받지 않는 분야인 탓에 비교적 고된 길을 걸어왔다. 7~8년 전, 그가 음식 전문지 ‘올리브’에 ‘한국 최초의 레스토랑’이라는 주제로 글을 연재하던 때였다. 당시 한국은 모던 한식,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의 개념이 막 주목받던 시기였다. 오랜 타국 생활로 다양한 음식 문화를 접한 데다, 건축 공부를 통해 균형 있는 관점까지 몸에 배 있으니 평론에 좀 더 객관적일 수 있었다. ‘먹고 겪은 대로 쓴다!’며 너무도 솔직한(?) 후기를 작성했고, 독자들은 ‘우리나라에 없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려는데 응원하지는 못할망정 알지도 못하면서 혹평한다’고 손가락질했단다.
“음식이 맛있다, 맛없다로 단순하게 판단할 문제는 아니에요. 재료의 특성과 조화, 조리의 원리, 사회적인 맥락 등을 통틀어 보거든요. 경력에 도움이 될 거라는 이유만으로 젊은 사람들을 싼 임금으로 고용해서 혹사하는 노동 현실, 유행처럼 번진 단기 요리 교육 과정, 부족한 실무 경험 등 여러 원인으로 레스토랑에서 선보이는 음식들의 완성도가 낮은 상태였어요. 감사하게도 제 글을 읽은 뒤 현실을 깨닫고 제대로 공부했다는 사람도 있었어요. 일종의 순기능이죠. 아무쪼록 개인의 의견과 괴리가 있을지라도, 요리라는 결과물이 나오기 전까지 과정이 와 닿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상상력에 불을 댕길 작품 속 음식들
수년의 경험과 철학을 꾹꾹 눌러 담은 저서는 어느덧 여덟 권이 됐다. 신간 ‘맛있는 소설’은 2019년 여름께, 한 방송국으로부터 교양 프로그램 출연 제안을 받고 기획했다. 소설 내 음식을 탐구하는 주제를 제안했는데, 소통이 매끄럽지 못했고 대우도 나빠서 결국 출연 결정을 철회했다. 방송 기회는 물 건너갔지만 출판의 가능성을 두고 기획안을 만들었다. 마침 지난 저서 ‘외식의 품격’을 함께 만든 편집자와 다시 뭉치게 됐다. 장난감 대신 세계문학 전집을 죽어라 읽던 어린 그로부터 시작된 산물일 테다. 그는 몇 번이고 되풀이해 보던 명작 ‘작은 아씨들’과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식재료의 속사정을 이야기한다. 또한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비프스튜와 콘비프샌드위치, ‘노르웨이의 숲’의 김에 싸서 간장에 찍은 오이, ‘댄스 댄스 댄스’의 유키가 마시는 피나콜라다 등을 한 울타리에 모았다. 비교적 최근 출간된 ‘채식주의자’, ‘82년생 김지영’을 통해 사회적 현실도 내포했다.
“2022년 내내 원고를 썼는데, 예상보다 훨씬 힘들고 버거웠어요. 항상 글로써 스스로를 증명하고 누군가를 납득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있던 터라, 냈던 책들과는 다른 시도를 했거든요. 특히 하루키 부분은 심한 압박을 받았습니다. 하루키의 소설은 음식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죠. 크게 소문난 식당은 반드시 찾아가 맛보고 리뷰를 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요. 흐름이 끊길까 봐 잠도 푹 자지 못했죠. 소파에서 새우잠을 자기 일쑤였어요. 그래도 완성하고 나니 소설이라는 식재료로 구성한 모든 메뉴가 충실한 뷔페 같더라고요. 책 만들기와 글쓰기는 제게 언제나 병증과도 같지만, 그것과 무관하게 독자들은 마음껏 맛보고 즐기셨으면 해요. ‘이 작가가 허투루 책을 내는 사람은 아니네, 두고두고 읽을거리가 있구나’라고 느낀다면 더 좋고요!”
올해에는 글을 써봐야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이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일까. 바로 글감이다. 무엇에 관해 쓸지가 문제다. 사실 글쓰기는 ‘어떻게’보다 ‘무엇’이 중요하다. 많은 사람이 내게 묻는다. “글을 ‘어떻게’ 해야 잘 쓰나요?” 질문의 순서가 잘못됐다. “‘무엇’에 관해 글을 쓸까요?” 이 물음이 먼저여야 한다.
무엇에 관해 쓸지 고민하는 이에게 나는 자신 있게 권한다. “자신에 관해 쓰세요. 자신에 관해 쓸거리는 세 가지가 있어요. 자신의 생각, 자신의 느낌, 자신의 경험이죠. 이 중 가장 쓰기 쉬운 게 자신의 경험입니다.”
누구나 쓰기 쉬운 ‘경험’
생각과 느낌을 쓰기는 어렵다. 하지만 경험을 쓰는 건 어렵지 않다.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나이만큼 있다. 내 경험은 내가 가장 잘 쓸 수 있다. 경험은 또한 차등이 없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든 낮은 사람이든, 돈이 많은 사람이든 적은 사람이든, 가방끈이 길든 짧든 경험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오히려 어렵고 힘든 사람이 경험은 더 풍부하다. 또 그렇게 아프고 슬픈 경험, 굽이굽이 험난한 경험이 탄탄대로를 걸은 경험보다 더 흥미진진하고, 가르쳐주는 것도 많다.
레프 톨스토이는 ‘어떻게 살 것인가’란 책에서 세 가지 방법으로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명상과 모방과 경험이 그것이다. 그리고 톨스토이는 이 세 가지 가운데 경험이 가장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글을 쓰는 데는 명상이나 모방이 더 어렵다. 있는 그대로를 서술하는 경험이 더 쉽다.
인생은 경험의 모음이다. 산다는 건 경험하는 것이다. 경험이 모여 삶을 이룬다. 첫사랑, 첫 출근, 첫 등교 등과 같은 첫 경험을 비롯해 숱한 만남과 선택의 경험 등 우리는 무수히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걸 글로 써보자.
경험을 쓰는 일곱 가지 방법
첫째, 기억을 떠올려보자. 어린 시절, 학창 시절 경험을 회상해보라. 떠오르는 기억이 없으면 그 시절 유행했던 노래도 들어보고, 빛바랜 사진첩과 일기장도 들춰보자. 당시 기사를 찾아보는 것도 좋다.
둘째, 스스로에게 질문해본다. ‘가장 기뻤던 순간, 슬펐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살면서 가장 후회스런 일은 무엇인가요?’, ‘그 당시로 돌아가면 어떻게 했을 것 같나요?’, ‘반대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무엇인가요?’, ‘만났던 사람 중에 가장 고마웠던 사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누구이며, 그 이유는요?’, ‘내 인생의 변곡점이 되었던 사건이 있다면요?’, ‘가장 충격적이었던 경험은 무엇인가요?’ 등등.
셋째, 탐문한다. 자신의 기억에만 의존하지 말고 사람들을 만나 자신의 이야기를 수집해보는 것이다. 부모님이 살아 계시면 그분들에게 여쭤보고, 형제자매, 과거 직장 동료, 어렸을 적 친구들을 만나 그 시절 아련한 추억에 잠겨도 보자. 스스로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혹은 자신도 모르고 있던 내용을 건져 올릴 수 있을 것이다. 또 자신의 경험만 글감이 되는 건 아니다. 부모님이나 친구들의 이야기도 내 글을 풍성하게 만드는 좋은 재료가 된다. 무엇보다 이런 기억 여행은 그 자체로 자신뿐 아니라 상대방에게도 좋은 선물이 될 수 있다.
