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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조숙증, 잘 크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냐!
- 10년 새 12배 늘어난 ‘성조숙증’이 뭐길래 우리나라에서만 7만5000명이 넘는 아이들이 진료를 받은 성조숙증은 이제 익숙할 정도로 많이 알려져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성조숙증을 앓는 아이들은 2006년 6400명에서 2015년 7만5000명으로 눈에 띄게 늘었다. 10년 만에 12배가 늘어난 셈이다. 성조숙증이란 쉽게 말해 신체가 너무 빨리 성장해 문제가 되는 질환을 말한다. 여아는 8세 이전에 유방이 발달하고, 남아는 9세 이전에 고환이 커지며 사춘기가 시작되는 2차 성징이 나타난다. 성조숙증은 주로 여아들에게 자주 발생하며 발생 후 호르몬 조절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여아는 10세 무렵에 월경을 시작할 수도 있다. 월경은 여자의 몸이 출산할 준비 과정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너무 이른 나이에 시작해선 안 된다. 남아의 경우 키가 다 크기 전에 2차 성징이 시작돼 성장이 멈추기도 해서 남자 아이들에게 스트레스를 주기도 한다. 성조숙증의 원인은 아직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유전적 요인, 식습관과 위생 수준, 소아비만 증가, 스트레스 등이 조기 발육에 영향을 끼친다고만 알려져 있다. 허약한 뚱뚱이 체질은 위험군! 평소 체질이 약해 잦은 배앓이를 하는 아이들의 경우, 학교나 유치원 등에서 겪는 단체생활로 인해 장염 등에 노출되기 쉽다. 설사, 복통 등을 반복하고 면역력과 소화 능력이 저하되면 식욕부진이 일어나고 이는 영양 섭취 미달로 인한 성장부진으로 이어질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장내 기능이 약해지거나 식욕부진이 지속되면 전체 ‘면역력’이 약해져 성조숙증 외에도 다른 질병 발생률도 높아진다. 아이들은 학교에서의 단체생활로 아무래도 감염원에 노출될 확률이 높다. 따라서 평소에 면역력을 키워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면역력을 보강한다고 전문가와의 상담 없이 이런저런 영양제나 보양식을 마구 먹이는 것은 더 위험할 수 있다. 아이들은 아직 성인만큼의 소화력이나 흡수력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보다 면밀한 일대일 처방이 중요하다. 또 무분별한 항생제 복용 역시 장내 유익균을 감소시켜 오히려 악순환을 일으킬 수 있으니 유의해야 한다. 반면 아이가 너무 잘 먹어도 문제가 된다. 요즘에는 체력은 부실하고 덩치만 큰 아이들이 많아졌는데 이는 운동도 하지 않으면서 정크푸드나 서구화된 식습관에 익숙해진 때문이다. 과다한 영양으로 오장육부는 허약하고 몸집만 큰 ‘허약한 뚱뚱이’ 체질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처럼 허약한 체질에 비만이 겹치면 성호르몬 분비에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 이럴 경우 성장호르몬 대신 나이에 맞지 않는 성호르몬이 과다 분비돼 성조숙증을 앓게 되고, 몸은 이미 2차 성징이 일어났다고 착각해 조기에 키 성장이 멈춰버리기도 한다. 만약 우리 손주가 성조숙증이라면 손주가 또래보다 빨리 자라는 것 같다면 먼저 정확한 검사와 임상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아봐야 한다.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 또는 인터넷에 나와 있는 정보로 혼자 섣불리 진단하고 적절한 치료시기를 놓치면 병을 키우는 상황이 된다. 성조숙증이 의심되면 발병시기, 진행속도, 약물투여 등에 대해 병력 청취를 한다. 이후 신장, 체중, 2차 성징 발생 정도, 색소침착 등에 대한 진찰을 한다. 골연령(骨年齡) 검사는 주로 왼쪽 손목 X선 검사 또는 호르몬 자극검사 등의 임상적 방법으로 진단한다. 성조숙증이라는 진단을 받으면 치료에 들어가야 하는데, 양방과 한방의 치료 방법은 차이가 있다. 일반 병원에서는 호르몬 치료를 한다. 대개 4주마다 한 번씩 근육주사로 성선자극호르몬(여성의 난소와 남성의 고환에 작용해 발육과 성호르몬의 생성과 분비 등을 조절하는 호르몬)의 분비를 억제한다. 호르몬 치료를 진행하는 동안 성호르몬을 억제해 성장 속도를 늦추고 골 성숙을 억제하는 것이다. 이것은 2차 성징의 쇠퇴가 일어나는 치료법으로 알려져 있다. 한방에서는 보다 근원원적인 치료에 집중한다. 아이만의 체질적 특성과 성장 속도에 맞는 일대일 맞춤보약을 지어 복용하도록 하거나 약침시술 및 생활관리 처방을 한다. 이는 신체 성장의 정상 속도를 찾아 제대로 맞추는 치료법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조숙증을 받아들이는 보호자의 태도다. 한창 성장하는 아이들은 또래와 자신의 몸이 다르다는 사실에 매우 민감할 수 있으므로 따뜻한 말로 차분하게 설명해서 이해시켜야 한다. 예를 들어 치료하지 않으면 빨리 월경을 시작해서 큰일이 난다거나 약을 먹지 않으면 키 성장이 멈춰버린다는 등의 겁주는 말은 위험하다. 그보다는 “보다 멋진 어른이 되기 위해 지금 속도를 맞추는 과정”이라고 설명을 해주는 건 어떨까. 조숙한 신체를 갖게 된 아이들은 또래 집단의 시선에 예민해질 수도 있으니 “달리기 해봤지? 친구들보다 한 걸음 앞섰을 뿐이야, 곧 친구들도 따라올 거야”라는 설명으로 아이가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도록 해줘야 한다. 윤정선 한의사 하우연한의원 대표원장, EBS 육아학교 소아청소년과 분야 BEST 육아멘토, 윤스한의원 대표원장, 소아한방 편 공동저자
- 2017-05-22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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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의 달, 효도를 다시 생각하자
- 오늘은 어버이날이다. 효도를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 간 인식 차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효도를 하여야 하고, 받아야 하는 입장에 선 시니어들은 고민이 깊어간다. 즐거워야 할 가정의 달에 설ㆍ추석 명절 스트레스처럼 ‘가정의 달 스트레스’를 어깨에 짊어진 안타까운 현실이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오면 반갑고, 가면 시원하다고 한다. 효도를 받는 입장에서는 이처럼 전통적인 혈연ㆍ정서적 의미의 효도를 바라고 있다. 필자는 쌍둥이 손주와 외손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입이 귀에 붙는다. 옛날 할아버지ㆍ할머니께서 손자들에게 내리 사랑하셨던 것처럼 손주가 있는 자체가 축복이다. 뺨을 비비고 껴안아주면서 따뜻한 체온을 느끼는 것이 행복이다. 효도를 하는 입장인 자녀 세대는 용돈, 비상시 목돈 등 부양료 지급 등을 우선순위로 꼽아 경제ㆍ물질적 지원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지금의 세태다. 지금은 맞벌이하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형편이다. 숨 가쁜 직장생활과 고달픈 육아 등으로 부모가 원하는 효도의 실천이 쉽지 않다. 시니어 세대처럼 전업주부는 꿈꾸기 어려운 옛 이야기가 되었다. 오히려 시니어는 손주들을 돌보는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도맡아야 주어야 한다. 이것이 정서적 교감을 하는 좋은 계기가 된다. 자녀 세대가 효도를 바라보는 관점이 변화하는 것을 단순히 물질만능주의로 해석해서 안 되는 것이 현실이다. 빛의 속도로 변하는 세상에 효도의 개념도 변하고 있음을 속히 인식하여야 한다. 자녀들이 부모가 필요할 때 미리 알아서 티 나지 않게 보살펴주는 지혜를 익혀야 한다. 내가 필요하다고 부르거나 찾아가는 일을 삼가야 한다. 그들은 시니어보다 더 어렵게 살고 있다고 이해하여야 한다. 부모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은 자식이 그 후에는 부모 봉양을 나 몰라라 해서 결국 효도계약서까지 쓰는 게 세간의 화제였다. 효도의 정도에 따라 자식을 차별하여 상속분쟁ㆍ폭탄이 터져 풍비박산한 경우도 종종 보아왔다. 부모와 자식 세대 간 갈등이 계속 늘어나자 국회에서는 불효자방지법이 발의돼 계류 중이다. 아무리 법으로 효도와 부양 의무를 규정하더라도 효도의 총량을 수치적으로 정의할 수는 없다. 부모와 자식이 평상시 대화를 통해 인식의 차를 좁혀 가는 게 가장 중요하다.
- 2017-05-08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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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아버지가 될 자격이 있을까?
