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나이가 들고 보니 살아온 삶에 대해 쓰고 싶어졌다. 책상 앞에 앉았다. 펜을 들었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종이에 적어볼까? 하지만 손에 들려진 펜은 곡선을 그리다 갈 길 몰라 방황한다. ‘그것참, 글 쓰는 거 생각보다 쉽지 않네!’ 하던 사람들이 모여 글쓰기에 도전했다. 생활의 활력이 생기더니 내가 변하고 함께하는 동료들이 성장하는 감동 스토리도 하루하루 글로 쌓여갔다. 이웃들의 정이 잔잔하게 이어지는 ‘부천 글쓰기 모임’에 다녀왔다.
지하철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원미동으로 향했다. 마치 유니버설스튜디오나 방송사 드라마 세트장 방문만큼이나 기대됐다. 양귀자의 소설 의 배경이 된 이곳에서 글 쓰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부천시 원미 2동 주민자치센터에서는 매주 목요일 오전 11시 반. ‘글쓰기 모임’ 강좌가 열린다. 강좌가 이어져온 지도 어언 6년. 수필집도 5권이나 출간했다. 등단한 회원, 부천 지역신문 시민기자가 된 회원, 이 강좌에서 공부한 것이 바탕이 돼 뒤늦게 대학 공부를 하는 회원도 생겨났다. 글쓰기를 통해 다양한 길을 찾고 발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보다 빛나는 모임으로 성장했다.
부천시 글쓰기 모임은 부천시 평생학습센터 특화 프로그램으로 선정돼 지원을 받는 강좌 중 하나다. 원미동 글쓰기 모임 외 시(市)의 지원을 받는 대부분의 강좌는 몸을 움직이고, 발산하는 활동 프로그램. 글쓰기 모임을 6년간 이끌고 있는 박창수(52) 작가는 이 모임이 꽤나 희귀하다고 설명한다. 글쓰기가 어렵다는 생각 때문에 일반인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데 6년 동안 모임이 이어져오는 것은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라고 덧붙였다. 올해는 19명의 회원이 글쓰기 모임의 문을 활짝 열었다.
노년의 글쓰기는 힐링이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등단보다는 자신이 뭘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의 답으로 글쓰기를 선택했다. 고민 끝에 문학에 도전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한 문장 한 문장 써내는 데 의미를 둔다. 박창수 작가는 글쓰기 모임의 기본 바탕은 ‘힐링’이라며 방점을 찍는다.
“글쓰기는 힐링 단계라고 생각해요. 자기 자신이 경험했던 것을 글로 쓰는 연습을 하면서 풀어나가요. 그다음이 문학으로 넘어가는 과정이죠. 우리 수강생들 중에는 사실 상처받으신 분들도 많아요. 다 큰 자녀가 죽었다든가, 시어머니와의 갈등 등 정말 다양해요. 그런데 이곳에서 치유하고 가슴을 여는 것이죠.”
글쓰기를 하고 50세가 넘어서야 대학 공부에 도전한 회원도 여섯 명이나 된다. 박창수 작가는 글쓰기 모임 회원 개개인의 수필집 발간을 염두에 두고 있다. 등단보다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박창수 작가는 “열심히 글을 쓰고 또 부쩍 글쓰기 능력이 늘고 있기에 가능하다고 본다”며 “제대로 된 방법으로 회원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을 낼 수 있도록 도와드릴 것”이라고 말했다.
