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을 가진 사람들이 옆에 있는 땅의 소유자와 분쟁을 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옆에 있는 땅을 사서 같이 건물을 지으면 좋을 듯하여 땅 주인과 흥정을 하다가 서로 기분이 상하게 된다. 특히 다음 그림과 같은 경우 두 땅의 소유자는 사이가 좋지 않다.
땅은 인위적으로 경계를 그어 놓았는데 그 경계로 구분되어 만들어진 것을 필지라고 한다. 필지는 그 모양에 따라 부동산의 가치가 완연히 달라진다. 이 경우 필지를 합하거나 나누면 전체 땅의 가치가 높아지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에 땅 소유자는 미래가치를 보고 서로 옆에 있는 땅을 사고 싶어 한다. 자기 땅의 가치와 가격은 높게 보고 옆에 있는 땅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낮게 가치판단을 한다.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주장하다가 분쟁이 생기는 것이다. 땅을 나누거나 합할 때 변수가 되는 것은 땅의 모양, 접해 있는 도로와의 관계, 땅의 용도 등이다.
그림을 보자. 땅 A 소유자와 옆에 있는 땅 B 소유자는 서로 땅을 팔라고 하다가 다투게 된다. 흔히 땅 B 소유자는 땅 소유자 A에게 시세보다 두 배 이상 줄 테니 팔라고 한다. 그런 말을 들은 땅 A 소유자는 대꾸도 안 한다. 두 배라고 해도 그 가격은 땅 A 소유자가 볼 때는 말도 안 되게 낮아 어이가 없다며 앞으로 얼굴 볼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경우 객관적인 땅의 가치는 어떻게 판단하여야 할까?
먼저 땅 A와 땅 B를 합해서 실제가 아닌 가상으로 최적의 건물을 지어 파는 것으로 이익을 계산해본다. 그러면 전체 매매 추산가격이 나온다. 여기에서 비용을 뺀다. 비용은 건설 관련 비용, 금융 비용, 마케팅 비용, 그리고 제세공과금 등이다. 전체 매매 추산가격에서 비용을 빼면 그것이 바로 땅 A와 땅 B를 합한 땅의 가격 최대치가 된다. 이번에는 땅 B만 가지고 실제가 아닌 가상으로 건물을 지어 파는 것으로 이익을 계산해 본다. 물론 땅 B의 경우도 관련 건축 법규나 행정 사항을 그대로 반영하여야 한다. 이 경우 제대로 된 건물을 짓지 못할 수도 있어 손실이 나타날 수 있다.
땅 A와 땅 B를 합해서 실제가 아닌 가상으로 최적의 건물을 지어 파는 것으로 이익을 계산한 결과와, 땅 B만 가지고 건물을 지어 파는 것과 이익을 비교한다. 그 차이가 바로 땅 A의 가격 최대치이다. 전문가에게 이와 비슷한 땅 거래와 관련된 가격 분쟁을 조정하라고 하면 이런 방식으로 가격을 설명할 것이다. 물론 최종 결정은 당사자의 자유 판단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서로 이해하고 거래하는 경우는 그리 쉽지 않다. 그 결과 서울 도심에서 새롭게 들어선 고층 건물과 그 옆에 있는 작은 규모의 저층 건물들을 종종 보게 된다.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운 모양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여러 형태의 사연이 숨어 있다. 시세보다 두 배, 세 배로 쳐주겠다는 말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또 땅 모양이 이상한 땅을 사면 나쁘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땅의 가치를 맹목적으로 무조건 좋다, 나쁘다라고 판단해서는 곤란하다. 땅의 가치에 대해 여러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1. 좋은 땅 모양은 어떤 모양일까?
2. 땅을 사고 팔 때 거래 단위는 무엇일까?
3. 자투리 땅이란 무엇일까?
4. 토지를 수용한다고 하면 보상가격 때문에 분쟁이 일어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보상가격은 어떻게 정해지는 것일까?
1. 직사각형의 땅이다.
2. 토지를 거래할 때는 필지 단위로 거래를 하게 된다. 필지는 하나의 지번을 가진 토지로서 토지의 등기 단위가 된다. 지적도를 보면 여러 토지의 경계가 그려져 있고 하나의 토지마다 번호가 붙어 있는데 이를 지번이라고 부르고, 이렇게 하나의 지번이 붙어 있는 토지를 필지라고 한다.
3. 자투리땅이란 도로를 내거나 건축을 하다 남은, 기준 평수에 미치지 못하는 소규모 땅을 말한다.
4. 토지보상 평가는 공익사업을 위한 토지 등의 취득 및 보상에 관한 법률 등 관련 법령에 의해 실시한다. 사업 인정 당시의 표준지 공시지가를 기준으로 대상 토지의 위치, 형상, 환경, 이용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산정하게 된다.
>> 김정렬(金淨烈) 한국일반행정사협회 전임 교수
국내 최초로 부동산 전문가들로 네트워크를 구성, RE멤버스를 설립하고 부동산써브 대표를 역임했다. 한국자산관리공사, 한국자산신탁, 기업체, 금융기관 등에 부동산 자문을 꾸준히 하고 있다. 저서로는 등이 있다.
부동산의 가치 판단과 관련한 두 가지 질문에 대해 그 답을 알아보자. 첫 번째 질문이다. 경사가 있는 땅이 있다. 경사진 땅의 높은 곳을 ‘가’라고 하고 경사진 땅의 낮은 곳을 ‘나’라고 하자. 당신은 어디가 좋은 땅이라고 생각을 하나? 두 번째 질문이다. 커피숍이 있다. 그 가게 앞에 도로가 있다. 그 도로의 폭이 넓은 곳이 좋을까? 좁은 곳이 좋을까?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해 답을 생각해 보는 것은 부동산의 가치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글 김정렬 부동산전문가
경사가 있는 땅, 어디가 비쌀까?
부동산은 토지와 건물이다. 건물도 땅과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아파트도 그렇다. 땅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땅의 크기가 적당하고 넉넉한가? 그리고 땅의 모양과 경사, 접근도로는 필수적인 검토사항이다. 물론 땅은 경사가 없고 평평한 땅이 좋다. 그러나 만약에 경사가 있다면, 어떤 판단을 해야 할까?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다. 일반적으로 경사진 곳의 낮은 곳이 높은 곳에 비하여 비싼 땅이다. 집을 짓는다면 ‘가’가 좋고, 가게를 한다면 ‘나’가 좋은 땅이다. ‘가’는 쾌적성이 장점이고, ‘나’는 접근성이 장점이다. 땅값은 ‘나’가 비싸다. 주거용지보다 상업용지가 비싼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좋은 땅이란 비싼 땅과 의미에 차이가 있다. 엄밀히 말하면, 좋은 땅이란 구매가격이 낮은 데 비해 나중에 활용도와 가치가 높은 땅이다.
주거용 부동산의 가치는 얼마나 편하고 행복할 수 있느냐를 따지고, 보통 이를 ‘쾌적성’이라 한다. 세밀히 보면, 교통, 환경, 편익 시설을 가지고 이를 판단한다. 수익성 부동산은 얼마나 수익을 올릴 수 있느냐를 그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데, ‘접근성’에 대한 판단이 가치 기준이 된다. 사람이 접근하기 편하고 많이 올 수 있는 곳이라면, 접근성이 높은 곳이고 가게를 하기 좋은 곳이다.
주상복합 건물을 생각해 보자. 주상복합 건물은 말 그대로 주거용과 상업용의 복합 건물이다. 이 건물에서 상업용은 저층에, 주거용은 고층에 배치하게 된다. 똑같은 이치이다. 그런 이유로 주상복합 건물에서 층이 높은 곳은 주거용으로 적합하고, 층이 낮은 곳은 상업용으로 활용된다.