넷째, 새로운 경험을 한다. 과거 기억만 쓰면 소재의 한계에 부닥친다. 밑천이 금세 드러날 수밖에 없다. 살고 있는 현재를 써야 한다. 현재를 쓰기 위해선 시도하고 도전해야 한다. 나는 매일 한 일을 기록한다. 기록이 없는 날은 허전하다. 기록이 빼곡한 날은 왠지 뿌듯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혼자서 흐뭇하다. 마치 고기 잡는 어부가 만선을 이룬 기분이랄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기록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한다. 경험하면서 살아 있음을 실감한다. 경험이 내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많다. 현업을 떠난 사람은 더욱 그렇다. 뿐만 아니라 그 나이까지 해온 경험이 있어 보다 원숙하게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직장에 다닐 때까지는 경험이 제약된다. 맡겨진 일, 시키는 일에 한정된다. 나를 위한 경험이 아닌 누군가를 위한 경험이다. 내 말을 하고 내 글을 쓰는 경험이 아니라, 남의 말을 듣고 남의 생각을 읽는 경험이다. 나이 들어 하는 경험은 잘해야 한다는 부담도 없다. 어차피 덤이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상황에서의 시도는 하는 만큼 남는 장사다.
다섯째, 미래도 괜찮다. 앞으로 일어날 것으로 예상하는 일, 바라고 소망하는 일도 훌륭한 글감이 된다. 10년 후, 20년 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고, 꿈과 목표를 이뤘을 때의 상황을 그려보자. 미래는 상상의 결과물이고, 간절하면 이루어진다고 하니까 말이다.
여섯째, 하지 못한 경험도 글의 재료가 된다. 나는 할 수는 있었으나 하지 않은 일이 있다. 정치인의 일이다. 아마 했으면 잘하지 못했을 것이다. 반대로 하고 싶었으나 못 한 일이 있다. 언론인이 되는 것이다. 아마 했으면 잘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런 내용을 글로 쓰면 된다. 이처럼 한 일만 경험이 아니다. 하지 못한 일, 하고 싶었던 일, 안 한 일 모두 경험이다. 미련의 경험, 희망의 경험이다.
일곱째, 독서다. 경험에는 직접경험과 간접경험이 있다. 내 몸으로 한 경험이 직접경험이요, 다른 사람의 경험은 간접경험이다. 간접경험은 책에 널려 있다. 이런 간접경험을 글에서는 사례라고 한다. 사례가 풍부할수록 글은 더 풍부해진다. 책을 읽고 사례를 찾아보자.
경험을 쓰는 방법
이렇게 쓸거리가 마련되면 ‘무엇’이라는 걸림돌은 사라진다. 다음은 ‘어떻게’ 쓸 것인지, 그 문제에 봉착한다.
먼저, 솔직하게 써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첫 관문은 솔직함이다.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경험을 말하는 용기로 그 문을 활짝 열어젖혀야 한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써야 한다. 오감을 모두 동원하고 육하원칙을 다 집어넣어 써라.
이야기 순서와 비중도 중요하다. 과거, 현재, 미래를 평면적으로 나열하기보다는 과거에서 미래로 비약하다 다시 현재로 돌아오고, 지금 이야기를 하다가 과거를 회상하는 식으로 어제와 오늘, 내일을 넘나들면 좋다. 시간뿐 아니라 좋은 일과 궂은일, 도와준 사람과 해코지한 사람, 친구와 천적이 번갈아 등장해야 한다. 또 어떤 이야기는 비중 있게 다루고, 어떤 이야기는 살짝 맛만 보여주는 식으로 무게를 달리해야 글에서 입체감이 느껴진다.
경험을 얘기한 후에는 그걸 겪으면서 느끼고 깨달은 바를 써야 한다. 독자들은 글을 재미있게 읽고도, 그것에서 얻는 게 없으면 실망한다. 다행히 모든 경험에는 시사점이 있다. 자신이 겪은 일에 관해 충분히 숙고해서 숙성시키면 깨달음과 깨우침을 얻을 수 있다. 바로 그 경험의 의미를 담으면 된다. 같은 경험도 각자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다음으로, 경험의 배경과 맥락을 추가한다. 그 경험이 어떤 배경에서 왜 일어났는지, 무엇이 그런 경험을 가능하게 했는지, 경험이 일어난 사회적·경제적 맥락과 상황은 무엇이었는지 설명해준다. 예를 들어 돈이 없어 학교에 진학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면 당시 사회의 경제적 조건은 어떠했는지 알려줄 필요가 있다.
끝으로, 경험을 일반화해줘야 한다. 자신의 경험만 쓰고 말면 독자들이 “왜 당신 얘기를 내게 하는 거야?”라고 물을 수 있다. 그때 일반화를 통해 “이건 나만의 얘기가 아니고, 당신에게도 해당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일반화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유사한 경험을 한 유명한 사람의 일화를 소개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경험이 자신만의 것이 아닌, 모든 사람의 것으로 보편화된다.
경험이 주는 혜택
경험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선사한다. 그 하나는 자신을 발견하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쉰 살 전까지 말하는 게 가장 두려웠다. 어떻게든 말하는 자리를 피했다. 말 안 해서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데 쉰 살 넘어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을 맞았고, 말을 해보니 내가 말을 못하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았다. 아니, 말하는 게 즐거운 사람이었다. 만약 쉰 살 넘어서도 직장에 계속 다녔으면 말없이 살았을 것이고, 죽을 때까지 내가 말할 수 있는 사람이란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강의나 방송 일을 경험하면서 내가 말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알았다. 경험은 나조차 몰랐던 나를 아는 기회가 된다.
경험은 또한 보다 넓은 시야를 갖게 해준다. 나의 마지막 직장은 출판사였다. 거기서 불과 일 년 좀 넘게 일했지만 그때의 경험으로 나는 출판업계를 알게 됐고, 내 책을 쓰게 됐다. 당시 나는 새로운 우주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우주가 있을까. 정유소, 편의점, 마트, 음식점 등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들 하나하나가 그 안에 우주를 품고 있을 것이다. 그 세계에 들어가 경험해보면 밖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내가 모르던 신천지가 펼쳐진다.
경험은 치유의 메시지도 준다. 지난 기억을 곱씹어보면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다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서럽고 안타깝고 후회스러운 기억 모두 의미가 있다. 그런 기억을 더듬다 보면 아픈 상처가 아물고 치유된다.
경험은 다음 세대에게 본보기도 된다. 이 땅에 와서 살았으면 뭐라도 남기고 가야 할 것 아닌가. 경험이 개인에 머물면 기억에 불과하지만 이걸 글로 쓰면 다른 이에게 영감을 주고, 누군가의 멘토가 될 수 있으며, 다음 세대에까지 전승된다.
모든 사람은 한 권의 책이다. 그것도 이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책이다. 나만의 경험을 기록하자. 기자같이 오늘의 나를 쓰고, 사관처럼 자신의 역사를 써 내려가자.
“시골로 내려가겠다고? 그건 좀 미친 짓 아닌가?” 김화자(59, ‘꽃피는 산골농원’ 대표)는 이런 핀잔을 종종 들었다. 그러나 귀에 담지 않았다. 시골살이의 고독과 농사의 고난을 헤쳐나가느라 몸은 물론 마음마저 상할 수 있으니 충분히 숙고하라는 충고쯤으로 여기고 시골행에 시동을 걸었다. 시골살이는 김화자 부부에게 오래 묵은 로망이었다. 복잡한 도시에서 벗어나 부부 단둘이 시골에서 오순도순 살고 싶다는 꿈에 무슨 결함이 있으랴. 김화자에게 귀농은 자연스러운 이행(移行)이었던 같다. 상류의 물이 하류로 흘러가는 것과도 같은 순행. 올해로 그는 귀농 11년 차를 맞이했다. 애초 귀농을 만류했던 이들의 말이 이젠 사뭇 달라졌단다. “어라, 이 사람들 성공했네!”