☞mini interview
류인록(부천글쓰기모임회장·71) 글쓰기로 새로운 삶을 선물받다
이제 글 쓴 지 5년 됐습니다. 살면서 타자기 한번 못 만져봤습니다. 62세가 돼서야 노인복지관에서 컴퓨터를 처음 접했습니다. 독수리 타법 면한 지는 오래됐어요. 그리고 포토샵(사진편집 프로그램)과 파워포인트도 배웠어요. 여행지에서 사진을 찍어오면 포토샵 스위시로 사진들을 꾸밉니다. 사별하고 저 혼자 산 지 꽤 됐지만 이렇게 살다 보니까 세상 지루한 줄 몰라요. 지금은 우리 원미마을신문 기자로 활동해요. 글쓰기 교실도 다니고, 주병률 시인에게 시를 배우러 다닙니다. 취미생활이 또 하나 있어요. 여행을 다니는 겁니다. 작년에 홍도에 다녀왔고, 제주도, 안동 이육사 문학관, 영월에도 다녀왔어요.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글감이 나오더라고요. 기행문 쓰는 게 좋아요. 제 입장에서 쓰기가 좀 쉽더라고요. 그것도 갔다 와서 일주일 안에 써야지 지나가면 금세 잊어버려요.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제가 원래 운동신경이 안 좋아서 다른 건 별 흥미가 없었어요. 글쓰기를 선택했고 버틸 만했어요. 첫 글을 쓰고는 정말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6년 전 먼저 간 마누라에 대한 글이었거든요. 그 글이 실린 책은 우리 마누라 납골당에 넣어두었어요.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몇 편이라도 더 써서 수필집도 내고 싶고, 시집도 내고 싶어요. 시도 쓰는데 현재 68편을 썼어요. 시집도 하나 내고 싶습니다.
이양순(요양보호사·61) 올 가을에 제 이름으로 된 수필집이 나옵니다
글은 나랑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워낙 기록하는 것 자체를 싫어했거든요. 그런데 2005년도에 요양보호사가 된 뒤 만나게 된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보면서 글을 쓰게 됐습니다. 너무 가슴이 아픈 거예요. 한 요양병원에 입원한 분이셨는데, 치매임에도 불구하고 아픈 기억은 고스란히 안고 계셨어요. 제가 그 일에 대해 당시 글을 써놓았어요.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수요집회를 TV로 접하다 제가 쓴 글이 생각나서 라디오 방송에 냈어요. 그런데 그게 방송으로 나오더라고요. 2013년도였어요. 방송에 채택된 뒤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글 쓰는 거 행복합니다. 제 재능에도 놀라고 기억력은 한계가 있는데 글로 기록해놓으면 안 잃어버리니까 좋고요. 요즘 요양원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글감이 좀 많거든요. 아직 미흡해서 걱정입니다. 가을쯤 제 이름으로 된 수필집이 나온다고 하는데 고민됩니다. 물론 글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영광이지요. 부끄럽기도 하지만 기대도 됩니다.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자손들은 하얀색, 검은색 상복을 입고 마지막 예의를 갖췄다. 수십 년 전 욕심이 한계를 넘던 어느 날의 이야기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또 살기 위해 끼니를 기다렸다. 김이 퐁퐁 나고 기름이 좌르르 흐르는 하얀 쌀밥을 보자 눈을 크게 굴려가며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어머님을 보내드리는 고된 일정에 온 가족들은 허기가 진 모양이었다. 입고 있는 상복에도 살금살금 음식 냄새가 배어들었다. 삶은 늘 치열한 생존전쟁 같았다.
불과 몇 시간 전, 멀쩡했던 어머님의 육신을 몇천 도의 화기 속으로 밀어 넣었다. 눈앞에 전개되는 생생함에 죽을 것처럼 소리쳐 몸부림치던 가족들은 다시 태연해졌다. 갑작스러운 어머님의 장례식이 얼떨결에 끝나고 수지면 신봉리 시아버님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님 앞에서 가족들 모두는 초췌하게 앉아 풀이 죽어 있었다. 칠순을 훨씬 넘긴 아버님은 어머님의 빈자리를 느끼시며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이윽고 아버님이 단언하듯 조용히 자식들에게 의견을 내놓으셨다. 어머님이 오랫동안 정들이며 살다 가신 그곳, 신봉리 농장에 납골당을 짓고 후손들에게 길이 남기고 싶다고 하셨다.