- 손녀가 태어난 지 6개월이 지났다. 남들은 손녀 보고 싶어 자주 가는 줄 안다. 그러나 동네도 좀 멀고 자주 가는 것이 아기에게 좋을 것 같지 않아 자제하다 보니 등한시 하게 된 것이다. 태어났을 때 병원에서 보고 그 다음 산후조리원에서 집으로 돌아 왔을 때 가본 것이 전부였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아기는 대개 비슷하고 아직 소통이 안 되니 그냥 보기만 할 뿐이라 별다른 생각은 안 들었다. 남들은 손주가 태어나면 귀엽다며 손주 자랑에 열을 올리는데 나는 아기에 대한 정이 없는 편이다. 아들딸이 고만할 때 나는 중동에 나가 있는 바람에 아기에 대한 정을 경험할 기회가 없었다. 아들이 사는 사당동 근처에 갈 일이 있었다. 산행을 하고 뒤풀이로 저녁도 먹었고 술도 거나해서 바로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했다. 그러나 너무 무심한 할아버지 소리를 들을까봐 아들에게 연락을 했다. 마침 집에 있다고 했다. 동네가 주택가라서 그런지 가게가 안 보였다. 제 철 과일이나 사려고 했었다. 편의점은 있는데 마땅히 사들고 갈 것도 없어 또 만만한 화장지 한 뭉치를 사 들고 갔다. 그리고 아들과 마실 막걸리 두 병을 사 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손녀가 앉아 있었다. 늘 보던 바퀴보행기가 아니고 바퀴 없는 보행기 같이 생겼다. 정면으로 나를 보고 있는데 카메라를 들이 대니 금방 울상이 되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통한 순간이다. 내내 누워 있다가 오늘부터 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검은 색 재킷을 입었으니 무섭게 느껴졌을 것이다. 여자들은 자주 드나들었으나 남자는 내가 처음 이라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나는 개를 좋아하는데 어느 별장에 갔을 때 그 집 개가 나를 문 적이 있다. 개가 임신 중이라 예민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했다. 그보다는 내가 어두운 색 옷을 입고 정문이 아닌 계곡에서 나타났기 때문에 경계심으로 그랬다고 추측해본다. 경험상 개들은 복장을 보고 사람을 차별한다. 우편배달부나 청소하는 사람에게는 짖지만 하얀 드레스셔츠에 정장을 한 사람에게는 짖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손녀가 느낀 할아버지의 이미지는 어두운 색 옷을 입고 나이 들어 무섭게 생긴 남자였던 것이다. 거기에 막걸리를 마셔 술 냄새가 풍풍 나니 그걸 할아버지 냄새로 기억할 것이다. 장차 이미지를 바꿀 수 있는 기회는 많겠지만, 일단은 그런 모습으로 상면한 셈이다. 요즘 다행히 전처가 일주일 간격으로 드나든단다. 퇴직 하고 나서 할 일도 없던 차에 귀여운 손주 보러 오기도 하고 육아 경험도 들려준단다. 두 자녀 키울 때 맞벌이를 하느라고 고생을 많이 했다. 처음엔 동네 할머니들에게 맡겼으나 할머니들은 책임감이 크지 않아 늘 노심초사했다. 출근할 시간은 되었는데 할머니가 사정이 있어 못 온다고 하면 발만 동동 굴렀던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나마 어느 해 겨울인가 유난히 추워서 고령의 할머니들이 돌아가셨다. 새로 사람을 구할 수 없었다. 그때 나는 회사 일에 바빠 어떻게 해결했는지 조차 모른다. 그때의 애로를 생각하고 며느리가 출산휴가를 마치고 곧 출근하게 되면 손주를 돌봐준단다. 다행이다. 무엇보다 아기가 좋아할 복장부터 표정, 말씨를 어느정도 다듬어야겠다. 할아버지가 되려면 일정한 훈련을 통해 자격을 갖춰야 하지 싶다.
- 2016-10-17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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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주 병법 PART6] 일본 할아버지·할머니의 ‘똑똑한’ 손주 사랑법
- 지피지기, 즉 적을 알면 백전백승. 하지만 손주는 적이 아니다. 쌍둥이에게도 세대 차가 있다는 유머처럼 아무리 인생의 대선배이지만 손주를 접하는 방법에 자식인 부모와 차이가 있고, 또 그 아이인 손주와도 세대와 문화의 차이가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런 모든 걸 뛰어넘어 손주랑 멋있게 그리고 알차게 지내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태문 동경통신원 gounsege@gmail.com 1.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착각 손주가 잘 안 따른다며 고민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많다. 당연히 귀여운 손주를 보고 싶어서 어루고 달래지만 손주가 좀처럼 익숙해하지 않고 길들지 않는다면 무조건 사랑을 쏟아부을 게 아니라 왜 그런지 환경, 조건, 그리고 자신에게 문제는 없는지 등 먼저 그 원인을 찾아봐야 할 것이다. 2. 며느리의 고민 할머니가 세 살짜리 손주를 때리는 걸 보고 정말 기가 찼다. 때린다고 해결될 것도 아니고 더 꺼리고 싫어질 텐데… 손녀에게 ‘손’하며 내미는 손을 잡고 웃는 할아버지 얼굴을 봤는데, 강아지도 아닌데 그런 식으로 다루다니… 이런 속사정의 며느리가 있는 게 현실이다. 매를 들더라도 그것은 부모의 몫이고, 자칫하다가는 학대로 비칠 수도 있으니 절대로 삼가야 한다. 또한 손주는 절대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애완동물도, 장난감도 아닌 엄연한 인격체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3. 둘만의 원칙을 정하기 놀이를 통해 배우는 건 운동 및 인지, 판단 능력만이 아니라 협력과 문제 해결 과정의 사회성이다. 용돈을 주면서 돈의 가치와 쓰임새, 그리고 활용에 대해 함께 가르쳐 준다면 더 큰 효과가 있듯이 자칫 고집불통, 독불장군으로 자라지 않도록 적절한 원칙을 만드는 게 중요할 것이다. 놀이터에서 놀 경우에도 시간을 정하고, 간식을 주더라도 양을 정하는 식으로 무한 애정과 무한 만족은 구분해야 하겠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즉 지나친 건 부족한 것만 못하다는 말처럼 뭐든지 정도껏 원칙 아래에서 행해져야 그 효과도 클 것이다. 4. 좋은 놀이법 공유하기 눈높이 교육이라는 말이 있듯이 손주의 시선에 맞춘 돌보기는 결국 손주가 받아들이기 쉽다는 걸 뜻한다. 앞서 소개했듯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렸을 때 즐겼던 놀이를 함께 하는 것도 좋을 것이고, 요즘 유행하는 놀이법도 배워서 서툴지만 함께 즐겼을 때 그 기쁨은 더 클 것이다 또한 같은 또래의 아이들에게 적극 물어보고, 같은 세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어떤지 그 사정도 들어본다면 정보의 폭도 넓어지고 시행착오도 줄일 수 있다. 게임중독에 빠진 청소년, 밖에서 뛰어놀지 않고 방에 처박혀 공부만 하다 체력이 약해진 요즘 어린이 등 사회적으로도 문제가 되고 있는 이런 것들도 결국 평소의 습관, 그리고 첫 단추를 어떻게 꿰느냐가 관건인데, 부모와 놀이법에 대해 상의하고 공유한다면 자신에게도 신선한 자극과 좋은 공부가 될 것이다. 5. 새 육아법을 받아들이자 할아버지 할머니와 부모 세대간 흔히 문제가 되고 갈등의 씨앗이 되기 쉬운 게 바로 ‘육아에 대한 생각’, 즉 육아법의 차이다. 예를 들면, 툭하면 안기려는 버릇이 생기니 좋지 않다, 오냐오냐하면 버릇이 나빠진다 등등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간섭하게 되면 손주 때문에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나빠질 수 있다. 새로운 육아법은 받아들이되 선배로서 조언하는 것까지 포기할 필요는 없다. 적절한 선에서 참고할 만한 경험과 지혜, 그리고 도움이 될 수 있는 조언을 아낌없이 전하고 함께 나눈다면 세대의 벽도 쉽게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손주와의 커뮤니케이션은 결코 어려운 게 아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평소의 모습 그대로 손주와의 관계를 차곡차곡 쌓고, 함께 나누며 지내는 시간은 알찬 삶의 활력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6. 기억은 규칙 속에서 추억으로 일회성은 피하자. 뷔페 같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음식은 오히려 질리기 쉽고 식상하기 마련이다. 원하는 대로 뭐든지 들어주는 게 결국 손주를 유아독존(唯我獨尊)의 괴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걸 명심하고, 일회성보다는 반복, 그리고 규칙적으로 행하자. 집 냉장고에 있는 음식 재료로 요리를 함께 만들어 보는 걸 일주일에 한 번씩 해 보든가, 동네 산책을 매번 다른 길로 다녀 보는 것도 좋겠다. 아니면, 편의점과 슈퍼마켓에서 음식을 살 때 재료가 뭔지 성분과 열량 표시에는 뭐가 씌어 있는지 읽으며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면 금상첨화이겠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횟수를 거듭할수록 커뮤니케이션도 깊어지고, 반복되는 경험 속에서 소중한 추억으로 자리 잡아 나이가 들어도 잊지 못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존재를 떠올리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 7. 손주보다 자식에게 사랑을 손주가 귀여운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손주를 가장 사랑하는 존재는 자신이 아니라 부모임을 잊지 말고, 먼저 손주를 흐뭇하게 쳐다보기 이전에 자식에게 사랑을 쏟고 있는지, 혹은 손주 앞에서 자식을 혼내지는 않는지 뒤돌아볼 일이다. 매일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식사와 대화, 놀이에서 우선 순위를 정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리사랑이라는 말처럼 자식에 대한 사랑이 결국은 손주에게 이어지고 더 커진다는 점을 명심하자. 자식과의 신뢰 관계, 그 태도를 보고 손주가 크며, 또한 손주를 가장 아끼고 사랑할 자격이 있는 건 바로 자식임을 인정한다면 손주를 대하는 방법에 변화가 생길 것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로서 존경 받고 오래 살기를 바란다는 손주의 듬직한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해서라도 듬뿍 사랑을 쏟는 게 어쩌면 자식과 손주에게는 지나친 관심이고 간섭일 수도 있다. 8. 할아버지 할머니의 역할을 알자 앞서 말했듯이 귀여운 손주의 재롱과 투정, 그리고 어리광에 그저 오냐오냐 응해주거나 혹은 넘치고 남을 만큼 모든 걸 주는 건 과잉보호일 수 있다. 부모가 보더라도 좀 심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분에 넘친 사랑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고, 도를 넘어선 간섭이 된다. 일단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역할에 대해 조금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 오면서 많은 경험을 쌓아온 대선배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든든한 매력이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연 날리기, 비눗방울 만들기 등 놀이 방법을 가르치면서 커뮤니케이션을 꾀하는 방법도 있다. 물론 놀이를 통해 인사법과 식사 예절 등을 가르쳐도 좋을 것이다. 특별히 손주를 가르친다고 의식하지 말고 평소 말투 그대로 이야기하며 함께한다면, 손주는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배워 나갈 것이다.