김화자의 집은 무주군의 명산 적상산 아래에 있다. 한갓진 외딴집이다. 집 앞엔 개활지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인상적인 건 이 집에서 바라보이는 산 풍경이다. 뒤편으로는 적상산이 떡 버티어 집을 보듬었고, 앞쪽에선 대호산이 뭔가 서기를 풍겨 생동감을 부여한다. 저 멀리 아스라이 덕유산도 보인다. 하얀 눈을 뒤집어쓴 그 산의 정상부는 아예 설산인데,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를 편집해 붙인 듯 신비감이 감돈다. 여기나 저기나, 앉으나 서나, 밤이나 낮이나 산들의 동향을 관찰하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환경이다. 산경(山景)에 심취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에게 적격인 삶터다. 김화자는 마땅한 시골을 물색하기 위해 남편과 함께 여러 지역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인터넷에 매물로 나온 이곳을 둘러보고 곧바로 부지를 사들였단다. 첫눈에 호감이 가서.
“이왕이면 산세 좋은 곳에 터를 마련하고 싶어 강원도와 경기도 북부 지역 곳곳을 답사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곳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강원도의 산세를 닮은 분위기에 보자마자 반했으니까. 깊은 맛을 풍기는 산세에다 탁 트인 경관까지 보기 좋게 어우러져 즉시 매입했다. 철탑이나 축사가 인근에 없는지, 가격은 합리적인지, 갖가지 꼼꼼한 점검부터 하는 게 매입 수칙이라지만 그런 걸 다 생략하고 샀다. 한참 뒤에 알고 보니 시세보다 훨씬 비싼 땅값을 치렀더라.(웃음) 하지만 억울하진 않았다. 취향에 맞는 터를 구입했다는 기쁨이 더 컸으니까. 터를 정하고 나자 지인들이 ‘미쳤다’는 소리를 또 끄집어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무주에서 무슨 재주로 살 거냐면서.(웃음)”
초기 5년은 혹한기
터 일대의 자연환경 하나에 꽂혀 일을 저지른 셈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날 이때까지 대체로 순탄한 시골살이를 해왔으니까 말이다. 터에 서린 무슨 지령(地靈)의 선한 감독을 받았을 리 없겠지만, 첫눈에 반한 땅이 주는 만족감을 정서적 기반으로 삼아 순항을 해왔으니 김화자에겐 영락없는 명당이다. 귀농 전에 그는 경기도 고양시에서 살았다. 남편과 함께 문구점을 18년간 운영하다가 접고 시골로 들어온 것.
“자영업이 대부분 그렇듯 자유시간이 없다. 스트레스도 많고 갑갑증이 난다. 더구나 우리는 휴일 없이 일에 매달려 살았다. 덕분에 문구점 규모를 키울 수 있었지만 언젠가는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 일찍부터 아이들을 다 키운 뒤엔 시골에 가서 마음 편하게 살 작정을 했는데, 마침내 적당한 시점에 이르러 가게를 청산하고 2013년에 이곳으로 내려왔다.”
도시에도 장점과 매력 요소가 많다. 시골이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됐나?
“돈을 벌기엔 도시가 한결 유리하겠지만 만족할 만한 좋은 삶을 꾸리는 데엔 시골이 더 낫다고 봤다. 그리고 그 좋은 삶이란 시골의 깨끗한 자연환경 속에서 텃밭을 일구고 정원을 가꾸는 식의 여유로운 활동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유롭고 평온하게 살고 싶어 오랫동안 시골을 꿈꾸었던 거다. 어휴, 도시는 참 싫다. 스트레스와 부자유는 물론 교통체증과 매연에 질렸다.”
농사는 어떤 작물을 하나?
“농원의 전체 부지 1800평 중 1500평에다 사과와 블루베리 농사를 한다. 처음엔 사과 농사만 하다 나중에 블루베리를 추가했다. 애초 우리는 귀촌 형태의 시골살이를 구상했다. 호미자루 한 번 손에 쥐어본 적 없는 나로서는 본격적인 농사는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그냥 한가하게 살고자 했다. 인근에 구천동 관광지구가 있으니 상황을 봐서 나중에 민박집을 하면 되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정작 들어오고 나서는 귀농 쪽으로 방향이 잡혔다.”
그렇게 된 계기가 있겠지?
“원래 이 터 일부에 사과 과수원이 있었던 데다 마을 주민들이 사과 농사를 하라 권유를 해 입문했다. 무주는 사과 특산지구다.”
농사 초심자가 과수원에 뛰어들었다. 막막한 게 많지 않았을까?
“처음 1년은 너무도 힘들었다. 호미로 풀을 메다가 집어던지고 주저앉아 펑펑 울기도 했다. 문제는 농사에 관한 아무런 사전지식도 없이 덤벼들었다는 데에 있었다. 그래서 무주농업대나 농업기술센터를 통해 열심히 배웠다. 여러 해에 걸쳐 농업교육을 이수하면서 농촌체험학습지도사, 농식품가공기능사, 팜파티플래너 1급 지도사, 다육아트지도사 등 다수의 자격증을 땄다. 농촌융복합산업 사업자 인증도 받았고.”
당초 귀농에 뜻을 두지 않고 내려왔지만 어차피 본격 농사에 승차했으니 제대로 한번 달려보자! 아마도 그런 결기가 작동했던 게 아닐까? 김화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직시하고 민감하게 움직이는 걸로 귀농 생활을 개척해나갔다. 그러자 매사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농사일이 즐거워졌다. 비록 고달픈 노동이 연속으로 이어지는 나날이지만 도시에서와 달리 마음은 편하고 여유로웠다. 하지만 농사로 얻는 수익은 쉬 오르지 않더란다. 초기 5년은 혹한기였다는 것.
“월 300만 원, 즉 연간 3500만 원 정도의 순소득을 목표로 삼았다. 그쯤이면 부부 둘이 먹고살기에 충분할 거라 봤다. 하지만 손에 쥘 게 거의 없었던 초기 5년간은 많은 고심을 하며 지냈다. 다시 말하자면 자리 잡는 데 5년이 걸린 셈이다.”
그마저 괜찮은 성적이지 않나? 10여 년이 지나서야 궤도에 오르는 귀농인도 많다.
“우리는 친환경 농법으로 사과와 블루베리를 생산한다. 따라서 품질이 좋다. 이게 입소문이 나면서 찾는 이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농사 자체는 쉽지 않다. 특히 자연재해엔 속수무책이다. 농부가 최선을 다해도 물과 햇빛이 도와주지 않으면 망칠 수 있다.”
일찍이 현자가 말했더라. 하늘은 때로 사람을 공깃돌처럼 가지고 논다고. 어떤 식의 자연재해를 경험했나?
“태풍이 몰아쳐 사과나무들을 쓰러뜨렸다. 낙과 발생이 극심해 팔 만한 게 없었다. 밤낮없이 나무를 일으켜 세우는 작업을 하며 울었다.(웃음) 봄철에 느닷없이 쏟아지는 우박, 긴 장마, 겨울 가뭄 등 수시로 악재와 부닥친다. 자연 앞에서 사람은 나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걸 실감하며 산다. 그러나 행복감을 맛보는 때가 아주 많다.”
어떤 때에?
“창밖이 밝아오는 아침에 눈을 뜰 때, 가만히 피어나는 들꽃을 바라볼 때 참 좋다. 밭에서 힘겹게 일하면서도 내가 지금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산다는 자각을 할 때도 행복하다. 이건 도시에서 가게를 할 땐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경험이다.”
괜히 시골에 들어왔다는 후회는 없었는지?