도로의 폭과 커피 전문점
커피 전문점 앞에 도로가 있다. 그 도로의 폭이 넓은 곳이 좋을까? 좁은 곳이 좋을까? 도로는 수익성 부동산에 있어서 ‘접근성’의 열쇠이다. 답은 가게 앞 도로의 폭은 ‘적당해야 한다’이다. 적당하다고 하는 것은 도로 폭이 너무 넓어도 접근성에 유리하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로 폭이 좁으면 사람이 많이 다닐 수 없고, 도로 폭이 넓으면 도로 가운데 다니는 차량 때문에 접근성에 지장을 준다. 이때는 건널목, 지하도, 육교가 변수가 된다. 업종과 주변 환경에 따라 접근성의 기준과 의미는 차이가 있다.
도로는 부동산의 가치를 좌우한다. 도로는 연결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반대로 분리 기능도 있다. 철도와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지역은 그 지역의 접근성을 분리하기 때문에 지역 발전이 늦어져 많은 고민을 하게 한다.
재미로 풀어볼까요?
‘S’ 자형으로 굽은 도로가 있다. ‘S’ 자형으로 굽은 도로의 안쪽과 바깥쪽 중 어디가 장사가 잘 될까?
햇볕이 잘 드는 곳과 햇볕을 피할 수 있는 곳, 어디가 장사가 잘 될까?
대형 상가 왼쪽에는 학교가 있고, 오른쪽에는 아파트가 있다. 어떤 점을 검토해야 할까?
커피 전문점 앞에 교회가 있다. 어떤 장·단점이 있을까?
‘S’ 자형으로 굽은 도로의 안쪽이 접근성이 높다.
사람들은 편하고 기분 좋은 곳으로 움직인다. 보통은 햇볕이 잘 드는 곳이다. 그러나 계절과 업종에 따라 다르며, 주변 혐오시설 정도가 더 영향을 미친다.
아파트쪽의 접근 동선이 살아 있다. 1층 상가 출입구와 동선은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접근성에 긍정적이지 않다. 다만, 일요일이나 특화된 위치에 있을 때에는 매력적으로 변한다.
>> 김정렬(金淨烈) 한국일반행정사협회 전임 교수
국내 최초로 부동산 전문가들로 네트워크를 구성, RE멤버스를 설립하고 부동산써브 대표를 역임했다. 한국자산관리공사, 한국자산신탁, 기업체, 금융기관 등에 부동산 자문을 꾸준히 하고 있다. 저서로는 등이 있다.
1999년. 필리핀에서 가장 덥다는 3월의 어느 바닷가 마을, 그곳은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이끌고 온 자원봉사자들로 북적였다. 많은 미국인이 참여했고, 한국과 일본에서 온 학생 단체도 있었다. 그 많은 외국인 사이에서 땀 흘리는 한 중년 한국인 남성을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그가 한국에서 특별히 휴가를 내고 참여한 대형 금융회사의 대표라고 생각하는 이는 더더욱 없었다. 그는 후에 한국해비타트의 이사장이 된다. 바로 이창식(李昌植·71) 이사장의 이야기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신태현 기자 holjjak@etoday.co.kr
한국해비타트 이창식 이사장은 한국해비타트 초창기부터 성장을 함께해오기도 했지만, 알고 보면 국내 금융업계의 발전을 지켜본 산증인 중 한 명이다. 이창식 이사장은 1968년 국민은행에 입사해, 1976년 삼보증권으로 옮기면서 증권맨으로 변신했다. 정적인 분위기가 싫어 은행을 박차고 나와, 증권업계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동부증권 부사장을 거쳐, 국민투자신탁증권 대표와 푸르덴셜투자증권 부회장까지 지낸, 은행과 증권, 보험을 두루 거친 금융맨이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까지 격동의 시기에 동서증권 영업부장을 하고 있었어요. 검증은 안 해봤지만, 마치 시장은 나라의 큰 사건을 예견하고, 반영하고 있지 않았나 느껴질 만큼 혼란의 시기였죠. 제가 종교에 귀의하게 된 것도 이때쯤이었어요. 굉장한 변화의 기운이 느껴졌고, 한국사회의 흐름이 달라질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그 누가 권유도 안 했는데 내 발로 교회를 찾아갔죠.”
이끄는 이 하나 없었는데 스스로 종교를 선택해 찾아갔다니 흔치 않은 일이다. 어떻게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물으니 그는 이렇게 답했다.
“변화에 답을 찾고 싶었어요. 당시 몸도 별로 좋지 않았고요. 힘든 시기에 스트레스로 부대낄 때였어요. 그래서 더 찾게 됐던 것 같아요. 교회를 나가고 나서 이런 세계가 있구나! 세삼 깨닫게 됐고, 잘 알고 있다고 자만했던 종교가 이런 것이었구나 새삼 자각하게 됐죠. 자신의 무지를 알게 된 것이죠. 대학교(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때 학생운동에 참여하면서 느꼈던 고뇌와 갈등적 요소들에 대한 해답도 얻게 된 것 같아요. 그간 고민했던 것들에 대한 정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이창식 이사장이 한국해비타트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종교활동이 계기가 됐다.
한국해비타트는 1995년 9월 13일 건설교통부 산하 비영리 공익법인으로 등록함으로써 공식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해비타트 활동은 훨씬 이전부터 국내에서 진행됐다. 1976년 미국에서 시작된 해비타트 운동은 1980년대 후반 미국인이면서 성공회 수도원 예수원 원장으로 활동한 대천덕(미국명 Ruben Archer Torrey) 신부가 신앙계 칼럼을 통해 소개함으로써 국내에 알려졌다. 이후 기독교계에서 펼쳐지다가 1995년 비영리 공익법인으로 공식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이창식 이사장이 한국해비타트에 합류한 것도 이때쯤이다. 그리고 1997년 감사직으로 이 단체에 처음 이름을 올렸다.
“대천덕 신부님은 한국사회의 성인 같은 분이시죠. 해비타트는 단순한 봉사활동이 아니라 일종의 토지 공개념으로 토지 투기를 막아야 사회가 건강해진다는 사상이 포함되어 있어요.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안으로 생각되었죠. 당시 국내 운동가들도 이러한 뜻에 동의하면서 한국해비타트의 시초가 됐어요.”
1997년이면 동부증권 부사장을 지내다 국민투자신탁증권의 대표를 맡았던 시기다. 금융인으로서 최절정을 향해 달려가던 때라 할 수 있는, 가장 바쁜 시기에 단체에 참여한 셈이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NPO(비영리민간단체) 활동에 시간이 많이 필요하진 않습니다. 관심과 애정이 중요하죠. 꼭 해야 하는 의무처럼 느끼지 않고 애정을 갖고 좋아하는 일이라 느낀다면 시간은 어떻게든 나게 되어 있어요. 기업에 있으면서 돈이나 출세 욕심이 많지 않아서 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덕분에 지금 부자는 되지 못했지만요.(웃음)”
국내에 수많은 NPO가 있고, 남을 도울 방법도 많은데 해비타트에 열정을 바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에 대해 이 이사장은 한마디로 “멋있어서”라고 답했다.
“해비타트의 운영방식(Operation Model)이 멋있다고 생각해요. 해비타트는 자립(Self Support)을 돕는 것이 목표예요. 집을 지어서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지어서 가지라는 것이죠. 원래는 혜택을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대가를 지급하도록 해요. 해비타트 운동을 통해 도움받는 사람들을 우리가 동료(Partner)나 구매자(Buyer) 혹은 집주인(Owner)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또 이들이 상환하는 자금을 다시 다른 이를 위해 집을 짓는 예산으로 쓰이는 구조도 멋있죠. 집이 있고 없고는 단지 거주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질과 건강, 장래까지 좌우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는 이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중요한 부분을 언급했다. 바로 ‘받는 사람의 자존감’에 관한 부분이다. 최근 일부 NPO들의 활동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도 받는 사람의 자존감과 관련이 있다. 일부 구호단체나 매체들은 아프리카와 같은 제3세계의 불행과 재난을 부각해 상업적 효과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생성된 사진이나 영상물을 일부에선 ‘빈곤의 포르노’(Poverty Pornography)라고 부른다. 자금 확보라는 근시안적 이득 때문에 균형 잡힌 시각과 지역 주민들의 자존감과 같은 장기적인 목표를 희생시킨 셈이다.