- 2016-07-18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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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초등학생시절 처음 하늘을 날았다
- 인생 100세 장수시대가 됐다. 어언 70년을 거의 살았고 앞으로 살아야 할 날도 30년은 족히 남았다. 즐거웠던 추억은 인생의 등불로 삼았고 아팠던 기억은 좋은 가르침으로 남았다. ◇학생회장 후보로 인생의 희열 새 학기가 시작하는 봄을 맞아 필자 아파트와 가까운 초·중·고등학교에서는 학생회장선거가 진행되었다. 아침마다 교문에서 붉게, 푸르게, 노랗게 만든 피켓을 들고 성인보다 더 열심히 선거 운동하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총등학생 시절 총학생회장 선거가 생각났다. 학생 수가 적고 선생님과 교실이 부족해 몇 개 학년이 한 교실에서 합동수업을 가끔 했던 지금은 아예 없어져 버린 시골의 조그만 초등학교 이야기다. 학생들은 학급장은 물론이요 총학생회장도 선거로 뽑는다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 물론 선거를 해 본 일도 없었고 선생님이 임명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다. 4학년이 되자 담임선생님이 급장선거를 시행했다. 산간벽지에서는 놀라운 변화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4.19혁명이 났던 해였다. 그런데 더 신기했던 건 필자가 급장에 뽑힌 것이다. 얼마 후 총학생회장선거가 실시되었다. 그간 6학년 중에서 임명하던 학생회장도 전교생이 직선하도록 바뀌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4·5·6학년에서 한 명씩 후보를 내도록 했다. 필자는 4학년 대표로 학생회장 후보자가 됐다. 합동연설을 하고, 각 교실을 돌면서 선거운동했던 기억이 지금도 뚜렷이 남아 있다. 그리고 선거운동이 끝난 후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서 큰 칠판에 바를 정자를 그려가면서 진지하게 개표가 진행했다. 모두가 한 표 나올 때마다 목이 터지도록 함성을 질렀다. 6학년 선배가 당선됐다. 만약 그 선배가 낙선하였으면 어떡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다행한 일이었다. 문제는 다음에서 발생하였다. 5학년 형을 누르고 2등이 된 것이었다. 2등이 확정되는 순간 가슴에서 이제까지 느끼지 못한 무언가 뜨거운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양말도 없이 맨발로 고무신을 신고 집으로 돌아오는 자갈길이 비단길처럼 포근하게 느껴졌다. 전교생이 모여 투표지 한 장마다 이름을 연호하던 개표장의 함성이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듯했다. 다음 날 학교가 내 집처럼 아늑하게 느껴졌다. 선생님들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칭찬해주셨다. 거의 처음 느껴보는 환대에 가슴이 벅찼다. 멀리만 느껴졌던 교무실을 즐겁게 찾는 찾아가기 시작하였다. 교무실 한쪽에 있는 ‘미니 도서실’을 열심히 찾는 학동이 됐다. 비록 수십 권에 불과하나 교과서가 아닌 ‘책’을 부지런히 읽기 시작했다. 그때 만난 ‘장발장’·‘삼총사’·‘모세의 기적’ 등은 훗날 탐독했던 다른 책보다 오래 기억에 남았고 인생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수줍음을 많이 탔던 ‘시골소년’은 읍으로, 대도시로, 그리고 서울로 진학해 학교생활을 재미있게 하면서 힘차게 성장했다. 그 밑거름은 첫 ‘희열’이었다. ◇인생을 바꿀 뻔했던 증기기관차 필자는 50년 전 고교 입시를 치렀다. 당시 중학교부터 전 과목에 대한 시험을 시행하던 시절이었다. 인생이 확 바뀔 수도 있었던 중요한 순간이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다행히 대도시 소재 고등학교에 어렵게 합격했다. 시골 동네에서 몇 년에 하나 날까 말까 하는 영광이었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되지 않았다. 입학등록금 준비도 문제였으나 한 번도 가보지 않는 대도시로 등록하러 가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었다. 등록 마감은 다음 날 정오까지 주어졌고 추가등록은 인정되지 않았다. 필자는 결행이 잦은 버스를 기다릴 수 없어서 기차를 선택했다. 우리 마을 종점에서 아침 6시에 출발하는 버스는 정상적으로 운행해야 5시간 걸려서 광주에 도착하던 때였다. 그리고 비포장 자갈 도로에는 비가 내리거나 눈이 오면 버스가 다닐 수 없었다. 당시는 특히 겨울철이어서 더 그래 보였다. 전날 오후 3시간 넘게 걸어 나와서 읍내 기차역 앞 여관에서 자고 마감시각에 늦지 않으려고 새벽 5시 첫차를 탔다. 8시 광주에 도착하는 통학차였다. 문제는 엉뚱하게도 ‘기차’에서 터졌다. 칙칙폭폭 석탄 연기를 내뿜으며 힘차게 달리던 증기기관차가 화순에서 광주로 가는 너릿재 중간 오르막길에서 숨이 막히는 듯 멈춰 서고 말았다. 시커먼 열차는 제동이 잘 안 되는지 삑삑 요란한 소리와 함께 속절없이 뒤로 내달렸다. ‘정오 마감시각’ 맞추기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화순역까지 밀려 내려온 기차는 한 시간 넘게 물과 석탄을 보충해 증기를 생산한 후 고개를 힘겹게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또 숨이 차고 말았다. 후진과 에너지 보충이 반복됐다. 마감 시각을 놓칠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들었다. 당시에는 다른 수단을 찾을 수 없었다. 두 번이나 숨이 막혔던 열차는 운행 예정 시각을 3시간 더 넘기고서야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 냅다 은행으로 뛰었다. 운명을 가를 뻔했던 순간이었다. “운 좋은 학생이구나!” 잠시 후 접수창구를 닫으면서 격려해주었던 은행원 누나의 그 한 마디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그때부터 ‘시간의 중요성’을 제일로 삼았다. 다른 것은 채우거나 보완할 기회가 주어지지만 한 번 지나간 시간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회에 진출하여서도 약속시각에 늦지 않도록 노력했다. 모든 업무는 기한 전에 마감하고 여유를 가지는 것을 생활신조로 삼았다. 사회 은퇴 후 자원봉사와 교육 수강, 강의, 친구 모임에 세계 최고 수준의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그 편리함도 알았다. 나이 들어서 운전하는 부담도 덜어야겠다는 생각에 승용차 사용을 자제하고 있다. 가까운 곳에 사는 아들 가족과 ‘승용차 나눠 사용하기’도 하고 있다. 키는 하나씩 나누어 가지고 주차 스티커는 양쪽에서 발부받아 이용에 불편이 없도록 했다. 평일에는 아들 가족이 출ㆍ퇴근에 전용하고 특별한 일이 있는 경우에만 내가 사용한다. ◇첫 입학식 60년 전과 후 [새 학기를 맞아 환갑 띠동갑 쌍둥이 손주와 외손자의 입학식이 열렸다. 60년 전 초등학교 입학식이 연상됐다. 아이들의 손을 꼭 잡고 ‘친구 잘 사귀면서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랐다. 