경기도 신봉리 농장은 어머님과 아버님이 20여 년 동안 갈고 닦은 수천 평의 아름다운 농장이었다. 지난 시절 어머님과 함께한 가족들의 수많은 추억이 깃든 농장은 이른 새벽이면 새들의 울음소리가 아침을 알려오고, 낮이면 방문객들로 하루가 짧았고, 쏟아져 내리는 계곡물 소리는 밤마다 자장가 소리가 되어주던 곳이다.
그런데 아버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느닷없이 하얀 소복 차림의 큰형님(남편 큰형의 부인)이 벌떡 일어나 아버님의 말씀에 감히 반기를 들었다.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아버님 돌아가시면 이 땅을 팔 생각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강하게 말했다. 온 식구들은 깜짝 놀랐다. 있을 수 없는 돌발 상황에 서로를 바라보며 그저 황당해했다.
말도 안 되는 비상식적인 일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벌어진 것이다. 아버님은 어처구니가 없으셨는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셨다. 잠시 후 아들만 둘을 둔, 가장 혈기왕성한 셋째 형이 밥상을 두들겨가며 바른말을 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냐며 딸만 둘인 큰형에게 큰 소리로 핏발을 세우며 대들었다.
큰 소리들이 오가면서 집안은 순식간에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야말로 초상집 난장판의 한 장면이었다. 하얀 소복, 검은 상복을 입은 남녀 형제들의 재산 싸움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기가 막힌 막장드라마도 없었다. 6남매(4남 2녀)의 막내며느리인 필자는 가만히 밖으로 나와 한숨만 쉬었다. 누구 편도 들어줄 수 없었다. 얼마 후 아버님은 자식들이 걱정이 되는지 슬그머니 안채로 들어가셨다. 그러고는 이 꼴 저 꼴 다 보기 싫으셨는지 불도 켜지 않은 채 아무 기척이 없으셨다.
그런데 잠시 후 아버님이 두런두런 혼잣말을 하셨다. "임자! 나도 같이 가고 싶네. 왜 당신 혼자만 갔소."라고 말하며 나지막이 흐느끼셨다. 막내며느리인 필자는 가슴이 아파 더 이상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어 밖으로 다시 나갔다. 답답한 현실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재산이 아무리 많으면 무슨 소용인가. 어머님을 방금 떠나보내신 아버님 앞에서 자식들의 아귀다툼은 너무나도 큰 불효였다.
그때 깜깜한 밤하늘에 하얀 동정의 까만 소복을 입은 어머님의 모습이 환하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다시 하얀 소복을 입고 또 나타나셨다. 아마도 삶과 죽음이 한순간임을 보여주고 계신듯했다. 어머니는 힘없이 손짓을 하시며 고요하게 말씀하셨다. “빈손으로 떠나가는 인생이다. 욕심 없이 그저 우애 있게 살아라.” 하시면서 멀리멀리 사라지셨다.
그날 이후 집안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재산 욕심은 병과 화를 불러왔다. 형제 우애는 물론이고 분란이 더 크게 일어나 형제들은 아예 왕래가 끊기고 말았다. 그리고 세월도 많이 흘러갔다. 이제 죽음이 코앞에 와 있는데도 피를 나눈 형제들의 마음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저 피해의식 속에 사로잡혀 자기를 꼭꼭 가두고 있는 사람들 같다.
지난 시절, 순수하고 다정했던 형제들의 따뜻한 우애가 그리워지는 하루다.
꼭 필요하지만 혐오시설이나 인식이 좋지 않은 단체가 우리 이웃에 생기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지역 이기주의로 우리나라에서도 장애인 시설이나 쓰레기 소각장, 하수 처리장, 핵 폐기물처리장, 화장장 등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있어야 하지만 ‘내 뒷마당에서는 안 된다 (not in my backyard)' 를 뜻하는 님비현상을 다들 아실 것이다.
언젠가 필자는 장애를 가진 아이들의 학교가 자기 동네에 들어오는 걸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는 뉴스를 들으며 분개한 적도 있다.