“국제개발협력민간협의회(KCOC)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받는 사람의 자존감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기본적으로 국내 NPO들은 아무래도 국외에서 시작된 단체들도 많아 외국 단체로부터 배우고 있는 편이죠. NPO들을 감시하는 NPO들도 존재하는데, 그들을 중심으로 비참한 광경을 자극적으로 부각하는 것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어요. 국내에서도 이런 부분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작지 않습니다. 구호 활동은 양적 성장만큼이나 그 과정에서의 진정성과 도덕성도 중요합니다.”
KCOC는 세계에서 활동 중인 국내의 국제개발 NGO(비정부기구)의 협의체로 이창식 이사장은 2011년부터 올해 4월까지 회장을 맡아 굵직한 업무들을 해결해왔다.
국제기구들 사이에선 그간 구호활동을 위해 많은 돈이 제3세계로 넘어갔지만, 삶의 질이 개선되지 않고 빈곤과 착취가 계속되는 이유에 대해 자성의 목소리도 높아졌다고 했다. 이에 대해 받는 사람의 준비가 안 됐다거나 주는 사람의 일방적인 지급을 문제 삼는 일도 있었다고.
“그래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이 밀레니엄개발목표(Millennium Development Goals)예요. 2000년에 유엔이 밀레니엄 정상회의(Millenium Summit)에서 빈곤자 수를 줄이기 위해 2015년까지 실행해 나갈 8가지 목표를 정했죠. 2011년엔 그 목표들이 잘 실행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전 세계 대표들과 NGO들이 부산에 모이기도 했습니다. 이 행사가 KCOC도 참석한 부산세계개발원조총회입니다. 이러한 움직임들을 보면서 느낀 것은 인류사회에 대해 낙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하는 점이에요. 불과 수십년 만에 각국 정부나 국민, 민간단체의 태도가 너무 달라졌어요. 인류사회가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 실감 되요.”
이 이사장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구호단체의 한 축은 바로 은퇴자들이다. 그는 1999년 필리핀과 2009년 메콩강 일대의 4개 국에서 열린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부부가 주최하는 국제 해비타트 봉사 프로그램, ‘지미&로절린 카터 워크 프로젝트(Jimmy & Rosalynn Carter Work Project)’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카터 전 대통령과 동행해서 일하는 70세가 넘은 수십 명의 자원봉사자들을 보고 감명을 받은 바 있다고 했다.
“그래서 한국해비타트에서 은퇴자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위해 노력한 적이 있어요. 제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알려지면서 주변에서 은퇴한 남편을 추천하는 아내들의 연락을 많이 받았어요. 아마 한국의 은퇴한 남자들은 가장 낯가림이 심한 존재들 일 거예요. 여성들은 반대고요.(웃음)”
재정적 여건이 넉넉지 않은 NPO 입장에서 전문적 지식과 경험을 갖춘, 많은 돈이 들지 않는 노동력인 은퇴자들은 분명히 매력적인 존재였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고 했다.
“생각보다 세대 간 갈등이 컸어요. 은퇴자들은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을 갖고 의미 있고, 드러나는 일들만 하려 하는 경향이 있고, 젊은 직원들의 지시나 의견은 따르지 않으려고 했어요. 조직 내 담당자들은 그런 은퇴자들이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고, 거추장스럽다고 여겼죠. 그래서 제가 먼저 취한 조치는 그들을 분리하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양쪽의 의견을 들어주었죠. 그들이 갖는 불만을 발산하지 못한다면 폭발했을 테니까요. 완충 역할을 한 것이지요.”
노력의 결과는 긍정적이었다. 은퇴자들은 젊은이들을 인정하기 시작했고, 반대로 젊은 담당자들은 은퇴자들을 전문가로 바라봤다. 그 가운데서 배운 것 중 하나는 은퇴자들의 태도 변화가 가장 절실하다는 것이다.
“모두가 몸을 낮춰야 해요. 최고경영자에서부터 은퇴자들까지 전부 다. 특히 은퇴자들은 마음가짐을 달리할 필요가 있어요. 결국, NPO에서 필요한 일손과 역할은 정해져 있으니까요. 누구나 전문적인 일을 할 수는 없어요. 부가가치 높은 일 하고 싶어도, 조직에서 필요한 일은 단순한 허드렛일이 먼저니까요. 직원을 돕는다는 생각으로 신입사원처럼 마음을 다잡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렇다면 정작 이 이사장은 어땠 을까? 국내에서 가장 고도화되어 있다는 금융권 조직 곳곳을 누빈 그다. 체계화된 기관에서 근무하다 뜨거운 선의와 열정과 비교하면 체계가 부족한 NPO 조직이 마뜩잖을 수 있었을 터.
“그간 기업 내에서 해결사나 중재자(troubleshooter) 역할을 많이 했었으니까요. 그런 과정에서 어려운 기업들을 살린 경험이 있고요. 워낙에 보수적이기보다는 개혁성 성향을 갖고 있어요. 조직을 고쳐가면서 이끌어가는 데 재미를 느끼는 편이에요. 이런 성향 탓에 회사에선 ‘호기심 천국’이라고 불렸었어요. 아내는 분잡스러운 부분이 닭과 닮았다고 하고요.(웃음)”
그 수많은 봉사활동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현장으로 ‘2006년 수해지역 사랑의 집짓기’ 행사를 꼽았다. 강원도 평창 일대의 물난리로 거처를 잃은 수재민을 돕기 위해 13일간 연인원 3600여 명이 참여한 큰 행사였다.
“박홍수 당시 농림부 장관이 석 달쯤 걸릴 예산 집행을 신속하게 해 줘서 늦지 않게 수재민들을 도울 수 있었죠. 컨테이너만 한 집을 40채 만들어서 20채씩 두 번에 나눠 옮겼어요. 그 집들이 고속도로에 올랐을 때 총 길이만 2㎞ 정도 됐는데, 아주 장관이었죠. 한여름 뜨거운 땡볕에서 너나 할 것 없이 나서 감동적이었습니다. 막내 녀석도 당시 2주간 교육받고 현장에서 크루 리더로 함께 참여했었죠.”
그는 최근 진짜 은퇴를 위해 사회적 활동을 점차 줄여나가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종착지가 될 단체는 ‘좋은의자’라는 NPO다.
“올해 시작된 정서적 심리적 약자를 돕는 단체예요. 이화여대 간호대 학장, 서울사이버대학교 총장을 지낸 김수지 박사가 ‘사람 돌봄 이론’을 바탕으로 창립하셨죠. 구호단체 경험이 많다 보니 도움 요청이 왔는데, 훌륭하신 분들과 함께하는 것이 좋아 합류하게 됐죠. 그러다 박사님 건강이 나빠지시면서 어쩔 수 없이 상근직을 맡게 됐어요. 계급상으로는 상근이사로 강등된 셈이죠.(웃음) 이 단체가 자리 잡을 때까지 당분간 도우면서, 내년까지 해비타트 활동도 마무리할 생각입니다. 자유로운 삶을 즐겨보고 싶어요.”