오전에 쌍둥이 손녀와 손자의 초등학교 입학식이 열렸다. 바로 집과 가까운 학교이지만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잔뜩 호기심을 드러냈다. 예나 지금이나 새로움에 대한 관심은 같은가 보다. 어머님의 손을 잡고 한참 걸어가서 참가했던 초등학교 입학식이 생각났다. 입학 전 몇 년 동안 할아버지가 만든 필사본으로 천자문을 공부하고 시조를 읊었다. 아버지에게 한글을, 어머니에게 산수를 익혔다. 그러나 ‘신학문’을 배우러 처음 가는 학교가 매우 궁금하여 밤잠을 설쳤다. 입학식이 진행되었다. 왁자지껄 떠들던 아이들도 조용해졌다. 옛 입학식 때 교장의 ‘훈화’가 떠올랐다. 당시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뭔가 보통 사람과 다른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하였다. 라디오 소리도 들어본 일이 없던 그 시절, 풍금 반주 애국가를 처음 듣고 가슴이 뭉클했던 것도 기억났다. 책을 처음 받았고 어머니는 공책과 연필을 사줬다. 글씨와 그림이 함께 인쇄된 새 책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잉크에 흠뻑 밴 책의 냄새가 정말 좋았다. 그때부터 책을 좋아하는 학생이 되었다. 어린 시절에 읽었던 책이 기억에 오래 남고 인생에 영향을 가장 많이 주었다. 요즘 아이들은 이미 좋은 책을 읽었기에 학교에서 받은 책에 대한 호기심은 크지 않을 터이다. 입학 전 예쁜 책가방과 필기구도 선물로 이미 챙겼는데 이것도 대단히 감동적이었다. 학교 재학 시절 제일 좋아했던 것은 장난감으로 재미있는 놀이하기였다. 그러나 손주들은 뛰어노는 것보다 체육관, 학원을 찾아 나설 것이다. 한국전쟁 후 지금의 최빈국보다 더 어려웠던 시절, 처음 본 공책과 연필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잘 깎이지 않는 연필을 날을 갈아가면서 조심조심 깎아주었던 아버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공책은 한 번 쓰기도 어려울 정도로 잘 찢어졌다. 딱딱한 연필심에 침을 발라서 공책이 파이지 않도록 글씨를 살살 그려야 하였다. 연필심 흑연으로 입술은 시커멓게 물이 들곤 하였다. 오후에는 외손자가 유치원에 입학하였다. 어린이집을 마치고 내년 초등학교 입학을 대비하는 중이다. 손재주가 좋은 이 녀석은 종이접기 작품을 필자 손에 쥐여주면서 ‘입학선물’이라며 재롱을 부렸다. 담임선생의 당부와 학교생활 안내가 있었다. 새겨듣는 아이들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하였다. 교실과 선생이 부족하여 합반수업을 하였던 옛날이 생각났다. 아무튼 좋은 환경에서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랐다. 아들 가족은 아주 가깝게 살고 있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아들 가족을 대신하여 쌍둥이의 손을 잡고 유치원의 등교를 도왔다. 올 첫 학년은 육아 휴직한 며느리가 직접 보살피고 있다. 퇴근이 늦은 딸 가족을 위하여 외손자의 어린이집 하교도 가끔 도왔다. 앞으로도 즐거운 마음으로 손주들의 등하교를 보살필 예정이다. 아이들의 입학식이 매우 아름답게 느껴졌다. 기념사진에 예쁜 모습을 담고 교문을 나섰다. 먼 훗날 아이들의 추억에 할아버지는 어떤 모습으로 남을지 상상의 나래를 폈다.
- 2016-07-14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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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입학식 60년 전과 후
- 새 학기를 맞아 환갑 띠 동갑 쌍둥이 손주와 외손자의 입학식이 열렸다. 60년 전 초등학교 입학식이 오늘과 비교되었다. 아이들의 손을 꼭 잡고 ‘친구 잘 사귀면서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랐다. 오전에 쌍둥이 손녀와 손자의 초등학교 입학식이 열렸다. 바로 집과 가까운 학교이지만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잔뜩 호기심에 차있다. 예나 지금이나 새로움에 대한 관심은 같은가보다. 어머님의 손을 잡고 한참 걸어가서 참가했던 초등학교 입하식이 생각났다. 입학 전 몇 년 동안 할아버님이 만드신 필사본으로 천자문을 공부하고 시조를 읊었다. 아버님에게 한글을, 어머님에게 산수를 익혔다. 하지만 ‘신학문’을 배우러 처음 가는 학교가 매우 궁금하여 밤잠을 설쳤다. 입학식이 진행되었다. 왁자지껄 떠들던 아이들도 조용해졌다. 옛 입학식 때 교장선생님의 ‘훈화’가 떠올랐다. 당시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뭔가 보통사람과 다른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하였다. 라디오 소리도 들어본 일이 없던 그 시절, 풍금반주 애국가를 처음 듣고 가슴이 뭉클했던 것도 기억났다. 책을 처음 받았고 어머님은 공책과 연필을 사주셨다. 글씨와 그림이 함께 인쇄된 새 책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잉크에 흠뻑 밴 책의 냄새가 정말 좋았다. 그때부터 책을 좋아하는 학생이 되었다. 어린 시절에 읽었던 책이 기억에 오래 남고 인생에 영향을 가장 많이 주었다. 요즘 아이들은 이미 좋은 책을 읽었기에 학교에서 받은 책에 대한 호기심은 크지 않을 터이다. 예쁜 책가방과 필기구는 선물로 이미 챙겼다. 장난감으로 재미있는 놀이하기를 좋아한다. 방과 후에는 뛰어노는 것보다 체육관, 학원을 찾아 나설 것이다. 한국전쟁 정전 후 지금의 최빈국보다 더 어려웠던 시절, 처음 본 공책과 연필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잘 깎이지 않는 연필을 낫을 갈아가면서 조심조심 깎아주셨던 아버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공책은 한 번 쓰기도 어려울 정도로 잘 찢어졌다. 딱딱한 연필심에 침을 발라서 공책이 파이지 않도록 글씨를 살살 그려야하였다. 연필심 흑연으로 입술은 시커멓게 물이 들곤 하였다. 오후에는 외손자가 유치원에 입학하였다. 어린이 집을 마치고 내년 초등학교 입학을 대비하는 중이다. 손재주가 좋은 이 녀석은 종이접기 작품을 내 손에 쥐어주면서 ‘입학선물’이라며 재롱을 부렸다. 담임선생님의 주의 말씀과 학교생활안내가 있었다. 새겨듣는 아이들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하였다. 교실과 선생님이 부족하여 합반수업을 하였던 옛날이 생각났다. 아무튼 좋은 환경에서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랐다. 아들가족은 아주 가깝게 살고 있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아들가족을 대신하여 쌍둥이의 손을 잡고 유치원의 등교를 도왔다. 올 첫 학년은 육아 휴직한 며느리가 직접 보살피고 있다. 퇴근이 늦은 딸 가족을 위하여 외손자의 어린이집 하교를 가끔 도왔다. 앞으로도 즐거운 마음으로 손주들의 등하교를 보살필 예정이다. 아이들의 입학식이 매우 아름답게 느껴졌다. 기념사진에 예쁜 모습을 담고 교문을 나섰다. 먼 훗날 아이들의 추억에 할아버지는 어떤 모습으로 남을지 상상의 나래를 폈다.