“한번은 사다리를 타고 사과나무를 돌보다가 떨어져 발목뼈 세 군데가 부러졌다. 게다가 수술마저 잘못돼 무려 2년간 심한 고생을 했다. 그때 처음으로 회의를 느꼈다. ‘아이고, 내가 왜 시골에 와서 이 고생을 하지?’(웃음) 하지만 잠깐 스쳐가는 후회에 불과했다.”
이미 얻을 건 다 얻었다
그의 농원은 정갈하고 쾌적하다. 2층으로 지은 살림집과 정원 공간, 체험장과 가공공장, 사과와 블루베리 밭, 또는 이리저리 이어지는 통로 등이 유기적으로 구성돼 조화로운 한편 기능성을 극대화했다. 부부가 쏟아부은 비지땀과 능력과 시간의 산물이다. 농장의 핵심 공간은 체험장이다. 이곳은 급조한 비닐하우스지만 내부 치장이 꽤 흥미롭다. 벽면에 걸린 수예품과 그림들, 선반에 올라앉은 공예품들, 너른 자리를 차지하고서 재잘거리는 수백 점의 다육식물들. 이것들은 모두 김화자가 손수 만들거나 가꾼 것이라는 점에서 가히 독창적이다. 그는 이곳에서 방문객들을 상대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우리 농원은 무주군 1호 치유농장이다. 과수 농사만 하다가 치유체험농장으로 전환한 이후 나름의 성장을 해왔다. 체험장에 있는 모든 사물이 치유 프로그램 소재로 쓰인다. 이건 실로 만족스런 대목이다. 나의 취미와 취향을 즐길 수 있는 수단을 프로그램화해 남들과 공유하고 소득까지 올리고 있으니까.”
일과 취미를 접목한 셈인가?
“시골에서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놀자는 게 기본 목표였는데 그게 이루어졌다. 처음엔 농사만 했지만 노동만 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나? 취미 역시 제대로 즐겨 삶의 질을 높이고 싶었는데 그게 이루어졌다.”
흔히 원주민이나 귀농인이나 농사에 매몰돼 취미 내지는 문화 활동과 무관한 일상을 산다. 당신의 스타일은 독특하다.
“내가 경험한 시골 인심은 정겹고 순박하다. 그러나 평생 호미를 쥐고 사는 할머니들을 보면 안타깝다. 때로 그들을 농원에 모셔 그림을 그리게 한다. 그러면 무표정하던 얼굴에 생기가 돌더라. 귀농인들도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문화를 즐길 수 있다. 난 읍내 합창단에 가입해 노래를 즐기기도 하는데, 문화 동아리도 많고 싼값에 볼 수 있는 공연이나 이벤트도 풍성한 게 요즘의 지방이다.”
성공한 귀농인이라는 얘기를 듣는다지? 이제 농원에 무엇을 더 보탤 계획인가?
“2023년 매출이 약 9000만 원이다. 이쯤이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수준이다. 차후 게스트하우스를 하나 지을까 생각 중이지만 사실 얻을 건 이미 다 얻었다. 부부가 노후를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고, 자식들이 놀러 와 맘껏 놀다 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으니까. 무엇보다 그토록 바랐던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고 있어 기쁘다.”
원했던 곳에서 원했던 삶을 발굴해 지속한다는 건 아마도 인생의 최고봉이다. 섣부른 귀농으로 인생이 외려 꼬이는 수도 있지만 과욕 없는 열렬한 행보라면? 김화자의 방식엔 은근히 개성과 패기가 박혀 있다.
김화자가 주는 귀농 Tip
•마음을 비우고 귀농하자. 꽉 채워진 마음엔 새로운 게 들어설 자리가 없다.
•성향이나 기질이 농촌 생활과 어울릴지 면밀히 점검하고 귀농 여부를 결정하자.
•귀농 초기의 고생은 통과의례로 여기고 귀농하자. 5년 차까진 수련기로 작정하는 게 현명하다.
•처음엔 집을 빌려 쓰라고들 하지만 아예 내 소유 집부터 짓는 게 좋을 수 있다. 초기의 어려움에 질려 너무 쉽게 역귀농하는 사례를 볼 수 있는데, 집을 지어놨을 경우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아 인내하며 활로를 찾아가기도 한다.
•작목은 가급적 지역 특산물을 선택하자. 관의 지원을 받을 수 있고, 생산물 유통의 이점이 크기 때문이다.
•남자만의 귀농은 금물이다. 부부가 함께 귀농하자.
“저보다 많이 실패해본 사람이 있을까요?” 25년 동안 300채의 한옥을 지은 김장권 북촌HRC 대표는 우리나라에서 한옥을 제일 많이 지었다는 이야길 듣는다. 그럼에도 그는 지은 집의 수보다 실패해본 횟수를 자랑하고 싶다고 했다.
“물론 부끄럽고 미안하다”며 겸손하게 말했지만, 김장권 대표는 ‘퍼스트 펭귄’으로 불린다. 실패의 위험을 감수하고 누구보다 먼저 도전해 다른 이들을 뒤따르게 하는 개척자다. 각종 상을 받은 ‘채효당’, ‘#200’, ‘관훈재’, ‘가회동 L주택’에는 그의 도전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한옥은 우리를 떠난 적이 없다
2000년대 초반 그는 ‘한옥으로 들어가자’고 주장했다. “한옥은 우리를 떠난 적이 한 번도 없다. 우리가 버리고 방치했을 뿐. 그러니 한옥으로 들어가자”는 게 그의 뜻이었다. 김장권 대표는 한옥이라는 공간을 다루면서 ‘변화를 주어야 할 것과 변화를 주지 말아야 할 것’을 늘 고민하고 강조한다. 본질과 흔적에 대한 이야기다. 요즘 지어진 한옥을 보면 형태나 구조는 한옥이지만 비례나 모양이 한옥이 아닌 변형된 집이 너무 많다고 했다. 복습과 답습만 해서 그렇단다. “카피를 하더라도 제대로 하면 좋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그래서 김 대표는 ‘포스트 클래식’한 한옥을 주장한다. 본질을 지키되 현대에 필요한 것들을 활용하자는 것이다. 더 많은 사람이 한옥에서 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현대인이 살기에 불편한 점을 하나씩 고쳐나갔다.
김 대표는 일제강점기 이전, 조선 말 정도에 지어진 집들이 우리가 이어나가야 할 한옥의 본질이라고 본다. 본질은 꼭 지키되 몇 가지는 현대에 맞게 바꿀 필요가 있다. 당시에는 전기가 없었기 때문에 에어컨, 냉장고, TV, 전화기 등의 가전제품이 들어갈 공간이 없었다. 또 과거에는 사랑채, 안채 등 대지를 넓게 활용했지만, 요즘 시대에는 불가능한 얘기다. 단열도 중요하다. 과거 조상들은 효율성이 떨어지는 흙을 소재로 집을 지었지만, 요즘에는 단열도 잘 되면서 대체할 수 있는 친환경 재료가 많다.
“저는 한옥이 가지고 있는 ‘가구결구식’이라는 양식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짜맞춤이죠. 그런 이야기 들어보셨어요? 한옥 지을 때 ‘못 하나 안 쓴다’는 말이요. 주먹장이라고 해서 한번 끼우면 빠지지 않고 서로 맞물리도록 설계된 게 한옥입니다. 이런 가구결구식이 한옥의 본질이라고 봐요. 원형은 존중하되, 현대 한옥에 맞는 작법을 담을 수 있겠죠. 요즘은 빗물 재활용이나 태양에너지를 덧대는 요소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그의 생각을 담은 작품이 ‘관훈재’다. 21세기 한옥 트렌드를 고민했던 김 대표는 수직적 확장성이 다음 한옥의 트렌드로 변화의 기점이 될 것이라 봤다. 당시만 하더라도 서울시에서는 한옥을 2층으로 지을 수 있도록 허가해주지 않았다. 그의 설득에 서울시 지원을 받아 처음 2층으로 지은 한옥이 관훈재다. 그는 다음으로 3층 한옥을 만들자고 건축주를 열심히 설득하고 있단다.