평균을 알면 자신이 평균보다 높은지 낮은지 판단이 가능하다. 내 집이 있다, 없다는 이제 무의미하다. 내 집이 있는 ‘거지’가 있는가 하면 ‘무주택 부자’도 많다, 10년도 더 지난 옛날에는 정부가 무주택 서민이라는 말을 자주 썼다. 중소도시에서 2000만원도 안 되는 아파트를 소유한 사람은 유주택자, 서울 강남에서 15억원에 아파트 전세를 살고 있는 사람은 무주택 서민으로 분류했다. 무주택이면 서민이라는 말은 맞지 않는다. 옛날에도 잘 맞지 않는 얘기였다. 예전에 우리나라 부동산정책이 질타를 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국민들이 어떤 상황인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기초조사가 변변치 않았다. 부동산 투기가 일어나도 또 가격이 폭락해도 여론의 질타만 있으면 부동산정책은 우왕좌왕 흔들렸다. 정부 정책이든 개인의 부동산에 대한 계획이든 원칙과 신뢰가 있어야 성공한다.
당신의 아파트는? 우리나라 평균은 이렇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절반은 서울, 경기 등 수도권에 살고 나머지 절반은 지방에 산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절반 이상은 아파트에 산다. 그렇다면 아파트 가격은? 피부로 느끼는 체감가격은 평균보다 조금 높게 나타난다. 체감가격은 억 단위로 구분한다. 서울의 아파트값은 평균 6억원으로 보면 된다. 강남권은 7억원, 강북권 및 비강남권은 5억원이다. 서울을 제외한 수도권은 4억원이다. 지방 도시는 지역별 편차가 있다. 2억원 또는 3억원이다. (체감가격은 필자의 주관적인 견해이며, 정확한 지역별 아파트 평균가격이나 관련자료는 국토교통부나 KB국민은행이 주기적으로 발표하고 있다.)
전세값은 매매가격의 70%로 보면 된다. 서울에서 중간 이상의 아파트 전세를 구하려면 1억원 이상은 있어야 된다는 얘기다. 3억5000만원이 아니라 왜 1억원이냐고 묻지 말자. 최소 그렇다는 것이다. 나머지는 전세보증금보다 무서운 월세를 부담하거나 대출을 받아야 한다. 이게 현실이다. 1억원도 힘든데… 행복주택, 신혼부부를 위한 임대주택 등 다양한 이름의 정부가 제공하는 임대주택이 나온 이유이다. 물론 많은 젊은이들이 결혼을 못하는 주요 이유이기도 하다. 결혼할 때 집 걱정을 안 하는 젊은이는 5%이다. 부모가 현금을 지원하거나 집을 완전히 사주는 경우이다. 그리고 월급을 한 푼도 안 쓰고 돈을 수년간 모아야 내 집을 가질 수 있다. 여기에서 젊은이들이 생각할 때 내 집이란 서울에서 80㎡(24평형) 이상의 새 아파트를 구입하는 것을 기준으로 생각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중간 등급은 3등급이다. 가족들이 이사를 가고 싶어 하면 자산 등급은 한 단계 떨어지지만 주거 만족도가 높으면, 반대로 한 단계 올라간다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다. 보유 자산 등급은 상대적이며 우리나라 평균을 기준으로 작성한 것으로 심리적인 요소도 크다.
>> 김정렬(金淨烈) 한국일반행정사협회 전임 교수
국내 최초로 부동산 전문가들로 네트워크를 구성, RE멤버스를 설립하고 부동산써브 대표를 역임했다. 한국자산관리공사, 한국자산신탁, 기업체, 금융기관 등에 부동산 자문을 꾸준히 하고 있다. 저서로는 등이 있다.
트러스톤연금교육포럼의 강창희 대표는 자산운용회사의 경영을 맡으면서 고민에 빠진 적이 있다. ‘어떻게 하면 투자자들이 우리 펀드에 장기 투자를 하도록 설득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였다. 그런 고민에 대한 해답을 모색하던 강 대표는 일본의 ‘워런 버핏’ 사와카미 아쓰토(澤上篤人) 회장이 운영하는 사와카미투자신탁을 찾는다. 그때가 2000년 초. 약 16년 전의 일이다. 그때 강 대표는 사와카미 회장에게 들었던 말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우리가 운용하는 펀드에 투자한다는 것은 우리와 함께 ‘장기 운용’이라는 항해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눈앞의 실적에 연연하는 고객은 배의 진행을 방해하고, 다른 승객에게도 피해를 주기 때문에 승선하지 말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15년이 지난 2015년 12월, 이 둘이 만났다. 한국의 미래라고 하는 과거와 현재의 일본. 일본의 현재를 살고, 더 나은 미래를 모색하는 사와카미 회장에게, 강 대표가 묻는다. 저금리, 저성장 시대에 합리적으로 자산을 운용하는 방법에 대해.
[강창희] 지금 한국의 전체 가계자산 중 70% 정도가 부동산이고 금융자산은 30%에도 이르지 못합니다. 또 금융자산의 절반 정도는 금리 1%대의 예금에 들어가 있는 상태입니다. 1990년대 초 일본의 가계자산 구성과 비슷한 상황이지요. 똑같은 방식이 한국에도 적용되어야겠군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와카미] 버블시대 이전의 일본도 ‘부동산이 최고’라는 현재 한국의 인식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은행에 예금을 하는 것만으로도 재산을 늘릴 수 있었고, 축적된 재산을 바탕으로 소비활동도 활발해지니 기업도 성장할 수밖에 없었죠. 기업이 사니 건설 경제도 당연히 좋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업은 생산 시설을 키우기 위해 주택과 공장을 우후죽순처럼 늘렸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때부터 일어났습니다. TV와 세탁기 등의 가전제품을 구매하던 국민들은 이제 가전제품을 ‘장만’의 개념이 아닌 ‘교체’의 개념으로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소비가 줄어들게 된 것이죠. 이와 함께 기업들이 우후죽순처럼 늘렸던 공장은 파리만 날리는 신세로 전락하게 됐습니다. 빈 공장과 빈 주택이 늘기 시작했습니다. 빈집이 860만 채가 될 정도였으니까요. 그때부터 일본의 땅값은 계속 추락하기 시작했습니다. 버블이 꺼진 것이죠.
저성장기에 자산을 늘리고 지켜가는 데는 어떤 세상이 오더라도 우리 생활을 지켜주는 좋은 기업,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기업의 주식에 장기 투자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제가 열심히 장기 투자 계몽활동을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강창희] 과거 20년 동안 주식이나 펀드 투자로 재미를 보지 못한 투자자나 주식 투자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사람, 한국 경제의 미래에 대한 불신이 늘고 있는데, 정기예금 금리 1%대의 저금리 시대에 금융자산 운용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와카미] 고성장 시대에는 사람들이 많이 노력하지 않아도 누구나 재산을 늘릴 수 있었어요. 고금리가 따라오니까요. 하지만 그 고성장 시대가 지나고 성숙경제의 시대가 오면 이야기는 달라지죠. 금리는 떨어지고 예금으로는 재미를 못 볼 테니까요. 이때는 투자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해야 합니다. 부동산의 가치와 예금도 매력이 없습니다. 일본은 아직 디플레이션 사회라 화폐 가치가 떨어지지 않았지만, 인플레이션이 일어나 화폐 가치가 떨어지면 예금 금리도 당연히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주장하고 있는 것이 주식 장기 투자를 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자산 형성층은 10~15년 정도를 한 기업에 투자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제는 자신의 판단으로 장기 투자를 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의 재산 차이가 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창희] 아무래도 일반 투자자가 장기적으로 성장할 기업을 꼼꼼히 따져보고 투자를 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성공적인 장기 투자를 하려면, 어떤 것을 고려해 기업을 선택해야 할까요?