- 2016-06-29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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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주 병법 PART1] 육아 일기 쓰는 할아버지 “내 자식 키울 땐 몰랐던 육아 재미 손자로 알게 됐어요”
- 이창식 번역가( 저자) 나이를 먹긴 먹었는지, 요즘 들어 내 인생을 자주 되돌아보게 됩니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살았다 할 수 있을까? 만년에 이르러서야 내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무 소박해서 성공적인 삶이라 주장하긴 낯간지러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1) 나보다 나은 삶을 사는 자식을 지켜보는 것 2)손주들과 즐겁게 노는 것 3) 조강지처가 곁을 지켜주는 것. 이 세 가지를 위해 오늘도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나의 일상을 한 번 살펴보면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거예요. 아침 6시 정각에 내 휴대폰 알람은 울립니다. “오 해피데이~” 노래 가사와는 달리 내 허리와 다리는 묵직합니다. 그래도 일어나야 해요. 꾸물대다간 딸과 사위의 출근에 지장이 있습니다. 우리 부부가 딸네 집으로 먼저 출근해야 그들도 출근할 수 있거든요. 여섯 살 외손자와 세 살배기 외손녀를 인수인계해야 하니까. 늙은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갑니다. 냉장고에서 계란 두 개를 꺼내 냄비에 담고 물을 부어 가스레인지 위에 올립니다. 10분쯤 끓여야 익죠. 베란다 광에서 고구마를 꺼내 깨끗이 씻은 뒤 그릇에 담아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립니다. 6분쯤 돌리면 익습니다. 계란과 고구마가 익는 동안 파프리카, 비트, 사과, 토마토를 꺼내어 깨끗이 씻은 뒤 칼로 잘라 커다란 접시에 담아냅니다. 한 입에 쏙쏙 들어갈 크기로 말이죠. 아침마다 하는 일이라 손길이 제비처럼 날렵합니다. 커다란 컵 두 개에 우유를 반쯤 따르고 미숫가루를 탑니다. 아내가 특별 제조한 종합 영양식이죠. 현미, 검정콩, 수수, 귀리, 보리, 율무, 약콩 등으로 만들었습니다. 티스푼으로 다섯 술씩 넣고 잘 저은 뒤 식탁에 올려놓고 익은 계란과 고구마를 접시에 담아내면 아침식사 준비 끝입니다. 샤워하고 화장을 끝낸 아내가 때 맞춰 부엌으로 나옵니다. 여자는 젊으나 늙으나 준비하는 시간이 오래 걸려요. 남자는 젊으나 늙으나 그런 여자를 기다리고 달래야 할 운명을 타고난 것 같습니다. 아침 식사 준비는 자연히 내 차지가 될 수밖에요. 즐거워야 할 아침 식사지만 새벽같이 일어나 무슨 입맛이 나겠어요? 그래도 먹어야 또 하루를 버틸 수 있다는 생각에 아내와 나는 그냥 욱여넣다시피 합니다. 식사하면서 행복한 표정을 지었던 적이 언제였던가 싶습니다. 느긋하게 커피 한 잔 마실 겨를도 없이 집을 나섭니다. 평생 운전할 일이 없을 줄 알았던 나는 요즘 마누라 잔소리를 보슬비처럼 맞으며 운전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잔소리가 심할 땐 더러 저항도 해보지만, 대개는 지당한 말씀인지라 내 목소리엔 힘이 실리지 않습니다. 분당 딸 집에 도착하면 7시 반. 손자 손녀는 이미 깨어나 뛰놀고 있습니다. 재영이는 유치원 2년생, 희영이는 어린이집 1년생이에요. 8시쯤 딸과 사위가 출근하고 나면 아이들은 우리 책임입니다. 나는 부엌에서 거실로, 안방으로 도망다니는 손자 녀석 쫓아다니며 아침밥을 먹이고, 아내도 똑같이 손녀를 따라다니며 먹입니다. 식사 끝나면 손자 세수시키고 유치원복 입혀 셔틀버스에 태우는 일은 내 책임이고, 손녀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는 일은 아내 몫이죠. 아내는 오후 4시에 어린이집에서 손녀를 데려오고, 나는 오후 5시쯤 유치원에서 손자를 데려옵니다. 그때까지가 우리들의 자유시간인 셈이죠. 나는 CGV에서 영화를 감상하거나 거실 소파에 앉아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를 보며 휴식을 취합니다. 아내는 근처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며 쉽니다. 유치원에서 외손자 녀석을 데리고 돌아오는 시간은 항상 즐겁습니다. 아파트 단지 안으로 이어진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녀석은 쉴새없이 지껄입니다. ‘하찌’는 무슨 얘기든 잘 들어준다고 생각하거든요. 우리는 동요를 합창하기도 하고, 보도블록을 따라 깡총깡총 뛰며 가위 바위 보 놀이도 합니다. 미리 챙겨 간 과자와 우유를 녀석에게 먹이는 것도 잊어선 안 되죠. 녀석이 지껄이는 얘기는 대체로 두서가 없습니다. 줄거리도 없고 내용도 없을 때가 더 많죠. 그래도 나는 열심히 들어주며 맞장구를 치고 가끔 추임새를 넣기도 합니다. 어쩌다 기막힌 얘기를 할 때도 있거든요. 같은 반에 있는 시아란 여자아이와 사랑에 빠진 얘기 같은 것 말이죠. 언젠가부터 녀석은 “재영이는 시아를 사랑해!”를 입에 달고 살았어요. 유치원에서 시아랑 결혼까지 했다는 겁니다. 아마 ‘웨딩게임’ 같은 걸 했나봐요. 시아와 결혼한 아이가 저 말고도 둘이나 더 있었다니까요. 또래 중에는 여자보다 남자가 월등 더 많거든요. “결혼하려면 프로포즈를 해야 하는데?”라고 내가 말했더니, “프로포즈가 뭐야?” 하고 되묻습니다. 내가 보도블록에 한 쪽 무릎을 탁 꿇고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나와 결혼해 주세요라며 여자한테 꽃다발을 바치는 거야”라고 했더니 녀석은 대뜸, “그렇게 했어”라고 대답했습니다. “정말 그랬단 말이야?” 하도 어이가 없어 다시 물었더니 녀석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말했어요. “응, 그렇게 하고 결혼했어.” 껄껄 웃을 수밖에 없었죠. “엄마하고 시아하고, 누굴 더 사랑해?” 하고 물었더니, 녀석의 표정이 갑자기 심각해졌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엄마.” 라고 조그맣게 대답했어요. 아직 어린애거든요. 그런데 그 다음 말이 기가 막혔습니다. “근데 시아한텐 그 말 하면 안 돼, 알았지?” 하는 겁니다. “알았어.” 나는 고개까지 끄덕이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어요. 녀석을 안심시켜야 했으니까요.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아내는 이미 어린이집에서 손녀를 데려와 목욕시키고 있습니다. 손자 녀석 샤워는 내 책임이죠. 바로 이 임무를 수행하다가 내 허릿병이 도졌는데, 녀석 몸무게가 어느새 부쩍 는 걸 간과하고 덥석 안았던 탓이었죠. 허리에서 우지끈 소리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벌써 열흘째 한방치료를 받고 있는데도 아직 허리가 묵직하고 왼쪽 다리가 저리답니다. 사위와 딸이 귀가하는 8시까지는 하루 중 가장 힘들고 길게 느껴지는 시간입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손자 손녀 따라다니며 저녁밥 챙겨 먹이고, 우리도 대충 한술 떠야 합니다. 집에 가면 밤 9시가 넘어 따로 차려 먹을 시간이 없거든요. 엄마 아빠 기다리는 아이들도 지쳐 짜증을 부리거나 칭얼대기 일쑤죠. 녀석들을 달래야 하는 우리 노부부도 진이 빠질 대로 빠지고요. 그래도 살살 달래며 같이 놀아줄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손녀가 울음을 터트리면 늙고 지친 아내가 둘러업어야 하고, 그러면 힘이 몇 배로 더 드니까요. 아이들과 즐겁게 노는 일은 그래서 매우 중요합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날마다 즐겁게 놀아야 한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죠. 고도의 내공이 필요합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나 자신이 바로 ‘아주 재미있는 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손자 손녀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아이들의 머리에 ‘하찌=재미있는 친구’로 새겨져야만 합니다. 눈높이뿐만 아니라, 마음 폭도 같아져야만 해요. 그러려면 실력을 쌓아야 하겠죠? 웬만한 동요는 다 부를 줄 알아야 하고, 무용도 곁들일 수 있으면 금상첨화입니다. 동요와 무용에는 우는 아이도 금방 달랠 수 있는 힘이 있거든요. 심하게 울던 아이도 하찌가 신나게 동요를 부르며 무용을 하면 뚝 그치고 빠져들 때가 많아요. 상황 연출력도 필요합니다. 울거나 투정부리는 녀석을 한순간에 다른 세계로 끌고 들어가는 기술 말이죠. 말로 설명하기 어려우니 한두 가지 사례를 들어보죠. 세 살배기 희영이가 악을 쓰며 웁니다. 아직 말을 할 줄 모르니 이유를 알 수 없어요. 할매가 아무리 달래도 소용없습니다. 또 둘러업어야 할 판이에요. 이럴 때 분위기를 바꾸어 버리는 게 상황 연출입니다. 옆에 앉은 재영이한테 대뜸 이러는 거죠. “재영아, 코끼리 어디 갔지? 방금 여기 있었는데. 소파 밑으로 들어갔나? 돼지는 어디 있지?” 그리곤 소파 아래를 들여다보며 계속 떠들어댑니다. 코끼리나 돼지나 염소 등은 희영이가 갖고 놀던 장난감이거든요. 이쯤 되면 희영이도 울음을 그치고 함께 소파 밑을 들여다보기 시작합니다. 나는 한참 찾는 척하다가 장난감들을 슬쩍 꺼내며 다음 상황을 연출하기 시작하죠. 동요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오리는 꽥꽥, 오리는 꽥꽥, 염소는 음메에, 염소는 음메에, 돼지는 꿀꿀, 돼지는 꿀꿀, 소는 음무, 소는 음무.” 상황 연출은 자기가 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이가 완전히 잊어버릴 때까지 충분히 오래 끌어야 합니다. 다른 세계로 완전히 밀어 넣어야 하니까요. 여섯 살배기 손자 녀석이 울 때는 그보다 정교하고 급박한 연출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소도구도 달라야 합니다. 녀석이 즐겨 갖고 노는 장남감들을 총동원하는 거죠. “재영아, 덤프트럭이 버스와 충돌했어! 