한옥이 가진 ‘공간의 힘’
그는 왜 25년 동안 한옥만 지었을까? 왜 한옥이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게을러서 그렇다”며 겸손한 답을 내놨다. 당시만 하더라도 30~40층짜리 건물 하나를 지으려면 엄청난 비용과 책임을 감당해야 했다. 김 대표는 사람이 사는 일반 주택을 짓고 싶었다. 요즘은 또 다르다지만 그때는 낭만도 있었다고.
“비 오면 건축주가 술 먹자고 했던 때죠.(웃음) 이사 들어올 집이 아니라 정주의 공간이기 때문에 서두르지도 않았고요. 어음이나 수표로 집 짓는 사람도 없었으니 도산 걱정도 없었죠. 목숨 걸고 하지 않는 일이라 좋았어요.”
일반 건축에 비해 한옥은 진입 장벽이 높은 건축물이었다. 당시에는 궁이나 사찰을 짓는 사람들이 주거용 한옥을 지었다. 하지만 김 대표는 사람이 실제 거주하지 않는 궁이나 사찰보다 누군가의 이야기가 담긴 집을 짓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항상 건축주에게 ‘살고 싶은 집’에 대해 묻는다. 한옥은 ‘맞춤형’ 집이기 때문이다.
일반 주택과 아파트를 비교하자면 아파트가 담보대출이 더 많이 나온다. 김 대표는 ‘집’이 또 다른 ‘화폐’ 역할을 하는 거라고 설명했다. 같은 평수의 같은 형태의 아파트는 비교가 가능하기 때문에 재화로서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주택은 집집마다 다르게 생겨 비교하기 어렵다. 건축주에게 물어보면 집이 아니라 터만 보고 샀다는 사람이 많았다. 지을 때는 아파트 리모델링보다 더 비싸게 드는 게 주택인데, 잘 팔리지도 않고 대출 담보력도 크지 않다. 그렇다면 한옥 주택이 아파트와 다르게 가질 수 있는 가치는 뭘까. ‘공간의 힘’이다.
“한옥에는 행태적인 요소가 들어갈 행간이 많아요. 행태라고 하면 문을 열 때 사람이 문고리를 잡는 방식에 따른 문고리 모양, 아이들이 사용하는 방에 필요한 난간 모양 등을 고려하는 거죠. 굉장히 중요한 요소예요.”
지인이 영국에서 공부하다 한국에 들어왔는데, 재래시장에 갔다가 울었다고 한다. 물건을 살 때 아주머니가 얹어준 ‘덤’을 보고 ‘아 그래, 이곳이 한국이구나’ 느꼈단다. 서양의 건축은 나무가 휘고 변형되지 않도록 집성을 한다. 하지만 한옥에는 굵은 나무도 있고, 균열이 간 나무도 있고, 문이 딱 맞지 않아 바람도 들어온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무의 속성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김 대표는 이런 덤과 여백의 문화가 우리 민족성이라고 본다.
“한옥에는 쪽마루나 툇마루가 있어요. 밖도 아니고 안도 아니에요. 우체부 아저씨가 오면 잠시 앉아서 물 한잔 마시고 가라고 합니다. 덤 문화처럼 딱 부러지게 이야기할 수 없는 우리만의 요소가 휘어진 석가래, 비뚤어진 문, 마당에 담겨 있습니다. 그 집에 사는 사람의 생활 영역에 흔들림도 파장도 주지 않으면서 방문객을 대하는 유연함이랄까요. 한옥에는 그런 것들을 아우르는 공간이 있지 않나 싶어요. 그래서 살고 싶은 집을 물어요. 주거 공간은 건축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건축주를 위한 건물이 되어야 합니다. 건축은 생활의 손때 묻은 시간과 삶의 흔적이 완성시키는 것이거든요.”
설계는 감각이 아니라 미학이다
김 대표는 어릴 때 문학 소년이었다. 지금도 소설가를 꿈꾼다. 그는 한옥에서 소설과 같은 매력을 느꼈다. 직유가 아닌 은유가 많은 공간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바람이 분다’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봤는데요. 거기서 비행기 설계에 관한 이야길 하면서 카프로니 백작이 주인공 호리코시 지로에게 ‘설계는 감각이네. 감각은 시대를 앞서가지. 기술은 그다음에 따라오는 거야’라고 했어요. 너무 멋진 말이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여기에 본질을 더하고 싶어요. 저는 ‘설계는 미학이다’라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 아름다움의 본질이 미학이잖아요.”
많은 아이들이 아파트에서 태어나 아파트에서 살아간다. 주택이 익숙지 않은 사람이 더 많아질 것이다. 인구도 줄어드는 마당에 아파트에서만 살아본 사람들이, 먼 미래에 과연 한옥을 찾을까? 한옥의 ‘쓸모’는 미래에도 유효한가 물었다.
“건축은 시간 앞에 거짓이 없다고 말합니다. 지금 남아 있는 건축들을 볼까요? 필요해서 남았나요? 버리고 싶은 건축물이라면 지워졌을 겁니다. 보존된 건물들은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고 봐요. 그게 사회적 가치가 아니어도, 어느 개인에게 가치 있는 건물일 수 있죠. 그러니 건축이야말로 시간 앞에 가장 정직한 작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사무실에서 바로 보이는 인촌 고택이 100년 된 한옥인데, 이를 현대에 와서 똑같은 한옥으로 지었다고 봅시다. 어떤 집이 더 가치 있을까요? 100년 전에 지은 한옥입니다. 그 이유는 시간의 영속성, 그러니까 그 집에 담긴 역사가 있기 때문이라고 저는 말합니다.”
그러니 오래된 한옥은 미래에도 여전히 유효할 거라고 본다. 김 대표는 또 다른 이유로 도시재생을 예로 들었다. 도시재생을 할 때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없앨 것이냐’에 대한 고민이 주를 이룬다. 여기서 다시 ‘본질과 흔적’으로 돌아온다. 도시재생을 하는 방법으로 ‘멸실형’과 ‘수복형’이 있다. 멸실형은 기존 건물을 없애고 새로 짓는 방식이다. 수복형은 야금야금 본채를 수복하면서 고쳐나가는 방법이다. 아파트는 대개 멸실된다. 그래서 서울이 고향인 사람 중에 어릴 적 살았던 아파트가 사라지고 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이들이 많다. 고향이 있지만 고향이 없는 셈이랄까. 그래서 그는 조금씩 수복하며 자리하는 한옥이야말로 회복탄력성이 높은 도시재생이라고 본다.
“설계는 미학이라고 했죠. 그런데 문화가 변하잖아요. 당시에 미학이라고 본 것이 나중에 보면 아닐 수 있거든요. 그런 것을 다시 고쳐나갈 수 있는 게 우리스러운 것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한옥이 가장 완벽한 본질에 접근성을 가지고 있는 건축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한옥스럽다’, ‘우리스럽다’고 하는 요소는, 역사와 문화 베이스를 담은 공간이라는 점입니다.”