[사와카미] 국민들이 생활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기업을 선택해야 합니다. 사실 주식 투자를 할 때 기업의 이익률을 가장 먼저 따지는 투자자들이 있는데 그것은 장기 투자에 결코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그 나라의 경제 확대 발전에 공헌을 하고 있는 회사는 장기적으로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즉, 회사의 부가가치를 보고 투자해야 합니다. 기업의 인건비, 연구개발비, 세금 지불 내역, 지불 이자 등을 따져보고 이런 부가가치를 키운 기업을 선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부가가치의 확대는 기업의 장기적인 이익을 위한 것이니까요.
[강창희] 아무래도 장기 투자를 할 때 가장 많이 애먹는 상황은 ‘리먼 쇼크’처럼 전반적으로 경제에 타격이 있을 때라고 생각하는데요. 장기 투자를 잘하려면 어떤 것을 고려해야 할까요?
[사와카미] 사실 일본도 저희 회사 빼고는 장기 운용 회사가 많지 않습니다. 개인이 장기 투자를 하는 경우도 1000명 중 1명꼴이죠. 이때의 문제점은 장기 투자를 결심해 놓고, 조마조마해한다는 것이죠. 그런 조바심은 결국 주식을 팔아버리게 만듭니다, 그것은 투자를 무용지물로 만듭니다. 사실 ‘리먼 쇼크’ 같은 상황에도 끝까지 버텨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는 않죠.
그래서 장기 투자에 대한 금융교육이 필요한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개인 투자자 중에는 내 갈 길만 가겠다는 ‘My Way’형의 투자자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이 돈을 잡습니다. 주식이 폭락할 때 사들였다가 오르면 파는 방식으로 말이죠.
[강창희] 2000년대 초반에 일본에서 회장님과 같은 방식의 경영이랄까, 투자교육 활동을 하시는 분은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 어떤 계기로 장기 투자 계몽활동을 하시게 되었나요?
[사와카미] 저희 회사에서는 1999년부터 장기 투자를 위한 펀드를 발매하기 시작했는데요. 그 필요성을 느낀 것은 사실 1980년대 후반부터입니다. 그때 유럽의 자산관리회사에서 공부하고 일하면서 구조적으로 저성장 성숙경제로 들어선 유럽과 미국 사람들이 어떻게 자산을 형성해 나가는지, 또 자산가가 됐을 때 어떻게 그 자산을 품격 있게 쓰는지 두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방식을 일본 투자자들에게 전파하고 싶었습니다. 저 자신이 그런 성공 사례를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을 한 겁니다. 장기 투자를 해서 자산을 모으면 그것을 품고 있을 것이 아니라, 사회를 위해 멋있고 폼 나게 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또 다른 사람들이 그 혜택을 볼 수 있으니까요.
△사와카미 아쓰토(澤上篤人) 회장
1947년 아이치(愛知)현 나고야(名古屋) 출생(만 69세). 젊은 시절을 스위스캐피털인터내셔널의 애널리스트와 펀드매니저로 일하며 성숙 경제로 들어가는 미국과 유럽을 배웠다. 저성장·저금리 시대에 현명한 대처 방안이 장기 투자라는 것을 깨닫고, 일본에 그것을 전파·계몽하기 위해 사와카미투자신탁을 설립해 대표이사 사장을 거쳐, 현재는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기부나 봉사활동을 하는 연예인의 모습을 달갑지 않게 보는 이들이 있다.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하는 행동이라는 게 그 이유다. 그러나 아무리 이미지를 좋게 하려는 목적이라 해도 수억 원의 금액을 기부하고, 장기를 기증하고, 머나먼 아프리카에 봉사활동을 가는 것은 일반인에게도 쉽지 않은 선택이다. 최근에는 팬클럽 회원들과 봉사활동을 하거나, 목소리 재능기부, 온라인 도네이션을 통해 네티즌과 함께 기부금액을 모으는 등 대중과 함께하는 형태의 선행도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다.
처음에는 재단이나 기관의 홍보대사, 친선대사 등으로 나눔을 시작했지만 세월이 지나 더욱 성숙한 자세로 선행을 이어오고 있는 연예인들의 모습도 보인다. 1980년대부터 유니세프에서 봉사활동을 해온 배우 안성기(63), 1986년부터 초록우산 어린이 재단과 인연을 맺고 있는 개그맨 이홍렬(61), 그리고 1991년 월드비전 친선대사로 임명된 후 전 세계 아이들을 돕고 있는 배우 김혜자(74) 등. 그들은 이미지 차원을 넘어서 삶의 철학이 담긴 진중한 나눔 활동으로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대중에게 받은 사랑을 어려운 이웃과 사회에 보답하며 훈훈한 에너지를 선순환하고 있는 스타들을 살펴봤다.
이문세X프렌즈 아트 컬래버레이션
가수 이문세(56)는 젊은 일러스트레이터, 캘리그래퍼들과 함께 ‘이문세X프렌즈 아트 컬래버레이션’ 재능기부 프로젝트에 참여해 크리스마스카드를 직접 제작했다. 수익금은 위안부 할머니 후원시설인 ‘나눔의 집’으로 전달돼 할머니들의 생활, 복지, 증언 활동을 위해 사용될 예정이다. 카드는 10월 30일 ‘네이버 해피빈’과 ‘2015 씨어터 이문세’ 수원 공연장에서 시작해, 강남 교보타워 내 하임, 서울역 디트랙스 등에서 판매하고 있다. 네이버 해피빈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300만 원을 목표로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11월 11일 기준) 685만여 원을 넘기며 목표액의 2배가 넘는 수익을 냈다.
이문세는 2009년 MBC FM 라디오 의 청취자 461명의 사연을 담아 만든 노래 ‘이 겨울 날 지나간다’의 저작권 기부를 통해 나눔을 실천하기도 했다. 크리스마스캐럴 느낌이 나는 발라드 곡으로, 청취자의 참여로 만들어진 곡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저작권법에 따라 이문세 사후 50년까지 노래에 대한 저작권과 음원수익금은 서울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갖게 되며, 모두 불우한 이웃을 위해 쓰일 예정이다.
‘해밀학교’의 이사장 인순이
‘거위의 꿈’이라는 노래로 많은 이에게 꿈과 희망을 선사한 가수 인순이(59). 아너 소사이어티(Honor Society, 사회복지공동모금회 1억 원 이상 고액기부자 모임)의 명단에도 이름을 올린 인순이는 각종 봉사활동은 물론 대학생 오케스트라 팀과 재능기부 형태의 ‘지하철 게릴라 콘서트’를 하는 등 다양한 자선 공연도 꾸준히 하고 있다. 대중에게 받은 사랑에 보답하고자 선행을 한다는 그녀는 오랜 고민 끝에 2013년 4월 강원도 홍천의 작은 마을 명동리에 다문화 대안학교 ‘해밀학교’를 설립했다. 2011년부터 3년여간의 준비과정을 통해 다문화 가정 아이들을 위한 배움터를 완성했다. 내년부터는 그동안 시행해온 수업료 면제에 이어 입학금, 급식비, 기숙사비까지 학교에서 부담하는 무상교육을 실시한다. 해밀학교의 이사장 인순이는 “학교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고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찾아 할 수 있는 꿈의 터전을 만들고 싶다. 내가 대한민국에서 겪었던 어려움, 외로움, 고통뿐만 아니라 사랑, 격려, 위로를 나와 같은 다문화 아이들이 알아갔으면 좋겠다”며 많은 아이들이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힘쓸 것이라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재능기부, 해외봉사, 장기기증까지… 국민엄마 고두심의 선행 릴레이
1983년부터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의 후원자로 나선 고두심(64)은 2006년 이후부터는 재단 내의 스타서포터즈에서 나눔대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배우 채시라와 함께 재단이 진행한 ‘어른이날(성년의 날)’ 캠페인 CF에 목소리 재능기부에 참여했다. 그녀는 “어린이를 돕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옵션이 아닌 필수”라며 “어른들이 나라의 미래인 어린이들의 든든한 지원자가 되자”고 말한 바 있다.