트럭이 넘어지고, 버스도 뒤집히고, 굴삭기와 경운기도 쓰러졌네! 어쩜 좋아? 사람들이 많이 다쳤을 거야! 그러니까 운전할 땐 조심해야 한다고 그랬잖아. 하찌가 그랬어, 안 그랬어? 빨리 구급차를 불러. 삐뽀! 삐뽀! 경찰차도 불러야지. 애앵! 애앵!” 상황은 새로운 내용을 보태며 계속 발전시켜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최대한 진지하고 박진감 넘치게 끌고 나가야죠. 아이가 울고 있던 사실마저 까맣게 잊고 “알았어. 지금 전화할게” 하고 끼어들 때까지. 그래서 마침내 하찌와 함께 즐거운 게임을 벌일 때까지. 귀가한 사위와 딸에게 아이들을 인계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9시 뉴스가 방영되고 있습니다. TV를 보며 대걸레로 방바닥 먼지만 대충 훔치고 곧바로 잠자리에 들죠. 6시에 울릴 휴대폰을 머리맡에 놓아두고요. 후유,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주말 휴식이 월요일부터 기다려집니다. 그래도 잠자리에 누우면 재영이와 희영이의 웃는 얼굴이 맨먼저 떠오릅니다. “고것들 참!”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옵니다. 녀석들 아니면 도대체 웃을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할매·하찌 기운을 쏙 빼놓지만 동시에 수많은 웃음을 선사하니 참으로 신비한 존재들입니다. 내년이면 희영이도 네 살이 되니 좀 수월해지겠지, 생각하며 안 오는 잠을 억지로 청합니다. 당신의 삶은 어떠했나요? 지금은 어떤가요? 그만하면 성공한 인생이라 생각하나요? 사람마다 판단 기준이 다르겠죠. 신입사원 시절 저는 가전회사 판촉부에서 근무했습니다. 10년을 채우고 사직한 뒤엔 영미 추리소설을 번역하며 먹고살았죠. 칠순을 코앞에 둔 지금 되돌아보니, 냉장고 세탁기 팔려고 뛰던 그 시절이나 남들이 쓴 책 번역하느라 골머리 앓던 그 시절이 다 부질없게 느껴집니다. 내게 남은 건 뭔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절로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더군요. 1. 나보다 나은 삶을 사는 자식을 지켜보고 있다. 2. 손주들과 날마다 즐겁게 놀고 있다. 3. 조강지처가 내 곁을 지켜주고 있다. 자, 이래도 내가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 2016-06-27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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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퇴 라이프] 행복한 노후 제2 조건은 ‘손주’
- 지난해 3월 하순의 어느 날, 아내와 함께 전남 구례군 산동면의 산수유 축제현장을 거니는 도중 아내가 불쑥 얘기했습니다. “나무들은 매년 봄이면 다시 꽃을 피우는데, 사람은 한번 늙으면 그만이라는 게 참 허무하네요. 우리도 이 산수유 꽃처럼 다시 새봄을 맞을 수 있다면 좋겠네…” 저는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나무는 매년 꽃을 피워서 되살아나지만, 우리에게는 손자들이 있잖소. 그 녀석들이야 말로 우리 인생의 새봄 아닐까요.” 아내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지난 호(號)에서 은퇴한 남자의 행복한 노후를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배우자와의 관계’에 대해 얘기했습니다만, 오늘은 그에 못지않게 소중한 손주들과의 좋은 관계, 그리고 그 관계의 키(key)를 쥐고 있는 며느리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제가 여기서 손주들과의 관계만을 애기하는 건 제게 외손주가 없기 때문일 뿐이지, 외손주들과의 관계가 친손주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절대 아닙니다. 친외손 가릴 것 없이 하나같이 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것은 “외손자들의 육아에 가담한 것은 오직 ‘내리사랑’이라고밖에는 일컬을 수 없는,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웅크리고 있었던, 제어 불능의 끌림 때문이었다고 해야 옳겠다” 는 정석희 님의 증언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정석희 저 - ) 이처럼 내 핏줄에 끌리는 것은 본능이니까요. 그는 외손자를 키우며 쓴 책의 말미에서 “내 인생이 다 저물기 전에 이처럼 아이들의 시작과 내 삶의 끄트머리가 겹쳐질 기회가 주어졌으니, 이것이 축복이 아니면 무엇이랴. (중략) 아이들의 존재란, 경험한 적 없으나 응당 그럴 것이라 상상되는 마약처럼 황홀하고 중독성이 강했다. 나의 노년에서 가장 행복하고 충일했던 시기를 손자 녀석들과 함께 보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지난 6년 가까운 세월에 걸쳐 두 손자를 키워 온, 아니 그 녀석들이 커가는 걸 옆에서 지켜본 저의 생각도 정석희 님의 고백과 꼭같습니다. 저는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전형적인 ‘손자 바보’입니다. 그걸 부인하기보다는 저는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다닙니다. 어찌 보면 구제불능인 사람이지요. 저는 두 손자가 태어난 이후로 가능하면 많은 시간을 손자들과 보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제 취미를 살려서 두 손자가 자라나는 과정을 사진으로 담고, 거기에 제 나름의 설명과 소회를 담아 ‘바보 할배의 육아일기’라는 제목으로 블로그에 올리는 걸 낙으로 삼고 있습니다. 언젠가 동창 모임에서 한 친구가 “야! 뭐 때문에 그런 일에 아까운 시간을 다 보내나? 그래 봐야 손자들이 크고 나면 할아버지가 잘 해준 것 기억도 못한다”라고 타박을 하더군요. “그거야 자네 생각일 뿐이고…”라며 웃고 말았습니다. 두어 달 후 저녁 자리에서 바로 그 친구가 “나는 밥 후딱 먹고 먼저 갈 거다. 오늘 손자가 집에 오는 날이거든…” “손자가 얼마 만에 오는데?” 하고 물으니 “한 달에 한 번 정도…”하고 말끝을 흐리더군요. 두어 달 전 그 친구의 타박이 저에 대한 부러움의 표현이었다는 걸 그때서야 알아차렸습니다. 세 손주들을 적어도 일주일에 한 차례 이상, 어떨 때는 녀석들이 집에 가지 않으려 해서 일주일 이상 함께 자고, 먹고, 뒹굴기도 하는 제 입장에서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손자를 보려고 달려가는 그 친구의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했다니까요. 요즘은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50~60대가 한자리에 모이면 저마다 손주들 사진 꺼내놓고 자랑하기가 바쁘다고 합니다. 동창 모임 같은 데서는 손자 얘기하고 싶은 사람은 미리 만원씩을 내놓고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지요. 뿐만 아니라, 손주가 있는 친구들은 예외 없이 지갑 속이나, 휴대폰에 손주들 사진으로 가득합니다. 실버 라이프에 있어서 손주들의 중요성을 입증해주는 사례들입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어쩌다 한 번 손주들을 보면서, 사진으로나마 애끓는 그리움을 달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내 피를 받아 세상에 나온 손주들을 매일 보고 싶은 실버들에게는 그러지 못한다는 사실은 일종의 고통이기도 합니다. 손주들을 자주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손주들이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친밀감을 느끼지 못해서이거나, 아니면 며느리들이 손주를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자주 보내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손주들을 자주 보고 싶다면 무엇보다도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주들과의 관계, 그리고 손주들의 엄마, 즉 며느리와의 관계를 보다 친밀한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손주들과 친밀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까요… 물론 돈으로 손주들의 환심을 살 수도 있습니다만, 그건 그때뿐입니다. 정말 손주들과 좋은 사이가 되고 싶다면 무엇보다 시간과 마음을 투자하십시오. 즉, 할아버지가 먼저 동심으로 돌아가서 손주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진정한 친구가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저는 손주들이 집에 오면 그때부터 녀석들과 친구가 되어 놉니다. 놀이터로 가 같이 미끄럼도 타고, 같이 달리기도 하며, 모래판에서 씨름도 합니다. 키즈 클럽에 가면 함께 작은 공이 가득한 풀에서 넘어지기도 하고, 좁은 미로 속을 같이 기어 다니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어릴수록 같이 노는 친구를 필요로 하고, 좋아하기 마련입니다. 며느리는 자신과 불편한 관계에 있는 시댁, 혹은 시부모와 자신의 아이들이 가까워지는 것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며느리와 사이가 썩 편하지 않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당연히 손자와 가까워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결혼 전에 심하게 반대를 했다거나, 예단 등의 문제로 며느리에게 격하게 스트레스를 준 원죄가 있다면 ‘구원의 문턱’을 넘기가 쉽지 않습니다. 