그러나 내 근처에 쓰레기소각이라거나 핵폐기물 같은 시설이 들어 올 경우 필자도 반대할 것 같기는 하다.
요즘 국립공원 주변인 우리 동네에 시끌벅적한 일이 생겼다.
서울 변두리 산 밑이어서 집값, 땅값 싸기로 유명하지만, 공기 좋고 경치 좋다는 환경 때문에 다들 만족하고 사는데 국립공원 바로 근처의 한 절에서 납골당을 만든다는 소문이 난 것이다.
며칠 전 밤 10시가 가까운 시각에 관리실에서 연락이 왔다.
옆 아파트의 부녀회원들이 우리 아파트 부녀회장을 만나러 그 시간에 방문했다고 한다.
우리 아파트는 규모가 작은 곳이라 6명의 부녀회원이 2년씩 임기를 정해 회장과 총무 일을 맡고 있다.
올해엔 필자 차례가 되어 필자는 총무가 되었다.
큰 아파트 단지의 경우 이권도 커서 서로 부녀회장을 하려고 싸움도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친목 외에는 별로 하는 일 없는 우리 아파트는 서로 안 한다고 해서 의무로 돌아가며 2년씩 맡기로 하고 있는 중이다.
관리실에 내려가 보니 옆 아파트 부녀회원들이 동네 소식을 전해주었는데 바로 국립공원 인근 절이 납골당을 만들고 있으니 결사 저지를 하기위해 연대를 해야 한다고 했다.
처음 들었을 땐 정말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납골당시설이 들어오면 동네가 번잡해지고 공기도 나빠질 것이며 집값도 떨어질 것이 분명하니 동네사람이 결속해 시위를 해서라도 막아야한다고 주장하는데 동조가 되었다.
물론 이것이 님비현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막상 필자에게 닥치니 필자도 이기심이 표출된 듯해서 좀 부끄럽기는 했다.
국립공원 바로 아래에 있는 이 절이 원래 법당으로 건축허가를 받을 때 명상센터나 경건한 종교시설로 사용하겠다고 했다는데 어느 날부터 납골당 같은 모습이 보이고 실제 옆에 사는 동네사람이 보았더니 바로 산 위쪽 국립공원의 그린벨트에 흰 가루를 뿌리는 장면을 목격했다 한다.
그러니 절 바로 옆으로 있는 빌라나 단독주택에 사는 주민들은 납골당이 들어옴으로써 자신들의 집값이 떨어지는 등 재산권이 침해된다는 위기를 느끼고 행동에 나선 것이다.
옆 아파트 부녀회원들이 며칠 후 구청으로 면담하러 갈 때 동참해 달라며 돌아간 후 우리 부녀회원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우리 아파트는 좀 거리가 떨어져서일까? 의견이 나뉘고 있다. 화장장도 아니고 보통 절에서는 위패도 모시는데 납골당정도야 어떻겠느냐는 의견과 납골당의 이미지 때문에 집값이 떨어질 게 분명하니 절대 반대라는 의견이 나왔다.
오늘 구청에서 동네 대표와 절의 주지스님 그리고 절 사무장이 만나 면담을 하는 자리에 동네사람이 참석하자고 해서 필자도 귀추가 궁금해 따라나섰다.
구의원 여러 분이 중재를 위해 참석했다.
사찰측에서는 동네대표측이 요구하는 4가지 사항 중 3가지는 들어줄 수 있지만 한 가지가 해결되지 않아 오늘의 회담은 결렬되었다.
납골당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찰측과 이미 여러 번의 목격담으로 납골당이 분명하다고 하는 주민간의 팽팽한 기 싸움으로 무언가 합의 사항을 끌어내는 게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걸 실제 눈앞에서 보았다.
자신들의 재산권 때문에 님비현상을 일으키게 된 주민 편에 서야할지 납골당이 아니라고 우기지만 무언가 꼬투리를 잡힌 사찰측을 이해해 줘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그저 님비현상의 와중에 서게 된 것이 씁쓸하기만 하다.