자신의 모교인 제주여자고등학교에 2억 원의 장학금을 기부하고, 2008년 에티오피아 우간다에 봉사활동을 다녀오는 등 다양한 선행을 펼쳐온 그녀는 1999년 장기기증 캠페인에 참여하며 장기기증 서약을 하기도 했다. 고두심은 한 인터뷰를 통해 “장기기증 서약 이후 건강을 더 생각하며 좋은 마음을 갖고 좋은 생각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며 “나이가 드니까 세월이 인생을 가르쳐 주더라. 어차피 흙으로 돌아가 썩을 육신인데 다른 사람에게 주고 가면 얼마나 좋겠는가. 주위 동료 연예인들에게 기증하라고 자주 권하는데 아직은 무서워서 못하겠다는 사람이 많다”며 장기기증 문화를 알리고 동참하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한다는 뜻을 전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1호 공익신탁자 유동근
올해 7월 배우 유동근(59)은 이철희 분당서울대병원장, 김현웅 법무부 장관, 한비야 국제구호전문가와 함께 국내 첫 공익신탁자가 됐다. 공익신탁은 기부자가 은행이나 단체에 재산을 맡기고 이를 운용해 나온 수익금을 장학, 구호 등 자신이 지정한 공익사업에 사용하도록 하는 제도다. 법무부와 외부 감시인 감독 아래 기부자가 원하는 곳에 정확하게 쓰이고, 적은 금액이라도 사용처가 투명하게 공개된다는 점이 특징이다. 간단한 절차로 ‘나만의 재단’을 만드는 셈이다(법무부 상사법무과에 문의 후 참여).
유동근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 후손의 생계 및 교육 지원을 위해 ‘나라사랑 공익신탁’을 만들었다. (이철희 원장은 ‘난치성 질환 어린이 치료를 위한 공익신탁’, 김현웅 장관은 아동학대 피해자를 지원하는 ‘파랑새 공익신탁’, 한비야씨는 인류애를 키우는 사업에 쓰일 ‘세계시민학교 공익신탁’에 참여) 그는 2008년 숭례문 화재 당시 복원 성금으로 1억 원을 기부한 바 있다.
연예계 선행 바이러스 정애리의 ‘하래의 집’
연예계 기부천사 정애리(55)는 아프리카 구호활동, 몽골 기아체험, 동남아 쓰나미 피해 지역 방문, 도시락 캠페인, 생명의 전화, 연탄은행 홍보대사, 월드비전 친선대사 활동 등 다양하고 끊임없는 선행을 펼치고 있다.
그녀는 2004년부터 SBS 사회공헌 프로젝트 프로그램 에 참여하며 매년 후배 연기자들과 아프리카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2009년에 함께 아프리카에 다녀온 배우 장서희는 “연탄 나르기 봉사활동을 끝내고 드라마 촬영장에 온 정애리 선배의 모습을 보고 나도 아름다운 일을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정애리의 선행이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2005년에는 17년간의 봉사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쓴 에세이 를 펴내며 인세 수익금 1억 원 전액을 정읍의 ‘사랑의 나눔의 집’에 기부했다. 책에는 그녀가 직접 운영하고 있는 고아시설 ‘하래의 집’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다. “지상에서 굶는 아이들이 없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봉사할 것”이라며 책을 펴낸 소감을 전한 그녀는 책을 통해 ‘하래의 집’에 대한 이야기와 나눔의 의미를 설명했다.
김자옥 재단 ‘공주는 즐거워’ 프로젝트
지난해 11월 안타깝게 우리 곁을 떠난 배우 김자옥을 추모하고 평소 어려운 이웃을 돕고자 했던 그녀의 뜻을 기리는 ‘김자옥 재단’이 내년 1월 설립된다. 기아대책 홍보대사활동, 사랑 나눔 한복 패션쇼 참여 등을 비롯해 2007년에는 배우 주현, 전무송, 나문희 등과 함께 출연료 전액을 어려운 이웃에게 기부하는 도네이션 드라마 (KBS 2TV)에 출연하는 등 다양한 나눔을 실천했던 그녀다.
고 김자옥의 남편인 가수 오승근은 “생전 어려운 이들을 위해 선행을 많이 한 아내의 뜻을 이어가고 싶다”고 재단 설립 배경을 설명했다. ‘김자옥 재단’은 배우 강부자를 비롯한 동료 연기자들이 동참해 장애인 시설 등을 찾아 봉사활동과 재능기부 등을 할 계획이다. 김자옥 재단은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원하는 40~60대 여성들이 불우한 청소년들의 멘토로 활동할 수 있는 ‘공주는 즐거워’ 프로젝트를 첫 공식 활동으로 기획하고 있다.
B씨는 이혼한 전남편 사이에 아들 C씨를 두고 있었다. A씨를 만나 교제하다가 청혼을 받아들여 혼인하였다. A씨는 B씨와의 혼인 중에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부동산 일부와 새로 매입한 부동산을 B씨 명의로 명의신탁을 했다. 그럴 정도로 겉으론 사이가 좋아 보였으나 사실 이들의 혼인 생활은 원만하지 못했다. A씨는 B씨에 대한 불만이 많아 자주 심하게 다투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다툼 끝에 B씨를 살해하였다. B씨 명의의 재산은 모두 B씨의 아들 C씨에게 상속됐다. A씨는 B씨에게 명의신탁한 재산을 찾으려고 C씨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A씨의 청구는 인용될까. A씨는 B씨의 배우자이지만 B씨를 살해한 사람이어서 민법 1004조 1호에 따라 상속인이 될 수 없다.
위 사례의 쟁점은 혼인 중에 이루어진 부부 사이의 명의신탁약정이 일방의 배우자가 사망하여 부부관계가 해소된 경우에도 유효한지 여부다. 즉 일반적으로 명의신탁을 받은 사람이 사망하면 그 명의신탁관계는 재산상속인과의 사이에 그대로 존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를 부부 사이의 명의신탁에서도 동일하게 볼 것인가가 문제된다고 할 수 있다.
부동산 실권리자명의 등기에 관한 법률(이하 ‘부동산실명법’이라 한다.)에 의하면 부동산 명의신탁 약정은 기본적으로 무효이나 위 법률 제8조에서 예외 사유를 두고 있고, 위 법률 제8조 제2호는 ‘배우자 명의로 부동산에 관한 물권을 등기한 경우’로서 조세포탈, 강제집행의 면탈 또는 법령상 제한의 회피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한 부부 사이의 명의신탁약정 및 그 약정에 기하여 행해진 물권변동을 유효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대법원은 ①문언(文言)상 명의신탁약정에 따른 명의신탁 등기의 성립 시점에 부부관계가 존재할 것을 요구하고 있을 뿐 부부관계의 존속을 그 효력요건으로 삼지 아니하고, ②일단 유효한 것으로 인정된 부부간 명의신탁에 대하여 그 후 배우자 일방의 사망으로 부부관계가 해소되었음을 이유로 이를 다시 무효화하는 별도의 규정이 존재하지 아니하는 점, ③유효한 부부간 명의신탁의 경우 부부관계가 해소된 이후에 이를 그대로 유효한다고 인정하더라도 부동산실명법의 입법취지가 훼손될 위험성이 크지 아니한 점을 근거로 부부간의 명의신탁이 일단 유효한 것으로 인정되었다면 그 후 배우자 일방의 사망으로 부부관계가 해소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명의신탁 약정은 사망한 배우자의 다른 상속인과의 관계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게 존속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라고 판시하였다.(대법원 2013. 1. 24. 선고 2011다99489 판결)
위와 같은 대법원의 판결에 따르면, B씨의 사망으로 인하여 C씨가 B씨 명의의 부동산을 모두 상속한 경우 C씨는 A씨와의 관계에서는 B씨의 지위를 이어받아 명의수탁자의 관계에 있다고 할 것이다. 즉 A씨는 B씨의 상속인인 C씨에게 B씨와의 명의신탁 약정을 근거로 A씨 자신의 부동산의 반환을 청구할 수 있다.