회한을 소급받는 공간, 한옥
김장권 대표는 여백이 있는 공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가 잃어버린 요소를 담아줄 것이라 믿는다. 현대인은 너무 바쁘게 사느라 자신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한옥에는 나를 돌볼 공간이 있다. 아파트에는 장을 담글 공간이 없다. 햇빛과 바람이 자연스럽게 드나드는 한옥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아파트에는 엄마나 아빠를 위한 공간도 없다. 아이들에게 방을 내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동묘지 들어가는 것도 경쟁하는 세대라고 했어요. 저도 이제 60이 넘었는데, 우린 여전히 활동해야 하잖아요. 미래에도 유효한 삶, 가치 있는 삶, 건강한 삶을 살아가야 하죠. 마치 오래된 미래의 한옥처럼요. 우리는 지난 회한을 소급받고 싶어 하는 나이입니다. 그 회한이란 추억일 수도 있고, 향수일 수도 있겠죠. 그런 마음을 담을 수 있는 공간적 요소가 한옥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곳에서만 마치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시간이 느리게 가는 한옥을 짓고 싶다고 했다. 비 떨어지는 소리도 들리고, 눈 내리는 것도 볼 수 있는, 건축이 공간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바람과 새와 구름이 공간을 채워주는, 그 안에서 나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집 말이다.
“흔히 살아온 이야기만 해도 책 한 권은 쓸 거라고 그러죠.(웃음) 굳은살투성이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노후를 앞둔 우리의 경험이 존중받지 못하는 시대지만, 거기에는 우리의 책임도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자존감 높은 삶을 살아가는 시니어가 되면 좋겠습니다. 누구와도 견주지 않는 멋있는 삶을 위해, 내 지난 회한을 소급받고 싶은 마음을 받아주는 곳이 바로 한옥이지 않을까요? 치유하는 공간으로서 오래도록 한옥과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와 ‘서울시50플러스재단’은 서울시 보람일자리 사업을 통해 인생의 재도약을 꿈꾸는 4050 세대를 응원하기 위해, ‘모두 위한 내 꿈, 다시 뛰는 4050’ 캠페인을 펼칩니다. 본지는 서울시와 서울시50플러스재단이 함께한 보람일자리 사업을 통해 사회 곳곳에서 공공에 기여하고 있는 중장년들을 소개합니다.
우연히 찾은 산에서 병마를 씻어냈다. 그렇게 산과 사랑에 빠졌다. 오세옥 씨의 이야기다. 한동안 힐링을 준 산에서 노년의 꿈까지 만났다. 안전산행지원단에게 받은 도움을 돌려주기 위해 4개월 넘게 구애한 오 씨. 그는 이제 산으로 출근한다.
쌀쌀한 기운이 감도는 한 해의 끝자락. 투박한 등산화가 무거워 보일 정도로 가녀린 여성이 씩씩하게 북한산국립공원 수유분소를 향해 걸어 내려왔다. 작은 체구에 속아서는 안 된다. 안전산행지원단 내 ‘끈질긴 집념’으로 유명한 오세옥 씨다. 수혜자로 도움을 받다 참여자가 된 그를 두고 서울시50플러스재단 북부캠퍼스 안전산행지원단 담당자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추가 합격 없냐는 전화를 몇 번이나 받았는지 몰라요. 저를 참 곤란하게 한 분이죠!”
예비 4번의 무한도전
전업주부로 오랜 시간 살림을 도맡아온 오세옥 씨는 한때 2개월가량 병원 신세를 질 정도로 몸이 좋지 않았다. 심신이 피폐해진 그에게 위로가 된 건 다름 아닌 산. 등산만 하면 생기가 돌았고, 자연스럽게 병원을 드나드는 횟수도 줄었다. 그 후로 오 씨는 산에 매료됐다. “아프지 않을 뿐만 아니라 활기가 넘치더라고요. 기분이 좋으니까 가족들한테도 잘하게 되고요. 좋은 이유가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산이 인생을 치유해주는 것 같은 느낌까지 받았어요.”
오세옥 씨는 집에서 가까운 도봉산을 매일같이 다녔다. 신중년 경력형 일자리 사업 참여로 도봉산 환경을 보호하는 봉사활동도 했다. 안전산행지원단을 만난 것도 도봉산에서다. 환경보호 활동, 안전설비 점검 등을 주로 해오던 안전산행지원단은 2023년부터 탐방객에게 더욱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오 씨도 그렇게 도움을 받았다. “여성, 노인, 외국인 등 초보 탐방객에게 하는 탐방로 안내 등 여러 지원이 인상적이었어요. 스틱 사용법, 등산화 매듭법도 배우고 나니까 정말 좋더라고요. 산을 그렇게 많이 다녔어도 다 제 맘대로였거든요. 제대로 알고 나니 필요성을 더 느꼈어요.”
팀으로 움직이며 체계적으로 활동하는 안전산행지원단을 접할 기회가 늘면서 오 씨 마음에는 새로운 꿈이 자리 잡았다. 도움을 받는 수혜자에서 도움을 주는 참여자가 되고 싶다는 바람이다. “안전산행지원단 이미지가 좋았어요. 서울시50플러스재단의 보수교육, 전체회의 등 관리와 활동도 마음에 들어서 지원하게 됐죠. 결과는… 예비 4번이었어요.”
활동하지 못하는 동안 오세옥 씨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틈만 나면 담당자에게 연락해 추가로 들어갈 자리가 있는지 물었다. 장장 4개월여 동안 그렇게 집념을 보였다.
산 애호가에서 산 전도사로
“예비 4번이면 기회가 안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어요. 인기가 높은 편이라서요. 그런데 마침 자리가 난 거예요.” 서울시50플러스재단 안전산행지원단 담당자의 말이다. 오세옥 씨는 활동을 시작한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9월 15일부터예요. 4개월을 기다린 끝에 추가 합격했어요. 활동한 지 얼마 안 돼 아직 낯설지만 팀원들 모두 좋아서 재밌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안전산행지원단은 북한산국립공원 6개 분소(산성, 구기, 정릉, 수유, 우이, 도봉)에 40명이 배치돼 활동하고 있다. 오 씨는 집 인근 도봉, 우이분소에서 다소 먼 수유분소에 배정됐지만 마냥 즐겁다고 했다.
참여자로 활동하는 사이 재밌는 경험도 했다. “한 탐방객이 산행 도중 빈병을 길에 버리고는 발로 차 숲속에 숨기는 걸 보고 제가 얼른 주웠어요. 그랬더니 ‘왜 주우세요?’하고 묻더라고요. 안전산행지원단 참여자인 걸 알리고 주의를 주니까 그제야 무안해하며 빈 병을 배낭 속에 넣더군요. 이제 그분은 함부로 쓰레기를 버리지 않겠죠. 그렇게 생각하니 참 보람 있는 것 같아요.”
오세옥 씨는 산 전도사로 거듭나고 있다. 규칙적인 안전산행지원단 활동으로 힐링을 얻을수록 더욱더 강력하게 산을 권한다고 했다. “봉사하러 왔는데 사실 얻어 가는 게 더 많아요. 돈으로 따질 수 없을 정도로 좋아요.”
오 씨의 안전산행지원단 사랑은 계속될 예정이다. 또 한 번의 지원을 예고하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이제 예비 번호는 받고 싶지 않아요. 바로 합격하겠습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와 ‘서울시50플러스재단’은 서울시 보람일자리 사업을 통해 인생의 재도약을 꿈꾸는 4050 세대를 응원하기 위해, ‘모두 위한 내 꿈, 다시 뛰는 4050’ 캠페인을 펼칩니다. 본지는 서울시와 서울시50플러스재단이 함께한 보람일자리 사업을 통해 사회 곳곳에서 공공에 기여하고 있는 중장년들을 소개합니다.
‘에너지컨설턴트사업단’은 서울시 내 공공시설 및 학교의 에너지 진단과 컨설팅 일을 한다. 다양한 경험과 사연을 가진 이들이 에너지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열정 넘치는 이경구(59) 씨는 눈길을 끄는 존재다.