# “상조업법 제정, 보건복지부로 이관해 소비자와 상조업 상생 추구해야”
새정치민주연합 보건복지위원장인 김춘진 의원은 이러한 부실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직접 나섰다. 상조법 입법을 추진하고 있는 김 의원은 상조법을 소비자 입장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말한다. 김 의원은 고령친화적 산업으로의 상조업 육성을 위해 보건복지부를 소관 부처로 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의원은 “보건복지부가 생로병사 관련 업무를 주관하는 부처이며, 장사등에 관한 법률 등 연관 법률이 있고 고령화정책을 주관하는 부처로서 대표적인 고령친화적인 상조업을 담당하는 소관 부처로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설명했다. 김 의원은 제도적으로 아직 정착되지 않은 상조업이지만 그 규모는 이미 산업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며 그렇기 때문에 상조업이 붕괴되지 않으면서 지금 소비자들이 겪는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제도화가 시급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김 의원이 강조하는 상조업법의 주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보건복지부장관으로 하여금 상조상품의 품질 개선과 소비자 보호를 위해 상조상품의 표준을 제정·보급하도록 하고, 둘째 보건복지부령으로 정하는 기준에 따라 소비자를 보호하고 우수한 품질의 상조상품을 제공하는 상조회사를 우수상조회사로 인증할 수 있도록 하며, 셋째 상조회사가 사업의 전부를 양도하거나 상조회사에 대해 합병 또는 분할이 있는 경우 사업의 전부를 양수한 회사, 합병 후 존속하는 회사, 합병에 의해 설립된 회사, 또는 분할에 의해 사업의 전부를 승계한 회사는 원칙적으로 그 상조회사의 지위를 승계하도록 해 중간에 상조회사가 인수합병 등을 통해 변경되더라도 소비자가 납부한 선수금 전체와 계약내용 모두에 대해 보호받도록 해야 한다. 넷째 상조회사가 소비자피해보상보험계약 등에 따라 보전해야 할 금액은 법령으로 정한 선수금에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이자를 더한 금액으로 하겠다는 내용도 들어있다.
마지막으로 소비자서비스콜센터 설치를 요구했다. 그 이유는 상조가입자 가운데는 고연령자가 많아 인터넷 등을 통해 상품가입내역 등에 대한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17대 국회 때는 2007년 안명옥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18대 국회 때는 2008년 권경석 당시 한나라당 의원, 2009년 김춘진 민주통합당 의원이 각각 상조업법안을 대표발의했지만 입법화에는 실패했다.
# 그래도, 건전한 장례문화 성장에 상조회사 역할 적지않았다
상조서비스는 발인 후 매장, 납골당 안치까지 장례절차를 알려주는 질 높은 서비스를 제공한다. 장례용품이나 장례비용을 미리 준비해 갑작스런 상황에 대처 할 수 있게 한다. 이에 따른 상조서비스는 소비자들의 선택에 달려있지만 소비자들을 보호하고 상조회사의 투명하고 건전한 경영을 유도하기 위해 조속히 법 개정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현재 상조업계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상조회사를 통해 우리나라 장례문화가 개선된 것 또한 소비자는 인정하고 있다.
상조회사와 불편한 관계에 있는 전문 장례식장이나 대학병원 장례식장 등이 가리지 않고 받아 왔던 ‘노잣돈’ 문화를 없앤 것은 분명 상조회사의 긍정적 역할로 평가된다.
음침한 음성거래가 이뤄졌던 장례문화를 양지로 이끈 것 또한 상조회사의 역할이 컸다.
사람은 누구나 죽기 마련이다. 현재는 상조업계가 힘들고 어려워도 부실한 상조회사가 퇴출되고 제도권 내 상조업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는다면 1~2년 사이 제2도약의 길에 설 수 있을 것이다.