며느리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고 손주를 맡겨도 좋겠다는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른들 스스로가 자신이 어른으로서 예우 받아야 한다는 권위의식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쓸데없는 권위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며느리에게 어른 대접을 받으려 하거나, 한 술 더 떠서 며느리가 자란 환경을 은연중 무시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노후의 행복 한 가지는 포기하는 것이 나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일체의 권위를 다 내려놓고,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는 사랑으로 먼저 다가갈 때, 며느리도 그에 상응하는 반응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 며느리에게 시댁에 올 때 느끼게 되는 부담감을 덜어 주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제 경우는 아이들이 집에 오는 날은 기본적으로 외식을 하되, 메뉴는 반드시 며느리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도록 합니다. 그게 저녁시간이면 아들, 며느리와 함께 폭탄주 한두 잔을 곁들이기도 하지요. 시아버지가 ‘말아주는’ 폭탄주 한두 잔이면, 웬만큼 두터운 장벽도 다 허물어지게 마련입니다. 이렇게 하면 며느리가 시댁에 와도 밥 짓고, 청소하고, 설거지하는 기본적인 부담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거기에 자신이 좋아하는 외식을 하게 되니 손해 볼 게 없는 장사가 되는 것이지요. 여유가 있어서 아이들이 돌아갈 때 신사임당 초상화 몇 장 찔러 줄 수 있으면 금상첨화겠지요. 손주들과 노는 시간에 간혹 역사상의 위인 전기와 같은 교훈이 되는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들려주는 할아버지가 된다면 더욱 좋습니다. 손주들이 바른 인성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게 하는 데는 할아버지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합니다. 결론적으로, 손주들은 인생의 끄트머리에서 얻은 가장 큰 축복입니다. 그리고 그 손주들이 할아버지를 좋아하고 자주 찾아와 준다면 그건 인생 최고의 훈장이기도 합니다. 이런 축복, 이런 훈장과 거리를 두고 살아야 하는 인생이라면 다른 어떤 것으로 노년의 무료함과 공허함을 메울 수 있겠습니까. >> 조용경(趙庸耿)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해서 한국은행을 거쳐 포항제철(현 포스코)에서 故 박태준 회장의 비서부장과 홍보부장과 회장 보좌역으로 일했다. 포스코건설 인천 송도신도시사업본부장과 지난 2009년부터 2012년 3월까지 포스코엔지니어링(전 대우엔지니어링) 대표이사 부회장을 지냈다. 현재 포스코엔지니어링 상임고문, 한국트라이애슬론연맹 부회장, (사)글로벌인재경영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 2016-05-07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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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식과 함께 살기? 도전해볼 만하다!
- 자식과 같이 산다고 생각하니 갈등이 생길 것 같다. 하지만 배우자와 둘만 살자니 뭔가 적적한 느낌이 올 때도 있다. 손주 녀석들이 보고 싶어 전화기를 들지만, 막상 보려고 하면 귀찮아 수화기를 내려놓기도 한다. 자식과 ‘함께 사는 것’이 망설여지는 것은 이러한 이유와도 맞물려 있다. 여유로운 황혼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 거기에 자녀 내외와의 갈등이 생길 것에 대한 걱정과 ‘품 안의 자식이 나태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더해지면서 지레 겁을 먹는 것이다. 가정경영연구소의 강학중 소장은 “자녀와 ‘함께 사는 것’은 해보지 않고 겁먹을 일이 아니다. ‘같이 사는 것’은 장점이 많아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설명한다. 같이 사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만 부각이 돼서 그렇지, 자식과 부모의 지혜를 모은다면 세대 간의 시너지 효과를 기대해도 좋다는 뜻이다. 함께 살기. 도전해보자. 그 전에 확실히 해둬야 할 것은 동거의 목적을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동거 그 자체가 목적인지, 행복을 위한 선택인지 말이다. 그것이 후자라면 강 소장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서로 합의하라 “같이 살면 어떤 갈등이 생길지 미리 예상을 해보세요. 그리고 그 예상 문제에 대한 모범 답안을 생각해본 후 동거를 시작하면 마음가짐부터 달라질 거예요.” 사실 자식뿐만 아니라 어떤 누구와 같이 산다고 해도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수십 년 같이 산 배우자와도 가끔은 다툼이 생기는데 세대 차이가 나는 자식이나 사위·며느리는 두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같이 살면서 이런 갈등을 피하려고만 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갈등이라는 것은 가족 구성원에게 문제가 있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구조적으로 한 집에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예상 문제들을 미리 준비해놓는다면 갈등은 가벼운 문제가 되고, 해결은 쉬워진다. 생활비 분담과 같은 경제적인 것부터 육아와 집안일의 분담 등 예상 문제들을 생각해보고,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같이 살다보면 가사는 여자가 담당하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도 합의가 필요하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수평적으로 변하고 있는 요즘은 어느 한쪽의 주도나 강요에 따른 분담은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고 강 소장은 설명했다. “구성원 모두의 대화를 통해 만든 규칙을 A4 용지 분량으로 작성해 잘 보이는 곳에 붙여놓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가령 ‘아침밥은 어머니가, 저녁밥은 며느리가 한다’ 등 간단한 것 말입니다. 연초에 이것을 만들었다면 분기별로 가족회의를 통해 개정해도 좋겠죠.” 강 소장은 갈등이 없어 좋은 시기인 동거 초기에 미리 어려운 이야기를 터놓고 이야기해보라고 조언한다. 예를 들면, 지금은 함께 살지만 누구나 그것을 원치 않을 때엔 서로 감정 상하지 않고 나가서 사는 것이 있다. 이것을 미리 말해둔다면, 이와 같은 상황이 발생했을 때 갈등이 생겨 따로 살고 싶어졌다는 오해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아름다운 거리를 지켜라 “신랑과 신부가 결혼을 했으니, 양가 부모들은 ‘자식이 아니라 남이라고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인생의 또 다른 출발점인 만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식과의 거리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강 소장은 우리나라의 부모, 자식 간의 관계를 망치는 가장 큰 이유는 지나친 밀착 관계 탓이라고 설명했다. 자식이 성인이 됐거나, 결혼을 했으면 부모도 자식을 정서적으로 내보내고, 자식도 부모 품을 떠나 자립을 해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아직 그렇지 못한 경향이 있다는 것. 그는 ‘함께 살기’ 위한 올바른 방법은 심리적·정서적으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조언한다. 이것을 ‘아름다운 거리’라고 표현했는데, 이것에 실패하면 상호 의존적이 되거나, 한쪽의 영향력이 커져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어릴 때의 자식과 성인이 된 자식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성인 자식의 행동양식이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닐 수가 있거든요.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부모에게만 요구되는 사항은 당연히 아닙니다. 자식들도 부모를 부모이기 전에 한 남자와 여성으로서 존중하는 게 당연하죠. 가끔은 부모가 자식 방에 들어오면 잘못됐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반대로 그런 경우에는 자식도 부모 방에 마음대로 드나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요즘은 같이 살면서, 서로의 독립적인 생활을 보장하는 형태의 동거가 늘고 있다. 간섭이나 강요는 없다. 대화와 타협, 그리고 존중이 존재한다. 이근후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다섯 자녀의 내외와 한 건물에서 함께 사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 건물에 살지만, 각각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모두 다르다. 한곳에 살지만, 독립적인 환경을 보장하는 것이다. “같이는 살지만, 서로의 독립적인 생활과 취향을 존중해야 하는 것이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생활권 안에서 각자가 잘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같이 살면서도 자식이 부모에게 손 벌리지 않고, 부모도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노후 준비를 차근히 하는 것이 좋은 동거입니다.” 