지난해 은퇴한 이경구 씨는 정보통신 대기업에 무려 34년간 몸담았다. 정보통신 연구 일을 시작으로 공공기관 및 지자체 B2B 마케팅 업무를 수행했다. 열심히 살아온 그는 ‘은퇴는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다양한 분야에 호기심이 넘쳤고 인생 2막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터. 그는 한국형 전직지원 전문 업체 이음길HR을 찾았다.
전직을 위한 교육을 받으면서 이경구 씨는 서울시50플러스재단과 보람일자리를 알게 됐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에서 나온 강사들은 다양한 보람일자리를 소개했다. 그중에서도 남부캠퍼스의 에너지컨설턴트사업단이 그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당시를 회상하며 “귀에 딱 꽂혔다”라고 말하는 이경구 씨. 정보통신 분야의 기술 경력을 살려 에너지 컨설턴트 업무와 연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보통신업에서 에너지 컨설턴트로
에너지 컨설턴트는 무슨 일을 할까. 서울시에서는 ‘2050 탄소 중립’의 일환으로 노후 건물을 친환경으로 바꾸는 ‘그린 리모델링 사업’을 시행 중이다. 에너지컨설턴트사업단은 그 과정에서 꾸려졌다. 사업단은 서울시 내 공공시설 및 학교 건물의 리모델링 전후 에너지 사용량과 손실량을 실측하고, 에너지 진단 결과를 바탕으로 모니터링 보고서를 작성한다.
“5명이 한 팀을 이뤄서 활동하고 있어요. 학교 같은 경우에는 점검해야 할 사항이 많아서 8명이 투입됩니다. 팀으로 움직이면서 협력하다 보니 장점이 많아요.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기도 하고, 배우는 부분도 많죠. 우리는 벽·지붕·창문 등이 단열 역할을 제대로 하는지, 옥상에 설치된 태양광이 잘 작동하는지, 환기 시설 장치를 잘 사용하고 있는지 등을 점검합니다. 그리고 결과물을 산출하는 역할을 하지요. 데이터 시스템을 활용하긴 하지만 수학적인 부분도 필요하고, 머리를 써야 하기 때문에 절대 쉬운 작업이 아닙니다.”
이경구 씨는 주로 경로당과 학교를 방문했다. 방문 전에 미리 연락을 드리고 사업을 설명하는데, 경로당의 경우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 거냐”, “우리는 필요 없을 것 같다” 등의 반응이 돌아오기도 한다. 그러나 막상 방문하면 어르신들이 매우 환영해주고, 에너지 점검을 하는 모습을 멋있게 봐주신다. 이경구 씨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경로당에 갔을 때 기기가 설치되어 있는데도 어르신들이 몰라서 못 쓰시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하나하나 설명해드리면 정말 좋아하시죠. 성북구 종암동 제2경로당을 찾았을 때는 이런 일도 있었어요. 어머님들이 햇빛·빗물 가리개 처마, 완만한 경사로 등을 만들어달라고 하신 거예요. 그런데 제 영역이 아니어서 도움을 드릴 수 없었어요. 어르신들께서 불편해하는 상황을 뒤로한 채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무거웠습니다.”
친환경 운동에 앞장서다
세계적으로 폭염·열대야·홍수 등으로 기후 위기가 심각해지면서 탄소 중립 실현을 위한 친환경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에 따라 이경구 씨는 앞으로 에너지 절감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며, 에너지 컨설턴트가 많이 양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평소 분리수거도 철저하게 하는 편이고, 경유 자동차를 타다 2년 전에 수소 자동차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사소하지만 환경에 관심이 높은 편이었는데, 그런 관심이 모여 지금의 에너지 컨설턴트가 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활동 기간이 끝난 후에는 에너지 컨설턴트 전문가로 성장해 중장년 세대와 함께하는 지도자(강사)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또한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이 전국적으로 늘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가 진행된 지난해 8월 31일은 이경구 씨가 퇴직한 지 꼭 1년 된 날이었다. 지난 1년을 돌아보며 생각에 잠긴 그는 “제가 하는 일이 작은 일이겠지만 모여서 큰 일이 될 수도 있고, 미래 지향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이 먹어서도 계속 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소감을 전하며, 보람일자리 참여를 적극 독려했다.
“초고령사회가 다가옵니다. 인생 2막을 의미 있게 살고 싶다면 적극적인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집에만 있지 말고 더 열심히 배우고,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알아봐야 한다는 거죠. 그 과정에서 사람들을 많이 만나다 보면 정보 공유가 되는 장점도 있습니다. 더불어 사는 이 사회에 공헌하고 기여하는 일을 하면서 보람 있게 살아갑시다!”
청룡의 해다. 김대환(60) 노사발전재단 사무총장은 육십갑자를 한 바퀴 돌아 생애 또 한 번 청룡의 해를 맞았다. 서예가 취미인 그는 매년 초 휘호를 쓴다. 올해의 휘호는 세심자신(洗心自新). ‘마음을 닦아 새로워지다’라는 의미다. 잘 닦아낸 개인의 삶을 사회와 나누고 싶다는 소망도 담겼다. 그리고 그 소망을 노사발전재단을 통해 이뤄보고자 한다.
지난해 봄 김대환 사무총장은 노사발전재단과 인연을 맺었다. 2022년 9월 중앙노동위원회 상임위원 퇴직 후 반년 만에 제7대 노사발전재단 사무총장으로 일터에 복귀한 것이다. 고용노동부 행정관리담당관•국제협력관•근로기준정책관 등을 지내며 회갑 생의 절반은 ‘고용노동부’의 명함을 지니고 살았다. 덕분에 고용노동부 산하기관인 노사발전재단의 업무가 낯설지는 않았다. 익숙함은 장기로 발휘하되, 늘 새로움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던 나날 속 어느덧 한 해가 저물었다.
“작년 봄 취임식 때 직원들과 인사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새해가 밝았네요. 취임 후 5개 지사, 13개 중장년내일센터, 6개 차별없는일터지원단을 방문해 직원 간담회를 열어 업무 현황을 들어봤어요. 재단의 운영 방향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가 됐습니다. 그러면서 재단 고객들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해봤죠. 결국 ‘소통과 협업’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마침 2011년 고용노동부 행정관리담당관 시절 만들었던 ‘한 권으로 통하는 고용노동 정책’이 떠올랐어요. 지금까지 발행되는 책인데, 한 권으로 고용노동부의 정책과 제도를 살펴볼 수 있죠. 재단에도 그런 매개체가 필요하다고 여겼고, ‘한 권으로 보는 노사발전재단 사업’을 만들어 배포했습니다.”
김 사무총장이 강조하는 소통과 협업의 대상은 본부 내 부서들을 비롯해 지사 및 유관기관, 고객까지 아우른다. 가령 사내에서 부서 단위로 함께 일할 때 다른 부서의 업무도 알아야만 효과적인 협업이 가능하다. ‘한 권으로 보는 노사발전재단 사업’은 전반적인 사내 업무를 한눈에 조망하는 일종의 참고서 역할을 해내고 있다.
“재단 직원들뿐만 아니라 유관기관이나 고객인 기업과 노동자들에게도 유용한 자료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재단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하는 일을 더 손쉽게 알리고, 찾는 발걸음도 늘릴 수 있다고 봐요. 지원책이 있어도 알아보기 힘들면 유명무실하잖아요. 또 직원 간 공감의 장 형성을 위해 직원 소식지 ‘공감레터 : 우리는…’도 매주 발간하고 있습니다. 나름 지난해에는 소통 면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냈다고 보고, 올해는 협업 시스템을 더 강화하는 노력을 기울일 계획입니다.”