“상조업의 근본적인 취지는 굉장히 좋습니다. 그런데 드러나는 모습이 신뢰를 못 얻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필도 을지대학교 장례지도학과 교수는 다른 나라는 장례 문화와 상업적 지점들이 겹쳐지는 게 많지 않지만 우리나라는 장례용품을 중심으로 발전한 게 문제라고 말했다. 그러다보니 장례 관련 업체들이 서비스는 최소한으로 하고 주로 용품을 통해 돈을 벌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특성이 장례회사들과 상조회사들의 구분을 모호하게 한 배경이라고 지적했다.
“장의사는 죽음과 관련된 의사입니다. 의사까지는 못 가더라도 적어도 사회적 자부심을 부여해 줘야 하는데 지금껏 민간자격증만 줘왔어요. 그러다 결국 국가자격증을 발급하기 시작했는데, 이게 민간자격증보다 더 못합니다. 시험도 없고 학원에서 300시간만 배우면 돼요. 국가 입장에서는 염습과 입관만 하면 장례지도라고 생각한다는 거죠.”
과거 대가족 체제에서는 체계화된 장례를 제대로 수행하는 장년의 전문가가 가족 안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그렇지 못한 게 현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례라는 문화 자체는 계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전문가가 사라져버린 상황이지만 문화적 욕구와 필요는 존재한다. 당연히 가짜와 부실의 문제가 생겨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상조업체들 모두 자기네 상조가 값이 싸다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땐 싼 게 비지떡입니다. 그리고 문제는 싸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별로 싸지도 않다는 겁니다.”
이 교수는 장례용품들의 경우 값을 속이려고 마음 먹으면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게 현실이라고 밝혔다. 예를 들어 안동 삼베로 만든 명품 수의라고 해도 진짜 전문가가 아닌 이상 진짜인지 가짜인지 잘 확인이 안된다는 것.
“장례는 믿음으로 이뤄집니다. 그래서 그러한 요소들에 대해 진짜라고 말해줄 수 있는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전문가에 대한 공감대 형성을 위한 표준이 필요합니다. 용품까지 어렵다고 한다면 서비스만이라도 표준화를 하자는 게 제 의견입니다.”
이 교수는 그래서 장례 서비스 표준화를 위해 기본용어 연구를 했고 이를 발표하기도 했다. 국가에서도 관련 사항을 현장에서 받아들이도록 추천 작업도 해줬다. 덕분에 100% 공설로 만들어지는 화장장에서는 표준장례서비스가 어느 정도 이뤄졌고 서비스 수준도 개선됐다고 평가받고 있다.
# 상조 서비스에 표준 등급을 매겨 신뢰 회복하자
상조업이 시작된 일본에서는 이미 40~50년 전에 만들어진 상조법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상조법이 없다. 일본의 사례를 받아들이면서 문화에 대한 검토 없이 돈 버는 부분만 받아들인 셈이다.
“보건복지부는 아직도 상조법을 우리가 왜 만들어야 하느냐고 하는 중입니다. 왜 돈 거래하는 것까지 관여해야 하느냐는 거죠. 그런데 사실 우리나라는 이 부분의 정립이 많이 늦습니다. 장례식장도 최근에야 보건복지부 소관이 됐어요. 그 전까지는 묘지, 화장, 납골당만이 보건복지부 소관이었죠. 사실 상조업에 관한 법이 순수하게 산업하고만 연관돼 있으면 다른 부서에서 만들어도 됩니다. 그런데 상조업은 ‘장례’로써, ‘예’로서의 문화적 요소가 들어가 있어요.”
산업에 대한 무게중심이 있어야 불신이 사라진다, 이 부분을 국가에서 조절해야 한다는 게 이 교수의 생각이다.
“국가는 관리-감독만 잘하면 됩니다. 제가 예전부터 꾸준히 주장하는 게, 장례식장이나 상조 서비스도 무궁화 갯수별 차등을 두는 호텔식 등급을 매기게 되면 문제가 상당수 해결될 거라는 말입니다. 무궁화와 별을 국화로 대체해 표기하면 상징성도 가질 수 있죠. 이를 심사할 수 있는 표준과 전문가의 확립이 필요하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