단 이번 사례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부부 사이의 명의신탁 약정이 유효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만일 부부간 명의신탁이 무효라고 한다면 다른 법리적 접근이 필요하다.
“손녀 일링(당시 7세)에게는 대학 졸업 시까지의 학자금으로 내 주식의 배당금에서 1만 달러를 준다. 아들 일선은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 자립해서 살아가거라. 딸 재라에게는 유한중·공고 안의 (내) 묘소와 주변 땅 5000평을 물려준다. 아내 호미리는 딸 재라가 노후를 잘 돌봐주기를 바란다. 내 소유 주식 14만 941주는 전부 ‘한국 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에 기증한다."
1971년 봄에 별세한 유한양행의 창업주 유일한(柳一韓·1895 ~1971) 선생이 남긴 유언장의 일부이다. 유일한은 9세 때 미국으로 가서 고학으로 대학을 졸업한 후 식품회사를 세워 크게 성공했다. 1926년 31세의 나이로 한국으로 돌아와 안정적인 교수직을 마다하고 가난과 병으로 신음하는 동포들에게 좋은 일자리와 약을 제공하는 것이 더 급하다면서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이런 유일한을 우리들 대부분은 청빈한 기업가로만 알고 있지만 온몸을 던져 독립운동에 헌신한 분이기도 하다.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미국 네브라스카주에 세운 ‘한인소년병학교’를 다닌 이후 투철한 애국심과 민족 사랑으로 일생을 살았다. 일제의 압박이 거세진 1930년대 후반에는 미국에 거주하면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산하 한인국방경위대 ‘맹호군(猛虎軍)’의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특히 1941년 일본의 진주만 폭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미군 전략정보처(OSS)의 한국 담당 고문으로 활약했다. 1945년에는 재미한인들을 훈련시켜 국내에 침투시키는 ‘냅코 계획(Napko Project)’의 행동대원으로 직접 참여했다. 기업 경영은 물론 필요하다면 조국과 동포를 위해 온몬을 던지려 했던 유일한의 애국심과 충정, 그의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영원할 것이다. 정부는 뒤늦게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유일한 외에도 우리는 예부터 내려오는 부자들의 훌륭한 전통과 아름다운 선행을 많이 알고 있다. 10대 300여년을 이어온 경주 최부자댁, 정직과 신의로 돈을 벌어 가난을 구제한 거상(巨商) 김상옥, 조선의 첫 여성 CEO 겸 자선가 김만덕, 일제강점기 시절 평양의 고결한 여성부자 백선행 등이다.
“저한테는 기부가 자손들에게 물려줄 유산입니다.” ‘아너 소사이어티(Honor Society)’의 1호 회원인 남한봉 유닉스코리아 회장의 말이다. 아너 소사이어티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1억 원 이상 고액기부자들을 가리키는 일종의 ‘명예의 전당’이다. 2007년 12월 남 회장이 첫 번째 회원으로 가입한 이후 2010년대 들어 매년 2배씩 늘어나면서 회원 수가 839명(2015년 6월 현재)에 달하고 있다. 기업인이 427명으로 절반을 넘고 전문직 86명(10.3%), 자영업자 48명(5.7%)의 순이고 기업체 임원과 공무원, 스포츠인, 방송·연예인도 찾아볼 수 있다. 돈 많은 부자만 있는 것도 아니다.
2014년 11월 627번째 회원으로 가입한 김방락 선생(68)을 만나보자. 특전사 부사관을 거쳐 군무원으로 30년 넘게 근무하다가 은퇴한 후 10년 남짓 한 대학의 경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지금도 그다지 넉넉하지는 않지만 어려웠던 때를 생각하면서 경비생활 10여 년 동안 번 돈을 모두 기부하기로 한 것이다. 공무원 연금(200만원)과 베트남 참전수당(22만원)으로 생활비를 하고 경비원 월급 120만원은 모두 기부하는 셈이다. 휴가라고는 군무원 때 30년 재직 기념으로 5일을 다녀온 게 전부란다. 제주도도 못 가봤고 외국은 베트남 파병 때 간 것밖에 없다.
외국으로 눈을 돌려보자. 미국의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는 ‘부자로 죽지 않기 위해’라는 소신대로 은퇴 후 여생을 기부 등 사회헌신으로 살다가 미국 부자의 롤 모델이 되었다. 이 같은 전통을 이어받아 부자 서열 1, 2위를 다투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와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은 기부금액에서도 수위를 다투고 있다.
뿐만 아니라 페이스북의 창업자 마크 주커버그가 수조원대의 기부를 하는 등 떠오르는 신흥부자들도 기부대열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최근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왈리드 빈 탈랄 왕자가 320억 달러(36조원)에 달하는 개인 재산 전부를 기부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럼 열심히 벌어서 사회에 기부하고 환원하는 것만이 최선이고 잘 하는 일일까? 아니다. 사람마다 생각과 철학이 다르다는 점에서 일률적인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다. 기부와 마찬가지로 상속 또한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지는 삶의 동기이자 보람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가운데서 열심히 일해 번 돈을 자손들에게 물려줌으로써 그들이 나와는 달리 좀 더 윤택하고 안정된 삶을 살았으면 하는 부모로서의 바람을 누가 탓할 수 있을까?
다만 남과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돌아보자고 권할 수는 있을 것이다. 배고프고 아픈 사람들을 돌아보다 보면 더 많은 좋은 일들이 생겨날 것이고 거기서 남다른 보람과 성취감을 얻는 부자들이 많아질수록 따뜻하면서도 살기 좋은 세상으로 바뀌어갈 것이다. 따라서 기부 또는 봉사를 강권하기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동참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소득 및 재산수준이 높아질수록 고민에 빠지게 된다. 가진 돈, 늘어나는 돈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돈의 관리(how to manage)는 크게 3 How, 즉 ‘어떻게 투자할 것인가(how to portfolio), 어떻게 쓸 것인가(how to use), 어떻게 물려줄 것인가(how to pass down)’로 나눌 수 있다. 이 세 가지를 강조하는 것은 이 중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할 경우 우리의 삶이 ‘유종의 미(有終之美)’를 거두기 어렵기 때문이다.
은퇴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죽지 않는 사람도 없다. ‘다 쓰고 죽어라(Die Broke)’의 저자 스테판 폴란이 주장한 바와 같이 영원히 살 것처럼 돈에 연연하지만 말고 나와 내 가족은 물론 한 걸음 더 나가 사회와 국가의 삶의 수준과 의미를 향상시키는 일에 돈을 쓸 줄 알아야 한다. 아닌 말로 일본사람들처럼 돈을 움켜쥐고만 있으면 나와 내 가족을 넘어 그 사회와 경제도 병들고 불행해질 뿐이다. 투자도 하고 그러면서 손해도 보고 이익도 보고 쓸 건 쓰고 물려줄 건 물려줄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돈으로부터 해방되면서 진정한 삶의 재미와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다시 한 번 ‘공자도 부러워할 5자’를 외치고 싶다. 5자가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니~. “놀자, 쓰자, 주자(베풀자), 웃자, 걷자.”