평생현역 사회를 위한 일터 혁신 필요해
지난해 6월, 김 사무총장은 2022년 지역 단위 총괄 조직으로 신설된 5개 지사에 1~3급 직원 4명을 지사장으로 발령하며 기능 정상화를 꾀하기도 했다. 그밖에도 중앙노동위원회, 한국어촌어항공단,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한국해운조합 등과 업무 협약을 맺으며 사업 연계 및 확장에 총력을 기울였다. 기관 간 협업 사업 중에는 ‘청춘문화공간’을 빼놓을 수 없다. 지난해 고용노동부와 문화체육관광부의 협업으로 노사발전재단과 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뜻을 모아 전국 13개 중장년내일센터(구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2023년 명칭 변경)에 청춘문화공간을 조성한 것이다. 청춘문화공간은 재취업을 희망하는 중장년이 한 공간에서 고용과 문화 서비스를 동시에 누리게끔 지원하고 있다.
“일자리뿐만 아니라 여가·문화생활이 겸비돼야 활기찬 노후가 가능하다고 봐요. 때론 그런 여유 시간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직업에 대한 영감을 얻기도 하죠. 과거보다는 일자리가 더 다양해졌고, 취미를 살려 소득을 얻을 기회도 많아졌잖아요. 퇴직 후 뭘 할지 고민이라면, 이런 강의를 통해 평생 일자리를 구상하는 계기를 마련해보셔도 좋겠어요.”
2025년 초고령사회를 앞둔 현재. 은퇴 이후에도 평생 일자리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대다. 이는 개인의 영역에서 그칠 일이 아니다. 기업과 정부 차원에서도, 사회적으로도 고령 인력 활용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 30년 가까이 공직에 몸담으며 고용과 노동에 관련한 현안을 다뤄온 김 사무총장 역시 같은 고민을 하던 터였다.
“OECD는 2018년 고령층 미취업 인구 중 25%가 취업하면 2050년에 1인당 GDP가 11%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는데요. 2023년 국내 고령층 미취업자 636만 명 중 3분의 1이 장래 일하기를 원했습니다. 고령층 취업자의 93%는 계속 일하기를 희망했고요. 고령화가 노동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간과할 수 없는 상황인 거죠. 퇴직한 중장년을 취업으로 연결하기 위한 노사정 모두의 노력이 절실하다고 봅니다. ‘평생직장’보다는 ‘평생현역’이라는 맥락에서 중장년에 대한 지속적인 직업 능력 개발과 취업지원 시스템을 마련해나가야 해요. 기업에서도 고령층이 일하기 쉬운 작업환경을 조성하고 유연근무 등 다양한 근무 방식의 도입을 고려해야 합니다. 일터에도 고령화에 따른 혁신이 필요한 셈이죠.”
고령 인력이 지닌 가치, 허비하지 않아야
상당수 기업이 코로나19를 겪으며 근무 방식에 변화를 감행했다. 그러나 체계를 구축하지 못해 난항을 겪는 사업장이 적지 않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사발전재단에서는 작업환경 및 고용문화 개선, 장년 고용안정 체계 및 평생학습 구축 등에 대한 일터혁신 컨설팅을 무료로 시행중이다. ‘재취업지원 서비스 운영 가이드라인’도 제작해 기업 상황에 맞게 사용하도록 독려하고 있다. 결국 고령 인력 활용의 실마리는 기업에서 찾아야 한다는 게 김 사무총장의 고견이다.
“고령 인력 활용에서 중요한 것은 경영진의 의지라고 생각합니다. OECD에 따르면 고령자는 경험과 지식 활용뿐만 아니라 청년과의 기술 보완을 통해 팀 성과 및 기업 전체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습니다. 기업은 고령자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 ‘일할 의지와 능력을 갖춘 숙련된 인재’라고 인식하고, 다양한 연령의 노동력을 통합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기업의 성과를 제고해야 합니다.”
기업에서 채용 시 연령차별을 철폐하고 다양한 연령과 경험 및 전문성에 기반한 고용문화를 장려해야 한다는 조언도 덧붙였다. 50세 이상 고령자에 대한 연령차별은 2018년 한 해에만 미국 경제에 8500억 달러의 손실을 발생시켰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고. 또한 그는 일본 고용정책 사례도 주목했다.
“일본에서는 ‘생애현역사회’를 기본 뱡향으로 한 고령자 고용정책이 이뤄지고 있어요. 정책의 성공 요인 중 하나는 기업이 고령자 고용연장을 위한 고용확보조치 노력의무 및 다양한 조성금 제도를 통해 아주 오랜 기간 단계적으로 의무화했다는 겁니다. 그런 토대를 만든 덕분에 법정의무를 만들었을 때도 기업이나 노동자에게 부담 없이 작용할 수 있었던 거죠.”
아울러 김 사무총장은 일터혁신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사업주 입장에서는 어렵게 느끼실 수도 있겠는데요. 일터혁신은 결코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중소기업에서도 노사가 함께 각 기업의 상황에 맞게 공동의 목표를 수립하고, 근로자들이 중심이 되는 참여적 활동을 통해 조직과 제도, 문화와 관행을 바꾸려 노력한다면 충분히 성과를 낼 수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다면 우리 재단의 서비스도 이용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개인의 인생이 사회의 쓸모가 되도록
김 사무총장 역시 재단에 몸담으며 우리 사회 고령 인력 활성화와 일터혁신을 위한 지원책 마련에 지속적으로 힘쓸 계획이다. 아울러 임기를 다한 이후에도 ‘평생현역’으로의 삶을 위해 개인적인 노력을 펼쳐가고자 한다.
“중앙노동위원회 상임위원을 퇴임하고, 평소 찾던 속리산 법주사에 딸린 한 암자의 주지스님을 뵈러 갔어요. 당시 스님께서 말씀하시길 ‘이제까지 공직에 있으면서 사회를 위해 일했는데, 앞으로는 보너스 인생을 산다고 여기고 더욱더 본격적으로 사회를 위해 봉사하라’ 하시더군요. 일단 재단에 머물면서 그 소임에 최선을 다할 테고요. 그 경험까지 아울러서 제가 지닌 것들을 사회에 잘 전수하고 나누고 싶습니다.”
그는 자신뿐 아니라 우리 사회 수많은 중장년이 스스로 쌓은 경험과 노하우를 나누는 기쁨을 누리길 바랐다. 과거에만 의존하기보다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의 자신을 잘 돌보고 닦아나가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에 이런 구절이 나와요.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결국 죽음에 이르면 생애 전체가 사라지는 거잖아요. 그러니 살아 있는 동안 자기가 쌓아온 것들을 사회에 쓸모 있게 나누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봐요. 현재의 저로 예를 들면 지나온 60년의 삶과 더불어 앞으로의 여생도 녹아 있는 셈이죠. 그 삶은 나라는 개인뿐 아니라 가깝게는 가족, 친구, 동료들에게 영향을 끼쳐요. 멀게는 지면을 통해 이 인터뷰를 보는 독자들에게도 자그마한 생각을 던져줄 수 있고요. 그런 의미를 되새기며 나의 과거, 미래, 현재를 아우르는 완연한 삶을 잘 닦아나가야겠습니다.”
△노사발전재단은?
고용노동부 산하 공공기관으로 전국에 13개 중장년내일센터를 운영한다. 중장년층의 생애경력설계, 재취업 및 창업 등 일자리 관련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기초역량 증진 교육 ‘내일부스터’, 일대일 심층상담 방식으로 개인의 특성을 반영하여 경력설계 컨설팅을 제공하는 ‘개인별 경력개발서비스’ 등 중장년 대상 체계적인 경력 관리를 지원한다. 만 40세 이상 중장년이라면 평생현역 활동을 위한 전직·재취업 지원, 산업별 특화서비스, 사업주지원 패키지, 청춘문화공간 등 다양한 서비스를 누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