같이 살기? 장점이 많다 “요즘은 자식과 같이 살지 않는 것이 쿨한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많아요. 사실 두려워서 회피하는 것이면서 말이죠. 자식과 같이 살면, 즉 대가족이 되면 좋은 점은 많습니다.” 강 소장은 같이 살기의 가장 큰 장점 중 첫 번째가 역할 분담이라고 했다. 부모가 가진 경륜이 자식 내외와 손주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 실제로 조부모와 함께 사는 가정의 아이들은 생활부터 다르다고 그는 말한다. 사람과 만나 소통하는 데 있어 구사하는 어휘의 범위도 커지고, 어른들을 대하는 방식이나 생각하는 것이 더욱 깊다는 것이다. 가사 분담하는 것도 힘든 일의 부담을 줄일 수 있어 좋다. 두 번째로는 중년에 느끼는 외로움을 없애준다는 것이다. 손주의 육아를 일부분 담당하면 자식들에게도 큰 혜택이 되겠지만, 반대로 부모에게도 좋은 영향을 준다. 손주들에게 느끼는 생동감이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줘 외로움을 달래주기 때문이다. 손주들의 학습을 도와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컴퓨터나 스마트폰 조작법 등이 익숙하지 않을 때 그들에게서 배울 수도 있다. 상호 보완적인 관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생활비를 절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동거를 시작할 때 회의를 통해 생활비를 합리적으로 분담한다면 부모와 자식 모두 경제적인 부담을 반으로 줄일 수 있다. 때에 따라서는 공동 경비를 모아 가족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산다든지 여행을 간다든지 할 수 있어 가족의 화목을 다질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
- 2016-01-21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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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주와 함께1] 손자바보의 행복
- ‘행복한 노후’ 즉 은퇴 이후 시작되는 ‘시니어 라이프’를 행복하게 영위하기 위한 조건으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얘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의 의식 구조 속에서는 노후 생활의 행복은 자식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 특히 자신의 분신인 손자들을 자주 만날 수 있고,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특별히 중요한 조건이라는 사실을 언급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 나의 분신, 현우와 승우 제게는 지금부터 4년 여 전, 거의 비슷한 시기에 두 손자가 태어났습니다. 녀석들이야 서로 4촌 간이지만, 저로서는 마치 쌍둥이 손자를 안은 느낌이었습니다. 두 아들 집을 왔다갔다 하며 녀석들을 어르기도 하고, 사진도 찍어주고 하던 어느 날, 마침내 대오각성(大悟覺醒)의 순간이 다가오더군요. “두 손자 현우(炫宇)와 승우(承宇)는 내 피를 받아 세상에 나온 나의 분신들이며, 앞으로의 내 인생에서는 이 녀석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중대한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밤 안으로, ‘앞으로 살면서 손자들과 함께 하고 싶은 일’의 리스트를 작성했습니다. 두 손자들은 제가 앞으로 많은 시간과 정성과 마음을 쏟아서 사랑해 주어야 할 제 인생의 소중한 열매들이니까요. 나중에 아들, 며느리들과도 협의를 거쳐 완성한 리스트 가운데는 ‘두 손자들과 몽골의 초원에 누워 밤하늘의 별 바라보기’ ‘유치원 시절부터 두 손자들에게 한자 가르치기’ ‘사진을 바탕으로 한 손자들의 육아일기 쓰기’와 같은 항목들이 포함돼 있습니다. 그 뒤로 손자들에게 가급적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손자바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두 녀석도 유달리 할아버지를 좋아해 주었으며, 특히 먼저 태어난 현우는 집도 가깝고 해서 두 돌이 되기 전부터 종종 제 곁에서 자고 가기도 했지요. ◇ 블로그에 올리는 두 손자의 육아일기 요즘도 변함없이 수시로 손자들의 사진을 찍고 간단한 글을 써서 블로그에 올리는 일을 지속하고 있는데, 앞으로 2년 쯤 후에 만약 여건이 된다면 ‘바보할배의 육아일기’라는 제목으로 책을 내볼까 생각중입니다. 이 목표가 성사된다면 아마도 손자들에게 남겨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손자들이 가슴 속에 아름다운 꿈을 간직할 수 있게 도와주는 일, 그리고 손자들을 정서적인 사람으로, 또 배려심을 갖춘 사람으로 키우는 일에 특히 노력을 해 왔습니다. 어린이집을 거쳐 금년에 유치원에 들어간 손자 녀석들이 지난 7월 말에 난생 처음으로 방학이란 걸 했습니다. ◇ 농가주택에서 두 손자를 위한 캠핑 두 손자의 아비, 어미들이 한참 전부터 두 아이의 방학을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지를 두고 많은 생각들을 하기에, 제가 아이들에게 춘천 농가주택에다 여름캠프를 만들어서 일주일쯤 데리고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얘기했지요. 일단 두 손자 녀석들은 서로 무지하게 좋아하는 사촌 형제와 일주일 동안을 같이 지낸다는 사실에 잔뜩 흥분을 해서 어쩔 줄 모르더군요. 그리고 녀석들을 보내는 입장의, 최근에 둘째 아이를 낳아서 육아에 여념이 없는 둘째 며느리 현우어미도, 직장생활을 하는 큰며느리 승우어미도 큰 걱정을 하나 덜어낸 홀가분한 표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미리미리 손자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한 다양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 나무 그네와 수영장 텃밭에다 벤치형 나무 그네를 사다가 설치했고, 한쪽으로는 텐트를 치고 그 안에서 놀 수도, 잘 수도 있도록 평상을 만든 다음 평상 위에 두꺼운 비닐 장판을 깔았습니다. 또 전기선을 끌어다 텐트 안에 예쁜 전구와 함께, 모기나 나방을 잡는 ‘블랙홀’이라는 기구도 설치했습니다. 또 장난감 가게에 가서 전시용으로 사용하던 미니 플라스틱 수영장을 사다가 낮은 평상 위에 설치를 끝냈습니다. 물론 아이들이 중간에 무료하지 않도록 수영은 물론 물총, 비눗방울 기구, 그리고 종이찰흙 등 자질구레한 장난감 소품들도 몇 가지를 사다 놓았지요. 마침내 7월 24일(금), 두 손자를 데리고 춘천으로 와 아내와 같이 상당 기간 연구를 하고 정성을 다해 준비한 여름방학 캠프를 녀석들에게 선보였습니다. 녀석들의 반응이 어땠냐고요? 상상 이상이었지요. 아이들 말로 ‘뿅!’ 가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캠프 생활에 녀석들은 잘도 적응해 주었습니다. 해주는 대로 밥도 척척 잘 먹었습니다. 특히 야채 종류는 입에 대기도 싫어하던 승우 녀석이 사나흘 지나더니 밥상 앞에 앉으면 스스로 손바닥에 상추 한 잎 올려놓고, 그 위에 밥과 삼겹살 한 점, 쌈장을 얹은 다음 입속으로 밀어넣고 우걱우걱 씹는 모습이란… 세상에 그보다 더 할아버지, 할머니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모습이 또 있을까요. 밤이면 두 녀석이 제 양 옆을 차지하고는 제 팔을 베고 누워서, 제가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를 들으며 서서히 꿈나라로 빠져 들어가는 그 사랑스러운 모습들… 그보다 더 행복한 순간이 앞으로 또 있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8월 1일 저녁까지, 8박9일에 걸친 손자들의 여름캠프는 성공적으로 끝이 났습니다. 일주일을 목표로 하기는 했지만, 일주일을 넘어 9일 동안을 할아버지, 할머니와 잘 지내주었습니다. 집에 갈 때도 얼마나 서운해하며 돌아갔는지 모릅니다. 손자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나니 이틀 정도는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늘어지더군요. 그러나 참으로 즐겁고 행복한 피로였습니다. 그 모습을 SNS를 통해서 본 어떤 분이 “손자를 위해 희생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그래 봐야 학교 들어가고 나면 할아버지, 할머니를 찾는 건 그걸로 끝인데, 왜 그렇게 애를 쓰느냐”고 물으시더군요. 삶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참 이기적인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에 투자하지 않고, 수고하지 않고 얻어지는 행복이란 게 과연 있을까요?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고, 할아버지, 할머니를 자주 못 본다고 해서, ‘9일 간의 캠프생활’이란 그 아름다운 기억마저 녀석들의 머릿속에서 지워져 버리는 건 아니잖아요? 저는 그분의 글에 이렇게 답글을 남겼습니다. “세상에 투자 없이 얻어지는 건 아무 것도 없을 겁니다. 저는 손자들과 함께하는 행복이란 할아버지, 할머니의 수고에 대한 훈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손자들이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바탕으로 바른 인성을 가진 사람으로 자랄 수 있다면 지금보다 더한 어떤 투자도 다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하면 제가 행복하니까요.” >>>글·사진 조용경 전 포스코엔지니어링 부회장
- 2015-09-30 1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