글 최성환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을 걷다 보면 작고 아담한 사케집 쿠노요를 발견하게 된다. 안으로 들어가면 빼곡하게 자리한 다양한 미니어처들과 사케 병들이 밀도 높은 풍취와 따스함을 느끼게 만든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인 먹을 식(食), 마실 음(飮), 취할 취(醉)의 일본어를 한 글자씩 따서 지었다는 쿠노요는 아는 사람은 이미 아는 신사동의 명소. 쿠노요를 8년째 운영하고 있는 박호준(朴浩?) 대표는 얼굴을 잘 기억 못하는 사람이라도 ‘어디서 봤더라?’ 갸우뚱하게 만들 것이다. 맞다. 그는 SK텔레콤, 한국투자신탁, 씨티은행, 일동제약 등등 다양한 TV 광고에 등장했던 CF 모델이기도 하니까. 중년들의 문화 공간 아지트를 운영하고 있는 박호준의 목소리로 들어보는 신중년 스타일과 문화 이야기.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기자 teinny@etoday.co.kr
박호준 쿠노요 대표는 과거 플로랄프로렌, 빈폴, 까르뜨블랑슈 등에서의 MD, 기획자, 의상 디자이너 등등 트레디셔널 캐주얼 디자인의 최고전문가였다.
“마지막 직장은 쌍방울에서 란제리 디자인 실장을 맡았었습니다. 일반 남자들은 접하기 어려운 영역이죠. 제가 사실 언더웨어와 란제리의 양쪽을 다 맡은 란제리 디자인 실장 1호예요. 그때 주변 남자 친구들이 나를 너무 부러워하는 거야.”
그러나 그는 그렇게도 친구들이 부러워하던 자리를 2007년에 내놓는다. 이후 3개월만에 신사동에 쿠노요의 문을 열었다.
술을 모르는 사람과의 대화에는 한계가 있다
“프랑스에서 란제리 쇼를 보고 돌아오면서 내 나이를 생각해봤어요. 이제 곧 5학년(50대), 직장 생활 하느라 내 인생을 더 지체할 시간이 없겠다 싶었죠.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니 사케가 떠올랐어요. 플로랄프로렌 일본 지사에 있을 때 사케를 접하고 지구상의 술 중에서 사케가 가장 좋아진 거죠. 그런데 사케만 먹고 다니니 비용이 너무 많이 나오는 거야. 차라리 차리는 게 돈이 덜 들겠다 싶었어요(웃음). 사케집은 아기자기하고 감춰진 듯한 맛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그런 가게가 없었죠. 그래서 목수를 데리고 직접 디자인하여 열게 됐어요.”
박 대표는 ‘술은 여자보다 좋다’는 모토를 갖고 있었다. 술을 모르는 사람과는 철학적인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게 박 대표의 신념. 그래서 나이가 들면 자신이 먹는 게 뭔지 모르고 먹지 말아야 하며 안주를 줄이더라도 술은 좋은 걸로 먹으라고 조언했다.
박 대표는 사케 전문가가 된 사람으로 사케에 관련해서는 정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이야기를 하면서 좋은 시간을 같이 보내니 단순한 술 한 잔 이상의 낭만과 여유가 느껴졌다.
바삭한 보리새우 안주에 청명한 사케 한 잔 생각날 때 쿠노요를 방문하면 일본통인 박 대표로부터 유쾌한 사케이야기와 일본 음식, 문화, 패션에 대한 풍성한 수다를 들을 수 있다. 법조인들, 방송인, 영화 감독들의 히든 스토리도 덤으로 듣는 기회도 생긴다고.
문화로서의 습관이 없기에 놀 줄 모를 수밖에 없는 세대
“베이비붐 세대는 앞뒤 세대에 깔려서 문화를 모르고 살았던 세대예요. 소위 말하는 산업역군으로서, 30여 년을 죽도록 일만 하면서 가족과 나라의 발전을 위해 산 것밖에 없거든요. 이제야 한숨 돌리고 돌아볼 수 있는 상황이 됐는데, 지금에서야 문화를 향유하자니 문화가 너무 앞서 간 상태예요.”
박 대표가 처음으로 직장에 입사했던 게 1982년 11월 22일. 그때만 해도 핸드폰을 들고 다닐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상이 너무 달라졌기에, 정서적인 것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것도 누리기가 쉽지 않은 이유다.
“빈부 차, 사회적 여건 등등도 문화를 즐기지 못하는 구분을 만들고 있습니다. 고교 동창회를 가보면 확실히 선이 그어져 있어요. 여유 있게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사람과 자기 위치를 보여주기 싫어서 나타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인생을 정말 열심히 일했던 친구들이겠죠. 그런 양극화를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사람들이 문화를 즐기지 못하는 한국의 어떤 저변은 사회의 다양한 층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문화를 즐기지 못하면 그 문화가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박 대표 또한 자신이 좋아서 시작한 사케집이지만 운영하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털어놨다.
“저는 백 년 된 가게를 해보고 싶은 게 꿈이었어요. 그래서 예전에는 ‘한국은 왜그럴까, 왜 외국처럼 백 년 넘은 가게가 없나’ 하는 생각도 했었죠. 그런데 이젠 이해합니다. 장사가 좀 잘 된다고 하면 주인들이 가만 놔두지를 않아요. 무슨 일이 있으면 나가라, 월세 올린다, 이러니 백 년 된 가게가 있을 수가 있나요.”(웃음)
“옷 잘 입을 권리 있어요”
‘CF스타’이자 모델로서의 그는 특히 일본과 비교하여 국내 모델 문화에서 교육적인 면이 너무 허약하다고 비판했다.
“지금 동양권에서 가장 돈을 많이 받는 모델은 일본 모델입니다. 일본 간지(패션 센스를 의미하는 비속어)가 확실히 좋아요. 간지를 내기 위해 중요한 건 교육적인 뒷받침입니다. 우리나라 모델들은 착장, 코디네이션 자체에 대한 흐름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에요. 대기업들조차도 교육에 대한 기본 매뉴얼이 없는 건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일본 모델들은 첫 직장에서 신입사원 교육(On The Job Training ) 받을 때부터 수염 다듬는 법까지 가르칩니다.”
자연스럽게 모델로서의 박 대표에게 같은 세대의 남자들이 갖춰야 할 패션 센스를 묻고 싶어졌다. 배도 나오고 자신의 체형에 대해 콤플렉스를 느낄 나이들에게 박 대표는 ‘우선 배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국 남자들은 스스로 포기하는 게 너무 많아요. 교육적 접근이 필요해요. 예를 들어 원래 투 버튼 정장은 아래 버튼을 채우는 게 아니에요. 쓰리 버튼일 때는 가운데 걸 채우고 하나 더 채우게 된다면 위 버튼을 채우는 게 옷의 룰이에요. 그런데 우리나라 TV에서는 모두 버튼을 다 채우고 나오죠. 그런 것들을 지적하지 않는 것 자체가 작은 거지만 아직 문화적 애티튜드가 안 되는 거예요. 한국 남자들은 교육이 안 되어 있다뿐이지 자질이 있습니다.”
모르거나 부족하면 우선 배워야 한다
박 대표는 패션의 포커스를 어느쪽에 둘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밝혔다.
“모든 아웃도어의 기본은 재킷입니다. 라펠이 붙어 있는 재킷이 착장의 기본이 되어줘야 해요. 재킷이 잘 되면 밑의 코디를 정장 바지로 하든 진으로 하든 소화가 됩니다. 화이트 칼라들은 셔츠와 타이를 매일 바꿔 입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어제를 지우고 오늘 새로 출근한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데님은 수트 느낌 나는 데님과 캐주얼한 데님이 있는데 가능한 한 두 가지를 구분해서 갖고 있는 게 좋아요.”
박 대표는 패션의 센스를 충족하는 조건으로 기본적인 액세서리를 강조했다. 박 대표 자신은 붉은색을 자신의 마스코트색으로 삼기에, 빨간색 양말을 40년 동안 신고 있는 중이다.
“옷의 멘토를 정하세요. 예를 들어 조지 클루니로 정하면 조지 클루니 입는 형태를 따라가면 됩니다. 멘토가 멋있게 입는 사람이면 자신도 멋있게 입을 수밖에 없어요. 옷 입는 걸 포기하지 말고 항상 관심을 가지는 게 좋습니다.”